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이면 마음이 열립니다
한국청소년상담원 지음 / 작은씨앗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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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은
아빠가 신문 한 면을 다 읽기에도 빠듯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다 듣기에도 부족한 시간.
그러나 아이를 꼭 안아주고 이렇게 말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누구야. 요즘 많이 힘들지?
아빠, 엄마가 네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사실은 우리도 속상하단다.
하지만, 너와 함께 있는 이 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하구나."

진심을 전하기에 1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14-15쪽

세상에 잡초는 없습니다.
이름을 몰라 잡초라 부를 뿐입니다.-17쪽

한 정신지체아의 부모는
자녀의 생일 카드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야,
작은 염색체 하나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기로 하자."

세상의 어떤 편견도
부모의 사랑보다 강할 수는 없습니다.-22-23쪽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이지만,
싹을 틔우는 것은 자연입니다. -27쪽

어느 고등학교에
자신이 맡은 반을 시험이든, 체육대회든
늘 1등에 올려놓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매해 3월 새 학년이 시작하는 날,
그 선생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교사 생활 이십 년에! 너희처럼
우수한 아이들을 맡는 것은 처음이다.
어제는 너희들 만날 생각에 잠도 못 잤다.
우리 올 한해 잘 해 보자."

마술사가 되는 첫 걸음,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나온다고
자기부터 믿는 것입니다.-30-31쪽

자녀들이
안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 같아서
"좀 좋은 친구를 사귀지, 왜 꼭 그런 애를 만나니?"라ㅏ고 했을 때,
자녀들도 동의하는 경우 별로 못 보셨지요?
자녀가 사귀는 친구가 걱정스러울 때는
이렇게 말해보세요.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그 아이는 참 좋겠다.
네 덕분에 그 아이가 마음을 잡았으면 좋겠구나.
엄마는 너희가 서로
도움이 되는 친구가 되길 바란단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아이가 있으면,
친구를 데리고 강남 가는 아이도 있는 법입니다.-38-39쪽

"원하는 것을 다 갖기에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슬기롭게 사는 것을 배우는 데는
모자라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사랑의 크기가 용돈의 액수와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41쪽

승리를 축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패배를 위로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45쪽

아이들 장난에 화부터 내면
그 아이는 계속 장난꾸러기로 남습니다.
장난칠 줄 아는 아이는 배울 줄도 아는 아이입니다.-47쪽

훌륭한 감독은 선수가
자신의 능력을 믿게끔 하는 사람입니다.-51쪽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건 맞지만 거짓말까지는 아니란다.
누구에게나 거짓말의 유혹은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잖니?
네가 그 정도의 유혹은 이겨내는
당당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자녀와 싸우지 말고,
자녀의 문제와 싸우세요.-53쪽

"별똥별이 떨어질 때
너무 많은 것을 바래서는 안 된단다.
정말 소중한 것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거든.
무엇이든 한 가지 꿈에 정성을 다해보렴.
바로 그 정성이 꿈을 이뤄줄 테니까."

무조건 큰 꿈보다는
작은 꿈이라도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키워주세요.-57쪽

"단풍이 아름답니? 그건 네 마음이 아름다운 거란다.
아무리 좋은 것도 마음이 없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거든.
걸으면서 바깥만 보지 말고 네 마음 속을 잘 들여다보렴.
단풍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이 그 안에 있을 테니까."

교육이란 "없는 것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63쪽

개교기념일에는 학교가 쉰다는 것을 모르고
학교에 간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있었습니다.
텅 빈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 아이를 발견한 당직선생님,
"지금부터 받아쓰기를 하는 거다.
자 그럼, 1번 '나', 2번 '우리'......"
쉬운 낱말만 골라서 보른 다음,
커다란 동그라미와 함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너 오늘은 백점 맞았으니까 특별히 일찍 가거라."

그날 이후 그 한심한 아이는
우등생이 되었다지요.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런 '교육의 순간'을 선물하고 싶습니다.-68-69쪽

"아빠! 콩쥐 아빠는 그 때 뭐했대?"
"콩쥐 아빠? 글쎄... 그런데 그건 왜?"
"아빠가 있는데도 힘든 일을 아이들 시켰다니까 그러지."
"...?!!"

분명 한 가족의 이야기인데,
왜 늘 아빠는 빼놓았을까요?
콩쥐 아빠가 좀더 노력했더라면
팥쥐 엄마도 마음이 열렸을까요?-71쪽

"엄마는 네가 상을 탄 것도 기쁘지만,
그 동안의 네 노력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단다.
그 동안 힘든 때가 많았을텐데 참 잘 이겨냈구나.
엄마는 바로 그것이 자랑스러운 거란다."

결과에 대한 칭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동안의 노력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73쪽

내가 만약 아이를 키운다면...

-다이애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떡갈나무 속의
도토리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82쪽

표현하지 않는 '마음'은
옷걸이에만 걸려있는 명품 같은 것입니다.-93쪽

선택의 계절에 부모들이 알아두면
좋은 설득이 심리학 두 가지.
첫째, 상대방의 자존심부터 세워주세요.
둘째, 설득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믿게 만드세요.-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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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CURIOUS 48
신현덕 지음 / 휘슬러 / 2005년 11월
절판


몽골에서 노란색은 신성한 색이므로 여성들은 허리띠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노란색 옷을 입지 못했다.

델은 남녀구별이 없다. 단지 단추의 숫자가 많고 화려한 것이 여성용이고, 단추가 적으며 장식 없이 폭이 넓은 것이 남성용이다.

델 한 벌을 만드는 데는 손으로 꼬박 3일쯤 소요된다. 손바느질로 한 땀씩 떠서 만들기 때문에 기계로 한 것보다 훨씬 촘촘하고 여물다. -103쪽

가죽 장화는 오른쪽과 왼쪽 신발 모습이 같은 점이 특이하다. 전쟁 중 신발을 갖춰 신고 나가는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구별 없이 만들었다고 한다. -110쪽

몽골인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천막집 게르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영어의 유르트(yurt)로 소개된 집이다. 몽골인은 기후 여건에 따라 자주 이사하므로 이동이 간편하고 보온이 잘 되는 게르를 주거로 이용해왔다. 게르는 새로 짓거나 다시 조립하는 데 길어야 3시간을 넘지 않는다. 이처럼 게르는 영구성이나 외적으로부터의 보호기능보다 일시적인 추위와 햇빛 그리고 비바람을 차단하는 차양 목적이 주였다. -111쪽

게르를 새로 짓는 것은 새 며느리가 들어와 식구가 늘어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아들이 장성한 집에서는 적당한 신부를 찾기 전에 게르 지을 준비를 서두른다. 신부가 나타나면 곧바로 예식을 올리고 살림을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113쪽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집의 크기를 말할 때 몇 칸짜리인가로 계산했지만 몽골에서는 벽이 몇 개인지에 따라 크기를 따진다. 일반인들은 보통 벽 5개로 게르를 짓는다.-114쪽

게르 안은 난로를 기준으로 남성구역, 여성구역, 신성구역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남성은 게르에 들어가면 곧바로 왼쪽으로 가고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간다. 남성구역은 하늘이 보호하고 여성구역은 태양이 보살피기 때문이다.

남성구역은 게르의 서쪽으로, 정문에서 보면 왼쪽이다. 이곳 벽에는 주인의 말안장과 고삐, 아이락 주머니 등이 걸려 있다. 주인의 방어용 무기는 이보다 안쪽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둔다. 손님을 우대하는 의미에서 주인의 오른쪽에 앉힌다지만, 여기에는 손님을 가장한 적이 들어왔을 때 오른손잡이인 가장이 방어를 하기 위한 모겆ㄱ도 내포되어 있다. 이 구역에서 접대하는 손님은 남자만을 의미하며, 여자 손님은 여성 구역으로 모신다. 여성구역은 게르의 동쪽 입구에서 볼 때 오른쪽이다. 안주인은 이곳에 주방용구와 생활도구를 비치하며, 아이들도 여기에 기거한다.

주인 내외의 침대는 여성구역의 벽에 붙어 있고 손님용 침대는 반대편 남성구역의 벽 쪽이다.-116쪽

게르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안팎 어디를 둘러 봐도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다.


화장실에 간다는 표현도 재미있는데 "말(馬)을 본다"고 한다. 예전부터 말은 대부분 게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볼일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럿이 말떼 속으로 들어가 볼일을 볼 때 주위 사람에게 건넬 말이 없어 "말이나 보자"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이다. -119쪽

철저히 개방된 공간에서의 성생활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 3대가 6~7평의 한 공간에서 살다보면 성에 대한 개념도 무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 풍습이 몽솔 사회의 개방과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몽골이 여타 공산국가보다 쉽게 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방된 성 문화를 비롯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1쪽

몽골인의 성 풍속만큼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 말을 아무하고나 의미 없는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몽골인은 알려진 것보다 더 완고하고 합리적이다. 그들은 사랑도 가문의 유지와 종족의 번영을 위한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121쪽

학자들에 따르면 에스키모와 몽골인은 근친혼의 폐해를 경험으로 배워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장애아로 태어나거나 열성유전인자가 쉽게 발현된다. 그래서 이들은 늘 혈통이 근접한 사람과의 혼인을 피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다. 결혼 상대자로는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다른 부족을 선택하려 했다.



아내를 외간 남자와 동침케 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손님을 맞은 씨족장은 회의를 개최하여 전체 구성원의 의사를 물었다. 남자의 지적 수준 및 외모와 됨됨이를 보고 동침 여부를 결정했다. 지적 수준이 우선적인 선택 요건이 되자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공산혁명 이전 몽골에서는 승려들이 새 신부들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신부가 첫날밤을 승려와 보내는 것이다. 당시 지식인 계층은 승려뿐이라 그들이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전반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수한 혈통을 이어받기 위해 이런 풍습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아이는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자식으로 키웠다.-123쪽

일부 지방에서는 남편이 집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출타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떠난다. 아내에게 자유 시간을 허락하는 묵시적인 방법이다. 남편은 가문에 좋은 씨가 들어온다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느긋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아내가 쾌락을 목적으로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해도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출산 이외의 목적으로 간음한 자는 예부터 법으로 엄히 다스려 왔다. 칭기즈칸 시대 이후 시행된 법에 따르면 평민이 왕공의 부인과 간음하면 전 재산을 몰수하고 두 사람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평민끼리 간통하면 가축 300마리와 귀중품 30개의 재산형에 처했다.
공식적으로 몽골인의 이러한 성 문화는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비 지방 혹은 북서부 산악지대 등 일부에서는 여전히 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 한다.-125쪽

몽골인은 친족에 의한 혈족은 인정하면서도 인척관계로 생긴 혈족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시에 두 명의 자매와도 혼인이 가능했다. 유목민의 이러한 풍습은 우리 역사에도 있다. 고려 초기 임금이 자매와 결혼한 경우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자는 자기가 현세에서 섬긴 자를 사후에도 섬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모가 아닌 과부는 재혼하지 않고 막내아들의 아내가 되었다. 몽골인은 막내상속을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후처 중에는 나이가 아주 어린 경우도 있어 막내에게 가는 것이 오랫동안 보살핌을 받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시간이 적었던 막내에게 아버지의 사랑 대신 그의 사랑하는 여인과 물질로 대신한다는 뜻도 있다. -127쪽

신부들이 하던 화장술의 하나인 연지곤지는 우리에게도 전해져 전통혼례에서는 자주 쓰인다. 부녀자들이 가슴에 차던 은장도와 족두리, 원삼도 몽골에서 유래된 것이다.

몽골족의 결혼은 우리 상식에 견주어보면 대체로 조혼이다. 과거에는 10살 이전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칭기즈칸도 아홉살 때 한살 연상의 여인이었던 웅기라드족 데이 세첸의 딸 부르테와 결혼했다.

우리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이 26.8세(2001년말 기준 남 29.6세)인데 반해 몽골은 15~16세에도 결혼한다. 물론 법적으로는 18세로 제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더 어린 경우가 많다. 여자 나이 스무 살이면 벌써 아이를 두세 명씩 낳는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생활에 대한 감각은 우리 나라 여성들보다 더 현실적이다.

유의할 것은 몽골인과 중국인의 결혼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법으로 아예 금지시킨 적도 있었다.-130쪽

몽골 국민의 90% 이상이 라마불교를 믿는다. 불교는 몽골인에게 종교라기보다 생활의 일부로, 이들은 집안에 불상을 모셔놓고 지낼 정도로 적극적인 신도들이다. 한때는 국교로서 강요되었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여전히 불교만을 믿는다.

몽골인은 것든 것은 부처를 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일은 부처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승려가 관장했다. 왕에서부터 말단까지 지배계층은 모두 승려였다. -138쪽

몽골인이 최초로 라마교를 받아들인 것은 원나라 태종 오고타이 때다. 세조 쿠빌라이가 중국 전역을 점령하고 티베트를 손에 넣었을 당시 라마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파스파를 초청하였다. 그는 몽골불교의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티베트어를 차용해 최초의 몽골 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몽골족의 사나운 기질을 완화하기 위해 라마교를 정책적으로 권장했고, 맏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라마승을 만들도록 법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인구가 격감하자 몽골 공산당은 1921년 혁명 후 라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당과 정부가 종교를 장악했지만 일반인의 신앙 생활만은 허용했다.


개방 이후에는 세계 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몽골로 몰려들었다.-139쪽

몽골인은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발전을 인정하지만 민족적 자부심에서는 늘 자신들이 앞선다고 말한다. 특히 몽골인은 21세기 초 우리나라 종교인들조차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중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의 방문을 허용했던 것이다. 2002년 11월 몽골 정부는 달라이 마라의 방문과 설교를 허용해 중국정부와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다. 중국은 티베트 독립을 꾀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를 경계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 정부는 종교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허용한 것이지 정치 지도자나 군사지도자로서의 입국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며 중국에 당당히 맞섰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 입국했던 것은 4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인이었고 몽골에 머물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중국도 이 사실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그의 입국을 허용할까 두려워 선수를 쳤던 것이다.
-141쪽

한편 우리나라는 여전히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이미 미국, 독일, 대만, 몽골 등지를 다니면서 깊은 정신세계의 진수를 가르치는데도 우리나라는 그의 입국을 허용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국민의 사랑을 받는데 그를 한국 땅에서 보기가 이리 어려운가. 미국에는 할말을 한다면서도, 한때 한국을 침공해 '중공 오랑캐'라 불렸던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다소 모순적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에서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3대 쇠남 갸초가 몽골 지도자였던 칸을 방문했을 때 받은 칭호가 굳어진 것이다. 몽골 종교 지도자들은 이 이름이 '바다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종교지도자도 그와 같이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141쪽

몽골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무당이다. 공산시절에는 국가가 무당을 모두 없앴으나 자유화 이후 다시 생겨나는 무당은 어쩔 수 없이 묵인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무당들이 외부에서 신을 불러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몽골 무당은 자신의 영혼을 몸 밖으로 내보낸다. -142쪽

몽골 초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은 '어버', 즉 성황당이다. 성황당은 미신을 억압했던 공산주의 시절에도 폐기되지 않고 전해질 만큼 몽골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몽골인은 학식, 사회적 지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수시로 성황당을 찾아가고, 어디에서나 성황당을 만나면 예의를 갖춘다. 성황당은 마을의 수호신이요, 초원의 이정표이자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143쪽

몽골인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한 번만 요리한다. 전쟁에 대비한 조상들의 습관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몽골 요리사들은 음식을 풍성하게 만들려면 많은 재료가 필요하므로 현지에서 약탈을 일삼게 되는 상황을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아침과 점심에는 차와 밀가루 튀김과자로 요기만 한다. 저녁에는 고기와 국수를 비롯해 쌀, 귀리 등 곡물이 든 묽은 죽을 곁들여 제대로 챙겨 먹는다. -152쪽

'순한 양'이라는 말을 몽골인이 양을 잡는걸 보고서야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미 살 의지를 잃은 양은 죽어가면서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사지만 잠깐 버둥거리다 만다. 시간은 고작 5~6분이 걸릴 뿐이다.
양이 죽으면 가죽을 가슴팍에서 사타구니까지 갈라 땅 위에 쫙 펼쳐 놓고 깔개로 사용한다. 우선 내장을 꺼내 큰 그릇에 담고 흘러나온 피는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그리고는 머리, 갈비, 다리, 엉덩이, 가슴팍, 어깨 부분을 따로 갈라내면 작업은 끝난다. 이 모든 과정은 길어야 30분을 넘지 않는다. 또한 피는 한 방울도 땅에 흘리지 않는다. 식량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짐승으로부터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배고픈 맹수와 맹금류가 피 냄새를 맡으면 사난ㅇ눠져 사람들을 해친다는 것이다. 또 피 냄새는 다른 냄새보다 멀리 퍼져 나가므로, 전장에서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목숨을 잃기 때문이기도 하다.-153쪽

몽골인의 주식은 고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들은 서구인처럼 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는다. 몽골인은 주로 젖을 섭취하며 고기는 부족한 젖을 보완하는 수준이다. 유목을 하는 몽골의 고기 생산량이나 육질이 목축을 하는 서구 국가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닭고기 값은 쇠고기의 5배, 돼지고기는 3배정도로 비싸다. 고기값이 비싼 것은 이들 가축이 사료를 먹기 때문이다.

몽골인은 죽은 가축의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다. -155쪽

개고기와 새는 먹지 않는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산야에 내다 버리는 풍장이 있었으므로, 이때 조상의 시신을 들개가 뜯고 새들이 쪼아 먹었기 때문이라 한다. 국가 문양에 물고기를 그려 놓을 만큼 신성시하기 때문에 생선도 먹지 않는다.

기온이 낮은 겨울을 이겨내려면 고칼로리 음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몽골인은 우리는 먹을 수 없을 정도의 비계 덩어리를 가장 좋은 고기로 친다. -156쪽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유제품은 아이락이다. 말젖을 가죽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휘저으면 아이락이 된다.
몽골인은 여름밤 내내 아이락을 젖는다. 게르 문 옆에다 가죽부대나 젖통을 놓아두고 오가면서 습관 삼아 나무 막대기로 휘휘 저어준다. -157쪽

아이락은 마유주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들이 알코올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만을 강조하여 번역한 것이며, 실제로 몽골인은 아이락을 전혀 술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아이락에는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한 6~7도의 알코올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두세 잔 마시면 취기가 오르기 보다는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는 정도다. 그래서 아이락은 식사대용이자 최고의 영양식으로서 몽골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름에는 한 사람당 매일 3~5리터의 아이락을 마신다. 허약한 아이에게는 아이락을 끊임없이 마시게 한다. 또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중증 환자에게도 아이락을 먹인다. 아이락은 비타민 A.C.B 등을 포함하고 있고 병원체미생물의 성장과 증식을 억제한다. 아이락은 특히 폐나 위 질환에 효험이 있고 신경작용을 활성화 한다. 더불어 식욕과 소화력을 증진시킨다. -159쪽

소나 양, 염소 젖으로 만든 '타라크(요구르트)'는 발효식품이다.


필요한 비타민은 유제품과 날고기를 섭취해 보충하므로 몽골 요리에서 야채는 비교적 적게 사용된다. 야채는 동물들이나 뜯는 목초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몽골인은 양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몽골인 요리에는 간장보다는 소금을 많이 사용해 별다른 맛을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기후가 건조한 탓에 음식을 매우 짜게 먹는다. 몽골 정부는 수돗물에도 의무적ㅇ로 요오드를 포함시켜 국민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161쪽

건조기법으로 만든 음식으로 봄여름에 먹는 보르츠라는 고기가루가 있다. 보르츠는 가축들이 살찌는 가을에 잡은 고기로 만든다. 주로 쇠고기로 만들며, 살코기의 결을 따라 찢은 뒤 그늘에서 말린다.

보르츠는 소의 위나 오줌보를 깨끗이 씻어 그 안에다 보관한다. 이것들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춘 최상의 자연 저장고이므로, 해가 바뀌어도 고기가루가 상하지 않는다.

보르츠를 뜨거운 물에 서너 숟가락 퍼 넣고 2~3분 기다리면 훌륭한 영양식이 된다. 외국에 가는 몽골인은 반드시 보르츠를 한 봉지씩 가지고 가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이것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170쪽

수테 차를 만들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소금을 넣는 일이다. 찝찔한 맛이 나지만 몽골고원에서는 염분 보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기후가 건조해 몸에서 수분이 자주 발산되므로 몸속의 염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175쪽

손님이 오면 주인은 술이기 보다 음료에 가까운 아이락을 먼저 내놓는다. 아이락으로 기분이 조금 얼큰해진 주인과 손님의 마음이 상통하면 아르히를 마시기 시작한다.

몽골에서 술을 마실 때는 만취하는 것이 에의다. 그래서인지 만취해서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다.-176쪽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몽골인은 늘 차강사르(설날)처럼 풍요롭기를 기원한다. -181쪽

몽골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를 사용한다.

양의 해에는 좋은 일이 생기며가정이 화목해진다. 닭의 해에는 살림이 풍요로워지고 출산율이 큭 ㅔ늘어난다. 돼지해에는 음식 저장량이 크게 늘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다고 한다.-183쪽

소련은 1921년 공산혁명 이후 몽골의 많은 전통 세시풍속을 없애면서 서구식 신년을 강요했다.

젊은이들은 소련의 본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세시풍습에는 민족의 전통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풍습을 바꾸면 민중의 의식과 사고에도 변화가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소련은 몽골인의 민족혼을 말살하거나 국민 단결을 약화시키기 위해 몽골 전래 풍습을 없애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몽골에서 신년은 서양풍속의 하나일 뿐이다. 이 날 모든 관공서는 휴무이다.-185쪽

몽골인이 '차강사르'라고 부르는 매년 음력 1월 1일은 거창하다. 3일간 모든 고나공서와 직장이 문을 닫고 집 안에서 식구끼리 지낸다. 한달 전부터 이날을 준비하느라 온 국민들이 분주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날에는 전 갖고이 모여 세배하고 성황당에 참배하는 등 새해맞이를 한다. 덕담도 어느 때보다 많이 주고 받으며 음식도 풍성한 명실공히 몽골 최대의 명절이다.

몽골 음력설의 역사는 쿠빌라이 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며 한족으로부터 음력설을 도입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어른들로부터 세뱃돈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몽골에서는 아래사삶이 웃어른에게 세뱃돈을 드린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다. 어른들이 준비하는 선물로는 초콜릿, 사탕, 학용품, 장갑부터 때로는 새로 나온 빳빳한 지폐 몇 장까지 다양하다. 또한 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문간에서 하나씩 선물을 나눠준다. 통상 유제품을 싸주는데, 이는 세배를 갈 때 싸갔던 것 중 먹고 남은 것이다. -187쪽

6월 1일은 어린이날이다. 몽골에서는 이때가 되어야 겨우 나뭇잎도 제대로 피고, 어린이들이 밖에서 놀기 좋은 계절이 시작된다. 몽골 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모든 관공서와 기업이 휴무한다. -193쪽

몽골 세시풍속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것이 가축의 거세다. 이 일은 유목민들이 가축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봄마다 하는 연례행사다. 지난해 태어난 수놈 중 좋은 종자를 제외하고 모두 거세하여 무차별적인 생식을 막는다. 또한 거세를 하면 발리 자라고 먹이를 적게 먹으며 온순해진다고 한다. -194쪽

몽골에서는 나담이 치러지는 매년 7월 11,12,13일에 국갖거인 축제를 벌인다. 나담은 '에른 고른 나담 (남성 3종 경기, 즉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의 준말로 '남성축제'라는 뜻이다. 나담은 원래 '놀다'라는 뜻의 몽골어 '나다흐'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몽골인은 경기의 의미보다는 놀이의 의미로 나담을 즐겼다. 이날은 또한 몽골 인민혁명 기념일이기도 하다. -195쪽

나담의 하이라이트인 씨름은 최고의 인기종목이다. 몽골에서 씨름의 인기는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미국의 야구, 독일의 축구, 스페인의 투우 인기를 능가한다. 씨름 경기는 나담 축제의 첫째, 둘째 날에 벌어진다. 울란바토르 스타디움에는 전국에서 예선을 거친 512명의 선수가 참가해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가 치러진다.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예선을 치른다. 이들 중 9회 동안 연승한 선수가 우승자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 타이틀 보유자나 최다승으로 지목받은 선수는 3회전부터 매회마다 경기 상대를 고를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비교적 쉽게 경기를 치를 수 있다. -196쪽

몽골 씨름에는 체급 구분과 경기시간 제한이 없다. 선수들은 최선의 방법으로 상대선수를 물리치면 그만이다. 우리나라 씨름처럼 샅바를 잡지 않고 서서 경기를 시작한다. 경기가 시작 후 상대방의 무릎이나 팔꿈치 등을 땅에 먼저 닿게 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198쪽

활쏘기는 나담에서 두 번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종목이다.

몽골인은 활을 쏠 때 과녁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멀리 날아간 쪽을 선호한다. 물론 명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녁에 못 미치는 화살은 궁수의 약한 힘을 드러내므로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궁술시합에는 남녀노소 모두 참가할 수 있다. 사수들은 꼭 몽골 전통복인 델을 입고 수술이 달린 모자를 써야만 한다.-199쪽

나담 마지막 날에는 시상식이 거행되며 이날의 주요 경기는 말달리기 시합이다. 4~7세읭 ㅓ린 기수들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최장 약 30킬로미터를 달린다.

이밖에도 매년 3월 8일은 몽골의 여성축제일이다. 몽골에서는 세계 여성의 날인 이날을 국경일로 지정해 기념행사를 펼친다.-202쪽

몽골 여행의 진수는 철도편을 이용해 느낄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인천에서 천진행 여객선을 타고 각서 북경-유라시아 간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기차 속에서 만리장성 너머의 중국을 보는 맛도 추천할 만하다.

몽골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승마와 승마여행이다.-212쪽

몽골을 여행하면서 주의할 것은 공룡알 들의 자연유물을 절대 가지고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몽골 정부는 몽골의 자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유물은 물론이고 가공되지 않은 동물 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녹용 등의 반출을 금지하고 있다.

고비에서 주운 돌멩이 하나, 작은 나무 가지 등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단, 공항이나 백화점 선물가게 등에서 구입한 선물은 인정된다.-216쪽

자본주의 사회와 70년이나 격리되었던 몽골에서는 영어보다는 러시아어가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1920년대에는 라마승과 극히 일부의 지식인만이 몽골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다. 당시 각 종족별로 언어가 달라 몽골은 하나의 국가이면서도 여러 개의 나라나 다름없었다. 몽골 정부는 1921년 공산혁명 이후 국가 통합을 위한 각종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책적으로는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국민들의 의사와 사고를 통합하는 데는 늘 언어장애가 뒤따랐다. 1940년 몽골 총인구 74만 3800명 중 문자를 깨우친 사람은 5% 미만이었다. 1946년 몽골이 러시아 문자르 ㄹ빌려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상황은 변했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의무교육을 강화해 문맹률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1990년 민주화의 상징으로 러시아 문자를 폐지하고 옛 몽골 문자를 부활시켜 공식문자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많은 지식인들은 옛 몽골 문자를 다시 사용하는 것은 전 국민의 80% 이상을 문맹으로 만들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들의 주장이 민주화 세력을 눌러 현재 몽골에서는 러시아 문자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217쪽

고비 지역은 우리에게 사막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 '고비'는 '황무지'라는 뜻의 몽골어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래지형의 사막은 3%에 불과하다. 연중 6개월 이상 눈이 쌓여 있어 무성하지는 않지만 풀과 나무가 자라며 야생동물도 뛰어다닌다. -223쪽

아라비아의 낙타는 혹이 하나인데 반해 고비낙타는 둘이라서 혹 속의 지방질로 열악한 환경에서 잘 견딜 수 있다고 한다.

낙타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살아서는 젖을 짜기도 하고 운송수단으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낙타젖은 진하고 끈기가 있으며 영양분이 풍부해 최고 품질로 선호된다. 낙타털로 만든 캐시미어 실은 양모와 염소털실보다 4~5배나 비싸다. 값도 비싸지만 털 자체를 구하기가 어렵다. 낙타 고기도 고비에서만 맛볼 수 있다. -226쪽

극북 히스테리아-극지방과 그 주변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옷을 찢는 등 과격한 반응을 보이며, 급격히 우울해지거나 정신을 잃기도 한다. 단조로운 기후와 고립된 환경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234쪽

옛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하라호름(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카라코름으로 소개됨)은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으브르항가이 아이막에 속해 있다. -238쪽

성곽 안에는 황제들의 집무실이었던 게르 터가 남아 있다. 황제들은 요란하게 치장된 건물이 아닌 일반 국민들과 같은 게르에서 살았다. 다만 왕의 게르는 일반 백성들이 구하기 어려운 호랑이나 사자 등의 가죽으로 실내를 장식했을 뿐이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몽골 국민들은 가족 같은 유대와 계급차별 없는 공정한 통치 아래서 살았다.

이곳은 북경으로 옮겨 갈 때까지 148년간 수도로 사용됐다. 그 후 200년간 퇴락을 거듭해 이제는 주민이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몽골의 성은 방어용이 아니라 공격을 준비하는 장소였다. 특이하게도 성이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처음 접하는 관광객들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 성들은 산이나 언덕 등을 끼고 방어에 유리하게 지어졌다.-239쪽

바로 여기서 몽골인의 전술을 알 수 있다. 적들과 지구전이나 방어전을 치르다보면 숫자가 적은 몽골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몽골인은 공격 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적이 침공해 오면 좁은 성벽에서 맞붙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곳으로 유도해 전열을 정비한 뒤, 전격전으로 맞섰다. 몽골인들은 당시로선 가장 강한 무기와 기동력을 가졌다. 말은 지금의 탱크처럼 위력적이어서 보병 위주의 군대는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현대에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화력이 우세한 군은 언제나 노출된 싸움을 원한다. 그래서 적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 유리하고 기마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넓은 초원 한가운데 하라호름 성을 구축했던 것이다.-241쪽

하라호름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두 번 놀란다. 첫째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제국의 첫 수도였던 하라호름 성이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윈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오스트리아의 쇤부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과 비교해도 형편없다. 유럽의 성은 외국에서 잡아온 포로를 이용해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로 지어졌으며 투입한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하짐나 몽골인은 으리으리한 성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유목민의 기질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사는 데 집착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전리품이 전무한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유라시아 지역을 점령하여 많은 것을 약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상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하라호름 성에는 만주족이 보낸 궁궐을 방비하기 위한 나무장애물이 있을 뿐이다. 몽골 군인들은 점령지에서 약탈하는 병사들을 즉석에서 참수했다. 엄정한 군기확립과 싸움에만 관심이 있었지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예상 밖의 전리품이 생기면 부하들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몽골인의 전통이었다.-247쪽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실자 발음은 울란바아타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249쪽

몽골의 사회학자들은 사회가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고 노후까지 책임지는 칭기즈칸의 정신에서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을 든다. 레닌은 몽골족의 핏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몽골족의 생활방식을 잘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몽골족인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가정교육에서 공동생산, 소유 및 분배의 정의와 인간다운 삶에 대해 감화를 받고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더불어 1921년의 몽골 공산혁명이 거부감 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259쪽

몽골처럼 교육열이 높은 국가도 찾기 힘들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문맹률은 비교적 낮다.
-264쪽

전통적으로 몽골인의 가장 큰 소망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돈과 명예는 순간적이지만 인간적인 덕망과 지혜는 영원하다는 것을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이 가장 강성해 중국을 지배하던 때부터 몽골인은 학문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한 집안에서 한 명 이상의 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학자는 승려였으므로, 당연히 출가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승려들이 정치, 학문, 의술은 물론 예술분야까지도 이끌어 갔으며 이들은 전쟁보다 평화를 주장했고, 약탈보다는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그 결과 몽골군의 군사력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265쪽

서구의 많은 사람들은 물론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조차도 몽골을 망한 나라라고 여긴다. 원나라의 강성했던 힘은 사라지고 이제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골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강점했던 중국을 한족에게 돌려주고, 약탈했던 러시아 땅을 러시아인들에게 반환했을 뿐이다. 옛날 강성했던 터키, 로마,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도 몽골처럼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 오늘과 같은 국가르 ㄹ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을 대상으로 망했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몽골에 대해서만은 유독 망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마도 현재 경제적으로 빈곤해서, 즉 일반적인 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몽골이 가난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원나라가 무너지고 공산혁명이 일어났어도 행복한 삶을 누려왔다. 몽골인은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예절을 찾고, 남을 위하며, 관용을 베풀 줄 안다. 몽골인은 지식인들의 덕목으로 꼽히는 관용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어느 민족보다도 충실히 실천해 나가고 있다.-268쪽

영주권은 아직 쉽게 얻기 힘들다. 몽골인구가 너무 적어 영주권을 쉽게 주면 중국인이 몰려와 내몽고처럼 중국에 예속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281쪽

과거 소련은 몽골에 산업시설을 배치하지 않았고, 그 결과 몽골에는 공업제품을 생산하깅 ㅟ한 기반시설이 취약했다. -281쪽

술을 마실 때는 지대가 높다는 점을 감안해 적당히 마시는 것이 좋다. 고지대에서는 쉽게 취하기 때문이다.-288쪽

많은 몽골인은 중국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깝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신상에 유리하다. 몽골인과 중국인의 어색한 관계는 역사적인 경쟁의식과 내몽고를 강탈해간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인해전술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중국과의 거래는 지형적인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13억이 넘는 인구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은 대단하다. 내몽고의 몽골인은 300만 명이지만 중국의 최대 민족인 한족은 2000만 명에 가깝다. 이제는 힘으로나 국민투표로나 어느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내몽고를 되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져 몽골인들은 이에 분해하고 있다. -291쪽

해도 되는 것!

-모자를 쓰고 있으면 게르에 들어갈 때 그대로 쓰고 있어도 무방하다. 인사를 할 때는 모자를 약간 들어올리면 된다.
-음식 선물 등 물건을 주고 받을 때는 양손이나 부득이할 경우 오른손을 사용하며, 걷어 올린 소매는 내린다.
-악수할 때는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벗는다.
-게르 안에서 움직일 때는 시계 방향으로 이동한다.
-차나 음식은 조금씩 마시거나 뜯어 먹는다.
-물건을 받을 때는 두 손을 모아 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다.
-몽골인의 발을 밟았을 때는 상대방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바닥에 앉을 때 무릎을 꿇어도 된다.
-초대받았을 때 작은 선물이나 적은 현금을 놓고 오는 것이 좋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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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08-08-2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나요? 예전에 몽골에 갔던 기억이 나면서 왠지 읽고 싶어지네요.
아, 잠시 읽어보니 다시 가보고 싶어지네요!

마노아 2008-08-27 17:52   좋아요 0 | URL
아악, 감은빛님! 몽골에 다녀오셨다구요! 만세!
제가 몽골에 대해서 공부할 일이 생겼거든요. 질문 생기면 달려갈게요^^
이 책 괜찮았어요. 아주 환상적으로 좋지는 않더라도 편안하게 유익했어요^^

감은빛 2008-08-28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갖다 오긴 했지만 아주 잠시였거든요.
8일이었던가 9일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요.
별로 도움이 안될 게 확실하지만,
혹 모르는 일이니 도움이 필요하시면 알려주세요!
근데, 몽골에 대해 공부할 일이 생겼다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네요. ^^

마노아 2008-08-28 16:10   좋아요 0 | URL
헤헤, 공부할 일이 드물게(?) 생기더라구요^^;;;
아직은 좀 막연한데, 궁금한 것 생기면 꼭 물어볼게요.
와, 그 멀리까지 다녀오시공... 대단대단...^^
 
몽골 CURIOUS 48
신현덕 지음 / 휘슬러 / 2005년 11월
절판


몽골은 '세상의 중심'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4쪽

몽골인은 광활한 대지를 발판으로 굳세게 살아간다. 몽골은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위치한 육지 속에 고립된 국가이다. 156만 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으로 한반도보다 7배 이상 넓은 국토를 자랑하지만, 인구는 270만 명(2005년 유엔 통계)으로 고작 대한민국의 20분의 1정도이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역사는 2005년 현재 366주년을 넘었으나 아직도 반 이상의 사람들이 13세기 생활양식을 고집하며 천막집인 게르에서 살고 있다.-12쪽

희귀한 식물이 많아 고비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000미터에 가까운 이곳은 국제기관들이 보호하는 야생동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고비는 중국과의 자연적인 국경선이다. 중국 한무제는 후손들에게 몽골을 침략하려면 군량조달이 어려우니 득이 없는 전쟁보다는 화해를 택하라고 지시했다. 고비를 지나 몽골까지 군량을 운반하려면 1석의 운반비가 18석이나 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ㅣ-16쪽

연교차가 70도가 넘는 몽골 전역은 그만큼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다. 그나마 연교차가 적은 지역이 울란바토르였다.-18쪽

우리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1960년대의 보릿고개가 있었던 것처럼 몽골의 시골에는 지금도 넘기 힘든 젖고개가 남아있다. 젖고개는 짐승들이 풀을 뜯어먹고 젖을 내는 5월말부터 6월초까지 계속된다. 양을 잡아봐야 겨울을 넘기느라 뼈만 앙상하게 남아 고기를 얻기도 어렵다. 더구나 갈무리 해둔 감자, 양배추 등의 야채는 벌써 바닥이 났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절박한 상황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때가 되면 징기스칸 군대가 세계를 제패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전통 비상식량 보르츠(고깃가루) 주머니가 열린다. 보르츠가 구황을 한다고는 하지만 많은 가정에서는 굶기를 밥먹듯 한다. -22쪽

몽골의 여름은 노루꼬리처럼 짧지만 알찬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는 가을에 수확하는 전형적인 농업경제이지만 몽골은 여름 한철 가축을 이용해 수확하는 유목경제다.

농업이 태양의 에너지를 식물의 형태로 저장한다면, 유목은 동물의 형태로 저장하는 셈이다.-23쪽

겨울대비용 연료로 소나 말 등 가축의 똥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 놓는다. 여름내 주워 말린 똥을 높은 둑처럼 쌓아 바람막이 벽으로도 사용한다. 우리가 가을철 나뭇짐으로 겨울 땔감을 비축했다면, 몽골에서는 가축 똥이 이를 대신하는 셈이다. 마른 똥을 주워오는 것은 여성들이 할 일이다.-29쪽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어는 추위(12월 31일부터 시작되어 다음해 1월 8일까지 계속된다.) 몽골인은 양을 우리에 넣어 재우지 않는다. 그만큼 양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의 체온으로도 녹이지 못할 추위라 양이 잠자는 바닥이 얼 정도라는 것이다. -32쪽

유럽에서는 지금도 아이들이 울면 호랑이가 아니라 '훈이 온다'고 겁을 주어 울음을 그치게 한다.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훈이라는데 도대체 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훈족이라는 말을 쓰지만, 나는 몽골에 가서야 그 말이 '사람'이라는 뜻의 몽골어임을 알았다. 또한 영어의 인간(human)이란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즉 이 세상의 인간은 몽골에서 시작된 셈이다.
사람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고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정말 몽골인보다 무서운 사람들은 없었다. 한때는 유럽에 코란이냐 칼이냐를 선택하게 했던 페르시아인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지만, 그를 뛰어 넘는 것이 몽골인이라는 것이다. 몽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떨쳤다. -35쪽

몽골 국민 270만, 내몽고의 300만, 브리야트의 300만, 중국 신장 지방의 24만 등 전 세계 약 1000만 명 이상의 몽골족들은 칭기즈칸의 묘가 발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위대한 신 이상으로 추앙받는 칭기즈칸의 실체가 외국인들 손으로 까발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37쪽

몽골인은 1990년 자유화 당시 울란바토르 시에 있던 스탈린, 흐루시초프 등 옛 소련 지도자의 모든 동상을 파괴했다. 몽골의 것이 아닌 치욕의 러시아 역사라고 분노하면서 때려 부순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레닌동상만은 울란바토르 중심 정부 청사 앞 광장 오른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레닌의 피 속에 몽골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몽골인의 동정을 받았던 것이다. -37쪽

몽골인은 최고라는 의미가 없는 곳에는 칭기즈칸의 이름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칭기즈칸 보드카, 칭기즈칸 호텔 등이 좋은 예다. 이처럼 몽골인 마음 속에는 칭기즈칸이 살아 있는 영웅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돈을 벌거나 여업을 번창시키기 위한 허튼 수작으로 칭기즈칸이란 명칭을 사용하면 손가락질을 당하기 십상이며, 심할 경우 테러도 감수해야 한다.-39쪽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했을 당시 몽골에는 약 9만 5000가구가 살고 있었다. 대가족 제도임을 감안하더라도 몽골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으며 병사는 10만 명을 넘지 않았다. 칭기즈칸의 전략은 현대전에도 적용될 만큼 기발했다. 그는 우선 한 집에서 병사 한 명씩만을 차출해 군대를 구성했다. 그래서 군대 조직 이름도 십호, 백호, 등의 집 개념을 사용해 전 국민이 병사라는 의식을 갖도록 유도했다. 병역의 의무보다 한발 앞선 국방의 의무를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선진 방위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었다.

칭기즈칸은 이 병사들에게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군 제도를 적용했다. 그는 군대를 10진법에 의한 단위로 조직하고 명령체계를 일원화했다. 10명을 1개 단위로 설정해 지휘자를 임명했던 것이다. 이 제도의 영향을 받은 청나라는 8기병 제도를 통해 원나라에 이어 또 다른 유목 국가를 세웠다. -39쪽

칭기즈칸은 진격하면서 300~400킬로미터 후방으로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정착 민족에게서 가족을 이동시키는 것은 삶의 터전 즉 병참기지를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유목민들에게는 평상시의 생활과 다름 없었다. 몽골군의 군량은 가족들이 후방에서 가축의 젖을 짜고 고기를 말려 보내는 것으로 완벽하게 해결됐다.
장기전에 대비한 비축식량도 양을 잡아 말린 고기가루 보르츠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보르츠는 가볍고 부피가 작아 군용식량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양 한 마리로 만든 보르츠는 3~4킬로그램에 불과했으며, 두 스푼 가량을 더운 물에 불려 마시면 요기하는 데 충분했다.

몽골 병사들은 1인당 8~9마리의 말을 몰고 진격했다. 병사가 100여 명이면 말이 800~900마리가 되어 적들은 몽골병사들에게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1시간쯤 달리다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꿔 탔다. 이렇게 해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던 것이다. -40쪽

일반 병사들이 칭기즈칸에게도 '너'라고 부를 만큼 형제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상하관계는 엄격하되 친숙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또 병사들이 죽더라도 가족들의 생활은 걱정 없도록 준비해 주었다.

현대에도 이런 전통은 그대로 전해져 몽골에는 상류층이라는 개념이 전무하다. 다른 공산국가들에는 지배계층을 위한 비밀 오락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몽골에는 전혀 없었다. 1980년대부터 옛 소련과 루마니아 등 40여 개국이 자유화 과정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으나 몽골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민족의 결집력 덕분에 유혈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한 군사들과 정복지의 국민을 자국민과 동일하게 대우했다. 적군도 항복하면 몽골군에 편입시켜 응분의 직책과 계급을 부여하는 동화정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지휘자로는 기용하지 않았다.-42쪽

역사상 이라크를 침공한 외세는 몽골군와 미국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몽골군은 단숨에 이라크 병사를 무력화시키고 점령에 성공했지만, 미국은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는 점이다. -42쪽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도 이국적인 문화를 잘못 받아들여 쇠퇴하고 말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라마불교의 도입을 들 수 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전성기에 몽골인은 한 집에서 한 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대신 한 명 이상씩 라마승으로 출가시켰다. 몽골인이 라마승을 많이 배출했던 것은 지식인을 숭상하는 당대의 풍토와 그 당시 지식인이 모두 승려였던 점에 기인한다. 그 결과 병사가 모자라 몽골의 군대제도는 와해됐다. 이후 국방을 외국인 병사에게 맡겼으며, 이 때문에 대제국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족에게 국가를 고스란히 바치고 만 것이다.
제국이 쇠퇴하기 전 몽골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의 세력을 밖으로 펼쳐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몽골의 흔적은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중국 수도인 북경은 몽골인이 처음 수도로 정했던 곳이다. 덕택에 중국영토가 북쪽으로 확장되는 부수효과를 얻기도 했다. 모스크바도 몽골인이 건설한 뒤 러시아인에게 물려준 것이다. 이란 북부의 이즈파한은 몽골족이 세운 일칸국의 수도였다. 당시 이주한 몽골인 후손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몽골어를 사용하고 몽골 문자로 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44쪽

1921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혁명에 성공한 몽골은 70년 동안 옛 소련의 지배를 받아왔다.

국내 총생산의 30% 이상을 러시아가 무상으로 지원했던 덕분에 몽골인은 자국 경제 상황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생활을 해왔었다.

모든 학교는 거의 무상에 가까운 교육을 실시했고, 당에 대한 충성심과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만 있으면 대학 진학 자격이 주어졌다.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되면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식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다. 곡물 생산량이 전 국민을 먹여 살리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음에도 배급표만 있으면 언제나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음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45쪽

몽골은 1990년 자유화 과정에서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아 동구 국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몽골은 민주화와 자본주의를 선택한 뒤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보장제도의 몰락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었다. -48쪽

정확한 수는 매번 바뀌지만, 대체로 몽골인구의 1%가 한국에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49쪽

몽골인의 1인당 국민소득은 480달러(세계은행 2005년 통계 기준)에 불과하지만 심리적인 만족감은 여전히 상위국가군에 속한다. 몽골인에게서는 저개발국가에서 흔히 드러나는 지도자의 신격화나 그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은 찾아볼 수 없다.

몽골의 정치체제는 이원집정제로, 대통령은 국방에 관한 결정권과 법률안 거부권만을 지닌다. 실질적인 경제나 치안 등 국내 통치권은 의회에서 선출되는 총리가 가지고 있다.-51쪽

몽골은 21개 종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61쪽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력이 1.0~1.5 정도인데 반해 이들의 시력은 때에 따라 5.0까지도 측정된다고 한다. 푸른 초원에서 적을 발견하기에 적합한 눈이다. 늑대나 여우가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양떼를 몰고 도망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훌륭한 눈이기도 하다. -63쪽

몽골인은 자기 신분증에 종족과 집안을 밝힌다. 인구 대다수가 할흐족인 몽골에서 소수민족임을 밝힌다면 불리하지 않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수민족이라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므로 종족을 밝힌다는 것이다.

카자흐족은 중국 신장성에 살다가 187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알타이 산맥을 넘어 몽골로 이주했다. 몽골 정부는 1917년 공산혁명 당시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카자흐 사람들에게 국적을 주고 몽골국민으로 편입시켰다. 카자흐족은 이주 후에도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물론 방언 및 관습, 의복, 주거문화 등을 유지해왔다.-64쪽

오이라트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흡스골 호수의 타이가지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알타이산맥 부근에 자리잡았다. 17세기 초에는 그 일부가 러시아의 볼가 강변에 새로이 정착했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오늘날 러시아 연방 내의 칼무크자치공화국이다.


청나라는 1757년부터 1758년 사이 준가르제국을 정복하여 오이라트족 대부분을 중국 신장성으로 이주시켰으며, 이들이 지금까지도 신장성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 65쪽

몽골리안이라 불리는 몽골 북부지역의 브리야트 몽골인과 중국 내몽고의 몽골인들은 본국의 몽골인보다 훨씬 숫자가 많다. 내몽고에 300만, 브리야트에 300만이 포진해 몽골을 감싸 보호하고 있는 형상이다. -66쪽

몽골반점을 지닌 종족을 언급한다면 에스키모와 아메리카 인디안까지도 몽골인의 범주에 포함된다. 반면 이들은 생활방식이 워낙 달라 모든 동질성을 상실한 상태다.-68쪽

초원의 작은 부족이었던 몽골인들은 종족의 번영과 지속을 위한 방어과정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를 성립할 수 있었다.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종족이 멸망한다는 강박감에서 공격을 최고의 방어책으로 삼아온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제국 건설 과정에서 점령지의 문화나 종교를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족이 피해를 당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는 강력한 자민족보호주의를 내세웠다.

인구가 많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늘 위협을 받아온 몽골인은 아이를 많이 낳아 인구를 증가시켜야 한다고 배워왔다. 지금도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살지 않으면 언제 나라가 송두리째 없어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68쪽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지라 몽골에는 태아숭배사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아이를 위한다. 덩달아 임산부도 그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다.




태어난 아이들의 엉덩이에는 푸른 반점이 있다. 이것이 '흐흐 민지' 즉 몽골반점이다. 이 점은 3~4살이 되면 자연스레 없어진다. 몽골족만이 갖는 특징이므로 몽골인은 이 점을 가진 민족을 동계혈족으로 여긴다. 그런 연유로 몽골인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형제 같은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한국인에게는 특히 우호적이며 모든 면에서 편의를 베풀려고 노력한다.-69쪽

1921년 당시 40만이 채 되지 않았던 몽골 인구는 곧 300만 명에 다다를 전망이다.
현재 몽골인구의 65%가 30세 미만이며, 45.2%가 16세 이하의 어린이들로 구성되어 있다.-70쪽

몽골인은 개를 지저분한 가축으로 여겨 개고기는 먹지도 않는다.-70쪽

몽골인에게는 가문을 나타내는 성씨가 없고 이름만 있다. 물론 몽골인에게도 성이 있었으나 옛 소련의 배후 조종을 받던 당시의 몽골 정부가 공산혁명 이후 성 제도를 폐지했다. 성을 없앤 것은 소련이 몽골족의 기상을 꺾어 놓기 위해 취한 여러 수단 중 하나였다. 소련은 몽골영토의 일부인 브리야트 지방을 자국령에 귀속시키고, 중국이 몽골 남족지방(현재 내몽고)을 접수하는 것을 방치해 몽골인의 근거지를 가급적 척박한 지역으로 한정시켰다. 또한 몽골 가족의 단합을 분열시키기 위해 성 대신 아버지의 이름을 쓰도록 하는 편법을 가르쳤다.-71쪽

몽골에서 매장이 일반화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푸장 또는 조장이라고 불리는 장례법이 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후가 건조하여 부패가 되지 않으므로 시체를 들판에 벌려 새와 들짐승이 뜯어먹게 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흔히 말안장에 시체를 앉혀 놓고 말을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체가 말에서 덜어지면 그곳에서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잔인한 것 같지만 자연 조건에 실질적으로 순응하는 장례문화였다. -74쪽

몽골인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으로는 독립심을 들 수 있다. 그들은 활과 칼, 말 한 마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 자신의 힘과 지혜만으로 세상을 살아왔기에, 그들에게 협동이나 단결이란 말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75쪽

개개인의 독립심이 투철했기 때문에, 몽골인은 지도자가 백성들을 책임지지 못하면 지도자를 심판해 목을 쳤다. 그러므로 몽골의 지도자는 늘 국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백성에게 보여주려 했다. 반면, 우리 지도자들은 언제나 말만 앞섰지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 한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던 몽골 지도자 같은 사람을 고르는 혜안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필요한 때이다.-76쪽

몽골인들은 그들만의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웬만한 사물을 詩로 묘사할 수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시를 아는 사람이 가장 환영받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모이면 노랫가락이 퍼지지만 몽골인이 모이면 시가 흘러나온다.-77쪽

모린호르는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 마두금으로도 불린다. 모습이나 소리가 우리나라의 해금과 매우 유사하다.

야타크라는 악기는 우리나라의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음색도 비슷한 편이다.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데, 경쾌한 음률이 실내악으로서 손색없다.-79쪽

없는 사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손님 대접은 극진하다. -81쪽

손님과의 안면 유무에 관계 없이 장황한 인사말을 주고 받는데, 인사는 적어도 5분 이상 걸린다.


코담배를 상대방에게 줄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 왼손은 불결하다고 생각해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기 때문이다. -84쪽

몽골에서는 어른들이 물건을 주면 아랫사람들은 황급하게 소매를 풀어 내리고 두 손을 내밀어 받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맨살을 보이거나 팔뚝을 드러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몽골인이 겉으로는 험악해 보일지 몰라도 예의 면에서는 어느 민족에게도 빠지지 않는다.

몽골인은 또한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이다. 자연환경이 척박해 외부인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몽골인은 외국인을 외부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이자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선구자로 여겨 반긴다. 그러나 몽골인의 호의적인 태도는 사실 도시지역에 한정된 말이다. 지방을 여행할 때 전통과 예절을 잘 알지 못하면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배타적이며 관습을 중시한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잘 몰라서 그렇다는 것을 모든 몽골인은 잘 알고 있기에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니다.-85쪽

손님은 음식을 먹고 포식했다는 표시로 트림을 한다. 그리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10분은 족히 넘을 시간을 할애하여 주인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나타낸다.

예부터 잔칫날에 귀한 손님이 오면 몽골인은 말고기를 대접한다는 중국 사신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몽골 학자들은 이 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손님에게 새로 잡은 고기를 대접하는 관습에 따라야 했지만, 당시 사신이 방문한 전쟁터에서는 가축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장 구하기 쉬운 말을 잡아 잔칫상을 차렸던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두고 몽골의 풍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중국 사신은 몽골인이 미개하고 무식해 말고기도 먹는다는 투의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말고기는 그저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다 수명ㄷ이 다하면 잡아 먹을 뿐이다.-86쪽

난로에 물을 붓거나 쓰레기를 넣어서는 안 되며, 불을 쑤시는 것과 난롯불에 발을 쪼이는 것은 금기시 된다. 난로를 타 넘는 것도 삼가야 한다. 난로를 모독하는 모든 행동은 죄악이며 주인을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유를 땅바닥에 쏟아도 곤란하다. 게르 기둥에 몸을 기대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인다. 게르 안에서 휘파람을 불면 게르 외부에 있던 불순 세력들이 침입해 온다는 옛말 때문에 몽골인은 이를 몹시 꺼린다.-86쪽

몽골인에게 풀은 생명과 직결된다. 초원의 풀을 이용하기에 따라 젖의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상대대로 비법이 전수되므로, 그들은 가축에게 포원의 풀을 효과적으로 뜯게 한다. 가능하면 풀을 짧게 듣어먹을 수 있게 가축을 순서대로 몰고 다니는 것이 그 방법이다. 소와 양을 같이 모는 목동은 소 다음 양이 풀을 뜯도록 하기 위해 소가 앞서 가게 몬다. 소는 풀뿌리 근처까지 뜯어먹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 남은 풀을 양은 샅샅이 헤쳐 먹는다. 마찬가지로 낙타와 양을 동시에 유목하는 고비 지방에서는 양을 먼저 뜯긴다. 양은 가시가 있는 거친 풀을 먹지 않기 때문에 거친 풀을 잘 먹는 낙타를 양 뒤에 세우는 것이다. -92쪽

몽골여성들은 빨래에서 해방된다. 칭기즈칸은 그의 법전으로 불리는 <대야사>에서 천이 완전히 해어지기 전까지는 의복을 세탁하는 것을 금하였다. 날씨가 추워 빨래를 하다보면 사람이 다치는 것은 물론 의복이 상하기 쉬워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역으로 생각하면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땀의 분비가 적고 건조하여 생활에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발상이 가능했던 것이다.-93쪽

몽골인은 물 대신 눈으로 빨래한다. 눈이 날리기 시작하면 털옷과 양탄자 등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온다. 빨랫감을 눈밭에 던져두고 그 위에 눈이 2~3센티미터가량 쌓이기를 기다린다. 눈이 쌓이면 빨랫감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눈이 골고루 묻게 한 뒤 바위나 나무 등걸에 대고 패기 시작한다. 이렇게 2~3번하고 훌훌 털어 버리면 끝이다. 털옷을 세탁하는 모습은 한 마리 늑대가 눈밭에 굴렀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94쪽

몽골에서는 기후가 민족의 생활환경이나 성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인류학자들의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몽골인은 혹독한 추위를 이겨 생존하기 위해서 게르를 지었고, 가축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일 년이면 네다섯 차례 이사한다. 이사라는 것이 지어진 집 사이를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집 자체를 뜯어 세간과 함께 옮기는 것이므로 우리의 이사 개념과는 판이하다. 이사는 일 년에 4~5번씩 하며 봄 이사가 그 시작이다.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피했던 좁은 지역에서 벗어나 햇빛이 비치는 평지로 집을 옮긴다. 시골에서는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4월말부터 봄맞이 이사를 서두른다. 겨우내 굶주렸던 가축에게 한시라도 빨리 새 풀을 뜯기려는 안타까운 심정에서다.-96쪽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같은 땅에 연작을 하지 않듯 몽골인도 같은 장소에 터를 잡지 않는다. 같은 장소로 오는 데는 적어도 4~5년이 지나야 한다. 그 이전에 가면 지난해 뜯어 먹은 풀뿌리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그 해 가축 농사는 실패한다고 한다. -97쪽

한여름에도 낮에는 27~29도의 뜨거운 햇볕이 대지를 달구지만 그늘에서는 서늘함을 느껴 별로 땀이 나지 않는다. 밤에는 기온이 4~5도까지 급격하게 내려가 곧바로 두꺼운 옷이 필요해진다. 그러니 유목민들은 두꺼운 옷 한벌이면 대충 사철을 견딜 수 있는 셈이다.



개방의 바람을 탄 집안에서는 최근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갖춘 집들은 유목에서 벗어나 반정착상태의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에 국한된다.-98쪽

영하 40도 이하인 외부와 단절된 게르 내부에서 열기를 더하는 것은 오직 난로뿐이다. 아낙네들이 여름내 모아 말린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는데, 이는 나무가 희귀한 초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연료이기 때문이다. 소는 사료 대신 풀만 먹어 똥에는 섬유소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냄새나 분진이 거의 없는 편이라 생각보다는 위생적이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하는 몽골인은 난로 연통을 게르 안의 자신들과 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로 여긴다. -99쪽

난로는 가문의 유일한 상속물로 여겨질 만큼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별로 없는 몽골인이지만, 전통적으로 난로에는 큰 의미를 두고 막내에게 상속해 왔다. 몽골인은 가장 최후까지 남아 가문을 지킬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장남이 아닌 막내아들을 상속자로 택한다. 칭기즈칸은 전쟁에 나설 때마다 막내 아들에게 집안의 모든 관할권을 위임하고 출정했다. 가족보호는 물론 城의 관할조차도 나이 어린 막내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는 "만약 이 애비와 너의 형들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가문과 나라를 일으켜 원수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와 더불어 하는 말이 바로 "난로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몽골인이 난로를 특별히 여기는 것은 불을 곧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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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구판절판


물가 상승도 물가 상승 나름이다. 극심한 물가 상승은 해롭지만 (40%까지의) 적당한 물가 상승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며, 심지어 급속한 성장 및 고용 창출과 양립할 수도 있다. 역동적인 경제에서는 어느 정도의 물가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가 변화하면 물가가 변하는 법이니,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새로운 경제 활동이 많은 경제에서는 물가가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233쪽

낮은 물가 상승률은 노동자들이 이미 벌어 놓은 것을 더 잘 지켜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데 필요한 정책은 노동자들이 미래에 벌 수 있는 기회를 감소시킬 수 있다. 왜 그럴까? 물가 상승률은 낮은 수준, 그것도 대단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엄격한 금융, 재정 정책은 경제 활동의 수준을 저하시킬 수 있으며, 이는 결국 노동 수요의 감축, 실업 증대, 그리고 임금 감소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엄격한 물가 통제는 노동자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 물가 상승률의 하락으로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연금 수급자와 고정된 이율로 금융 자산에서 수입을 얻는 (금융 산업을 포함한) 경제 주체들에 한정된다. 이들은 노동 시장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물가 상승률을 낮추는 엄격한 거시경제 정책이 미래의 고용 기회나 임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반면, 이미 가지고 있는 소득은 오히려 더 잘 보호된다. -233쪽

개발도상국의 실업률은 실제 실업의 정도를 크게 낮아 보이게 만든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은 실업 상태로 남아 있을 여유가 없어 (거리에서 싸구려 물건을 팔거나, 문을 열어 주고 푼돈을 받는 일 따위의) 극히 생산성이 낮은 일자리를 통해 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위장 실업'이라고 한다.-235쪽

지나치게 엄격한 통화 정책은 투자를 줄인다. 그리고 낮은 투자는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감소시킨다. 부자 나라들은 높은 생활수준, 관대한 복지 정책, 낮은 빈곤율을 달성한 상태이므로 이런 문제들이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절박할 정도로 더 높은 소득과 더 많은 일자리가 필요하고, 심각한 소득 불평등 문제를 대규모의 재분배 프로그램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하는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는 엄격한 통화 정책은 재앙에 가까운 일이다. -237쪽

부자 나라는 경제 후퇴기에 들어서면 대개 통화 정책을 완화하고 예산 적자를 늘린다. 개발도상국에 같은 일이 발생하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실업이 세 배로 늘어나고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IMF를 통해 이자율을 불합리한 수준으로 올리고, 예산 균형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거기서 더 나아가 예산 흑자를 이루라고 강요한다. -243쪽

아르헨티나 재무 장관 카발로가 개발도상국들은 '성장'이 필요한 '반항하는 10대'와 같다는 말은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른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그가 정말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10대는 교육을 받고 제대로 된 직장을 찾을 필요가 있다. 10대 청소년이 다 큰 어른인 것처럼 행동하며 저축을 늘리겠다고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개발도상국이 이미 '다 큰' 국가들에게나 어울리는 정책을 사용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개발도상국이 해야 할 일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이를 위해 개발도상국들은 부자 나라들이 사용하는 정책에 비해서 보다 투자 지향적이며 성장 지향적인 거시경제 정책을, 그리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지금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거시경제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244쪽

자이레 : (지금은 콩고 민주공화국인) 자이레는 1961년에 연간 1인당 소득 67달러의 극빈국이었다. 모부투 세세 세코는 1965년에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1997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21년 동안 자이레를 주무르면서 50억 달러를 축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11억 달러였던) 1961년 국민소득의 4.5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49쪽

인도네시아 : 인도네시아는 1961년에 연간 1인당 소득이 49달러에 불과한, 자이레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였다. 1966년에 모하메드 수하르토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1998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32년 동안 150억 달러를 축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일부에서는 그 금액이 35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자녀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사업가가 되었다. 150억 달러와 350억 달러의 평균치인 250억 달러는 48억 달러였던 1961년 국민소득의 5.2배에 해당한다. -249쪽

부패만을 기준으로 하면, 인도네시아는 자이레보다 경제 사정이 훨씬 더 나빴어야 했다. 그러나 모부투가 집권하는 동안 자이레의 생활수준은 세 배나 악화되었던 데 반해, 수하르토가 집권하는 동안 인도네시아의 생활수준은 세 배 이상 향상되었다.
......
이렇게 자이레와 인도네시아를 대비해 보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부정부패야말로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것은 아니라 해도) 상당히 큰 장애물'이라며 갈수록 즐겨 떠벌이는 주장의 한계를 알 수 있다.
......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부패는 큰 문제이다. 그러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이것을 약속했던 원조를 삭감하는 명분으로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들이 원조를 삭감할 경우 해당 국가의 부정직한 지도자가 입는 손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손실이 더 클 것이고, 극빈국들의 경우에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250쪽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부정부패와 관련된 돈이 대부분 국내에 남아서 고용과 소득을 창출했다. 자이레의 경우는 부패한 돈이 대부분 국외로 빠져나갔다. 부패한 지도자가 있다면 최소한 더러운 돈을 국내에 남겨 두기를 바라야 한다. -255쪽

부정부패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해당 부패 행위가 어떤 결정에 영향을 미치느냐, 뇌물을 받은 사람이 뇌물을 어떻게 쓰느냐, 그리고 만일 부패가 없었다면 뇌물이 과연 어떻게 쓰일 수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256쪽

역사를 살펴보면,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는 부정부패를 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극빈국들의 경우 하나같이 청렴도가 높지 않다는 사실은, 어떤 나라가 뇌물 수수 관행을 크게 줄일 수 있으려면 절대적인 빈곤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존엄성을 사기는 쉽다.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이 밀가루 한 포 준다는 유혹을 받고도 표를 팔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수가 낮은 공무원들은 뇌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개인적인 존엄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257쪽

일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통치자의 독단적인 재산 몰수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데, 이런 보호가 없다면 부를 축적할 동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국 정부의 대외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는 "민주주의의 확대는 개인이 번영과 향상된 복지를 누릴 기회를 증진시킨다"고 주장한다. 반면 자유 시장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라면 민주주의는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던 것이 그 사례라 하겠다. -263쪽

자유 시장이 경제 발전을 위한 최선의 길이냐 하는 질문을 접어두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 질문과 관련하여 이 책에서 시종일관 그렇지 않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은 실제로 천생연분이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일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65쪽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게 되면 부자들은 자신들의 욕구 가운데 가장 하찮은 요소들까지 실현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조차 없다. 개발도상국에서는 해마다 말라리아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수백만 명이 시달리고 있지만, 세계는 말라리아 치료약 개발보다는 살 빼는 약 개발에 20배나 많은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다. 또 건강한 시장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매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법원의 판결, 공직, 학위와 (법률가, 의사, 교사) 특정 직업의 자격증 등이 그 예이다. 누구든 돈만 있으면 이런 것들을 살 수 있는 사회는 단순히 정당성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의사들이나 교사들의 자질이 적절한 수준 이하일 경우에는 노동력의 질이 떨어질 수 있고, 법원이 불공정한 결정을 내리게 되면 계약법의 효력이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267쪽

민주주의와 시장은 둘 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충돌한다. 우리는 양자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자유 시장이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그리고 경제 발전 사이에 효과적인 순환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268쪽

특별히 강조해야 할 사실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경제의 탈정치화를 독촉하는 것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민주 정체 안에서의 정책 결정을 탈정치화한다는 것은 *(직설적으로 말해) 바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손에서 모든 중요한 결정들을 빼앗아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기구에 속하는 선출되지 않은 기술 관료들의 손에 넘긴다면, 민주주의를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 바꾸어 말해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시장과 모순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은 피노체트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것과 민주주의를 칭송하는 것이 모순된다고 보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들이 원하는 민주주의는 몹시 무력한 민주주의이다. -270쪽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과 관련해서는 유리한 근거도, 불리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연구자들이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여러 나라들을 조사하면서 통계학적인 규칙성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유리한 쪽으로나 불리한 쪽으로나 별다른 체계적인 근거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272쪽

물론 민주주의가 경제적 성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근거가 있어야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비록 민주주의가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가치 때문에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민주주의가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더욱 강력하게 민주주의를 지지해야 한다. -273쪽

노르웨이는 당시 유럽에서 몹시 가난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민주 국가가 되었다. (노르웨이는 1907년에 최초로 보통 선거제를 도입한 뉴질랜드에 이어 두 번째인 1913년에 보통 선거제를 도입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스위스는 1인 1표라는 아주 형식적인 기준으로만 볼 때도, 이미 큰 부자가 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와서야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캐나다는 1960년이 되어서야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62년이 되어서야 '백호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투표를 허용했다. 미국의 남부 주들은 1965년이 되어서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투표를 허용했는데, 이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등의 인물들이 주도한 시민권 운동 덕분이었다. 스위스는 1971년에야 여성들의 투표를 허용했다. -274쪽

(만일 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든 두 개의 주 아펜첼아우서로덴과 아펜첼이너로덴이 각각 1989년, 1991년 이전까지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은 것까지 따진다면 이 시기는 훨씬 늦춰진다.) 인도는 최근까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가난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60년 동안 민주주의를 유지해 왔고, 한국과 대만은 상당히 부유해진 1980년대 말이 되어서야 민주 국가가 되었다.-275쪽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자유 시장을 촉진하고, 자유 시장은 다시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견해는 대단히 문제가 많다.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사이에는 강한 긴장이 있으며, 자유 시장이 경제 발전을 촉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일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면, 이것은 대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주장처럼 자유 시장을 촉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75쪽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입으로는 항상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조치들을 장려하는 것이다. 규제 완화가 그 한 예인데, 그것이 민주주의 약화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규제 완화는 시장의 영역을 확장하고, 민주주의의 영역을 축소시킨다. 그 밖에도 엄격한 국내법 혹은 국제 조약으로 정부를 구속하고, 중앙은행이나 여러 정부 기국에 정치적 독립성을 부여하는 따위의 고의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276쪽

1세기 전의 일본인들은 근면하지 않고 게을렀으며, 충실한 '일개미'가 아니라 독립심이 지나쳤고,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라 감정적이었으며, 심각하다기보다는 실없었고, (높은 저축율로 표현되는 지금과는 달리)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오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다. 또 그 반세기 전의 독일인들은 능률적인 게 아니라 나태했고, 협조적이 아니라 개인적이었으며,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었고, 똑똑하기보다는 어리석었으며, 준법 정신이 투철하기보다는 부정직하고 도둑질을 잘했고, 자제심이 강하기보다는 태평했다.

우리가 일본인과 독일인에 대한 이런 성격 묘사를 읽으면서 어리둥절해지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인들과 독일인들은 이렇게 '나쁜'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둘째, 당시의 일본인 및 독일인들과 오늘날의 일본인 및 독일인들이 어째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이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민족적 습관'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을까?-285쪽

문화에 근거하여 경제 발전을 설명하는 견해는 1960년대까지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시민권 운동과 탈 식민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이런 설명에는 (인종주의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문화 지상주의적인 기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런 설명들은 비판을 받았다. -287쪽

유교(Confucianism)는 기원전 6세기 중국의 위대한 정치 철학자 공자의 라틴식 이름인 Confucius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유교에는 신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기 때문이다. 유교는 그보다는 정치 및 윤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가정생활의 편제 및 사회적 예법과도 관련이 깊다. -289쪽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 이후로 유교 문화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이 지역의 경제적 성공을 가져 온 원인이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 나갔다. 유교 문화는 근면, 교육, 검약, 협동,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인적 자본의 축적을 독려하고, (검약을 강조함으로써) 물리적 자본의 축적을 장려하며, 협동과 규율을 중시하는 문화가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291쪽

그런데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이 있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 지역의 발전 지체를 유교 탓으로 돌렸다. 옳은 이야기였다.

유교는 사람들이 경제 발전에 필수적인 산업과 기술 따위의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꺼려 하게 만들었다. 전통적인 유교식 사회 체제의 정상에는 학자-관리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통치 계급 상 하급에 해당하는 직업 군인들과 함께 농민, 장인, 상인(그 아래에는 노비들이 있다.)의 순으로 위계를 이루고 있는 평민 계급을 다스렸다. 그런데 평민 계급 중에서도 농민과 그 아래의 다른 계층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경계가 있었다. 농민들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나마 공직 경쟁 시험인 과거에 합격하면 통치 계급에 편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인이나 상인은 이 시험에 응시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 공직 시험은 유교 문헌에 대한 학문적 지식에 대해서만 시험을 본다는 것이다. 이런 요 인들 때문에 유교 사회의 통치 계급은 실용적인 지식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292쪽

유교는 또한 독창성과 기업가 정신을 막는다. 앞서 언급했듯 엄격한 사회적 위계질서를 고집함으로써 (장인이나 상인 같은) 특정 계층 사람들의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게 만ㄷ르었다. 또 사회적 위계질서는 윗사람에 대한 충성과 권위에 대한 복종의 강조를 통해 유지될 수밖에 없는데, 상급자에 대한 충성과 권위에 대한 복종은 순응주의를 낳고 독창성을 억눌렀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뛰어난 독창성이 필요치 않는 기계적인 일에 능하다는 문화적인 고정관념은 유교의 이런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93쪽

유교는 법치주의를 무력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공자의 '만일 사람들을 법으로써 이끌고 처벌로써 화합시키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처벌을 피하려 노력하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모를 것이다. 만일 사람들을 덕으로써 이끌고 예절로써 화합시키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선량해질 것이다."라는 유명한 진술에서도 드러난다. 공자의 말은 옳다. 법적 제재를 엄격하게 하면 사람들은 처벌이 두려워 법을 준수할 것이다. 하지만 법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사람들은 도덕적인 해위자로서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법의 준수를 넘어선 도덕적인 행동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법치주의를 업신여기기 때문에 그만큼 전횡적인 통치에 취약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만일 통치자가 덕이 없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293쪽

그렇다면 유교란 정확히 어떤 문화인가? 헌팅턴이 한국과 관련하여 표현한 것처럼 '검약, 투자, 근면, 교육, 조직, 그리고 규율'을 중시하는 문화인가? 아니면 실용적인 직업을 멸시하고 기업가 정신을 가로막고 법치주의를 저해하는 문화인가?
둘 다 맞다. 앞의 묘사는 경제 발전에 유리한 요소들만 뽑아 낸 것이고, 뒤의 묘사는 경제 발전에 불리한 요소들만 뽑아 낸 것이긴 하지만. -294쪽

유교만이 이중인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회교의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교 문화가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업가 정신과 독창성을 가로막고, 내세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의 축적과 생산성 향상 같은 세속적인 일에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밖에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여성들에 대한 활동 제한은 재능을 허비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노동력의 질까지 떨어뜨린다. 어머니들이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하면 자식들에게 충분한 영양과 학업에 대한 도움을 제공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자식들의 학업 성적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회교의 (지하드 개념으로 구체화된) '군사주의' 경향은 돈벌이 대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칭송한다. -294쪽

하지만 회교 문화에는 다른 대부분의 문화와는 달리 고정된 사회적 위계질서가 없다. (그래서 남아시아의 하층 카스트에 속하는 힌두교도들이 회교도로 개종했던 것이다.) 따라서 열심히, 그리고 독창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회교 문화는 유교의 위계질서에서와는 달리 공업이나 상업 활동을 경멸하지 않는다. 예언자 무하마드 자신이 상인이었다. 회교는 상인의 종교이다 보니 계약에 대해 매우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결혼식에서도 결혼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절차가 있다. 이런 경향은 법치주의를 장려한다.(알라의 9개 이름 중 두 가지는 '정의로운 분') 실제 회교 국가들의 판사 양성 역사는 기독교 국가들보다 수백년이나 앞선다. 회교 국가에서는 또 합리적인 사고와 학습을 강조한다. 아랍 세계는 한때 수학, 과학, 의학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했다. 또 코란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대 이전의 회교 사회는 대부분 기독교 사회보다 훨씬 관대했다. 1492년 스페인 기독교도들의 국토 회복 운동 직후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이 오토만 제국으로 망명했던 것도 그런 이유이다-295쪽

자본주의 초기 시절 경제 발전에 성공한 국가들의 대부분이 신교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신교가 특히 경제 발전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천주교 문화권인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남부 독일이 급속히 발전하자 신교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신통한' 문화로 취급되었다. 일본이 부자 나라가 되기 전에는 동아시아가 유교 때문에 발전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일본이 번영을 이룩한 뒤에는 중국과 한국의 유교가 개인의 계발을 중시하는 데 반해, 일본의 유교는 협동을 강조하기 때문에 급속한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홍콩, 싱가포르, 대만, 한국이 경제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자 유교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은 잊혀졌다. 유교야말로 근면과 검약, 교육과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경제 발전에 가장 적합한 문화가 되었다. 요즘에는 회교권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불교권인 태국, 그리고 힌두교권인 인도가 경제적으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296쪽

많은 문화주의자들이 은연중 전제하는 것처럼 문화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에 일본 문화나 독일 문화가 경제 발전에 불리한 것처럼 보였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더 부유한 나라 출신의 관찰자가 (특히 가난한 나라의) 외국인에 대해 가진 편견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부자 나라의 상황과 가난한 나라의 상황은 다르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진정한 '오해'도 있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문화적' 특질로 자주 인용되는 게으름에 대해 살펴보자. 부자 나라 사람들은 으레 나라가 가난한 것은 국민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단히 가혹한 조건에서 장시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이들이 게으르게 '보이는' 것은 시간에 대한 '산업 사회적인'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연장이나 간단한 기계만 가지고 일할 때에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 반면 자동화된 공장에서 일을 할 때는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부자 나라 사람들을ㄴ 시간 개념에 대한 이런 차이를 게으름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297쪽

가난한 나라에 '게으르게 지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빈둥대는 것을 더 좋아하는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일까?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들이 게으르게 지내는 주된 원인은 가난한 나라의 경우 실업 혹은 준실업 상태(사람들이 직업은 있지만 할 일이 충분치 않은 경우)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것은 문화가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으른' 문화를 가진 가난한 나라 출신의 이민자들이 부자 나라로 이주한 뒤에는 현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을 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때 크게 떠벌여지던 독일인들의 '부정직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비윤리적인, 심지어는 불법적인 수단에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 가난은 또 법의 집행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법적인 행동을 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위법 행동을 '문화적으로' 수용하기까지 한다.-298쪽

일본인들과 독일인들의 '감정 과잉'에 대해서는 어떤가? 합리적인 사고가 없는 상태가 '감정 과잉'이라고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합리적인 사고는 대개의 경우 경제 발전의 결과로 발전한다. 현대의 경제는 합리적으로 조직된 활동을 전제로 하고, 이것이 다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남미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떠올리는) '오늘을 위해 사는 것'혹은 '태평하게 사는 것' 역시 경제적인 조건이 빚어 내는 결과이다. 천천히 변화하는 경제에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필요성이 그다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새 직업 같은) 새로운 기회나 (수입품의 갑작스런 유입 같은) 예기치 않은 충격을 예상할 때에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가난한 경제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신용, 보험, 계약 따위의) 장치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299쪽

닫시 말해 문화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변화한다. 오늘날의 일본과 독일 문화가 자신의 선조들의 문화와 크게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문화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이다. 어떤 나라가 '근면하고' '규율이 잘 선' (그리고 그 밖에 '긍정적인'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발전해 가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특성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설명이다. -300쪽

그러나 한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나라들은 자만에 빠질 수 있다. 1980년대 후반이 되기 전까지 한국은 기술적으로 자본을 통제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은 신중한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자본 시장을 대폭 개방했는데, 이는 미국의 압력도 있었지만 20년 동안 경제 '기적'을 계속한 뒤라 자만에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부자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1996년 OECD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부터는 부자 나라처럼 행동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소득을 대부분의 OECD ㅎ ㅚ원국들과 비교하면 3분의 1수준, 가장 부유한 회원국과 비교하면 4분의 1수준에 불과했다. 1997년의 금융 위기는 이런 행동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316쪽

현재를 희생해서 미래를 개선하라는, 간단하지만 강력한 이 원칙 때문에 미국인들은 19세기에 자유 무역을 실시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핀란드 사람들은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한국 정부는 1960년대에 세계은행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철소를 건설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스위스 사람들은 19세기 말이 되기 전까지는 특허를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 사람들은 외국인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결국 바로 이것 때문에 나는 여섯 살 먹은 아들 진규를 공장에 보내 생계비를 벌어오게 하지 않고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321쪽

능력 개발을 위한 투자는 그 열매를 거두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에 대해 논평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그걸 말하기에는 너무 때가 이르다."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한, 마오쩌뚱 아래서 오랫동안 중국 수상을 지낸 저우언라이 정도로 시간을 길게 잡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앞에서 노키아의 전자 부문이 수익을 내기까지는 17년이 걸렸다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그저 전주에 불과하다. 도요타는 30년 넘게 보호와 보조금 정책을 실시한 뒤에야 비록 하급차지만 국제 자동차 시장에서 어느 정도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이 모직물 제조 부문에서 저지대국을 따라잡기까지는 헨리 7세 시대부터 시작해서 거의 100년이 걸렸다. 미국이 고나세를 폐지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질 만큼 경제를 발전시키기까지는 130년이 걸렸다. 만일 이렇듯 시간을 길게 보는 시야를 갖지 못했더라면 아직까지도 일본에서는 견직물이, 영국에서는 모직물이, 미국에서는 면직물이 주력 수출 품목이었을 것이다.-321쪽

스위스는 비밀은행에 예치된 검은 돈에 의지해 먹고 사는 나라도 아니고, 소 목에 다는 종이나 뻐꾸기시계 따위의 시시한 기념품을 사들이는 관광객에 의지해 먹고 사는 나라도 아니다. 사실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공업화된 나라이다. 2002년에 스위스의 1인당 제조업 생산고는 세계 최고였는데, 이는 세계 2위인 일본에 비해서는 24%나 높고, 미국에 비해서는 2.2배, 오늘날 '세계의 공장' 노릇을 하는 중국에 비해서는 34배, 인도에 비해서는 156배나 높은 수치이다. 금융의 중심지이자 무역항으로 번창ㅇ하는 ㄴ도시 국가로 알려진 싱가포르 역시 마찬가지로 대단히 공업화된 나라인데, 1인당 제조업 생산고가 '공업 발전소'로 통하는 한국보다 35%, 미국보다 18%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325쪽

자유 무역 경제학자들이 농업에 집중하라고 권장하고, 탈공업화를 부르짖는 경제 예언가들이 서비스를 개발하라고 선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은 번영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중요한 길이다. 여기에는 훌륭한 이론적 근거가 있고, 이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례도 풍부하다. 우리는 스위스, 싱가포르 등 제조업을 기반으로 여전히 번창하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서 서비스 경제의 성공 사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326쪽

국제 경쟁은 수준이 비슷하지 않은 경기자들이 참여하는 게임이다. 우리 개발 경제 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하자면, 스위스에서 스와질란드에 이르는 모든 나라들이 맞붙어 싸우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약한 나라에게 유리하도록 '경기장을 기울게 만드는 것'이 공정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약한 나라들이 자국의 생산자들에 대한 보호와 보조금 정책을 보다 강력하게 실시하고, 외국인 투자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규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들 국가가 선진적인 나라들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차용'할 수 있도록 지적소유권 보호를 완화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또 부자 나라들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가난한 나라들에게 기술을 이전해 줌으로써 이들을 도울 수도 있는데, 이는 가난한 나라의 경제 성장을 돕기도 하지만, 지구 온난화 방지라는 절박한 필요에 좀 더 부합된다는 추가적인 이득도 거둘 수 있다.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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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구판절판


세계화 경제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부자 나라들에 의해 결정된다. 설령 부자 나라들이 의식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된다. 부자 나라들은 세계 생산고의 80%를, 국제 무역의 70%를, (해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 외국인 직접투자의 70~90%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부자 나라들의 국가 정책이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자 나라들이 가진 막강한 영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영향력을 발휘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세계 경제의 규칙을 만들고자 하는 부자 나라들의 의도이다. -58쪽

개발도상국들의 정책 형성에 있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내가 '사악한 삼총사'라고 부르는 다자적 기구들, 즉 IMF, 세계은행, WTO이다. 이들 사악한 삼총사는 부자 나라들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은 아니지만, 주로 부자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고, 부자 나라들이 원하는 나쁜 사마리아인 같은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다. -58쪽

부자 나라들은 IMF와 세계은행의 전체 투표권 중 60%를 장악해 절대적인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은 가장 중요한 18개 영역에서 사실상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이다. -62쪽

세계화와 관련해서 불가항력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의 주된 추진력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듯 기술이 아니라 정치, 즉 인간의 의지와 결정이다. 만일 기술이 세계화의 정도를 결정한다면 (증기선과 유선전신에 의존하던) 1870년대보다 (인터넷을 제외하고는 모든 현대화된 운송과 통신 기술을 확보하고 있던) 1970년대에 세계화가 덜 진전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술은 세계화의 외부적인 경계를 규정지을 뿐이다. 엄밀하게 말해 세계화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어떤 국가 정책을 만들고, 어떤 국제 협정을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본다면 '대안 없음'이라는 명제는 잘못된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은 있다.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닌 다른 여러 가지 대안들이 있다. -67쪽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정치에서 노예 제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분열적 요소가 아니었다. 노예 제도 철폐론자들은 일부 북부 주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매사추세츠 주가 특히 심했다. 그러나 북부에서도 노예 제도 철폐론이 우세한 견해는 아니었다.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조차 흑인들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해 투표권을 비롯한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에는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예 제도를 당장 철폐하자는 급진론자들의 제안을 대단히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해방자'인 링컨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링컨은 즉각적인 노예 해방을 촉구하는 신문 사설에 대해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야만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일부 노예만 해방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겨 두고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역시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썼다. -88-89쪽

당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링컨이 1862년에 노예 제도를 철폐한 것은 도덕적인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인 조처였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실제로 남북전쟁을 초래한 노예제만큼이나 중요한 문제,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무역 정책을 둘러싼 불화였다. -89쪽

독일의 경우는 항상 관세가 낮았다. 19세기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의 평균 공업 관세율은 5~15%로, 영국과 미국의 (1860년대 이전) 평균 공업 관세율 35~50%보다 낮았다. 산업 보호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1920년대에도 독일의 평균 공업 관세율은 20% 근처에 머물렀다. 독일의 이런 사례를 고려할 때 파시즘과 보호 무역주의를 동일시하는 자유 무역 이론은 사실을 오도하고 있는 셈이다. -93쪽

안타깝게도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면서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강요해 왔다는 사실 역시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이미 안정된 자리를 차지한 나라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사용해 효과를 보았던 민족주의적인 정책들ㅇ르 통해 경쟁국들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부자 나라들의 클럽에 최근 합세한 나의 모국 한국도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은 한때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보호주의적인 나라였지만, 지금은 WTO에서 완전한 자유 무역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제조업에 대한 관세를 크게 낮출 것을 주장하고 있다. ...... 더욱 어이 없는 현실은 한국에서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이들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 어느 시기에 국가 개입주의와 보호 무역주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던 장본인들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99쪽

다행스럽게도 역사에서는 선진국들이 반드시 나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나쁜 사마리아인 행세를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부자 나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입증하는 사례들도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중요 사례로는 1947년 마셜 플랜이 시작되고 나서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가 부상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들 수 있다.
......
실제로 투입된 금액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마셜 플랜은 필수적인 수입 비용과 사회간접자본의 재건 비용을 조달함으로써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의 경제 발전에 시동을 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마셜 플랜의 경우 미국이 과거이 적국들까지 포함된 다른 나라들의 번영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본다는 신호였다는 것이다. 미국은 또한 다른 부자 나라들을 설득하여 가난한 나라들이 민족주의적 정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것을 돕거나, 아니면 최소한 허용이라도 하도록 이끌었다. -100쪽

부자 나라들의 이같은 태도 변화는 부분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가진 식민주의에 대한 죄책감에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세계 경제의 새로운 주도권자로 나선 미국이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 개발에 대해 (계몽된)깨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런 '깨인' 전략은 눈부신 결과를 낳았다. 부자 나라들은 이른바 '자본주의의 황금기'(1950-1973)를 경험했다. ...... 엄청난 성장의 달성과 함께 소득 불평등 완화와 경제 안정도 이루어졌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시기 동안 개발도상국들 역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101쪽

미국이 1947~1979년 사이에 가난한 나라들에게 너그럽게 굴었던 것은 소련과의 경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냉전 상황 때문이라고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냉전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치하해야 할 공적을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의 강국들은 극심한 경쟁을 하면서도 약소국들에게 얼마나 지독하게 굴었던가. -102쪽

내가 여섯 살 먹은 아이를 노동 시장으로 몰아넣는다면 아이는 약삭빠른 구두닦이 소년이 될 수도 있고,돈 잘 버는 행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일 아이가 그런 직업을 가지려면, 내가 앞으로적어도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보호와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108쪽

나의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개발도상국에는 급속하고 대대적인 무역 자유화가 필요하다는 자유 무역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논지가 일치한다. 이들은 개발도상국의 생산자들이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도록 지금 당장 가능한한 경쟁에 많이 노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호는 안이함과 나태함만 유발할 뿐이므로, 경쟁에 노출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경제 발전에 더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기 부여 외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능력이다. ...... 개발도상국의 산업 역시 너무 일찍부터 국제적인 경쟁에 노출되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선진 기술을 익히고 효율적인 조직을 만드는 등의 능력을 키워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108쪽

무역 자유화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다. 가난한 나라들의 입장에서는 관세 수입의 축소로 말미암아 정부읭 ㅖ산 압박이 커지는 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세금 징수 능력이 취약한데, 관세는 개중 가장 징수하기 쉬운 세금이다. 따라서 가난한 나라들은 (관세 수입이 전체 세입의 50%를 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관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 게다가 무역 자유화로 말미암은 경제 활동의 약화와 높은 실업률 역시 소득세 세입을 감소시켰다. 그런데 이 나라들은 IMF로부터 예산 적자를 줄이라는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었던 만큼 세수 감소는 곧 극심한 지출 감축을 의미했고, 이것은 대개 교육, 의료, 사회간접자본 등의 필수적인 분야에 대한 재정 지출을 줄여 장기적인 성장에 악영향을 주었다. -112쪽

나쁜 사마리아인인 부자 나라들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 무역을 권장하면서, 자신들이 모두 오나전한 자유 무역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무역을 하고 있다는 걸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여섯 살 먹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보고, 성공한 어른들은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는 논리를 들이대면서 여섯 살 먹은 그 아이를 일터로 보내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성공한 어른들은 성공을 했기 때문에 자립을 한 것이지,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을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경제적, 정서적으로 든든한 지원을 받아온 사람들이다. ...... 요컨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이다. -119쪽

하지만 무역이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논리와 자유 무역이 경제 발전에 가장 좋다(또는 무역이 자유로울수록 더 좋다)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논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자유 무역주의 경제학자들ㅇ른 반대론자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 자유 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진보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암시하는 교묘한 속임수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왔다. -130쪽

한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 무역을 해야만 국제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유치산업을 장려하지 않고 자유 무역주의를 추구했다면 한국은 지금과 같은 중요한 무역 국가가 되지 못하고, 아직도 1960년대에 주된 수출 품목이었던 (텅스텐 원광, 생선, 해초 등의) 원료들이나 (직물, 사람의 머리털로 만든 가발 같은) 낮은 기술, 낮은 가격의 상품들을 수출하고 있을 것이다.-131쪽

핀란드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집착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언어는 우랄 알타이어계로 가까운 이웃인 스웨덴이나 러시아 말보다는 한국이나 일본 말에 더 가깝다. 핀란드는 또 스웨덴 식민지로 600여 년을 지냈고, 러시아 식민지로 다시 100여 년을 보냈다. 수천 년 동안 한족, 훈족, 몽고족, 만주족,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주변에 있는 민족들에게 시달려 온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핀란드 사람들의 이런 심정에 공감할 수 있다.
따라서 핀란드 사람들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1918년 이후로 외국인들을 멀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해 온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135쪽

핀란드는 1930년대에 외국인이 20% 이상을 소유한 기업들 모두를 공식적으로 '위험한' 기업으로 분류하는 법률을 도입하기까지 했다. 결국 핀란드는 외국인 투자를 거의 받지 못했다. ......
핀란드에서 외국인 투자가 전면적으로 자유화된 것은 1993년의 일이었는데, 이것도 1995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준비 조치의 일환이었다.
신자유주의 정통파의 견해에 따른다면, 50년이 넘도록 지속된 이런 극단적인 외국인 배척 전략은 핀란드의 경제 전망에 극심한 악영향을 미쳤어야 했다. 하지만 핀란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의 성공적인 본보기로 칭송 받고 있다. -136쪽

개발도상국들이 1980년대 및 1990년대에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강권에 못 이겨 자본 시장을 개방한 뒤로 금융 위기를 훨씬 자주 경험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는 없다. 탁월한 경제 사학자 두명이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세계 금융의 개방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45~1971년 사이에 개발도상국들은 금융 위기는 단 한 번도 겪지 않았고, 통화 위기는 16번, (금융 위기와 통화 위기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 '쌍둥이 위기'는 한 번 겪었다. 그러나 1973~1997년 사이에 개발도상권 국가들에서는 17번의 금융 위기와 57번의 통화 위기, 그리고 21번의 쌍둥이 위기가 발생했는데, 이는 1998년 이후 (브라질, 러시아, 아르헨티나 등에서) 발생한 대규모 금융 위기는 포함되지도 않은 숫자이다. -139쪽

미국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외국인 투자를 가장 많이 받았던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외국인 투자에 대해 다방면으로 엄격한 통제를 실시했는데, 이는 최근 중국의 경우와 비슷하다. 중국 역시 최근 몇 십 년 동안 초국적기업을 엄격하게 규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외국인 직접투자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면 투자의 흐름이 줄어들고, 외국인 투자 규제를 완화하면 외국인 투자의 흐름이 증대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관세율의 유지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엄격한 규제에도 불구하고-부분적으로는 바로 그런 규제 덕에-19세기부터 192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던 경제였다. 이는 외국인 투자 규제가 경제의 성공 전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일반적인 견해의 토대를 허무는 것이다. -148쪽

외국인 투자는 경제 성장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성장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다. 명백한 진실은 규제 체계가 아무리 개방적이라 해도 해당 국가의 경제가 매력적인 시장과 높은 품질의 (노동, 사회간접자본 등의) 생산 자원을 제공하지 않으면 외국 기업들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외국 기업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외국인 직접투자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개발도상국들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나라만이 초국적기업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156쪽

공산주의가 경제 시스템으로서 실패했다는 데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서 국영 기업이나 공기업이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을 이끌어 낸다면 이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이런 견해는 1990년대 초반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주도했던 선도적인 민영화 프로그램 이후 널리 퍼져 나갔고, 과거 공산주의권 경제들의 '체제 전환'이 이루어지던 1990년대에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신조의 지위를 얻었다. 과거에 공산주의에 속했던 세계는 한동안 전부 '민영은 좋고, 국영은 나쁘다.'는 주문에 홀린 것 같았다. 이런 국영 기업의 민영화 역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했던 신자유주의 방침의 주요 항목이었다.-164쪽

자유 시장을 공언하는 정뷰가 대규모 민간 기업에 대해 국가적인 금융 지원을 시행한 사례는 실제로도 많다. 스웨덴의 조선 산업은 1970년대 말 파산에 이르렀는데, 당시 44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장악한 우파 정부의 국유화 조치에 의해 구제되었다. 그런데 이 우파 정부는 국가 규모 축소를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정부였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는 1980년대 초 위기에 직면했지만, 당시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의 선봉에 섰던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정부에 의해 구제되었다. 칠레는 부실하게 계획된 금융 자유화를 때 이르게 실시했다가 1982년에 금융 위기를 맞은 뒤 전체 은행 부문을 구제하기 위해서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했다. 자유시장과 사적 소유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 정부에 의해서 말이다. -169쪽

거의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로 되어 있는 싱가포르에서는 정부 관련 회사들이 전화, 전력, 운송 등의 일반적인 공익 '시설' 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민간 부문이 소유하고 있는 반도체, 조선, 엔지니어링, 해운, 은행 등의 분야까지 운영한다. -170쪽

한국에도 (과거 포항제철이라 불렸으며 지금은 민영화된) 제철회사 포스코라는 공기업의 성공 사례가 존재한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말에 현대적인 제철 회사를 세우기 위해 세계은행에 융자를 신청했는데, 세계 은행은 이 사업 계획이 실행 불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융자를 거절했다. 당시 한국의 최대 수출품은 어류와 값싼 의류, 가발, 그리고 합판이었다. 한국에는 또한 제철에 필수적인 주요 원료 철광석과 점결탄 광산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가까운 중국에서 원료를 수입할 수도 없었는데, 이는 동서 냉전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은 제철에 필수적인 원료를 멀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실어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다 한국 정부는 이 모험적인 사업을 국영 기업으로 운영하겠다고 주장했다. 실패를 위한 처방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본의 은행에서 조달한 자금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1973년에 조업을 시작한 지 10년도 채 안 되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효율적인 제철회사가 되었고, 지금은 규모 면에서 세계 3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71쪽

이렇게 성공적인 공기업들이 많은데 우리는 왜 이런 기업들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한 걸까? 이는 언론계 혹은 학계에서 행하는 보고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언론은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기근, 범죄, 파산 따위의 나쁜 사건들만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 언론계와 학계가 국영 기업에 대해 조사를 하는 경우는 대개 (비효율성이나 부정부패, 또는 태만 같은) 좋지 못한 일과 관련되었을 때뿐이다.

그러나 국영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가 적은 데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지난 20~3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인해 국가 소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퍼져 나간 상황 탓에 성공한 국영 기업들 스스로가 국가와 연관되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싱가포르항공은 자사가 국가 소유라는 사실을 광고하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 민영화되었지만) 르노, 포스코, 엠브라에르 역시 자사가 국가 소유 시절에 세계 일류 기업이 되었다는 사실을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소유권의 일부가 국유인 경우에는 대개 그 사실이 은폐된다. 예컨대 독일의 니더작센 주 정부가 폭스바겐의 최대 주주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74쪽

국영 기업은 '자연 독점'이 있는 분야에도 설립될 수 있다. 자연 독점은 기술적인 조건 때문에 공급자를 하나만 두어야 시장의 요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을 이르는데, 전기, 수도, 가스, 철도, 그리고 전화 같은 것이 자연 독점의 사례라 할 수 있다. -176쪽

정부가 국영 기업을 설립하는 세 번째 이유는 국민들 사이에서 형평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에게 맡겨 둘 경우 외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우편, 수도, 교통 등의 중요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진다. 예컨대 스위스에서는 외딴 산간 지역의 주소지로 편지를 보내는 비용은 제네바의 주소지로 보내는 비용보다 훨씬 높다. 이윤에만 관심이 있는 기업이 우편 업무를 맡을 경우 이렇듯 산간 지역으로 보내는 우편 요금이 올라가게 되고, 그러면 그곳 주민들은 우편 서비스 이용 횟수를 줄이거나 아예 이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는 모든 국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핵심적인 서비스에 대해서는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공기업을 세워 그 사업을 운영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177쪽

정부는 대개 부실한 기업, 정확히 말하면 잠재적인 구매자들로부터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기업을 팔려고 한다. 이 경우 정부는 민간 부문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해 해당 부실 기업에 대해 막대한 투자 및 구조 개편을 선택적으로 혹은 병행해서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 소유 하에서 성과를 향상시킬 수 있다면 어째서 민영화를 하려 한단 말인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부의 강력한 민영화 의지 없이는 어떤 공기업의 재건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민영화를 하지 않도고 공기업이 가진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민영화 대상 기업은 '적절한 가격'으로 매각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재산을 위탁 받은 정부의 의무이다. 국영 기업을 지나치게 싼 값에 매각하는 것은 공공의 부를 구매자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바로 여기서 분배라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더구나 이전된 부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갈 경우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부의 손실이 일어난다. 구매자가 해외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경우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보다 높아진다. -181쪽

국영기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정부패 문제를 자주 들먹이곤 하는데, 얄궂게도 민영화 과정에도 역시 부정부패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것은, 정부가 국영 기업 내의 부정부패를 통제하거나 일소할 능력이 없다면 민영화를 한다 해서 갑자기 부정부패를 막을 능력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183쪽

정부의 세금 징수 능력 혹은 규제 능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경우에는 자연 독점 산업에 속하는 기업들이나 대규모 투자와 높은 이험도를 수반하는 산업에 속하는 기업들, 그리고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은 국영 기업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다른 조건들이 동일하다면, 국영 기업은 선진국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 시장이 발전되어 있지 않고 규제와 징세 능력이 취약한 개발도상국에서 더 필요하다. -185쪽

특허 제도를 비롯한 다른 유사한 지적소유권 보호 제도의 독점으로 인한 비효율성과 '승자 독식' 구조에서 빚어지는 경쟁으로 인한 낭비는 그 제도가 가진 유일한 문제점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문제점도 아니다. 지적소유권 보호 제도의 가장 치명적인 영향은 경제 발전을 위해 선진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술 후진국으로 지식이 흘러들어 가는 것을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 발전의 핵심은 선진적인 외국 기술의 흡수이다. -197쪽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다. 짝퉁 제조나 복제품 제조는 현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명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선진국들은 지식의 관점에서 볼 때 후진적이었던 시절에 하나같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특허권과 상표권, 저작권을 닥치는 대로 침해했다. -206쪽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지적인 노력들이 혼합된 발효조에서 튀어나오는 것인데, 어떤 발명품에 '마지막 손질'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영예-그리고 이익-를 독차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냐는 의문에서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바로 이런 근거에서 특허에 반대했다. 그는 아이디어는 '공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소유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았고, 실제 수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212쪽

솔직히 말해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지적소유권 제도가 경제 발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부자 나라들이 전체 특허의 97%를, 그리고 저작권 및 상표권의 대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적소유권 보유자들의 권리가 강화되면, 개발도상국들의 지식 획득 비용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216쪽

지식을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물에 비유한다면, 오늘날의 지적소유권 제도는 비옥한 경지가 될 가능성이 있는 땅으로 흘러드는 물을 막아 기술의 황무지로 바꾸어 놓는 댐과 같다. 이런 상황은 뜯어고쳐야 마땅하다.-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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