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품절


"나가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내가 낼게."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 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163쪽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 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193쪽

우리는 80년대에 태어나 컬러 TV와 프로야구를 벗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주눅들어보지 않은, 다른 나라 광고판에서 우리나라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첫 세대다.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라났다. -193쪽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직업이 없다. 이게 말이 돼?-194쪽

나는 연필을 들고 백지 위에 적었다.
돈이 필요해.
그랬다가, 누가 볼 것도 아닌데, '돈'이라는 글자가 상스러워 보여 그것을 지우고 그 아래에 '직장'이라고 써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적절치 않은 것 같아 다시 지우고 '직업'이라고 썼다. 직장은 없어도 되지만 직업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195쪽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식의 고통에 대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부자에게도 부자의 고통이 있을 것이고, 가진 자라고 덜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고통이라고는 없는, 퇴폐와 환멸, 끽해야 허무 속에서 허우적대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고통에 공감하려고 해도 그 공감이 받아들여질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들이 정색을 하고 "네가 어떻게 그 고통을 알아? 그걸 가져본 적도 없으면서"라고 물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를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는 애초부터 넘을 수 없는 정서적 갭이 있다. 남들 다 가진 부모도 못 가져본 나는 사춘기 이후로 언제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207쪽

"나는 그게 우리 세대의 특징이라고 생각해. 자기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굳게들 믿고 있어."
"그렇게 생각해?"
"너무 지나친 기대에 대한 일종의 피로가 있는 것 같아.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기대를 받아왔잖아. 부모, 선생, 광고, 정치인 심지어 서태지까지 우리한테 '네 멋대로 하라'고, 원하는 걸 가지라고, 그렇게 부추겼잖아. 피아노 조금만 잘 치면 음악하라고 하고, 글 좀 잘 쓰면 작가 되라고 하고, 영어 좀 잘하면 외교관 되라고 하고...... 언제나 온 세상이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었던 것 같아.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뭐든 하나만 잘하면 된다고. 그런데 그 '하나'를 잘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결국 사람들을 자꾸 실망시키고,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돼버린 것 같아. 그리구......"-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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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아틀라스 - 지도로 배우는 세계의 문화와 자연 아틀라스 시리즈 2
브누아 들라랑드르 지음, 제레미 클라팽 그림, 이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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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 현재까지 유럽 25개국이 가입했다. 회원국 가운데 12개 국에서는 단일 화폐인 '유로'를 쓴다. -8쪽

1953년, 덴마크에서는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블록 장난감이 태어났다. "레그트 고드트(재미있게 놀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장난감이 바로 오늘날 전 세계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레고'블록이다.

스웨덴에 가면 얼음으로 만든 호텔이 있다. 얼음이 녹기 때문에 해마다 새로 지어야 한다. 음료를 주문하면 차가운 얼음 잔에 담겨 나온다.

얼음으로 뒤덮인 거대한 섬 그린란드는 덴마크 영토이다. -9쪽

유럽 연합 본부가 있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은 만화로 유명한 도시이다. 만화 주인공인 땡땡과 루키 루크, 스머프가 모두 이 곳에서 태어났다. 또 유명한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도 볼 수 있다. 집 앞에서 오줌을 싸는 꼬마를 보고 화가 난 마녀가 동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독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성 같다. 바이에른 공국을 다스리던 루트비히 2세가 세운 것으로, 디즈니랜드에 세워진 성도 이 근사한 성을 본따 만들었다. 만화 영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도 이 성을 볼 수 있다.

프랑스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나라이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다녀간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을 만드는 데는 무려 250만 개의 볼트가 쓰였다고 한다.-10쪽

이탈리아 말로 "안녕하세요!"는 "본조르노(Buongiorno)!"
영어와 프랑스어의 알파벳은 26자, 포르투갈은 23자의 알파벳을 쓰지만 이탈리아는 21자의 알파벳만을 쓰고 있다.
이탈리아어에는 j,k,w,x,y가 없다. -12쪽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베르베르 말로 "안녕하세요!"는 "마 툴리드(ma toulid)!"
베르베르어는 왼쪽에서 오른쪽, 밑에서 위, 또는 그 반대로도 쓸 수 있다.-18쪽

캘리포니아에 있는 세쿼이아는 높이 110미터에 이르는,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이다. 나이는 대략 2000살 정도로 추정된다. -22쪽

코코넛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열매이다.
과즙은 갈증을 없애 주고 하얀 속살은 쿠키, 기름, 비누를 만드는 데 쓰인다.
껍질에 있는 섬유질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들 수 있다.

파나마 해협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한다. 해협을 가로질러 가면 남아메리카를 빙 둘러 가는 것보다 약 1만 2,000km의 항로를 단축할 수 있다.

1902년, 마르티니크 섬의 펠레 화산이 폭발했다.
겨우 몇 분 안에 용암이 몰아닥쳐 생피에르 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당시 죄수였는데, 감옥의 두터운 벽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카리브 해 주변에 잔인한 원주민 전사들이 살았다.
그들은 적을 잡아 '바르바코아'라는 나무틀에 그을려 구워 먹었다.
우리가 쓰는 '바비큐'라는 말은 '바르바코아'에서 비롯된 것이다.-28쪽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페루는 잉카 족의 나라였다.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게 되자 몇몇 잉카 족은 안데스 산맥 깊숙이 숨어 마추픽추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에스파냐 이주민들은 끝내 절벽과 구름 속에 가려진 마추픽추를 찾아 내지 못했다.
하지만 1911년, 한 미국인이 마추픽추 유적을 발견한 뒤로는 누구나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코카 나무의 잎을 즐겨 씹었다.
남아메리카에 건너온 유럽 인들은 코카 잎에 화학 처리를 해서 코카인이라는 위험한 마약을 만들어 냈다.-32쪽

인도는 세계에서 차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나라이다.
어린 찻잎을 하나하나 사람이 직접 손으로 딴다.
찻잎을 그대로 말리면 녹차가, 말린 잎을 발효시키면 홍차가 된다.
-39쪽

중국의 인구는 자그마치 13억이나 된다. 2초에 한 명씩 태어나는 꼴이다.

만리장성의 길이는 6,000km가 넘는다.

중국은 러시아(구 소련)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렸다. -40쪽

도쿄는 세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로, 무려 3,50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41쪽

과거 미얀마 여자들은 호랑이에게 목을 물리지 않도록 여러 겹의 목걸이를 했다고 한다.
목이 길어진 '기린 목 여인'들은 열여덟 살이 되면 목의 길이만 30cm가 넘는다.

대부분의 아시아 사람들은 젓가락을 능숙하게 쓸 수 있다.
젓가락질은 대뇌 운동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2쪽

산호는 식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강장류에 속하는 동물이다.
여러 마리의 산호가 첩첩이 쌓여 딱딱한 산호초를 이룬다.

오세아니아 대륙에는 캥거루와 코알라 같은 유대류가 많이 산다.
갓 태어난 유대류의 새끼는 완두콩만큼 작다.

타조와 닮은 에뮤는 날지 못하는 대신 아주 빠르게 뛴다.
독특하게도 수컷이 새끼들을 품고 보살핀다. -44쪽

백인들이 발을 내딛기 전까지 뉴질랜드는 폴리네시아에서 온 마오리 전사들의 땅이었다.-45쪽

1788년, 영국 사람들이 처음 오스트레일리아에 양 29마리를 들여왔다.
그 양들이 새끼를 낳고 낳아 지금은 120만 마리에 이른다.-47쪽

이누이트어에는 눈을 가리키는 말이 열 두 가지나 있다.
녹은 눈과 얼어붙은 눈, 눈송이가 크거나 작은 눈 등을 뜻하는 말이 다 다르다.


북극의 개들은 힘차게 썰매를 끌고 난 뒤 많은 양의 고기와 생선을 먹어 치운다.
잘 때는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만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대개 암컷이다. -48쪽

가장 큰 강 : 아마존 강(7.000km). 유역 면적과 유량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
가장 넓은 사막 : 사하라 사막. 11개 나라에 걸쳐 있다.
가장 큰 포유류 : 흰긴 수염 고래는 최대 길이 30m, 몸무게는 1만 5000kg에 이른다.
가장 오래된 나무 : 미국 캘리포니아 화이트 산에 있는 '므두셀라'라는 소나무는 4700년도 더 살았다.
가장 낮은 바다 : 사해. 해저 390m
가장 깊은 바다 : 마리아나 해구. 해저 11,034m태평양 북서쪽에 있다.
가장 낮은 기온 : 1983.7.21. 북극 보스토크에서 기온이 영하 89도까지 내려갔다.-49쪽

가장 큰 육상 포유류 : 아프리카코끼리는 어깨 높이가 3-4미터에 이르고 몸무게도 7.500kg이나 된다.
가장 큰 육상 육식 동물 : 북극곰은 평균 몸무게가 500kg을 훌쩍 넘는다.
가장 작은 포유류 : 돼지코박쥐(태국)는 몸무게 2g에 몸길이도 3cm밖에 안 된다.
가장 넓은 바다 : 태평양. 전 세계 물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가장 깊은 호수 : 바이칼 호(시베리아) : 수심 1,620m
가장 비가 적게 오는 곳 : 아타카마 사막(칠레)
가장 긴 거리를 여행하는 새 : 북극제비갈매기. 1년에 두 번, 양극을 오간다. 이 거리는 무려 1만 6천km에 이른다.
가장 높은 폭포 : 앙헬 폭포(베네수엘라). 높이 979m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 도쿄(일본). 면적 1km2당 약 5,300명이 살고 있다.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 : 중국. 약 13억.-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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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7-11-1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알아두면 좋을 내용이 많군요.^^
초등학생들이 보기 좋은 책인가봐요?

마노아 2007-11-19 13:32   좋아요 0 | URL
초등학생을 겨냥한 책인데, 어른인 제가 봐도 재밌고 유익했어요. ^^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절판


프랑코 장군(1892-1975)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자 그해 7월 모로코에서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 왕당파, 우익 정당, 가톨릭 교회의 지지와 히틀러/무솔리니의 지원을 바탕으로 1939년 내전에서 승리하고 팔랑헤당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내전 기간 중 100만여 명이 사망했으며, 프랑코 독재 시기 공화파 인사 5만 명이 처형당하고 30만 명이 해외로 추방되거나 망명했다. 1975년 사망하면서 ‘정적에게 용서를 빌며 정적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21쪽

1938년 11월 15일, 국제여단은 정식으로 해산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9년 3월 28일, 마침내 프랑코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영국, 프랑스에 이어 4월 1일에는 미국 정부가 프랑코 정부를 승인했다. 내전 후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정부에 의해 인민전선파의 패잔병 10만 명이 사살되고 200만 명이 투옥되었으며, 50만 명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33쪽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
2차대전의 전초전이자 파시즘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국제전이던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공화파 국제의용군. 국적과 언어를 넘어 총 4만여 명이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참가했다. 1938년 해체.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도 참가해,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다큐멘터리 <스페인 땅>의 대본을 썼고, 앙드레 말로는 소설 <희망>을 발표했으며,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 국제여단을 다룬 영화로는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이 있다. -35쪽

카탈루냐
스페인 북동부 자치지역. 바스크와 함께 대표적인 분리주의 운동 지역이다. 상공업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로, 스페인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는 고유어를 가지고 있는 등 독자성이 강하다. 19세기 후반부터 사회주의/아나키즘 운동과 자치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931년 공화제 실시 후 다시 자치권을 획득했고, 내전에서 인민전선파의 거점으로 최후까지 프랑코에 저항했다. 프랑코 사후 다시 자치권을 얻으면서 급진 민족주의자와 일부 좌파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화가 피카소, 달리, 미로와 건축가 가우디 등 많은 20세기 예술의 거장을 배출했다.-41쪽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으로 유입된 이민자의 수는 1920년대에는 43만 명, 1921년에는 8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에 대해 ‘전통적 미국’의 수호를 주장하는 아메리카니즘의 대두나 KKK단의 발호와 같은 배외주의 풍조가 급속하게 강화되면서 1921년부터는 인종차별적인 이민제한 입법이 시행되기에 이른다. 이 법률에 따른 이민자 할당 기준은 영국과 북유럽계에는 유리하고 이탈리아계나 동유럽계 유대인에게는 불리했다. 덧붙이자면, 동양인은 ‘귀화 자격 없는 이민’으로 간주되었다. -45쪽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1차대전으로 독일제국이 붕괴한 후 군부, 관료, 대자본가 등 보수 세력과 사회민주당의 타협에 의해 성립한 민주공화국. 1919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한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파가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그해 8월 헌법을 반포하면서 출범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극우 세력의 카프 반란, 좌파의 루르 봉기 등 반대파의 거센 반발에 시달렸고,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과 1923년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의 루르 점령으로 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20년대 중반 배상 문제를 일단락하고 다시 선진공업국으로 변모하면서 짧은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국력이 회복됨에 따라 강대한 독일 전선을 꿈꾸는 우익의 권력이 강화되고, 1929년 대공황에 휘말리면서 공화국은 급격히 쇠락했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면서 극좌와 극우 세력이 강해졌는데, 분열한 좌파와 달리 우파는 군부, 관료, 자본가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나치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1933년 1월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은 14년 만에 무너졌다.-73쪽

피노체트(1915-2006)
칠레 발파라이소 출생. 1973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육/해/공군 및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 1974년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시카고 대학 출신 경제학자들을 등용해 급진적 신자유주의정책을 시행했으며,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 구속, 고문, 살해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1988년 집권 연장 찬반투표에서 패배해 1990년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나 군 총사령관직은 계속 유지했다. 1998년 영국 방문 중 스페인 성직자 납치/살해 혐의에 따른 스페인 법원의 요청으로 가택연금되었으나, 대처의 지원과 칠레 정부의 요구로 1년 반 만에 칠레로 송환되었다. 그후 수없이 기소되었지만 끝내 법정에 서지 않았고, 2006년 말 자연사했다. 사망 직전, 재임 기간 중 발생한 문제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느낀다고 밝혔지만 반인권 범죄에 대해서는 인정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 피노체트에 의해 학살당한 이들은 총 4,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91쪽

샌프란시스코가 게이들의 수도가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600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을 병사로 동원했다. 전쟁은 그들을 가족들로부터 떼어내고 고향 마을에서 대도시로 끌어내어 동성만이 존재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만 명의 남자들이 자신이 오랫동안 감춰왔던, 또는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자기 본래의 성적 기호에 눈을 떴다. 군항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전쟁으로 출병하는 최대 근거지이기도 했다. 동성애라는 이유로 군에서 불명예제대를 당한 많은 병사들이 기독교적 도덕관이 지배하는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채 이 관대한 고장에 머물렀던 것이다.-134쪽

다이쇼 데모크라시
다이쇼 천황 재위기간(1912-1926)을 중심으로 일본의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서 나타났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경향. 1905년 러일강화조약 체결에 반대한 시민운동을 시작으로 군비확장 반대, 악세 폐지운동 등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적인 흐름이 형성되었다. 정당내각제 성립, 보통선거제 실시를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졌으며 대학 아카데미즘의 확립과 출판/저널리즘의 발전 등 문화적인 자유주의 경향도 확대되었다. 1930년대 들어 군부와 우익단체 등이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혁신운동’을 전개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붕괴하고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치달았다.-145쪽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고 군사력에서 소련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각각 투하했다. 지상 500~600미터 상공에서 폭발한 원폭은 뼈까지 태워버리는 열선과 7km 떨어진 집 유리창까지 날려버리는 폭풍, 그리고 방사능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초토화했다. 원폭으로 1945년 말까지 히로시마에서 14만 명, 나가사키에서 7만 명이 사망했다. 또한 히로시마에서는 부상 13만 명, 완전 연소 및 완파 가옥 6만 2천 호, 반소 및 반파 가옥 1만 호, 이재민 10만 명이 발생했고, 나가사키에서는 부상 5만 명, 완전 연소 및 완파 가옥 2만 호, 반소 및 반파 가옥 2만 5천 호, 이재민 10만 명이 발생했다. 징용 혹은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과 중국인 피폭자도 7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비일본인 피폭자는 오랫동안 일본 정부의 피폭자 원호정책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고통을 홀로 감수해야 하는 이중의 피해를 겪었다.-181쪽

‘죽음’을 스스로의 것으로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한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싸움은 근대 일본에서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독립투쟁이었다.
-187쪽

(하세가와 데루)
원한다면 나를 매국노라고 욕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타국을 침략하는 것도 모자라 죄 없는 난민들 위에 태연자약하게 이 세상의 지옥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자들과 똑같은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 그것을 나는 더 큰 수치로 여깁니다. 참다운 애국심은 결코 인류의 진보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배외주의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배외주의자들이 일본에 생겨났습니까?(중국의 승리는 전 아시아의 미래를 여는 열쇠다-일본의 에스페란티스트에게 보내는 편지)-190쪽

우리 에스페란티스트들에게 민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민족이란 단지 언어, 습관, 문화, 피부색 따위의 차이를 뜻할 따름이다. 우리는 서로 ‘인류’라는 하나의 대가족에 속한 형제라고 생각한다. (......) 우리 역시 자신의 조국을 깊이 사랑한다. 하지만 그 조국애는 타민족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지금 내 앞에는 자유의 바다가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바다는 나를 조국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갈라놓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새로운 생활로, 새로운 친구들에게로 이끌어줄 것이다. 안녕, 나의 조국이여, 나의 친구여.(<투쟁하는 중국에서>-하세가와 데루)
-191쪽

안우생
안중근의 막내동생 안공근의 장남. 해외에서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동시에 에스페란토를 통한 문학활동으로 민족해방과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안중근이 처형된 후 일가족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가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다시 상하이로 옮겼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인성학교를 거쳐 베이징 복건대학과 광둥 중산대학에서 수학했다. (......) 해방 후 김구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하며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뒤 행방이 묘연했으나 1991년 북한에서 사망 소식이 발표되었다. -195쪽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은 법정에서 자신은 "한일 친선을 방해하고 동양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제거한 것이라고 밝히며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동양 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했다. 그가 1910년 2월 밝힌 동아시아 평화구상은 뤼순을 개방해 한중일 3국이 동아시아 평화회의체를 세울 것, 뤼순에 3국이 공동으로 은행을 세우고 3국 공용화폐를 발행할 것, 3국 연합군을 창설해 서양 침략에 맞설 것 등 5가지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세계적, 지역적 차원의 협력기구 등장에 수십 년 앞서 역내국들의 협력과 통합을 제시한 것이자, 일본이 평화지향적 국가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바람이 담긴 구상이다. 안중근은 자서전을 쓴 후 1910년 3월 15일부터 이러한 구상을 담아 <동양평화론>을 썼지만, 안타깝게도 11일 후 사형이 집행돼 <동양평화론>은 머리말과 1장 일부만 작성되었다.-235쪽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인연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인연은 임시정부에서 다시 맺어져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감옥에 갇힌 아들 안중근에게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고 당부한 조마리아 여사는 상하이 독립운동계의 정신적 대모였으며, 동생 안정근은 연락과 재정 업무를 담당한 임시정부의 핵심으로 해방 후에는 김구의 밀서를 들고 김일성, 김두봉과 만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어냈다. 막내동생 안공근도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약했으며, 김구의 대외담당비서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구 암살 후에도 민주화외 통일운동에 앞장선 안중근 가문은 그러나 5.16 후 군사정권에 의해 반국가사범으로 몰려 안경근이 7년형을, 숙부 안태건의 손자 안민생이 10년형을 선고받는 등 탄압을 받았다.-241쪽

조선어학회사건은 해방 후 한국에서 일본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탄압사건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 중심인물인 이극로에 대해서는 대개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 이유는 그가 ‘월북자’였기 때문이다.
-264쪽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군 관계자 984명 가운데에는 조선인 23명과 타이완인 2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희생자일 조선인과 타이완인들이 왜 일본군의 전범으로 죽어야만 했을까. 일본 후생성에 따르면 일본군에 군인/병사로 소속되었던 조선인의 수는 11만 6천명 남짓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약 12만 6천 명의 군속이 근무했다고 한다. 총 24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전장에 끌려나갔던 것이다.
-268쪽

국민총력조선연맹
일본의 대륙 침략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한일합동단체. 침략전쟁 선전, 전시공출 독려, 학도병지원 선동 등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주도했다. 국민협회, 시중회, 조선기독교연합회, 조선불교중앙총리원, 천도교중앙총리원, 조선문예회, 조선상공회의소 등의 단체와 윤치호, 천도교의 최린, 여성계의 김활란, 재계의 박흥식, 언론사주이던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조선일보의 방응모, 김사량과 함께 중국 전선에 파견되었던 시인 노천명, 음악가 홍난파 등이 참여했다.-280쪽

생체실험 의혹
의문에 싸여 있는 윤동주의 사망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가 생체실험 의혹이다. 윤동주와 같은 형무소에 갇혔던 고종사촌 송몽규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윤동주가 죽기 얼마 전부터 매일같이 규슈제대 레지던트들에게 이름 모를 주사를 맞았으며, 그 주사를 맞고부터 살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으며 물체도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송몽규 역시 윤동주가 죽은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문학 연구가 고노 에이지는 1980년 그 주 사의 성분이 당시 규슏제대에서 실험하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혈장 대신 소금물을 주입해 신체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측정하는 생체실험이자, 전쟁에서 다친 병사에게 귀한 혈장 대신 값싼 생리식염수를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한 실험이라는 것이다. -287쪽

동백림 사건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가 유럽 거주 예술인 등 194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 행위를 했다고 발표한 사건. 윤이상을 비롯해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펼쳤던 김중태/현승일 등이 이 사건에 휘말렸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해 부정선거 규탄시위 등을 잠재우고 3선개헌과 장기집권의 초석을 만들었으며, 유럽 거주 관련자 17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적인 항의를 받기도 했다. 관련자들은 북한 방문, 금품 수수 등은 인정했지만 간첩혐의는 부인했다. 핵심인물로 분류된 34명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으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정규명 등 2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국제적 항의가 빗발치자 박정희 정권은 3선개헌 작업이 마무리된 1970년까지 관련자를 모두 특사로 석방했다. 2006년 1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피의자들에게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고 범죄 사실을 확대 과장했다’고 발표했다.-308쪽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의해 그때까지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 신민이 되고 말았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옮겨가 살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말미암은 경제적 궁핍 때문이었고, 그 뒤에는 탄광과 광산, 그리고 군수공장 등으로 강제연행 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말기에는 일본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수가 약 240만 명에 달했는데, 그중 약 60만 명은 일본의 패전 뒤에도 일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발효와 더불어 그들에게 법무부 민사국장의 일방적인 통보로 ‘일본 국적 상실’을 선고한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일본의 신민이 되어버렸던 이들이 이번에는 다시 국가에 의해 마음대로 국적을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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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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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사회보장이 없는 대신 고용보장이 있었잖아요. 지금은 사회보장도 없는데 고용보장마저도 흩어지는 거 아닙니까, 중산층이 몰락하고. 사람들은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자기 사고방식의 책임인데, 그런 생각을 안 해요. 교육 문제가 왜 안 풀리냐 하면 학부모들의 머리가 썩었기 때문이에요. ‘우리 아이들을 다같이 잘 키우자’가 아니라 ‘내 아이만 잘 키우자’는 거거든요. 모든 사람이 다 그러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아이는 어떻게 되어도 좋고,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회에서 교육이라는 게 있을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맨날 요구만 한단 말이죠. 누구하나 뽑아놓으면 해결될 것처럼 생각되는 게 얼마나 비합리적인 겁니까?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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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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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라는 게 서민들이 달러를 빌려 써서 온 게 아니잖아요. 재벌들이 빌려 쓴 거고 그걸 승인해준 게 관료 아닙니까? 그때 우리가 허리띠 졸라매면서 이런 엄청난 국가부도 사태를 초래한 재벌과 관료집단을 개혁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김대중 정권이 등장한 다음에 탈IMF 위기 강박관념에 빠져들었고 재벌과 관료를 앞세워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한 거 아닙니까? 사실은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렇게 되면서 개혁의 기회를 놓친 거예요. 구조적인 문제를 개혁했어야 하는 거죠. 그 기회를 놓치니까 재벌과 관료들이 무엇으로 살아남았습니까?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전도사가 되어버린 것 아닙니까? 개혁의 대상이 자기가 개혁의 주체임을 자부하면서 ‘이렇게 우리가 IMF 위기를 돌파했다’고 했는데요. 그걸 돌파한 것이 결국 IT 산업과 카드 경제 아닙니까? 그런데 IT 거품이 빠지고 카드빚으로 서민경제가 어려워지니까 노무현 정권한테까지 부담으로 남게 된 거죠. 노마크 찬스뿐 아니라 국제금융자본이 어시스트해주는 그 기회를 날려버린 겁니다.
-177쪽

17대 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 거기서 제일 먼저 했어야 했던 일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이른바 4대 개혁입법입니다. 그리고 민생이나 사회복지 부분에서 반드시 했어야 할 것들을 ‘이것만은 반드시 하자’는 아젠다를 가지고 ‘이게 17대 국회에서 나타난 민의’라고 밀어붙였어야죠. 민주노동당 10석을 합쳐 162석이면 뭘 못하겠습니까? 국회에서 그 시대정신에 입각해서 우리는 이렇게 간다고 했어야 했습니다. 상생이니 화해니 하는 것은 개혁을 해놓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어야 하구요.
-178쪽

유창순 씨가 경제기획원 장관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됐을 땐데, 관료 출신의 경제인조차도 남의 전쟁에 가서 돈 벌어오는 것을 민망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40년이 흐른 지금은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 아닙니까? 교육 수준은 그때하고 비교해서 어마어마하게 높아졌구요. 그때는 적극적 파병론자도 그렇게 민망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파병 반대론자도 국익 얘기만 나오면 꼬리를 내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진보진영이 반성을 해야 할 부분이 이런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190쪽

반북핵만을 얘기하는 것은 기회주의자들이에요. 미국 핵무기까지 반대를 하는, 지구상에서 핵무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원칙적인 입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구요. 한국의 일부 통일운동 세력에서 북핵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에도 반대합니다.
-192쪽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 국가라고 얘기하지만, 일본 민족이 세계 유일의 피폭 민족은 아니에요. 국가로서는 세계 유일의 피폭 국가지만요. 피폭당해 죽은 한국 사람이 히로시마에 3만, 나가사키 1만, 모두 4만 명이 넘어요. 그런데 우리 역사책에서는 이걸 안 가르칩니다. 20세기 우리 역사가 정말 울퉁불퉁했다지만 하루에 3만 명이 죽은 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4만 명이 죽었는데 이걸 역사 시간에 안 가르친다니까요.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미군의 핵무기가 우리한테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핵무기가 이렇게 나쁜 거라는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죠. 아직도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요. 한반도의 핵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려면 이런 문제를 얘기해야죠.
-193쪽

1957년에 일본에서 반핵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니까 일본에 있던 핵무기가 한국으로 이사왔잖아요. 그래서 1991년까지 적게는 600기, 많게는 1000기 이상의 핵무기가 한반도에 배치되어 있었는데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를 안 해왔으면서 북한이 최근에 개발했던 한 발인지, 몇 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만 문제 삼는 건 말도 안 되죠.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게끔 몰고 간 과정 자체는 그것대로 미국을 비판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북핵을 용인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193쪽

남한의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또 하나는 ‘미국이 혹시라도 북한을 때릴지는 몰라도 남쪽에 있는 주한 미군은 총알 하나 동원하지 못한다. 그건 내가 책임지고 막는다.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는 보장입니다. 북한을 껴안아야 하는 거죠. 그런 상황이 이라크하고 다른 겁니다. 죽어도 북한을 못 때리게 만드는 상황은 국제 사회에서 남한이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북이 군사 교류를 하고, 감군을 하고, 남북 간의 군축회의를 하고, 국군 장성이 북쪽에 가서 북한이 감군을 제대로 하는지 검열하고, 인민군 장성이 남쪽에 와서 또 남한은 감군을 잘하고 있는지 검열하는 상황이라면 미국이 제 아무리 세계 깡패라고 해도 폭격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194쪽

대한민국 정부나 시민운동 단체가 미국의 정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으로 하여금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거든요. 국가 이름에 똑같이 ‘코리아’라고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남쪽이 할 수 있는 여지는 굉장히 많죠. 우리가 원칙적인 입장에서 ‘핵무기는 절대 안 돼’라는 이야기도 해야겠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해도 되는 상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한국 정부를 추동하고, 한국 시민사회를 추동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압력을 미국에 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칼을 휘두르지 못하는 그런 조건을 남북이 같이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195쪽

형법의 간첩조항은 적국으로 규정이 되어 있고, 국가보안법은 반국가 단체에 적용되는데 미국은 적국도 아니고 반국가 단체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미국은 로버트 김을 한국 간첩으로 처벌했어요. 우리는 한국의 국익을, 최고 정보를, 그것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 결정을 ‘머리 검은 미국인’들이 들어와서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처벌은 고사하고 적발 내지는 위기의식조차도 없는 거죠. 이라크 파병을 보면서 처음에 느낀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 미국 간첩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그냥 간첩 수준이 아니에요.(웃음)
-196쪽

이완용도 소신이 컸죠. 그 사람이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송병준은 그랬을지 모르겠지만요(웃음). 노무현 대통령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제발 역사의 법정에 불려 나오지 말라’는 겁니다. 그나마 노무현 정권의 업적이라면 과거청산을 들 수 있어요. ......그런 노무현이 나중에 과거청산의 법정에 불려나오면 안 되잖아요. 신자유주의적인 거나 노동 문제는 역사의 평가로서 비판을 받겠지만 한미FTA 문제는 청문회 정도가 아니라 과거청산 법정이 열려야 할 사안입니다.
-197쪽

처벌이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했어요. 처벌이 안 되니까 보복이 생기는 거예요. 처벌과 화해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보복과 처벌이 대립하는 개념이지.
-208쪽

감군 문제는 남쪽보다 북한이 더 절박합니다. 우리는 2년 가지고 썩는다고 하는데 북한은 인구가 우리 절반임에도 불구하고 군인 수는 두 배나 됩니다. 그러니까 복무 기간이 네 배가 되는 겁니다. 걔네는 20대 청춘이 온통 날아가는 거예요. 북한 같이 경제가 어려운 나라에서 선군 정치를 하고 싶어서 합니까? 가장 우수한 노동력이 군대에 다 박혀 있는데요. 북한도 감군하자고 하면 제일 먼저 박수를 칠 겁니다. 비율로 하든지, 동수로 줄이자고 하든지 남북 공동 감군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북 경제가 삽니다.
-215쪽

박근혜 같은 경우는 "몇 번이나 사과해야 하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거랑 같은 거죠. 일본이 한국한테 사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과를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난다는 거죠. 진짜 사과라면 한 번이면 되는 겁니다. 진짜 사과하는 눈빛과 분위기라면 말없이 다가와서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고, 마음이 풀릴 수 있는 거죠. 그게 수구세력 입장에서도 불행입니다. 그 짐을 대를 이어서도 물려줄 겁니까?
-218쪽

물론 저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는 거 바라죠. 그렇지만 거기에 너무 급급해하다가 우리가 진짜로 깊이 있게 반성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말자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외환위기 때 우리가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탈출 강박관념 때문이었거든요. 지금의 상황이 어렵지만 탈출 강박관념 때문에 공학적인 묘수풀이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진짜 진지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성찰의 계를 마련해야 하고요.
-219쪽

매 맞는 여성에게 가서 한반도 평화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건 폭력이죠. 매 맞는 여성에게는 안 맞는 것이 평화인 거고, 배고픈 아이한테는 밥이 평화인 거고, 졸린 사람에게는 잠이 평화인 거죠. 이주 노동자들처럼 추방의 위협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는 여기서 살 권리가 있어"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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