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3 - 여씨와 유씨 - 건설과 숙청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3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11월
절판


역사의 패배자들에게 문학은 영생을 주었다. 유막둥이에게 패배한 항우만이 아니라 여후에게 살해된 한신도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나이가 되었고, 척부인도 가장 가련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쩌면 이 모든 결과도, 사마천이 <사기>에서 의도한 것일지 모르겠다. ‘항우본기’나 ‘회음후열전’ 등에서 사마천이 유막둥이가 아니라 항우나 한신에게 공감하도록 글을 써내려갔다는 점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당시 일어났던 일은 물론 이러한 영웅 판타지와는 다를 것이다. 현실 권력의 앞에는 절대적인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영웅도 엄청난 악당도 없다. 패배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안타깝지만, 여러 번 읽으면 그들이 패배할 이유가 없지만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사연은 서럽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언제나 정당했던 것만은 아니다.
-5쪽

입술 가운데를 세모꼴로 칠하는 것은 한나라 시대의 화장법이라고 한다.

-31쪽

<사기> ‘고조본기’에 따르면 유막둥이는 황제가 되고 나서 이렇게 말했대요. "계책을 짜내는 일은 내가 장량만 못하며, 백성을 위로하고 양식을 공급하는 일은 내가 소하만 못하고, 백만대군을 통솔하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을 쓸 수 있었고 그래서 천하를 얻은 것이다. 항우 측에 쓸 만한 인재는 범증 하나였지만, 항우는 그마저 제대로 쓰지 못하여 나에게 졌다."
사마천이 보기에 리더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른바 용인(用人), 즉 사람 쓰는 능력입니다. 지도자 본인이 모든 능력을 고루 갖출 필요는 없으며, 다만 각 분야 능력 있는 인재들의 마음을 얻으면 충분하다는 사상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2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동아시아의 독특한 지도자상을 형성했어요. <삼국연의>의 유비나, <수호지>의 송강, <서유기>의 삼장법사 등, 이렇게 무능력한 리더들이 다른 문화권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37쪽

당시 사람들도 한신이 정말 모반하려 했을까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민심이 한신에 동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신들을 숙청하는 동안 황제는 자주 사면령을 내렸는데, 혹시 있을지 모를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56쪽

한신은 몰락 후에 더욱 삼가는 바가 없었다. 몰락 이후의 오만한 언행이 그의 비참한 죽음에 일조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신이 말을 공손히 하고 주위를 살폈다고 해서, 유막둥이와 여치가 그를 살려 두려 했을까?

-62쪽

유막둥이는 군현제도 봉건제도 택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가족도 믿지 못한 채 천하를 직접 다스리겠다며 무리하게 군현제를 밀어붙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어요. 초나라의 항우는 부하들에게 땅을 나눠주며 봉건제를 부활시켰지만, 유막둥이 같은 ‘공신’들이 더 많은 땅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무너지고 말았어요.
유막둥이는 공신들에게 땅을 주어 일단 안심시켰다가 기회가 되는 대로 ‘회수’했어요. 다시 빼앗은 땅 일부는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군현으로 삼고 일부는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자기 아들과 조카들한테 건네주었지요. 여러 공신들 즉 ’이성제후‘의 땅은 하나둘씩 황제 직할의 군현이 되거나 황제의 가족인 ’동성제후‘의 나라로 바뀌었어요. 예컨대 한신에게서 거두어들인 제나라 땅은 유막둥이의 아들에게, 초나라는 그 사촌형에게 넘어갔지요. 이러한 정책 덕분에 한나라는 내전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하는 쪽이야 괴롭겠지만요.
-63쪽

한신이 실각할 무렵 전후로 장량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장량은 신선이 되겠다며 정계를 은퇴했다. 장량은 매우 영민한 사람이었으므로 "신선이란 헛되고 궤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사리기 위해 그러했다고 사마광은 생각한다. 그러나 장량이 신선사상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73쪽

유막둥이에게는 서로 다른 여인에게서 얻은 여덟 아들이 있었다. 여후의 아들 유영은 다른 일곱 형제와 경쟁해야 했다. 친누이 노원공주와 그 남편 장오는 유영에게 매우 든든한 지원 세력이었을 것이다.

-78쪽

조나라 땅은 중원에 있고 오래전 전국시대부터 문화의 중심지였다. 유막둥이는 그 땅을 여후의 사위인 장오에게서 빼앗아 척부인의 아들에게 준 것이다. 이후 조나라의 왕 자리를 놓고 여씨와 유씨의 세력 다툼이 일어난다.

-82쪽

<사기> ‘유후세가’는 장량의 전기입니다. 몰락한 귀족 장량은 젊어서 황석공이라는 노인을 만나 수련을 쌓았대요. 황석공의 정체는 신비한 ‘누렁바위(黃石)’라나요. 장량은 전쟁 중에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고 후방에서 작전을 세워 능력을 발휘하고요, 통일 후에는 ‘상산사호’라는 수수께끼의 노인들을 모셔오기도 하지요. 결국 몸소 신선이 되겠다며 속세와 인연을 끊습니다. 후세의 어떤 연구자들은 장량을 전형적인 도가 지식인으로 이해합니다. 이전 세대 법가 지식인과는 처신이 사뭇 다르기는 하지요. 법가라면 얼핏 모질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회 개혁 세력이었습니다. 어쩌면 사회가 서구화된 요즘, 우리에게 더 익숙한 지식인의 모습일지도 몰라요. <한비자>에도 나오지만,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버려도 좋다는 의식이 있었어요. 상앙이니 이사니 실제로 개혁에 나섰던 법가 지식인들 가운데 제 명에 죽은 사람도 없어요. 그들 덕에 바로 민중의 삶이 나아진 것만은 아니었지만요.
-97쪽

그러나 도가 지식인은 달라요.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거꾸로 자기 몸부터 챙겼답니다. 노자는 난세를 피하여 인간사회를 등졌지요. <장자>에는 벼슬살이에 묶였다가는 자기 몸을 망칠 수도 있다는 철학이 등장합니다. 도가 지식인은 소하나 진평처럼 절묘한 처세술로 복이란 복은 다 누리기도 하며, 장량이나 ‘상산사호’처럼 은일지사가 되기도 하죠. 개인을 중시하는 도가 지식인의 모습은 이후로도 동아시아의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였답니다.
-97쪽

한신을 유막둥이에게 추천한 것은 소하이다. 그러나 한신을 죽이는 일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얄궂은 일이다. "한신은 소하 덕분에 성공의 길을 갔고, 또 죽음의 길을 갔다."(이중톈)

-111쪽

노관은 연(燕)나라의 왕이었다. 숙청 당할까 두려워하다가 흉노와 손잡고 모반을 기획하지만, 결국 황제를 이기지 못하고 흉노로 망명한다. 연나라 땅이 변란에 휩싸인 이 무렵, 위만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에 입국했다고 한다.

-134쪽

여후와 척부인의 관계는 단순히 질투심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대립으로 파악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여후가 척부인을 숙청하려는 상황은 이전의 공신숙청과 같은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45쪽

소하의 전기 ‘소상국세가’를 읽다 보면 뭔가 앞뒤가 어색합니다. 전란의 시대에 둘도 없는 행정가였던 소하.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제국의 2인자가 되자 소하는 큰 사업에 손대지 않습니다. 소하에 뒤이어 승상이 된 조참과 진평도 술만 마시며 일을 벌이지 않았지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일을 안 했을까요? 황제의 질투가 두려워서?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면 한나라는 성공한 제국이 되지 못했겠지요. 조참의 전기 ‘조상국세가’에 따르면 백성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나요. "소하가 제정한 법... 청정무위의 정책 집행하니 온 백성 한결같이 편안하네." 유막둥이와 여후, 소하와 동료 대신들은, 도가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되도록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정책기조는, 진나라의 까다로운 통치를 싫어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특히 어필했겠지요.
-151쪽

그러나 ‘내버려 둔다’는 기조만으로는 제국을 운영할 수 없죠. 사실 백성들 처지에서도 유력자(豪强)의 횡포를 규제해주는 강력한 법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요.(힘없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자유방임만큼 불리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한나라는, 도가 사상의 ‘무위’를 모토로 삼은 채 법가 사상에 입각한 진나라의 제도를 물려받은, 묘한 하이브리드 체제로 운영됐습니다. (사실 도가 사상과 법가 사상을 버무리려는 시도는 진작부터 있었지요.) 한편 이 무렵부터 유가 지식인들도 정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해요.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숙손통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유가 사상이 통치이념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은 몇 세대가 지난 후의 일이랍니다.

-151쪽

노자의 부쟁사상. 굳이 경쟁하고 이기려 들지 말라는 의미인데, ‘나서지 말라’는 처세술의 의미도 있다. 진평의 경우에 특히 이런 처세가 눈길을 끄는데, 결국 이것이 내전을 막아 천하를 안정시켰으니 천운이랄까.

-168쪽

짐승의 피를 찍어 입가에 바르는 삽혈(歃血) 은 고대의 맹세 방식이다. 이 맹세에 따르면 여씨 왕을 세우려고 할 때 대신들이 내전을 불사, 들고 일어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진평은 왕릉과 생각이 달랐다.

-171쪽

유막둥이는 공신들한테 맡겼던 땅을 빼앗아 유씨한테 주었습니다. 유막둥이 자신도 항우를 배신했으니만큼, 공신들을 믿기 어려웠겠죠. 그런데 유막둥이가 죽자 권력이 여후에게로 넘어갔어요. 여후로서는 유씨 역시 믿을 수 없었죠. 유씨 왕들 대부분은 남편 유막둥이가 다른 여인들과 낳은 아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힘닿는 데까지 임금 자리를 빼앗고 여씨를 제후왕으로 앉힌 것이지요.(여후가 죽은 후 다시 유씨로 바뀌기는 하지만요.) 결국 여후 역시, 크게 보면 유막둥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을 벌였던 셈입니다. 둘 다 그나마 믿을 사람으로 자기 직계가족을 택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권력의 비정한 속성일까요.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원래 한 가족이던 ‘동성제후’들끼리도 서로 창칼을 겨누고 내전을 일으키지요. 이 내전은 ‘오초7국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집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나라는, 봉건제도 아니고 군현제도 아닌 새로운 체제의 제국으로 발전했어요. 봉건제와 군현제의 이러한 중간 형태를 군국제라고 부른다지요.
-187쪽

사마천은 여후를 잔인한 여인으로 그렸지요. 사실 사마천의 붓끝에서 멀쩡하게 묘사된 여인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수는 "당시 많은 부인들이 유교의 예법...에 속박되지 않고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무슨 특종이라도 보도하듯, 악의를 품고 붓끝을 놀린 사마천의 심리 상태도 정상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사마천이 궁형에 처해진 후 인생관에 변화가 와서 여성에 대한 혐오나 증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동양사학계의 대가가 쓴 글치고는 다소 도발적입니다. 그러나 지적했다시피, 사마천은 여후를 나쁘게만 그리지는 않습니다. ‘여태후본기’의 말미에 실린 ‘좋은 정치를 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지요. 여태후의 전기는 ‘세가’나 ‘열전’이 아니라 당당히 ‘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심지어 그 위치마저, 유막둥이의 생애를 다룬 ‘고조본기’(권8) 바로 다음에 아홉 번째 책(권9)으로 이어지지요. 황제의 자리는 아들 혜제(유영)가 물려받았는데도, ‘혜제본기’니 ‘효혜본기’ 같은 것은 따로 없고, 여후만이 진시황제와 항우, 유막둥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221쪽

미야자키 교수도 인정하고 있어요. "고조본기의 뒤에 여후본기를 놓은 것도 훗날 종종 문제가 되었다. ... 사마천은 이 시기의 실권자가 여후였다는 점을 중시해 천자의 존재를 무시하고 ‘여후본기’를 놓은 것이다." 사마천이 여후를 마냥 깎아내리려고 했다고 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221쪽

중국에서 가부장적 국가의 제도적 확립은 주나라의 종법 제도에서 완성된다. 그렇다면 그 이전, 즉 한자의 형성기인 주나라 이전 은나라 때 여성은 가족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였을까? 우선 여(女)란 글자의 형태를 보자. ‘여’의 갑골문 자형을 보면 여성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고대에는 여자건 남자건 앉을 때 꿇어앉는 것이 기본적 자세였다.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이 기마 전술을 위해 호복을 채택하기 전까지 바지는 중원의 중국인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또 한나라 이전에는 의자가 없었고 자리(席, 깔개)를 깔고 그 위에 앉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자건 여자건 무릎 꿇고 앉는 자세가 예의 바른 기본 자세였다.
-233쪽

그렇다면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은 과연 가치중립적인 일상적 자세였을까? 공경, 경외, 조심스러움을 나타내는 ‘경(敬)과 따름, 복종, 몸에 붙이고 떼지 않음의 뜻을 지닌 복(服)의 갑골문 자형은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한데, 모두 가운데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의 요소를 갖고 있다. 무릎 꿇는 동작은 제례에 참여한 사람이 취하는 공손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갑골문의 여(女) 중에는 윗부분에 가로선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머리 장식을 가리킨다. 이것은 높은 신분의 사람임을 나타낸다. 짧은 머리나 더부룩한 머리는 지위 없는 천인을 나타내는 데 비해 단정하게 정리하여 관(冠)으로 장식한 머리는 높은 신분의 상징이다. 또 결혼한 여성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여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234쪽

갑골문에서 부(婦)는 녀(女)가 생략된 추(帚)의 형태로도 많이 쓰였다. 추는 빗자루이다. 후대의 용법으로서 아내를 낮춰 이르는 말로 ‘기추지첩(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드는 비천한 첩)이라고 했다. 출토된 갑골문 자료를 보면 이 ’부‘라는 글자는 지배층 여성의 호칭 앞에 붙는 접두사로 흔히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은나라가 제사중심사회였음을 상기해본다면, 추는 청소용 빗자루라기보다는 제례 의식에 앞서 물을 뿌려 제사 장소를 정화하는 용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부‘는 제사에 참여하여 집안을 유지하고 나아가 국가 경영에도 참여하는 왕실과 혼인한 유력 씨족 집단의 여성 대표자를 가리키는 글자로 볼 수 있겠다.

-235쪽

최근에는 가부장제 하의 여성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억압적이고 굴종적으로 살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자유를 누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성과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자가 생긴 이래 며느리이자 아내인 부(婦), 아니 여성 전체인 여(女)는 언제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여성의 낮은 지위의 역사적 연원은 깊고 강고하다. 여성이 무릎을 펴고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서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것이 항상 유쾌한 일일 수는 없다. 때로 우리는 철저한 단절을 위해, 그 깊은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37쪽

왕,후,장,상은 각각 왕, 제후, 장군, 재상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에 이 말이 있다면, 서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길쌈할 때 누가 귀족이었겠는가?(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와트 타일러 봉기(1381) 때 영국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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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7-20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내주신 책 어제 받았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잘 읽을께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마노아 2011-07-20 09:40   좋아요 0 | URL
책이 좀 무겁지요? 재밌게 읽으셔요^^

2011-07-20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0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 항우와 유방 - 제국의 붕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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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고대사만 전설이 넘쳐나는 건 아니어서, 헤로도토스나 플루타르코스 등 서양 고대사 역시 예언과 징조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텍스트를 낯설게 느끼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다. 반면 이미 지나칠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초한지>를 우리는 충분히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만일 영화나 그림에서 튜더 시대의 판금 갑옷을 입은 한니발이 포병부대를 지휘한다면, 여러분은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때의 복장을 한 항우나 유방을 보아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전국시대 말의 유물대로 복식을 고증하면, 그게 더 낯설어 보일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한니발과 항우가 동시대 인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깜빡깜빡 잊는다. 우리 머릿속에서 한니발은 먼 옛날 사람이지만 항우나 유방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4쪽

당시 긴 칼은 귀족이 차고 다니는 것이어서 서민인 한신이 칼을 차고 다녔으므로 놀림을 받았던 것 같다.

-19쪽

<사기> ‘항우본기’에는, 진나라가 멸망시킨 여섯 나라 중 초나라 사람들이 제일 억울해하였다고 한다. 진승, 항량, 항우, 유방 등 반군의 주요 인물들은 초나라 출신이다.

-21쪽

진나라가 망할 당시에는 말 위에서 긴 창과 긴 칼을 휘두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아직 등자가 보급되지 않았고, 칼도 크게 단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1쪽

진승이 왕 노릇을 한 것은 고작 6개월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의 멸망은 결국 진승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마천은 진승의 전기를 열전(列傳)이 아닌 왕과 제후의 전기인 세가(世家)로 분류하였다.

-35쪽

초나라 문화는 화려하고 판타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37쪽

봉(鳳)새는 초나라 지역에서 특히 사랑받던 상상 동물이다.

-57쪽

옛날 동아시아 사람들은 옥에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60쪽

긴 자루를 가로질러 ㄱ자 모양으로 날을 이은 무기가 과이고, 그 앞에 창날을 하나 더 꽂은 것이 극이다.

-72쪽

어린 임금은 항량이 범증의 건의를 받고 세운 초회왕의 손자 미심이다. 초회왕에 대한 동정 여론을 의식하여 어린 임금도 초회왕이라 불렀다.

-77쪽

‘막둥이’는 유계다. ‘계(季)’는 막내아들을 부르는 말. 그 아버지는 역사서에 ‘태공(太公)’이라 소개되지만, 그 역시 동네 영감을 일컫는 말이다. 즉 이름도 갖지 못할 정도의 신분이다. 당시 농민군에는 이런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78쪽

장함의 항복 이후 호해는 조고를 문책하였고, 조고는 처형될까 두려워 "이제 사태가 급박해지자 책임을 우리 가문에게 떠넘기려 한다"며 정변을 꾸몄다.(‘진시황본기’) 호해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바보가 아님을 보여 준다.

-109쪽

아방궁은 진시황제 생전에 완공되지 않았고 황제는 바빠서 향락을 즐길 틈이 없었을 것이다.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우주와 천하를 모방해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아방궁은 세계의 미니어처인 셈인데 주술적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111쪽

어린 임금 의제의 죽음에 대해 <사기>의 ‘항우본기’ ‘고조본기’ ‘경포열전’에 기록된 세부사항이 조금씩 다르다. 증거가 남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대에도 후세에도 항우가 암살 배후라는 주장이 의심받은 일은 없었다. 먼 훗날 조선에서 김종직이 몰래 ‘조의제문’을 지어 단종과 세조를 의제와 항우에 빗대었다. 40년 후 1498년에 이 사건이 밝혀지면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의제의 일은 그때까지도 핫이슈였던 셈이다.

-140쪽

팽성전투에 이어 형양전투에서도 패배하자 유계는 한신의 병부를 훔친다. 병부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명령권자와 일선 지휘관이 각각 지니다가 맞추어 보는 도구다. 부(符)를 맞춘다(合)는 것에서, 부합(符合)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163쪽

명나라 모곤은 "한신의… 전략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 기묘하여 적과 혈전을 벌인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혈전을 벌이지 못하는 것은 그가 항상 신병을 데리고 싸워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74쪽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세 세력이 솥 발처럼 웅거하면 어느 쪽도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천하삼분의 계책은 제갈량의 것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보다 앞선 것은 노숙이었고, 그 기원은 괴철과 무섭까지 올라간다. 한나라 때는 한무제 유철의 이름과 겹치지 않게 하려고 괴통이라고 불렀다.

-183쪽

‘패왕별희’라는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가 소개된 문헌은 <사기> ‘항우본기’다. 그런데 여기에는 항우의 부인 우미인이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자치통감>에는 아예 ‘패왕별희’의 장면조차 누락되어 있다.

-192쪽

유계는 이름도 없는 미천한 신분이었다. 황제로 즉위한 다음에야 우리에게도 친숙한 유방이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최고 권력자인 그를 이름으로 부를 사람은 없었다.(미치지 않고서야)

-198쪽

‘존왕’의 왕은 주왕을 뜻한다. ‘양이’는 ‘이(夷)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이때 ‘이’는 초나라다. 옛 기록에 초나라 군주는 ‘초자’라 일컬었다. 초의 자작(子爵)이라는 뜻이다. 당시 중원 제후국들의 작위는 대개 공, 후, 백이었으므로 초자는 초나라를 하대한 칭호였다. 초의 군주였던 웅통은 주의 왕에게 자신의 작위를 높여달라고 요구했다가 들어주지 않자 스스로 무왕이라 칭해버렸다. 당시 ‘왕’은 주나라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였다. 이후 초는 대대로 왕호를 칭하며 중심의 질서에 도전했다. 장강 연안의 풍요로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여 팽창해가던 초의 신장세는 대단했다. ‘존왕양이’는 초라는 강력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211쪽

초나라 지역은 거대한 장강과 수많은 지류, 안개와 비가 많은 습윤하고 온난한 기후 등의 자연 조건으로 인해 북방처럼 노동 집약적 집단 농업 경제 및 강력한 중앙 집중형 권력이 출현하기 어려웠다. 또한 물의 유연함, 거대한 대자연에 대한 경외가 뿌리 깊었다. 사회 속의 인간관계, 문화와 규율의 법칙성을 중시하는 유교가 북방의 고대 문화를 대표한다면, 인위에 대한 자연의 우위와 기존 질서를 초월한 자유로운 해방을 추구했던 도가 사상은 남방의 사유였다.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도 장강 유역에서 탄생했다. 유가와 도가 사상은 음양의 관계로 중국 문화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 산수의 아름다움에 대한 침잠과 찬탄이 결여된 중국 예술은 상상하기 어렵다. 남방, 즉 초라는 타자로 인해 중국 문명은 그 거대한 풍요를 획득할 수 있었다.

-212쪽

유방이 세운 제국의 이름인 한(漢)은 원래 지명이다. 한은 한수(漢水)라는 장강의 한 지류를 가리키는 한자인데, 이 한수의 중상류 유역이 한중이다. 유방은 패(沛) 출신이다. 패는 원래 송(宋)나라 땅이었다가 송이 멸망한 뒤 초나라에 편입된다. 또한 거병 후 줄곧 초 항우의 휘하였으므로 그는 엄연히 초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유방의 아이덴티티는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213쪽

한중은 유방과 항우의 근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외부로부터 격절된 궁벽한 산골이 아니었다. 험한 길이긴 하여도 관중 및 촉 등 주변 지역과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었으며, 한중 분지와 사천 분지는 온난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농업 생산력도 높았다. 또한 혜문왕 이래로 진(秦)에 속하여 왔던 진나라의 고지(故地)다. 한중의 왕이 된 후 유방 집단의 성격은 크게 변모한다. 한중 시절 유방 집단은 군사 및 행정 부문에서 진나라의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패 지역의 토착적 군사 집단에 불과했던 유방 집단은 전국적 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이에 반해 항우는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고도 다시 초나라라는 지역성으로 회귀해버렸다. 바로 이 점이 초한쟁패에서 유방과 항우의 운명을 갈랐다. 유방이 한왕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었으되, 그가 건립한 대제국이 한(漢)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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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구판절판


"변호사에게 가장 끔찍한 의뢰인은 무고한 사람이라고 했어. 까딱 잘못해서 그가 감옥에 갈 경우 평생 괴로워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지."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대충 그런 뜻이었네. 무고한 고객에게는 중간이 없다는 거야. 타협도, 협상도, 중도도 없어. 오직 한 번의 판결뿐이지. 점수판에 '무죄'라고 적어놓기라도 해야 할 거야. 무죄 말고 다른 선택은 없으니까 말이야."-112쪽

다리우스는 크랙코카인의 형식으로 죽음과 파괴를 전파했다. 아니, 어쩌면 또 다른 폭력이나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처음부터 아무 기회도 제공받지 못한 수많은 낙오자 중 하나였다. 그가 아는 건 오직 길거리 생활뿐이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랐고, 마약 거래를 배우기 위해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마약 밀매장에서 돈은 정확하게 세지만 그렇다고 당좌거래를 터본 적은 없으며,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는커녕 카운티 해변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이제 창살이 달린 버스를 타고 생애 첫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다.-118쪽

그 순간 내 울분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루이스가 늦어서도 거짓말을 해서도 아니었고, 샘 스케일스가 나를 돌팔이 사기꾼 변호사라고 욕해서도 아니었다. 그건 대박이 깨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사건에는 재판도 없고 여섯 단위의 수임료도 없을 것이다. 처음에 받은 계약금 정도만 챙겨도, 에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할 정도로 쪽박이 된 것이다.-152쪽

"왜, 카피를 10부나 보내야 하죠? 하나가 아니고?"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아홉은 교도소에 뿌려야 하거든. 그래야 전화가 걸려올 거 아냐? 항소심에서 승리한 변화사는 교도소의 황제와도 같은 존재라고. 놈들이 개떼같이 전화할 거야. 그러면 당신은 옥석을 가려, 가족도 있고 돈도 있는 자들을 골라내야지."-242쪽

나는 금방 이 방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라울의 마지막 표정이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완전히 덮어버릴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만 것이다. 저 두 눈을 영원히 떠올리고 싶지 않다면 결국 그를 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254쪽

"그러니까 내가 변호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하지 않아, 매기. 유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악한 건 아니라고. 무슨 뜻인지 알지? 차이가 있어. 그 친구들의 말을 듣고 노래를 들으면,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이해하게 돼. 그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려고 한 것뿐이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거라고. 그 중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치들도 있고. 하지만 악은 달라. 근본적으로 달라. 그러니까... 모르겠군. 악은 스스로 원하는 거야... 모르겠어. 설명할 수가 없어."-274쪽

열두 명의 이방인들이 당신의 인생에 판결을 내리는 기분을 아는가? 내면에서부터 치고 나오는 이 치열한 싸움을? 지금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형사법 변호사. 피고에 대한 판단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난 한 번도 의뢰인의 유무죄를 따져본 적이 없다. 솔직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288쪽

나는 그를 보았다. 너무 가까웠다. 증오가 아니라 사랑한다 해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거리였다. -290쪽

민튼은 창녀나 매춘 같은 단어는 애써 피하고 있었다. 그 역시 재판에 악영향을 미칠까 염려되어서이다. 나는 메모지에 그 단어들을 적고 변론할 때 써먹어야겠다고 작심했다. 검사가 빠뜨린 부분이니 나라도 돌려놓아야 하지 않겠는가.-297쪽

판사에게 빨리 끝내겠다고 말한 이유는, 배심원들이 검사의 이야기만 듣고 점심 식사를 한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햄버거와 참치 샐러드를 먹으면서 오직 검사 쪽 주장만 되새김질할 것이 아니겠는가?-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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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 이야기 3 -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3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2월
구판절판


중국 문화는 여러 개의 발을 가진 솥과 같다. 그 솥발들을 다 없애고 세 개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단연 초를 남겨둘 것이다. 나머지 둘은 중원, 그리고 진(秦)을 포함한 융적(戎狄)이다. 진이 중원과 다르듯이 초도 중원과 확연히 다르다. 물론 초는 진과도 다르다. 진이 실용성을 강조했다면 초는 거기에 미를 더했다.

-15쪽

초는 왜 자꾸 동쪽으로 나가려고 했을까? 물론 동쪽에 넓은 미개척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구리다. 초 장왕이 초나라의 창의 날만 모아도 주나라의 구정 따위는 만들 수 있다고 한 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48쪽

고대에 구리는 실로 금보다 귀중한 자원이었다. 금은 장신구나 만들 수 있었지만 구리로는 병기, 수레, 농기구까지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구리는 고대에 ‘미금(美金)’이라고 불렀다.

-50쪽

애초에 중원보다 물질이나 문화 모든 방면에서 뒤졌던 초나라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초나라 특유의 진취성과 흡수력 때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縣이라는 제도는 초나라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다. 주나라의 봉건제도에 의하면 주나라를 제외한 국가의 수장들이 公이 된다. 그런데 초는 ‘참람히도’ 일개 현의 수장을 공이라고 불렀다. 초는 약한 나라들을 합병한 후 곧장 현을 설치했다. 초는 점령한 영토를 현으로 만들고, 거기에 군사거점을 두면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영토가 크고 또 강을 따라 전차가 이동하는 길들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초나라의 특성상 지방에 군사거점을 두는 것이 편리한 면이 있었다.

-82쪽

초는 중원보다 먼저 현을 만들어 지방거점으로 활용하면서 빠른 속도로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 이것은 제나라를 비롯한 동방의 나라들이 중앙의 도성에 주로 의지하고 확장이나 전진방어를 위한 대책이 거의 없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발전된 행정제도였다. 그리고 북방의 晉과 같이 새로 편입된 지역의 인민들을 압박하고, 공신들에게 실질적인 봉지로 내리는 가혹한 체제에 비해서도 안정성이 있었다. 진이 한.조.위 세 나라로 갈라진 것은 지역에 봉지를 둔 가문들이 중앙권력을 좌지우지하다가 결국은 나라를 분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의 公들은 지방을 진수하는 지방관의 성격에 가깝다. 초는 서방 秦과 같이 강력한 중앙과 그에 예속된 행정구역으로서의 현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방행정 면에서 초의 제도는 秦과 중원국가들의 절충점에 해당했다.

-83쪽

고대의 구리합금 청동은 글자 그대로 金이었다. 청동은 썩지 않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언제든지 다시 녹여도 낭비가 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도 철기가 있었지만 철의 탄소성분을 조절하고 물성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아직 한참 동안 기술의 진보를 기다려야 했다. 또 철은 자연상태에서 쉽게 부패한다. 그러나 청동은 다르다. 청동 솥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이동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청동 솥을 들고 다니면 장거리 군사작전도 가능했다. 청동으로 만든 무기의 중요성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묵자는 청동으로 악기를 만드는 것도 반대했고, 그런 보물을 무덤에 묻는 것도 반대했다. 묵자가 활동하던 전국시대 초기에 구리는 금과 같이 귀했다.

-123쪽

초나라의 팽창정책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초나라는 중원의 예법에 크게 구속되지 않았다. 초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 움직였다. 초나라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경작지다. 마지막으로 구리광산이다. 특히 구리는 국가만이 관리할 수 있는 품목이다. 국가가 이 독점 품목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국세가 바뀌었다. 특히 초나라는 전통적으로 공업을 관장하는 공윤의 힘이 강했다. 이들은 군수품을 관리했지만, 전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25쪽

손숙오는 중국사에서 또 하나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바로 무결한 관료다. 관중은 재상 역할을 했지만 그를 관료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조력자라기보다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며 기획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역사적인 추세로 왕권이 점점 강화되자 진정한 조력자들이 필요해졌다. 어쩌면 조력자가 되기는 기획자가 되기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권력은 왕에게 있기 때문에 조력자는 왕의 권위를 해쳐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그는 왕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권력은 줄어들고 할 일은 더 많아진 상황에서 조력자는 어떻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바로 청렴이다. 청렴하지 못하면 권력을 이행할 수 없다.

-134쪽

관료 체제가 확립된 후 수많은 뛰어난 재상들이 부패 문제에 걸려 넘어졌다. 명나라를 중흥시킨 명재상 장거정을 보자. 장거정은 옛 초나라의 수도 강릉에서 태어난 명신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사소한 비리로 죽어서도 오명을 남겼다.

-135쪽

손숙오는 남을 위해 몰래 일하는 사람이다. 손숙오는 무력을 통한 다스림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생산력 증대와 민심의 지지를 통해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규율을 강요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방법들을 원용해서 점진적으로 바꾸는 것을 촉구했다.

-137쪽

장왕이 뛰어난 것은 뛰어난 귀족을 등용해서가 아니라 뛰어난 ‘촌뜨기’를 기용했기 때문이다. 제 환공이 뛰어난 것은 귀족이 아니라 처사였던 관중을 기용했기 때문이고, 秦 목공이 뛰어난 것은 노예였던 백리해를 기용했기 때문이고, 晉 문공이 뛰어난 것은 환관에 도둑까지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손숙오는 비인(鄙人)으로서 國人이 아니었다. 비인이란 국도 밖에 사는 농민이나 지방의 소읍민을 가리킨다. 춘추전국 시대는 귀족사회다. 그러니 비인을 중앙정계에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왕은 비인을 과감하게 등용한 것이다.

-141쪽

손숙오는 원래 제방을 쌓는 토목 기술자였다. 그는 경제적으로 식민지 경영을 시도한 정치가였다. 춘추시기에 하천에 제방을 쌓아 물을 댔다는 기록을 남긴 사람은 손숙오가 첫 번째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재방을 만들고 물을 활용했다. 그러나 당시 손숙오가 한 일은 그저 흐르는 물을 가둔 것이 아니라 물길을 돌리는 거대 공정이었다. 그런 대규모 공사는 기록상으로는 손숙오의 기사피라는 인공호수가 최초다. 이 기사피는 초나라의 동방 진출 교두보가 되었다. 전국시대 중기까지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나라는 초다.

-148쪽

손숙오는 초나라 동쪽 변경에 쌀의 시대를 연 것이다 .회하 일대 사람들이 먹는 것은 "쌀밥에 물고기 국"이라는 『사기』의 기록은 당시 초나라 사람들의 식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원래 있는 것이지만 쌀밥은 선조들이 제방을 쌓고 땅을 개간해서 얻은 결과물이다. 손숙오는 들판에 물을 대어 논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초나라의 관할지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백성은 곡식을 하늘로 안다고 했는데, 손숙오가 농경사회에서 추앙받는 것도 당연했다. 그 곡식 중에 단연 중요한 것은 살이다.

-150쪽

오늘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쌀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쌀은 밀보다 두 배 중요한 작물이다. 중국은 전 세계 쌀 생산과 소비의 1/3을 담당한다. 이 위대한 살의 시대의 초석을 초인들, 그중 손숙오라는 사람이 놓았다. 쌀이 없었다면 중국은 그토록 많은 인구를 부양하지 못했을 것이다.
점령지를 부유한 곳으로 바꾸면 반란이 적게 일어난다. 장왕 시대가 되면 초는 급속히 동쪽으로 팽창했지만 새로 점령한 지역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초의 일부가 되었다.
-152쪽

유비는 제갈량을 얻고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고 표현했다. 장왕이 손숙오를 얻은 것은 대붕이 날개를 얻은 격이었다.

-154쪽

보통 원정군이 나설 때는 농민들은 잡역을 맡고, 공인들이 따라와 물품을 만들며, 상인들은 사전에 전투 물자를 유통시킨다. 그러나 초나라 원정군은 달랐다. 졸들이 스스로 수레를 끌고, 풀을 베어 잘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이 군대가 장기전을 위한 자급자족형 군대임을 의미한다. 당시 초나라 군대는 장기전을 수행하는 매우 훈련된 군대임을 알 수 있다.

-178쪽

전투 대형은 사냥 대형과 같기 때문에 양군이 마주칠 때 중간에 짐승들이 갇히는 것은 당연했다.

-191쪽

"응당 승리의 군영을 만들고 적의 시체를 모아 경관을 만드시지요. 듣건대 적을 물리치고는 반드시 자손에게 고해 무공을 잊지 않게 한다고 하더이다."
그러나 장왕의 생각은 달랐다.
"이는 그대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대저 武라는 글자는 ‘창을 멈춘다(止+戈)는 뜻이다."
이것이 유명한 창을 멈추는 무, 곧 ‘止戈之武’라는 고사의 기원이다. 후대에 지과지무는 무인들의 이상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충무공 이순신의 칼에도 ‘지과’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203쪽

‘해는 일식이 있고 달은 월식이 있다(日月之食)’는 말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은 의미로 이용된다.

-206쪽

손숙오는 장기전이 가능한 군대의 편제를 만들었는데, 신숙시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둔전을 만들어 초가 장기전으로 적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니 최소한 기록상으로 전쟁과 경작을 결합한 것은 초나라가 처음이다. 송나라 사람들은 아예 집을 짓고 씨를 뿌리는 초나라 군인들의 행동에 버틸 의지를 잃어버렸다.

-224쪽

결과적으로 초 장왕의 북벌은 중국사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켰다. ‘오랑캐 군주’가 중원의 군주보다 낫다? 오랑캐의 우월을 인정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즉각 화하인 특유의 민첩성이 발휘되었다. 물론 중원이 오랑캐보다 못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초의 오랑캐라는 꼬리표를 떼면 될 것 아닌가? 장왕 이래 초는 중국사에서 더 이상 오랑캐 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국시대가 되면 초는 대국이자 문명국으로서 위상을 떨친다. 이후 북방에서 유가와 법가 철학이 무르익고 있을 때 남방에서는 기술학과 노장 철학이 만개하게 된다. 남북의 우열 시대는 끝난 것이다.

-227쪽

믿음의 군주 환공을 ‘유가적 군주’, 엄격한 상벌을 중시한 문공을 ‘법가적 군주’라고 한다면, 무모한 듯하면서도 멈추고 하는 일이 없는 듯하면서도 성취하는 장왕은 분명 도가적이다. 특히 장왕이 도가적인 것은 그가 어떤 때 멈춰야 하는지 갈파했기 때문이다.

-230쪽

결론부터 말하면 ‘노자’는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책 이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사마천이 『사기』의 열전을 쓸 당시에 ‘노자’는 이미 대중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실존인물로 여겨졌고 그의 책인 『노자』나 『도덕경』은 지식인이라면 거의 아는 책이었다. 사마천이 열전을 쓸 당시에도 노자가 누구인지는 정설이 없었다. 그래서 용의주도한 사마천은 자신이 여러 사서를 참조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231쪽

춘추시대 미증유의 대승을 거두고 슬퍼한 사람은 이제껏 장왕밖에 없다. 진나라 문공은 항상 싸움에서 이기면 승리를 과시했다. 그러나 장왕은 무력을 미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상례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물론 장왕이 평화를 사랑한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중원을 대신하여 동쪽으로 무자비하게 국토를 확장했다. 그는 현실의 군주일 뿐 ‘노자’와 같은 심오한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북쪽으로는 명성을 얻으면서 사실은 동쪽에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그가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잔혹한 방법만 썼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비록 침략자지만 그는 자신의 사람과 남의 사람을 최대한 살린다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장왕은 武라는 이름을 가진 형이며, 노자는 文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다.

-242쪽

남방에서 한바탕 광풍을 몰고 온 장왕은 패업을 이루자마자 죽었다.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초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晉은 다시 군사력을 키웠다. 둘째, 제나라가 진나라의 패자 지위에 의문을 품고 도전했다. 그 배후에는 물론 초가 있었다. 그래서 진-제 양국은 규모로는 필의 싸움에 버금가는 대군이 동원되는 국제전을 벌인다. 셋째, 서방의 秦은 晉-초, 晉-제 간의 알력이 있을 때마다 晉의 후방을 노렸다. 급기야 晉-秦은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 마지막으로 동쪽에서 신흥 강호 吳가 등장한다. 초의 동진은 오에게 위협이었다. 그러자 晉은 오를 이용해 초를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하게 횐다. 이리하여 초는 오와의 기나긴 싸움에 돌입하게 되고 북방에 힘을 쓸 겨를이 없었다.

-256쪽

대저 전쟁이란 국가의 존망을 건 대사이기에 이기고도 불안하다. 역사상 전쟁에 이기고 나라를 잃은 군주도 수없이 많다.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등 패자라고 불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쟁을 신중하게 했다. 전쟁은 감정으로 할 수 없고, 전쟁은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기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군주는 승산이 없으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다.

-290쪽

군대가 진을 칠 때는 일반적으로 그믐날을 꺼린다. 원래는 어두워서 진을 치다가 야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일 테지만 점차 관습으로 굳어졌다.

-303쪽

‘영(靈)’이란 공업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 않은 군주를 칭하고, 포학한 군주에게는 ‘여(厲)’라는 시호를 붙인다. 공왕이 언릉의 패배 이후 얼마나 뼈저리게 반성하고 살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일화다.

-310쪽

싸움의 이면을 이론적으로 살펴볼 때가 왔다. 두 가지 관점, 곧 국가의 ‘팽창 관성’과 토지와 권력을 둘러싼 ‘군주와 경대부들의 구조적인 갈등’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먼저 초나라의 입장을 보자. 장왕 대의 팽창은 일종의 관성을 만들어냈다. 마치 후대의 한족들이 만리장성을 심리적인 경계로 삼았듯이 초나라는 황하를 잠재적인 국경으로 만들고 싶었다. 황하 이남에 적대국들을 두는 것은 불안했다. 진나라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 내정의 연장이었다. 군주도 욕심이 있었고 경대부들도 욕심이 있었다. 전쟁은 그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다. 전쟁에서 지면 누가 책임질 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이기면 누구의 공인지를 두고 알력이 생겼다.

-314쪽

중원과 오랑캐의 제도 중에 무엇이 더 야만적인가? 중국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그 사람들을 노예로 쓰는 사회가 야만적인가, 아니면 자신과 다른 종족들을 포용하고 장점을 흡수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야만적인가? 낡은 중원의 사상으로는 팽창하는 세계를 담지할 수 없었다. 아마도 초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팽창은 거기에서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생산의 주체로 인간을 대하는 관념 면에서 초는 제하 국가들보다 선진적이었다. 동방의 수많은 나라들이 초나라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초나라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초는 급격히 영토를 늘려나갈 수 있었다.

-331쪽

가장 많은 ‘오랑캐’ 민족들을 가장 빠른 시간에 아우른 이들 역시 ‘오랑캐’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초는 오랑캐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후 이 오랑캐들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원을 앞지른다. 이제 우리는 오랑캐의 정의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노자』에 "골짜기는 낮은 곳에 처하기에 물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초는 화하가 아닌 2류 민족이었기에 그 많은 민족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초가 없었으면 화하는 황하를 벗어나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332쪽

현재의 중국은 한때 중원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종족으로 여긴 초인들이 살던 땅까지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춘추시대에는 정체도 알지 못하던 곳들까지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히말라야 북쪽의 고원지대, 타림 분지 일대의 사막지대도 모두 ‘중국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땅들은 모두 처음에는 중국인들이 적대시하던 민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는 어떤 민족의 근원을 따지는 일은 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다. 56개의 민족이 ‘화합하여’ 중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민족의 근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항상 경계의 눈초리를 받는다.
-336쪽

오직 현재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사라진 사람들은 "후손들의 무지막지한 저평가"에 시달리기도 한다. 중국의 고대 중원인들이 한자로 남긴 기록의 위력을 목도하고 나면, "현재"와 "후손"을 '기록’으로 바꾸어 말해도 좋을 것이다. 최소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는 ‘기록과 사실의 대결’이며, ‘기록은 사실을 무자비하게 저평가한다.’ 기록에 의하면 북쪽에 사는 사람은 북쪽 오랑캐(북적), 동쪽에 사는 사람은 동쪽 오랑캐(동이)다. 기록의 힘은 거침이 없다. 언젠가 중원이 초를 압도한 이후부터 중원인들 중심의 기록에 의해 초는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초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저평가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민족들의 연원에 대한 고대의 한자 기록들은 최소한 5할은 허구다.
-336쪽

오늘날에는 ‘성’과 ‘씨’가 구별 없이 사용되지만 고대 중국에서 성과 씨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원래 한자로 姓은 여자(女)가 낳은(生) 자녀들이라는 듯으로 모계 씨족사회에서 동일한 모계 혈족을 구분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래서 ‘姬’, ‘姜’, ‘영瀛’ 등 초기의 성들에는 계집 녀 자가 포함된 것이 많다. 그런데 사회가 점차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성이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어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족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지파가 생겨나고, 이들은 새로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자신들을 구별할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계통을 구별하기 위해 氏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초나라 왕들은 대대로 웅씨熊氏가 계승했지만, 성은 미羋였다.
-341쪽

이러한 성과 씨의 구별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귀족들이 분봉받은 채읍의 지명이나 관직, 조상의 字나 시호, 작위, 거처 등을 씨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부자 사이에도 성은 같지만 씨가 다른 경우가 생겼고, 성은 다른데 씨가 같은 경우도 나타났다. 이러한 성과 씨의 구별은 종법질서가 무너진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진한 대에 이르러 점차 그 차이를 잃고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341쪽

상나라와 주나라 시조설화는 비슷한 시기에 생겼다. 주인들은 상인들을 극복했기 때문에 상인들보다 우월한 조상을 원했다. 그래서 주나라 시조의 어머니(제곡의 첫째 부인)는 상나라 시조의 어머니(제곡의 둘째 부인)보다 순위가 앞서고, 성을 받은 사람도 순임금보다 한 대 위인 요임금이다. 진나라 시조 설화는 상나라와 주나라 시조설화보다 늦게 만들어졌다. 진인들도 주인들보다 우월한 조상을 만들기 위해 제곡보다 순위가 앞서는 전욱을 끌어들였다.

-342쪽

유비의 삼고초려, 제갈량에게 "유선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재능이 없으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라"는 유언도 모두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관우가 조조의 막하에 기식할 때 장요가 넌지시 투항을 권유했을 때, "나는 유장군께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했으니 남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도 기록에 있고, 손권에게 포위당해서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투항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제갈량과 유비는 좋은 친구였고, 관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리란 의리는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삼국지』와 『자치통감』은 모두 관우가 죽자 유비는 오직 ‘관우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오나라를 정벌했다고 적었다. 이런 무모한 결정은 정상적인 군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조가 단지 형제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킨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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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 이야기 2 - 영웅의 탄생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2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구판절판


라틴어의 ‘영웅(vir)'은 수컷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어의 ’영웅(Hero)'에는 신의 힘을 가진 자라는 뜻이 있다. 영웅이라는 말은 그래서 남성의 감성을 물씬 풍긴다. 그러니 누구를 영웅이라 하는가? 영웅은 반드시 수컷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수컷의 자질 중에는 지략(英)과 용맹(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서 영웅은 힘을 뿜어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10쪽

영웅이 어떻게 권력을 버릴 수 있는가? 독수리가 어떻게 먹이를 측은하게 여길 수 있는가? 권력은 바로 힘이다. 영웅은 힘을 가진 사람이다. 영웅은 권력을 버릴 수 없지만, 성인은 버릴 수 있다. 또 영웅이 어떻게 뭇 사람들의 칭송을 거부할 수 있는가? 영웅은 힘을 뿜어내고 뭇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 그러나 성인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11쪽

성인의 개성은 독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개성은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깝다. 성인은 커다란 어머니다. 성인은 오직 부계사회가 고착화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은 모계사회의 잔영이 남아 있는 곳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웅은 다르다. 권력을 어떻게 남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영웅은 다만 사람을 모으고 적절히 쓸 뿐이다. 수컷들이 역사를 차지한 이후 ‘성인’들은 사라졌다. 그렇지 않다면 공자가 기린이 잡혔다고 한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관중과 환공은 영웅과 성인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12쪽

공자는 제 환공이 비록 힘을 쓰는 패자였지만 바른 이라고 평한다. 또 비록 흠결이 있지만 무력을 쓰지 않고 천하를 다스린 관중을 착한 이라고 단정한다. 영웅이 바른 이인가? 영웅이 착한 이인가? 영웅은 바르게 보이는 사람이며 착하게 보이는 사람이지만, 꼭 착하고 바른 이는 아니다. 영웅을 만들어내는 상황이 그를 바르게도 만들고 굽게도 만든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를 보라. 동양에서는 영웅 하면 조조, 조조 하면 영웅이다. 그가 바로 ‘치세에는 능신이요, 난세에는 간웅’이라는 평을 받은 사람이다. 시대가 그의 도덕적인 능력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고, 또 시대가 그의 ‘부도덕한’ 야망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13쪽

『군주론』에서 "덕을 지키라. 그러나 권력을 잃을 정도로 지키지는 말라."(15장) "잔인하라. 그러나 관대하다는 평판은 들으라."(19장) 이런 이야기가 바로 마키아벨리가 그의 영웅인 군주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공자는 문공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이면을 그대로 파악했다. 문공 속에는 마키아벨리가 들어 있다. 물론 문공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처럼 천박하지는 않다. 그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난립한 춘추의 질서를 잡은 ‘패자’였기 때문이다.
-13쪽

환공과 관중의 이야기는 왠지 보통 사람이 모방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다. 단번에 인재를 알아본 후 끝까지 중용하고, 도덕과 원칙을 이익보다 앞에 두고, 우두머리들은 직접 대결을 피하고 내공으로 힘을 겨룬다. 그러나 문공은 다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패업을 이룬 사람으로 현실 정치의 쓴맛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14쪽

문공의 처절하면서도 굴곡진 인생은 관중 사후 춘추시대 중원의 확고부동한 패자로 부상하는 진(晉)나라의 운명과도 비슷하다. 진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서로는 태생이 무사인 진(秦)나라 사람들을 맞아야 하고, 북으로는 이름 자체에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융(戎)과 적(狄)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시작부터 이들과의 난타전을 통해 성장했고, 때로는 비굴함도 감수할 만큼 정치적이었다. 이렇게 주변의 강인한 족속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한 진은 강골이었다. 그들에게 관중의 인(仁)한 정치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껍데기를 버리고 서서히 군국주의적인 본색을 드러냈다. 관중은 적이 비도덕적일 때 쳤지만 이들은 적이 약해지면 쳤다.
-15쪽

딱히 다른 나라들보다 인구가 많지도 않았던 진이 강해진 것은 변화하는 정세를 재빨리 간파하고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준비했기 때문이다. 진은 군제, 전제, 행정체제 면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꾀했다. 관중이 일관되게 외교관계를 통해 국제체제의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다면, 진 문공과 그의 후계자들은 자국을 실질적으로 강하게 하는 현실적인 체제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들은 자국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국시대에도 삼진(진이 분열되어 만들어진 한, 위, 조)의 인사들은 흔히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평가받았는데, 그 선배 격이 바로 문공의 총신들이다.

-15쪽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에도 큰 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이 골짜기 분지보다 부유했고, 평원이 산지보다 물산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춘추시기의 절대 권력은 골짜기에 집중되었다. 춘추시기 초강대국인 진(晉)은 분하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고, 전국시기 초강대국인 진(秦)은 관중의 분지에 자리를 잡았다. 초나 제는 이들보다 훨씬 부유했고 항상 강국의 반열에 들었지만, 이들 국가들만큼 응집력이 없었다. 평원에서는 인민들이 흩어질 수도 있고 모일 수도 있다.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인민들이 흩어지고 모인다. 그래서 이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골짜기는 완전히 다르다. 진과 진은 공히 융과 적이라고 부르는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골짜기에 있는 국가들은 나쁘게 말하면 백성들에 대한 강도 높은 착취가 가능했고, 좋게 말하면 토지를 집약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전국시대의 변법은 사실 백성들의 힘을 최대한 뽑아내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변법이 삼진에서 시작되어 진(秦)에서 완성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변법 하면 떠오르는 상앙은 위나라에서 태어나 진(秦)나라에서 공업을 이루었다.
-27쪽

당이 멸망한 후에야 중국사의 중심은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분하와 위수의 두 골짜기가 중국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골짜기의 전략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평원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지평이 훨씬 넓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평원이 중국사의 중심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정적으로 북방의 몽골족이 북경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역사 무대의 동진은 훨씬 더디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황량한 모래바람이 부는 황토 언덕 사이의 골짜기에 불과하지만 고대에는 그곳이 황금이 땅이었다. 최소한 서기 1000년까지 이들 골짜기의 지위는 확고했다.

-30쪽

진은 명목상으로는 하나의 제후국에 불과했지만 처음부터 왕권을 지향한 국가였다. 헌공이 밝혔듯이 왕권은 무력에 기반을 둔 것이고, 자식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이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헌공은 과거 경쟁자들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첩을 취해서 낳은 아들 신생은 항상 껄끄럽다. 또 그에게는 제나라의 그림자가 있다. 중이와 이오는 적(狄)족 여인에게서 난 자식들이다. 둘은 모두 총명하고 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진이 앞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과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적과의 싸움을 앞두고 적의 혈통을 받은 능력 있는 두 아들들도 미덥지 않다. 헌공은 진(晉)의 정체성을 만들고 싶어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은 부족의 여인이 낳은 아들을 더 사랑했다.
-54쪽

1대나 2대 창업형 군주들이 장성한 아들들의 능력을 시샘한 경우는 흔하다. 당 태종의 아들 중에 남아난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태자 이승건은 일찌감치 폐위되었다. 역사서에는 이승건이 패악한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그 원인 중 하나는 이승건이 전쟁을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쟁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유목민의 전술을 배우려 했다. 그다음에 세울 사람은 당연히 황후의 둘째 아들인 이태였다. 문제는 이태가 너무 재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신들이 이태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는 개국공신이자 황후의 오빠인 장손무기의 견제를 받았다. 그도 역모의 죄를 쓰고 죽었다. 그의 죄는 아버지의 명성에 도전한 것이었다. 황후의 아들 중 막내인 이치는 별 특징이 없고 유약했다. 결국 그가 제위를 이으니 당 고종이다. 고종은 자신의 무능을 십분 발휘하여 무측천에게 나라를 넘겨주게 된다.

-54쪽

또 청나라의 강희제는 태자 윤잉을 폐했다. 역시 도덕적인 자질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진나라 헌공처럼 너무 오래 자리를 유지한 아버지의 의심이 문제였다. 그 다음은 만주족의 풍습상 무공을 세운 14자 윤제가 유력했다. 윤제는 몽골 초원과 티베트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윤제의 공이 너무 크고 노회한 장수들이 그를 지지하자 강희제는 결단을 보류했다. 그래서 결국 가장 무난하고 무력과는 거리가 먼 옹정제가 즉위하게 된다.
당 태종은 돌궐의 지지를 받아서 초원을 평정했지만 아들이 돌궐인을 닮는 것에는 기겁을 했고, 자신은 무력으로 왕권을 차지했지만 무력을 갖춘 아들은 멀리했다. 강희제도 마찬가지다. 그도 너무 오래 집권한 나머지 아들들과 경쟁했다. 나이가 들자 의심이 많아졌다.
헌공은 당 태종이나 강희제와 같은 인품은 없었지만 마키아벨리적인 정치감각은 오히려 그들보다 나았다. 그러니 장성한 데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아버지의 위신을 위협하는 아들, 혹은 어머니의 배경이 강한 데다 개성이 뚜렷한 아들들이 기꺼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55쪽

동방의 노나라와 제나라가 종주국인 주의 예법을 가져갔다면 진(秦)은 주의 생존과 발전 전략을 고스란히 가져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몸종으로 있으면서 정치를 배웠다. 몸종은 예절을 가지고 있지만 예절을 내면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절의 이면에 들어 있는 권력의 속성들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요토미는 주인의 뒤를 이어 전국의 패자가 되지만 주인과는 확연히 다른 품격을 가지게 된다. 도요토미는 오다의 대범함 속에 숨어 있는 속임수들을 배워 확연힌 실리주의자로 성장한다. 진나라가 바로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진은 주의 허식이 아니라 실리를 철저하게 모방했다.

-83쪽

바퀴의 발견은 인류사적 관점에서 거의 불의 발견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바퀴가 생김으로써 인간은 동물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게 되었다. 현대문명은 사실상 바퀴문명이다. 회전력을 빼면 기계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날아가는 비행기도 엔진의 회전운동으로 움직인다. (...) 여러 정황으로 봐서 전차는 초원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중국은 최초의 발명자는 아니더라도 받아들인 것을 최대한 발전시켜 활용한다. 춘추시대가 되면 전차는 여러 국가의 주력 전쟁 무기로 진화한다.

-104쪽

춘추시대 전기는 전차전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전투에서 양편이 회전하는 장소는 대체로 양편의 전차가 움직일 수 있는 장소였다. 전쟁의 목적이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곳에 모여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또 국가는 기본적으로 몇 개의 성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투할 장소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요새 점령이 목적이라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쉽게 주둔하고 방어망을 펼치는 보병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숫자가 제한된 전문적인 군인들이 전투를 했으므로 야전에서 상대방 주둔군에게서 불의의 습격을 받을 염려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무기의 관통력이 아직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14쪽

춘추시대의 전쟁은 비유하자면 무리의 대표들끼리 정해진 장소에서 1대1 대결을 벌이는 것과 유사하다. 이들 전사들은 직업군이었고 그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야인’들은 이들을 부양할 의무는 있었지만 싸움에 끼어들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되면 싸움은 점점 더 전면전으로 바뀐다. 한 무리 전체가 다른 무리 전체와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싸움의 기본은 숫자를 우위로 한 포위나 지형을 이용한 장기전이다. 전차가 들어설 공간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수한 춘추중기까지 전차는 전술의 기본이었다.

-115쪽

전차에는 세 명이 탄다. 전차의 주장은 왼쪽에 타고 활을 잡는다. 그래서 차의 왼쪽에 탄다고 하여 거좌라고 한다. 가운데는 전차를 모는 거어가 탄다. 그 오른쪽에는 거우가 타는데 그는 방패를 잡고 극이나 창을 휘두른다. 사서에 ‘누구의 전차’라고 하면, 그 전차의 왼쪽에 탄 사람이 바로 주인이다. 군주나 중군의 수장의 전차를 모는 사람은 알려진 무장이어야 하고, 오른쪽에 타는 무사는 용력이 가장 뛰어난 무사여야 한다. 그래서 전투에 앞서서는 대개 점을 쳐서 거어와 거우를 결정한다. 거어와 거우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평시에는 국사에 참여하는 거물들이다.

-116쪽

전차전에서 양측의 중군은 가장 강하며, 아군의 좌우군이 상대방 좌우군 중 하나를 밀어낼 때까지 버티는 것이 주요 임무다. 중군이 좌우군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상대방 좌우군에게 측면이 노출된다. 그래서 매우 주도면밀한 지휘관들은 좌우군과 중군의 위치를 바꾸어 일부러 중군이 밀리도록 만든다. 실전에서 군대는 승기를 잡으면 무조건 밀고 들어가는 습성이 있으므로 상대가 등을 돌리면 밀고 들어간다. 상대의 중군이 깊이 들어오면 사실상 주력부대인 좌우군이 중군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이 쓴 반달진 전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쓴 학익진 등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작전을 펼치려면 각 부대는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118쪽

전쟁이란 참혹한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 지배계층의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춘추시대의 농민들은 직접적인 위협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당시의 농민들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고서야 아는 경우도 많았다.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세금을 내는 대신 전쟁터에서 죽을 확률은 적었다. 그러나 앞으로 상황은 바뀌게 된다. 농민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시절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전쟁의 유일한 순작용은 전쟁에 대한 공포다. 중국을 예로 들면, 기원전 1500년경에 한 부족이 전쟁에서 패했다면 그들은 노예 신분을 감수해야 한다. 춘추시대에 이르면 상황이 좀 좋아지지만, 여전히 전쟁에 패하면 주종관계를 맺고 정책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군대에 차출당할 수도 있고, 노동력을 차출당할 수도 있다. 해마다 바쳐야 하는 공납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138쪽

전쟁의 공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승리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노력이 종종 사회의 잠재력을 이끌어낸다. 재원을 집중하고, 때로는 구시대의 폐단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세계사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니발이 몰고 온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를 극복하는 와중에 로마는 기병대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단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의 신분제를 뒤흔들어놓았다. 양반들이 적군 앞에서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노비라도 전공을 세운 사람은 신분 해방의 길이 열렸다. 비록 본격적인 개혁은 실패했지만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기회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개항도 마찬가지다. 객관적인 열세 속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다가 서양화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동원된 민병대, 남북전쟁의 노예해방 등은 모두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나타난 개혁이다.
-138쪽

춘추시대의 기록들은 기본적으로 귀족의 기록이다. 귀족들은 특권층이다. 그런 귀족의 특권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이 자해와 자살이다. 잘못이 있을 경우 남이 자신을 해치기 전에 스스로를 해치고, 죽음을 당해야 할 상황이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이 특권은 춘추의 귀족들이 매우 귀중하게 생각한 불문율이었다. 한나라가 만들어진 후 가의(賈誼) 등의 유학자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 바로 대부의 자결권이다.

-144쪽

군주의 첫 번째 자질은 바로 인재등용과 신상필벌이다. 사회가 급격한 기술의 진보다 집단적인 토론에 의해 지탱되지 않던 고대에는 인재집단이 바로 국가였다.

-190쪽

문공의 논공행상은 앞으로도 이어지지만 그 원칙은 깨어지지 않았다. 인의를 밝힌 사람과 나라를 지킨 사람을 앞에 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란 자신을 위해 고생한 사람을 먼저 챙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공은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일정한 공을 돌리고, 패자의 기본 자질을 세워준 사람들을 우대했다. 19년의 망명생활이 허무한 것은 아니었다.

-193쪽

당시 농민 한 명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맹자는 100무로 보았다. 100무를 경작하면 5~9명을 부양할 수 있다고 한다. 농부 한 사람이 수입으로 부양할 수 있는 인구를 평균 7명이라고 하자. 그렇게 보면 군주는 대략 2,240명, 경운 224명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그러나 춘추 중기 진(晉)나라는 사방 100리가 아니라 사방 500리의 대국이었다. 그 군주는 주나라 천자보다 부유했으니 그 나라의 경의 지위를 알 만하다. 물론 맹자가 말한 수치는 모두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지배층이 과다하게 착취하는 전국시대의 현실을 강력히 비판하는 입장이므로, 춘추 이후에는 지배층이 받는 녹이 그가 말한 것보다 더 늘어났음은 분명하다. 그러니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경이나 대부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최소 수백 명에 달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재산가였음은 분명하다.

-196쪽

한자로 ‘정치’는 정(政)과 치(治)의 결합이다. 정이란 바르다(正)는 듯과 명령(文)이라는 말의 결합이다. 그러니 정이란 군주의 정령을 뜻한다. 치는 다스림이다. 다스림의 주체는 지식을 가진 자이며, 그 꼭대기에는 군주가 있다. 이것이 대체로 통일제국 이전의 정치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이다. 정치의 주체는 명백히 군주다. 군주는 하루도 없을 수가 없으며, 군주의 존재는 문명의 조건이다.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주권자인 인민이다. 그러나 군주에게 그 권리가 양도된 상태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군주’가 ‘법’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고 통치한다. 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을 쓰는’ 것이다.

-206쪽

관중이 만들고자 한 제나라는 부유한 나라였고, 문공이 만들고자 한 진나라는 근검절약하는 나라였다. 부채탕감과 부세경감은 구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신진세력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다. 제 환공의 팽창정책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지만 진 문공의 팽창정책은 땅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 진-진이 황하를 사이에 두고 강력한 영토분쟁을 벌인 것도 모두 이름을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문공은 서방 진(秦)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서방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으니, 앞으로 동방으로 진출할 것이 명백했다.

-210쪽

공성은 심리전이다. 그래서 성을 공격할 때는 완전히 포위하지 않고 항상 한 면을 열어둔다. 상대의 전투 의지를 꺾기 위한 것이다. 양번과 원을 공략하면서 문공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원을 점령한 후 조최를 두어 다스리게 했고, 온 땅은 호진이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문공은 주나라 왕실의 땅을 차지하면서도 신의를 지켰다는 명성을 얻었다. 남방의 초나라로서는 이제 제나라보다 훨씬 호전적인 상대를 만난 것이다.

-225쪽

대규모 전쟁은 심리전이다. 쌍방의 실력이 비등할 때, 명분을 가진 군대가 이기는 것은 별로 예외가 없는 규칙이다.

-244쪽

고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의 절반은 사실 전쟁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의 이면을 들추다 보면 고대사를 결정하는 요인, 심지어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힘까지 볼 수 있다. 중국은 전쟁사의 보고다. 전쟁의 강렬한 유혹과 그 참혹한 결과를 목도한 많은 철학자들은 전쟁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왔다. 춘추 말기의 위대한 사상들은 모두 전쟁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없애기 위한 이론도 있었고, 침략전만 배제하자는 이론도 있었으며,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극복하자는 이론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론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쟁의 목적, 수단, 정의 등 모든 방면에서 서양의 어떤 이론도 중국의 이론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249쪽

고대 마야 문명을 구성하던 부족들은 거의 수백 년 동안 대규모 전쟁 없이 공존해왔다. 체계적인 약탈의 필요성이 매우 적은 지리적인 조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체계적인 약탈을 위한 전쟁기술들이 계속 발달했다. 중국이나 중근동이나 지중해 세계는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근래 서양 국가들이 자행한 식민지 쟁탈전은 체계적인 약탈전쟁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체계적인 약탈전의 시대에 들어오자 전쟁 행위를 전쟁 수행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또 전쟁에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계급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바로 지배계급이다. 이제 전쟁에서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의 성과를 분배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251쪽

지도자란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와 전쟁을 수행할 때 그가 끌어들인 이유들을 보라. 본질적으로는 상나라의 지배를 주나라의 지배로 바꾸기 위해서지만, 그는 이때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적은 무도하고, 인민들을 착취한다. 우리는 그 착취를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부족들을 끌어들여 상나라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이때부터 전쟁은 급격히 이념적인 것이 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국가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했다. 이제 전쟁은 여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여론을 끌어들이는 명분이 없이는 전쟁은 불가능했다. 이 명분을 세우는 일이 바로 고대의 정치였다.
-251쪽

오기는 전쟁의 발발 원인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는 명분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셋째는 증오심이 쌓였기 때문이다.
넷째는 내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55쪽

문공의 원칙은 명백했다. 벌줄 자는 단호하게 벌주고, 상을 줄 자는 확실하게 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과 전투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았다. 또 전쟁을 통치에 연결하는 방식도 알고 있었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하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중이요, 정치에서 이기는 것이 상이라는 것이다.

-261쪽

융은 서쪽에 있는 민족이고(서융), 적은 북쪽에 있는 민족(북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융이나 적은 범칭이며 특정한 민족을 지칭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태행산맥 동단과 북부의 사람들을 적이라고 고정적으로 불렀지만, 태행산맥 남단의 사람들은 융이나 적으로 뒤섞어서 불렀다. 어떤 때는 융, 어떤 때는 적이라 부르고, 융적이라고 붙여서 부르기도 했다.

-297쪽

전국시대가 시작되면 중원의 여러 세력들은 기존의 이민족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대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수레를 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달렸다. 더 무서운 것은 말 위에서 활을 쏘아댔다. 이들은 전차와 보병을 무력화시키는 무서운 적이었다. 전국시대 말기에 진, 조, 연 등 북방에 위치한 나라들은 ‘흉노’라는 기마궁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들은 전국칠웅으로 대표되는 중원국들의 대척점에 있었다. 그래서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문헌 근거에 의해 전근대 시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흉노를 융족의 계승자로 보았다. 그들은 원래 중원에서 기인했으나 북방으로 옮겨가서 기마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304쪽

융과 호(흉노)는 다르다. 호는 완전한 유목민이며 기본적으로 기마궁수들이었다.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들(융적)이 역학관계에 따라 호에 속하게 되거나 화하에 속하게 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기원전 4세기 오르도스와 산서성 북부에 출현한 흉노라는 집단은 문화적으로는 기존의 융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기존의 융족들은 이들의 문화를 매우 빠르게 배워갔다. (...) 여러 융적들은 화하나 흉노의 문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니 흉노는 하나의 집합적인 정치체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진 목공이 평정한 융은 아직 흉노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308쪽

관중은 인간적으로는 훌륭하나 욕망을 통제하는 능력이 부족한 환공을 변함없이 보좌한다. 이런 관계는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관중 사후에 제나라의 패권이 급격히 무너진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반면 진(晉)의 체제는 달랐다. 문공이 죽었으나 패권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는 문공이 좀 더 현실적인 체제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많은 인재들을 남겨 뒤를 받치게 하는 점에서는 진문공이 제 환공이나 관중보다 나았다. 다시 말해 진 문공이 더 현실적이었다.

-321쪽

진 문공은 고생이 몸에 밴 인물이다. 보통 사람은 고생이 끝나면 방탕해지기 쉽다. 그러나 그는 그 고생을 간직했다. 그래서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했고, 이는 진나라의 기풍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아마도 그가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영유하던 적족의 풍속을 간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족인 호언은 문공에게 항상 가장 실질적인 길을 가르쳐주었다. 사치하고 화려한 제나라의 방식으로 물자가 부족한 진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문공은 스스로의 핏줄 속에서 중원과 북방의 장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324쪽

춘추전국은 서북방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추무대에서는 가장 북방에 있는 진(晉)이 줄곧 맹주 자리를 유지했고, 전국시대를 통일한 이는 가장 서쪽의 진(秦)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 지역은 동남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낙후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웅장한 유적들도 방치된다. 그러나 동남방의 풍부함, 유려함만 보면 전체 중국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 청나라 말기의 극도로 화려한 궁정 문화는 서방의 침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무굴 제국의 화려한 궁정에 비하면 영국의 왕궁은 장난감 수준이지만, 그 무굴 제국의 화려함도 영국인들의 화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화려함과 섬세함, 혹은 풍부함은 문명의 한 일면이지 전체가 아니다. 문명이 간결한 원시성을 상실할수록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간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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