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과 시클로 - 이지상 베트남 여행기
이지상 지음 / 북하우스 / 2007년 1월
품절


전쟁 기념관 안에는 밀라이 학살 사건에 대한 사진과 기록도 있다. 1968년 3월 어느 날, 미군 몇 명이 부락에서 베트콩 소탕작전을 하다 사살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은 주민 504명을 모두 모아놓고 학살하고 방화했다. 그 중에서 여자는 182명(임신한 여자 17명), 어린이는 173명(56명은 5살 이하)이었다. 그 사진과 기록 밑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미군을 욕되게 하기 위해 이 사진을 전시한 것이 아니다.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타락시키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끔찍한 학살은 장교들의 지령으로 벌어졌다. 나중에는 장군 이하 모든 장교가 그 사건을 은폐했으나 1년 후 미국에서 마침내 그 사건이 폭로되었는데 오직 켈리 중위 한 사람만 혐의가 인정돼 기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켈리 중위는 넉 달 보름 동안 복역하다가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그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정신과 치료를 받는 참전 군인들은 1백 50만 명 정도이고, 2만 명은 자살을 했다.
-21쪽

용서하지 못할 자들. 전쟁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군수품 업자와 그들과 결탁한 정치꾼들. 그들은 피 묻히지 않은 하얀 손으로 전쟁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계산’하고 ‘결정’했다. 그리고 ‘......을 위해’라는 온갖 수사를 동원했다. 그들에게 하늘의 벌이 있기를. 베트남전은 끝났지만 그들의 용서 못할 행위는 전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다.

-22쪽

시클로는 자전거를 개량한 것으로 앞바퀴 두 개, 뒷바퀴가 하나인 삼륜차인데, 시클로 운전수에 대한 평판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좋지 않다. 전후에 시클로 운전수들 중에는 비밀 경찰이 많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베트남 인구 6천 6백만 명 중에 비밀 경찰이 1백 20만 명이니 50명당 하나는 비밀경찰인 셈이다-라는 글을 어느 책에선가 보기도 했으며, 또 외국 관광객들 상대로 바가지를 많이 씌운다는 평판이 있어서 늘 조심해야 했다.

-23쪽

대개 남베트남 정부군 출신들은 직업을 갖기가 힘들어서 시클로를 몰거나 이발사를 많이 한다.

-25쪽

내가 그동안 책을 통해 접한 호찌민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겸손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구한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수레바퀴 속에 끼여 자신의 삶이 다 뒤틀려버린 남베트남 정부군 출신의 운전사로는 호찌민이 좋을 리 없을 것이다.

-26쪽

결국 미국은 철수작전을 편다. 미국인, 한국인,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은 미리 집결지를 통보받아 그곳에 집합한다. 대기한 헬리콥터를 타고 바다에 정박중인 배로 가기 위해서였다. 모든 외국인과 남부 베트남 고위 장성과 관료들은 시시각각 들려오는 포성 속에서 허겁지겁 도주했다. 그래도 이들은 미군의 도움으로 철수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미국인 혹은 한국인과 결혼한 베트남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공무원, 경찰, 미군 편에 붙어서 일하던 사람 등등 처형이 예상되던 중하위직의 베트남인들이었다. 수백 명이 미국 대사관과 그 외의 외국인 집결지로 몰려들었고, 철조망을 뛰어넘으려 했으며,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무장한 미 해병대에 저지당하면서 절규했으나 그들은 들어올 수가 없어서 생지옥과도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40쪽

포성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남베트남 정부군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맞서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군복을 벗고 도주했다. 드디어 4월 30일 새벽, 미국인과 한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인이 헬리콥터를 타고 사이공을 마지막으로 떠났고, 새벽 3시 30분, 주베트남 미국 대사인 그레이엄 마틴이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면서 미국은 군사 사절단이 최초로 사이공에 왔던 1950년 6월로부터 25년 만에 베트남에서 물러간 것이다. 기나긴 베트남전은 이렇게 끝났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전쟁 패배였던 것이다.

-41쪽

그러나 어느 치하에서 사나 마찬가지인 일반인들은 구경꾼처럼 태평했으며 밤거리의 여인들은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도망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고도 한다. 사이공을 점령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도 예상과 달리 남베트남군이나 관료들을 학살하지 않았고 민심을 무마하여 다음날인 5월 1일 메이데이는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들이 탄압을 받은 것은 그후부터였다.

-42쪽

"하노이와 사이공 중 어디가 더 살기 좋아요?"
"사이공이요. 사이공에는 물건이 더 많고 잘 살거든요."
이 공산주의를 믿는 아가씨도 혁명의 산실인 하노이보다는 자본주의 물결이 흐르는 사이공이 더 좋다고 말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43쪽

사이공 북서쪽 75km 지점에 있는 꾸찌 마을. 베트콩들의 근거지로 정글 밑에 총 길이 약 250km의 기가 막힌 땅굴이 있다.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 때 (1948-1954) 48km가 파였는데 프랑스와 싸우던 해방 전사들이 서로 연락하기 위해 만든 땅굴이다. 그런데 프랑스 대신 미군이 들어오고 반정부 투쟁이 격화되면서 땅굴은 더 길게 확장된 것이다. 1966년 미군 제25보병사단은 베트콩들을 제압하기 위해 꾸찌 마을에 기지를 세웠다. 몇 개월 후, 땅굴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미군은 그 좁은 땅굴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46쪽

총 길이 200km의 땅굴은 사이공 강변까지 나 있는데, 이곳에서 싸우다 후퇴할 경우 사이공 강변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이 땅굴을 어떻게 팠는지 아세요?"
안내원은 호미와 작은 망태기를 들었다. "이곳의 토질은 아주 연합니다. 그래서 팔 때는 살살 긁어도 쉽게 파지는데, 일단 파이고 나서 공기와 접촉하면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시끄럽게 삽으로 팠다가는 금방 들켜서 폭격을 맞을 텐데, 아낙네들이 호미를 들고 매일 몰래 쥐처럼 조금씩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47쪽

대나무 숲 땅속의 작은 구멍.
이 구멍은 바로 공기 구멍입니다. 미군들이 땅굴을 찾으려고 군견을 사용했을 때 우리들은 냄새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여우 살점을 그곳에 갖다 놓았지요. 그러면 군견은 우리 냄새를 못 맡았어요. 또 나중에는 우리도 미군이 사용하는 비누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군견들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해 매우 혼란에 빠졌지요. 또 정글 곳곳에 부비트랩을 설치해놓고, 땅굴 안에도 각종 함정과 폭탄을 설치해놓아서 미군이나 군견이 들어올 경우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나중에는 군견도 무서워서 땅굴에 접근을 못 했어요.
-48쪽

꾸찌 땅굴 안에는 굴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용도의 사무실, 방, 취사장 등이 있었다.
다시 좁은 굴속으로 기어들어가자 5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약 15평 정도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작전 회의실이라 했다. 책상이 있었고 뒤에는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뜻의 구호가 걸려 있었다. 이 말은 호찌민이 늘 주장하던 것으로 그 당시 민족해방전선 투사들의 신조였다고 한다. 이 작전 회의실 구석에 함정이 하나 있었다. 가로 세로 약 1m 정도의 구멍 속에는 날카롭고 길쭉한 죽창이 꽂혀 있어서 바로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오는 침입자들은 모조리 그 함정으로 떨어져 죽게 되어 있다. 죽창이나 쇠꼬챙이에는 파상풍을 일으키도록 동물의 소변 등을 묻혀났다고 한다.
또 구석에는 매우 작은 땅굴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 땅굴로 도망가면 베트콩들은 지하 2층, 3층의 통로로 내려가 꾸찌 땅굴의 끝인 사이공 강변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땅굴은 하나고 사방에 있는 다른 땅굴들은 가짜로 그곳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함정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미군들은 땅굴 입구를 발견하기 힘들었고, 발견해도 들어가기 힘들었고, 들어가도 함정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뿐인가. 정글에는 각종 함정, 부비트랩 등을 설치해놓았으니 미군들로서는 미칠 일이었다.
-50쪽

결국 미군은 고엽제를 살포했다. 이걸 맞은 나무들은 금방 시들어서 잎이 다 떨어졌다. 그러면 정글은 잎이라고는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들만 가득한 음산한 곳이 된다. 이렇게 되면 베트콩들이 숨을 곳이 없어지므로 소탕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후일 이 고엽제 때문에 수많은 베트콩, 미군, 한국군이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온몸이 부르트고 신경쇠약에 걸리며 또 유전이 되어 뇌가 없는 신생아를 출산하는 등 그 후유증이 심각하다. 지금도 한국의 베트남 참전 용사 가운데는 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에 대한 정부의 보상은 미흡하기 그지없다.
고엽제를 뿌렸지만 미군은 베트콩을 근절하지는 못했다. 결국 미군은 꾸찌 마을을 ‘자유 공격 지대’로 선포하고 무차별적으로 포격했다. 또 B52 조종사들은 다른 지역을 공습한 후, 돌아오다 남은 폭탄을 이곳에 투하했고 나중에는 융단폭격을 해서 땅굴 자체를 붕괴시키려고 했으며, 움직이는 것들은 무조건 사살했다.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많은 땅굴이 함몰되기도 했고 베트콩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됐다. 그러나 미군은 이 무렵부터 서서히 발을 빼고 있어서 이곳에 있는 베트콩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다.
-53쪽

구석에 함정이 있었고 천장에는 지금도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이 박쥐는 모기를 먹고 살기 때문에 땅굴 속에 숨어서도 모기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54쪽

얼핏 생각하면 베트콩들은 의연하게 미군을 조롱하고 괴롭히면서 싸웠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사실 미군보다 더 많이 죽고 당한 것은 베트콩이다. 1만 6천 명의 꾸찌 게릴라 중 생존자는 6천 명이다. 꾸찌 땅굴은 아니지만 꾸찌에서 멀지 않은 캄보디아의 정글에서 투쟁했던 베트콩의 고위인사인 쯔엉뉴땅이란 사람의 증언을 보면 B52에 대한 공포감이 잘 나타나 있다.
-B52의 폭격에 의한 공포는 대단했다. 폭격 중심지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있어도 B52가 투하하는 폭탄의 작렬음으로 고막이 찢어질 정도였다. 중심지에서 0.5km 이내에 있는 보강공사가 되어 있지 않은 엄폐호의 벽은 모두 무너져서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은 생매장이 됐다. 폭격이 끝난 후 폭탄 떨어진 곳에 가보면 직경 약 10m 정도 되는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 B52가 포격할 때는 마치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인류의 종말이 온 것처럼 느꼈고 신체의 모든 기능이 지리멸렬되어 수습할 수가 없었다.
-55쪽

이렇게 어렵게 투쟁하던 베트콩들은 1968년 1월 말 구정 대공세 때 미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지만, 사실 이때 가장 많이 죽은 사람들은 미군도 아니고, 북베트남의 정규군도 아닌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사인 베트콩들이었다.

-56쪽

여성 게릴라들은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생리할 때는 옷 냄새 때문에 부끄러웠고 밤이면 몰래 빠져나와 위험을 무릅쓰고 빨래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휴머니즘은 있었다. ‘보티모’라는 베트콩 소대의 여자 지휘관이 땅굴 입구에서 보초를 서다 미군 병사 세 명이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총을 겨누고 긴장 속에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미군들은 과자와 사탕을 나눠 먹더니 편지를 읽다가 울기 시작했다. 그때 베트콩 전령이 다가와 미군들을 사살하려 했으나 보티모는 조용히 제지했다. 결국 미군 병사를 공격하지 않은 보티모는 이 행위로 인해 비난을 받고 약식 군사 재판을 받았는데, 전령의 열띤 변호로 해임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녀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었고 4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열일곱 살의 전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령은 열 살짜리 소년이었다.
열일곱 살, 열 살...... 그리고 고향에서 온 편지를 보며 울던 20대 초반의 미군 병사들.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면 서로 미소 지을 소중하고 파릇파릇한 청춘남녀들이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면 이제 마흔이 넘고, 쉰이 넘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보티모라는 여인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을까? 열 살짜리 전령은?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살아난 그 울던 미군병사들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까?
-57쪽

여행 중 만났던 남부 베트남 사람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북베트남에서 내려온 거만한 공산주의 관료들이 돈맛을 알고 나자 옛날 관리들보다 더 부패했다고 말했다. 반면 북베트남의 하노이에 가보니 사람들은 남베트남 사람들을 이렇게 깔보았다.
"남쪽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퇴폐적이지요."
"남부 베트남 사람들은 게을러요. 낮잠이나 자고. 그리고 예전부터 외국 세력에 빌붙어서 사는 근성을 버리지 못했지요."
낮잠, 즉 시에스타는 기후가 더운 남부 베트남에서는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현명한 방법이지만, 북베트남 사람들은 게으르게 보는 것이다. 여행자인 내가 보아도 남쪽과 북쪽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기질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59쪽

2001년 2월, 8년 만에 다시 사이공에 와보니 많이 변해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나를 남주띤(남조선)이 아닌 한꾸옥이라 불렀고 한국 탤런트들과 드라마가 매우 인기를 끌었다.(특히 장동건) 차량과 오토바이는 더욱 많아졌고, 거리의 차량 행렬은 급속하게 빨라져 있었으며, 도시 전체의 건물도 높아졌다. 시클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2005년 4월, 친구들과 사이공에 갔다. 이제 2주일 미만의 베트남 여행은 비자가 필요없다.
-67쪽

향락산업은 더욱 번창. 어느 나이트클럽의 풍경. 무대 위쪽에 제복을 입은 경비원 둘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위에는 사회주의의 계몽, 관리, 통제가 상징적으로 있고 밑에서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춤추는 모순적인 풍경.
한국에서도 베트남의 이미지는 전쟁을 탈피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이제 연 8%의 경제 성장을 하며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모든 게 밝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물론 베트남 노동자와 한국 고용주 사이에서 불협화음도 간간이 보이고,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온 베트남 처녀들의 불우한 결혼 생활도 종종 보도되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대세는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수많은 한국 기업과 단체 관광객, 배낭여행자가 베트남을 방문하며 서로 벽을 허물고 있다.
-71쪽

8천4백만 베트남 국민의 68%가 25세 미만이라고 하는데 공장의 근로자, 음식점 종업원, 상점, 거리에서 코코넛이나 셔츠를 파는 상인, 거리에서 남자를 유혹하는 매춘부...... 모두 젊은 여인들이다.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틀림없이 뒤에는 가난한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잘 웃는다. 그래서 슬프고, 이들이 존경스럽다. 그렇게 모은 돈을 부모에게 보내고, 남동생에게 교육비로 보내면서 자기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건 바로 우리의 과거 모습이 아닌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근대화, 자유, 민주, 물질적 풍요의 토대는 구호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처절한 희생으로 다져졌다. 서양에서 수백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산업화와 그것과 상응해서 발전한 정치제도를 수십 년 안에 이루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빠른 시일 내에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앞장서서 뛰었던 사람들과 바닥에서 일하며 처절하게 희생했던 사람들. 그리고 인갑답게 살아보자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앞장서다 탄압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 사회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제 베트남이 그 길을 가고 있다. 틀림없이 우리 못지않게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은 그후의 일이다. 과연 베트남이 한국처럼 되면 행복할까? 요즘의 한국은 과연 행복한가? 그리고 우리가 뒤좇았던 미국, 일본은 바람직한 나라인가? 그렇다고 독재와 비효율성 속에 망해버린 공산주의가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는 없고. 과연 행복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베트남의 눈부신 성장과 열의를 보면 희망에 차다가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며 우울해지기도 한다.
-87쪽

베트남은 어느 도시든 아침 6시면 이미 활기차다. 식당은 문을 열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거리를 서서히 메우고, 어떤 이들은 운동을 한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더운 나라의 특성이지만, 특히 베트남은 더욱 그렇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부지런하다는 얘기다. 참전 용사든, 기업가든, 여행자든, 한결같이 베트남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영리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정 많고, 체면을 중시하며, 개방적이고, 교육열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한국과 비슷한 모습은 그 외에도 많다. 아마도 역사적 상황이 우리와 비슷하고 같은 문화권이기에 그런 것 같다.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고 불교도 다른 동남아 사람들이 믿는 상좌부 불교(소승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다. 그리고 수많은 외침을 받으며 생존했다. 중국의 영향권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프랑스를 물리쳤으며, 세계 최강의 미국에게 패배를 안겨준 나라다.
-88쪽

미국과 수교 협상을 하는데 미국이 베트남전에 대해서 ‘보상’해주겠다는 말을 꺼내자, 베트남 측에서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보상이라니! 베트남전은 우리가 승리한 전쟁이오. 패자가 승자에게 무슨 보상을!"
미국에 대항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북한도 그렇지만, 미국 앞에서 굽신거리며 도움을 받았으되 이제 크고 나니 미국을 아니꼬워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베트남의 자존심이 쉽게 이해가 간다.
-89쪽

베트남에는 까오다이교라는 특이한 민족 종교가 있다. 까오다이교를 한자로 표시하면 고대교(高臺敎)다. 고대는 ‘높이 쌓은 대’를 말하고, 이는 ‘지극히 높은 곳에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하느님, 혹은 상제를 믿는 종교라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까오다이교의 목표는 이 번뇌가 가득한 세상에서 해탈하는 것인데, 유일신 사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까오다이교의 교리적 바탕은 불교, 유교, 도교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절대자 까오다이는 인류사에 걸출한 위인들을 통해 인류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노자, 석가모니, 모세, 공자, 예수, 모하메드 등이라고 한다. 그뿐이 아니라 잔다르크, 데카르트, 셰익스피어, 빅트로 위고, 파스퇴르 등의 서양 인물들, 그리고 중국의 혁명가 쑨원과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 등이 절대자와 영혼의 교류를 했다고 주장한다.
까오다이에 포함된 종교와 인물은 이렇게 너무나 광범위해서 어리둥절할 정도인데 샤머니즘적인 요소도 있다.
-93쪽

까오다이교는 레반찌에우(응오민찌에우)가 창시했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와 철학을 공부한 그는 서른두살인 1919년부터 신의 계시를 받은 후, 그를 포함한 12명의 주도로 1925년에 까오다이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6년 10월 24일 떠이닌 시에서 개도식을 가졌다. 그는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의 교리에 자신들의 조상숭배사상, 그리고 유럽의 과학적 심령주의를 혼합해 독특한 교리를 만들었는데, 수많은 인류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통합한 것이 바로 자신의 까오다이교라고 선포했다.

-94쪽

까오다이교는 처음 1년 만에 신도가 6만에 이를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했고 1935년에는 1백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까오다이 교도는 약 2,3백만 명으로 남부 베트남에 많이 살고 있으며 특히 떠이닌 시가 그들의 성스러운 도시다. 까오다이교는 신자들이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기본 계율을 외교, 내적인 명상수련을 내교라 한다. 외교에는 자신, 가족, 사회, 국가, 우주 만물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며, 자연, 동식물, 인간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살생, 도둑질, 간음, 음주,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한 달에 최소한 10일간 채식을 해야 한다. 또한 매일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 자정에 예배를 보며, 집에서 매일 최소한 한 번의 예배를 하도록 가르친다.
까오다이교는 정치에도 휘말렸었다. 일본군이 진주했을 때 플아스를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에 협력하기도 하고, 프랑스군이 다시 진주했을 때 타협하여 핵심 인물이 식민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맡기도 했다. 그후 프랑스와 다시 싸우고, 응오딘지엠 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까오다이교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응오딘지엠 정권 쪽으로 붙고 나머지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95쪽

결국 그 당시 까오다이교의 지도자였던 팜꽁딱은 캄보디아의 프놈펜으로 피신했고 거기서 1959년에 죽었다. 그 후부터 까오다이교에는 대주교가 없고 지도자들도 공석 상태이다. 그러면서 교세가 위축된 까오다이교는 미국, 플아스, 캄보디아 등과 연관된 3개의 세력으로 분화되고, 베트남전에서는 베트콩을 지원하지 않다가 적화통일이 되자 탄압을 받았다. 사원이 가진 모든 토지를 공산정권이 몰수했으나 1985년 베트남 정부가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펴면서 총본산과 400여개의 사원이 교단에 반환되었다고 한다.
석가모니와 노자, 그리고 관세음보살은 그렇다치더라도, 이태백, 강태공, 관운장은 왜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을 다 통합하려는 시도 같다. 이런 시도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익숙한 전통, 종교, 철학, 문학적 기반 위에 프랑스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친숙해진 잔다르크, 빅토르 위고 등이 등장하면서 종교, 철학 등의 통합 못지않게 동서양의 정서적 교류와 만남도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인들은 참 똑똑하다. 외부의 것을 배척하지도 않고 무조건 맹종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 것을 만든 후, 현재까지 약 2,3백만 명의 신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99쪽

저 멀리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장장 4,500km를 흘러가는 메콩 강은 중국, 미얀마는 물론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등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기름지게 하는, 어머니의 젖줄 같은 강이다. 베트남은 그중에서도 이 강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다. 거대한 메콩 강 연안에 있는 메콩 삼각주는 전체 국토의 12% 정도를 차지하지만 베트남 쌀 수출량의 80%를 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은 비록 가난하지만 어딜 가나 쌀과 과일 등이 풍부하다. 모두 메콩 강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다.

-102쪽

베트남 인구는 2006년 기준 8400만 명.
베트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자기 논에 묘를 만드는 것이 전통.
베트남에서는 불어나 영어를 잘하면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지요. 그리고 우리 베트남어로 비엣(Viet)은 ‘다시 합친다’는 뜻이고, 남(Nam)은 ‘물’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물이 다시 합치는 나라지요. 즉 베트남은 ‘물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쓰는 원뿔형 모자 논라. ‘논’은 모자, ‘라’는 잎이라는 뜻. 얼굴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쓰지요.
-103쪽

쩌우독을 비롯한 메콩 델타 지역은 한때 크메르인의 땅이었고 지금도 크메르족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캄보디아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111쪽

베트남 사람들은 주로 중앙의 안방에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반터(제단)라는 것을 설치한다.

-114쪽

달리다 보니 창밖으로 ‘한진 스포츠 센터’ ‘뉴코아 백화점’ 등의 한글이 적힌 대형버스들이 달리고 있었다. 한때 저런 버스들은 백화점에서 많이 운영했는데 금지를 시키자, 이렇게 동남아 등지에 헐값에 팔았다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한글을 지우면 오히려 값이 안 나가서 일부러 안 지우고 다니는데, 다른 도시에서도 이런 버스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17쪽

속짱 역시 번잡한 도시였다. 이곳은 인구의 28%가 크메르 족이고 그들이 세운 불교 사찰이 있다.

-119쪽

길쭉하게 늘어진 베트남 지도를 보면, 배꼽에서 허벅지 되는 부분에 중부 고원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내려온 길고 긴 쯔엉 산맥의 남쪽 부분에 해당되는데, 쯔엉 산맥은 바로 호찌민 루트가 있는 산맥으로 북베트남의 수많은 게릴라가 이 루트를 통해 내려왔고, 탄약과 물자를 남부 베트남의 베트콩들에게 지원했다. 이 쯔엉 산맥에는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남쪽 끝의 달랏(Da Lat)이라는 곳에는 랏족이 살고 있다. 달랏이란 랏족의 말로 ‘랏족의 강’이라는 뜻이다. 달랏은 해발 1.475m의 고지대여서 기온이 늘 서늘한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12년부터 프랑스인들이 개발하면서 휴양지가 되었고, 베트남전 당시에도 서로 암묵적으로 전투를 피한 남베트남 고위 관료들과 베트콩 간부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 번도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달랏에는 아름다운 호수와 정원, 계곡, 폭포, 마지막 황제의 여름 궁전과 프랑스풍의 예쁜 집들이 있어서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멈추질 않고,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드는 곳이라 했다.

-124쪽

베트남의 절에는 언제나 꽃들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다.

-138쪽

베트남 커피는 로부스타 종이라 매우 쓰다. 커피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우리가 늘 마시는 대부분의 원두커피는 아라비카 종이다. 해발 약 8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생산되는 부드러운 맛의 이 고급 커피는 중남미와 에티오피아, 인도 등지에서 생산되고 있다. 반면 베트남 커피는 로부스타 종으로, 해발 600m 이하에서 재배되고, 카페인이 많고 맛이 쓰다. 아프리카나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인들도 그곳에서 주로 생산되는 로부스타 종을 많이 마시는데, 쓴맛을 없애기 위해 우유를 많이 탄 카페오레 등을 개발했다고 한다.

-141쪽

냐짱은 현재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다. 투명한 바다, 고운 백사장, 그리고 카이트서핑, 보트서핑,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 등의 해양 스포츠, 그리고 온천까지 있어 마음껏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153쪽

쏨봉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산 위에 뽀나가르 참탑이 나왔다. 이곳을 지배하던 참 왕국은 힌두교를 믿었는데 그 유적지인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승불교를 믿고 있지만 이렇게 힌두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있다.
-154쪽

깜언(감사합니다.)

-161쪽

3월 말인데 벼 추수를 하고 있었다. 아낙네들이 탈곡기로 벼를 추스른 후, 바닥에 볏짚을 깔아놓았다. 어떤 곳은 낫으로 벼를 베고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보통 2모작, 3모작을 한다니 먹을 걱정은 없어 보였다.

-165쪽

한국군은 주로 중부 지방에 주둔했다. 야전군 사령부가 냐짱에 있었고 병참부대인 십자성 부대가 냐짱의 북쪽 근교에 주둔했다. 그리고 뜨이호아 지역에는 전투부대인 백마부대가 주둔했고, 조금 더 올라간 뀌년에는 수도기계화사단인 맹호부대가 주둔했었다. 그리고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간 다냥 근처의 호이안과 쭐라이에는 해병대인 청룡부대가 주둔했었다. 이 중부지역은 서쪽으로 쯔엉 산맥이 있고 그 산맥 속에 호찌민 루트가 있어서 이 지역의 베트콩들은 북부로부터 병력을 비교적 풍부하게 공급받고 있었다 한다. 사이공 시내에서 폭탄 투척이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식으로 북에서 교육받고 온 정규군 같은 베트콩이어서 처음에 전투 경험이 없던 한국군은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한다.

-166쪽

어쨌든 이럭저럭해서 알아낸 바로는 풀람은 넓은 지역 이름이고, 구체적으로 사건이 일어난 곳은 푸니에우란 곳인데 약 50km 정도 떨어진 산골 부락이란 얘기였다.

-169쪽

눈치로 보니 엉뚱하게 통역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 사람이, 한국군 아버지가 여기 와서 싸우다 죽어서, 그 현장을 찾아왔나봐요!"
분명히 그런 식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당하면서 가슴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아버지가 여기 와서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게 되는 건데...... 짧은 순간이나마 입술이 바짝 탔는데 사태는 계속 예상치 않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모여든 사람들이 "아하"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참 안됐다’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173쪽

고마웠다. 나의 아버지가 이곳에서 전사한 줄 알고 나서 더 친절하게 해주었던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한국군의 아들이라고 해코지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들었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174쪽

호이안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제3의 도시 다낭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도시인데, 구시가지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양복점, 혹은 양장점이 많으며 어떤 디자인이든 주문하면 하루 만에 만들어주어서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라 했다.

-197쪽

호이안 역사박물관은 과거 찬란했던 호이안 역사를 느끼기에는 부족했는데 그 옆에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1653년에 만들어진 조그만 사당이었는데 관운장이란 인물은 중국 문화권에서는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든, 화교들이 사는 곳에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종종 보인다. 1539년에 만들어진 ‘일본 다리’는 중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 사이에 만들어졌다. 16세기에 많이 활약한 일본 상인들은 이 다리를 만들었지만 1637년 도쿠가와 막부가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면서 일본인들은 다시 나타날 수 없었다. 그후 일본인들이 이곳에 진출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로 상인들이 아닌 군인이었다.

-201쪽

호이안이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한 이유는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28년 북쪽의 하노이에서 일어난 레러이는 명나라의 지배를 물리친 후,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레 왕조(1428-1788), 즉 다이비엣이란 나라를 세웠다. 이 왕국은 16세기 중반 실질적으로 북쪽은 찐씨가 중부는 응우옌 씨가 지배하게 되면서 남북이 분단됐다.
유럽인들이 베트남을 방문하기 시작한 때는 바로 이 무렵이었다. 1511년 포르투갈 사람들은 말레이시아의 서부 해안 도시 멜라카를 점령했고, 1540년에는 베트남 중부 해안의 호이안으로 와 교역했는데 이곳을 파이푸라 불렀다. 당시 호이안은 응우옌 조의 대외 무역항으로 포르투갈 사람들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사람, 프랑스 사람, 영국 사람들이 들어왔으며,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지에서도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호이안의 전성기는 16세기에서 17세기였다. 이 시기에는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주민들의 상호 왕래가 금지되었는데 외국에서 온 상인들은 남북 간의 교역을 통해 이득을 취할 수 있었고, 또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직접적인 무역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호이안을 통한 중계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16세기 중엽부터 명나라의 무역 금지 정책이 해제되어 중국인의 남해 무역이 자유로워졌고, 일본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외무역을 크게 장려하여 호이안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거주지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투본 강에 실려온 침적토가 해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바다가 너무 얕아져 큰 선박이 들어올 수 없게 되면서 호이안의 명맥은 끊기고, 대신 부근의 다난ㅇ이 국제무역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2쪽

호이안은 등불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고가들이 많다 보니 전기가 없던 옛날, 넓은 집을 밝히기 위해 등이 발달했고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구시가지 곳곳에는 등불이 휘황찬란했다.

-208쪽

베트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무역항이 호이안인데 그곳이 쇠락하면서 19세기말부터 다낭이 그 명성을 이어받았다. 항구도시로 발전한 다낭에 미군이 최초로 상륙하고 주둔하면서 남부 베트남에서 제2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 도시가 북베트남의 대공세인 1975년 3월 말 지옥으로 변했다. 다낭 북쪽에 있던 후에가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되고, 뒤이어 바로 남쪽의 호이안이 3월 27일 함락되자 다낭은 고립되면서 극심한 공포 속에 빠졌다. 3월 28일 아침부터 모든 남베트남 정부의 공공기관은 기능을 상실했고, 남베트남 정부군은 폭도가 되어 민간인들의 돈과 시계, 카메라를 강탈하기 시작했으며 시민들은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거대한 심리적 공황 상태가 온 것이다.
-213쪽

베트남 사람들은 사진을 찍자고 하면 늘 기뻐했다. 그들은 나에게 주소를 적어주며 사진을 보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217쪽

우메노와 함께 다낭 시내에 있는 참파 왕국의 유적지 조각을 모아 놓은 박물관에 가보았다. 그곳에는 참파 왕국이 믿었던 힌두교의 유물들이 있었는데, 창조의 신 바르흐마, 보호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와 죽음의 신인 시바 들의 신상이 있었고, 남근을 형상화한 링가, 비슈누 신이 타고 다녔다는 전설상의 새 가루다, 시바 신의 아들로 코끼리 머리를 한 재물신 가네샤 신상, 인도의 신화 라마야나와 관련된 조각 등 많은 전시물이 있었다.
중부 지방은 원래 참 족의 무대였다. 참파 왕국을 일으킨 참 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계의 사람들로, 2세기 말경 럼업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가 훗날 참파 왕국이 된다. 이들은 인도문화를 수용하며 힌두교를 믿었고, 한때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앙코르 왕국을 공격해서 앙코르 유적지에 있는 바욘 사원의 벽에는 참파 왕국과의 전투가 부조로 새겨져 있을 정도다.
참파 왕국은 중부와 남부 베트남을 지배하며 14세기 중반까지도 북베트남과 치열하게 싸웠고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13세기 후반에는 중국을 통일한 원이 동남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만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 무역을 장악하려고 해상으로 공격해 참파 왕국의 수도 비자야를 점령하였으나 게릴라전 때문에 고전했다.
이에 원나라는 육로를 통해 참파 왕국을 멸하기 위해 당시 북베트남에 있던 쩐 왕조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했다.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2백여 년(1225-1400)동안 존속한 리 왕조의 뒤를 이어 등장한 쩐 왕조(1225-1400)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과 싸웠는데, 여기서 민족의 영웅 ‘쩐훙다오’ 장군이 원군을 격파했다.
이렇게 몽골이 공동의 적이었지만 북베트남의 쩐 왕조와 남베트남의 참파 왕국은 서로 적이었다. 14세기 중반 강성해진 참파 왕국은 약 30년 동안 끊임없이 북베트남의 쩐 왕조를 침략했고 또한 남쪽의 메콩 델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223쪽

그런 가운데 북베트남의 쩐 왕조는 내부에서 몰락했고, 새롭게 권좌에 오른 호뀌리는 국호를 다이응우로 바꾼 후, 참파 왕국을 밀어붙이며 공격했다. 그러자 참파 왕국은 새롭게 일어난 중국의 명나라에 원군을 청했고 명나라 군대가 1407년, 다이응우를 멸망시킴으로써 북베트남 지역은 독립한 지 4백여 년 만에 또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그러나 명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다. 21년 후인 1428년 레러이는 명나라를 물리친 후,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레 왕조(1428-1788), 즉 다이비엣이란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1470년에는 참파 왕국을 침입해 수도를 점령하고 왕을 생포했으며 참파군 6만을 살해하고 군민 3만을 포로로 잡았으니, 이제 참파 왕국은 냐짱 부근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가 되었고 다이비엣의 속국이 되었다.
참 족은 그러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이비엣이 남북으로 분단된 후 남베트남을 다스리던 응우옌 씨가 주민들을 이주시키며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해오자 1611년과 1653년에 응우옌 씨 정권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그후부터 참 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만다. 냐쨩의 뽀나가르 탑이나 다낭의 참 족 박물관은 그들의 융성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빈약하기 찍이 없었다. 또한 호이안 부근 미선에 있는 참파 왕국의 유적지도 베트남전 당시에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 패자의 설 자리란 그리 넓지 않았다. 참 족은 계속 남으로 옮겨가는데 응우옌 씨는 점령지에 주민들을 이주시켜 더욱 세력을 다지고 수도를 후에로 옮긴 후, 18세기 중반에는 메콩 델타 지역까지 지배하게 됐다. 그후 응우옌 씨 집안의 응우옌푹아인이 1802년 전 베트남을 통일하면서 최후의 전통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수립했고 참파 왕국은 소멸되었다. 그후 참파 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225쪽

늘 후텁지근하고 건기와 우기로 두 개의 계절밖에 없는 호찌민 시에 비교해 하노이는 4개의 계절이 있다. 겨울에는 높은 산에 눈도 온다는데 4월 초의 바람은 서늘했다.
호찌민 시도 그렇지만 하노이 사람들 역시 아침부터 부지런했다. 아니, 전 베트남에서 아침 6시만 되면 길은 이미 흥청거렸다.
-234쪽

(1993년)도대체 이게 뭐지? 베트남의 수도이며 베트남 공산주의 심장의 현실이 이거였나? 내가 공산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래도 걸출한 지도자 호찌민을 중심으로 세계 최강대국과 싸워 이긴 나라의 심장이, 그들이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업신여기던 사이공에 비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전쟁의 후유증, 소련의 붕괴,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 공산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어떤 비효율성, 관료들의 경직성, 그리고 시민들의 무기력이 하노이 곳곳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244쪽

내 경험에 의하면 유독 공산권이었던 중국, 동유럽, 러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외국인에 대한 바가지가 만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요즘은 그 순박하던 동남아의 라오스, 캄보디아 사람들조차 돈맛을 알아가고 있다.
이런 것은 민족성이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느끼는 자본의 갭에서 오는 문제 아닐까? 공산권 국가들은 그들이 무너진 후 갑작스럽게 그들의 빈곤함을 깨달았다. 인간은 평등하다고 배웠고 그런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무너지고 그들의 빈곤은 처참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외국 관광객들이 갑자기 들어와 돈을 물 쓰듯이 쓰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허탈감 속에서 ‘자본의 갭‘을 충격적으로 느낀 것 같다.

이런 자본의 갭을 메우려는 현상들은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중국은 처음에는 국가에서 이중가격제를 시행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발전하자 그것을 철폐했고 내외국인 차별 없이 정가로 받는 분위기로 변했다. 물론 그만큼 물가는 비싸졌다.
-256-258쪽

(2005년) 여기가 하노이가 맞는가? 역사는 멋지게 바뀌었고 그 앞은 수많은 차량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259쪽

11세기 초, 약 1천 년간 계속된 중국의 지배를 벗어난 리 왕조는 오늘날의 하노이 땅에 도읍을 정하고 ‘탕롱’이라 불렀다. 그 이래 하노이는 약 1천 년간 베트남의 수도였다. 용이 승천했다는 뜻의 ‘탕롱’은 리 왕자가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금색 용이 승천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또한 15세기 초 북부 베트남 지역은 중국 명나라의 침입을 받고 백성들은 신음했다. 이때 비엣 족의 영웅 레러이는 명나라를 물리치고 1428년 다이비엣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그가 명을 물리치기 위한 비검을 받은 곳이 바로 하노이의 호안끼엠 호수였다. 이 호수는 구시가지 부근에 있는데 우리 식대로 읽으면 환검호다. 레러이가 이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거북으로부터 비검을 받아서 명나라를 물리쳤는데 전쟁이 끝난 후 거대한 거북이 다시 그 비검을 돌려받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265쪽

할롱 베이, 즉 할롱 만은 1,500제곱 킬로미터 넓이에 약 3천 개의 암석이 떠 있으며 1994년에는 유네스코가 보존해야 할 인류의 자연 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이어서 유명해졌고, 한국에서도 어느 항공회사 CF의 배경이 되어 익숙한데 중국의 구이린과 비슷한 풍경이다. 할롱은 ‘하룡’의 베트남식 발음으로 용이 내려왔다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용이 바다로 내려와 해안을 달리면서 꼬리를 휘저어 계곡과 협곡이 파이면서 지금과 같은 풍경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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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 유재현의 역사문화기행
유재현 지음 / 창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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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것은 1965년, 철수한 것은 1973년이었다. 8년이나 계속되었고 30만 명이 넘는 한국군이 머나먼 이역만리에 파병된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5쪽

독재정권시대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제는 말할 수 있게’된 지금 우리는 베트남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좀 더 옳게는 인도차이나에게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이 참전했던 전쟁은 베트남전쟁이 아니라 인도차이나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전쟁이 베트남전쟁으로 호도되기를 바라겠지만 비밀폭격과 군사작전으로 덧없이 스러져간 100만이 넘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민중의 희생은 진실을 베일 뒤에 가리기에는 너무도 크고 참혹했다.
전후의 캄보디아는 의심할 바 없이 킬링필드였다. 수십만 명의 아사자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야 했다. 1960년대까지 쌀을 수출하던 캄보디아는 전쟁이 끝나자 식량자급률 20%라는 참담한 현실을 목도해야 했다. 누가 수십만 명의 크메르인들을 아사로 몰아넣었는가? 폴포트인가, 곡창지대를 불모지로 만들었던 미국인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승리의 주역이었던 베트남은 미국이 패퇴한 인도차이나에서 스스로 패권주의자가 되고자 했다.
-7쪽

호찌민에는 한국산 차량들이 많다. 특히 버스와 승합차 그리고 소형트럭은 예외가 거의 없다.

-19쪽

호찌민이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물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이후 통일된 베트남에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오랫동안 사이공이었고 또 그 이전에는 쁘레노꼬라고 불렸다.

베트남을 침략한 것은 중국 독일 포르투갈 프랑스 미국 등이다. 중국을 제외한다면 근대 이후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침입이다. 외침의 역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베트남의 역사는 남진(南進)을 시작했던 15세기 이후 줄곧 침략의 역사이다. 지금의 영토는 그 침략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중부베트남은 원래 짬빠 왕국이 지배하던 영토였지만 베트남은 18세기 초에 이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지금의 남부베트남은 원래는 크메르민족의 땅이었다. 베트남이 이 땅을 침탈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이다. 홍강(홍하) 삼각주 유역에서 시작해 이른바 수백 년의 남진을 통해 얻은 것이 지금의 베트남영토이다.
-20쪽

메콩강 북쪽에 위치한 미토는 원래 타이완에서 박해를 피해온 중국인들이 거주하던 차이나타운이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것은 1680년대이다. 1624년 네덜란드의 침공으로 37년간의 지배 아래 놓였던 타이완은 1661년 대륙의 명나라가 침공하여 다시 한족의 지배를 받았다. 아마도 이후 타이완 원주민들과 대륙에서 건너온 한족 지배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일부 원주민들이 미토까지 와 정착했을 법하다.

-26쪽

전아시아에 걸쳐 화교자본과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차이나타운이 맥을 추지 못하는 나라로는 단연 베트남과 남한이 으뜸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남한이 차이나타운을 어떻게 요절을 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남한보다 더 참혹하게 차이나타운이 멸절한 시기는 1975년 통일 이후이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후 중국은 인민해방군을 앞세워 베트남국경을 넘었다. 명분은 ‘버릇 고치기’였다. 소련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시작부터 전면전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소비에트 진영을 자처했던 베트남이 친 중국의 캄보디아를 침략한 것을 중국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국경 너무 랑선을 점령하고 버릇을 고쳤다고 선언한 뒤 물러섰지만 베트남의 버릇이 고쳐졌는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변변한 실전경험도 없이 뒤쳐진 화력으로 국경을 넘은 인민해방군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렀고 소련제와 미제 첨단무기로 무장한 베트남군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10여일의 전투 끝에 무려 2만여 명의 인민해방군이 전사한 말뿐인 승리였다.
-27쪽

중국이 베트남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벼르게 된 이유는 캄보디아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화교들을 집요하게 탄압한 베트남에 대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베트남은 화교들을 자본주의의 구악(舊惡)으로 몰아 재산을 일방적으로 몰수했고 거주지에서 추방하는 정책을 펼쳤다. 1975년 남북통일 이후에는 베트남 전 지역에서 화교에 대한 탄압이 벌어졌는데 남부에서는 상당수의 화교들이 보트피플 신세가 되었고, 북쪽에서는 국경을 넘어 밀물처럼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990년대 이후 화교들이 다시 베트남으로 하나둘씩 돌아오면서 호찌민에도 차이나타운이 들어섰다.
-28쪽

길가의 포스터가 아니더라도 베트남의 어디에서도 호찌민의 초상 흉상 동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9쪽

1920년대 창시된 기불선 종합의 까오다이는 ‘메이드 인 베트남’ 종교이다.
프랑스 식민지시대에 창시되었으니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중국에서 전래된 베트남의 유교돠 도교를 받들고 메콩 삼각주의 상좌부 불교를 혼합하였으니 다양한 종교적 배경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구원하기에는 일면 적절하였을 것이다. 까오다이는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가톨릭세력과 행보를 같이했던 것은 아니다. 베트남의 가톨릭세력이 프랑스 인도차이나 식민통치의 첨병역할을 하고 1954년 이후에는 남베트남 응오딘디엠 독재정권의 버팀목이 되어줄 동안에 까오다이는 불교와 함께 남베트남에서 반독재투쟁을 벌였던 양대 종교세력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핏줄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30쪽

베트남의 메콩삼각주에서는 대개 석 달에 한 번씩, 삼모작을 한다. 캄보디아는 이모작에 불과하고 그도 못해 일모작에 그치는 논들도 숱하다.
지금 베트남은 태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쌀 수출국이다. 그런 베트남이 1980년대 초반인가 중반인가까지는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는 쌀 수입국이었다. 이제는 메콩삼각주의 소출만 가지고도 베트남인구 전체가 자급할 수 있게 되었다.
-32쪽

짜빈은 메콩삼각주에서 크메르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이다. 한때는 이 땅의 주인이었던 그들은 지금은 소수민족 취급을 받으며 살아간다.
현대사에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은 1945년 이후 호찌민의 베트민이 캄푸치아크롬의 크메르인들을 살육한 사건과 미군에 협조했던 ‘화이트스카프’라고 불리는 크메르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으로 요약된다.
-33쪽

캄푸치아크롬, 메콩삼각주의 크메르인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 말과 베트남 말을 모두 쓰는 베트남 속의 소수 민족으로서이다. 베트남인들은 대체로 캄보디아인들을 발뒤꿈치의 때만도 못한 존재로 여긴다. 심지어는 먹고살기 힘들어 캄보디아로 흘러들어간 베트남인들조차 그렇다. 이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깜푸치~’라는 말은 ‘깜푸치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조롱 섞인 말이기 쉽다. 베트남 내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약하기 짝이 없지만 해외에서는 캄푸치아크롬의 캄보디아 반환을 목표로 하는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이들은 15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해외 단체들은 800만 명에 달하는 크메르인들이 캄푸치아크롬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34쪽

호찌민은 인도차이나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혁명가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또 인류역사상 가장 행복한 혁명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평생 꿈꿔왔던 혁명은 이루어졌으며 그 영예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호찌민 자신에게 바쳐졌다. 무엇보다 그는 사후의 오욕을 피해간 몇 안 되는 공산주의 혁명가 중의 하나다. 그는 또 자신의 조국 베트남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진보주의자들의 존경과 애정을 한껏 누렸으니 혁명가로서 그 이상의 영예는 없을 것이다.
나는 호찌민이 쌓은 위대한 업적으로 조금도 훼손할 의도는 없지만 그를 숭배할 생각 역시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을 신에 가까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결국 불행과 비극을 배태하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베트남공산당 지도부의 책임이라고 말하겠지만, 절반은 인정할 수 없다. 그 절반은 호찌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호찌민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패권주의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인도차이나공산당의 주도권을 쥐었던 그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공산주의 운동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40쪽

소비에트와 코멘테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는 인도차이나에서 스딸린 식 노선을 견지했다. 스탈린의 소련이 동유럽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호찌민 역시 베트남을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비타협적으로 앞세웠다. 심지어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을 각각 공산당으로 분화시킨 것도 베트남혁명의 필요성 때문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후일 베트남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결과적으로 이 두 나라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던 것은 호찌민이 생전에 견지했던 노선의 자연스런 계승이자 귀결이었다. 때문에 호찌민 사후 혁명이 승리를 거두고 뒤이어 폭발한 인도차이나 삼국간의 갈등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소간의 분쟁과 베트남과 중국 간의 역사적 구원(舊怨) 같은 배경을 고려한다 해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베트남의 패권주의는 결과적으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인도차이나에 대한 베트남의 패권주의는 결과적으로 혁명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인도차이나 인민을 형제간의 전쟁에 몰아넣어 피흘리게 한 점에서 혁명의 대의를 비켜간 것이었다.
-40쪽

호찌민 사후 베트남을 지도한 것은 군사주의였다. 물론 혁명이 장기전의 형태를 띤 상황에서 이는 불가피했다. 초강대국이자 이미 한반도에서 피범벅이 된 손을 인도차이나에 들이민 미국과 싸울 다른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75년 마침내 혁명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후 통일베트남이 직면한 과제는 군사주의적 혁명을 건설적 혁명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제네바협정에 따른 분단에서부터 사이공 함락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호찌민을 포함한 군사 엘리트인 혁명1세대들은 남북문제와 군사적 투쟁에 있어 적잖은 오류를 범했다. 호찌민의 적자들인 통일베트남의 군사 엘리트들은 그 오류를 비판하고 시정하는 건설적 방안 대신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통일베트남을 군사주의적으로 통치하는 길을 택했다. 가장 쉬운 길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또 가장 익숙한 전쟁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형제간의 전쟁이라 불리는 캄보디아와의 전쟁이었다.
-41쪽

결과적으로 베트남의 이 같은 군사주의적 대외정책은 인도차이나를 동서냉전과 중소분쟁의 화약고로 바꾸어버렸다. 모든 고통을 인도차이나를 동서냉전과 중소분쟁의 화약고로 바꾸어버렸다. 모든 고통은 인도차이나인민들의 몫이었지만 통일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은 호찌민의 이름으로 그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41쪽

베트남국기는 붉은 바탕에 큼직한 별이 단 한 개 노란색으로 박힌 황성적기이다. 적과 황의 배색이 강렬하기 짝이 없는 이 국기는 적색바탕에 노란색 낫과 망치가 그려진 전통적인 공산당기와 함께 베트남 어디에서나 펄럭인다. 별은 공산주의국가의 국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징이다. 별은 언제나 공산당과 인민을 나타낸다. 중국의 오성홍기는 아주 전형적이다. 붉은 바탕은 혁명을 의미하고 큰 별은 인민을 영도하는 중국공산당을, 큰 별을 반원으로 감싼 작은 네별은 각각 노동자와 농민,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의미한다.
별이 하나만 등장하는 것이 베트남국기만은 아니지만 그저 붉은 바탕에 별이 딱 하나인 것은 찾기 힘들다. 베트남은 이 별이 통일과 승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별은 베트남공산당이며 일당독재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결국 국가의 권위인 이 별은 또 호찌민이기도 하다.
-43쪽

쌀국수는 이제 세계적으로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아니고 쌀로 만든 국수여서 한국이나 일본의 국수와도 다르고 조리된 야채가 아니라 생야채를 그대로 얹어 먹는 특이함 때문에 세계 식도락가들의 구미를 당겼을 것인데 쌀국수가 이렇게 세계적 음식이 된 계기는 아무래도 1970년대 말 남중국해를 떠돌았던 보트피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세아니아는 물론 유럽과 북미 등지로 퍼져나갔던 이들 난민은 베트남음식을 세계로 전파한 주역이 되었다. 우리에게 쌀국수와 베트남음식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베트남인들도 한국이 받아들인 약간의 난민들이었으니 쌀국수를 세계적인 음식으로 만든 공은 누가 뭐래도 보트피플에게 돌아가야 하겠다.
-53쪽

야자즙의 맛은 그저 밍밍하지만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그만이며 물과 비교하면 짭짤달달하기 때문에 생수 먹는 기분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다 먹고 난 야자통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는데 대표적으로는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 컵 등의 공예품을 만들며 그 중에는 옻칠까지 해놓은 상품(上品) 중의 상품도 있다.
파인애플은 애플처럼 나무에 열리는 것도 아닌 풀의 일종이다. 무와 비슷한데 뿌리는 아니고 엄연한 열매이다.
-61쪽

베트남에서 자행된 미군의 양민학살을 대표하게 된 미라이 양민학살은 1968년 3월에 벌어졌고 504명의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 학살을 지휘했던 미군 중위 윌리엄 켈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무고하지는 않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이 폭로된 만행을 무마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 책임져야 할 범죄자들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종신형을 언도받아야 할 범죄자들은 대통령 존슨과 닉슨을 비롯한 위정자와 미국의 군산복합체였다. 물론 그들은 책임지지 않았다.
-71쪽

독립의 아버지, 해방의 아버지, 혁명의 아버지 호찌민. 미혼으로 자식을 남기지 않았던 그는 이처럼 베트남 인민이라는 자식을 남겼다. 호찌민 사후 베트남에는 호찌민의 이름과 겨룰 수 있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베트남공산당의 통치는 호찌민의 유훈 통치나 다름없었다. 호찌민이란 거대한 권위를 전면에 내세운 베트남공산당은 일사불란한 일당독재 체제를 완성했고 그동안 문제없이 유지해왔다.
도이머이로 시장경제란 괴물과 대적하고 있는 오늘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정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개방 이후 중국이 겪은 톈안먼 사태는 강 건너의 불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베트남의 대부 노릇을 했던 소련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도이머이로 나아갔을망정 베트남 공산주의정권은 요동도 하지 않았다. 감탄할 정도로 튼튼한 정권이다.
-75쪽

죽은 호찌민을 내세우고 산 자들이 면죄부를 얻었으니 개혁이란 언감생신이다. 호찌민의 적자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한 번도 내놓은 적이 없으니 고인 물이 썩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보응우엔지압 같은 1세대 전쟁 엘리트들이었다. 베트남이 무력에 기초한 경찰국가가 된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이들은 호찌민을 신격화하고 그를 사상적 통제의 근간으로 삼아 지난 30여 년 동안 체제와 권력을 지켜냈던 것이다.

-77쪽

1912년 프랑스 코친차이나 총독부가 다랏에 도시를 건설하기 전까지 이 고산지대에는 이름처럼 랏족이 살았다. 도시가 건설된 후 비엣족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다랏의 원주민들은 소수민족이 되어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다랏과 주변의 농민들 대부분은 남부에서 이주한 비엣족들이다. 투어의 첫 번째 기착지인 랏마을은 다랏 주변의 랑비안 산기슭에 있는 랏족의 마을이다. 가이드는 랏족에 대해 피부가 검고 생김새가 다르다는 명쾌한 설명을 건넨다. 그 뉘앙스가 마치 열등한 종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려 흔쾌하지 않은데 문득 얼굴에 복면을 두르고 팔까지 긴 장갑으로 덮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던 호찌민의 여인들이 떠오른다. 그녀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살면서 기를 쓰고 그을리는 것을 피해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들은 검은 피부를 가진 메콩삼각주의 크메르인들이나 지금 이 랏족들과는 달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 아닐지 모르겠다.

-86쪽

현재 베트남의 가톨릭인구는 전체 인구의 8~10%를 헤아린다. 가톨릭만큼 베트남의 근현대사와 밀접한 종교는 없을 것이다. 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의 선교사들을 통해 뿌리내리기 시작한 가톨릭은 17세기 말엽에는 80만 명의 신자를 가질 만큼 세를 확장했지만 왕조의 박해를 받았고 중국에서처럼 제국주의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프랑스가 식민지로 지배하던 인도차이나에서 가톨릭은 국교처럼 번성했고 그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프랑스의 퇴장과 함께였다.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북베트남에 정권을 수립한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가톨릭을 탄압했고 무려 90만 명에 달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북위 17도선 이남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응오딘디엠 정권의 절대적인 지지층이 되었다. 1975년 이후 남베트남에서 가톨릭의 운명은 정해진 수순을 밟았다.
1990년 이후 가톨릭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예전의 영화를 되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30여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이처럼 쉽사리 부활할 만큼 가톨릭의 뿌리가 깊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88쪽

중국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는 않았지만 인생이야 그와 별반 다르지도 않았던 바오다이는 1945년 호찌민에 의해 퇴위 당했지만 홍콩으로 망명한 후 1949년 프랑스가 코친차이나와 안남, 통킹을 합병하면서 세운 베트남국의 꼭두각시 국가수반으로 세워져 돌아왔다. 결국 바오다이는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1955년 8월의 총선으로 남베트남에 응오딘디엠 정권이 수립되면서 그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응오딘디엠은 말뿐인 바오다이 정권에서 실세인 수상을 지낸 인물이다.

-91쪽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남쪽에서는 응오딘디엠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그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한 독재자였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남베트남에서 그 응오딘디엠정권에 대항하던 세력들 중 하나는 불교승려들이었는데 후에의 티엔무 사원은 그 본산 가운데 하나였다. 그 시기 전 세계의 해외토픽란을 장식했던 사진 한 장이 있다. 남베트남의 승려인 틱꽝득이 응오딘디엠정권의 폭정에 항거해 가부좌를 틀고 분신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결국 1963년 11월에 남베트남에서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디엠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116쪽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나뉜 베트남은 그 위도를 따라 비슷하게 흐르던 벤하이 강 남북으로 한시적인 비무장지대를 설정했다. 한반도가 그랬듯이 베트남의 그 누구도 이 비무장지대가 20여년의 분단으로 이어지리라고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었고 베트남은 한반도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1956년으로 예정되었던 남북베트남 총선은 한반도에서처럼 단독선거로 귀결되고 분단은 고착되었으며 결국은 전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 결과 300만 명의 베트남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118쪽

호찌민트레일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잇는 군수물자와 병력의 보급로로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뚫린 수많은 루트의 총칭이다. 미군은 호찌민트레일의 존재를 명분 삼아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폭격하기도 했다. 전쟁 후 호찌민트레일의 일부는 도로로 개발되기도 했고 다리가 되기도 했으며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했을 것이다.

-120쪽

벌어진 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울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전쟁지도자들은 손쉽게 전쟁을 결정하고 국민과 인민을 선동하고 민족과 민족을, 종교와 종교를 이간한다. 그 뒤에는 언제나 비열하고 무책임한 호전주의자들이 버티고 있다. 그들은 오직 승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처참한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고 땅과 집과 논들을 불태울 뿐이다.

-121쪽

전쟁주의자와 군사주의자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명이란 군수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에도, 비무장지대에도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을 이끌었던 북베트남의 군사 엘리트들은 평화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캄보디아와의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그들 군사주의자들이었고 라오스에 베트남군을 주둔시킨 것도 그들이었다.
베트남전쟁의 영웅은 누구인가? 유감스럽게도 승리의 실질적인 주역은 미국의 더러운 전쟁을 반대한 미국 민중과 세계의 민중, 그리고 세계의 민중을 반전운동으로 몰아넣은 베트남민중의 참혹한 죽음과 참상이었다. 전쟁의 비극을 막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다.
-123쪽

말이 달라도 이렇게 다른 베트남과 한국은 모두 한자문화권에 속했던 탓에 문화적 공감대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문자만 해도 한자를 빌려 쓰다 지금은 꾸옥응우라는 표음문자를 사용한다. 한글도 표음문자이지만 다른 점이라면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시한 것이요, 꾸옥응우는 로마자를 빌려 표기하는 것이다. 이래서 조금만 애를 쓰면 의미를 눈치 챌 수 있는 단어들이 적지 않다.

-124쪽

같은 한자문화권이라고는 하지만 베트남이 한국보다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더 수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발음에 성조랄 것이 없는 한국어에 비해 베트남어의 6성조는 고작(?) 4성조의 중국어쯤은 소화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한자로 표기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던 베트남에서는 한자의 음을 빌리거나 고유어의 음을 표기하는 한자와 그 뜻을 나타내는 한자를 합성하거나 한자의 의미를 합성한 쯔놈이란 문자가 만들어졌다. 이 문자를 쓴 문학작품들은 13세기에 들어 등장하는데 프랑스 식민지지배의 역사를 거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문자는 베트남의 고유문자로 발전했을 것이다.
-125쪽

하노이의 사람들은 호찌민의 사람들보다 여유가 있고 표정도 덜 각박하게 보인다. 그러나 도이머이 초기 베트남에 질린 외국기업들은 차선으로 북부를 버리고 호찌민으로 몰려갔으니 체제의 배타성은 하노이가 위에 서는 것인데 체제에 대한 자부심도 그만큼 강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노이, 베트남의 혁명수도. 베트남의 모든 권력은 하노이에서 나온다. 총과 사상이 하노이에 있기 때문이다. 하노이는 지난 반세기 이상 베트남을 지배해온 상징이며 실체이다. 읻 h시는 또 세계사에 기록된 가장 유명한 전쟁과 혁명의 진지였다.
-129쪽

몰락 이전 소련에서 레닌이 차지했던 위치를 고스란히 재현한 이 거대한 묘는 레닌과 마찬가지로 방부 처리된 호찌민의 시신을 경배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호찌민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살아남은 자들 탓이다. 생전의 호찌민은 화장을 원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유언조차도 널리 선전하고 있다. 죽은 자에게는 매우 가혹한 일이다. 머리는 아프더라도 살아서 책임을 지는 피델 까스뜨로가 더 행복할는지도 모른다.
-132쪽

연꽃은 베트남의 국화(國花)이다.
연꽃은 두루두루 의미심장한 꽃이니 인도에서는 다산(多産)과 힘 그리고 생명의 창조를 의미하고 영원불사를 상징하며 부처의 탄생을 알리는 꽃이다. 중국에서도 불교의 전래 이전부터 연꽃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모습으로 속세에 물들지 않은 군자를 상징하였다.
-133쪽

하노이에는 호수가 많다.

-135쪽

베트남역사에서 영웅의 칭호는 대개 중국과 싸워 이긴 황제나 장수에게 헌정된다. 명(明)과 싸워 이긴 레왕조의 시조 레러이도 그렇고, 박당강에서 당(唐)을 물리쳐 중국의 1천년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 응오꾸엔, 장군 쩐응엔한 등은 모두 중국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 승리한 인물들이다. 이처럼 베트남역사에서 중국이란 존재를 떼려야 뗄 수 없다. 베트남이 중국과 치른 마지막 전쟁은 1979년에 일어났던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공으로 비롯된 것이다. 이 전쟁에서도 베트남은 판정승을 거뒀다. 전쟁으로는 베트남을 당할 수 없었던 중국은 도이머이 이후 막강한 화교자본으로 베트남에 밀려들어오고 있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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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문화답사기
다큐인포 지음 / 북이즈 / 2003년 2월
품절


구총독부(이하 총독부) 건물은 그야말로 일제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4년간의 설계와 10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설계는 독일인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가 맡았고, 그가 죽자 일본인 노무라 이치로와 구니에다 히로시가 마무리를 했다. 건축 자재는 국내외 것을 가리지 않고 최고급 자재를 사용하였는데, 다른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에 있는 총독부보다 훨씬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으려는 의도였다. 건축 양식은 당시 유행하던 르네상스식이었다.
이 건물은 완공 후 20년간 식민지 조선의 총독부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 청사로 사용되었다. 군정이 끝나자 과도 입법의회가 사용하더니, 제1공화국 때는 정부 청사로 쓰이면서 제헌국회 개회식, 초대 대통령 취임식, 9.28 서울 수복 등 현대사의 영욕을 함께 했다. 6.25 전쟁 때는 대파되어 '유령의 집'으로 불릴 정도였으나 완전 복구되어 5.16쿠데타 이후에는 정부 청사로 활용되며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했다.
-17쪽

제5공화국 때는 거센 여론에도 불구하고 277억 원의 거금을 들여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개관했다. 제6공화국 시절에도 철거 여론이 있었으나 막대한 철거 비용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광복 5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시점에서 이 건물은 첨탑을 자르는 것을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총독부 건물이 마땅히 철거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이 건물은 유서 깊은 우리 민족의 심장부인 경복궁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들어섰다. 이때 헐어낸 면적이 경복궁 전체 면적의 1/4에 달한다.
또한 총독부 건물의 위치는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거의 종교와도 같았던 풍수사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풍수로 볼 때, 총독부 자리는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입에 해당한다. 이처럼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그들은 최대한 우리 민족의 전통과 정서를 파괴하는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총독 관저의 자리는 사람의 목 부분인데, 그들은 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지음으로써 조선 정궁이 파괴는 물론 풍수의 관점에서 조선의 숨통을 조이고, 입을 막으려 한 것이다. -18쪽

일제가 우리 풍수사상을 교란하기 위해 박았다는 쇠말뚝으로 치면 가장 크고 고약한 쇠말뚝인 셈이다. 게다가 종종 보도된 것처럼 총독부를 '日'자 형태로 지어서 '大'자 형상인 북한산과 '本'자 모양으로 지은 경성부청사(현 서울 시청)와 아울러 '대일본'을 나타내고 있따. 그들은 한복판에 그들의 이름을 거대하게 써놓고 영구 통치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19쪽

그들의 잔혹성은 총독부 지하 공간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전체 20평 정도의 지하실에는 두께 14cm의 철판 문이 있는 방이 네 개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일제 고문 감금 시설의 형태다. -20쪽

경복궁에 들어서면 유난히 주위의 건물과 부조화를 이루는 민속박물관이 서 있다. 그 민속박물관을 오른쪽ㄱ에 두고서 계속 가다보면 구박물관이 나온다. 그 오른쪽 구석에 '명성황후 조난비'와 '순국숭모비', 그리고 사당이 단촐하게 세워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시신이 불태워진 자리에 표식이라도 하나 세우지는 못할망정 공중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순국숭모비'에는 건립위원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대표적 친일파 '모윤숙'이 부회장으로 새겨져 있다.
....
(26) 반미(?) 운동까지 하던 그녀는 광복 이후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띠며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다. 이승만 정권과 손을 잡고 친미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그녀는 자신의 친일 행적을 보호받으려 했다. -23쪽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그녀는 군사 독재 안에서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한다.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녀는 문단, 외교, 여성계의 대표로 활약하게 되는데, 1970년 국제펜클럽대회 준비위원장이 된 것이다.
그녀는 19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말로 화려한 이력과 함께 친일에서 친미로, 그리고 친독재로 옮겨 앉으면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보여줬다.

숭모비를 옆에 두고 있는 명성황후 조난비의 비문은 모윤숙이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한 이승만의 친필이라고 한다. -27-28쪽

뒷이야기)
경복궁은 본래의 1/10 정도 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원형이 크게 파손되어 있었다.
철거 당시 총독부 건물의 지하에서 일제가 박아놓은 나무 말뚝 9,388개가 발견되었다.
한겨레 신문에 따르면 "95년~96년 정부가 경복궁 안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일제 때 총독부 건물의 지반 다짐용으로 궁궐 터에 박아넣은 대형 말뚝 수 천여 개를 뽑아내지 않은 채 홍례문과 주변 행각을 복원한 사실이 드러났다."(2002년 10월 4일)고 한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와 공사 관계자의 말이다. "말뚝을 모두 빼낼 경우 터 자체를 사실상 전면 굴착해야 하므로 공기가 1년 이상 늦어지고 막대한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논란 끝에 전문가 자문을 받아 말뚝 10여 개만 빼고 홍례문과 전각, 개울 등을 복원했다."
시간과 비용문제로 말뚝을 제거하지 못했다니, 이젠 슬그머니 땅속에 감춰놓으면 그만인가?-29쪽

현 서울시청사는 일제가 1926년 경성부청사로 지은 건물인데, 하필 덕수궁 대한문 맞은편에 버티고 있는 것은 조선총독부로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조선 왕조의 기를 끊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기와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부린 술수였다.

서울시청사는 남대문에서 경복궁으로 가는 통로이자 을지로, 소공동으로 가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셈이다.-31쪽

일제의 조선 지배를 위한 치안유지법은 구대법원 청사(당시 경성지방법원)에서 시행되었던 대표적 악법이었다. 일제가 자기들의 손으로 지어 제멋대로 우리 민족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판결을 내리던 억울한 역사, 그 역사를 담고 뻔뻔스럽게 서 있는 건물을 우리는 사적이라고 할 것인가?-35쪽

시청 맞은편에 있는 서울시의회 건물.
원래는 조선시대 초부터 있던 흥천사라는 절이 있던 곳인데, 예부터 절터가 명당자리라는 것을 알았던지 그 오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부민관을 세운 것이다. 이름대로라면 부민관은 '민'을 위한 '관'이어야 하는데 말이 좋아 부민관이지 상류 계급을 위한 시설이었다.
부민관은 주로 공연장으로, 식민 문화의 홍보 창구로 많이 쓰였는데 일제 말기 변절한 친일파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모윤숙을 들 수 있다.
8.15 광복이 되면서 정부는 이 건물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주로 일제의 정책을 홍보하는 장소로 쓰이던 곳이므로 친일파가 대거 국회의원으로 재등장한 국회의 근거지로 쓰기에는 적격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건물에서 초대 대통령까지 선출하였다. 그후 1970년대 중반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해오다가 의사당이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의회가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37쪽

경성역은 무려 3년여에 걸친 대규모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1922년 6월 1일 신축 착공하고 1925년 9월 30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공사비는 무려 194만 6천원. 당시 돼지 한 마리에 4원 미만이었고, 조선 정부의 1년 예산이 4백만 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조선총독부가 투자한 경성역 공사가 매우 거대한 국책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42쪽

일제는 철도 공사비를 절약하고, 풍부한 광물과 농산물이 있는 요지를 지나기 위해 논밭, 무덤, 명산들의 혈과 수맥을 무시한 채 설계했다. 백성들의 원성은 당연히 뒷전이었다. 그들이 측량했던 그 길을 지금의 경부선이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51쪽

철도박물관 어디에도 일제의 철도 침략에 대한 전시물은 찾기 힘들었다.

박물관을 나와 보니 건물 정면에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친일전력이 있는 시인으로 알려진 서정주의 글이다. 역사의식의 부재를 드러낸다.

산을 뚫고 물을 건너 뻗어나가던 철길은 무한한 미래를 지향하는 발전의 길이 아니었다. 끝없는 침략과 수탈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었따. 조선을 완전히 자신의 영토로 생각했던 일제는 그래도 미래를 보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미래는커녕 과거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61쪽

독립기념관의 대표적인 오류는 친일 인사들을 애국지사로 미화시켜 전시한 부분이다.
탑을 지나 다리 밑 오른편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새겨진 이승만 어록비가 눈에 띈다. 이 유명한 말의 배경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우울한 역사가 숨겨져 있다. 6.25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끝까지 수호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서울 시민들에게 피난을 만류하며 한 말이 바로 뭉쳐야 산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있을 때 이미 그는 서울을 떠나고 있었고, 곧이어 무책임하게 한강 다리를 폭파해버렸다. -67쪽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후에 극렬한 친일파로 변절하여 학병 독려를 주장한 박희도와 교회 종까지 헌납한 정춘수 등도 미화되어 초상화까지 걸려 있다. 여기에 반민특위 법정에 섰던 최남선과 최린도 민족운동가로 소개되어 있다.
제5관(독립전쟁관)에도 친일 음악인 홍난파를 비롯, 학병 참여를 권유하고 일제에 빌붙어 갖은 반민족 행위를 한 장덕수와 윤치호 등이 민족운동가로 위장되어 있어 알 만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70쪽

우리는 영웅주의 사관에 빠져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역사 기여도를 너무 무시해왔다. 이제라도 이름 없이 쓰러져간 무수한 용사들을 위해 무명독립용사상이든, 광복용사상이든 세우는 것이 오히려 독립기념관의 건립 이념에 맞지 않을까? 유엔군 무명용사상은 있으면서 광복군 무명용사상이 없다는 건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73쪽

PIFF광장이 있는 광복동과 그 인근에 있는 남포동은 부산의 패션, 문화, 젊음의 중심지다. 이곳이 부산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도시 개발이나 행정상의 계획도시 차원이 아닌 침략자의 이권 획득 때문이었다. -92쪽

제2차 대전 이후 1970년대 초, 국제 무대에 일본이 다시 등장함을 가리켜 <뉴욕 타임스>가 "벚꽃이 다시 핀다."고 했을 정도로 벚꽃은 일본의 국가정신을 나타내는 꽃이다.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열리기 시작했다는 진해의 군항제는 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왜적을 무찌르고 이 땅을 지켜낸 충무공의 정신을 기리자는 행사가,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벚꽃이 흩날리는 속에서 거행되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충무공과 일본 정신, 그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116쪽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진해는 약 100년 전부터 조성된 계획 도시다. 일제가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항으로 개발한 도시가 바로 진해다.

창경궁에 심어진 벚나무도 그렇지만 진해의 벚나무 역시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민족정신 말살을 기도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117쪽

광복 후 거의 사라졌던 벚나무가 부활한 이유는 무엇인가?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우리나라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무궁화연구회 박춘근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주도에 있는 벚나무와 진해에 있는 벚나무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진해에 심어진 나무는 일제에 의해서 일본에서 가져다 심어진 나무죠. 정복의 의미로 심어진 겁니다. 사쿠라를 진해나 군산에 심은 것은 단순한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일본혼'을 심은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쿠라를 누가, 왜 심었는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벚나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단지 그 나무에 인간의 속성이 묻어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자국의 벚나무를 내세우고, 그 나무와 같은 속성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우선 벚꽃놀이만 해도 우리 고유의 풍습이 아니라 일본의 풍습이다. 우리나라는 전래의 진달래 화전놀이와 국화놀이가 있었을 뿐이다. -118-119쪽

1952년 4월 13일 진해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제막되고, 해군 통제부가 주관하는 군항제가 시작되었다. 군항제는 이순신 장군의 구국정신을 추모하고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와 예술행사를 펼치며, 민과 군이 화합을 다지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군항제가 열리는 시기는 일제 때 심어진 왕벚꽃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인 만큼 충무공의 추모제는 흩날리는 왕벚꽃 속에서 진행되게 마련이다. 지금은 오히려 군항제보다 벚꽃놀이에 더 많은 고나심을 갖게 된 것 같다. 군항제가 마치 벚꽃놀이를 정당화시키는 구실로 전락한 것 같아 씁쓸하다.
방사선 도시 계획이 특징인 진해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 개의 광장을 두고 있는데, 태양은 일본의 상징이다. 중워노강장에는 거북선 모형과 분수 시계탑을, 북원광장에는 이 충무공의 동상을, 남원 광장에는 충무공의 시비를 세워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일본의 상징인 태양과 그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충무공의 모습은 보기에도 민망하다.-120쪽

벚꽃의 가지는 충무공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이락사에까지 뻗쳤다. 일제는 이락사에도 왕벚나무를 심었고 그것이 지금은 거목으로 성장해 있다. 호국 영령이 통탄할 일이다.
북원광장에 있는 충무공 동상은 당시 한국 조각계의 권위자인 윤호중 씨가 만들었다. 윤호중 씨는 모형 제작을 마치고, 이 방면의 권위자들에게 감상, 비평하게 한 결과 만족할 만한 평을 얻지 못하고 세 차례에 걸쳐 수정한 끝에 완성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방면, 즉 충무공에 관한 권위자들이라는 사람들의 면면이다. 친일 변절자 최남선, 친일 신문 만선일보에서 활약했던 이은상, 그리고 친일 미술가의 대부 김은호 등이 이 방면의 권위자들이었다. 충무공의 정신이 친일 변절자들에 의해 더럽혀지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충무공 동상 앞면에는 '충무공 이순신상 이승만 근서'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이은상의 찬문이 적혀 있다. -121쪽

진해에 벚꽃이 부활하게 된 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로(?)가 크다. 그는 만주 신경군관학교 졸업식장에서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선서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사쿠라같이 훌륭하게 죽을 각오를 한 그에게 있어 한 도시를 벚꽃으로 장식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민족혼을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그들의 국화인 왕벚꽃을 전국에 심기 시작한다.
전주-군산간 번영로에 심어진 왕벚나무 가로수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이기도 한 이 길로 일제는 호남 곡창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던 것이다. 한마디로 '수탈의 길'이었다.-122-123쪽

벚꽃 길은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한복판,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이사당을 감싸고 있는 '윤중로'라는 길이 그곳이다. 봄이 되면 국회의사당은 활짝 핀 벚꽃에 묻혀버린다. -124쪽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맞은 일본은 진해를 기지로 하여 전투를 벌였다. 해전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한 일본은 이곳 진해 탑산에 기념탑을 세웠다. 도고 헤하치로 사령관이 대마도 해전에서 기함으로 사용한 삼립의 함교 모양을 본떠 세운 탑이었다. 이 탑은 광복 후 이곳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보기 싫다.'는 말을 던지는 바람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진해향토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황정덕 선생님, "벚나무는 공해와 병충해에 약하고 어린 나무에서도 이른바 미친병(천구소병, 빗자루병)에 감염되는 개체들이 많은 단점이 있어요. 그리고 조금만 상처가 나도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죠."
벚나무는 가로수로는 적합한 나무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125쪽

사천은 최초로 거북선이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천도 일제의 손길을 막지는 못했다. 일제는 임진왜란 전승지마다 벚나무를 심어 민족정신의 식민화를 유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를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던 이곳을 아예 성역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구축한 '선진왜성'이라는 곳은, 1963년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총독부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된 선진왜성은 해방이 된 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역시 사적 제50호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천읍성은 우리가 쌓은 성인데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반면, 선진왜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영화를 누리고 있다.-126쪽

우리에게 한밭(太田)을 대전(大田)이라 부르고 표기하도록 강요한 이는 바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히로부미가 태전이라는 지명을 없애고 대전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은 <조선대전발전지>(1917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토는 왜 태전을 대전으로 고쳤을까? 역학과 풍수 등 동양학에 능했던 그가 한밭 주위의 산천 경계에 흐르는 상서롭로 강렬한 지기를 꺾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은옥 간사, "우리 말의 '한'은 크다는 뜻 외에도 밝다, 동쪽이다, 중심이다, 하나다, 통일하다, 희다, 처음이다, 으뜸이다, 높다, 하늘, 임금.... 등 20여 가지 이상의 뜻이 있죠.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한'이라는 말을 '대'라는 글자로 번역하여 대전으로 쓰면 그저 작은 밭이 아닌 큰 받 정도의 의미 밖에 나타내지 못해요." -130쪽

"그럼 太자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살펴볼까요? '태'자는 창조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시작한다(태조, 태치 등)의 뜻이 있으며, 성장이 정지된 大와는 달리 무한히 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더 이상 클 수 없는 가장 크고 지존하다는 의미(태황제, 태상황 등)도 담고 있죠. 가장 작고 가장 큰 데 걸림이 없으며, 질적으로 양적으로 커나가는 과정과 가장 커버린 경지까지 포함하고 있어요." -131쪽

지명은 곧 그 땅의 역사요, 혼이다. 1991년 8월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들어서자마자 레닌그라드라는 지명을 없애고 원지명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원시킨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엑스포를 치른 국제 도시 태전은 하루빨리 이토가 지어준 부끄러운 이름을 처분해야 한다. 태전을 고향으로 둔 모든 이에게 이토와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이름 한 자 한 자에 생명을 부여한 우리 민족이 침략의 원흉 이토가 오래 전에 지은 반민족적 지명을 고집할 필요가 전혀 없다. 비록 행정기관에겐 귀찮고 돈이 좀 드는 일이라도 말이다. -134쪽

물론 부끄러운 문화유산이라고 해서 철거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역사의 고발 없이 건축사에 의의가 있다고 보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139쪽

1920년 수탈 사업을 시작한 이후 조선에서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둬들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151쪽

예부터 일본은 호시탐탐 제주도를 노려왔다. 제주도의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여덟 개의 유인도와 54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1,845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갖는 제주도의 중앙 경위선은 127도 27분E, 33도 22분N이다. 이것은 한반도와는 59km의 폭을 갖는 제주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해남반도의 해남곶과 가장 가까우면서, 일본과도 불과 260km 떨어져 있고, 중국과도 제주-서울간과 비슷한 거리의 420km 떨어진 상하이와 가장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제주도의 위치가 한반도, 일본 열도, 중국 대륙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속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3국의 문물을 교류하는 데 가장 유리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163쪽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일본 제국주의는 '결7호작전'이라는 군사작전으로 제주도를 자신들의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삼고 관동군 등 일본군 정예병력 7만여 명을 제주도에 주둔시켰다. 당시 제주도 인구 25만여 명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제주에 들어온 것이다.-164쪽

서길수 교수,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지배할 때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바로 정신적 문화적 전통과 유산이죠. 첫째, 자국의 언어 사용을 강요합니다. 언어는 정신 침략의 무기라고들 하죠. 둘째, 역사적 자료를 없애고 역사를 왜곡합니다. 그 나라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사를 없애서 그 국민이 가진 성취 동기를 없애는 것이죠. 셋째, 전통적 풍습이나 민간신앙을 통해서 패배감을 심어나갑니다. 말과 글을 없애고 역사를 없애는 작업이 그 나라 상층부나 지식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일반 민중에게 폭넓게 또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풍습이나 민간신앙이죠. 그래서 일제가 조상을 명당에 묻으려는 묘지풍수사상을 비롯한 풍수지리학을 이용하여 패배의식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 풍수 침략으로 나타난 거예요."-175쪽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이라는 개념은 금세기 초 일본 지질학자들이 땅밑의 지질 구조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산맥들은 실제 눈에 보이는 산줄기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지표상의 실제 산줄기의 흐름과 일치하고,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져서 중간에 강이 나오는 일이 없는, 독특한 인식 체계인 '산경표'를 사용하였다.

같은 대간, 정맥 등으로 둘러싸인 지역은 같은 물을 쓰기 때문에 문화가 동일하고 하나의 경제권을 이룬다. 그래서 '산경표'에 따른 지역 분류는 등산이나 여행에 도움을 주고 과거 우리의 역사와 인문지리학과 향토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78쪽

서울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고 김세중이 만들었다. 그런데 왜 고개를 숙이고 있을까?
그는 충무공 이순신 상(충무, 1953년/부산, 1955년)을 세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상, 맥아더 상, 김활란 상, 김성수 상 등의 동상을 세웠다.-255쪽

'애국지사 정춘수'
이 말은 그의 묘 입구에 써 있는 글귀다. '변절자', '친일파', 이것만큼 적합한 이름이 따로 없는데 애국지사라니.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다.

1906년 그는 전도사로서 원산지역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중, 1907년 같은 고향 출신인 신석구를 만난다. 신석구 역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정춘수와는 달리 끝까지 민족신앙과 지조를 지키는 대조를 보인다.

정춘수는 3.1운동으로 인해 1년 6개월을 복역한다.

정춘수 동상, 2.8 독립선언 77돌에 맞춰 철거하다.
-259쪽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는 감신대에 가면 대학원 현관 안에 정춘수 부조물이 있다. 3.1운동 감신교 출신 민족대표라는 이름 아래 일곱 명의 부조물이 있었는데 현재 여섯 명의 부조물이 있었다. 없어진 한명은 김창준 목사다. 광복 후 사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벌였는데, 6.25전쟁 때 북으로 갔다. 그래서 그는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되었고 감신대에 새겨진 부조물마저 철거당했다. 월북한 것은 월북한 것이고 민족대표로 3.1운동한 것은 3.1운동한 것이다. 역사는 역사로서 평가되고 사실은 사실로서 기록되어야 한다.

정춘수는 감리교 출신 목사였지만 감리교를 떠났다. 감리교는 버젓이 천주교인이 된 그의 부조물을 두고 있다. 모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정춘수 부조물을 철거하지 못한다면 김창준 목사 부조물 역시 역사적 현실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269쪽

우리 전통적인 양식에 의하면 사당에는 영정이 걸리면 안 된다고 한다. -277쪽

남도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일컫는 진주는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거두이자 의병의 정신적 원천을 제공하였던 남명 조식이 있었고 조선 말에는 동학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났고, '형평운동'의 거대한 불꽃이 백정들의 '형평사'(1924년) 결성으로 타오른 곳이기도 하다.-283쪽

단지 그림 한 장 때문에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거창한 명목으로 분개해야만 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 이완용이 아무리 당대 최고의 조각가라 해도 그가 3.1절 기념 조형물을 조각하겠다고 나선다면 여론은 분명히 그가 저지른 과거의 죄를 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은호 역시 스스로 붓으로 논개를 담아낼 자격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봤어야 했다.-284쪽

고 임종국 선생, "유치환의 '수' 역시도 잘못된 평가를 받고 있다. '작은 가성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은 대륙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세력의 총칭이었다. 침략적 잔인 행위의 고발이 아니라 항일하다 죽어 효수당한 '머리 두 개'를 꾸짖은 친일시가 바로 '수'인 것이다. 이런 거짓말들이 고쳐져야 민족의 혼이 바로 선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된다. 유치환과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아직 엇갈리고 있으므로 아직 섣불리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289쪽

월탄 박종화 선생은 비슷한 전력이 있는 유치진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입영의 아침'에서 일제의 학병 참여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박종화는 유치진보다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발표된 수필 2편과 담화 1편이 현재 발견된 박종화의 친일 행적의 전부이다. 당시 그의 비중으로 볼 때 그 정도밖에 쓰지 않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친일 행위자를 다시 추앙하는 글을 쓴 행위는 또 다른 형태의 친일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292쪽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 박중양. 1941년에는 중추원 고문,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49년 1월 21일,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 피의자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감된지 일주일 만에 폐렴에 걸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 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모든 공문서에서 박중양에 대한 처리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바, 아마도 그 당시의 다른 반민족 행위자와 같이 별 처벌 없이 석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친일 행적을 기념한 일소대는 후손들에 의해 자진 철거되는 신세가 되었다.-306쪽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혀 있는 국립묘지 애국자 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
-일생을 항일 독립 투쟁과 민족적인 삶으로 일관해온 백강 조경한 선생이 1993년 10월 7일 타계하며 남긴 말이다. -317쪽

국립묘지 안에는 가이즈카 향나무, 리기다 소나무 등 일본산 나무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 풍속에서는 묘지에 향나무를 심는 것을 금기로 했다. 왜냐하면 묘지는 음기가 강한 곳인데 향나무는 양기가 강하기 때문이다.-322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들춰보면 이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1899년 10월 대구 출생으로 1919년 최연소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이 되어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고 있는 자료들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항일 경력들과 함께 친일의 경력 또한 화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3.1운동 후 이와모토 쇼이치로 창씨개명을 하여 상하이에서 일제의 고급 밀정으로 활동한 것이 임시정부 서무국장으로 있던 임의택, 의열단원이던 김성수,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 씨 등의 증언으로 밝혀지고 있다. -325쪽

대통령 특사로 면죄시켜준 사람에게 다시 법원이 유죄 선고를 내릴 수 있는 것이 프랑스 국민의 정신이며, 민족정기인 것이다. 부끄럽게도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와 베트남만이 예외였다. -331쪽

대전 국립묘지. 백범 김구 선생의 실질적인 암살범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애국지사를 탄압했던 친일파 김창룡의 묘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333쪽

1890년대의 '독립'과 1910년 이후의 '독립'은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르지만 독립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쉽사리 구분하기가 어렵다.-337쪽

나라를 생각하던 선열들은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도 홀대를 받고 있는 반면, 친일 경력이 있는 김기창의 집은 당국의 지원과 비호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세교리에서 한봉수 의병대장 묘소에 이르는 길은 확장은커녕 포장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운보의 집을 잇는 길은 2차선으로 확장, 포장을 해주었다는 사실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1만 원권 지폐에 김기창이 그린 세종대왕 영정과 을지문덕 영정, 김정호 영정 등 국가 표준 영정에서 김기창의 그림을 폐출하라!-365쪽

1940년 나치의 침공을 당한 프랑스는 개전 6주 만에 완전히 무너졌다. 나치는 프랑스를 직접 합병하지 않고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를 세웠다. 겉으로는 "프랑스는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정부가 통치한다."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의 군대를 사실상 해체하고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일제의 식민 통치와 비슷한 양상의 강압 통치가 실시됐다.
나치가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비시정부에 참여했던 프랑스 인사들은 "프랑스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며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프랑스인들은 "비시 정부 아래 프랑스는 더욱 황폐해졌으며 당신들은 나치에 협력한 범죄자들이다."라며 그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광복 후 우리나라 ㅂ라전을 위해 일했다는 것을 근거로 이른바 '공과상쇄론'을 들먹이며 친일인사의 죄를 희석시키려는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이후 프랑스는 비시 정부 참여자와 나치에 동조한 언론인, 문인 등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과 처벌에 들어갔다. -374쪽

반민특위는 이광수, 최남선 등 682명을 조사해 이 중 221명을 기소했다. 이 중 실형을 선고받은 친일 인사는 일곱 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모두 풀려났다.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맥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376쪽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겐 희망이 없다.-385쪽

'누구는 친일파다'라고 문서로 남기고 끝내기에는 그들의 죄가 너무 크다.-387쪽

민족 전체가 일제 하에서 신음할 때 일신의 안위를 추구했으며, 해방 후에는 과거를 속이고 민족주의자 행세를 했던 그런 인물들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이루어지려면 지금까지의 청산 노력은 너무나도 미미하다.
저항이 거세고 시간이 걸려도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 적어도 친일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 우국지사로 돌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야 후손들에게 역사의 준엄함을 보여줄 수 있고, 만의 하나 민족과 국가가 어려울 때 부모 형제를 팔아먹는 반역자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388쪽

변화는 어렵지만 변절은 쉽다. 수많은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변절 행위를 변화라고 변명했다.
-필자 조현경-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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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1-02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봤군요~ 요즘 뉴라이트와 교과서 개정 등 분통 터지는 일이 많은데 정말 기막히지요.ㅜㅜ
이 책을 보며 울분에 치를 떨고 부끄러워 했던 기억이 역력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는 한 우리의 부끄러움은 계속 되겠죠~~~~

마노아 2008-11-02 13:21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은지는 몇 년 되었어요. 기록을 보니 2005년 4월 13일이네요. 어떤 책을 읽다가 이 책이 언급되어서 같이 읽게 되었는데 충격적이었죠. 당시 기록을 남겨놨는데 그 책이 없어졌거든요. 그래서 밑줄긋기로 다시 남기는 중이에요. 헌데 재차 보게 되니 또 크르릉! 열 받는 거 있죠. 부끄러운줄을 모르고 반성을 모른다면 역사는 또 반복될 수밖에 없겠죠. 지금이 딱 백년 전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서 더 환장할 노릇이에요ㅠ.ㅠ

노이에자이트 2008-11-0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 쇠말뚝이 풍수침략이며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한 것이냐 아니냐는 지금도 해답이 안 나와 있더라구요.이이화 씨는 근거 없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역사가입니다.저는 아직까지 알쏭달쏭합니다.

마노아 2008-11-02 16:55   좋아요 0 | URL
효과의 유무는 몰라도, 악의적인 마음으로 박아넣은 거라는 생각을 해요. 무시하고 살자니 상당히 기분이 나쁘기도 하구요.
 
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구판절판


거북이의 그 속도로는 절대로 멀리 도망가지 않아요.
그리고 나보다도 아주 오래 살 테니까요.
도망가지 못하며, 무엇보다 자기보다 오래 살 것이므로
내가 먼저 거북이의 등을 보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
이 두 가지 이유가 그 사람이 거북이를 기르는 이유.
사람으로부터 마음을 심하게 다친 사람의 이야기.
-#006쪽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가진 게 없어 불행하다고 믿거나 그러지 말자.
문밖에 길들이 다 당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인이었던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던가.
-#20.5쪽

앞으로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그럴 땐 똑같이
생긴 뭔가를 두 개 산 다음 그중 하나에 마음을 담아서 건네면 된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면 된다.
-#033쪽

먼 훗날은 그냥 멀리에 있는 줄만 알았어요.
근데 벌써 여기까지 와버렸잖아요.
-#043쪽

항상 나는 지도를 처음 받을 때처럼, 지도를 펴들고 버릇처럼 묻는다.
이 지도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여기는 어디냐고.
그건 여행자에게 있어 중요한 시작이며, 절대적 의무이기도 한 일이다.
지금 현재 있는 곳을 마음에 두는 일,
그것은 여행을 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044쪽

발걸음을 멈춰 서서 자주 뒤를 돌아다본다.
그건 내가 앞을 향하면서 봤던 풍경들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지나온 것이 저거였구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아예 멈춰 선 채로 멍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일도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버린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를 뒤집어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나에게 찾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048쪽

나는 누구 인생의 무지개가 되면 안 될까?
그 누가 내 인생의 무지개가 되면 안 될까?
환상은 건드려서 이미 부서졌다지만,
희망은 건드리면 무지개가 되잖아. 저렇게.
-#0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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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 2008-10-2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왜 나는 이 작가를 모를까요...^^

메르헨 2008-10-29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보았더니 바람의 사생활...그 분이네요. 힛...^^ 어쩐지...^^

마노아 2008-10-2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바람의 사생활 저도 갖고 있는데 같은 작가분인줄 몰랐어요..;;;;;
책을 쟁여두고 읽지 않았더니 이런 폐단이 생기는군요^^;;
 
유목민 이야기 - 유라시아 초원에서 디지털 제국까지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5년 1월
품절


고비 사막의 기온은 겨울에 섭씨 영하 50도에서 여름에 115도까지 올라간다.-20쪽

위성 안테나를 설치해 두고 CNN 방송을 시청하는 몽골의 겔.
천창(겔의 지붕에 난 창)을 통해 별자리를 읽는 유목생활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24쪽

70년 간의 사회주의도 몽골 유목민의 문화를 없애지 못했으며, 초원의 귀족이라는 자부심과 세계의 절반을 공포에 떨게 했던 민족 자존심을 몰아내지 못했다.-253쪽

'몽골족의 세기'에 대륙간 교역은 번성했고, 대상들의 통로는 이전보다 더욱 안전해졌으며, 더욱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이는 동서간의 개인적인 접촉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접촉은 결코 마르코 폴로 한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인 접촉은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영원한 타자로서만 존재하던 동과 서가 서로를 정신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28쪽

실크로드가 로드(도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역사의 중대한 비밀 하나를 추적하게 만든다. 그곳은 도로가 없기 때문에 통행세를 받는 사람도 없고 또 그같은 권리 행사를 어느 나라가 해야 마땅한지도 알 수 없다. 진정한 주인이 익명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실크로드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 지역은 유럽과 중국의 통로 구실을 한 도로라는 인상이 강하게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지금의 중앙아시아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는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존재했던 것이지 유럽과 중국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중앙아시아는 동서 문화의 통로로서 동과 서의 문물을 중개하는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앙아시아는 어디까지나 중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고유한 사회와 독자적인 문화, 주체적인 역사가 만들어진 곳이다. 모든 중요한 교역로는 중앙아시아 사람들에 의해, 또는 그들의 참여 하에 개척되었다. -46쪽

뮬란의 적들에 대해 이 애니메이션이 가르쳐주는 것은 그들이 막무가내의 저돌성을 지닌 불멸의 악마라는 점과, 이름이 훈족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저주에 찬 존재들처럼 뮬란의 적들은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침략과 파괴를 감행한다. 충돌의 원인은 한편은 선인데 한편은 악이라는 것밖에 없다.-63쪽

서기 350년에 극악한 인종 박해를 받고, 벌써 몇 세대를 그 땅에 살았던 흉노는 사라지고 만다. 이때 중원의 정착민들에 의해 그들 중 20만 명이 남녀노소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살해되는데, 그것이야말로 한때 절대적인 지배자였던 흉노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살아남은 흉노는 우선 북쪽으로 도망친다. 그들의 이동을 가속화시킨 것은 끔찍한 기후 변화였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만나면 초원은 황폐해진다. 유목민은 생사의 기로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373년, 유목민들은 북쪽 피난민이 늘어 초원에서의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인구가 최대로 증가한 상태에서 몹시 추운 겨울을 맞고 처참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흉노는 식량 부족과 인구 과잉으로 대이동을 감행한다. 남쪽은 만리장성과 중국 때문에 내려갈 수 없어, 서쪽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알타이 지역을 지나 아랄해와 카스피해 그리고 흑해를 지나 유럽의 카르파티아 산맥 분지까지 쭉 뻗어 있는 초원지대를 따라간다. 이렇게 해서 서쪽으로 떠난 흉노를 훈족이라 한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유목민이 그 훈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유럽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가 열리는 것이다.-68쪽

유목민의 정체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은 유럽인들의 종교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북아프리카로부터 골란 지방까지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로마의 멸망은 곧 세계의 멸망"이라는 생각과 로마의 분열, 수많은 황제들의 쿠데타 등 정세 불안으로 모두가 위기감을 감추지 못하던 때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곡과 마곡(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종족)을 각각 고트족과 마사게타이족으로 여겼으며, 당시에는 마사게타이족이 사라진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훈족이 바로 그들이라고 믿었다.
로마인들은 훈족을 악마가 보낸 군대라고 믿었기 때문에 굳이 훈족의 유래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유목민의 이미지는 그만큼 유황 냄새와 지옥의 화염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69쪽

서양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훈족의 생업은 전쟁이었고 그들의 일자리는 말의 등이었다."
이 놀라운 사태를 경험한 유럽인들은 작은 소규모 전투를 하더라도 훈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소위 '용병'이라는 희한한 군사 영업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제 훈족은 거액의 몸값과 스카우트비를 받으면서 유럽의 곳곳으로 팔려다니기까지 한다.
그들은 말을 팔아서도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79쪽

유럽의 정착민들은 훈족이 자기네가 정복한 지역을 계속 유지하려는 집착을 보이지 않는 까닭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훈족은 자신들이 직접 경작하기 위해 농부를 밭에서 쫓아내지 않았고, 도시의 건물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 도시 사람들을 몰아내지도 않았으며, 특권을 누리기 위해 정복 지역의 정통 정부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닥치는 대로 훔치며 약탈하고 죽이면 그만이었다.-80쪽

두개골이 길게 늘어난 훈족의 우골. 이는 당시 유목민들의 전통이었다고 전해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문화가 신라의 유물인 금관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둘레가 약 45cm(7~8세 어린아이의 두개골 크기)인 신라의 금관은 머리를 훈족처럼 길게 늘이지 않고서는 착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84쪽

오늘날 유목민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경작을 가르치고 건초 사업을 권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유라시아 유목민이 겨울 식량으로 건초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초원은 한 번 벌초를 하면 다시 풀이 자랄 때까지 수년이 지나야 하고 그러는 사이에 벌판은 덤불이 무성해져 목초지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까닭이요, 다른 하나는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다. 100마리의 말을 방목하는데 1년 내내 한 사람이면 족하지만 100마리를 겨울 동안 먹이기 위해서는 건초가 24만 5천 7백 킬로그램이 필요하다. 차라리 풀이 있는 겨울 영지로 이동하는 것이 몇백 배 효율적인 것이다.-98쪽

수천 년의 역사를 동물과 함께 살아온 그들은 지금도 동물을 죽일 때에 자신이 갖출 예를 모두 보여줌으로써 동반자임을 확인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절대로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든가, 날이 어두워지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양을 잡아주지 않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날씨에 내 양을 먼 길 가게 만들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유목민들에게 이방인이 내미는 돈 뭉치는 참으로 부끄러운 문명의 부스러기일 뿐이다. -111쪽

당시 대륙의 심장부는 건조 지대가 아니었다. 타조나 코끼리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하고 비도 많이 내렸다. 우량이 풍부하여 초목이나 동물이 번식하고 그 전역은 원시림에 뒤덮인 습윤 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이 땅에다 수수를 심었다. 그리고 청동기에 이르기까지 번영을 지속한다. 그러나 빙하의 후퇴와 함께 북극 고기압이 수축해서 이 지대에 비를 몰아오던 온대서 저기압이 차츰 북방으로 이동을 개시한다. 그 결과 이상 건조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고비의 사막화 현상이었다. 지금도 고비 사막에는 그 건조화가 가져다 준 경악할 만한 재앙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운이 좋은 여행자들은 종종 모래 사막에 드러난 공룡의 뼈를 보게 된다. -123쪽

스키타이, 그들은 누구일까? 이 난감한 질문에 가장 먼저 손을 들 사람은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일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세 번째 왕인 그는 몸소 7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싸울 상대는 초원 위의 바람과 허공뿐이었다. 괴상하게 생긴 기마유목민들은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졌다. 다리우스가 가는 곳은 도시도 없었고, 건물도 없었으며, 아무런 전리품도 거둘 수 없었다. 단지 끝없이 펼쳐진 초원뿐이었다. 유령과의 싸움에서 대왕은 자신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스키타이의 남하가 멈춘 것 또한 사실이다.-134쪽

세상의 모든 강한 집단이 그러하듯이, 스키타이도 소멸되고 있었다. B.C4세기부터 그랬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조도 같은 운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에게 패했다. 그러나 스키타이는 알렉산더의 북방 정벌군을 겨고티시켰다. 스키타이를 멸망시킨 것은 세계의 패자 알렉산더가 아니라 같은 유목민 사르마트였다. 그들은 스키타이와 같은 이란계 북방 유목민이었다. 칼 대신 창을 사용하는 기마민족인 사르마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볼가강을 건너왔다. 원래 그들의 고향은 아랄해 북방이었다. 스키타이는 사르마트에 쫓겨 서쪽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38쪽

서쪽에 스키타이가 있었다면 동쪽에는 흉노가 있었다. 흉노는 투르크-몽골계였다. 그들은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9세기에 이미 험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후 서양에서는 야만인을 뜻하는 훈으로 불리웠다. 기원전 4세기 이전의 흉노는 중국 변방의 약탈자에 불과했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틈틈이 성을 쌓았다. -139쪽

흉노의 월지에 대한 공격은 그 파장이 대단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족 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월지는 감숙을 떠나 서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다시 이식쿨에서 오손에게 쫓겨나 또다시 서쪽으로 향했고, 파르가나의 시르다리아강 상류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박트리아 왕국의 국경이었다. 월지는 그곳에 살고 있던 '스키타이인' 사카족을 건드렸다. 사카족은 소그디아나를 침압하고 박트리아로 들어갔다. 월지는 옥서스의 북부에 있다가 박트리아에서 사카인을 몰아낸 뒤 1세기에 쿠산 왕조를 세웠다. 이처럼 흉노의 월지에 대한 공격은 아시아의 판도를 바꾸었다. 초원의 작은 진동이 끊임없는 파장을 일으키며 인도와 서아시아까지 간 것이다.-140쪽

흉노는 400년 간 존속한다. 그들의 해체는 내부분열 때문이었다. 또 한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손실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은 이를 어렵지 않게 보충했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 한은 흉노로부터 비단길의 지배권을 탈취하였다. 흉노 안에서는 선우의 자리를 놓고 호한야와 질지가 싸웠다. 기원전 43년, 한나라 선제의 도움을 받은 호한야가 승리했다. 호한야에게 쫓겨난 질지는 새로운 땅을 찾아 서쪽으로 향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흉노의 동서 분열이었다. -146쪽

유라시아 각지에서 일어나는 흉노나 훈 또는 후나는 과연 동일한 종족일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찬란한 흉노 제국의 이름을 도용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침략을 받은 피해자들이 무서운 흉노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았을 수도 있다. 자칭, 타칭, 참칭을 막론하고 여기서는 흉노가 당시 유라시아 세계에서 태풍의 눈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흉노의 흥기와 해체가 유라시아의 대변동을 가져왔고, 그 와중에서 한과 로마라는 동서의 고대 대제국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149쪽

여러 민족의 고대 장군들이나 일본의 사무라이 복장 등을 보면 치마처럼 밑이 터진 옷을 입고 있다. 그로부터 점점 바지를 입는 사람이 늘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유목민의 영향이었다.
유목민의 의복 중 주변 민족의 주목을 가장 크게 끈 것은 바지였다. 바지는 달아날 데 없는 기마족의 의복으로써, 말을 달리기에 편하며 추위도 막아준다.
상의는 허리까지 덮거나 아니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자켓이며 오른쪽으로 여민다.-156쪽

유목민이 생태계의 흐름에 순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정착문면의 사람들이 생태계의 명령을 더 이상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이고, 초원의 사람들은 사회주의 정부가 계몽정책을 쓰기 전까지는 대부분 문맹으로 살았던 까닭에 생태계의 인식에 대한 그들의 능력은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문화는 그 진가를 다 판독해내기 어려울 만큼 생태계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인식력을 반영하고 있다. -158쪽

유목민이 오랜 세월동안 쌓아 온 경험과 지혜가 집약돼 있는 것은 지금도 2천년 전의 것과 똑같은 형태로 남아 있는 그들의 집 '겔'이다. 겔의 가장 큰 특징은 계절에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분해 조립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창은 하늘을 향하는 천창인데, 그곳에 들어오는 햇빛으로 시각을 안다. -158쪽

계절마다 이동하는 장소의 범위를 영지(사람이 사는 장소)라고 한다.-160쪽

'경계'의 습성을 유목민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동물에게서 배운 것이다. 예컨대, 말에게 다가갈 때는 절대 뒤쪽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실수로 뒤에서 다가가면 말이 놀라서 차 버리기 때문이다. 말에 다가갈 때는 말의 시야에 잘 들어오도록 비스듬히 옆쪽에서 다가가 안심시켜야 한다. 동물의 삶은 언제나 사방팔방에서 기습해 오는 위험과 대결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것을 기겁을 하듯이 싫어한다.-165쪽

연평균 강우량이 140~320mm에 불과하고 가혹한 기후 조건을 지닌 몽골 고원에서 유목말고는 그 어떤 다른 유형의 경제 행위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가혹한 겨울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겨울 방목지의 확보이다. 눈이 쌓이지 않고 풀이 풍부하며 바람도 막을 수 있는 곳, 그러나 이러한 곳은 한정되어 있다. 역대 유목민족들간의 전쟁 원인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겨울 방목지의 확보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73쪽

칭기스칸은 공동체의 활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를 창안했다. 개인 약탈의 금지가 대표적인 예였다. 약탈은 당시의 유목민들로서는 생산 활동이었으므로, 개인적인 약탈은 개인 생산이었다. 그러니까 개인적 약탈을 금지시킨 것은 개인 생산을 공동 생산으로 바꾼 셈이다.-198쪽

몽골 치하의 항주는 크게 번영했던 남송 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몽골의 타격을 전혀 안 입었던 것이다. 실제로 몽골군은 항주에서 거의 약탈을 하지 않았다. 진주 과정에서 있었던 약간의 피는 오히려 남송의 병사들간에 발생한 충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항주성 일대에는 40만에 이르는 병력이 주둔해 있었는데, 남송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자 실직을 두려워한 일부 부대가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301쪽

칭기스칸을 이은 어거데이칸, 구유크칸, 멍케칸은 칭키스칸과 다름없는 유목군주였다. 그러나 쿠빌라이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의 정복지 관리시스템을 전면 수정했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창업자 칭기스칸과는 또다른 창업자였다. 쿠빌라이는 금나라와 남송을 몰아낸 중원 대륙에 원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몽골 제국 자체가 아니라 몽골 제국의 중앙 부대였다.
쿠빌라이칸은 몽골 제국을 한화시킨 첫 번째 인물이라는 점에서 할아버지 칭기스칸의 실망을 사기에 충분한 후예였다. 반대로 할아버지의 제국을 더 크게 완성시켰다는 점에서는 얼마든지 창찬받을 만했다. 칭기스칸이 뿌리이자 씨앗이었다면 어거데이칸과 멍케칸은 줄기였고, 쿠빌라이칸은 열매였다. -302쪽

쿠빌라이칸에 이르러서야 일칸국의 페르시아 정벌이 완료됐다. 킵차크칸국도 강력한 주권 국가로서 유럽을 향해 포효했다. 중원을 석권한 쿠빌라이는 베트남,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와 대만 오키나와 고려 등을 장악했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쿠빌라이칸 대에 사상 최대가 된다. 그런 그에게도 뼈아픈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형인 멍케칸이 사망하자 정식 코릴타를 열지 않고 중원 땅에서 기습적으로 대칸에 즉위해 버린 사실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는 쿠빌라이의 막내동생 아리크 버케가 주둔하고 있었다. 멍케칸의 친위대도 그의 휘하에 있었다.-304쪽

쿠빌라이칸과 아리크 버케칸은 형제 전쟁을 벌였다. 몽골판 남북 전쟁이었다. 결과는 쿠빌라이칸의 승리였다.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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