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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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박탈은 인간에게서 인격을 빼앗고 인간을 '사물'로 최급하기 위해 필수적인 절차다.
지배자는 항상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나찌 독일만의 지혜가 아니다.
지금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많은 나라의 교도소에서 통상적으로 수감자를 이름이 아니라 수인번호로만 부른다-115쪽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기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자기 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155쪽

실상 이와 같은 질문은 나 자신의 귀에도 익숙하다...... '일본인'의 죄라는 것이 있을까요? 과거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학대한 사람들과 우리는 동일한 '일본인'인가요? '일본인'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었음을 무시하지 말아주세요. (단, 전쟁 전과 전쟁중에 천황제와 침략전쟁에 반대하여 싸운 일본인은 나찌에 저항한 독일인보다도 지극히 적었다.)-216쪽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만이 칭송될 뿐, 나찌 시대의 죄를 독일 스스로의 손으로 밝히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218쪽

대다수 독일인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았고 무지의 상태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각가 행사하는 테러리즘은 분명 저항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 국민이 전혀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일반 독일 시민은 무지한 채 앙ㄴ주하고, 그 위에 껍질을 씌웠다. 나찌즘에 동의한 것에 대한 무죄를 증명하기 위래 무지를 이용한 것이다. 눈, 귀, 입을 모두 닫고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을 알아채고 알리는 것은 나찌즘에서 거리를 두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그래서 결국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았다). 독일 국민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이 깊이 고려된 의도적인 태만이야말로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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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2-0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일드 보이'에서도 야생소년에게 '빅토르'라는 이름을 붙여주므로 '사람'이 되지요.
민경이 '조선 블로그' 올렸어요.^^

마노아 2008-02-02 15:04   좋아요 0 | URL
소싯적 쓰던 제 소설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와요.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요.
어제 읽은 만화 방울공주에도 이름을 불러줄 때 의미가 생기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순오기님, 순오기님! 막 이름 불러보고 싶어졌어요^^
 
자라지 않는 아이
펄 벅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절판


이 세상에, 자라지 않는 이 아이들처럼 죄 없고 순수한 존재는 없다.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설사 부모에게 아이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해도 그런 일을 방치했을 때 결과는 끔찍하다. 처음에는 힘없는 아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힘없는 노인들을 죽이는 것으로 확대될 수도 있고, 이렇게 양심이 무뎌지면 편견만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다. 피부색이나 종교 등만으로 사람을 구분해 죽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 죽는 사람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안락사라는 말은 듣기 좋은 말이지만 사실 무시무시한 현실을 듣기 좋은 말로 감춘 것에 불과하다.

-64쪽

나와 같은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을 때에는 정말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나와 같은 짐을 진 사람이 많다고 해서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슬픔을 지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들을 보고 나도 그럴 수 있으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68쪽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고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한다고 해서 떨쳐 버릴 수 없는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원망하고 탄식하는 데 힘을 다 쏟아붓지도 않았다. ‘왜’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지도 않았다. 가장 큰 변화는 나와 나의 불행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아이 생각만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삶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삶에 순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견디기조차 힘든 삶이다. 그렇지만 중심을 조금만 옮겨도, 쉽지는 않지만 슬픔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74-75쪽

나는 행복이 아이의 환경이 되게 해주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에 대한 기대, 긍지도 모두 버리고,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다만 흐릿한 아이의 정신에 어떤 빛이 반짝일 때 감사하기만 하겠다고 결심했다.

-79쪽

아이들은 자기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알아야 할 너무나 중요한 사실인데 정작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도 사람이고 사람처럼 고통을 받는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깊은 고통을 느낀다.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것이다.

-86쪽

언제까지고 어머니가 아이를 감싸고 보호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 아이도 사람이고, 자기 몫의 조그만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97쪽

이 아이들은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감정은 지능과는 무관하다.

-105쪽

아이의 삶은, 그것이 얼마나 단순하든 간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력한 아이지만 무언가 세상에 기여할 부분이 있다. 아이가 그런 상태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고, 그 원인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 자체는 낫거나 변하지 못할 지라도, 이 아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인해 다른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107쪽

미국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과학적 진보 중 대부분은 사설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이다. 공공 자금으로는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과학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절실한 분야, 정신지체의 원인과 치료법 연구는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소규모 사설 기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연구를 관장하는 기관이 있어서 연구가 중복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할 것이다.

-113쪽

이 위대한 여인, 나의 어머니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런 한편 상처받은 삶을 남겨 두고 떠났다. 내 형제들과 내가, 생부와 생모에게 버림받은 우리들이 나중에는 우리 양모인 펄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캐롤이 우리가 버림받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가 글을 쓰도록 만든 1차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138쪽

유명인으로서 어머니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고 그녀의 관심과 동정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말에 귀 기울이고 어머니의 노고를 이해하는 온 인류에게 관심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어머니가 캐롤을 낳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가 남긴 유산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단언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나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39쪽

윈스턴 처칠이 사회적 다윈주의에 기반을 두어 ‘정신적 퇴화자’에게 강제로 불임시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얼마 전 영국에서 밝혀졌다. 1910-11년 영국 내무장관 재직 중 처칠은 이 사람들을 시설에 강제 수용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차라리 더 인간적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신지체인들의 생식을 막으면 대영 제국에서 정신박약 인구를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처칠의 생각은 영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적국의 아돌프 히틀러가 저지른 만행의 전조가 되었다.

-150쪽

여러 대기업(매리어트, 피자헛, 맥도날드, 보잉, 유나이티드 항공, IBM 등)에 수천 명의 정신지체인이 고용되었다. 일례로 피자헛은1,012명의 장애 노동자를 고용했는데(그 중 73%는 정신지체이다), 이들은 비장애인보다 직장에 4~5배 가량 더 길게 머물렀다. 낮은 이직률 덕분에 피자헛은 신입사원 모집, 고용, 교육비용 220만 달러 이상을 절약할 수 있었다.

-170쪽

어쩌면 인류의 가장 큰 진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내딛은 조그만 발걸음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인종주의는 아시아인, 흑인, 백인이 현관 앞에 나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내딛는 아주 작은 한 발에서 무너지기 시작하는지 모른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직장 동료가 사무실 밖에서 우정을 나눌 때마다 동성애 혐오증은 그렇게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는지 모른다. 딸이 성추행을 당한 경험을 이야기할 때 아버지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 남성은 여성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될지 모른다. 통계 자료와 도표, 연구 자료가 아니라, 나의 여섯 살배기 조카가 말하듯 ‘진짜 진실’을 말하는 개인의 이야기가 산을 움직이고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173쪽

나는 1974년 처음 <자라지 않는 아이>를 읽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내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난 직후였다. 24년 전에 출간된 책이었고 책의 어떤 부분은 약간 구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펄 벅의 이야기에서 정말 큰 위안을 얻었다. 그녀는 나의 고통을 알았고 나는 그녀의 고통을 알았따. 그녀는 나에게 지지와 희망을 주었다. 오늘날 그리고 훗날에 다른 가족들에게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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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2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2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12월
절판


총 231개의 근육이 관여하고
15개의 안면근육이 동시에 수축하고
광대뼈근육을 전기적 흥분상태로 만들고
숨을 헐떡이게 하고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하는

웃음!!
-31쪽

공공장소에서 몰래 녹음한
1,200건의 웃음 샘플을 분석한 결과
유머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웃음은 고작 10~20%
대부분의 웃음은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도 알아~"
가장 이상적인 대화의 순간에 발생한다.
-32쪽

코미디물을 보고 난 사람들의 혈액검사 결과
병균을 막는 항체
200배 증가!

질병에 대한 면역력과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힘
200배 증가!

하지만
여섯 살 때는 하루에 300번 웃던 웃음을
다 커서는 하루에 17번밖에 웃지 않는다.
-34쪽

각막에 산소와 양분을 공급하며 노폐물을 받아내는 것은
피가 아닌
눈물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은
심혈관에 부담을 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시원하게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눈물은 몇몇 세균들을 1시간에 99%,
3시간 후에는 99.99%를 죽인다."
-40쪽

명왕성을 계속 행성으로 인정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다른 행성체들과의 형평을 고려 태양계 행성목록을 12개로 늘려야한다는 딜레마까지 안고 있던 천문학계는 결국 명왕성 퇴출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항공우주국의 데이터베이스는 아직 명왕성을 소행성으로 분류하지 않고 있다. 유럽에 본부를 둔 IAU와 미국 천문학자들은 지금도 명왕성의 지위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명왕성은 기존 9개의 태양계 행성 중에서 유일하게 ‘미국인’인 톰보에 의해 발견된 ‘행성’이다.
-99쪽

‘집중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란, 소아 아동들에게 나타나는 충동성/무절제성/과다행동성 증후군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학습장애를 동반하며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하고 폭력적이며 산만한 행동을 보인다. 한국의 경우 초등학교 한 반에 3-4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남자 아동에게서 더 많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ADHD증후군 아동들은 정상아보다 활동의 절제가 부족하고 남의 일에 조급증을 내며 자주 참견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쉽게 화를 내고, 충동적이고, 감정이 불안정하고, 기분변화가 심하고,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다. 지속적으로 공격성, 분노, 적대감, 반항 등 행동문제를 일으킴에 따라 주변환경의 부정적인 제재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기 쉽고, 이는 심각한 반사회적 행동이나 자기비하행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청량음료의 대표격인 콜라에 함유되어 있는 인산을 지속적으로 섭취한 아이들에게서 ADHD발병확률이 높다는 보고가 있다.
-134쪽

칼라일 그룹은 911 테러 이후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911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이 속한 사우디의 빈라덴 가문 또한 칼라일의 주요 투자고객 중 하나다.
-161쪽

일본군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400여 척에 가까운 연합군 군함이 피해를 입고 5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정작 가미카제의 최우선 공격목표였던 연합군 항공모함은 한 대도 침몰되지 않았다. 사실 가미카제 전술은 연합군에 대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면초가에 몰린 일본군 수뇌부가 자국민들을 상대로 군국주의 정신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상징적 자해행위였다.
-176쪽

2005년 현재 일본 자위대의 총병력은 26만 3,000명, 일본의 군사비 지출규모는 426억 달러로 공식적으로 세계 3위, 비공식적으로는 세계 4위다.
-179쪽

"노점상은 원래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은 서울시가 배려한 것이며, 배려는 어디까지나 배려일 뿐이다. 따라서 항구적인 영업권은 인정할 수 없다"며 풍물벼룩시장의 강제철거를 시사하고 있는 상태다.
-186쪽

오세훈 서울 시장이 전임자가 했던 약속을 번복하면서까지 ‘임기 내에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식의 야심찬 포부에 집착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전임자인 이명박 전 시장이 임기 내에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 눈에 띄는 성과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추진력을 인정받고 이후 대통령 후보로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상황적 학습효과의 산물이라는 비판적인 분석도 있다.
-187쪽

이정우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는 "흔히 ‘군부정권이 독재는 했지만 경제는 잘했다’는 말들을 하지만 그건 단순히 경제성장률 수치만 보고 오해하는 것이다. 독재정권이 한 경제성장이란 결국 개발주의/토건국가의 입장에서 전국을 개발하고 땅값을 올려서 수치로 생색을 낸 것일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204쪽

부적합한 대중교통수단의 대안은 결국 택시밖에 없지만, 독일의 경우처럼 장애인에게 교통증을 발급하여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 한 저소득층이 많은 장애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반 택시요금의 35% 정도로 이용할 수 있는 장애인콜택시는 30분~1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이용할 수 있는데다 오전 7시에서 오후 10시까지만 운행된다. 실제로 자가용을 구입하여 직접 이동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장애인은 전체의 35.5%에 불과하다.
-213쪽

소극적인 의미의 평등은 모든 이에게 동일한 기회를 일정하게 부여한다는 뜻이지만, 적극적 평등은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기회의 평등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다. 당연히 공동체구성원들 중에는 이러한 ‘역차별’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생겨날 수 있다. 따라서 긍정적 역차별은 일정한 법률의 형식을 취할 필요가 있게 된다.
-214쪽

동물을 보호구역이나 동물원으로 몰아넣게 되면 그들의 미래는 사라질 것이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서식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팀 플래너리(미래학자)
-251쪽

1945년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
조선인들에게는
꿈에 그리던 해방...
그러나 콰이강의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범재판

A급 일본인 전범 7명 사형
B/C급 조선인 전범 23명 사형

B/C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지만 사형을 면한
나머지 조선인들은
1957년까지 일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소 후
한 사람은 목을 매었고
또 한 사람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68쪽

1948년 11월 12일, 도쿄전범재판소는 심리 중 사망한 2인과 정신 이상을 일으킨 1인을 제외한 피고 25명에 대하여 전원 유죄를 인정, 교수형 7명, 종신형 16명, 금고 20년 1명, 금고 7년 1명의 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이들 외에 전쟁과 식민점령의 정책에 관여했던 수많은 책임자들은 기소를 면하여 전후 일본재건의 주역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미국은 과거에 연연하기보다는 태평양 전략선의 새로운 교두보이자 방파제로서 일본의 재건이 시급했고, 일본인들로서는 또 그들 나름대로 도쿄전범재판이 사후법에 의한 ‘승리자의 재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전쟁관련자들의 사회적 복권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270쪽

B/C급 조선인 전범 148명 가운데 전쟁 당시 군인의 신분이었던 이들은 3명뿐이다.
1940년을 전후하여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잇단 승리로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수십만 명의 연합국 포로들을 떠안게 됐다. 포로관리의 필요성을 절감한 일본 군부는 1941년 12월 육군성에 포로정보국을 설치하고, 이듬해 5월부터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일본은 당시 조선에서만 약 3,000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일정기간 군사훈련을 시킨 뒤 1942년 8월부터 동남아시아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배치했다.
-271쪽

일본 당국은 일본인 군인 및 군속, 전범자에게 연금, 위로금, 유족 연금 등을 지급했고 대만인들에게도 200만 엔씩 지급했다. 조선인들만 보상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65년 한일회담으로 일괄해결된 사항이라는 논리였다. 한국정부 역시 조선인 전범들의 보상 문제에는 철저히 외면해왔다. 이학래는 조국행을 포기했다.
-273쪽

1794년 5월에 갑자기 일본에 나타나 불과 10개월 만에 무려 140여 점의 풍속화를 남기고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 ‘토슈사이 샤라쿠’라는 전설적인 일본화가가 김홍도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연풍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김홍도가 정조의 밀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풍습과 지형 등을 살피고 낱낱이 그림으로 그려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샤라쿠의 화풍은 당시 일본의 화풍과는 너무 다르며, 오히려 조선풍속화의 화풍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편,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인물인 김홍도와는 달리 거의 전생애가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고 할 수 있는 혜원 신윤복이야말로 토슈사이 샤라쿠의 진짜 정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345쪽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구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권정생
-371쪽

1981년부터 한 교회잡지에 <몽실언니> 연재를 시작했다가 "인민군이 너무 인간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원고 일부가 삭제되기도 했다.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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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사려고 했는데, 2권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고마워요 마노아님

마노아 2008-01-07 21:57   좋아요 0 | URL
책꽂이에 나란히 꽂아 놓으니 더 뿌듯했어요. 반응 좋으면 다음 번 회사 선물에 포함되는 거야요? ^^;;;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 탐미의 시대 유행의 발견, 개정판
이지은 지음 / 지안 / 2006년 6월
구판절판


중국에서 말하는 ‘大人’의 풍모를 기본 소양으로 여긴 당시(16세기...) 프랑스 왕이나 대영주들에게 ‘구두쇠’보다 치욕스러운 평판은 없었다.
-17쪽

샤를 9세 재위 시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매년 1월 1일을 한 해의 시작으로 정하기 전까지는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부활절이 새해의 첫날이었다.
-23쪽

16세기 왕족들의 생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로맨틱하지 못했다. ...... 사실 당시 공주는 자매인 다른 공주들뿐 아니라 자기 시종들까지 데리고 한 방에서 잤다. 시종들은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인 호위병과 기사들까지 포함된다. 한 방에 50명 남짓한 남녀가 혼숙을 한 것이다.
-25쪽

당시 왕들은 궁전의 옥좌에 앉아서 신하들에게 점잖게 명령만 내렸을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 왕의 삶이란 그야말로 여행과 이동의 연속이었다. ...... 왕들은 지방에서 일어나는 잦은 민란을 평정하기 위해서, 또는 반란군에 쫓겨서 자주 궁을 떠나 여행길에 올라야 했다. 대책 없는 전염병을 피해 급히 피난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평시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지방의 귀족들을 찾아가 어르고 겁도 줘야 했고, 세금도 직접 챙겨 와야 하는 등 친히 지방을 돌면서 수행해야 할 업무가 많았다.
-27쪽

당시 여행은 말을 타고 유유히 거니는 낭만적인 모습과는 한참 멀었다. 제대로 닦인 도로가 없이 진창길을 헤치며 늪을 건너야 했고, 곳곳에 도사리는 비적이나 암사자의 테러에도 맞서야 하는 고생길이었다.

여러 성을 오가며 생활했던 당시의 궁정은 집기며 기본적인 가구들을 각 성마다 비치하고 몸만 옮긴 것이 아니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궁정 전체가 통째로 이사를 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시는 가구나 집기를 놓아두고 간다고 해도, 돌아올 때 그대로 온전히 남아 있을 리 없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수도원의 가구들을 제외한 16세기 가구 대부분은 옮기기 쉽게 고안되었다.
-29쪽

19-17세기에도 요즘처럼 거울을 여자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당시 여성의 가장 큰 덕목이란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되는 것이었다. 모범답안으로 여겨진 르네상스 미인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세 가지 하얀 것, 피부, 치아, 손
세 가지 검은 것, 눈, 속눈썹, 눈썹
세 가지 빨간 것, 입술, 뺨, 손톱
세 가지 긴 것, 몸통, 머리카락, 손가락
세 가지 짧은 것, 치아, 귀, 발
세 가지 가는 것, 입, 허리, 발볼
세 가지 굵은 것, 팔뚝, 허벅지, 다리
세 가지 작은 것, 젖꼭지, 코, 머리
-알랑 드코, <미의 기준> 중에서
-37-38쪽

머리카락에 신경을 많이 쓴 당시 사람들은 염색을 하기도 했다. 빨간 머리카락은 은화 30개에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처럼 불길하다 해서 남자는 검은 머리를, 여자는 금발을 최고로 쳤다. ......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까지도 피부를 하얗게 보이기 위해 아침마다 백분을 온몸에 뿌리는 데 한 시간을 기꺼이 투자했다.
......
이렇게 두터운 화장을 한 번 하면 보통 일주일 동안 지우지 않고 매일 덧칠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풍겼고, 당연히 향수가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17세기 향수의 중심지는 문화적으로 앞선 이탈리아였다. ......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향수를 한두 방울 뿌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몸은 물론이고 겉옷이며 속옷, 신발, 장갑 등등에 뿌렸다.
......
씻지 않아서 생기는 악취를 가리려고 향수를 뿌려대는 와중에 사람들이 유일하게 매일 씻는 신체 부위가 있었다. 바로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손이었다.
-44-45쪽

당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던 샤프란, 귀족의 식탁에 필수품이었던 후추, 약재로도 쓰였던 계피, 영혼마저 녹일 듯한 단맛을 전해준 설탕 같은 향신료들이 들어와 단박에 프랑스 사람들의 혀도 녹여버렸다.
-59쪽

아무리 넓고 큰 성에서도 오븐을 집에 두지 않고 성 밖에 놓았던 까닭은 오븐의 열기가 종종 큰 화재를 불렀기 때문이다. 빵은 지금처럼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각자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었다.
-60쪽

16-17세기 프랑스 식탁의 중심은 육류였다. 기록을 보면, 당시 부자들은 하루에 1kg 정도의 고기를 먹었고, 수도원에서 주는 음식 배급으로 살아가는 빈민들도 일주일에 네 번은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사냥이 일상화된 시대였기 때문에 고기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직접 사냥을 하지 못하는 도시인들은 주로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다 먹었다. ...... 유일하게 먹지 못한 고기는 말뿐이다. 교회에서 대기근이 닥칠 때를 제외하고는 먹어치우기보다는 없어서는 안 될 이동수단으로서 이용가치가 컸다.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었던 육류에 비해 생선은 무척 귀한 것이었다. 파리를 비롯해 내륙 지방에서는 보존상의 문제로 생선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안동 간고등어처럼 소금을 듬뿍 쳐서 보관하기에는 소금이 너무나 비쌌다. ....... 당시 사람들은 고기를 맛으로 먹는 음식이라 생각했던 반면, 야채는 약으로 먹는 음식으로 여겼다.
-63-64쪽

17세기 때 음식 재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육류였다면, 일상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음료는 포도주였다. 정화 시설이 없었고, 수인성 전염병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에 당시에는 물 대신 와인이나 맥주를 마셨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다섯 살이 지나면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 요즘이야 오래 숙성시킬수록 좋은 와인으로 치지만, 당시에는 압착해서 짜낸 지 1년 내의 것을 최고로 쳤다. 포도주를 오래 숙성시키는 기술이 없던 탓에 포도주는 신선한 상태로 마셔야 하는 음료였다. 당시 포도주는 알코올 농도가 아무리 높아도 3%가 되지 않았다. 애주가 입장에서 보면 와인이 아닌 포도 주스였던 셈이다.
-65쪽

17세기의 기본 식사는 하루에 두 끼였다.

루이 13세의 경우는 보통 300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남들 앞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권력의 과시로 여겨지던 시대의 풍속이다.

17세기 유럽인들은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우아하기만 할 것 같은 왕조차 스프에 손가락을 넣어 고기를 건져 먹은 것은 물론이다. 물론 포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포크는 커다란 고기를 썰기 위해 고정하는 도구로 쓰였다. 더구나 포크 무게는 500g 정도로, 한 사람이 들고 휘두르기에도 무거웠다.

손가락 식사에도 나름의 예절이 있었다. 왼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의 세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냅킨은 반드시 왼손에 걸치며, 식사 전후에 반드시 오렌지 향을 가미한 물에 손가락을 씻고 냅킨에 닦았다.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포크가 보편화됐지만, 가장 기본적인 식사 예절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68-69쪽

루이 14세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지만 일방적으로 목소리만 높이는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주로 대신들의 보고와 논의를 경청하기만 하고 언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왕의 역할은 대신들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열린 귀를 가진 왕이었지만 정적에 대해서는 과격할 정도로 잔인함을 보였다.

-84쪽

베르사유는 성의 명칭이 아니라 마을 이름이다. 루이 14세가 살던 성이 베르사유라는 마을에 있어서 베르사유 성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19쪽

베르사유는 우리나라 경기도의 일산이나 분당, 충청도의 신행정수도처럼 계획도시이다. 이는 베르사유 성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역시 성의 연장이란 의미이다.

-121쪽

왕이 사는 궁전에 아무나 출입한다는 것은, 왕가 일가친척이라도 되어야 의관을 갖추고 겨우 궁궐에 들어갈 수 있었던 우리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왕은 만인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언제든지 아버지가 사는 곳을 방문하고, 아버지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심지어 루이 14세가 카비네에서 업무를 볼 때는 실내화를 빌려 신고 왕의 침실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이토록 왕궁 출입이 자유로웠으니 당시에도 유럽 전역에서 베르사유를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124쪽

규모로는 1664년 재상 콜베르가 만든 왕립 도서관이 제일로 꼽힌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출간된 모든 책들은 여기에 두권씩 보관하도록 의무화한 법이 만들어져 장서는 날로 늘어갔다. ...... 18세기 파리의 공공 도서관이 종종 박물관 역할을 겸했다. ...... 18세기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하루 종일 일반인에게 개방된 공공 도서관에서 맘껏 빌려보며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다. ....... 당시 파리는 도서관뿐 아니라 유명한 출판사 겸 서점들이 널린 유럽 제일의 교양 도시였다.

-193-194쪽

원래 살롱이란 말은 둥근 방에 천장이 돔 형태로 된 공간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살롱이란 단어에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교적 의미가 추가되었다. 주로 아름다운 여주인이 자기 집 응접실을 개방하여 예술가나 철학자, 학자를 초대해 담소를 나누는 모임을 뜻했다. 요즘 식으로 하면 문학 동아리나 미술 동아리 같은 분위기의 모임이다.

-197-198쪽

오페라를 감상할 때는 조용히 앉아 우아하게 듣는 것을 에티켓으로 생각하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은 아이돌 스타의 콘서트를 찾은 10대 팬이 할 법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다. 아리아를 따라 부르고, 수건이나 꽃을 던지고, 마음에 드는 성악가가 나오면 괴성을 지르며 손을 흔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당시 유명 극작가나 오페라 가수는 요즘 유명 소설가나 대중음악 가수들을 뺨 칠 만큼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연극과 오페라가 끝나면 다음날 신문에 어김없이 공연평이 실리고, 파리의 살롱 이곳저곳에서 공연 소감을 나누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204쪽

toilette(투왈렛)이란 말은 현대 프랑스에서는 화장실을 가리키지만, 18세기에는 몸을 치장하는 모든 행동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 것뿐 아니라 목욕을 하고, 이를 닦는 것까지 모두 투왈렛이라고 했다. 투왈렛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당시 모든 사람의 생활습관이었다.

-212쪽

루이 14세 시대의 베르사유는 외양처럼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복도마다 오줌 냄새가 진동했고, 가발에서 나온 비듬과 벼룩이 반질한 대리석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루이 14세는 유럽의 태양이라 불렸지만, 평생 목욕한 횟수를 꼽으면 20번 정도에 불과하다. 3-4일도 아니고, 3-4년에 한 번씩 목욕을 한 셈이지만, 이마저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놀라운 기록이다. 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3쪽

17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세수란 포도주를 엷게 탄 물에 흰 천을 적셔 얼굴과 손에 문질러서 닦는 것을 뜻했다. 물속에 들어 있는 나쁜 균이 모공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물에 몸을 담가 목욕하는 것을 심하게 두려워했다. 당시 수인성 전염병이 흔했던 탓에 사람들은 그러한 속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깨끗한 물을 구하기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214쪽

당시 파리는 유럽 최고의 도시였지만 시내를 통틀어 공동 우물은 고작 35개뿐이었다. 물이 귀했으니 단지에 담을 물은 당연히 돈을 주고 사야 했다. 파리 거리에서는 물장수들이 2만 명을 헤아렸다. 이들이 파는 물은 맑은 지하수가 아니라 바로 센 강에서 퍼 온 거무튀튀한 물이었다. 상하수도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터라 집집마다 각종 오물을 모두 센 강에 버렸고, 치안이 불안해서 강물에 시체가 떠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기서 퍼 온 물을 돈 주고 사서 음식을 해 먹으니 병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물이 부족한 여건은 18세기 후반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215쪽

루이 14세 시대에는 ‘뚫린 의자’들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방 한가운데 있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다른 사람들이 방 안에 있건말건 엉덩이를 드러내고 볼일을 봤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볼일을 보는 것은 사적인 용무,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18세기 여성들은 이 의자를 침실에 두고 혼자 조용히 볼일을 보아TEk.

-219쪽

애교점을 눈 옆에 붙이면 정열적인 사랑을, 볼 가운데 붙이면 우아함을, 보조개에 붙이면 주저하는 마음을, 코에 붙이면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음을 나타낸다.

-225쪽

‘바구니 드레스’라고 불리던 넓고 평평한 치마 드레스는 18세기 전 유럽의 최대 히트상품이었다. 한 벌을 만들려면 3m 60cm 나 되는 옷감이 들어가야 하는 이 드레스 덕에 프랑스의 직조 산업은 날로 번창했다.

-227쪽

17세기 중후반 까지도 자그마한 거울은 말 한 마리 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싼 물건이었다.

-228쪽

커피는 18세기 사람들에게 일종의 만병통치약이었다. 임신부들이 보약처럼 즐기는 음료였다. 근엄한 바흐조차 1732년 커피에 대한 칸타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커피 외에 18세기 사람들이 열광했던 음료로 초콜릿이 빠질 수 없다. 당시 초콜릿은 요즘처럼 딱딱한 고형이 아니라 죽처럼 걸쭉했다. 초콜릿 음료는 커피보다 고급이었다. 당시 초콜릿은 요즘의 부드러운 초콜릿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칠었다. 사람들은 초콜릿이 몸을 데워서 최음제의 효과를 낸다고 믿었다.

-273쪽

18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아무리 제 자식일지라도, 아이란 그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짐승’같은 존재로 여겼다. 특히 아직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는 아이들은 애완동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유 있는 집안에서는 아이를 낳자마자 시골에 있는 유모에게 보냈고, 걸음마를 떼고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집으로 데려왔다.

-276쪽

지금은 결손가정이 아닌 다음에야 아이들이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아홉 살이 되면 남자아이들은 수도원으로, 여자아이들은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어려서 집을 떠난 아이들은 열여섯 살 정도가 되어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을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지금과 달리, 당시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아동 학대에 가까운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278쪽

흔히 18세기를 ‘가족사의 전환기’라고 부른다. 한편에서는 아이를 내다버리는 부모들이 넘쳐났지만, 새로운 유형의 부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세대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출세와 교육을 위해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279쪽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가 열다섯 살, 4년 뒤 루이 16세로 왕좌에 오르게 될 왕세자의 나이 열여섯 살. 결혼식을 마치자 곳곳에서 축복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평화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 정략적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훗날 혁명정부가 유포한 온갖 악의적인 이미지 탓에 사람들은 루이 16세를 뚱뚱하고 무능력한 왕이며, 매사에 무관심하고 냉정한 남자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제일 처음으로 전기를 일으키는 기계를 들여와 조작했고, 지리에 밝았으며, 일곱 살 때부터 완벽하게 라틴어를 읽고 썼다. 또한 당시에는 드물게 영어를 포함해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자물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끈기있게 연구하는 모습은 왕이라기보다는 과학자나 수학자가 어울릴 법했다.

-315쪽

모국어인 독일어조차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략결혼이 결정되자마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초빙한 교사에게 프랑스어 강습을 받아 간신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천성이 가볍고 천진난만한 그녀에게 문학이나 철학, 과학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주제였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만큼 성격이 정반대인 부부가 또 있을까? 그는 너무 진지한 반면 그녀는 너무 경박했고, 그는 매사에 신중한 반면 그녀는 모든 일에 즉흥적이었다. 그는 오랜 생각 끝에 말을 꺼냈지만, 그녀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을 했다. 그가 검소했다면 그녀는 화려했다. 규칙적인 일과를 따르는 그가 잠자리에 드는 밤 11시는 오페라와 무도회, 게임을 즐기던 그녀에게는 본격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다.

루이 16세는 포경수술을 해야만 남자 구실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특유의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는 바람에 7년이나 수술을 망설였다고 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눈에 금발 머리를 가진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운 외모는 루이 16세에게는 아무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316쪽

트리아농 궁에 가보면 그 주인이 사치로 유명한 왕비였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달리 당시 그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은 것은 트리아농 궁의 공사에 든 돈 문제가 아니었다. 앙투아네트는 비교적 검소했다. 그녀는 트리아농 궁을 증축하지 않았고, 심지어 마담 뒤 바리가 쓰던 가구들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왕가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한 공사에 들인 돈이 아니라, 트리아농 궁전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비밀스런 생활을 고집하는 왕비의 행동이었다. 실제로 트리아농 궁에는 왕을 위한 방이 한 개도 없었다.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왕비의 사생활은 곧 ‘국민을 적대시하는 왕비’라는 부정적인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그곳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국민들 사이에는 왕비의 사생활에 대한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다.

-322쪽

더군다나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해 여전히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일본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당시 선입견을 제치고 보면 사실 앙투아네트는 권위적이기보다 섬세하고 우아한 취향과 가족적이고 따스한 생활을 꿈꾸는 왕비였다. 그녀는 위선적이고 딱딱한 베르사유의 인간관계와 냉랭한궁정보다는 따뜻하고 안락한 트리아농 궁에서의 친밀한 관계를 원했을 뿐이다. 앙투아네트의 가장 큰 불행은 아마도 자신의 바람을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나라의 왕비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325쪽

프랑스의 왕비는 왕실 예법상 반드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다. 왕족들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반드시 관객이 있어야 하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었다.

-326쪽

루이 16세는 비록 좋은 왕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좋은 아버지였고, 나름의 방식으로 앙투아네트를 사랑한 좋은 남편이었다.

-326쪽

흔히 바스티유가 왕실의 감옥이라 해서 엄청나게 크리라 짐작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많아야 50명 정도를 수감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감옥이었다. 크기도 작고 14세기에 지은 낡은 성이라 성난 군중의 힘에 감옥의 성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343쪽

‘앤틱’이건 ‘디자인’이건, 그 속에 담긴 정신은 본질적으로 같다. 인간이 만든 모든 문화예술이 그러하듯, 오브제 역시 그것이 태어난 시대의 철학과 생활이 반영된 창조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앤틱 오브제의 진정한 가치는 그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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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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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의 사회적 부재는 경쟁의 부재 또는 극적인 순화를 의미했다.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적합한 자들과 부적합한 자들은 모두 다윈의 사슬에 묶이기를 거부했다. 학교는 출세의 경쟁터가 아니었으며 단지 배움의 장이었다. 자본이 없으므로 누구도 축적하지 않았다. 시장이 없으므로 학교와 병원은 오직 공공의 논리와 복지의 논리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차별이 없으므로 흑인과 뮬라토, 백인은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9쪽

비상시기가 선포된 후 농업개혁 등의 결과 에너지와 화학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농업이 탄생했으며, 이는 생태와 환경에 있어서 축복과도 같았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1차 지구환경회의에서 한 카스트로의 발언은 그 신호탄이었다.

"불평등한 무역, 보호주의, 외채가 생태를 공격하고 환경의 파괴를 조장하고 있다. 우리가 인류를 이 같은 자기파괴에서 구해내려 한다면 세계의 부와 기술을 더 많이 나누어야 한다. 일부 국가들은 덜 사치스럽고 덜 소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으로 세계의 대다수가 덜 빈곤하고 덜 굶주리게 될 것이다. 제3세계는 더 이상 환경을 파괴하는 생활양식과 소비관습을 이전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자. 정의로운 국제경제질서를 만들자. 모든 과학지식을 환경오염이 아닌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사용하자. 외채가 아니라 생태에 진 빚을 갚자. 인류가 아니라 굶주림을 사라지게 하자."
-65쪽

쿠바는 현재 심층적 생태주의를 가깝게 실현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로 손꼽히고 있다.
-66쪽

비효율적 운영에 대한 지적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배급시스템은 동일한 경제적 수준의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은 국민적 영양수준을 가능하게 해왔다.
......
배급되는 식량으로는 필요량의 2/3 정도를 충족한다.
-67쪽

식량이 부족해 배가 고플수록
분배에 더욱 세심해져야 한다.
오늘,
얼마 전에 들어온 취사병이
모든 대원들의 접시에
삶은 고깃덩어리 2점과
말랑가 감자 3개씩을 담아주었다.
그런데,
내 접시에는 고맙게도
하나씩을 더 얹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취사병에게 접시를 던지며 호통쳤다.
이 아부꾼아,
지금 여기서 당장 나가!
......
그는,
단 한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평등을 모독했다.

체 게바라, <대장의 접시> 중에서
-110쪽

‘인민을 땅과 함께’라는 정책 아래 국유지를 개인농이나 개인농 협동조합에 임대료 없이 무기한 임대했다.

-127쪽

경제적으로 쿠바는 개발도상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교육만큼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실현하고 있다. 미국의 가혹한 봉쇄 등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이처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교육에 대해 GDP의 10%를 상회하는 높은 수준의 투자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2004년 11.3%)

-128쪽

쿠바 교육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무상교육
-교육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지원하는 일관된 정책 환경과 정치적 의지
-높은 질의 기초교육과 중등 및 고등교육에 대한 기회의 개방성
-아동에 대한 폭넓은 조기교육과 기초교육의 일환으로 매김되어 있는 학생 보건프로그램.
-학교 밖에서의 보완교육 프로그램-문맹해소교육, 성인과 비정규 교육(이 역시 기초교육의 일환)
-학교의 운영에 있어서 지역사회의 참여를 촉진하는 메커니즘
-교사에 대한 지대한 배려(광범위한 임용 전과 후의 교직 훈련, 높은 사회적 신분과 도덕성, 인센티브, 투명한 책임 시스템, 전문주의 문화의 전략적 개발, 개선에 대한 보상)
-저비용 고품질의 교육기재
-전국적 교과과정 도입 및 지역적 교육기재 개발에 교사와 학생의 주도적 참여. 국가적 차원에서 개발되는 교과과정에 지역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신중한 구조적 경쟁
-농촌의 학생과 특수학생을 위한 트인 전략
-학교와 일터를 묶는 전략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교육
-129쪽

-교육대학은 5년제이다. 자격증을 취득한 후 2년 동안 학교에서 인턴으로 근무해야 하며, 그후 정식교사로 임명된다.
-교사는 평생교육의 대상이며 이를 위해 특별한 교육기관인 5개의 '고등교육 교원연수원’을 두고 있다.
-교사는 제도적으로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교사는 학부모회, 학부모학교 그리고 기타의 대중조직의 회원이 되는 식으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는다. 교사의 근무시간의 80%는 학생들에게, 20%는 학생들의 부모들에게 할애해 학부모 또한 학생들의 교육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한다. ‘교육은 공유된 책임’이라는 원칙에 따라 학생들은 함께 공부하며 1~3주에 한 번씩 한 학생의 집에서 공부한다. 가정수업은 해당 학생의 부모가 주관한다.
-교사에 대한 평가와 책임에 있어서 교사는 지속적으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점검을 받아야 하며 끊임없이 교육과 관련된 훈련으로 능력을 유지, 향상시켜야 한다. 교사의 평가에는 교사모임, 대학, 학부모 등 교육의 모든 주체들이 참여한다.
-쿠바에서 교사는 진정한 전문직이며 그에 상응하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다. 다른 전문직종에 비해 약간의 임금 격차가 존재한다.-130쪽

모든 이들에게 교육을
-쿠바는 모든 국민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한다.
-산악지대와 같은 고립된 지역을 포함해 장애자와 기타 특수 교육이 필요한 대상자들 모두 교육혜택을 누릴 수 있다. 10명 이하의 학생이 존재하는 학교가 쿠바 전역에는 2천여 개에 달한다. 교육평가에 있어서 통계에 따르면 도시지역과 농촌 지역, 고립지역 간의 학력 차이는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30쪽

학교와 일터
-일하는 학생, 배우는 노동자를 통해 평생교육을 목표로 한다.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긍정적 태도의 계발 등에 목적을 둔다.
-이런 노동경험은 ‘교육이며 생산이 아니다’를 목표로 한다.
-노동교육은 그림, 재봉 등의 실용교육을 겸한다.
-131쪽

1/10이나 절반의 정의는 불의일 뿐이야. 하나의 정의가 정의인 것이지.

-157쪽

맑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 것은 종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편을 금지한다고 아편을 없애지는 못한다.

-163쪽

1959년 혁명 이전까지 쿠바경제의 대미의존도는 80%를 웃돌았다. 이같은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혁명 후 미국의 적대적인 태도로 극단을 향해 치달았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극단적 봉쇄는 대체로 존.F.케네디가 그 터를 닦았다. 1961년 대통령에 취임한 케네디는 쿠바와의 단교를 선언했으며 1962년 2월 케네디는 무역제재를 실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해상봉쇄가 이루어졌다. ...... 19990년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쿠바에 대해 미국은 봉쇄를 더욱 강화했다. ...... 2004년 6월 미국은 쿠바를 대상으로 신경제봉쇄 조치를 단행했다.
-197쪽

‘모든 쿠바인들의 수도에 오셨습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가 아니라 ‘쿠바인’들의 수도에 온 것이다.
국가가 아니라 사람을 앞세운 발상이 신선하다.

자유, 조국, 혁명과 사회주의가 난무하는 쿠바에 또 하나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인간’이다. 현실에서는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은 단어들이다. 인간적 자유, 인간적 조국(국가), 인간적 혁명, 인간적 사회주의.
-205쪽

1세계와 3세계, 남과 북, 제국주의 본국과 식민지의 시침은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211쪽

소원을 빈다는 것은 소원을 만나는 것이다.

-223쪽

인종이란 얼마나 구분하기 어려우며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248쪽

모든 쿠바의 어린이들은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케이크를 배급받을 수 있다. 공장에서 꾹꾹 찍은 케이크를 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생일날 케이크를 주는 쿠바지만 우리의 위대한 피델 카스트로 동지의 생일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피델의 생일이 언제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체 게바라의 생일은......"
"......"
내가 어떤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291쪽

아이들은 7살까지 하루 1리터의 우유를, 이후 14살까지는 1리터의 요구르트를 배급받는다.
아이들의 98%는 병원에서 태어난다. 갓난아이들은 모유를 먹으며 이 기간 동안 우유는 어머니가 먹는다.
62살이 넘은 노인들은 분유를 배급받는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성인 역시 분유를 배급받을 수 있다.
-291쪽

쿠바 교육의 특징 중 하나는 ‘가난한 나라, 고질의 교육’으로 일컬어진다. 한 나라에게 있어 가장 적절한 교육예산으로 유네스코가 권유하는 것은 GDP의 6%. OECD 가입국인 한국이 2004년에 겨우 5%를 넘는 교육예산을 편성하고 북 치고 장구 칠 때 지구 반대편의 가난한 섬나라에서는 몇 십년 전부터 GDP의 10%가 넘는 예산을 교육에 쓰고 있었다. 한국도 쿠바도 9년의 의무교육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의무교육이라면 최소한 교복과 학용품 그리고 급식 정도는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쿠바라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한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교사 한 명이 32.2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쿠바에서는 12명을 가르친다. 한국의 중학교에서는 교사 한 명이 21.9명을 가르친다. 쿠바의 중학교에서는 10명을 가르친다. 또 하나. 쿠바에는 학생 수가 10명 이하인 학교가 2천 개가 넘는다. 한국의 농촌에는 폐교가 널려가고 있지만 쿠바에서는 가르칠 학생이 있는 한, 산꼭대기에도 학교를 짓고 교사를 보낸다.
-293쪽

쿠바에서 의료는 교육에 뒤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총생산(GDP)dml 7% 이상을 의료에 지출하고 있으며, 교육과 함께 쿠바혁명의 자부심을 대표한다.

의료장비와 의약품 등의 수출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GDP의 12%가 과학기술 연구분야에 지출되고 있다. 항암, 에이즈 등의 분야에서 세계 ㅊ ㅚ고 수준의 의약품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299쪽

대표적인 성과는 2000년 무역협정 이래 베네수엘라에 1만 4천여 명의 의사를 파견한 것을 들 수 있다. 차베스의 집권 이래 상류계층인 의사들은 반정부 태도를 노골화했고 의사들이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차베스의 의료개혁 또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2000년 무역협정은 베네수엘라가 원유를 공급하는 대신 결재의 일부를 의료인력과 기타인력으로 대신할 수 있었던 협정으로 라틴아메리카의 국가간 협력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 쿠바와 베네수엘라는 이런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고 있다.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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