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이야기 1 - 최초의 경제학자 관중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1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구판절판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황하를 비롯한 큰 물줄기들 주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들이 탄생했다. 또 노예를 대신하여 일반 백성들이 생산을 담당하는 농업국가의 틀과 왕조의 조세체계와 상비군이 만들어졌다. 전국시대 말기에 마침내 진이 경쟁자인 6국을 겸병하고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루었고, 한이 이를 계승하여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의 몸체가 탄생했다. 그래서 춘추전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뼈대가 탄생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뼈대 위에 육체와 정신이 덧붙여져 오늘날의 중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15쪽

중국 문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서는 후발주자다.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최초의 중국 왕조인 상(商)은 기원전 1600년 무렵에야 출현한다. 그러나 이 후발주자의 뒷심이 만만치 않았다.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중국은 오리엔트의 제국들과 버금이 되고, 급기야 기원전 3세기 무렵 진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이 되면 이미 세계의 서쪽에는 중국 제국과 비견할 제국이 없었다.
진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신흥 강국인 로마는 아직도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힘겹게 제2차 포에니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25쪽

중국의 상나라(기원전 17세기~기원전 11세기)시기, 서아시아에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히타이트 네 제국이 경합하고 있었다. 기원전 9세기경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차지하는 제국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진정한 제국은 아시리아를 이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691~기원전330)다. 이 제국은 그 영역과 인구의 방대함, 문화의 복합성, 통치제도의 정교함 등 모든 방면에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라 할 만하다.

-26쪽

크기 면에서 현대 중국의 약 1/3에 해당하는 춘추전국의 무대는 페르시아 제국의 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는 대체로 몇 세기 후 로마 제국이 인구와 맞먹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3,500만 명에서 7,000만 명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제국은 인구 면에서도 확실히 춘추전국의 두 배 정도는 되는 듯하다. 이처럼 거대한 세계 제국을 이룬 페르시아도 기원전 4세기 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어이없이 멸망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잠시 약탈했을 뿐이고, 제국의 구성요소들은 이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나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제국의 핵심은 그대로였다.

전국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비하면 페르시아 시대와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벌어진 서아시아의 전쟁은 낭만적일 정도다.
-29쪽

페르시아는 부유한 대제국이었지만 전국시대의 중국 각국들과 같은 무시무시한 군국주의 국가는 분명 아니었다. 또 몇 세기 후에 등장하는 로마 제국만큼의 철저한 호전성도 없었다. 제국에 속해 있는 민족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페르시아는 이들에게 세금을 낼 의무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충분한 금은 용병을 쓰기에 적절했고, 그 용병이 인도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 민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특별히 건드리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그리스 세계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하는 듯했고, 유목민으로 바뀌고 있던 스키타이가 남하할 이유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말 항상 하수로 보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의 중장보병이 서쪽에서 몰려와 불과 10년 만에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장악했다. 세계 최대 제국의 운명치고는 싱거웠다.

-31쪽

수도 페르세폴리스는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그때 왕궁에는 12만 탈렌트의 황금을 포함한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있었는데, 이 금은 당시 5세기 아테네 제국의 300년 치 국민소득에 해당된다고 한다. 최소한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페르시아는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동시대 중국의 나라들과 같은 제국 내부의 극렬한 투쟁을 겪지 않았다. 춘추 말기와 전국시대의 무대는 페르시아의 무대보다 크기는 작지만 그 투쟁의 강도는 몇 배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33쪽

영토의 크기만으로 보면 로마를 거대 제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성기 로마가 지중해 전체를 다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지중해라는 바다는 황하와 장강 유역의 육지보다 작다. 그리고 그들은 고대의 아시리아나 페르시아 같은 고대 문명의 후계자라고 할 수도 없는 문화적인 변방인들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문명은 확실히 동방만큼 화려하지 못했고, 로마의 출발은 분명히 작았다. 그러나 이 후발주자는 페르시아 제국보다 훨씬 호전적이었다.

-36쪽

로마와 한나라의 규모는 정말 흡사하다. 이를 통해 추론해보면 전국시대 말기에도 중국의 인구는 3천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216년 그 유명한 칸나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 군단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때 한니발의 군단은 5만 명, 로마 군단은 8만 5천 명이었다. 이런 정도의 병력 규모는 전국시대의 한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숫자보다 적었다. 그러나 그 후 로마는 급격히 팽창한다. 기원후 2세기 안토니우스 황제 시절 로마는 약 45만 명의 훈련된 군인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로마의 전성기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에는 국민 모두가 군인이었고, 전투에 동원된 규모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런 규모의 전쟁은 세계사에서 오직 중국 땅에서만 펼쳐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구나 면적 면에서 춘추전국의 규모를 넘는 페르시아가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중원 각 나라들처럼 그렇게 격렬하게 싸우던 세계는 없었다. 단 후대의 로마가 비슷한 수준에 접근했을 뿐이다.
-38쪽

역사의 중심이 북경이나 남경으로 가기 전에 낙양은 명실공히 중원의 중심이었다. 낙양은 유유한 곳이지만 기백이 있는 군주들은 낙양의 축축한 공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주나라가 힘이 약해지자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왔고, 강대한 한 제국이 약해지자 다시 동쪽 낙양으로 옮겨왔다. 낙양의 역사도 서안만큼 강건하지는 못했다.

-46쪽

기원전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그렇게 화려할 수 없다. 철제 갑옷에 멋진 안장, 등자를 딛고 말 위에 올라 달리며, 오늘은 여기에서 내일은 저기에서 싸우는 무사들, 들판을 수놓은 막사들과, 그 안에서 촛불을 켜고 전략회의를 하는 장군들. 그 멋진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고대에 대한 환상에 빠져들고, 전쟁을 무슨 게임처럼 생각한다. 알다시피 금속 등자는 기원후에 만들어졌다. 천으로 만든 병사들의 막사는? 그런 좋은 막사가 있었다면 동양 최초의 역사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경』에서 병사는 왜 그리 불평이 많았겠나? 새하얀 천으로 만든 천막이란 장군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귀한 것이다. 비나 눈을 만나면 병사들은 얼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 기원전에는 눈비 오는 날은 대체로 싸움을 멈췄다. 또 그런 계절에는 아예 싸움을 피했다. 『손자병법』에서 하늘의 때와 지리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땅의 조건은 삶과 죽음의 조건이었다.

-61쪽

서유럽에서 ‘신의 채찍’이라 불리던 훈족의 대침공을 묘사할 때 로마 군단과 대적하는 그들의 강인한 말과 기동력을 열심히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로마와의 대비를 강조하다 보니 급기야는 로마의 적을 거의 완전한 야만인 수준으로 다룬다. 기동력과 야만성이 그들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헝가리 초원이 얼마나 넓기에 10만 이상의 훈족 기병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기병 한 명이 최소한 말 다섯 마리를 보유해야 한다면, 헝가리 초원의 풀은 키가 몇 미터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한의 반 정도 되는 헝가리 초원에 도착한 후 훈족은 실제로는 말 10만 마리 남짓에, 기병 만 몇천 명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훈족은 최소한 다뉴브 강을 건넌 후부터는 ‘보병’이었다.
-62쪽

그렇다면 그들은 야만적인 유목민의 강인함으로 로마를 제압했을까? 로마군이 동맹군이듯 그들도 동맹군을 이끌고 싸웠다. 훈족의 수령 아틸라의 동맹에는 동고트족을 비롯한 온갖 민족들이 섞여 있었다. 남쪽의 로마나 북쪽의 훈족이나 모두 온갖 정치적인 힘을 다 동원하여 싸운 것이다. 훈족도 연맹, 조공, 협상, 압박, 전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상대와 대결했고, 이길 때는 용감하고 질 때는 비겁했다. 유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았고 유달리 초인적이지도 않았다. 이렇듯 전제에 편견이 생기면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 해석의 함정이다.
그래서 역사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곧 팩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팩트, 기록이나 유물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62쪽

1950년대 장사 오리패의 전국시대 무덤에서 뿔로 만든 활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그러니 최소한 전국시대에는 각궁을 사용한 셈이다. 왜 각궁을 말하는가? 각궁의 사정거리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만약 「고공기」의 내용대로 활을 만든다면 최대 사거리가 거의 300m에 달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병사들이 이런 활을 갖지는 못했겠지만, 당시의 활도 사거리 몇십 미터에 불과한 기원전 유럽 등지의 활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했던 것이 틀림없다. 주로 타림 분지의 사막이나 초원에서 뿔 재질의 활이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이 각궁 제조기술은 변방에서 중국으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74쪽

『사기』는 주족이 동방에서 기원했다고 한 뒤 그 계보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사기를 무조건 믿지 않을 필요도 없지만 다 믿을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족은 관중 일대의 융(戎)족과 결합한 연합세력으로 이들의 문화는 동쪽 중원의 문화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융’이라는 말은 갑옷과 창을 결합하여 만든 것으로 무기, 갑옷, 전차, 병력 등의 의미로 파생된다. 중원인들이 보기에 융은 군사적으로 강한 이민족이라는 의미가 있다. 주족은 이 융과 연합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원을 압도할 수 있었다. 후대의 진(秦)나라도 역시 융의 땅에서 흥성했고, 융을 모두 제압했다. 융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진은 강해진 것이다. 주나라도 마찬가지다.

-95쪽

필자는 두 가지로 상나라와 주나라가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서주시대부터 비로소 신의 세계를 벗어난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인간’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서주에 이르러 진정한 ‘정치’가 탄생한 것이다. 주나라는 전쟁에 더하여 소프트 파워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 정점은 봉건제다. 필자는 역사상 주가 이룩한 두 가지 업적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는 신과 인간을 분리시킨 인간 혁명, 또 하나는 무력과 이념을 본격적으로 결합시킨 정치혁명이다.

-102쪽

아마도 상나라 말기(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와 비슷한 시기였을 트로이전쟁기. 땅 위에서는 사람들이 싸우고, 그 사람들 위에서는 신들이 대리전을 치른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라는 대서사시를 쓰던 기원전 8세기, 그때 서주시대는 막을 내리고 동주시대가 열렸다. (...)
승패는 목마로 결정되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겼다. 인식의 차이였다. 사람의 일은 결국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은 무심했고, 트로이는 멸망했다. 동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103쪽

신화의 세계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세계에는 인간 행위의 결과만 있을 뿐이다.

-104쪽

당시 상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의 인구를 1천만 명 정도로 보는데, 이는 오늘날 서울의 인구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사람이 한 사람 죽을 때 수백 명이 따라 죽고, 제사 한 번 지낼 때 많게는 무려 천 명을 함께 죽인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주대에 이르면 사람으로 제사 지내는 일은 거의 사라진다. 순장도 동주시대가 되면 급격히 줄어든다. 사람 희생을 거부하고 순장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나라의 예를 언급한다.

-106쪽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주례』나 『의례』 따위는 「가정의례준칙」만큼 한심해 보이지만 그것도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이었다. 상이나 주는 모두 노예제 국가였음이 분명하지만, 노예에 대한 대우는 질적으로 달랐다. 앞으로 노예가 점차 사람 축에 끼다가 결국은 국가의 재상이 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시대가 바로 춘추시대다.

-107쪽

힘으로 이길 수 없을 때 다른 수단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은 국제정치의 기본이다. 『주례』의 복잡한 체제는 주나라 정치의 섬세함을 말해준다. 이제는 순수한 힘이 아니라 존왕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외양을 쓴 힘이 등장한다. 오늘날 말하는 소프트 파워다. 주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했다. 동천으로 이미 유명무실해진 주나라 왕실은 그 후로 500년도 넘게 살아남는다. 주나라 사람들이 만든 제도, 법률, 관념 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힘을 발휘했다. 반면 상나라에는 주에는 있는 ‘정치’가 없었다. 상의 정치 부재는 국내외적으로 전쟁과 폭압으로 드러났다.

-108쪽

상은 전쟁을 너무 많이 수행했다. 그리고 그 전쟁을 기본적으로 약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상나라가 계속 수도를 옮기는 이유도 잦은 약탈전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좌전』에는 상의 마지막 왕이 동이와의 싸움에서 힘을 다 빼서 나라를 망쳤다고 쓰여 있다. 사면에 강한 적을 두고 싸우면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서주시대와 춘추전국시대 전반에 걸쳐 모든 국제정치의 제1원칙은 절대로 한꺼번에 두 방면의 적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시대의 강대한 진도 연횡이나 원교근공 등의 외교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했다. 그러나 상은 그야말로 무모할 정도로 정면승부를 했다. 적이 약하면 잡아오고, 강하면 전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적을 많이 죽여서 겁을 주려는 정책은 역효과만 냈다.
-111쪽

주나라의 국토운영 전략은 힘의 부족을 인정하는 만큼 현실적이었다. 그러고는 그 현실적인 조치에다 그럴듯한 정치적인 수사를 씌웠다. 주는 상이 남긴 유산을 다 취했다. 그리고 이름만 바꾸어서 주나라의 것으로 했다. 주는 상이 남긴 역법을 건졌고, 제사를 취했다. 상나라의 제사는 주에서 ‘의례’로 더 정교하게 발전했다. 상나라의 중앙관제와 군제도 모두 주나라의 것이 되었다. 특히 왕이 삼군을 통솔하는 전통적인 군대의 편제는 상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중군, 좌군, 우군은 작전 시에는 적을 포위하는 대형으로, 평상시에는 그 수장들이 서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122쪽

행동철학 방면에서 관중은 약 300년 후에 등장하는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하다. 관중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관중은 더 나아가 실천하지 못할 일은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말과 행동을 부합하게 하는 것이 관중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관중에게는 플라톤의 이데아도 있었다. 다만 이데아가 형이상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164쪽

관중은 중국 최초로 경제학을 정립한 사람이며, 아마도 세계 최초로 재정학의 핵심을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경제에 관한 한 공자나 맹자, 순자 모두 관중을 따르고 있다. 관중은 야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관중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치의 핵심은 경제였다. 그것도 오늘날의 협소한 경제학이 아니라 방대한 스케일의 정치경제학이다.

-170쪽

큰물이 없으면 용은 개미떼도 이기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인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큰 인재는 반드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으로 나온다. 관중에게는 포숙이 있었다.

-208쪽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군주와 신하의 재능을 나눈다. 신하는 군주의 재능을 가질 수가 없으며, 또 군주는 신하의 재능을 다 가질 필요가 없다. 군주는 신하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으면 그만이다. 그 나머지 일들은 신하들이 한다. 군주는 신하들이 최선을 다해서 달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큰 인재와 작은 인재를 구분할 능력이 있으면 어떤 조직이든 다스릴 수 있다. 술을 좋아해도 술의 폐해를 알고 있으면 인재를 쓸 수 있다. 다혈질이라도 남이 제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자신은 허명을 쫓더라도 실속 있는 사람을 옆에 두면 된다. 제나라 환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210쪽

후대의 법가 사상가들은 이들 농민들을 강력한 수탈체제의 대상으로만 삼았다. 변법을 통해 강력해진 진나라가 이런 수탈을 기반으로 전국을 통일했지만, 진나라는 성취와 동시에 몰락했다. 바로 관중의 방법은 있었지만 그의 철학이 없었던 것이다. 관중은 지배층의 욕망을 억누르자고 했고, 후대의 법가 사상가들은 피지배층의 욕망을 억누르자고 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240쪽

관중은 관료의 책임을 크게 두 가지로 보았다. 바로 사람농사와 곡식농사를 잘하는 것이다. 관중은 사람농사, 곧 인재 양성을 관리의 책임으로 보았다. 인재를 국가의 요체로 보았다는 점이 관중과 제 환공이 다른 주자들보다 먼저 출발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다.

-243쪽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백옥처럼 희기는 참 어렵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갈등을 조절하는 것인데, 백옥처럼 흰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러운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러면 갈등을 조절하기 어렵다. 그래서 관중이 임종 시에 후계자로 포숙은 안 된다고 한 것이다. 포숙은 악한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하기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치인은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을 가지고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바로 기(掎)라고 한다. 그 수단이 바로 법이다! 법이란 권력의 수단인지라 타락하기 시작하면 천하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그러나 관중이 법으로 정치를 한다고 말할 때 법은 법을 이용하여 뒤통수를 친다는 말이 아니다. 관중은 법을 관문에 걸어둔다고 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둔다는 말이다. 관중이 보기에 그 법은 누구나 알아보기 쉬워야 한다. 법을 몰라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는 법의 잘못이지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관중의 정치는 명명백백하다.

-262쪽

환공이 위험에 처하자 관중이 중간에 재빨리 끼어드는 모습을 보라. 관중은 뭔가 보여줘야 할 때 보여준다. 환공이 위협을 받아 맹서당하는 것을 관중은 ‘허락하는’ 모양새로 바꾸었다. 관중은 어그러진 일을 단숨에 정리할 줄 알았다.

-273쪽

누가 관중이 힘으로 천하를 제패했다고 말하는가? 관중은 정치로 제패했다. 관중은 어제 한 말을 오늘에 뒤집는 사람이 아니다. 관중이 오직 힘만 썼다면 제나라 혼자의 국력으로 강력한 초나라와 서방의 나라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관중은 국제관계를 이했고, 정치를 통해서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았다. 정치의 제1원칙은 신뢰다. 위협당했더라도 허락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허락했다면 목숨 때문에 약속을 버린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관중의 패업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땅이야 다시 얻을 수 있다.

-275쪽

관중의 선택은 언제나 차선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차선은 항상 현실성을 인정받았다. 관중은 포숙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그에게 기댔다. 그러자 사람들은 포숙을 높이 샀고, 관중은 포숙의 선행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다. 관중은 소홀에게는 미안하지만 따라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새 군주에게 최선을 다함으로써 소홀의 의를 빛내고 자신은 충성스럽다는 말을 들었다. 관중은 착하지만 당하며 사는 사람보다는 강하지만 덜 괴롭히는 사람을 목표로 삼았다. 국제관계에서 그는 민족 간의 평등이 아니라 존왕양이를 주창했다. 그러자 공자는 "관중이 없었으면 중국이 다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차선을 행하면서도 이렇게 칭찬받는 것이 관중의 특징이다.

-279쪽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시기에도 장거리 원정은 최대 100일이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보급 문제 때문이었다. 진이나 초를 공격하려면 전투병보다 더 많은 보급인력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불감당이다.
물리적인 한계는 사회경제적인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전국시대에 공성전이 벌어진 것은 춘추시기에 ‘야인’으로서 전쟁에 동원되지 않던 농민들이 모두 무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국시대에는 곡식의 비축이 활발해져서 장기간의 원정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일단 성을 둘러싸면 성 내부의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자면 일군의 부대가 계절을 넘겨도 보급물자가 끊기면 안 되었다. 관중시기에 농민들을 무장시키려 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농사시기를 놓치면 처자가 굶주리게 된다. 철제 농기기구가 농사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의 농업생산력으로는 대규모의 저장도 어려웠다. 또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곡물을 운반하기도 어려웠다. 관중의 방법은 연합군을 결성해서 힘도 약하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상대의 틈을 노리는 것이었다.
-287쪽

춘추시대 제후들 사이의 의리는 약간 낭만적인 면이 있었다. 관중이 설령 전국을 제패할 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관중의 법률은 제후국의 군주가 스스로 ‘윗사람을 범하지 않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내의 백성들의 반란을 막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제후들끼리도 서로 일정한 한계를 넘지 않았다. 전투에서 상대편 군주를 잡는다 해도 죽이지는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또 전투에서 장수가 상대편 군주에게 예를 올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원수를 친다 해도 그 자손 한 명은 남겨두는 것이 춘추의 예법이었다. 종법질서에서 상대의 핏줄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패륜이었다.

-291쪽

춘추시대는 일종의 과점체제에 비교할 수 있다. 국인(士)들과 귀족들은 싸움을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꼭 전쟁에서 목숨을 걸 의무는 없다. 국인들은 농민들이 생산하는 것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굳이 목숨을 걸고 겸병전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야인들의 입장에서 무도한 군주가 아니라면 나라 이름이 제나라든지 진나라든지 기본적으로 상관이 없었다. 당시 귀족들은 문제가 생기면 종종 망명했다. 다시 말해 나라와 상관없이 귀족은 귀족들끼리 연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망명객은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귀족들 간의 불문율이었다.

-292쪽

국인과 야인이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해를 같이할 때 살벌한 투지가 발생한다. 전국시대가 그런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국인, 야인의 구분이 없이 모두 군현의 백성이었고, 모두 군인이었다. 이기면 이익이 있고 지면 손해를 입었다. 또 마음대로 망명을 할 수도 없었다. 또 그때는 국가와 애국심이라는 관념이 자라나고 있었다.

-293쪽

실제로 제나라는 도덕적인 이유들을 들어 약소국들을 공격했고, 이것은 향후 중국사에서 국제적 문제에 개입하는 대원칙이 되었다. 당나라가 연개소문을 공격할 때도 왕을 시해했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었다. 이런 전통의 원칙도 관중이 세웠다는 것을 알면 전율할 것이다.

-299쪽

관중과 환공은 먼저 동쪽을 제패하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눌렀으며, 북쪽 융적의 동남진을 막았다. 말년에는 중원과 서방의 문제까지 끼어들어 혜공을 세우고 융을 공격하여 진(晉)의 명맥을 이었고, 진(秦)의 동쪽을 두드려 겁을 주고 제나라의 패권을 인정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과연 동서남북에서 ‘일광천하’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관중이 환공을 보좌하여 한 일이다. 춘추시기의 환경에서 이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관중과 환공의 조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관중은 영걸이지만 세상을 모두 한 손에 놓고 주무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역사가 할 일이었다.

-337쪽

관중은 환공의 욕망을 긍정했다. 공적인 일만 잘하면 사적인 욕망들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 관중의 태도였다. 만약 관중이 활달한 환공의 모든 욕망을 다 막았다면 환공도 평범한 사람에 그치거나 다른 길로 빠졌을 것이다. 실력으로는 관중에 버금가는 명나라 시절의 대정치가 장거정. 그는 군주의 모든 욕망을 막았다. 그러나 자신은 은근히 욕망을 즐겼다. 막상 장거정이 죽자 세상에서 가장 탐욕적이며 가장 게으른 ‘괴물’ 황제가 탄생했다. 바로 신종 만력제다.

-367쪽

"과인은 사냥을 너무 좋아합니다. 밤낮으로 사냥을 하고 안 돌아오니, 백관과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돌아가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나쁘긴 나쁩니다만,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과인은 밤낮으로 술을 마십니다."
"나쁘긴 하지만, 이도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과인은 음란한 버릇이 있어, 불행히 여색을 너무 좋아합니다."
"나쁘긴 하지만, 역시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이런 게 다 괜찮으면 도대체 나쁜 행동은 뭡니까?"
"군주는 결단력이 없고(優) 행동이 굼뜨면(不敏) 안 됩니다. 결단력이 없으면 백성을 망하게 하고, 행동이 굼뜨면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관자』「소광」
사생활이야 개인의 영역이니 군주도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군주는 공적인 생활에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관중의 생각이다. 군주는 따르는 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군주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368쪽

사실 관중은 춘추시대의 경제체제, 행정, 군사, 법률, 외교 등 모든 방면의 질서를 세운 사람이다. 사농공상의 분업, 시장의 활성화, 국제무역, 농지개간, 세제개혁, 중앙과 지방 행정체제 확립, 삼군제도의 정비, 법령의 집행 방식 확립, 존왕양이와 회맹질서의 수립, 그 모든 것이 관중의 손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질서는 후대로 계속 이어졌다.

-369쪽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모두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면 사회가 각박해지고 난폭해진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무한의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관중이 말하는 원칙이다. 지도자는 열심히 뛰어야 한다. 그러나 열심히 뛰지 않는 추종자들에게 채찍을 들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의 인간관이며, 또 관중의 인간관이다.

-371쪽

남들의 욕망을 긍정하라. 욕망이 심하게 억눌리면 ‘변태’로 바뀐다. 특히 먹는 욕망이 억눌리면 사람은 무엇이 되는가? 아무리 착한 사람도 폭도가 될 수 있다. 남들의 자기보존 욕구에서 나오는 건강한 욕망을 긍정하라. 이것이 바로 관중의 생각이다. ‘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리려 하지 말고 그들의 본성이 원하는 것을 주어라.’ 이것은 제나라의 창시자인 강태공이 만든 불문율이다.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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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반양장)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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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안 계신다고 했지? 그래도 돌아갈 곳은 마련해 두고 다녀야 해. 기다릴 사람이 없으면 집이라도 기다리게 해야지. 그래야 어딜 가도 든든하다우."-73쪽

참 이상하지? 근사하게 생긴 사람도 아닌데, 가진 게 많아서 듬뿍듬뿍 퍼 주는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은 건널목 씨를 좋아 했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 건널목 씨 한 사람 더 와서 사는 건데 아리랑아파트 분위기가 달라졌다니까. 이웃끼리 인사도 더 자연스럽게 했고 더 상냥해졌지. 좋은 사람이란 그런 거야. 가만히 있어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내가 이걸 해 주면 저 사람도 그걸 해 주겠지? 하는 계산된 친절이나, 나 이 정도로 잘해 주는 사람이야, 하는 과시용 친절도 아닌 그냥 당연하게 남을 배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건널목 씨야. 그런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참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77쪽

노인이 흘리는 눈물은 농이 짙은 눈물이다. 살아온 세월 동안 물기는 날아가고 진액만 남아 버린 눈물. 내게도 그것과 비슷한, 어릴 적 꾹 참아 버린 눈물이 몸에 남아 있다. 그 눈물이 아직도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112쪽

사람들은 지하가 지상보다 더 시원하다는데, 그 집은 미치도록 더웠어. 여름에는 땀띠가 두드러기처럼 온몸에 돋았다니까. 그래도 태석이와 태희는 창문을 열지 못했어. 창문으로 보이는 발들이 너무 무서웠거든. 저벅저벅 걸음 소리, 끼익! 오토바이 멈추는 소리...... 아빠가 돌아가신 것보다, 엄마가 떠난 것보다, 창밖에서 들리는 그런 소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어.-130쪽

"거지 거지 땅거지! 또랑 건너는 쥐새끼. 한 푼 줍쇼!"
그랬어. 태석이와 태희는 한 번도 구걸한 적이 없는데, 아이들은 그렇게 노래를 불렀어. 아이들은 알고 있었지. 놀리고 놀려도 달려와 혼내 줄 부모가 없다는 걸. 태석이와 태희도 알고 있었어. 같이 싸워도 혼나는 건 늘 자신들이라는 걸. 아이들이 잔인하게 놀리고 괴롭혀서 싸웠는데, 태석이 얼굴도 까지고 퉁퉁 부었는데, 부모들은 태석이만 혼냈어. 태석이한테 동네 깡패라는 거야. 그건 혼낸 게 아니야. 어른들까지 찾아와서 괴롭힌 거지. 그래서 태석이는 엄마를 기다렸어. 처음에는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기다렸는데, 언제부턴가는 나서서 싸워 줄 엄마를 기다린 거야. 어른이 따지러 오면 어른이 나가 주는 집,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지. 무조건 자식 편인 부모가 있는 집, 그런 집 말이야.-145쪽

건널목 씨는 세상에 덩그러니 놓인 태석이와 태희한테 건널목 같은 어른이었어. 건너라는 소리와 반짝거리는 신호등은 없어도, 조심해서 건너면 된다고 다독여 주는 건널목 같은 어른 말이야. 만약에 건널목 씨가 없었더라면...... 태석이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어.-163쪽

(작가의 말)
때로는 힘들고 지쳐 주저않고 싶을 때도 있을 테지요. 어른들도 부족한 게 많이 번쩍 안고 원하는 곳으로 옮겨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덜 힘들게 덜 아프게 덜 무섭게 그 시기를 건널 수 있도록 건널목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친구라도 좋고 이웃이라도 좋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도 괜찮고, 누군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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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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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어를 안다거나, 다른 것들을 배웠다고 해서 미래를 준비했다고는 할 수 없어. 네 미래는 올바른 질문을 찾아내고 용기 내어 그 질문을 던지면서 찾아 나서는 거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보다 훨씬 중요한 거야. 그렇지만 질문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 가브리엘라, 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겠지. 하지만 왜 사는 지도 알겠니?"

-46쪽

"두려워하고 불안해해도 괜찮아. 두려움과 불안이 변화를 가져온단다."


-48쪽

아빠는 몸집이 크지 않지만, 옹이진 오래 된 나뭇가지처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평생 일한 탓에 피부는 거칠고 주름졌다. 삶이 아빠에게 주름살을 주었고, 지혜는 아빠에게 인내를 주었다.

-52쪽

약속이란 미래에서 빌려 오는 것이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68쪽

천둥이 칠 때마다 나는 알리시아를 끌어안고 달랬다. 알리시아는 계속 나를 엄마라고 불렀는데 굳이 고쳐 주지 않았다. 아이들한테는 누구나 엄마가 필요한 법이니까.

-82쪽

기억말고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가 장에 지고 간 어떤 짐보다도 무겁게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내 등 뒤에는 죽음의 재가 깔려 있고, 내 앞길에는 부연 구름이 뒤덮여 있었다. 나는 위험한 나라에서, 집도 미래도 없이 홀로 남은 어린 여자 아이였다.

-87쪽

"조용히 해, 아가야! 네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는 거야. 살고 싶으면 날 도와 줘야 돼. 난 네 엄마도 아니고, 세상은 언제나 친절하기만 한 건 아냐."

-108쪽

군인들은 면도를 하고 교대로 몸과 군복에서 피를 싯어 냈다. 갈끔한 모습으로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결코 깨끗하게 씻어 낼 수 없을 것이다.

-125쪽

산미겔 수용소에는 식량과 구호품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보다 절박하게 바라는 것 한 가지는, 트럭이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건 바로 희망이다.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희망, 가족들이 고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희망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포기하고 스러져 간다.

-152쪽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특히 마음이 아팠다. 전쟁 때문에 어린 시절을 빼앗겨 버린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울지도, 놀지도, 웃지도, 큰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그 동안 매일 두려움에 떨었고, 언제나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마음 속에 새겨야 했다.

-167쪽

"공 한 개 구해 주실 수 있어요?"
미국인 구호 요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가 놀이터니? 여긴 난민 수용소잖아."
"아이들은 다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돼요."
구호 요원이 화를 내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나는 계속 매달렸다.
"행복해지려면 놀이가 필요해요. 놀기 위해서 제대로 된 공이 필요하고요."

-169쪽

"좀더 신경 써주실 수 없어요? 아이들은 오늘 행복해져야 해요. 내일이면 늦어요. 제발요."-170쪽

그건 여러 전쟁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네 경우에는, 여자라는 것도 평생 치러야 할 전쟁이야. 그리고 우리 둘 다, 인디오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전쟁을 해왔다고 할 수 있어."-177쪽

"지금으로선 여기가 우리 집이고, 몇 년을 더 있어야 할지 모르잖아요.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디오라는 걸 평생 수치로 여겨야 할 거예요."
마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긍지와 자부심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 거야."-180쪽

빗속에 비닐과 판자 조각을 덮고 앉아 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칠판도 책상도 없는 교실에서 무얼 배운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배우지 않고 희망을 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181쪽

내가 학살에서 살아남은 건 내가 겁쟁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강하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기 때문이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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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3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같아요

마노아 2011-05-31 01:01   좋아요 0 | URL
한 해에 한 권씩은 이 시리즈를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참 교육적인 책이었어요.
 
나를 생각해
이은조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5월
품절


"오해하는 남자는 이해시키면 되고 이해 못 하는 남자는 기다려 주면 되죠."
-88쪽

"실장님, 다시 안 올 겁니다. 이렇게 대접도 못 받는 곳에 있을 바에는 지금이라도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게 낫다고 봐요. 청춘을 바쳤다고 해서 평생을 저당 잡힐 수는 없어요."
-97쪽

연극을 한다고 말했을 때 소중한 생업에 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어떤 흥에 겨운 놀음으로 치부하거나 다른 세상 이야기로 취급했다. 그들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나는 자부심을 느꼈다. 나에게 연극은 생업이면서 미래다. 그들은 연극이 돈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을 진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178쪽

왜 항상 우리는 상대보다 더 많은 걸 주고 더 많은 걸 실망하게 되는 것일까. 나의 오랜 친구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너이기 때문에 네가 실망스러운 거라고.
-200쪽

택시는 쉬이 오지 않았다. 승원의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전화 액정 화면은 막막하고 맹랑했다. 이토록 작은 세상이 나의 전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224쪽

승원과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 그는 카페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열심히 들려주었다. 통과의례 같은 서로의 사용설명서들, 부풀려진 추억들이었다.
-231쪽

"사실 아버지를 포옹한 건 다른 이유도 있었어. 아버지 냄새를 맡고 싶었거든. 냄새로 아버지의 현재를 파악하고 싶었어. 아무리 오래 입은 옷이어도 식구들의 옷과 함께 세탁한 옷에서는 티가 나거든. 속일 수 없는 집의 향기가 있어. 서로 으르렁거리는 가족이라도 같은 세탁기에 옷을 넣어 빤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게 바로 가족이고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이미 다른 세탁기를 사용한다는 건 가족에서 이탈한 거나 마찬가지지. 난 그래."
-247쪽

어떤 일에서건 엄마는 완벽한 화장을 한 후 외출했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엄마는 완벽한 화장으로 주목을 끌었다. 수수한 차림으로 나타난 다른 아이들의 엄마와는 달랐다. 엄마는 달리기를 할 때도, 이인삼각 경기를 할 때도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거울을 볼 시간은 있어도 내 입에 김밥을 넣어줄 시간은 없던 엄마였다. 나는 엄마를 잃은 딸을 바라보았다. 초췌한 얼굴로 머리를 대충 묶고 검은 카디건과 검은 바지를 갖춰 입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253쪽

내가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야. 엄마는 그런 식으로 자꾸 나한테 들켰어. 그럼 털어놓든지. 그게 너무 서운한 거야. 하나뿐인 딸자식한테 친구처럼 터놓을 수도 있었잖아. 부모 노릇도 하고 싶고 자기 사랑도 지키고 싶었던 거지.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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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5-2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을 바쳤다고 해서 평생을 저당 잡힐 수는 없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노아님.

마노아 2011-05-28 00:11   좋아요 0 | URL
그걸 알아차릴 수 있고, 또 자각하는 순간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청춘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걸 거예요. 실장님은 진정한 용자!
 
노무현이, 없다 - 다시는 못 볼 아주 작은 추억 이야기
도종환 외 17인 지음,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엮음 / 학고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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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정책은 협상 테이블의 메뉴가 될 수 있다. 가치? 그것도 전술에 따라 칼집에 잠시 넣어둘 수 있다. 그러나 정서! 그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한 인간의 생애가 농축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만의 스타일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스타일은 무슨 근사한 패션 감각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가치와 정서를 농축한 생활 양식이다. 걸음걸이와 말투와 웃음과 농담과 손짓은, 한 인간의 성장과정과 지향하는 가치와 교육, 성격과 문화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동시에 그 어떤 결함을 가리고자 하는 한 인간의 간절하면서도 ‘미숙한’ 연기까지 어김없이 노출시키는, 외부로 노출된 내부, 곧 한 인간의 세계 전체인 것이다. 저마다의 스타일에 의하여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단 한 명의 존립자가 되는 것이다.
-50쪽

‘노간지’라고도 하던가. 나는 ‘노무현 스타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스타일을 갖고 있지 않다. 그와 같은 정서와 눈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이 농축된 스타일의 정치인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스타일은 결코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서정과 그 서정에서 길러진 애이불비의 위대한 연대와 그 연대에 의해 형성되는 진실한 마음의 울림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거의 유일하게, 그 애틋한 눈물을 진심으로 흘릴 수 있었던 사람. 그가 1년 전에 자연의 다른 한 조각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나갔다. 진실로 슬픈 것은, 그런 사람이 이제는 없다는 것이다.

-52쪽

기사 할아버지는 매일매일 빈소에 들렀다가는 사람들을 그들의 집으로 실어다주면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살다 살다(군대도 가고 사우디에도 가보고 조기 축구회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자발적인 사람들은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인 사람들을 며칠씩 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우리도 누군가를 굉장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싶어 했던 것 아닐까......"
-56쪽

누군가를 상실했다는 것, 그것은 비극이다. 그런데 그 상실이 빛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는 ‘메마른 합리주의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비극적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다’라고 했을지 모른다.
우리의 상실, 우리의 이별에도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일까? 그건 가능하다. 추모 기간 동안 우리들은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이미지, 슬픔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더 이상 불행해할 필요가 없고, 대신 무엇인가 만들어내면 된다. 우리는 더 이상 불행해할 필요가 없고, 대신 무엇인가 만들어내면 된다. 죽어 떠나간 사람들의 부재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부재를 존재로 만들기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죽음 앞에서 다시 한 번 (대통령이 되기 전처럼) 비상히 강해졌을 그의 의지를 생각해 본다. 그의 의지, 죽음 앞의 의지, 죽어서 살려고 했던 의지, 죽어서 표현하고자 했던 그 의지를 소생하고 재구성될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사랑하고, 그리하여 그를 진정으로 떠나보낼 수 있다.
-58쪽

퇴임 후 그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를 봉하마을 그의 집에 걸어두었다. 90살 먹은 우공 노인이 산을 옮기기로 결심한 이야기. 주변 사람 모두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하자 우공 노인은 나에게는 아들이, 그 아들에게도 아들이, 또 그 아들이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꿈 또는 의지는, 명사가 아니라 한없는 이름과 행위로 연결되는 동사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꿈을 꾸고, 내가 받아 다시 건네주는, 바로 그 행위 말이다.

-59쪽

그는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썼다. 그는 시민 사회에 희망을 걸었다. 그는 미완의 자서전에서 ‘원칙’이란 단어를 무척 자주 썼다. 그리고 죽음에 임박한 마지막 순간에는 ‘우공이산’이라는 고사성어를 벽에서 떼어냈다. 그 ‘우공이산’을 다시 벽에 거는 일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우리 몫이다.

-60쪽

아메리칸 드림의 세계는 강한 자에게 혜택을 주고 약한 자를 불리하게 한다. 개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운명까지도 내가 책임진다는 확고한 책임 의식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도 있었지만, 부의 축적이나 개인적 성공이라는 좁은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에 배타적이다. 하지만 유러피언 드림의 세계에서 시민의 행복은 ‘재참여와 재결합의 깊이’에 달려 있다. 재참여란 무엇인가? 깊은 공감 속에서 다른 존재에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공감적 경험이다.

-61쪽

그의 죽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를 지배했던 아메리칸 드림과 코리안 드림을 생각해 본다. 개인의 행동과 선택이 이 세상의 다른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숙고하는 사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주어진 권리처럼 배타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사회, 집단적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 사회, 타인의 불행에 어떻게든 나도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하는 사회, ‘무질서보다는 불의가 낫다’고 외치지 않는 사회, 언젠가 올 유토피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는 가능한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기력한 우리 앞에 미래는 없다.

-62쪽

"운동이 원칙의 문제라면 정치는 선택의 문제더군요. 운동은 항상 원칙적으로 문제 제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고 부득이한 선택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는 것이죠. 이에 반해 정치는 선택인 거지요."-1998년 인터뷰 당시

-81쪽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는 경찰, 군인, 우익 청년과 미군들이었다. 농민, 여성, 어린이들이 빨치산 출몰 지역에 산다는 구실로 학살되곤 했다. 빨치산 출몰 지역은 그야말로 ‘킬링필드’였다. 또 국군이 후퇴하면서 자행한 보도연맹 사건 및 형무소 재소자 집단 학살 사건 등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민간인 학살 사례가 많았다. 이는 이데올로기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 풀어야 할 일이었다.

-94쪽

부자들이 돈을 잘 모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얻어먹을 것이 많다는 요즘의 정책 기조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나눔과 소통, 화합이 있는 부드럽고 여유로운 인간 관계가 형성돼야 한다.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이란의 변호사이자 인권 운동가이며 2003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시린 에바디를 위해 이렇게 말했다.
"페르시아 시인 하페즈는 7천 년의 기쁨도 7일 간의 억압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했다. 에바디는 바로 이 시구를 체화한 사람이다. 오늘 저녁, 여기 있는 그녀가 우리 각자인 동시에 모두이기를! 그녀가 타의 모범이 되기를! 그녀 앞에 어떤 어려움이 놓이더라도 그녀가 사명을 다하기를! 그리하여 다음 세대는 ‘불의’라는 단어를 삶에서가 아니라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기를!"
바로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말이다.
-124쪽

"내가 대통령 보러 왔어. 칠십 평생 대통령 실물을 못 봤기 때문에 천릿길을 달려왔다고." -전남 순천의 조재현 할아버지(70)

"여기 오려고 밭 매서 하루 일당 2만 5천 원씩 벌어 가지고 옷도 하나 사 입고...... 신발도 하나 사 신고 왔어. 이래봬도 메이커여......." -전남 화순의 조이남 할머니(62)
-211쪽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양복을 입고 대통령을 모시던 비서관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농사일을 배우고,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동네 머슴’이 됐다. 마을에서 이동할 때는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를 이용한다. 등산화에 삽자루를 들고 마을을 누비고 검게 그을린 얼굴 때문에 마을 주민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몰라보게 변했지만 스스로 행복하다 말하는 봉하마을의 ‘행복한 머슴들’, 그리고 대통령의 귀향과 함께 그의 고향으로 내려온 노사모까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대통령 노무현의 꿈은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져 가고 있었고, 그래서 봉하마을에서의 72시간은 여느 <다큐멘터리 3일>처럼 따뜻할 수 있었다.

-218쪽

봉하 마을에 노점상이 부쩍 늘면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마을 사람끼리 노점을 하지 말자고 합의하고도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날도 할머니 한 분이
대통령 생가 입구 골목에 미나리 노점을 떡하니 열었습니다.
도리 없이 비서진이 몽땅 사버렸습니다.
그걸 어쩌지 못해 마을 장터로 가져가 되팔게 됐습니다.
미나리를 사는 사람에겐 사진 찍을 기회를 주겠다며
방문객을 상대로 호객 행위를 했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던 비서진들이
시골에서 미나리를 파는 모습이 신선했던 모양입니다.

2시간 만에 다 팔았습니다. 3만 원에 사서 3만 1천 원을 벌었습니다.
접대용 막걸리 값으로 1만 7천 원을 써버리는 바람에
이날 장사는 망했습니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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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5-2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밑줄 쳤던 곳에 마노아님도 밑줄 그었군요.

마노아 2011-05-24 10:15   좋아요 0 | URL
이심전심이에요.^^

카스피 2011-05-25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노무현님이 돌아가신 벌써 2주년이군요.세월은 참 무심히도 빠르게 흐릅니다.

마노아 2011-05-26 00:06   좋아요 0 | URL
무심하다는 표현이 딱이에요. 정말 무심히 세월이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