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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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이 입성했던 1220년 그날부터 1920년에 소비에트 군대가 진입할 때까지 꼭 700년 동안 칭기스 칸의 후손들은 칸과 아미르로서 부하라를 통치했는데, 이 통치자 가문은 역사상 가장 긴 가족 왕조로 손꼽힌다.
-48쪽

초원 문화에서는 냄새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끌어안거나 입을 맞추지만 초원의 유목민은 뺨에 입을 맞추는 것과 흡사한 동작으로 서로 냄새를 맡는다. 냄새 맡기에는 매우 깊은 감정적 의미가 담기는데, 여기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루어지는 가족간의 냄새 맡기에서부터 연인 사이의 성적인 냄새 맡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이 있다. 각 사람의 숨결과 독특한 체취는 그 사람의 영혼의 일부로 여겨진다.
-53쪽

초원지대의 모든 부족 가운데 몽골족과 가장 가까운 친족은 동쪽의 타타르족과 거란족, 그리고 더 동쪽으로 만주족,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족이었다. 이 세인종 집단은 시베리아의 일부 부족들과 문화, 언어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들 모두가 시베리아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55쪽

나이든 여자와 아기는 보통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싸울 수 있는 나이의 남자는 보통 가장 빠르고 튼튼한 말을 타고 가장 먼저 달아났다. 그들이 죽을 확률이 가장 높았고, 전체 집단의 미래의 생계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58쪽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물자였다.
-59쪽

다른 군대와는 달리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이나 호수에서도 쉽게 움직이고 심지어 싸움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은 얼어붙은 볼가 강이나 도나우 강이 외침의 방어선 노릇을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몽골족에게는 오히려 상대의 방비가 가장 허술한 철에 말을 타고 성벽까지 다가갈 수 있는 간선도로가 되었다.
-66쪽

부르칸 칼둔의 숲에 숨은 테무진은 그의 평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내의 납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부르테를 다시 빼앗아올 희망을 접을 수도 있었다. 사실 이것이 예상되는 선택이다. 그의 작은 집단으로는 강력한 메르키트에게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부인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의 어머니를 납치했듯이 테무진도 여자를 납치해야 했다. 더 힘센 남자들에게 부인을 빼앗긴 사람한테 자발적으로 딸을 내줄 가족은 없었기 때문이다.
-79쪽

7은 몽골족에게 불운한 숫자
-91쪽

칭기스 칸은 주권자를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128쪽

13세기에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몽골 남부 지역에는 수많은 독립 국가와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세계 인구의 1/3이 살고 있었다. 주르첸 왕국은 인구가 약 5,000만으로, 현재 중국에 포함된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왕국들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나라였다.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영토는 수백 년 중국 문명의 상속자인 송 왕조의 행정부(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송!) 관할하에 있었으며, 그들은 항저우(당시에는 임안이라고 불렀다.)를 수도로 삼아 중국 남부에서 약 6,000만 명의 인구를 다스리고 있었다. 몽골 고원과 송나라 사이에는 유목민의 국가들이 한줄로 늘어서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다.
-145쪽

몽골인은 장거리 여행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반드시 필요한 것만 지니고 다녔다. 이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전통적인 양털 겉옷 밑에 바지를 입고, 귀덮개가 달린 모피 모자를 쓰고, 밑창이 두꺼운 승마용 장화를 신었다. 이렇게 각 전사는 악천후에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옷을 입었을 뿐 아니라, 불을 피울 수 있는 부싯돌, 물과 젖을 담을 수 있는 가죽 그릇, 화살촉을 날카롭게 갈 수 있는 줄, 짐승이나 포로를 묶을 수 있는 밧줄, 옷을 수선할 수 있는 바늘, 뭔가를 자르는 데 사용하는 칼과 자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가죽 부대 등을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십호마다 작은 천막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다.
-147쪽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 점에서 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군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행군하는 보병 없이 무장한 기병만 있다는 뜻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나라의 군대는 대개 다수의 전사가 보병이었다.
몽골군의 두 번째 독특한 특징은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 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가축의 젖을 짜고, 가축을 도살하여 식량을 만들고, 사냥과 약탈을 통해 배를 채웠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전사들이 불을 피우거나 음식을 조리하느라 멈추는 일이 없이 열흘 동안 여행을 할 수 있으며, 말의 피를 마시고, 각 사람이 5kg의 마른 젖 덩어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매일 그 가운데 500g 정도를 물이 담긴 가죽 용기에 풀어 식사를 해결한다고 전했다. 전사는 가늘게 자른 육포와 마른 응유를 가지고 다니다 말을 탄 채로 먹었다. 새로 고기가 생겼는데 조리할 시간이 없으면 날고기를 안장 밑에 넣었다. 그러면 곧 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졌다. -148쪽

주르첸 병사들과 비교할 때 몽골군은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했다. 몽골족은 고기며 우유며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꾸준히 했으며, 적들은 여러 가지 곡물로 이루어진 죽을 먹었다. 농민 전사들은 곡물 식사를 하기 때문에 뼈의 발육이 좋지 않았고, 이도 썩었고, 몸에 힘이 없었고, 병에 잘 걸렸다. 반대로 몽골 병사는 아무리 가난해도 주로 단백질을 먹었으며, 따라서 이와 뼈가 튼튼했다. 탄수화물이 많은 식사를 하는 주르첸 병사들과는 달리 몽골 병사들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하루 이틀은 너끈히 버텼다.
전통적인 군대는 긴 열을 이루어 똑같은 길을 가고, 식량을 잔뜩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몽골군은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서 이동했다. 그래야 가축이 풀을 충분히 뜯을 수 있고, 병사들이 사냥을 할 기회도 최대한 늘어났기 때문이다. -149쪽

몽골족은 우월한 무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될 수 없다. 한쪽 편에서 유용하게 써먹은 무기는 전투를 몇 번만 하고 나면 상대편도 사용하게 된다. 몽골의 승리는 작은 무리를 지어 다니던 유목민이 수천 년 동안 다져온 단결과 규율에서 나온 것이며, 지도자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디서나 전사들은 지도자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칭기스 칸은 부하들에게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적 목적으로 삼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에게 쉽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역사 속의 다른 장군이나 황제들과는 달리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함부로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칭기스 칸이 군대를 위해 만든 가장 중요한 규칙들은 인명 손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몽골 전사는 전장의 안팎에서 죽음, 부상, 패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생각만 해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3쪽

중국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쟁의 승리는 하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얻는 것이었다. 칭기스 칸이 계속 승리를 거두어나가자 중국의 농민이나 주르첸 전사들은 그가 하늘의 명령에 따라 싸우는 것이며, 그에게 대항하는 것은 곧 하늘에 대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61쪽

13세기 무슬림의 땅에는 아랍, 투르크, 페르시아 문명이 결합되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모여 살고 있었으며, 이 나라들은 천문학이나 수학에서부터 농학이나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또 일반 주민의 문맹률도 세계에서 가장 낮았다. 사제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유럽이나 인도, 정부 관료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중국과 비교할 때 무슬림 세계에는 어느 마을을 가나 쿠란을 읽고 무슬림 법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은 있었다. 유럽, 중국, 인도가 지역 문명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면, 무슬림은 상업, 기술, 일반 학문의 높은 수준으로 볼 때 세계 수준의 문명에 가장 근접해 잇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머지 세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추락할 거리도 그만큼 길었다. 몽골 침략군의 말발굽은 다른 어느 곳보다 이곳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174쪽

이 시대의 문명화된 군대가 공포를 자아내는 행동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몽골군의 행동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원정은 그들이 피에 굶주린 행동을 했거나 사람들 앞에서 잔혹성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막강한 군대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들과 싸워 전례 없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184쪽

몽골군이 정복한 도시의 유적을 조사해보면 실제 주민의 수가 희생자로 계산된 주민 수의 1/10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건조한 사막 토양이기 때문에 뼈가 수백 년, 때로는 수천 년씩 보존된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몽골군이 살육했다고 하는 수백만 명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칭기스 칸은 주민 살육자라기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하거나 공포심을 자아내는 목적 외에 전략적인 목적에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186쪽

도시 주민에게는 일 년 내내 항상 먹을 것을 공급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식량을 생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고비 사막 남쪽에서 큰 대가를 치르고 들여오는 물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카라코룸은 넓은 초원지대에 있었으므로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가축은 산이 있는 곳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도시는 철마다 자리를 옮길 수가 없었다.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은 이런 문제들에 시달리다 결국 사라지고 만다.
-206쪽

몽골인이 기독교에 끌린 데는 예수라는 이름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예수라는 말은 몽골의 신성한 숫자인 9를 가리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며, 왕조의 창건자라고 할 수 있는 칭기스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의 이름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기독교인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카라코룸이라는 작은 도시는 아마 당시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개방되고 관용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종교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자기 신앙을 지키는 곳은 달리 찾아볼 수 없었다.
-208쪽

말을 탄 러시아의 공후들은 반짝거리는 창과 검, 화려한 기를 들고 문장이 박힌 옷을 자랑하며 육중한 군마 위에 앉아 있었다. 이 유럽의 군마들은 힘의 과시를 위해 키웠기 때문에 연병장에서 고귀한 승마자의 갑옷 무게는 어렵지 않게 감당했지만 전장에서 속력이나 민첩성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러시아 귀족은 육중한 금속 갑옷을 입어도 전장에서 다른 유럽 귀족을 만났을 때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상대방 역시 비슷한 과시용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에서 보병이 패주하는 상황이라 그들 역시 달아나야 했다. 그들의 말은 아름답기는 했지만 무거운 짐을 싣고 오래 달릴 수는 없었다. 몽골군은 철갑을 두른 전사들을 따라잡았고 러시아의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공후들은 하나씩 죽음을 당했다. 몽골군은 전투가 시작되었던 흑해로 돌아가는 길 내내 러시아군을 추적하여 도륙했다. 1224년의 노브고로드 연대기에 따르면 몽골군과 싸우러 나간 대군 가운데 오직 "1/10만 고향에 돌아왔다." 거의 1000년 전 훈족이 유럽을 공격한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 군대가 유럽을 침공하여 대군을 완파한 것이다.
-216쪽

몽골은 늘 똑같은 방식을 따랐다. 어떤 영토를 원정할 때면 먼저 공식 사절을 보내, 항복하여 몽골 가족에 합류하고 대칸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한다. 상대가 동의를 하면 사절은 새로운 봉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할 뿐 아니라, 권력과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허용했다. 다만 속국은 이런 보호의 대가로 모든 재산과 물자의 10%를 몽골에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항복 제안을 받아들이는 도시는 거의 없었다.
-221쪽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극도의 사악함" 때문에 죄 없는 자신들이 몽골인의 진노의 피해를 입고 있다고 비난했다.
-236쪽

유럽인은 자신들의 문명의 경계를 위협하는 몽골군을 물리칠 수는 없었지만, 국내의 적이라고 상상하는 유대인은 제압할 수 있었다. 요크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도시마다 성난 기독교인 군중이 유대인 거주 구역을 공격했다. 기독교인은 몽골인이 원정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방법으로 유대인을 벌주려 했다. 그들은 유대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간신히 도시를 빠져나온 유대인은 피난처를 찾아 떠돌았지만, 어디를 가나 더 심한 박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피난민 가운데 유대인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교회는 유대인에게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남들과 구별되는 옷을 입고 상징물을 달라고 명령했다.
-237쪽

몽골군은 도나우 강 너머를 정찰하기는 했지만 서유럽 전면 침공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1241년 12월 11일, 우구데이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카라코룸으로부터 6,500km 떨어진 유럽의 몽골군에게 4주에서 6주 내에 전해졌다. 차가타이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칭기스 칸이 죽고 나서 불과 14년이 지난 시점에 아들 넷이 모두 죽은 것이다. 그러자 칭기스 칸의 손자들은 다음 대칸이 되기 위한 경쟁을 계속하기 위해 고향으로 달려갔다. 가문들 간의 투쟁은 이후 10년간 계속된다. 적어도 이 10년 동안은 세계가 몽골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238쪽

몽골의 남자들이 전장에 머물며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느라 바쁠 때 여자들은 제국을 운영했다.
우구데이는 대칸으로 재위하는 동안 술에 취하는 일이 너무 잦아 제국을 제대로 이끌 수 없었다. 그는 제1부인은 아니었지만 가장 유능했던 투레게네에게 행정권을 점차 넘겨주었다. 1241년에 우구데이가 죽자 투레게네는 공식 섭정이 되었다. 1251년까지 이후 10년간 그녀는 다른 여자들 몇 명과 더불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관리했다. 이 여자들 가운데 몽골족 출신은 없었다. 모두 정복당한 초원지대 부족 출신으로 칭기스 칸 집안에 시집을 왔다. 또 이 여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성도 종교도 권력투쟁의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아들의 손에 제국 전체를 넘겨주려고 싸웠다. -240-241쪽

칭기스 칸 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 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릴라이가 대칸 자리에 오르며, 나머지 아들 훌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Assassins-이들의 명성 때문에 훗날 유럽으로 건너와 암살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249쪽

아마 이스마일파가 대마초를 중시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핫샤신, 즉 "하시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름은 아사신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살인자들이 실제로 하시시에 취해서 행동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이름은 고관을 암살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여러 언어에 스며들었다.
-264쪽

몽골군은 불과 2년 만에 서쪽의 유럽 십자군과 동쪽의 셀주크 투르크가 200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들은 아랍 세계의 심장부를 정복했다. 그 이후 2003년 미군과 영국군이 들어올 때까지 무슬림이 아닌 부대가 바그다드나 이라크를 정복한 일은 없었다.
-271쪽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276쪽

쿠빌라이는 교육을 잘 받았고 중국 문화가 지배하는 농경지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황금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전적인 신임이나 인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쿠빌라이는 건물이나 도시를 더 좋아했다. 심지어 중국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이렇게 몽골의 전통적 생활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늘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277쪽

카라코룸은 불과 30년 동안 몽골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뒤, 몽골인 자신의 손에 의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어버렸다. 쿠빌라이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카라코룸은 세계의 중심이고 축이었다.
-281쪽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와 같은 수준의 군사적 기술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의 집안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중국식 수도를 건설하고, 중국식 이름을 채택하고, 중국식 왕조를 창건하고, 중국식 행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중국인보다,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는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285쪽

뭉케가 아버지 톨루이에게 대칸의 자리를 추서했듯이 쿠빌라이는 그에게 중국 황제 자리를 추서했다.(툴루이는 예종이 되었다. 참고로 칭기스 칸은 태조, 우구데이는 태종, 구육은 정종, 뭉케는 헌종이며, 쿠빌라이는 세조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또 그들의 중국식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는데, 그 결과 그들의 모습은 몽골의 전사라기보다는 중국의 현자를 닮게 되었다.
-288쪽

쿠빌라이 칸의 행정부는 지주에게 소유권을 보장하고, 세금을 낮추고, 도로와 통신을 개선했다. 몽골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송나라의 가혹한 형법을 완화했다. 전체적으로 쿠빌라이의 치세 30여 년 동안 처형된 범죄자는 2500명 이하였다. 평균 사형 건수로 보자면 현대의 중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의 사형건수보다 훨씬 적다.
-292쪽

몽골 법은 자백을 얻어낼 목적으로 고문을 하려면 그 전에 용의자가 특정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단순한 의심 이상의 실체적 증거를 쥐고 있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몽골이 고문의 사용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시기에 유럽의 교회와 국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범죄에 증거를 불문하고 고문을 시행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293쪽

과거의 행정제도는 보수를 받지 않는 학자 겸 관리들에 의존했다. 이들은 일을 해주거나 승인 도장을 찍어주는 대신 사람들한테서 돈을 강탈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일상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직에는 보수를 주는 직원을 고용했다. 이들의 보수는 몽골 영토 전역에서 표준화되었으며, 다만 생활비 차이를 고려하여 지역마다 약간 다르게 지급했다.
합의를 전제로 한 회의체와 보수를 지급하는 공무원 제도를 만들려는 노력은 중국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몽골 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명나라는 위에서 아래로 다스리는 방식을 선호하여 권력을 잡자마자 회의제를 버리고 전통적인 관료제로 돌아갔다. 그 이후 중국 역사에서는 이러한 참여 행정 실험의 길이 막혀 있다가, 20세기에 이르러 공화국 창건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지방 회의체, 토론, 보수를 받는 행정가, 시민 참여 정부 등의 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296-297쪽

쿠빌라이는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마르코 폴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폐가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뽕나무 껍질로 지폐를 만든다고 묘사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종이임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몰랐다. 지폐는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그 가치를 기록하고 주홍색 도장을 찍었다. 지폐의 첫 번째 장점은 당시 사용되던 주화에 비해 다루거나 운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었다.
-297쪽

몽골인은 유교나 전족 같은 일부 중국 문화는 일관되게 거부했다. 쿠빌라이는 실용적 가치가 있는 사상이나 제도를 찾아 오래 전 중국 역사까지 뒤지는 사람이었다. 쿠빌라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학문과 문화 가운데 몇 가지 유형을 장려하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들로 이루어진 한림원을 재건했다. 그는 1269년에 몽골 언어 학교를 세웠으며, 1271년에는 칸발릭에 몽골 국립대학을 건립했다.
몽골 조정은 몽골어만이 아니라, 아랍어, 페르시아어, 위구르어, 탕구트어, 주르첸어, 티베트어, 중국어를 비롯하여 덜 알려진 언어들을 위한 서기도 두었다. -298쪽

몽골은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한 방법으로 문맹 퇴치를 장려했다. 쿠빌라이 칸은 농민의 자식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공립학교를 만들었다. 몽골은 겨울에는 농민의 자식들도 배울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교사들은 그들에게 고전 중국어 교육을 시키지 않고 구어를 사용하여 실용적인 교육을 했다. 몽골 왕조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공립학교가 2만 166개 세워졌다. 서구에서는 100년이 더 지난 뒤에야 작가들이 구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부가 보통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공교육 책임을 떠맡은 것은 거의 5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299쪽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배우와 가수 같은 공연 예술가들이 매춘부나 첩처럼 존경도 받지 못하고 지위도 낮았다. 그러나 몽골 통치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전문 직업인으로 격상하고 공연장이 장터, 매음굴, 선술집에 한정되지 않도록 극장 지구를 조성했다. 중국의 연극과 몽골의 음악 후원이 결합되면서 훗날 경극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301쪽

쿠빌라이의 일본 침공은 실패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회적, 정치적 삶에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몽골군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화적 통일을 이루고 군국주의적 정부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몽골은 언제 그런 실패가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더 손쉬워 보이는 목표물을 찾았다.
몽골의 지상 정복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열대의 더위와 낯선 지형 때문에 큰 고초를 겪으면서도 미얀마, 베트남 북부의 안남, 라오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베트남 남부의 참파나 인도 해안의 말라바르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몇 개 왕국은 스스로 몽골 지배에 복종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런 복종은 현실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몽골에는 그들을 다스릴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307쪽

몽골인의 상업적 영향은 그들의 군대보다 훨씬 멀리까지 퍼져갔으며, 쿠빌라이 칸 치세에는 몽골 제국이 ‘몽골 회사’로 바뀌었다. 13세기 내내, 그리고 14세기 초에 몽골인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고 30 내지 50km마다 자리잡고 있는 대피소에 물자를 쟁여두었다. 역참은 운송용 동물만이 아니라 상인이 험한 지형을 헤쳐나가도록 도와주는 안내인까지 제공했다. -317쪽

몽골 엘리트가 교역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전통과 뚜렷한 단절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전통 귀족은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불명예스럽고, 더럽고, 종종 부도덕하다고 멸시했다. 권력이나 신앙을 독점한 자들이 낮추어보는 육체노동 작업과 같은 급이었다. 나아가서 이 시대 봉건 유럽의 경제적 이상은 모든 나라가 자족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각 장원이 최대한 자급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봉건체제에서 수입된 물자에 의존하는 것은 곧 국내 경제의 실패를 뜻했다.
그러나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대신 중국 전통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 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323쪽

역사상 대부분이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 로마는 라틴어, 신, 와인, 올리브 기름, 밀농사를 강요했다. 밀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터키의 에페소스에서 독일의 쾰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모든 도시는 도시 설계와 건축양식이 똑같았다. 시장과 목욕탕으로부터 기둥이나 문간의 아주 미세한 곳까지 마찬가지였다. 다른 시대로 가면 영국은 봄베이에 튜더 왕조식 건물을 지었고, 네덜란드는 카리브 해에 풍차를 세웠고,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자신의 양식을 적용한 성당과 광장을 만들었고, 미국은 파나마에서 사우디아바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독특한 주거단지를 건설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 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정을 추적할 수 있다. -325쪽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몽골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 평화 기간에도 똑같은 관행을 유지하여 유목민 사회의 이동 원칙을 생활과 문화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적용했다. -325쪽

전통적인 제국은 한 도시에 부를 축적했다. 모든 길은 수도로 통했고, 늘 가장 좋은 것은 수도에 이르렀다. 한 도시가 제국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로마나 바빌론 같은 이름은 제국 자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제국 내에서 물자와 사람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326쪽

몽골은 문화를 휴대 가능한 형태로 바꾸었다. 단순히 물자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은 상품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328쪽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 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이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333쪽

몽골이 위대하다는 이미지는 1390년 경 제프리 초서가 가장 분명하게 표현했다. 초서는 외교적인 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자신의 독자들 다수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영어로 쓰인 첫 책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가장 긴 이야기는 칭기스 칸의 생애와 모험을 로맨틱하고 환상적으로 묘사한다.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그는 왕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태어난 신앙에 따라
스스로 맹세한 법을 지켰다.
게다가 강인하고, 지혜롭고, 부유했으며,
누가 보아도 정이 많고 의로웠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자비롭고, 명예로웠으며,
그의 감정은 중심이 잡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집의 어떤 젊은 남자 못지 않게
젊고, 생기있고, 강하며, 전투에서 앞서고자 했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고 운도 좋았으며,
늘 왕의 지위를 잘 유지하여,
그런 사람은 달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고귀한 왕, 이 타타르의 칭기스 칸.-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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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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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스탈린의 심복들은 여러 차례 몽골의 문화와 종교를 공격하여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약 3만 명의 몽골인을 처형했다. -11쪽

칭기스 칸의 혁신적인 전투 기술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무장한 기사는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전체에 통합된 단위를 이루어 움직이는 규율 잡힌 기병이 전면에 나섰다. 칭기스 칸이 방어용 요새에 의존하는 대신 기습을 기발하게 활용하고 공성전을 완벽하게 다듬어 운용하자, 성벽을 두른 도시의 시대도 끝이 났다. -14쪽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칭기스 칸은 아들, 손자 들과 함께 13세기에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문명들을 정복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수가 한때 몽골이 점령했던 나라에 살고 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런 성취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의 휘하에 있던 몽골 부족 전체가 약 100만 명으로, 현대 일부 기업의 직원들보다 적은 수였다는 점이다. 칭기스 칸은 이 100만 명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그 수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현대의 대형 경기장도 꽉 채우지 못할 숫자였던 것이다. -15쪽

칭기스 칸은 돌이 아니라 나라로 건축을 했다. 몽골군은 동유럽에서 슬라브족의 공국과 도시 여남은 개를 묶어 하나의 커다란 러시아 국가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3대에 걸쳐 남쪽의 송나라에 만주의 주르첸(여진), 서쪽의 티베트, 고비 사막 옆의 탕구트, 투르키스탄 동부의 위구르의 땅을 결합하여 커다란 중국을 만들었다. 몽골은 통치 영역을 확대하면서 인도도 통치했다. 인도는 대체로 몽골 정복자들이 세운 경계 안에서 현대까지 생존해왔다.
칭기스 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지역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을 거의 알지 못했다. 중국은 유럽을 몰랐고, 유럽은 중국을 알지 못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사망한 1227년에 중국와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16쪽

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 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칭기스 칸은 통치자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복당한 모든 신민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지만, 영토 내에서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17쪽

역사는 대부분의 정복자들에게 비참하고 때 이른 죽음을 선고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33세의 나이에 바빌론에서 의문을 남기고 죽었다. 부하들은 그의 가족을 죽이고 땅을 나누어 가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동료 귀족과 이전 동맹자들에게 로마 원로원에서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모든 정복지가 파괴되거나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본 뒤 지구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외딴 섬에서 외로운 수인으로 고독하고도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러나 거의 70세에 이른 칭기스 칸은 자신의 야영지 침대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의리 있는 친구, 명령만 내리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충성스러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었다.
-18쪽

그를 묻은 자리에는 능도 없고 사원이나 피라미드는커녕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은 묘비조차 세우지 않았다. 몽골인의 믿음에 따르면 죽은 자의 몸은 평화롭게 놓아두면 그만이었으며 굳이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영혼이 이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영혼은 영기에 머물며 살게 된다.
-19쪽

몽골인은 과학 기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금속을 주조하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주었다.
-20쪽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 르네상스 기간에 유럽 생활의 모든 측면-과학기술, 전쟁, 의복, 상업, 음식, 예술, 문화, 음악-이 바뀌었다.


역사의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칭기스 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자신의 상을 조각하거나, 동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3쪽

19세기 과학자들은 아시아 사람들과 아메리카 인디언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때 그들을 몽골 인종으로 분류했다. 의사들은 우월한 백인종 어머니가 지진아를 낳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을 때, 지진아의 얼굴 특징을 보면 아이의 조상 가운데 누군가가 몽골 전사에게 강간을 당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불행한 아이는 백인이 아니라 몽골 인종이었다. 매우 부유한 자본가들이 부를 과시하면서 민주주의나 평등이라는 가치에 반대되는 태도를 보일 때 이들은 무굴 사람이라고 조롱을 당했다. 무굴은 몽골을 가리키는 페르시아 말이다.
-26쪽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27쪽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1395년 경)

민족! 민족이 무엇인가?
타타르족! 훈족! 중국인! 그들은 벌레처럼 몰려다닌다.
역사가는 그들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려 애쓰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면 한 사람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개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일기>(1851년 5월1일)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이 지구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아시아가 우리를 삼키고 있다. 어디를 보든 타타르와 마주친다.
-토마스 만, <마의 산>-각장 서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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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아란타로 가다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13
설 흔 지음 / 생각과느낌 / 2008년 6월
구판절판


이언진은 역관이었습니다. 역관은 역관이어야 했습니다. 역관이 시인을 꿈꾸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오직 양반만이 시인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왜인들은 달랐습니다. 왜인들에게 이언진은 시인이었습니다. 누에가 실을 뽑듯 자리 잡고 앉기만 하면 아름답고 힘 있는 시들을 저절로 만들어 내는 타고난 시인이었습니다. 일본에 있었을 때 이언진은 행복했습니다. 자신의 시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돌아온 뒤 이언진은 불행했습니다. 자신이 쓴 시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너무도 적었기 때문입니다. -202쪽

일본에서 이름을 얻고 돌아왔지만 시를 말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박지원이 내린 야박한 평가 탓이었습니다. 시를 알아볼 수 있는 감식안이 없는 사람들이 기대는 것은 유명 인사의 말 한 마디였습니다. -203쪽

"일본으로 가자고요, 문을 부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문을 향해 가는 겁니다. 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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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이성 친구 (작은책)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5월
품절


그녀는 겉멋만 잔뜩 든 멍청한 녀석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그녀를 알아보았다는 기색은 털끝만큼도 내비치지 않았다. 마침,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 하나가 택시에서 내려 길 건너편의 어떤 가게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여보!>라고 소리치며 길을 건넜다.
그날 밤 텔레비전을 보는데, 프로그램들은 그날따라 더욱 재미가 없고, 기분은 그저 처량하기만 했다. -20쪽

우리는 서로에게 감탄하고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우정은 더욱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선의의 경쟁이 되었다. 그가 어떤 선행을 하면, 나는 기어이 그보다 더 착한 일을 한 다음 그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 사람 역시 오기가 대단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 며칠도 안 돼서, 그는 내가 행한 것보다 훨씬 더 착한 일을 하고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그를 따라갈 수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 다음날, 나는 홧김에 우리의 약속 장소에 조금 늦게 나갔고, 또 그 다음날에는 두 시간 넘게 지각을 했다. 그 다음 주에는 그를 바람맞혀 종일토록 기다리게 만들고도 나몰라라 하였다. 그 다음 달에 그는 나에게 알리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그에 질세라 나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니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62쪽

너는 기분이 좋으면 멍멍하고 짖는다. 화가 났을 때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짖지. 너는 감정의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는 데 많은 한계가 있어. 네가 표현할 수 있는 뉘앙스는 별로 많지 않아. 하지만 나는 너와 달라. 기분이 좋을 때, 나는 그 좋은 기분의 미묘한 차이를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어. 싱긋거리거나 껄껄거릴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엉엉 울 수도 있어. 화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야. 나는 허허 웃는 것까지 포함해서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있어. 그 이치는 아주 복잡하고 대단히 혼란스러워.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너는 착한 개야. 그리고 내가 개를 좋아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지. 그런데도, 나는 이따금 네가 고양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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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5-22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자끄 쌍뻬..^^ 나도 이 책 중고샵에서 건졌어요.

마노아 2008-05-22 09:12   좋아요 0 | URL
전 며칠 전에 얼굴 빨개지는 아이랑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를 중고샵에서 건졌어요.
요 책은 다른 서점에서 샀구요. ^^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4 - 몽골 중국 티베트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8년 12월
품절


몽골이라는 이름은 '용감한 전사의 나라'라는 뜻이란다. -21쪽

세계 열어 곳에서 만난 우리와 닮은 사람들, 남미의 인디오나 북미의 원주민, 알래스카의 에스키모나 티베트인, 중국인의 모습이 그저 우리와 비슷한 정도라면 몽골 사람들은 우리를 빼박아서 섞어놓으면 거의 분간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가는 눈매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더 그런 것 같다.
'한민족과 사촌이든 백촌이든 촌수가 형성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 바로 몽골족이다.'
우리나라 몽골 학자 한 분이 그렇게 말했는데 다른 건 모르겠지만 얼굴 생김새는 정말 그렇다. -21쪽

접시에 산같이 쌓아놓은 만두를 보고 어떻게 애들끼리 이런 걸 만드느냐니까 몽골 아이들은 모두 집안일을 잘 거드는데 남자, 여자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포르마는 이가로부터 '한국에서는 남자들이랑 아이들이 집안 일을 잘 안 거들어 준다'는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28쪽

할머니는 아들 셋, 딸 셋을 두셨는데 아이를 많이 낳았다고 나라에서 주는 2급 훈장을 받으셨단다. 인구증가에 기여한 공이란다. 몽골은 땅 넓이가 남한의 약 16배인데 인구는 1921년 독립 당시 64만 명도 되지 않아 전세계가 인구증가 억제책을 쓰고 있는 와중이었으나 출산을 적극 장려했다고 한다. -32쪽

독립 당시 몽골의 인구가 그렇게 적었던 것은 청나라의 간교한 정책 때문이었다고 한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원나라의 부활을 막으려고 몽골 사람들의 불심을 교묘히 이용하여 후손의 번성을 막는 정책을 폈단다. 라마 불교를 보호하는 척하면서 큰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들들을 불교에 출가시키도록 법으로 정해 인위적인 산아제한을 했던 것이다. -33쪽

몽골 말들은 생각보다 숏다리에 몸집에 비해 머리가 크고, 배 부분이 통통한 것이 우리가 상상하던 키 크고 날렵한 준마의 위용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저 말이 지구력과 인내심이 뛰어나서 칭기즈 칸이 동서양에 걸친 세계 대제국을 건설할 때 한몫을 단단히 한 말이란다. -38쪽

"저 비닐이 썩으려면 적어도 1백 년은 걸려요. 이 플라스틱은 수백 년, 저기 버려둔 보드카 병은 무려 4천 년이 걸리죠. 여기가 아저씨 나라이기도 하지만 내가 사는 행성이니까 나도 못 버리게 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요."-52쪽

"환경보호는 거창한 게 아니에요. 부엌이나 목욕탕 등 생활에서 자기가 기꺼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환경에 해롭지 않은 일을 찾아서 하면 돼요. 시냇물이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듯이 작은 힘이 모이면 큰 힘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가 지금 몽골에 있으니 적어도 몽골을 더럽히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요."-52쪽

몽골에서는 손님을 아주 귀하게 여기며 환대를 한다고 가나가 이야기 해 준다. 그래서 긴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도 먹고 잘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 게르나 들어가서 자기 집처럼 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행동이 조금만 굼떠도 왜 이렇게 밥이 늦느냐, 마실 것이 늦느냐, 장난삼아 호통까지 칠 수 있다고 한다. -57쪽

에스키모나 몽골의 유목민들은 아주 외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근친혼이 불가피해서 비정상적인 아이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누가 오면 그 사람의 '씨'를 받아 종족의 열성화를 막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 주장에 수긍이 갔다. -61-62쪽

그런데 고비맨ㄴ의 이런 낙타 예찬은 티베트 사람이 야크에 대해 하던 말과 너무나 흡사하다. 티베트에서는 야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있는 고마운 동물이라고 했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로부터 필요한 모든 의식주의 원료를 얻어내는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은 소를 최고로 여겼다. 중동 같이 양이나 염소를 주로 키우는 곳에서는 또 양과 염소가 그랬다. 남미의 고산지대에서는 야마가 그런 대접을 받고 있었다.
모든 유목민들은 자기들이 키우는 동물에 대해 모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행 다니면
서 알게 되었다.
비단 동물에 대해서만 이런 상호의존적이고 고마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쌀이 그런 것처럼 보리나 밀, 옥수수, 감자, 야자, 대나무 등이 그것에서 필요한 것들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마운 식물이 된다. -64-65쪽

여자도 말을 타고 다니며 가축을 돌보고, 남자도 식사 준비나 설거지를 하고 아이까지 돌본다. 세계의 반을 호령했던 칭기즈 칸의 후예들이라 남성의 지위가 여성보다 훨씬 우위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는데 전혀 그게 아니다. -69쪽

몽골 사람들은 성이 없다. 보통 아버지의 이름에 자기 이름을 붙여 쓴다. 가나의 아들이 보르톡이니 그 정식 이름은 가나 보르톡이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아서 바토르라고 이름을 지으면 그 이름은 보르톡 바토르가 된다. 그래서 이름만 가지고는 조상을 따져볼 수가 없단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성울 물려받는 풍습이 있었고, 그것을 기록한 족보도 체계적으로 잘 보존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산 혁명 이후 구 소련의 조정을 받은 몽골 정부가 1925년부터 성을 물려받는 제도를 폐지해 버렸단다.
몽골족의 기상을 꺾어놓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는데,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혈연관계의 끈을 없애버리면 개개인으로 흩어져 힘없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공산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식민지배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다행히 러시아가 물러난 지금은 잃어버린 성 찾기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71쪽

몽골 하면 사막과 초원으로만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이곳은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놀랍게도 지리학자들은 몽골을 산악국으로 분류한다. 북부는 울창한 삼림과 호수와 강이 있고 중서부는 산맥이 가로 놓여 있다. 남부에 있는 고비 사막은 전 국토의 2%밖에 차지하지 않으며, 동부 대초원이 25%를 차지한다. -72쪽

1507년 전세계를 휩쓸던 칭기즈 칸 군대들이 티베트도 침공했다. 그때 군대를 이끌었던 몽골 장군은 티베트 사람들의 불심에 감화를 받아 전쟁을 하다 말고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 그들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스님들 몇을 몽골로 데리고 갔다. 이때부터 몽골은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한때는 남자 인구 중 1/3이 스님일 정도로 신심 깊은 불교국이 되었던 것이다. -79쪽

카라코룸은 몽골이 동쪽으로는 고려, 서쪽으로는 헝가리, 남쪽으로는 베트남과 바그다드, 북쪽으로는 모스크바에 이르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세웠을 대의 수도였다. 이 제국은 유럽의 대제국 로마가 최전성기때 차지했던 땅의 두 배가 넘는 전세계의 반을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후손들은 곧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몰락의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칭기즈 칸의 아들들이 쓴 지방분권제의 실패와 정착민의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병사들이 전의를 잃게 된 것, 성인 남자들이 군인이 되는 대신 승려가 되기를 원해 군사가 부족해진 것 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한다.-79쪽

몽골은 그후 19세기 때 청나라에 망해 식민통치를 받다가 1921년 신해 혁명 이후 독립을 선언했다. 24년 소련의 도움을 받아 세계에서 두번째로 공식적인 사회주의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사실상 러시아의 세력권에 들어 있다가 92년에 국호를 '몽골리아'로 바꾸고 새로운 건국을 했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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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5-22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감한 전사의 나라~ 나도, 언젠가 가봐야지!

마노아 2008-05-22 09:22   좋아요 0 | URL
진짜 사막의 나라에 가보고 싶어요. 그 메마름 속에서 촉촉한 감동이 느껴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