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로부터의 편지
마크 트웨인 지음, 윤영돈 옮김 / 베가북스 / 2005년 7월
절판


인간들은 천국을 머리 속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에서, 모든 인간들이 첫손에 꼽고, 사실 우리 천사들도 최고로 치는 가장 큰 즐거움, 성교의 황홀경을 완전히 빼놓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찌는 듯한 사막에서 길을 잃고 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조해 준답시고 다가와서는 '원하는 건 다 줄게, 물만 빼고.'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지요. -23쪽

또 모든 사람이 하프를 켭니다. 천국에 있는 그 무수한 사람들 모두가 말입니다. 지구에서는 하프를 켤 줄 아는 사람이, 심지어 켜고 싶어하는 사람까지 합해도 천에 하나나 될까 말까 하는데도 말입니다.-28쪽

이곳 지구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증오합니다. 이 나라 저 나라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유대인을 미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과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천국은 숭배하고 또 가고 싶어합니다.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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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고 1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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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에야 금성에 다다랐다. 고을 수령 김목중이 내게 술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나를 만나려 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모두들 내게 다가서면 큰 병이라도 옮는 듯 몸을 움츠렸다. 유배 길은 배움의 길이었다. 그 길에서 나는 냉혹하고 무심한 세상을 보았다.-56쪽

강을 다 건넜어도 죽음의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맞이한 것은 얼어 죽은 시체였다. 채 자라지도 못한 소년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죽어 있었다. 진저리를 쳤다. 죽은 것은 소년 하나뿐이 아니었다. 얼어 죽은 시체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검은 새가 아쉬운 마음에 입을 쩝쩝거리며 하늘로 날아갔다. 무심한 세상이었다. 내가 어깨에 힘을 주고 글을 쓸 때 세상은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임금의 의중을 짐작하려 애쓸 때 세상은 눈과 바람으로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이 거친 세상에서 글이란,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김려는 무엇이며, 이옥은 또 무엇이며, 임금은 또 무엇일까.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세상이 사라지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58쪽

남이곤과의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세상 끝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임금에게 낙인찍힌 죄인을 그는 죄인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선 것은 죄인이 아니라 죽어 가는 사람이었다. 다시 이옥을 떠올렸다. 나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62쪽

내게 글 쓰는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네. 지루해서 할 일이 없기에 쓴 것일 뿐.
이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웠다. 글에 목숨 건다는 말보다 그냥 쓴다는 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옥에게 글은 공기요, 물이요, 밥이었다. 그의 곁에 그냥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이옥은 자기 삶 전체를 글쓰기의 현장으로 승화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116쪽

조선 시대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문학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가졌다.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의 지배층인 양반은 모두 문인이었고, 그들의 일상은 문학으로 이루어졌다. 문학 작품은 인간의 일상과 교직되어 있었으니, 친구가 찾아와서, 누가 죽어서, 술을 마시며, 한가해서, 흰머리가 나서 시를 지었다. 꽃을 보고, 달을 보고 시를 지었다. 이뿐인가? 집을 지으면 기문을 썼고, 친구가 책을 쓰면 서문을 썼다. 누가 죽으면 행장을 짓고, 제문을 짓고, 비문을 쓰고, 묘지를 썼다. 문학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글쓰기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금전적인 대가가 주어지지 않지만 문인으로 명성을 날린다는 것은 생을 걸어 볼 만한 일이었다.-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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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1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내내 속상하고 깨닫게 되고 그러더라고요

마노아 2011-05-16 21:32   좋아요 0 | URL
그 입장이 되어보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어휴...
 
상상목공소 -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김진송 지음 / 톨 / 2011년 3월
품절


인간의 사고 대부분이 언어중추를 통해서 일어나듯이 상상력 또한 대개는 언어작용에 의해 작동된다. 하지만 그 전에 언어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사회적 도구다. 아이는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사물을 구분하고 대상을 구체화시킨다. 언어적 소통을 통해 타자와 자신을 분리해내는 인식이 발달하며 또 언어를 통해 사회적 교감을 이루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러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사회적 억압에 익숙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어는 사물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사물과 현상의 여러 측면에서 얻어지는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다만 하나의 축소된 개념에 갇혀버리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라고 말하면 그것이 붉은 사과건 벌레 먹은 사과건 농부가 힘들여 가꾼 사과건, 그저 사과일 뿐이다. 사과라고 말하는 순간 사과가 지니고 있는 수만 가지의 다양한 측면이 사라져버리고 오직 ‘사과’라는 개념만 강요될 뿐이다. 언어는 늘 폭력적이다.

-21쪽

따라서 언어는 이미 인식의 제약을 전제하고 있다. 어쩌면 상상력은 언어가 제거해버린 대상의 다의성을 되살려내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언어작용일지도 모른다. ‘인식된 모든 것은 상투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이미 언어가 지니고 있는 관념의 상투성에 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언어에 포획되기 이전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사물과 현상 그리고 생각 그 자체의 본질에 접근할 때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지며 바로 이 과정이 창의성의 핵심이 된다. 그것은 종종 직관적인 이미지 언어를 통해 극복되기도 한다. 언어를 포함한 모든 고정관념에 매몰되지 않을 때 상상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22쪽

상상력은 모든 언어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메워주는 가장 간단한 수단이자 유일한 방법이며 또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인식의 원리이기도 하다. 언어가 간접적이며 시간적이고 구조적이라면 이미지는 직접적이며 즉흥적이고 공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미흡한 글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글에 이미지의 요소를 집어넣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흡하고 비어 있는 이미지의 공간을 글쓰는 이의 상상과 독자의 상상으로 채우는 순간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글을 즐겁게 읽는 까닭이다. 반대로 서사가 빠진 이미지에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언어를 최대한 확장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림을 보는 이유다. 이미지든 텍스트든 각각의 언어들은 결정적인 결핍의 요소를 갖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상상의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진다.

-23쪽

아마 톱니바퀴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시계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고 시계가 없었다면 인간이 시간을 제어할 수 있다는 착각도 없었을 것이다. 시간을 제어할 수 없음에도 인간은 시계를 통해 시간을 장악했다. 시계가 만들어진 이후 인간의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 인간들이 시간의 속도와 전쟁을 벌이며 과학과 기술 혁신에 가속도를 붙였고 사람들은 물질문명을 구가했다. 대신 시간을 뺏기 위한 전쟁이 일상 곳곳에서 벌어졌다.

-38쪽

이미지와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존재한다. 그건 틀림없다. 아무리 뒤죽박죽인 이야기도 스스로 흘러가기 위해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생각 위에 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공간의 한 귀퉁이와 시간의 축에 걸쳐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 이야기가 우연히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공기 중에 떠도는 생각의 입자가 몸속으로 들어왔다’는 말처럼 터무니없다.

-58쪽

세상의 모든 물질들은 이야기를 위해 존재한다. 아니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종이 위에 새긴 글씨건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건 컴퓨터 속에서 깜빡이는 빛이건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그런 건 아니다. 더 많은 이야기들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그 이야기들은 때가 되면 다시 그 어디엔가 달라붙어 살아 있는 이야기로 되돌아올 것이다.
시공간이 사라지고 나면 모든 이미지와 이야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들의 이야기가 망각의 입자로 사라지지 않는 한, 이야기들은, 이미지들은 언제나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59쪽

기계들이 줄지어 일하는 공장을 시찰하기 좋아하는 권력형 인간들이 그토록 기계에 집착했던 이유는 일사불란한 기계야말로 그 어느 아날로그의 유물보다 파시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기계적 생산방식에서 파시즘을 떠올리는 게 단지 연상만은 아니다. 산업화 이후 대량복제 시대의 유물은 기계뿐 아니라 일상을 조직하는 사회구조에 더 많이 남아 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계적 인간이 탄생한 계기는 방직공장에 늘어서 있는 기계들이 만들어주었음이 틀림없다.

-78쪽

아이를 낳고 아이가 점점 자라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인형을 품에 안겨준다. 아이는 인형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나와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학습한다. 하지만 어쩌면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타인의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욕일지 모른다.

-84쪽

기계는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이었다.

-90쪽

반복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아니면 인간에게 조건 지워진 물질을 구성하는 절대원칙일지도 모른다. 알에서 애벌레를 거쳐 번데기로 변하고 탈피와 우화를 거쳐 성충이 되는 벌레,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다시 씨를 맺는 식물,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다시 아이를 낳고 죽는 동물들은 수억 년을 거쳐 똑같은 반복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므로 반복은 생명의 조건이다.

-96쪽

벌레와 인간. 그들은 한 번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둘 간의 관계는 늘 적대적이었다. 인간은 수백만 년을 벌레에게 시달려왔음에도 벌레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확신한다. 벌레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목숨을 내어주면서도 자기의 길을 포기한 적이 없다.

-146쪽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말하는 것처럼, 애벌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며 인내하는 추한 존재이기만 한 것일까? 만일 어느 인간이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인생의 진리만 가지고 그가 살아왔던 나머지 모든 인생이 불완전하고 하찮은 삶이었을 뿐이라고 한다면 그게 옳은 일일까?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죽어라 노력한 어떤 사람에게 성공 이전의 삶이 불행하고 보잘것없는 삶이었다고 마음대로 떠벌린다면 그것만큼 터무니없는 말이 또 있을까? 매미가 되지 못한 굼벵이를 불쌍하게 바라보려는 시각은 결과만을 따지는 버릇에서 비롯된 어설픈 비유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165쪽

고도의 지능을 가진 인간들은 자신의 본질을 사물이나 눈앞의 대상에 전이시키는 데 능숙하다. 이를테면 하찮은 자신을 보고 벌레 같다는 비유를 함으로써 아무런 잘못도 없는 벌레를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

-166쪽

상상력에 관한 많은 오해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오해는 상상력이 동심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오해다. 그런데 한 가지 의심스러운 현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은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한다. 따라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창의력이 더 높을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어른을 뛰어넘은 수준까지 도달한 예는 거의 없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상상력이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상상력은 얼핏 무관해 보인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는 경험이 적은(그래서 순수한) 사람들이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이미 경험했던 대상에서 유추하여 대상의 형태와 성질 등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하게 된다.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반응은 빈약한 경험에서 비롯된 연상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쉽다. 경험과 사고의 부족에 기인한 엉뚱한 연상이 어른들의 눈에 기발한 상상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172쪽

어른들은 스스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눈앞에 등장했을 때도 그 세계를 자신이 알고 있는 경험의 세계에 밀어 넣어 버린다. 늑대가 눈앞에 등장하면 음험하고 사나운 동물이며 여우가 나타나면 교활한 동물이어야 한다. 그럴 때 사나운 늑대와 교활한 여우는 ‘사실’이 아니라 ‘논리’적 실재이다. 어른들의 일상은 이렇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설명이 가능한 영역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만일 자신이 구축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세계에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보이면 그들은 기겁을 하며 그것을 또 다른 논리로 메우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 자신이 구축한 세계 속에서 마치 고치 속에 들어가 있는 누에처럼 편안하고 안정된 세계가 완성되었다고 느끼며 만족한다.
-176쪽

사람들은 현실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어른들은 경험을 통하여 그 자신이 현실에서 밀려났을 때의 공포를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런 경험은 낯선 세계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도록 만들며,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게 만든다. 그들이 어쩌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조차 애써 그것을 외면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들은 상상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이며 ‘동심’의 세계이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이성’의 세계 속에 사는 어른들이 그곳을 기웃거리는 것은 유치한 행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영원히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가지지 않는다.
-176쪽

상상의 세계는 일상의 모든 부분에 걸쳐 있으며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영역에서 작용하는 세계이다. 현실적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작동해 왔고 또 작동되어야 하는 공간인 것이다.
상상과 현실은 구분되어 있거나 단절된, 서로 다른 공간이 아니라 뒤섞여 있는 동일한 공간이다. 상상은 무수히 많은 경험과 사고의 틈 속에 존재하며 그 틈 속에서 인간의 인식을 무한히 넓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따라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다. 일상의 경험 속에 매몰되어 상투성의 늪에 빠져 있을 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177쪽

최근 상상력과 창의성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럴 뿐이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생산성과 효율성이란 경제적 효과를 위한 사회적 필요에 의해 자주 거론된다. 이때 창의성은 개인의 사회적 성공과 목표 성취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 혹은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자질과 덕목으로 취급된다.
물론 상상력은 사회적이다. 창의적인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의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 발상이 뛰어난 한 개인에 의해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적 공간이 없다면 상상력과 창의성 또한 발휘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창의성 혹은 상상력은 통념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열린 사고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규준을 넘는 새로운 사고는 사회적 규준으로 평가될 수 없거나 측정되지 않는다.
-178쪽

모든 사회가 꽃에 대해 문화적으로 동일한 태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인 잭 구디의 말로는 아프리카에서는 꽃을 거의 사용하지도 않고 꽃에 부여된 상징성도 희박하다고 한다. 숲에 꽃이 널려 있어도 아름다운 여인에게 꽃을 따다 바치는 총각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꽃을 심미적 용도로 사용하는 데는 경제적 계층화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아프리카 부족 사회에는 유한계급이 없었고 소비경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꽃을 즐기고 꽃을 나누는 인간의 행위는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이라는 말이다. 가난한 어미에게는 장미 한 송이보다 옥수수 한 포대가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듯이 꽃에 대한 선호와 상징은 사회문화적으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212쪽

인간은 왜 꽃을 좋아할까. 부드럽고 하늘거리는 꽃잎의 감촉, 도발적인 색채와 매혹적인 향기, 무엇보다 형태적인 면에서 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꽃에게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꽃향기는 곤충이 서로를 유인하는 페로몬과 닮아 있고 곤충의 페로몬은 향수의 성분과 유사하다(꽃이 향수의 재료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즉 꽃의 형태와 색채와 향기는 인간의 성적인 충동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섹스에 꽃을 이용하는 데 익숙하다.

-228쪽

생태공원이나 호숫가의 구조물에도 방부목을 쓴다. 근처가 오염될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방부목을 없애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방부목을 사용한 이후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목재의 양을 엄청 줄일 수 있었다. 숲이 덜 파괴되게 하는 역할을 방부목이 톡톡히 해낸 것이다.

-242쪽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자연의 양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인간의 삶의 속도는 자연의 삶의 속도마저 뒤바꾼다. 이를테면 돼지의 평균수명은 칠 년이지만 실제로 세상 모든 돼지의 평균수명을 계산해보면 칠 개월에 불과할 것이다. 도축하기에 가장 적절한 나이가 돼지의 평균수명이다.
닭이나 소, 돼지만이 아니다. 인간이 선택한 대부분의 꽃은 씨를 맺기도 전에 잘려 꽃병에 꽂힌다. 수반 위에 아름답게 장식된 꽃은 일생의 반을 빈사상태로 보낸다. 어시장의 물고기들은 운명을 스스로 마치지 못한, 자연에서 폐기된 시신들이다.
-243쪽

인간의 삶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소수자의 현명한 선택은 자연의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을 천천히 낭비하자는 것. 자연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소비하는 현대의 삶을 조절하지 않고는 사람 사는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자연과의 조화를 방해한 주범으로 지적되는 게 과학이나 물질의 발전이지만 따지고 보면 과학적인 방법 말고 인간이 자연과 조화할 수 있는 길은 쉽게 찾아질 것 같지도 않다. 이를테면 화석연료를 대치하는 새로운 에너지원은 과학적 발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몽상에 불과하다. 이제 과학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아마 과학기술의 최종 발전 단계는 자연을 가장 적게 소비하는 방법을 찾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로 이어질 것인가?

-244쪽

현대인은 배움에 중독된 동물이다. 배움에 관한 수만 가지의 좋은 말들을 다 제쳐두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배움이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거나 무엇을 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으면 불안해 견디지 못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학습중독증 환자다.

-276쪽

창작이든 작업이든 일에 대한 두려움이 배움의 장으로 이끈다. 그러나 배움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은 생각이다. 스스로의 생각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남에게 배워서도 알지 못한다. 꼭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배워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일의 필요성이 덜 하거나 일을 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기 쉽다.

-277쪽

진실에 대한 오해나 오류가 인간에게 숱한 성공과 실패, 희망과 비극을 가져다주었지만 사실 진실이나 오류 그 자체가 문제되었던 적은 거의 없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그렇듯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문제는 오류나 오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확신 혹은 진리를 전유하려는 다툼이다. 그것은 진실과는 또 다른 인간의 문화이자 생태이자 행동양식이다.

-305쪽

자연의 물질과 현상, 생물의 본능과 생태 그리고 인간의 느낌과 감각 그리고 경험의 언어들은 언어 이전의 언어이자 지식 이전의 지식이다. 자연의 현상이나 생태적 본능 혹은 감각의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에서 열리는 상상의 세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가능성일 것이다. 그럴 때 상상력이란 인간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해준 신의 선물이 될 것이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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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3월
품절


1월 14일 박종철
1987년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재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 숨졌다. 경찰은 박종철의 ‘대학문화연구회’ 선배로 수배 중이던 박종운의 소재를 캐기 위해 그 전날 자정께 박종철을 연행했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개연성을 확인한 부검의의 용기 있는 증언이 나온 뒤 고문 사실을 시인하고 수사 경관 두 사람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한 혐의로 구속했다.
그 죽음과 연루되었던 선배 박종운 씨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 5공 정권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나라당의 후보로 경기도 부천 오정구에서 출마해 세간의 탄식을 자아냈다.
-26쪽

1919년 1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파리의 프랑스 외무부 청사에서 시작됐다. 이것이 파리강화회의다. 그 해 5월까지 계속된 이 회의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조지,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주도했다. 파리강화회의에는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의 출석이 허가되지 않았고 약소국들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았다. 이 회의의 결과로 체결된 여러 강화조약을 뭉뚱그려 파리강화조약이라고 하는데, 그 조약들은 구체적으로 독일에 대한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 오스트리아에 대한 생제르맹 조약(1919년 9월), 불가리아에 대한 뇌이 조약(1919년 11월), 헝가리에 대한 트리아농 조약(1920년 6월),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세브르 조약(1920년 8월)이다.
-30쪽

1월 22일 김상옥
1923년 1월 22일 일제하 독립운동가 김상옥이 자결했다. 향년 33세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하의 무장독립투쟁이나 테러 활동 같은 직접적 민족해방운동은 대체로 민족 구성원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923년 오늘 자결한 김상옥 의사도 그 예다. 조선조에서 가장 큰 혜택을 누리던 왕족이나 양반을 비롯한 상층 계급에서 무력 독립운동의 투사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민족사의 슬픈 대목이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자칭 ‘주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명예심이다. 그들은 친일을 외치던 그 입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애국을 외치면서도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만큼 둔감하거나 교활했다.
-34쪽

1월 30일 김창룡
1956년 1월 30일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 길에 암살당했다. 이 사건의 배후는 육군 중장 강문봉으로 밝혀졌다. 공식 문서에는 김창룡의 생년이 1920년으로 돼 있어 죽을 때 나이가 36세지만, 그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16년생이다.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 김창룡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주류를 자처해 온 우익 세력의 가장 흉한 몰골을 표본화하고 있다.
김창룡이 관동군 시절부터 익힌 첩보와 공작 기술 그리고 무자비한 파괴/공격 성향은 최고 권력자 이승만의 필요에 적절히 부응했다. 그가 소위가 된 1947년부터 암살된 1956년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커다란 시국사건 뒤에는 거의 어김없이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의 손에 걸려든 사람들 가운데는 진짜 공산주의자도 있었으나, 단순히 이승만의 정적 그리고 김창룡 자신의 군대 내 라이벌도 숱하게 끼어 있었고, 많은 수는 자기도 모르게 용공 조작 사건에 휘말린 애매한 사람들이었다. 1992년에는 백범 김구의 암살도 그가 지시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서울 관악산 근처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8년 초 대전 국립현충원의 장군묘역으로 옮겨졌다.-42쪽

2월 23일 배정자
1870년 2월 23일 구한말 일제 시대의 친일반민족 행위자 배정자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1951년 서울에서 몰.
배정자의 아버지 배지홍을 처형함으로써 어린 분남(배정자의 아명)을 길거리로 내몬 것이 민씨 일파였다.
그녀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고, 사다코(정자)라는 이름도 이토에게서 얻었다. 그녀는 일제의 한국 병탄 이전에나 이후에나 일관되게 일본의 밀정으로서 정치 공작에 종사했다. 배정자의 81년 삶 속에는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과 확인이 힘든 소문/전설들이 뒤범벅돼 있다. 국권 피탈 이전에는 이토의 앞잡이로, 이후에는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앞잡이로 그녀가 종사한 첩보 활동이나 선무 공작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확인된다. 그리고 그녀가 세 번 결혼했다는 것과 그녀 남편들의 행적도 확인된다. 그러나 배정자의 삶을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더 많은 요소들은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이다.
배정자는 1948년 반민특위가 체포한 여섯 명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66쪽

3월 11일 데아미치스
한국에는 사랑의 학교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쿠오레(1886)’는 토리노의 초등학교 4학년생인 엔리코의 일기라는 틀에다 조국애/우정/용기/효도/겸손/박애/존중 따위의 주제를 담아내고 있다. 이탈리아의 한 학기가 시작하는 10월부터 학년 말 방학이 시작하는 그 이듬해 7월까지의 각 달을 한 챕터로 삼았다. 엔리코의 일기가 뼈대를 이루고 있지만 더러 아버지/어머니/누이가 엔리코에게 쓴 편지가 첨부돼 있고, 각 챕터마다 담임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 달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이 달의 이야기’ 가운데는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이야기가 많다.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아펜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쿠오레’는 이탈리아어로 ‘마음’ ‘심장’이라는 뜻이다.



-82쪽

3월 23일 파시스트당 결성
1919년 3월 23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전투자동맹을 결성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첫 파시스트 정당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파시스트 정당이었다.
파시즘은 ‘전투자동맹’의 ‘동맹’, 이탈리아어로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본디 ‘묶음’이라는 뜻이고 확대된 의미라야 ‘결속/단결’ 정도였지만, 오늘날에는 독특한 정치적 의미, 즉 국수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지극히 반공적인 정치 운동의 주체를 뜻한다. 파쇼주의, 즉 파시즘은 대체로 반합리주의, 불평등한 인간관, 폭력 숭배, 엘리트주의, 인종주의 따위를 구성 요소로 삼는다.
-94쪽

3월 31일 데카르트
1596년 3월 31일 프랑스의 철학자 겸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투렌라에서 태어났다. 1650년 몰. 데카르드는 1649년 스웨덴 알렉산드라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청으로 스톡홀름에 가 여왕의 개인 교사가 되었는데, 매일 새벽 다섯 시에 레슨을 받기 고집한 여왕가 함께 어쩔 수 없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다가 폐렴에 걸려 죽었다. 스웨덴에 온 지 넉 달 만이었다.
‘굴절광확’ ‘기상학’ ‘기하학’ 세 논문에 대한 서론으로 집필된 ‘방법서설’은 1637년에 네덜란드에서 간행되었는데, 놀랍게도 플아스어로 집필되었다. 데카르트가 살던 시절에 학술 서적은 라틴어로 쓰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이 저서는 학문 탐구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학문적 생애를 이야기하는 형식에다가 학문 연구의 방법과 형이상학/물리학의 개요를 담아냈다. 그러니 이 책은 논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102쪽

4월 6일 모르몬교
1830년 4월 6일 24세의 미국 청년 조지프 스미스가 뉴욕주 맨체스터에서 "고대 기독교의 부활"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모르몬교이 창시를 선포했다.
1843년 스미스는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일부다처제를 인정한다고 선포해 중혼규탄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았고, 그 이듬해 반대파에 의해 옥중에서 살해됐다. 이 악명 높은 일부다처주의는 한동안 모르몬교의 상표였는데, 스미스는 생전에 50명의 여성과 결혼했다. 중혼 관습은 대법원의 개입으로 금지됐고, 교회 내부에서도 1895년에 중혼을 금하는 결의를 해 일단락됐다. 스미스가 죽은 뒤 모르몬교는 다처주의에 반대하는 그의 아들 일파와 이에 찬성하는 브리검 영 일파로 분열됐다. 브리검 영은 원래 감리교 신자였다가 1832년 모르몬의 성서를 읽은 뒤 모르몬교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는 신자들을 이끌고 1847년에 유타주의 주도 솔트레이크시티로 이주한 뒤 이곳에 본부를 두고 교세를 크게 확장했다. 유타주는 지금도 모르몬주로 불릴 만큼 인구의 다수가 모르몬교 신자다.
브리검 영은 생전에 27명의 아내와 56명의 자녀를 두었다.
-110쪽

4월 12일 보스토크 1호
1961년 4월 12일 세계 최초의 유인 인공위성인 옛 소련의 보스토크1호가 발사됐다. 탑승자는 유리 가가린. 한 시간 29분 만에 지구 상공을 일주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된 가가린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감상을 ‘지구는 푸른빛이었다’라고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쪽’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을 단 인공위성은 그 뒤 6호까지 발사됐다. 제3호와 제4호는 하루 차이를 두고 발사됐는데, 가장 접근했을 때 두 인공위성의 간격은 5km로서 최초의 그룹 비행을 했다. 우주 랑데부를 위한 예비실험이었던 셈이다. 제6호에는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인 테레슈코바가 탑승했다.
유리 가가린의 유리는 조지 워싱턴 할 때 조지의 러시아어형이다. 그 스페인어 형은 호르헤, 이탈리아어형은 조르조, 독일어형은 게오르크다. 이 이름들의 기원은 그리스어 이름인 게오르기오스다. 게오르기오스는 ‘땅에서 일하는 사람’ 곧 ‘농부’라는 뜻이다. 맨 처음으로 게오르기오스라는 이름을 지녔던 사람은 농부였을까? -116쪽

4월 14일 타이타닉호 침몰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께. 영국 화이트스타사가 건조한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거대한 빙산과 충돌했다. 두 시간 40분 가량의 아비규환 뒤에 그 배는 해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승선자 2천 208명 가운데 1천 523명의 희생자를 낸 사상 최대의 해난 사고였다. 타이타닉호는 4월 9일 아일랜드의 퀸스타운을 떠나 뉴욕항으로 처녀 항해 중이었다. 총 톤수 4만 6천 328톤, 길이 259.08m, 너비 28.19m, 깊이 19.66m, 속력 22km의 타이타닉호는 바다에 떠 있는 15층짜리 궁전이었다.
타이타닉호는 즉시 sos를 포함한 온갖 조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타이타닉호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던 캘리포니안호는 우연히 무전기를 꺼놓고 있었다. 타이타닉호가 조난 신호로 쏜 꽃불을 캘리포니안호에서는 불꽃놀이라고 생각했다.
-118쪽

4월 20일 나폴레옹 3세
1808년 4월 20일, 뒷날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을 거쳐 제2제정의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될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1873년 몰.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 1세와 3세를 배출한 보나파르트가의 전성기는 나폴레옹 1세가 제위에 있던 19세기 초일 것이다. 그 당시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는 스페인의 왕이었고, 동생 루이는 네덜란드 왕, 또 다른 동생 제롬은 베스트팔렌 왕이었다. 형제들만이 아니라 누이동생들도 한자리씩 차지했다. 엘리자는 토스카나 대공비였고 폴린은 이탈리아의 보르게제 공비였으며, 카롤린은 나폴레옹의 부장 뮐러와 결혼해 나폴리 왕비가 되었다.
-124쪽

4월 22일 지구의 날
지구는 태양계에서 고등생물이 서식하는 유일한 행성이다. 그래서 ‘하나뿐인 지구를 사랑합시다’라는 구호는 상투적인 만큼이나 절실하다.
-126쪽

4월 26일 게르니카 폭격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군을 지원하던 독일 공군이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던 바스크 자치정부의 수도 게르니카를 폭탄으로 도배했다. 파시스트 세력끼리의 군사적 협력을 노골화한 이 폭격으로 1천 600명이 죽고, 900여 명이 다쳤다.
1936년 7월 프랑코가 이끄는 모로코 주둔군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었다. 이 내전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좌파와 우파를, 우파와 우파를, 좌파와 좌파를 분열시켰다. 예컨대 프랑스의 우파는 대개 프랑코의 반란을 지지했지만, 클로델이나 베르나노스 같은 가톨릭 작가는 파시즘과 스페인 교회를 비판하고 나섰다. 당초에 프랑코의 반란에 호의적이었던 모리악도 결국 공화파 지지로 돌아섰다. 좌파 내부에서도 스탈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분열했다. 승리를 파시스트에게 돌아갔다. 양심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130쪽

5월 14일 조명하
1928년 5월 14일 대만 타이중시 다이쇼조 도서관 앞에서 23세의 조선 청년 조명하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군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에게 독검을 던졌다. 조명하의 독검은 구니노미야의 왼쪽 어깨와 목을 스쳤다.
구니노미야는 현장에서 죽음은 모면했으나 그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사망했다.
조의사는 그 해 7월 대만 고등법원에서 황족 위해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순국했다. 1945년 민족해방의 가장 큰 동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연합국의 승리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해방을 향한 민족적 열망과 그 열망을 최일선에서 구현한 여러 선열들이 있었다. 그들이 자기 희생적 실천으로 노현한 그 열망이 없었다면, 우리의 해방은 훨씬 더 늦춰졌을 것이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일제에 대한 소극적 순응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른 이들이 있었다. 역사를 잊은 이에게 역사는 반드시 복수한다. 박정희 기념관이 세워져서는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다.
-148쪽

6월 13일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323년 6월 13일 마케노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죽었다. 33세.
알렉산드로스는 문무 겸전의 군주였다. 당대 최고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돼 그에게 온갖 학문을 가르쳤다. 알렉산드로스는 호메로스의 시를 애독해 원정 때도 시집을 지니고 다녔다. 알렉산드로스는 세 번 결혼했지만, 여자들에게는 별 취미가 없었다. 그가 탐하던 몸은 남자들의 것이었다. 그가 18세가 되어도 여성과 동침을 하지 않자 아버지 필리포스 2세와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캄파스메라는 이름난 매음녀를 궁전으로 불러 아들에게 열락을 경험하게 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캄카스메의 갖은 교태에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애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페르시아 출신의 미소년 바요아스다. 바요아스는 대왕의 첫 번째 원정에서부터 그를 동행했고,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함께 있었다.
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종족적 자부심이 매우 강해, 자신들의 군주가 동성애자라는 사실보다 그 군주의 가장 가까운 애인이 페르시아 사람이라는 점을 더 불편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178쪽

6월 14일 스토 부인
1811년 6월 14일 미국의 소설가 해리엇 비처 스토가 코네티컷의 리치필드에서 태어났다. 1896년 몰. 스토 부인은 장편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으로 유명하다.
켄터키주의 흑인 노예 톰이 주인을 바꿔가며 겪는 비참한 삶을 그린 이 소설은 통속적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지만, 그로부터 11년 뒤 남북전쟁의 와중에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링컨 역시 켄터키주의 호젠빌 출신이다. 켄터키 흑인 노예들의 슬픈 운명은 포스터의 우수에 찬 가곡 ‘켄터키 옛집’에서도 에둘러 노래되고 있다.
노예 제도는 사람이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평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노예 제도는 외국인 노동자나 혼혈인들을 멸시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고, 여성들을 깔보는 남성들의 마음속에 있고, 장애인들을 백안시하는 비장애인들의 마음속에 있다. 그것은 차이의 권리를 권리의 차이로 바꿔치기하는 우리들의 교활함 속에 있다.
-179쪽

6월 18일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18일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났다.
이틀 전부터 워털루에서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12만 5천 프랑스군이 웰링턴 지휘하의 영국군 9만5천 그리고 블뤼허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12만 등 20여만의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다. 6월 16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다음 18일 영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으나, 또 다른 프로이센군의 내원으로 4만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했다. 22일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됐다.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의 기묘한 점은 그가 전제군주이자 정복자였으면서도, 한편으로 자유주의와 혁명 사상의 전파자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비록 프랑스혁명을 탈취했지만, 프랑스혁명의 자식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이 절대 군주는 유럽의 다른 절대군주들의 적이었고, 이 정복자는 해방자이기도 했다.
-183쪽

8월 5일 마릴린 먼로
1962년 8월 5일 미국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가 36세로 죽었다. 약물 과용 탓이었다. 그녀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우발적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마릴린은 그때 전 남편인 야구 스타 조 디마지오와 다시 결합하기로 하고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둘째 남편 조 디마지오와 셋째 남편 극작가 아서 밀러를 포함해 세 번 결혼했다.
배우 겸 가수 이브 몽탕과 프랭크 시나트라, 영화 제작자 조 솅크,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 미합중국 대통령 존 케네디(와 어쩌면 그의 동생인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 같은 널리 알려진 이름들이 그녀의 ‘베드메이트(bedmate)' 리스트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 가운데 그녀를 진정으로 존중한 남자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234쪽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았다. 그로부터 꼭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 미국 군정이 폐지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 우리는 독립을 얻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를 흔히 해방기라고 부르는데, 문학평론가 김윤식 씨는 이 기간의 한국을 ‘해방공간’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해방 공간은 나라 만들기의 작업장이면서 분단체제의 원공간이기도 했다.
외세와 외래 이념이 휘두르는 원심력을 감당해 내기에 우리 민족의 내적 역량은 충분치 않았다. 그리고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해방공간은 단순히 다사다난이라는 말로는 형용이 미진한 격동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 속에서 송진우/여운형/장덕수 등의 거물 정치인들이 차례로 암살됐고, 정치 집회와 파업과 폭동은 끊일 줄 몰랐다.
-244쪽

8월 27일 부전조약
1928년 8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미국/프랑스 등 15개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여 부전 조약, 곧 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가 조약의 규정을 위반했을 경우에 그에 대한 구체적 제재 수단을 명시하지 않아 실효성을 담지 못했다. 다만, 전쟁이 불법이라는 것을 명문화한 조약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군국주의는 일반적으로 군대만이 아니라 민간 사회의 재향군인회, 우익 단체, 군수 자본가들에 의해 떠받쳐져 있다. 특히 전쟁의 유혹이 군수 자본가의 이해와 연결돼 군산복합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평화 교육에서 거듭 강조돼야 한다. 전쟁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흔히 인종이나 종교 사이의 갈등이므로 반인종주의, 세속주의, 개인주의도 평화 교육의 지향점들이 돼야 한다. 결국 타인에 대한 관용의 확산이야말로 전쟁을 막는 심리적 무기다.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속언은 군국주의자들의 금과옥조였지만, 전쟁 준비는 늘 전쟁으로 마무리됐다.

-256쪽

9월 3일 호치민
1969년 9월 3일 베트남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호치민이 79세로 타계했다. 그는 1946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초대대통령을 지냈다.
호치민은 성년이 된 뒤 일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았지만, 그의 공산주의는 20세기 베트남의 가장 큰 대의였던 민족해방운동과 한몸을 이루고 있었다.
호치민은 공식적으로는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지도자였지만, 그의 이름은 외세에 맞서 싸우는 남북 베트남 민중 전체의 단합을 상징했다. 남북을 통틀어 그런 지도자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부러워할 만한 점이다. 정약용을 깊이 흠모해 그의 기일을 손수 챙기기도 한 호치민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263쪽

9월 11일 아옌데
1973년 9월 11일 오전 9시, 무장을 한 채 자신의 관저인 모네다궁에 남아 있던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그때까지 군사 반란군이 유일하게 접수하지 못한 국영방송 마야가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해 마지막 대국민 메시지를 남겼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것입니다. 마야가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조국의 운명에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사람들이 싸워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우리의 아름다운 거리들이 다시 개방돼 시민들이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더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271쪽

그 직후 아옌데는 모네다궁으로 밀고 들어온 반란군과 맞서 싸우다 살해됐다. 65세였다. 의과 대학 출신의 아옌데는 25세에 칠레 사회당에 참여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당 서기장이 된 그는 1970년 대통령 선거에 좌파 정당들의 연합체인 인민연합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인민연합은 집권 뒤 대기업과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고 무상교육/무상의료 등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는 한편, 쿠바와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미국과 국내 우익 세력은 아옌데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마침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육군참모총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육해공 삼군과 경찰의 연합 쿠데타를 조직해 아옌데를 제거했다. 아옌데가 몸을 피했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했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의 대통령’은 조국의 민주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했다.
-271쪽

9월 17일 광복군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대한민국 광복군이 출범했다. 총사령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광복군은 이준식/공진원/김학규를 각각의 지대장으로 삼은 3개의 지대로 편성돼 출범했고, 1941년 1월에는 주로 전지 공작원들로 구성된 제5지대가 발족해 전후방 공작 업무를 수행했다. 나월환이 이끈 이 부대가 제4지대가 아니라 제5지대로 명명된 것은 이런 공작활동 때문이다. 정규군에 호응해 적의 후방에서 각종 모략/파괴/간첩 활동을 하는 비밀 집단이나 그 집단의 구성원들을 오열(제5열, 또는 제5전선)이라고 부르는 관습은 스페인 내전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이 말은 일반적으로 간첩/스파이와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광복군은 1941년 12월 9일 대일 선전을 정식으로 포고했고, 이를 계기로 좌파 군사조직과의 합류를 추진해 그 이듬해 7월에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으로 맞아들임으로써 그가 이끌던 조선의용대를 흡수했다.
-277쪽

1989년 9월 28알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72세로 사망했다. ‘피플파워’라고 불렸던 민중 봉기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지 세 해 만이었다. 마르코스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다. 항일운동 경력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대통령이 된 민간인으로서, 선거 부정이 촉발한 민중 봉기로 하야해 하와이에서 죽었다는 점에서 그는 이승만을 닮았다. 그러나 독재 체제의 강화 과정과 정적 탄압 방식에서 그는 박정희를 더 닮았다.
어느 점에서 마르코스는 박정희보다 더 나아갔다. 김대중을 납치하고 가두면서도 살해하지는 못했던 박정희와 달리, 마르코스는 정적 베니그노 아키노를 백주 마닐라 공항에서 살해했다. 그 정적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는 세 해 뒤 대통령궁의 새 주인이 되었다.
-288쪽

10월 18일 낭트칙령 폐지
1685년 10월 18알 프랑스의 신교도에게 조건부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던 낭트칙령이 폐지됐다. 당시 국왕은 루이 14세였다. 낭트칙령은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가 낭트에서 공포했다.
젊은 시절 프로테스탄트로서 위그노 전쟁(1562-1598)에서 활약했던 앙리4세는 즉위 직후 내전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신교도에게 제한적인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는 이 칙령을 공포했다.
특별법정의 구성은 가톨릭에게 크게 유리했는데도 가톨릭측은 계속 불만을 드러냈고, 마침내 절대군주 루이 14세가 이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신교도의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박탈하기에 이르렀다. 낭트칙령이 폐지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프랑스 신교도 가운데 30만 명 가량이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 등 이웃나라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대개 뛰어난 기술자/상인/군인들이어서 프랑스는 막대한 산업적/군사적 손실을 입었다.
-310쪽

10월 31일 인디라 간디
1984년 10월 31일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도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 67세.
인디라 간디의 뒤를 이어 인도 총리가 된 장남 라지브 간디도 1989년 총선 패배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두 해 만인 1991년 5월 21일, 유세 도중 꽃다발 속에 장치된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모자가 똑같이 정치적 반대자들 손에 살해된 것이다.
1948년 1월 30일에 암살당한 그 위대한 사상가는 간디 모자와 친인척 관계가 없다.
인디라 간디는 인도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하를랄 네루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녀 집안은 북인도 카슈미르 지방의 부유한 브라만 계급에 속해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아버지처럼 인디라도 옥스퍼드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옥중의 네루가 어린 딸에게 보낸 편지들은 뒷날 ‘세계사 엿보기’라는 제목으로 편집돼 전세계 독자들에게 읽혔다. 인디라 간디는 인도 독립 뒤 아버지를 도우며 정치 훈련을 받았고, 네루에 이어 총리가 된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1966년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이어 인도의 세 번째 총리가 되었다.

-323쪽

11월 2일 마리 앙투아네트
1755년 11월 2일 프랑스 루이 16세의 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1793년 몰.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고,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1세다. 그녀는 빈의 황궁에서 태어났지만, 38년 뒤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죽었다.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성적으로도 무능했던 남편을 제쳐놓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살던 베르사유궁의 트리아농관으로 수많은 애인을 불러들였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그녀의 전기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가 낳은 자식들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고 한다. 루이 16세가 무능하되 검소했던 데 비해, 왕비의 낭비벽은 프랑스의 재정을 흔들거리게 할 정도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은 참혹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녀가 형편없는 여자였다는 사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명성황후 민씨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했지만, 그것이 민씨를 좋게 볼 이유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325쪽

11월 10일 창씨개명
서양 사람이나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인의 성은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일생 동안 변하는 일이 없다. 굳은 맹세를 하면서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면 "성을 갈겠다"고 말하는 관습이 아직 남아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은 성을 가는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긴다.
1939년 11월 10일 일제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조선 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도입하면서, 그 이듬해 2월부터 8월 10일 사이에 모든 조선인이 ‘氏’를 결정해 제출할 것을 명령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의 시행이다.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의 징표로서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골적인 친일 인사들의 일본 이름이 우리에게 슬픔을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가 1975년 경기도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하 장준하는 생전에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셋 있는데, 첫째는 오카모토 미노루, 둘째는 다카키 마사오, 셋째는 박정희"라고 말한 바 있다. 세 사람은 동일인이다.
-333쪽

11월 19일 게티즈버그
1863년 11월 19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대통령 링컨이 민주주의 역사에 남을 만한 연설을 했다. 링컨은 이날 남북전쟁의 격전지인 게티즈버그의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는 식전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건국이념을 강조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병사들이 자신들의 목숨과 맞바꾼 목적에 더 헌신할 것을 다짐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 목적이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를 지상에서 소멸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이것은 흔히 ‘링컨의 5분 연설’이라고 불린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가 동시적으로 구현될 때에만 가능하다. ‘인민에 의한’만이 강조될 때, 정치는 대중의 변덕과 이기주의에 이끌리는 포퓰리즘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인민을 위한’만 강조될 때다. 이때 정치는 흔히 ‘수호자주의’라고 불리는 엘리트 독재로 변질될 수 있다. 수호자주의는 공자나 플라톤에 기원을 둔 위계적 사상이지만, 그것은 20세기의 좌익 이론인 레닌의 전위당 이론과도 결합해 수많은 독재정권을 낳았다.
-342쪽

11월 20일 톨스토이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가 82세로 작고했다. 유럽 문학사에서 19세기는 소설의 시대였다. 그 소설은 프랑스/영국/러시아 세 나라를 중심으로 꽃피었다. 톨스토이는 작품의 양으로나 질로나 그 시기 유럽 문학을 대표할 만한 너더댓 사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노벨 문학상에 제정되고도 10년이다 더 산 그가 그 상을 못 받았다는 사실이, 이 상 운영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한 근거로 제기되고 있을 정도다.
-343쪽

11월 30일 처칠
1874년 11월 30일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옥스퍼드셔에서 태어났다. 1965년 몰. 처칠은 ‘대영제국’의 마지막 지도자였다.
대독 유화론자였던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1940년 5월 총리가 된 처칠은 전시 거국내각의 지도자로서 의회에서 한 첫 연설을 통해 "내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이 연설은 동료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영국인 전체를 하나로 묶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전쟁을 견뎌내게 한 힘이 되었다. 처칠은 이 전쟁에 대한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처칠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이 권위 있는 상이 정치적 고려에 휘둘린 치명적 예로 자주 거론된다.
-353쪽

12월 4일 남산 제2호 터널
1970년 12월 4일 서울 남산의 제2호 터널이 개통됐다.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 있는 높이 262m의 남산은 북악산/낙산/인왕산과 함께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다. 조선조 초기에 서울이 왕도로 정해졌을 때는 다른 여러 산과 함께 왕도의 위곽을 이루었지만, 오늘날엔 ‘남산’이라는 이름과 달리 서울 한가운데에 자리 잡게 되었다. 남산의 옛 이름은 목멱산이다. ‘목멱’은 ‘남산’을 뜻하는 중세어 ‘마뫼’에서 왔다고 한다.
-357쪽

12월 6일 파농
1961년 12월 6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프란츠 파농이 미국 메릴랜드 주 베세스다의 한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작고했다. 36세. 생전의 소원대로 그의 유해는 알제리에 묻혔다. 그가 죽은 이듬해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파농은 알제리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난 흑인이다. 그는 프랑스의 리옹 의과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뒤 정신과 의사가 되었고, 대학 시절에 사귄 백인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고, 죽을 때까지 프랑스 시민으로 살았다.
그가 보기에,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었고 이성을 지닌 신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이고, 더 큰 폭력 앞에서만 항복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마르티니크 출신 흑인이 대서양 건너편 아랍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파농은 혁명의 국제주의를 실천했다. 그 점에서 그는 토머스 페인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후예였다. 그러나 그와 더 닮은 사람은 체 게바라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질병은 진료실에서가 아니라 사회 변혁의 과정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59쪽

12월 14일 워싱턴
1799년 12월 14일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67세로 작고했다. 워싱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버지니아주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독학으로 토지 측량관이 됐다. 버지니아 대표로 1774년과 그 이듬해의 대륙회의에 참가했고,d l 회의에서 영국에 대한 무력 항쟁이 결정된 뒤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해인 1789년에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재임 중인 1793년에 일어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유럽의 분쟁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수립했다. 이 원칙은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워싱턴은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됐지만 민주주의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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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절판


"벌써 점심시간이야? 방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로즈메리가 시계를 본다. 바늘이 있는 진짜 시계다. 디지털 시계는 한때 유행하다 사라졌다. 천만다행이다. 뭔가를 만들 줄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언제나 깨달을까?-295쪽

"나이를 먹다 보면-얀콥스키 씨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 얘기에요.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요. 아무튼, 나이를 먹다 보면,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 오랫동안 소망해온 것이 진짜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진짜라고 믿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정말로 인생의 일부가 되잖아요. 그런데, 남들이 거짓말 말라고 다그치면-나는 상처를 받겠지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다 잊어버려도, 누가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절대 잊을 수가 없겠지요. 얀콥스키 씨의 말대로 맥긴티 씨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맥긴티 씨가 왜 화가 나셨는지 이해할 수 있으시겠지요?"-298쪽

"그런 유태인 새끼는 쓸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입 조심해!" 내가 소리친다.
월터가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대체 왜 그래? 이봐, 너는 유태인도 아니잖아? 유태인이야? 이런,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다들 하는 욕이잖아." 그가 말한다.
"그래. 그냥 다들 하는 욕이야." 나는 고함을 지른다. "다들 하는 욕인데, 나는 다들 하는 욕에 아주 질렸다고. 배우는 일꾼에게 욕을 하고, 일꾼은 폴란드 사람에게 욕을 하고, 폴란드 사람은 유태인에게 욕을 하고. 난쟁이는-자, 말해 봐, 월터. 그냥 유태인과 일꾼이 싫은 거야? 아니면 폴란드 사람이 싫은 거야?"
월터가 얼굴을 붉히며 바닥을 내려다본다.
"싫어하지 않아. 싫어하는 사람 없어." 잠시 후에 덧붙인다.-355쪽

나는 쓸쓸하게 사십팔 호 차 창문을 바라본다. 우리에게 코끼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말레나에게 어떻게 꺼내야 할는지. 난감하다. -520쪽

"굉장했지. 맞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나. 제길, 어제 일은 기억이 안 나도, 그때 일은 기억나."-535쪽

그 당시 뉴욕의 공식적인 사형집행 방법은 전기의자였다. 교수대에서 전기의자로 바뀐 건ㅅ이었다. 톱시가 목이 매달리는 대신 감전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소동을 멈추었다.
첫 번째 처형은 실패로 돌아갔고, 두 번째 처형은 성공했다. 톱시가 청산가리를 섞은 당근을 먹은 것이 첫 번째 처형 때였는지 두 번째 처형 때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에디슨이 처형장에 영화 카메라를 들고 온 것만은 확실하다. 에디슨은 톱시의 네 발에 샌들을 신기고 구리 전선으로 잡아맸다. 그러고는 육천육백 볼트의 전류를 연결했다. 오천 명이 넘는 구경꾼이 보는 앞이었다. 에디슨은 이 실험을 통해서 교류 전기의 위험성이 증명되었다고 믿었으며, 전국 각지를 돌며 이 필름을 상영했다.-549쪽

제이콥은 로지(코끼리)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코끼리는 지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동물이자, 상당히 똑똑한 동물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를 알아보는 동물은 인간, 원숭이, 돌고래, 그리고 코끼리뿐이다. 가죽도 꽤 두꺼워서(2.5cm), 서커스단 동물 감독 오서스트가 갈고리로 마음껏 찍어도 생명에는 지장 없다. 한편, 코끼리는 술을 좋아하고 복수심이 강한 동물이다. 1998년 12월, 1999년 10월, 2002년 12월, 인도에서는 불만을 품은 코끼리들이 마을을 쑥대밭을 만드는 사건이 있었는데, 최소한 몇 마리의 코끼리는 술에 취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을 상징인데, 그것이 코끼리의 잘못은 아니다.-553쪽

소설의 주인공 제이콥은 지금 아흔 살 혹은 아흔세 살의 노인이다.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이, 정확히 말해서, 올해가 몇 년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이. 더 정확히 말하면 알 필요가 없는 나이. 내가 있길 기대하며 거울을 볼 때마다 웬 낯모를 노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곤 하는 나이. 희미한 눈동자 뒤에서 아무리 열심히 나의 흔적을 찾으려 해봐도 소용없는 나이. 야단맞는 것에 익숙해지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데 익숙해지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나이. 온전한 정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 되는 나이. "이제부터 내리막길이야. 금방 끝이 나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정신만은 온전하길 바랐는데. 정말 바랐는데."-554쪽

노인 제이콥은 한탄한다. "사실 이제 내 진부한 이야기를 가지고는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그것을 그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도 없다. 내가 겪은 이야기는 모두 다 유행이 지났다. 나는 스페인 독감, 자동차의 첫 등장, 일이차 세계대전, 냉전, 게릴라전, 스푸트닉을 직접 경험했고 그에 대한 경험담을 들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봤자 이 모든 것은 이제 오래전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한테는 오래전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제 더이상 새로운 경험을 할 가능성이 없다. 그게 바로 늙는다는 것의 실상이다.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나는 아직 늙고 싶지 않다."-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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