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지만 매주 책들은 쏟아지고 그 중 주목할 만한 책들이 10여 권 정도 언론의 리뷰를 탄다(단평까지 포함하면 20-30권쯤 되겠다). 그 중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책들은 물론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여러 가지 여건이 관심을 제약하기 때문이다(그러고도 '책벌레'란 소리를 듣는다!). 금요일자 한겨레의 북리뷰들을 대충 훑어보다가(읽을 시간도 없다!) 이 주의 책으로 혼자서 꼽은 건 앨런 그로스의 <과학의 수사학>(궁리, 2007)이다. 기념비적인 책이 아닐 경우에 내가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의외성'이다. 즉, '예기치 않은 책'에 아무래도 눈길을 주게 되고 <과학의 수사학>은 그런 책이다. 이때 수사학은 물론 '과학 수사'와는 전혀 무관한 '레토릭'을 말한다. 부제대로 하자면, '과학은 어떻게 말하는가'를 다룬 (아마도 드문) 책이다. 원저는 지난 1990년에 출간됐다고 하니까(하버드대출판부에서 나왔다) 나이 좀 먹은 책이다. 관련리뷰를 먼저 읽어두고 언제쯤 구매할/읽어볼 것인지 가늠해본다.  

한겨레(07. 03. 09) 과학도 철학처럼 ‘설득의 산물’

백과사전은 ‘과학’을 “이제까지 아무도 반증을 하지 못한 확고한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한 보편성과 객관성이 인정되는 지식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이런 규정은 “사상이나 감정 따위를 효과적˙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 ‘수사학’으로 분석 가능한 정치적인 것, 사법적인 것, 나아가 철학, 문학비평, 역사 등과는 달리 과학에 절대적 신화나 특권을 부여한다.

<과학의 수사학>(궁리 펴냄)은 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유래의 고전적 정의와 달리 수사학적 분석 대상이 가능하다는 걸 ‘설득’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 앨런 그로스는 과학적 주장들도 단지 ‘설득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과학이 ‘자연의 원초적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지식이 아니며, 문제가 선택되고 결과가 해석되는 과정은, 설득을 통해서만 중요성과 의미가 구축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수사학적이라는 것이다. 수사학적 관점으로는 과학은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다.

뉴턴은 1672년 기존의 관점을 뒤집는 광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데카르트가 <방법론 서설>의 부록에서 ‘백색광이 기본이며 색은 백색광의 변형으로 이차적인 것’이라고 정의한 것을 ‘백색광은 이차적인 것으로, 가시 스펙트럼의 모든 빛들이 합성된 결과’임을 밝힌 논문이다. 그러나 뉴턴은 전통적 관점·방법들과 대립함으로써 ‘설득’에 실패했다. 결정적 실험의 설득 능력은 실험을 재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음에도 , 뉴턴의 논문은 결정적 실험에 대한 어떤 그림도, 분명한 실험방법들도 결여돼 있었다. 30여년 지나 1704년 뉴턴은 <광학>을 출간해 2차 시도를 한다. 뉴턴은 “데카르트가 한 일은…훌륭한 발걸음이었다.…만일 내가 더 멀리 내려본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라며 <광학>에 역사적 연속과 논리적 불가피성이라는 인상을 부여했다. 또 세밀한 실험을 거듭해 ‘압도적 현존감’을 창조했다. 그는 <광학>의 말미에 수사학적 질문을 쏟아내 실험에 의해 확실해진 것과 불확실한 채로 남은 것을 구분함으로써 질문 이전에 제시된 결론들의 ‘과학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로스에게 뉴턴의 <광학>은 ‘수사적 개종’을 통해 성취된 ‘수사학의 걸작’이다.

저자는 과학에는 종종 잘 숨겨져 있지만 수사학이 내포돼 있으며, 정치연설과 학술논쟁, 과학논증의 영역에는 서로 닮은 꼴(유비)이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진화생물학에서 새로운 ‘종’의 발견은 자연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의 구분과 분류에 대한 설득을 통해 ‘창조’됨을 보여주고 있다. 또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왓슨의 회고담 <이중나선>이 담고 있는 설화 서사구조와 왓슨과 크릭의 논문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DNA 구조의 실재는 설득을 위해 사려분별 있게 사용된 말과 수사, 그리고 그림의 결과들”이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놓는다.

그로스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이성의 개종’을 요구한 수사학적 혁명으로 해석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천문학이 이성의 혁명이기 위해서는 정밀관측과 틀림없이 일치하고 정확한 물리학에 부합하는, 수학적으로 깐깐한 체계가 돼야 했지만, 이런 이상적 설명은 그가 죽고나서 1세기 이상이 지난 뒤에야 가능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가 증거와 논증이 아니라 ‘선전, 감정, 임시방편의 가설, 선입견에 대한 호소’ 등 비이성적 수단들에 의해 지지됐음을 저자는 당시 텍스트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가 과학과 수사학을 각각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융합을 들고 있음은 과학저술의 전범인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뉴턴의 <프린키피아> <광학>, 왓슨의 <이중나선>, 아인슈타인의 논문들을 수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저자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이근영 기자)

07. 03. 09.

P.S. 최근 '수사학' 붐이 얼마간 조성되고 있지만, <과학의 수사학>은 그러한 붐에도 한몫 낄만 하겠다. 책은 궁리출판사에서 내는 '궁리하는 과학'의 두번째 책인데, 왓슨의 <이중나선>(궁리, 2006)이 첫번째 책이었고 이번에 같이 나온 듯한 로저 트리그의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궁리, 2007)이 세번째 책이다. 트리그의 책에 대한 리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트리그의 책들은 몇 권 더 소개돼 있다), 내게 더 친숙한 책은 <과학의 수사학>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이다. 그건 예전에 사회생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책의 원서를 모셔둔 지가 벌써 오래됐기 때문이다. 'The Shaping of Man'(1982)이 그 원서이고 부제는 '사회생물학의 철학적 측면'이다(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저자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이다). 186쪽의 얇은 책인데, 국역본은 333쪽. 책이 폼나게 나오긴 했으나 이런 식의 분량 '인플레'는 슬슬 염증이 나기 시작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7-03-09 13:02   좋아요 0 | URL
벌써 꽤 되었는데, 제 꿈에 로쟈님이 나타나셔서는 "그런데 '이기적 유전자'는 읽으셨는지..?" 라고 물으시는 거에요. 제가 "아뇨, 아직..."이라고 대답했는데도 그 책에 대한 얘기를 계속 하시더라구요.
책을 사 놓긴 했는데 계속 미뤄두어서, 드디어 읽을 때가 된 것인가 생각했더랍니다. 그치만 여전히 미뤄놓고 있네요. -_-;;

로쟈 2007-03-09 18:14   좋아요 0 | URL
제가 어쩐지 밤낮으로 피곤하다 싶었습니다.^^; 때가 되면 읽으시겠지요. 읽고 안 읽는 것도 어쩌면 다 '확장된 표현형'의 힘입니다...

소경 2007-03-10 17:40   좋아요 0 | URL
<문화 기호학>에서 잠시 다룬 내용이 나오는 군요. 사실 이에 단지 유추로 이해하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언젠가 읽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처음으로 접한 기호학책이라 어려움은 있지만 재미가 쏠쏠합니다. 대신 책을 읽자니 시간을 솔찬히 지났지만 ... 페이지수는 몇장 안되는 군요. 과학의 수사학이라~

로쟈 2007-03-10 20:08   좋아요 0 | URL
<과학의 수사학>이 분량은 좀 되는데요.^^
 

이달에 가장 고대하는 책 중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생각의나무, 2007)이다. 역자는 역시나 김종건 교수인데, 상품 소개가 뜨지 않아서 책이 범우사판을 한 권짜리로 다시 내는 것인지 개정된 내용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달라진 내용이 없다면 일종의 '트릭'이다). 제목이 <율리시즈>에서 <율리시스>로 바뀐 이유도 잘 모르겠고(그냥 '차별화 전략'인가?).

 

 

 

 

나로선 범우사판의 <율리시즈>를 모두 갖고 있고, 역자의 <알기 쉽게 풀이한 율리시즈>(범우사, 1997)도 챙겨놓은 지 오래이다. 다만 이 세기의 문제작을 완독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간혹 여름방학때면 조이스학회에 주관하는 '율리시즈 강독' 강좌가 개최되곤 하는데, 언젠가부터 한번 들어본다고 마음만 먹다가 두어 차례 흘려보내고 말았다.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던 것인데, 덕분에 2종류 갖고 있는 <율리시즈>의 원서도 책장에서 자고 있다. 게다가 범우사판 <율리시즈>와 관련서들이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라 이번에 나온 책이 개정번역판이라면 새로 구입해볼 생각을 품어본다. 그런 생각의 와중에 문득 '준비' 같은 게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이 페이퍼를 쓴다.

 

 

 

 

먼저 조이스에 관한 책들을 챙겨둘 필요가 있겠다. 리처드 앨먼의 평전 <조이스1,2>(책세상, 2002)가 일단 챙겨두어야 하는 소장도서(조이스 컬렉션을 마저 채우려면 돈푼깨나 깨지겠다). 나는 이 두툼한 평전 대신에 얄팍한 조이스 두 권, 곧 데이비드 노리스의 만화 <조이스>(김영사, 2006)와 프랭크 스타터의 <30분에 읽는 제임스 조이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을 챙겨두고 있는데, 상황을 봐서 용적을 늘려야겠다(사실 문제는 책값이 아니라 꽂아놓을 공간이다). 거기에 국내서를 보태자면 나영균 교수의 <제임스 조이스>(정우사, 1999), 김학동 교수의 <제임스 조이스>(건국대출판부, 2001)를 꼽아볼 수 있겠다. 두 권 모두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들이다.  

<더블린 사람들>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거쳐서 <율리시즈>에 이르는 조이스의 여정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여러 종의 번역서들이 나와 있다). 다만 거기에 덧붙여 횡적으로 읽어야 할 책들도 있다. 러시아작가 나보코프가 세계 4대소설로 <율리시즈>와 함께 꼽은 책들인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경우 국내 유일의 완역본(국일미디어, 1998)이 현재는 절판중이지만 같이 읽어두어야 할 고전이다. 거기에 카프카의 <변신>, 그리고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문학과지성사, 2006)까지가 그 네 권의 소설들이다(카프카의 경우엔 <변신>을 꼽았는지 아니면 다른 작품을 꼽았는지 헷갈리긴 하다). 모두 20세기 전반기에 각 언어권별로 세게문학이 산출해낸 걸작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종적으로 읽어야 할 책은 물론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06)부터이다. 이 방대한 고전도 읽어내려면 상당한 견적을 요한다. 영역본도 한두 종 정도는 갖춰놓는 게 좋겠고(인터넷에 떠 있긴 하지만 편의상) 해설서도 챙겨두도록 하자.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솔출판사, 2004)나 강대진의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 2007)가 적절한 길잡이가 돼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아우구스테 레히너란 오스트리아 작가가 다시 쓴 <오디세이아>(문학과지성사, 2006)도 번역/소개돼 있다. "그리스 서사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현대의 독자들을 위해 새롭게 쓴 작품. 원전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가치와 의의를 그대로 전하는 동시에 읽는 재미를 준다. 지도와 등장인물 소개 글을 수록해 장대한 텍스트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짚어준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명화도 함께 실었다"고 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책이 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 문학사의 모더니즘에 대한 도발적인 재평가/재서술을 시도하고 있는 이 야심만만한 책의 한 장이 '<율리시즈>와 20세기'에 바쳐져 있다.

Улисс

개인적으론 지난 2004년 모스크바 체류시 러시아어본을 구하고자 했었던, 하지만 끝내 구하지 못한 책이 세 권 있는데, <율리시즈>는 그 중 하나이다(<모비딕>과 <특성없는 남자>가 다른 두 권이다). <율리시즈>의 경우는 러시아어본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너무 고가였다(기억에는 3만원이 넘는 액수였다). 

Улисс

그러는 사이에 작년에 보다 대중적인 판본의 새 번역서가 나왔다(역자가 같은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감스러운 건 인터넷서점에서 품절중이라는 것. 내가 <율리시즈>를 읽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손대볼 수 있는 건 이 러시아어본을 손에 넣는 일이다...

07. 03. 04.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꿀라 2007-03-04 03:08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퍼갑니다.

류스케 2007-03-04 10:28   좋아요 0 | URL
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신 분이군요 ^^ 추천하고 갑니다~

biosculp 2007-03-04 13:31   좋아요 0 | URL
지금 강대진의 고전은 서시시다 를 읽고 있는데 글이 간결하면서 번역투가 아니라 머리복잡하게 하지 않고 뚜렷이 읽히게 만듭니다. 더불어 고전읽기의 해법이라는 책머리의 제목처럼 고전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니(들어갈지는 들어가야 하니 아직은?) 최근 읽은 책중 최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근데 혹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위하여라는 페이퍼를 쓰신적은 있나요.
열린책들에서 새로운 판본을 210질 낸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오면
달려들어볼 계획인데요.

로쟈 2007-03-04 14:42   좋아요 0 | URL
두분의 추천,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전은 서사시다>는 서점에서 보고 바로 손에 들 뻔한 책인데, 책값을 보고서 다시 내려놓은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책들임에도 많이 팔릴 거라고 생각들을 안 하는 것인지(실제로 많이 안 팔리는 것인지) 저자의 책들이 주로 고가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선 다른 페이퍼들을 좀 쓴 게 있습니다. '새로운 판본'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는데, 210질 한정본인가요?..

biosculp 2007-03-04 16:10   좋아요 0 | URL
새로운 판본이 아니라 겉표지가 새로운것입니다. 한정본이더군요.아직 나오지는 않고 출판사에서 가격고민중인것같더군요.

로쟈 2007-03-04 19: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이미 전집 초판을 갖고 있는 데다가 여러 권의 '빨간책'을 소장하고 있어서 '고민'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2007-03-05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05 13:38   좋아요 0 | URL
**님/ 햇빛비둘기님의 정보를 참고하시길...
햇빛비둘기님/ 목돈 들어가게 생겼네요.^^;

로쟈 2007-03-05 15:35   좋아요 0 | URL
주석 말씀하시는 거지요? 저도 갖고 있습니다. 다만 박스에 있을 뿐입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 2007-03-07 06:52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조만간 '율리시즈'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마침 이 책 발간 소식을 듣고 살까,말까 고민하던 차에 로쟈님 페이퍼 보니 구매의욕이 불끈 솟아 오릅니다. 아주 알찬 페이퍼네요.^^ 추천 꾸욱!!

로쟈 2007-03-07 23:04   좋아요 0 | URL
다소님/ 이 카테고리가 '로쟈의 낚시'랍니다.^^
**님/ 메일 드렸습니다. 감사.^^

2007-03-13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14 23:04   좋아요 0 | URL
**님/ 그러셨군요. 강선생과는 직접 면식은 없지만 한다리 건너서 예전에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잔혹한 책읽기>가 나오기 전에). 저에 대한 '온갖 소문'은 뜻밖인데 아직 숨어계신 분들이 다 드러나지 않은 탓이란 생각이 드네요...
 

지난주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도널드 시먼스의 <섹슈얼리티의 진화>(한길사, 2007)이다. 학술명저번역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는데, 지난 1979년에 출간된 원저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진화심리학 분야의 '고전'으로 살아남은 이유/비결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데이비드 버스의 책들이나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5)를 비롯해서 이후에도 이 분야의 '명저들'은 많이 출간/소개됐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저자의 이름도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책소개도 이런 점을 의식했는지 아래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출판된 지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에 따라 진화심리학에서 그 당시 이뤄졌던 논의와 현재 진행되는 논의가 다소 다를 수도 있으나, <섹슈얼리티의 진화>는 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논의의 이정표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있는 책이다. 관련 분야의 다양한 논의를 심화시키는 데 이바지한 바가 크며, 특히 국내의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 성 심리학, 그리고 여성학적 논의의 성숙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성매매 특별법' 등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요컨대, 이정표가 된 책이라는 것. 분량도 560쪽(원저는 368쪽)에 이르기에 부피에 대한 바람도 채워준다. 장서용으로 좋다는 얘기이다. 다윈의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도 아직 꽂아놓고 있지 못한 형편인지라 소장도서로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하지만, 리뷰 정도는 미리 읽어두도록 한다.  

 

문화일보(07. 03. 02) 남성의 바람기는 ‘유전자의 명령’

여성을 위한 ‘플레이 보이’지를 창간하려는 사람에게 주는 충 고. 첫째, 음경이 발기한 남성의 사진이 음경이 축 늘어진 남성 의 사진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둘째, 남성의 단독 사진보다는 벌거벗은 남성과 함께 있는 여성의 사진이 좀더 효과적이다. 셋째, 남녀가 서로 어루만지는 사진이 특히 효과적이다.

이 같은 충고는 여성의 성(性)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여성의 벗은 모습에 시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성과 달리 상당수 의 여성들은 남성의 누드사진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기한 남성의 사진이 그렇지 않은 남성 사 진에 비해 효과적인 것은 보다 실질적인 성 관계를 시사하기 때 문이다. (이는 여성을 위한 포르노 잡지의 입지가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포르노토피아(pornotopia)에선 합당한 맥락에서의 성적 현실 보다는 환상적인 상황을 설정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은 남성을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데서 오는 자극보다 는 사진에 같이 나오는 여성에 대해 주관적인 동일화를 함으로써 더욱 자극받는다. 이는 세번째 충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단순한 시각적 자극보다는 사진에 자신을 투사해보기를 여성은 더 선호한다. 사진에 자신과 같은 성인 여성이 나오는 것은 경쟁과 질투심 같은 정서 또한 촉발할 수 있다.



책은, 이 같은 인간의 성 특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고찰을 집대성한 고전이다. 진화심리학에선 인간의 진화사를 통해 보통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심리적 특성과 행동을 설명한다. 저자는 인간의 성적 행동과 태도, 감정에서 남녀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차이가 생래적이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똑같은 환경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남녀 사이에는 전형적인 성 특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류의 진화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성 특성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이성을 두고 벌어지는 동성간의 경쟁은 일반적으로 여성들 보다 남성들 사이에서 훨씬 치열하다. 둘째, 남성은 일부다처적인 성향이 농후하지만 여성은 이런 측면에서 비교적 유연성이 있다. 셋째, 배우자에 대한 성적 질투심은 남성이 더욱 강렬하다. 넷째, 육체적 특징 특히 젊음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에 비해 남성의 육체적 특징(젊음 등)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작다. 다섯째, 여성에 비해 남성은 훨씬 많은 수의 성 파트너를 갖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여섯째, 성은 여성이 남성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또는 호의로 간주되며 그 반대는 아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같은 남녀의 성적 특성이 유전자의 보존과 후대 전달을 위해 모든 생물이 프로그램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유전자의 후대 전달을 위해 남녀간 성적 특성과 행동에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남성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의 수에 제한이 있는 여성은 다수의 남성과 무작위로 관계를 맺기 보다는 우수한 유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 따라서 남녀는 각기 다른 성행동 전략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사족 한마디. 남성에게 다수의 성 파트너를 얻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특성 이 있다는 ‘사실(fact)’에서 ‘가치(value)를 도출해내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자연’과 ‘선(善)’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은 진화론적 원인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김영번기자)

07. 03. 03 - 04.

P.S. 저자인 도널드 시먼스는 "캘리포니아 대학 인류학과 교수"로서 "인간의 성 특성의 진화론적 해명에 관심을 가지고 줄곧 연구해왔으며, 성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탐구를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소개돼 있다.

"지은 책으로는 <놀이와 공격성: 붉은털원숭이에 대한 연구>, <섹슈얼리티의 진화>, <전사 연인들: 성애적 허구, 진화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 등이 있다"고 하는데, 마지막에 언급된 <전사 연인들>이 최근에 나온 <다윈의 대답> 시리즈의 한권이다. 마저 소개되면 좋을 듯하다...

P.S.2. 섹슈얼리티의 진화심리학의 연장선상에서 '강간의 진화심리학'에 대한 소개/논의를 옮겨놓는다.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의 리뷰팀이 <섹슈얼리티의 진화>의 역자이기도 한 김성한 교수의 연구논문을 요약정리해놓고 있다.

담비(07. 03. 03) 진화심리학을 오해하는 페미니즘에 맞서

강간 같은 흉폭한 강력범죄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는 그 원인에 대한 설명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설명의 유파가 존재한다. 피해 여성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강간은 그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간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주로 페미니스트들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이 그 주도권을 잡아왔다. 강간을 사회문제화하고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 기준을 제시해온 그들의 공력은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양 측이 해석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근 '철학' 제89집에 발표된 김성한 서울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의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 비판은 타당한가?'는 진화심리학적 설명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분류하고 그 각각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먼저 김 연구원은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불필요한 질문처럼 여겨지지만 왜 남성이 강간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까부터 보자. 이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의 생물학적 성 특성의 차이 때문으로 "여성이 상대를 가림에 비해 남성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단순히 교접만으로도 자손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랑없이, 상대와 비교적 무관하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시각적 자극 등 비교적 단순한 기작을 통해 성적 욕구가 일어난다. 반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 등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상대를 잘못 고를 경우 자칫 자손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 선택에 신중하다. 이 때문에 성관계와 관련한 수요 공급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남성들이 성적 파트너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가 성매매의 사회적 승인여부와 관계없이, 나이와 사회경제적 지위 또는 정신병의 유무와 관계없이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들마저도 강간범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다. 남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어떤 설문조사에선 잡히지 않으면 강간을 범하겠는가의 질문에 35%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건 이런 주장을 보강해주는 자료다.

강간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왜 강간의 고통이 여타의 폭력 등에 비해 더 심각한 상처를 안겨주나. 강간 희생자인 여성은 육체적 상처를 넘어서, 아이출산 시기와 상황, 그리고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가 될 남성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하며, 이로 인해 번식적 성공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기 때문이라는 게 그 설명이다. 심지어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런 가정도 해봤다고 한다. 만약 여성들에게 번식적 성공의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교육을 시키면 어떻게 될까. 물론 터무니 없는 추론이다. "여성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강간당하는 경험을 원하게 될만큼 유연한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결론.

그렇다고 진화심리학이 강간을 옹호하거나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레이(R. Gray) 같은 학자는 "진화론적 설명은 우리의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유전자에 프로그램화돼 있으며, 그래서 그 행위가 자연스럽고 고정적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라고 비판적 입장을 보이지만, 진화심리학은 남성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야기하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을 타고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즉, '여러 여성과의 성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곧 강간에의 욕구는 아니라는 것. 이런 맥락에서 유전자 결정론자로 비난을 받고 있는 도킨스조차 "우리는 유전자에 대항할 힘이 있으며,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이기적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적 지배에 반역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에드워드 윌슨도 인간의 공격성은 유전적 성향과 사회가 처한 환경, 그리고 그 사회의 역사라는 세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말한바 있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결정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구했다'라는 의미의 결정이 아니라, '직각적으로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감정이 우리에게 육박해 들어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라고 김 교수는 되풀이 설명한다.

그럼에도 진화심리학자들은 학습이나 환경적 요인들이 통제력을 발휘해 행동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일부 성향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호랑이의 맹수적 본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진화심리학자들은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김 교수는 논문에서 이들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자연적인 것'이라는 등식은 받아들이지만, '자연적인 것=옳은 것'이라는 등식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연적인 경향을 인정하는 게 곧 옳음을 주장하는 게 아니며, 이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화심리학에 대한 기타 사회과학자들의 구체적인 반박을 살펴보자. 먼저 진화심리학의 강간에 대한 설명은 꼭 필요하지 않은 군더더기라는 관점이다. 니네들이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된다는 것으로 탕-말티네즈(Z. Tang-Martinez) 같은 이는 "강간이 생물학적 토대를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페미니스트 사회심리학 분석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페미니스트 사회심리학이란 남성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화를 통해 여성을 통제, 지배하려는 욕구를 습득하게 되고, 이것이 고착 강화되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나타난다는 해석으로, 강간이 일종의 정치적 행위라는 주장을 표방하는 입장을 지칭한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김 교수의 주장처럼 동일한 현상에 대해 근인(proximate cause)적 설명과 궁극인(ultimate cause)적 설명을 모두 추구하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는 동물의 행동을 신경, 호르몬, 인지과정, 유전자, 조건화, 감정 등을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이들 중 어떤 한가지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강간에서 생물학적인 성 특성을 간과한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심리학자들은 강간이 성범죄가 아니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 강간범들의 증언을 활용하기도 한다. 강간범들은 붙잡히고 나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 "불만, 분노, 소외감" 등을 대기도 하는데, 이를 근거로 강간을 힘, 지배, 굴욕, 착취, 가학성에 관한 폭력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 강간범들이 "더 이상 내가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성적 충동을 최소화해서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사실상 크고, 일부 조사에서 강간범들은 자신의 실제 동기를 말하기보다 연구자들이 원하는 설명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할 때의 폭력사용을 이유로 강간을 폭력으로 이해하려는 경우도 비판하고 있다. 강도가 피해자의 물건을 강탈할 때 강도의 목적이 물건이지 폭력이 아닌 것처럼, 강간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손힐(R. Thornhill) 등의 경험적 연구가 있는데, 강간범의 폭력을 도구적 완력과 과도한 완력으로 나눌 때 대부분 전자에 속한다는 연구가 그것이다. 또한 강간희생자가 살해당하는 경우도, 전체 살인사건에 비해 극히 일부분이고, 면식범의 소행일 경우 사건은폐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다.

또한 일부는 전쟁중에 강간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근거로 강간이 성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브라운밀러 같은 이는 전쟁 중에 남자들이 떼거지로 다니면서 여자의 나이를 가리지 않고 집단윤간을 행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이나 지배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데 이것도 생각해보면 성적 욕구의 충족을 목적으로 일어난 강간으로서, 다만 전쟁중에는 처벌받을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지기 때문에 강간빈도가 높아지고 행위의 수준도 강화된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아무튼 강간의 원인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설명은 기존의 사회심리학적 설명의 부족한 부분을 잘 메워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김 교수의 논문은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사회심리학적 설명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감이 없지 않다. 때문에 이것은 논쟁을 통해 가다듬어 나가야 할 주제인 듯하다.(리뷰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주 언론의 북리뷰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은 프랑스 사회학자 이브 드잘레이와 미국의 법학자 브라이언트 가스가 공저한 <궁정전투의 국제화>(그린비, 2007)이다. 며칠전 한 지인으로부터 책을 얻었는데, 제목은 생소하지만 리뷰기사를 하나만 읽어봐도 무슨 내용인지 다 짐작된다. '궁정전투'란 말이 "국가권력을 둘러싼 지식투쟁의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새로울 것도 없고 남의 나라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의의는 그러한 '상식'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는 것(그러니까 이런 건 '머리'로 쓰는 책이 아니다). 경향신문의 리뷰기사를 '조감도' 삼아 읽어두기로 한다. 보다 자세한 리뷰는 한겨레의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92298.html)

한국일보(07. 02. 24) 美유학파들이 재생산하는 '세계의 미국화'

정치학 강사 A씨는 어느 술자리에서 끝내 본심을 들키고 말았다. “내가 박사를, 프랑스가 아니고 미국에서 했어야 했는데…”라는 푸념과 함께.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즐비한 강단에서 몇 년째 자리를 못 잡고 강사직을 전전해야 하는 현실에서 ‘소수자’의 비애를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가라면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jacket image]

‘세계의 미국화’를 논하는 게 새삼스럽지 않은 요즘이다. 여타 국가의 제도와 인적 구성이 미국적인 것을 표준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학문 체계와 지식 엘리트 계층도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이브 드잘레이는 미국의 학문을 수용한 유학파 지식인이 자국에서 특권 엘리트 계층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남미 사례를 통해 자세히 보여준다.

2002년 별세한 사회학의 거장 피에르 부르디외를 사사한 드잘레이는 지배 계급 자체보다는 위계가 발생하는 원칙에 주목했던 스승의 지론을 계승, 거시적 논의보다 미시적 관찰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두 공저자는 연구 대상국의 정부 대학 로펌 싱크 탱크에 소속된 주류 지식인을 300명 넘게 인터뷰하는 공을 들였다.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파가 길러낸 칠레의 ‘시카고 보이스’를 살펴보자. 1950년대까지 국내에서 열세를 보이던 시카고 학파는 공화당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학문 수출에 나섰다. 이들은 국제 개발처와 거대 재단들을 활용, 칠레 산티아고 가톨릭대학에 투자했다. 자연스레 이 대학 경제학도들은 시카고대학으로 건너가 하이에크, 프리드먼 등이 기초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며 세력을 키운 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정권과 손을 잡았다. 국가 개입 축소, 민영화 등 정책 아젠다를 생산하며 이들은 옛 엘리트들을 붕괴시키려는 군부 독재 정권에 기여했고 스스로 특권 계층의 공석에 올랐다. 1980년대 외채 위기 이후 브라질에 불어 닥친 탈규제·투자 개방 바람도 칠레 사례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경제학과 더불어 가장 잘 팔리는 미국의 학문 체계는 법률이다. 미국 법률의 장이 지닌 특징은 법률가들이 대형 로펌 및 대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시민 운동이나 무료 법률상담 같은 공익적 활동을 중시하며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는 점이다. 이를 습득한 일군의 남미 법률가들은 1970, 80년대 비민주적 자국 정부에 맞서 국제사면위원회와 손잡고 국제인권법을 무기로 삼는 등 미국식 인권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군부 독재가 속속 무너지면서 헤게모니를 쥐게 된 이 엘리트 법률가들은 금세 표변하며 보수화됐다. 여기에 더해 외채 위기를 계기로 남미에 신자유주의 체제가 급속히 도입되자 미국식 경제 관련법에 정통한 법률가들 역시 국가 권력의 한 축으로 부상했다.

저자 드랄레이는 한국판 서문을 통해 자신의 논의가 아시아에도 유효하리라 조심스레 예상한다. 일례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과 결탁한 ‘버클리 마피아’의 출세 경로는 칠레의 ‘시카고 보이스’의 경우가 고스란히 겹친다는 것. 저자들은 전문 지식인들이 국가 권력을 놓고 벌이는 투쟁이 옛 궁정 귀족들의 정치 다툼과 닮았다며 제목에 ‘궁정 전투’(palace wars)라는 단어를 넣었다. 한국의 현대 정치사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분석틀이다.(이훈성 기자) 

07. 02. 24.

P.S. 찾아보니 두 공저자가 <궁정전투의 국제화> 이전에 쓴 전작으로 <미덕의 거래(Dealing in Virtue)>(1996)란 책이 있다. '국제 무역 중재와 초국가적 법질서의 구축(International Commercial Arbitration and the Construction of a Transnational Legal Order)'이 부제인데, 얼추 책의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아래는 그 내용소개이다. <궁정전투의 국제화>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마저 번역되면 좋겠다(로펌들은 싫어하려나?).

In recent years, international business disputes have increasingly been resolved through private arbitration. The first book of its kind, Dealing in Virtue details how an elite group of transnational lawyers constructed an autonomous legal field that has given them a central and powerful role in the global marketplace.

Building on Pierre Bourdieu's structural approach, the authors show how an informal, settlement-oriented system became formalized and litigious. Integral to this new legal field is the intense personal competition among arbitrators to gain a reputation for virtue, hoping to be selected for arbitration panels. Since arbitration fees have skyrocketed, this is a high-stakes game.

Using multiple examples, Dezalay and Garth explore how international developments can transform domestic methods for handling disputes and analyze the changing prospects for international business dispute resolution given the growing presence of such international market and regulatory institutions as the EEC, the WTO, and NAFTA.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2-24 23:13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한겨레의 '18도'를 편의점에서 사들고 와서 훑어보다가 가장 호기심을 갖게 된 책은 '다윈의 대답'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시리즈이다. 가격이 2만 8500원이라고 돼 있어서 꽤 두툼한 책인 줄 알았더니 4권 합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각 권은 130쪽 안팎 분량에 정가 7500원짜리 책이다. 그러니까 문고본 컨셉에 해당한다.

 

 

 

 

예일대출판부에서 나온 시리즈라고 해서 찾아보니까 'Dawinism Tdoay'라는 원 시리즈 제목이 풍기는 인상과는 약간 어긋나게 지난 1998-9년부터 나온 책들이다(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시리즈이다!). 한겨레의 간략한 소개에 따르면, "예일대 출판부에서 펴내 화제를 부른 ‘다윈이즘 투데이 시리즈’의 번역본 <다윈의 대답>(이음). 편집자들은 ‘사회과학적 논제의 패러다임을 진화생물학으로 뒤집는다’는 도전적 표제를 내걸었다.(...) 실제로 책은 인문·사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충돌하는 현대사회의 쟁점들에 대한 다윈주의자들의 도발적 ‘대답’을 담고 있다."

"‘다윈주의 자체는 좌도 우도 아니다’며 기존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고 나선 1권의 저자 피터 싱어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협동”을 인간의 본성이라 주장한다.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2권), ‘남자 일과 여자 일은 따로 있는가?’(3권), ‘낳은 정과 기른 정은 다른가?’(4권)로 이어지는 책들은 제목에서 이미 ‘한 판 벌어질 듯한’ 흥미를 자극한다. 이를테면 “여성의 성공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은 고의적인 남녀차별 장치가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된 본질적 성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여성주의자들을 도발한다."

이만한 시놉시스라면 좀더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란 아쉬움은 든다. 원서가 80여쪽 정도의 분량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보다는 좀더 두툼했으면 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번역본 분량으론 한 200쪽 가량). 물론 이런 푸념은 먹어보기도 전에 양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번역본의 첫 권을 장식하고 있는 건 피터 싱어의 책으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를 부제로 단 <다윈의 대답1>이다. 원제는 '다윈주의 좌파: 정치, 진화 그리고 협동'으로 돼 있다. '프로이트 좌파'와 계열체를 이루는 원제 자체가 내겐 더 매력적인데 요즘 '좌파'란 말이 별로 호감을 주지 않는 국내 정세를 반영한 듯도 하다. 그래도 목차만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마지막 제안으로 그가 덧붙이고 있는 게 '오늘날 다윈주의 좌파의 숙제'인 것이다.

 

 

 

 

시리즈의 첫번째 권으로 출간됐지만 원저 자체는 2000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영어본 시리즈의 '첫권'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다위니즘1>의 자리를 차지한 데에는 물론 저자인 피터 싱어의 지명도가 고려됐을 법하다(기억에 싱어는 호주 철학자이다). 알다시피 저명한 윤리학자인 싱어의 책들은 국내에 (거의 놀라울 만큼) 많이/자주 번역돼 있기 때문이다(지명도에 비하면 베스트셀러 학자라고도 할 수 없는데, 좀 기이한 일이다). <다윈의 대답>을 제외하더라도 최근 2년간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5권이나 된다. '철학 가판대의 숨겨진 베스트 싱어'라 할 만하다.

나머지 2, 3, 4권의 저자는 모두 생소하며 (알라딘에는) 목차 또한 떠 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겠다. 대신에 나로 하여금 다윈이즘에 입문하도록 해준 도킨스의 신간이나 덧붙이도록 한다. 작년에 나온 책 <신이라는 망상>이 그의 최신간이다(http://en.wikipedia.org/wiki/The_God_Delusion). 제목 그대로 종교(유신론)에 대한 한 다윈주의자의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종교계와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치면 도킨스도 도올 급인 듯하다). 그러한 도킨스의 '무신론'을 유신론적 다윈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한 책도 <도킨스의 신>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다(http://en.wikipedia.org/wiki/Dawkins'_God:_Genes,_Memes,_and_the_Meaning_of_Life). 얼른얼른 번역되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07. 02. 23.

P.S. 그러고 보니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아래의 책도 아직 나오지 않았군. 책장에만 꽂아두기엔 좀 아쉽다. 번역본이 나와야, 멍석이 깔려야 떠들어볼 수 있을 텐데...

P.S.2. 고대하던 책이 드디어 출간됐다. <리처드 도킨스: 우리의 사고를 바꾼 과학자>(을유문화사, 2007). <이기적 유전자>를 낸 출판사에서 그래도 '책임감'을 갖고 출간한 듯하여 미덥다.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이기적 유전자>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책.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로서, 합리주의자로서, 작가이자 대중 지식인으로서 활동하면서 사회에 미친 다방면의 영향들을 살펴보고 있다. 과거 도킨스의 대학원생이었고 지금은 생물학자들인 앨런 그래펀과 마크 리들리가 엮은 이 책에는 리처드 도킨스를 깊이 분석하거나 그와의 개인적인 일화를 회상하는 과학자, 철학자, 저술가의 글들이 실려 있다."

거기에 보태는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 "내게 가장 심오한 과학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였다." 얼른 원서와 나란히 꽂아두어야겠다...

07. 03. 28.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매 2007-02-23 13:13   좋아요 0 | URL
피터 싱어의 책 중 <전쟁 대행 주식회사>는 다른 Singer의 책인데요^^;

로쟈 2007-02-23 13:17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언젠가 싱어가 둘 있다는 건 확인해놓고 깜박했네요.^^;

2007-02-23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3 13:42   좋아요 0 | URL
**님/ 제가 '개봉박두'라고 해도 되겠군요.^^

자꾸때리다 2007-02-23 23:17   좋아요 0 | URL
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의 성공회 역사신학자... 물리학도 출신... 전 별로 안 좋아하지만 대단한 인물임은 맞는 것 같음...근데 맥그래스가 유신론적 다윈주의라는 이야기는 첨 듣는 이야기삼... 이 사람은 지적 설계 운동하고 맥이 닿아 있는 사람이라 하워드 반틸 류의 유신론적 진화론은 별로 안 좋아할텐데...(아주)

로쟈 2007-02-23 23:29   좋아요 0 | URL
맥그레스에 대한 진술은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댄 건 "Alister E. McGrath is one of the world's leading theologians, with a doctorate in the sciences." 같은 소개구절들이었기 때문에요...

2007-02-24 0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8:39   좋아요 0 | URL
**님/ 축하드립니다. 정신 없으실 텐데, 내주면 곧 강의부터 하시겠네요(보통 책도 오기 전에 학기가 시작하죠?^^). 싱어와는 나름의 인연이 계시군요. 푸코에 대한 소개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007-02-24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9:02   좋아요 0 | URL
**님/ 그 기사는 몇 달째 걸려있어서 남세스럽게 하더군요.^^;

미생지신 2007-02-25 17:43   좋아요 0 | URL
한겨레의 18도를 편의점에서 사 오셨다는 말씀은 18도만 따로 판다는 말씀인지 금요일자 한겨레를 사셨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편의점에 잘 안 가서...ㅡㅡ.

로쟈 2007-02-25 18:13   좋아요 0 | URL
따로 팔리가 있겠습니까?^^ 주된 목적이 '18도'에 있다 보니 그렇게 적었네요...

자꾸때리다 2007-03-19 11:57   좋아요 0 | URL
아 잘못 알았습니다. 맥그래스는 물리학도가 아니라 분자생물학도 출신이군요. 22세 옥스퍼드 분자생물학 박사 24세 옥스퍼드 신학 박사.

자꾸때리다 2007-05-10 23:27   좋아요 0 | URL
아 죄송합니다. 맥그래스 유신론적 진화론자 맞습니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