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근간 목록에 올라와 있던 파스칼 키냐르의 에세이 <섹스와 공포>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바 있는데, 반년이 지나서 드디어 책이 출간됐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중후한 에세이 한 권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발빠른 리뷰도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2. 10) 쾌락 뒤에 숨겨진 공포 '섹스와 공포'

사회적인 공인을 통과하지 않은 섹스에 대한 현대인들의 끈질긴 공포감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이 같은 공포감의 연원으로 기독교의 엄격한 청교도주의를 꼽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있지만,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인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이에 의구심을 품었다. 특히 1980년대 에이즈의 등장으로 인한 청교도적 윤리의 확산은 키냐르의 의구심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섹스에 대한 현대인의 공포감의 뿌리를 찾아가던 키냐르의 눈길이 멎은 곳은 폼페이의 회화였다. 통음난무의 자유분방한 풍조를 반영하듯 폼페이의 벽화들은 에로틱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시선은 수줍고 심각했다. 즐겁고 쾌활해야 할 그림 속의 여인들은 정면을 바라보지 못했고 겁에 질려있었다.

키냐르는 <섹스와 공포>에서 자유로웠던 초기 로마의 성윤리가 공포감에 짓눌리게 되는 시기는 공화정이 제국의 형태로 정비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기(BC 18~AD 14)라고 지적한다. 황제는 간통 처벌법인 ‘율리아의 법’ 제정 등 성의 억압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 이를 기반으로 황제권을 강화하려 했다. 여자를 유혹, 밀애를 즐기는 내용을 노래한 당대의 인기시인 오비디우스는 당장 ‘불온시인’으로 낙인 찍혀 다뉴브 강변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성에 대한 억압과 금기가 없었던 기독교가 ‘로마의 윤리’를 따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온다’ ‘음행하는 자는 제 몸에 죄를 짓는 것이다’라며 기독교인의 윤리를 설파하는 신약의 로마서는 바로 이 때에 쓰여졌다. 로마인들이 알몸을 가리기 위해 팬티를 착용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의 변화된 성 모럴을 반영한 풍속이라는 것.

키냐르는 아우구스투스가 재위하던 32년이 단지 로마역사의 변곡점과 같은 시기가 아니라 세계사의 ‘지진’과도 같은 기간이었다고 과감하게 결론내린다. 디오니소스적이었던 로마의 에로티시즘이 이 시기 불안과 공포감에 가득찬 우수로 변질됐고, 이 공포감은 적대감으로 탈바꿈하면서 기독교 원죄의식의 질료가 됐다는 것이다. 섹스를 지옥으로 보내버린 중세의 청교도적 윤리가 이 시기에 뿌리 내리고 있고 현대의 성 윤리 역시 일정 부분 중세 윤리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신대륙 발견기보다도 더 큰 변혁기라는 것이다.

역자 송의경씨는 “탄생이 죽음으로의 출발을 의미하는 양면성이 있듯이 섹스에는 쾌락과 공포가 본질적으로 혼재돼 있다”며 “섹스에서 공포만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현대인들이 쾌활함이라는 에로티시즘의 또 다른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책”이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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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10 00:01   좋아요 0 | URL
성병에 대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창가를 드나드는 심리가 바로 그것일테지요.

승주나무 2007-02-10 02:53   좋아요 0 | URL
저는 욕구불만의 공포는 좀 알고 있습니다만..그러고 보니 이것도 섹스의 공포 중 하나겠군요.^^

기인 2007-02-10 07:08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stella.K 2007-02-10 11:14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참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문화의 탄생과 발전이란 게 에로티시즘을 발전시킨 것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요?

다락방 2007-02-10 23:25   좋아요 0 | URL
아, 오늘 신문에서 이 책을 봤는데 여기서 또 보네요. 반갑게스리.
 

'비평이론 총서 01'로 <들뢰즈와 그 적들>(우물이있는집>이 출간됐다(처음에 '들쥐와 그 적들'로 읽었다). 정정호 교수 편의 논문집인데, 11명의 필자 모두가 국내의 어문학, 철학 전공자들이다. (재)작년인가 영미문학회인가의 학술발표회 주제가 '들뢰즈와 그 적들'이었고 아마도 이번에 묶인 논문들은 그때 발표된 것들인 듯하다. 몇년 전에 <들뢰즈 철학과 영미문학 읽기>(동인, 2003)가 같은 편자에 의해서 나온 적이 있는데, 그간에 보다 확장되고 심화된 연구 성과들을 열람해볼 수 있을지 기대된다(이진경의 <노마디즘>과 이정우의 몇몇 저작을 제외하고도 국내 저자가 쓴 들뢰즈 관련서들은 댓 종 이상 출간돼 있다).  

 

 

 

 

아직 아무런 리뷰기사가 뜨지 않아서 소개를 옮겨오면, "철학사 교수에서 철학자로, 예술이론가에서 영화이론으로, 정치경제이론가로, 문학이론가로 종횡무진 횡단하는 인문 지식인인 들뢰즈의 폭넓은 연구 영역을 각 분야별로 고찰했다. 들뢰즈의 문학예술론 및 몸철학, '중간'문학론, 언어와 문화론, 영화론, 윤리론, 정치론, 유목주의와 자율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들뢰즈에 대해서 다양하고 종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목차로 보아 좀 아쉬운 건 지젝의 들뢰즈론 <신체 없는 기관>에 대한 참조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 커플의 작업을 맹비판하면서, 가타리야말로 들뢰즈의 적임을 주장한 이가 지젝 아닌가?(내부의 적!) 그런 관점에서 들뢰즈/가타리를 다시 읽는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연말에 나온 걸로 돼 있는(하지만 알라딘에는 꽤 늦게 올라온) 책이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 3부작' 중 마지막 책 <들뢰즈와 시네마>(동문선, 2006)이다. 따져보니까 작년 한해 동안 세 권이 모두 출간됐다(역자들의 부지런함을 치하할 일이다). 사던 책이니만큼 이미 구색을 다 맞춰놨는데(원서로도 진작에 맞춰놨었다), 완독하는 건 아마도 역순이 될 듯싶다. 그건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 숙지해야 할 필요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들뢰즈와 시네마>는 "<시네마1>과 <시네마2>에 대해 영어로 쓴 최초의, 최상의 해설이다"란 평도 듣는 만큼 한번 도전해봄 직하다. 물론 '들뢰즈와 영화'란 주제에 한정하더라도 읽을 책은 차고 넘친다. 책읽기에만도 거의 '진화적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거기에다 보그는 "시네마에 대한 들뢰즈의 접근에는 베르그송으로부터 그가 받은 영감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시간에 관한 베르그송의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시네마1>과 <시네마2>의 많은 부분이 애매하게 된다."(11쪽) 협박해놓고 있으니 견적은 더 불어난다(물론 저자가 베르그송에 대해선 잘 정리해놓고 있지만).

지난 1월에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읽고 또 들뢰즈의 <푸코>까지 읽어보겠다던 계획이 입에 침만 묻히고 무산돼 버렸는데, 어느새 스테이지는 '들뢰즈'로 바뀌었다. 이 숨가쁘게 반복되는 차이 속에서 잠시 넋을 놓는다...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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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2-09 22:15   좋아요 0 | URL
<들뢰즈와 시네마>일단 주문해 놓긴 했는데 워낙 악명높은 동문선이라. 번역이 어떨지 심히 걱정되는군요. 로날드보그의 다른 들뢰즈책도 그래서 구입을 안했다는..원서대조작업으로 읽어야하는 공을 다시 들여야 하는건지..-_-

로쟈 2007-02-09 22:17   좋아요 0 | URL
역자인 정형철 교수가 보그의 제자라는군요. '전력투구'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yoonta 2007-02-09 22:20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그렇다면 일단 믿고 읽어봐야겠네요. 이상한 부분은 로쟈님이 검열해 주시리라 기대해 봅니다..^^
 

어제 유고슬라비아 시인 바스코 포파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문학동네, 2006)을 구입했는데, 정현종 시인의 '추천의 글'이 맨앞에 적혀 있었다. 시인이 경험도 나와 다르지 않아서 '작은 상자'란 시를 통해 바스코 포파를 처음 만난 인연을 고백하고 있었다. 한데, 다른 시들은 대략난감이었던 듯,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번에 번역되어 나오는 이 선집이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니 대체로 해독이 쉽지 않은데, 그 점은 영역자인 찰스 시믹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써, 그는 그 까닭을 포파의 시가 갖고 있는 세르비아적 전통 - 역사, 민속, 신화 등 - 이라는 배경과 시인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에서 찾고 있다.

인용문에서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는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가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게 어제의 일이다. 암튼 정현종 시인과 궁합이 더 잘 맞는 시인은 아무래도 스페인어권 시인들이고 그 중에서 파블로 네루다를 빼놓을 수 없겠다('정현종과 네루다'란 글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네루다의 시편들을 여럿 우리말로 옮긴 바 있는 시인이 이번에 더 보태서 두 권의 네루다 시집을 새로/다시 출간했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사실 청년 네루다의 대표작인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나대로 자세히 읽기를 시도해본 적도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CNO=0&PCID=492&CType=1&paperid=793966). 찾아보니 작년초의 일이다. 그때 참조했던 정현종 시인의 번역은 완역이 아니어서 다소 아쉬웠는데, 이번에 완역본 시집이 나왔다니 반갑다. 유고에서 아르헨티나로의 시적 여정을 이 겨울의 마지막 '여행'으로 삼아봐야겠다... 

경향신문(07. 02. 08) 정현종시인 네루다 첫시집 ‘스무 편의…’ 완역

시인 정현종씨(67·전 연세대 교수)가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정시인은 1989년 번역했던 네루다 시선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를 통해 네루다의 존재를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그후 네루다는 노시인이 우체부에게 시를 가르치는 내용의 영화 ‘일 포스티노’ 등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고, 그의 시선집도 94년 개정판이 나오는 등 스테디셀러가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종전의 시선집 번역을 가다듬어 ‘네루다 시선’(민음사)으로 제목을 바꾸고, 네루다의 첫 시집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21편을 모두 번역해 원래의 제목을 되돌려줬다. 국내에서 시선집 제목이었던 ‘스무 편의…’가 시집 제목으로 바뀐 것이다.

“개인적으로 네루다, 로르카(스페인), 릴케(독일)를 20세기의 위대한 시인으로 생각하며 그중 최고는 네루다라고 본다”는 정시인은 네루다 시집 ‘백 편의 사랑 소네트’(문학동네)를 이미 번역했으며 ‘충만한 힘’이란 만년의 시집도 새로 번역할 계획이다. 그는 네루다 탄생 100주년이던 2004년 칠레 정부가 전 세계의 문화인 100인에게 수여한 네루다메달을 받기도 했다.

“네루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시가 언어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생동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의 시를 통해 드러날 때 사물은 희희낙락하는 것 같고, 스스로의 풍부함에 놀라는 것 같아요.”



태국·중국·일본 등 극동 주재 영사를 지냈던 네루다는 광산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상원의원에 출마, 정치를 시작했고 아옌데 민주정권을 지지했던 현실참여 시인이었다. 초기 낭만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시는 후기로 가면서 역사가 들어있는 혁명시로 바뀐다. 그래서 민중 시인 김남주씨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됐을 때 네루다의 시를 틈틈이 번역해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88)라는 번역시집으로 내기도 했다.

그러나 서정 시인 정현종이 보는 네루다의 미덕은 남미의 풍성하고도 신비로운 자연 속에서 태어난 초현실주의적 상상력, 만물과 하나가 되는 힘이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책으로는 처음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된 시집 ‘스무 편의…’는 열아홉살의 시인이 지닌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랑시들로, 젊은날 사랑의 소용돌이를 열광적 호흡으로 노래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한 여자의 육체’ 일부)

정시인은 “‘터널처럼 외로웠다’는 말이 얼마나 신선하고도 놀라운 표현인가”라고 물으면서 “성욕의 충동에 따른 즐거움과 괴로움, 감정의 소용돌이가 시라는 형식을 통해 질서를 얻은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 “스무 편의 사랑시의 시로 끝났으면 밋밋하고 싱거웠을 텐데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덧붙인 게 묘미”라며 “사랑의 상실 없이, 사랑이 어떻게 열매를 맺겠는가”라고 말했다.(한윤정기자)

07.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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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인가 올초인가 '조중걸 교수와 함께 열정적 고전 읽기' 시리즈가 10권짜리로 갈무리되어 언론에 주목을 받은 바 있고, 나도 관련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같은 저자의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프로네시스, 2007)가 '지식 전람회' 시리즈의 한권으로 출간됐는데, '키치'와 관련한 문헌이 드물던 차에 요긴한 책이 한권 출간됐다는 인상을 받았다(물론 '지식 전람회' 시리즈가 대중적인 인문학을 표방하고 있는지라 말 그대로 '전람회'에 그치는 듯싶은 책들이 더러 있지만). 우연히도 이 책에 관한 리뷰들을 검색하다가 읽게 된 글 두 꼭지를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하나는 한겨레21에 실린 서평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강유원씨가 미디어오늘에 실은 'Book소리'이다. 저자 조중걸씨에 대한 궁금증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한겨레21(07. 02. 02)  우리의 값싼 낭만에 대하여

<열정적 고전 읽기>로 놀라운 해박함과 독서 편력을 보여줬던 조중걸 교수가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프로네시스 펴냄)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묵직한 문체로 현대사회의 키치에 대해 매우 독창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 조 교수는 키치를 단순한 ‘그림 쪼가리’가 아니라 근대 이후 우리 삶의 태도와 세계관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근대 이후 예술사와 철학사를 키치에 대한 다양한 작용과 반작용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키치란 무엇일까. 지은이의 비유를 빌리면 키치는 고전예술과 통속예술 사이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고급예술의 탈을 쓴 저급예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전예술은 감상을 위해 상당한 양의 교양과 긴장을 필요로 한다. 좋은 예술일수록 거짓 기만이나 타협을 하지 않고 진실을 보여준다. 반면 통속예술은 가장 저급한 현실 도피이고 오직 소비를 위한 문화이다. 산업혁명 이후 탈진할 정도의 노동시간에 짓눌린 시민들은 싸구려 감상을 통해 숨을 돌렸다. 키치는 위선적인 통속예술이다. 싸구려 감상에 호소하면서도 고급예술에서 한자리를 요구한다.

고급예술이 작품과 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을 전제한다면 키치는 작품과 독자 사이에 ‘환상’이 끼어든다. 예컨대 음악이 그 자체로 감상되는 게 아니라 헤어진 옛 애인과의 추억을 상기시킨다든지, 어떤 그림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떠올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것을 지은이는 키치가 불러내는 ‘이차적 눈물’이라 부른다. 키치는 이런 식으로 작품과 독자를 직접 대면시키지 않는 이중적 예술이다. 키치의 가장 큰 해악은 현실 옹호적이라는 점이다. 키치 안에서 세계는 늘 조화롭고 통일적이다. 키치는 대중들이 실존과 불안을 직시하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세계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이것을 슬로건으로 표현하자면 “아아, 인생은 아름다워라”이다. 지은이는 프랑크푸르트학파보다 훨씬 과격한 대중문화의 적이며, 키치문화의 고발자다.

키치는 지극히 근대적인 예술이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예술에서만큼은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제 자아실현은 소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예술은 대중에게 불친절하며 고도의 집중력과 몰입을 요구한다. 그러나 키치는 편안하고 달콤한 예술이다. 혹은 대중의 슬픔이나 우울을 싸게 팔아먹는 시큼한 예술이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이다.”

근대적 이성의 파탄은 키치를 번성시키는 토양이다. 신을 ‘불가지’의 영역으로 추방한 이성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함께 몰락했다. 합리적 세계라는 신념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키치는 이런 절망의 토양에서 자라났다. 키치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나와 세계의 화해를 주선한다. 거짓된 위안, 달콤한 사탕발림, 위선의 낙원…. 키치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실재하는 척할 뿐이다. 이 시대에 키치는 예술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사물들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상품의 사용가치와 아무 상관없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상품광고들, 온갖 양식들이 비빔밥처럼 병렬된 강남의 건축물들, 고객을 헛된 꿈으로 인도하는 백화점 등이 그것이다.

지은이가 제안하는 키치의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지은이를 따라 좀더 복잡하고 내밀한 예술사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키치에 저항하는 다양한 근현대 예술사조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의 인습성과 구태의연함, 자기만족, 부르주아적 허위의식 등에 내재한 키치적 요소들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했다. 현대미술의 기하학주의는 키치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가식적 진지함을 벗겨내려 한다. 인상주의자들은 인습으로 굳어진 시각상을 해체한다. 인상주의는 부르주아들이 세워놓은 가치의 전복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의 혹독한 반발에 직면해야 한다.

지은이의 논의는 키치를 해체하고 넘어서려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기법들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넘어서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가 있고, 자신을 부정하는 예술인 메타픽션과 실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네오리얼리즘 등이 있다. 후반부의 복잡한 논의에 길을 잃은 독자라면 지은이가 서두에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는 게 좋겠다. “언제까지 값싼 거짓 낭만과 삶의 역겨운 기만적 행복 속에 몸을 담그고 있을 것이냐.”(유현산 기자) 

미디어오늘(07. 02. 04) 석학에 관해 궁금한 두세 가지

대형서점에 가보면 ‘논술’이라는 항목에 꽂혀있는 책만 서너 서가를 넘는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분류된 경우이고, 저자 서문이나 띠지(책표지에 두르는 광고지)에 논술 관련임을 알린 것까지 치면 훨씬 더 많은 책들이 그 부류에 속하게 된다. 논술관련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나 출판사는 서점에 가서 서가를 한번이라도 둘러보는 게 좋을 듯도 하다. '저 많은 책들 틈에 끼어들 내 책을 어떻게 사람들이 뽑아들고 계산대로 가게 할까’를 고민하면서 말이다(*강유원도 그이들에 포함되는 것인가?).

논술 책에 가담하는 필자들도 정말 다양해졌다. 항생제를 많이 먹으면 내성이 생겨서 웬만한 약은 약발을 받지 않듯이, 중고등학생에게 논술을 가르치기에 딱 적당한 이들이라 여겨지는 사람들만이 아닌 이른바 석학들까지도 가세한 형국이다. 지난 연말 그 많은 논술 책 틈에 10권짜리 참고서가 덧붙여졌다. 띠지에 ‘생각의 폐활량을 높여라!-논술 달인을 위한 비밀 레시피’라는 문구를 단 <조중걸 교수와 함께 열정적 고전 읽기>가 그것이다.

어느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본 저자 소개는 다음과 같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중 프랑스로 유학하여 파리 제3대학에서 서양문화사와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서양예술사(미술사·음악사·문학사)와 수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With a View to George',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등이 있다.”

“논술 달인”을 만들기 위한 턱없이 강한 처방처럼 보였다. 공부라는 게 수준과 단계가 있어 그에 알맞는 선생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그의 저서 'With a View to George'라는 책을 외국서점에서 찾아보았다. 내가 검색을 잘못한 탓인지 찾을 수 없었다(*나도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하긴 모든 책이 다 검색되는 건 아닐 테니까).

그가 쓴 또다른 책인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를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1999년에 개마고원 출판사에서 펴낸 <인물과 사상> 11권에 같은 이름의 논문이 보였다. 거기서 몇 가지를 옮겨보면 이렇다. “키취, 그 이해와 극복-키취는 우리 마음 속에 있다(제10권)” “영상의 시대-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3부작(제11권)”, “관념의 시대 / 조송배의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 4부작(제12권)”(*강유원씨 덕분에 알게 된 건데, 나는 '조송배'씨의 글들을 이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쓴 이는 조중걸이 아니라 조송배였다. 개마고원 출판사의 저자 소개를 보았다. “파리 제3대학과 예일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했으며,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캐나다에 체류하면서 예술사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With a view to George'가 있다.” 나는 조중걸과 조송배가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올해 초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만한 인터뷰 기사가 어느 신문에 실렸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파리3대학(소르본) 유학, ‘스승으로 만나 친구로 헤어진’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서양예술사와 서양철학을 전공, 미국 예일대로 건너가 문학사와 수리철학으로 2개의 석사학위, 미술사 음악사 수리철학으로 3개의 박사학위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인터뷰에는 내가 궁금했던 것들, 이를테면 'With a View to George'라는 책은 언제 어디서 출간된 것인지, 그게 그가 썼다고 하는 “몇 권의 대학 교재(영문)”인지, 조르주 뒤비는 서양중세사 전공자인데 어떻게 그 밑에서 서양예술사와 서양철학을 전공할 수 있었는지, 1950∼ 60년대에는 리용, 브장송, 엑상 프로방스 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70년대에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던 뒤비가 과연 80년대에 파리 3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기는 했었는지, 예전에 <인물과 사상>에 쓴 글들이 있는데 그건 어찌된 것인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자질구레한 것들이지만 궁금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강유원)

07. 02. 06.

 

 

 

 

P.S. <열정적 고전 읽기>는 저자의 이력을 표나게 내세웠던 책들인 만큼 그 사실 여부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번 페이퍼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가령 '미술사 음악사 수리철학'이라는 각기 다른 분야의 박사학위를 세 개나 받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세 분야의 강의를 들어봤다, 정도는 가능하겠다). 강유원씨는 나보다 더 강렬한 궁금증을 가졌던 모양으로 덕분에, 조중걸씨가 조송배씨이며 예전에 <인물과 사상>에 몇 편의 글을 썼다는 이력을 알게 됐다(당시 <의미만들기와 의미찾기>(개마고원, 2001)의 저자 '조흡' 교수와 함께 기억에 남는 외부필자였다). 조송배/조중걸 교수의 '키치론'도 <인물과사상> 10호에 게재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는 그 확장판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필자는 이렇게 적었다. 

키치하면 우선 연상되는 게 시골이발소 그림이다.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 고풍스런 중세건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성모 마리아 상 등등. 요즘은 진부한 이발소 그림 대신 경음악 메들리로 편곡된 베토벤 교향곡, 뉴에이지, 판타지 소설과 영화 따위로 바뀌었다. 적당히 아름답고 감미로우며, 부드럽고 평이해서 오로지 안락함만이 느껴지는 키치. 단순성의 미학. 시큼하고 느끼한 그것.(...) 키치는 나름대로 고상함을 가장하고 있어 통속 대중예술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하지만 감상하는데는 굳이 고통스런 훈련,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치 않다. 한눈에 명확하고, 쉽게 각인 될 수 있도록 인상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키취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 즉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이다. 키취는 단지 숫자만을 고려하며, 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공리적 예술양식이다. 고도의 집중과 오랜 훈련을 요구하는 모욕적인(?) 고급예술과는 반대로 키취는, 감상자의 마음에 스미며 그 달콤함(때로는 시큼함)으로 추근댄다. 키취는 독창성과는 반대의 예술양식이고, 탁월함에 대한 범용함의 승리이며 천재에 대한 재능의 승리다.

그리고 이어서 몇 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상의 시대, 관념의 시대'를 다룬 연재에서 '사실주의'에 대한 대목.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어서 눈길이 간다. 참고삼아 읽어볼 만하겠다.  

사실주의자들이야말로 우리 앞에 영상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물과 사건과 인물에 대한 어떤 관념도 배제한 채로 그것들을 그 직접성의 빛 아래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사실주의가 거둔 이 풍부한 결실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가는 다른 한 명의 천재적인 사실주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이 지닌 이를 데 없는 매력이 그 내용에 있다고 잘못 인식되어 왔다. 이를테면, 추리소설적인 구성, 그로테스크하고 때때로는 악마적인 사건들의 연속, 주정적인 이국적 격정 등,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걸작이 못 되는 작품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그의 작품들의 이러한 요소에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해도 그것들이 걸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소설들의 두꺼운 볼륨과 거기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의 짧음의 대비는 충격적이다. 『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백치』나 모두 대단한 장편들이지만 시간은 지극히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읽어 나가기에 전혀 따분하지 않다. 오히려 대단히 격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채로운 사건을 중첩시킴으로써-호메로스의 『오딧세이』가 그렇듯이-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사건 속에서 한없는 대화와 마음의 움직임과 소품적 디테일을 중첩시켜 그 박진성을 얻어내는 것이다. 사건의 중첩이 강도를 높인다는 것은 중세의 로망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밀도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의 사건들을 이어나감으로써가 아니라 단일한 사건의 그 미세하기 짝이 없는 구성요소를 확산적으로 표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즉, 그의 작품은 사건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박진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기 때문에 박진적인 것이다. 독자는 지칠 줄 모르게 분출되는 그의 주인공들의 대화와 끊임없이 흐르는 디테일로부터, 개념상으로는 도저히 얻어낼 수 없는 생동하는 주인공, 발생 상태의 주인공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는 영상적 효과는 자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언제나 한 인물을 도입하기 전에 그 인물의 소개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이것은 그의 선배인 투르게네프나 푸슈킨이나 고골리의 양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어떤 계급에 속해 있으며 어떤 성격의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설명함으로써, 한 일문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내려버리는 비사실주의적 요소를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라임 라이트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곳을 어둡게 만드는 무대장치와 같다. 그러나 주인공의 실재는 어둠 속에서 뛰어드는 새로운 인물들에 의해 밝혀진다. 주인공들은 무대에 뛰어들자마자 애초에 제시되었던 관념상 속의 인물들과는 완연히 모순되는 모습을 드러낸다. 제시된 장면들은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관념과는 상반되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상이 관념을 배신하는 것이다.

방탕하고 광기어린 정열의 소유자로 소개되는 미쨔는 순진하고 자유분방한 영상적 제시에 의하여, 그의 전체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이상한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난폭한 생명력과 정열이 시적 민감성과 명예에의 존중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는 부친 살인범의 선고를 받는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고 죽일 생각까지 있었다. 따라서 그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동기 때문에 미쨔는 기꺼이 십자기를 진다. 이것이 받탕하고 난폭한 사람의 모습인가? 그러나 모순적으로 제시되는 그의 주인공들은 다른 작가의 일관된 주인공들보다 훨씬 선명하고 사실적이다. 우연적 모순이 오히려 내적 일관성을 주는, 사실주의가 지닌 영상적 효과라고 할 만한 것이다.

철두철미 악의 화신인 표도르는 오히려 가여운 속물, 교활한 야바위꾼, 질투에 눈먼 졸장부, 천박한 어릿광대로 묘사됨으로써 그 생명력을 얻는다. 악 그 자체에다 그것이 지닌 파렴치함과 난폭함에 덧붙여 누구에게나 발견되는 이러한 악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조명을 비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이류의 소설 속에서 얻게
되는 그 미이라 같은 악의 화신, 철두철미하고 악마적인 뉘앙스로서의 악인이 배제되고, 살아 있는 악의 화신, 생동하는 악의 화신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이들 주인공들에 대해 작가의 설명에 의해 도입된 정의는 그 정의로부터 독립된, 그리고 주로는 모순되는 그들이 생생한 '영상'들이 제시됨에 따라 독자와 더불어 생성(becoming)과정 중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관념과 영상의 두 개념상은 서로 부합되는 것이 아니 것이므로, 여기에 부딪힌 감상자들은 이 모순되는 사실들을 어떻게든지 통일시켜 정의해 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 인물상들을 통일시켜 이해하지 않는 한 늘 이 교차점에서 그들을 놓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 역시도 이 소설적 현실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떡해서든지 이해하려 애쓰는 한 대상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에게 기지의 인물로서 제시되었는가? 마치 한 의학자가 심장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내릴 때처럼 그렇게 정의가 내려진 인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한 개념적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와 소유로부터 독립된, 그리하여 복잡하고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개성을 지닌 채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을 포착하고 소유한 채로 삶을 살아나갈 수는 없다. 같이 살아나가야 하고 영원히 이해하도록 애써야 하고, 결정되어 있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생동하고 갱신되어가는 관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감상자가 그들의 비밀을 뚫고 육박해 들어오는 것을 쉽지 않게 한다. 그들은, 그들에 관해 형성시키고자 애쓰는 독자의 관념으로부터 독립하여 거기에 자신들을 부합시키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그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하나의 효과적인 실상으로 변모해 나간다. 그는 이러한 효과를 장황한 심리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전개되어 나가는 주인공들의 대화에 의해서 얻어낸다. 그의 모든 소설은 연속되는 사건의 중첩이라기보다는 장면의 중첩이다. 그 각 부분은 연극의 극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없이 많은 디테일을 설명 없이 제시함으로써 극적인 영상효과를 얻어내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인물을 창조했느냐가 아니라, 그 인물을 어떻게 창조 했느냐가 되는 것이다.
 


거대하고 통일적인 세계상이 해체되어가는 이 시대, 예술은 예술만의 것으로 수렴되는 이 시대, 그렇기 때문에 직관과 감각과 영상이 점점 더 중요성을 더해가는 이 시대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시대정신을 비교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닌 채로 그의 소설 속에 구현한 것이다. 원한다면 관심을 그가 가난한 간질병 환자였고, 도박벽 때문에 끊임없는 모욕 속에 산 사람이었고, 숭고한 인간정신을 가진 사람 이었고, 종교적 문제에 끊임없이 집착한 천재였다는 데에 둘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심오한 관념을 구축했다는 데에 둘 수도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알렉세이는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음란이라는, 키릴로프는 자살함으로써 신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관념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것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작가, 자기 직업에 충실했던 숙련된 장인이었지 그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실주의 시대의 소설적 기법에 있어 최대의 거장이었고 소설형식의 최고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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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6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2-06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06 09:49   좋아요 0 | URL
**님/ 곧 주저들을 낸다고 하니까 책이 말해주겠지요.^^ 겸사겸사 어제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감사.^^ 공들이신 만큼 많이 나갔으면 좋겠네요...

드팀전 2007-02-06 12:08   좋아요 0 | URL
키치에 대한 쿤데라의 정의가 가물 가물 떠오르네요. '키치에 대한 키치의 요구'같은 것이었는데.키치를 원하는 키치적 정서에 대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거울에 비친 키치의 모습에 만족하는 키치적 만족감'같은것....요즘은 키치론도 좀 희멀건해진것같지요?

로쟈 2007-02-06 14: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키치에 관해서라면 쿤데라도 일가견이 있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였던가요?.. 저도 가물가물이긴 하네요.^^

이네파벨 2007-02-06 16:10   좋아요 0 | URL
뭔가...흥미로운 냄새가 솔솔~~

경음악 편곡의 관현악곡(폴모리아류...토 나와욧..ㅠ,ㅠ), 뉴에이지 음악, 저급한 환타지 소설에 경기를 보이는 취향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키치에 대한 이야기는 어렵네요...
문외한인 저에게 예술은 그저...주관적인 저의 감성에 와닿으면 좋은 예술이고 그렇지 않으면 별로라고 생각하는지라...(솔직히 잭슨 폴락이니 백남준같은 분들의 미술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지만 때때로 잘 만든 광고 한편에는 진심으로 "인정"을 보내게 되더군요...이 분 관점으로는 실험적 예술가는 좋은 예술..광고는 무조건 키취...그런게 되는걸까요?)

BTW,
쿤데라는...모더니즘에 향수를 포스트모더니즘에 혐오를 보이지 않았던지요...
엘리트주의에 깊숙히 들어앉아있는 고단수 투덜이지만 미워할수 없는 사랑스러운 할아부지....쿤데라.....

2007-02-06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06 22:16   좋아요 0 | URL
**님/ 인용문의 오타는 한 군데 고치긴 했는데, 잘 눈에 안 띄네요. 아무래도 화면상으로 읽는 것과 프린트해서 읽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좀 있어서요.^^;
 

소피 칼? 왠지 들어본 듯도 한 이름이지만, 프랑스의 이 '저명한' 사진작가의 이름을 어디서 접했는지는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지난주에 그녀의 책 두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는 서평기사를 읽고 서점에서 두 권의 실물을 확인했을 따름. <뉴욕이야기>는 폴 오스터와의 공저인데, 소개를 읽어 보니 사연이 없지 않다. 오스터는 "자신의 소설 <거대한 괴물>에서 프랑스의 사진작가 소피 칼의 삶과 작품을 모델로 한 '마리아 터너'라는 인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 속 허구의 인물로 등장한 것에 매력을 느낀 소피 칼은 자신의 방식대로 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폴 오스터의 소설과 놀이를 즐기기로 한다. 이 작업은 총 7권으로 이루어진 <이중 게임>이라는 전집으로 소개되었는데, <뉴욕 이야기>는 그중에서 마지막 7권에 해당한다"고 한다. 과문한 건 내가 오스터를 별로 읽지 않은 때문인가 보다. 그래도 일단은 어떤 책인가 확인해두도록 한다. 

문화일보(07. 02. 02) 타인 시선 통해 나를 까발리다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진실일까. 프랑스의 저명한 사진작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소피 칼의 ‘진실된 이야기’를 읽으면 책 제목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번뜩 스친다. TV 인기 프로그램명이긴 하지만,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타이틀이 적당해 보인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진실된 이야기’는 소피 칼의 자전적 사진과 글로 구성돼 있다. 그녀는 책에서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한장 한장에 담겨 있는 사연들을 옆 페이지에 적어 놓았다. 아홉 살 때부터 마흔아홉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추억들을 적나라하게 펼쳐보이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비롯해 가족과 친구, 결혼생활과 이혼에 얽힌 ‘진실된’ 이야기는 너무나 내밀한 것들이어서 오히려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목욕 가운’이라는 제목 아래 적혀 있는 글(왼쪽 페이지엔 하얀 목욕 가운이 벽에 걸려 있다)을 보자.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가 내 방 문을 열었다. 그는 나의 아버지의 것과 같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흰색 타월로 된 긴 가운이었다. 그는 나의 첫 연인이 되었다. 내 앞에서 성기를 보이지 말라는 부탁을 그는 일 년 내내 들어주었다. 등은 괜찮았다.…나를 떠나면서, 그는 내게 그 가운을 남겨 놓았다.’

Sophie Calle, Autobiographical Stories (The Nude Model

‘면도칼날’에선 자신의 누드 데생을 보여주면서 ‘나는 매일 오전 9시에서 정오 사이에 나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매일 한 남자가 맨 앞줄 왼쪽 끝자리에 앉아 세 시간 동안 나를 데생했다. 그러다가 정확하게 정오가 되면 그는 호주머니에서 면도칼날 하나를 꺼내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기가 그린 그림을 세심하게 찢었다.… 이러한 광경은 열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열세 번째 날 나는 일하러 가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전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내면 한 구석을 날카롭게 드러내 보인다.



그녀는 왜 이처럼 자신을 까발릴까. 그녀가 사진과 글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문학평론가 심은진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소피 칼에게는 자신의 몸, 자신의 삶 전체가 허구를 만들어내는 작품의 대상이 된다. 타인에게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는 행위, 고의로 연출해내는 그 행위가 바로 자신이 만든 하나의 작품이다.… 자신의 삶과 육체를 타인의 시선에 드러내는 작업은 그녀에게 자기 존재를 주체에서 객체로 만들어,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게 한다.’ 자신을 객체화해 낯설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같은 허구의 세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소피 칼의 속셈이라는 말이다.

사진과 글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다. 사진이 현장성과 확실성을 담보한다면, 글은 한 컷의 평범한 사진이 들려줄 수 없는 내용을 풀어헤친다. 당초 프랑스에서 책에 담긴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었을 때, 관람객들은 여느 사진 전시회와 달리 한 작품마다 눈길을 돌려가며 오랫동안 쳐다보았다고 한다. 사진 옆에 붙어 있는 글을 읽고, 다시 사진을 보면 작품이 전혀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Sophie Calle, Autobiographical Stories (The Amnesia)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진실된 이야기’에 수록된 사진 작품 중 네 컷의 사진에서 신체 특정 부위가 박스처리돼 있다. 번역자의 부탁을 받은 소피 칼이 한국의 19세 미만 독자를 위해 직접 작업했다고 한다. 아직도 작품에 손대야 하는 한국의 ‘특수 사정’은 언제 ‘일반적 상황’으로 바뀔까.

또다른 책 ‘뉴욕 이야기’는 그야말로 실험정신으로 가득차 있다. 세계적인 작가 폴 오스터가 소피 칼에게 ‘뉴욕에서 아름답게 사는 방법’에 대해 적은 시나리오를 보낸다. 그가 권하는 네 가지 방법은 ▲미소 짓기 ▲대화하기 ▲걸인과 노숙자에게 배려하기 ▲한 장소를 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가꾸기 등이다. 소피 칼은 그의 조언대로 일상을 꾸려 나간다. 매일 거리로 나가 낯선 이들에게 미소와 말을 건네고, 샌드위치와 담배를 권한다. 또 길가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하나 선택, 꽃과 각종 물건들로 아름답게 가꾸고 관리한다. 이같은 작업에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뉴욕이라는 거대한 익명의 도시에서 타인과 자신의 삶을 긴밀히 연결시키는 것, 타인의 존재로 자신을 채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책은 증명하고 있다.(김영번기자)

07.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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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2-06 01:08   좋아요 0 | URL
꽤나 기대하고 산 책인데, 뭐랄까, 존 버거와 잔 모로의 작업같은 책일까? 하면서요. 저런 평이라면 대단하군요. 책에서는 '그녀의 요청에 의해' 폴 오스터가 저 네가지.를 보내 준 걸로 되어 있어요. 저도 폴 오스터를 많이 읽지는 않지만, 꽤나 심심하게 착한 이야기들.이고, 그걸 따라하는 소피 칼은 ... 차마 댓글에 못 적겠군요 ^^
근데, 정말, 소피 칼이 '저명한' 사진작가인가요??
게으르고, 관심 없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책날개에 있는 정도의 약력이면, 얼마든지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하긴, 폴 오스터가 찾아서 소설에 인용할 정도면 유명하긴 한건가? 여튼,'뉴욕이야기'는 진짜- 별로였어요. '실험정신으로 가득차 있다' 하기에는 참으로 빈약하기 짝이없는.. 사소한 범법.과 거슬림.이라고나 할까.요

로쟈 2007-02-06 08:24   좋아요 0 | URL
사진집들이 대개 심심하긴 한데, 하이드님 리뷰로 봐서는 매력이 없는 책인가 보네요...

2007-02-06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06 14:28   좋아요 0 | URL
**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엉뚱한 걸 퍼왔었군요.^^; 인용문에 소피 칼의 책을 읽고 있다고 돼 있어서 그녀의 책에 나오는 사진인 줄 알았습니다. 다른 사진으로 교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