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뜻밖의 책이 나온 걸 알게 됐다. <인간론>으로 잘 알려진 에른스트 카시러의 <문화과학의 논리>(길, 2007)가 그것이다. 흔히 '문화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카시러의 저작에 '문화과학'이란 문구가 들어간 것도 이채롭다(찾아보니 독어본 원제는 'Zur Logik der Kulturwissenschaften'이며 영어로는 <인문학의 논리(The Logic of the Humanities)>라고 옮겨진 책이다. 그러니까 카시러의 '문화과학'은 '인문학'과 유사한 개념이며 영어권의 '문화연구'와는 계보가 다른 것이겠다. 더 찾아보니 영역본은 <문화과학의 논리>라고 새로 번역돼 나왔다) . 김상봉 교수의 서평을 옮겨놓으며 몇 자 보탠다.

한겨레(07. 02. 23) ‘문화’라는 학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아는 것은 세계를 아는 것보다 어렵다. 세계는 눈앞에 펼쳐져 있어 바로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대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내게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낯설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으로서의 자기인식만이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의 삶을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삶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문화라 부를 수 있다. 문화는 인간성의 객관적 표현이자 실현인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를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는데, 이른바 문화과학이란 문화에 대한 학술적인 인식의 체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Cover

카시러의 책 <문화과학의 논리>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를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새로운 학문의 근본적인 곤경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문화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기 전까지 학문과 인식의 모범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자연에 대한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을 두 가지 방법론적 원리에 근거해서 해명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왔는데, 그 하나는 주어진 사실을 그 사실이 아닌 다른 원인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런 인과관계를 보편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인식의 이상은 세상만사를 외적 필연성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다. 대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외적 필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타율성과 수동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자연인식의 방법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삶의 현실태인 문화를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문화과학의 논리>를 관통하는 근본 물음이다.

생각하면 자연과학의 방법은 죽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나 합당한 것으로서 문화는 고사하고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데조차 쓸모가 없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생명현상이란 외적 필연성에 의해 떠밀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 생겨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아무리 생명현상을 외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에 따라 분석하고 해명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생명체의 발생과정일 뿐, 그 발생과정을 이끌어가는 근원적 힘과 원리인 생명 그 자체는 아니다.

생명이 그러한데, 인간의 일은 또 어떠하겠는가? 칸트가 말했듯이 자연은 법칙에 따라 운동할 뿐이지만 인간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한다. 그렇게 법칙을 인식할 수 있는 까닭에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타율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대상을 타자적 원인과 타율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려는 시도는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인간은 타자의 작용과 객관적 법칙 밖에 거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지배하는 법칙 그 자체를 대상화하고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줄 아는 존재인 까닭에 언제나 법칙 속에서도 법칙을 넘어서고, 타자성 속에서도 자기를 발견하고 형성하는 존재이다. 문화란 그런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이니, 그것을 학문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한 외적 필연성의 논리가 아닌 다른 학문 방법과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카시러는 이 책에서 그 새로운 학문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박식한 철학자는 문화과학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또 다른 학문 방법이 필요한지, 그 가장 기본적인 문제 상황을 다양한 시대와 학문분야들을 넘나들면서 명석한 필치로 소상히 설명한다. 어떤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려는 사람은 다른 것에 앞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인 문화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인간성의 신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을 위한 이상적인 길잡이이다.(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

07. 02. 22.

 

 

 

 

P.S. 카시러(캇시러) 입문서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외>(책세상, 2002)이다. 역자의 해설과 관련문헌 해제가 유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고본이어서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다. 역자인 오향미 박사는 카시러 전공자인데(국내에서는 최명관, 신응철, 박완규 교수 등이 카시러 전문가로 분류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카시러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에 비하면 독일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철학자의 속한다."(7쪽) 독일어 주저인 <상징형식 철학>(전3권)의 핵심을 압축/축약해서 출간한 것으로 알려진 영어판 <인간론(An Essay on Man)>(1957)의 출간 이후에는 오히려 미국에서 더 많이 연구되고 있다 한다(저자 스스로 축약해준다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론>은 국내에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서광사, 1988)로 번역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인간과 문화>라는 발췌역본  있었다). 최초 번역본은 <인간론>(민중서관, 1960)이었다. 이어서 나온 것이 <국가의 신화>(서광사, 1988)이며 모두 최명관 교수의 번역이다(<국가의 신화>는 아직 절판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좀 터울을 두고 나온 책들이 <계몽주의 철학>(서광사, 1995),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서광사, 1996), <루소, 칸트, 괴테>(서광사, 1996) 등이다. 완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가장 흥미로운 책이었다. 카시러 연구서로는 신응철 교수의 <캇시러의 문화철학>(한울, 2000),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철학과현실사, 2003), <카시러의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철학과현실사, 2004)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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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3 00:3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벌써 또 금요일이군요. 내일 한겨레를 사야겠습니다.

로쟈 2007-02-23 00:32   좋아요 0 | URL
'오늘'입니다.^^

2007-02-23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경향신문의 북리뷰를 읽다가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그린비, 2007)에 눈길이 머물렀다. 출판관계자를 통해서 이 책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는 진작부터 듣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동아시아 사상'은커녕 일본 근대사상에도 눈이 밝지 못하다. 마루야마 등의 이름을 일본의 근대사상가로 주워섬기는 것이니 아직 초급의 초식밖에는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야겠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과문한 것도 아니어서 국내 출간된 다케우치의 책은 <일본과 아시아>(소명출판, 2004), 그리고 <루쉰>(문학과지성사, 2003)이 전부인 듯싶다(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다케우치는 루쉰 연구자 다케우치였다). 전자는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이어서 출간 사실도 이번에 알았고 <루쉰>은 내가 산 책인 듯도 싶지만 기억의 공백 때문인지 감이 없다. 여하튼 '다케우치 유시미라는 물음' 자체가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인지는 리뷰나 읽으면서 알게 됐다. 한데, 경향신문의 리뷰는 기본사항들을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연이은 의문부호'들을 나열하고 있기에 좀 불친절하다. 지난주 서울시문의 리뷰를 먼저 읽어봐야 문맥이 잡힌다. '동아시아 저항사상의 계보'라는 문맥. 

 

서울신문(07. 02. 10)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지난해 국내에서 ‘근대 논쟁’ ‘해방전후사 논쟁’이 뜨겁게 불어닥치는 등 요즘 동아시아에서는 ‘탈근대’가 화두이다. 침략, 이식의 형태로 유입된 근대는 아시아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사상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진보주의와 동양의 민족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근대’를 사유한 일본의 비평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1910∼1977)의 사상은 우리에게도 유의미하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유럽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일본의 근대를 강력히 비판한 사상가로 유명하다.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근대화를 이루고, 자신을 유럽과 동일시하면서 근대화의 과정을 겪은 일본의 근대는 기본적으로 ‘저항’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일본은 어떤 저항이나 반성도 없는 패전을 경험했다는 게 다케우치의 생각이다. 일본의 패전 당시 중국에 있었던 다케우치는 일본군의 무저항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다.“일제히 통곡했다. 그리곤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눈을 뜨고 나서 그들은 일제히 귀국준비를 위해 몸단장을 했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한 다케우치는 루신(魯迅·1881∼1936)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루쉰 전문가이다. 최초의 저작이 1943년 발간한 ‘루쉰’이었고,65년 평론가 폐업을 선언한 이후 죽을 때까지 루쉰의 글을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평생 루쉰을 사상의 ‘참조점’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는 당대 일본내의 중국 및 중국문학 연구가 한학 중심이었던 것에 비춰볼 때 엄청난 차이점이었다.

이런 그가 루쉰을 통해 길어낸 사상은 ‘쩡자’ 다.‘쩡자’는 ‘저항’이라는 말로 옮길 수 있지만 ‘자기임과 자기이외임을 모두 거부하는’ 이중의 거부로 보인다.“아시아의 사상 자원은 겉으로 보기에 유럽에 대항하는 모습을 취하겠지만 반드시 ‘반유럽적’이지도 않다.”라는 다케우치의 말은 바로 이 ‘쩡자’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쑨거(孫歌·52)는 10년 이상 이런 다케우치의 사상에 매달렸다.‘루쉰-다케우치 요시미-쑨거’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저항’사상의 계보가 엮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재작년 일본어와 중국어로 펴낸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쑨거 지음, 윤여일 옮김, 그린비 펴냄)은 다케우치 사상, 루쉰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듯하다.(박홍환 기자)

경향신문(07. 02. 17) ‘타자’로 자기해체, ‘주체’로 자기재건

다케우치 요시미를 대면한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다케우치는 끊임없이 신원 증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소속 기관이 발부한 증명서를 가지고 가도, 관공서가 인증한 등본 서류를 제출해도, 다케우치의 반응은 싸늘하다. 쓰라린 비웃음만이 되돌아올 뿐이다. 무언의 눈빛으로 다케우치는 계속 추궁한다.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어찌 너의 주체성을 보증할 수 있느냐. 어떤 외적 근거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네 자신만으로 너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실질적인 증명 가능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물음을 자신의 물음으로 끌어안을 때 당면하게 되는 일련의 또다른 질문들. 지금껏 자명성과 안정성을 자신에게 부여해 준 근거들을 향하는 연이은 의문 부호.

다케우치가 평생 씨름하며 고투한 ‘주체’의 문제는 ‘주체와 세계’ 혹은 ‘주체와 타자’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객관성-관찰 가능성 등의 이름으로 주체와 대상 혹은 타자 사이에 거리를 확보하면, 주체에게는 안정적 근거가 마련된다. 이 안정성이 주체의 주체성과 활동성을 보장해 주지만, 그 대가로 주체는 세계-대상에서 이탈하고 분리된다. 세계-속에 존재하는 주체가 세계의 전체상을 가질 수는 없다. 지구를 보려면 지구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은 이미 세계의 전체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주체가 인지 가능한 방식으로 추상화하고 조작한 결과일 터이다. 통계 수치나 계량적 측정이 대표적인 수단이겠다. 주가 지수가 경제 상황의 전체상을 대신하고, 통계 수치가 현실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주체의 자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단적으로 이른바 국가의 정책이 시행되는 자리는 늘 여기이다. 국민의 대상화가 불가피하므로, 어떤 국가-정부도 국민의 의지와 수렴될 수는 없다.

다케우치 식으로 추궁하자면,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는 뼈아픈 자각을 전제로 할 때, 국가의 정책은 어떤 의의가 있고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다케우치는 말한다. “지식은 그것을 부정하는 계기 없이는 지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인문학이 정말 위기라면, 정말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에 자기 부정의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주체가 세계를 관찰하지 않고 대상-타자와 더불어 세계 속에 내재해 있다면, 세계가 움직이는 한 주체는 늘 유동상태에 놓인다. 여기서 안정적인 실체성은 존립하기 어렵다. 제도화된 개념이나 객관적인 지식도 분명 존재하고 또 필요하다. 그렇지만 주체-세계의 유동 속에서 이러한 실체성은 늘 부정될 운명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래야 배반당하지 않는다.

주체의 부단한 자기 갱신은 타자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 해체를 진행하면서도 타자를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를 재건하는 길. 이 길은 바로 “타자를 타자로서의 자족성에서 해방하는 동시에, 자기를 자족적 배타성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부단한 과정이다.” 다케우치를 대면하는 일이 고통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잠 들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달콤한 유혹과 자기 변명은 이미 수없이 유포되어 있지 않은가.

지난 20년 간 개혁 개방 시기 중국의 내적 혼란과 지식계의 변동을 몸으로 겪으면서, 바로 이 문제를 자신의 신체감각으로 예민하게 파악한 지식인이 이 책의 저자이다. 저자에 따르면 다케우치는 평가를 기다리는 역사상의 인물이라기보다는 당대 중국 및 아시아 지식인으로서 저자가 직면한 문제들을 대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질문법’에 가깝다.

다케우치의 명성은 무척 오래지만, 아무도 그 일을 선뜻 맡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당연히 다케우치 자신이 아무에게나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장 중문학자인 서광덕, 백지운 두 분에 이어, 젊은 패기의 윤여일씨가 고된 일을 자임하고 나섰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기억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제목처럼, “다케우치 요시미” 자체를 “물음”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너무도 절실하다.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루쉰이 그러했고, 저자 쑨거에게 다케우치 요시미가 그러했듯이.(류준필|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07. 02. 18.

P.S. 국역본에는 중국어판과 일본어판, 그리고 한국어판 저자 서문이 모두 붙어 있다. 그건 한국어판이 맨마지막에 나왔다는 뜻도 된다. 이미지는 일본어판(2005)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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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7-02-18 15:26   좋아요 0 | URL
좋은 글 퍼갑니다. 늘 신세를 지고 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7-02-18 17:31   좋아요 0 | URL
제 편의를 위해서 정리해놓는 것인데 도움이 되신다면 다행입니다. 앨런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베토벤 2007-02-19 12:04   좋아요 0 | URL
앞으로도 로쟈님이 '편의'를 계속 추구하셨으면 합니다. 저도 맘속으로 신세를 지고 있는 듯 하여서요. ^^;

로쟈 2007-02-19 18:58   좋아요 0 | URL
그러다가 '편의주의자'가 되겠는데요.^^
 

어제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과 함께 주문한 신간은 욜렌 딜라스-로세리외의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서해문집, 2007)이다. 저자나 역자 모두 생소하고 불어본의 번역이라서 망설여지긴 했지만, '토마스 모어에서 레닌까지'란 부제가 암시하듯이 러시아 근현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어서 일단은 '참고자료'로 구입을 결정한 것. 그러고 나서 리뷰들을 찾아보니 의외로 많이 뜬다. '유토피아'란 주제가 아직도 언론에서는 '먹히는' 이슈인가 보다. 한데 자세히 뜯어보니 리뷰의 시각이 제각각이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두고서도 '무리짓기'가 가능할 정도로. 두 가지 사례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리뷰를 차례로 읽어본다.

한국일보(07. 02. 10) 존재만으로도 큰 매력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 

오늘날, 유토피아는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떤 행태일까? 거칠게 말해, 책의 결론은 쓸쓸하다. 이상향에 대한 꿈 따위는 깨라고. 현실이 웅변하고 있지않은가. 베를린 장벽과 더불어 공산주의의 준거틀이 무너지자, 유토피아에 대해 유효하게 남은 것이라곤 미래에 대한 기억뿐이다. 궁지에 몰린 ‘최후의 인디언 부족’과 같은 운명에 놓인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 주어진 길이라곤 새로운 혁명밖에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와 미국의 강고한 패권주의에 내몰려 역사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만 같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조차도 끝인가.

그 출발은 당연히 토머스 모어의 저작 <유토피아>다. 일체의 사유 재산과 화폐를 부정하고 노동을 사회적 책무로 부과하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은 17, 18세기 계몽주의와 결합해 카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같은 평등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작품으로 계승된다. 감성적 차원의 초기 유토피아론들은 프랑스 혁명을 겪으면서 실천적 강령을 갖춰 간다. 평등 아니면 죽음도 불사한다며 기득권에 대해 총칼을 든 그라쿠스 바뵈프에 의해 도구화ㆍ합리화되는 길을 걷게 된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는 이어 생시몽 등 19세기의 선구적 공산주의 또는 무정부적 신질서론으로 모양새를 갖춰 나간다.

현실 사회의 원리와 공동체의 원리 중 어떤 것을 채택할지, 그들의 후예는 부단히 고민해 오고 있다. 폐쇄적 상업 국가가 될지, 사유 재산과 가족 제도가 사라지고 사랑과 노동은 모든 이해와 도덕 관계에서 해방되는 사회가 될지, 도대체 어떤 공동체적 사회의 모습을 취할지 그들은 현실 사회 질서에 대한 뜨거운 반명제들을 생산해 왔다. 그 열망은 오늘날에도 엄존한다. 프롤레타리아 없는 도시에서 모든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과 생활 수준을 향유해야 한다는 주장, 노동에서 해방된 유목민적 생활에의 강조, 나아가 모든 불합리와 억압이 일거에 사라진 ‘가짜 사회’와 그를 위한 어설픈 실험과 정교한 문학 작품 등.

어쨌든 확실한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다. 젊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반파시즘, 반인종차별주의, 반자유주의, 반제국주의 등 다양한 급진 운동은 유토피아와의 연관 없이는 설명할 길 없다. 또 현재 과학 문명이 일궈낸 가능성도 그에 동참한다. 이데올로기의 틀을 깨고 나온 새로운 전망, 즉 인터넷을 통한 가상 공간 등에서 새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라.

아무 데도 없는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원칙. 공교롭게도 우리 시대가 찾아낸 새 비전은 토머스 모어가 제시했던 저 원칙으로 회귀 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토피아라는 허망한 꿈과 유토피아만이 줄 수 있는 가능성 사이의 방대한 공간을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모른 척 해오지 않았는지를 책은 묻고 있다. 현실이 가능성 보다 억압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존재 가능성만으로도 끊임없는 매력이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거지는 대안적 공동체의 비전도 결국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실질적 근거를 두고 있다.(장병욱 기자) 

중앙일보(07. 02. 10) 그대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꾸나

현실과는 달리 행복한 세상, 그야말로 꿈같은 사회를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16세기 악덕 귀족의 횡포에 분노한 영국의 '모범 귀족' 토마스 모어가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간 이상적인 사회를 그린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파리10대학(낭테르)의 사회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유토피아라는 매혹적인 개념의 역사와 본질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풍요'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서로 상충하는 두 열매를 동시에 따먹으려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반영한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인 '인민의 낙원'은 그런 모순 때문에 현실에서 사라졌다.

꿈꾸는 것은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 초 논객인 앙드레 고다르는 '형제애로 단결된 유럽이 십자군의 기치 아래 문명과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꿈을 꾸었다. 조국.노동.가족.종교라는 예언자적 구호로 가득 찬 그의 사상은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즘의 바탕이 됐다.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구현해 보려는 사람도 많았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조반니 로시는 '사회적 화학실험실'이라는 공동체를 세우고 농민들에게 사회주의를 주입,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무정부주의자 세바스티앙 포르는 어린이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고 1904년 시골에 교육공동체를 세워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1854년 빅토르 콩시데랑은 미국 텍사스에 땅을 사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다.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몽상가들은 실현 가능성은 따지지 않으며, 현실과 상상을 교묘하게 섞어 사람들의 혼동을 유발한다는 지은이의 지적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의 태반은 새로운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 정치시스템의 위험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야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뜻으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미권이 아닌 프랑스의 학자가 지은 책답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사상들이 상당히 낯설다. 그런 만큼 자극도 신선하다.(채인택 기자)

07. 02. 11.

P.S. 일단 타이틀에서 두 리뷰의 방점이 어디에 놓일지 암시된다. 전자는 역사상 수많은 시도와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의 매력과 그 희구의 불가피성을 시사한다면, 후자는 그 매력보다는 '실패'에 초점을 둔다. 문제는 두 가지이다. (1)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는 언제나 나쁜 결과를 낳았다. (2)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꿀 수밖에 없는 나쁜 세상이다. 과연 미덕은 현재의 나쁜 세상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하지만) 미래의 유토피아, 혹은 '나쁜 세상'으로 뛰어드는 것인가.

 

 

 

 

유토피아란 주제와 관련해서 예전에 읽은 책은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창비, 1999)와 자코비의 <유토피아의 종말>(모색, 2000)이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와 함께 이번에 더 읽어보려고 하는 것은 <유예된 유토피아, 공산주의>(부키, 2005)와 모처럼 나온 국내저작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책갈피, 2007)이다(후자는 엊그제 주문했다). 중량감 있는 책들은 아니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데에는 얇은 책들이 더 유용할 때가 있다.

L'Utopie ou la mémoire du futur, De Thomas More à Lénine : Le Rêve éternel

참고로, 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이번에 번역된 <유토피아>의 저자 로세리외는 "파리 10대학(낭테르) 사회학과 교수"이면서 "공산주의와 유토피아 사상 전문가"라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 아마존에서 검색되는 책은 이 책 한권이다. '전문가'가 되는 루트가 따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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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1 19:17   좋아요 0 | URL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쟁겨두어야 겠네요. :) 퍼갑니다.
 

엊그제 구내서점에서 본 신간은 데이비드 베레비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이다. '우리와 그들'의 구별방식에 대한 인류학적, 심리학적 고찰쯤으로 보였는데, 주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만 부피가 좀 있는 책이라는 생각 정도. 한데, 언론에 뜬 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뭔가 흥미로운 글감이 되겠다 싶어서 구입을 결정했다. 키워드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부족적 감각'이다('민족주의'라는 말보다는 근본적이지 않은가?). '부족의식' 혹은 '끼리끼리의식'. 국역본의 제목엔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지만 원서는 부제는 '당신의 부족 심리를 이해하기(Understang your  tribal mind)'라고 돼 있다. 원서의 서평을 잠깐 읽어보니 주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나 베레비의 책은 다양하고도 풍부한 사례를 제공해준다고 한다. 아마존을 검색해봐도 이 책은 그의 처녀작처럼 보이는데,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를 갖게 한다.

뉴스메이커(07. 02. 13)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무리를 짓고 집단 혹은 부류에 속하며 산다. 혼자 동떨어져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리는 결코 어느 하나에 국한하지 않는다. 인종, 종교, 민족, 계급에 따라 한 인간이 여러 개의 부류에 속한다. 더욱이 현대사회에서 ‘무리’는 나이, 직위, 정치이념에 따라 더욱 세분화된다. 가정을 갖고 있는 40대 남성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지역사회에서, 직장에서, 학부모 모임에서, 동호회에서, 정치이념에서 여러 무리에 속할 수 있다. 우리도 각자 서는 위치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무리에 속할 수 있다. 무리 속에서 개인은 ‘우리’라는 표현을 아주 쉽게 쓰며 ‘우리’와 다른 사람들은 ‘그들’ 또는 ‘적’이 된다.

이러한 무리·부류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본질적으로 뜻이 맞기 때문에 자연스레 형성된다.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다. 하지만 코드보다 더 중요한 것요소가 있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의 저자 데이비드 베레비는 사람들이 한 무리·부류를 형성하는 데에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가 무척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무리·부류는 나의 위치에 따라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거나 본의 아니게 무리에서 이탈해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새로운 무리·부류에 합류할 수도 있다. 

 

베레비는 이 책에서 인류학부터 신경과학까지 여러 분야를 접목해가며 인간의 ‘부족적 감각’을 설명한다. 어디든 부류에 속하고자 하는 ‘부족적 감각’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다. ‘부족적 감각’은 당연히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디든 속하고 싶어하는 ‘부족적 감각’은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부족적 감각’의 가장 큰 폐해는 뻔히 잘못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부류에 섞여 자기의 뜻을 접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적·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따금 자기가 동의하지도 않는 무리에 속해 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무리짓기는 인간의 주관에 좌우되는 것보다는 놓인 상황에 따른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또한 ‘한 부류는 외부에서 말하고 평가하는 것처럼 되어간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를테면 ‘한국인은 근면하다’ ‘B형 남자는 이러이러하다’는 등 외부의 평가에 따라 원래 그렇지 않은 부류도 점점 그렇게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무리의 생각이 옳다고 느끼고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면 여전히 그때 옳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그때 달리 할걸’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제일 경계해야 할 일로 드는 것은 동지와 적으로 분류하는 ‘무리짓기’이다. 오늘날 ‘코드’는 영원히 맞을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드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무리는 언제든지 해체되고 새롭게 조직될 수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상황만 봐도 이는 명백해진다. 불과 몇 년 전 창당 당시의 뜨거웠던 정신은 식은 지 오래고 무리별로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 아닌가. 끼리끼리 무리를 형성하고 다른 무리를 적으로 분류하는 행동은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적은 바로 우리’라는 점, 이것이 저자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임형도 기자)

07. 02. 10.


 

 

 

P.S. <우리와 그들>의 내용을 좀 읽어봐야겠지만, 내가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로 얼른 떠올린 것은 '부족적 감각'이 문명의 수준으로 확대된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김영사, 1997)과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룬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동문선, 2004), 그리고 그 기원에 있어서 주체의 불완전성이란 객체의 불완전성의 반영/반복이라는 걸 보여주는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까지이다. 각각 정치학, 철학, 정신분석학으로 대별될 수 있겠다. 거기에 <우리와 그들>의 심리학/인류학을 보태 읽고자 하는 것. '계획'은 언제나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런 계획마저 없다면 나의 책읽기는 한 뼘 이상 더 게을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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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10 21:52   좋아요 0 | URL
"문명의 충돌"을 그렇게 엮어 읽는 것 꽤나 신선하네요..^^
근데 문명의 충돌은 '정치학'이라기 보다는 헌팅턴 스스로 부족적 감각을 문명의 수준으로 체현한 것에 가깝지 않을지... ㅎㅎ
곧 새학기 시작인데 계획한 바 최대한 이루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7-02-10 22:03   좋아요 0 | URL
제 짐작도 그런 것인데, 자세한 건 들춰봐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곧 새학기'라서 거의 '플랜 임파서블'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sommer 2007-02-11 00:31   좋아요 0 | URL
'무리짓기'를 근본적 적대의 '강팍한' 차원으로 이해하려는 무리들과 문화 인류학적 혹은 하위 문화의 '유연함'으로 파악하려는 무리들로 대립구도를 만들어 볼 수 있겠네요. 여기에 칼 슈미트의 '적과 친구'의 관계는 두 곳 모두로 통하는 입구가 될 수 있겠네요.

로쟈 2007-02-11 00:35   좋아요 0 | URL
suture님도 이 참에 흥미로운 플랜을 한번 세워보시죠.^^
 

어제 <섹스와 공포>,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등과 함께 주문한 책은 손종섭 선생이 엮은 <손끝에 남은 향기>(마음산책, 2007)이다. 문화일보의 북리뷰를 보고 무슨 책인가 하여 알라딘에서 확인해봤다. '한시 번역'의 달인이라 할 정민 교수조차도 이런 추천사를 남기고 있었다: "선생의 작업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나는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읽었다. 선생의 글을 펄떡이는 물고기 같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 젊은이의 감수성도 그 앞에서는 그저 머쓱할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큰 어른이 가까이 계신 것이 내 큰 복이요, 우리 문화계의 자랑이다." 몇몇 번역시들은 이러한 상찬이 허사가 아님을 입증해준다. 내가 읽은 리뷰를 같이 옮겨둔다.

문화일보(07. 02. 09) 우리말로 옮긴 漢詩의 감칠맛

남녀 문학인 몇 사람이 술을 먹는 자리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이 화제가 됐다. 각자가 자신의 미관(美觀)을 피력하는데, 소설가 김훈씨의 한마디가 압권이었다. 난, 젊지도 늙지도 않은 여성이 겨드랑이 아래의 흰 살결을 드러낼 때 눈이 부셔서 어쩔 줄을 몰라 하지. 김훈씨의 말에 좌중은 실소했으나, 그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의견을 다시 펼쳤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익살을 전하는 독특한 화법의 소유자다.

조선시대 문신인 유영길(1538∼1601)도‘절구질하는 아가씨(春杵女)’의 겨드랑 밑 흰 살결에 매료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절굿공이 사뿐사뿐 드놓는 연약한 팔/약방아 찧던 월궁 솜씨 여기서도 그대로고!/깁적삼 들릴 때마다 드러나는 저 살결!’

유영길의 한시를 이렇게 우리말로 옮긴이는 올해 만 89세의 한학자 손종섭옹이다. 손옹은 시를 해설하며 이렇게 적었다. ‘감출수록 신비롭고 거룩해지는 반면, 드러낼수록 알량함에 시틋해지는 여체!’

이 책 ‘손끝에 남는 향기’는 손옹이 선인들의 한시(漢詩) 280수를 우리말로 옮기고 감상을 덧붙인 것이다. ‘사랑’‘이별’‘기다림’‘그리움’‘회고’‘무상’‘정한’‘해학’‘달관’ 등 18가지 주제로 시를 나눠 담았다. 표제시는 고려말 문신 이제현이 고려가사를 한역한 것을 손옹이 현대어로 옮겼다.‘수양버들 시냇가에 비단 빨래 하노라니/말 탄 선비님이 손잡으며 정을 주네./손끝에 남은 향기야 차마 어이 씻으리?’

손옹의 한시 번역과 해설은 우리말의 진수를 보여준다. 한문학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는 “선생의 글은 펄떡이는 물고기 같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난다”고 상찬했다. 손옹은 책 머리글에서 “(한시도) 본디는 정감 어린 고운 우리말이었건만, 부득이 한자를 빌려썼던 것”이라며 “고운 우리말로 말문만 열어주면, 굽이굽이 정에 겨운 사연들이, 실꾸리에서처럼 하염없이 풀려나온다”고 말했다.

손옹의 번역은 한시를 시조 가락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기존 번역과 뚜렷한 차이점을 보인다. 서화담과 황진이가 주고 받은 시처럼 양장시조로 번역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전통적인 3장시조로 옮겼다. 한시에 숨어있는 선인들의 정감을 되살리기에 적절한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옛 시절에 한시를 즐겼던 문신들뿐만 아니라 아녀자, 천민, 기녀들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들어있다는 것. 손옹은 “설움 받던 계층의, 설움에 겨운 목소리들을 더 많이 발굴해서 실었다”고 밝혔다.(장재선 기자)

07. 02. 10.

P.S. 책은 내주에나 받아보게 될 터이니 소개된 한시 한 수만 더 옮겨오면 이렇다.

버들개지 하나
- 노긍

어디선지 버들개지 하나 사뿐 떨어지기에
무심결에 손 내밀어 고이 접어들고서는
유심히 들여다보다 도로 던져버리네.


怪來楊柳花 輕薄墮當地
偶然拾得之 促視還復棄

「子夜曲」

 

 

 

 

시 번역에 있어서 역자 또한 시인이어야 함을 입증해주는 사례이겠다. 그간에 손종섭 선생이 낸 책들 가운데 <다시 옛 시정을 더듬어> 같은 책은 서점에서 자주 봤던 것이지만 그저 그런 번역이겠거니 해서 특별히 주목해보지는 않았었다. 우리 고전과 한시 번역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이라면 전범이 될 만한 스승이 있어서 부듯하겠다...

 

 

 

 

문득 생각나서 보태자면 작고하신 김달진 선생의 고전, 특히 선시 번역 또한 일가를 이룬 것이었다. <당시전서>와 <한산시> 등의 번역시집들을 나는 갖고 있었다(시골집 어디엔가 꽂혀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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