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람 3 - 미스테리심리썰렁물 시즌 3
강풀 지음 / 문학세계사 / 2009년 4월
절판


-양영순 :(...)지금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게 공동체 인식이다. 옆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언제나 떠날 수 있고, 내 옆의 사람이 경쟁자라는 의식이다. 사실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담녀 사이코패스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장상용 : 사이코패스는 사회 환경의 탓인가?

-양영순 : 이 같은 경쟁 사회 속에서는 사이코패스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사회 리더들은 인간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소시민이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산다. 이런 상황에서 무한경쟁을 모토로 내세우면 남이야 어떻든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분위기가 생긴다. 오히려 정치인들이 더 사이코패스 같다. '이웃 사람'이란 제목 자체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웃 사람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다. 이웃이란 무관심에 의해 악마가 되기도 하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도 된다. 고시원에서 불지르고 뛰어나온 사람들을 칼로 지른 사건을 보라. 그 사람도 단절된 상태에서 자기 안에 악마를 키운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가 경쟁보다는 상생을 유도해야 한다.
-297쪽

-장상용 : 우리 사회 개개인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양영순 : 21세기의 화두는 벽이다. 사람이 갇혀 산다. 혼자 사는 사람도 늘어나고. 인간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게 벽이다. 지금은 벽을 양산하는 체제다. 벽 속에서 외로운 개개인인데, 벽 하나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다.-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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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09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카이스트 학생들 자살 보도와 관련해서 씁쓸해요.
경쟁을 부추긴다는 건...극단적으로 몰아붙이면 자살을 부추긴다는 말이 되는 거잖아요~ㅠ.ㅠ

마노아 2011-04-10 01:51   좋아요 0 | URL
이 부분을 읽으면서 카이스트 학생들 생각을 했어요.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에요.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의 힘인지 혼란스러워요.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자본주의의 미덕이라고 여겼는데,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를 몰아주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선 평안을 앗아가는 것은 아닌지 소름이 돋기도 하고요.... 울적한 일이에요..ㅜ.ㅜ

루쉰P 2011-04-09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맞네요. 정말 저도 그 벽 속에 함몰돼 살고 있으니 말이죠. 결국 모든 사회적 분위기가 사이코패스를 만드는 분위기. 요즘 <언더그라운드>라는 옴진리교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교단의 사린가스 주범들도 바로 저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상한 종교단체로 빠지고 말았죠. 벽을 깨고 나가야 합니다. 맞아요. 전 내일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다녀야 겠어요. 근데 인상이 안 좋아서...괜찮을지...

마노아 2011-04-10 01:52   좋아요 0 | URL
어떤 범죄자에게 범죄를 일으킬 만한 어떤 이유가 있기라도 한다면, 그 썩은 부분을 도려낼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이유도 없이 범지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섬뜩해요. 영화 추격자의 하정우 같은 그런 캐릭터 말이에요. 웃는 얼굴의 밝은 인사는 선한 의도를 잘 전달해 줄 거예요.^^
 
히로시마 - 되풀이해선 안 될 비극, 그림으로 보는 히로시마 이야기
나스 마사모토 지음, 니시무라 시게오 그림, 이용성 옮김 / 사계절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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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에 관한 연구와 설계․조립은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에 있는 비밀 공장에서,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폭탄을 만드는 데 들어간 돈은 모두 20억 달러쯤으로, 전쟁을 치르는데 들어간 총비용 가운데는 아주 작은 부분이었지만, 미국 자동차 산업 전체의 규모와 맞먹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16쪽

포츠담 회담을 시작하던 7월 17일 하루 전날, 뉴멕시코 주의 앨러모고도에서 첫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습니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포츠담에서 이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는 협상에 참가하는 트루먼에게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7월 26일, 이미 두 개의 원자폭탄이 티니안 섬으로 운반되어 있었습니다. 트루먼은 하루 전에 이 폭탄들을 사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미국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힘을 온 세계, 특히 소련에 보여 주기 위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에 들어간 비용과, 앞으로 이어질 연구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나랏돈으로 충당하는 일에 대해 국민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21쪽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의 4개 도시로 압축되었는데, 이 가운데 교토는 일본의 옛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이라는 이유로 당시 전쟁 장관이던 헨리 스팀슨이 반대하여 나가사키로 바뀝니다. (...) 목표 도시들은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신중하게 가려 뽑았는데, 인구 밀집 지역과 중요한 군사 시설이 있는 곳, 또는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큰 공장들이 있는 곳을 먼저 꼽았습니다. 재래식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없는 도시들 또한 우선 검토하였는데, 이것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어 일본인들과 온 세계에 충격을 더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히로시마를 비롯한 몇몇 도시들이 연합군의 폭격을 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뒷날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까닭이었습니다.

-21쪽

일본 시각으로 8월 6일 새벽 1시 45분, B29 폭격기 ‘에놀라게이’가 원자폭탄을 싣고 티니안 섬의 공군 기지를 떠났습니다. 이 폭격기는 두 대의 다른 비행기와 함께 비행했는데, 한 대는 폭발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대는 촬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에놀라게이’는 조종사였던 폴 티베츠의 어머니 이름이었습니다. 석 대의 비행기가 출발하기에 앞서 다른 석 대의 비행기들이 일본으로 날아가 히로시마와 고쿠라, 나가사키의 날씨를 살폈습니다. 오전 7시 25분, 앞선 비행기들이 에놀라게이로 날씨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히로시마, 날씨 맑음." 히로시마의 운명이 정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2쪽

도시 밖으로 탈출하는 부상자들은 열폭풍에 녹아 너덜거리는 살갗으로 마치 유령처럼 팔을 앞으로 내민 채 걸어갔습니다. 팔을 아래로 내리면 너무나 아팠습니다. 한여름이었지만 그들은 추위에 덜고 있었습니다.

-36쪽

9월 17일, 태풍 ‘마쿠라자키’가 도시를 강타했습니다. 태풍이 몰고 온 큰비 덕분에 원자폭탄이 터진 뒤 도시를 겊고 있던 먼지와 오물들이 깨끗이 씻겨 나가긴 했지만, 태풍은 분명 또 하나의 비극이었습니다.

-45쪽

히로시마 상공 580m 높이에서 일어난 폭발은 1조4천억 칼로리의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내뿜었습니다. 폭발 당시 폭심의 순간 온도는 섭씨 몇백만 도에 이르렀습니다. 폭발한지 0.1밀리초(1밀리초는 1,000의 1초) 뒤 지름 30m짜리 불덩이가 생겨났습니다. 불덩이의 바깥 온도는 섭씨30만 도에 이르렀습니다. 불덩이의 지름은 순식간에 500m로 커졌습니다. 불길은 10초 동안 눈부시게 타올랐습니다. 불덩이가 내뿜은 열선 때문에 폭심 근방의 온도는 섭씨3천에서 4천 도까지 치솟았습니다. 공중폭발로 생긴 충격파가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충격파와 땅에서 반사되어 생긴 충격파가 합쳐졌습니다. 폭심 부근에는 폭풍의 압력이 평방미터 당 30t에 이르렀고, 이런 상태는 약 1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재래식 폭탄이 폭발할 때 일어나는 폭풍의 압력이 겨우 몇 밀리초 동안 유지된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참으로 엄청난 위력입니다.

-46쪽

1945년 8월 6일 아침에 히로시마에는 대략 35만 명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폭격 뒤에 많은 사람들이 바깥에서 히로시마로 들어왔기 때문에 방사능에 오염된 사람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히로시마 밖의 많은 사람들도 검은 비를 맞고 방사능 낙진에 오염되었습니다. 이렇게 피해를 입은 외부 사람들은 1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한 기의 원자폭탄이 45만 명을 방사능에 오염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8쪽

폭발 때문에 직접 피해를 입었든, 나중에 히로시마로 들어와 방사선을 쏘였든, 방사능에 오염된 45만 명 가운데 13만에서 14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석 달 안에 죽었습니다. 요컨대 방사능에 오염된 사람들은 세 명에 한 명 꼴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채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족증, 백내장, 재생 불량성 빈혈, 급성 백혈병, 유산, 불임과 여러 종류의 암에 평생 동안 시달려야 했습니다.

-50쪽

원자폭탄에 사용하는 플루토늄은 방사능이 반으로 줄어드는 데 24,000년이 걸립니다. 반감기가 짧은 물질들은 긴 물질들보다 방사능이 빨리 줄어드는 대신에 더 강렬합니다.

-51쪽

원자폭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던 1940~1950년대에, 미국의 몇몇 병원과 의료기관에서는 환자들에게 각기 다른 양의 방사능 물질을 투여하는 여러 가지 의학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이 실험에 참여한 의사들 가운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했던 유명한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원자폭탄의 영향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구 결과를 공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방사능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생존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주 작을 것이라는 발표만을 되풀이했습니다.

-56쪽

일본은 앞장서서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왔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원자력 발전소는 짓고 있는 것까지 합쳐서 530개쯤 됩니다. 핵연료를 이용하여 발전을 할 때에도, 무기용으로 플루토늄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방사성 폐기물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경우 모두 이것을 안전하게 보관해야만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 물질이 원자로 시설에서 새어나올 위험도 있습니다.(...)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 때문에 방사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어림잡아 모두 350만 명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옛 소련 사람들로 248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미국 사람들은 88만 5천 명이 방사능에 오염되었습니다.

-57쪽

핵무기를 가진 나라들은 늘 그것이 남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전쟁 억제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국이나 옛 소련은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군사 예산 또한 어마어마하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모순이 됩니다. 핵무기가 빌미가 되어 핵전쟁이 일어날 번한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1995년에 미국과 옛 소련이 갖고 있던 전략 핵탄두는 모두 1만 7천 개에 이르렀는데, 그 위력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52만 개와 맞먹었습니다.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
대형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권 밖으로 발사된 뒤에, 목표물을 추적하여 대기권으로 다시 들어오도록 만든 미사일. 초속 6km로(사냥총의 총알 속도는 초속 1~2km) 최고 10,000km를 (지구 둘레의 1/4)30분 안에 이동합니다. 목표 지역의 사람들은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을 보거나 소리를 듣기도 전에 폭격을 받게 됩니다.
-58쪽

핵무기가 널리 퍼지는 현상은 옛 소련이 망하여 냉전 시대가 끝난 뒤로 더욱 심해졌습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일에 예전의 맨해튼 계획에서처럼 엄청난 돈이라든가, 알려지지 않은 기술이 이제는 더 이상 필ㅇ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원자로가 크게 늘어나 플루토늄을 얻기도 훨씬 쉬워졌습니다.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울지 몰라도,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할 뜻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심각하게 위험한 일입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방사능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핵탄두는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하에서 성능 실험을 해야 합니다. 방사능은 낡은 핵탄두를 해체할 때에도 새어나옵니다. 이 모든 사실을 합쳐서 생각해 보면, 핵무기가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59쪽

1945.9
맨해튼 계획의 조사단이 히로시마 방문. 단장인 토마스 페렐 박사가 방사능으로 죽을 사람은 이미 모두 죽었으므로 더 이상 방사능 피해로 고통 받을 사람은 히로시마에 없다고 주장
1946.5
일본의 ‘일본영화사’가 1945년 9월부터 만든 기록 영화 ‘원자폭탄의 영향: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미국이 압수(1967년에 돌려받음)
1947.7
미국에서 암환자들에게 플루토늄 이용한 생체 실험을 함
1949.4
미국 대통령이 필요할 경우 다시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
1949.10-12월
미국이 핸포드 상공에서 방사성 물질을 뿌리며 방사능 전쟁 연습을 함
1950.1
미국 대통령이 수소폭탄을 개발하라고 명령. 맨해튼 계획을 지휘했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이에 반대.
1950.6
한국전쟁 발생. 미국이 일본에 미군 기지를 두고 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를 생산, 조달하여 태평양전쟁 뒤 망가진 경제를 회복하는 데 힘을 얻게 됨
1950.8
연합군 사령부가 히로시마 평화의 날 행사를 취소시킴
1950.11.
미국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한국전쟁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
1951.10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
-60쪽

1953.8
소련이 중앙아시아에서 첫 번째 수소폭탄을 실험. 소련은 이 실험에서 방사능의 영향을 비교 조사하기 위해, 근방 여섯 마을의 주민 191명을 고의로 마을에 남기고 다른 2만 명의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게 함. 뒷날 한 마을에 남아 있던 40명 가운데 37명이 사망했으며, 그 중 30명은 백혈병을 비롯한 암으로 죽음. 이 실험 내용은 1993년까지 공개되지 않음.
(1953년부터 67년까지 CIA가 인체에 대하여 방사능 실험을 함. 실험 관련 서류는 73년에 파기.)
1954.1
미국이 세계 최초의 핵 잠수함인 노틸러스 호를 진수
1954.3
미국이 마셜 제도의 롱겔라프 섬에서 수소폭탄을 실험하여, 많은 미크로네시아 사람들이 방사능의 영향을 받음. 일본 참치잡이 어선 제5 복룡환 호에 타고 있던 어부들이 방사능 낙진에 오염됨. 뒤에 미국은 인근 바다를 오염시켜 수산사업에 손해를 입힌 데 대한 배상금으로 7억 2천만 엔을 일본에 지급함
1954.5
일본에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 일어남. 처음에는 어머니들의 모임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1년 동안 3천 2백만 명이 서명.
-61쪽

1955.7
버트란드 러셀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평화를 촉구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하고, 1957년에 열릴 첫 번째 퍼그워시 회의를 준비하기 시작
1955.10
천마리의 종이학으로 잘 알려진 사다코 사사키가 백혈병으로 사망
1956. 5월-7월
미국이 마셜 제도의 비키니와 에니웨톡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함. 실험 내용 가운데는 비행기를 몰고 버섯구름 속을 지나간 뒤 조종사의 방사능 오염도를 측정하는 것도 있었음.
1957.7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세워짐. 이 기구는 핵에너지를 군사용으로 쓰지 못하게 하고 평화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일을 함.
1958.2
미국의 트루먼 전 대통령이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함. 히로시마 시의회가 이에 대해 항의함.
1958.3
소련 최고위원회가 핵실험을 중지하겠다고 선언.
1958.8
미국과 영국도 10월 말부터 1년 동안 핵실험을 중지하기로 결정
(미국이 마셜 제도의 핵실험을 중지하고, 콰잘레인 섬에서 미사일 실험을 시작)
1961.10
소련이 58메가톤급(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원자폭탄보다 파괴력이 4,000배 강한) 수소폭탄 실험을 함.
-61쪽

1962.7
알제리가 프랑스 식민 통치에서 벗어남. 하지만 프랑스는 1966년까지 알제리에서 핵실험을 계속함.
1963.8
핵실험에 반대하는 국제 사회의 압력이 커지자 미국과 영국, 소련이 일부 핵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을 체결(1996년까지 125개 나라가 이 조약에 서명). 이 조약으로 땅위와 물속에서 하는 핵실험은 금지되었지만 땅속의 핵실험은 계속됨. 그러나 프랑스는 모루로아 산호섬에서 땅위 핵실험을 계속하겠다고 발표.
1964.10
중국이 신장 지역에서 첫 핵실험을 함
1964.11
히로시마 시의회가 한국에 살면서 치료를 위해 일본을 찾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게 원폭 피해자 건강 카드 발급.
1965.12
베트남을 떠나 요코스카로 가던 미군 수송기 ‘티콘데로가 호’가 운반하던 전투기 한 대를 실수로 떨어뜨림. 전투기에는 조종사와 핵무기 한 대가 실려 있었는데 핵무기는 오늘날까지도 찾지 못함
1966.6
일본의 첫 원자력 발전소인 토카이 발전소 가동 시작
-62쪽

1967.1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를 지구 궤도 위로 쏘아 올릴 수 없다는 내용의 ‘우주 평화 이용 조약’이 체결. 다만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허용하기로 함
1967.12
일본의 사토 수상이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들여오지도 않겠다’는 비핵3원칙 발표.
1968.7
56개 나라가 서명한 핵확산금지조약(NPT) 조인. 이 조약에는 핵무기를 이미 갖고 있는 나라는 기존의 핵무기를 그대로 갖고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앞으로도 핵무기를 가질 수 없다는 불평등한 측면이 있음.
1969.2
일본 정부가 방어를 위해 핵무기를 쓰는 것은 헌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1969.6
일본의 핵 선박 ‘무추’ 진수
1970.4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히로시마에 세워짐
-62쪽

1972.3
1960년부터 1963년까지 미군이 30차례에 걸쳐 혼슈와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로 핵무기를 운반했다고 한 미군 병사가 증언.
1973.12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를 위한 병원이 문을 열다.
1974.9
일본의 핵 선박인 ‘무추’에서 원자로를 시험가동하다가 방사능이 새어나오는 사고 발생
1974.10
예비역 미 해군 장교가 의회에서 미국 군함이 핵무기를 싣고 일본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고 증언
(프랑스가 1975년부터 지하에서만 핵실험을 하겠다고 발표)
1975.6
미국 국방장관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함
1975.10
일왕 히로히토가 "히로시마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원폭 투하는 당시 상황을 볼 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말해 많은 논란이 일어남
1976.10
미국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에놀라게이의 기장이었더 폴 티베츠가 원자폭탄 투하를 재현. 일본의 원폭 피해자 단체가 이에 항의
1976.11
중국이 신장 지구에서 4메가톤급 수소폭탄 실험을 함
-63쪽

1977.7
소련의 인공위성이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서 핵실험 시설을 찾아냄
미국 대통령이 미국에서 중성자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내비침
원폭관련 피해자들을 일컫는 말로 ‘히바쿠샤’라는 낱말을 다같이 사용하기로 결정
1978.1
핵실험에 참가했던 34명의 병사들이 방사능병을 앓고 있다고 미국의 한 과학자가 미 하원 의회에서 증언
1978.11
오스트리아가 원자력 발전소 운영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함. 그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원자력 발전소 운영을 중단.
1979.8
히로시마의 날 기념 연설에서 히로시마 시장이 :"방사능 피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라고 말함
(팔라우공화국이 3번의 국민투표 끝에 세계 최초로 반핵 조항이 들어있는 헌법 채택. 주민의 79%가 새 헌법에 찬성)
(일본 수상 오히라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만큼보다 많지만 않다면 핵무기를 갖는 것이 일본 헌법에 위배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함)
-63쪽

1980.3
스웨덴이 원자력 발전소 운영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여 12기의 원자로만을 건설하되, 2010년까지는 이를 모두 가동을 중단하기로 결정
(영국의 맨체스터 시가 도시 안에서는 절대로 핵무기를 들이거나 만들거나 설치하거나 할 수 없다는 비핵화 도시 선언을 함)
1981.3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가 건설하고 있던 원자로를 폭격함. 이에 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이스라엘을 비난함.
1981.4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에서 전쟁을 벌임. 이 전쟁은 여러 가지 새로운 무기들의 실험장이 됨
1981.11
유엔 총회에서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군사 공격을 금지하기로 결의
1983.11
미국과 소련의 과학자들이 만일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뒤에 따를 길고 어두운 핵겨울이 인류를 멸종시킬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음
1985.2
뉴질랜드의 수상이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미국 전함의 입항을 금지
태평양의 13개 섬나라들이 남태평양을 핵이 없는 지역으로 삼는다는 라로통가 조약 채택. 프랑스, 영국, 미국은 1996년까지 이 조약에 서명을 거부
-64쪽

1986.1
1965년에서 1977년 사이에 미 해군에서 361건의 핵 관련 사고가 있었다고 미국의 한 민간 단체가 폭로
1986.4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핵무기 제조와 발전용으로 쓰던 원자로에 사고가 나서 원자로가 파괴되고 막대한 양의 방사능이 새어나옴. 이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병에 걸리고 유럽 전역에서 음식물이 오염됨
1986.9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 나라의 유일한 원자로였던 츠웬텐도프 원자력 발전소를 해체하기로 결정. 이 발전소는 1977년에 완성되었으나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1987.9
필리핀이 비핵 헌법 채택
1988.10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일본이 플루토늄을 선박으로 운송할 수 있다는 데 동의
-64쪽

19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핵무기 6기 개발(1993년 공식 발표)
1991.1
걸프전쟁 기간 동안 미군이 이라크의 핵 시설 공격
1991.8
히로시마 시장이 히로시마의 날 기념 연설에서 2차대전 기간 중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저지른 가혹한 범죄들에 대해 일본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함. 히로시마 시장은 또한 히로시마가 전 세계의 핵실험 피해자와 핵 시설 관련 사고의 피해자들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강조.
1992.3
일본이 아오모로 현 로카쇼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가동
1992.6
히로시마에서 열린 유엔 군축 회의에서 미국의 한 대학 교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백만 명이 넘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셈"이라고 주장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은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우라늄을 농축하거나 플루토늄을 제조하지 않겠다고 밝힘
1992.11
일본의 화물선 아카츠키마루가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플루토늄을 싣고 와 세계 여러 나라의 비난을 받음
1992.12
남한과 북한이 한반도를 비핵화하기로 뜻을 모음
-65쪽

1994.1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를 비핵화하기로 약속
1994.2
유엔 핵 사찰단이 이라크에서 40kg의 농축 우라늄 압수
1994.6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핵 폐기장 일부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들이 새어나옴
일본 정부가 ‘핵무기가 반드시 국제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제출하려 하였지만, 나라 안팎에서 비난이 일자 ‘핵무기 사용은 국제법의 인도주의 정신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고침
1994.10
농축 우라늄 600kg이 카자흐스탄에서 미국으로 비밀리에 빠져나감
1996.7
국제사법재판소(ICJ)가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그 위력을 과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국제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발표. 그러나 방아 목적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
1996.11
미국이 앞으로 5년 동안 옛 소련의 핵무기에서 나온 132톤의 농축 우라늄을 구입하여 원자력 발전소에 보내기로 결정
1996.12
제20회 세계 문화유산 위원회가 열려 원폭 돔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킴
1997.6
프랑스가 1985년에 지어진 원자로 슈퍼피닉스의 가동을 중단
-65쪽

1997.8
히로시마 시장이 일본 정부에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라고 처음으로 요구. 이러한 요구는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일본의 핵 정책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짐.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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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4-06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인가 히로시마 원폭 다큐멘터리를 받는데 참 세상에 있을 물건이 아니란 생각이 부쩍 들었습니당 ㅡ.ㅜ

마노아 2011-04-07 00:08   좋아요 0 | URL
기록을 보니 일본 정부 측에서는 저 무서운 걸 그 무서운 경험을 하고서도 적극 반영해 왔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었어요. 요새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기형 사진을 많이 봤더니 무척 심난합니다. 정말 세상에 없어야 할 물건이에요..ㅜ.ㅜ
 
인류의 위대한 여행
앨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 / 책과함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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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남자 아이들은 마을의 언저리에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갖고 놀고 있었다. 다듬은 나뭇가지를 화살을 쏘듯이 멀리 있는 흙더미를 향해 던지는 놀이었다. 이 놀이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테오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경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전통적인 부시먼의 방식이라고 했다. 부시먼을 연구해 온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부시먼들은 집단 안에서 뿐만 아니라 집단끼리도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57쪽

클릭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유전자를 연구해 온 유전학자들은 이 언어가 수만 년 동안 보전되어 온 것은 우연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클릭 언어는 우연이 아니라 사냥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데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다만 내가 부시먼들과 직접 사냥에 나서 보니 소곤대는 목소리는 잘 안 들려도 클릭음은 아주 잘 들리는 것은 분명했다. 내 생각에 높은 주파수를 가진 클릭음은 목소리만큼 널리 퍼지지 않기 때문에 사냥을 할 때 사냥감 모르게 사냥꾼끼리 대화를 나누는 데에 아주 적합한 것 같다. 물론 이 가설은 아직까지 전혀 증명된 바 없다.

-61쪽

부시먼의 작은 몸집이 더위를 빨리 식혀 주어 더운 지방에서도 오랜 시간 달릴 수 있게 해 주기는 하지만 사람이라면 모두 다 오래달리기를 할 때에 더위를 식혀 주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털이 거의 없어 땀을 잘 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땀샘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오래달리기를 하기에 적합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비록 다른 네 발 동물처럼 단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리지는 못하지만 오래달리기만큼은 어느 동물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영장류 중에는 우리처럼 오래달리기를 잘하는 동물이 없다.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말이나 개보다도 장거리 달리기를 더 잘 하니 말이다. (...) 물론 다리가 길면 걷기에도 뛰기에도 유리하다. 하지만 발바닥에 있는 스프링과 같은 힘줄 그리고 커다란 엉덩이 근육은 뛰지 않으면 별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사람의 몸은 오래걷기와 오래달리기에 적합하게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65쪽

미토콘드리아 DNA 계보는 전 세계인을 불과 몇 개의 계보로 나누기 때문에 내 조상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다. 자신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아든 참가자들은 인종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것인지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인종’끼리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인종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의미가 없는 개념이다. 이는 특정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체적 특징, 문화, 종교를 단순히 인종이라는 단어로 묶어버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실제로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77쪽

우리 인류가 가졌던 ‘원래’ 피부색은 검은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에 사람들이 햇빛이 적게 내리쬐는 북부아시아와 유럽으로 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굳이 검은색 피부가 생존에 더 유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피부색이 옅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과 똑같이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다. 어쩌면 북쪽 지방에서는 오히려 피부색이 옅은 사람이 생존에 더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 비타민D를 섭취하기도 하지만 우리 몸은 햇빛을 받아 피부에서 비타민D를 생성하기도 한다. 햇빛이 강한 지역이라면 피부색이 검더라도 피부에서 충분한 양의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일사량이 적은 북쪽 지방에서는 오히려 피부가 검으면 비타민D 합성에 방해가 되어서 비타민D 결핍이 일어나기 쉽다.
-169쪽

비타민D는 칼슘 합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비타민D가 부족하면 칼슘이 제대로 합성되지 않아 뼈가 약해져서 구루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구루병에 걸리면 팔다리뼈가 비정상적으로 휘게 되고 골반뼈가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에 여자의 출산이 힘들어진다. 따라서 북쪽 지방에 사는 사람의 경우에는 피부색이 점점 더 하얀 쪽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어쩌다가 나타난 하얀 피부색 돌연변이가 오히려 생존에 이점을 주게 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유럽인들의 검은색 피부가 점차 하얀색으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북아시아인들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텐데, 유럽인과는 다른 유전자 돌연변이가 생겼지만 결국은 같은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수렴 진화의 좋은 예이다.
-169쪽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 늘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는 한다. 기능주의적․생태학적 해석은 우리가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게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에게 진짜 중요했던 것은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가장 적합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262쪽

최후 빙하기 때의 시베리아 환경은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환경과도 매우 달랐을 것이기 때문에 과연 그 당시의 모습이 어땠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광대한 평원을 상상해 보자. 평원에 자라고 있는 풀은 모두 짧은 풀이었고 나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추운 기후와 연관시키곤 하는 순록이나 북극여우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따뜻한 기후와 연관시키곤 하는 치타, 하이에나, 표범 같은 동물도 함께 살고 있었다. 빙하기의 시베리아 환경은 극과 극을 왔다갔다 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훨씬 더 추웠고 여름은 심하게 더웠다는 이야기이다.

-265쪽

에벤크족의 인근 마을에 사는 야쿠츠족은 전통적으로 유목과 정착을 병행해 왔다. 그들은 말을 유목하면서 동시에 소를 길렀고 터키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 야쿠츠족이 남부 시베리아인들처럼 소를 키우고 터키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들이 13~15세기 경에 몽골이 세력을 확장하는 데 밀려서 북쪽으로 이동해 온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289쪽

에벤크족의 주식이 고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에게 심장 관련 질환이 널리 퍼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의 콜레스테롤 수치는 매우 낮다. 이들이 유전적으로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은 것일 수도 있고, 활동량이 많고 신진대사가 활발한 것이 나쁜 콜레스테롤을 줄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위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 결과도 에벤크족의 결과와 비슷한데 오메가3가 많이 들어 있는 생선유를 섭취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여러 부족들이 점차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포기하기 시작하면서 슬프게도 이 지역 사람들의 심장 관련 질병률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현대 문명이 만들어 낸 병이라고 여겨지는 심장 질환과 당뇨병은 이렇게 머나먼 북쪽 지방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

-293쪽

"중국에서 교육 받은 중국인으로서 저 역시 중국인의 조상을 중국에서 찾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하지만 과학자로서 저는 과학적 증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 연구 결과는 아프리카 기원설을 뒷받침합니다. 중국인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어요."

-329쪽

동아시아의 경우 농경의 시작보다 더 먼저 시작된 것이 토기의 사용이다. 1960년대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일본의 조몽 문화에서 사용된 약 1만3000년 전의 조몽 토기라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새로운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에 일본과는 무관하게 러시아의 동쪽 끝자락과 중국 남부 지방에서도 토기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34쪽

우리가 초기 구석이 유적을 분석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은 4만 년 이상 된 샘플의 연대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히 20세기 초반에 시행된 연대측정의 경우 잘못된 결과를 냈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54쪽

"사람들은 흔히 빙하기라고 하면 하얗고 험한 얼음으로 뒤덮인 곳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겨울이 추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봄과 여름에는 지금 같이 풀도 자라고 그걸 먹고 사는 동물들도 사방에 많이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빙하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인 매머드를 생각해 보세요. 매머드는 하루에 150kg의 풀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로네 계곡에서 수많은 매머드 뼈를 발견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털코뿔소, 순록, 말을 비롯한 다른 동물도 많이 발견했지요. 그만큼 이 지역에 먹을 것이 풍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겨울은 아주 춥지 않았나요?" 내가 물었다. "추웠지요. 하지만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호모 사피엔스는 먹을 것과 몸을 덮을 가죽, 불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399쪽

클라이브는 원래 전공이 동물학․생태학이었는데, 거기서 배운 지식을 이용해 구석기 고고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했다. 그는 인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석기의 형태가 아닌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던 곳의 환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환경과 사회 조직의 변화가 석기와 같은 기술의 변화를 유도한 것이지 그 반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문화와 기술의 차이는 결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지능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닌 환경의 차이일 뿐이다.

-412쪽

"최후의 네안데르탈인들은 아주 적은 수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멸종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클라이브는 기후 변화가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주된 원인이라고 믿었다. "지난 25만 년 동안 가장 혹독한 기후가 찾아온 그때가 바로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 때와 맞아 떨어지지요."
클라이브가 볼 때 네안데르탈인의 멸종과 호모 사피엔스의 탄생은 별도의 사건이다. 그 역시 다른 지역에서는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호모 사피엔스가 만났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423쪽

네안데르탈인은 몸집이 건장하고 팔다리가 짧은데 이는 길쭉하고 팔다리가 긴 현대 호모 사피엔스보다 신체적으로는 추위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구조이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빙하기의 유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우수한 문화를 가지지 못했다. 어쩌면 네안데르탈인의 몸집 자체가 이미 추위에 잘 적응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일구어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추위에 약한 신체구조를 가졌던 현대 호모 사피엔스는 이에 적응하기 위해 더 따뜻한 옷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개발해 오히려 유럽의 빙하기 기후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424쪽

예술이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었겠지만 고고학자들은 동굴 벽화를 통해 최후 빙하기 시대 사람들에 대해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예술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회 네트워크가 점점 더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동굴 벽화는 석기 제조 기술의 변천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굴 벽화는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옛날 사람들의 사회적․문화적 적응 방식이었던 것이다.
-452쪽

벽화가 그려진 동굴은 어쩌면 빙하기에 같은 집단의 사람들끼리 한곳에 모여 정체성을 확인하는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어요." 로블랑쉐가 말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각자의 영역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굴에 벽화를 그려 넣음으로써 여기가 내 땅이라고 표시를 했던 셈이지요. 교회가 마을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옛날에는 동굴이 한 집단의 중심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 한 곳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함께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은 긴 세월동안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교환된 정보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을 수도 있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동굴 벽화가 이러한 ‘정보 교환 시스템’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암각화처럼 말이다.
-452쪽

농경이 시작되면서 식량 자원이 안정적으로 공급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음식이 그다지 건강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기존에 고고학자들은 농경이 시작되면서부터 사람들의 건강 및 영양 상태가 좋아지고 평균 수명과 휴식 시간이 더 늘어났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진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그 당시 사람들의 뼈를 분석한 결과는 놀라웠다. 농경의 시작과 함께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467쪽

수렵 채집인들과 비교해 볼 때 농부들은 충치가 많았고 키도 작았으며 평균 수명도 짧았다. 뼈에는 각종 외상이 더 흔하게 나타났는데 이로 미루어볼 때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일이 더 잦아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전염병에 더 자주 노출되었다. 빈혈도 흔하게 나타났다.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좋아지고 평균 수명이 늘어난 덕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었다. 농경의 기원은 우리 조상들의 평균 수명을 단축시켰고 건강 상태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출생률이 높아지는 바람에 인구가 증가하게 된 것이었다. 고대 마을의 인구수를 추정해 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구석기 시대에는 인구 증가가 매우 더디었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만 하더라도 지구상에는 약 800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기원후 1800년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0억을 넘었다.
-468쪽

미국 정부가 유전자 분석을 통해 다양한 원주민 집단을 분류한 후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서 특혜 혹은 불이익을 주는 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유전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887년에 할당 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들은 원주민 피가 얼마나 섞여 있는지에 따라 나뉘게 되었다. 원주민 피가 절반이 안 되는 사람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땅은 자연스레 백인들에게 넘어갔다. 미국 정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반드시 원주민 피가 절반 이상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게끔 했다. 예술가들의 경우 정부가 인정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면, 자신이 만든 예술품에 ‘원주민’이 만든 예술품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지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다문화 국가인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이다.

-482쪽

"곰은 덩치가 크고 정해진 구역에서 살지요. 마치 사람처럼 말이에요. 게다가 곰은 사람처럼 동식물을 모두 먹는 잡식성 동물이에요. 곰은 열매, 뿌리, 곤충, 이외에도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은 물론이고 사슴이나 순록과 같은 큰 동물도 잡아먹습니다. 또한 곰은 물을 좋아해서 해안가에서 잘 살지요. 저는 곰이 해변의 돌 위에서 장난을 치면서 바닷게를 잡아먹는 것을 여러 번 봤어요. 곰이 산란을 위해 이동하는 연어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요. 사람 역시 곰이 먹는 것의 대부분을 먹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곰이 살기 적합한 환경에서는 분명 사람도 살기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495쪽

인류의 과거를 찾아 떠난 여행은 나에게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후손들은 어쩌면 지구 환경의 변화로 인해 다시 수렵 채집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5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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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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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투쟁’에 비해 군사적 측면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에 비해 투쟁은 무력충돌이 아닌 다양한 대립과 대결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점을 고려해 나는 문화전쟁이 아니라 문화투쟁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문화투쟁에서 말하는 문화란 정치, 사회, 경제 등과 같이 세분화된 특정 분야가 아니라 그 총합으로서의 문화다.
-62쪽

정조가 청산 대상으로 여긴 소품문의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글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종래 선비들의 애호를 받아온 "고문"과 어떻게 달랐을까.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형식 면에서 볼 때 소품은 고문에 비해 문장의 길이가 짧다. 구어를 많이 섞어서 사용한다. 그리고 고문과는 글의 구성 방법도 달랐다. 소재와 내용도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소품은 고문에서 불문율로 되어 있는 금기 사항을 무시했다. 사회적 소외와 개인의 비밀, 자질구레한 일상생활 등을 주로 다뤘다. 요컨대 생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115쪽

소품의 가장 큰 특징은 글쓰기의 주관성에 있다. 감성적인 글쓰기, 자기 고백적이고 감정이 듬뿍 담긴 주관적인 글이 소품의 대종을 이루었다. 자기 고백적인 산문의 출현, 이것이야말로 소품의 문학사적 기여였다. 소품을 좋아하면 자연히 성리학적 가치에서 멀어진다. 정해진 격식을 떠나 글쓴이의 눈으로 사물을 직접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가치의 다원화가 이루어진다. 중국에서 양명학파의 사상이 소품에 깊이 스며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정조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다. 왕은 이단의 문이 한 번 열리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이라며 걱정했다.
-115쪽

소품은 글의 성격상 글쓴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더러 그런 마음을 글로 옮기다 보면 글씨체 역시 글의 내용에 상응하여 비뚤고 기울어지고 나부끼는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정조는 이런 풍조를 참지 못했다.

-127쪽

그는 만물의 생육을 주재하는 조선의 왕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달마다 강우량을 기록했다. 적어도 신해년(1791) 이후 9년째 강우량을 기록해 왔다. 그것은 아마도 대궐에서 측정한 서울의 강우량이었을 것이다. 왕이 이런 기록을 사적으로 작성, 보관한다는 것 자체가 신하들에게는 하나의 ‘경이로움’이었을 것이다. 왕의 꼼꼼함과 치밀함은 조정 신하들을 감복시킬 때가 많았다.
-133쪽

박지원은 노론의 핵심가계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와 장인은 박지원이 명분 없이 출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또한 정조 초년의 정치적 상황은 박지원에게 대단히 불리했다. 예컨대 홍국영과 박씨들의 긴장관계가 문제였다. 박지원은 준론 탕평이 본격화되자 음직을 통해 벼슬길에 나아간다.
-151쪽

마테오 리치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해주되 단순히 유능한 신부가 아닌 정말 탁월한 신부만 엄선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선교 대상인 중국인들이-정확히 말하면 중국의 고관대작과 황실 인사들이겠지만-유식하고 똑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 파견된 초기 예수회 신부들은 하나같이 특출했다. 언어적 재능은 물론이고 인문과학적 박식함을 넘어 자연과학과 기술 또는 예술에 정통한 선교사들만 중국으로 건너왔다.
여기서 하나의 아이러니가 생겼다. 교황이 이끌던 서양의 천주교회는 과학과 근대에 대한 반동 세력이었지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기계문명의 애호자, 창달자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그런 흐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천주교회의 세계관이 이를 용인하지 못했다. 중국의 경우 18세기 후반경 선교사들의 기술적, 과학적 기여가 사실상 막을 내린 듯하다.
-188쪽

사료를 읽는 역사학자의 눈은 흐려지기 쉽다. 함부로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되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기도 어렵다. 역사학자인 나는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 기록을 통해 다른 기록의 거짓을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자와 역사학자는 영원히 술래잡기를 하는 셈이다. 하지만 때로 그들 둘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기록자와 역사가의 문제는 영원하다.

-233쪽

18세기 서양에 공산혁명과 거리가 먼 공상적 사회주의자가 있었듯, 강이천도 이를테면 그런 "공상적" 지식인이었다. 생시몽(1760-1825) 같은 이는 사적 소유 제도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했다. 하지만 아직 노동자계급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적 한계를 인식해 노동자계급을 단순한 구제 대상으로만 파악했다. 강이천도 비슷했다. 그는 한편으로 중국과 조선의 기성 왕조가 붕괴될 시운이 박두했다고 믿었고, 그날이 오면 자신을 비롯해 동지들이 뜻을 펴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고 예언과 소문 그리고 몇 가지 징후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242쪽

강이천은 정치조직을 만들어본 경험이 전무했다. 정치투쟁 이력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꿈꾸는 능력, 상상의 힘이었다. 그는 현실의 혁명가로서는 부적격했다. 그저 몽상적인 지식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몽상에 파괴적인 힘이 있었다. 당시 몽상의 힘을 바로 인식한 이는 아마 국왕 정조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강이천의 제어되지 않은 상상력이 현실과 단단히 결합될 경우 그것은 국가를 전복시키고 성리학 중심의 조선 문화를 여지없이 파괴시켜버릴 수 있다는 걱정, 왕은 바로 그런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246쪽

먼 훗날 일이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1909년 겨울, 일본의 거물급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했다는 이유로 신자인 안중근을 파문시킨 적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 공동체의 안전과 사회적 평판을 위해서라면 강이천 같은 이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314쪽

왕은 자신의 처지에서 휘두를 수 있는 최강의 무기가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하나의 답을 찾았다. 바로 문체반정이요, 글씨체의 통제였다. 왕은 지식계층을 상대로 한 사상검열과 세뇌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효과적인 장치는 과거시험이었다. 과거시험은 권력에 다가서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왕의 방침은 현명한 것이었다.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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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리뷰 - 이별을 재음미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 책 읽기
한귀은 지음 / 이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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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연인의 공통점은 의외로 많다. 때론 베개가 되기도 한다. 끝까지 읽어도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외출할 때마다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 짐이 되기 때문에. 그러나 기차 여행을 할 때는 동반하고 싶다. 침실까지 따라올 때도 있다. 겉모양이나 표지가 멋있다고 내용이 충실한 것은 아니다. 크고 두껍다고 많은 것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때때로 쓸데없이 비싼 것도 있다. 오래 묵히면 그것에서 추억의 냄새가 난다.

어쩌면 당신의 연인은 독특한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불행히도, 그 책을 읽을 줄 모르고 품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은 자기 자신조차도 하나의 책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연인에게 읽힐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별한 자는, 파지가 몇 장 섞인 불안정한 책이거나, 시인 기형도가 말했듯이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책일 것이다. 이제 당신이라는 책을 다른 책의 힘으로 다시 편집하고 제본할 차례이다.
-12쪽

자본주의에 살면서 자본주의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미를 따르고, 자본주의의 성공담을 부러워하며,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자신이 갇혀 있다고 느끼면서 박탈감을 느낀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을 재단하는 물신 이상의 신인 듯 여겨진다. 어쩌면 자본주의적 삶을 냉소하는 것만이 겨우 자본주의에서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61쪽

그런 사건(황순원 소나기)은 잊히지 않는다. 이별은 오래오래 인정되지 않고, 다만 기억 속에서 ‘사랑했던 시절’, 혹은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 ‘화양연화’로만 기억된다. 첫사랑이 그러하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첫사랑과의 이별을 오랜 기간 부정한 탓이다.

-92쪽

때때로 영화관을 혼자 찾을 때마다, 이렇듯 혼자인 사람들에게 영화관이 이별의 여행지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를 사랑스럽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영화는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나르시시즘을 채워줄 누군가의 말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씁쓸하게 인내된다.

-111쪽

크리스마스는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라기보다는, 별 일도 없는데 자신이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날이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집에 편안히 있으면서도 어쩐지 사회관계의 패자가 된 것 같은 열패감에 젖기도 한다.

한편으로 크리스마스는 연인들에게 사랑으로 가득 찬 날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 회의하는 날이 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가 상대에게 무언가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항상 기대치는 그 높이만큼의 실망을 예비하고 있다. (...)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기대를 해야 하는 날이 아니라 도리어 기대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날이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애쓰는 날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스스로 위로해야 하는 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텔레비전을 통해, 라디오를 통해 성탄특선을 하나씩 섭렵하는 것이다.
-117쪽

외로운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외롭지 않으려고 애를 쓸 때 자신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냥 물같이, 외로우면 그만이다.

-138쪽

이별할 때에도 공정거래법을 지켜야 한다. 상대가 그 법을 어기고 전횡한다면, 그 아픔을 어찌할 바 몰라 단지 자기 자신을 파먹으면서 집 안에서 유령처럼 떠돌거나, 부조처럼 벽으로 숨어들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한다. 그것이 또한 실존을 수호하는 방법이다.

-161쪽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실패를 완성해야 한다. 이별은 분명 관계의 실패이다. 이별이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고, 이별했지만, 실패는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별을 완성할 수가 없다. 이별은 도피해야 하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해야 하는 중립적인 것이다. 누구나 이별할 수 있고, 누구나 이별 때문에 아프다. 그 실패의 아픔은 반드시 겪어내야 할 과정이다.

-193쪽

좋은 이별은, 좋은 사랑을 위한 희망이 된다. 사랑했다면, 그것이 이별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존중은 계속되어야 한다. 억지로, 헤어진 연인을 떠나보내려고 할 필요는 없다. 찰나의, 그/녀와 찬란했던 순간이 섬광처럼 터졌다 지더라도,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기억은 그렇게 몸속 어디에서 폭죽처럼 켜졌다가 사위어가기도 하는 것이므로, 등 어딘가에서 폭죽이 터지고, 그것이 이내 뜨거운 눈물이 되더라도, 조금만 덜 안타까워하고, 덜 슬퍼하면 된다.

-202쪽

희망은 느리다. 희망에 대해서, 모든 연인들은 겸손해야 한다. 희망은 경계함으로써 비로소 도래하는 역설적인 것이다.

-251쪽

‘희망이 있느냐고…….’가 아니라, "희망을 믿느냐고……."이다. 희망은 ‘존재와 부재’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와 불신’의 문제일 것이다. 희망을 조심스럽게 믿는 사랑과, 희망을 불신하는 위악적인 사랑, 그것의 차이는 얼마나 깊은가.

-253쪽

나는 정신대 할머니처럼 직접 당한 사람들의 원한에다 그걸 면한 사람들의 한까지 보태고 싶었어요. 당한 사람이나 면한 사람이나 똑같이 그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였다고 생각해요. 면하긴 했지만 면하기 위해 어떻게들 했나요?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10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나요? 삼천리 강산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기쁨, 그 향기로운 숨결을 모조리 질식시켜버리니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죠.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 알겠어요? 《그 여자네 집 中》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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