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면 문지아이들 24
윤동주 외 지음, 최윤정 엮음, 한유민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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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고 간다

윤동주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72쪽

내가 쓴 글자

문명래

내가
나 때문에
부끄럽고

내가
나 때문에
속상한 날은

눈 덮인
들판으로 달려가
시린 손가락으로
하얀 눈 위에
글씨를 쓴다

'하느님, 제가 또 그랬어요'-78쪽

눈 내리는 밤

강소천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82쪽

호수1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88쪽

우리 엄마

임길택

밭둑에 앉아
"엄마, 이 꽃 좀 봐요" 해도
꽃 볼 새 어딨냐며
뒤도 안 돌아본다.

엄마 눈에는
마늘과 그 옆의 풀들만
보이나 보다.

노랑나비를 보아도
표정이 없고
무당벌레를 보면
징그럽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떠나 산다.-104쪽

키 작은 아이

노여심

그 애를 쳐다보고 싶지만
쳐다볼 수가 없다.
부끄러워할까 봐.

그 애 곁을 지날 때마다
내가 앉아서
손을 잡아 주고 싶지만
그만두고 만다.
울어 버릴 것만 같아서

짓궂은 아이가
그 애를 불렀다.
"야, 숏다리!
너의 아빠도 난쟁이지?"
나는 덜렁 겁이 났다.

키 작은 아이는
씨익 웃고 지나갔다.
나는 그때서야 말을 했다.
"야. 같이 가자."-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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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5권 - 개화기편,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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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도 나중에 아시아 연대론의 허구를 깨닫긴 했지만 러일전쟁 개시 당시만 해도 일본이 "황인종 전체를 위한 의로운 싸움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순국 직전까지 쓰다 만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을 머리로 한 평등한 자격의 한국․중국․일본의 연합과 백인 러시아 등으로부터의 공동 방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한국식민화정책으로 황인종의 조화로운 동맹의 건설 가능성을 박탈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황인종과 동양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137쪽

김종서 "각 종교가 주장하는 신자 수를 합하면 우리 인구보다 많다는 우스개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현상이 단순히 숫자 부풀리기가 아니라 여전히 중층다원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 가족 안에 여러 종교 신자가 혼재하고 불교나 개신교 신자이면서도 자녀 결혼시킬 때는 사주․궁합을 보고, 택일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생활 속에서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기보다는 수용하며 섞여 사는데 익숙한 것이죠."

-183쪽

이어령 "미국은 기독교 사회이지만 대통령이 아무 곳에서나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지 못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정말 희한하고 행복한 나라다. 서울 시청 앞마당에서는 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벌어지지만, 그곳에 세워진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나 연등에 시비를 거는 이는 없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한국 특유의 ‘엇비슷 신화’의 방증이다. 우리말 가운데 ‘엇비슷하다’는 말은 세계 어느 나라 말로도 바꿀 수 없다. 굳이 설명하면 ‘엇비슷’은 어긋났는데 비슷하다거나 닮았지만 닮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에 기독교와 불교를 엇비슷하게 보는 한국인의 의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어긋나고 비슷한 것이 하나의 단어가 된 것은 바로 한국인 특유의 포용의식의 상징이다. 우리 문화에는 21세기 다원주의를 흡수할 수 있는 여러 가치가 공존한다. 엇비슷하다는 말은 아시아적 화이부동 철학을 담고 있다."

-183쪽

조선시대엔 서울 종로2가에 있는 보신각에서 치는 종소리가 시계 역할을 했다. 종지기가 인경을 알리면 통행 금지였는데, 만일 이때 돌아다니다 걸리면 새벽 파루를 칠 때까지 꼼짝없이 붙잡혀 있어야 했다. 이때 생긴 욕 아닌 욕이 ‘경을 칠 놈’이라는데, 이 말은 바로 종치는 데 싫증이 난 종지기가 통금 위반으로 붙잡힌 사람에게 벌로써 종을 치게 했던 것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통금 위반자들은 곤장을 맞아야 했다.-187쪽

중국에서는 과거 응시자를 지역적으로 안배하여 특정 지역의 독점현상을 막았지만, 조선에서는 지역 안배를 위한 시도는 있었을망정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임시로 치러지는 비정기 과거는 지역 안배가 완전히 무시된 채 서울 거주자를 대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서울, 혹은 서울 인근에 거주하는 세도 높은 가문이 유리했고, 응시 기회도 많았다. 이것이 특정 가문의 후예들이 대거 국가 요직에 등용된 이유다. 특정 가문, 특정 지역 독식 현상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강해졌다. 다산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야 하며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사회적으로 재기하기 어렵다고 신신당부한 동시에 경고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260쪽

송준호 "중국이 조선과 달리 개방사회로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끝없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사람이 죽고, 나라를 오랑캐에 빼앗기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교 경전만 가지고 세상일이 다 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 결과 중국은 서자 차별도 없고, 본관 제도도 없앴고, 상인 천시 사고방식도 사라졌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외부 침략에 대응을 하다 보니 개방된 것이죠. 조선은 이런 역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때까지 오로지 유교 경전에 매달린 겁니다."--267쪽

한국에서 늘 종교 간 갈등은 있어도 유혈사태로까지 나아가지 않고 여러 종교들이 제법 사이좋게 평화공존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앙의 이유가 매우 실용적이기 때문에 종교 때문에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복룡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
"한국인에게 종교성이 높은 것은 우리의 풍토와 관련이 있다. 하천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향토애가 강하여 그것이 호국 사상으로 확대되고 끝내는 호국 신앙으로 승화되는 예는 얼마든지 있으며, 천수답을 주요 경작지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경천에 빠지기 쉬우며, 육식을 주로 하지 않고 채식을 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공격적이라기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등의 민족성이 종교성을 높은 이유로 지적될 수 있다."-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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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4-2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3쪽의 신복룡의 주장이 어디가 경청할 만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천 문화권이 향토애가 강하다는 건 그런 예가 있다고 하니 일단 지나가더라도, 향토애가 호국사상으로 확대된다는 건 말하는 이의 짐작이 너무 강하게 들어간 것 처럼 들려요. 개화기에 국가라는 개념이 명확했는지 호국사상이 호국신앙으로 넘어간건지 그것도 의문이구요.
거기에 채식을 위주로 해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이 종교성이 높은 이유로 지적되는 것도 어딘지 어색해요 --;

그러고 보니, 경청할 만하다,라고 했지 옳다고 한 건 아니네요. 엥~ 제가 괜한 소리 한 것 같아요 orz


마노아 2011-04-27 18:14   좋아요 0 | URL
농사를 짓고 살면 하늘과 땅과 물을 살펴야 하는 게 간절해지니까 그 영향으로 종교적 성향이 커지기 쉽다고 이해했어요. 채식이 평화를 사랑한다고까지 말하는 건 오버일지 몰라도 육식 위주의 식단보다는 덜 공격적일 거라고 생각해요. 어디서 그렇게 읽었던가, 들었던가... 가물가물하긴 하지만요.^^;;
아무튼 저는 한국인의 신앙이 실용적이라는 게 놀라웠어요. 이건 신앙 입장에서 덜 순수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한국적이다 라고 느끼게 되네요. ^^
 
한국 근대사 산책 4권 - 개화기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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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는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한동맹론을 내세우면서 일본 육군성에 군자금 1만 원을 기부하는 등 일본의 지원하에 정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용구를 통해 국내 구 동학조직을 진보회로 묶어 일본군의 군사활동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용구는 동학농민전쟁 때 맹활약한 동학의 실력자로 최시형이 잡힐 무렵에 함께 잡혀서 사형언도까지 받았지만 탈옥해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1902년 일본으로 망명한 손병희는 반일 반외세노선을 접고 개화노선으로 전향했다. 그리고 동학교단의 젊은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새로운 문물을 배우게 했다.)
-74쪽

실제로 개화기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바로 호기심이다.
-95쪽

송우혜 "승자가 패자보다 훨씬 더 막심한 상처를 입었던 이상한 전투, 여순 전투의 승리는 러일전쟁 전체의 승패를 갈랐다. 온 유럽을 떨게 한 저 위력적인 발트함대의 운명에도 막심한 영향을 미쳤다. 전투의 후일담도 유별나다. 여순 전투를 지휘했던 일본군 사령관 노기 장군의 두 아들은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것도 두고두고 그의 경력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귀국 후 노기는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의 자살을 하겠다고 청했다가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대꾸를 들었는데, 7년 뒤에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노기 부부는 천황의 장례식 날 나란히 할복자살, 여순 전투의 기이한 마침표가 되었다."
여순 전렴 작전에서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는 3만여 명이었던 반면, 일본군의 사상자 수는 6만여 명이었다. 사실상 일본 국민이 부른 피였다.
-115쪽

러일전쟁에서 내내 일본군을 괴롭힌 건 병사들의 질병이었다. 물로 인한 배탈과 설사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이때 만들어진 배탈․설사약은 나중에 러시아를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유로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28쪽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도고가 말은 바로 했다. 도고의 승리는 국가의 지원뿐만 아니라 영국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영국이 당시 그들의 통제 아래 있던 홍해의 수에즈운하 통과를 불허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아프리카 남쪽의 희망봉을 거쳐 지구를 반 바퀴나 도는 에너지․시간 낭비를 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129쪽

1905년 8월 8일,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협상 대표단이 미국 뉴햄프셔 주의 작은 해군기지인 포츠머스에 도착해 1년 넘게 끈 러일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회담을 시작했다. 러시아군 사상자 27만 명 중 사망자 5만 명 이상, 일본군 사상자 27만 명 중 사망자 8만 6000명이라는 참혹한 통계수치가 말해주듯 양쪽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일본군 사상자는 68만 9000명이며, 이중 전사자만 14만 5000명이었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이 이 전쟁에서 지출한 직접군사비는 14억 엔으로 청일전쟁의 전비를 6배나 초과하는 비용이었고, 1903년도 군사비의 10배, 국가 예산의 5배 가까운 액수였다. 그렇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139쪽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조선 백성이 분노에 떨 때 조선 주재 타국 외교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당시 한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는 모두 11개국이었고 공사를 파견한 나라는 일본․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청국 등 7개국이었다. 이미 공사관이 폐쇄되었거나 철수한 러시아와 일본 이외의 나라들은 미국이 앞장서는 가운데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서양 국가들 중 한국과 가장 먼저 외교 관계를 수립한 미국은 가장 먼저 국교를 단절하는 기록을 세웠다. 알렌의 후임으로 부임했던 당시 미국공사 에드윈 모건은 한국 민중이 보호조약에 반대해 철시를 하고 아우성칠 때 일본공사 하야시와 축배를 들고, 한국 정부에 고별의 인사 한마디 없이 서울을 떠났다.
-160쪽

이이화는 손병희에 대한 평가는 포폄이 엇갈려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군자금을 댄 일, 한일병합을 주장한 이용구를 상당기간 끌어안은 일, 돈을 민족운동 이외에 마구 쓴 일, 본부인말고도 첩을 둘씩이나 거느린 일 따위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또 최제우․최시형을 신으로 만들고, 자신도 성사와 인황씨로 추앙하게 한 것도 인간 중심의 동학을 신비주의로 변질시켰다는 입길이 따른다. 걸출한 인물에게도 흠집이 있다는 말로 호도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평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194쪽

1905년 10월 경무사 신태휴는 흰옷 대신 검정 등 짙은 색 옷을 입으라는 법령을 발포했다. 강압적이었다. 흰옷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을 잡아 염색을 할 수밖에 없게끔 옷을 더럽히는 수법이었다. ‘흰옷금지령’의 이유는 검은 옷이 편리하고 위생적이라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억지였다. 일본에서 수입된 색색의 옷감이 잘 팔리지 않았기에 나온 조치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4쪽

노주석 "지금까지 러시아가 적극 후원한 헤이그 밀사 파견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의해 무산됐다는 학설과는 달리 헤이그 밀사 사건은 대한제국과 만주, 몽골을 맞바꿔친 러시아의 냉혹한 국제외교의 부산물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유석재는 "훗날 러시아군의 장교가 된 이위종이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볼셰비키 혁명군의 편에 서서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가담한 것은, 이때 입은 배신의 상처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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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가족 레시피 -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
손현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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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라는 말이 정말 마음에 든다. 가출이라는 말은 왠지 불량스러워 보이는데, 출가라는 말은 자존감 높아 보이며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는 느낌이다. 나는 나를 욱하게 만드는 일들이 종종 일어날 때마다 참을성을 기르는 것이 곧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무언, 무반응으로 대처한다. 인내의 열매는 달다는 것. 단언하건대 나는 조만간 출가에 꼭 성공할 것이다.-12쪽

할매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뉴스 시작 전에 방송되는 홈드라마다. 그 시간대 드라마에는 노인이 빠지는 법이 없고, 대부분 노인의 권위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드라마를 볼 때면 할매가 어찌나 앙탈을 부려 대는지 귓속의 달팽이관을 빼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22쪽

삼촌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이든 주식이든 사연이 많은 건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하기야 사연으로 따지면 나처럼 사연 많은 아이도 없을 거다.-57쪽

두꺼비 같은 아빠의 손맛은 무척 맵다. 아빠는 화가 나면 고릴라처럼 변하면서 몸과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어른이 되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마법에라도 걸리는 걸까.-94쪽

미하일은 세몬과 살면서 그 질문의 답을 얻는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지혜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사랑이며,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산다는 게 그 답이었다. 미하일은 지극히 종교적인 이 세 가지 답을 깨닫고 하늘로 올라간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서 얻은 답이다. 모두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한 명도 없다.-103쪽

이 집에서 삼촌 하나만은 엄마를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엄마를 나이트클럽 댄서라는 이유로 괄시하고 그녀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소외시켰는데, 삼촌은 엄마를 사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해 주었다.
삼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게 한마디를 더 했다.
"그런데 여울아, 너 혹시 돈 가진 거 있니? 주식 오르면 팔아서 갚을 테니, 가진 돈 있으면 좀 꺼내 봐라."-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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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품절


掌篇 2

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12쪽

수문 양반 왕자지

이대흠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속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31쪽

감꽃

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60쪽

밀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79쪽

호랑나비돛배

고진하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파른 목조계단 위에
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
문득
개미 한 마리 나타나
뻘뻘 기어오더니
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
그러고 나서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
어쭈,
날개는 근사한 돛이다.
(암, 날개는 돛이고 말고!)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을 받는 돛배처럼
기우뚱
기우뚱대며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
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119쪽

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158쪽

월식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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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09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론 부페음식 같은 이런 옴니버스 시집도 괜찮죠~
전 정끝별이 선별한 '밥'이라는 시선집도 괜찮았어요~^^

마노아 2011-04-10 01:48   좋아요 0 | URL
헤헷, 생각보다 좋았어요. 정끝별 시인의 책도 지금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궁금해졌어요.^^

루쉰P 2011-04-0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대단한 독서의 양이시네요. 만화, 시집 등 끝을 알 수 없는 독서십니다. ^^ 시는 별로 읽지를 않아서 휘트먼이나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찬찬히 올려주신 시를 읽었는데 과연 자신의 생각을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하는 것은 대단한 힘이라고 느껴요. 특히나 '호랑나비돛배'란 시를 읽고 놀랐네요. 리뷰 속도가 그나저나 엄청나세요. 잠도 잊으시고 리뷰를 쓰시는 듯...음...독서오타쿠이삼.

마노아 2011-04-10 01:49   좋아요 0 | URL
만화는 무척 좋아하지만 시집은 가끔 읽어요. 시를 금방 읽는 것은 부끄럽지만 저는 급하게 읽을 때 시집을 선택하는 편이긴 해요.^^
저는 두꺼운 책은 무서워서 웬만하면 잘 안 건드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