문학과 여성에 대한 일련의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탓에 여성문학과 페미니즘 관련서들을 책상에 쌓아두고 있다. 독일 작가 엘케 슈미터의 <자르토리스 부인의 사랑>(황소자리, 2006)이 눈에 띈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책은 두 가지 점에서 특징적인데, 일단 제목에서 허다한 부인들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작가의 오마주일 수도 있고 자신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분량이 200쪽밖에 안된다는 점(실제 원서는 더 적은 분량일 테니까 '중편소설' 범주에 들어갈 듯하다). 동아일보의 리뷰를 자료로 옮겨온다.

 

동아일보(06. 08. 05) 많은 걸작은 바람난 부인들에게 빚을 졌다. <안나 카레니나> <테스> <보바리 부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 여기 한 부인이 있다. 제목부터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원제 Frau Sartoris·자르토리스 부인) 이 책의 주인공, 자르토리스 부인이다.

 

 

 

 

-테스처럼 첫 남자에게 배신당했고 보바리 부인처럼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 애정 없는 결혼생활에 지친 안나 카레니나처럼 무료한 삶을 보내다가 앞선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바람이 난다. 2000년 독일에서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이 “모든 극과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을 위한 오마주”라고 찬사를 보낸 것처럼, 이 책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작품 속 많은 ‘부인’들을 다시 한번 불러낸다.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남편과 마음이 잘 맞는 시어머니, 예쁘장한 딸과 함께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자르토리스 부인.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첫사랑의 상처를 지울 수 없다. 20여 년 전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첫사랑 남자가 약혼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쫓기는 마음에 부랴부랴 결혼한 뒤 벌써 나이 마흔 살에 이르렀다.

-중년에 다시금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 자르토리스 부인. 그러나 상대는 유부남, 그것도 유산이 많은 아내와 잘 자란 두 아들, 시청 문화국장이라는 타이틀까지 갖고 있다. 잠깐 한눈은 팔아도 야반도주를 저지를 리 만무하다. 남편에게 편지까지 써 놓고 사랑의 도피를 꿈꾸지만 약속 장소에는 아무도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이 중년 남자의 애인 노릇을 한다는 걸 알았다. 부인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얼핏 진부한 듯 보이지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구성이 독특하다. 자르토리스 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들려주는 중간 중간에, 도시에서 벌어진 뺑소니 사고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이 삽입된다(부인의 사연과 뺑소니 사고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데, 이런 점 때문에 평범한 연애소설이라기보다 미스터리물 같은 느낌도 준다).

-신파와 낭만을 철저하게 걷어낸 문체도 매력적이다. ‘자르토리스 부인의 불륜’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긴 어렵겠지만, 눈물 섞인 목소리가 아닌 담담하고 체념적인 고백은 ‘많은 것을 갖췄으면서도 하나를 갖지 못해’ 한없이 쓸쓸한 심정을 잘 전달해 준다.(김지영 기자)

06. 08. 07.

P.S.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가 엘케 슈미터는 "1962년 독일 크레펠트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한다. 약력을 보니,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독일의 좌파 일간지인 'TAZ'의 편집장을 지냈고, 1994년 이후 중도 좌파 주간지인 '디 차이트'와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쥐트도이체 차이퉁'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는 시사주간지 '슈피겔'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니, 전/현직 통틀어서 언론인이다.

 

 

 

 

언론인 출신의 여성작가, 하니까 떠오르는 이는 한겨레(씨네21) 기자 출신의 조선희씨이다. 엘케 슈미터보다 두 살 더 많다. 굳이 떠올리게 된 건 그녀가 소설을 쓰기 위해서 기자직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하이에나가 되기 위해서? 하이에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것이 개인차인지 아니면 한국과 독일의 (직장)문화적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려나 우리도 '자유부인'을 넘어선 우리식 부인전을 가질 만한 때가 되지 않았나?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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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판타지 문학에 별다른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사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이담(the marvellous)', 즉 초자연적/마술적인 이야기들에 별로 끌리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판타지(환상문학)에 대한 시학을 최초로 정립한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the fantasy)은 초자연적 논리에 근거한 경이담과 자연적/현실적 논리에 근거한 기괴담(the uncanny) 사이에 놓이며, 거기서 긴가민가 망설이게 하는 이야기들을 가리킨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격찬한 바 있는, 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이다. 하지만, 근래에 '판타지'란 말은 용례상 경이담을 포함하는 듯하며, 거기서 더 나아가 경이담과 동일시되는 듯하다(가령 대표적인 판타지 <반지의 제왕>의 이야기들을 누가 '현실'과 혼동하겠는가?). 그런 판타지를 즐기기에는 현실 자체가 너무 판타스틱한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어슐러 르 귄의 판타지 소설 <어스시 전집>(황금가지, 2006)이 출간된 것은 반갑다. 특별히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소위 '세계 3대 판타지 대작'이 모두 완역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른바 비로소 짝이 다 맞게 된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게 옆에서 보기에도 좋은 법이다. 당장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지만, 판타지 컬렉션이라도 차릴 수 있을지 모르고 요즘 <오즈의 마법사>를 읽는 딸아이가 '나니아'나 '어시스'를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해서, 미리 손을 써두도록 한다. 어스시 시리즈와 곧 개봉될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들을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08. 04) 어스시 시리즈, 마법 통해 자아 찾는 성장소설

-팬터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과 함께 세계 3대 팬터지 대작으로 꼽히는 <어스시> 전집도 마찬가지다. 미국 여성작가 어슐러 르 귄은 이 작품을 청소년용으로 썼지만, 어른들도 함께 열광했다.



 

 

 

-어스시는 용들이 살아 숨쉬고 마법이 일상생활인 환상의 세계로, 푸른 바다와 수많은 섬들로 이뤄져 있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된 어스시 시리즈는 총 6권 중 4권이다. 나머지 2권도 다음달에 출간할 예정이다.

-국내에서 곧 개봉될 일본 애니메이션 <게드 전기: 어스시의 전설>의 원작인 이 시리즈는 팬터지인 동시에 주인공이 마법을 통해 자아를 찾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다. 제1권 ‘어스시의 마법사’, 제2권 ‘아투안의 무덤’, 제3권 ‘머나먼 바닷가’, 제4권 ‘테하누’로 구성됐다.

 

 

 



-1권은 마법 능력을 가진 주인공 ‘게드’가 실수로 불러낸 그림 자 괴물과 쫓고 쫓기면서 괴물의 이름을 알아낸다는 내용이다. 어스시에서는 등장인물의 고유한 이름을 알아내면 지배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괴물은 게드의 악한 본성을 상징한다.

-2권에서 소녀 ‘테나’는 어스시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다. 3권에서 어스시 세계를 지탱하던 마법이 효과가 없어지자 소년 왕자 ‘아렌’과 이제는 나이가 든 현자(賢者) 게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게드는 해답 대신 아렌을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아렌은 이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낸다.

-제4권에서 어린 시절 모험을 떠났던 르 알비의 절벽으로 돌아온 게드는 늙은 데다가 마법의 힘을 잃어버린 상태다. 자신의 첫 스승 ‘오지언’의 집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 만났던 테나와 재회하고, 테나와 함께 온 화상 입은 아이 ‘테루’와도 만나 치유와 회복에 힘을 다한다. 사악한 마법사의 위협에 대응하는 과정을 통해 젊음과 힘을 잃어버린 이들이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어스시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한 환상의 세계를 창조했던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의 힘에 근원한 마법을 설정했다는 점이다. 어스시에서 독창적으로 시도된 ‘언령(言靈)마법’은 이후 수많은 팬터지 작품에 전해졌다.

-이 작품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주인공 게드가 백인이 아 니라 갈색 피부를 가진 유색인이라는 점이다. 서양 팬터지의 주 인공이라면 흔히 백인을 연상하는 국내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장재선 기자) 

경향신문(06. 08. 04) 미야자키 VS 스필버그 ‘이름값 승부’

-스티븐 스필버그의 명성을 등에 업은 ‘몬스터 하우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광을 입은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이 오는 10일 나란히 개봉한다. ‘몬스터…’는 스필버그 외에 로버트 제메키스, ‘스튜어트 리틀’의 제작자 제이슨 클라크 등 4명의 제작지휘자가 이름을 올린 여름방학용 기획 애니메이션으로 길 캐넌 감독의 데뷔작이다. ‘게드전기…’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장남인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 데뷔작으로 동양사상의 향취가 물씬한 작품이다.
 


-하야오 감독 장남 데뷔작… ‘동양적 세계관’ 물씬-

-‘게드전기’는 판타지 소설의 고전인 어슐러 K 르귄 원작의 ‘어스시의 마법사’ 중 3, 4편을 영상화했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숙원사업이었다는 점만 떠올려도 작품 속 세계관을 예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노장사상을 출발점으로 한 동양적 가치가 중용의 미덕, 물아일체, 음양의 균형, 자연과 인간세계의 현명한 조화 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작품 곳곳에 새겨져 있다.

-악의 기운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동하고, 역병이 번지고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인간세계. 자신 안의 또다른 자아로 인해 국왕인 아버지를 살해한 아렌 왕자는 궁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다. 대현자(大賢者) 마법사인 하이타카는 아렌과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함께 길을 떠난다.
 
 
 
 
 
 
 
 

-‘게드전기’의 시나리오는 원작의 신화적 상상력이 스튜디오 지브리의 스타일에 맞게끔 꽤 적절히 가공된 듯 보인다. 이미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지브리표 작품에 눈높이가 맞춰져 있는 관객이라면, 화면의 역동성이나 동양적 가치의 미술적 구현 등의 여러 측면에서 실망감을 얻게 된다.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풍부한 상징의 캐릭터들, 긴장감과 여유로움의 절묘한 조화 등 하야오 감독의 전작들이 보여줬던 미덕을 고로 감독은 보여주지 못한 채 아버지의 작품세계를 계승하려 애쓰는 데에 그치고 있다.
 


-스필버그 제작 참여… 화려한 액션 스펙터클 볼만-

-‘몬스터 하우스’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제작·감독한 로버트 제메키스의 솜씨가 그대로 이어진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앞마당에 뭔가가 떨어지기만 하면 집어삼켜버리는 괴물 같은 집. 어른들이 보면 움직이지 않고 어린이들 눈에만 살아움직이는 게 보이는 기괴한 집과 맞서 한바탕 대결을 벌이는 어린이들의 모험을 속도감 있게 그렸다. 액션 스펙터클의 압도력이 다름 아닌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실력임을 화면으로 증명하고 있는 ‘몬스터…’는 어린이 관객들의 눈을 고정시키는 힘만큼은 부치지 않아보인다.

-‘게드전기’의 문제가 연출력에 있다면 ‘몬스터…’의 문제는 세계관에서 드러난다. 자유롭게 사는 히피 청년들이 몹쓸 존재, 따라해서는 안되는 어른으로 묘사되면서 설교를 늘어놓는가 하면 ‘어린이는 어린이가 꾸는 꿈을 꾸며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라’는 미국적 보수성을 드러내는 엔딩은 보기에 거슬린다. ‘포레스트 검프’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드러낸 제메키스식 보수주의의 연장이다. 롯데시네마의 전국 11개 상영점, CJ CGV의 전국 6개 상영점에서는 ‘몬스터…’ 상영관에 3D입체상영 시스템을 도입, 전용 안경을 착용하고 보는 3차원 입체영상으로도 상영할 계획이다.
 
06.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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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으로 폴 블룸의 <데카르트의 아기>(소소, 2006)는 아마도 '데카르트'란 단어가 표제에 들어간 책들 가운데서는 가장 귀여운, 그리고 가장 읽기 편한 책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장 실용적인 책일 것도 같다(특히나 새로이 육아의 세계에 뛰어든/걸려든 엄마/아빠에게라면. 육아용품과 함께 선물해봄 직하다). '아기한테 인간의 본성을 묻다'가 부제이니까 사실 제목에서 방점은 '데카르트'가 아니라 '아기'에게 찍혀 있으며 아기 인형이 박혀 있는 표지는 그걸 웅변한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현암사, 1997) 정도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에 관해서는 두 편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08. 04) 종교·도덕·예술의 관념은 유아 시절부터 갖게 된다

-책은 유아를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인간 고유의 특성인 예술과 유머, 믿음, 혐오, 윤리 등에 대해 일반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결과를 제시한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입장을 오가며 아기의 행동을 발달심리학의 입장에서 탐구한 내용을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발달심리학과 인지과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아이들은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배우는가>로 미국출판협회 우수도서상과 미국심리학회가 ‘발달심리학 분야 최고의 책’에 주는 엘리너 매코비상을 받은 바 있다(*그럼 왜 그 책이 먼저 소개되지 않은 건지?).



-원래 저자의 전공인 발달심리학은 자연적인 본능을 간직한 유아 가 어떻게 해서 문화적인 존재로 서서히 변모해 가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진화론적인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화론과 창조론의 입장을 떠나 ‘왜 진짜 예술품이 가짜보다 더 가치 있는가’,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지는 광경 을 보면 왜 박수를 치며 깔깔 거릴까’, ‘아이들이 사후의 세계를 믿는 건 언제부터인가’ 등 인간 고유 본성에 대한 질문에 저자가 제시하는 해답은 독자들의 흥미를 돋운다. 창조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창조주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존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히 어린 나이에 신과 도덕, 예술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가령 아이들은 생후 1~2년 동안은 혐오감을 느끼지 못하다가 생 후 3년이 지나면서 배변훈련을 통해 이를 배우게 된다. 아이들은 일종의 오염에서 혐오감을 느낀다. 또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 윤리적인 이유 때문에 육식을 포기하고 채식만을 고집하는 것, 여행 갔을 때 새로운 음식 앞에서 주저하는 우리의 모습은 이미 아이 때부터 시작된다. 생후 4년이 될 무렵에는 더욱 까다로워져 혐오 음식에 대해 어른과 상당히 비슷한 직관을 지니게 된다.

-아이들에게 우연히 제작된 이미지와 의도를 가지고 제작된 이미 지를 보여줬을 때, 의도를 갖고 만든 이미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데서 아이들도 창작자의 의도를 예술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체의 소멸은 받아들이면서도 영혼은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후 세계에 대한 개념도 아주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마이티 베이비!). 인간이 경험하는 직관과는 반대되는 특성을 지니는 신의 존재도 아이들은 잘 받아들인다.

-심리학은 물론, 시와 소설, 영화, 미술, 신화, 종교, 철학 등의 분야를 종횡무진 누비며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인간 존재 를 탐색하는 무거운 주제를 전혀 딱딱하지 않게 전달하는 저자의 글솜씨가 돋보인다.(최영창 기자)

서울신문(06. 08. 05) 동심을 통해 인간본성을 보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 존재가 처음부터 모든 동물들에 비해 특별히 탁월하다고 믿고, 성인이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탁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특별히 탁월한 것이 가장 정상적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이러한 믿음을 뿌리에서부터 흔들면서 붕괴시킨다. 인간이란 원시 생물체에서부터 환경과의 충돌에 의거해 지난하게 진화해 온 결과이고, 따라서 다른 동물들에 비해 특정할지는 몰라도 무조건 특별히 탁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진화론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화론의 주장을 검토할 수 있는 묘한 학문 영역이 있다. 발달심리학이 그것이다. 발달 심리학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유아들의 행동과 그 속에 스며 있는 의식·무의식을 탐색함으로써 성인들의 세계에서 발휘되는 언어생활, 각종 지성적인 활동, 예술 작업, 종교 활동 등의 원시적인 형태들을 추적한다.

-<데카르트의 아기>는 진화론을 바탕으로 발달 심리학의 이러한 과제들을 일반 대중들이 실감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블룸은 현재 예일대학교의 심리학 교수다. 그는 미국심리학회에서 ‘발달심리학의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아이들은 낱말들의 의미를 어떻게 배우는가>라는 책을 쓴 학자다.

-유아들은 이미 물질적인 존재와 비물질적인 존재를 구분할 줄 안다. 여기에서부터 정신 혹은 영혼의 관념이 생겨난다. 유아들은 원본과 복사본을 구분할 줄 안다. 여기에서 예술적인 가치가 발생한다. 유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공감을 느낀다. 여기에서 도덕심과 도덕이 발생하고 확대된다. 유아들은 혐오스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안다. 여기에서 동정심이 발생한다. 유아들은 자연적인 세계와 인위적인 세계를 구분할 줄 안다. 여기에서부터 신성한 존재를 믿는 종교가 발생한다. 유아들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암암리에 구분한다. 여기에서 웃음과 유머가 발생한다. 블룸이 이 책을 통해 내리는 결론들이다.

-블룸은 유아들의 행동과 의식에 관한 갖가지 예화와 사실들을, 심리학 분야는 물론이고 시, 소설, 영화, 미술, 신화, 종교, 철학 등의 각종 교양 영역과 연결해서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블룸이 책 제목에 ‘데카르트’를 삽입했다고 해서 그가 물질·정신 이원론이나 원리상 물질과 분리된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물질·정신 이원론 혹은 독자적인 영혼의 존재는 인간의 특정한 삶의 방식에서 진화론적으로 발생되어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블룸이 드러내 보이는 유아들의 세계는 대단히 매혹적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인간 존재의 특성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발생적인 기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블룸의 문체는 결코 딱딱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을 일단 읽기 시작하면 특별히 긴급한 일이 없는 한 좀처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는 과정에서 문득 자신이 평소 인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고, 자신 혹은 나아가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자연스러운 기초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다만 한 가지 부연할 것은 이러한 블룸의 작업은 발생론적인 신경과학 연구와 결합될 때 더욱 더 빛을 발할 것이라는 사실이다.(조광제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06. 08. 05.

 

 

 

 

P.S. 소개해놓고 보니까 블룸의 책이나 브록만의 책이나 오늘 품을 거든 교양과학서들이 모두 소소출판사에 출간된 것이다. 이전에 <시냅스와 자아>란 책을 소개한 기억이 나는데, <데카르트의 아이>는 'new humanist classic'의 6번째 책으로 돼 있는데, 나머지 다섯 권의 면면을 한번 더 들여다보기로 한다(재출간된 <언어본능> 정도가 관심을 끌었을까. 부피와 품에 비해서 대개 소홀하게 대접받고 있는 책들이다). <거짓말쟁이, 연인, 그리고 영웅>이 새로 눈길을 끄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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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이는 어떻게 말을 배울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17 11:31 
    육아 관련서는 관심도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지만, 지능이나 언어발달 쪽이라면 약간 사정이 다르다. <아이는 어떻게 말을 배울까>(교양인, 2010)란 신간에 눈길이 가는 이유인데, "영유아 언어 발달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는 발달심리학자 골린코프와 허시-파섹이 함께 쓴, 초기 언어 발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론서이자 실용서"라고 소개되는 책이다. 스티븐 핑커의 추천사는 이렇다. "이 책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 탁

새로 나온 책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책, 그리고 올해 네번째로 나를 놀라게 한 책. 저명한 영어권 헤겔학자 테리 핀카드의 헤겔 전기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제이북스, 2006)가 출간됐다. 부랴부랴 리뷰들을 찾아봤지만 아직은 감감 무소식이다.

개인적으론 예전에 헤겔에 관한 문헌들을 찾아보면서 이 두툼한 전기에 눈길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이걸 언제 읽겠는가?'라며 마음을 고쳐먹은 적이 있다. 국역본 1088쪽이니까 만만찮은 분량이지만(원서보다 300쪽 가량 늘어난 분량이다) 그만하면 읽어볼 만하다. 국내에 나와 있는, 몇 안되는(아니 거의 없는) 헤겔 전기류를 단번에 평정하고도 남을 만한 책이니 특별히 기록해둘 만하다.  

손쉬운 대로, 저자에 관한 소개를 옮겨오면, 현재는 "노스웨스턴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고, "뉴욕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칸트부터 현재까지의 독일 철학, 특히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시기의 철학을 주로 연구했다. 1988년에는 독일의 튀빙겐 대학교에서 명예교수와 명예강사로 위촉되었고, '철학 연구 잡지(Zeitschrift fur philosophische Forschung)'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헤겔의 변증법>, <헤겔의 현상학: 이성의 사회성>, <독일 철학 1760-1860: 관념론의 유산> 등이 있다고 돼 있는데, 앞의 두 권은 나도 갖고 있는 책이다. 헤겔 관련서로서 지명도가 있었고 국내 서점들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책이다(이번에 나온 전기는 따로 주문해봐야겠다). 핀카드 교수는 "최근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 영역본 출간 작업을 하고 있다"고(새 영역본이 나오는 것인가?).

 

 

 

 

아무튼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헤겔의 전기 중에서 가장 세련되고 신뢰할 만한 것이다."(런던 리뷰 오브 북스)라고 하니까 기대해봄 직하다. 그의 전기를 읽고 나면, 혹 알겠는가? <정신현상학>이나 <논리학>을 읽어내기가 좀 수월해질지(슬라보예 지젝이 꼽은 두 권의 책이다. 무인도에 간다면 들고 갈). 하긴, 절판된 <논리학>은 그냥 들고 다니거나 꽂아두기도 힘들겠지만(나는 예전에 1권만 놔두고 2, 3권은 박스에 집어넣었다).  

덧붙여 고백하자면, 헤겔에 대한 '자발적인' 관심을 내가 얼마간 갖게 된 건 순전히 지젝 덕분이다. 나는 지젝만큼 이 '괴물 철학자' 헤겔을 재미있게 읽어내는 '괴물'을 따로 알지 못한다. 핀카드는 헤겔의 생애를 혹 그만큼 재미있게 읽어줄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겐 그런 '친절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06.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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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6-08-04 19:39   좋아요 0 | URL
헤겔의 <논리학>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의 주저인 <논리학>과 <엔찌클로페디(철학집성 또는 철학강요라고 불리는)>내의 <논리학>부분이 그것인데, 전자를 '대논리학', 후자를 '소논리학'이라고 부릅니다. 대논리학은 임석진번역으로 벽호(지학사)에서, 소논리학은 서동익번역으로 을유문화사, 전원배번역으로 서문당에서 출판되어있습니다. 이 세종류의 책은 지금 모두 구할 수 있습니다. 대논리학은 교보종로점에 꽂혀있습니다.

로쟈 2006-08-04 20:14   좋아요 0 | URL
예, 알고 있습니다. <대논리학>, <소논리학>이란 구분은 일본에서 전래된 관례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논리학>하면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한편 소논리학은 김계숙 번역도 있습니다. <대논리학>도 아직 서가에 꽂혀 있는 걸 저도 보았었지만 잔여본이 약간 남아 있을 뿐 책은 이미 절판된 게 아닌가 싶네요...

주니다 2006-08-09 10:33   좋아요 0 | URL
서점에서 직접보니 책장에 꽂아두면 자세나올 책이더군요. 이제이북스의 북 디자인은 수준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읽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구입을 해야할듯...^^
 

어제 낮에 구내서적에서 본 책인데, 한 도서광 내지는 책중독자의 도서편력기를 다룬 <책사냥꾼>(동녘, 2006)이 출간됐다. '책사냥꾼'이란 비유 자체가 유별난 건 아니고, 나로서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이런 류의 책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가령 <젠틀 매드니스> 같은 책을 생각해보라).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되면 교양미술서들이 팔려나가는 것처럼 이런 류의 편력기들도 팔려나가는 것일까? 츨판/도서 평론가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아무튼 나로선 동류의식을 느낄 만한 저자의 책이어서 반갑다. 한겨레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08. 04) 구제불능 책중독자의 도서편력기

-책에 미친 사람은 곳곳에 있다. 책이 그러한 것처럼…. 맛이 간 사람들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어한다. “어? 미친 녀석이 여기 또 있네” 하면서. <책사냥꾼>(동녘)은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의 방송인, 작가이자 책 수집가인 존 백스터(1939~ )의 회고록. 말이 좋아 회고록이지 평생을 책에 중독되어 산 구제불능 노인의 주절주절 수다다. 그런데 참 재밌다!

 

 

 

 

-도처의 책은 도처로 그를 끌고 다녀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런던,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랑스 파리를 주유하게 만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중독자의 대열에 발을 디디기는 1978년 런던. 스위스 코티지의 벼룩시장을 어슬렁거리다 그레이엄 그린의 희귀본 어린이책이 단돈 5펜스에 얻어걸렸다. 그와 더불어 전설적인 서적 판매상 마틴 스톤을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던 것.

-1980년대 초반 그가 수집한 그린의 책은 거실 벽을 넘쳐 침실 벽을 침범했다. 한번은 알파벳 순으로, 한번은 연대순으로 책을 새로 배치하면서 완상하다가 어느 순간에 다가온 깨달음. 한때 커다란 기쁨이었던 어린 새가 거대한 뻐꾸기가 되어 자신의 에너지와 돈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1982년 6월24일. 그는 책을 팔아치웠다. 하지만 책수집 열정이 식겠는가. 텅빈 책꽂이가 더 큰 유혹이 되었다. 1990년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창고에 보관하던 책을 파리에 모아 책으로 성을 쌓고는 장엄하게 선언한다. “이제 모두 완성되었다.”

-그는 “책을 수집하는 목적은 순전히 책을 손에 넣는 그 순간에 느끼는 전율 때문”이라며 그 순간을 삼각주의 수로에서 물고기를 낚는 순간의 손맛에 비유한다. 그가 추구해 마지 않던 그린마저 “지난 30여년 동안 내가 꾼 가장 행복한 꿈은 헌책방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정도이니….

-책을 따라 읽다보면 자연스레 문학거장들의 세계로 끌려들어가고 책사냥꾼들이 희귀본을 찾아 헌책방, 벼룩시장, 경매장, 오래된 빌라를 누비는 과정에 합류하게 된다.(임종업 기자)

06. 07. 04.

P.S. 리뷰만으로는 너무 단촐하여 '책중독'이라면 전혀 남의 얘기가 아닐 만한 번역가이자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의 칼럼 '책사냥꾼'도 옮겨놓는다. 이 '사냥꾼들'의 세계에 대해서 기본적인 사항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다.

 

 

 

 

-책사냥꾼들이 있다. 그들의 사냥터는 실로 전방위적이다. 요컨대 서점은 그들이 활동하는 사냥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서점은 그들에게, 사냥감을 미리 풀어 놓은 뒤 사냥꾼들에게 돈을 받고 운영하는 곳 정도에 불과하다. 무척 편하기는 하지만, 사냥감을 발견하고 손에 넣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떨어진다.

-책사냥꾼이 보통의 사냥꾼들과 다른 점은, 사실상 일상 생활의 모든 장면들 속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는 안테나를 접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는 물론이거니와, 오랜만에 방문한 친구집 서가라던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때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서점이라던가,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라던가, 버리지 않고 쌓아 둔 몇 년 전 신문더미라던가.....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냥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후각이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일단 사냥감을 발견하고 나면, 책사냥꾼의 몸과 마음은 바빠진다. 우선 과연 그 사냥감이 사냥에 나설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서점이 주요 무대라면, 사냥감을 직접 만져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다양한 체널을 동원해야 한다.

-우선 그 사냥감을 손에 넣은 적이 있는 주위 사람에게 직접 물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사냥 일지('서평'이라는 이름의)를 찾아 볼 수도 있다. 다른 나라 말로 집필된 사냥감이라면, 인터넷을 통해 저자, 서평, 인터넷 서점에 올라 온 다른 사냥꾼들의 일지, 기타 등등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판단해야 한다. 도서관 이용이 가능하다면, 각종 도서관을 방문하여(직접 방문이던, 인터넷을 통한 방문이던) 그 책의 소장 여부를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직접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도서관 이용의 경우, 치사한 사냥 방법이기는 하지만 불법 복사 및 제본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사냥감이 천연기념물에 해당하는 경우,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구할길이 없고 오직 한 군데 도서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경우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해도 책사냥꾼의 양심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보통이다.

-책사냥꾼이 보여주는 이런 종류의 양심 몰수가 과연 윤리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항인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불법 제본, 그러니까 박제로 만들어 획득한 사냥감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서 쾌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책이라는 사냥감은 그 속살뿐만 아니라, 가죽과 털도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사냥당한 적이 있는 사냥감을 모아 놓고 파는 곳, 그러니까 이른바 중고서점이라는 사냥터는 각별한 사냥의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일반 서점과는 달리, 우연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사냥감이 갑자기 등장할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 그러니까 중고서점은 일종의 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경우에 준비된 실탄(돈)이 없으면 곤란하다. 실탄을 장전하기 위해 뜸을 들이는 동안, 누군가 다른 사냥꾼이 선수를 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정한 프로 책사냥꾼이라면, 어디를 가든지 사냥을 위한 여분의 실탄을 장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냥에 성공한 다음 할 일은 역시 사냥감의 속살을 맛보는 일인데, 이 단계에 불충실한 사냥꾼들도 적지 않다. 요컨대 서가에 진열해 놓기만 하고 좀처럼 그 속살의 맛을 보지 않는 경우라 하겠는데, 나 역시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언젠가는 맛보리라 생각하며(마치 뱀술, 과일주 등을 큰 유리병에 담아 놓고 바라보는 애주가의 눈길과 비슷) 흐뭇하게 바라보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지만, 역시 책이라는 사냥감은 직접 맛을 보아야 제격이다.

-책사냥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사냥감을 직접 만들어 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없지 않다. 요컨대 다른 사냥꾼들의 후각을 자극할만한 사냥감을 만들어 풀어 놓고 싶다는 생각. 일본의 어느 저명한 동양학자(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책을 소개하고자 마음먹기도 했었는데.)의 책에 대한 신조랄까 그런 것이, "책을 구입한다. 구입하면 반드시 읽는다, 읽고 나면 반드시 쓴다"였다는데, 가히 책사냥꾼의 입신의 경지라 할만하다.

-요컨대 책을 사고, 그것을 읽고, 읽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그렇게 쓴 글이 모이면 책으로 출간하여 팔고.... 뭐 이런 순환 과정인 셈이다. 여하튼, 책사냥이라는 일은 강박 관념에 가까운 집착이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서, 갑자기 읽고 싶은 생각이 든 책이 있는데, 분명히 서가 어느 곳에 있기는 있는데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자신의 서가 전체를 여러 번 살펴 본 적이 있는 사람, 그러나 결국 찾을 수 없어서 잠못 이룬적이 있는 사람. 오래 전에 절판되었으나 반드시 구하고 싶은 책이 있는데, 도무지 구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아 괴로워한 적이 있는 사람, 한 달 생활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우연히 만난 훌륭한 사냥감에 주저 없이 투자한 사람, 실탄 부족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사냥감을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그러니까 훔치는 일)하고 싶다는 치명적인 유혹에 시달려본 적이 있는 사람, 그런 등속의 사람들(*이런, 이 모두에 해당하는군!).

-탐미주의 또는 유미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탐서주의 또는 유서주의라는 말도 가능할지 모른다. 탐미주의자의 의식 상태를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한다면, 탐서주의자의 의식 상태 역시 그러할 것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책의 노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스스로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상태, 그러니까 일종의 약물 중독과 비슷한 상태라는 점이다.

-문자의 금단 현상,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문도 들어오지 않고 변변한 책이나 책방 하나 없는 산골에서 사흘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 일종의 문명병이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사실상 치유 불능에 가까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내릴 수 있는 처방 아닌 처방은 아마도,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한 시한부 말기 암환자" 가족에게 의사가 건네는 이런 말밖에 없을 것 같다. "집에 모시고 가셔서 드시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게 하십시오."(*아니, 사냥꾼 얘기가 어이해서 말기 암환자에 대한 비유로 마무리되는가? 하긴 간혹 정신병원에 가보란 소리를 듣는 나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겠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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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8-04 01:19   좋아요 0 | URL
'책에서 배운 것대로' 살기 위해서라면 많은 책이 필요하지 않을 거 같은데요. 제 주변의 아는 분 같은 경우도 성경책 한 권 읽는 걸로 충분하다고 믿으시니까요. 수천 권의 책을 읽을 경우에 무얼 배우고 무얼 따라 해야 할지 막막하지 않을까요?..

로쟈 2006-08-04 08:49   좋아요 0 | URL
새벽이라기보다는 한밤중이었는데. 저는 곧 잤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늙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웃음소리 2006-08-10 09:39   좋아요 0 | URL
그런데 로쟈 님은 어떻게 표지에 들어간 그림까지 따로 갖고 계실까... 궁금. ^^ 로쟈 님 글을 조용히 읽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흔적 남깁니다. 덕분에 재밌는 표정훈 씨 글도 읽고 고맙습니다. 이번 휴가 때는 책사냥꾼이랑 로쟈 님이 표지 붙여 놓은 책들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로쟈 2006-08-10 11:33   좋아요 0 | URL
그게요, 언론사 리뷰들에 붙어있는 거걸랑요. 저는 포샵은커녕 파워포인트도 못 다루는, 스캐닝도 할 줄 모르는 위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