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품절


엄마가 그랬잖아. 위녕, 세상에 좋은 결정인지 아닌지, 미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어떤 결정을 했으면 그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노력하는 일뿐이야,하구.-17쪽

공부도 행복하게 해야 하는 거야. 어떤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거 그거 좋은 거 아니야. 네가 그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오늘을 견딘다면, 그 희망 때문에 견디는 게 행복해야 행복한 거야. 오늘도 너의 인생이거든.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영영 행복은 없어. -48쪽

있잖아. 그런 말 아니? 마귀의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만 있고 하느님의 달력에는 오늘만 있다는 거?-49쪽

엄마를 다시 만난 후 내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아마 태양계의 행성에서 난데없는 왜소 행성으로 변한 명왕성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명왕성이 생각을 할 수 있는 유기체라면 그는 인간들이 '명왕성은 행성 아님' 선언을 하고 영어로는 난쟁이 행성이라는 보통명사를 붙여준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질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빠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탈락이고 엄마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명왕성의 자유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이제 사람들이 붙여놓은 딱지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그냥 별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거꾸로 말하면 그는 그냥 자신이 꿈꾸는 그 별이 되어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51쪽

난 춥고 흐린 날이 좋아.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맑은 날을 좋은 날씨라고 판단해버리는 건 횡포잖아.-53쪽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왜 불행한지. 그건 대개 엄마가 불행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가 불화하는 집 아이들이 왜 불행한지도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그건 엄마가 불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아, 이 세상에서 엄마라는 종족의 힘은 얼마나 센지. 그리고 그렇게 힘이 센 종족이 얼마나 오래도록 제 힘이 얼마나 센지도 모른 채로 슬펐는지. -56쪽

가끔은 네가 너무 조숙한 게 겁이 나.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엄마도 어렸을 때 아주 조숙했었는데, 그만 그것만 믿고 있다가 평생을 성숙은 못 하고 그냥 미숙하게 살았거든. 혹시 네가 그러지 않을까 겁도 나고. ......너무 이해하려고 하지 마. 가끔은 네가 엄마를 너무 이해하는 것 같아 겁이 나. 엄마를...... 쉽게 용서하려고 하지 마. 새엄마도...... 아빠도...... 쉽게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구. 그건 미움보다 더 나빠. 진실이 스스로를 드러낼 시간을 자꾸만 뒤로 미루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를 빼앗아갈 수 있으니까.-57쪽

괜찮아, 울어. ......우는 건 좋은 거야. 좀 정리가 된다는 거거든. 맘속에 나쁜 열기가 가득하면 온몸의 물기가 다 말라버려서 울지도 못해. -81쪽

어떤 부모든 최선을 다해. 하지만 자식에게 상처를 줘. 그건 어쩌면 인간의 운명 같은 걸 거야. 그래서 그 많은 심리학자들이 어린 시절을 연구하는 거고.

어른들도 완전하지 않아. 더구나 처음 낳은 자식에게는 언제나 실수투성이야. 부모 연습을 해본 적이 없어서......-82쪽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너도 모자라고 엄마도 모자라고 아빠도 모자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자람 때문에 누구를 멸시하거나 미워할 권리는 없어. 괜찮은 거야. 그담에 또 잘하면 되는 거야. 잘못하면 또 고치면 되는 거야. 그담에 잘못하면 또 고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 엄마는...... 엄마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어.-85쪽

가족이라는 것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울타리 같은 거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니까.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고 침범당해서는 안 돼. 그런데 그런 폐쇄된 영역에서 힘이 센 한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쓰자고 들면 힘이 약한 사람은 당하게 마련인 거야. 타인들이 볼 수 없는 장막 저쪽의 세계니까. 그게 부인이든 남편이든 혹은 아이든 노인이든...... 그 사람이 페미니스트든 사회정의의 화신이든 힘이 센 사람이 폭력을 쓰면 약한 사람은 당하는 거...... 그게 가족의 딜레마일 거야. 낯선 사람이 가하는 폭력을 피하면 되지. 친구가 그러면 안 만나면 되지. 그러나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 가족이 그런 일을 저지를 때 거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거야. -89쪽

내가 왜 거기서 그 사람이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을까. 이게 바로 내가 입은 피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하고 말이야...... 나중에 혼자 생각했지. 그래, 상처와 치유가 별개냐? 내가 내가 아닐 때, 그것은 상처이고 내가 다시 나를 찾을 때, 누구에게도 먼저 내 잘못이 아니라구요, 변명하지 않을 때 그게 바로 치유가 아니겠냐고......-128쪽

그 선생님은 언제나, 내게서 불행의 기미만을 찾아내고 싶어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나는 힘이 든다. 생각해보시라, 준비물 하나 가져가지 않은 일로 상담실에 불려가 특별 상담을 받아야만 했던 나날을. 어른들은 아마도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신발주머니를 챙길 때나 교과서를 준비할 때나 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슬피 새기면서 사는 줄 아나 보다. -130쪽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엄마는 그걸 운명이라고 불러...... 위녕, 그걸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걸 받아들이는 거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큰 파도가 일 때 배가 그 파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듯이. 마주 서서 가는 거야. 슬퍼해야지. 더 이상 슬퍼할 수 없을 때까지 슬퍼해야지.원망해야지, 하늘에다 대고,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하고 소리 질러야지. 목이 쉬어 터질 때까지 소리 질러야지. 하지만 그러고 나서,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실컷 그러고 나서......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말해야 해. 자, 이제 네 차례야, 하고.-178쪽

훗날 나는 엄마의 인터뷰 기사에서 엄마가 써달라는 묘비명을 읽었다.
"나 열렬히 사랑하고 열렬히 상처받았으며, 열렬히 슬퍼했으나 이 모든 것을 열렬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으니, 이제 좀 쉬고 싶을 뿐."-197-198쪽

위녕, 엄마는 네게 그런 방법이 좋은 게 아니라고 말했어. 하지만 너는 듣지 않았고...... 너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그때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어. 너의 나쁜 결정에 동참해주는 것, 그래서 같이 후회하는 것...... 엄마도 너와 같이 나쁜 결정을 한 동지가 되는 것......-269쪽

공부? 네가 하는 거야.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야. 엄마는 어차피 너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날 거야. 함께 있을 때까지는 엄마가 도와주지만 그 다음엔 너희의 몫이야. 더 길게는 잔소리하지 않겠다. 그리고 어쨌든 둥빈, 엄마가 온다고 힘든 반성문 써준 거 고마워. 내친 김에 한마디만 더 하면 인마, 반성은 조건 없이 하는 거야. 네가 이러면, 네가 저러면 이런 거 없어.-278쪽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은 알까? 그들이 우리에게 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주어왔는지. 그것이 상처든 감동이든 지식이든 말이야...... 엄마,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어. 그래서 엄마 없는 아이들을 돌보아주고 싶었어. 아빠 없는 아이들, 아니면 엄마 아빠 다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어. 학부모님께, 로 시작하는 통지서 대신 보호자 되는 분께, 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수업 시간에 무심히 내일 엄마 오시라고 해요, 라는 말 대신 보호자분 오시라고 하세요, 라고 하고 싶었다구...... 엄마, 내 말을 이해해?-328쪽

우리가 함께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였지만, 증오의 대상이 스스로 항복하고 나자, 그 증오는 이제 미숙한 서로를 향해 겨누어지게 된 것이지. -335쪽

성모마리아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구세주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란 걸 엄마는 그제야 깨달아버렸다. 달빛 아래서 엄마는 거실 바닥에 엎디었지. 그녀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녀가 그 아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그냥, 놔두었다는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야. 모성의 완성은 품었던 자식을 보내주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실에 엎디어서 엄마는 깨달았았다. 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은총이라는 것을 말이야.
사랑하는 딸, 너의 길을 가거라. 엄마는 여기 남아 있을게. 너의 스물은 엄마의 스물과 다르고 달라야 하겠지. 엄마의 기도를 믿고 앞으로 가거라. 고통이 너의 스승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네 앞에 있는 많은 시간의 결들을 촘촘히 살아내라. 그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에게 금빛 열쇠를 줄게. 그것으로 세상을 열어라. 오직 너만의 세상을.-336-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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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악하악 - 이외수의 생존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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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어느 시인이 강원도 두메산골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서 수업시간에 혹시 백일장에 나가본 경험이 있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어떤 학생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어투로 시인에게 말했다. 선생님 여기는요, 백일장이 아니라 오일장이래요!-21쪽

닥쳐 시리즈.
거북이 아저씨가 민달팽이를 보면서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전속력으로 달려도 시속 오십 센티를 넘기지 못하는 놈도 동물로 분류되냐. 그러자 민달팽이가 대답했다. 닥치세요. 아저씨는 저처럼 다리가 하나도 없으면 짱돌 그 자체예요.-22쪽

연가시라는 생물이 있다. 일급수 이상에만 서식한다. 철사벌레라고도 한다. 실같이 단순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일정 기간 곤충의 몸속에 기생하다가 성충이 되면 곤충의 뇌를 조정해서 곤충이 물에 뛰어들어 자살토록 만드는 생물이다. 때로는 인간들도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쾌락의 늪에 뛰어들어 자멸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 의식 속에 이성을 마비시키는 허욕의 연가시가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23쪽

소나무는 멀리서 바라보면 참으로 의연한 자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까이서 바라보면 인색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소나무는 어떤 식물이라도 자기 영역 안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소나무 밑에서 채취한 흙을 화분에 담고 화초를 길러보라. 어떤 화초도 건강하게 자라서 꽃을 피울 수가 없다. 그래서 대나무는 군자의 대열에 끼일 수가 있어도 소나무는 군자의 대열에 끼일 수가 없는 것이다. -25쪽

예술이 현실적으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카알라일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그렇다, 태양으로는 결코 담배불을 붙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태양의 결점은 아니다.-51쪽

간만에 외롭지 시리즈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찌 제헌절을 공휴일로 기념하겠습니까. 한글이 만인에게 나랏말씀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찌 한글날을 공휴일로 기념하겠습니까. 365일 닥치고 포맷,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라는 포스팅을 올리면서 조낸 외롭지 말입니다.-96쪽

때로는 어떤 사람의 성공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99쪽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음식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부패되는 인간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부패된 상태를 썩었다고 말하고 발효된 상태를 익었다고 말한다. 신중하라. 그대를 썩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대를 익게 만드는 일도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 -122쪽

영국 사람이 영어를 잘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잘 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영어는 잘 하면서 한국말은 잘 못하는 건 캐안습이다. 일찍이 퇴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내 손자가 뜰 앞에 천도복숭아가 있는데 먼 데까지 가서 개살구를 줍고 있구나. 즐!-128쪽

감성마을로 오는 길에는 몇 개의 표지판이 있다. 새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4km. 물고기가 헤엄치는 방향으로 2km. 표지판에는 방향을 지시하는 새와 물고리가 한 마리씩 그려져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악하악, 너무나 화살표에 익숙해 있어서 뻑 하면 다른 길로 빠져버린다. 뿐만 아니라 도로의 일정 부분은 내비게이션도 감지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하지만 아놔, 모르시는 말씀, 인공위성 따위가 어찌 선계로 가는 길을 안내할 수 있단 말인가.-129쪽

가지고 싶은 건 한없이 많은데 주고 싶은 건 하나도 없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라. 끝없이 먹기는 하는데 절대로 배설은 하지 않는 습성 때문에 뱃속에 똥만 가득 들어차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139쪽

오늘만 어린이날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초등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다시 몇 군데의 학원을 순례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때 초등학생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라. 학원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초등학생들의 표정이 하루 종일 잡무에 시달리다 집으로 돌아가는 40대 일용직 노동자의 표정과 흡사하다. 어린이는 나라의 새싹? 아놔, 새싹에 비료를 너무 많이 주면 말라 죽는 줄도 모르냐?-148쪽

오늘도 인간반성
티끌 같은 노력으로 태산 같은 보상을 바라지 말라. 그런 사람이 축적할 수 있는 재산은 티끌같이 미흡한 존재이유와 태산같이 거대한 불평불만뿐이다.-179쪽

후배가 담임을 맡았던 학생 중에서 시험을 보면 수학점수만 월등하게 높은 녀석 하나가 있었는데 후배의 판단에 의하면 어떤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높은 점수를 얻어낼 재목이 아니었다. 어느 날 후배는 은밀하게 녀석을 다그쳤다. 솔직히 말해라 커닝했지. 그러나 녀석의 대답은 의외였다. 마음을 비우고 찍었어요. 후배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언어영역은 왜 점수가 그 모양이냐. 녀석이 대답했다. 아는 글자가 많이 나오면 마음이 안 비워져요. 실화다.-194쪽

인간반성
대부분의 동물들은 먹이가 생기면 서열이 높은 우두머리가 먼저 차이를 차지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닭의 우두머리는 다르다. 서열이 낮은 놈들이 먹이를 배불리 먹을 때까지 주위를 경계해 주고 자기는 제일 나중에 먹이를 먹는다. 우리는 가끔 머리가 나쁜 사람을 닭대가리에 비유하지만 탐욕에 사로잡혀 부모형제도 몰라보는 인간들이 늘어가는 현실을 생각하면, 아놔, 만물의 영장, 닭과 함께 살아갈 면목조차 없는 입장이다.-209쪽

지성을 초월한 대화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인간.
조까. 명색이 새인데 날아서 쫓아가지 미쳤다고 걸어서 쫓아가냐-뱁새.-222쪽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진리는 아니다. 때로는 지식의 백태가 끼어 정작 보아야 할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238쪽

인간은 '알았다'에 의해서 어리석어지고 '느꼈다'에 의해서 성숙해지며 '깨우쳤다'에 의해서 자비로워진다. 그런데도 제도적 교육은 후덜덜, 죽어라 하고 '알았다'를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한다. 즐!-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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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8-07-1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읽어봐야 할텐데...ㅜ.ㅜ

마노아 2008-07-17 17:37   좋아요 0 | URL
학교 도서관에 신간 도서 오던 날 바로 찜하고 대출해 왔어요. 히힛^^

순오기 2008-07-1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외수 책은 한권도 안 읽어서 이양반을 알수가 없어요.
밑줄 긋기만 봐도 좋은데요~ 수고하셨어요.^^

2008-07-18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08-07-17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용어도 좀 짱으로 아시는 듯^^ 전 무릎팍 도사에 나와서 나방에게 한 말이 기억에 남아요. 저녁 무렵이면 자신의 창가에 나방들이 모이는데 이외수 선생님이 그러셨대요. 오늘은 야동 안 튼다. 일찍 들어가 자라. 입담도 보통이 아니시고 참 멋있으세요. 물론 몇몇 생각들은 저와 좀 안 맞지만.

마노아 2008-07-18 00:02   좋아요 0 | URL
저보다 더 많이 아시더라구요. 연구하시나봐요^^ㅋㅋㅋ
야동 얘기 책 속에 아주 많이 나와요. 담배 하루에 7갑을 피는데 2갑으로 줄였다면서, 이제 야동만 줄이면 된다고^^...

연두부 2008-07-1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외수씨 책은 한권도 안읽어 봤는데..함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ㅎㅎ..책 살때는 꼭 노아님 땡스투 누르고 삽죠..

마노아 2008-07-18 14:26   좋아요 0 | URL
엽기적인(?) 도인의 풍모를 자랑하시는 분이죠^^ 알라디너들의 우정의 땡스투로 무르익는 독서예요^^;;;
 
눈물나무 카르페디엠 16
카롤린 필립스 지음, 전은경 옮김 / 양철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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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에는 빗물이 필요하지 않아. 우리 이야기와 여기서 흘린 눈물만 먹고도 자라지."-9쪽

"이 사람들에게는 법이 중요한 게 아니야. 오로지 우리가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의 문제일 뿐이지. 일할 사람이 없어 과일이 나무에 매달린 채 썩어 간다면 농부는 네가 필요해. 그래서 네가 어디서 왔는지, 체류 허가를 받았는지,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아. 자기 일꾼들이 합법적인 노동자들이라는 걸 이민국에 증명하기 위해 서류를 위조하기도 한다고. 그러다가도 우리 아이들이 자기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되면, 세금을 제대로 내서 학교 재정을 돕는 불법 체류 노동자들은 적다는 말을 갑자기 끄집어내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순식간에 깃애충 취급을 받고 추방을 당해야 해."-99쪽

"네가 여기에 있는 게 불법이라고 누가 그래? 여기는 처음엔 에스파냐 영토였고, 그 뒤에는 멕시코 소유였어. 로스엔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나 산타아나와 같은 에스파냐 식 이름을 누가 붙였을 것 같아? 미국 사람들은 여기서 금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1846년에 이 땅을 빼앗았어. 오로지 탐욕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재산을 몰수당했어. 멕시코로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고 했대. 여기가 고향인데도 말이야. 그링고들이 더 강하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어. 우리가 미국 국경을 넘은 게 아니라, 미국이 우리의 국경을 무시한 거야. 내 생각에 이곳은 도덕적으로 멕시코 땅이야. 그러니까 네가 아니라 그링고들이 여기서 불법 체류 하는 거라고."-103쪽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에 도착한 청교도들도 불법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미국의 조상으로 간주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대륙에 있는 모든 백인들도 예전에는 불법 이민자들이었습니다. 백인들의 아메리카는 4천만 라티노와 함께할 때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그들에게 보여줍시다! 말로 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된맛을 봐야 합니다!"-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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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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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배낭을 등 위로 추켜올리며 황폐한 땅을 건너다보았다. 길은 텅 비어 있었다. 밑의 작은 골짜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잿빛 뱀 같은 강이 있었다. 어김없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변에는 죽은 갈대들이 짐짝처럼 쓰러져 있었다. 괜찮니? 남자가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암회색 빛 속에서 아스팔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을 질질 끌며 재를 헤치고 나아갔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다.-10쪽

남자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괴멸하는 시커먼 우주의 진공. 그리고 어딘가에는 쫓겨다니며 숨어 있는 여우들처럼 몸을 떠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와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149쪽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어쩌면 남자는 그 자신이 소년에게는 외계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는 사라진 행성 출신의 존재. 그 행성에 고나한 이야기는 수상쩍었다.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를 구축할 때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자신보다 이 점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꿈을 기억하려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은 것은 꿈의 느낌뿐이었다. 어쩌면 그 생물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경고하러? 그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 지금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174쪽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이해하겠니? 하지만 넌 포기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215쪽

아팠죠, 그죠?
그래. 아팠어.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307쪽

남자는 카트의 손잡이를 엇갈려 쥔 두 팔 위에 이마를 묻고 기침을 했다.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걸음을 멈추고 쉬는 횟수가 늘었다. 소년이 남자를 지켜보았다. 다른 세상이었다면 아이는 이미 남자를 자신의 삶에서 비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다른 삶이 없었다. 소년이 밤에 잠에서 깨 남자가 숨을 쉬는지 귀를 기울이며 확인한다는 것을 남자도 알고 있었다.-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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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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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산소가 부족하고 살갗 밑에 피가 말라붙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시커멓게 변해갔다. 이 극적인 변화 때문에 이 병은 ‘흑사병’이라고 알려졌다. 환자는 보통 며칠 동안 몹시 괴로워하다가 죽었다.
상당히 그럴듯한, 그러나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병은 중국 남부에서 발생했고 몽골 병사들이 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병의 세균은 벼룩 속에 살며, 벼룩은 쥐의 몸을 타고 남쪽에서 오는 식량이나 다른 공물과 함께 옮겨다녔다. -343쪽

중국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 그리고 훗날 다른 도시의 수많은 쥐는 이 세균에게 완벽한 거주환경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쥐가 오랫동안 인간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동물이라 이 병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31년 연대기 기록자는 허베이성(하북성) 주민의 90%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은 이 병 때문에 인구가 1/2 내지 1/3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13세기 초에 이 나라에는 1억 2300만 명 정도가 살았는데, 14세기 말에는 인구가 6,5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면서 병도 따라갔다. 이런 식으로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페스트는 교역으로 옮겨지는 전염병이었다. 몽골이 상인을 위해 건설한 도로와 역참 또한 의도와 관계 없이 벼룩, 따라서 병 자체가 이동하다 머무는 지점으로 이용되었다. -344쪽

1348년 페스트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그해 6월이 되자 잉글랜드에 진입했다. 1350년 겨울에는 페로 제도에서 북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를 통과하더니 그린란드에까지 이르렀다. 페스트는 아이슬란 정착민의 60%를 죽인 것으로 보이며, 그린란드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바이킹 거주지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346쪽

페스트는 로마의 몰락 이후 유럽을 지배했던 사회질서를 거의 파괴해 버려, 대륙에는 위험한 무질서만 남았다. 이 병은 도시 거주자를 더 쉽게 공략했기 때문에 교육 받은 계급과 숙련된 장인들이 많이 죽었다. 도시 안이든 밖이든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폐쇄된 공간은 병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몰살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유럽의 수도원 제도, 나아가서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는 이 비극의 충격으로부터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347쪽

사람들은 이 병의 진짜 원인이나 전염 경로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 도시 안팎의 교역이나 사람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게 되었다.
즉시 교역, 통신, 운송이 중단되었다. 유럽 전역의 지방당국은 페스트의 전파를 막고 대중의 반응을 통제하기 위해 페스트 법을 만들었다.

외교사절단과 편지도 오가지 않았다. 몽골 운송체계의 가동이 중단되자 가톨릭 교회와 중국 선교단의 연락이 끊겼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외국인이 병을 가져온다고 비난했고, 이로써 국제교역은 더 위축되었다. 유럽에서 기독교도는 다시 유대인을 공격했다. 유대인은 교역이나 동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이 두가지는 또 페스트하고도 관계가 깊었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을 집에 가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끌어내어 죄를 자백할 때까지 형틀에 묶고 고문하기도 했다. 1348년 7월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유대인을 보호하고 유대인 박해를 중단하라는 교서를 내렸음에도 유대인 탄압은 오히려 증가했다. -348쪽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중국의 황금 가족은 러시아와 페르시아로부터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각 지파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자 서로 맞물리는 소유제도도 붕괴했다. 페스트는 국토를 유린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켰고, 교역과 공물을 차단하여 몽골의 황금 가족으로부터 일차적인 소득원을 빼앗았다. 몽골인은 거의 100년 동안 서로간의 물질적 이해관계 덕분에 그들을 가르는 정치적 단층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통일ㅇ성이 흔들릴 때에도 문화적, 상업적으로는 통일된 제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페스트의 살육이 시작되면서 중심이 버틸 수가 없었고, 그 결과 복잡한 체제는 붕괴했다. 몽골 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제국 전체를 끊임 없이 빠르게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349쪽

몽골인이 외국인 정복자이면서도 때로는 자기들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신민을 큰 탈 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물자가 계속 대규모로 흘러다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스트의 여파로 교역도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지파에서 지원병을 보내줄 가능성도 사라지자 칭기스칸의 황금 가족 각 지파는 신민이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매우 가변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꾸려나가야 했다.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 이점이 사라지자,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인은 자신의 신민과 결혼을 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따름으로써 권력과 정통성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나갔다.
-349쪽

조정의 관리들은 중국인에게 자유를 너무 많이 주었고, 몽골인이 지나칙 중국 생활에 동화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중국 문화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대신 자신들의 이질적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언어, 종교, 문화, 중국인과의 혼인 관계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극단적인 탄압을 하자 중국 신민은 불만이 늘었으며, 몽골 통치자들을 더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몽골인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여 특혜를 주었다.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351쪽

중국의 몽골 칸들은 페스트의 확산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고 신민들로부터도 점차 고립되자 티베트 불교의 영적 세계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중국의 몽골 통치자들이 자신의 영성과 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동안 수도의 ‘금단의 도시’의 담 너머 바깥 사회는 붕괴하고 있었다. 가장 뚜렷한 증상은 몽골 당국이 그렇게 힘겹게 또 꼼꼼하게 만들어낸 화폐제도를 통제할 힘을 잃었다는 점이었다. 몽골 행정부가 약해진다는 조짐만 보여도 지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가치가 폭락하는 대신 구리와 은의 가치는 상승했다. 인플레이션도 매우 심해져 1356년에 이르자 지폐는 가치를 거의 잃고 말았다. -352쪽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붕괴했다. 각각 1335년과 1368년에 몽골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페르시아 일 칸국의 몽골인들은 사라졌다. 죽음을 당하거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신민에게 흡수된 것이다. 중국에서 대칸 토곤 테무르(순제)와 약 6만 명의 몽골인은 명의 반군을 피해 가까스로 달아났다. 그러나 뒤에 남은 약 40만 명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중국인에게 흡수되었다. 간신히 몽골로 돌아온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목가적인 유목민 생활을 계속했다. 121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을 다스렸음에도, 그저 남쪽 여름 숙영지에서 조금 오래 머물다 온 듯이 다시 옛날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의 킵착칸국은 작은 무리로 나뉘어 이후 400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서서히 쇠퇴해갔다.
-353쪽

명의 통치자들은 몽골이 중국에 정착하도록 권유했던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상인들을 쫓아냈다. 또 그렇지 않아도 힘을 잃어가던 지폐를 완전히 없애고 금속화폐로 돌아감으로써 몽골이 세워놓았던 상업체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몽골이 후원했던 티베트의 라마교 계열의 불교도 배격하여 그 자리에 전통적인 도교와 유교의 사상과 전통을 집어넣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몽골의 교역체계를 소생시켜다 실패하자 대양을 다니던 배들을 태우고, 외국인의 중국 여행을 금지하고, 외국인은 못 들어오고 중국인은 못 나가게 할 목적으로 국민 총생산의 큰 부분을 투여하여 육중한 새 성벽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 살던 수천 명의 중국인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354쪽

명은 새로운 몽골 침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중국식 도시라 할 수 있는 남쪽의 난징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미 통일중국의 통치는 북부의 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주민 다수의 태도와 행동방식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다. 명은 결국 옛 몽골의 수도 칸발릭으로 돌아갔다. 대신 명은 몽골의 외양을 제거하여 도시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금단의 도시’(자금성)를 세우려 한 것이다.
-354쪽

티무르의 후손은 역사에서 인도 무굴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519년 무굴 왕조를 창건한 바부르는 칭기스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13대손이다. 무굴 제국은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치세(1556-1608)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칭기스 칸과 마찬가지로 행정의 천재였을 뿐 아니라 무역도 중시했다. 악바르는 원성의 대상이던 지즈야 세금, 즉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게 물리는 인두세를 철폐했다. 그는 기병대를 전통적인 몽골의 십진법에 따라 편성했으며(5000명까지), 공무원 체계를 확립하여 공과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했다. 몽골이 중국을 당대에 가장 생산적인 제조와 교역의 중심으로 만들었듯이, 무굴은 인도를 세계 최대의 제조와 교역 국가로 만들었으며, 무슬림과 힌두 전통과는 반대로 여성의 지위를 높였다. 악바르는 종교에 대한 보편주의적 태도를 유지했으며, 모든 종교를 하늘에는 하나의 신이 있고 땅에는 하나의 황제가 있다는 내용의 하나의 ‘거룩한 신앙’, 즉 디니 일라로 융합하려 했다.
-356쪽

아주 많은 제국들이 정치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몽골 제국의 환상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여론 역시 몽골 제국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완강하게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몽골 제국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 곳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또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곳은 유럽이다. 마지막 칸이 중국을 통치하고 나서도 100년 이상이 지난 뒤인 1492년 유럽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이 바다를 통해 대칸의 몽골 조정과 다시 접촉하여 허물어진 교역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설득했다. 몽골의 교통체계가 무너지면서 유럽인은 제국의 몰락과 대칸의 패배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몽골 조정으로 가는 육로는 무슬림이 막고 있지만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를 하여 ‘세계의 바다’를 건너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땅으로 가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357쪽

콜럼버스에게 마르코 폴로는 영감이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안내자였다. 그는 몇 개의 작은 섬을 찾은 뒤에 쿠바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대칸의 영토 가장자리에 이르렀고 곧 몽골의 카타이 왕국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몽골인의 대칸의 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몽골인의 나라 남쪽에 자리잡은 인도 주민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인도인)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357쪽

황화의 공포는 필리핀인이나 한국인 등 어떤 집단에도 적용될 수 있었지만, 그 가운데도 중국과 일본이 가장 위험해 보였다. 일본은 산업화를 이루고 대군을 육성했다. 중국은 식민지화를 계속 거부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아시아인은 서구 대중의 눈에 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내내 유럽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공포가 쌓여갔다. -364쪽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 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근대 유럽은 새로 발견한 식민지 정복의 힘과 스스로 내세운 세계 지배의 임무 때문에 아시아의 정복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칭기스 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다.

유럽 과학자나 정치가들과는 정반대로 이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칭기스 칸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발견했다. 이것은 유럽의 우월성이라는 교조를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365쪽

20세기 전반에 점차 아시아의 지도자로 자처하던 일본은 유럽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면서 범몽골주의에 강하게 끌리기 시작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칭기스 칸이 사무라이 출신으로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뒤 고향을 떠나 초원지대 유목민 사이에 살면서 힘을 길러 세계 정복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다.
-367쪽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범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몽골 민족의 어머니가 공격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그녀를 빼앗기자 어린 테무진은 자신의 젊은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되찾으려 했다. 테무진은 결국 그녀를 구했으며, 이후 평생 동안 자신의 민족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싸웠다. 이를 위해 쉬지 않고 외부인들을 공격하며 돌아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테무진은 세계를 바꾸었고 민족을 창조했다. -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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