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출간된 책 중에 <기억 - 제3제국의 중심에 서서>(마티, 2007)가 '리콜'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접했는데(작년말에는 그린비출판사가 <자본주의 역사강의>를 리콜한 바 있다), 내일자 한국일보에 자초지종에 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기에 옮겨온다. 거의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가격 또한 상당해서 감히 손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책이었다. 그런 만큼 구입자들에게 '의미있는 책'이었을 텐데, 출판사측에서는 이런 점도 고려한 듯하다. 가장 바람직한 건 물론 한번에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내는 것이지만, 차선의 방책은 책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 '책임'을 지는 태도이겠다. 신뢰할 수 없는 책들을 내고선 입 닦는 태도가 가장 나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알고 보니 '마티'는 1인 출판사인데,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손해를 감수한 대표의 결단에 격려를 보낸다(사실 '30여 개의 오자'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출판사들 적지 않다).      

한국일보(07. 01. 31) ‘마티’ 정희경 사장 “오자 30여개… 다시 찍기로"

정희경(30)씨는 <마티>라는 1인 출판사의 사장이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젊은 출판사 대표이고, 마티는, 1인 출판사로는 유일하게 인문서적만 내는 곳이다. 그는 2005년 4월 출판 등록한 이래 지금껏 17종의 책을 냈고, 그 책들을 찾는 이들이 적으나마 꾸준히 있고, 타산 앞세워 단 한 권도 절판하지 않았다는 점을 자랑스러워 한다(*출간된 지 2-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절판된 책들 적지 않다).

가장 최근에 낸 책이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을 지낸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 서서>(957쪽ㆍ3만7,000원)이다. 그런데, 출간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이 책을 그 스스로 절판 시켰다. “오자가 30여 개나 돼 독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수정판을 찍어 구매자에게 다시 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여유가 있나 보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돈 안 되는 인문서만 고집하는 것도 그렇고, 이번 결정도 무모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땐 ‘땅이 좀 있어요’라고 말하고 웃어줘요. 문을 닫네 마네 하는 판인데 말이죠.”(*실제로 땅 밑천으로 책장사하는 출판사들이 많다고 한다.) 

-그 정도로 손실이 큰가.

“들인(일) 돈만 쳐서 약 2,500만원 정도 돼요. 제 책은 초판 2,000부를 1년 안에 소화하기도 쉽지 않거든요. 재판 찍으려면 또 목돈 들고, 그 돈 회수하려면 더 오래 기다려야 하고…. ‘투자- 회수- 재투자’의 아슬아슬한 균형에 이처럼 치명적인 변수가 터진 거잖아요.”

-대안은 없었나. 가령, 정오표를 따로 낸다든가.

“이틀 동안 고민도 하고, 조언도 구했어요. 그런데 내용상의 오류가 아니라 단순 오ㆍ탈자가 대부분이에요. 마티 이미지에는 그런 오자가 더 치명적일 수 있거든요. 후회하진 않아요.”(그는 ‘오프 더 레코드’를 조건으로 이번 사태의 경위를 설명했는데, 그 역시 어이 없는 피해자였다. 그렇다고 책임이 경감되지는 않는다. 피해자이자 책임자인 당사자는 이중의 고통, 곧 피해의 상처와 책임의 하중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아마도 편집/교정을 외주에 맡겼던 모양이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제가 사는 오피스텔 보증금(2,000만원)을 빼기로 했어요. 사무실(보증금 500만원)은 빼봐야 별 도움이 안 되거든요. 현재 진행중인 책만도 10종이 넘고, 집필이나 번역이 거의 마무리된 것도 있어요.”

대학 96학번인 그는 수습 월급 150만원의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4개월 만에 월급 50만원 주는 출판사로 이직했다. “기업 안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과 역량을 오롯이 책에 반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고 했다. 독자층이 적은 분야에 기약 없이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출판사는 흔치 않다. 그래서 차린 게 마티다. 그는 자신의 모든 책의 기획ㆍ편집ㆍ디자인을 해왔다.

“우리 근대 형성에 일본 못지않게 영향을 준 서양 근대에 대한 책은 많지 않아요.” 세기말 파리의 시각문화 양상을 분석한 책 <구경꾼의 탄생>이나, 20세기 초 상용화된 최초의 항공 운송수단인 비행선이 대중 문화에 미친 영향을 살핀 <비행선, 매혹과 공포의 역사> 등이 그렇게 출간됐다. 서양 미학사의 고전인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도 그가 낸 책이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의 논리가 출판시장을 장악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먹이 피라미드 안에, 돈 없이 돈 안 되는 인문서만 내는 마티의 자리는,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없다. 주거와 사무를 겸할, 보증금 싼 집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며 털고 일어서던 그는 “다 잘 될 것”이라고 했다. “제가 낸 책이 모두 살아있잖아요. 뜨겁게 활활 타지는 않아도 가장 오래 타는 출판사를 만든다는 게 제 모토랍니다.”(최윤필 기자) 

겸사겸사 <기억>에 대한 언론 리뷰도 하나 옮겨놓는다. 조만간 수정판의 '속살'이 드러나길 고대하면서.

서울신문(07. 01. 20) 침묵했던 제3제국 속살 드러내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서(김기영 옮김, 마티 펴냄)’는 9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우선 독자를 압도한다. 이처럼 두꺼운 자서전을 펴낸 슈페어(1905∼1981)는 과연 누구인가.‘히틀러의 건축가’로서 그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적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긴 장본인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재판에서 나치 독일의 장관 중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20년 징역형을 언도 받고 복역을 마쳤다.



독일 만하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슈페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가 되었다. 그는 1931년 베를린의 대학생을 상대로 맥주홀에서 가진 히틀러의 연설을 처음 들었다. 히틀러에 대한 첫인상은 “열광에 넘치는 분위기 자체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의 모습 또한 나를 놀라게 했다…모든 것이 적절한 겸손함을 풍겼다.”란 것이었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유머를 섞은 그의 연설이 풍기는 분위기와 열정에 빨려든 슈페어는 나치의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한다. 나치당 청사 공사에 참여한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장식과 시각적 장치를 맡아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히틀러의 신뢰를 얻는다. 히틀러의 대중선동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다. 나치 정권에서 최연소인 37살의 나이에 군수장관에 오른 슈페어는 전시경제를 장악한다. 또한 점령지 강제수용소의 노동력을 군수생산을 위해 착취했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모든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하는 히틀러에 맞서 독일의 문화유산과 산업시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체포된 슈페어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랐다. 자기반성과 변호를 절묘하게 뒤섞은 태도를 보이며 ‘선량한 나치’ ‘최고의 피고인’으로 불리며 교수형을 면한다. 재판 과정에서는 자신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류가 제시되면 무조건 히틀러의 명령이었다고 설명하는 피고들을 향해 “엄청난 월급을 받는 우편배달부들!”이라고 외쳐 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는 자살을 하려고 수건으로 아픈 다리를 묶어 정맥염을 유발하거나, 니코틴도 물에 녹으면 치명적이란 내용을 기억하고 부서진 시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러나 자살 시도를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슈페어는 메모광이었다. 감옥에서 군수장관으로서 작성한 업무일지, 편지, 전보 등을 바탕으로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히틀러의 내밀한 모습을 담아낸다.



히틀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비전문성이었다든지, 체중을 항상 걱정했다는 일화 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히틀러는 독학으로 자수성가를 이루었기에 모든 분야에 문외한이었지만, 재빠른 두뇌회전으로 전문가가 시도하기 어려운 특별한 방식을 고안했다. 전쟁 초기에는 과감성으로 승세를 잡았지만, 패배가 확산되면서 비전문성은 아집으로 변했다.

“끔찍하군! 배를 불룩 내밀고 걸어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그건 바로 정치적 파멸이야.”라고 외치며 채식을 고집했던 히틀러는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조롱했다.1943년 이후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히틀러는 “슈페어, 요즘은 친구가 둘뿐이군. 브라운(히틀러의 연인이자 비서었던 에바 브라운)과 개라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치 정권의 ‘속살’을 보여주는 ‘기억’은 유일한 내부 증언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럼에도 슈페어의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이란 비난이 뒤따르는, 여전히 논란 속에 놓인 책이다.(윤창수기자)

07. 01. 30.

P.S. 둘러 보니 오드리 설킬드의 <레닌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2006)이 또한 마티에서 낸 책이다. 그러고 보니 그 책 또한 젊은 여사장의 '열정'이 낳은 산물이었다.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혁명을 팝니다>와 <구경꾼의 탄생> 정도이다. 1인 출판사가 출판계에 드문 건 아니지만 이만한 실적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사람은 혼자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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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책 중의 하나는 '새로운 여자의 탄생'이란 부제를 가진, 댄 킨들런의 <알파걸>(미래의창, 2007)이다. 지난주 구내서점에서 책이 나온 걸 보고 한번 들춰봤었는데, 다시 확인해보니까 상당히 저렴한 책이다. 364쪽에 10,000원(할인가 9,000원)이면 짐작엔 신간들 가운데 분량 대비 최저가가 아닌가 싶다.

대개 이런 종류의 책은 그냥 리뷰들 몇 개 읽는 걸로 대신하는데(사실 그걸로 충분할 때가 많다) 그 '책값'이 특이해서 한번 관심을 가져본다. 내가 읽은 리뷰들이 정리하고 있는 내용을 옮겨놓는다.

국민일보(07. 01. 27) ‘알파걸’… 거칠 것 없는 그녀들의 야망·파워!

미국에서 여성들이 처음 투표권을 얻은 것은 1920년이다.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몸의 주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피임의 합법화는 1965년에 이뤄졌다. 백 년여 동안 페미니스트들이 힘들게 쟁취한 남녀평등이라는 토대 위에서 요즘 미국 10대 딸들은 역사상 최초의 신천지를 경험하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자와 남자의 출발선이 똑같아진 것. 이 아이들은 남녀구분 없이 동등하게 부모의 관심을 받고,교육을 받고,사회진출 기회를 갖게 됐다. 그 결과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우수해진 것이다.

이에 대해 하바드대 아동심리학과 교수인 저자 댄 킨들런은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층이 출현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저자가 ‘알파걸’이라고 명명한 이 소녀들은 ‘여자들은 사춘기가 되면 자신감을 잃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는 심리학계의 유력한 학설과 달리 대다수 남학생들보다 더 씩씩하고 경쟁도 겁내지 않는다. 이들은 여성이 관리직에 오르는 것을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소위 유리천장도 얼마든지 분쇄해버릴 태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또다른 특징은 페미니즘의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저는 여권주의자가 아닌 평등주의자에요. 페미니즘은 여성평등이 아니라 남성 적대적으로 보이거든요”라고 말하는 이들은 사실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미 남자를 추월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과학이나 수학에 약하다는 편견에 대해 저자는 “같은 땅에 두 식물을 심고 수분,햇빛,영양분 공급 등 모든 조건을 똑같이 해주고도 한 식물이 더 크게 자랐다면 유전적 차이 때문”이지만 “현실에선 하버드대학이건 월가건 남녀에게 같은 토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면서 토양이 갖춰지지 않는 한 유전적 차이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미래 지도자가 될 알파걸들의 등장은 역할 모델이 되는 ‘알파우먼’의 수가 늘어난데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정계에는 힐러리 클린턴과 콘돌리자 라이스가 버티고 있고,대중문화에서는 오프라 윈프리와 마돈나가 있다. 이외에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저자인 JK롤링이나 미녀 테니스 스타인 마리아 샤라포바 그리고 골프스타 미셸 위 등이 알파걸들의 눈높이를 높이고 있다.

저자가 알파걸과 관련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의 친근한 관계. 신세대 아버지들은 구세대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그랬듯이 딸들에게 열심히 도전의식을 심어준다. 그리고 딸들은 여성적 혹은 남성적으로 규정됐던 다양한 기능들을 습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시켜 나간다. 이에 따라 딸들은 여전히 사회에 남아있는 남녀간 차별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 책의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는 “학교가 알파걸로 넘쳐나는데,왜 알파우먼이 미국을 지배하지 못하는가?”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 직장 여성들의 월급은 남성에 비해 평균 23%가 작으며 대기업 임원이나 의원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20% 안팎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저자의 ‘알파걸’은 모든 소녀라기 보다는 장래 권력과 영향력 있는 사회계층으로 진출할 소녀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계층과 인종을 넘어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이같은 사례는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올초 판·검사 임용 대상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으며 각종 고시의 수석은 물론 공군사관학교,경찰대 수석 졸업도 여성이 휩쓸고 있는 것을 볼때 우리도 새로운 계층의 출현이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알파걸의 출현에 불안해 하는 남성들에 대해서 저자는 긍정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여자들이 운영하는 세상에서 남자들은 스트레스도 덜 받고 장수할 수 있다. 그리고 미처 개발하지 못했던 다른 면들을 개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기르며 집안 살림도 할 수 있다…남자다워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더 사랑스러워질 수 있다.”(장지영 기자)

한국일보(07. 01. 27) 새로운 슈퍼파워 계층의 탄생 '알파걸'

“여성들에게 책임을 맡겨라. 그러면 감당할 능력이 생긴다.(…) 조만간 여성들이 완전한 경제적ㆍ사회적 평등에 도달하리라는 것은 확실해 보이며, 이를 통해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49년 <제2의 성>(1949)에서 낙관적 의지를 담아 예견했던 ‘내면의 변화’가 이미 시작됐고, 그 중심에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층”인 ‘알파걸(Alpha Girls)’이 있다는 게 심리학자 댄 킨들런의 논쟁적인 저서 <알파걸>의 요지다.

저자는 미국과 캐나다의 15개 학교를 방문해 “재능 있고 성적이 우수하며 리더이거나 앞으로 리더가 될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인종ㆍ계층의 야심만만한 소녀 113명을 인터뷰하고 900여 명의 소녀들을 설문조사했다. 그 결과 그가 확인한 이들이 알파걸이다.

●알파걸: 성실하고, 낙천적이고, 실용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개인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평등주의자인, 그러면서 관심 영역이 광범위해 인생의 모든 가능성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유능한 소녀집단.(203쪽)

이들은 ‘혁명의 딸’이다. 참정권과 스포츠 참여권, 낙태 합법화를 위해 싸운 여성해방운동가들의 딸이자 손녀로 그 투쟁의 열매를 쥐고 태어난 첫 세대다. “순응 아니면 반항, 억압 아니면 저항. 이것이 알파걸 세대 엄마에게 주어진 선택”이었다면, 알파걸은 “1980~90년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페미니스트의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저는 여권주의자가 아닌 평등주의자예요.”(몰리ㆍ17세)

알파걸은 또 과거 아버지들이 아들에게나 쏟았을 관심을 받고 자라며,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전통적인 남성적 가치관을 전수 받았다. 어머니만이 더 이상 딸의 역할모델이 아닌 것이다. 직업관 역시 ‘여성적’ 관습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들은 계란 거품기와 전기톱 둘 다 능숙하게 다룬다.”(202쪽)

저자는 전통적인 심리학과 지능, 신체적 특징 등을 둘러싼 성(Gender) 편견을 다양한 연구성과와 인터뷰를 통해 논박한다. 과거 심리학이 규정했던 사춘기 소녀의 특징들, 즉 낮은 자부심과 정서장애(우울증/불안), 타인 위주 가치관, 관계 지향, 감정적 스타일은, 적어도 알파걸에게는 낯선 가치관이다. 이들이 이끌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 이를테면 고등교육에서의 여성 우위, 직종 성역(性域) 파괴, 성 소득격차의 급격한 해소, 사랑ㆍ결혼관의 변화와 가정의 변화 등은 더 멀리 깊숙이 전개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이다.

이들의 진군으로 위축된 남성에게 저자는 “알파걸 세대가 성인이 되는 미래 세계에서 우리 아들들은, 혁명의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름대로의 ‘내면 변화’를 거쳐 전통적인 남자의 핵심적 특성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위로한다. “세계를 운영해야 하는 부담, 골칫거리들을 알파우먼들한테 해보라고 하면 될 것 아닌가.(…) 여자들이 운영하는 세상에서 남자들은 더 오래, 스트레스도 덜 받으며 살 수 있고, 아직까지 미처 개발하지 못했던 남성의 다른 면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199쪽)이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위 책에서 “자유만이 (억압의) 굴레를 깨뜨릴 수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알파걸>의 저자는 책의 말미에 “알파걸 정신은 우리 역사의 중심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한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어느 사회에도 여전히 “너무 똑똑하면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을까 봐 자신의 학습능력을 드러내기를 주저한다”고 했던, 페기 오렌스타인의 책 <여학생>(1994) 속의 여학생들이 있다.

그러므로 ‘알파걸’을 10대 소녀의 상징으로 미화할 수도 없고, 일반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들이 사회에 나와 머리 위에 얹힌 ‘유리천장’(소수자의 승진을 막는 보이지 않는 천장)을 과연 효과적으로 해체할지 낙관할 수 없고, 그 과정에 무수한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새롭고 야무진 계층은 지금 여기 우리 곁에서 희망처럼 자라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최윤필 기자)

07. 01. 28.

P.S. 원저는 작년 9월에 나온 걸로 돼 있다. 번역이 초스피드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물론 사전 계약을 통해 국내 출판사에서는 원고를 미리 건네받을 수 있다). 분량도 352쪽으로 만만찮다. 국역본의 분량이 그보다 10여쪽 늘어난 데 그친 것은 놀랄 만하다(혹 참고문헌이나 후주가 빠진 것일까?). 그럼에도 역시나 놀랄 만한 건 책값이다. 번개같이 책을 출간한 걸 보면 판권료가 저렴하진 않았을 듯한데, 여하튼 궁금하긴 하다. 참고로, 국역본의 부제는 '새로운 여성의 탄생이지만, 원서의 부제는 'Understanding the New American Girl and How She Is Changing the World'이다. 그러니까 이 '알파걸'들은 일단 '뉴 어메리컨 걸'들이다. 한국적 현실과 얼만큼 관련되는지는 좀더 따져봐야 하는 것. 하지만 이미 '알파걸'을 인용하고 있는 시평들이 씌어지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칼럼들.

노컷뉴스(07. 01. 27) '알파걸' 세상 접수… 공부·운동·리더십 '남성' 능가

서울 은평구의 S고교는 남녀공학이다. 이 학교는 그동안 남녀학생을 구별하지 않고 내신등급을 매겼다. 하지만 지난해 신입생부터는 남학생은 남학생끼리, 여학생은 여학생끼리 각기 내신등급을 산출하고 있다. 남학생에 비해 여학생의 성적이 워낙 뛰어나 같이 묶어서 등급을 매기면 남학생들은 좀처럼 1등급을 받기가 힘들었고, 따라서 남학생 학부모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자 신입생들은 이 같은 학교의 조치에 당연히 항의했다. 또다른 ‘남녀차별’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학까지 서슴지 않는 남학생 학부모들의 반발을 우려한 학교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여학생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남녀를 구분해 내신 등급을 받는 ‘역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문제는 또 있다. 이 학교 남학생 1등급과 여학생 1등급의 차이가 너무 현저하게 난다는 것. 수학의 경우 여학생이 1등급을 받기 위해선 80점대 이상을 받아야 했지만, 남학생은 60점대 이상이면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과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남녀학생의 학력 격차는 크게 벌어져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히 고교 내신성적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진출은 이미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지난 16일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사법연수생 중 판사 임용이 예정된 여성은 전체(90명)의 64.4%인 58명이었다. 검사 임용이 예정된 연수생 100명 중 여성이 차지한 비율은 44%(44명)로 나타났다. 판·검사 임용을 앞둔 여성 비율이 전체 190명 중 102명(53.7%)으로 사상 처음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이처럼 급격히 커지고 있는 ‘여성 파워’의 현상을 최근 출간된 책 ‘알파걸’(댄 킨들런 지음, 미래의 창)은 ‘새로운 여자의 탄생’으로 파악하고 있다. 저명한 아동심리학자로 하버드대 교수인 저자는 1000여명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통해 “미국의 신세대 소녀들이 이전 세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층”이라며 이들을 ‘알파걸’로 선언했다.

미국 여학생중 약 20%에 해당하는 알파걸은 공부, 운동, 리더십 모든 면에서 남학생들을 능가하는 엘리트 소녀들이다. 재능과 욕심, 자신감이 넘치는 이들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제약을 느끼지 않는다. ‘소녀들은 자부심이 별로 없고 외모 때문에 비틀린 심리를 갖고 있다’는 통념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자신만만한 이들은 섹스와 남녀역할, 의존과 독립, 지배와 복종 같은 전통적인 사회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로 무장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과 동등하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다”고 이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장래 희망하는 직업에서도 이들은 전혀 여성으로서의 제약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장래 일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알파걸들의 응답을 보면, ▲의학·과학 분야 25.4% ▲수학분야 13.0% ▲공학·기업분야 12.3% ▲법·정치 분야 9.4% 순이다

알파걸이 탄생한 배경은 간단하다. 그동안 여성들이 힘들게 쟁취한 남녀평등이라는 토대 위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자와 남자의 출발선이 똑같은 조건에서 자란 첫 세대라는 것. 이 아이들은 남녀 구분없이 동등하게 부모의 관심을 받고, 동등한 교육을 받았으며, 동등한 사회진출 기회를 갖게 됐다. 그 결과 여자가 남자보다 더 우수해진,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알파걸 집단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축은 1980년대 말에 태어난 아이들로, 이때가 전환기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80년대 말부터 미국 대학에선 여학생 수가 남학생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알파걸들은 급격한 여성 상승세 속에서 성장한 것이다. 지난 2004~2005학년도엔 미국 전체 학위 취득자의 59%가 여자였다.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포함한 비즈니스계 영역에서도 여성의 리더십 역할은 상승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지 ‘포춘’ 선정 500대 기업에서 여성 기업간부는 15.7%, 여성 CEO는 1.4%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CEO 비율은 기업세계에서 여성들이 남자와 진정한 동격을 이루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알파걸들의 급속한 진출은 비즈니스계에서도 남녀의 역전 현상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문화일보 김영번기자)

경향신문(07. 01. 29) 딸

딸의 일생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지 못했다. 운전보조석에 앉아 운전수가 가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삼종지의(三從之義)의 길이 숙명이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르고. 여자 팔자가 뒤웅박팔자인 이유였다. 선택에 따라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 그 선택도 자신이 한 것은 아니었다.

딸의 인생은 흔적이 없다. 이름 없이 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의 아내로, 어느 누구의 어머니로만 존재했다. 총명한 것이 오히려 걱정이었다.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고 벼슬도 할 수 없었다. 시경 사간편(斯干編)도 그래서인지 “계집아이가 태어나거든/ 맨바닥 땅바닥에 잠자게 하고/ 실감개나 주어서 놀게 하고/ 술 데우고 밥짓기나 익히게 하라”고 읊었다.

어머니가 된 딸은 딸이 걸어가야 하는 그 기구한 인생길을 알기에 딸을 낳고 남몰래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고, 출가외인(出嫁外人)에 여필종부(女必從夫)였던 그 어머니를 보면서 딸은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항변했지만 여자의 일생은 오랫동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 풍습도 변하는 것. 그저 나이만 먹었던 올드미스는 인생을 황금빛으로 설계하는 ‘골드미스’가 되고, 일찍이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예견했듯 가능성 무한대의 ‘알파걸’이 등장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오랜 남아선호 사상도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국정홍보처가 전국의 성인남녀 25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자녀를 한 명만 가져야 할 경우 아들을 원한다는 응답이 1996년 40.4%, 2001년 31.2%에서 2006년 24.8%로 줄었다. 특히 출산을 가장 많이 하는 30대 부부의 경우 아들(17.3%)보다 딸(21%)을 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같은 세태변화는 여성들이 당당한 인격체로서 사회의 많은 영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젊은 세대들이 노후를 자녀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반쪽 사회에서 양쪽 사회로의 전환, 사회의 양대 축이 함께 뛰는 미래는 아마도 더욱 활기찬 시대가 될 듯하다.(이영만 논설위원)

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딸아이를 위해서 한번 읽어볼까 생각중이다. 가격도 저렴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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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1-29 00:26   좋아요 0 | URL
이 글들을 보고 떠오른 질문
1. 알파걸과 마담 스피커는 어떤 관계일까?
2. 상위로 올라갈수록 여성이 급격히 줄어드는 구조에 대해 알파걸들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3.알파걸들은 여성의 정체성으로 영향력을 드러낼까 아니면 남성들의 정체성에 편승하는 것일까?
4. 교대를 지원하는 2명의 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남교사가 급격히 줄고 있는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남학생들의 쿼터를 줘야 할까?" 각각 찬반으로 갈렸다. 한 학생은 '공정한 대결'에 초점을 한 학생은 '학생들의 교육권'에 초점을 두었다.
5. 최재천 선생이 한 칼럼에서 미래에는 정자은행에서 건강한 정자를 받아서 출산을 할 수 있으므로 남성이 '잉여존재'로 전락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학사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저항과 은폐의 역사라고 한다. 가능한 이야기일까?

물론 답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난 김에 적어 보았습니다.

로쟈 2007-01-29 00:36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질문들이네요. 제가 답변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제 생각은 보다 단순한데, 인구학적 관점입니다. '장래 권력과 영향력 있는 사회계층으로 진출하는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사회가 그만큼 바뀌는 거라고요. 그에 대한 이런저런 염려와 걱정은 나중 문제일 거 같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이 바꾸어가는 거라고 말할 때 제가 믿는 건(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인구'(쪽수)입니다(피플 파워는 그 한 예가 아닐까요?)...

승주나무 2007-01-29 00:50   좋아요 0 | URL
저는 '여권'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특히 우리 같은 남성들이 사용할 때 다소 '수세적'이라는 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많이 올라왔구나 하는 거죠. 최초의 총리, 최초의 헌재소장 (내정자) 하는 말들이 자꾸 거슬립니다. 제가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피해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진정한 인간'(반쪽짜리 인간이 아닌)이 되고 싶은 겁니다. 저도 쪽수를 믿지만, 그보다 '반대급부'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남성들이 전향적인 자세를 잡게 되고, 그것이 모든 면에서 '나은' 자세라는 확신에 도달하는지 기다려볼랍니다. 그 전에는 '반쪽짜리 쪽수'에 알파 걸들의 '고군분투'가 당분간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당~~

로쟈 2007-01-29 08:35   좋아요 0 | URL
딸을 원하는 부모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부터가 '전향적인' 자세 아닐까요? 앞으로 한 세대쯤 지나면 양상이 많이 달라질 거란 생각이 들고, 전향 이전에 그러한 상황에 '적응'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인간은 '반쪽'이 정상 아닐까요?^^ 성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승주나무 2007-01-29 10:41   좋아요 0 | URL
생물학적으로 반쪽이라 해서 반쪽이 '완성(?)'됐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반쪽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어느 한 쪽이 한쪽을 포함한다거나 위에 있다는 사고방식이 내재돼 있을 때 '원래 반쪽'이라는 말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성의 발견이 있어야 그에 따라 남성의 발견이 생기고, 반쪽이나 인간도 그때에야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딸을 원하는 부모들이 많아진 것은 확실히 전향의 증표이지만 남아선호가 정상화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셋째, 넷째에 가서는 그 차이가 조선시대못지 않다는 건 거대한 뿌리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ㅋㅋ 이야기가 논쟁의 모양이 되었군요. 무서버요^^

로쟈 2007-01-29 11:42   좋아요 0 | URL
생물학적 관점이라고 한 건 완곡어법이었고, 사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 '진정한 인간'이란 표현 자체가 텅빈 기표가 아닌가라는 것이었습니다('여자는 없다'란 라캉식 테제를 확장하자면 결국 남자와 여자의 합으로서의 '인간'은 없다는 게 논리적 귀결이어서요). 한데, 너무 긴 얘기입니다... 출산률이 1.1명도 안 되는 나라에서 셋째, 넷째까지 키우시려는 분들의 '선택권'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moonnight 2007-01-29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신문에서 이 책에 대한 기사를 읽고 흥미가 생기더군요. 그땐 몰랐는데 책값도 상당히 저렴하군요. 읽어봐야겠네요. ^^

sommer 2007-01-29 16:57   좋아요 0 | URL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이 생정치(bio-politics), 더 나아가 알파걸이라는 새로운 종을 선택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셈이군요. 알파걸을 남아선호의 반대편보다는 주체의-선택에서 배제된 혹은 거절하는-반대편에 놓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건 왜일까요...

로쟈 2007-01-29 17:14   좋아요 0 | URL
저는 쪽수가 결과적으론 우발적인/잉여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믿는 편입니다. 알파걸이란 새로운 명명에 대해 예단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좀더 지켜볼 필요도 있지 않을가요? suture님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일적이며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사실 '완벽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죠). 뭔가 구멍이 있는 거 아닐까요?..
 

프랑스의 저명한 지식인이자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의 소설론 <실험소설 외>(책세상, 2007)가 출간됐다. 표제작을 따라 '실험소설론'이라고도 많이 알려진 그의 '자연주의' 소설론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소개에 따르면 "총 8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첫 번째 글 '실험소설'은 졸라가 주창한 자연주의 소설 이론의 핵심을 보여준다. 이어서 '현실 감각'이란 제목의 글은 작가의 기본 자질에 대해 역설하며, '묘사에 대하여'에서는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니라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환경 묘사를 강조한다. '사실주의'는 자연주의자 졸라의 문학 이론을 보완하는 글이다."

역자는 국내에 많지 않은 것으로 아는 졸라 전공자 유기환 교수이고, 이미 드레퓌스 사건의 기폭제가 됐던 <나는 고발한다>(책세상,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내가 아는 또다른 졸라 전공자는 원로 불문학자인 정명환 선생으로 <졸라와 자연주의>(민음사, 1982)란 저작이 있다. 염상섭과 졸라를 비교하는 평문 등을 쓰기도 했다(일견 서로 모순돼 보이는 자연주의자 졸라와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졸라의 책은 지난주에 구내서점에서 나온 걸 확인하고 아직 구입하지는 않았는데, 주말의 언론리뷰에서 너무 소략하게 다루어진 감이 있어서(문고본이기도 하지만) 이런 자리를 마련한다. 드물게도 이 책에 주목한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졸라가 말하는 실험소설을 난해한 현대소설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문학에서의 상징주의나 심리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졸라의 실험소설론은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 연구 입문>이라는 의학서의 결정적인 영향 아래 입안된 것으로 자연과학적 접근을 커다란 특징으로 한다. ‘과학적 실험을 수단으로 해서 일정한 유전 조건과 환경 속에 놓인 인간의 운명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실험소설의 핵심이 된다. “실험소설은 추상적 인간, 형이상학적 인간의 연구를 물리화학적 법칙에 따르고 환경의 영향에 의해 결정되는 자연적 인간의 연구로 대체한다.”(37쪽)

졸라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일정한 조건 아래 놓으면 그들의 향후 반응과 행동, 운명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무생물을 다루는 화학자와 물리학자, 생물을 다루는 생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작가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써 살아 있는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사적 상식으로 '자연주의'란 (쇼핑몰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이 유전과 환경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작가적 세계관과 창작방법론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영국의 토마스 하디, 그리고 프랑스의 에밀 졸라(이미지는 마네가 그린 초상화 1868)와 기 드 모파상 등이 있고, 드라마작가로는 헨릭 입센이 자연주의의 거장이다. 그 정도의 상식을 갖고서 졸라를 검색해보면 빈곤한 리스트에 좀 실망하게 된다.

 

 

 

 

당대의 벽화를 꿈꾼 그의 필생의 대작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목로주점>이나 <나나> 같은 대표작 정도만 중복 번역돼 있으며 <제르미날> 등을 포함하여 몇몇 더 소개된 작품들 대부분은 품절이거나 이미 절판된 상태이다. 새삼스럽진 않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읽거나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닌 것이다.

개인적으론 에밀 졸라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목로주점>이고, 르네 클레망의 영화 <목로주점>(1956)이다(영화의 원제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제르베즈>이다). "1850년 파리의 뒷골목 사업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진 남편 때문에 가난에 찌들리며 살아가는 여인의 슬픈 삶을 그린 멜로물"인데. 억척스런 연기를 펼치던 마리아 쉘(1926-2005)이 기억에 남는다. 찾아보니 이 영화로 당시 영화제의 연기상들을 휩쓸었었군. 하지만, 그녀의 시대도 이미 떠나버렸다... 

07.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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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8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8 16:49   좋아요 0 | URL
**님/ 예, 저도 나와 있는 책들은 대충 다 알고 있는데, 세상 좋게 읽어볼 만한 짬은 나지 않네요. 학부때와는 또 다른 거 같습니다. 시간이 좀 있을 땐 다른 게 좋아보였었나 봅니다.--;
 

지난주 문학 신간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이다. 나는 지난주에 구내서점에 들어와 아직 서고에 있던 책을 사들고 왔다. 윤대녕의 작품들을 찬찬히 따라 읽어온 건 아니지만 짐작에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집이 될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윤대녕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라고 적었지만, 알라딘의 착오인 듯하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제비를 기르다>는 다섯번째 소설집이다. 지난 94년 <은어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이 나온 후 12년이 지났으니까 적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작이랄 수도 없겠다. 중간에 장편소설들과 산문집 등이 끼여 있어서 많게 여겨졌었나 보다.

두번째 소설집 <남쪽 계단을 보라>(세계사, 1995/2003)에 이은 세번째 작품집은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생각의나무, 1999; 양장본 2001/2005)이며, 네번째가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 2004)이다. 나는 둘러보니 두번째, 네번째 작품집을 안 갖고 있는데, 언제 한번 모아놓고 통독해볼 생각은 있다. 그의 장편소설들을 나는 읽은 바 없지만(<은어낚시통신>에서도 강한 인상은 받지 못했었다) 견문에 그가 작가로서 더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건 중단편들에서가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나온 소설집을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이고.

알라딘의 표준적인 소개에 따르면, "이번 소설집은 태어나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인간사에 대한 포용 혹은 긍정의 시선으로 충만하다. 수록된 여러 작품에 죽음을 앞둔 인물이 등장하지만('탱자', '제비를 기르다', '편백나무숲 쪽으로') 그들을 감싸고 있는 소설의 정조는, 슬픔은 슬픔이되 어둡지 않고 환하다. 초기 윤대녕 소설을 설명해주던 '감각'과 '내면'의 세계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애틋한 시선으로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런 면에서도 그의 작품세계가 보다 성숙한 단계로 접어든 게 아닌가 싶다.

이번주 언론리뷰들에서 다들 크게 다루고 있지만 특히 동아일보에는 작가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기에 잠시 옮겨온다(아무래도 작가의 육성이 어필하는 바가 있으므로). 인터뷰어는 김지영 기자이다.

-‘윤대녕 소설’ 하면 비현실적이면서 묘하게 연애감정 생기는 여성이 떠오르는데, 이번에는 별로 없네요.

지난해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요. 어머니 곁에 있다 보니 여자의 일생이 뭘까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을 돌보고, 나이 들어가고…. 막연했던 여성의 이미지가 피부로 느껴졌달까.” (‘제비를 기르다’의 어머니는 철마다 가출해 길에서 몸으로 구르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나이를 먹고, ‘탱자’의 고모는 첫사랑의 상처를 안은 채로 굴곡진 삶을 살아간다).

-예전 작품엔 구차한 생활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하늘하늘한 여성들이 대부분인데 이번엔 여자들이 그악스럽게 집안을 꾸려갑니다.

몇 년 전부턴 인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어요. 그렇게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고. 앞서 나온 책들은 여성 독자들한테서 종종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길 들었는데, 최근작들은 여성 독자의 호응이 많아요. 여성에 대해 알기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나 봐요. 나뿐 아니고 모든 남성이….”(웃음)

-한편으로 고단한 삶이면서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성찰을 발견합니다.

“‘탱자’의 병든 고모는 실제 고모님의 부음을 듣고 쓴 작품이에요. 큰 충격이었지요. 죽음에 대한 어렴풋한 관념이 육화했다고 할까요. 인생과 인간에 대해 좀 더 넓게 생각해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등단 17년에 많은 작품을 냈지만, 윤대녕 하면 첫 소설집 ‘은어낚시통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손해 볼 때가 많다는 느낌도 들어요. ‘은어낚시통신’을 보면 저 스스로도 신통하다 싶긴 한데,(웃음) 문장이 거칠고 구조도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눈에 띄고…. 작품집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지금껏 그 인상이 이어지네요.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해요. 그때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평이 나왔는데, 내가 그동안 많이 걸어왔지만 결국 그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 그건 결국 내가 추구해 온 철학적 구현이라는 생각.

-여전히 사람들은 길을 떠나네요. 그 여정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고….

로드 로망! 난 이게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길을 떠난다는 게 결국 살아가는 것이고, 죽음을 준비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하면, 익숙했던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모색을 하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죠.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

짧은 인터뷰이긴 하지만 '윤대녕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요약해주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가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지나가는 자'들이다. "길을 떠난다는 게 결국 살아가는 것", 거꾸로 말하면 살아간다는 게 결국은 길을 떠난다는 것이라는 게 그의 '작가적 세계관'이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길(떠남)은 삶의 비유일 뿐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이 비유가 갖는 시적/서정적 울림이 내가 생각하기에 '대녕본색'에 해당한다. <제비를 기르다>에 실린 중단편들은 그 '대녕본색'을 유장하고도 아득하게 그려보이기에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내가 동의하는 세계는 아니지만 충분히 현혹될 만한 '아름다움'이 거기엔 펼쳐져 있다.

07. 01. 27.

P.S. 소설가란 직함을 갖고는 있지만, 내 식으로 분류하자면 윤대녕은 '시인'에 속한다.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시적인 것'을 쓰는 시인 말이다. 작품집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그는 그 '시적인 것'의 일단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삼년 만에 다시 소설집을 낸다. 각별히 고독을 챙기며 살았던 지난해에 여러 편의 중단편을 쓸 수 있었다. 자정에 작업실에서 퇴근할 때 막사발에 냉수를 받아놓고 아침에 출근하면 그것을 마셨다. 하루하루 그 일을 되풀이하면서 내가 과연 삶의 한가운데로 가고 있나를 산짐승처럼 틈틈이 살폈다. 길을 잃으면 안되겠기에 보다 숨을 낮추고 되도록 말을 꺼렸다. 그렇게 생의 한가운데를 어두운 숲처럼 더듬더듬 관통하면서 나는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을 자주 체험했다. 삶의 정체는 결국 그리움이었을까?(...) 그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들을 밖으로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또한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삶이라는 '어두운 숲'을 관통해나가는 '산짐승'이다. 그리고, 그에게 소설쓰기란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그리움을 밖으로 떨쳐내는 일이다. 그것이 소설적인 것이 아닌 시적인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그가 장편소설보다 중단편소설에서 그만의 세계를 더 잘 끌어낼 수 있다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해서, 어지간한 시집들 대신에 <제비를 기르다>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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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1-27 16:07   좋아요 0 | URL
저는 노골적으로 '윤대녕빠'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독자군에 속합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속절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병을 앓으면서도 쉽사리 그의 책을 덮지 못하겠더라구요. 시적 문체로 먼 곳의 것들을 기억하고 호명하는 소설가들 중 단연 백미는 윤대녕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편백나무숲 쪽으로>와 <탱자>는 계간지를 통해 읽었는데 서둘러 소설집도 사 둘 생각입니다.

로쟈 2007-01-27 16:04   좋아요 0 | URL
줄여서 '윤빠'라고 하더군요.^^ 어느 기자의 서평대로 서너 번은 물리지 않고 읽으시겟습니다..

읽는기계 2007-01-27 16:29   좋아요 0 | URL
기자가 깜빡한 모양인데 <제비를 기르다>는 다섯번째 소설집입니다. 제가 알기론 <남쪽 계단을 보라>가 두번째 소설집입니다. 윤대녕이 시인으로 분류된다는 데 동감입니다. 소설에 취한다는 것이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드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윤대녕의 소설을 읽을 때 작가와 사적인 만남을 갖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소개하신 작가의 말을 보니 <제비를 기르다>는 수도생활을 한 산짐승의 자취를 담아낸 소설인 듯 하군요. 얼른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언젠가 저 산짐승의 성차와 '로드 로망'의 미학 사이 함수관계를 푸는 것이 저 혼자만의 과제입니다.^^

로쟈 2007-01-27 16:33   좋아요 0 | URL
알라딘의 착오구요, 저도 왠지 작품집 수가 좀 적다 싶었습니다.^^

수유 2007-01-27 18:08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의 소설집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옛 팬으로서 좋은 평을 받는 소설집이기에 더 반갑군요^^ 작가의 말도 그럴듯 합니다. 제 손이 움직이기에 말이죠.

드팀전 2007-01-28 12:02   좋아요 0 | URL
저도 옛날에는 윤대녕을 좋았했었지요.지금은 좋고 말고 할것도 없이 .... 90년대 그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지금은 잊혀진듯 또 기억되고 그런 상태인가 봅니다.책장을 바라보면 윤대녕 소설집을 살펴봤는데..^^ 꽤나 많네요.<은어낚시><지나가는자의 초상><누가걸어간다>..거기에 98년 현대문학상,2003년 이효석문학상.윤대녕이 상을 받아서 마치 윤대녕 책 같군요.에 서있군요.그러나 역시 제가 윤대녕에게 꼽힌 건 96년 이상문학상의 <천지간>이었습니다.TV문학관에서도 했었는데..심은하가 주인공했다니까요.^^

sommer 2007-01-28 15:52   좋아요 0 | URL
그의 로망의 '에로스'를 더불어 좋아했었는데요, 여행하는 자는 에로스적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백 석의 어느 시구절과 더불어서 말이죠...

로쟈 2007-01-28 17:12   좋아요 0 | URL
'지나가는 자', '지나가고 싶은 자'들은 매혹될 만한 작가죠. 저는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기로 했습니다...

다락방 2007-01-28 22:3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제 신문에서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고 살까 말까를 망설였는데, 로쟈님의 페이퍼를 보니 구입해도 무리가 없겠네요 :)

비로그인 2007-01-31 13:49   좋아요 0 | URL
저는 윤대녕작가가 세상에 발표한 작품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매번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한권 읽고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하다가 다시 작품집이 나오면 사고 말았죠. 그 문체의 매력을 쉽게 잊을 수가 없어서요.
작품들과 작가의 사진이 영 매치가 안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제겐 윤대녕과 은희경이 그렇더군요. 그 섬세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 인지... 이 책도 결국은 사게 되겠네요.

로쟈 2007-02-01 00:0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로님을 보시길!
아로님/ 윤빠시군요!^^
 

오전의 '행사'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배달된 중국음식을 먹은 다음에 신문들 뒤적이는데 문득 한 책광고가 눈에 띄었다. 피터 앳킨스(1940- )의 <갈릴레오의 손가락>(이레, 2006). 내 딴에는 주야로 불침번을 선다고는 하지만 수시로 졸았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들통났다. 이 '과학책'도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모양인데, 리뷰를 뒤져보니 일간지들 가운데서는 중앙일보 정도만 비중있게 다루었다. 해서, 리뷰들만 믿다가는 이런 식으로 간혹 구멍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리처드 도킨스의 추천사가 나를 혹하게 한다: "아직까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없었지만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피터 앳킨스는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그는 강력하면서도 신비로운 영어로 심원한 과학의 시를 창조하여 우리를 눈뜨게 해준다. 앳킨스의 문장들은 우리를 영감으로 가득 채우고, 완성시키며, 풍요롭게 만들어, 완전하게 살아 있도록 이끈다." 그러니까 문장만으로도 읽어볼 만한 책인 것이다. 마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철학자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듯이 말이다.

해서 도킨스 덕분에 앳킨스란 이름도 기억하게 됐다. 한데 다시 뒤져보니 그의 <원소의 왕국>(사이언스북스, 2005)은 나도 갖고 있는 책이 아닌가(물론 이전에 두산동아판으로 나온 책이 소장도서이다). 그 책을 유심히 읽어본 건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문장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된 책은 아니었다 보다. 딱딱한 '물리화학' 교재들도 그의 저작들이니 그럴 만은 하겠다(그밖에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 2002)에도 그의 글이 포함돼 있다). 앳킨스라면 넌덜머리를 낼 독자들도 상당수 있지 않을까? 그럼, 문제는 오히려 어떻게 하다가 <갈릴레오의 손가락> 같은 '명문장'을 쓰게 되었는가, 이겠다.

책의 부제는 '과학의 10가지 위대한 착상들'이다. "현대 과학이 도달한 빛나는 성과와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한 10가지 위대한 착상을 선정하고,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과학사적 의의, 착상의 근본 아이디어에 대한 상세한 과학적 설명을 통해,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를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소개돼 있다. 방점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라는 데 놓여져야 하겠다.

요컨대 그가 꼽고 있는 열 가지 착상, 곧 "1. 진화는 자연선택을 통해 이뤄진다 2. DNA에 담긴 암호가 유전된다 3. 에너지는 보존된다 4. 엔트로피는 늘 증가한다 5.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6. 대칭하는 것은 아름답다 7. 파동과 입자는 같은 것이다 8. 우주는 팽창한다 9. 시공간은 물질에 의해 휘어진다 10. 산술적 추론에는 한계가 있다." 자체를 다룬 책들은 생각보다 많이 나와 있으니까. 문제는 그 착상들의 '위대성'을 어떻게 설명해내느냐, 혹은 연주해내느냐인 것. 

짐작엔 고등학생들의 교양서로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하튼 내 관심은 그런 쪽이고 600쪽이 넘는 분량도 마음에 든다(2003년에 나온 원저는 392쪽 분량이다). 아, 교양과학서들만 읽어도 삼백 예순 날들이 날도 아니겠다. 더 위대한 착상들과 씨름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직 뭐가 더 남아있을까?..

07.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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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1-20 20:07   좋아요 0 | URL
정말 삼백예순날이 날도 아니겠죠. 책의 두께와 스트레스는 비례하는듯. 저로선.

에바 2007-01-20 23:13   좋아요 0 | URL
얼마전부터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를 읽고 있는데 다른 책들에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꼭 완독하고 싶은데...그리고 오늘 '비평고원'에서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조만간 번역/출간된다는 '댓글'을 봤는데 좋은 번역서가 나왔으면 합니다. 근데 출판사가 어딘지 혹시 아시나요??

로쟈 2007-01-20 23:57   좋아요 0 | URL
수유님/ 저는 그냥 꽂아둡니다.^^
에바님/ 어딘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나오면 알겠지요.^^

알케 2007-11-26 22:36   좋아요 0 | URL
소생은 어제서야 한겨레에 실린 정재승의 칼럼에서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쟈님도 저 같은 두꺼운 하드카바 북 페티쉬인가 보군요 ^^;;

로쟈 2007-11-26 22:48   좋아요 0 | URL
얄팍한 책은 왠지 믿음이 덜 가서요.^^; 앳킨스의 책은 잘 모셔두고 있습니다...

테레사 2008-07-28 10:06   좋아요 0 | URL
와우,,저도 한겨레 정재승 교수의 추천을 읽고 샀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책이더군요. 하지만 한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다시 읽으려고 합니다. 좋은 책을 알아본다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