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출간된 <원본 백석 시집>(깊은샘, 2006) 관련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온다. 이숭원 교수의 노고가 담겨 있는 책인데, 백석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애독자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없다. 1912년생인 백석은 지난 1963년쯤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얼마전에 1995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확인돼 '충격'과 안타까움을 던져준 바 있다(그는 '동시대' 시인이었던 것이다!). 아무려나 그의 시를 읽는 건 그의 생애만큼이나 아련하다.

교수신문(06. 07. 17) 변형 없이 복원한 원형…“체험의 진실이 주는 감동”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51세, 국문학·사진)가 3년 전 <원본 정지용 시집>에 이어 지난 6월 <원본 백석 시집>을 펴냈다. 이 교수가 원본 시집을 연이어 두 차례 낸 것은 “석·박사 재학생들이 자료를 찾아다니는 번거로움을 덜고, 이후 뜻풀이를 하는 데 들이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기본 텍스트를 제공함으로써 보다 쉽게 심층 연구로 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현대어로 표기할 수 없는 글자들, 행갈이가 애매모호한 부분들을 임의로 바꾸지 않고 백석이 쓴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독자들이 ‘연구자 맘대로’ 재해석되었거나 변형되지 않은 시의 ‘원형’을 즐길 수 있는 것.

 

 

 

 

-그러나 <원본 백석 시집>을 내는 일은 ‘정지용’ 때보다 힘들었다. 시의 대부분이 2권 시집에 수록돼 있는 정지용과는 달리 백석의 경우 그의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는 33편이지만 그 외 신문과 잡지 등에 실린 시들이 70편을 넘는다. 따라서 여러 신문과 잡지에 흩어져 있는 원문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 것. 이 작업은 제자인 이지나 박사가 했는데, 이렇게 자료를 모으는 데만 6개월이 넘게 소요됐다.

-원본 인쇄의 경우 편집도 힘들다. 시가 그림과 같이 게재된 경우, 그림이 글자를 잡아 먹어버려 그림을 지우고, 다른 시에 나오는 같은 글자들을 오려서 붙여 넣는 등의 작업을 했다. 매체가 다양해 너무 작거나 크게 인쇄되어 있는 활자의 경우 확대 및 축소를 통해 평균치로 만들어 비슷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출판사의 편집자가 겪는 고생이긴 하지만 그만큼 ‘원본 시집 작업’이 어려움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백석 시의 백미로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꼽는다. 이 시에는 “체험의 진실이 주는 감동”이 있다고 한다(*'흰 바람벽이 있어'와 함께 많은 독자들이 백석의 절창으로 꼽는 시이다). 몰락한 외톨이가 된 처지에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의 쓸쓸함과 절망적 상황을 반추하면서 힘겨운 세상살이의 아픔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는데 “백석 개인의 경험인 것 같다”며 진실해서 감동을 준다는 것. 이런 시들을 1940년대, 50년년에 찍힌 인쇄자를 통해 옛 냄새를 맡으며 감상할 수 있다.

-원전 백석 시집에는 이 교수만의 해석도 있다. 시 ‘쓸쓸한 길’의 ‘거적장사’는 ‘거적을 팔러 다니는 장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거적으로 둘러메고 지내는 장사’로 해석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시에 나오는 산가마귀의 울음과 서러운 땅버들의 소복 차림이 쉽게 이해가 간다. 이런 식의 다년간의 연구가 바탕이 된 주석들로 인해 백석 시의 원형을 느낌과 동시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마련된 것.

-이 교수는 이번에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라는 연구서와 원본 시집을 한꺼번에 냈다. 두 권을 한 번에 냄에 따라 주변에서 “와”하는 탄성을 보내는 반면, 내심 아쉬움도 있다. <정지용 원본 시집>은 그 이전에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를 먼저 내고 이후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보다 세밀하게 주석을 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과정이 생략된 것. 그래도 이 교수는 “1차적인 텍스트의 세밀한 분석과 이해보다는, 라깡이나 데리다 같은 외국 이론부터 끌어와 적용하는 요즘 연구자들이 텍스트의 정치한 해석이 중요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표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정지용과 백석을 졸업한 느낌이다”라고 말한 이 교수는 이제 김소월부터 정지용 백석까지, 정말 좋은 시, 계속해서 읽힐 만한 문학적 감동을 주는 시들을 모아 왜 좋은 지 뭐가 좋은 지를 해설하는 해설서를 내기 위한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백석도 정지용도 모든 시가 다 좋지는 않다”며 “건질 것은 7~8편 아니냐”라고 말한 황동규 시인의 말이 발판이 됐다. 이 교수의 작업을 통해 숨겨진 좋은 시를 맛보는 한편, 너무 익숙해 그 맛과 멋을 잊었던 시들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박수진 기자)

06.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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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7-17 12:04   좋아요 0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 ^^

2008-03-2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에 문학평론가 김수이 교수의 세번째 평론집이 출간됐다. 두께에 비해 비싼 책이어서 서점에서 들었다가 놓은 적이 있는데(구입은 좀더 짬을 봐야겠다), 중앙일보의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란에서 다루고 있기에 겸사겸사 옮겨온다. 김교수는 시 전문 비평가로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평을 듣고 있고, 지난 계절부터는 <문예중앙>의 편집위원으로 가세했다(중앙일보에서 거들 만하군). 아무튼 같은 세대 비평가가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는다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같이 늙어갈 터이지만 대가급 비평가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중앙일보(06. 07. 15)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

-글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면모가 보인다. 가령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하곤 사이가 안 좋고,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에 대해선 경기를 일으키는 것쯤 이내 알아챌 수 있다. 비평가일수록 더 하다. 비평이란 게 참견하고 가타부타 따지는 일이라서 그렇다. 가치가 배제된 비평은 세상에 없다. 해설에도 가치는 개입한다.

 

 

 



-그러나 꼭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예외가 있다. 비평가 김수이(37)다. 말하자면 그는, 좀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평론가다. 최근 출간된 세 번째 비평집 <서정은 진화한다>(창비)를 보자. 젊은 비평가이니만큼 김근.황병승.김언 등 젊은 시인에 대한 관심은 쉬이 짐작했던 터다. 한데 정현종.최하림.정호승 등 시단의 중진을 정성껏 호명하고선 김혜순.김언희.김선우 등 여성시 계보를 죽 훑는다. 그러더니 불쑥 '지게꾼 시인' 김신용을 칭찬한다. 그렇다고 민중시 계열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 민중시 계열이 대거 몰린 요즘의 생태시를 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를 좀더 알아보기로 했다. 석사논문 주제가 김수영과 김춘수였다. 흥미로운 조합이다. 시대와 문학의 거리를 묻는 듯 보였다. 1997년 등단할 땐 기형도와 남진우를 파헤쳤다. 독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시인들이다. 80년대라는 시대적 고민도 읽혔다. 그러나 박사학위 주제는 서정주였다. 미당의 미학, 욕망의 변화 양상을 분석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물을 만한 시적 편력이다(*머 그래봐야 다 시인들(!)이지만, 다방면으로 두루 훑었다는 얘기는 되겠다. 즉, 기본기가 튼튼하다는 것).

-오히려 김수이의 정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현대시를 다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계파와 경향, 진영과 계보 따위는 상관없는 것이다. 진실한 문학이라면, 온몸으로 앓은 시라면 모두 보듬으려는 것이다. 하여 사방에 대고 잔소리만 해댄다는 소리도 듣는 것이다. 만인의 편이라는 건, 만인이 적이라는 얘기도 된다.

-평론집 제목에서 '진화'는 두 가지 의미다. 진화(進化)와 진화(鎭火)를 동시에 뜻한다. 내일의 서정으로 나아가고 어제의 서정은 꺼트려야 진정한 서정이란 의미다. 부단히 움직이라는 다그침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이 단호한 몸가짐에서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을 읽는다.



-김수이에 따르면, 시인들은 '그리고'나 '그러므로'가 아닌, '그러나'와 '그럼에도'에서 시작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와 '그럼에도'에 존재해야 시다. 설명되거나 부연되어선 시가 아니다. 그래서 다시 김수이에 따르면, 시는 요약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요약되어선 아니 되는 것처럼.

06. 07. 16.

P.S. 저자를 평론가로 '호명'해준 문학비평가 황종연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현재 평단에는 김수이만큼 부지런하게 시를 읽고 정확하게 시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평론가도 드물다. 그에게는 국내의 어떤 유수한 시인의 언어도 낯설지 않으며 어떤 새로운 유행도 당혹스럽지 않은 듯하다. 김수이의 평론을 읽어보면 작품의 유형이 아무리 달라도 비슷한 높이에서 검토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대상 작품이나 시인에게 잠복된 의식의 행로가 정연하게 검출되는 한편, 동시대 시의 역동적인 구도 속에 수려하게 배치되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하니, 동시대 시의 지리부도 같은 걸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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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인도의 한 가정부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하게 됐다는 내용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한 印 가정부의 인생역전"이 기사의 타이틀이다. 조만간 번역/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프리뷰'로 분류해놓는다.

Baby Haldar

한국일보(06. 07. 15) 시골 출신의 가정부에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한 인도 여성의 고단했던 삶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화제의 인물은 자전적 소설 <평범하지 않은 인생(A life less ordinary)>를 펴낸 바비 할더(32).

-프랑스 일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14일 못배운 인도 여성들이 전통이란 미명 하에 얼마나 억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책이 그동안 소설가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재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며 자세히 소개했다(*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인도 출신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이다. 가정부 또한 그녀가 말하는 '하위주체'가 아닌가?).

 

 

 

 

-4살때 어머니가 가출하고 12살때 강제로 결혼한 뒤 남편에게 온갖 구박을 박다가 결국 집을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할더는 책의 첫 부분을 이렇게 시작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거의 바깥에서 살았고 가족 부양은 아예 신경쓰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는 시장에 간다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4살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집에 쌀이 없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후 계속해서 다른 새엄마가 들어오는 가운데 할더는 가정불화와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러던 어느날 할더의 언니는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먹을 것이 없다는게 이유였다. 하지만 이때 할더는 어린 나이에 시집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몰랐다. 할더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나이가 배가 많은 남편에게 시집가라고 했을 때에도 "결혼하면 모든게 좋을거야. 최소한 밥은 실컷 먹겠지"라고만 생각할 정도로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지옥이란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 이듬해에 임신을 했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했다. 하루하루가 악몽인 가운데서도 할더는 2명의 아이를 더 나았다. 그러던 어느날 할더는 남편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졌다. 먼저 시집갔던 언니는 형부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도 전해졌다.

-집을 나오기로 결정한 할더는 무작정 뉴델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나 청소부의 일을 하면 되겠지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하지만 도시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아들을 한 집에 하인으로 보내고 자신도 가정부로 일하면서 생활은 좀 나아졌지만 그녀가 만나는 집주인들은 인간도 아니었다. 어떤 집주인은 일을 많이 부려먹으려고 업무 시간에는 아이들을 다락에 가두라는 요구까지 했다. 그녀는 "한 집주인은 커미와 음료수, 과일 등 시키는 대로 갖다주고 나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사지를 하라고 했다. 정말이지 잠시도 쉴새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13살때 엄마가 된 뒤 너무나도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바비의 어떤 과거를 보더라도 그녀가 인도 문학계에 혜성으로 떠오른 이유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사실 지독한 집주인들에게 시달리면서 혼자서 3명의 자식을 부양해야 했던 할더로서는 독서라든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그랬던 할더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그녀가 인류학 교수 출신의 브라둡 쿠마르의 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교수들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서재를 청소하라고 시켰을 때 할더가 먼지를 털면서 슬쩍슬쩍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쿠마르는 할더가 작가로서의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연필과 노트를 주면서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5세였다. 할더의 글을 읽고 뭔가 특별하다는 판단을 했던 쿠마르는 계속 글을 써보라고 권했고 몇달 뒤 그는 할더와 마주 앉아 책을 낼 수 있도록 문법상의 오류와 중복된 부분을 뜯어 고친 뒤 이를 복사해 출판사에 있는 친구에게 보냈다.

"아주 좋아하더군요. 내 글이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연상하게 했던가 봐요. 그래서 매일 내가 겪은 삶을 써내려 갔죠. 그때만 해도 책으로 나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Light and Darkness

-할더의 글은 문단에서 획기적이란 평가를 받으면서 인도에서 사용되는 몇가지 언어로 출판돼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고 있다. 올 초에는 영문판도 나왔다. 이 책에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나 어떠한 감상주의적 색채도 없다. 할더는 아버지나 남편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는다(2004년 9월의 BBC기사를 보니까 그녀의 첫번째 책은 <빛과 어둠(Aalo Aandhari)>(사진)이며, 이 작품은 영화화 제안까지 받아놓고 있다고 한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은 그녀의 신작이면서 자전적인 대표작인 모양이다).

-하지만 할더는 그들에 관한 `팩트'만 갖고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담한 수법'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델리 인근 구르가온에 있는 쿠마르씨의 하인숙소에 살고 있는 할더는 지금도 낮에는 가정부로 일하면서 밤에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나면 비로소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또 글을 마무리하고 나면 아버지와 남편에게 나름대로의 복수를 한 것 같아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힌두스탄 타임스는 서평에서 "이 책은 인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수백만 밑바닥 여성들의 운명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평가했다(*제1세계에서 근대문학은 이미 종언을 고했지만, 제3세계에서 근대문학은 아직 '미완의 기획'인 것. 인간의 운명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우리 주변에서는 점차 쇠퇴해가고 있는 '위대한 문학'이다).

-IHT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프랑크 매코트가 소년기의 비참한 생활을 엮은 자서전인 <안젤라의 재>에 견줄만한 이 책이 1970년대 북인도에서 살았던 한 여성의 황량한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전했다.(정규득 특파원)

06. 07. 15.

P.S. 바비 할더(1972- )의 자전적 소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 생각보다는 빨리 번역돼 나왔다. <신데렐라가 된 하녀>(문이당, 2006)이 그것이다. 제목 대로라면 작가=신데렐라이다?! ..

06.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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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7-15 19:19   좋아요 0 | URL
(*교수들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_.. 라고 표시해 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

로쟈 2006-07-15 19:39   좋아요 0 | URL
사실 가정부 할더 덕분에 교수 쿠마르의 이름이 '불멸'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니까 할더 또한 쿠마르의 은인인 셈이죠. 그런 게 변증법이기도 하구요...

이리스 2006-07-15 22:38   좋아요 0 | URL
누구를 만냐느냐, 그것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꽤, 크게 바뀌지요.
 

경제학 책을 내가 사서 읽는 일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없지는 않다(지금은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이 분야의 책도 30여권은 될 듯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경제/경영 관련서를 구입한 기억이 없다(하긴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으니!). 물론 바타이유식의 '일반경제'라면 사정은 달라지고 나는 그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관심이 제한되어 있는 쪽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 곧 '제한경제'일 따름이다. 그걸 나는 다리 '속좁은 경제'라고 부르고도 싶다.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쉬운 경제학 입문서'라 이름붙일 만한 책의 리뷰가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얼마전 출간된 <일상의 경제학>(더난출판사, 2006)에 대한 리뷰인데 문화일보 김종락 기자의 것이다.

문화일보(06. 07. 07) 인생이 무엇이냐고? 경제학을 읽어라!

-일부다처제는 남성에게 천국인가, 지옥인가. 혼잡한 고속도로에서 잘 빠지는 옆 차선으로 옮길 때마다 왜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가.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는 것은 경기가 나아지고 있다는 신호인가, 그 반대인가. 스커트 길이와 경기의 상관관계야 경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회자되지만, 여타의 질문들은 경제학과 관계가 없어 보인다. 특히 일부다처제 같은 주제는 효율을 제1원리로 하는 경제학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로 여겨질 만하다. 그럼에도 <일상의 경제학>은 경제학이야말로, 이런 문제에 가장 훌륭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거의 모든 일상의 순간들이 경제학적 상황에 놓여 있고, 경제학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FAZ)’의 경제전문 에디터인 저자 하노 벡 박사는 경제학이 각종 도표와 수식으로 가득한 골치 아픈 학문이며, 일부 학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오해를 바로잡는 데서 책을 시작한다. 경제학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만 기계적으로 따지는 학문이 아니라, 보다 근저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심리학이라는 것이다(*이건 경제학의 확장인가, 자포자기인가?). 현대인의 매 순간이 경제학적 활동의 연속으로, 남녀 간의 연애에서 밀고 당기기를 할 때조차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쯤에서 책에 기대 앞의 문제를 풀어보자. 일부 남성들이 꿈처럼 이야기하는 일부다처제.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1대1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능력있고 잘 생긴 일부 남성들이 여러 여성들을 차지할 경우 나타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다. 평범한 남성들은 일부 빼어난 남성들로 인해 확 줄어든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나마 차지하기 위해 쟁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예전에 일본인 저자가 쓴 <결혼경제학>이란 책도 출간됐었다. 그걸 읽었다고 해서 내가 도움을 받은 바는 하나도 없지만).

-여성을 두고 쟁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뼈 빠지게 돈은 벌어주되 요구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가능하고, 설거지며 빨래, 청소, 육아를 도맡아 하겠다는 전략도 가능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여성을 얻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 시장에 남성은 여전히 넘치기 때문이다. 여성의 요구가 보다 다양해지고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예상과는 다른 남성의 지옥이다.

-혼잡한 도로나 할인마트의 줄에서 머피의 작용이 작용하는 것도, 경제학에서 다루는 인간의 욕구와 관련돼 있다. 도로에서 한쪽 차선이 잘 빠지면, 필연적으로 차선을 옮겨 타는 차량이 생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우르르 차선을 바꾸다 보니 잘 빠지던 차선이 정체되는 반면, 좀 전의 차선은 멀쩡하게 빠진다.

-그래서 옮겨 타면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도로의 차선이나 할인마트의 줄 같은 것이야 조정이 빨리 이뤄지지만, 조정 사이클이 긴 농산물이나 직업 시장은 상황이 다르다. 고추 파동이며 돼지 파동이 일어나고, 한때 대접깨나 받던 직업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미니스커트의 길이와 경제의 상관관계도 심리학으로 설명한다.

“여성들이 짧은 스커트를 입을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뭔가를 감행하고 싶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바로 경기가 호황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분과 같다.”



-이야기는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패션이 화려하고 실험적이라면 경제상황 또한 낙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이 경제학으로 설명하는 일상은 이뿐 아니다. 왜 청바지는 직장의 유니폼이 될 수 없는가, 영화에서 여자 친구를 인질로 잡은 갱의 위협에 굴복해 총을 내려놓는 것은 왜 현실적이지 못한가, 농업보조금이 반경제적인 이유는, 내기는 도박인가 게임인가….

-경제학자인 저자가 이런 문제에 적절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경제학이 인간의 욕망해소, 선택과 집중, 계산과 저울질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책이 주제별로 배치해 솜씨좋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요와 공급, 기회비용, 가격의 탄력성, 게임이론, 죄수의 딜레마 등 경제학의 주요 개념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책은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난해한 개념이나 복잡한 수식을 늘어놓는 경제학 전문 서적이나, 전체 경제에 대한 조망없이 말초적으로 돈버는 기술만 전수하는 재테크서와 구별된다. 더불어 일상에 녹아든 경제학의 논리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도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전한다. 맛깔스러운 번역으로 글만 읽어도 이해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책, 편집자들은 여기에 그림과 만화까지 덧붙여 더러 미소까지 머금으며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언젠가 전공서로서 가령 <맨큐의 경제학> 같은 책을 그 '명성' 때문에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984쪽짜리 경제학서를 읽는 게 과연 내게 '경제적인' 일인지 끝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남들 경제학개론 들을 때 나는 문학개론이나 듣지 않았던가?). 259쪽짜리 <일상의 경제학>이라면 사정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괴짜경제학>이나 <경제학 콘서트> 같은 책들도 취지는 유사하다). 하지만, 가장 '경제적인' 일은 이런 잡스러운 관심들을 잡아매고 팔릴 만한(?) 책을 한권 쓰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06.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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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7-12 23:18   좋아요 0 | URL
경제학원론정도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상의 경제학>이라던가 <쾌도난마 한국경제>등과 같은 책을 읽는다는건 영문법을 공부하지 않고 영문독해를 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맨큐의 경제학>이나 <경제학원론>같은 책을 한번 통독해보는 것은 그다지 품을 많이 팔지 않는 일입니다. 제가보기에는 그런 초급 경제학전공서을 읽는 것이 본격적인 철학책 한권 읽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로쟈 2006-07-13 00:11   좋아요 0 | URL
일반경제 얘기도 꺼냈지만, 제가 '공학적' 경제학(센이 그렇게 부르더군요)에 대해 갖는 불만은 경제에 작용하는 경제 '외적' 변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이진경식 표현을 쓰자면, '경제학의 외부'를 경제학은 다룰 수 있느냐는 것. 더불어, 그것이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게 왜 '외부'냐는 것). 넓게 보아 '계량적/계산적 합리성'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건지(경제학 개론을 듣던 친구는 시험공부한다고 얼심히 계산문제 풀더군요). 더불어, 기본은 고등학교때 다 배웠다는 '자만'도 있는 거죠(부동산과 주식 투자만 빼고)...

yoonta 2006-07-13 00:39   좋아요 0 | URL
님이 말씀하시는 "일반경제" 혹은 이진경의 "경제학의 외부"와 <경제학원론>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죠. 원론에서는 그런 경제 외적 변수는 고려치 않고 즉 다른 변수들은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죠. 그건 어떻게 보면 다른 여타 과학과목과 비슷한 연구방식이죠. 그런 극히 제한되고 공학적이고 조작적인 논리전개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수도 있고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같은 순수과학분야에서는) 경제학과 같은 "일반경제" 혹은 "경제학의 외부"와 같은 외생적 변수들이 내생적 변수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분야에서는 그러한 인위적 제한은 그 경제학이라고 하는 학문자체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회의로서 제기될만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경제학이라고하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양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맑스주의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의 모습이 그런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죠. 어쨋든 맑스의 자본론과 같은 "(주류)경제학의 외부 "와 경제학의 내부를 구분하려면 적어도 그 내부가 무엇인지 정도는 대충 알아볼 필요는 있단 거죠..^^ 공무원시험이나 고시공부할것 아니면 한 두번정도 읽고 이해하는 수준정도만 봐주면 일반경제와 주류경제학전반을 어느정도 조망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겁니다..^^

로쟈 2006-07-13 00:42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의 주제이기도 한데, 경제면의 기사를 읽는 데 장애가 없다면 그럴 만한 '투자'의 필요성을 제가 갖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는 얘기지요.^^

yoonta 2006-07-13 00:45   좋아요 0 | URL
근데 경제면의 기사를 읽는데 장애가 옵니다..솔직히..경제학원론을 잘 모르면..-_-
가령 왜 최근들어 GNP를 사용하지 않고 GDP를 사용하느냐하는 것등의 이유는 원론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죠..

로쟈 2006-07-13 00:52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컴퓨터에 대해서도, 자동차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오히려 실생활에서는 그런 '무지' 때문에 불편하거나 타박을 받곤 합니다. 혹은 부동산 시세에 대한 무지. 요컨대, 모든 공부는 유용하지만 인생은 짧고 벌이는 항상 모자라는지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瑚璉 2006-07-13 11:54   좋아요 0 | URL
경제 원론을 읽는 것은 1) 이른바 '경제학적 마인드'를 접할 수 있고, 2) 경제학의 큰 틀을 조감할 수 있다라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경제쪽이 전공은 아니지만 '맨큐의 경제학'은 한 번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그 정도 노력을 할만한 가치는 있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06-07-14 14:45   좋아요 0 | URL
'원론'적인 문제로 되돌아왔네요.^^
 

어제는 태풍을 핑계로 하루종일 집에 죽치고 있다가 저녁 무렵 읽은 게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김용석 교수의 연재칼럼이다.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이고 청소년들을 타겟으로 한 글이지만, '진화생물학의 마키아벨리즘'이란 제목도 눈에 띄고 도킨스의 책도 한번 더 홍보할 겸 여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6. 07. 10)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1976년)가 출간된 이후 지난 한 세대 동안 이 책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도킨스 자신도 책의 2판(1989년) 서문에서 “논쟁적인 저서로서의 이 책의 명성은 해가 갈수록 커져 지금에 와서는 과격한 극단주의의 작품으로 널리 간주되고 있다”고 인정한다(*이전에 지적한 바이지만, 국내에는 이 1판과 2판이 모두 번역돼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주장이 ‘보편적 이론’일 수 있음을 확신한다. 또한 이런 확신 때문에 동료 과학자들로부터도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도킨스의 입장이 이해보다는 오해와 곡해의 대상이 된 것은 일정 부분 그 자신의 수사법에도 기인한다. 그의 수사법이 모호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단도직입적이고 명확해서라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생존 기계다.” “우리는 로봇 운반자다.” “사람과 기타 모든 동물은 자기 복제하는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같은 표현들이 그것이며, 바로 이 간단한 문장들이 그의 이론을 대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킨스의 이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 문장에 현혹될 게 아니라 내용 전체를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으며, 찰스 다윈의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도킨스의 이론은 “유전자의 눈으로 본 다윈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다윈의 이론이지만 다윈이 택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한” 것과 같다. 즉 “개개의 생물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유전자의 눈으로” 자연 선택을 설명한 것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진화생물학의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이는 책에서 도킨스가 지적하는 것도 종의 이해관계나 개체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진화론의 오류들이라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유전자의 이해관계이다.



-한편 과학사회학과 과학철학적 맥락에서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흥미로운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이 저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저주받은’ 책 <군주론>과 유사한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도킨스도 인정하듯 엉뚱하고 깜짝 놀랄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비유와 해석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선 도킨스는 자신이 사용하는 윤리적 성격의 단어, 즉 ‘이기적’이니 ‘이타적’이니 하는 말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에 제동을 건다. 이 말들로 “진화에 따른 도덕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말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즉 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떠하다고 하는 진술’의 구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의 논법이다. 마키아벨리 역시 도덕적 논의에서 벗어난 입장을 견지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사는가’의 구별을 전제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도킨스는 자신의 목적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마키아벨리는 다름 아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정치학’을 탐구한다. 그는 정치사의 사례들을 들면서 “이로부터 거의 항상 유효한 일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즉 타인을 강하게 하는 자는 자멸을 자초할 뿐이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타주의를 가장할 줄 알라고까지 조언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결코 타자를 도와주지 않는다. 도와주는 것처럼 보일 경우라도 그것은 “겉보기의 이타주의일 뿐”, 결국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다.

-이 밖에도 둘 사이의 유사점은 많다(그들이 사용하는 수사법도 그렇고, 일부 주장들은 ‘양면적’으로 독해해야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두 저서에 가해진 비판들도 비슷한 양상을 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두 저서가 공유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둘 모두 ‘현실을 직시하라’는 매우 평범하면서도 지극히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도킨스의 경우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관점’에서 본 한정된 현실이지만, 이런 고전들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중요한 관점들을 제시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06.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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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루핀 2006-07-14 03:40   좋아요 0 | URL
"자신을 위한 이타주의"... 저는 <이타적 유전자>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양극화 현상이 전세계적인 흐름이라고 할 때 자신을 위한 이타주의, 즉 타인에 대한 기만이 아닌 자신과 남을 향한 공생적 (win-win) 이타주의에 대한 철학이 너무나 절실하지 않나 싶은 요즘입니다. <이타적 유전자>라는 책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신지..

로쟈 2006-07-14 07:37   좋아요 0 | URL
<이타적 유전자>란 책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아시다시피 원제는 <미덕의 기원>이니까요. 그리고 그때의 미덕은 '이기적 유전자'론으로 다 설명되는 부분입니다(상호 협력(공생)이란 것도 궁극적으론 지극한 이기주의(계산)의 산물이라는 것이죠. 다만 개체 차원이 아닌 유전자적 차원에서). 다만, '이기적'이란 게 유전자적 이해관계를 표현한 수식인 만큼 인간적 '해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붉은루핀 2006-07-15 03:12   좋아요 0 | URL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타적, 이기적 이라는 단어 속에는 벗어날 길 없는 도덕적 윤리적 포스가 서려있긴 하지요...ㅎㅎ <이타적 유전자> 경우 제목 자체때문에 조금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혹 대안할만한 좋은 단어가 있을런지요?

로쟈 2006-07-15 19:46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원제가 좋습니다. '미덕의 기원', 혹은 '이타성의 진화' 같은 것도 고려해볼 수 있을 거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