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 유재현의 아시아 역사문화 리포트, 프놈펜에서 도쿄까지 유재현 온더로드 1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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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이 침묵하는 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단 한 번도 책임을 묻지 못하고 다만 학살의 진상만을 밝힌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미 흙이 되어버린 주검의 살과 뼈들이, 오래전에 바람과 파도가 삼켜버린 비탄의 신음 소리들이, 구천을 헤매야 하는 그 수많은 영혼들이, 아니 그보다도 역사가, 그렇게 밝혀진 불완전한 진상만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중정기념당에 있는 장가이섹의 그 오만한 좌상 앞에서 고개를 들고 물었던 똑같은 질문을 2.28기념관에서 다시 묻고 있었다. 그건 2.28학살에 대해서이기도 했지만, 1980년 한반도의 남단 광주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학살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자행되었던 학살들, 나아가 세계사에 은폐되어 있는 세상의 모든 학살들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224-225쪽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전리품으로 1895년의 시모노세키조약을 얻었다. 이 강화조약으로 청은 일본에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랴오둥 반도, 대만과 펑후제도를 양도했다. 대만은 이때부터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놓여야 했다. 일본의 식민지 쌍생아로서 조선과 대만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1916년까지 대만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이 존재했고, 1928년에는 대만공산당이 독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조선과 대만에 대해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무단통치와 문화통치, 일어 공용, 창씨 개명 등 조선과 대만에서 같은 시기 동일한 방법의 식민 통치가 행해졌다. 심지어 징용과 위안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적 운명은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항복을 받아들였을 때에조차 같았다.-225쪽

조선과 대만의 해방은 카이로선언(1943년 11월 27일)과 포츠담선언(1945년 7월 26일)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쌍생아로서 조선과 대만도 해방 후만큼은 그 운명이 같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 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했다. 마찬가지로 카이로와 포츠담이 결정한 대만의 해방은 장가이섹 국민당군의 진주와 귀속을 앞두고 있었다. 1945년 국민당군은 북베트남에도 진주했는데, 구종주국인 프랑스가 돌아올 때까지란 단서가 붙어 있었다.(같은 이유로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했다.)-225-226쪽

그러나 카이로선언은 만주와 대만을 중국이 되찾을 것임을 명시한 선언이었고, 마지막 전시 회담 선언이었던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을 재차 확인한 것이었다. 대만에 진주한 국민당군은 단순한 해방군이 아니라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돌아온 중국이었다.

포츠담의 자식임과 동시에 얄타의 자식인 조선 해방은 소련과 미군이 진주하면서 잉태된 비극이 한국전쟁으로 이어졌고, 대만의 중국 '귀속'을 보장한 카이로와 포츠담의 대만 해방은 2.28학살로 이어져야 했다. -226쪽

장가이섹의 국민당군이 대만에 진주했을 때 대만인들의 눈에 그들은 외성인이었다. 외성인들은 무궈(母國)를 자처했다.
......
그러나 중국이 또는 중화민국이 대만의 무궈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
진주한 국민당군을 ㅗ한영했다고 해서, 대만인들이 중국을 무궈로 받아들였다고도 볼 수 없다.
......
1945년 대만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대만인들이 원했던 것은 말하자면 자치였다. 대만의 지식인들은 근대적 국민국가인 중화민국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국민당 또는 장가이섹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무궈 대신 또 하나의 약탈자와 식민 통치자가 되기를 너무도 간절하게 원했다.-227-228쪽

대만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북방어를 궈유(國語)로 강제하는 외성인들은 창씨개명과 일어를 강요했던 일제와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가 대만인들을 이류 국민으로 차별하고 멸시하기 위해 일어를 강요했던 것과 동일한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궈유의 강요는 궈유를 말할 수 없는 대만인들을 정치와 행정,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이류로 만들었다. 총을 들고 섬에 진주한 외성인들은 손쉽게 대만인들을 정치와 행정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제외시킬 수 있었다. -229쪽

대만인들이 계층을 막론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빼앗기고 완벽한 타자가 되고 있는 동안, 이른바 외성인들은 섬의 모든 것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약탈은 사유재산과 공공재산을 가리지 않았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외성인들의 부정과 부패는 극에 달했다.-229-230쪽

대만인들은 경찰서와 헌병대로 몰려가 살인범의 처단을 요구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총으로 화답했다. 이전과 달리 대만인들은 항쟁의 거리로 나섰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다.-234쪽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던 항쟁의 기운은 장가이섹이 보낸 병력이 섬에 도착하면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참극으로 발전했다. ...... 그들이 섬에 발을 딛던 바로 그 순간, 부두를 지키고 있던 노동자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힘없이 쓰러졌고 앞바다는 금세 피로 물들었다. 상륙하는 순간 부두 노동자들에게 총을 갈기며 섬에 등장한 국민당군은 대만인들을 상대로 진압이 아닌 전투를 시작했다.-236쪽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에서 오관영과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조국을 말한다. 아마도 그는 2.28의 비극 속에 죽어간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바로 그 조국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 조국이 있었다면 그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대만이란 섬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억압받는 자들이 지켜야 할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대만이라느 이름 외에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왔던 이 섬은 유럽 제국주의와 청, 일본 등 수많은 지배자들이 거쳐 간 식민의 땅이자 수탈의 땅이었다. 그들에게 조국이 있다면, 그건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가도 아니며, 민족도 아닐 것이다. 그건 억압받는 자들, 섬에서 태어나 혈통을 이어온 사람들과, 관리와 귀족들의 수탈을 피해 대륙으로부터 섬으로 도망 온 사람들 모두, 단 한 번도 제 땅의 주인이 되어보지 못했던 사람들 모두가 꿈과 희망으로 보듬었던 미래란 이름의 조국이었을 것이다. -239쪽

장가이섹은 계엄령을 선포해 대만의 38년 계엄 시대의 문을 열었다. 1987년 해제될 때까지 대만은 38년 간 계엄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28항쟁 역시 그 기나긴 어둠의 장막 뒤에 묻혀 있어야 했다. 다시 또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2.28은 겨우 고개를 내밀고, 한때 항쟁의 주역들이 봉기를 호소했던 바로 그 라디오 방송국 건물에 기념관을 세우고 항쟁의 날에 군중들이 모였던 공원에 기념탑을 세울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학살의 주역 중 그 누구도 심판대에 오르지 못했다. 대륙의 극악무도한 쓰레기들을 대만으로 밀어내 섬에 피비린내와 악취를 선사한 중국공산당은 오늘 대륙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섬의 독립 불가를 윽박지르며 제2의 국민당이 되고자 하고 있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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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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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고립된 섬이었다. 남한은 정신적으로 제3세계의 일원이 된 적이 없으며, 그 과정을 생략하고 경제발전으로 OECD의 일원이 되었다. 오늘 남한은 그 머리와 심장을 천박하기 짝이 없는 하위제국주의의 울타리 안에 두고 있다.

민족주의가 숨기고 있는 인종주의는 全 아시아인을 남한족의 하위에 두고 있다. 그 시선에는 북한족도 포함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허브라는 허황된 자의식은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그렸던 대동아공영권의 제국주의 정신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가? 그 모방의 꿈은 이미 일본이 완성시킨 경제적 대동아공영권이 떨군 나락을 구걸할 뿐임을 확인하는 순간에 파탄할 것이다.

남한은 뒤늦게나마 아시아에 손을 내밀기보다는, 하위제국주의의 칼을 들이밀어 스스로의 미래를 포박하고 있다. 그러나 정점에 섬으로써 쇠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시대에 미래는 미국과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이 뒤늦게 발 아래 두고자 하는 아시아에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세계와 미래를 건설할 힘은 아시아에 있다. 남한의 미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주도하는 자본과 시장의 아시아가 아니라, 핍박받는 아시아 민중의 신음 소리에 담겨 있을 것이다. 이게 남한이 아시아에, 아시아를 통해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이다.-5-6쪽

아시아는 지리가 아니며 역사이고 이념이다. 아시아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아시아라는 길을 따라 세계로 걸어나가 그 손은ㄹ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짐대로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고 있다. 긴 여행이 될 테지만 결국 떠난 지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7쪽

당신의 천국과 그녕늬 지옥-섹스의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입술을 붉게 칠한 소녀들은 한껏 고운 옷을 차려입고 당신의 선택을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당신의 15달러짜리 천국을 위해 소녀들은 기꺼이 오늘밤 그녀들의 연옥이 될 당신의 모텔이나 호텔, 또는 20촉짜리 전등을 희미하게 밝힌 음습한 뒷방을 찾을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내밀었고 메피스토는 당신에게 5분 또는 10분의 쾌락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메피스토가 파우스트에게 약속했던 대가의 억만 분의 일이로군요. -16쪽

도쿄로 몰려간 미군 병사들은 아낌없이 군표와 달러(모두 미군의 국방예산이었다)를 거리의 창녀들에게 뿌려댔다. 전선으로 돌아가야 할 병사들에게는 휴지처럼 여겨지곤 했던 군표와 달러는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던 패전 일본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울지언정 생존의 조건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군은 유럽에서 결코 이따위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패전국인 독일에서도 분명 미군을 상대하는 독일 창녀들이 존재했지만 소수였다. 미국은 정책적 차원에서 이를 지원하거나 고무하지도 않았다. 상황은 무대가 아시아로 바뀌자 돌변했던 것이다.

전쟁터인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선이 고착하면서 남한 후방의 도시 주변에서는 굶주림 끝에 미군을 상대로 하는 창녀들이 등장했고, 전쟁 후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따른 미군의 항구적 주둔은 기지 주변에 기지촌이라는 이름의 크고 작은 알앤알(휴식-오락/회복)은 수빅 만에서 오키나와, 마닐라에서 도쿄와 서울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군사적 매춘 벨트를 완성시켰다. 10년 뒤 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을 일으켰고, 이 벨트의 다음 마디는 방콕이었다.-21-22쪽

미군이 사라진 방콕 매춘가에는 유럽인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곧 들끓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에게 방콕만큼 안전하고 편안하고 값싸게 매춘을 즐길 수 있는 도시는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때를 맞추어 고도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엔을 앞세워 일장기를 휘날리며 방콕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에게는 불쾌한 풍경이었다. 미군이 그랬듯이 그들에게도 아시아인인 일본인은 서비스를 제공할 뿐이지 향유할 수 있는 인종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뒤이어 난데없는 섹스관광 소동이 벌어졌다. 유럽인들은 공공연하게 깃발을 들고 방콕과 마닐라에서 섹스관광에 나선 일본인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한다면 방콕에서 유럽과 일본의 차이는 단지 깃발 하나의 차이일 뿐이었다.-23-25쪽

태국의 친미 군부독재정권은 자신들의 수도가 거대한 창녀촌으로 변모하는 것에 대해 확고한 공범자였다. 미군의 공공연한 군사적 매춘이 참혹하고 비인간적인 전쟁범죄였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정권은 미군의 알앤알 정책을 옹호했고 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은 자국의 빈곤층 여성들을 무제한적으로 외국군의 성적 노리개로 상납함으로써, 점령지가 아니고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정치군인들은 직접 매춘산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달러를 챙기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방콕의 매춘산업의 배후에 태국군부의 실력자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불과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25-26쪽

유럽가 미국의 여성단체들과 지식인들이 아시아 저개발국에서 만연한 일본인들의 섹스관광을 비난하고자 했다면, 먼저 앞서 자신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아야 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도 도쿄가 미군의 정액단지로 헌납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이 방콕과 마닐라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벌였던 섹스관광은 결코 용서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서울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울은 방콕, 마닐라와 더불어 일본인들의 3대 섹스관광지 중의 하나였던 곳이다. 한국은 전쟁의 참화를 몸으로 겪었고 기지촌의 가슴 아픈 역사를 지금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주인공인 한국인들이 오늘 태극기를 휘날리며 매춘관광에 나서고 있다. 바로 그 한국인들에게 방콕의 그 수많은 매춘 여성들을 모두 전쟁과 식민지의 고통에 신음했던 아시아의 딸, 우리의 딸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온전히 나의 과대망상일 뿐일까?-26-27쪽

1957년 부정 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서의 피분과 사릿-군주제와 야합한 태국의 군부독재는 남한의 정치군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태국의 군부쿠데타를 교본으로 삼아 불철주야로 학습했고 마침내 그들의 꿈을 이루었따.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을 넘을 때 군주제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군주제보다는 좀더 근대적인 이념을 개발해야 했는데, 그게 새마을운동이라거나 조국 근대화라거나 개발지상주의라거나 하는 것들이다.-40쪽

그러나 영국과 태국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근대적 국민이었다. 1689년 영국이 입헌군주제를 성사시켰을 때에는 부르주아의 등장, 시민민주주의의 경험 등 왕정을 넘어 근대로 발전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태국에는 그 모든 것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42쪽

한국전쟁의 발발 이래 태국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가 퍼부어지는 나라였고, 그것은 태국의 전략적 가치가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욱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패퇴하고 미국이 직접 개입하면서 태국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미국의 목표는 동남아에서 태국이 친미 반공의 군사적/정치적 전략기지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강력한 친미 반공정권을 열망했다. 미국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정권은 당연히 군부독재정권이었지만, 동시에 미국은 채제의 안정도 희구했으므로, 군부독재정권이 피할 수 없는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장치 또한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코앞, 방콕의 왕궁 안에 있었다. -49-51쪽

베트남의 선전이 효과를 거둔 동력은 서방의 반공주의였다. 서방의 우파들에게 있어서 캄보디아는 공산주의의 야만성과 폭력성, 비인간성을 만천하에 입증하는 생생한 사례였다. 말하자면 '킬링필드'는 더없이 훌륭한 반공영화였다. 베트남은 세계사에 족적을 남길만한 반공선전 하나를 몸소 남길 수 있었다.-69-70쪽

폴포트의 민주캄푸치아에 대한 평가의 일반은 혁명 후 급진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었다는 것이고, 그 결과 급진적 공산화 정책이 킬링필드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그 모델은 중국의 대약진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1958-1960년까지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던 대약진운동은 그 결과 2천만 명에서 3천만 명을 헤아리는 아사자가 발생했던 처참한 실패였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마오쩌둥은 실권의 위기에 처했다가 문화대혁명으로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다. 이처럼 이미 1960년에 과오가 드러났던 대약진운동을 1975년의 폴포트가 모델로 삼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71쪽

캄푸치아 공산당의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놈펜을 함락하기 이전부터 엄연한 현실이었던 대규모의 식량난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 게릴라들이 마침내 프놈펜을 함락했을 때, 이 도시에는 전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150만 명이 북적이고 있었지만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저주받은 도시일 뿐이었다.
해방 후 미군으로부터 식량 공급이 끊긴다면 이 인구에 대한 식량 조달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함락 전부터 명확했다. 미군의 폭격과 오랜 전쟁으로 캄보디아의 농업은 완전히 붕괴된 이후였다. 식량자급률은 20%에 불과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73-74쪽

혁명 후 민주캄푸치아는 경제난과 군사적 위협이라는 두 마리의 괴물과 싸워야 했다. 특히 군사적 위협은 전후 재건에 나서야 했던 민주캄푸치아로서는 두 겹의 고통이었다. 혁명 직후 민주캄푸치아는 미국의 재도발과 베트남의 위협에 대비해 태국 국경인 서부 전선과 베트남 국경인 동부 전선에 군사력을 집중해야 했다. -74-75쪽

서구학자들의 캄보디아 관련 연구의 헌신적인 조사 작업과 분석은 이 학살이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자행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데에 바쳐졌다. 물론 그들이 보기에도 죽음의 대부분은 식량난에 따른 굶주림에 의한 것이었다. 누가 그 죽음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들은 예외 없이 민주캄푸치아를 통치했던 잔인하고 야만적인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제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신과 주술'은 이들의 다양하고 방대한 연구의 기저를 관통하는 맹목적인 사상적 편향의 실체로, 그 정체는 반공주의였다.-79-81쪽

캄보디아가 감내해야 했던 처참한 비극은 캄보디아 인민, 캄푸치아공산당 그 어느 편도 아닌 미 제국주의에 의해 배태된 것이었다. 1970년 이전까지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서 부유한 편에 속하는 쌀 수출국의 하나였다. 동남아시아의 인구가 평균 1일 400그램의 쌀을 소비할 때에 캄보디아는 600그램의 쌀을 소비할 수 있었다. 1970년 CIA의 공작에 의한 론놀의 쿠데타와 미국의 야만적인 맹폭은 혁명 후 캄보디아가 감당해야 했던 참극의 근원이었다. 특히 1969년에서 1973년까지 미군의 대대적인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폭격은 사망자 수만 최소 15만 명에서 80만 명까지로 추산될 만큼 대규모의 인명살상을 야기했고 이는 농업 노동력의 급격한 소실로 귀결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사망자 수는 킬링필드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서 부주의하게 취급되거나 때로는 무시되기도 했다.-82쪽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이라는 주제에 매달린 대부분의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던 이념적 편향성 즉, 반공주의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 학자들의 연구는 언제나 공산주의에 대한 일방적이고 부당한 선입견과 예단에 의해 좌우되는 성향을 띠어왔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언제나 부도덕하며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동시에 침략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한 캄보디아의 민주캄푸치아 통치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미국의 침략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와 정책, 전쟁의 수행이 초래한 결과는 실제보다 언제나 축소되게 마련이고, 설령 언급되는 경우에도 전개되는 논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83-84쪽

44개월 동안의 민주캄푸치아 시대는 이 밖에도 2백만 명의 크메르인들이 목숨을 잃은 킬링필드라는 오욕의 시대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 수치는 오로지 반공주의의 산물이며, 실제로는 70~80만 명이었고 대부분의 사망자가 미군의 폭격과 전쟁으로 인한 농토의 황폐화, 농업 노동력의 극적인 감소에 따른 아사자였다. -87쪽

툴슬렝은 무엇인가? 박물관인가, 기념관인가, 유물관인가, 또는 미술관인가? 유감스럽게도 툴슬렝은 이것들 중 아무것도 아니다. 툴슬렝은 단지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충실한 선전관이다.
......
현재의 군부독재정권의 수장인 훈센은 베트남 괴뢰정권의 외상과 수상 출신이며, 그의 정권은 무력과 쿠데타, 공포, 탄압, 정치 테러 그리고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권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이 그랬듯이 훈센 정권 역시 그 어디에서도 정통성을 찾을 수 없는 정권이다. 그런 훈센 정권이 기대고 있는 버팀대가 무력과 함께 툴슬렝으로 상징되는 민주캄푸치아의 혹정이다. 이런 점에서 캄보디아를 침략한 베트남과 훈센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베트남공산당은 형제국을 침략한 원죄를 호도하기 위해 툴슬렝과 킬링필드를 만들었고, 훈센은 그것을 반공주의의 제물로 바쳤다. 그들은 모두 툴슬렝의 자식들이다.-92-93쪽

툴슬렝은 사실인가? 사실이다. 그 어느 전시물도 조작되거나 허위인 것이 없다. 고문 기구들과 수많은 사진들, 심지어는 그림과 해골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품이고 현장을 기록한 것들이다. 게다가 전시물이 놓여 있고 걸려 있는 그곳은 그것들이 탄생했던 바로 그 현장이다.

툴슬렝은 진실인가? 유감스럽게도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1980년대 세계인을 경악시켰던 이 위대한 박물관은 위조품이 아닌 진품들을 전시하고 있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툴슬렝은 28년 동안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해왔다. 툴슬렝은 '폴포트는 악마였고 캄푸치아공산당과 민주캄푸치아는 살인마'라는 것을 입증(사실은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또 운영되어 왔다. -93쪽

방문객들은 무너져가는 낡은 건물에 전시된 조악한 물품들을 보면서 은연중에 이 박물관의 가치를 절하할지도 모르겠지만, 기실 툴슬렝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도로 조직화된 박물관이다. 예를 들어 모든 전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주얼에만 호소한다. 고문기구, 사진, 그림, 재현된 감방, 심지어는 해골에 이르기까지, 이 놀라운 박물관은 결코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방문객의 사고를 극도로 단순화시키는 한편, 이성적 무장을 무의식적으로 해제한다.

그런데 툴슬렝의 이 기괴한 힘은 뭔가를 떠올리게 한다.
"설득하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그리고 박멸한다."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위용을 떨쳤던 선전장관 괴벨스의 말이다.
툴슬렝은 이 원칙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박물관 중 하나이다.
물론 괴벨스를 툴슬렝에까지 인도한 것은 스탈린과 베트남이었다.-93-94쪽

어느 나라에서나 역사는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나아가 이념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프로파간다는 역사를 해석하지 않고 단지 이용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거두절미한다(사실 전체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이념을 말살시키고 들어서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이다.)-94-95쪽

말하자면 해골 지도는 전적으로 '메이드 바이 베트남'으로 베트남의 캄보디아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놈펜 외곽의 킬링필드인 쯔응아익의 해골 탑도 마찬가지로, 그 중의 하나에 손을 댄 것은 여하튼 변화를 의미한다. -95쪽

태평양전쟁 전개 상황도
-대동아공영권은 제국주의가 품은 원대한 꿈이자 이상이었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유럽 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의 자부심'이라 일컬었다. 그들은 하나의 제국주의가 다른 제국주의로부터 식민지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했는데, 물론 식민지로서는 주인이 바뀌는 것에 불과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대동아공영권이 물거품이 되자 유럽 제국주의는 자신들의 식민지로 다시 돌아왔다. 식민지에는 옛 주인들이 다시 찾아왔지만 아시아의 식민지들에는 하나 같이 해방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98쪽

일본이 남방 침략에 있어 인도차이나를 가장 먼저 선택했던 것은 중일전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주국인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과 굴욕적 휴전, 괴뢰 비시정부의 수립으로 일본의 침략을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99쪽

1945년 9월 6일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기 나흘 전인 9월 2일, 대영제국군의 그레이시 장군이 이끄는 20인디언 사단이 사이공에 입성했다. 같은 날 그레이시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의 공군기가 삐라를 살포했다. 삐라는 "영국군이 일본군과 함께 공공질서를 유지할 것이며 어떤 종류의 무기라도 소지한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사실상의 경고문이었다.
(1945년 해방 후 남한에 주둔한 미군 역시 같은 종류의 삐라를 뿌렸다.)-102쪽

1945년 일본의 패망은 의심할 바 없이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였다. 일본 점령 전의 프랑스는 베트남을 코친차이나와 안남, 통킹으로 분할통치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연방에서 직접 통치령인 코친차이나는 식민지 통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패망한 후 베트남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코친차이나를 해방시켜야 했다. 그러나 호치민은 북부의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코친차이나의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대신 적으로 돌렸다.-104쪽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명시한 이 협정은 호치민 자신이 선언한 독립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모욕하는 것이자 굴욕적인 양보였으며,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얻어진 해방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이 예비협정은 전전의 프랑스 보호령 통치 하의 식민지 군주제를 식민지 공화국으로 바꾸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이 협정과 함께 영국군은 남부에서 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식민지 반군에 불과한 베트민과 대등하게 협정 따위를 맺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106쪽

1949년 6월 14일 프랑스는 일제가 버리고 간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를 망명지인 파리에서 데려와 코친차이나와 통킹, 안남을 묶어 베트남국을 수립했다. 1950년 1월 공산화된 중국과 소련은 베느남민주공화국을 승인했고,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국을 승인했다. 특히 중국은 프랑스와의 일전을 벌이고 있던 베트남에게는 구세주와 다름없는 역할을 자임했다. 또한 미국은 이를 빌미로 바오다이의 베트남국을 승인하고 프랑스에 대한 원조를 시작한다고 선언했다.-106-107쪽

그러나 중국이 이처럼 베트민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그 순간,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었다.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승인한 그 다음 달인 1950년 2월 미국은 "(공산화 된) 중국과 소련이 호치민 정부를 지원하고 있는 것은 호치민 정부가 공산 정부라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브리핑과 함께 프랑스에 대한 군사지원을 공공연하게 선언했다. 인도차이낭네 대한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의미심장했다. 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개입한 첫번째 전쟁이었으며, 1950년 2월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4개월 전이었고, 애치슨방위선이 발표되기 한 달 전이었다.-116쪽

애치슨라인은 미국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선 밖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애치슨라인은 다만 군사적 마지노선으로서(공세적 시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방위선일 뿐이었다. 종전 후 미국은 유일의 초 강대국으로서 세계의 각 지역, 특히 유럽 제국주의의 유산이 되어버린 구식민지 지역에서 예외 없이 적극적으로 공세적인 국가였으며 침략적인 국가였다. 요컨대 국무장관 애치슨이 밝힌 미국의 방위선이란 정치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것이 확실한 영토와 (아직) 자신의 것이 아닌 영토를 구분하는 '라인'일 뿐이었다. 방위선 안에 위치한 필리핀과 일본은 이미 미국의 점령지 또는 식민지와 마찬가지인 처지였다.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시혜적인 독립을 얻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원 아래 친미 정권이 들어서고 공산주의 세력이 탄압당하는 전형적인 미국의 신식민지였다. 패전 일본은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던 나라였다.-116-117쪽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은 기꺼이 그 전쟁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지배 전략은 연합국의 일원이기도 했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득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결국은 독립, 친미 정권의 수립, 공산주의 세력의 섬멸로 대표되는 필리핀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는 그런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었다.
......
미국은 그런 프랑스에게 막대한 달러를 솓아 부었다. ...... 이는 전쟁 기간을 통틀어 소요된 총 전비의 8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
1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가 수행한 미국의 대리전에 가까웠다.-118-119쪽

만약 호치민이 제네바협정이 정한 1956년 통일 선거를 통해 베트남을 통일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것은 한반도가 피로 증명한 사실을 외면한 것이었다. 또한 호치민이 북부를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협정에 서명한 건ㅅ이라면, 남부를 외면한 것이었다. 호치민은 명백하게 김일성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124쪽

1954년 이후 베트남노동당의 좌편향 실책으로 취약해진 기반을 다지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전쟁만큼 적당한 방편이 없었다. 베트남노동당은 전시체제의 강화에 나섰다. 그건 미국 또한 원하는 바였다.-127쪽

미국은 제네바협정을 준수할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실제로 단독 선거를 지원함으로써 이를 증명했다. 미국은 남베트남(나아가 베트남)에 강력한 친미 반공정권을 세움으로써 동남아시아 본토에 친미 반공의 전초기지를 만들고자 했으며, 공산화된 중국의 잠재적인 위협으로부터 동남아시아를 지키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차이나는 미국의 진정한 방위선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이런 이익에 절대적으로 복무했으며, 그럼으로써 지주/자본가계급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생은 마치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의 남한의 경험이 복제되는 것과 같았다.-128쪽

1966년 미 공군의 북베트남 폭격
-한국전쟁에서 증명된 융단폭격의 위력은 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1,899,688회의 폭격기 출격으로 6,727084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2차대전에서 사용되었던 270만 톤의 2.5배에 달했다. 캄보디아에서의 불발 폭탄 제거를 위하여 미 공군이 제공한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캄보디아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미군의 비밀폭격은 23만 회 출격에 폭격지는 113,716곳에 이르고 있으며 투하된 폭탄의 총량은 2,756,941톤이었다.-134쪽

지난 한 세기를 고난과 실패로 점철한 사회주의에 대한 인류의 실험은, 혁명이 세계가 아닌 국가와 민족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봉착하게 될 거대한 장벽을 실증했다. 자본의 세계화 앞에 일국사회주의는 더더욱 무력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베트남의 자본주의화는 스스로 그것을 웅변하고 있는 참이다. 자본주의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었던 이 두 나라의 인민은 이제 자본주의 체제의 난민이 되어 그 결과를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169쪽

오늘날 노벨상의 권위는 이 상의 태생과 어울리지 않게 하늘로 치솟아 있지만, 별로 개의하는 사람도 없다. 노벨이 이 상을 위해 내놓은 돈은 노벨재단이 관리하고 있지만, 상에 대해서는 스웨덴 한림원(왕립과학아카데이)이 전적으로 권한을 갖고 있다. 돈 낸 자의 영향력이 일소되어 있으므로, 상의 권위는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벨이 돈으로 사후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산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비난받을 일유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189쪽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상이 있다. 막사이사이상이다. 필리핀의 3대 대통령이었던 라몬 막사이사이는 임기 마지막 해에 재선 운동을 벌이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인물이다. -189쪽

1957년 3월에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막사이사이를 기념하여(바로 다음 달인) 4월에 제정된 이 상을 위해 돈을 댄 것은 태평양을 건너고 미 대륙을 횡단해야 만날 수 있는 뉴욕의 '록펠러형제기금'이었다. 부연한다면 다섯 개 부문으로 나뉘어 수상자를 찾는 막사이사이상은 2001년에 수상 부문 하나를 더 추가했는데, 이때 필요한 돈을 댄 것은 미국의 '포드재단'이다.
하지만 펀딩이 수상쩍다고 해서 막사이사이상을 비난할 수는 없다. 돈을 미국인들이 댄 것은 마뜩찮지만, 노벨상과 마찬가지로 막사이사이상 역시 록펠러형제기금이나 포드재단이 상을 관리하지는 않는다. -190쪽

1946년 7월 4일 미국은 자신의 독립기념일에 맞추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식민지인 필리핀의 독립을 승인했다. 필리핀의 독립을 7월 4일로 정한 것은 1935년 필리핀연방을 등장시킨 미국의 타이딩스-맥더피법이었지만, 1946년 미국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법안을 독립 기념 선물로 준비하고 있었다.
독립 기념으로 미국이 필리핀에 선물한 것은 '필리핀무역법'이라고도 불리는 '벨무역법'이었다. -196쪽

벨무역법은 필리핀이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임을 강조했다. 미국인과 미국 기업은 원한다면 어떤 상품도 관세 없이 수입할 수 있었고 자본의 투자에도 제약이 없었다. 반면에 필리핀의 주요한 수출 품목은 미국 이외의 국가에는 수출할 수 없었다.
......
필리핀은 단지 미국 상품의 시장이었으며 천연자원의 공급지였다. 말하자면 명목상의 독립일 뿐 필리핀은 전쟁 전과 다를 바 없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군사적으로 필리핀은 미군의 대아시아 전진기지였다. 미국 외에는 어떤 외국군도 필리핀의 기지를 임대할 수 없으며, 두 개의 미군기지는 완전히 치외법권 지대였다. 독립 필리핀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 여전히 미국의 (신)식민지였다. -197쪽

빈한한 중산층 출신 막사이사이는 필리핀 역사상 지주계급 출신이 아닌 단 두 명의 대통령 중 하나이다. 막사이사이가 하원의 국방위원장, 국방장관을 거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패한 지주계급 출신의 정치인과 군인들은 결코 할 수 없었던 일, 공산주의 게릴라를 토벌하는 일에 발탁되었다. 막사이사이의 일이 끝났을 때 권력은 다시 지주 계급의 손으로 돌아갔다.-204쪽

같은 시기를 전후해 미국이 아시아에서 발탁했던 인물들, 예컨대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에 비교한다면 막사이사이는 윌리엄 콜비가 말했던 것처럼 그 중 최고의 인물로 손색이 없었다.-206쪽

1957년 막사이사이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지 않았어도 1950년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한국전쟁과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이 결과한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비상한 경제적/군사적 원조와 경제적 양보(외환/수입 통제)는 1950년대 말이면 이미 시효가 끝나가고 있었다. -211쪽

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남미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선택은 민중의 투쟁을 폭력적으로 압살할 수 있는 자에게로 돌아갔다.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고,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필리핀에는 1인 장기 독재체제가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73년은 남미의 칠레에서 아우구스트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통해 권좌에 오른 해였다. 미국의 눈으로 볼 때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칠레의 피노체트는 같은 필요에 의해 선택된 두 얼굴의 동일 인물이었다. -212쪽

그는 완고하고 강직한 친미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식민지 지주계급이 토지개혁에 저항하며 농민들을 살해하고 수탈했던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예속시킨 미국을 외면했다. 그는 공산주의가 농민들 속에 뿌리를 내린 이유를 무시하고 공산주의를 군사적으로 섬멸하는 데 앞장선 맹목적 파시스트였다.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전과 후에 존재했던 필리핀의 대통령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막사이사이의 밝은 이미지가 막사이사이상을 오늘까지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고 그 수상자들에게 명예롭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로써 족한 일이다. 게다가 그는 현직을 포함한 필리핀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는 그래도 좀 난은 대통령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상에 붙여진 이름, 막사이사이에 대해 무심할 수는 없다. 그 이름 속에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시아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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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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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0여일 만에 5만 명을 굶겨 죽인 국민방위군 사건은 과거의 일이라 하더라도, 1980년부터 1995년 5월까지 15년 5개월 간 군 복무 중 사망한 사람은 자살 3,263명, 폭행치사 387명 등 모두 8,951명에 달한다. 이는 연 평균 577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우리 군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3년마다 1개 연대 병력을 잃고 있는 셈이다. 걸프전 당시 미군 쪽 사망자가 269명에 불과한 것에 비한다면 이같은 손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 있다. -269쪽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빈민개병제'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271쪽

민주사회의 표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중요한 하나는 국가나 정부가 국민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만 민간인 출신이 된다고 군부독재의 잔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새 시대에 맞는 군의 역할과 규모, 위상, 그리고 군사문화의 청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281쪽

21년 전 필자가 이등병이 되었을 때 첫 월급이 2,700원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 얘기를 했더니 한 미국인 동료가 "음, 괜찮네"라고 말한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니 그 친구도 뭐가 잘못됐느냐는 표정으로 "시간당 2,700원이면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럴 땐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284쪽

이제는 우리도 모병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더구나 상류층의 병역비리가 연일 방송과 신문을 장식하면서 현역으로 복무했고, 복무하고 있고, 또 앞으로 복무해야 할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극에 달했다. 이런 처지에서는 징병제가 갖고 있는 장점은 전혀 살릴 수 없다. 모병제를 채택하면 물론 초기에 돈이 많이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징병제의 낭비도 생각해야 한다. 한창 학업에 정진하거나 생산활동에 종사할 나이의 청년들을 26개월 간 군에 잡아두는 것은 국가경제적인 면에서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70만 명에 육박하는 대군에다 300만 명의 예비군, 500만 명의 민방위를 갖고 있따. 인해전술을 쓸 게 아니라면 이런 방대한 규모를 유지할 까닭이 없다. -286-287쪽

군당국이 안전사고를 줄이려 많은 노력을 기울임에도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제한적인 공급이 가능한 징병제 아래서 사병들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병들에게 정당한 월급을 지급함은 '신성한 군복무'를 수행하는 사병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287쪽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운동이 가장 어려운 문제는 국방부나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등이 반발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은 현역으로 복무한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이다. 그리고 이 박탈감은 너무나 정당한 이유가 있다. 문제는 분노의 대상은 평생을 전과자로 살 각오를 하고 양심의 명령에 따르기로 한 병역거부자들이 아니라,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제도와 그런 제도를 강요해온 대한민국 정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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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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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손으로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휘둘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지적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 피동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해방과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해 우리는 참으로 끈질기게 주체적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불행히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숨가쁘게 근대로 끌려들어오는 와중에 우리는 중요한 통과의례를 치르지 못했다. 왕의 목을 치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시민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된 것이다.
......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다음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8-19쪽

자유총연맹은 있어도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한 발은 군사독재의 시대에 딛고, 다른 한 발은 엉거주춤 민주화의 시대에 걸치고 있는 오늘도 우리는 바쁘게 살고 있다. 한 시대를 제대로 장송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새 시대로 들어가다보면, 우리는 항생제의 남용이 병균의 내성만 키워주듯 전시대의 잔재가 새 시대의 화려한 옷 속에 반민주성을 감추고 도사리고 앉아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을 벗어나려면 시대를 거슬러올라가 미해결의 과제를 모조리 해결할 수는 없지만, 독재잔재만큼은 확실히 청산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26쪽

'황제'가 다스린 중국에서 왕조의 교체 주기는 200~300년이었던 반면, 국왕이 다스린 한국에서 왕조의 교체 주기는 500년이었고, '천황'이 다스린 일본에서는 '천황'가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만약 일본의 '천황'이 중국 '황제'에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조선 '국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하였다면 만세일계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32쪽

임시정부는 중국 땅에서 거의 전적으로 중국 정부의 재정지원 아래 광복군을 조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군대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중국 쪽에 넘어간 것을 치욕으로 알았으며, 끈질긴 노력의 결과 마침내 이를 되찾았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객군'인 미군이 안방을 차지한 채 새로운 천년을 맞았다. 1980년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문제가 집중적인 성토의 대상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으로부터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회수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인 바가 없다. 반미감정이 고조되자 미국은 마지못해 한국군에 대한 평시작전지휘권을 한국 정부에 되돌려주었지만, 실제로 군대의 작전이 실행되는 시기인 전시의 작전지휘권은 여전히 '객군'인 미군이 거머쥐고 있다.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에서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피를 토하며 반통일세력을 질타했다. 백범이 간 지 50여 년, 불행히도 이 비판은 지금도 유효하다.-45-47쪽

1948년에 수립된 단독정부로서의 대한민국 정부가 실제로 계승한 것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임시정부를 철저히 부정했던 미군정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모든 법령과 인원을 접수하여 그대로 활용했다. 한번도 제대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조선총독부-미군정-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지는 불행한 계승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왔다.-48쪽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일본에 나부끼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53쪽

한국 현대사에서 온갖 영욕을 함께한 태극기가 감정을 갖고 있다면 가장 민망했던 때는 1980년대 학생들의 성조기 소각 사건 때가 아니었을까? 광주 이후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은 갑자기 세계에서 반미운동이 가장 치열한 곳이 되었고, 학생들은 광주학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고, 성조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는 성조기를 불태운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태운 것도 아니고, 또 정작 미국에서는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는데 말이다.-59-60쪽

이제 우리는 좀 다른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유감스럽게도 다른 민족이라면 차별해도 괜찮다라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보다 더 강하게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 하나의 언어를 내세운 나치 독일은 600여만 명의 유대한 학살과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으로 나아갔다. 물론 이런 가능성들이 늘 현재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일민족의식 속에는 분명 억압과 차별과 불관용이 숨어 있다.-65쪽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에 대해 '동조동근'(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성과 뿌리가 같다는 뜻)을 이야기하고, 일본식 이름을 갖는 것을 '허락'하고, '황군'에 참가하는 '은전'을 베푼 것도 다 '2등신민'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쓰라린 상처의 하나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 역시 일제가 우리에게 자기 마음대로 부여한 '2등신민'의 지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성적인 노리개로 농락당한 여성들은 적게는 수만 명, 많으면 20만 명으로 추산되는ㄷ, 그중 80% 이상이 조선 여성들이었다. 파렴치한 일제는 '차마' 일등신민인 일본 여성들을 잡아다가 그 짓을 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황군' 병사들한테 '열등'한 인종 출신의 '질 나쁜 성적 노예'를 공급할 수도 없었기에 '2등신민'인 우리의 누이들을 마구 끌고 간 것이다. -67쪽

쓰라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나 처지가 못한 자에게는 턱없는 우월감을 갖고 인종차별을 전가해왔다. 노근리 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동안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깔려 있는 인종멸시의 태도는 베트남의 정글에서 재현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이 땅의 이주노동자 등 피부색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비껴가지 않는다. 동남아나 중남미로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는 일제시대 일본인 공장주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가한 민족적 멸시와 학대를 다시 볼 수 있다. 우리의 내면에 터를 잡은 백인우월주의는 어김 없이 이민보따리에 묻어 태평양을 건너 본고장으로 역수출되어 한흑 갈등의 주요인이 되고 있다.-68쪽

일제의 만주강점은 '만주 붐' 또는 '만주열'이라 불린 호황을 가져왔다. 실제로 일본은 1929년의 세계대공황의 충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나라였고, 그 이유는 바로 만주의 점령으로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투자수요가 활짝 열렸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자본가 계급에 이제 일제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일제는 모반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일 뿐 아니라, 새로운 이윤추구의 기회를 제공한 '은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93쪽

1930년대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였다. 1920년대까지 파산당한 우리 동포들이 마지못해 짐을 싸 만주로 발걸음을 뗐다면, 1930년대 일본과 조선의 청년들 중에는 출세나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만주로 향한 사람들도 많았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긴 칼 차고 싶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박정희도 그런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93쪽

분명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잘못 끼운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친일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친일파만 제대로 청산하였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에서 남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이북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 아닌가?-104쪽

친일파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된 것도 또 하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
학생들은 형식상 지원제인 학병에 나간 것을 친일 행위로 본 것인데, 이는 해방 당시의 정서와는 큰 거리가 있다. 물론 학병에 지원한 사람들 중에 황국신민 의식이 골수에 박혀 스스로 자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끌려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학병 출신들은 일제 통치의 희생자로 간주되었고, 해방 정국 초기에 학병동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4-105쪽

일제잔재 청산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편향은 나치 점령을 벗어난 프랑스에서의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단죄와 친일파 청산이 동일선상에서 비교된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4년여의 나치 점령을 벗어난 뒤 괴뢰 비시 정권하에서 독일에 협력했던 7천여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많은 사람들은 불과 4년여의 점령지였던 프랑스가 수천 명을 처형한 데 반해 35년이나 강제 점령을 당한 우리의 경우는 단 한 명의 민족반역자도 처형하지 못한 것에 대해 통분해 한다. 친일파 청산이 꼭 가혹한 처벌을 의미하느냐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다.

자치파가 집권한 인도는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200년 간 받았지만 친영파 처 ㅇ산은 독립 뒤의 핵심 과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사실 제국주의의 통치 기간이 오래될수록 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에 대한 처벌문제는 어려운 법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인적 청산의 폭이 결코 프랑스에서처럼 광범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05-106쪽

이북은 인적 청산의 면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실시했다.
......
이북의 지도부가 채택한 방식은 탄백이었다. 탄백이란 일제 통치 아래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하게 당과 인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자신의 죄과를 감춘 것이 뒹 ㅔ드러날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는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용서를 받았다. -106-107쪽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문제도 해방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조금 달리 볼 수 있다.
......
일제 말에 폐간당했던 두 신문이 해방 직후 복간할 때 두 신문의 친일행위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모두가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전 국민의 80% 가량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일제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원하면서도, 현재 우리의 감각에 비해 구체적인 친일행위의 범주에 대해 상대적으로 좀 더 관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107쪽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조선일보>의 방응모 사장이 백범 선생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이 환국한 뒤 이 당의 재정부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백범 선생 역시 해방 뒤의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라도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백범 선생 스스로 남북협상에 임하면서 자기비판을 했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방응모가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이라는 공식직함을 맡을 정도로 인적 청산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방응모나 <조선일보>의 친일이 그냥 넘어가도 좋은 문제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백 보를 양보하여 그들의 친일이 하루하루 신문을 내기 위해 부득이한 행위였다 하더라도 방응모와 <조선일보>는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최소한 그런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서 민족지라고 자랑하는 망발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108쪽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말은 차라리 순진하기나 하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지배를 근대화의 길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친일이 반민족 행위가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은 확신범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의 근대화와 반공 논리는 그대로 대한민국에서 계승되었다. 일제의 밑에서 떡고물을 주워먹던 친일파들은 이제 해방된 조국에서 떡판을 송두리째 차지한 것이다.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 아래 굳게 결속한 친일파들에 의해 오히려 청산된 대한민국에서 해방은 친일파들의 잔치판이 되고 말았다. -108-109쪽

일본도, 우리도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다. 일본은 그래도 군과 경찰의 고위직에 있던 자들을 정부와 정계에서 배제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우리는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 한-일 협정 체결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한-일 관계는 미국이 내세운 반공의 깃발 아래 이렇게 살아남은 군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의 야합의 역사였다. 친일파 박정희의 기념관을 짓지 못해 안달하는 나라, 제국주의의 베트남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민간인 학살의 과오를 범하고서도 사과하지 않는 나라, 친일파의 행위를 비롯하여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하나도 가르치지 않는 나라, 과연 우리가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우경화에 제대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우익들이 비웃을 일이다. -109쪽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과거청산을 모범적으로 행했다는 독일에서도 신나치가 생겨나는데, 단 한번도 과거청산을 하지 못하여 미청산된 과거의 만물상으로 불리는 우리 사회야 오죽하겠는가? 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현실로 이어진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친일잔재의 청산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친일잔재는 군부독재권력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재생산되었다.-119쪽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끔찍스러운 일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100만 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한 이 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모르는 척하거나 정말로 모른 채 반세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 수십만 명의 죽음을 50년 간 외면해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학살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학살 은폐의 방조자가 됨으로써 사람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124쪽

한국사회에 오랜 기간 군사독재가 유지되고, 군사독재가 물러난 뒤에도 반공주의 보신주의가 횡행하는 것은 다 학살의 무덤 위에 한국사회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또 가족의 생존과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신가족주의나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의 전도 역시 학살이 남긴 상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25쪽

민간인 학살만은ㄹ 놓고 본다면 이민족 지배하의 학살에 비해 동족 내의 '빨갱이 사냥'이 규모나 강도에서 훨씬 더 잔혹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은 8.15해방이 우리 민족에게 온전한 축복이 되지 못하고, "뜨거운 프라이팬을 벗어나니 불구덩이 속이더라"는 식이 되게 만든 것이다.-135쪽

100만 명 가량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더기로 학살한 자들도 온전하게 살아남았는데, 물 좀 먹이고, 전기 좀 통하게 하고, 관절 좀 비틀고, 공중에 매달고, 그리고 좀 두들겨 팼기로서니 그게 무어 그리 대수겠는가? 당하는 사람이나 가하는 놈이나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인권불감증도 다 민간인 학살에서 연유한 것이다. 시민들의 인권을 지켜야 할 국가기구가 민간인 학살의 주체였을 때, 힘있는 자들의 손가락질 하나로 생과 사가 갈릴 때, 시민들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다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극도의 몸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136쪽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어딘가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수자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왜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공자님 말씀이다.
......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주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지혜와 관용 대신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박멸하고 싹쓸이해버린 기억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못마땅한 자들을 보면 다시 싹 쓸어버리고 싶어한다. 박멸의 기억을 스스로 벗어던지는 일은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나를 편들지 않으면 모두가 적이라는 부시의 힘의 논리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도덕과 상식은 다시 시험을 받고 있다.-140쪽

현재 한국에는 500년의 역사를 지닌 왕조가 쓰러진 자리에 건설된 나라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보수주의가 허약하다. 조선을 가리켜 당파싸움으로 날새우다가 나라를 빼앗겼다고 식민주의자들뿐 아니라 일제 초기의 민족주의 사학자들도 통탄했다. 그러나 조선이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입장에서 고루한 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합리적 보수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전통의 내용이 과연 어떤 것일까? 보수주의자들은 '뿌리없는 것'에 대한 깊은 혐오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보수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뿌리 없음이며, 전통적 보수주의와의 단절이다.-145쪽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 한국전쟁 때 마오쩌둥도,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도 아들을 바쳤지만 그들은 한강 다리를 끊고 가장 먼저 도망갔다가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다. -152쪽

그러나 해방 직후에는 분명히 좌익이 존재했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 세계사적인 기준에서 볼 때 좌파라 할 만한 세력이 형성돼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신자유주의조차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일삼는 극우파의 기준에서 볼 때 좌파가 있을 뿐이다. -159쪽

누군가가 좌우대립을 부추기고 있다. 해방 직후에 그런 역할을 한 자들은 친일파였다.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가 지속된다면 친일파들이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를 이념이라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좌우대립의 구도로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일제의 고등계 형사였던 조선인들은 민족 대 반민족의 대립구도 아래서는일제의 앞잡이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살해한 민족반역자로 처단의 대상이었지만, 좌우대립의 구도 속에서는 공산당 때려잡는 데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160쪽

우리는 흔히 3족을 멸한다는 말을 쓰며, 3족을 친가, 외가, 처가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원래 3족이란 3대에 걸친 친족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인 조족, 형제와 그 소생인 부족, 그리고 본인의 아들 및 손자를 가리키는 기족을 말하는 것이다.-177쪽

1894년 갑오경장 당시에 폐지된 연좌제가 되살아난 것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였다. ......이북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자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점심은 대전에서 저녁은 부산에서 먹을 정도로 뺑소니를 쳤다. 대구까지 내려갔던 이승만은 "각하, 너무 많이 내려오셨습니다"라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고 다시 대전으로 올라갈 정도였다.
......
이승만 정권은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국군이 북진중이니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놓고 도망치면서 ,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한강 다리마저 끊어버리고 갔다.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부통령 이시영을 비롯하여 정부 요인들 중에서 이승만과 약간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핵심부의 도주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1,500여 명의 무고한 피난민이 폭살당했다. -179쪽

그리고 석 달 뒤 이승만 정권은 서울로 '개선'했다. 정부의 발표만 믿고 있다가 인민군 치하에서 석 달을 보낸 시민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하는 위로도, "우리만 피난갔다 왔으니 정말 미안하다"라는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에게 사과 담화를 발표할 것을 건의했다가 되레 이승만에게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짐이 덕이 없어' 하고 사과하란 말이냐"는 핀잔만 받았을 뿐이었다. 위로와 사과 대신에 서울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적 치하의 부역자를 가려서 엄선한다는 서슬 푸른 방침이었다. -180쪽

만주폭격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원자폭탄의 사용을 전제로 한 맥아더의 만주폭격 구상이 실편되었다면 이는 한반도의 통일이 아니라 즉각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한두 곳이 아니라 무려 26곳을 선정하여 보고하면서 즉각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도 1차로-209쪽

맥아더가 이렇게 강력한 주장을 한 것은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자신의 판단착오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끊임없는 정보보고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격 가능성을 무시했으며,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묵살하고 38도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단행했다. 더구나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중국군이 개입하자 미군은 미군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기억되는 장진호 패배를 당하는 등 중국군에 크게 밀렸다.-209쪽

38개월 간 지속된 한국전쟁에서 정전회담은 무려 25개월을 끌었다.-213쪽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을 미국에 예속된 존재로 보았으나, 이승만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가 '반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의 '반미'가 미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투정'으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것이었다면, 이승만의 태도는 미국의 약점을 꿰뚫어본 상태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몽니'였다.-219쪽

이승만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뒤엎는다는 위협을 가하여 미국한테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을 뿐 아니라, 한국군의 증강, 미국의 군사경제적 원조 등을 따냈다. 이남의 어느 대통령도 미국을 상대로 이런 외교적 '성과'를 얻어낸 사람이 없지만, 그 '성과'는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 대미 예속의 강화, 이남의 군사주의화 등등의 저주받은 유산을 남긴 것이기도 했다.-221쪽

이제까지 한번도 개정된 적이 없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주둔의 목적규정이 결여되어 있고, 무상주병권이 인정되어 있으며, 미군 철수에 관한 협의규정도 없고, 조약의 시효가 무기한이라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전면적 재검도 없이 그 부속협정에 지나지 않는 소파의 어떠한 개정도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235쪽

효순이, 미선이 두 소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거세게 일자, 미국은 뒤늦게 부시가 사과했지만 소파의 개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95년 오키나와에서 초등학생이 미군에 의해 성폭행당했을 때 10만 명이 모여 항의집회를 열어 클린턴 대통령의 사과외 일본 소파의 개정을 끌어냈다. 미국은 이렇게 일이 커져야만 소파를 바꿀 생각을 하는 정녕 그런 천박한 나라인가?-235쪽

우리와 미국의 만남은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871년의 신미양요.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라지만, 한-미 관계의 첫 장을 전쟁으로 여는 것이 못마땅해서인지 교과서는 이를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237쪽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정부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태프트-카쓰라 밀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일본이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것을 묵인했다. 루스벨트는 이런 밀약이 한 부분을 이루는 러일전쟁 종결을 위한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자 제일 먼저 미국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238-239쪽

후천성 반미결핍증... 이 병의 특징은 멀쩡한 두 발을 갖고서도 자신이 홀로 설 수 없다고-증세가 심해지면 홀로 서서는 안 된다고까지-생각하면서,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굳건히 내려 서려는 건강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두들겨패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 병의 병원균은 뇌 속 깊이 침투하여 환자 스스로 병에 걸린 사실은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에 환자들이 절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고, 완강히 치료나 요양을 거부하게 한다. 모든 치료를 거부하면서, 건강한 사람들이나 이 병에 걸렸다가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적개심을 품는 공격성 때문에 허준 같은 명의가 있다 해도 환자를 돌보기 어렵다.-242쪽

이승만의 저격미수범도 사형을 받지 않던 시절 조봉암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민족일보>의 청년 사장 조용수, 통력당 사건,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 등에서 사형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통일을 이야기하던-통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미국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다-사람들이었다. -244쪽

미국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기사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든 박정희를 일부 인사들이 마치 반미와 자주국방의 기수인 양 떠받드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245쪽

미국이라면 끔뻑 죽던 이 땅에서 반미라는 불온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1980년 5월 광주를 겪고 난 뒤의 일이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은 미국이 7함대를 파견하자 민주국가인 미국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7함대를 보낸 것이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이는 오해도 엄청난 오해였다. 미국은 전두환 일당이 광주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마음놓고 짓밟는 동안 이북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245쪽

국방의 의무를 지러 간 젊은이들을 전경으로 차출하여 치안유지에 돌리는 위헌을 일삼는 자들은 그것도 모자라 전경들을 미군기지 앞에 배치한다. 이 세상 어느 천지에 경찰이 군대를 지켜주는 꼴은 있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미군은 언필칭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와 있다는 존재가 아닌가? 후천성 반미결핍증이 맹위를 떨치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꼴불견이다. -246쪽

온몸에 시너를 붓고 산화해간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후예들은 '민족의 허리가 두 동강난 아픔'을 외면하면서, 윤금이씨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 없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실은 외면하면서, 그까짓 금메달 하나 빼앗겼다고 난리치는 '참을 수 없는 반미의 가벼움'을 견딜 수 없었다.-251-252쪽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어떤 국가도 자국민에 대한 치외법권을 순순히 포기한 적이 없는 사실을.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민간인에 대한 치외법권은 더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미국과 맺은 소파는 해당범위가 너무 넓어 미국뿐 아니라 그 가족, 친척, 그리고 미군과 계약을 맺은 미국인까지 포함하고 있다. 20세기 불평등 시대에 미군에 대한 사실상의 치외법권ㄴ이 인정됐다면, 이제 21세기에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지 못한다는 법이 없고, 공무 중을 포함한 미군의 모든 범죄를 강력히 규제하는 새로운 협정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258쪽

이라크에도, 아프가니스탄에도 수많은 효순이와 미선이가 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민족자주가, 우리가 되찾고야 말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어찌 한반도의 남녘에만 국한될 것인가? 미국의 오만은 국경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도 국경이 없다. 미국의 오만에 상처받은 사람들, 우리는 모두 하나다. 촛불의 힘으로, 아무도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있다.-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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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8-13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날릴까 봐 4줄씩 무수한 수정을 거듭하여 작성. 그리고도 다 못했다. 50구절까지만 가능하구나... 쿨럭...;;;;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
이정익 지음 / 길찾기 / 2006년 12월
절판


나는 7-80년대 노동운동의 자생적인 운동을 목격했고, 그 속에서 많은 좋은 점들을 보았어요. 그래서 90년대가 지나고 노동운동이 지나치게 계급화되고 또 권력화되어가는 부분이 마음 아파요. 지금이야말로 낮은 곳에서부터의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봐요.
요즈음 들어 많은 운동과 저항이 빛을 잃어 가는 느낌이 드는 건, 노동운동이 지나치게 경제 논리화되어만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회와의 연대를 지향하고, 다시금 자존에 대한 노력을 더해갔으면 해요.-38쪽

정부의 문화공보부 공보국장 박종국이 '한국인 7백만 명은 죽어야 하고 매년 30만 명씩 추방해야 한다'는 망언을 퍼뜨렸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유신체제 혹은 박정희에 대한 반대자를 총칭한 것이었다. 그것은 70년대 말 민주화운동 각계의 참여인사 50만 명을 숙청하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장담하며, 그 명단까지 만들었다는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의 구상으로 이어지는 한 줄기 맹목적인 충성심이었다.-41쪽

수도 서울에 탱크를 밀고 들어와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군부 쿠데타의 특성상, 국민의 인권을 유린함에 있어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정권수호를 위해 국가보안법이라는 철퇴를 쉼 없이 내리쳤다. 좌익과 우익의 구별은 정부의 편에서는가, 아닌가를 가르는 편의로 사용되었다.-43쪽

1970년 이런 가혹한 노동에 대한 임금은 월 1,500원에서 3,000원 사이였다. 그들의 하루 임금은 다방에서의 커피 한 잔 값에 해당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531쪽-47쪽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 주고, 문화기사는 판매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쓰겠다는 것인가, 신문이 신문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대중을 위해 있는 것일진대, 폭력이 무서웠다고, 돈맛이 좋았다고 그렇게 나자빠져 버리면 그만인가
-66쪽

박정희의 군사정부가 부자들에게 돈을 토해내게 하는 데에서는 이승만보다 훨씬 체계적이었고, 점차 액수는 천정부지로 마구 뛰었다. 이런 활동의 상당 부분이 2차대전 전후 초창기의 이탈리아나 일본의 경우처럼 한국중앙정보부와 협력하는 CIA 요원들에 의해 중개되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523쪽-72쪽

대학에는 프락치를 심고 야당에는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상시 침투하여 활동하였고 신문, 방송매체는 팔과 다리를 잘라 수족처럼 사용하려 하였습니다. 군사 독재란, 이토록 철저하고, 그래서 모두를 두렵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는 과거의 권력자는 없어요.-73쪽

많은 학생들이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되었습니다. 당시 간첩 현상금이 30만원 정도였지만, 학생시위 주동자들의 현상금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이백에서 삼백만 원을 넘나들었죠.
그만큼이나 국가의 중범죄자로 취급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검거된 순간부터의 고초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철, 유인태, 강구철 3인은 이미 현상금이 50만원씩 걸려 있었다. 수배전단에는 "이들이 있는 곳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거나 숨겨주면 사형 무기..."라고 씌어 있었다. '미친 법'의 시대였다. 데모 학생이 생긴 학교는 폐교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긴급조치 4호였다. -90쪽

이들은 출동하기 전에 독한 술에다 환각제를 타서 마신 상태였고, 수통에는 빼갈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황석영<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0쪽 재인용-132쪽

12.12쿠데타의 주역들은 광주의 피를 포도주처럼 마셨고, 5.18 광주는 비현실적인 광기의 제물이 되었죠.-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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