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내서점에 들렀다가 뜻밖에 발견한 책은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이다.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란 제목의 리뷰를 어제 옮겨왔었는데, 마침 바로 그 주제에 관한 책이 출간된 것(알라딘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은 듯하다).

책 이미지

1981-1982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를 펴낸 것인데, 불어본은 지난 2001년에, 그리고 영역본은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다. 푸코의 강의록으로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비정상인들>에 이어서 세번째로 소개되는 책이다. 이 강의록 시리즈의 책임 편집자는 프랑수아 에왈드와 알레상드로 폰타나이며, 이 책의 편집자는 <푸코와 광기>(동문선, 2005)의 저자이자 <미셀 푸코, 진실의 용기>(길, 2006)의 공저자인 프레데렉 그로이다. 책에는 이 강의의 특징과 출판과정에 대한 편집자의 자세한 해설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역자는 오래전에 저명한 푸코 연구서인 존 라이크만의 <미셸 푸꼬, 철학의 자유>(인간사랑, 1990)을 소개한 바 있고 미셸 푸코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후에 귀국하여 프랑수아 샤틀레의 <이성의 역사>(동문선, 2004)를 역간하기도 한 심세광 박사이다. 모처럼 무게 있는 저작이 최적의 역자를 만나 출간되었기에 안도감이 든다. 20쪽에 이르는 해제성 역자서문도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하고.

1982년 1월 6일부터 3월 24일까지 행해진 강의에서 푸코가 주로 다루고 있는 텍스트는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등이다. 역자가 잘 정리해놓은 바에 따르면,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고대의 자기 기술둘, 특히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의 자기 기술들을 연구하면서 고대인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해낸다."

"고대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할 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발견해야 할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행동의 문제였다. 고대에 자기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은 '인식'의 거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와 '생이라는 작품'의 거리였다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고대 주체의 문제는 자기를 인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작품의 재료로 간주하는 데 있었다.'"(25쪽) 푸코는 이를 일컬어 '실존의 미학'이라 명명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도 참고해야 하는 필독서이다.

책에는 시리즈의 공동편집자가 작성한 일러두기가 서두에 실려 있는데, 푸코의 독자라면 다들 알 만한 내용이지만 생소한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 옮겨보면, "미셸 푸코는 안식년이었던 1977년만 제외하고는 1971년 1월부터 1984년 6월 그가 사망하던 때까지 줄곧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다. 그의 강좌명은 '사유체계의 역사'였다. 이 강좌는 쥘르 뵈유맹의 제안에 따라 콜르주 드 프랑스 교수협의회에 의해 1969년 11월 30일에 개설되었는데, 장 이폴리트가 죽을 때까지 맡고 있던 '철학적 사유의 역사'를 대체한 것이다."(31쪽)

그러니까 스승이었던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새로운 강좌를 맡게 된 것인데, "교수협의회는 1970년 4월 12일 미셸 푸코를 새 강좌의 교수로 선출했다. 그때 그는 43세였다. 미셸 푸코는 1970년 12월 2일 교수 취임 기념강의를 했다." 푸코와 교수직에 나란히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이가 바로 폴 리쾨르였다. 그리고 푸코의 첫 취임강의는 이듬해 5월 <담론의 질서>로 출간되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강의를 듣는 데에는 어떠한 자격요건도 필요하지 않았고 교수들은 지도학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청강생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어반 청강생'들을 위한 교본으로 생각하면 책값이 그렇게 부담스럽지만은 않을 듯하다.

국역본이 나온 김에 나는 도서관에서 이전에 너무 두꺼운 탓에 엄두가 나질 않아 대출하지 못했던 영역본을 대출했다(영역본은 556족으로 588쪽의 국역본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건 국역본의 페이지당 행수가 30행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역본은 35행이다). 그리고는 아예 영역본은 아마존에 주문했다. 배송료를 포함해도 국역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고, 그 정도면 책을 복사하는 것보다 경제적이어서이다. 영역본으로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가 네댓 권 정도 번역돼 있는 듯하다.

Интеллектуалы и власть. Избранные политические статьи, выступления и интервью. Часть 2

한편, 러시아어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비정상인들>이 번역돼 있다(이 중 <비정상인들>은 모스크바 체류시에 구입한 책이다). <주체의 해석학>의 경우에는 한국어본이 먼저 나온 셈이다. 러시아어본으로 최근간은 대담집인 <지식인과 권력> 2부(2005)이다. 1부는 지난 2002년에 출간됐었다... 

07. 03. 27-28.

P.S. 푸코가 주로 다루는 책 중의 하나가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라고 했는데, 이번에 우리말 번역본이 출간됐다. <알키비아데스>(이제이북스, 2007).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의 첫 권으로 나온 듯싶다. 소개에 따르면, "정암학당의 학자들이 7년간의 시간을 기울여 번역한 플라톤 전집 중 한 권.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라는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를 상대로 질문을 던져 가며, 알키비아데스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앞으로 해야 할 바를 자각게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에 걸쳐 질문을 주고 받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모습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의 진미를 느낄 수 있으며, 위서 논란이 있지만 플라톤 사상의 전조(*전모)를 보는데도 부족함이 없다." 한국의 플라톤 수용에 있어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가 될지 기대된다.

07.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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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3-28 00:36   좋아요 0 | URL
* 영역본을 살려고 했는데 잘 됐군요. 역자가 '심세광'씨라서 믿음도 가고요. 고마운 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07-03-28 01:1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예 영역본까지 주문해버렸습니다.^^;

Ritournelle 2007-03-28 01:27   좋아요 0 | URL
예스 24에서 꽤 싸게 파네요. 17, 420원... 2주 정도가 걸리니 저도 영역본을 주문해야 겠습니다. '삶의 미학적 차원' 혹은 '삶의 예술적 차원'이라는 주제는 정말 멋있는 것 같습니다. 푸꼬가 그토록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 아닐런지요?

로쟈 2007-03-28 01:31   좋아요 0 | URL
알라딘도 빨리 '국제화'되면 좋겠는데요...

Ritournelle 2007-03-28 03:4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예스 24는 책 값의 10% 정도를 마일리지로 적립해 줍니다. ^^* 물론 플래티넘 고객한테만요. 다른 고객에게는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푸코와 교수직에 나란히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이가 바로 폴 리쾨르였다." 이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오는 군요.

이비 2007-03-28 09:47   좋아요 0 | URL
참고할 필독서로 <자기의 테크닉>을 소개해주셔서 검색해보았는데 잘 찾을 수가 없네요. 이 책도 역시 푸코의 저서인가요?

주니다 2007-03-28 11:52   좋아요 0 | URL
기대되는 책이군요. 번역본이 원서보다 훨씬 비싸네요. ㅎㅎ

로쟈 2007-03-28 14:42   좋아요 0 | URL
tavola님/ 제목을 제가 축약해버렸네요. <자기의 테크놀로지>입니다.^^;
주니다님/ 원서보다 비싼 게 요즘은 대세 같아요.--;

테렌티우스 2007-03-28 20:00   좋아요 0 | URL
하 희소식이네요. 그런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국내번역서의 정확한 제목은 원저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되어야 맞습니다.

이 제목은 푸코가 주장하는 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의 이른바 '보수적인' 사람들이 기존의 윤리적 정치적 가치를 비판받을 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는 말을 푸코가 비판적으로 인용한 내용을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불어원서도 그대로 "Il faut defendre la societe"로 출간되어 있지요(알라딘 넷에도 인용부호 없는 사회를 보호한다로 잘못 되어 있지요). 즉 일종의 비판 혹은 비아냥(?)식의 책제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사실 푸코가 말하고 싶은 것은 - 제목을 얼핏 들었을 때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정반대로 - 차라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라는 반문에 더 가깝지요.

이는 예를 들면 독일 제3제국 시절의 어느 한 나치주의자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말이 당시 가졌을 정치적 함의를 생각해보면 그 뜻을 잘 알 수 있지요...

여하튼 로쟈님, 빠른 소개 정말 반갑고 고맙습니다.^^

로쟈 2007-03-28 22:2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국역본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나와 있구요, 제가 누락시키긴 했지만.^^; 푸코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오해의 소지는 없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나저나 테렌치우스님의 활동도 기대가 됩니다.^^

2007-03-28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29 14:00   좋아요 0 | URL
**님/ 제가 알기에 푸코는 권력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공모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런 비판이 나온 게 아닌가 싶네요. 자세한 건 맥락을 봐야 할 거 같습니다...

2007-03-2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렌티우스 2007-03-29 23: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해야 할텐데 걱정되네요...^^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핀커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난주 후반에 깔린 책인 듯하다(내지는 출판사가 언론홍보라는 간접적인 방식보다는 독자와 먼저 대면하는 정공법을 택했는지도).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소소, 2007)가 이번에 나온 책이며 원제는 'How the Mind Works'(1997), 제목 그대로이다(다만 저자명 '핀커Pinker'가 '핑커'로 바뀌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원서가 나온 지 10년만에 한국어본이 나온 셈인데, 기억엔 지난번 <빈서판>(사이언스북스, 2004)이 출간되던 때쯤 핀커의 주요 저작들 몇 권을 한꺼번에 구입할 때 사들였던 책 중의 하나이다(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라 '소장도서'란 말이 무색하지만).  

사실 출세작이기도 한 <언어본능>(그린비, 1998)이 출간되었을 때(2004년에 소소에서 개정판이 출간됐다) 내가 저자인 스티븐 핀커(1954- )에 대해 알고 있던 내용은 MIT의 동료인 촘스키와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언어학자라는 게 전부였다(그는 가장 탁월한 '촘스키 전도사'였다). 그렇더라도 <언어본능> 이후에 나는 '핀커의 모든 책'이란 분류항을 머릿속 서재에 마련해놓고 있다.  

본래 심리학 전공으로 출발하여 언어학과 인지과학쪽으로 연구영역을 확장해간 핀커는 21년간 MIT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3년 이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주로 언어심리학진화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다. 적어도 그 두 분야를 '조인트'해놓은 영역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빈서판>은 한 예증일 터인데, 그런 명망가에게라면 '마음'에 대한 강의를 한번쯤 들어봄 직하지 않은가?

<언어본능>, <빈 서판> 등으로 알려진 스티븐 핑커의 마음에 대한 탐구서. 마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진화했으며, 마음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웃고, 교류하고, 예술을 즐기고, 인생의 신비를 음미하는지를 신경과학에서부터 경제학과 사회심리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들을 동원해 설명한다. 총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음을 ‘역설계’(역설계란 대상을 분해하고 구조를 분석하여 그 설계로 거꾸로 파악해가는 기법을 말한다)하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 자연선택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최근 많은 담론으로 둘러쌓여 있는 인간 마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해주는 책.

'인간의 마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해주는 책'이라고 하니까 말하자면 '기본서'이다. 한데 분량은962쪽이다(원서 자체가 672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학문을 책두께로 승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만한 분량의 책들을 몇 년에 한권씩 턱 턱 써제끼는 역량 자체는 경탄할 만하다(문제는 그런 학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학자들은 얼마나 겸손한 것인지!).

해서 어쨌거나 다소 부담스런 분량과 가격이지만 하버드대학의 강의를 한 학기 수강하는 셈치고 구입한 다음에 2주에 한 장씩 읽어나감으로써 본전을 뽑는 방법도 나쁘진 않겠다(소프트카바의 원서 자체는 물론 국역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그만한 비용과 수고로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밑그림을 얻을 수 있다면 한 학기 소득으로는 바꿔치기할 만하다(하지만 나는 정말 그런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핀커의 주요 저작으로 아직 번역되지 않은 또 다른 책(역시나 몇년 전에 구입했지만 박스 속에 묻어두고 있는 책)은 <단어와 규칙>(1999)이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1997)에 바로 뒤이어 출간된 것인데, 국역본도 그 순서에 따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럴 경우 우리는 2009년쯤에 국역본을 얻게 되는 것인지? 그때쯤이면 한국어로도 "스티븐 핀커를 좀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요한 게 주변에 없다면 옆집에서 꾸어오는 일이라도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

07. 03. 25. 

P.S.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부담스럽다면 개리 마커스의 <마음이 태어나는 곳>(해나무, 2005)부터 읽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클루지>(갤리온, 2008)도 마커스의 책이다). '몇 개의 유전자에서 어떻게 복잡한 인간 정신이 태어나는가'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의 저자 자신이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도유망한 학자라는데,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에 따르면 "마커스는 생각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종합하여 보여준다. 재능이 넘치는 독창적인 이 책은 과학을 대중화하는 데, 그리고 과학 그 자체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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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3-25 12:49   좋아요 0 | URL
심리철학과 연관하여 볼 만한 책들이군요. 학부시절 심리철학을 접하고 꽤 관심있었는데, 졸업 이후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보다 봐야할 것들이 많아서.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로쟈 2007-03-25 13:22   좋아요 0 | URL
'심리철학'도 걸쳐 있지만 짐작에 좀더 실제적인 쪽 같습니다.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에 좀더 가까운...

비연 2007-03-25 20:43   좋아요 0 | URL
보관함에 넣어두었습니다^^ 항상 좋은책 알려주셔서 넘 감사해요~!

딸기 2007-03-26 07:06   좋아요 0 | URL
정말 부담스런 분량과 가격...입니다만 일단 보관함에 넣어두어야겠어요. 감사~

자꾸때리다 2007-03-26 12:25   좋아요 0 | URL
언어 본능 번역 상태 괜찮나요?

로쟈 2007-03-26 14:16   좋아요 0 | URL
오류들을 수정한 개정판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개정판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저로선 처음 국역본을 읽을 때 원본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marine 2007-03-27 21:14   좋아요 0 | URL
갑자기 읽고 싶은 생각이 확 당기는군요 "빈 서판" 도 7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었지만 워낙 쉽게 쓰여져서 소설책 읽는 기분으로 쭉 읽어 나갔거든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이번주에 나온 신간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책은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저자 존 리드의 평전이다. 워렌 비티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영화 <레즈>(1981)의 원작이었다고도 하니까 로젠스톤의 원저 자체는 좀 오래된 책이다. <낭만적 혁명가(Romantic Revolutionary)>(1975)가 그 원제이다. 32년만에 번역된 것에 의의가 있다기보다는 러시아혁명 90주년을 맞는 해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더 뜻깊다고 하겠다. 프레시안에 실린 리뷰가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7. 03. 22) 진정 이 시대엔 '혁명'이 사라졌는가

"철도공무원."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린이가 장래 희망을 묻자 망설임없이 이렇게 답하는 것을 봤다. 그 어린 나이에 '장래 희망'을 구체적인 '직업'으로 콕 짚어 이야기한 것도 놀랍지만, 철도공무원이 되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자 "직업이 안정적이잖아요"라고 대답한 대목에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안타깝게도 그는 너무 어려 지난 2005년 철도청이 민영화돼 철도공사로 전환된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안정적 삶'이라는 사실은 어느덧 '불안'이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돼버린 21세기 초 한국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하지만 자아가 확립되기 이전 단계에서부터 '부'와 '안정적 삶'을 목표로 삼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형성 이후 어느 사회에서든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취재한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존 리드(Jhon Reed)의 평전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백만장자를 꿈꾸던 청년이 혁명가가 되기까지
  
최근 출간된 로버트 로젠스톤의 <존 리드 평전- 사랑과 열정 그리도 혁명의 투혼>(정병선 역. 아고라 펴냄)에 따르면, 대학 시절 존 리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든 것은 이렇게 요약된다. 행복과 모험, 아니면 돈과 판에 박힌 일상."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 개월간 유럽을 여행한 뒤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리드는 두 가지 인생 목표를 설정했다. "백만장자가 되는 것과 결혼하는 것." 물론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돈과 일상'이 아닌 '행복과 모험'을 택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에도 불행한 순간이 많았지만.


  
특히 기자로서 그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913년 봄 뉴저지 주 패터슨 노동자 파업 취재였다. 그는 이 파업을 취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구금됐다. 이 경험에 대해 그는 "나는 영웅도 아니고 순교자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한바탕의 장난일 뿐"이라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지만, 대학시절 낭만주의적 발상으로 고기잡이 배를 탔던 것과 나흘에 불과했지만 노동자들과 함께한 감옥 생활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낭만주의적 지식인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1914년 판초 비야가 이끄는 멕시코 원주민 반군을 취재해 쓴 <반란의 멕시코>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책에 대해 그의 친구는 "멕시코는 물론이고 너와 함께 약동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그는 "멕시코 혁명을 취재하면서 대의가 삶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리드는 유럽 전역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취재하면서 철저한 반전주의자가 됐다. 전쟁을 두고 미국 내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 급진주의자들의 공동체가 혼란에 빠졌고, 종국에는 대다수가 전쟁에 찬성했지만, 그는 국회의사당에 출석해 전쟁 반대 주장을 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사실상 '실업자'가 됐다. 어느 매체도 공개적으로 전쟁 반대 입장을 밝힌 그에게 일거리를 맡기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기운을 감지하고 러시아로 건너가 1917년 11월 볼세비키 혁명을 목격했다. 그는 "대중의 승리"인 이 혁명의 기록을 담은 책을 두 달 만에 완성했다. 이 기록이 바로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와 함께 세계 3대 르포르타주로 평가받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다.

한 세기의 시간을 두고 변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볼세비키 집권 이후 소비에트 선전국에서 일했으며, 뉴욕 주재 소련 영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대중의 승리'를 꿈꾸며 공산주의 노동당을 창당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으러 러시아로 갔다가, 1920년 모스크바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레닌을 비롯한 동지들의 애도를 받으며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크렘린에 묻혔다. 안타깝게도 그가 1776년 '독립 영웅'들 이외의 혁명가들은 존경받지 못 하는 미국인이라 점에서 자국민들의 기억 속엔 깊이 남아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에 대한 기억이 환기된 것은 1981년 이 평전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레즈(Reds)> 덕분이다. 이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착오로 보인다. 그해 작품상은 <불의 전차>가 수상했으며 <레즈>는 감독상과 여우조연상 등을 수상했다. 오래전에 본 이 영화를 며칠전에 상기할 수 있었는데, 보드리야르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 대담에서 털어놓을 걸 읽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1927년 사망한 존 리드의 모스크바에서의 장례식).

서른셋 짧은 생을 불꽃같이 살다간 리드의 평전을 읽다보면 100년 가까운 시간과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리드는 1913년 패터슨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뉴저지주 패터슨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전쟁이다. 일방적으로 한쪽, 다시 말해 공장 소유주들만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의 하수인인 경찰이 저항하지 않는 남녀를 곤봉으로 구타하고, 법을 준수하는 군중을 탄압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돈을 받은 용역 깡패들이 총탄을 사용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그들의 신문인 <패터슨 프레스>와 <패터슨 콜>은 선동적이고 범죄를 조장하는 기사를 씀으로써 파업 지도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그들의 끄나풀인 캐럴 치안판사는 경찰서에서 잡아들인 평화 시위대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있다. 그들이 경찰과 언론, 법원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본가들과 경찰, 법원, 그리고 주류 언론의 '끈끈한 관계'는 사실상 변한 게 없다. 또 당시 패터슨 노동자들의 요구는 '8시간 노동'과 '최저 임금'이었다. 이는 현재의 대다수 노동자들도 여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리드는 1916년 미국의 참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 때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전쟁을 반대했다.
  
"근로대중은 자신의 적이 독일이나 일본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국가의 부를 60%나 소유하고 있는 미국의 2%가 근로대중의 적이다. 근로대중의 재산을 빼앗아간 이 사악한 '애국자' 집단이 이제는 그들을 군인으로 동원해 자신들의 약탈재산을 보호하려 획책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들어 이라크를 적으로 설정한 지금의 전쟁에서도 딕 체니 부통령의 헬리버튼 등 부시 정권과 결탁한 미국 군수업체들만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다. 이 전쟁에서 죽어 나가는 것은 근로대중들의 자녀인 동원된 군인들과 점령국의 무고한 민중들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지만 20대 초 백만장자를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 혁명가가 된 것은 그의 특출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여자를 밝히고, 한때 부인의 배신에 괴로워하고, 돈벌이를 위해 글을 쓰기도 하는 등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역사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몸을 맡겼고,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나 더 이상 '혁명'을 꿈꿀 수 없다는 21세기 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저항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또 미국이 일으키고 있는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남미에선 여러 국가들에 좌파 정부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들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 서문에서 "내 감정은 중립적이지 않았다"고 썼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이 과연 누구의 시각인가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만드는 말이다. 살아가면서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살다간 기자이자 혁명가인 그의 삶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전홍기혜 기자) 

07. 03.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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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3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3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24 12:35   좋아요 0 | URL
ㄱ님/ 품성론은 그래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과학'과 결합되면 '인간개조론'이 되는 것이죠...
ㅁ님/ 러시아혁명 자료를 찾으면서 비디오로 보아서인지 전반부를 몰입해서 보지 못했습니다. 스크린으로 본다면 느낌이 좀 다를 거란 생각은 드네요.^^
 

20세기의 역사를 통째로 다룬 책들도 이젠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클라이브 폰팅의 <진보와 야만>(돌베개, 2007) 또한 '20세기 통사'이다. 특징이라면 유럽 중심적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책이라는 점. 언론 리뷰들에서 많이 다루어졌기에 더 보탤 말은 없다. 문화일보의 리뷰가 자세하기에 관련기사와 함께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7. 03. 16) 진보, 야만을 낳다 - 20세기 인류발전의 빛과 그림자

[질문 1]지난 20세기 사람들의 사망 원인 가운데 질병과 기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다음 중 무엇이었을까. ⓐ교통사고 ⓑ제노사이드(Genocide·민족, 종교 등의 차이를 이유로 한 집단 학살 행위) ⓒ자연재해 ⓓ전쟁 [질문 2] 지난 20세기 세계 각국의 정부형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입헌군주정 ⓓ독재 [질문 3] 20세기 말 인류는 1900년에 비해 얼마나 늘어났을까. ⓐ1.5배 ⓑ2배 ⓒ3배 ⓓ4배

세 질문의 답은 모두 ⓓ다. 지난 세기 교통사고로 2500만명, 자연재해로 1000만명, 제노사이드로 1400만명이 죽은 데 비해 전쟁으로 인해 1억5000만명이 사망했다. 물론 기근으로 인해 죽은 인구는 이를 훨씬 웃돌았다. 또한 자유민주정부나 사회주의 정부보다 20세기를 지배했던 정부형태는 바로 독재였다. 인구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해 100년 사이에 약 4배로 늘어났다. 이 같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기술의 발전을 이룩한 20세기지만 그 이면에 이처럼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은 역사의 진보 또는 발전이란 개념을 무색게 하는 것이 아닌가.



‘20세기의 역사’란 부제가 붙은 책은, 한마디로 지난 세기 인류가 이룩한 진보의 이면엔 야만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고 규정한다. 진보와 야만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돼 있다는 것이다(이젠 이러한 시각 또한 상식이 되어야 하겠다). 저자는 “20세기에 있었던 두 개의 가장 파괴적인 정치운동, 즉 공산주의와 나치즘은 유럽의 역사와 사고방식의 깊숙한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20세기의 야만성은) 18세기 계몽주의와 19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유럽적 유산의 훨씬 더 어두운 측면”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진보주의는 거대한 생산력 증대와 인구증가, 인간 수명의 획기적 연장, 세계의 통합 등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파시즘과 나치즘, 1·2차 세계대전과 집단학살, 국가폭력, 독재정권, 거대한 환경파괴 등 기괴한 야만을 낳았다는 것이다. 책은 이 같은 진보와 야만의 20세기를 풍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보여준다.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자.

◆ 식량부족과 기아 = 1990년대 말에도 매년 4000만명이 굶어죽거나 그와 연관된 질병으로 사망했다. 물론 전 세계의 식량 생산은 크게 늘어났으나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게다가 분배의 측면에선 이전보다 훨씬 불평등해졌다. 아주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20세기 100년 동안 기근으로 인해 최소 1억명이 죽었다. 일생 동안 배고픔과 반(半)아사 상태에서 산 사람들의 수는 수십억 명에 달한다.

◆ 공업 생산의 편중 = 1953년 이후 20년 동안 세계 공업 산출량은 이전 150년간의 공업 산출량의 총합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단히 편중돼 있었다. 20세기 말에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세 나라의 공업 생산이 세계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여기에 중국, 독일, 프랑스, 영국을 합친 7개국의 공업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의 4분의 3에 이르렀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비중은 더 하락했다.

◆ 부의 불균형 = 전 세계 사람들의 평균 소득이 증가했지만 이 역시 불평등한 현상이었다.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국가들은 2000년에도 가장 부유했고, 최빈국들도 거의 변함이 없었다.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간극은 줄어들기는커녕 훨씬 더 벌어졌다. 20세기 초 3배에 달했던 중심부와 주변부의 소득 격차는 20세기 말에는 7배 차이로 늘어났다. 1990년대 중반에 89개국 사람들이 1980년대보다 더 가난해졌고, 43개국 사람들은 심지어 1970년대보다도 가난해졌다.

◆ 국가폭력의 증대 = 20세기에 각 국 정부는 자국민을 얼마나 죽였을까. 최악은 5000만명을 기록한 공산당 치하 중국이다. 1700만명을 기록한 소련과 1000만명의 자국민을 죽인 국민당 치하 중국이 뒤를 잇고 있다. 아시아 공산주의 정권은 최소 400만명을 학살했으며, 독립 이후의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300만명에 가까운 자국민을 죽였다. 전 세계적으로 정부에 의해 학살당한 국민은 최소 1억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진보가 이룩한 성과에 대한 지적 또한 잊지 않는다. 20세기에는 산업 생산의 거대한 팽창이 있었고, 이것은 19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전기를 비롯, 자동차·전화·TV 등 신기술은 인류의 삶을 변화시켰다. 20세기가 막 시작되면서 만들어졌던 원시적 수준의 비행기는 세기 말엔 수억 명의 사람들이 매년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도약했다. 컴퓨터와 반도체, 로봇과 실리콘 칩 등과 같은 기술은 20세기 초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술이었다. 또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글자를 깨우쳤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20세기는 진보와 야만이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면서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야만성은, 세계가 매우 빈곤한 압도적 다수와 부유한 소수 사이의 거대하고, 더욱 증대하는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졌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주변부의 극빈국에서 중심부 국가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한국인들로선 선뜻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군부독재의 세월을 헤쳐왔던 우리 역시 이 같은 ‘진보와 야만의 20세기’를 극명하게 경험한 것이 아니겠는가.(김영번기자)

 

문화일보(07. 03. 20) "日 자본주의 급성장은 식민무역 덕”

영국 역사학자 클라이브 폰팅의 저서 ‘진보와 야만’에선 20세기 주변부 국가에서 반(半)중심부 국가로 지위 상승한 국가로 한국과 대만을 꼽는다. 1900년대 초의 세계 역학 구도가 20세기 말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가운데 100년 동안 주변부 국가에서 중심부로 가까이 다가선 국가들은 찾아보기 힘드는데, 유독 한국과 대만이 그같은 ‘희귀한’ 사례로 꼽힐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대만이 그같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어떤 원인과 과정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는 논문들을 집중 소개한 책이 최근 발간됐다. 한국을 비롯, 일본·대만 학자 11명이 힘을 합쳐 만든 ‘일본 자본주의와 한국·대만’(전통과 현대)이다. 1945년 이전의 일본과 한국, 대만의 경제를 통시적으로 고찰한 책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동아시아 경제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하의 조선과 대만 경제를 실증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이 시기에 일어난 3국의 경제변동을 가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와 관련, “식민지에서 공업화 전개나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식민지 지배의 미화 또는 정당화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는 어떠한 궤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한국 및 일본·대만의 고속성장 배경 = 호리 가즈오(堀和生) 일본 교토(京都)대 교수는 ‘일본제국과 식민지 관계의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에서 무역 분석 결과를 통해 1·2차 대전 사이의 일본과 조선·대만 간 관계의 특징을 분석하고 있다. 일본의 무역량은 1930년대에 특이할 정도로 팽창했다. 1930년대 말 일본의 대 식민지 무역은 당시 최대의 식민 제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대 식민지 무역량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는 곧 식민지가 일본에 광대한 시장을 제공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식민지가 일본에 대량의 곡물과 식료품을 제공하면서, 역으로 일본으로부터 생산재와 자본재를 도입하는 무역 내용은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맞물려 있다.

호리 교수는 “양차 대전 사이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분업관계, 즉 자본주의적 국제관계가 형성되어가고 있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면서 “그것은 일본제국의 팽창, 침략과 전쟁, 식민지 지배의 강화라는 과정과 겹쳐 있었다”고 밝혔다. 이같은 과정이 식민지 주민을 위해 진행된 것은 아니었으며, 때로는 식민지 주민의 의사에 반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이후 이 지역의 고도성장은 이같은 역사적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호리 교수의 결론이다.

2차 대전 이후 거대한 미국시장의 등장이나 기술 이전의 가능성이라는 일반적인 조건이 다른 국가에도 있었음에도 유독 일본이 선진자본국으로 올라서고, 한국·대만이 신흥공업국(NICs)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시대 동아시아에서 형성됐던 역사적 조건에서 그 원인 중 하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은 식민지 및 종속지역 등의 주변 사회를 자본주의에 적합하게 재편성함으로써 일본 자본주의 발전에 아주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으며, 조선과 대만은 그같은 자본주의적 재편성에 의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산업사회로 변모해갔다고 호리 교수는 밝혔다.

◆ 조선과 대만의 공업화 =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수록문 ‘식민지 시대 공업화 비교:대만과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자국의 제도를 식민지에 이식해 본국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구했다는 점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고 밝혔다. 즉, 식민지 시대 초기부터 토지제도 개혁에 착수했으며, 관세와 통화제도를 일본에 통합시켰다는 것. 이같은 제도적 통합은 대만과 조선경제에 매우 유사한 특징을 부여했다. 대일 무역이 급증, 무역의존도가 매우 높은 형태로 변모했으며 일본 자본이 주도하는 이식(移植)공업화가 전개됐다.

김 교수는 “광복 후 한국과 대만의 경제성장 유형은 식민지 시대와 매우 흡사했다”면서 “이러한 연속성은 한국과 대만이 두 시기 모두 개방체제 하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 기인한 듯하다”고 추론했다. 즉, 2차 대전 이후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한 나라들은 개방체제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지만, 한국과 대만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대외 개방으로 정책을 전환한 데에는 이같은 식민지 하 개방체제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과 대만이 NICs로 발전할 수 있었던 하나의 조건이 됐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또 “광복후 경제가 식민지 시대와 비교해 두드러진 특징은 민족국가가 출현, 산업정책이 전개됐다는 점”이라며 “특히 한국은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뤄져 대만과 거시적 경제 운용 등에서 차이를 초래했다”고 덧붙였다.(김영번기자)

07. 0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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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의 서평을 둘러보다가 어제 지면에서도 지나쳤던(게재는 되었던 것일까?)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미스테리한 것은 아직 어느 온라인서점에서도 이 서평기사의 대상이 떠 있지 않다는 점. 무슨 유령 같은 책이다. 기자가 서평을 작성한 것으로 보아 언론사에는 '뿌려진' 듯하지만 다소 늦게 보내진 탓에 다음주로 서평들이 미뤄지거나 별로 주목을 못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해본다. 한데 주제 자체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쪽이어서 책은 나오는 대로 훑어봐야겠다. 그 책의 타이틀은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시유시, 2007)이다.

원저의 제목은 <자본가 없이 자본주의 만들기(Making Capitalism Without Capitalists)>이며 지난 1999년 버소출판사에서 나왔다(부제는 '사회주의 이후 중부유럽에서의 계급형성과 엘리트 투쟁'이다). 이런 류의 책으로는 좀 오래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게 흠이긴 한데, 책에서 다루는 러시아나 동유럽 경제만 하더라도 2000년 이후에 상당히 변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는 맘에 든다.

한국일보(07. 03. 10)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동유럽의 脫공산주의 다시보기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속속 몰락하자 미국의 정치학자 후쿠야마는 재빨리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가 냉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헤겔-마르크스가 말하던 진화적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이 책의 저자들도 후쿠야마의 판단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진 않다. 대신 그 선정적 구호를 ‘역사의 다양한 종언’이라고 바꾸지 않을까.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본주의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이다. 책은 그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특히 유산 부르주아 층이 빈약한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역이행하면서 밟는 다양한 경로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그 대표적 사례로 동유럽 국가의 변동 과정을 실증 분석한다. 설명에 따르면 사유재산을 가진 계급이 없었던 이들 나라에서 체제 전환을 진두지휘한 것은 교양 부르주아였다.

이들 대부분은 국가사회주의를 공격하던 반체제 지식인이었다. 예상과 달리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귀족 관료는 신체제에서 기존 권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 신세대 관료라 할 수 있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교양 부르주아와 손잡고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등장했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에서 두드러진,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었다. 이 같은 현상의 분석 틀을 마련하고자 저자들은 베버와 브루디외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 전자에선 신분과 계급의 구별을, 후자에선 정치자본 문화자본 경제자본 등을 포괄하는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빌렸다.

이 관점에서 동유럽의 탈공산주의를 들여다보면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역동성이 포착된다. 체제 변동에 뒤쳐질세라 개인들은 앞 다퉈 사회주의적 신분에서 자본주의적 계급으로 정체성을 조정한다. 바꿔 말하면 변화한 환경에 유리한 자본은 늘리고 불리한 것은 버리면서 자본 포트폴리오=아비투스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치열한 적응 과정을 거치며 문화자본을 가진 지식인-기술관료 연합은 정치·사회자본을 갖춘 엘리트 관료를 압도한다. 교양이 권력과 권위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진풍경이 펼쳐진 셈이다.

영미식 모델에 구애받지 않고 각각의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특성을 드러내는 것. 저자들은 이 야심찬 기획을 ‘신고전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으로 대표되는 고전사회학이 19세기 근대자본주의 이행을 분석했다면, 신고전사회학은 20세기 말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설명이다.(이훈성 기자) 

07.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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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12 07:30   좋아요 0 | URL
오옷. 퍼갑니다. 애인이 체코에서 동유럽 역사 공부하고 있는데, 이 책을 체코에서 소개했을지도 모르겠네요. :)

로쟈 2007-03-17 23:18   좋아요 0 | URL
앉으나 서나 애인 생각이십니다.^^ 그나저나 희한하게도 알라딘에는 아직도 입고가 안돼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