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세로 세계사 3 : 중동 - 화려한 이슬람 세계를 찾아서 가로세로 세계사 3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07년 3월
구판절판


이슬람은 현대 유럽문명의 어머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야. 십자군 전쟁을 치루면서 기독교도들은 훨씬 앞서 있던 이슬람 문명을 배워 유럽에 전했고 이로써 유럽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접어들게 되지. 이슬람문화의 가장 큰 공로는 예술, 철학, 자연과학 등의 보존이었어.
서양 자연과학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도 아랍인들의 기록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망각의 세계에 묻혀버렸을 거야.
또 아랍인들이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서지도 못했겠지.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머릿속으로만 우주를 다루던 데 비해 아랍인들은 모든 것을 실험, 실습을 통한 증거에 바탕을 두고 연구했어. 그들의 과학적 방법은 현대과학의 기틀이 되었단다.
그들은 상업과 공업, 건축에 뛰어났고, 수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겨서 기하, 대수, 삼각함수 등을 이미 사용해 현대수학의 기초를 이뤘어. 특히 복잡하고 불편한 로마의 숫자에 비해 아라비아 숫자는 대단히 간편하고 분명했지.
MCCXXXIII=1233
수많은 별들의 이름이 아랍어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야. 또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지배했기에 지리와 측량에서 뛰어난 정확성을 자랑했지. 그러나 무엇보다 이슬람세계가 단연 앞선 분야는 의학이었어. 유럽인들이 병을 악마의 장난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려 기도와 주술에 의존하고 있을 때 이슬람의 의사들은 이미 과학적인 치료제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세계를 휩쓴 흑사병이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유럽이 깊은 종교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을 때 이슬람 세계는 앞선 문명을 이루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고 그 문명의 빛은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갔지.

-82-84쪽

이슬람교는 알리 문제로 크게 두 파로 나뉘어 혈통과 정통성을 앞세워 알리가 칼리프가 돼야 한다는 무리와 알리가 아니더라도 무함마드의 언행을 따르는 훌륭한 인물이면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무리로 엄격하고 극단적인 알리 지지파를 시아파(이란), 보편성을 중요시하는 무리를 수니파(75% 이상 무슬림)라 하여 수니파와 시아파는 지금까지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는 거야.-93쪽

알리의 죽음은 이슬람교의 한 시대가 막을 내 리는 것이었어.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이 네 명의 칼리프들은 모두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가족들로 최초의 무슬림들이며 무함마드를 통해 신의 계시를 직접 듣고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며, 그의 언행을 본받은 최초이자 최후의 정통 무슬림으로 이 네 명의 후계자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해(632-661)-94쪽

옴미아드 왕가의 상징은 흰색 깃발이었어. 그런데 이란 북동쪽 호라산에서 일어난 아바스 가문이 검은 깃발을 내세우며 749년 허약해진 옴미아드 왕조를 공격해 쓰러뜨리지.
750년 아바스의 흑색군단은 옴미아드 일족을 모조리 색출해 살해했고 옴미아드 왕조는 채 90년도 안 되어 멸망해 아바스 왕조가 탄생한 거야.
모조리 살해당한 옴미아드 가문에서 단 한 사람의 왕자가 생명을 건져 도망쳤는데 그가 바로 아브드 알라흐만이었어. 그는 스페인 땅으로 피신하는데 성공. 이슬람 군대를 규합해 스페인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는데 756년 수도 코르도바를 정복하고 전 스페인의 통치자가 되어 後 옴미아드 왕조를 열고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란 칭호에 대항해 스스로 '에미르'라 칭하니, 드디어 동 칼리프, 서 에미르 시대의 막이 열렸던 거야.-99-100쪽

이슬람 세계가 아바스 왕조의 등장과 함께 둘로 나뉘어 동쪽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와 서쪽 아프리카와 스페인에 세워진 후옴미아드 왕조의 에미르는 대립하고 반목했어도 집안끼리의 원한 때문이지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어.(우리는 수니파!)
그런데 이 두 왕조 사이의 북부 아프리카 이집트 지방에서 알리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한 세력이 등장했으니 이들이 바로 시아파가 세운 파티마 왕조였지.-105쪽

재미있는 사실은 십자군전쟁이 유럽에서만 큰 사건이었다는 거야. 이슬람의 역사나 아랍의 역사에선 아주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당시의 서유럽은 이슬람세계에 비해 극히 뒤떨어진 후진세계였고 동로마제국보다 의미가 작은 야만적인 변방에 지나지 않았거든. 그래서 이슬람 역사에선 십자군 전쟁을 셀주크튀르크와 기독교도들의 싸움으로 작게 취급해. 그러나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방에서 '가져온'(뺏어 온, 또는 훔쳐 온...;;;;)문화와 기록으로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로 접어드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돼.

우리가 배운 역사에는 십자군전쟁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건 서유럽 중심으로 본 세계사이기 때문이지. -117쪽

인도 북부는 일찍이 이슬람세력이 뻗어오긴 했으나 몽골계 티무르제국에 속했다가 1405년 티무르가 죽은 뒤 그 자손들에 의해 여러 지역으로 갈라졌지. 거의 100년이 지난 뒤인 1496년 티무르의 손자를 자칭하는 바부르가 강력한 정복자로 떠오르는데,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힌두교도 연합군을 무찌르고 인도 땅에 이슬람제국을 건설하니 이것이 바로 19세기 중엽까지 북부 인도를 지배했던 무굴제국이야. 그의 손자가 악바르. 무굴제국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지.

악바르의 손자는 샤자한. 예술을 사랑하고 문화를 꽃피운 명군이지만 1631년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자 끝내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어. 샤자한은 아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아름다운 묘지 건설을 명령했지. 뭄타즈 마할은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 묘지가 남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자 인도 이슬람 건축의 최고봉이라는 타지마할이야. -136-139쪽

샤자한의 두 왕자 다라시코와 아우랑제브는 왕위 계승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말아. 1658년 동생 아우랑제브가 승리하자 아버지인 샤자한을 체포해 가두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 르지. 아버지 샤자한은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뒀고, 형 다라시코도 끝까지 추격해 죽이고 말았어. 아우랑제브는 인도를 엄격한 이슬람법 지배체제 아래 두고 비이슬람교도들을 법으로 혹독하게 다스렸으며 음악을 금지시켰고 모든 역사 기록을 금지시켰지. 이때부터 무굴제국은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 1738년 멸망하고 말았어.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이슬람제국은 멸망했으나 인도인 무슬림은 인도 전 지역에 퍼져 힌두교도와 대립하게 됐어. 수억의 신을 지닌 대표적 다신교인 힌드교와 오직 하나의 신을 믿는 엄격한 유일신교인 이슬람교의 대립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가 독립하면서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수천만 명씩 고향을 떠나 민족대이동을 한 끝에 동 서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되면서 끝나. 오늘날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이 되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가 됐지. -139-141쪽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디아스포라(분산)됐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고향 잃고 쫓겨 온 이들을 반겨주지 않았어. 특히 기독교 세계가 이들을 천시하고 박대하여 이들이 자기네 터전에 뿌리내리고 살지 못하도록 절대 토지를 가질 수 없게 했고 직업도 못 갖게 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한 거야. 자연히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이 기피하는 돈놀이, 즉 금융업을 주업으로 하게 됐고 금융업으로 돈을 번 유대인들이 늘어나면서 기독교도들의 미움은 더욱 커졌어. 유대인은 돈을 '상품'으로 본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최초의 민족으로 오늘날의 세계, 특히 초강대국 미국의 금융계,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는 실력자들이지. -173쪽

영국 총리로 전쟁을 이끌던 처칠이 강력한 시오니즘의 지지자였고 유대인 지도자 차임 바이츠만에게 유대인 구 ㄱ가 건설 지원을 약속한 바 있었거든. 그러나 전후 1945년 7월, 영국의 총선거에서 처칠의 보수당이 패하고 애틀리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내각이 출범하면서 시오니즘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입장이 크게 달라졌어. 독립국이 된 아랍국가의 수가 많은 데다 석유의 힘이 막강했던 만큼 중동에서의 영국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외무장관 베빈이 아랍을 지지하며 유대인 국가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거야.

그러나 유대인 국가 건설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돼. 1945년 4월 12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이 바로 그였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세계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합중국의 대통령. 그의 영향력은 영국 외무장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강한 것이었어.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은 유대인 피난민에 대한 긴급 구호를 역설했어. 영국을 대신해 이제 유대인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된 거야. 이때부터 미국은 전 아랍세계와 적이 됐던 거지. -182-184쪽

UN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무런 문제 해결 없이 물러날 경우 유대인과 아랍국가들의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1947년 4월 2일,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내놓았어. 팔레스타인을 3지역으로 나누어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를 세우되 예루살렘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국제 지역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1948년 5월 영국 철수 이전에 평화적 분할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였어. 유대인들은 당연히 대환영이었지. 그러나 아랍권은 결사반대했어. 영국과 미국 국무부도 반대했지만 미국의 경쟁자 옛 소련이 이 안에 찬성하자 미국 트루먼 대통령도 지지했어. 유대국가 건설에 미, 소 두 나라가 지지하자 아랍국가들은 긴장하여 아랍국가들의 동맹체 아랍연맹은 급격하게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했지.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1947년 11월 29일 UN에서 가결됐어. -186-188쪽

1948년 5월 14일, 영국 국기가 내려가자 즉시 뒤를 이어 이스라엘 국기가 게양되고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지. 이로써 2,000년 만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탄생했고 미국의 국무장관 마셜은 석유와 아랍세계와의 외교관계를 우려해 이스라엘 인정을 반대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즉각 주권국가로 인정했고 소련과 영국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전쟁이었다.-190쪽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그 날, 이집트 전투기들이 즉각 텔아비브를 폭격하고 전 아랍은 전쟁 물자와 군대를 동원해 전시체제에 돌입했어. 이 전쟁이 '이스라엘 독립전쟁', 또는 제1차 중동전쟁이야.(1948.5.16-1949.2.24)

총 인구 1억 4천만 명에 달하는 5개 아랍국이 연합하여 고립된 65만 명의 유대인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고 영국식 교육을 받은 아랍 정규군에 비해 유대인은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어. 처절한 전투가 20일 넘게 계속됐지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텔아비브를 끝내 지켜냈고 전 세계는 크게 경악했어.

1948년 6월 11일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상이 시작됐지. 잠시 휴전이 되자 이스라엘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무기와 군수품이 대거 유입. 이스라엘군은 단시간 내에 강력한 현대적인 전투 군대로 변모했어. 평화협상이 타결되기도 전에 선수를 쳐 카이로, 다마스쿠스, 암만(요르단 수도)을 폭격하고 육군은 탱크를 앞세워 아랍 영토를 정복해나가자 아랍권은 물론 전 세계가 크게 당황했고 7월 18일 두 번째 평화 협상이 영국의 주재로 다시 시작됐어. 1949년 2월 이집트에서 평화조약이 조인된 후 이스라엘은 세계 각국의 인준을 받았어. 이로써 UN이 인정해 팔레스타인 지방에 세워지기로 했던 아랍국가는 물거품이 되고 이 지역 주민은 하루아침에 옛 유대인처럼 난민으로 전락한 반면 오로지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모든 ㄴ영토를 차지하게 됐지. -191-193쪽

1952년 7월 이집트에 쿠데타가 발생해 청년 장교 나세르가 이집트의 통치자로 떠올랐어. 1954년 대통령이 된 그는 1970년까지 16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이스라엘을 돕는 미국에 앙심을 품고 중동 진출을 노리는 소련과 손잡아 아랍연맹의 통일을 꾀하자 미국과 영국은 아스완댐 건설 등 나세르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지. 이에 나세르는 이집트 영토에 있지만 소유권은 영국과 프랑스에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어. 영국과 프랑스가 가만있었을 리 없었고 이 기회를 틈타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낭니 반도를 침공했어. 그리고 2일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 공군이 수에즈를 공격했어. 전세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유리했지만 자칫 이 전정은 세계대전으로까지 번져갈 조짐이 보였던 거라고. 당황한 미국이 이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소련도 위협하여 세계여론까지 이들에게 불리해지자 UN도 긴급총회를 소집해 철군안을 채택했어.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돼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했는데 이를 제2차 중동전쟁, 또는 시나이전쟁이라고 하지. -194-195쪽

세 번째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됐지. 이 전투에서 아랍권은 전투기 716대를 잃고 이스라엘은 26대를 잃었어. 공군이 무력화된 아랍권은 불과 이틀 만에 패색이 완연했어. 공중전에 이은 탱그전에서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군은 밀리기만 했고 결국은 이 전쟁은 6일 만에 아랍권의 패배로 끝나 제3차 중동전쟁을 '6일전쟁'이라고 불리지.

이 전쟁에서 아랍군 1만 5천 명이 죽거나 다친 반면, 이스라엘군 피해는 사망 777명, 부상 2,186명이었어. UN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정전안을 6월 9일 양측이 받아들여 중동엔 다시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지.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땅은 약 7만2천 km2였다.-197-198쪽

1973년 10월 5일, 이집트군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제4차 중동전쟁이 터졌어. 이날은 이스라엘의 종교 축제일인 욤키푸르(속죄의 날)이었고 그래서 이 전쟁을 '욤키푸르 전쟁'이라 부르지(1973.10.6-1974.1.18).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1/3, 무기는 반도 되지 않았지. 패전에 패전을 거듭, 개전 48시간 만에 17개 여단이 전멸,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포위되어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이 없었어. 이 화급한 상황에서 미국은 대대적인 이스라엘 지원에 나섰는데 욤키푸르 전쟁에 소련이 35억 달러, 미국이 22억 달러를 쏟아 부음으로써 이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으로 성격이 변하고 말았지. 미국은 30일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작전을 펼쳤어. 미국의 지원으로 전력을 정비한 이스라엘은 반격에 나서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군이 포진한 골란 고원을 집중 공격했지.

북부 전선에서 승리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와의 전선에 총력을 집결하여 이집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대공세를 퍼부어 또다시 이집트는 패전의 피눈물을 삼켜야 했어. 결국 네 번째 도전도 실패로 끝났어. 그러나 승리한 이스라엘도 상처투성이였지. 이스라엘군은 이 전쟁에서 점령한 골란 고원에서 철수를 거부하고 계속 점령지에 머물며 UN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니 세계 여론이 좋지 않았어. 또 날이 갈수록 석유의 중요성이 커져 이스라엘에 지지를 보내는 나라들이 줄어들어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은 국제적 동정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단다.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에 모두 패한 아랍권은 1973년 10월 17일, 아랍 산유국 석유장관들이 모여 '석유의 무기화'를 결의했지. 유가는 폭등하고 세계경제는 대혼란에 빠져들었어. 이것이 1973-1974년에 터진 이른바 제1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고 또 한 번 1978-1980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석유 무기화가 얼마나 무서운가 절감케 했단다.-200-203쪽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의 분위기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어. 1977년 11월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의 벤구리온 공항에 이집트 비행기가 착륙했어. 그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여기에서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가 포옹을 한 거야.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극적으로 화해하는 순간이었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이집트 영토에서 물러나는 대신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조건이었어.

이들은 1978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캠프데이비드에서 만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이 두 나라 사이엔 평화가 정착됐으며 그해 노벨평화상의 수상자가 됐단다. -206쪽

유일한 해결책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이야. 그러자면 이스라엘이 웨스트뱅크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하는데 절대 그럴 리 없는 데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테고 주변 아랍국가 또한 새 아랍국가가 생기는 걸 반기는 분위기도 아니며 이스라엘 점령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철수 거부도 또 하나의 걸림돌로 등장했어. 그러나 모든 문제의 실마리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아랍세계가 인정하느냐에 달렸어. 현재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아랍국가는 이집트와 요르단뿐.
(이집트 : 1967년 점령된 시나이 반도 반환조건/요르단 : 1967년 점령된 영토반환조건)-229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4-1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세계는 역시 '역사'라는 길고 긴 시간을 들여 서로 서로 인간들이 문화를
주고 받으며 진보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죠.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나라들의 선진 문화가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후엔
반대로 현재의 영광을 누리는 나라가 선진 문화를 과거의 '선배'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셈이랄까요. 또 미래의 영광은 어디에게로 향할지는 모릅니다만.
서로 이어달리기의 바톤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작업중"이란 제목에 처음엔 엉뚱하게, 두번째에는 '하드 고치는 중' 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습니다만. 완전히 예상 밖의 결과입니다. (웃음)

마노아 2007-04-1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쓰다가 하드 고치는 것 때문에 급하게 나가느라고 저장할 틈이 없었어요. 일부는 글 쓰던 게 날라갔고, 처음 것만 살린 건데 그래서 제목도 급히 '작업중'이 되어버렸죠. 그나저나 심각해요. 흑흑..ㅠ.ㅠ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샘깊은 오늘고전 3
허난설헌 지음, 이경혜 엮음, 윤석남.윤기언 그림 / 알마 / 2007년 4월
장바구니담기


가난한 여자의 노래

얼굴이며 자태며 어디 빠지랴
바느질도 길쌈도 척척이지만

가난한 집안에 파묻혀 자라니
중매쟁이라곤 얼씬도 안 하네.

추워도 배고파도 아무 티도 안 내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짜고 있네.

어버이만은 나를 가련케 여기시지만
남들이야 어찌 내 신세를 알아주랴.

밤 깊도록 쉴 틈 없이 베를 짜느라
덜그럭덜그럭 차가운 베틀이 울고 있네.

베틀에 걸려 있는 명주 한 필은
누구의 옷이 될까.

한 손에 가위 들고
삭둑삭둑 가위질을 하고 있으니

차가운 밤 기운에
열 손가락이 시려 오네.

남 시집갈 때 입을 옷은
잘도 짓는데

정작 나는 해마다
홀로 잠들 뿐.-136-137쪽

다시 시집가는 선녀(조선의 재혼 금지 풍습을 비웃고 있는 시)

선녀 동비에게
서왕모가 분부를 내리셨네.
"술랑한테 시집가거라!"

동비는
자줏빛 난새에 올라타고
아지랑이 아물아물
신랑 집으로 날아간다네.

꽃 앞에서
한 번 이별하면
삼천 년

예전에야
신선 세상 큰 세월이
그저 못마땅하기만 했지.

(이 시는 '신선 세상에서는 이렇게 혼자 사는 여인을 챙겨서 재혼까지 시켜 준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선 세상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사람 세상에서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146-147쪽

이 세상에 마음 붙이지 못하고 산 허난설헌이 자신을 귀양 온 여자 신선이라 생각하며 가까스로 살아온 끝에 마침내 자신이 돌아갈 곳의 집을 짓는 그 마음이 나는 참으로 안쓰러우면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허난설헌은 이렇게 자기가 돌아가 쉴 집까지 하늘나라에 지어 놓았습니다. 어쩌면 난설헌은 정말로 이 세상에 잠시 귀양 왔다 떠나간 여자 신선이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겠지요.
허난설헌이 잠시 귀양을 왔다 떠나간 여자 신선이든, 아니면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이든 상관없이 나는 허난설헌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이 땅에 들러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184-185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4-05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베를 짜는 '은혜 갚은 학'이 생각나는군요.

마노아 2007-04-0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하희라씨가 그 은혜 갚는 학으로 나온 적이 있어요. 어린 마음에 어찌나 슬피 울었던지요. 그 조잡한 분장에도 말입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구판절판


그동안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가까웠을 터인데 하루 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듯하다.
(조광조에 대한 사사 결정이 나온 날, 사관이 적은 논평이다.)-127쪽

어쨌든 기묘사화와 함께 조광조의 개혁은 끝났다. 중종은 소격서까지도 부활시켰을 만큼 조광조에 의해 이룩된 개혁조치들을 다 되돌려 놓았다. 정국공신은 살아남았다. 엄청난 재산과 현실적인 힘을 보유한 그들은 끝없이 재산 증식을 꾀했다. 공신, 대신, 왕자, 부마들은 궁궐 같은 집을 짓고 갖은 사치를 행했지만 백성들은 그만큼 땅에서 유리되었으며, 상당수는 도둑이 되어 세상을 불안케 했다. 단근법(아킬레스건을 끊는 형벌), 경면법(얼굴에 죄명을 문신해 넣는 형벌)을 부활하는 등 도둑들에 대한 강경 처방을 내렸으나 줄어들지 않았다. 세수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나라는 늘 가난에 허덕였다. 재정이 빈약하니 국방력도 자연히 약화된다. 군인 수가 줄어들고 무기는 녹슬어가는데도 손쓸 도리가 없다. 유생들은 공부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조정에서 학교 진흥책을 내놓아도 효과가 없었다. 민심은 늘 흉흉하여 익명서가 달린 화살이 곳곳에 꽂혔다. 각종 고변사건도 잦았는데, 대개는 상을 노린 무고였다.

대간은 건강성을 잃었다. 견제가 약해지자 일부 대신들에게 힘이 쏠렸고 그들은 점차 권신화되어갔다. 결국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였고, 중종의 실패였다.-131-133쪽

김안로의 복귀에서 숙청까지를 보면 조광조의 경우와 무척 유사하다. 무모할 정도의 힘 몰아주기, 그리고 갑작스런 뒤집기! 여기에 중종식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 들어 있다. 이 시대 모든 임금들이 가졌던 최우선 목표는 왕조의 유지요, 왕좌의 유지였다.

"태평성대? 부국강병? 그딴 건 다 그 다음의 목표라고."

반정으로 임금이 쫓겨나는 것을 경험한 중종에게 있어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신하가 임금을 몰아내다니... 그것도 강력하기 그지 없었던 연산 형님을... 나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나는 형님처럼 힘도 없는 걸. 우선은 신하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아야 해. 성실한 모습, 말 잘 듣는 모습을 보이고 힘을 가진 자들을 억울한 상황으로 내몰지 말아야겠지. 욱하면 곤란하잖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를 지켜줄 보디가드가 필요해. 다른 신하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자, 그런 자와 동맹을 이룬다면...'

박원종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반정 주도자로서의 압도적인 힘, 과연 즉위 초 여러 역모 사건이 잇달았지만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보호자 격인 동맹이 사라졌다. 권력의 공백상태, 곧 보호자의 공백상태가 온 것이다. 그때 조광조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래 봐야 아직은 신진일 뿐.
왕은 빠른 승진과 공고한 신임을 보여줌으로써 조광조를 일약 정승을 능가하는 실세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박원종과는 많이 다른 인물.
어찌 보면 박원종은 권세와 영화의 유지를 추구하는 평범한 신하였지만, 출발부터 왕의 스승으로 자리 잡은 조광조는 자신의 영화보다는 이상 실현에 모든 것을 건 사람. 시간이 흐를수록 조광조의 존재는 커져만 가고, 원칙과 이념이 조정을 지배한다. -181-185쪽

하여 중종은 잠시 밀쳐두었던 카드인 남곤을 이용해 조광조를 밀어냈다. 유학자지만 이상보다 현실을 중시하고 대신에서 말단까지 능숙하게 관리하는 남곤. 남곤이 죽자 왕은 본능적으로 새 동맹을 찾았다.
확실히 김안로는 조광조보다 남곤 쪽에 가까운 인물. 그러나 문제는 욕심이 훨씬 더 크고, 정치적 수완 또한 뛰어나다는 사실이었다. 복귀하자마자 갖가지 방법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김안로의 보복 정치는 왕조차 제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결국 김안로도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왕은 기회를 보다 기습적으로 제거해버린다.

늘 여론에 귀 기울이고, 온화하며, 우유부단하던 왕은, 권력을 교체할 때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했다. 독선적이고 냉혹하며 과감한 모습으로!

중종은 아마도 그 어떤 신하도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박원종의 하나뿐인 아들을 싸늘하게 내쫓아버렸으며, 조광조에 대해서도 끝까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정광필도 믿지 못했다.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일각에서는 다시 그를 정승에 기용할 것을 주장했었다. 참 고독한 군주였다.-186-188쪽

중종의 39년은 참으로 일관된 39년이었다. 내내 부지런했고, 비판에 귀 기울였으며, 반성과 사과에 인색하지 않았다. 세종이나 성종도 재위 20년을 넘기면서는 사뭇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중종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국정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다. 국방, 민생, 인사, 교육, 출판, 의료 등등......
그런데도 이렇다 할 진전을 이뤄내지 못한 건 왜일까?

그는 단지 성실했을 뿐이었다. 왕좌의 유지라는 최우선 목표만 있었지, 장단기 구상도, 일의 선후도, 일관된 원칙도, 책임성도 없었다. 자신은 해어진 옷을 기워 입을 만큼 검소했지만, 자식들의 호화 사치에는 대간의 잦은 문제제기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과 병력의 감소를 걱정하면서도 공신들은 끝까지 손대지 못했으며, 학교 교육의 낙후함과 선비들의 공부하지 않는 풍조를 염려하면서도 사화를 직접 주도한 왕이었다.

재위기간 동안 고변 사건, 익명서 사건은 수없이 많았다. 대형 옥사로 번진 것만 해도여러 번이어서 옥사에 희생된 이가 연산 때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189-191쪽

39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권좌를 지켰으면서도 제자리 뛰기만 하다 떠난 중종.
조광조라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해놓고도 개혁보다 왕좌 유지에만 골몰했기에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조광조에게 몰아준 힘의 일부를 정광필에게 주었으면 어땠을까?
조광조와 그의 그룹을 개혁 엔진으로 삼고, 정광필로 적절히 제어하면서 운행했더라면...
조광조 이후의 정치는 특정인에게 힘 몰아주기와 그 특정인의 권신화에 특징이 있다.
남곤이 죽은 뒤 심정, 이행 등은 권간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김안로를 끌어들여 둘을 제거하고 나자 이번에는 김안로가 더 강력한 권간이 되고 말았다. 특정 권신에게 힘이 집중되는 양상이 계속되자 세상은 이를 어느 정도 당연시하게 되었으니, 이는 김안로 사후 또 다른 권신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종이 눈을 감기 전에 이미 조정에는 새로운 권신의 후보로 세자의 외숙인 윤임과 대군의 외숙인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떠오르고 있었다. -193-194쪽

중종이 죽은 날짜에 실린 사관들의 평

사론1

왕은 인자하고 현명했다. 폐조 시에는 효도와 우애를 지극히 했고, 신하의 도리를 극진히 했다. 백성을 불쌍히 여겼으며 간언을 잘 따랐다. 39년 동안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폈으니 진실로 드문 현주다. 다만 인자하고 온화함에는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했고, 진퇴, 용사에 현명함과 불초함이 뒤섞이는 실수가 많았따. 이로 인해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했고, 권간이 왕명을 도둑질했으며, 변고가 자주 일어났다. 정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210쪽

사론2

왕은 검소, 인자했고 성색이나 사냥에 빠지지도 않았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마음이 잠시 열렸다가 끝내 닫히고 말았으니 이는 조광조 등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광조 등이) 점차적 개선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배척만을 힘써 자신의 흉중에 품은 생각을 대폭적으로 실행하려 한 데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인후한 성덕으로 백성들의 크고 작은 고통을 어루만져 구휼하였으니 참으로 중흥의 성군이라 할 것이다.-211쪽

사론3

왕은 인자, 유순하나 결단성이 부족했다.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다. 호, 불호가 분명치 않고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뒤섞어 등용함으로써 다스려진 때보다 혼란한 때가 더 많았다.-211쪽

사론4

인자, 겸허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에게 이끌림으로써 진성군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단경왕후 신씨를 내치고 경빈 박씨를 죽여 부부 간의 정이 없었으며, 복성군을 죽여 부자 간의 은의가 훼손되었다. 또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이 잇달아 군신의 의리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21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의 가계부
제윤경 지음 / Tb(티비) / 2007년 2월
구판절판


상담을 받은 많은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이 무엇이든, 그 일로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관계없이 말입니다. 실제로는 돈을 많이 쓰며 사는 사람들도 '원 없이 돈 쓰며 사네'하며 만족해하진 않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돈은 현재 얼마를 갖고 있건 채우지 못하는 욕망의 대상일 뿐입니다.-6쪽

사실 많이 벌어도 정작 우리 둘을 위해 쓰는 건 벼롤 없어요. 부모님 용돈에, 집안 행사에 내는 돈이 정말 적지 않아요. 돈 쓸 일이 생기면 다들 으레 우리가 제일 많이 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부담스럽기까지 해요. 그런데 누가 알겠어요. 우리가 매달 원금은커녕 이자만 갚고 있는 빚쟁이라는 걸요. 우린 고소득 빚쟁이예요-36쪽

그렇지만 결국 광수 아내가 돈을 내야 했다. 그녀가 더욱더 화가 나는 건, 그런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댁 식구들의 태도였다. 돈은 돈대로 내면서 대접도 못 받고 뒤로는 생색낸다는 소리, 돈 많이 번다고 남편 우습게 본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니, 광수 아내는 속이 썩어 들어갔다. 그렇다고 남편이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편은커녕 살가운 말 한마디 들어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37쪽

사실 문식은 광수나 재벌에 비해 버는 돈은 적어도 사정은 나은 편이다. 공기업에 다니다 은퇴한 아버지의 재산이 꽤 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사준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물려주실 유산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수중에 돈이 없는 건 걱정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돈'에 대한 믿음은 그동안 문식 부부에게는 보이지 않는 안전장치이자 미래의 희망이었다. -42-43쪽

무역업이란 게 아이템이 좋아 대박이 터지면 큰돈을 쉽게 벌기도 하지만 잘 관리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그만큼 까먹는 돈도 많다. 그리고 재벌은 아내가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위기의식이 덜하다. '내가 망해도 마누라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니까' 하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안이해진 것이다. -47쪽

우리는 엄청난 소비유혹의 한가운데 살고 있다. 눈만 돌리면 돈쓸 일이 천지다. 그러나 인생은 길고 벌 수 있는 기간과 돈은 한계가 있다. 그저 아끼고만 산다면 살림살이가 대단히 어렵고, 마음까지 불편하게 된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쓰는 지출일기는 소비통제를 좀더 즐겁게 만들어줄 것이다.-67쪽

젊었을 때는 소비를 억제하느라 허리띠를 졸라매는 생활이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박하고 검소해 보여 더 아름답게 보인다. 반면에 정작 필요할 때 돈을 쓸 수 없다면, 그것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재테크의 왕도는 지출관리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소비예산부터 세워보자.-71쪽

엄마의 행동은 일상생활에서 실시간으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긍정적이고 성실하며 건전한 돈 개념을 가지고 경제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성실히 노력한 만큼 돈을 버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며, 그렇게 번 돈을 합리적으로 지출할 줄 알게 해야 한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재미라고 가르치는 것은 곤란하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잘 벌어 잘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가르쳐야 한다. 로또 당첨보다 착실히 저축해나가는 기쁨을 먼저 가르쳐야 공부를 하든지 사회생활을 하든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72쪽

미래의 부자를 꿈꾸며 오늘은 가난해지자. 그리고 그 속에서 행복을 느껴보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급하게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 작은 목표에서부터 하나하나씩 이뤄가는 것이 진짜 부자의 삶이다.
1. 가족과 함께 지출을 기록하자.
2. 지출 기록을 평가하자.
3. 평가를 바탕으로 희망을 가져보자.
4. 안 써도 되는 돈이 무엇인지 발견하자.
5. 꼭 써야 할 돈이 무엇인지 가리자.
6. 지출을 최대한 미래로 미루자.
7. 검소하고 소박한 일상을 사랑하자.
8. 점점 늘어가는 살림에서 재미를 찾자.
9. 계획대로 지출하는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자.
10. 지출에 앞서 저축을 저지르자. -89-90쪽

모두들 한결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써 펼쳐보고 싶지 않던 미래의 모습을 자신들 스스로 그려보고 나니, 적어도 뿌옇게 보이던 막연한 불안감의 실체를 명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00쪽

부모 마음이야 아이의 미래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재능을 발견하고 이끌어주고 싶죠. 부모의 역할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것도 가정경제라는 큰 틀에서 균형 있게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야 부모 마음 편하고 아이들도 이것저것 해보겠지만, 5년 후,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 대학등록금만으로도 일 년에 천만 원 이상 들어갈 텐데, 등록금도 그렇고 노후자금도 그렇고, 모아놓은 돈이 없다면 어떻게 하냔 말이죠. 우리집 경제사정에 사교육비가 적정한지 계산해보고, 그렇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균형을 되찾아야 할 것 같아요.-106쪽

우리집은 나름의 원칙을 세워놨어. 소득의 20퍼센트 범위 내에서 교육비를 감당하기로 한 거지. 이것저것 시켜주면 좋겠지만, 형편을 뛰어넘는 교육을 시키다간 정작 아이 대학등록금을 못 댈 수도 있겠더라고. 빤한 사정에 교육비가 차지하는 영향도 무시할 순 없어. 우리는 우리 애들이 이 사회에서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은 버리기로 했어. 실패도 해보고 가난해보기도 하고 말이야.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아이들이 됐으면 좋겠어. 우리들처럼. -107-108쪽

집값 오르면 기분 좋지. 그래서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서 집을 샀다고 해보자. 그런제 과연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제대로 따져보자는 거야. 가령 재벌이네가 3년 전에 은행에 1억 5천만 원 빚을 지고 집을 샀다고 하자. 그 돈을 20년으로 나눠 갚는다고 하면 원리금만 해도 한 달에 백만원 정도가 될 거야. 백만 원을 20년간 모으면 그냥 저축이자로만 해도 3억이 넘는 돈을 모을 수 있어. 그렇다면 집값이 3억 이상 올라줘야 한다는 건데, 그건 확신할 수 없는 거잖아? 미래를 두고 도박을 할 순 없는 거지.-116쪽

재무설계가 단순히 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돈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 우리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계획을 먼저 세울 게 아니라 인생설계부터 해야 한다. -121쪽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대학까지만 보내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들이 알아서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추세대로 등록금 인상이 꾸준히 이어진다면 4,5년 뒤의 등록금은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로 마련할 만한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128-129쪽

대개 내 집을 마련하고 나서 집값이 오르면 부자가 된 기분이 들어 대단히 유쾌해지는데, 정작 그 집을 도로 팔아서 차익을 실현할 계획이 있는지 물어보면, 그런 계획을 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보유 자산가치가 올라 세금부담만 늘어났지, 이익을 손에 쥘 수는 없는 것이다. -134쪽

인내와 끈기는 눈부신 성공을 선사한다. 그것은 쉽게 얻은 성공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것이다. 생활 속 작은 성공의 경험들을 눈여겨 찾아보고 작은 성공을 커다란 것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인내와 끈기가 내 옆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다. 그 작은 성공의 경험을 위해서,
1. 목표를 세우자
2.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목표를 세우자.
3. 돈이 아닌 인생을 목표로 세우자.
4. 허황되지 않은 소박한 목표를 세우자.
5. 장기 목표를 먼저 세우되 성공의 경험을 쌓기 위해 단기 목표를 제대로 세우자.
6. 단기 목표에 모든 것을 걸지 말자.
7. 인생의 긴 흐름을 그려보자.
8. 목표를 가족과 함께 공유하자.
9. 아이들에게도 목표의식의 중요성을 가르치자.
10. 아이들에게 목표달성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자.-143쪽

반드시 은행 한 군데하고만 거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해. ....일단 금융기관을 은행뿐 아니라 증권사, 종금사까지 확대시켜서 따져봐야 해. 나는 월급통장을 종금사 것으로 하고 있어. 은행의 보통예금통장보다 이자가 높거든. 은행의 보통예금통장은 0.2% 수준인데, 이 통장은 현재 이자가 4% 정도야. 게다가 하루만 맡겨도 이자가 붙어서 돈 붙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아. -145-146쪽

어느새 신용카드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대학생들마저 들고 다니는 신용카드가 일반화된 지는 그리 길지 않다. 본격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에게 신용카드사용이 확산된 것은 IMF 이후이다. 당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내수시장의 거품이 필요했는데, 그 거품을 훌륭하게 만들어 IMF 탈출이라는 목표달성을 이룬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신용카드였다. 그러나 그렇게 한국경제의 위기탈출을 도운 대가는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것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ㄴ용불량자 몇 백만 하면서 그 문제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 아픔은 개인의 문제로 남겨둔 채 우리 사회는 신용카드 대중화가 정착되는 듯하다.-162-163쪽

신용카드 사용으로 실제로 받는 소득공제는 연봉이 높아 세금부담이 큰 고소득자에게나 유리할 뿐 보통 직장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165쪽

신용카드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못 사게 되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홈쇼핑이다. 12개월 무이자에 가격파괴, 자동전화주문할인, 화려한 사은품 등, 현란한 수식어로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지금 사둬야 좋은 기회를 활용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평소 갖고 싶었지만 자신의 소득에 부담스런 고가품도 신용카드 무이자 할부 앞에선 별거 아닌 게 돼버린다. 이렇게 저지르고 저렇게 저지르고, 결국 소액에 불과한 할부금이 모이고 모여 월급을 타도 카드결제일이 지나면 남는 돈이 없는 현실을 만든다.-167쪽

믿을 만한 재무파트너인지에 대한 판단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인생설계를 도울 만큼의 건전한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셋째, 금융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언을 얻기 쉬운 성실한 사람이어야 한다.-169쪽

결혼은 두 주인공의 재무적 결합이기도 하다. 신혼부부의 행복한 재무설계를 위해 먼저 통장부터 목적에 따라 구분해 만들 것을 권한다.
우선 각자의 월급통장은 증권사 등의 CMA 통장으로 변경하자. 이 월급통장을 공과금이나 적금 등이 빠져나가는 기본 통장으로 활용하면 좋다. CMA계좌도 은행연계 계좌의 현금카드를 발급해주지만, 현금카드는 가급적 발급받지 않거나 발급을 받더라도 지갑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 편이 좋다. 그래야 예산을 뛰어넘는 지출을 미리 막을 수 있다. -176쪽

결혼 뒤에는 1)자동차 구입, 결혼기념여행 등의 단기자금 통장과 2)커다란 재무목표인 내집마련, 자녀교육비, 은퇴 등을 대비한 투자계좌, 3)체크카드와 연계된 생활비 통장, 4)월급통장과 연계된 수시입출식 비상금 통장 등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 거기에 서로의 취미생활을 위한 소액의 저축통장을 더 만들어도 좋다. 매월 5만원 수준의 소액을 모아서 일 년에 한 번씩 취미생활에 과감한 사치를 누려보는 것이다. 그럴 때 돈 모으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177쪽

맞벌이 부부는 흔히 외벌이 가정에 비해 소득이 높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출할 때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부인이 전문직 고소득일 경우 남편의 직업안정성이 다소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한마디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끌고 가야 한다는 절박감이 외벌이 가정에 비해 적은 편이다.-178-179쪽

보통 맞벌이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 아이 양육을 맡기고 있다는 미안함에 아이와 외식이 잦거나 장난감이나 아이 용돈 등에 많이 지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지출들은 결코 가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미래 교육비를 추가로 준비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녀에게도 유익하지 않다. -180쪽

비자금을 만들고 싶은 깊은 속내에는 부부가 서로 동의를 끌어내기 어려운 지출을 내 맘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하다. 남편의 경우 부인에게 동의받기 어려운 모임 참석이나 술자리, 혹은 남편 쪽 가족을 챙기기 위한 비용을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부인 또한 부인 쪽 가족을 돕거나 만약의 경우 부부 사이가 어려울 때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비자금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비자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계 재무구조가 형성이 되면 서로 소득이나 지출을 투명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각자 지출 통제만 더 어려워진다.
점점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조금만 방심해도 몇십만 원씩 초과로 지출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환경이다. 따라서 더 풍요로운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이 불필요한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서로 불신하기보다는 각자 소득이나 지출을 투명하게 운영하면서 가계 지출예산, 저축 목표 등을 공유해야 한다.-1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 연산군일기, 절대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2월
구판절판


'무오사화'로 명명된 이 옥사의 승자는 누구일까? 외형적으론 상을 받은 훈구파들로 보인다.

주연이 유자광이었던 것은 맞지만,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 사건의 총감독, 바로 연산이다. -78쪽

취향에 관해서 연산은 부왕인 성종과 많이 닮았다. 시를 좋아했고, 그림 애호가였으며, 사냥도 좋아했다. 그러나 둘의 기질은 결정적으로 달랐으니...

연산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했다.
성종은 시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고, 신하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연산은 지어 올리게도 하고 지어 내리기도 했다.

성종은 좋아하는 매를 기르는 것도 대간의 눈치를 봐야 했지만, 연산은 매에다 사냥개까지 맘껏 길렀다. 심지어 개들이 조회하는 내정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임금의 모든 것은 정치이고, 따라서 일거수일투족이 다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연산은 정치와 자신의 사생활을 엄격히 구분하려 했다. -90-91쪽

실제 진행과정을 보면, 갑자사화의 임상홍에게선 무오사화의 유자광 같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갑자사화는 연산이 각본, 감독, 주연까지 겸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연산은 그 과격함과 갑자사화의 시작에 대한 <일기>의 오보로 인해 매우 충동적이란 인상을 주지만, 사실 꽤나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다. 힘이 약할 땐 다른 힘을 빌릴 줄 알았고, 속내를 숨긴 채 때가 무르익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줄 알았다. -118-119쪽

연산은 그동안 자신의 행동을 비판했던 신하들을 생각나는 대로 잡아들였고 어머니의 추숭을 반대했던 이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감옥이 모자라 잡아온 이들을 바깥에 둘 수밖에 없을 정도였고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는 그치지 않았으며 날마다 새 얼굴이 장대에 걸리었다. 대신도 대간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지당하신 분부이옵니다."

"상교가 참으로 지당하시옵니다."

모두들 제 한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휴~오늘도 살아남았구나!"-134쪽

유교정치는 왕권의 지나친 확대를 견제하는 장치를 담고 있어서 유교정치가 자리잡을수록 군약신강의 양상이 나 타나게 된다.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이나 세조는 신하들의 견제장치를 크게 제한했다. 경연을 정지시키고 대간들의 활동도 위축시켰다. 하지만 태종조, 유교보다 불교를 더 숭상했던 세조도 대간 그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대간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국시를 거스르는 반체제적인 행위라 하겠다. 그러나 연산은 달랐다.

연산은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다.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사간원이 폐지되고 사헌부도 축소시켜 조사들에 대한 감찰기능만 남겨놓았으며 홍문관도 폐지되었다.

견제장치들을 제거한 연산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성균관과 사학의 활동을 사실상 정지시켰으며, 과거도 경전 대신 율시로 대체했다.

연산은 유교식 장례나 제례도 못마땅했다. 어머니를 죽인 할머니 인수대비가 미워서 그녀의 장례절차를 대폭 축소해버리는 패륜을 저질렀다고 <일기>는 쓰고 있지만, 이보다 앞서 죽은 예종비 안순왕후(인혜대비)의 장례 또한 그랬다. 친모인 폐비 윤씨의 제삿날엔 후원에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146-148쪽

연산은 폭압을 통하여 황제적 권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를 보면 연산군보다도 더 가혹한 정치를 하고도 후세에 명군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있다. 그런 황제들의 공통점은 신하들에게 가혹했지만,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연산에겐 그렇게 강화시킨 왕권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설계가 없었다. 넘볼 수 없는 왕권을 구축하는 것 그 자체와 강력한 왕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만이 지상목표였다. -150-151쪽

연산은 예술 방면이 발달한 사람이다. 시를 좋아했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특히 처용무를 즐겼는데 연산이 처용무를 추면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죽은 자의 우는 연기라도 할라치면 기생들도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통곡의 자리로 바뀌곤 했다. 그의 미의식은 웅장 화려함을 추구했다. 새롭게 짓는 이궁의 정전은 청기와를 덮도록 했으며, 규모도 크게 지었다. 기생들은 물론 궐 안의 노비들도 깨끗한 옷을 입도록 명했고, 서민들에게 넓은 소매를 권장했으며, 품계가 낮은 신하들에게도 흉배를 달게 하고 비단옷을 장려했다. -155-156쪽

연산의 최측근 인물은 바로 장녹수. 집안이 가난하여 여러 번 시집을 갔는데 마지막으로 결혼한 이는 제안대군 집의 가노였다. 가의 아들을 낳은 뒤에야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가 되었다. 연산을 만났을 때의 그녀를 사관은 이렇게 묘사한다.

"나이는 서른, 얼굴은 보통!"

비천한 신분에다 이렇듯 내세울 것 없는 그녀가 어떻게 연산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열여섯으로 보였다고 할 만큼 피부가 고왔고, 동안이었던 모양. 그리고 견줄 이 없을 정도의 빼어난 교태가 그녀의 무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파악이지. 나는 주상의 기질, 취향, 버릇, 약점까지 다 꿰고 있걸랑.'

때론 어린아이 다루듯 조롱하고 반말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종 부리듯 하였다. 연산은 이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리 화가 났다가도 그녀만 보면 눈 녹듯 풀렸다. 연산은 때때로 그녀와 함께 그녀의 친정을 찾곤 했는데, 둘의 모습은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세도가 오죽했을까?-169-170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3-3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치게 강한 카리스마는 스스로를 '혼자'라는 고독속에 갇히도록 하지.
그러니까, 세상 모두가 자신의 옷자락 밑에서 벌벌 떨기를 원하면서도 - 한편으론,
자신에게 엄하게 대하고, 자신을 자식처럼 편하게 대해 줄 '절대적인 누군가'를
원한 것은 천재적이지만 불쌍한 독재자들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녹수'에게 꼼짝못했던 것은 당연한 심리 현상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웃음)

마노아 2007-03-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그대로 같아요. 불쌍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가 광해군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은 열받아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