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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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짐에 대하여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 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리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리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20쪽

감자를 씻으며

흙 묻은 감자를 씻을 때는
하나하나씩 따로 씻지 않고 한꺼번에 다 같이 씻는다
물을 가득 채운 통 속에 감자를 전부 다 넣고
팔로 힘껏 저으면
감자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면서 흙이 씻겨 나간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도
흙 묻은 감자가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과 같다
나는 오늘도 물을 가득 채운 통 속에
내 죄의 감자를 한꺼번에 다 집어 넣고 씻는다
내 사랑에 묻어 있는 죄의 흙을 제대로 씻기 위해서는
죄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게 해야 한다
흙 묻은 감자처럼
서로의 죄에 묻은 흙을 깨끗하게 씻어주기 위해서는-46쪽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 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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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10-25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여자가 쓴 시들 같아요. 하나같이 맘에 와 닿아서요

마노아 2007-10-25 09:56   좋아요 0 | URL
시인의 감수성이 여자의 느낌이 닿아 있죠. 저도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
 
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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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146쪽

먹으로 쓴 거짓은 피로 쓴 진실을 감출 수 없다.

<루쉰의 꽃 없는 장미 2>-173쪽

한일회담에서 다카스기가 한 발언은 이렇다.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를 강제하고 창씨개명을 시킨 것은 모두 조선인들을 위한 호의에서 비롯된 일로,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20년 더 지배했더라면 조선도 좀더 괜찮은 나라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전쟁에 지는 바람에 우리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안타깝기 그지없다."-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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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2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더 편안한 책읽기가 가능한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노아님


마노아 2007-10-24 13:19   좋아요 0 | URL
당연히 동의합니다. 편안히 책보다가 저는 방금 졸았습니다. 커피 한 잔 마셨어요^^;;;
 
영혼의 시선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 에세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권오룡 옮김 / 열화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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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정(Ma passion)은 사진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피사체의 정서와 형태의 아름다움을 찰나의 순간에 기록하는 가능성,
다시 말해서 보이는 것이 일깨우는 기하학을 향한 것이다.
사진 촬영은 내 스케치북의 하나다.

1994.2.8-19쪽

사진과 드로잉 : 평행선
photographier et dessiner : Mise en parallele

나에게 사진은 순간과 순간의 영원성을 포착하는,
늘 세심하 ㄴ눈으로부터 오는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드로잉은 우리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섬세한 필적으로 구현해낸다.
사진은, 성찰을 드로잉하는 순간적인 행위이다.

1992.4.27-41쪽

1949년 해방군이 난징에 들어왔을 때, 나는 거기에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대장정이라는 거대한 서사시의 명성을 쌓게 한
이상이 아직 남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늘날 천안문 사태에서 학생들의 피로
체제의 경직성을 지키려 한 것은 현 중국군의 치욕이다.

1989-57쪽

게바라는 산업부 장관이라는 직함 이상의 인물이다.
체는 난폭하지만 현실주의적인 사람이다.
그의 눈은 빛난다.
그의 눈은 넋을 잃게 만들고 유혹하며 매력에 빠지게 만든다.
그는 설득력있는 사람이고 참으로 위대한 혁명가이지만, 결코 순교자는 아니다.
쿠바에서 혁명이 종식된다면,
체는 다른 데서 아주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리란 느낌을 받았다.

......
196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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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 고뇌의 레바논과 희망의 헤즈볼라, Pamphlet 002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07년 6월
절판


우리는 믿음으로 재건을 합니다. ...제가 시작하면 하나 둘 사람들이 와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재건을 포기하고 넋을 놓고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폭격한 자들이 바라는 것 아닙니까. 이게 저의 저항입니다. 저항하지 않는 것은 노예가 되는 길입니다.
-36쪽

우리는 기독교와 이슬람이지만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어 보입니까? 우리는 평화입니다. 한 배를 탄 동료입니다. // 나는 기독교지만 헤즈볼라를 지지합니다. 문제는 빈부차이와 부정부패입니다. 종교 갈등 운운하며 내전을 부추기는 세력은 따로 있죠. 미국과 이스라엘에 충성스런 부패정치가들 말입니다.
-50쪽

나는 못 배웠지만, 많은 고기를 잡아서 한꺼번에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내 힘으로 그물을 던져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하루 일을 마치고 가족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이 항구 아래에서 샤이를 마시고 나르길라를 피울 수 있는 행복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내 작은 평화를 박살 내 버렸습니다. 나는 지금껏 평화의 배를 띄우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살아왔는데, 이스라엘은 파괴의 배를 띄우고 미국은 폭탄의 그물을 던졌습니다.
-51쪽

나는 지금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양심의 편이 되어야죠.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늘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성공한 사람이라고 겉모습만 보고 인정하지 마라. 그가 무슨 배를 띄우는지를 지켜보아라. 평화의 배인지, 불화의 배인지. 그가 자기의 그물을 던져 무엇을 건지는지를 보아라. 사랑인지, 탐욕인지. 너는 공부해서 성공하고 싶거든 해라. 그러나 남에게 탐욕과 불화의 그물을 던지는 성공은 하지 마라. 성공하려거든 헤즈볼라처럼 해라.
-52쪽

결코 개인의 책임이 아닌 불행과 재앙을 개인의 심장 위에만 얹어두게 만드는 것은, 그 개인을 다시 한번 죽이는 일이다. 개인의 고통과 슬픔이 공동체의 고통과 슬픔으로 함께 나누어질 때, 죽은 자는 비로소 눈감을 수 있고 살아남은 자들은 절망의 상처를 감싸 안고 다시 조금씩 일어설 수 있다. 나눔은 곧 치유이기에...
-89쪽

이 지역은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권으로 서방에 우호적인 문화와 정서를 갖고 있다. 소득수준도 남부 레바논 주민의 몇 배가 된다. 마침 주변 교회에서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 잠깐 들러 보았다. 신부들의 입에서도 미사 집전 내내 전쟁이나 희생자에 대한 기도 한마디 흘러나오지 않는다. 양극화도 이런 양극화가 없다. 전쟁도 신앙도 문화도 인간성도... 쎌라비(C'est la vie!), 이런 게 인생일 수 있는가.
-99쪽

레바논은 작지만 너무 다양하고 너무 복잡한 나라다. 우리나라 경기도만한 면적에 400만 명의 인구가 산다. 현지의 인구는 적지만 해외로 나가 있는 사람이 약 1,600만에 달해 작은 나라라고만 할 수도 없다. 레바논 내 인구 구성도 단순하지 않다.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여러 종파와 기타 소수 종교를 포함해 17개의 종교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레바논은 지역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지중해 너머 아프리카가 교차하고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위치에 있어 역사적으로 늘 서로 넘나드는 관문 구실을 해 왔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와 인종과 문화가 만나고 독특하게 섞여 다채로운 빛을 발한다.
-102쪽

그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레바논은 늘 국제정치의 희생양이었다. 강대국들이 한 번씩은 레바논을 삼켰다가 토해 냈는데, 그 역사는 카이사르의 로마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부터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투르크가 몰락하면서 프랑스의 신탁통치 아래 들어갔고, 어렵게 독립을 얻어낸 것이 1943년이다. 독립을 했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10년이 멀다 하고 벌어지는 중동전쟁을 네 차례나 치러야 했고, 1975년부터 1990년까지 15년 동안 내전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 사이에도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 레바논의 역사는 실로 파란만장하다.
-102쪽

독특한 정치 역학 관계와 굴절된 현대사는 ‘종파지분제’라는 매우 기괴한 정치 체제를 낳았다. 레바논의 권력 구조는 기본적으로 내각제가 가미된 대통령 중심제다. 그러나 대통령은 기독교 종파에서,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에서,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에서 각각 차지한다. 주민이 직선하는 것은 국회의원뿐이다. 이것은 레바논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레바논을 계속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 미국과 서구가 강제하고 있는 기형적인 정치 구도다. 이런 권력 배분은 현실적 인구 구성이나 지지율과 전혀 무관하다.
-103쪽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정말이지 사려 깊고 정확하게 자신들이 폭격하고 싶은 대상만 신중하게 골라서 폭격한 듯이 보였다. 레바논 북부와 남부를 가려서 폭격하고, 기독교 마을과 무슬림 마을을 가려서 폭격하고, 부유층의 빌라와 가난한 사람의 집을 가려서 폭격했다. 레바논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무슬림 인민의 집과 마을만을 철저히 선별 폭격함으로써, 헤즈볼라의지지 기반을 무너뜨리고 주민과 헤즈볼라를 갈라놓자는 저의가 분명하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그 저의가 성취되고 나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레바논 국민 다수가 원하는 정부가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원하는 정부를 세워 헤즈볼라를 몰아내고 레바논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이전에, 레바논은 혼란과 내전의 불구덩이에 먼저 뜨겁게 휩싸여야만 할 것이다.
-105쪽

레바논 정부가 재건을 한다고요? 전쟁에 군인도 출동시키지 못하는 레바논 정부가요? 우리는 정부에 기대 같은 것 안 한 지 오래됐습니다. 상수도도 그래서 우리 손으로 직접 수리하는 겁니다. 이 파이프나 저기 전화 케이블 등의 재료도 모두 철물점을 하는 주민이 무료로 내놓은 것입니다. 적의 침략도 우리 손으로 막고 재건도 우리 손으로 합니다.
-110쪽

이스라엘은 나흘 동안 7번에 걸쳐 이 주유소를 폭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파괴하지만 우리는 건설합니다. 그들이 다시 폭격한다 해도 우리는 다시 재건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세 번, 네 번 폭격하면 우리는 네 번, 다섯 번 다시 지을 것입니다. 그들 파괴자보다 우리가 한 번 더 재건할 때 그것은 우리의 승리이자 인류의 승리입니다.
-112쪽

전쟁이 터지자마자 우리 마을 주민들은 바로 요 앞 UN군 캠프 안으로 피난을 들어가려고 찾아갔지요. 그런데 UN군이 우리를 거부했습니다. 다시 피난을 떠나다 길 위에서 폭격당해 죽은 겁니다. 우리는 UN과 세계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126쪽

우리의 땅은 값집니다. 하나뿐인 우리의 소중한 터전입니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이 마을은 이스라엘의 땅이 되고 맙니다. 주민 없는 점령지에는 곧바로 이스라엘의 정착촌이 들어섭니다. 바로 요 앞 국경 너머를 보십시오. 지금은 이스라엘 정착촌이 되어 버린 저곳도 이전에는 레바논 주민이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도발과 총질에 못 이겨 마을 주민들이 떠나고 나면 이스라엘은 그것을 삼킵니다. 그런 식으로 야금야금 땅을 먹어 들어와 국경선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것입니다. ......점령지의 공포 속에 살아 견디는 게 힘든 일이지만 내 나라 내 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127쪽

위대한 저항은 총을 든 용기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땅에서 꼼작 없는 고립과 공포를 견디며 살아내는 사람들, 척박한 비탈의 올리브 나무처럼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사람들, 마르와인 주민과 아이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위대한 평화의 저항자였다.
-128쪽

헤즈볼라는 무장저항단체, 심지어 무장테러조직으로까지 알려져 있지만, 레바논 현장에서 본 헤즈볼라는 평시에는 이웃집 아저씨, 삼촌, 이장님, 공무원, 의사, 학교 선생님이었다. 무엇보다도 자발적으로 주민들의 어려운 일과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자원봉사자였다. 그들이 총을 든 전사가 되는 것은 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뿐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상시 무장 군사조직으로서의 헤즈볼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평상시 다정한 우리 이웃이 적의 침공에 맞서 헤즈볼라 전사가 되고, 헤즈볼라 전사는 주민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 순교자가 되고, 순교자는 마을과 광장과 생활 속에서 늘 함께 살아있는 큰 바위 얼굴이 된다.
-140쪽

"너에게 평화는 뭐지?"
"평화요? 서로 진심으로 인사를 나누는 거죠. 그러면 앗살람(평화)이 커져 가죠. 이스라엘은 생각을 해야 해요.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해주기 바라요. 사람, 생명, 자유, 평화에 대해서요. 이번에 헤즈볼라 전사들이 그들을 패배시켰기에 정말 생각을 좀 해서 평화의 길을 갔으면 좋겠어요."
-144쪽

"무함마드, 넌 뭐가 제일 갖고 싶니?"
"평화요!" 뜻밖의 대답이다. 나는 축구화나 컴퓨터나 자전거 같은 것을 예상했는데.
"평화는 사랑, 믿음, 그리고 협력이에요. 돈만 많이 있고 사랑이 없다면 평화가 아니잖아요. 성공해도 믿음이 없으면 열매 없는 올리브나무예요. 많이 배우고 똑똑한데 협력을 못하면 행복이 없지요."
-146쪽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이라는 것, TV와 신문을 통해 접하는 전쟁의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나 선별된 것인가. 카메라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진실은 얼마나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인가. 알려진 고통은 알려지지 않은 고통의 총체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얇은 것인가. 알려진 부분적 사실조차 시간이 흐르면 몇 줄 지식으로서의 역사로 박제되고 말 것인가. 기록된 역사는 기록되지 못한 삶의 고통과 진실의 총체에 비한다면, 책갈피에 끼워진 마른 풀잎 한 장만큼 미미한 것이리라. 어쩌면 역사의 더 많은 진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책 바깥에 소리 없이 묻혀 있는 것들이 아닐까. ...... 더구나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신이 우주였던 젊은 전사자들과 희생자들은...
-154쪽

우리 집도 친척 집들도 모두 무너졌지만, 헤즈볼라 때문이 아닙니다. 헤즈볼라는 마을 건물에 숨어서 전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의 집이 파괴될까봐 그들은 몸을 숨길 곳도 없는 저 언덕 너머 광야 쪽으로 나가 전투를 했습니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불리한 지형을 택해 자신을 노출시키며 이스라엘군을 유인해 싸우다 전사한 것입니다. 여기l 묻혀 있는 바로 이들이 이스라엘 탱크의 발을 묶고 지상군의 진격을 가로막아 우리 라베논을 구한 거지요.
-157쪽

이스라엘군이 패각한 뒤 피신했던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지요. 주민들이 무너진 집을 정리하다 부엌에 놓여있는 쪽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전투 중에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물과 빵을 허락 없이 먹었습니다. 제가 전사하면 이 쪽지를 들고 헤즈볼라를 찾아가면 보상해 줄 것입니다. 살람 알에이 쿰!’ 주민들은 급히 휘갈겨 쓴 그 쪽지 한 장을 돌려보며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어요.
-158쪽

백향목은 진한 향기가 나고 벌레가 먹지 않기 때문에 예로부터 성전과 왕궁의 재목으로 쓰였다. 이스라엘의 군주 솔로몬이 자신의 왕궁을 짓고자 이 나무를 사갔으며, 이집트의 파라오들 역시 저세상으로 갈 때 타고 갈 배를 이 나무로 만들었다. 수천 년이 지났어도 백향목으로 만든 그것들은 여전히 정정하기만 하다. 살아서 2천 년, 죽어서 3천 년! 그리하여 이 신령한 백향목은 레바논 국기 한가운데 푸르게 박혀 레바논인의 강인한 정신과 불굴의 평화 의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174쪽

헤즈볼라는 주요 전투와 작전에 반드시 카메라맨과 사진작가 등 취재진을 대동시킨다. 그 많은 특종성 필름과 증거자료들이 모두 그렇게 해서 치밀하게 축적된 것들이다. 생사를 건 위험한 현장에서 전투를 하는 전사는 비록 세 명에 불과할지라도 카메라 렌즈를 통해 수백만 레바논 국민과 수천만 아랍권 시청자들의 눈동자와 함께하게 된다. 그래서 설령 자신이 그 자리에서 죽을지라도 부모 형제와 이웃이, 그리고 전 세계의 무슬림과 평화의 벗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며, 자신의 진실과 정의로운 희생은 그대로 기록되고 전해질 것이라는 위안과 믿음을 갖는다.
-187쪽

이런 알 마나르 TV의 활약은 헤즈볼라가 얼마나 민심을 중요시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작전을 성공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민심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헤즈볼라는 투쟁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민중의 눈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운동과 조직은 자기들 내부의 시야에 갇히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이념과 희망사항으로만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 인민과 함께 호흡하는 법을 잃어버리고 변화하는 세상과 소통하는 감성과 의식이 닫히게 된다.
-188쪽

그가 헤즈볼라다

말을 신성하게 하는 자
가난한 약자와 함께하는 자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자
적에게도 약속을 지키는 자
살아서 즐겁고 죽어서 빛나는 자
자신의 피로 평화를 심어 가는 자
하느님 이외에는 결코 무릎 꿇지 않는 자
바로 그 자신이다
바로 그 자신이다
-189쪽

샤이르 박은 제가 모르는 테러 증거나 우리가 체크하지 못한 민간인에 대한 파괴와 공격 보도를 접한 적이 있는짖요? 혹시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조작 보도 잘하는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조차 90년대 이후 헤즈볼라가 테러를 했다는 증거를 단 한 건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부의 구성에 참여하는, 그리고 레바논 국민의 7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합법 정당조직이자 최대의 사회복지 단체입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의 불법적인 침략에 대해서만 무력으로 맞설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196쪽

"레바논 민중의 헤즈볼라지지 열기에 놀랐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 무엇으로 그런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헤즈볼라의 일관돤 정직성과 자기희생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단 한 번도 민중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는 항상 뒤가 아니라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희생은 지도부가, 평화는 민중에게, 헤즈볼라는 적에게 한 말과 약속도 꼭 지켜왔습니다. 그리하여 적들조차 헤즈볼라의 말은 신뢰합니다."
-197쪽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돈도 아닙니다. 무기도 아닙니다. 권력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가진 말입니다. 성서에 나온 것처럼 태초에 말이 있었습니다. 말은 하느님의 일이고 성스러운 것이기에 꼭 존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깨끗하지 못하게 말하는 것은 추한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늘이 보는 것은 옷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고 돈도 아닙니다. 그의 말입니다. 깨끗한 말은 자신의 눈물과 희생의 피로만 빛납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왜 말을 난폭하고 추하게 하는지요. 헤즈볼라의 말 중 폭력적이고 추한 말을 찾아보십시오. 지키지 못한 허장성세나 거짓말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래서 레바논 민중은 물론 적들마저 헤즈볼라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헤즈볼라의 말은 곧 믿음이고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198쪽

사람이 두 신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굶주리는 사회에서도 인간성을 찾기 어렵지만 돈이 신으로 군림하는 풍요 사회도 인간성이 죽은 사회입니다. 우리는 세계화를 지지합니다. 진정한 세계화는 미국 중심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도 존중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199쪽

헤즈볼라 깃발의 칼과 총은 저항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지구의와 올리브 가지는 인류의 평화를 염원합니다. 또한 한 손에 있는 꾸란과 책은 우리 이슬람의 고유한 정신과 함께 문화다양성을 상징합니다.
-201쪽

밖의 적과 싸우는 ‘소 지하드’는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억압당하면 저항하는 것이 순리니까요. 하지만 인간 자신의 본성 안에 도사린 이기적 욕망을 스스로 이겨내고 자기 안의 신성을 빛나게 하는 투쟁인 ‘대 지하드’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우리는 적과 투쟁을 잘한다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이겨낸 힘으로 밖의 불의와 폭력을 물리치는 대 지하드가 진정한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소 지하드를 끝내고 돌아온 그대를 환영하노라. 이제 그대를 기다리는 것은 대 지하드이니라.’ 대 지하드를 수행하는 자, 그가 진정한 헤즈볼라입니다.
-202쪽

쿠리아의 젊은이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쿠리아도 레바논도 강대국의 식민지 억압을 경험했습니다. 강대국으로부터 우리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지켜내고 정치경제적 독립이 없이는 삶의 맛이 없습니다. 꽃은 일 년을 살지만 꽃이 피는 시기는 한 달입니다. 먹고사는 것은 누구나 인생을 다 써가며 한평생 합니다. 젊음이라는 너무도 소중하고 짧은 꽃의 기회를 소중하게 써야합니다. 자기 가슴 안의 선과 정의는 젊을 때 꽃피우지 않으면 영영 피어날 기회가 없습니다.
-206쪽

헤즈볼라의 가치경영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레바논 주민들에게 새로운 재미와 유익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금을 다시 일자리 창출과 빈민 복지에 투입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수도 베이루트의 버려지다시피 한 큰 땅을 싼 값에 사들여 멋진 건축물을 지어 황금의 땅으로 만드는 ‘부동산 투자’ 수완도 대단하다. ...... 헤즈볼라가 경영하는 회사들로 높은 수익률과 함께 존경받는 기업으로 확고한 시장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 각 정파와 경쟁하면서도 반이스라엘 전선에는 이슬람 수니파, 드루즈파는 물론 기독교 조직과도 연대하는 폭넓은 정치력도 보이고 있다. 20만 명 이상의 기간 당원을 가진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정당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대중정당이기도 하다.
-209쪽

내가 몇 년 전에 중풍이 들어서 불편한 몸이라 피난을 떠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아마 나를 들어서 장애인과 노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택시비가 없어서 피난을 가지 못했다는 식으로 얘기한 모양입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피난 가겠다는데 그까짓 택시비를 못 도와준단 말입니까? 레바논 어디에도 이웃을 그렇게 버려두고 갈 만큼 몰인정한 마을은 없습니다. 저희는 일부러 가지 않은 것입니다. ... 낯선 피난길에서 죽으면 누가 나를 알아보고 내 시신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생사를 확인 못한 친지와 마을 사람들은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죽으면 적어도 누가 죽었는지 알아볼 수나 있을 것 아닙니까?
-236쪽

사람은 그가 바라보는 대로 되어간다. 그의 관심사가 곧 그의 미래에 다름 아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다. 자기 가족, 자기 나라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남에 대한 관심은 배워야만 한다. 국경 너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관심은 애써 배워야만 한다.
자신 안에만 갇힌 관심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소망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자기 자신만으로 가득한 곳에는 ㅇ도 선도 아름다움도 자라날 자리가 없고, 결국 진정한 자신마저 자기 안에 발 디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국경 너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관심은 진정한 나 자신에게로 가는 더 넓은 길이기도 하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얼마나 관심을 보이는가가 그의 인간성의 무게이고 국경 너머 인류의 아픔과 슬픔을 얼마나 공유하는가가 지구시대 지성의 깊이이고 인간의 품격일 것이다.
-284쪽

한 사람의 성숙한 인간성의 잣대는 ‘얼마나 나 아닌 남이 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많은 남이 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세계화 시대의 성숙한 인간성은 국경 너머에서 실현된다. 인간성에는 국경이 없고, 정의에는 국적이 없다. 국경과 인종과 종교와 이념을 넘어 인간성과 정의가 유린되고 아이들이 학살당하는 그곳이 바로 나의 인간성이 떨고 서 있는 자리이기에.
-286쪽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국익 논리’와 ‘물신주의’가 유일종교로 휩쓸면서 강자 추종이 현실로 승인되고 침묵의 동조가 삶의 지혜인 양 당연시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살지만 양심과 정의를 저버린 이익 추구가 결국 손실이 되어 돌아오듯, 불의 앞에 침묵하고 인간성을 저버린 국익추구는 결국 국제적 고립과 보복이라는 치명적 손실로 귀결될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때로 손해를 감수하며 양심과 원칙을 지킨 사람이 긴 안목에서 더 큰 인생의 성취를 이루게 되듯, 한 나라도 인류의 공동선과 정의의 길을 걸어갈 때 진정한 국익과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이다.
-287쪽

미성숙은 필연적으로 오만한 우월감과 특권의 선민의식을 불러오고, 그로 인한 갈등과 배타심의 증폭은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더 큰 성벽과 무장을 필요로 하기에 끝없는 돈과 권력의 추구로 내몰려 간다. 불안과 공포는 그의 지성과 영혼을 마비시켜 세계를 나와 남, 선과 악으로 이분시켜 자신의 욕망과 입장을 ‘선의 축’으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가 딛고 선 존재의 기본적인 정당성의 결여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이스라엘의 저 안하무인의 침공과 학살 행위의 내면에는 오만과 공포가 악령처럼 들어앉아 있고, 그것은 유대인 대학살 때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다는 기억, 기독교의 하느님도, 이슬람의 알라도, 선진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도 지성도 인권도, 이 지상의 그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다는 쓰라린 배반의 체험에 기반하고 있으리라.
-288쪽

유대인 대학살의 참극을 겪은 이스라엘과 9.11 사태를 겪은 미국은 자신들의 풍요와 번영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딛고 선 존재의 부당성 때문에 함께 레바논 침공에 나섰으리라. 미성숙과 공포의 노예가 되어 무기로 이룩한 번영은 인간성의 상실에서 피어나는 악의 꽃이고 불행의 싹일 뿐이다. 정당한 불편과 적절한 결핍과 필요한 구속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자의 탐욕의 논예가 되어 제국의 환상을 추종하며 금빛 갑옷을 입고 있지만, 그러나 그 안쪽, 자기 영혼의 검은 구멍에서 철철 흐르는 피로 인해 결국 자신을 불행의 길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288쪽

이스라엘은 이번 레바논 ‘침공’을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전쟁이란 동등한 정치 집단 간에 어느 정도 대등한 무력의 충돌에만 사용되는 군사용어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이스라엘이 전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국가도 정부도 아닌, 이스라엘 스스로 ‘일개 무장 테러단체’에 불과하다고 낙인찍어 온 헤즈볼라였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35명의 국회의원과 2명의 장관을 가진 엄연한 합법정당인 헤즈볼라를 ‘무장 테러단체’로 단정해 왔고, 미국은 테러조직으로 지목해 왔다. 그러나 막상 레바논을 침공하면서는 헤즈볼라를 레바논 국가의 정부인 양 격상시키면서 자신의 불의한 침공을 전쟁으로 정당화하려는 자가당착을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정치조직 하나를 붕괴시키기 위해 무력으로 국경을 넘은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불의한 침략이었다.
-289쪽

헤즈볼라와 레바논 인민이 일관되게 요구해 온 것들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것들이다. 첫째, 이스라엘은 레바논 영토 내의 불법 점령지에서 물러갈 것. 둘째, 이스라엘에 수감된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을 석방할 것. 셋째, 이스라엘이 레바논 영토 국경지대 전역에 심어놓은 40여만 개에 달하는 지뢰 지도를 넘길 것. 넷째, 미국과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내정에 개입하거나 내전을 부추기지 말 것. 이렇게 정당하다 못해 소박하기까지 한 이 요구사항들은 지금도 여전히 요구사항인 채로 남아 있다.
-290쪽

그러나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데는 다른 본질적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침공의 명분은 사실 표면적일 뿐ㄴ이고, 그토록 무모한 침공을 도발한 숨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레바논 영토 내 점령지에 분리장벽을 설치해 자신들의 영토로 고착시키고 레바논 남부의 청정 수자원을 손에 넣겠다는 계산과 함께, 무엇보다 ‘BTC송유관’의 통과 경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91쪽

풍부한 석유 매장량 때문에 ‘제2의 중동’으로 불리는 카스피해 유전에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그루지야의 트빌리시-터키의 세이한을 거쳐 지중해로 이어지는 BTC송유관 건설이 미국의 주도로 발의되어 최근 건설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송유관의 연장 건설을 터키와 합의해 놓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BTC송유관이 이스라엘까지 이어지자면 시리아와 레바논 영토를 거쳐야만 한다. 이 일을 입맛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레바논 정부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는 것이 선결 과제다. 한편 중동과 카스피해의 석유 자원 전체의 지배를 꾀하는 미국은 양대 유전지대를 끼고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이란을 통제해야 한다. 미국이 이란 핵무기 제재를 내세우며 이란 침공의 명분 쌓기에 집착하는 이유이다.
-291쪽

그러나 이란과 연대 관계에 있는 헤즈볼라가 건재해 있는 한 미국으로서도 이란을 넘보기 어렵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이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대리자로 이 걸림돌을 빼기 위해 나서게 되었고, 이것이 이번 레바논 침공의 본질적 배경이라는 게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왜 그렇게 미국이 국제여론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스라엘을 두둔하고 막대한 달러와 첨단무기를 제공하고, 휴전에 반대하며 시간을 끌었는지 명확해진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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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절판


유대의 가르침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그 아기를 찾아간다는구나. 그리고 그 아기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다 알려주시고는, 손가락으로 아기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쉬"하고 말씀하신단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기와 비밀을 간직하자는 약속을 하는 거야. 네 얼굴을 보면 코 바로 아래 부분, 윗입술 위에 움푹 들어간 자리가 있지? 인중이라 부르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지문이 남아있는 자리, 하나님과 네가 한 비밀 약속의 흔적이다.
-27쪽

샘,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명심해라. 네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34쪽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노여움이 치미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없으면 내가 살 수 없다고 느끼는 관계라면, 그들은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가 아니다.
-41쪽

"상처가 아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몸속에 다 있습니다. 필요한 영양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스스로 알아서 상처를 치유하죠."
의사의 말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몸의 상처가 그렇게 치유된다면,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되는 것일까? 아기들이 태어날 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옛 예언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도 우리 안에 다 있을 것이다.
-55쪽

한 소년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끙끙대고 있는데, 선생님이 탐스런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다가와 말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이 빨간 사과 한 개에 다 담겨 있단다. 갖고 싶지 않니?"
소년은 벌떡 일어나 사과를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쳤다. 그러나 손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펄쩍 뛰었다. 하지만 키 큰 선생님이 들고 있는 사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높이 뛰었다. 뛰고, 뛰고, 또 뛰고...... 그러나 매번 빈손ㄴ이었다.
미친 듯이 뛰던 소년은 녹초가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는 움켜쥔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벌려 앞으로 내밀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들고 있던 사과를 소년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뜨렸다.
-82-83쪽

누군가 빨리 와서 날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때로 그것은 곧바로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이 아닐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고 싸움을 멈추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99쪽

정신건강을 연구하는 많은 전문가들에 따르면, 인간이 느끼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이 부끄러움이다. 그들 말이 맞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어 있다. ‘경명’을 당했다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폭력이 발생한다. 하지만 경멸이 진정한 원인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시선이나 말, 혹은 행동에서 스스로가 느낀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하는 게 오히려 맞을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창피한 부분을 드러내면, 스스로 따돌림을 받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103쪽

샘,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감추고 싶은 부분이 드러나면 수치심을 느끼는 것처럼, 감추고 싶은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수치심을 치유할 수가 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마음의 자유는 그럴 때 얻게 되는 것이다.

-104쪽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역사라고 해서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용기를 갖고 맞선다면
그런 역사는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116쪽

샘, 네가 갖고 있는 문제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너와 내가 아무리 ‘원해도’ 네가 느끼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으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다. 하지만 네가 네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 깨닫게 될 것이다. 네가 상상했던 것보다 네 그릇이 훨씬 더 크고 멋있다는 것을.
-131쪽

난 어머니가 나선 것이 만족스러웠다. 나를 위해 싸워서가 아니라, 날 믿고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게 뿌듯했다. 어머니는 내가 도움을 요청한 후에 도움을 주었다. 당신 혼자 알아서 판단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 싸우되, 그것을 당신의 싸움으로 번지게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아들을 믿고 이해하는 차원이었다.
-154쪽

샘, 네가 엄마 아빠를 생각해주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가족이 서로를 보살펴주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도 흔치 않다. 하지만 부모의 짐을 네가 대신 짊어지는 것은 좋지 않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가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면, 그러니까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자기 몫의 삶을 누리지 못하면, 그건 자기 영혼을 저당잡히는 것과 같다. 부모가 자기 영혼을 저당잡히면 그 이자는 고스란히 자녀들이 갚아야 할 빚이 되고 만다.

-156쪽

샘, 부모는 언제나 부모일 수밖에 없고, 자식은 언제나 부모의 인생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자식과 부모는 서로 보살펴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보살피는 방법은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워드리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가 스스로를 잘 보살피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그 아이들도 자기 미래를 행복하게 내다본다.
-160쪽

랍비인 내 친구가 알려준 것인데, 성경에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번역된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여행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행이기도 했던 것이다.

-163쪽

벼랑으로

"벼랑으로 오렴!"안돼요...... 무서워요."
"벼랑으로 오라니까!"
"안돼요...... 떨어지잖아요."
"벼랑으로 와!"
마침내 벼랑으로 가니, 그가 나를 밀었네.
나는 날아올랐네.
-166쪽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기쁨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아라. 혼자 알아내는 것보다 함께 발견하는 기쁨이 훨씬 큰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알고 이해하면서,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키는 존재를 넘어,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지키는 존재가 될 수 있다.
-171쪽

네가 자폐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자폐증이 곧 너는 아니다.
-193쪽

우리에게 붙여진 ‘꼬리표’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한테 말조차 걸지 않거나 우리를 믿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나는 척추손상으로, 넌 자폐증으로 단지 남들과 모습이 다르고 행동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노마가 내게 가르쳐준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 샘, 우리 이렇게 말하자.
"할아버지는 몸에, 저는 마음에 사고를 당했어요. 하지만 우리 영혼이 다친 건 아니에요."

-193쪽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누군가와 친밀한 시간을 보내며 그 사람의 이야기에 누구보다 더 귀기울여 들어주었을 때, 그로 인해 어떤 사람이 이전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 하루는 의미 있는 하루다. 그럴 때 나의 하루가 생산적이었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 하루를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게 된다.
-199쪽

모든 아픔은 과거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전에 무엇을 가지고 있었든, 예전에 어떤 존재였든 관계없이 말이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고통을 낳는다. 사람들은 고통이 빨리 사라지지 않으면 스스로를 탓한다. 고통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자신이 강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또 자기가 애초에 너무 나약했기 때문이라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는 게 아니다. 상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 상처는 그 자체의 방식으로,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지나야 아무는 것이다.
-209쪽

네가 입은 상처가 아무리 깊더라도, 그 상처가 아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네 안에’ 있다.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고통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보살펴주면 된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212쪽

네 이력서가 성공의 잣대가 된다 하더라도, 네 영혼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걸 항상 기억하기 바란다. 부나 명예가 아니라 누군가를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이 사랑하는 성인으로서의 책임 말이다.
샘, 사랑하거라, 어제보다 조금 더!

-224쪽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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