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초원에서 보내는 편지 - 평생 잊지 못할 몽골의 초원과 하늘,그리고 사람 이야기
강제욱 외 지음 / 이른아침 / 2008년 6월
절판


수만 년 전, 몽골인들은 유라시아 초원 지대를 넘어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남쪽까지 진출할 정도로 전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갔다. 난 아직도 칠레의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에서 만났던 몽골리안의 엉덩이에 박힌 몽골반점을 보던 순간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19쪽

몽골의 등장으로 세계는 비로소 섞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동양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20쪽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빠르게 변하는 모습이 공존하는 나라. 초원 위의 전통 가옥 게르에 발전기와 파라볼라안테나가 달리고, 휴대폰과 위성방송, 인터넷이 몽골인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한국은 2008년이 돼서야 비로소 우주인을 배출했는데, 몽골은 놀랍게도 1981년 아시아 최초로 우주인을 배출할 정도로 우주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작은 상처에도 파상풍이 번져 목숨을 잃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있다.-24쪽

몽골의 언어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몽골어는 어휘가 풍부해 다양한 표현과 용법이 가능하다. 한국의 '거무튀튀하다' '노리끼리하다'와 같은 세분화된 표현이 가능한 언어는 흔치 않는데, 몽골어는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 -25쪽

유목을 제외하면 별다른 산업이 없는 몽골은 현재 실업률과 고용 창출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28쪽

사계절이 있지만 그 경계가 뚜렷한 편은 아니어서 10월부터 4월까지 길고 추운 겨울이 이어지며, 5월이 되도 쌀쌀하다. 9월 초순에 첫눈이 오거나 서리가 내리는 경우도 많다. 내 기억 속의 몽골은 1년의 2/3는 겨울로 남아 있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가축과 사람이 살아간다. 바람이 세게 불지 않고 건조하기 때문에 몽골의 겨울은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체감온도로 따지자면 한국의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다.-30쪽

몽골인들은 기름진 고기를 먹고, 독한 보드카를 마시며 추운 겨울을 보낸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짧은 여름이 오면 대지가 온통 눈부신 녹색으로 바뀐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색채는 투명하고 강렬하다. 한여름에는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가지만 한국처럼 습기가 많지 않고 건조해 그늘로 들어가면 시원하다.
넓은 땅덩이에 인구는 적어 평소 외지인을 보기 힘들어서인지 처음 본 사람을 만나도 경계심을 품는 대신에 반갑게 맞아주고 집안의 온갖 음식을 꺼내 대접하곤 한다. 자신 또한 언제 어느 곳에서 이방인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화와 공존의 실천, 오랜 세월 환경에 적응하며 찾아낸 생활양식은 그들의 삶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이들이 사는 집인 게르는 유목 생활이 만들어낸 최고의 주거 형태다. 보기에는 단순한 구조지만 경험을 통해 축적된 몽골인의 지혜와 과학 장치들이 담겨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몽골인은 통풍과 보온, 이 두가지 요소를 조절해 초원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적의 주거문화를 만들어냈다.-31쪽

네이멍구는 청나라 때 청의 속국으로 영토에 편입되는데, 중국 본토와는 달리 몽골 부족장들은 어느 정도 자치가 허용되었고, 만주족과 같은 우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청나라에 순종하는 몽골 부족들의 경우였고, 반항하던 부족들은 철저한 파괴와 학살을 당해야 했지요.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청나라가 멸망하자 몽골의 각 부족들은 독립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 결과 몽골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몽골인민공화국임을 선포하지요. 하지만 네이멍구의 경우 한족이 많이 살고 있었고 부족들의 내부 분열로 인해 결국 중국 영토로 잔류하게 됩니다. 그 후 중국은 인구 증가로 한족의 이민을 장려하지요. 현재 네이멍구자치구에는 약 2천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이중 한족이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얼마 전까지도 독립한 몽골을 중국의 失地로 간주했고, 현재까지도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계속합니다.-44쪽

현재 몽골에는 젊은이들이 일할 만한 직장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네요. 특히나 지식인일수록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가 더 힘들어 앞으로 과연 무엇을 더 배워야 할지 걱정이랍니다.-56쪽

원래 몽골은 한 나라였지만 네르친스크조약 때문에 양분된 후 한쪽은 중국화, 한쪽은 러시아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고형.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그야말로 유럽풍의 도시였습니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도시에 비해 러시아풍이 무척 강하더군요.-59쪽

1999년 9월부터 몽골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이듬해 봄까지 이어져 가축 250만 마리가 얼어 죽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또 2000년에는 40년 만에 최악이라는 차강조드(한파와 폭설을 동반하는 몽골의 겨울 재해)가 발생해 한달 사이에만 60만 마리의 가축이 굶어 죽었답니다. 이처럼 몽골인에게 겨울은 최대의 시련이자 고비인 셈입니다. -60쪽

선반 위의 고물 라디오가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인 듯해요.

이렇게 추운 겨울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몽골인에게 "지금 행복하세요?"라고 물어보면 80%가 "예"라고 답한다 합니다. 이들보다 경제적으로 10배는 더 잘산다는 우리에게 같은 물음을 했을 때 35%만이 "예"라고 답했다지요. 역시 물질적인 풍요와 행복은 별개인가 봅니다. -61쪽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부모의 이혼, 또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폭력을 피해 집을 나온 아이들이 거리를 떠도는데 이들은 주로 도시의 지하에 거주합니다. 과거 울란바토르를 건설할 때 지하에 온수를 공급하는 대형 파이프 고나을 매설했지요. 그래서 거리를 걸으면 곳곳에서 맨홀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이런 곳에 갈 데 없는 아이들이 둥지를 틀고 사는 거지요.

정부는 아이들을 재활 기관으로 보내 기술교육을 시키고, 건강이 안 좋은 아이들은 치료하려 노력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커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동네 깡패가 되거나 매춘부가 되어 거리로 나가는 것뿐이지요. -66쪽

울란바토르는 현재 치안 부재와 급격한 빈부차, 전통 가치 체계의 혼란 등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옛날 전 세계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더군요. 몽골은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의 영향으로 칭기즈칸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체제 전환을 하면서 칭기즈칸을 복권했지요. 따라서 젊은 세대들은 칭기즈칸을 아직 잘 모릅니다.-67쪽

게르 안의 난로에 장작과 말똥을 넣고 계속 때워도 들여놓은 생수병이 돌처럼 꽁꽁 얼었습니다. 초가을부터 내리는 눈은 겨우내 쌓여 이듬해 여름까지 녹지 않습니다. 얼어붙은 눈은 돌보다 단단하고, 그 날카로운 단면은 쇠창 끝보다 예리합니다. 사방 몇 십 킬로미터를 둘러봐도 하얀 눈과 푸른 하늘밖에 안 보일 때도 있습니다. -77쪽

사랑은 알아야 생기는 감정입니다. 처음 공항에 내렸을 땐 즉시 후회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신기해 보였으며, 한 달 째엔 매력을 느꼈고, 1년 후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라, 바로 몽골입니다.-85쪽

아르항가이는 달느 지역에 비해 강수량이 풍부해 풀들이 잘 자라는 너른 초지가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몽골 역사에 대해 말하려면 이곳을 지나쳐선 안 됩니다. 여기가 칭기즈칸의 서역 정벌 출발지거든요. 아르항가이 아이막의 주도 체체를렉 주변 지역은 옛 몽골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몽골 정부는 현재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과거 몽골제국의 중심지였던 이곳으로 옮긴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선조들의 영화와 영광을 현재에 재건한다는 상징적 조치라 보아도 좋겠지요.
아르항가이 지역을 돌아보니 소문대로 풍요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습지가 있는가 하면 토흥강이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어 건조함을 느끼기도 어렵습니다. 야트막한 연봉들이 어우러진 초원의 풍광은 여느 몽골 지역의 척박함과 비교되기 십상입니다. 차강 솜에 있는 노천온천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온천이 다 솟아나다니! 오래 전부터 이곳이 몽골 지배층의 휴양지로 사용된 이력은 당연해 보입니다.-89쪽

거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건 가축과 사람만이 아닙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몽골의 식물들은 짧은 우기에 몸을 흠뻑 적시고 일제히 그 생명력을 드러냅니다.
노란 꽃이 지면 긴 줄기의 하얀 꽃이 피고, 곧 보라빛 라벤더 꽃이 진한 향기와 함께 이어집니다. 초원에 꽃이 피는 시기는 아쉽게도 무척 짧습니다. 짧아서 더욱 강렬한 대지의 축제는 운 좋게 그 시기를 맞춘 사람만의 전유물이지요.-93쪽

현재 몽골 국토의 1/3은 지하자원 개발 붐에 파헤쳐진 상태라 합니다.
외국 자본이 몰려와 100여 개의 채굴 회사를 설립했고, 경제 발전을 원하는 몽골 정부는 이들에게 초원의 사용권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초원의 원래 주인이던 유목민들은 갈 곳을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닥쳐온 기상 이변으로 유일한 생계 수단이던 가축들이 폐사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불법 채금자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지닌 채 금이 나는 지역을 찾아다닌다고 합니다. -107쪽

무분별한 개발로 산림과 초원이 훼손되면서 사막화되는 지역이 빠르게 늘어나고, 폭설과 한파 등 이상 기온 현상도 나타납니다. 초원에 폭설이 내려 보름 이상 눈이 녹지 않으면 풀을 뜯지 못한 가축들이 굶어 죽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초원도, 가축도 잃어버린 유목민들은 살길이 막막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닌자 광부가 되어 돈을 법니다. 이들은 때로 큰 금맥을 발견해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합니다. 결국 초원의 주인이었던 유목민들이 금광 산업의 틈새에 끼어 불법 채금자로 전락해 노다지를 건지는 꿈만 키워가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불합리한 현실을 타개하고 자녀의 교육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스스로 닌자 광부의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123쪽

몽골에서는 누구나 칭기즈칸 초상을 상표권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137쪽

과거에는 낙타나 말을 타고 다니며 행상을 했는데 이제는 자동차에 일용품을 싣고 지방 소도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다.-141쪽

게르 안은 예상과 달리 너무 개끗했습니다. 나름의 질서에 따라 가족의 자리와 살림살이의 위치가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세간은 붉은색 반닫이. 가족의 소중한 물건을 보관한다고 합니다. 게르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양털을 깎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인근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더군요. 일종의 품앗이라고 합니다. (수백 마리의 양털을 깎아야 해서 인근 게르에 머무는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145쪽

바롱오르트에서 또 하루를 달려 다리강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길도 제대로 없는 초원을 1시간 정도 더 남쪽으로 달리면 거의 국경인데, 그곳에 고구려 양식의 적석총과 고구려 성터가 있습니다. 고구려가 몽골의 고아대한 초원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증거지요.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그저 고구려 기와편이 널려 있을 뿐이었습니다.-152쪽

최근들어 초원에도 차량이 제법 늘어났지만 말을 타고 가면 30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차로 가면 서너 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다.-155쪽

이곳 사람들은 양을 도축할 때 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답니다. 그러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해체하는데 정말 놀랍더군요.-156쪽

하늘이 낮은 나라, 바람의 나라, 풀과 똥, 먼지의 나라. 길 없는 길이 존재하고 그 위로 구름이 마구 달리는 나라. 밤이면 불빛 하나 없는 땅 위로 한가득 별들이 쏟아지고, 가축이 주인인 초원에 사람이 끼여 사는 나라. 아! 말로만 듣던 지평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봐도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없는 저 끝없는 초원, 있는 듯 없는 듯 가물가물한 땅 저 끝, 그 벌판에 마치 지구본 위에 덩그마니 혼자 튀어나온 존재처럼 홀로 서 있어. 도대체 몽골의 무엇이 그토록 나를 잡아끄는 것인지.-161쪽

게르 안엔 오직 하나뿐인 창과 하나뿐인 문이 있었어. 그 창으로 몽골의 신들이 드나들고, 사람들은 밤마다 천장 밖 별들을 보며 다음날 날씨를 가늠하더라. 땅에 뚫은 세 개의 기둥 구멍에 의지해 누울 잠자리를 설치하고, 언제든지 그 기둥을 접어 떠날 준비를 하는 유목민들이야말로 하늘에 뿌리내리고 사는 천상의 사람들이지 싶어. 그러기에 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주소 없이 사는 게 아닐까?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주소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164쪽

몽골인들은 생선과 나물을 먹지 않아.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라 생선 먹을 일이 드물고, 나물을 먹는 순간 가축들이 먹어야 할 먹이가 줄어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먹이가 줄어들면 굶주린 짐승들이 울타리를 넘나들 수 있고, 이를 막으려는 사람과 짐승 사이에 전쟁이 선포될 것이기에 그들은 나물을 먹지 않아. 야생동물과 가축, 사람이 모두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음식 문화를 가진 그들이 내겐 얼마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던지. -165쪽

몽골인들은 물을 생명처럼 여긴다고 해. 칭기즈칸이 '옷이 너덜너덜해지기 전에는 절대 빨래를 하면 안 된다'고 명을 내릴 정도였다니.
타문화에 관대한 몽골이지만 모든 종교를 허용해도 이슬람교의 목욕 의식만큼은 금지하고 있어.
물과 불은 그들의 공동체를 지켜내는 최후의 수단.

양과 염소떼들이 게르 바로 앞에서 무리지어 조용히 잠들어 있더라. 무척이나 편하게 잠자는 모습들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어. 나는 지금 사람과 가축 간에 별다른 경계 없이 그냥 무리로서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는 나라에 와 있구나.-169쪽

방목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말이 풀을 먹고 지나가면 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가 풀을 뜯는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몽골 생태계가 흔들리게 된다.-171쪽

사람들은 게르에서, 가축들은 게르를 둘러싼 바깥에서, 비록 잠자리만 달리할 뿐 이들의 관계는 가족과도 같았어. 양이나 염소가 새끼를 낳으면 독수리가 채가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 무게가 나갈 때까지 게르 안에서 기른다고 해. 게르 안에서 아이들과 새끼 양들이 함께 자라고, 아이들은 어린 양들을 장난감 삼아 친구 삼아 가족 삼아 그렇게 생명의 소중함을 자연스레 알아가는 것이지. 이른 아침 녀석들의 풀씹는 소리가 자동 알람이 되는 곳, 바로 몽골의 초원이었어. -174쪽

그나저나 몽골인들은 정말로 합창을 좋아하더라. 혼자 나서서 노래 부르는 법 없이 남녀노소 모두 입을 모아 배가 꺼질 정도로 몇 시간 동안 부르더라고. -182쪽

몽골에서는 아들과 딸이 있으면 대학 교육은 먼 곳으로 유학을 보내서까지 당연히 딸을 시킨다고 해. 사내들은 막노동을 해서라도 살 수 있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배워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래. -186쪽

이 나라는 공산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비싸. 재래시장을 가도 우리네 시장처럼 야채와 생선이 즐비한 것이 아니라 거의 각종 공산품이 주를 이루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지. -187쪽

염소를 게르 안으로 가져와 일단 가죽을 벗기는 거야. 가죽을 다 벗기면 그 자체가 아주 훌륭한 작업대가 되는 거지. 그 위에서 배를 갈라 위를 꺼내 안에 있는 내용물을 제거하고, 피는 그릇에 따로 담아. 창자는 여인네들에게 전달되고, 창자 속 내용물은 화로 잿더미에 고루 섞어 흙으로 돌려보내면 한 방울의 물도 필요 없이 요리 준비가 완료되며 상황이 끝나. 원래 물이 귀한 나라여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붉은 피로 신성한 대지를 얼룩지우지 않는다는 풍습과 피 냄새가 불러올 맹수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지혜가 섞여 탄생한 허르헉 요리법과 그 신속함에 정말 감탄했어.
이들은 어린 동물은 절대 잡지 않고, 또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잡는 일도 삼간다고 해. 교미 시기에도 도축을 피하고 말이야.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철저히 자연에서 얻어야 했던 전통적 습관에서 나온 또 하나의 지혜겠지.
(염소를 잡아 해체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20분이 넘지 않았다.)-187쪽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어. 동양과 서양을 만나게 해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켰고, 선진적인 법률과 제도를 만들었지. 칭기즈칸은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존중해 주었다고 해. 그가 탕조한 통합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교류하고 무역을 했다지. -199쪽

한족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잃고 지배를 받아야 했던 몽골제국과 청나라 시대를 인정하기 싫을 법도 한데 도리어 자신들의 역사라고 당당하게 우기고 있으니 정말 대단하단 말밖에 안 나와. 대한민국 국정교과서에도 중국의 주장이 사실인 양 실려 있으니 한족의 떼쓰기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셈이지. -202쪽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국 시민권을 땄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조상까지 미국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지금 네이멍구가 중국 자치구가 되고, 이곳에 사는 몽골인들이 중국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조상 칭기즈칸까지 중국인으로 만드는 건 정말이지 이해가 안 돼. -203쪽

하얼빈 북쪽 치치하얼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납하시 납모이하 주변에 북부여 유적지가 있다.

건조한 초원을 적셔주는 고마운 강, 시라무렌.-231쪽

조조가 세운 위나라와 선비족이 세운 위나라는 똑같이 위라는 글자를 나라 이름으로 사용했는데 우리는 왜 200년 가까이 영화를 누렸던 선비족의 위는 북위라고 폄하하고, 고작 수십 년 존속했던 조조의 위에 더욱 정통성을 부여할까요? 이후에 등장한 통일 왕조 수와 당의 뿌리도 알고 보면 북위 아니던가요?

선비족과 우리는 알고 보면 적지 않은 인연이 있습니다. 한족은 선비족을 동호(東胡)라고 불렀지요. 사실 동호는 한족이 우리 민족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북위의 중흥 군주인 효문제의 부인 문소황후 고씨는 고구려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요.-242쪽

저는 지금 네이멍구자치구 바얀 호트에 와 있어요. 옛 오르도스 청동기 문명이 꽃을 피웠고, 서하제국이 지배를 했던 이 땅을 며칠간 거닐었지요.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웠고 실크로드 교역로에 위치해 무척이나 융성했던 서하제국은 칭기즈칸에 의해 몽골제국에 합병되었고, 최근에는 중국에 의해 자치구로 편입이 되었어요. -253쪽

우리는 몽골의 불교를 흔히 '라마교'라 합니다. 티베트 불교의 일종으로 들리는데 과연 정확한 표현일까요? 라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몽골인이 자신의 불교를 별도로 라마교라 부르지 않는데 굳이 우리가 그렇게 칭하는 데는 약간의 편견이 있어 보입니다. 먼저 몽골이나 티베트와 같은 유목민의 불교문화보다 더 나은 불교문화를 지녔다는 우월감일 것이고, 다음은 티베트와 몽골의 불교가 밀교라 불리는 데서 오는 성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몽골 불교는 정통 티베트 불교로 한국 불교와 같은 대승불교에 속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초기 경전에 대한 연구가 많아 우리보다 훨씬 풍부한 교리를 담고 있답니다. 남녀 교합을 표현하는 불상이나 탕카(불화)로 연상되는 성적인 이미지는 고려 말에 수입된, 성적 에너지를 이용하는 인도 후기 좌도밀교에서 나온 것으로 실상 티베트 불교와는 아무런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282쪽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고, 오가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 광활한 몽골 초원에서 어워는 길잡이나 경계의 역할을 합니다.-284쪽

울란바토르의 한 사원에서 승려가 신도에게 점을 쳐주고 시주를 받고 있다. 몽골식 샤머니즘이 불교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신조가 시주로 가져온 한국산 박카스가 눈에 띈다.-289쪽

1940년대 몽골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국이자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위해 간단 히드의 청동관음상을 총알 제조용 고철로 선물했답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부처가 제 몸을 녹여 독일과 일본군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니! 반파시즘 전선에 선 부처라! 역사의 비극이라 해야 할지 아이러니라 해야 할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293쪽

몽골의 공산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몰아친 불교 숙청 과정에서 간단 히드 역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당시 간단 히드는 몽골에 주둔하는 소련군의 막사와 마구간으로 쓰였다니 그 참담함이 눈에 선합니다.
그나마 간단 히드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1944년 미국의 부통령이던 헨리 A. 월리스의 몽골 방문 때문이었습니다. 몽골이 불교 국가임을 책을 통해 알고 있던 그는 스탈린을 통해 몽골 불교의 정수를 보고 싶다고 전합니다... 나름 국빈이라 생각했던 몽골 정부는 부랴부랴 폐허가 된 간단 히드를 복원하려고 씨가 말라버린 승려들을 수소문했지요. -294쪽

명나라에 의해 원나라가 멸망한 후 초원으로 돌아간 몽골의 부족들은 분열되어 이전투구를 벌입니다. 이때 초원을 다시 통일하려는 세력에 의해 불교가 부활합니다. 1578년 칭하이 호수 근처에서 몽골 최강 투메트족의 수령이자 몽골 유목민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알타칸은 티베트 불교 교단의 중심인 겔룩파 대표 라마 소남 갸초와 역사적 회담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몽골인들이 불교를 신봉하도록 규정하는 법령을 선포하는 한편 소남 갸초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을 선사합니다. 소남 갸초는 자신의 스승을 2대 달라이 라마로, 스승의 스승을 1대 달라이 라마로 추대하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99쪽

겔룩파 교단과 몽골 지배층들은 기존 신앙 체계를 억압하고 이를 불교에 통합시키기 위한 강온 전략을 구사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에 대한 몽골인들의 반발도 만만찮아 소남 갸초는 몽골인에 의해 결국 살해되고, 불교는 샤머니즘과 기나긴 투쟁에 돌입합니다. 그러다가 18세기 전후에 와서야 불교의 우위가 확보되고 두 세력 사이에 통합과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수많은 몽골인들이 말에서 내려와 삭발을 하고 라마승이 되었고 초원의 곳곳에 사원이 들어섰습니다. 20세기 초반 몽골 초원에는 약 1,000개의 사원들이 있었답니다. 몽골의 남성 절반이 승려가 되어버린 것이죠.
덕분에 그 야수같이 용맹하던 몽골 전사들이 모두 순한 양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몽골이 역사에서 퇴조하는 시기와 불교의 중흥기가 일치하다니, 정말 표현하기 힘든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299쪽

네이멍구자치구 지역의 불교는 역사적으로 한국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흔히 교과서에서 중국의 대승불교를 수입했다고 가르치기에 티베트의 불교나 몽골의 불교와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궁예가 자주 외던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에서 네이멍구자치구 지역을 거쳐 전해진 것입니다. 몽골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은 불교국가였던 고려 때였답니다. 당시 세계적인 강국이었던 몽골은 13세기 티베트와 고려를 침공함으로써 불교문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 전파되고, 그것이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이때 수많은 티베트어로 쓰인 경전이 수입되었고 만다라와 괘불, 탱화, 단청 등이 등장하게 되었답니다. 저는 가끔 그 전에 우리 절에는 단청 대신 어떤 문양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310쪽

몽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동시에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역사적인 주권마저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와 동병상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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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좋은 정보입니다.특히 제가 관심있는 내몽고와 티벳불교에 대한 이야기...전에도 라마불교란 단어는 현지에서 안쓴다는 말은 들었죠.그리고 헨리 왈라스가 몽골에 왔군요.제가 루즈벨트 임기중의 소련과의 동맹에 관심이 있는데...음..중국에 온 건 알았는데 몽고에도 왔군요.
그리고 몽고는 1930년대에 일본과 소련이 신경전을 벌이다가 노몽한 지역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으니 여하튼 강대국들의 각축장입니다.
종교에 대한 정보 매우 유용했습니다.

마노아 2008-10-04 23:42   좋아요 0 | URL
마구 옮기느라 오타도 수정 못했는데, 그래도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니 기뻐요^^
사진도 좋았고, 편지 형식으로 전달하는 문체도 맘에 들었고, 무엇보다 내용이 알찼어요.
이 책을 보고 나니 윈난에서 보낸 편지도 읽고 싶어지더라구요^^

순오기 2008-10-0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이 많은 밑줄긋기 쓰느라 고생했어요. 읽기도 만만치 않구만요~ㅎㅎ이렇게 기록을 남기면 더 많이 기억에 남겠죠~ 애썼어요.^^
한족이 우리를 동호로 부른게 아니라 동이라 부르지 않았나요~~
티벳의 불교와 문화는 영화 '쿤둔'과 '티벳에서의 7년'으로 이해했어요~ 달라이 라마의 책도 한 권 읽었고.
몽골은 마노아님 덕에 공부를 하고 있어요.^^

마노아 2008-10-05 01:23   좋아요 0 | URL
기억하려고 열심히 옮겼는데 지금 찾고 있는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마구 뒤지는 중이에요. 쿨럭...;;;;
동호나 동이나 똑같이 동쪽 오랑캐란 뜻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쓴 것 같아요.
티벳에서의 7년은 저도 참 인상깊었어요. 영화 포스터도 짠했구요. 보면서 울었던 것 같기도 해요^^;;;
아,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기후 커넥션 -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
로이 W. 스펜서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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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수도 없고 식물도 없다면, 태양에너지는 몽땅 현열(온도 상승)로 바뀐다. 수증기로 전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열의 일부를 흡수하는 물이 없다면, 에너지는 몽땅 대기의 온도를 높이는 데 소모될 것이다. 예를 들면 도시에서 '열섬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사막의 기온이 엄청나게 높은 것도 모두 증발을 통해서 열을 흡수해줄 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부 도시에서는 열섬 효과를 완화하기 위해서 건물 옥상 등에 식물을 심을 것을 권장한다. 이는 흡수된 햇빛의 일부를 현열(열이 온도로 저장된ㄷ다)로 바꾸는 대신에 잠열(열이 수증기 안에 저장된다_로 바꾸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 가지 덧붙일 사실은 사막이 뜨거운 것은 모래가 밝게 빛나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래가 밝게 빛나기 때문에 모래가 검은 경우에 비해서 사막의 공기가 차가운 것이다. 만일 도시에 있는 모든 물건을 하얀색으로 칠하면 그리 많은 햇빛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서늘한 온도를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눈은 그렇게 밝은 상태를 견뎌내지 못한다.-89쪽

특정한 종교에 호의를 베푸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 규정이 있는데도, 우리는 학생들에게 자연에 대해 저지른 죄를 참회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이 지구온난화의 장점에 대해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질 못했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원인에서 발생한 것이든 이산화탄소와 온난화가 지구를 점진적으로 녹화시킨다. 따뜻한 기후에 사는 종들의 서식지가 극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몇 가지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서 겨울철의 혹한은 완화되고 있다. 차가운 날씨에 사망하는 사람이 뜨거운 날씨에 사망하는 사람보다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는 왜 무조건 나쁜 것인가?-145쪽

우리는 전기를 지속적으로 이용하기를 바라면서도 발전소가 더 세워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풍력 발전을 더 많이 이용하기를 바라면서도, 풍력탑이 풍경을 망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쓰레기와 폐물을 내다버리기를 바라면서도 더 많은 매립지가 들어서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원자력이 공해를 ㅂ라생시키지 않는다고 좋아하면서도, 원자력 폐기물과 안전성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어하지 않는다.-210쪽

우리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것과 같은, 아프리카인들의 소박한 생활양식을 동경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대신 그런 생활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215쪽

미국인들은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쓰고 있지만, 그중 대부분은 부패한 정권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가수 보노는 존경할 만하지만, 우리는 이미 아프리카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함으로써 유익하기보다는 유해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219쪽

(역자 후기) 미국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2001년 3월 탈퇴했다.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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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초원
시바 료타로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3년 10월
절판


유목은 이동이다. 이동이라 해서 제멋대로 아무데나 가는 것은 아니다. 부족에 따라 가야 할 초원이 정해져 있으며, 그 장소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다르다. 타부족이 자신들의 목초지를 침범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22쪽

유목에도 적지가 있다. 반드시 초원이어야 한다. 초원이라 할지라도 일본의 산이나 들, 도시의 빈 뜰에 돋아나는 잡초는 양이 날것으로 먹기에는 너무 거칠다. 양이 좋아하는 풀은 실처럼 가늘고 부추 계에 속하는,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풀이다. 그러한 풀이 나는 장소는 그 생육에 알맞은 기온과 건조함을 필요로 한다.
지구 규모에서 볼 때,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몽골 고원의 초원이 최고의 적지였다. 면적이 넓을 뿐만 아니라 기복이 완만하다. 이러한 기복도 유목에 알맞은 조건 중 하나이다. 여름에는 산 위에서 방목하고, 가을이 되어 산을 내려오면 저지에는 가을이 늦게 찾아오기 때문에 목초가 아직도 푸른빛을 띠고 있어 안성맞춤이다.
-26쪽

몽골에 라마교라는, 속칭 티베트 불교가 전해진 것은 이 민족의 힘이 쇠약해지는 16세기 말부터이고, 17, 8세기에는 청나라가 몽골인의 강인하고 활달한 풍골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이를 크게 장려하였다.

-46쪽

‘체베쿠마’라는 말은 티베트어로 꽃을 뜻한다고 한다. 몽골어로는 ‘치칫크’라고 한다.

-47쪽

시베리아는 고대로 갈수록 높은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던 듯하다. 또 기후도 따뜻했다고 한다.

-52쪽

스키타이라는 고대민족은 세계사에 빛나고 있다. 기원전 7세기로부터 3세기에 걸쳐, 흑해 북안의 초원에서 활약하고 유목문명을 발명한 것으로 보이는 기마민족이다. 인종상으로는 백인종이었다. 그들은 금속품에 독특한 동물 의장을 새겨 넣는 것을 좋아했고, 또 황금 세공을 몹시 사랑하였다. 흉노가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54쪽

헤로도투스, 그는 ‘역사’ 속에서 흑해 연안의 초원을 발판으로 하는 스키타이라는 이국풍의 문화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였다. 그들은 말 등에 올라타고, 양 떼를 따라 이동하고, 집도 이동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문명권으로부터는 사마천이 ‘사기’의 <흉노열전>에서 그들의 기이한 풍속을 기술하였다. 양자의 관찰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다. 이 두 사람의 기술의 동일성을 근거로 해서도, 스키타이와 흉노는 하나의 문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흉노가 어떤 인종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유목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스키타이와 마찬가지로 백인이었다는 기설이 있는데, 나는 멋대로 황인종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즉, 흉노는 터키인 또는 몽골인으로 모두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고, 얼굴은 지금의 몽골인이나 중국인 혹은 일본인과 닮았으리라고 생각한다.
-55쪽

한 무제 때는 청동기 무기에서 철기로 바뀌는 과도기였다. 곽거병의 한군은 화살 끝에다 끌처럼 무겁고 날카로운 철제 촉을 달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반해 흉노의 청동 화살촉은 철제보다 가볍고, 따라서 멀리까지 날아가지 못했으며, 더욱이 철제만큼 적의 갑옷을 잘 뚫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태어날 때부터 바람처럼 달리던 흉노의 기병들이 젖비린내 나는 곽거병이나 그 보병단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을 리가 없다.

-58쪽

이릉은 끝내 한나라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흉노의 땅에서 존경받으며 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우교왕이 되어 이후 20여 년을 더 살았다.

-60쪽

몽골의 아기들은 대부분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하얗다. 물론 성장해 가면서 검게 변하여, 결국에는 평균적으로 일본인의 피부와 그다지 다르지 않게 된다. 이처럼 몽골인은 형질적으로 일본인과 흡사하지만, 단지 아기의 얼굴색만은 분처럼 새하얗다.
키르키즈는 현재 터키화되었고 언어는 우랄알타이어인 투르크어를 사용하며, 소련의 키르키즈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다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고대 이래, 혼혈을 거듭했기 때문인지 피부가 흐릿하고 얼핏 보면 지중해인처럼 보인다. 기원전에는 이 민족의 조상이 시베리아에 살았다. 한대에는 이 시베리아 백인종을 ‘견곤’이라고 불렀다. 견곤이란 ‘키르기즈’의 한자표기이다. 당대의 기록에서는 그들에 관해, 머리카락은 노랗고 눈동자는 녹색이며 얼굴은 하얗다고 설명하고 있다. 몽골인 아기의 피부가 하얀 것은 먼 옛날 흉노가 ‘견곤’과 혼혈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1쪽

원래 몽골인은 붉은색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초원은 푸른색 하늘과 초록색 땅, 계절에 따라 땅이 회백색이 되는 단순한 색채 구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대지에 뚜렷하게 표시를 하기 위해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원색이 좋다.

-68쪽

검은 모래땅의 ‘검은’은 카르(kar)라는 말로 표기한다. 몽골 고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터키어에서도 카라(kara)는 흑(黑)을 뜻한다. 일본어의 구로(黑))도 어쩌면 우연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나는 학생시절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69쪽

몽골인은 마음속 깊이 초원을 사랑하고 있다. 유목을 좋아해서 울란바토르에 있는 관리나 학자도 여름이 되면 야생마처럼 초원으로 달려나가는 것이다. 여름을 게르에서 지내는 것이다. 유복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72쪽

유목경제가 시대에 잘 맞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인구가 겨우 2백 몇 십만에 불과하므로 타국에 모피나 모직물, 육류를 어느 정도만 팔 수 있으면,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즉, 국가적인 체면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라는 도시에 대한 희미한 의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개가 걷히듯이 도시가 사라져 원래의 초원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그들에게는 아무런 미련도 불편도 없는 것이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울란바토르의 본질은 이것이 전부다.

-73쪽

유목민은 고래로부터 물자를 저장하지 않았다. 가구나 의류를 필요 이상으로 가지면 이동이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옛날부터의 습속 때문에 대부분의 몽골인은 물건을 탐내는 마음이 없고, 오히려 가볍게 이동하는 것을 귀히 여기는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몽골인은 돈이 되는 보석이나 금,은 장신구를 즐겨 몸에 지녔다. 그런 물품이라면 이동하는 데에도 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73쪽

이미 칭기즈칸의 몽골은 세계제국을 건설한 터이다. 그 제국 최대의 회의 장소가 풀이 돋아있는 좁은 삼각지였다는 것만큼 유목민족의 특질을 잘 표현해 주는 것은 없다.

-74쪽

오고타이는 바다처럼 스케일이 큰 데다가, 산처럼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버지 칭기즈칸이 못다 이룩한 정복사업을 보완하여 그 영역을 더욱 넓혔다. 물론 이 사업은 처절하고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다. 즉, 호라즘국을 완전히 파멸시키고 이란을 평정한 후,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중국의 금왕조를 멸망시킨 후, 일군은 더욱 서방으로 향하여 러시아에 새로운 정복사업을 개시하였다.

-75쪽

몽골의 대정복에 의해 세계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전하게 되었다. 그들이 출현하기까지의 세계는 무수한 장벽으로 가로막힌, 작은 부분들이 할거하는 모습이었다. 몽골의 대정복에 의해 그러한 세계에 커다란 바람이 관통하여 사방팔방으로 통상로가 열리고, 또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여러 문화가 타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는 일변하였다.

-76쪽

오고타이칸은 왕자이긴 했지만, 뿌리깊은 초원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동이야말로 생산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전투가 생산이며,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제국의 제왕이 된 이상, ‘나 자신은 이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농경제국의 예를 본떠서 움직이지 않는 지휘소인 제도(帝都)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 움직이지 않는 장소를 현재의 몽골 인민공화국의 거의 중앙을 흐르는 오르혼 강 유역의 한 지점에 정했다.

-77쪽

몽골인의 특이한 점은 타민족의 직인들이 만들어 낸 것을 사들이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그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귀찮고 자질구레한 일을 싫어하는 유목민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예는 직인들을 왕창 잡아들이면 가볍게 해결된다.

-80쪽

오고타이 칸만큼 몽골적인 인간은 없다. 욕망이 없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몽골인의 초상을 보는 듯하다. 물론 욕심이 적다는 것은 어느 민족에게나 미덕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에 있어서는 근대가 물욕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결국 이 미덕은 몽골의 근대사에 부정적인 작용을 했다. 즉, 물욕이 적기 때문에 가내공업도 하지 않았고 자본 축적도 하지 않았다. 결국은 그것을 기반으로 해야 할 근대는 이 초원 위에 나타날 수 없었다.

-83쪽

청나라가 겨우 60만 인구를 가지고 만리장성 안쪽을 장악하여, 약 3백 년 간 중국 전토를 지배했다는 것은 명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던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청나라가 이민족의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중국왕조사에 있어 희귀할 만큼 뛰어난 통치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원래 그 민족이 조잡하긴 해도 농업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이 영위했던 농업의 측면에서 중국이라는 농업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예전의 원과는 다르다.
또 청왕조는 원래 수렵민족이었기 때문에 몽골의 유목에 대해서도 다소 이해가 있었다. 거기에다 청은 그 발흥기에 몽골의 원조를 받은 적이 있어서 제국이 성립된 후 몽골인을 우대했다. 예를 들면 몽골 팔기라 불리는 특권적인 무인집단을 기관으로 설치하고, 또 내몽골의 초원을 보호할 것을 조정의 명령으로 하달하기도 했다.
이루 인하여, 한인이 제멋대로 초원에다 괭이질을 하거나 경지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
-98쪽

그러나 청조도 중기에 이르면 양상이 달라진다. 황제와 황족이 이민족이라는, 조금은 켕기는 점도 있고 해서 오히려 역으로 심하게 유교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유교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유목인들을 오랑캐로 취급한다. 이윽고 청조는 한인 ‘침입자’들이 초원을 경작하는 것을 보고서도 모른 척하고, 마침내는 앞장서서 농민들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이후, 중국인들이 ‘내몽골’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거의 남김없이 괭이 맛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몽골인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험준하고 메마른 고비 사막이 내몽골과 외몽골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이다.

-99쪽

시베리아에서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죄인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었다. 특히 도시 거주자들 중에서 대량으로 정치범을 만들어 내서 유형을 보내는 것이다.

-103쪽

여러 형태의 인류사회에-이를테면 유럽이나 중국, 또는 일본-화폐경제(유통경제)는 인지(人智)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 사회에서는 화폐경제가 서서히 발전했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 면역이 생겨 해악보다는 이익이 많았다. 한편 자급자족경제를 영위하는 사회에 갑작스럽게 유통경제가 들어가면 극약이 들어간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을 잃어버린다. 19세기의 몽골 유목사회가 바로 그런 경우로, 빈곤이 초원을 뒤덮음과 동시에 매매성의 청나라 상인은 살찌고, 많은 몽골인은 목축이라는 유일한 보루를 잃어버리고 유랑의 길을 떠났다.

-106쪽

몽골인의 반항이 거세지자,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20세기 초엽 청나라 정부의 용어로는, 이 작전을 ‘몽비변환초정’이라 하였다. 이 탄압이 외몽골의 몽골인을 제정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911년 가을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쓰러지자, 몽골인들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109쪽

러시아에 혁명정권이 일어나고, 그 혼란을 틈타 중국이 다시 초원에 통치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몽골인에게 한인은 모두 고리대금업자로 보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1924년,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선택한 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역사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한인으로부터 초원을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110쪽

원래 중국 및 중국인에 관해서는 민족적 범칭을 정하기가 어렵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가 끝날 때까지 당인(唐人)이라 불렀다.
반면, 몽골어에서는 단호하게 지금도 중국을 거란이라 부른다. 거란은 몽골민족이다. 단지 한화(漢化)되었다는 점이 몽골인과 다를 뿐이다.
중국을 ‘거란’이라 부르는 몽골인의 오해가 그냥 그대로 러시아로 흘러 들어가,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중국을 ‘키타이’라 부른다. 이 오해는 나아가 유럽에까지 영향을 끼쳐, 캐세이(영어에서 문어의 cathay)라는 명칭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거란이다.
-117쪽

만주라는 지명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지리적인 호칭이 아니라 민족의 호칭인 것이다. 만주란 여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진인은 우랄알타이 어족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는 몽골인의 친척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목을 하지 않았다. 고래로 만주 남부의 산림지대에 살면서 말을 타고 수렵을 했고, 때에 따라 소규모의 농업을 경영했다. 이들이 명 말에 크게 융성하여 만리장성 밖에서 명이 쇠퇴하기를 기다리다가, 명의 황실이 내란으로 무너지자마자, 곧바로 장성을 건너 화북 평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또다시 북경을 제압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세워진 청제국은 그 전성기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된 왕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청은 왕조 그 자체가 오랑캐였다. 이 때문에 청조로서는 자신들이 종전에 여진이라 불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의 민족명칭을 붙였다. 즉, 만주는 민족명이다. 청조가 자신들의 옛 땅을 만주라 부른 적은 없다. 동삼성, 또는 단순하게 동성이라 불렀다.
-137쪽

그러나 청 말의 19세기가 되어 열강이 이 노(老)제국과 접촉하면서 구미인들은 어떤 착오에서인지, 그 땅을 ‘만추리아(manchuria)’라 불렀다. 이 명칭이 메이지시대의 일본에0이른바 서구를 거쳐 수입되어-들어와 만주라 불리게 된 것이다.

-138쪽

청조가 자신의 옛 땅을 부를 때는 또 하나의 다른 말을 쓴다. ‘관동(關東)’이라는 말이다. 장성의 관문인 산해관 동쪽이라는 의미다. 청조의 경우, 관동삼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만주에 주둔시킨 작은 부대를 정식 명칭으로 ‘관동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만주와 관동이 지명으로 병용되었던 것이다.

-139쪽

7세기 후반의 당의 기세는 대단했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을 때는 상주하는 병력이 2만이었다.

-145쪽

기(旗)란 몽골어로 호슌이라 하고 15세기경부터 천 호 단위의 호칭이 되었다. 맹(盟) 역시 몽골 특유의 행정단위로 기보다 위에 해당한다. 청조 때 외몽골은 86기가 네 개의 맹으로, 내몽골은 49기가 네 개의 맹으로 나뉘어 있었다.

-150쪽

중국에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치적 폭풍이 휘몰아쳤다. 모택동이라는 영웅이 신과 같은 대접을 받은 다음 은퇴하여 소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예전의동료들이 만들어 가고 있던 현실주의적 정권에 불만을 품고, 이를 타도하기 위하여 천 만이라는 소년 소녀를 부추겼다. 홍위병 운동이라 불리는 이 정치적 광기는 공자 등의 고전적 권위를 끌어내리는 한편, 19세기 말의 의화단처럼 국내의 친외국분자를 격멸하고, 소수민족의 한 사람인 체베쿠마 씨의 생을 고통스럽게 했다.

-162쪽

고대 중국에서는 투르크를 정령, 돌궐, 철륵, 그리고 칙륵 등으로 표기했다.

-164쪽

몽골 고원의 여름은 해지는 시각이 늦어 하루가 길었다. 오후 다섯 시 반이나 되었는데도 경마는 시작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경주가 시작되는 시각은 오후 일곱 시 반이었다.

-193쪽

이 부근은 움푹 패인 땅으로 바람이 부드러웠다. 움푹 패인 땅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고급관리의 여름 휴양지로 사용되었다.

-199쪽

‘부른사인’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좋다’라는 축복의 말이다.

-201쪽

모택동의 중국이 성립한 것은 일본이 패전한 지 4년 후인 1949년의 일이다. 그 직후에 모택동의 중국은 소련과 우호동맹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끊임없이 삐걱거리다가 이윽고 국교를 단절한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다가, 1956년 직후 모택동은 소련식의 사회주의 건설과 인연을 끊고 중국의 독자 노선을 표방했다. 독자노선이라고는 하나, 그에 부합될 만한 구체적인 안은 없었다. 우선 기존의 촌락을 그대로 ‘인민공사’로 바꾸는 것과, 생산을 장려하여 ‘대약진’시키는 것이 모택동 노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207쪽

그녀는 소련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모스크바’라고 부른다. 나는 그때마다 13세기 말 킵차크 한국의 지배하에 세워진 ‘모스크바 공국’이라는 나라 이름이 떠오른다. 또는 15세기의 모스크바 대공인 이반 3세나 16세기의 이반 뇌제 때까지는, 모스크바가 도시 이름인 동시에 나라 이름이었다는 것을 생각함녀 시베리아에서 비슬라브인으로 태어난 그녀로서는 모스크바가 나라 이름이 되는 쪽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214쪽

귀국 후, 닥치는 대로 말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말에게 귀소본능이 있다고는 씌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표고 1,000~3,000미터의 이 고원에 사는 말들에게만 이런 이상한 습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 고원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이상한 습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24쪽

(역자 후기)냉전체제는 단순히 우리 민족을 남북으로 단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저 북방의 몽골이나 시베리아, 만주, 실크로드 등을 단지 지도책이나 역사책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저 북방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표출할 거의 완벽한 자유를 구가하였다. 당연히 학문적인 연구도 두텁게 축적되었다. 그들의 동양학이나 북방에 관한 사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다. 일본은 거기에 관해 근대사의 백 년을 전통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러한 북방적인 사유가 일상화되어 있다.

-229쪽

즉, 일본은 역사 이래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중국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말을 바꾸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가 없는 것이다. 일본은 그 자신이, 중국과 조선이 야만족(오랑캐)이라 부르던 그런 문화를 영위한 나라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이 소설에서 말하듯이 스스로가 오랑캐(비문명국)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30쪽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유학(주자학)적인 상상력 때문에 예의(유학의 경전에 맞는)라는 ‘문명’이 없는 일본과 만주족 그리고 그 외의 오랑캐들을 자신과 구별하였다. 스스로를 중국이라는 중심에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한 착각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누가 뭐라 해도 우랄알타이어를 구사하는 몽골계통의 민족이다.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의 문화적인 특질이 강하고, 고구려를 비롯한 역대의 왕국 모두가(조선은 제외) 문화적으로 중국과는 판이한 그런 민족이다. 우리는 중국이 말하는 그대로 ‘동쪽 오랑캐’이다. 대한민국은 오랑캐의 나라인 것이다.

-231쪽

이러한 시각, 즉 조선 이전의 민족의식을 회복하지 않는 한 북방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현대를 우리 민족은 합당하게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민족이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위대한 민족일 수는 있다. 그러나 중국 그 자체는 아니다. 그보다는 만리장성의 바깥에서 가끔씩 안쪽을 드나들었던 자유분방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은가. 동시에 역사적 사실에도 맞지 않은가.

-232쪽

조선이 중국이라는 큰 집에 빌붙어 산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미국에 빌붙어 살 듯이. 그러나 그것은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대와 의식의 문제이다. 이제 시대는 전환점에 달했다. 우리의 의식의 문제가 남았을 뿐이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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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사셨군요.양억관 씨가 일본어 전문 번역가예요.
홍콩의 항공회사 케세이 패시픽이 키타이에서 어원이 유래했다고 하죠.일본은 만주사변 이전부터 중국을 하나 하나 분리할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어요.내몽고도 관동군 특무기관이 나서서 분리독립하려는 공작을 했죠.라마 불교 성직자들을 회유하기도 하구요.

마노아 2008-10-01 23:28   좋아요 0 | URL
양억관씨 번역이라서 더 반가웠어요. 마지막에 옮긴이 글도 참 인상적이었구요^^
일본의 계획력과 추진력은 모두 무서워요. 독한 놈들 사이에 어리버리 대한민국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가 번역한 <일본이 일어선다>는 한일외교막후의 괴물 세지마 류조 이야기입니다.5,18직후 전두환과 일본우익을 연결해준 사나이죠.삼성과 민정당을 디딤돌로 전두환에게 접근한 뒤 나카소네의 방한을 이뤄냈습니다.

마노아 2008-10-02 21:38   좋아요 0 | URL
일본이 일어선다로 검색하니까, 고려원에서 나온 김경민씨 책만 나오네요. 이건 번역서가 아닌데 이 책이 아닌가봐요. 아무튼 절판이네요.
양억관 씨 이름으로 검색해 보니까 번역서가 무려 178권이에요. 대단하군요!
세지마 류조, 무서븐 사나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마자키 도요코<불모지대>가 세지마 류조를 모델로 한 대하소설이에요.70-80년대에 삼성에서 사원들에게 필독서로 읽혔다고 합니다.야마자키 작품은 제 또래들만 해도 거의 안 읽죠.그러다가 드라마 하얀 거탑 덕에 반짝 그 원작이 팔리는 듯 했지만 역시 빤짝이로 끝났죠.대단한 소설가입니다.세지마 류조의 이토추 상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열심히 영업을 하고 있죠.
김경민 씨는 이라크 파병 논쟁 때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자주 나와 열심히 파병을 찬성해서 기억에 남습니다.그가 쓴 일본이 일어선다는 일본 자위대에 관한 이야기죠.이 책 통해 이지스 함대를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1990년 이라크 전 때 미국 첨단무기 핵심부품이 일제였던 것까지.

마노아 2008-10-03 02:24   좋아요 0 | URL
야마자키 도요코가 하얀거탑의 원작을 쓴 사람이군요. 드라마를 엄청 재밌게 보았는데 원작 소설 역시 강렬할 것 같군요. 책들을 찾아보니 역시나 절판이 많지만 여러모로 관심이 갑니다. 세지마 류조가 작년에 죽었군요.
김경민씨 책도 역시나 관심이 가네요. 문득 침묵의 함대가 떠올랐습니다.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았거든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마자키 것도 그렇고 일본 역사소설이나 기업소설의 분량은 정말 어마어마하지요.김경민 책은 자위대 무기 성능,일본의 안보정책을 보고서 형식으로 썼어요.침묵의 함대 같은 책에 관심이 있다면 아예 군사분야 책을 직접 독파해 보심이 어떨른지...야마오카 소하치의 태평양 전쟁은 절판되었으니 <미드웨이>라는 책을 읽어보세요.군사분야 전문 출판사인 플래닛 미디어에서 나왔어요.태평양 전쟁 최대의 일본과 미국의 항공모함 해전을 다뤘어요.사진도 많고 읽기도 쉬워요.

마노아 2008-10-03 23:0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진짜 분량 보고 화들짝 놀랐어요. 어찌나 길고 시리즈도 방대하던지요^^;;;
미드웨이란 책으로 검색을 해보니까 미드웨이 1942라는 제목이 뜨네요. 우와, 무려 올해 나온 책이군요! 사진 많은 책 원츄에요!
침묵의 함대가 재밌어서 같은 작가의 '메두사'도 사두었는데 아직 보진 못했어요. 원래도 읽기보다 책사기에 더 열심이었던 저지만 금년엔 더더욱 쌓이는 책들이 많군요. 갑자기 머리가 지끈!
지금 보니 열이 있네요. 호곡!
 
몽골에 가면 초원의 향기가 난다
장장식 지음 / 민속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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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말은 어깨 높이 120~130cm이며, 무게는 310kg으로 비교적 왜소한 편이다. 체격상으로 유럽 말에 비해 몸집이 작으며 순간 속력도 떨어지지만 인내력(특히 지구력)과 추위에 특히 강하다. 왜소한 몸은 초원의 바람을 덜 쐬는데 유리하며, 스스로 초원의 풀을 뜯어먹는 반야생 상태의 생활을 하기 때문에 초원지대에 적합한 말이라 하겠다.

몽골 말은 사료를 먹는 유럽의 말과는 달리 초원의 풀을 뜯어먹으며, 겨울철에는 눈 속에 파묻힌 마른 풀을 뜯어먹는다. 눈이 내렸을 경우 말굽으로 눈을 헤치고 풀을 뜯어먹는 모습은 흔히 이야기하는 '목가적'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간혹 눈이 녹았다가 얼면 마른 풀을 뜯어먹지 못해서 아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254쪽

말이 태어난지 3년이 되면 조련을 시작한다. 매일 10여 km를 뛰게 해 땀이 나게 하고 재갈을 물려 먹지 못하도록 한다. 10여 일의 조련이 끝나면 말은 어깨가 넓어지고 배가 홀쭉해져 위엄을 갖춘 모양이 된다. 이렇게 훈련을 받은 말은 물과 목초가 부족한 곳에서도 일주일 정도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한 말이 된다. -255쪽

측대보는 오른쪽 앞다리와 뒷다리가 동시에 올라가고 왼쪽 앞다리와 뒷다리가 내려가는 주법이다. 이런 주법을 가진 말을 '조로모리'라 했는데, 제주도의 조랑말이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조로모리 상태에서 뒤를 돌아 쏘는 활 솜씨는 기마술의 진수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파르티얀 샤프트'라 한다. 이것은 고구려 고분 무용총에 그려진 활 쏘는 기술과 같은데, 이란계 유목민이었던 파르티아 사람들(기원전3세기)이 이런 방식의 활을 잘 쏘았다 한다. 중형마가 주류를 이루는 북방 유목민족의 말들이 뛰어난 전마로서 명성을 떨치고 세계를 주름 잡을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측대보 주법에 있다고 할 정도이다.-255쪽

몽골인들은 다양한 유제품을 먹는데 이것들은 주로 양젖, 소젖을 이용한 제품이다. 이는 젖을 내는 가축으로서는 말이 소나 양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몽골인에게 말은 식용의 개념보다 다른 용도로 쓰이는데, 1차적으로 탈것이라는 개념과 함께 주인과 생명을 같이 하는 동물로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57쪽

우승자가 결승선에 들어오면 우승자를 기리는 찬시인 '홀치모리'라는 노래가 마두금 반주에 맞춰 연주된다. 내용은 우승자에 대한 찬양이라기보다 말에 대한 찬양이다. 우승한 말에게는 '투메니 에흐(만 마리 말의 으뜸')라는 칭호가 부여되며, 결승점에 도달한 모든 말들은 '모두 복 받은 말(부렌 자르갈)'이라는 칭호가 수여된다. 우승마를 비롯한 5등까지의 말은 광장을 세 바퀴 돌며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이때 기수와 말(머리와 엉덩이)에게 아이락을 뿌리며 축복해 주고 상을 준다. 우승마의 이마에 메달을 달아준다. -265쪽

1960년대 몽골은 선린외교의 이로한으로 베트남에 말을 선물한 적이 있다. 비행기에 의해 수송되었던 이 말은, 6개월 뒤에 홀몸으로 베트남을 탈출하여 몽골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도 몽골 사람들은 이 전설적 이야기를 즐기며 몽골 말의 영리함과 강건함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들은 인마동체임을 꺼리지 않는다. 그만큼 말과 함께 생활하고, 말과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했다. 유목제국을 세웠던 기반도 말이었고, 전 세계를 정복하여 지구촌을 이룩했던 것도 몽골 말 때문이었다. 이런 까달게 말에서 태어나고 말에서 죽었던 몽골인은 가히 마상족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266쪽

가을은 지나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내 겨울이 오고, 봄은 오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여름이 된다는 몽골의 겨울. 그렇기에 몽골 사람들은 겨울에 관해 매우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몽골의 겨울 추위는 양력 12월 22일 동지부터 81일 동안 계속된다는 산술적 계산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이에 추위가 그 강도에 따라 아홉 번 바뀌는데, 81일에 아홉이니, 한 추위가 9일간 지속된다는 계산이다. 몽골인은 이런 아홉 단위를 '첫 구일, 두 번째 구일...'식으로 표현한다.

몽골인은 3이라는 숫자를 길수로 여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3의 3배수인 9는 하늘의 수 내지는 인간에게 있는 하늘 힘의 최대치로 생각한다. 81은 9의 9배수니 세상에서 가장 큰 수요 완전한 수로 여기고 하늘 힘의 최대치를 상징한다.-285쪽

뭉치려 해도 잘 뭉쳐지지 않는 게 몽골 눈의 특성이다. 습기가 없기에 마치 밀가루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가 바스락거릴 뿐이다. 분명 냉기에 눈의 결정마저 얼어버린 탓이리라. 그래서일가. 눈을 밟으면 바스락거리는 요란한 소리만 날 뿐 녹지를 않는다.-288쪽

몽골의 겨울은 9일 간격으로 추위의 강도가 더해져서 네 번째 9일을 정점으로 하다가 다섯 번째 9일에서 꺾이기 시작하여 마침내 아홉번째 9일이 지나서야 봄이 온다. -290쪽

(크리스마스 씨즌)칭기스칸 호텔 앞에도 나무를 세우고 얼음으로 만든 칭기스칸을 세워놓았다. 칭기스칸 호텔이니 칭기스칸을 조각하여 호텔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21세기를 과거의 찬란한 영화와 함께하려는 의도도 담았을 게다.

21세이와 대정복자. 21년의 재위기간(1206~1227)에 50여 회의 전쟁을 벌여 40여 나라를 정복했다.-291쪽

나담은 '놀다'라는 뜻을 가진 '나다흐'에서 비롯된 단어인데, '축제' 또는 '놀이'라는 말이다. 본디 나담은 8월에 열었으나, 지금은 독립을 쟁취한 때를 기념하여 7월 11일에서 13일까지 3일간 거행하고 있다. 바로 이 나담때 씨름을 비롯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한다. 이 세 경기를 남성 3종 경기라 하는데, 씨름이야말로 나담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나담은 험난한 자연환경과 열악한 경제구조를 가진 몽골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를 통해 군사들의 힘을 기르고 전투력을 향상시키려는 상무정신과 관련이 있는 전통이 아닐 수 없다.-305쪽

굽이 없고 신발코가 우뚝 솟아오른 몽골전통 신발 몽골고탈. 두꺼운 통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맨땅에서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신발코는 말등자에 발을 넣을 때 잘 빠지지 않도록 고안한 것인데, 기마 민족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신발이라 하겠다. 몽골사람들은 고탈을 신을 때 양말을 신지 않고 긴 천으로 된 발싸개로 발을 둘둘 말아 싼다. 혹독한 추위를 막으려는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다.-305쪽

오늘날 몽골 씨름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것은 거란족의 씨름이다. 1931년 요나라의 동경유지에서 팔각형 백색도관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의 8면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금나라 때에는 여진족은 물론이고 중국인들도 씨름을 즐겨했다. 씨름 자체가 워낙 상무정신과 관련된 것인지라 한족의 발흥을 두려워한 금의 장종(1189~1208)은 1193년에 '여진 사람만 씨름을 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 결과 중국에서 씨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저런 사례를 볼 때 씨름이야말로 전통적으로 이어내려온 유목민의 놀이인 동시에 체력단련의 방법이 아닌가 한다.

돌궐의 후예인 터키에도 씨름이 있다. '40개의 샘물'이란 뜻을 지닌 키르크리나르라는 지역에서 행해지는 이 놀이는 '카라쿠삭'이라 불리는데, 팔이나 무릎이 땅에 닿아도 무방하나 양 어깨가 닿으면 진다. 씨름꾼들은 온몸에 올리브 기름을 바르기 때문에 서로의 몸을 쉽게 잡지 못한다. 기름을 바른다는 점에서 우리의 씨름과 판이하나 유목민의 씨름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311쪽

비교컨대 한국의 씨름, 일본의 스모, 몽골의 부흐는 참으로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많은 경기라 하겠다. 한국의 씨름은 기술과 기법 면에서 '스모'나 '부흐'와는 완전히 다르며, 체급별이 아닌지라 체중이 많이 나가는 선수가 유리한 면에서는 '스모'와 '부흐'가 매우 흡사하다. 대결하는 방법에서는 '씨름'과 '부흐'는 비슷하고, 일본의 '스모'와는 판이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씨름은 스모와 부흐의 중간 형태를 취한 듯하다는 인상이 든다.-311쪽

네르 : 이름
귀 : 없다
네르귀 : 이름 없음
다와 : 월요일의 아이
하과 : 수요일의 아이
바야르 : 막내
비 : 나
비비쉬 : 내가 아니다-313쪽

몽골 주부들의 하루 일과는 수테차이를 끓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음료로 뿐만 아니라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사람은 수테차이 두어잔과 빵만으로 끼니를 삼을 정도다. -316쪽

음식을 마무리하는 것도 수테차이다. 그래서 수테차이가 나오면 식사가 시작되는 것이고, 식사 중에 수테차이가 나오면 식사가 끝난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준비한 음식이 모두 나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318쪽

주부들은 아침에 차를 끓인 다음 반드시 우리네의 고수레와 같은 의식을 행한다. 수테차이를 끓인 다음 첫잔에 떠서 천신, 지신, 수신에게 고수레하는 신앙.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선 다음 숟가락으로 차를 떠서 공중에 뿌린다. 이런 동작을 동서남북 방향에 각각 하는데, 제자리에 서서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한다.

수테차이는 물론 젖을 신에게 바치기도 한다. 술이나 다른 유제품은 물론 심지어는 곡식까지 고수레한다. 방같은 좁은 데서 약식으로 할 때에는 약지에 묻혀 공중을 향해 3번 튕긴다.
동쪽을 바라보고 시작하는 것은 동쪽이 해가 뜨는 신성한 곳이기도 하며 울란바타르가 있는 방향이고 울란바타르를 둘러싼 네 개의 성산에 세운 어워가 있는 방향이기 때문.-318쪽

ㅁ오골인과 술을 나눌 때 첫잔의 술에 오른손 약지를 담가 물을 묻힌 다음 어깨 위로 손을 들고 튕기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 천신과 지신 및 수신에게 바치는 고수레의 의미. 하지만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민의 전통적 생활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낯선 이를 비롯한 남의 술을 받을 때에 술에 독을 탔을 경우를 대비해서 고수레를 핑계 삼아 약지에 낀 은반지에 술을 흘려 독의 유무를 살핀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318쪽

차를 뿌릴 때 마음속으로 기원을 한다. 기원문은 대체로 '모든 세계는 우리들이 잘 되도록 해 주시고 자손들이 안전하게 살도록 도와주십시오.'이다. 집안의 대소사를 위해서도 기원한다. 특히 양파와 당근을 심는 마당의 채마밭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을 하기도 한다. -319쪽

현재 몽골인이 입고 다니는 델이 중국의 영향으로 거의 한 종류로 통일되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델은 종족마다 다르다. 델의 문양과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델만 보면 그 사람이 어느 종족에 속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도시의 몽골 처녀들이 델을 입은 모습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델을 입는 것 자체를 '촌스러운' 것이라 여기는 게 요즘 도시 젊은이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도 여학생들은 델을 입고 등교했다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자유화 바람이 세긴 센 모양이다. -321쪽

양궁은 서양 활이기는 하지만 활쏘기는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고래로부터 이어온 장기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활쏘기는 분명 사실이다. 뿐아니라 고구려는 세운 건국주의 이름이 '선사자'라는 주몽이니,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유목민족의 하나인 몽골족도 활을 잘 쏘았으며 '메르겐(가장 뛰어난 궁사)'이라는 칭호가 여전히 남아 있다. 고구려의 특산물 중 하나가 대궁이었고, 중국인은 우리를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동이'라 하지 않았던가. 활과 그만큼 가까웠고 활 다루기를 잘 했다는 뜻. 올림픽의 양궁 솜씨도 그 유전적 형질이 남은 건 아닌지?-352쪽

바둑은 놀이의 성격상 유목적 성격이 짙다. 장기나 체스는 위계적 질서가 강조된 신분사회의 정치 논리가 반영된 놀이이다. 그러나 바둑은 왕과 병졸의 구분이 없이 구성원 각자가 동등하며 구성원 하나하나가 균질적인 구실을 한다. 유목사회란 개개인의 능력이 철저하게 중시되는 사회다. 우리가 장기보다 바둑을 더 좋아하고, 중국이나 일본보다 잘 두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목적 성격을 반영한 놀이에 원초적으로 익숙해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해석할 수 있따. -353쪽

이동통신 보급률 1위. (2위 핀란드, 3위 노르웨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몽골리안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점. 일찍이 유목생활을 체험했던 민족인 것. 이동통신의 장점, 무한 접속과 원거리의 단거리화라는 기능을 가진 새 이기가 어느 민족보다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 인터텟 구축 제1위라는 우리네 현실과 IT산업의 선두주자라는 점과도 상통한다. 수도권의 이사율, 다른 말로 하면 이동율이 세계 1위라는 점도 유목민의 이동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354쪽

술잔을 돌리는 문화. 대체로 농경정착민족은 제 것의 술잔을 준비해서 술을 마시는 문화를 가졌다. 즉 술잔을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유목민은 술잔 하나를 준비해서 이를 돌리는 음주문화를 가졌다. 이동성이 강조되는 문화인지라 간편성이 으뜸가는 생활방식으로 굳어진 것이 바로 술잔 하나를 여러 사람들에게 돌리는 관습이며 간접 접촉을 통해 일체성을 가지려는 몸짓인 것. 우리의 음주 방식은 농경과 유목문화의두 형태가 합쳐진 것. 제 잔을 가지면서 이를 돌리니 말이다. 술자리가 1차에 끝나지 않고 2,3차로 이어지는 것도 유목성, 이동성과 관련이 있는 관습. -354쪽

고스톱이 인기를 끄는 것. 이동성과 초지 확보라는 절체절명의 특성이 반영된 놀이가 바로 고스톱. -355쪽

봄맞이 관광이나 가을맞이 관광의 열풍. 수천 년의 정착농경생활에서 이미 이동성은 자취를 감추었을 선싶은데, 우리네 여성들은 끊임없이 나들이를 실행했다. 삼월삼짇날의 답청 풍속이 그렇고 9월 9일 중구일의 단풍놀이가 그렇다. 우리네 여인들은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지녔다. 그래서 화전을 부치고 약수를 찾으며 물맞이, 단풍맞이를 해야만 했다. 공간의 문화에 실현된 시간의 문화이고, 농경문화에 투영된 유목성인 것이다. 이러한 관습과 체질이 구현된 것이 고나광버스놀이다.
버스 안 막춤은 유목민이 말을 타고 이동할 때 나타나는 몸동작과 같다. 유목민의 민속무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춤사위가 어깨춤이다.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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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9-2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몽골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

마노아 2008-09-20 23:11   좋아요 0 | URL
요새는 어디서 '몽골' 소리가 들려도 귀가 번쩍 트이는 경지에 이르렀지요^^ㅎㅎㅎ

마노아 2008-09-2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아래 여섯 단락은 우리 안에 있는 유목성의 증거로 제시된 것들인데 좀 억지스런 부분이 있다. 역동성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순오기 2008-09-2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긋기는 타이핑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책에 밑줄은 그어도 서재에 옮기지는 못해요.
손가락 좀 주물러 줄게~ 이리 와요!!^^

마노아 2008-09-21 12:17   좋아요 0 | URL
쭈르륵 올렸는데 간혹 알라딘이 날려먹으면 분노게이지 급 상승이지요. 페이퍼와 리뷰와 달리 밑줄긋기는 임시저장 기능이 없거든요.(몇 번 문의했는데 만들기 어렵대요ㅠ.ㅠ) 그걸 방지하려면 한글에 미리 써서 다시 옮겨와야 하는데 그건 또 많이 귀찮지요^^;;;
책을 반납해야 하기도 하고, 워낙 페이지가 많으니까 일일이 찾기 어려워서 대체로 밑줄긋기를 선호해요. 일종의 저장 기능이죠. 앙, 손에 호~ 해주세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에서 가장 엄한 위계질서가 자리 잡힌 나라인 우리나라가 수평적 질서를 중시하는 유목적 기질과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우리나라 사람이 유목민 기질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개고기를 옹호할 땐 우리는 유목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개는 식용 외엔 쓸모가 없다고 하더니...

마노아 2008-09-21 16:34   좋아요 0 | URL
고구려 때문이지 싶어요. 그 광대한 땅의 주인공이었던 조상. 그들이 기마민족이었으니 우리 안에 그 유전적 형질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거겠죠.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우린 북방계보다 남방계에 더 가까운 사람들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싫어한다는 거예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거죠. 그래놓고는 기를 쓰고 북방계의 흔적을 찾으려고 용쓴다구요. 얼마 전에 면접자리에서 교감샘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과거 우리 땅이었던 만주 땅을 찾아올 수 있느냐고. 찾을 수도 없고 찾는 게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했더니 뭐 씹은 표정 되시더라구요..;;;; 이궁... 아무튼 갖다 붙이는데 뭐 일가견 있어요. 무슨 유목기질이래요.(ㅡㅡ;;)

노이에자이트 2008-09-2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구려도 조공 바친 나라였다고 교과서에 명기를 하든지 해야지 원...우리나라는 크고 강한 것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강하고 정복자인 척 하고픈 욕구도 유독 강해요.그래서 남자들이 해외에 나가 외국여성들을 정복대상으로 삼으며 매춘관광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그렇다고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릴 존경하는 것도 아닌데...오히려 현지인들 반감만 잔뜩 사지요.

마노아 2008-09-21 22:24   좋아요 0 | URL
컴플렉스가 너무 심한 것 같아요. 큰 것 강한 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좋은 전통이나 역사도 많을 텐데 그런 것을 찾을 생각은 않고 이미 없는 것에 집착하고 뜬구름 잡고요. 해외 나가서 어글리 코리안 소리 듣는 것도 정말 망신스러워요. 되먹지 못한 마초 근성. 강한 자에게 굽신거리고 약한 자에게 큰소리치는 나쁜 습관 중 하나이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치게 고집세고 자존심 강한 인간들은 열등감도 강하죠.그런데 우리나라에 마초가 있나요? 우리나라엔 아들은 많지만 남자는 드물죠.

마노아 2008-09-22 22:26   좋아요 0 | URL
아들은 많지만 남자는 드물다. 아, 아픈 진실이군요...!
 
칭기즈 칸과 몽골제국 - 정복과 관용의 두 얼굴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24
장폴 루 지음, 김소라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품절


근대에는 몽골제국만큼 방대한 식민 제국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곳도 몽골제국처럼 서로 인접한 한 덩어리의 땅은 아니었다. 구세계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평양에서 발트 해와 지중해에 이르는 거의 모든 땅이 같은 통치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북쪽의 경계가 불분명함에도, 몽골제국은 프랑스의 50배, 미국의 3배가 넘는 3,000만 제곱km이상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아가 인접한 수많은 지역에 어느 정도 직접적인 통치를 실시했고, 인도 남부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그곳의 왕들로 하여금 제국의 권력을 인정하게 했다. 1260년 쿠빌라이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국이 네 개의 나라(울루스)로 나뉨으로써 정치적 단일성은 유명무실해졌지만, 동일한 이데올로기와 문화가 오랫동안 이 나라들의 근간을 이루었다.-41쪽

처음에 칭기즈칸이 세계 정복을 위해 통일된 유목 국가를 세웠을 때 몽골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겨우 수십만 명을 넘지 않았다. 이후 몽골을 통일하고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옹구트족 등 온갖 민족을 흡수했을 때도 인구는 100만에서 150만 명 정도였다. 몽골제국 군대의 실제 인원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단지 칭기즈칸이 사망했을 때 병력이 12만 9천명 정도였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물론 중국에서 전투 중이던 군대는 합치지 않은 것이지만, 그들도 기껏해야 수만 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는 미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것이었다. 제국의 인구 열 명 중 한 명이 군인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도 이 정도 비율의 군대가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된 경우는 드물었다. 군대의 중핵을 이루는 이 수에다, 원정에 계속되면서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징병된 군인들이 더해졌다. 이들은 헤아릴 수 없는 무리를 형성했다. 그 수는 아마도 몇 십만 명에서 최대 백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 -60쪽

칭기즈칸은 점령한 지역에서 열 명 중 세 명의 남자를 징집했다고 한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탈영하거나 도주하거나 반항했을 법한 이 신병들이 아주 드문 예외를 빼고는 늘 충성스러웠다는 사실이다. 나약함이나 배신의 대가로 가해질 형벌이 무서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위대한 군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에서 비롯된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60쪽

스텝의 말인 조랑말은 유럽의 말에 비해 작았지만 등허리가 단단하고 힘이 넘쳤으며 강인하고 빨랐다. 아무것이나 먹었고 쌓인 눈 아래서도 풀을 찾아낼 수 있었으며, 염소처럼 바위 위로도 뛰어다녔다. 잘 먹고 잘 쉬면 하루에 100km도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몽골군은 말이 여름풀을 먹어 상태가 좋은 겨울에 원정을 나서는 것을 더 좋아했다. 전장에 나가는 남자들은 언제든 갈아 탈 새 말이 있어야 했으므로 적어도 세 마리의 말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대여섯 배의 말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몽골족은 말과 한 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을 탄 그들은 말에서 먹고 자는 데도 익숙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들은 최고의 기병이었다. -62쪽

몽골군은 큰 전투는 피하고, 적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을 자주 썼다. 너무 강한 군대를 만나면, 도망치는 척해서 전투에 적합한 장소로 그들이 쫓아오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적은 대오가 흐트러지고 쉽게 함정에 빠졌다. 적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몽골군은 뒤로 돌았다. 특히 기병들은 몸을 돌리면서 어깨 위로 활을 쏘았는데, 이 자세를 '스키타이식 또는 파르티아식 활쏘기'라고 한다. -64쪽

1220~21년 칭기즈칸은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의 오지에 길을 냈다.
오고타이는 몽골과 다른 지역들 사이에 역참망을 확립했다. 또한 천천히 이동하는 대상들을 위한 우물을 파라고 관리들에게 지시했으며, 교역품에 부과하는 세금을 폐지했다. 다만 사치품은 예외로 해 상품 가격의 1/30을 세금으로 책정했다.
중국에서는 오래된 길들을 보수하고 가로수를 심고 숙박 시설을 갖추었으며,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전히 재정비했다. 이렇게 해서 제국의 상업 및 금융 활동은 대단히 활발해졌고, 문화융성의 원동력인 富가 제국에 집중되었다. 이는 전쟁의 재앙을 겪은 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실로 모든 것이 재건의 대상이었다. -67쪽

1260년 쿠빌라이는 나이 든 지식인과 고아, 병자들을 돕는 조치를 취했다. 1271년에는 구빈원의 설치를 명했다. 모든 도시에 빈민을 위한 식량 배급 시설이 세워졌다. 마르코 폴로는 매일 3만 명의 극빈자에게 음식을 제공했다고 썼다.
몽골제국은 관용의 나라였다. 다양한 종교 공동체를 위해 수많은 칙령이 공포되었고, 왕들은 종교 간 토론을 열었다. 유교와 도교의 나라에서 불교가 융성하고, 그리스도교가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의 나라에 수많은 탑과 교회가 세워졌다. 이 모든 것이 몽골의 종교적 관용을 증명한다.
몽골제국에서는 모든 인종이 평등했다. 특정 인종을 찬미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찬미한 것은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몽골족은 다른 인종을 몽골화하기는켜녕 황금 오르도나 차가타이한국에서는 오히려 투르크화되었다. 또한 그들은 어디에서도 라틴족이나 아랍인, 투르크족, 영국인들처럼 자신들의 언어를 강요하지 않았다.-69쪽

서민층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몽골족인 민중 예술, 특히 금과 송나라에서는 매우 천시되던 연극을 좋아한 덕에, 연극은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74쪽

몽골제국은 전례없는 민족의 혼합을 유도했다. 제국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접촉케 했다. 아마 투르크족, 몽골족, 이란인, 중국인들이 유럽으로 갔을 것이다. 이주자들 혹은 망명자들은 고국의 문화도 함께 들여갔다.

아시아로 간 유럽인들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보고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들이 네스토리우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점은 동방정교회와도 달라 '우상숭배'의 집단으로 보였다. 유럽인들은 또한 이슬람교도들처럼 단순한 이단자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불교도들과도 논쟁을 벌였다.-89쪽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별개라고 생각하는(따라서 성모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임을 부정하는) 네스토리우스교의 교리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아시아로 전파되어 셀레우키아와 바그다드에 정착한 총대주교의 권한 아래 새로운 독립 교회를 탄생시켰다. 이란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네스토리우스교는 군데샤푸르 의학교와 더불어 이슬람 과학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종교는 소그디아나, 세린디아, 중국까지 퍼져나갔다. 중국에서 네스토리우스교 수도원은 '페르시아' 수도원으로 불렸다. 네스토리우스교는 몽골 시대에 번성했다.-91쪽

이집트나 페르시아 만에서 중국의 항구들까지 바닷길로 가려면 적어도 8개월을 항해해야 했다. 하지만 2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릴 때도 있었다. 발두치 페골로티는 크리미아에서 중국의 대운하까지 육로로 265일이 걸린다고 했다. 그의 계산은 정확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경우 공적인 여행자들(황제의 행렬이 아닌)이 아시아를 횡단하는 데 5~7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상인이나 평범한 개인들은 이보다 더 걸렸다. -92쪽

1182년 출생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 조반니 데 피아노 카르피니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교황이 몽골로 보내는 최초의 선교사절단 중 하나를 지휘하는 임무를 자진해서 맡았다. 그는 1245년 4월 리옹을 떠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볼가 강을 지나서 1246년 7월 몽골에 도착해 구유크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한겨울에 귀로에 올라 1247년 5월에 키예프에 다다랐다. 그는 자진해서 아시아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92쪽

1368년 몽골족이 중국에서 쫓겨나면서 유럽인들의 몽골 모험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모험은 문학을 통해 이어졌다. 상인들은 거의 글을 쓰지 않았지만 사절단은 많은 글을 썼다.-95쪽

이리하여 사실상 1260년 이후 몽골제국에는 네 개의 독립적인 국가(울루스)가 존재하게 되었다. 두 국가는 짧게 존속했지만 대단한 번영을 누렸다. 세 번째 국가에서는 14세기 말 티무르 왕조가 탄생했다. 황금 오르도라 불린 네번째 국가 킵차크한국은 250년간 러시아를 지배했으며, 그 마지막 후손들은 20세기 초에도 군림했다.-97쪽

일한국(이란)에서는 이미 1300년대 초에 몽골족이 배제되었다. 훌라구(1265년 사망)와 아바카(1265~1282재위), 아르군(1284~91재위)의 통치 이후, 가이하투(1291~95재위)와 가잔(1295~1304재위)의 집권 아래 이슬람의 영향력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마침내 올제이투 시대(1304~16)에는 이슬람 세력이 모든 것을 장악하기에 이르러, 이란은 과거를 되찾고 몽골족의 나라가 아닌 이슬람 국가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1317년 네스토리우스교 총대주교인 옹구트족 마르 야발라하 3세가 불행하게 사망함으로써, 몽골 역사의 중요한 인물뿐 아니라 몽골의 한 시대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개종한 유대인으로 훌륭한 정치가이자 뛰어난 역사가였으며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재상 라시드 앗 딘이 불행하게도 1년 후(1318) 처형된 사건 역시 우연은 아니었다. 무력한 왕 아부 사이드의 시대(1317~36)에 사회와 국가는 붕괴되었고, 이 일한국의 칸이 지계 후손 없이 사망하자 아무도 그의 뒤를 이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한국은 완전한 무질서 속에 해체되었다.-98쪽

국경이 불안정하고 유동적이었던 차가타이한국은 이슬람 세력과 몽골족인 쉽게 융합하지 못했다. 북부에는 칭기즈 칸의 법인 '야사'에 충실하고 토착신앙을 믿는 가난한 유목민이 살았고, 남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에 뿌리를 둔 부유한 이슬람 정주민이 살았다. 그 까닭에 나라는 이해 관계와 문화, 사상의 대립 및 서로에 대한 멸시로 인해 분열되었다. -100쪽

티무르(1336~1405)는 몽골제국을 완벽하게 재건하고자 했던 인물로, 유럽인들에게는 칭기즈칸보다 더 큰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복한 나라들을 지속적으로 통치하는 데는 실패했다.-100쪽

차가타이한국과 마찬가지로, 킵차크한국(황금 오로도)을 이끈 몽골족도 급속히 투르크화했다. 이란의 일한국에서처럼 몽골족은 일찌감치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베르케의 치세(1257~66)에 일시적이었던 이슬람교의 영향이 우즈베크의 통치시대(1312~40)에 킵차크한국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킵차크한국의 통치자들은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을 멀리서, 그러나 강경하게 다스렸다.-102쪽

1348년에는 페스트가 엄습하여 서아시아 전체를 집어 삼켰다. 페스트는 크리미아 반도에 상관을 세운 이탈리아인들을 통해 서유럽으로 퍼졌다. 게다가 황실마저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1360년에서 1380년까지 14명의 칸이 왕좌에 올랐을 정도로 칸들은 권력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그 혼란을 틈타 러시아인들은 과감히 반기를 들었다. -102쪽

칭기즈칸의 마지막 후손들은 볼셰비키 혁명 때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지배를 계속했다. 망기트 왕조의 지배는 1920년에 끝났다. 칭기즈칸이 정복자로 부하라에 입성한지 정확히 700년 후의 일이었다. -104쪽

한국들은 서로 반목했다. 황금 오르도와 차가타이한국은 호라즘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으며, 둘 다 일한국과 싸움을 벌였다. 복잡한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다. 일한국과 아르메니아, 십자군, 유럽의 왕들이 동맹을 맺었고, 황금 오르도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동맹을 형성했다. 후자는 맘루크 주민의 많은 수가 킵차크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299년, 일한국이 시리아 재정복에 실패한 것도 호아금 오르도의 공격 때문이었다. 1290년부터 1304년까지 차가타이한국이 인도 정복에 계속 실패한 것 역시 황금 오르도의 공격이 원인이었다. 또한 오고타이 일족은 1260년부터 1306년경까지 원나라와 반목을 거듭했다.-104쪽

그러나 몽골제국은 세계 도처에 강렬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란과 중국에서 단명했건 킵차크에서 장수했건, 몽골제국은 크고 작은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는 북쪽으로 중심이 이동하여 북경이 시안과 난징을 대체했다. 또 아직 편입되지 않았던 윈난이 한족의 세계에 통합되었다. 몽골과 만주, 티베트, 신장, 인도차이나도 원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하나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예술과 사상도 혁신되고 풍부해졌다. 몽골족은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마니교, 불교 같은 외래 종교를 보호했다. 몽골인은 박해받고 내몰렸던 이 종교들 중 적어도 두 종교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105쪽

도시화와 기초적인 산업화를 이루고 곡물과 콩재배를 장려하며 근대화를 추구하고 유목 새오할에 적대적인 정권아래서 몽골족은 여전히 조상 전래의 생활방식을 고수했다.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몽골족은 숨겨온 바람을 이루고 과거를 되살릴 수 있었다. 불교와 칭기즈칸주의, 유목생활 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전통과 관습이 부활했다. 고립된 지역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남녀 공통 전통 의상 '델'이 도시의 전 계층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명절에 군인들은 13세기 전사 차림을 했다. 1992년에는 야크나 말의 꼬리로 만든 중세 깃발 '투그'가 다시 군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불사가 다시 열렸고, 전통적인 종교적 관용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도 불러들였다. 유목민들은 다시 여러 가축을 키우고, 스텝에는 생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유르트 마을들이 조성되었다.-109쪽

근동에서는 몽골에 예속되어 모욕받고 그리스도교에 의해 저울질 당하고 존재 자체가 위협받아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이슬람교가 눈부신 설욕을 이루었다. 그리고 협력자로 여겨지던, 또한 실제로도 그랬던 그리스도교도들은 의심을 받았으며 아랍 정복 이후 누리던 상대적인 평화를 잃어버렸다. 한창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나 이미 초기의 십자군에 의해 약화된 투르크족은 서진을 제지당했다.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을 때 힘의 균형은 유럽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유일하게 전장에서 몽골족을 무찌르고 이후에도 의기양양하게 그들에게 대적하여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맘루크 왕조는 거의 고대 이집트에 비견할 만큼 이집트를 눈부시게 부흥시켰다.
유럽에서는 강대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헝가리가 쇠퇴했다. 인구가 감소한 슐레지엔은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의 예속 상태는 한없이 계속되어, 몽골족이 남긴 많은 흔적이 소비에트 체제에서까지 발견되었다. 무엇보다도 몽골제국은 극동으로 향하는 닫혀 있던 길을 다시 열거나 또 다른 길을 찾아내겠다는 욕망을 부추겼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을 낳은 것은 바로 몽골이었다.-110쪽

몽골족은 16세기에 제국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이제 유목민들은 열외자였고 말이나 활로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몽골제국의 재현에 성공했다. 티무르(1370~1405재위)와 그의 뒤를 이은 티무르 왕조의 왕들이 인도 땅에 '몽골'의 이름을 간직한 무굴제국을 세운 것이다. 이 제국은 나중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계승했다. 그리고 만주족은 중국을 정ㅂ고하여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를 창건하기 전, 몽골족에게 와서 칭기즈칸의 정통 왕위 계승자임을 승인받았다(1634). 세계 정복자의 자손들은 이 기회에 만주족을 통해 위대한 과거를 재현하길 바라며 이를 승낙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몽골족을 예속하여 거의 소멸 상태로 몰아가고 말았다.-111쪽

몽골 군대는 그 누구보다 흔쾌하고 용감하게 전쟁 또는 다른 목적을 위해 떠난다. 그들은 기꺼이 고된 일을 하며, 필요하다면 암말의 젖이나 활로 잡은 짐승의 고기만 먹고도 너끈히 한 달 동안 전진하거나 버틴다. 게다가 말은 걷다가 길가에 보이는 아무 풀이나 먹으므로, 귀리나 건초, 짚을 가져갈 필요도 없다.(...)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심하게 일하지만 피로를 견디며, 가장 적게 소비하고 소식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마르코 폴로, L.앙비 번역, <동방견문록>, 클랭크시크 출판사, 파리, 1955년-116쪽

여성들의 지위 : 스텝 유목민들의 사회에서 여성은 상당히 자유와 높은 지위를 누렸다. 전형적ㅇ니 보수주의 이슬람교도였던 모로코 여행자 이븐 바투타(1304~77)는 이를 보고 분개했다. -116쪽

몽골족 대침입 시기에 생겨난 공포로 인해 몽골 사람과 그 나라에 대해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몽골족을 직접 본 사람들과 이야기만 들은 사람들 모두 공포에 휩싸였다. 유달리 극적인 서양의 연대기들은 마치 훈족 침략기에 쓰인 연대기들을 베껴놓은 것 같다. -125쪽

몽골족의 문명 단계는 아직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들은 정착 농경 문명을 전혀 몰랐으며,(당시에)아는 것이라곤 파괴뿐이었다.(...)그러나 이처럼 한정된 여건 속에서도 칭기즈칸은 완벽한 인간이자 공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으며, 그의 우정은 신뢰할 수 있었다. 그는 열심히 싸운 적에게 관용을 베풀줄 알았고, 충성심을 소중히 여겨 배신자들을 혐오했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다. 그의 출현으로 몽골사회는 혼란과 해체의 단계를 통과했다. 그는 몽골 사회에 질서와 가정의 미덕, 도덕, 규율을 정착시켰다. 이 야만족 사람은 몽골족을 문명의 길로 이끌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문명화된 여러 투르크 몽골 민족의 도움을 받았는데, 중국 문화를 흡수한 거란족과 투르판의 위구르 투르크족, 그리고 불교와 네스토리우스교의 지식인들을 등용한 카라샤르와 쿠처의 도움이 컸다. 위구르 문자는 몽골의 외교 문자가 되었다. 오래전에 아시아 내륙의 투르크족 사이에 뿌리내린 네스토리우스교는 칭기즈칸 가문 내에서 특혜를 누렸으며, 거란족의 불교와 더불어 몽골족의 풍속을 빠르게 순화하는데 기여-르네 그루세<아시아의 역사>1950-132쪽

칭기즈칸이 추구한 권력의 길은 외적인 상황과 표면적인 힘의 균형만을 고려한다면 이유있는 허세나 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논리적이고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모든 계획은 가능성을 고려하여 수립하고 실행했다. 초기에 그는 권력과 배경이 거의 없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을 부유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기존의 군대나 국가 체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무에서 창조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칭기즈칸은 분명 역사를 만든 사람 중 하나이며, 어쩌면 그 중 가장 위대할지 모른다. 그가 역사를 창조했기에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었다.(...)그는 전통을 부정한 찬탈자가 아니었다. 역사가 그의 안에 살고 있었기에, 그 자신보다 큰 뿌리가 그의 힘을 기러주었다. 전통과 꿈은 그의 뛰어난 정책의 수단이었고, 그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몽골족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섯 세대에 걸쳐, 그들은 역사의 연단을 차지했다. 한 세기 반동안 세계의 운명이 그들의 손안에 있었다. 그들은 지구 반 바퀴에 걸친 파란만장한 모험을 마치고, 영광만을 짊어진 채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펠트 천막에 살게 되었다.-133쪽

(윗글과 이어서) 사람들은 인류가 얼마나 많은 경이를 잃어버렸는지 이야기한다. 위대한 과거는 곧 꿈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몽골족은 다시 가난한 유목민이 되었다. 그들의 조상이 그러했듯이.
-
요아힘 바르크하우젠, <칭기즈칸의 황색 제국>, 파이요 출판사, 파리, 1935년-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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