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 하늘과 맞닿은 바람의 나라 - 대구 MBC HD 기획 10부작
이른아침 편집부 엮음 / 이른아침 / 2008년 5월
절판


신발 코가 위로 향한 모습이 고무신과 사뭇 비슷한 몽골의 전통 신발 ‘구달’
양모와 가죽으로 만든 구달은 특이하게도 오른쪽 왼쪽 구분이 없다.
-22쪽

‘세걸음 이상은 승마’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늘 말을 타고 다니는 몽골인들에게 승마는 더없이 즐거운 놀이.

-35쪽

강수량이 부족한 몽골은 눈이든 비든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은 언제나 환영. 유목민 가정이면 집집마다 있다는 물 당번은 겨울이면 지천으로 널린 눈을 부지런히 퍼다 나른다. 녹이기만 하면 온 가족이 마실 물과 차, 먹을 음식을 만들 수 있기 때문

-36쪽

800년 전, 칭기즈칸과 함께 말을 타고 초원을 호령하며 세계무대에 등장한 몽골은 이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말로 갈아타고 힘차게 달린다.

-47쪽

70여 년 동안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의 틀 안에서 생활했던 몽골은 공산권의 몰락으로 한때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재빨리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해마다 6%를 웃도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건국 800년을 맞는 지난 2006년을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귀환’이라 불렀다. 구체제에선 금기시했던 칭기즈칸의 완전한 복권을 계기로 세계를 호령하던 옛 몽골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핵심은 경제성장이다.
-48쪽

몽골의 광업은 총 산업 생산의 65%를 차지하고, 국가 GDP의 17%를 담당한다. 광산을 끼고 있는 도시들이 새로운 성장 지역으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50쪽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몽골 중산층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자녀교육.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오로지 교육만이 더 많은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

-52쪽

1921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유목은 국가적인 탄압을 받았고 유목민들은 강제로 해체됐다. 전통적인 유목 생활이 중앙통제식 경제와 맞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집단화 정책이 느슨해지면서 유목은 조금씩 다시 활기를 띠게 됐다. 시장 경제 전환 이후에는 집단농장에 속해 있던 가축이 개인 소유로 바뀌면서 대규모 목축업이 더욱 회복되는 추세다.

-55쪽

가축 수가 많은 유목 가정만이 초원을 지키고, 가축 수가 적은 목축 농가들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유목 생활을 접고 도시로 떠난다.

-59쪽

젊은이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면서 노인들만 남아 있는 유목 마을이 점점 증가.
가축이 아주 많은 집은 자식들이 초원에 남지만 가축이 적어 할 일이 없는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나가는 것.
시장경제는 이농 현상을 부추기고, 유목 마을의 빈자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모두가 떠나가고, 지금 남아있는 청년들마저 나이가 들면 그때는 누가 초원을 지키게 될까? 몽골의 정신적 뿌리이자 이 나라를 지탱해 온 가장 중요한 산업인 목축업이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64쪽

울란바토르 외곽의 달동네, ‘야르막’은 최근 3,4년 사이에 울란바토르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생겨난 빈민촌 중 하나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사람들로, 공장 직공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직업을 구하지 못해 실업자로 전락한 이들도 많다.

-67쪽

한정된 일자리 때문에 실업률이 7%를 웃돌고, 빈부격차가 커지는 등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몽골에서 발생하고 있다. 눈부신 경제성장 뒤에는 도시의 팽창과 시골의 인력 부족, 실업 문제, 빈부의 격차 등 어두운 그늘이 뒤따르기 마련.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시장경제를 선택한 몽골에게 또 하나의 숙제가 주어진 셈.

-68쪽

몽골 유목민의 하루는 노래로 시작된다. 이들은 소나 양의 젖을 짜면서도, 말을 타고 가축을 몰고 다니면서도 노래를 부른다.

-79쪽

만약 노래가 없다면 이른 새벽부터 시작하는 유목민의 노곤한 삶을 무엇으로 풀어야 할까? 가축이 깨어날 때부터 시작하는 유목민의 하루에 노래는 피로를 풀어주는 윤활유이자, 가축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번잡스런 문명을 멀리한 유목민의 삶은 푸르른 초원만큼이나 단순하고 순박하다.
-91쪽

몽골의 역사 속에서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 이 세 가지 경기는 즐거운 놀이이자 효과적인 전쟁 연습이었다.

-100쪽

말을 훈련시킬 때 경기 도중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리도록 가르치기에 몽골의 말 경주를 지켜보면 종종 낙마한 기수를 팽개친 채 결승점으로 달려오는 말들을 볼 수 있다. 몽골인들은 이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는 말 경주를 기수의 용기와 인내심을 시험하는 좋은 기회로 여긴다.
(나담은 칭기즈칸 이전부터 전해진 전통적인 여름 축제다.)
-112쪽

나담 말 경주에서는 각 나이별로 몇 백 마리의 말들이 동시에 달리는데 기수가 너무 무거우면 말이 제 속도를 낼 수 없어 보통 세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꼬마들이 출전한다. 조련사는 대부분 기수의 아버지인 경우가 많다.
-116쪽

울란바토르 근교에는 몽골인들의 여름 별장인 ‘조슬랑’이 밀집해 있다. 회계사인 간수흐는 양복과 자동차, 현대식 건물이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도시 사람이지만 석달 남짓한 여름 동안엔 공기가 나쁜 도시를 떠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조슬랑에서 생활하며 야과 말을 치는 몽골의 전형적인 유목민으로 살아간다.

-127쪽

가축들은 대개 봄에 새끼를 낳기 때문에 이 시기에 가장 젖이 많이 나온다. 이는 곧 유제품을 많이 만들 수 있다는 뜻과 같다. 여자들은 여름 내내 부지런히 젖을 짜서 겨우내 먹을 유제품을 만들어 비축한다.

-137쪽

몽골인에게 가축은 삶의 동반자이자 친구인 동시에 중요한 식량원이다. 그래서 몽골 남성들은 가축을 방목하는 일 못지 않게 양이나 염소를 도축하는 일에 신중을 기한다. 가축을 도축할 때는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최대한 빨리 숨을 끊고, 피를 땅에 흘리지 않게 한다. 도축은 집안의 어른인 가장의 몫이며 몽골 남자라면 자라면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기술이다.

-141쪽

허르헉은 양이나 염소를 큼직하게 잘라 감자, 당근 등과 함께 푹 쪄서 먹는 몽골의 대표적인 요리로 과거 솥을 가지고 다니기 힘들던 유목민 시절에 가죽 부대에 넣고 끓여 먹던 방식에서 초래한 초원의 음식이다. 고기 요리는 보통 남자들이 맡는다. 먼저 아버지가 불을 피우고 작은 돌부터 달구기 시작한다. 그 사이 방금 잡은 염소를 먹기 좋게 잘라 양념과 함께 큰 솥에 넣고, 뜨겁게 달군 돌을 집어넣어 고기를 골고루 익힌다. 이 상태로 한두 시간 정도 푹 익히면 연하고 먹기 좋은 허르헉이 완성된다.

-142쪽

유목민은 거친 대자연과 그를 관장하는 영적 존재에 많은 것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야 하는 몽골 유목민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샤머니즘은 곧 몽골인의 삶, 그들의 정신적 뿌리인 것이다.

-171쪽

몽골에서는 한국어 자체가 한류의 상징이다. 몽골어에는 ‘으’ 발음이 없어 한국어를 읽고 말하기가 까다로운데도 자녀가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가르치려는 학부모가 많다. 그래서 한국어 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 1년 이상 기다리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몽골 학교에서도 예전에는 주로 러시아어를 가르쳤는데 요즘에는 영어와 한국어가 인기다.

-177쪽

해마다 10월이면 한글날을 전후해 울란바토르 대학에서 ‘한글 큰잔치’가 열린다. 말하기, 글짓기, 붓글씨, 한글 예쁘게 쓰기, 노래 경연 이렇게 총 5개 분야의 대회. 대상을 수상한 학생에게는 열흘간의 한국 연수 기회가 주어진다. 노래 경연 시상식을 끝으로 3일 동안 울란바토르를 뜨겁게 달군 한글 큰잔치는 몽골과 한국 사이를 한걸음 더 다가서게 하며 막을 내린다.

-184쪽

울란바토르에서 420km 떨어진 돈드고비 아이막은 광활한 초지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산재한 곳. 이곳에 속한 델 올 지역은 몽골 최초의 미술 작품인 암각화로 유명. 날씨가 건조해서 암각화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지역의 암각화는 약 3만 개로 추정. 소재의 종류 또한 다양. 델 올 지역에 암각화가 많은 것은 사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하계의 정설.

-197쪽

20세기 초반까지 불교는 몽골 최고의 종교였다. 하지만 1920년대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 국각가 되면서부터 종교는 곧 아편이라는 스탈린의 정책에 따라 국민이 불교를 믿는 것을 막고, 많은 사찰과 사원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결국 10만여 명의 몽골인들이 내몽골이나 다른 나라로 도피했고, 수많은 스님과 승려들이 학살당했다. 당연히 불교미술도 몰락했다.

-213쪽

땅을 소유하고 영원히 정착하는 것을 꿈꾸지 않는 유목민들이야말로 몽골을 가장 몽골답게 보여주는 존재다.

-223쪽

길을 잘 기억하고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물 냄새도 찾아낸다는 명석한 가축 낙타는 유난히 정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 몽골인들의 오랜 벗이자 가족 같은 존재. 오축 중에서 가장 가벼우면서 뛰어난 보온력을 자랑하는 낙타의 털은 봄기운이 시작되는 이맘때쯤 깎아야 g나다. 낙타는 체구가 크고 강인해 추위에 강하지만 더위에는 유난히 약하기 때문.

-224쪽

매년 가을이 되면 새로 태어난 망아지와 나이가 적은 말들을 한 번씩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 몸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여름에 도장을 찍으면 상처가 곪을 수 있기 때문에 도장 찍기는 주로 가을에 많이 한다. 방목을 하다 보면 다른 집 가축들과 섞일 수가 있어 찾기 쉽도록 찍는 것이다.
이맘때부터는 소똥 줍기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수분이 다 빠져 나간 소똥은 냄새도 없거니와 화력이 그만이어서 시골 유목민들의 겨울 난방을 책임지기에 안성맞춤이다. 모은 소똥을 1년 내내 말리면 그 다음 겨울쯤엔 태우기 딱 좋은 연료가 만들어진다.
-234쪽

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여름에는 물이 풍부한 강 주변에, 겨울에는 뒤에 산을 낀 장소에 정착한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며들지 않도록 게르 주변을 흙으로 꼼꼼히 막고, 펠트로 게르를 두 겹 세 겹 덮는다. 몽골의 겨울은 단순한 추위 문제가 아닌, 생존이 걸린 계절이기 때문이다.

-235쪽

자유화, 개방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이 이어가는 그들의 유목 생활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신선한 메시지이자 몽골을 가장 몽골답게 만들어 주는 유목민의 삶이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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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08-09-18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줄 ... 한 줄...의미 있게 들립니다.

마노아 2008-09-19 00:01   좋아요 0 | URL
몽골을 지켜보고 있자면, 때묻지 않았던 자연이 점차 오염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자본주의의 속성은 그런 게 있으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9-18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골인들이 징기스칸 숭배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중국도 징기스칸을 굉장히 홍보하더라구요.중국은 이민족들이 세운 나라도 중국사라고 주장하니까 요,금,원,청도 자기나라 역사라고 합니다.그런데 여진인은 사실상 완전히 흩어졌으니 금,청에 대해선 그런다 쳐도 몽골은 엄연히 독립국가인데 중국이 몽골인인 징기스칸을 중국의 영웅으로 선전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마노아 2008-09-19 00:02   좋아요 0 | URL
광개토대왕도 지네 임금이라고 할 애들이죠. 몽골은 중국 굉장히 싫어하는데 기분 나쁠 것 같아요.
티벳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다들 열받을 일이에요.ㅜ.ㅜ

달빛푸른고개 2008-09-1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몽골'도 의미가 있겠지만, 이전 몽골의 역사가 갖는 의미가 참 크더군요. 한반도와의 관계도 그렇구요.

마노아 2008-09-19 00:03   좋아요 0 | URL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샌드위치 자리가, 우리가 중국과 일본, 그밖의 강대국 사이의 샌드위치 입장과 동질감이 느껴져서 더 눈여겨보게 되어요. 한국을 참 좋아하는 나라인데 요새는 이미지 완전 버려놔서 자꾸 싫어한다고 해서 걱정이에요.

노이에자이트 2008-09-1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소련군 기지가 몽골에 있었는데 지금은 러시아 군기지가 있는지 궁금하네요.한국의 늙은 남자들이 몽골의 손녀뻘되는 처녀를 현지처로 거느리고 있는 데다가 매춘관광등이 말썽을 일으키더라구요.그런데 몽골에 나치주의자들이 있어요.요주의!!!나치 깃발을 차에 달고 시내에서 위력시위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마노아 2008-09-19 15:43   좋아요 0 | URL
몽골 안에서 나치주의자라니, 굉장히 이질감이 느껴지네요. 갑자기 오싹해져요!
그나저나 어디서든 똥물 튀기고 다니는 인간들이 있다니까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바깥에서도 새는 거겠지만, 꼭 저런 사람이 '대표'인 냥 전체 망신을 시키잖아요. 우호적이었던 한국에 대한 감정이 자꾸 나빠지는 게 안타까워요.

노이에자이트 2008-09-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치주의는 예전 사회주의권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도 굉장한 선풍이죠.이념의 공백을 메워주니까요.우리나라 남자들이 워낙 껄떡질을 하고 다니니까 아마 몽고의 네오나치들이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마노아 2008-09-19 22:20   좋아요 0 | URL
이념의 공백을 메운다고 하니까 분위기가 좀 수긍이 가네요. 어휴, 잘못하다간 국제 뉴스에서 끔찍한 소식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군요. ;;;;

노이에자이트 2008-09-2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맞아 마땅한 놈이 당하는 거야 인과응보지만 무고한 사람이 단지 한국남자라는 이유로 봉변을 당할까봐 큰 걱정입니다.

마노아 2008-09-20 19:2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도 걱정이에요. 꼭 죽어 마땅한 녀석들은 명도 길더만 엄한 사람이 재수 없어 죽기도 하는 세상..ㅡ.ㅡ;;;
 
생 배노? 몽골
루이사 워프 지음, 김옥수 옮김 / 도서출판 오상 / 2004년 3월
품절


"생 배노(안녕하세요)?"

"타이왕(평화롭습니다)."-33쪽

챠강 사르, 오늘은 바로 몽골의 설날인 챠강 사르였다. 몽골의 설날은 5~6개월에 걸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됨을 축하하는 오래된 명절이었다. 설날은 음력으로 정하기 때문에 양력으로는 보통 2월 초에서 말 사이였다. 울란바토르에서는 챠강 사르 연휴가 3일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방에서는 몇 주일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몽골인 대부분은 연휴가 계속되는 동안 찾아올 손님을 대비해 양고기 만두 스천 개를 만들어 얼려놓는다. 때문에 이 기간 동안은 어디를 가든지 보오쯔를 먹고 애르흐를 마실 수 있었다. -35쪽

봄은 몽골에서 사계절 중에서 가장 변덕스럽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봄을 싫어한다. 도대체 날씨를 믿을 수가 없다며 마치 '여자의 변덕처럼 예측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봄은 정말 가혹했다. 바람이 몰아치고 눈발이 날렸고 태양은 빙판을 뚫기 위해 강렬하게 내려쬐고 있었다. 땅은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얼어붙은 모래처럼 보였고, 혹독한 겨울은 바위에 있던 물기까지 말려버렸다. -63쪽

몽골의 거친 환경은 사람들을 매우 보수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자와 여자는 각자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해서 했다. 남자는 동물 사냥을, 여자는 식물 채집을 했으며, 각자 맡은 분야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규칙이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부부, 만나거나 이별할 때 얼굴에 키스하는 부부를 한 번도 못 보았다. 아니,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헤어지는 경우가 아닌 이상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냥 말없이 떠날 뿐이었다. '잘 가라'는 의미의 '바야르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는 누군가에게만 하는 인사였다. -66쪽

모자를 쓰라는 경고를 두 번이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집을 피우며 하루종일 맨 머리로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직 바람에 냉기가 실려 있긴 했지만, 오후 내내 태양이 너무 따듯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질녘이 되자, 공기가 차가워지면서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그러더니 결국 머리가 깨져나갈 듯 아팠다. 나는 그날 밤에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눈도 잘 안보였다. 간신히 진통제를 집어 몇 알 함께 삼켰지만 곧바로 구역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온몸이 떨리고 어지러웠다. 다음날 아침에 간신히 일어날 수 있기는 했지만 눈알이 여전히 뻑뻑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74쪽

우리 모두가 봄의 파편에 뒤덮인 상태였다. 목구멍에 모래 냄새가 올라오고, 머리와 피부에 모래가 달라붙었다.

"아, 지금이 1년 중에 제일 힘든 시기에요. 오히려 겨울은 괜찮아요. 우리 모두 춥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봄은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정말 위험해요. 또 공기압력이 낮아서 항상 피곤하지요. 사방이 먼지투성이라 가축이 굶주리기도 하고요. 비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겠어요. 아, 정말 힘들다."-79쪽

몽골 전통에 따르면 선물을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하면 절대 안 된다. 가방이나 주머니에 가만히 넣어두었다가 혼자 있을 때에 선물을 풀어야 한다. 선물을 받고 고맙다고 말하는 건 선물을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아주 무례한 행동이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물을 꺼내보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다. 말없이 선물을 받아 나중에 혼자 열어야 한다. -87쪽

마을 사람들은 캐시미어를 판 돈으로 상점에서 쌀과 밀가루를 구입하고 게르를 해체해 산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사람들은 거기서 여름을 보낼 예정이었다. 이제 이 정적인 마을 전체가 약 3개월 동안 예전의 유목민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쳉겔의 거의 모든 가정은 최소한 몇 마리씩 가축을 기르는데, 일부는 마을 주변에서 기르고 나머지는 알타이 산맥에서 길렀다. 산에 있는 가축은 겨울과 봄을 나는 동안 산에서 사는 친척이 돌봐주었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거의 모든 마을 사람이 알타이 산맥으로 들어가 직접 가축을 기르며 거기에서 나오는 풍부한 우유와 유제품을 먹으며 살았다. -109쪽

학교는 6월 15일에 공식 일정을 마쳤다. 학생 대부분은 이미 1주일 전에 떠났고 행사 때문에 머물던 소수의 학생들은 최대한 빨리 떠나기 위해 준비했다.-112쪽

어떤 나라이든 독재자나 전제군주가 공포로 통치하던 시절, '오랫동안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던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1939년에서 1952년 동안 몽골을 통치한 초이발산 정권. 초이발산 수상은 1930년대에 몽골 전역에 걸쳐 악명 높은 숙청을 단행. 요셉 스탈린을 추종한 초이발산은 10여 년에 걸쳐 반혁명적인 몽골인을 감옥에 가두고 처형. 처음 18개월 동안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만 해도 최소한 2만 명 이상. 야당이거나 공산당 정권에 반대한다고 판단되는 학자와 스님 수천 명이 탄압의 표적. 몽골에는 장남을 라마승으로 키우는 오랜 전통. 1945년경 18,000명 이상의 라마승이 처형. 사원 800여곳 파괴. 화를 피한 곳은 단 세곳. 울란바토르의 간당 서원이 그 중 하나. 선전용으로 남겨둔 것. -119쪽

용기를 내서 바깥으로 나가보니, 도시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우중충한 상점과 가판대, 나이트클럽과 술집 등이 중앙 엥흐 타이왕(평화의 거리)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고, 진열장마다 최신 상품이 번쩍이고 있었다. -124쪽

모든 유목민은 여름과 가을 내내 유제품을 먹기 때문에 요구르트와 크림, 치즈를 많이 만들었다. 또 겨울에는 먹을 게 없기 때문에 미리 지방질을 충분히 섭취해야 했다. 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거품과 크림이 많은 암말에게서 짠 젖이다. 암말에게서 젖을 짤 수 있는 시기는 약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유목민들은 그 유명한 아이락(발효시킨 암말 젖)을 몇 통씩 만들어 놓는다. -132쪽

내가 게르에서 여자들과 일하는 동안, 산사르후우를 비롯한 남자들은 바깥에서 밧줄과 나무로 만든 여름용 임시 축사를 손질하고, 말에게 낙인을 찍고, 양에게 이름표를 붙이고 양털을 깎았다.
남자들은 손톱깍이 같은 조그만 가위 두 개로 150마리 이상의 양털을 깎았다.

양털 깎기가 모두 끝나자, 남자 아이들은 웃통을 벗어던진 채 모두 강으로 들어가서 양털을 깨끗하게 빨릴 때까지 맨 손으로 박박 문질렀다. 그런 다음에 비틀어 짜고 쭉 펴서 우중충한 양털을 모아놓았다. 양털은 마치 민들레 꽃씨처럼 보송보송 일어났다. 쭉 늘어놓은 양털은 마치 수많은 거미 떼가 밤새도록 짜놓은 은빛 거미줄처럼 보였다. -135쪽

내가 여름 캠프에서 작성한 일지는 주로 유목민의 작업 방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일하면서도 상호 보완이 되는 방식, 다양한 유제품을 만드는 방식, 끝없는 방목과 젖 짜기, 가축을 잡아서 운반하기 등이었다.
"여름에는 산에서 할 일이 아주 많은 법이야. 오랜 겨울을 지낼 양식을 지금 다 만들어 놓아야 하거든."
그들은 식량을 모으기 위해 산으로 왔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여름은 식량을 수확하는 계절이며, 순간이나마 풍요로움을 누리는 기간이었따. 나른하게 보내도 되는 휴가기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함께 외출한 적이 있었다. 7우러 중순경에 근처 계곡에서 열리는 나담 축제에 참석했다. -136쪽

가장 중요한 나담 축제는 울란바토르에서 매년 7월 11일과 13일 사이에 열린다. 7월 중순경에 열리는 나담 축제는 작은 규모로 전국 수백 곳에서 열린다. 지역에서 열리는 나담 축제는 가축을 하루 이상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 당일에 끝났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활쏘기 대회는 대부분 생략했다.

언뜻 보기에, 나담 축제는 오랜 전통의 소박한 여름 축제 같았다. 마당에 하얀 천을 길게 깔고, 그 위에 버르척과 아롤, 치즈, 크림 등을 잔뜩 쌓아놓았다. 젊은 여인 10여 명이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수테채(우유차)를 따라주는 모습도 보였다. 남자와 여자는 따로 떨어져 앉았으며, 아이들은 맨발로 양쪽을 오가며 뛰어놀았다. -137쪽

몽골에서는 결승선을 그려놓지 않아, 언제나 두세 마리가 똑같이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심판은 우승자를 정확히 가려냈고, 사람들은 우승자 주변으로 몰려갔다. 우승마에게는 존경을 상징하는 파랑 비단 하딱(스카프)을 씌워졌다. 그리고 아이락과 쉬밍애르흐를 정중하게 부어주었다. 어린 기사에게는 왕관을 씌어줬다. 그러나 우승마보다 많은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139쪽

나는 데르후우가 차와 음식을 게르 바깥에 있는 낮은 식탁에 준비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몽골인과 투바인은 언제나 집 안에서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기 때문이다. 나담 축제처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어떤 유목민이든 결코 바깥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저속한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142쪽

몽골에서 에스기(양모 담요)를 만드는 건 곡식을 추수하는 것과 비슷했다. 양모 담요는 게르를 덮는 벽과 좁은 침대의 매트리스나 담요로 사용했다. 염색과 바느질을 거쳐 멋진 양탄자나, 남자들이 겨울에 신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로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부츠는 잘 젖지 않아서 눈길을 걷는 데 아주 좋았다.
데르후우와 마니크가 아주 촘촘히 짠 갈대 돗자리에 양털을 고르게 깔자, 강수흐가 따듯한 물 두 통을 가져왔다. 데르후우가 잘 보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쭉 편 손바닥에 물줄기가 가느다랗게 되도록 부었다. 물방울이 잘 마른 양털에 뚝뚝 떨어졌다.
"먼저 양털을 충분히 적신 다음에 이걸 말아서 에스기로 만드는 거야. 골고루 충분히 적시지 않으면 서로 달라붙질 않아."
양털이 축축하게 젖자, 우리 네 사람은 돗자리와 양털을 기다란 소시지처럼 천천히 단단하게 말았다. 그러자 데르후우가 거기에 기다란 회색 밧줄을 돌려서 꽉 묶었다. 그 일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마른 풀밭에 무릎을 끓고 앉아서 소시지 모양의 돗자리를 앞뒤로 밀었다.
-153쪽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딱딱한 돗자리를 천천히 펼쳤다.
"양털이 잘 엮이지 않았으면 오늘 오후에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할 거야."
마니크는 밧줄을 풀면서 말했다. 모습을 드러낸 양털은 새로 태어난 것처럼 신선했으며, 조직이 떼어낼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잘 됐어요. 좋은 에스기에요. 보세요."
우리는 하얀 바닥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나머지 양털은 겨울용 델이나 담요에 넣고 바늘로 꿰맸다. -153쪽

남자들이 풀을 베고 돌아왔다. 살갗은 까맣게 탔고 몸은 더 수척해보였다. 벌써 8월 중순, 여름은 어는덧 끝나가고 있었다. -158쪽

알타이 산맥에서 마지막 며칠을 보내는 동안 폭우는 내리기 시작할 때처럼 갑자기 끝났다. 이제 앞으로 아홉 달에서 열 달 동안은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기온이 밤사이에 갑자기 내려갔고 계곡 비탈면에는 드문드문 눈발이 스며들었다. 유목민들은 짐을 싸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가을을 보낼 준비에 착수했다. 이들에게는 기온의 변화가 삶의 나침반이었다. -158쪽

여름은 가장 바쁜 계절이야. 겨울에는 일이 약간 쉬워지지. 남자들이 건초를 저장해 놓았고, 통나무집은 따듯해. 하지만 겨울에는 눈이 많이 쌓여서 쉴게가 양 떼를 데리고 갈 수 없는 날이 많아. 그리고 야크한테서 우유가 안 나오는 날도 많아. -159쪽

게르를 해체하는 과정은 정말 예술이었다. 우선 바깥에 덮은 천을 벗기고, 그 다음에 벽을 형성했던 양모 담요를 벗겼다. 그러면 단단한 나무 골조가 나오는데, 마름모 격자를 지탱하는 장대를 서너 개만 남기고 천장을 내렸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침대를 모두 꺼내고 옷과 가재 도구를 나무 궤짝과 포대와 여행 가방에 담았다. 게르를 해체하는 작업은 약 두시간 정도가 걸렸다. 나는 게르가 있던 자리와 난로가 있던 자리에 남은 약간의 잿더미를 바라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다음에는 당연히 차를 마셔야 했다. 몽골에서는 서로 이별하기 전에 항상 차를 마신다. 그래서 처음 생각했던 시간보다 항상 늦게 출발한다. 우리가 트럭에 올라탄 건 이른 오후 시간이었다. -161쪽

나는 몽골인과 카자크인과 투바인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가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이고, 보수적인 문화도 거의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세 민족 가운데에서 카자크인이 가장을 존중하는 문화가 특히 강하다는 것이다. 집에서 여자들이 앉아 있다가 남편이라도 들어오면 모두가 깜짝 놀라 그 집 안주인을 제외한 모든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가장은 집안일을 결코 거들지 않고, 부인이나 딸에게 명령만 내렸다. 그리고 몽골 여자나 투바 여자와 마찬가지로 카자크 여자들도 차나 음식을 남편에게 제일 먼저 대접했다. -175쪽

2주일이 지난 후에 아바이는 아들들을 데리고 풀베기 작업을 마쳤다. 건초를 높이 쌓아올린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들들이 그 꼭대기에서 빙그레 웃으며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건초를 게르 주변과 하샤 뒤편에 널었다. 몽골의 가을은 대체로 아주 짧아서, 겨울을 알리는 짧은 예고편이고 기나긴 추위로 들어가기 직전의 불꽃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지난 봄이 아주 길고 여름은 늦더니, 이제 가을을 보세요. 더웠다 춥더니 이제 다시 더워졌어. 이건 문제가 있어요. 올해는 아주 힘든 한 해가 될 거예요, 박쉬."-176쪽

나는 쳉겔에서 영어 수입이 아주 중요하다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마을 사람은 벌써 세 개(러시아어를 포함하면 네 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울란바토르까지 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도시에서는 영어를 원활하게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지방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갈 거라면 영어가 중요하겠지만, 대학에 들어갈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180쪽

토야는 몇 달 전에 얼어 죽은 게렐휴의 조카이자 자신의 먼 친척이 되는 남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몽골인은 죽은 자의 이름을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가난한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우리보다 죽음에 익숙할 거라고, 사람이 죽어도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거라고, 죽은 자를 슬퍼하는 건 여유 있는 나라에서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강바타르와 벌러르마의 게르에서 나는 그렇게 깊은 슬픔을 생전 처음 느꼈다.-183쪽

몽골인은 상대방이 술잔을 안 받는 걸 대단한 모욕으로 여겼다. 하지만 외국인에게는 계속 술잔을 부어대는 이곳의 문화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190쪽

여름이 되면 타왕 벅드에 야생화가 만발하며, 목초지마다 물과 풀이 풍성했다. 1년에 3~4개월 동안은 목초지에 풀이 많기 때문에 가축을 거느린 유목민들에게 황금기다. 하지만 가을은 짧고 겨울은 길었다. 목초지는 꽁꽁 얼어붙고 가축은 먹이를 찾을 수 없었다. 거세게 몰아닥친 눈은 커다란 야크까지 빠져서 질식할 정도로 쌓인다. 그래서 '짧은 황금의 계절'이 겨울에게 밀려날 즈음이 되면 유목민들은 왕들의 왕관을 포기한 채 말을 타고 높은 절벽이나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는 통나무집에서 겨울을 보낸다. 그리고 봄이 오면 다시 타왕 벅드로 돌아간다.-204쪽

라디오 방송에 의하면 지금 굉장히 많은 군중이 수흐바토르 중앙 광장으로 몰려나와 이흐 ㅎ ㅗ랄 앞에서 항의하고 있어요. 몽골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곳은 러시아처럼 마피아가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국민은 지금까지 우리 정치인들이 안전하게 일한다고 생각했어요. 초이발산 정권 이후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전혀. 민주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죽은 사람은 물론 감옥에 간 사람조차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이 나라는 자유국가에요. -222쪽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평상시라면 담요를 둘러쓴 채 깊이 잠자고 있을 시간에, 나는 여전히 난로 옆에 앉아있었다. 바로 옆에서는 촛불이 타들어가고 어깨에는 염소가죽으로 만든 델이 걸쳐 있었다. 나는 두 손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손바닥과 손가락을 바라보니, 낯선 기분이 들었다. 피부가 마르고 거칠었다. 손바닥에 딱딱하고 노랗게 굳은살이 박혔고 이리저리 갈라졌다. 손톱은 울퉁불퉁하고 더러웠으며 손가락 끝은 문드러졌다. 내 생전 처음으로 일하는 손을 가져본 것이다.-227쪽

"받으세요, 박쉬, 나는 발라크(물고기)를 먹지 않아요."
쳉겔에서 만난 사람 대부분은 생선을 먹지 않았다. 생선은 보오쯔(양고기 만두)나 염소고기, 또는 쇠고기 대신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음식 가운데 하나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고기 대신 먹는 창피한 음식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강가에서 놀이삼아 낚시하는 아이들을 아주 많이 보았지만, 어느 집을 가든 생선 요리를 대접받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233쪽

이곳에서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몇 가지 질문이 있다. 나이가 몇 살이며, 이름은 무엇이며, 남편은 언제 사망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239쪽

"당신이 사는 나라에도 가축이 있소?"
아팜이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똑같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240쪽

"생 배노, 박쉬. 우리 집에 가서 차를 마셔요. 여기에서 아주 가까워요."
이것이 몽골 방식이다. 모두가 사람을 너무나 친절하게 반긴다. 내가 "챠뜨씅(배가 부르다)."하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241쪽

1990년 말에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선언했어요. 우리는 나자르바에프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자마자, '잘됐다, 이제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가자'고 말했지요.

나자르바에프 대통령과 카자크 정부는 몽골 카자크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면 살 만한 집과 직장을 주고 노인에겐 연금도 주겠다고 홍보했지요.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벌써 몽골 카자크인이 수천 명에 달했고 그들은 묵을 짋과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애를 스고 있었어요. -244쪽

카자흐스탄과 몽골 사이에는 물리적인 국경선이 없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려면 그저 러시아 일부 지역을 지나기만 하면 된다. 유목민들은 국경선에 신경 쓰지 않고 아주 오래전부터 중앙아시아 국경지대를 넘나들었으며, 게르를 세웠다. -245쪽

쳉겔 카자크는 자신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천대를 받고 심지어 쫓겨나기도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러시아 카자크들이 자신들을 이민자로 여긴다는 사실도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곳은 정말로 살기 좋다는 말만 되풀이했다.-249쪽

유목민은 계절의 지속성에 극단적으로 의지하며 살았는데, 겨울이 이렇게 오다가 가고, 그러다가 다시 찾아오는 것은 이들에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지금은 눈과 얼음이 필요한 시기였다.
"지금은 이 스텝지대를 뒤덮을 눈이 필요해요. 가축들이 싹을 모두 갉아먹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지금 가축이 계속 싹을 갉아먹으면 내년 봄에 자라날 풀이 없어질 거예요. 지금 모조리 먹어치우면 스텝지대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거예요. 여름이 되면 다시 자라겠지만 그땐 이미 늦어요."-254쪽

"강물이 얼어붙으면 우리 모두 산으로 가서 가축을 잡아올 거예요. 우리는 언제나 겨울 초입에 가축을 도살한답니다. 여름 내내 풀을 뜯어먹어 살이 통통한데다 날씨도 고기를 냉동하기에 적당하거든요. 겨울과 봄이 지나고 풀이 다시 무성하게 자랄 때까지 우리 모두 고기를 충분히 저장할 수 있어요."
가축을 도살하면 부위대로 나눈 후, 마을 통나무집마다 옆이나 뒤편에 만들어 놓은 오랜 방식의 조그만 저장소에 넣고 얼린다. 이것은 냉장고 역할을 하는데, 여름에 먹고 남은 유제품 역시 이곳에 저장한다. -255쪽

가을이 지나가고 몽골 특유의 앞이 보이지 않는 강풍과 함께 겨울이 몰려왔다. 기온은 곤두박질쳤으며, 얼어붙은 호브드 강에서 물을 길어오기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얼음물은 두 손을 마비시키고, 얼음조각은 물통을 때렸다. 밖에 빨래를 널어도 곧바로 얼어버려, 하루생활이 갑자기 너무 힘들어졌다.-259쪽

아바이는 항상 지시만 내릴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카자크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불만이었다. 이들의 언어는 산사람 특유의 굵고 그윽한 후음이 가득해 정말 듣기가 좋았으며, 구슬프고 애처로운 덤버르 가락은 아무리 가혹한 싸움꾼이라도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슬람 종교는 실용적이고 편안했으며, 사람들도 모두 관대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서 아바이네 집에 들어가면 매번 폭소를 터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힘들고 귀찮은 일은 모두 여자의 몫이었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259쪽

나는 굴짱의 따듯한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양가죽 장갑을 벗어 오른손으로 자물쇠를 잡았다. 그런데 얼어붙은 쇳덩이에 따듯하게 메마른 손이 아교풀처럼 달라붙고 말아, 나는 깜짝 놀랐다.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피부가 천천히 찢겨나가는 걸 느끼며 그냥 손을 잡아당겼다. 피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서 떨어져 나간 가느다란 피부가 쭈그러든 실타래처럼 쇳덩이에 얼어붙었으며, 오른손은 불에 댄 것처럼 콕콕 쑤시고 간지러웠다.-273쪽

1주일이 지나자, 남자 10여 명이 식은 땀으로 뒤범벅 된 말을 탄 채 산에서 양떼와 염소 떼를 몰고 내려왔다. 짧은 낮 시간에 남자들이 가축을 몰고 얼어붙은 호브드 강 빙판을 건너오자, 쳉겔 전역이 죽을 때만 기다리는 가축으로 넘치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에 가축을 모두 도살하기 위해 온 가족과 이웃이 달라붙었다. 그리곤 모두 신선한 고기로 잔치를 벌였다.
...... 암소 두 마리, 양과 염소 열 마리, 낙타 한 마리와 갈기가 무성한 말 두 필을 몰고 우리 하샤로 들어왔다. 낙타만 살려두고 나머지는 모두 도살할 예정이었다. -275쪽

우리가 음식을 다 먹고 손가락을 닦았다. 크아츠가 아들에게 채찍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기름기가 잔뜩 묻어있는 손으로 채찍을 받은 후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가죽에 먹여 부드럽게 만들면서 그는 다른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 마을에서는 무엇이든 버리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유용하게 사용했다. -277쪽

이곳 몽골의 변방에서는 결코 개를 집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물론 번개가 칠 때는 예외였다. 몽골인은 번개에 대해 거의 종교적인 공포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실내에 들어올 때마다 발로 내차고 먹이도 찌꺼기만 주었으나, 번개가 치는 동안에는 겁에 질린 개에게 동정을 베풀기도 했다. -284쪽

강수흐-쇠도끼
산사르후우-우주의 아들
얄타-승리
어피아-약초 이름
어뜨게렐-별빛
부타커즈-낙타 눈알
아마르후우-힘이 매우 강한 소년
쇼뜨락-주먹
쪌빙-무숙자
사스트-독한 냄새
엥흐쟈르갈-커다란 행복
네르구이-이름이 없다
보그-소
제를렉-야만인
엔비쉬-이것이 아니다
바토르-영웅
후우-아들
수흐바토르-도끼 영웅
엥흐바토르-위대한 영웅
나랑체첵-해바라기
뭉흐체첵-은빛 꽃
알탕토올-황금빛 불꽃
게렐휴-빛의 아들
아메르후우-위대한 힘의 아들-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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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칭기스칸 - 유목민에게 배우는 21세기 경영전략 SERI 연구에세이 2
김종래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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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혹독하게 추운 날 성인식을 치른다. 영하 40도,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허허벌판. 두터운 가죽옷을 입고 털모자를 눌러 쓴 몽골 아이 10여 명이 말 위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린다. 신호가 떨어지면 소년들은 말을 내달린다. 왕복 80km에 이르는 눈보라 길의 출발이다. 소년들은 지평선 끝에서 사라졌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지평선 위로 점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눈보라를 뚫고 온 아이들과 말의 모습은 참혹하다. 하지만 소년들의 눈빛만큼은 형형하다. 흘린 땀이 온 몸에 얼음으로 붙어 있으면서도 뜨거운 김을 펄펄 내뿜는다. 말 고삐를 쥐었던 소년들의 손도 얼어 퍼렇게 동상을 입었다.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면 동상 걸린 손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소년들은 돌아와서야 동상 걸린 손을 눈 속에 파묻고 비빈다. 이냉치냉. 동상 든 손은 비로소 다시 피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렇듯 몽골 아이들은 시련의 들녘에서 강인하게 벼려진다. 절벽 아래로 새끼를 떨어뜨려 스스로 올라오는 새끼만 거둬 기르는 사자의 선택에 다름 아니다. 문명의 울타리 밖에서 인간은 스스로 강인해질 수밖에 없다.
-12쪽

매일 아침 아프리카에선 가젤이 눈을 뜬다.
그는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매일 아침 사자 또한 눈을 뜬다.
그 사자는 가장 느리게 달리는 가젤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당신이 사자이건 가젤이건 상관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은 질주해야 한다.

-보스턴 컨설팅의 보고서
-15쪽

유목민은 지금껏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유는 크게 둘이다. 우선, 그간 역사 서술이 기록 중심 사관에 편집증처럼 집착했기 때문이다. 유목민에게 문자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의 문자 의존도는 매우 미약했다. 유목민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정착민 쪽에서 쓰여졌다. 그래서 기록된 것보다 기록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기록된 부분들에도 오해와 곡필이 많았다. 기록하는 측은 이견의 여지 없이 자기들을 ‘문명인’으로 상정한다. ‘야만족’, ‘파괴자’, ‘비(非)문명’ 같은 단어를 붙이면서 기록자들은 유목민의 성격부터 악의적으로 채색했다. 유목민에게 공격-지배 당했던 사건의 기술에는 극도의 피해 의식이 가미됐다. 자기네가 유목민을 공격했던 시기에 관해서는 과도한 우월감을 드러냈다.
-16쪽

유라시아 유목민의 행적은 주로 중국 역사가들의 눈으로 관찰됐다. 그들의 편견은 호칭에서부터 시작한다. 흉노(匈奴)는 시끄러운 종놈, 돌궐(突闕)은 날뛰는 켈트족, 몽고(蒙古)는 아둔한 옛 것...... 명백히 문자의 폭력이다. 한자라는 상형문자가 사람들 마음에 심는 조형의 힘은 알파벳을 비롯한 표음문자와는 판이하게 강력하다. 아메리카를 똑같이 ‘미국’이라 부르더라도, ‘쌀미(米)’로 표기하는 것과 ‘아름다울 미(美)’의 나라라고 쓰는 게 전혀 다르듯.
-17쪽

둘째, 그간 역사가 오직 공간만을 중심에 놓고 관찰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출현 이후 19만 년 동안 채집이나 수렵 생활을 하다 지금부터 1만 년 전에 하천을 중심으로 농업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경제가 본격적으로 발전되고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6,000년 전,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황하 유역에서 도시 문명이 일어났다. 이후 산업혁명을 거쳐 지식혁명까지 인류는 특정 장소들을 중심으로 문명을 일궈왔다. 처음에는 하천 주변에서 인류 문명이 발달하다 지중해, 카스피해 같은 내해와 연안으로 옮겨갔고, 300년 전부터 대서양문명 시대가 계속돼온다는 식이다. 이런 역사 관찰방식은 거의 거부감 없이 받아 들여지고 있다.
-18쪽

그러나 이는 사실일지언정 진실은 아니다. 인류가 자랑해온 4대 문명 발상지는 다시 표현하면 4대 정착문명 발상지라 해야 옳다. 4대 정착문명 거점들은 자연환경과 역사 경험에 따라 매우 다른 개성들을 지니기도 하지만 상당히 공통된 특성도 보인다. 예를 들어 하나 같이 물가에서 출현했고, 식물을 중심에 두고 사고했으며, 오직 씨를 뿌려 거두기를 삶의 기본이자 세상의 표본적 질서로 여겼다. 그렇게 성을 쌓고 울타리를 늘리며 관료제를 발달시켰으며, 공간 이동을 꺼렸다.
농경 정착민들의 우선 관심 대상은 경작할 토지와 비를 내려 줄 하늘이다. 옆을 볼 필요 없이, 위(하늘)와 아래(땅)를 봐야 한다. 정착민들은 한 자리에 붙박혀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한다. 이웃 사람, 이웃 마을, 이웃 나라와 교류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폐쇄적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소유 의식이 강해지고 관료제가 발달한다. 천자와 왕을 대신하는 관리가 나서서 사람들 사이 분쟁을 해결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행정을 편다. 정착사회는 이처럼 수직 마인드를 기초로 삼게 된다. 잘만 운영하면 모든 것을 평생 보장하는 종신형 사회이자, 식물형 사회이며, 수직사회다.-18쪽

그러나 그 사회가 자기 정화력과 절제력을 잃어버릴 경우 온갖 폐해를 드러낸다. 제도피로 현상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계급과 계층들이 먹이 사슬처럼 생겨난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군림하면서 아래를 착취하려 든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위에 아첨하면서 자기보다 더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군림하고 착취하려 한다. 그러면서 부정과 부패가 창궐한다.

그런 곳에서는 남에 대한 봉사, 효율, 생산성, 투명성 따위가 구호로만 떠돌아 다닌다. 수직사회에서 창의력 약화는 필연이다. 대신 기억력이 존중되고 발달한다. 모든 경쟁도 기억력 겨루기가 핵심이다. 기억력을 중시하는 사회는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과거를 산다.
-19쪽

그에 반해, 유목 이동민들은 항상 옆을 바라 봐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생존하려면 싱싱한 풀이 널린 광활한 초지를 끝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 그래서 더 뛰어난 이동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더 좋은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 그들에겐 고향이 없다. 한번 떠나면 그만이다. 초원에는 미리 정해진 주인도 없다. 실력으로만 주인 자리를 겨룰 뿐이다. 기회는 항상 열려 있다.
살기 위해 위가 아니라 옆을 봐야 하는 수평 마인드의 사회, 살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해야 하는 사회가 유목사회다. 그 속에서 단 하루도 현실에 안주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끝까지 승부 근성을 놓지 않고 도전해야 한다. 그곳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이 소중하다. 민족이, 종교가, 국적이 다르다는 것도 무시해 버려야 한다. 아니 다른 사람일수록 더 끌어들여야 한다. 사방이 트인 초원에서는 동지가 많아야 살아남고 적이 많으면 죽게 된다.
-20쪽

그런 사회에선 완전 개방이 최상 가치로 통한다. 모든 개인의 개방화는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그렇게 해서 그 사회는 출신이나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능력에 따라 무한 가능성을 보장하는 사회가 된다. 그 속에선 효율과 정보가 무척 중요하다. 이동과 효율과 정보의 개념 속에서 시스템이 태어난다. 자리는 착취와 군림 수단이 아니라 역할과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다. 최고 자리에 앉는 사람은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리더다.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는 것은 씨족이나 부족의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다.
-20쪽

아침이면 달려야 하는 아프리카 사자와 가젤처럼, 인류에게 질주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유목민들의 생존을 위한 질주가, 21세기 초입에선 사람들의 일상이 됐다. 이제, 이동적인 관점이 모든 인간의 잠재적 자세이며, 인간 존재의 기본 범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22쪽

겔에서 잠을 자다 소변이 급해졌다. 하지만 겔 바깥을 사나운 개가 지키고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주인은 두 뼘도 안 되는 끈 하나를 챙겨 개를 불렀다. 정착민의 사고 속에서 개를 묶는 방법은 목에 올가미를 씌워 어느 한 곳에 구속시키는 것쯤이 유일하다. 그 유목민은 한쪽 앞다리의 무릎을 접더니 끈으로 칭칭 감아 개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놓았다. 벙착민의 방식이 개의 활동 공간을 제한해 구속하는 것이라면, 유목민의 것은 시간(개의 속도)을 구속해 개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이었다.
-23쪽

정착문명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으며 제 이익과 기득권 보호에 혈안이 돼있을 때, 유목 이동문명 사람들은 길을 닦았다. 만리장성보다 더 소중한 인류 유산으로 일컬어지는 실크로드다.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 복판 초원 유목지대에 형성됐다. 유목 이동문명 세계의 인간들이 마침내 동․서양의 소통과 교류를 실현해 낸 것이다.
-24쪽

울란바토르 근교에는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이 있다. 당시 유목민이 겪었던 눈물 겨운 사연들을 구구절절 기록하면서, 장군의 유훈을 새겨 놓았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 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닫힌 사회는 망하고 열린 사회만이 영원하리라는 이 말은 글로벌 인터네티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매서운 교훈이 될 것이다.
-27쪽

칭기스칸의 선대 유목민들이 인류사에 일으킨 첫 파란은 기원전 1,400년쯤에 등장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은나라가 서고, 지중해에선 철기 문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시 국가가 발생할 즈음, 역사 바깥에 있던 유목민들이 갑자기 나타나 정착 세계를 정복해 나간다. 함무라비 왕조를 무너뜨린 히타이트인, 인더스강 유역을 침범한 아리아인, 이집트를 지배한 힉소스인이 그들이다. 그들에겐 ‘기껏 일궈놓은 고대 문명을 짓밟는 야만인’이라는 오명이 씌워졌다. 하지만 유목민들의 ‘파괴’는 새로운 문명 탄생을 불렀다.

-35쪽

기원전 8세기, 그들은 역사의 표면에 다시 얼굴을 내민다. 흑해 북동부 초원에 기마 문명권 사람들의 말발굽 소리가 진동하면서 그곳에 살던 키메르인을 쫓아 냈다. 사람들은 그들을 ‘스키트’ 또는 ‘사카’라고 불렀다. 그 후 500년 넘도록 그곳 러시아 초원을 지배할 주인공 ‘스키타이’였다.
헤로도투스는 저서 <역사>에서 스키타이를 매우 잔인한 종족으로 그리고 있다. 유럽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악마 그 자체였다.
-36쪽

서쪽에 스키타이가 있었다면 동쪽엔 흉노가 있었다. 동방 유목 국가의 원형을 만든 흉노는 기원전 9세기 이전에 험윤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역사에 등장한다. 처음에 그들은 변방 약탈자에 불과했다.
기원전 3세기 말, 시도 때도 없는 돌풍 같던 흉노가 태풍으로 돌변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장군 몽염을 보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을 건국한 고조(유방)는 흉노를 토벌하려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 그러나 백등산에서 흉노의 칸 묵특선우에게 포위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백등산 전투에서 참패하고 어렵게 도망한 고조는 황실 여자들과 막대한 공물을 주고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백등산 전투는 통일 유목국가와 통일 농업국가 사이의 싸움이었다. 국가 창시자끼리 직접 맞붙은, 세계사에 희귀한 전쟁이었다. 결말은 유목국가의 승리였다. 말 타기와 활 쏘기에 능한 기병들 앞에서 보병의 힘은 초라했다.
-37쪽

흉노는 400여 년을 존속한다. 그리고 내부 분열 때문에 해체된다. 기원전 43년, 선우(왕) 자리를 놓고 호한야와 질지가 싸웠다. 전투는 한의 도움을 얻은 호한야의 승리로 끝났다. 패배한 질지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들이 400년 뒤 모습을 다시 드러냈을 때, 서양인들은 그들을 훈족이라고 불렀다.

훈족은 서기 5세기 다뉴브강 동쪽, 오늘날 헝가리(Hub+Gary, 훈족+땅을 뜻하는 합성어, 즉 훈족의 나라라는 뜻에서 파생된 이름)땅에 근거지를 둔다. 당대 유럽에서 그들은 공포의 화신이 된다. 유럽인들은 ‘훈족이 문 앞에 와 있다’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들에게 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의 채찍’이었다. 그 중심에 아틸라가 있었다. 아틸라는 지금도 우리의 환상을 자극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다. 그의 전설은 <니벨룽겐의 노래>나 베르디의 오페라 <아틸라>, 프란츠 리스트의 오페라 <훈족의 전쟁>에 남아 전해 온다.
-38쪽

아틸라가 훈족을 이끈 세월은 8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다뉴브강을 건너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육박하면서 동로마인들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다. 이어 세계 15대 전투에 꼽히는 카탈루니아 전투에서 로마인과 치열하게 싸웠다. 극적인 행동, 검소한 생활, 뛰어난 지략과 탁월한 전술 구사, 무서운 인내심과 치밀한 외교술, 그의 카리스마는 유목민을 단순무지한 야만인으로 여겼던 유럽인의 편견을 말끔히 씻어냈다.

-39쪽

흉노가 사라진 뒤 몽골 고원을 다시 통일한 세력은 돌궐이었다. 6세기 초 돌궐은 유연에 예속된 부족이었다. 그들은 알타이 지역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탁월한 리더 부민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부민칸은 유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패배한 유연의 지배자 아나괴는 자살했다. 몽골 고원은 돌궐족의 무대가 됐다.
그러나 부민칸이 제국을 세운 이듬해 급사하자, 돌궐은 동생 이스테미와 아들 무한의 세력으로 갈라졌다. 당 태종 때 돌궐은 붕괴된다. 정착국가가 강성해지면 주변 유목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일종의 시소 효과다. 그러나 돌궐의 멸망 원인이 그것만은 아니었다. 유목은 유목의 정신을 잃으면 멸망한다. 돌궐을 다시 일으켰던 인물, 톤유쿠크 장군과 빌게칸의 비문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39쪽

비행기뿐이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지상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마다 그 이름을 붙여 둔다. 울란바토르에 도착하면 칭기스칸 호텔에 묵으며 칭기스칸 보드카를 마신다. 식당에서 밥값을 치르려고 지폐를 꺼내면 거기에도 칭기스칸이 있다. 그는 몽골인들이 하늘의 별처럼 숭모하는 영웅이다.

-41쪽

되찾은 아내 버르테는 이미 만삭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적장의 아들이 조치. 칭기스칸은‘나그네’ 또는 '손님’이라는 뜻으로 조치라 이름 붙이면서도, 그를 기꺼이 장남으로 받아 들인다. 다만 제국을 이끌고 나가기 위해 후계구도에서 장남을 배제시킨다. 조치와 그 후손들은 새로운 영지 개척에 나서 유럽을 수중에 넣는다. 조치의 아들 바투칸이 유럽을 정벌해 세운 국가가 킵차크칸국. 17세기까지 명맥을 이어가는 킵차크칸국 말고도 칭기스칸의 차남 차가타이가 세운 차가타이칸국, 페르시아를 정복해 세운 손자 훌레구의 일칸국,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의 본토까지 그의 제국은 전 지구적이었다. 1206년 부족을 통일하고 칸에 오른 이후, 20년에 걸쳐 칭기스칸은 서하와 서요를 정복하고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며, 페르시아에 있는 콰레즘 제국, 그리고 유럽과 러시아 일대까지를 점령했다.
몽골 고원에 흩어져 살던 수많은 부족, 아니 서로 약탈하고 약탈당하면서 잠시도 안정을 찾지 못하던 고원의 부족들을 통일시킨 칭기스칸! 당시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마차로 달리면 2년이 걸렸다니, 칭기스칸은 거의 말 달리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세계를 정복한 셈-45쪽

흔히 칭기스칸 요리로 알려진 샤브샤브는 몽골의 것이거나 칭기스칸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칭기스칸 요리는 소화(昭和)시대 일본인들이 고안해 냈다. 몽골에는 비슷한 음식조차 없다. 중국 베이징에는 산양 고기로 만드는 샤브샤브 요리가 있다. 독특하게 생긴 냄비에 산양고기를 끓여 장국에 찍어 먹는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양고기를 끓일 경우 별도 장국 없이 국물째 먹는다. 그들에게 샤브샤브 같은 요리법은 없다.
그런데도 왜 일본산 요리의 이름이 칭기스칸일까. 조심스럽게 내놓고 싶은 추측은 고기를 얇게 썰어 수없이 칼질해 놓은 게 마치 칭기스칸 같은 잔인함을 연상시켰던 탓이 아닐지.
-47쪽

적의 양자가 됐다가, 칭기스칸의 4준마가 돼 천호장까지 올라간 풍운아 보로콜은 세계 제국의 문턱 앞에서 주인의 곁을 떠나야 했다. 그의 딸 우시진은 원나라를 세운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의 아내가 됐다.

-57쪽

콰레즘의 수도 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도시)는 1년 안에는 누구도 함락할 수 없다던 거대 요새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의 푸른 군대는 단 사흘 만에 끝장내버렸다. 콰레즘의 지배자, 술탄 무하마드는 북으로 달아났다. 제베는 칭기스칸의 명을 받아 수베에테이와 함께 무하마드를 추격했다.
추격전은 1만 km 가까이 계속됐다. 지구 둘레가 4만 km이니 1/4바퀴를 돈 셈이다. 무하마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카스피해 작은 섬으로 숨어들어 걸칠 옷도 없이 죽는다. 이 소름끼치는 추격전에 온 유럽이 경악했다. 제베는 칭기스칸에게 보고하려고 무하마드의 목을 들고 초원으로 귀환하던 1224년, 삶을 마쳤다.
-59쪽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은, 패퇴했거나 항복한 부족으로부터 우선 가축부터 빼앗았다. 경우에 따라 여자까지 취했다. 나쁘게 말해 약탈이고 좋게 얘기해 전리품을 챙기는 셈이다. 몽골인들에겐 그 전리품을 누가 얼마나 차지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칭기스칸이 전리품 획득과 배분에서 새로운 조치를 내리기 전까지는 일종의 선착순 약탈방식이 지배했다. 적이 달아난 뒤 적진에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가축이든 여자든 취했다. 개인적 약탈이었던 셈이다. 이 방식에선 맨 앞에서 싸우는 사람만 득을 볼 수밖에 없다. 뒤에 서거나 간접적으로 전투를 도운 사람, 다른 사정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돌아오는 게 없다.
칭기스칸은 이런 불공평을 해소하고, 조직 전체 전투력과 소속감도 높일 목적으로 혁신적 조치를 단행한다. 전리품을 공동 몫으로 두고 누가 얼마만큼 공을 세웠느냐에 따라 나눠 갖는 공동 분배제였다. 이 방식에선 선봉에 선 사람은 싸운만큼 자기 몫을 차지하고, 뒤에서 싸움을 도운 사람에게도 몫이 돌아간다.
-63쪽

원대한 비전 제시와 개별적 약탈 금지로 칭기스칸의 병사들은 성취욕에 불탔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기여한 만큼 대가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믿음도 갖게 됐다. 이는 숫자가 적은 칭기스칸 군대가 엄청나게 많은 상대방을 제압한 비결이기도 하다.
몽골 사회에는 지금도 이 전통이 남아 있다. 몽골에선 매년 7월 11일부터 13일까지 체력단련대회를 겸한 나담 축제가 열린다. 몽골 씨름과 활쏘기, 말타기 경주가 열리는데, 축제의 꽃은 역시 말타기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경주에서 우승하면 기수보다 말 조련사에게 더 큰 포상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공을 잘 아는 탓이다. 더욱 놀라운 건 우승마에게도 똑같은 포상(일등표)을 한다는 점. 동물에게도 이익이 공평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유목민적 발상이다.
-63쪽

칭기스칸은 수많은 기득권층의 반대를 감내하면서도 구성원 전체에게 평등한 분배를 약속했다. 전쟁에 참여한 병사 모두가 자기 자신의 일로 여길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 그리고 이 힘은 전 지구적 영토 정벌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800년 전의 신경영, 이것은 칭기스칸 제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성공 비결이었다.

-66쪽

물리학에 E=mc2이라는 운동에너지 공식이 있다. 이 공식을 전쟁에 대입해보자. 에너지(E)는 군대 전투력, 질량(M)은 병력 규모나 투입된 예산, 속도(C)는 기동성쯤이 될 것이다. 전투력은 병력 규모나 투입된 예산에 정비례하지만 속도에는 제곱 비례한다. 따라서 몽골처럼 적은 병력으로 대병력을 무찌르는 지름길은 기동성을 높이는 것이다.
수적 열세에서 세계 정복에 나선 몽골 유목민들은 사람 수를 당장 늘릴 수는 없지만 속도는 늘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축만 해도 오리나 돼지는 소나 말, 양과 달리 사람 손길이 많이 가는 동물들이다. 그래서 그런 동물들은 아예 기르지 않았다. 몸에도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다녔다.
그들은 특히 말의 효용성에 주목했다. 유목민들은 ‘말의 가축화’를 이뤄냈다. 기차나 컴퓨터 발명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인류사에 획기적인 성과요 사건이다. 그들은 가축으로 키운 말을 이용해 보병과 보급선을 두지 않는 간편한 기병체제를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놀라운 행군 속도와 신속한 명령체계를 창출해 농경정착문명의 군대를 제압했다.
-67쪽

유목군대는 군사 장비도 경량화해 속도를 늘렸다. 당시 유럽 기사단 갑옷과 전투 무기의 무게는 70kg이었지만 유목민 군장은 7kg밖에 되지 않았다. 몽골 군대는 갑옷 대신, 옷 속에 얇은 철사로 된 스프링을 넣고 다녔다. 몸이 가벼울 뿐만 아니라 화살도 웬만큼 튕겨내는 갑옷 효과를 냈다.
활과 화살도 ‘신소재’로 만들어 가볍되 멀리 날아가도록 고안해 냈다. 군량 무게를 줄이는 것도 행군 속도를 높이는 방법. 요즘 인스턴트 음식의 시초 형태로 전투 식량을 마련해 군수보급품 무게를 가볍헤 했다. 보르츠(육포)가 대표적인 예다. 소 한 마리 분의 고기를 말린 보르츠는 소 방광에 모두 들어가 운반하기 간편하고 가벼우면서도, 병사 한 명의 1년 식량으로 너끈했다.
몽골군대는 원정 전쟁을 치르려면 군대 이동은 물론, 군수 물자, 병참, 식량을 운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들은 전장까지 동물을 끌고 다니면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정착민들처럼 지켜야 할 근거지가 그들에겐 없었기 때문. 여자나 아이들은 병사들의 전선 후방에서 가축을 돌보며 방목과 군량 지원을 동시에 해결했다.
-68쪽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정착민과 현지 조달도 불사하는 유목민의 차이. 이는 근거지가 필요한 정착민과 살기 위해 움직이고 머무는 곳을 근거이자 고향으로 여기는 유목민의 마인드 차이에서 비롯한다.

-69쪽

칭기스칸이 승리할 수 있었던 또 하나 이유는 정보 마인드에 있다. 유목민들에게 정보는 생존을 위한 필수 과목이었다. 초원지대엔 험준한 산이 없다. 주로 호수와 강, 들판이라 천지사방이 평평하다. 이런 자연조건에선 언제 적이 들이칠지, 내가 어디에 숨어야 할이지 항상 경계하게 마련이다. 또 주변 사람들과는 많은 이야기와 의견을 나누게 된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평선 너머 초원에는 적이 있을까 동지가 있을까. 가축들을 배불리 먹일 초지가 어디에 있을까. 바깥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유목민들은 끊임 없이 뭔가를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의 인사말은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라 "당신이 온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였다. 주변 사람과 정보를 교환하고, 정보를 많이 수집하는 것이 생존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몽골인 시력은 평균 4.0 이상이라고들 한다. 몇 십 리 밖에서도 먹을 것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73쪽

유목민에게 외지인은 정보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외지인을 환대한다. 반면 정착민들은 자기 몫을 지키려고 외지인을 배척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정보는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칭기스칸의 주요 정보원들은 중앙아시아와 중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대상(隊商)단이었다. 대상들은 실크로드를 대동맥으로 삼아 곳곳을 떠돌아 다니는 피 같은 존재였다. 고원의 칭기스칸은 주로 아라비아 상인들인 이들을 통해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를 듣고 참고했다.
정보화 마인드로 무장한 칭기스칸 군대는 첩보전과 심리전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어떤 나라를 공격하기 앞서 그 나라에 고나한 정보부터 속속들이 수집 파악했다. 공격해 들어갈 때엔 5천 명이 나서도 5만 명이 공격하는 것처럼 루머를 퍼뜨렸다. 적군은 싸우기도 전에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74쪽

칭기스칸 군대의 특징은 점령지의 종교나 문화 부문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하층을 그대로 둔 채, 상층부만 부수는 데 주력했다. 군대 조직도 천호제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피라미드 형태를 갖췄다. 그래서 칭기스칸이 손을 한 번 들면 그의 군대는 10만이 됐다가, 한 번 더 들면 20만, 30만, 40만으로 얼마든지 변신했다. 군대 숫자가 고무줄처럼 신축적일 수 있는 비결은 어떤 병사를 충원하더라도 충분히 전술기량을 펼치는 호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A가 하는 일을 B가 할 수 있고, 활을 쏘다가도 칼을 들고 진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착문명 군대는 활 쏘는 군사, 창 든 군사, 말 타고 진격하는 군사 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반면 칭기스칸 군대는 모든 군사가 기본 전술기능을 종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더욱 놀랍게도 칭기스칸 군대의 호환성은 전쟁에서 이긴 뒤 포로들을 흡수 편입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칭기스칸은 적이든 아니든 쓸모있는 모든 사람을 확보하려 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기술자들을 따로 골라내고 부족한 군사들을 현지에서 충원하는 방식으로 항상 인력 풀을 운용하는 놀라운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78쪽

칭기스칸 군대는 정규전, 게릴라전을 구분하지 않았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반상의 돌들이 저마다 최선의 수를 이어낸 끝에야 승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바둑은 가장 유목-이동 문명적인 게임이다. 장기나 서양 체스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를테면 장기의 말들은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다. 포, 상, 마, 차, 졸의 기성 역할이나 정체성은 내내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각기 말들이 갈 수 있는 길과 갈 수 없는 길까지 미리 정해져 있다. 농경-정착 문명의 신분 위계 질서를 닮았다. 바둑에선 모든 돌이 똑같고 평등하다. 더욱 의미심장하게도 그 평등한 돌들은 혼자만으로 생존할 수가 없고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서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상생으로 전체가 사는 방식이다. 기존 돌들이 형성하는 어떤 관계 옆에 새 돌이 놓이면서 다시 전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게다가 놓이는 위치에 따라 그 역할도 시시각각 달라진다. 전형적인 유목-이동성이다.
-80쪽

바둑식 사고를 하는 몽골 군대는 체스식 사고를 하는 유럽 군대를 격파했다. 유럽군은 체스를 두듯 진을 짜고 대항했지만 몽골 기마병들은 정렬된 진지 없이 변화무쌍한 공격으로 상대를 유린했다.

카르피니 출신 수도사가 쓴 <카르피니의 몽골여행기>. 이 수도사는 칭기스칸 제국의 3대 칸인 구육칸의 즉위식을 참관하러 서양에서 파견됐었다.(카르피니는 원래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역 명이다.)
-81쪽

칭기스칸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절대 죽이지 않는 적진 사람들은 기술자들. 신기술을 지닌 자만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테크노 헤게모니, 일종의 기술 패권주의다. 전쟁은 목청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기술로 한다.
유목민들의 전투 기술 개발이 칭기스칸 시절에만 있었던 건 물론 아니다. 충격적 신무기를 대대적으로 세상에 선보인 것은 로마를 괴롭힌 대선배 훈족이었다. 훈족이 유럽에 선보인 무기는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1. 안장(버팀목이 없는 둔중한 로마 기병들은 전투 중에 균형을 잃고 낙마하기 일쑤)
2. 등자(등자가 있으면 그걸로 발을 디디고 무게 중심이 아래로 내려가 고삐를 쥘 필요가 없다. 마상 쇼가 가능한 것도 등자 덕분. 앞, 뒤는 물론 옆으로, 밑으로도 탈 수 있다. 그러나 등자 없이 말을 탄 사람은 중심을 잡느라 고삐를 단단히 쥐어야 한다.)
3. 새로운 활
4. 삼각 철 화살(손잡이에 특별한 구멍이 뚫려 있어 날아가는 동안 공중에서 여러 소리를 낸다. 이 소름 끼치는 소리는 전투 중 유럽 병사들을 공황상태에 빠뜨리곤 했다. 파괴력 또한 치명적. 60미터 떨어진 목표물도 명중시킬만큼 고성능-86쪽

칭기스칸 군대의 칼은 직선형이 아니라 반달형. 반듯한 직선형 칼은 사람을 찌르거나 베는 수밖에 없으나 반달칼은 말이 달리는 속도에 얹어 살짝만 그어도 엄청난 파괴력을 낸다. 아랍인의 발명품을 칭기스칸 군대가 실전에 대량으로 도입해 효과를 거둔 것.
-86쪽

칭기스칸은 자기를 부를 때 칭기스칸이라 하지 말고 이름, 즉 테무친이라고 부르라 했다. 그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싫어했다. 리더와 구성원 관계에서도 공평을 추구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그것을 지켰다. 심지어 정복한 민족과 정복당한 민족 간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다. 페르시아 지방에서 빚을 많이 진 몽골병사가 아랍인의 노예 생활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복지에서 승자가 노예가 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칭기스칸은 자신부터 검소하게 살았다. 부하들과 똑같이 입고 먹었으며 자기 것을 부하들과 공유했다.
칭기스칸이 추진한 여러 개혁들은 당시 몽골 기득권 세력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오갈 데 없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약속했다. 그들 또한 칭기스칸의 미래 청사진을 지지했다. 그래서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91쪽

칭기스칸은 인치가 아니라 법치의 원리를 세운다. 제국 헌법이라 할 대자사크를 만든다. 몽골 최고(最古) 성문법전이다. 대자사크는 칭기스칸 제국이 출범한 1206년 코릴타의 승인을 거쳐 성립됐다. 대자사크의 특징은 최소로 정해 놓고 최대로 지켜야 하는 데 있다. 규칙은 최소화하되 어길 경우 최대한 엄하게 처벌하도록 해 놓았다. 칭기스칸은 단 36개 조항에 불과한 법으로 대제국을 무리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 인간사의 세세한 항목까지를 모조리 조문화하고도 지켜지는 것은 최소한에 그치는 우리 법 현실과 비교된다.

-95쪽

대자사크 제1조. 간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칭기스칸은 공동체의 내적 결속을 이완시키는 행위가 가장 큰 범죄라고 생각했다. 유목민은 고립되면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신뢰의 공동체가 모든 것의 선행조건이다. 간통은 융합집단의 내적 연대를 파괴한다. 부부로 이뤄진 가족 가치가 무너지면 그 사회가 무너진다는 걸 칭기스칸은 알았다. 그만큼 남녀 간의 신의,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칭기스칸이 적장의 자식을 잉태한 아내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 들였다는 사실. 아내의 잉태는 간통이 아니라 강간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 약속의 파기는 중형에 처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저질러진 실수나 잘못은 간단하게 용서된다. 유목민 관습인 형사취수도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남자를 잃은 여인네들을 살리는 방법이었던 것.
-96쪽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칭기스칸은 대자사크 외에도 수많은 제도 개혁에 나선다. 그 중 하나가 개인의 능력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사회 행정조직 천호제이다. 천호제를 통해 몽골인들은 노예도 능력이 있으면 리더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몽골 사회는 씨족 사회로 편제된 봉건사회였다. 김씨는 김씨끼리, 이씨는 이씨끼리 살았다. 칭기스칸은 씨족사회를 10진법으로 와해했다. 씨족과 관계 없이 가까운 10가구가 모여 살고, 다시 100가구, 1,000가구, 1만 가구 단위로 모여 살게 했다. 지연과 혈연, 학연은 무시됐다. 각 단위 조직의 리더, 즉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은 조직원들 스스로 뽑도록 했다. 그리고 리더의 능력이 부족하면 조직원들 스스로 결정해 교체할 수 있게 했다.
-109쪽

천호제를 기반으로 조직한 군대는 그 자체사 사회이자 국가였다. 군사조직 개편을 넘어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치, 군사, 사회의 종합 통치 시스템이자 총력 동원체제였다. 기득권 세력이던 씨족장과 부족장들 사이에선 원성이 자자했다. 반면 일반 백성과 병사들은 대환영이었다.
-110쪽

칭기스칸 제국의 성격 중 또 하나의 핵심은 합의제 사회였다는 것.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칸의 천막(겔)이 거대한 도시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막 한 가운데에 칸이 앉았고, 옆으로 참모와 아내들까지 함께 자리해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이는 칭기스칸에게 ‘독대(獨對)’가 없었음을 말한다. 독대가 없는 사회는 야합이 없다. 칭기스칸은 모든 문제를 독단 아닌 합의에 따라 처리했고, 이를 제도화했다. 특히 전쟁이나 후계구도 같은 중대 정책은 유력 지도자 회이에서 통과된 뒤에야 집행했다. 이 회의가 코릴타다. 신라 화백제, 고구려 합좌제, 백제 정사암과 비슷하고, 지금으로 치면 제국의회라 할 수 있다.
-111쪽

코릴타에는 국가 원로와 칭기스칸 가문인 이른바 ‘황금씨족’ 그리고 천호장들이 구성원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몇 달 동안씩 모여 회의를 했다. 코릴타의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칭기스칸이 사망한 뒤 곧바로 증명된다. 칭기스칸은 죽기 직전 셋째 아들 어거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는 아들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기고 있다.
‘차가타이(차남)는 군대를 아끼지만 교만하고 호전적이다. 톨로이(4남)는 훌륭한 전사지만 인색하고 잔인하다. 어거데이(3남)는 어릴 때부터 남에게 잘 베풀고 도량이 넓다. 누구든 부귀를 찾으려면 어거데이에게 가라.’
칭기스칸은 아들들의 시대가 전쟁 아닌 제국 경영의 시대가 되리라 예상했다. 그런 시대에선 지도자가 덕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어거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하지만 어거데이가 칸에 즉위하기까지는 2년 반이나 걸렸다. 코릴타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거데이칸이 사망한 뒤 제국의 3대 칸인 구육칸은 무려 5년에 걸친 코릴타를 거쳐 칸이 된다. 이 또한 코릴타 구성원 전원의 합의와 동의가 이뤄지지 않아서였다. -112쪽

여기서 또 하나 놀라운 사실! 칸이 없는 상황이 2년, 5년씩 이어지는데도 제국은 분열되기는커녕 더 발전했다. 모든 제도도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끊임 없이 전쟁을 치르는 국가가 최고 지도자를 두지 않아 권력 공백이 지속됐다니. 몽골 유목제국의 시스템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다. 이는 몽골제국이 인치국가가 아니라 법치국가, 시스템국가였음을 뜻한다.

-113쪽

칭기스칸 제국에는 정보와 기동성을 상징하는 역참제가 있었다. 당시 몽골 유목민들은 말(馬)을 통한 정보 전달시스템을 구축한다. ‘800년 전 인터넷’이라 할 역참제다. 역참제는 지금으로 치면 정보 인프라이자, 물류 시스템이며, 군사 고속도로라 할 수 있다. 역참의 형태는 촘촘한 거미줄 모양 그물을 연상하면 된다. 수도를 중심으로 각 지방으로 뻗어나가는 주요 도로에 40~50km마다 역참이 설치됐다. 일종의 말 정거장이다. 그리고 그 사이 5km마다에 칸의 소식을 전달하는 파발이 살았다. 파발들은 방울을 울리며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5km만 내달려,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다른 파발에세 서장을 건넸다. 이리하면 한 달 걸릴 지방의 보고라도 1주일이면 전달된다.
역참망을 달린 것은 파발들만이 아니었다. 군대나 외교관도 역참을 따라 이동했다. 물자까지 달리는 수송로이기도 했다.
-114쪽

역참제는 프로토콜 방식, 이른바 릴레이 전달 방식이다. 정보를 말에 싣고 달리는 전달자는, 최종 전달지가 1만 km 떨어져 있다 해도, 다음 역까지만 전달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각 전달자는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다. 수 천 개 역이 점점이 흩어져 있어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전달 경로를 바꿀 수도 있다. 최종 수신자가 이동 중일 땐 그 전달 경로 역시 이동한다.
-115쪽

제국 성립 후 170여 년, 칭기스칸 사후 150여 년 만에 몽골제국은 몰락했다. 그러나 일반국가의 흥망성쇠를 논할 때 쓰는 말뜻 그대로의 멸망은 아니었다. 칭기스칸의 나라는 멸망한 적이 없다. 요, 금, 남송과 달리 원제국이 쇠퇴한 뒤에도 왕조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그들은 점령지 중원에서 물러나 카라코롬으로 철수했을 뿐이다. 그들이 출발했던 곳, 양치고 말 기르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줄곧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몽골제국은 많은 후계 국가들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무굴제국이다. 무굴은 힌두어로 몽골을 뜻한다. 타지마할 궁전도 몽골인들이 세웠다. 무굴제국은 1562년 유목민인 티무르의 손자 바베르가 인도에 세운 나라로, 1858년까지 계속됐다. 오스만 투르크제국 또한 몽골의 제국 성격을 이어 받은 후계국가로 꼽힌다. 킵차크칸국의 한 갈래인 크림칸국은 1783년까지 계속됐다.
-118쪽

몽골제국이 쇠퇴한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소모적인 후계자 경쟁이었다. 유목 기마민족은 예외 없이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다. 권력 중심부가 흔들리면 해체 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원나라를 비롯한 몽골 칸국들 역시 계승 분쟁에 휘말려 들었고, 이는 결국 제국을 분열시키는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
테크노 헤게모니의 상실도 한 이유가 됐다. 그 옛날 총은 칼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것은 불편하고 시끄럽고 무거운 무기였다. 머스킷이 그랬다. 머스킷이란 대체로 구식 소총을 가리킨다. 지금처럼 탄피와 탄두가 결합된 실탄을 총구 후방으로 장전하는 게 아니라, 총구를 통해 화약 가루와 납구슬 탄환을 쑤셔 넣고, 총구 후방의 점화 화약접시에 불을 붙여 총탄을 발사한다.
-119쪽

머스킷의 기원은 대포다. 인간은 대포를 먼저 발명했고, 이를 좀 더 줄여 손에 들고 쏠 수 있게 만든 게 총이다. 쇠로 만든 통에 화약과 동그란 탄환을 밀어 넣고 불을 붙여 발사하는 대포 방식을 그대로 총에 적용했다. 모양도 총이라기보다 휴대용 축소판 대포에 가까웠다. 그래서 핸드 캐넌, 즉 손 대포라고도 불렸다. 머스킷은 이 핸드 캐넌이 진화하고 진화한 끝에 16세기쯤 등장했다. 초기 형태는 불을 붙여 심지를 화약접시에 닿게 해 발사하는 화승총이었다. 화약과 총알을 총구 쪽으로부터 장전한 뒤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한다. 방아쇠를 당기면 불 붙은 심지가 총구 후방의 화약 접시로 내려가 닿으면서 점화용 화약을 터뜨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총열 후방 안쪽에 쑤셔 뒀던 추진용 화약이 터지면서 탄환이 발사된다.
그러나 화승총은 현대식 총과 비교해 보면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했고 성능도 보잘 것 없었다. 150cm나 되는 긴 총신 끝에 화약과 탄환을 넣고 불을 붙여 발사하는 복잡한 사용법 탓에 2분에 한 발 쏘기가 고작. 그나마 비라도 오면 심지가 물에 젖어 제대로 발사할 수 없었다.
-120쪽

알렉상드르 뒤마 소설 ‘삼총사’. 원제 ‘Three Musketeers'는 세 명의 머스킷 소총수라는 뜻. 그러나 소설 어디서도 삼총사들이 머스킷을 들고 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삼총사에서도 달타냥이 임금을 호위하는 정식 총사로 임명되는 마지막 대목에야 머스킷 총이 등장할 정도. 이는 당시 총이 실용 무기라기보다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 하사하는 일종의 상징물이었음을 보여준다.
-120쪽

초기의 총이 이처럼 우스꽝스럽긴 했어도, 총의 발명이야말로 몽골제국의 퇴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머스킷이 출현하면서 유목 군대는 스피드를 놓쳐버렸다. 유럽인들은 이 신무기 덕분에 몽골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동성의 근원인 말이 신무기의 총알에 맞아 고꾸라진 탓이 아니다. 말들은 처음 듣는 총소리에 놀라 겁을 집어먹고는 병사들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도망치거나 대오를 흐트러뜨렸다.

-121쪽

정체성 상실도 몽골제국 멸망에 큰 원인으로 꼽힌다. 칭기스칸은 이렇게 경고했다.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후대 지도자들은 끝내 이 충고를 되새기지 못했다. 소수인 몽골 사람들은 다수의 피정복민을 지배하기 위해 정착 지역에 생계 근거를 뒀다. 그 결과 그들의 존재 기반인 수렵과 유목성을 스스로 거세하고 현지에 동화돼 버렸다. 그것은 결국 정체성 상실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덜 중요한 이유는 조정 재정의 고갈이다. 몽골제국은 창업 초기부터 창업 공신들에게 엄청난 지분을 할당했다. 그러고도 예속민이나 대상(隊商)들에게 무한한 재산 축적을 허용하다 보니 막상 대칸은 대주주로서 지분을 잃어버렸다. 원나라 마지막 칸인 순제 토곤 테무르칸이 대도를 버리고 카라코롬으로 철수할 때 황실의 지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막강한 부의 근원이었던 운남의 은광 채굴권은 주원장을 비롯한 한족 반란군 손아귀로 떨어져 나갔다. 소금 전매권을 비롯해 황실이 쥐고 있던 권한마저 분산되기 시작했다. 지방 각 군-현의 세금은 제후들이 차지해 대칸의 몫까지 오지 않았다.
-122쪽

고인 물은 썩는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쌓이지 않는다. 로마제국이나 중국 왕조가 무너진 이유를 설명하려면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격언이 적합할지 모르나 유목국가의 멸망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기에 ‘쌓을’ 여유가 없었다. 흐르는 물이 쌓이지 않듯. 축적이 되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도 남는 것이 없다. 군대도 각 제후와 토호들에게 분산돼 칸의 명령이 먹혀들지 않았다. 설령 군대가 있다 해도 군량과 전비를 댈 수 없었으니 결론은 번했다. 고향 카라코롬으로 돌아가야 했다.
-123쪽

1995년,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기획 기사를 냈다.
-지난 1,000년(서기 1001년에서 2000년까지)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누구인가. 1,000년 전 세계 인구는 3억 명쯤이었다. 문명은 극소수 지역에만 존재했다. 당시 인간은 자신들이 어디에 사는 지도 몰랐다. 오늘의 세계를 보자. 조그맣다. 지난 1,000년 동안 지구가 축쇠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이 우리가 지난 1,000년의 인물을 찾는 배경이다. 이 세계를 작게 만든, 인간과 기술이 지표면을 가로질러 이동하도록 만든, 그래서 전 지구에 인간이 지배력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든 누군가를 찾는 작업이다.

이 개념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 있다. 크리스터퍼 컬럼버스는 유럽과 아메리카 두 대륙을 연결시켰다. 컬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심각하고도 파괴적인 영향을 가져다줬다. 각종 질병과 낯선 동식물이 대서양을 건너왔고 야만적인 노예 무역시 시작됐다. 컬럼버스식 모험은 유럽이 세계를 식민지화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124쪽

컬럼버스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동쪽으로 떠날 때 서쪽으로 떠났을 뿐이다. 왜 그는 대양을 가로지르면 중(원나라)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지구 크기를 잘못 생각한 것 말고도 그는 이미 쿠빌라이칸의 궁전에 관해 엄청나게 묘사해 놓은 2세기 전 마르코 폴로 여행기를 읽었던 것이다. 만약 이슬람이 동서양 사이에 철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면 마르코 폴로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나침반이나 화약, 인쇄술 같은 중국 기술도 유럽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1,000년 전 지구를 지배하는 두 문명이 이슬람과 중국 문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문명의 유럽은 고인 물과 같았다. 봉건 장원, 주교령, 귀족 영지 따위가 모여 있는 곳일 뿐이었다. 1,000년 전에는 아무도 유럽 기독교도들이 이 지구를 식민화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을 뒤흔든 게 완전히 새로운 제국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몽골제국, 즉 칭기스칸의 제국이었다.
-126쪽

칭기스칸은 최초의 지구촌 시대를 만들었다.
1. 중세 자유 무역지대 구축-대몽골제국은 한반도와 중국, 아랍, 유럽,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하나의 정치-경제-문화권으로 묶는 글로벌 체제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칭기스칸의 제국은 13세기 말까지 태평양에서 동유럽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팽창을 거듭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자유 무역지대를 만들어냈고, 동서양 문명의 연결을 강화했다. 이는 중세의 GATT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는 끝없는 범위의 잠재적 자유 무역지대를 마들어냈다. 외교관에게, 용병에게, 상인에게 그곳은 처녀지였다.
2. 단일지폐권 창출
칭기스칸이 정복한 지역과 나라는 인종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며 언어, 문화, 생활 모든 것이 각양각색이었다. 이 피정복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칭기스칸 제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단일 지폐를 유통시켰다. 유럽보다 무려 400년이나 앞서 만든 지폐였다. 원나라 지폐는 오늘의 달러처럼 세계의 기축통화였다.
-128쪽

3. 다민족 다종교 국가의 건설
이질적인 사람이나 사회를 수용하면서 그 어떤 차별도 하지 않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칭기스칸은 광활한 지역에 걸친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의 대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자기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적의 장수를 받아들여 동지로 삼았다. 전사한 적장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고, 적장 아들을 양자로 삼아 자신의 보호 아래 두기도 했다. 심지어는 적에게 빼앗겨 적장의 아들을 임신한 자신의 아내와 그 아들(장남 조치)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칭기스칸과 몽골인들은 대체로 샤머니즘을 믿었으나 칭기스칸의 며느리이자 원나라 창업자 쿠빌라이칸의 어머니인 소르카크타니는 기독교도였다.
-130쪽

그들은 항상 동물과 함께 살아오면서도 양을 더 키우거나 종을 더 번식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사자와 호랑이를 교배해 탄생시킨 라이거처럼 새로운 종은 정착문명적 사고에서나 나올 수 있다. 동물들 속에서 동물과 몇 천년을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종자 변이와 생태계 파괴라는 참혹한 오늘의 현실이 유목민의 현명함을 증명하고 있다.
유목민의 생존 방식은 동물을 기르는 게 아니라, 동물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풀을 먹는 동물이 움직이면 그 동물을 쫓아가면서 사는 방식, 즉 생태계 자체를 ‘산업화’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136쪽

‘잡 노마드(job nomad)'는 직업을 따라 유랑하는 유목민이란 뜻의 신조어로 과거의 직업 세계에 등을 돌린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평생 한 직장, 한 지역 그리고 한 가지 업종에 매여 살지 않는다. 잡 노마드는 승진 경쟁에 뛰어들지도 않고, 회사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지도 않는다.

필자가 펴낸 ‘밀레니엄맨(1998)’에서 ‘칭기스칸의 편지’라는 대목
한국의 젊은이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땅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비린내만 났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탓하지 말라.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 데 동원한 몽골 병사는 적들의 100분의 1, 200분의 1에 불과했다. 나는 배운 게 없어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됐다.
-139쪽

이태준 선생은 몽골의 마지막 칸이었던 잡잔단바보그드칸의 주치의로 일하며 독립운동을 벌이다 처형됐다.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세브란스 의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중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에 입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치료하면서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는다. 1911년 졸업한 선생은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 남경의 ‘기독회 의원’이라는 병원에서 의술을 펼친다. 그는 4촌 처남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울란바토르로 건너가 항일단체를 도우며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열어 몽골인들의 질병을 치료한다. 김규식 선생은 몽골에 비밀 장교 양성소를 세울 계획이었다. 그는 몽골인들에게 ‘신통한 의술을 지닌 까레이 의사(고려인 의사)’로 알려지면서 보그드 칸의 주치의가 됐다. 1919년에는 몽골 최고 훈장 ‘에르테닌오치르’를 받았다. 선생은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가 하면 항일운동을 위한 무기를 만들려고 헝가리 출신 폭탄제조 기술자와 접촉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과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러시아 백군에 붙잡혀 38세(1921년)에 처형당했다.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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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08-09-08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얇지만 굉장히 파워 있어요.^^신선했구요.기억나네요.^^전 사무실로 누군가 보내줘서 봤었었어요.

마노아 2008-09-08 23:30   좋아요 0 | URL
경제경영 책에서 뜻밖에 좋은 정보들을 얻었어요. 마무리는 좀 맘에 안 들지만 전반적으로 참 유익했어요^^
 
몽골인의 생활과 풍속
이안나 지음 / 첫눈에 / 2005년 7월
품절


몽골에는 초원 지대가 70% 정도를 차지.
전체적인 지형을 보면 산악 지대는 주로 서부, (삼림)초원 지대는 중북부와 동부, 사막 지대는 중남부에 걸쳐 있다. -12쪽

몽골의 지하자원은 전 국토의 30%에 걸쳐 분포. 약 80여종의 지하자원을 채굴할 수 있다.금, 은, 구리, 주석, 아연, 형석, 몰리브덴, 우라늄, 인회토, 석유, 석탄 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어 세계 10대 자원부국으로 불린다. 구리 체굴은 세계 1위.
몽골의 광산업은 국내 생산의 50%, 수출 소득의 60% 차지. 그러나 가공기술이 부족해 순이익을 많이 내지 못하는 실정. 외국인 투자의 비율로 보면 광산업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17쪽

1911년 만주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찾은 몽골은 제8대 버그드 짜브장담바를 왕으로 추대했으며, <이흐 후레>를 몽골 정부의 중심지로 삼고 그 명칭을 <니이스렐 후레>라고 했다. 다시 1924년 인민혁명이 달성된 후 혁명 영웅인 '수흐바타르'를 기념하여 수도명을 '붉은 영웅'이란 뜻의 <울란바타르>라고 개칭했다. -20쪽

연평균 기온은 -2.2도, 1월 평균 기온 -19도, 가장 더운 7월은 17도. 가장 추웠을 때의 기온은 -49도, 가장 더웠던 기온은 38.5도

해마다 10월 9일을 수도의 날로 정해 기념함.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시는 한국의 수도 서울과 1995년 10월 6일 우호 협력을 다지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양국의 수도는 역사적 관계를 시작. 이를 기념하여 1996년 울란바타르 시 중심부에 총 길이 2.1km의 '서울의 거리'가 조성. '서울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울란바타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21쪽

울란바타르를 둘러싸고 있는 네 산에는 각기 독특한 상징성을 지닌다. 남쪽의 버그드 항 산은 '정치', 서쪽의 성긴 하이르항 산은 '용기', 북쪽의 칭겔테 산은 '지식', 동쪽의 바양주르흐 산은 '재물'을 각각 상징한다.-27쪽

몽골은 북반구의 건냉 지역에 속해 있으며, 아시아 4대 건조 지역의 하나이다. 사계절이 분명하며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덥다. 그러나 한냉 건조 지대에 속하는 몽골의 기후는 하강 온도에 비해 체감온도가 그리 낮지 않은 편이다. 몽골은 세계에서 맑은 하늘(연 평균 250일)과 일조량(연 2,600-3,300시간)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평균 강수량은 230mm 정도이며, 609월 사이에 90%가 내린다. 북쪽 지방은 연평균 250-400mm 정도의 비가 온다면, 남쪽 지방은 100-150mm 정도의 적은 비가 내린다. 7월이 가장 더운 달이라면 1월은 가장 추운 달이다. 몽골은 연중 건조한 편이며 또 연교차도 심해 90도 정도의 교차를 보일 때도 있다. 연평균 기온은 서북쪽의 산악지대는 영하 5도, 초원 지대는 영상 5도의 기온을 보인다.-33쪽

봄은 음력으로 1월, 양력으로는 대개 3월부터 시작되며,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깨어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점차 기온이 풀리지만, 연중 가장 건조한 때이며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바람에 먼지가 날려 거리가 온통 먼지로 뒤덮이는 때가 많다. 이때는 추운 겨울보다 오히려 지내기가 힘들며, 몽골 생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계절이다. 봄에는 일정한 기온을 보이지 않으며, 때로 덥다가도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면서 추워지기도 하고, 때 아닌 눈이 오기도 한다. -34쪽

여름은 5월 말부터 9월까지 계속된다. 이 시기는 비교적 비가 많이 내린다. 고기압에 드는 날이 많고 청명하고 하늘이 드높고 맑다. 30도 이상의 높은 기온을 나타내지만 건조한 대기로 인해 불쾌지수가 높지 않으며, 그늘에 들어가면 더위를 금방 식힐 수 있다. 7월이 가장 더운 때로 지역에 따라 15~40도까지의 분포를 보인다. 산악지대가 시원한 편이라면, 고비 지역은 매우 높은 기온을 보인다.

여름이 되면 도시의 사람들은 고향이나 가까운 도시 외곽으로 나가 주로 1달 정도의 휴가를 보낸다. 도시의 많은 가정들은 도시 외곽에 '조스랑'이라는 여름집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춥고 길었던 겨울과 변덕스러웠던 봄을 지내느라 지친 심신의 피로를 푼다. 몽골 사람들은 여름집에 가면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유유히 1달 정도를 쉬는데, 이것은 몽골의 변화가 심한 날씨 때문에 누적된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한 건강법의 하나이다. -36쪽

몽골의 가을은 겨울로 이동해 가는 과도기적인 계절로 비교적 짧다. 9월 초부터 11월 초까지로 보며, 몇 년 전만 해도 10월 정도만 되어도 겨울이라 할 정도로 추웠으나 최근에는 기후 변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 몽골 사람들은 나담이 끝나는 7월 중순부터 가을이 서서히 시작된다고 본다. 가을은 가축의 젖이 풍부하여 이것으로 유제품인 차강이데를 만들고, 말이나 낙타읮 ㅓㅈ으로는 젖술을 만들어 겨울을 대비한다. 또 양고기나 쇠고기를 말리거나 저장을 시작하며 가축에게 먹일 건초를 준비한다. -37쪽

몽골의 겨울은 가장 길고 추우며 혹독한 날씨를 보인다. 보통 11월부터 3월까지의 긴 기간을 이른다. 겨울에는 눈이 간헐적으로 자주 오기는 하나 그렇게 많은 눈ㄴ이 오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하 20도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놀라곤 하는데, 이곳의 기온은 건조한 대기로 인해 체감 온도가 그렇게 낮은 편이 아니며 특히 겨울에는 바람이 적기 때문에 지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바람이 없기 때문에 대기가 정체되어 있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도시 주변 게르촌에서 때는 유연탄 가스로 심한 스모그가 발생해 겨울을 지내기 어렵게 만든다. -37쪽

몽골에는 9.9 추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한겨울부터 시작하여 추위가 9일 단위로 9번 지나야 겨울이 지나간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9.9 추위는 동지인 12월 22일부터 계산하여 81일 동안의 기간을 이른다. -38쪽

여름에 모기를 쫓기 위해 소똥을 태우기도 한다. 똥은 땔감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겨울에 가축우리의 보온을 위해 우리의 벽면을 똥으로 두껍게 발라 추위를 막아 준다.

몽골 사람들은 가축 가운데서도 말을 가장 존중하고 사랑하여, 예전에는 주인이 죽으면 말을 함께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72쪽

몽골인들은 흉노시대부터 국가의 수호기를 만들어 사용해 왔다. 고대로부터 아홉 개의 깃대를 가진 흰 수호기(유승 차강 술드)는 국가의 신성함을 나타내고 번영과 성장을 상징하는 신앙적 대상물이었다. 9수는 존귀함, 숭고함을 상징하며 여러부족들의 화합을 뜻하기도 한다. -75쪽

마두금은 몽골 남자의 정기가 될 뿐 아니라 최근까지도 마두금이 없는 가정, 마두금을 연주하지 못하는 남자는 없었다고 한다. 남이 집에 방문한 남자는 호오르를 연주할 수 있든 없든 악기 소리를 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1920년대부터 머링호오르(마두금)는 일반 가정의 악기에서 전문적인 무대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전문 연주가들이 연주하게 되었다. -78쪽

예로부터 몽골에서는 홀수를 길한 수로 여겼다. -99쪽

새해 첫날, 해가 뜨면 식구들은 서로 절을 하는데, 부부는 서로 한 몸이라고 생각하여 절을 하지 않는다. 부부가 서로 절을 하게 되면 헤어지게 된다는 속신이 있다. 요즘은 아이들이 어른께 절을 할 때 하득 위에 돈을 올려 드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는 풍속과는 반대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나 자식들이 절을 할 때는 연장자는 덕담을 하며 한 해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해 준다.
오후가 되면 식구들은 집안의 어른이 사는 집을 시작으로 친척이나 스승의 집을 돌며 새해 인사를 한다. -102쪽

친지나 은사, 친구들끼리 새해 인사를 위해 집을 방문하는 것은 보통 새해 첫날부터 보름 정도까지 계속된다. 다른 집을 방문할 때는 값에 관계없이 적절한 선물을 가지고 가며, 때로 돈을 선물과 함께 드리기도 한다. 방문한 손님이 돌아갈 때 집 주인은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손님에게 주는 풍습이 있다. -103쪽

말경주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대개 5~13세의 어린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6~8세의 어린이들이 대부분이다. 말경주에는 남자 아이들뿐 아니라 여자 아이들도 참가한다. 경주마는 2세, 3세, 4세, 5세가 된 말까지는 나이 별로 경기를 하며, 6세 이상의 말 '이흐나스'라 하여 나이 제한이 없이 한꺼번에 경기를 하고, 종마는 따로 경기를 한다. 이렇게 6종류의 경기를 하며, 측대말을 타고 단거리를 도는 시범 행사가 있다. 경기의 거리는 말의 나이에 따라 달리 정한다. 2세의 어린 말은 10~14km, 3세 말은 14~18km, 4세 말은 18~22k,, 5세 말과 종마는 22~25km, 나이가 많은 말은 대략 25~28km를 달린다. 어린 기수들은 안장 없이 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안장이 없으면 말에서 떨어지더라도 말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때문에 말로 인한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115쪽

몽골의 게르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오늘날의 펠트 게르 형태는 16세기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게르를 주거 형태로 한 민족은 터키, 만주, 몽골의 유목 민족들이다. 몽골의 에스기 게르를 러시아어로는 '유르트', 중국인들은 '바오', 야코트 사람들은 '모걸 오라스', 알타이 사람들은 '아가쉬' 등으로 부른다.

몽골의 왕정 시대에는 일반민이 사는 게르 이외에 왕이나 귀족의 궁궐, 관청 등의 고정 건물이 지어졌고, 정착 도시가 생기면서 고정 가옥이 지어지기도 했다. 도시 아파트는 러시아 기술로 1940년부터 시작하여 점차 소규모로 지어지다가 1960년대에는 상당수의 아파트가 지어졌다. 그후 계속해서 새로운 아파트가 지어졌으며, 현재는 건축업이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활기를 띠고 있다. -126쪽

게르의 크기는 재산의 정도나 필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게르의 면적과 크기는 '한'이라고 하는 벽체의 수로 나타내는데, 보통 4,5,6,8,10,12,15한의 게르가 있다. 15한의 경우 150개의 천정 받침나무가 들어가는 큰 게르인데, 이렇게 넓은 게르에는 왕이나 귀족들이 주로 살았으며, 관청으로 사용되었다. 부자들은 대개 6,8한을, 평민들은 4,5한을 짓고 살았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지어지는 크기는 5한으로 평균 5명 정도가 살 수 있다. 일반적으로 4한 게르의 크기는 15~20m2, 5한은 20~30m2, 6한은 30~50m2가 된다.

몽골인들은 길한 모든 것들이 위의 천창을 통해 들어온다고 생각하여 이를 매우 존숭했다. 또 천창을 게르의 생명이라고 보아 매우 중시하는데, 이것은 하늘과 연결되는 통로로서의 상징성을 갖는다.

기둥의 높이는 5한의 경우 228cm, 6한은 245m 정도가 되며, 일반적으로 천장과 벽체의 높이는 60대 40 정도의 비율을 이룬다. -128쪽

시골에서는 주로 소나 말똥을 이용하여 불을 때고 있으나, 울란바타르의 경우 외곽을 끼고 형성된 고정가옥이나 게르촌에서 나무나 유연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매연이 심하게 나고 이것이 환경 오염의 주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추운 겨울 저녁 시간 때부터 시작하여 울란바타르 시내 공기는 매캐한 연기로 뒤덮여 호흡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다. 몽골의 대기가 겨울에는 바람이 없이 정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울란바타르 시가 고분지 지역이기 때문에 공기가 밖으로 빠져 나가지 않은 채 시내에 정체되어 있어 이러한 공해 현상은 더욱 가중된다. -135쪽

몽골 민족들은 광대한 초원에서 수 세기 동안 유목 생활을 해온 민족으로 손님을 맞는 예의가 각별하다. 이것은 인적이 드문 외로운 초원 생활 속에서 인간을 그리워하는 심정에 한 원인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동 생활을 하면서 여행을 한다는 어려움을 잘 이해하는 데서 오는 미풍양속일 것이다.

주변에 다른 인가가 없을 경우 주인이 집을 비울 때는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가기 때문에 나그네가 들어가 쉴 수도 있었다. -137쪽

드넓은 고비의 집

먼 여행길을 걸어
피곤에 지친 나는 한 잔의 차를 갈망하여
끝없이 광활한 고비의 인가를
보석 찾듯 살피며 갔다.
한참을 헤매다 어느 집에 이르니
게르 문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주인 목자는
먼 초지에 가축 떼를 방목하러 간 듯
오 한의 게르 안에는 가구며 그릇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원하는 어떤 이를 위해 준비해 놓은 뜨거운 차
갈증으로 찾아온 어느 누군가가 차를 마시고 갔다면
집 주인이 기뻐하는 고대 풍습을 나는 안다.
태양과 바람이 스며든 육포로
체력을 보충하고 떠난 이가 있다면
이생에서 해야 할 일을 이루었다 자랑하는
소중한 풍습을 나는 안다.
진한 향기의 차로 갈증을 풀고
의심 없는 믿음의 깊이에서 나는
마음의 갈증을 풀었다.
펠트 게르 문은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채
믿음을 잃지 않은 주인이
가축 떼를 이끌고 초지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의 광활한 고향을 찾는다면 당신은 잘 안다,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사구가 펼쳐진 고비, 몽골인의 마음에는 인색의 자물쇠가 없다.'
"몽골 현대시선집"에서-139쪽

몽골에서는 술을 뿌려 올리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의 고시레 풍속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약지를 사용하여 3번을 올리는데 이것은 푸른 하늘과 대지, 인간(천지인)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약지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약지는 다른 사물에 닿지 않는 가장 깨끗한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147쪽

부족이나 한 나라의 지배자를 아무도 알지 못하게 철저히 숨기는 것은 아마도 적으로부터 시신을 보호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칭기스칸이나 쿠빌라이칸 등 ㅁ오골 대칸들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장례행렬 도중에 만나는 모든 생명체를 죽음에 처했다.

왕족은 매장을 주로 했으며, 왕족이나 귀족, 고승의 경우 때에 따라서 화장을 하여 뼈를 날리거나 탑에 넣어 모시기도 했다. 어떤 때는 미이라로 만들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몽골의 가장 보편적인 장례법은 풍장이었다. 그 후 매장 방식이 바뀌었으며 현재는 매장이 일반적인 장례법이 되었다. -166쪽

장지에 가는 길에 유가족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간다. 눈물을 흘리면 죽은 이의 영혼이 물에 빠져 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속은 곡을 하고 소리를 매기며 슬픔ㅇ르 표하는 우리의 풍속과는 사뭇 이질적이다. -169쪽

흉노인들은 한 해를 4계절 12달로 나누고, 봄은 호랑이, 토끼, 용
여름은 뱀, 말, 양
가을은 원숭이, 닭, 개
겨울은 돼지, 쥐, 소 달이라고 했다.
12동물이 각각 단위가 되는 역을 흉노에서 한나라가 받아들여 사용했으며,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사용했다. 몽골에는 12지지 이외에 10간지가 함께 사용된다. -173쪽

일반적으로 한 가정에 세 명의 아들이 있는 경우 맏아들은 정치적인 일에 힘쓰고, 둘째 아들은 지식이나 종교적인 일을 위해 집을 떠나고 셋째인 막내는 집안에 남아 부모의 일을 도우며 갈 걸럼트를 계승한다는 말이 있다. -225쪽

쿠빌라이칸 시대부터는 무당들 대신 국사에 승려를 앉힘으로써 무교는 통치의 기반에서 물러나게 된다. 불교는 무교의 의례를 불교화 했으며, 이러한 불교적 영향 밑에 들어간 무당을 '샤링 버어' 즉 황무당이라 한다. 원나라 시대에 비록 불교가 국교로 자리잡고 정치적인 주된 역할을 수행했으나, 일반 민중들의 대다수는 무속에 의지해 살았다. 쿠빌라이칸과 원나라의 칸들은 불교를 존중하고 전파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역시 무속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생활 속에서 여전히 무속의 지배를 받았다. -244쪽

어워는 유목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몽골 사람들은 충분한 초지를 제공하는 대지와 그 초지를 가능하게 하는 태양, 비 등을 내려 주는 하늘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경외의 마음을 드러내고, 앞날의 삶을 가호하고 축복을 내려 줄 것을 기원하며 어워를 세웠다. 또한 먼 길을 떠날 때 높은 산이나 고개 위에 어워를 세워 방향을 가늠하는 방향자가 되게 했으며, 어워는 초원의 험한 여행길에서 여행객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전쟁을 떠날 때에도 어워에 제의를 드림으로써 하늘에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했다.
현재 몽골에서 어워제를 드리는 곳은 800여 곳에 이르며, 신성이 거하여 제의를 드리는 어워는 420여 개가 된다.
어워는 큰 산이나 언덕, 고개 위나 강, 호수, 샘물 옆에 또 초원 등에 만들어지며 몽골의 어느 지역을 가든 쉽게 볼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돌을 쌓고 맨 위에 기나 하득을 묶은 버드나무나 나뭇가지 등을 꽂아 놓은 형태이다.-256쪽

불교는 기원전 6세기 경에 인도에서 발생하여, 7세기 경 티베트에 전파되었다. 티베트 불교를 일명 라마교라 하는데 라마란 티베트 불교에서 '정신적 스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원래는 사원의 지도자나 위대한 스승에게만 붙일 수 있었던 '라마'라는 명칭이 오늘날에는 일반 승려에 대한 경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몽골에 들어온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한 이유는 티베트 불교의 새로운 개혁 종파가 경전보다는 스승의 가르침 즉 '라마'를 존중한 데서 붙여진 명칭으로 생각된다. -263쪽

개혁파 불교에서 스승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이 불교를 곧바로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라마교라는 것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몽골 불교를 비하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다.


불교가 몽골에 강하게 전파된 것은 16세기 말 경이지만, 그 이전에도 몇 차례 불교가 전파되었던 역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흉노 시대부터 간헐적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고 본다. -264쪽

불교가 몽골에 들어온 역사적 시기는 13세기이다. 칭기스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세계 정복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러나라의 종교 문제에 있어 상당히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스스로는 전통적인 무속을 신봉하여 결정적인 사건에 마주치면 영원히 푸른 하늘의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하고 무당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또한 외국의 용한 점쟁이나 점성가들의 예언이나 조언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칭기스칸은 거란인 야율아해나 야율초재와 같이 양의 견갑골로 점을 치는 점쟁이들을 주위에 데리고 있었으며, 원정을 떠나기 전 점을 쳐보게 하기도 했다. 또한 도교 교단의 장로인 장춘진인에게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장생의 비법을 묻기도 했다고 한다. -265쪽

원나라 시대에 몽골의 칸들은 중국에 널리 퍼져 있던 유교와 도교를 금지하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지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융화적 태도는 매우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중국인들 가운데 큰 명성을 얻었거나 영향력이 있는 유가 혹은 도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특별히 도사들에게 공적인 세금을 면제해 주고, 유교 사당을 부흥시키고 제를 드리게 하는 등의 일을 지원했다. 그와 동시에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몽골 지역에 전파되는 것을 보이지 않게 엄격히 규제하는 이중 정책을 썼다. 일반적으로 그 시대 몽골 칸들은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나라의 중심 종교로 삼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종교적 확산과 영향력을 막기 위해 티베트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사상적으로 중국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의 한 방편이었다.-271쪽

불교가 통치자들의 야심에 의해 몽골에 전파되긴 했으나 그 시대 상황에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즉, 귀족과 봉건 영주들 간의 투쟁과 위기를 어느 정도 약화시키고, 한 집단의 정치인 결집을 확고히 하며 민중들에게 문자를 전파시키고 불교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국의 문화를 발전, 확대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방 통치자들과 귀족들은 불교의 서로 다른 분파를 옹호하면서 불필요한 경쟁을 하고,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굳히기 위한 일환으로 가능한 한 불교의 높은 칭호를 얻기 위해 애썼던 것은 마침내 그들의 이익과 관심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잃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277쪽

몽골의 유목 문화는 자신들의 수천 년 역사 중 외래 종교, 문화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만주가 1644년부터 150년 이상 정책적으로 불교를 몽골에 전파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1800년대 초에는 몽골에 1,000개 이상의 사원이 생겨났다. 승려들은 사회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일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주는 불교의 지도자를 비롯해 일반 승려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다.-279쪽

하르호름 시는 122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1238년(어떤 학자는 1235년이라고도 함) 이곳에 어거대칸의 궁전을 세움으로써 하르호름은 더욱 발전하고 확장되어 몽골 대제국의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이 도시에서 몽골의 여러 나라들을 통치했으며, 이곳을 통과하는 실크로드를 통해 400여 년 동안 유라시아와의 상업이 이루어졌다.-291쪽

하르호름은 140년 간 존속하지만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시기는 32년간이었다. 1215, 1268년 큰 화재가 있었으며 1380년, 1466년 중국인에 의해 파괴를 당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복구되었다.

수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km 거리에 위치해 있고 울란바타르에서 차로 6~8시간 정도 걸린다.-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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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3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3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7월
절판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시간과 계절, 바다생물, 순록, 식용 식물, 수학, 풍경, 신화, 음악, 미지의 세계, 매일매일에 대해 수세기에 걸쳐 인간이 생각해온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미국 스워스모대학의 데이비드 해리슨 언어학 조교수-49쪽

사람들은 '가치'보다 '가격'에 더 주목합니다.
가격은 당신이 지불하는 것이지만
가치는 당신이 얻는 것입니다.

-워렌 버핏-98쪽

2007년 5월의 주주총회에서 부모를 따라온 10살 소녀가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부모나 어른들과 자꾸 상의하세요. 돈에 관한 공부는 어려서부터 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너무 어린 것 같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기꺼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빚을 지지 마세요."-101쪽

모두에게 쉽게 허락되는
건강도
아이도
사랑도
얻지 못한

프리다 칼로

1954년 47살
그녀의 마지막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112쪽

사람들은 왜 억압을 욕망할까? 사람들은 어째서 부당한 권위에 '기꺼이' 복종할까? 사람들은 어째서 자유로부터 도피할까? 나치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던 유럽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극우정당들이 다시 힘을 얻는 게 가능한 일일까? 어째서 저소득층들이 오히려 보수정당을 지지할까? 어째서 사람들은 독재정권을 향수하고 독재자의 재림을 부단히 꿈꾸는 것일까? 이 진부하고도 유효한 질문들에 빌헬름 라이히가 과연 해답이 될 수 있을까? -137쪽

영국에서는
물기업의 이익이 692% 오르고
물기업 CEO의 봉급이 708% 오르는 동안
물값은 450% 상승하고 단수 사례는 50% 증가했다.
물기업들이
수돗물 누수와 폐수불법방류 등으로
기소된 사례만 128차례
영국 환경청은
자국의 환경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집단으로
주요 물기업들을 지목했다.-153쪽

2007년 11월
우토로 지원책이 국회에 계류되는 동안
한국의 시민들은
성금 5억여 원을 모았다.

"우리에게도 조국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잘되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마음만이라도 우리를 지켜주세요.
저는 끝까지 여기
우토로에 남을 겁니다."
-우토로 주민 김군자 할머니(78)-167쪽

사실 우토로 문제에는 한국정부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다. 1965년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수교과정에서 전후 보상 문제를 정부 대 정부의 차관 형식으로 일괄타결함으로써 민간차원이나 개인차원의 보상청구권 문제를 원천봉쇄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의 사과 및 보상 문제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169쪽

2004년 1월
'특수임무수행자 지원에 관한 법류'이 제정되어
북파공작원에 대한 보상 근거가 마련되었지만
'북파의 증거'를 제시해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다더군요.

정부가 공식 확인한 전사자만 7,519명이었지만
당시 가족에게 발송된 전사통지서는
136장뿐이었습니다.

결국 '증거'를 제시한 유가족 660여 명에게만
822억 7,000만 원의 보상금이 지급되었습니다.-178쪽

1968년 멕시코 올림픽, 200m 결승, 신기록의 주인공 토미 스미스

"우승 덕분에 난 흑인이 아닌 미국인이 됐지만, 내가 이기지 못했다면 검둥이(negro)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미국의 백인들은 우리들이 승리하면 미국이 이겼다고 말하고, 반대로 나쁜 일이 있으면 흑인이 했다고 말한다. 우리들의 항의는 미국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의 평등을 요구하는 권리이며, 흑인사회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흑인들은 우리의 행동을 이해할 것이다."-205쪽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문화적 교차점이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십자로라는 지정학적 특징 때문에 동서양의 강대국들은 확장과 수축을 거듭할 때마다 이 지역을 짓밟고 지나갔다. 특히 14세기에 오스만 투르크가 400여 년간 이 지역을 통치함으로썽 ㅣ후 가톨릭교, 크리스정교, 이슬람교 등 3개 종교와 알바니아계, 그리스계,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계, 터키계 등 5개 민족, 4개 언어, 2개 문자권이 뒤섞인다. 이 지역이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모자이크가 형성된 이유이다. -216쪽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를 것 같다.
그 나라들은 가해자였던 경험밖에 없지만
한국은 피해자였으니 우리를 더 잘 이해할 것 같다."

2006년 12월 서울중앙지검의 공소장에 따르면
한국의 대우인터내셔널은 2002년부터 2006년 10월까지
포탄 제조공장과 설비, 기술을 미얀마에 불법수출했다.-227쪽

아웅산 수치는 <아웅산 수치의 평화>라는 수필에 이렇게 썼다.

"겁준다고 겁먹지 말되 겁 없이 살지는 말라. 자유의 대가는 가벼운 적이 없으나 특히 버마에서는 그 대가가 무겁다. 하지만 사랑과 진실이야말로 어떤 형태의 강압보다 더욱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증오와 복수심으로 우리를 짓밟고 없애버리려 사납게 날뛰는 이들 역시 버마인, 곧 우리 동포다."-232쪽

ABSDF의 무장 투쟁을 현장에서 밀착 취재한 바 있고 스스로를 '전선기자'라 칭하는 정문태 분쟁전문 프리랜서 기자는 얼마 전 미얀마의 국경전선을 찾아가 ABSDF를 다시 만나본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모두들 살이 찌고 배가 나왔다. 국경 전선을 달리던 시절의 앳된 모습들은 사라지고 어느덧 중년 티가 났다. 반가운 얼굴들은 저마다 총 대신 새로 찾은 '혁명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건 이른바 '정치'라고 부르는 소재였다."-233쪽

서울의 6.4배 면적의 두바이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접한 UAE(아랍에미리트)의 일곱 토후국 중 하나다. 자국민은 25만 명에 불과하지만 체류노동인구를 포함하면 아랍에미리트 내에서는 연합국의 수도 아부다비 다음으로 인국가 많다. '두바이'는 아랍어로 '메뚜기'를 뜻한다.


강력한 리더십과 종교적 지원, 그리고 막강한 오일머니를 밑천으로 두바이는 마침내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 첨단의 세계도시를 일구어내는 데 성공한다. 두바이는 현재 세계 최대의 자유무역항, 세계최대의 국제공항, 세계 최대의 쇼핑몰, 세계 최대의 테마파크를 보유한, 그야말로 '세계 최대의 허브'로 인정받고 있다.


두바이 개발의 초점은 무엇보다 '자유무역'에서 찾을 수 있다. 개발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10~20년 사이의 일이지만 이미 두바이는 1800년대부터 관세를 철폐하고 타국 상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활발하고 자유로운 무역이 지속된 상황에서 1960년대에 석유가 터지고 막대한 오일머니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266쪽

평(3.3m2)당 1천만 원씩 오르는 땅값
급격하게 치솟는 분양가
인근지역까지 덩달아 오르는 집값 땅값
결국
이주보상비로는
재입주는커녕 아예 서울 시내에서 집을 구할 수 없게 되고
세입자들은 물론 주택소유자들 또한
몇억 원대로 치솟은 뉴타운 분양가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273쪽

2005년 4월 첫 입주가 시작된
길음 뉴타운
서울시가 애초에 장담했던
40~50%와 달리
원주민의 재정착률은

17.1%에 그치고 만다-274쪽

서구권 국가 중
의료보험이 '민영화'된
유일한 나라
미국

하루하루 아프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의료보험 미가입자 5천만 명...
하지만
의료보험에 가입된 2억 5,000만 명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284쪽

쿠바는 기초적인 의약품과 의료장비의 수입조차 막아버린 미국의 경제 봉쇄를 40년 이상 견디고 있는 나라다. 1959년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의사 3천여 명이 미국으로 망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무료 의료시스템과 수준 높은 의료 기술 덕분에 늘 '의료 관광객'으로 붐비는 나라. 의사 1인당 국민수는 150명이다.(미국 390명, 한국 630명). 정부가 지출하는 1인당 의료지원금은 1년에 270쿠바달러(약255만원).

쿠바의 의료서비스는 기본적으로 가정의 시스템을 따른다. '기쵸의학'보다는 '예방의학'에 주력하고 있다는 뜻.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경제적이고 보건적이기 때문. 그래서 쿠바의 의사들은 자신이 관리하는 주민들이 평소에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고 어떤 체질이며 어떤 지병을 갖고 있는지 등을 정확히 파악해둔다. 쿠바의 1차진료기관은 각각 10~20가정을 담당한다.

쿠바의 의사들은 가난하고 의료시스템이 열악한 세계의 오지에 나가 무상의료 지원활동을 벌이는 것으로도 유명. 1963년 이후 지금까지 아프리카, 중남미 등 101개국에서 약 10만 명의 쿠바 의사들이 지원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맨발의 의사들'이라는 별칭을 얻었다.-293쪽

2007년3월 현재
사망 해외이주 등의 이유가 아닌
주민등록 말소자는
64만여 명
그들 중 대부분이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에서 40배나 증가한
'사회극빈층'이다

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고물수집
막노동
꼬지(앵벌이)...
그나마 요즘에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도
신분증이 종종 요구된다

2001년 8월 복지보건부는
주민등록 말소자들에게도 기초생활보장번호를 부여하지만
"1개월 이상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으면 자격미달..."
결국
전국 403명만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었다.-304쪽

현재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대표적인 나라로는 인도와 싱가포르를 꼽을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두 나라는 다양한 민족이 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상황에서 국가적 언어통일을 위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케이스로 '국가경쟁력 확보'나 '세계화 대비'등의 목적과는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325쪽

문화제국주의가 과거의 식민주의 시대에는 보완적 기능을 수행했지만 신식민주의 시대에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말해서, 영어의 이데올로기적 폭력이 신식민주의 시대에 와서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제3세계에 작용하는 것이다.-327쪽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생기고
그럴듯한 핑계가 생깁니다
과연 옳은 일이고 인류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합시다
옳은 일을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라는 걸 명심합시다"

"적어도 실패는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입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356쪽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장소에서 해야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故 이종욱(1945-2006)-357쪽

이종욱이 평생에 걸쳐 저개발, 개발도상국가들의 보건환경 개선을 위해 몸바쳤던 것과 달리 다국적제약회사들은 개발도상국들의 저렴한 복제 의약품 개발을 방해하는 한편 저개발국에서 '의료지원'을 빌미로 신약 실험을 실시하는 등 극단적인 영리주의로 일관해왔다. 인간을 대상으로 충분한 임상실험을 거칠 수 없는 제약업계의 특성상 저개발국의 낙후된 보건환경은 오히려 좋은 실험환경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359쪽

헬싱키 선언이란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의사협회 총회에서 채택된 의료윤리선언이다.

1.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일반적으로 승인된 과학원칙에 따라야 하며, 연구대상자(피험자)들의 건강과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윤리적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
2. 실험계획과 수행은 독립적인 윤리심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거쳐야 한다.
3. 연구대상자의 이익에 대한 고려는 과학발전과 사회이익에 앞서야 한다.
4. 약자의 입장에 있는 연구대상자들은 특별히 보호돼야 한다.
5. 연구대상자가 연구자와 종속관계에 있는 경우 특히 주의해야 한다.
6. 연구 자체의 목적과 방법, 예견되는 이익과 내재하는 위험성 등에 관하여 연구대상자에게 사전에 충분히 알려주어야 하며, 그들로부터 충분한 설명에 근거하여 자유로이 이루어진 동의를 바당야 한다.
7. 동의는 그 연구에 참가하지 않고 독립된 위치에 있는 의료인이 받아야 한다.
8. 법률상 무능력자에 대해서는 국내법에 따라 법적 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9.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 연구자는 이 선언에 규정된 원칙을 따라야 한다.
10. 학술지는 이 선언을 준수하지 않는 논문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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