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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르크 왕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왕은 아름다운 이솔다의 죄를 물러 화형대에 매달고자 하는데 문둥이들이 왕에게 주청하기를, 화형주 형벌은 너무 가벼운즉 그보다 무거운 형벌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솔다를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저희가 이솔다를 공유하겠습니다. 저희 아픔이 저희 욕망을 태우노니, 그 여자를 저희 문둥이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문드러진 상처에 달라붙은 저희의 남루를 보십시오. 그 여자는 다람쥐 가죽에다 보석이 박힌 옷을 입고 폐하의 궁전에서 호사를 누리다 문둥이들의 궁정을 보게 되면, 그리고 저희 무리로 들어와 함께 기거하게 되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깨닫고 오히려 화형주 밑의 화목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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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실사에 비춰본 '신한사태'] 

후계구도 둘러싼 싸움은 누구 하나 이로울 것 없는 이전투구 

<2인자.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은 그렇게 불렸다. 2인자는 한순간에 인생의 멘토를 잃었고 아끼는 후배에게서 공격을 당했다. 신한은행 측은 신 사장이 은행장 시절 부당 대출로 회사에 손해를 기쳤고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의 자문료를 횡령했다고 주장했다. 신 사장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가운데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건을 라응찬 회장과 신 사장의 권력 다툼으로 해석한다. 강력한 결속력을 자랑하던 신한의 리더 그룹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이유는 뭘까. 라 회장과 신 사장의 거취는 어떻게 판가름날까. 역사 속에서 실마리를 풀어 봤다.<편집자>> 

-군주정에서는 비록 형제지만 군주가 된 왕자와 되지 못한 왕자 사이에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정도로 괴리가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이로 인해 왕자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진다. 이를 막기 위해 태자 제도가 생겼다. 미래의 임금인 태자는 군주정에서 명실상부한 2인자지만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래도 태자는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대개 적장자가 태자가 되지만 군주의 의향에 따라 바뀔 수 있으므로 군주와 태자 사이가 원활하지 못하면 태자 자리를 놓고 아들간 암투가 벌어졌다. 나쁜 소문을 퍼트려 태자를 실각시키려는 음모도 많았다. 이 때문에 부자인 군주와 태자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곤 했다.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신한금융지주의 한 중역은 라응찬 회장과 신상훈 사장의 관계가 원만했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암투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 것은 라 회장이 4연임을 결정하고 장기집권에 들어간 때부터였다고 한다. 물려주는 이도, 물려받는 이도 '후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자 교체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중국황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 가운데서도 청나라 강희제(재위1661~1722)와 한나라 무제(재위BC140~87)는 매우 비극적이었다. 

  청의 4대 황제로 남명 정권을 무너뜨리고 중국 전토를 통일해 청조를 반석에 올려놓은 강희제는 아들이 35명이었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 윤잉만 황후가 낳은 자식이었다. 강희제는 윤잉을 유독 총애해 이듬해 태자로 지명했다. 당시 강희제는 만21세(1654년생)였으므로 태자 선정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태자는 한문에 능총하고 기마와 궁술에 뛰어난 청년으로 자랐으나 점차 품행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고 있다는 소문이 궁중에 떠돌았다. 소문은 강희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고리타분한 유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자란 태자는 장성하자 패거리를 만들었다. 태자는 유흥비를 마련하려고 비밀리에 청탁을 받아 강희제에게 부탁했다. 자식 사랑에 눈이 먼 강희제가 청탁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태자를 중심으로 당파가 생겼다. 급기야 태자가 정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강희제는 강희 47년(1708)가을 태자를 불러 폐위 선고를 내린다. 폐위 선고를 한 후 강희제는 신하들 앞에서 통곡했다고 한다. 

  금융권에서는 이번 사태를 두고 이백순 신한은행장이 거사를 감행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라 회장이 이번 일의 진행 상황을 몰랐을 리 없다고 수군댔다. 라 회장은 묵묵부답이다. 

  강희제는 폐위된 태자가 반성하는 빛을 보이면 복위시킬 생각이었다. 결국 다른 황자들이 태자가 되려고 노골적으로 암투를 벌이자 이듬해인 강희 48년 봄 다시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1인자와 2인자 사이의 미요한 간극 

태자의 추종자들이 활개를 쳤고 태자가 쿠데타를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음모는 처음에 태자의 반대파가 지어낸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사실이 됐다. 태자파는 황제가 의심하고 있으므로 다시 폐위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정변 음모를 진행했다. 강희51년(1712)강희제는 다시 태자를 폐위하고 구금했다. 

  강희61년(1722)11월 건강이 악화된 강희제는 북경에 있는 아들을 불렀다. 모은 아들은 3자, 4자, 7자, 8자, 9자, 10자, 12자, 13자로 모두 여덟이었다. 대신으로는 융과다가 유일했다. 강희제는 융과다에게 누구를 후계자로 정했는지 전했다. 후계자는 4자 윤진이었다. 그가 옹정제(재위1722~1735)다. 

  그러나 곧 옹정제가 속임수로 황제가 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강희제가 자신을 닮아 총애하던 12자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쓴 종이를 옹정제가 훔쳐 변조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까지도 명확히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이 음모설은 당시 옹정제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옹정제는 이른바 '태자밀건법'을 곤안했다. 태자를 정하되 발표하지 않고 그 이름을 종이에 써서 상자에 넣어 보관했다. 황제가 임종하면 상자를 여는 방법이다. 이 제도로 청에서 더 이상 태자파는 생기지 않았고 여러 왕자는 늘 수양하고 자제하는 자세를 보였다.  

  라 회장이 태자밀건법을 완수한 데서 이번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느 시중은행 임원은 "후계구도를 점칠 수 없는 상황에서 2인자, 3인자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한무제 역시 태자와 갈등으로 일족이 죽음을 맞는 비극을 겪었다. 한 무제 유철에게는 진 황후가 있었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 고대하던 아들은 BC128년 손위 누이의 집에서 첫눈에 반해 데려온 가기 위자부가 낳았다. 무제는 아이 이름을 유거라 지었다. 이후 진 황후는 BC130년 폐위되고 위자부는 황후로 책봉됐다. 유거는 만 6세에 태자가 됐다.  

  순행과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무제는 태자가 15세가 되자 자신이 수도를 비운 동안 섭정을 하도록 했다. 온화하고 신하의 말을 경청하는 태자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다 흉노 원정으로 공을 세운 태자의 외삼촌 위청이 BC106년 죽자 태자와 의견 충돌을 빚었던 관료가 그를 폐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평소 신선술과 미슨을 믿던 무제는 노년이 되자 편집증이 심해 졌다. BC91년 병상에 누운 무제는 자신의 병을 측근들의 무고(주술로 특정인을 해치는 행위)탓이라고 여겼다. 비밀경찰 총수인 강충은 이를 이용해 정적을 제거해 나갔다. 우선 무제의 두 공주와 위청의 아들이 처형됐다. 태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 강충은 태자의 궁전에 주술 인형을 묻어 놓고 무고의 증거를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황제를 무고하는 것은 대역죄였다. 

  태자는 스승인 석덕과 대책을 논의했고 석덕은 시황제의 태자 부소가 억울하게 죽은 예를 들며 거병을 권고했다. 태자는 해명하러 별궁에 있는 무제를 찾아가려 했으나 강충의 사자가 이미 별궁으로 갔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일으켜 강충을 죽였다. 그러자 태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오해한 무제는 진압을 명령했고 수도 장안에서 5일간 시가전이 벌어졌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태자는 장안을 탈주했고 그의 처자는 모두 죽었다. 

  한 젊은 관리가 목숨을 걸고 태자를 변호해 무제의 노려움은 누그러졌으나 사면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태자 유거는 은신처가 포위되자 목을 매 자살했다. 위 황후도 폐위될 것을 알고 역시 자살했다.  

  이번 일이 사상 초유의 사태라 불리는 이유는 30년을 이어온 '신한'의 이미지 실추를 감수하면서까지 신 사장의 행보를 틀어놓은 라 회장의 결단이다. 검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라 회장, 신 사장, 그리고 신한이 모두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게 금융가의 관측이다. 

  2년 후 무제는 태자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깨닫고 강충일족을 처형했다. 유거의 유일한 손자이며 후손인 유순은 훗날 소제(재위BC87~74)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됐고 유거를 복권시켰다. 유거는 여채자(참회하지 않는 태자)라 불린다. 

  "(라회장이 신사장을)미워서 미워한 게 아니다."신한금융지주 고위 관계자는 조직의 권력 구도를 한탄했다. 이 관계자는 "이행장이 지주사 사장이 된다 해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신한은 되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일까. 

   이윤섭 역사연구가 <천하의 중심 고구려>등 저술         

-<이코노미스트>제1054호p26~27- 

역사의 한 면을 통해서 오늘날의 사건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너무 

도 빛난다. 과연 후계구도와 관련된 위의 두가지 일화가 신한사태 

와 맞아떨어지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이해의 단초를 역사에 

서 찾는 자세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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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은 1784년 <발해고>를 완성하였다. 그가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을 다녀온지 6년이 지난 뒤였다. 그의 역사의식은 남달랐다. 

틈나는 대로 유득공은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역사는 책장속에 고이 모셔져 있기보다, 팔딱팔딱 뛰는 아이들의 가슴 속에 자리해야 한다고 여기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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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에서 기상이변은 어김없이 흉작을 몰고왔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위기를 유발했다. 14세기 중반 유럽대륙을 공동묘지로 만들어버린 페스트는 기온강하와 홍수빈발로 삶의 조건이 악화된 가운데 번식력이 큰 쥐 떼에 의해 전파된 재앙이었다. 유럽은 인구의 3분의 1인 3000만 명을 잃었고 북미와 아시아에서도 4000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1918년에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도 그 이전의 기상조건과 맞닿아 5억 명이 감염되고 5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폭발도 기상이 민생과 정치에 어떤 충격을 주는지 잘 보여준다. 당시 화산재로 인한 기온 강하는 미미했는데,(0.4~0.7) 북반구에서는 이듬해 여름이 사라졌고, 냉해가 3년간 계속 됐다. 굶주림과 전염병은 폭동과 난민사태를 빚었다.  

영국엘리자베스1세 치세에서도 1590년대 기상악화로 기근이 닥치는데 여왕이 귀족과 부자에게 수요일과 금요일의 저녁을 굶으라 하고 기부토록 해서 민심을 살폈다는 기록이 흥미롭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빵값이 가장 비쌌다는 기록도 예사롭지 않다. 

 

<동아일보>2010. 9. 14. 시론 '기후변화 대응체계 발등의 불' KAIST 초빙특훈교수 전환경부장관 김명자의 글 중에서 

 

  역사에서 먹을 것과 기후의관계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가지 기상이변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특히 '소빙하기'이론은 무시하기엔 너무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왕조실록이나 역사서에서 기후와 관련한 내용으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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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은 황해도 금천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항상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하여 '연암'이란 이름이 붙은 바위였다.  

언뜻보면 선생은 거대한 바위와도 같은 인상을 풍긴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선생은 벌어진 어깨에 등은 꼿꼿하여 앉아계실 때면 더욱 그애 보였다.  

깊은 주름이 진 이마와 불그레하고도 긴 얼굴은 고집스러워 보이고, 길게 쌍꺼풀진 눈과 듬성듬성한 구레나룻은 더욱 강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한 번 입을 열면 이내 방 안에 봄 햇살처럼 명랑하고 쾌활한 기운이 감돌았다. 굵은 눈매는 어느새 가늘어지고 활짝 웃는 얼굴에 치켜진 구레나룻이 햇살처럼 퍼졌다. 마치 봄기운을 안고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 듯 싶었다.  

세상에 가장 먼저 봄기운을 안고 날아오는 새는 제비이다. 

   <책만보는바보> p172,173 

 

연암 선생은 1780년에야 뒤늦게 중국에 다녀오셨다. 북경을 지나 중국황제의 피서 행궁인 열하에까지 이르는 긴 여행이었다. 선생은 그때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글로 남겼는데, 바로 <열하일기>이다. 

....그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평소 중국의 제도와 문물에 대한 선생의 생각, 중국과 우리의 역사,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연암 선생 특유의 명쾌하고 논리적인 문장과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해학까지 곁들여져, 한번 손에 들면 놓기가 어려웠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을 오랑캐라 멸시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암 선생은 확실히 볼 것은 보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보기 좋고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냐... 

...깨어진 기와 조각과 냄새나는 똥거름이 가장 볼 만하더이다.... 

....중국 사람들이 깨어진 기와 조각 한 장이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담을 쌓는 데 쓰고, 더 작은 조각들은 땅에 깔아 비가 와도 질척이지 않게 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신 것이다. 그저 낯선 곳의 풍물을 구경 삼아 간 것이라면,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광경이다. 

                 <책만보는바보> p178~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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