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좀 합니다 - 일만 알던 내 몸이 요가를 부를 때, 퇴근길에 인도까지
백서현 지음 / 에이치비프레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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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의욕적으로 '오늘은 요가를 가겠어!' 라고 결심하지만, 퇴근이 가까워올수록 '가지말까'하는 마음이 크게 생긴다. 새벽 다섯시 이십분에 일어나 시작하는 하루는 내게 너무나 길고 오후 세네시경이면 이미 지쳐있다. 그런참에 퇴근하고 요가센터로 간다는 건 사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갈까말까 고민하는 내게 여동생은 '그냥 가' 혹은 '그냥 가지마' 라며 그게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어렵기만 하다. 이런 나의 고민에 매일 요가를 하는 지인은 '그냥 매일 다니는 걸로 바꿔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4회를 갈 수 있는데 이 4회를 꽉 채워 가는 날은 드물다. 그렇게 4회로 정해 놓으니 고민하게 된다며, 매일 가는걸로 바꾸면 그냥 매일 가게된다는 거였다. 그러고보니 내가 플랭크 한달 도전도 매일 하기 때문에 '오늘 할까말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해야한다'뿐이었지.. 아아, 그러나 나는 매일 요가를 가는 건.. 아직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일주일에 네 번도 힘든데...



어제 아침도 요가복을 가방에 쑤셔넣고, 오늘은 갈등없이 퇴근 후 요가에 가리라 마음 먹었지만, 하하하하, 퇴근 무렵부터 갈등이 오기 시작했고, 그렇지만 나를 추스리며 간신히 간신히 센터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어라, 복도가 깜깜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요가 센터의 문은 왜 닫혀있지? 나는 내가 내린 층이 내가 내려야할 층이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맞았다. 요가센터의 문을 열어보니 온통 깜깜했고, 코로나 때문에 이번주 휴관이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아니, 그러면 진작 회원들에게 문자 메세지를 넣었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이건 보냈을것 같은데, 그런데 내가 못본 게 아닐까' 싶어서 내 핸드폰을 훑어보았다. 하아, 역시나 금요일 저녁에 휴관할거란 메세지가 도착해있었다. 나는 걍... 안봤어 문자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왜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왜냐하면, 그건 말이야, 내가 가기 싫어 안간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못간 거니까. 집에 돌아가니 엄마는 내 표정이 신나보인다 했고, 나는 엄마, 제부가 선물해준 와인 마시자~ 하면서 와인을 마셨... 요가 아니면 와인이라니, 이런 극단적인 삶이여...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 위로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아, 최근에 재등록을 앞두고 요가를 다시 등록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나는 반드시 다시 등록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그렇지 않으면 진짜 꼼짝도 안하는 사람이겠어... 그나마 요가센터에 등록해뒀으니 억지로라도 몇 번 가서 몸을 움직여주는 게 가능했다. 쓰지 않았던 근육들에 힘을 주고 쫙쫙 펴주는 게, 그나마 센터에 가기 때문에 가능했어. 집에서 혼자서는 결코 하지 않고, 이것봐라, 매일 술이나 마실 것이여...




침대에 앉아서는 '백서현'의 [요가 좀 합니다]를 읽기 시작했다. 요가를 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요가책은 읽어줘야 나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백서현은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몸이 안좋아졌고 그래서 요가를 하게 되었다 했다. 3년쯤 하다가는 요가를 더 잘 하고 싶어져서, 아아, '미리 마음먹지 않으면 찾아가기 어려운 인도의 끝(p.161)' 인 인도의 케랄라에 가 요가를 하기로 결심하는 거다. 잘하고 싶은 마음, 좀 더 알고 싶은 마음,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쏟고 싶은 마음을 나는 언제나 너무 응원하고 좋아해서, 그런 사람들만으로 내 주변을 채우고 싶은 사람이라서, 그래서 아아, 너무 좋다, 그래, 가라, 인도든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가 원하는 수련을 해라,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인도는 '더운' 나라고, 나는 더운 나라를 몹시 좋아하는 터라, 갑자기 얼른 베트남에 가고 싶어졌다. 인도에 갈 마음은 아직까지 잘 생기질 않아서 베트남에 가고 싶었어. 마침 호치민에 혼자 가려고 비행기표를 예매해둔 터라, 얼른 그 날이 오라고 바라면서 이 책을 읽었다. 나도 더운 나라 가요, 가서 땀흘릴거야. 그렇지만 요가는 안하지..



예전에 요가 수업 때 일주일에 한 번쯤 만나던 선생님은 내게 요가 지도자과정을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 했었다. 그때는 어쩐일인지 다른 회원들이 오지 않아 선생님과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1 수업을 하고난 다음이었다. 선생님,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저 이렇게나 못하는 게 많은데요.. 선생님은 '아사나는 계속 노력하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때가 오는 거고, 그보다는 요가에 대한 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게 그 감각이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예전부터 한 번 권하려 했었다고.



선생님... (눈물이 그렁그렁)



그러나 나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지도자과정(TTC)에 대해 나오는데, 지도자과정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하는 것처럼 퇴근하고 억지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 한시간 수업하는 걸로 되는 게 아니다. 정말 요가가 좋고 잘하고 싶다면, 그래, 인도에 가서 하는 것도 답일거야, 생각했지만, 그래서 '나도 언젠가 퇴사하면 요가에만 집중하는 TTC 과정을 밟아볼까' 하였지만, 하하하하. 나는 백서현이 이 책을 통해 알려준 인도의 요가 시간표를 보고서는 인도에 가지 않을 것이고 지도자과정도 밟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퇴사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아침 이른 기상인데, 뭣이여, 요가를 할 때도 이렇게나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퇴근 후 지친몸을 이끌고 가는 요가는 언제나 갈까말까 고민의 대상이 되지만, 하하하하, 저것은 무리입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요가를 좋아하는 건 아닌가보다.


지도자과정은 수련을 많이 하고 이론도 공부하는 만큼 교육비가 많이 든다. 나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 때 선생님이 내게 지도자교육을 권한 건, 내가 돈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응?)

농담입니다.




센터에 다니다보면 선생님들이 길게 휴가를 낼 때가 있다. 휴가후 돌아오면 다들 스페인에 가서 요가하고 왔다, 발리에 가서 요가하고 왔다고 말들을 하더라. 자신이 이미 잘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자하며 노력한다는 것은 역시나 짜릿한 일이다.



이 책속에서 백서현은 요가한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안되는 자세들은 여전히 안된다고 말한다. 크-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백서현 역시 대부분의 요기니들처럼 머리서기를 하고 싶어하는데, 인도에서 한달간 집중 요가할 때도 되지 않았던 것이 돌아오고 나서 되었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그 집중훈련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다. 나도 집중하면, 그러면 뭐든 될까. 지금은 다리찢기 하고 싶은데 연습 너무 안하나.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내가 요가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너무 적지 않은가.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걸까.



요가를 하면서 많은 동작들이 여전히 안되는데, 특히나 비틀기가 안될때면 '내가 너무 많이 먹나', '내가 너무 고기를 먹나'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거꾸로 활자세가 되지 않을 때는 선생님께 '제가 뱃살이 너무 많아서 안되나요' 묻기도 했다. 선생님은 꼭 그런 건 아니라며(꼭 그런 건 아니면 그럴 수도 있긴 한거잖아요?), 손에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각을 찾기만 하면 금세 될거라고. 저..예전에 다른 선생님이 감각 있다 그랬는데.. 감각 없었나봐요.....역시 돈 때문이었나.. 킁.


요가를 시작하면서 다른 여러가지 상황들과 맞물려 '먹는 양을 줄이자', '가급적 고기를 먹지 말자', '하루에 두 끼만 먹자' 생각하였다. 몸이 가벼워지면 요가가 더 잘될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백서현도 요가를 할 때는 먹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얘기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하루 세 끼'가 모든 사람들에게 맞는 정답은 아니다. 자신의 일과 생활에 어울리는 식이법은 스스로 찾으면 된다. 누군가에게는 아침을 잘 먹는 게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하는 데 중요한 일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1일1식이면 충분하게 느껴진다. 나는 집에 혼자 있을 때면 10시쯤 첫 끼를 먹고, 4시쯤 두 번째 끼니를 먹는다. 세끼를 먹을 때는 아침엔 간단한 주스를 마시고 점심은 골고루 배부르게 씹는 음식을 먹고 저녁은 건너 뛰거나 요거트를 먹는다. 물론 약속이 있다면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지만, 이 정도가 몸의 바이오리듬이 가장 좋다고 느낀다. (p.124)



적게 먹는 것도, 두끼로 줄이는 것도, 고기를 안먹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매운 거 좋아하고 술과 커피를 즐겨 마시는데... 아아, 나는 요가 잘하긴 틀린거야.. 나는 다리찢기를, 까마귀자세를, 머리서기를, 거꾸로 활자세를... 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백서현의 [요가 좀 합니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요가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가를 하고 싶어서 인도까지 갈 열정 같은 게 내게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아. 그렇다면 잘 할 수도 없는 거 아닐까.

그렇지만 모두가 언제나 알고 있었던 진실,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할 수 있다는 것도 다시 새겼다.

그리고 지금보다 적게, 가볍게 먹어야 한다는 것도.


아사나(자세)를 하면서 드는 생각이랄까 나는 좀더 일상적인 것에 가까운 요가 에세이를 원했는데, 이 책은 요가일상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인도에서 좀 빡세게 요가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훨씬 더 적절할 것 같다. 인도에서 하는 요가에 매우 집중되어 있는 책이다. 인도에서 요가하고 싶은데 정보가 필요하다면 이 책은 매우 도움이 될것이다.






요가는 마음의 상태를 통제하는 것이라니.

난.... 요가를 잘 못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성장을 원하는 요가 선생님들은 다양한 곳에서 여러 번 TTC를 하거나 계속 새로원 워크숍에 참여하고 공부하면서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 P48

2013년 취업을 하고 그해 요가를 시작해서 약 4년이 흘렀다. 중간중간 게을렀던 기간을 제외하면 3년간 반복해서 매트 위에 섰다. 덕분에 많은 동작의 구조나 의도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동작들은 여전히 처음 시작했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헤매고 있었다. 그 불균형을 깨기 위해서 뭔가 새로운 노력이 필요했다. 이제는 정말 달라지고 싶었다. 하루를 쪼개서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곳에 쓰고 남는 시간에 겨우 요가원에 들르는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서 조금 더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살아 보고 싶었다. 아직 가 보지 못한 요가의 세계는 넓고 나는 작은 우물 안 올챙이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을 때 호기심은 갈급함으로 이어졌다. - P64

작은 매트 위에 쌓아 올린 완벽한 나의 세계에서 숨을 마쉬고 내쉬는 그 순간에만 집중하면 고통의 감각도 정신의 산란함도 없다. 원하지 않는 일들로 가득찬 하루의 모든 시간 중 유일하게 복잡한 생각, 다른 사람의 시선, 앞으로 해야 할 일 같은 건 덜어내고 나를 위해 의식적으로 사는 잠깐의 시간. 아사나를 수련하기만 해도 삶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치유 효과를 볼 수 있는 이유다. 가장 단순한 것들로만 채워진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엔 순수한 평화가 깃든다. - P108

요가 호흡의 목표는 좋은 공기-산소를 더 많이 받아들이고 몸에 남은 찌꺼기-이산화탄소를 최대한 바깥으로 배출하는 것이다. 느리고 깊은 호흡은 우리가 정신적/감정적 안정 상태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 P117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하루 세 끼‘가 모든 사람들에게 맞는 정답은 아니다. 자신의 일과 생활에 어울리는 식이법은 스스로 찾으면 된다. 누군가에게는 아침을 잘 먹는 게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하는 데 중요한 일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1일1식이면 충분하게 느껴진다. 나는 집에 혼자 있을 때면 10시쯤 첫 끼를 먹고, 4시쯤 두 번째 끼니를 먹는다. 세끼를 먹을 때는 아침엔 간단한 주스를 마시고 점심은 골고루 배부르게 씹는 음식을 먹고 저녁은 건너 뛰거나 요거트를 먹는다. 물론 약속이 있다면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지만, 이 정도가 몸의 바이오리듬이 가장 좋다고 느낀다. - P124

요가는 살생을 금지하는 아힘사 정신을 기본적으로 따른다. 죽은 동물의 육체를 먹는 것이 우리 몸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연히 커피와 술도 금지다. 마음을 산란하게 해 요가 수행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맵고 짜고 달고 튀겨 부풀린 음식을 먹으면서 몸이 편안해지길 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 P126

하루 온종일 수련하는 삶을 몇 주간 계속하다 보면 그간 어려워했던 아사나를 갑자기 하게 되는 등 실력이 폭발적으로 늘기도 한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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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0-02-1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를 왔는데 주변엔 요가를 할 곳이 없네요....물론 있을 때도 드문드문 다녔지만요☞☜

다락방 2020-02-11 15:18   좋아요 0 | URL
저도 일주일에 세 번 가면 많이 가는 겁니다...☞☜

han22598 2020-02-12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영 일주일에 2~3번하는데...물론 대부분 2번을 해요 ㅎㅎ
저도 갑자기 수영장 문 닫는 날이 가장 기쁘고 뿌듯합니다 ^^

다락방 2020-02-12 07:4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치요? 뭔가 합법적으로(?) 안가는 거라서 마음이 편안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주아 2020-03-29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갖인상적이네요..일상생활에서 묻어나는 요가글을 보고싶었는데 열정가득한 사람이 봐야하는것같아서 구매고민중인데..잘하고싶은마음은커요 인도까지 가고싶진 않아서.,

다락방 2020-03-29 12:56   좋아요 0 | URL
저도 인도까지 가고 싶진 않아서 말입니다. ㅎㅎ
요즘은 텔레비젼에서 <요가소년> 보면서 가끔 따라하고 있어요. 어제는 수리야 a,b 세트 열번씩 따라하고 근육통 있습니다. ㅎㅎ
 
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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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편을 들면 있었던 사실을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되고 심한 것을 그렇게까지 심한 건 아닌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가해자의 편을 들까. 왜 가해자의 말을 피해자의 말보다 더 신뢰할까. 그건 아마도 가해자의 말을 신뢰하는 편이 방관자의 마음이 더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책에서 배움에서 오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걸 느끼기도 했고.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던 타라 웨스트오버가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과 대면하고 빨려들어가 공부하는 것이라든가,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접목시키는 순간들은, 내가 바랐던 바로 그 이야기였다. 공부하면서 예전의 나와 달라지는 바로 그 지점들. 



타라 웨스트오버는 모르몬교의 절실한 신자인 부모님 덕에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면서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폐철처리장에서 일을 하면서 학대당하고 위험에 노출된다. 게다가 그녀의 오빠중 한 명은 자라는 내내, 그녀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어마어마한 폭력을 휘두른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세계는 그녀에게 전부였으므로 세상에 나온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우적댄다. 대학을 다니면서 자신이 그간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다른 환경에 놓였는지 인지하게 되고 모든 학문들로부터 자신의 삶을 돌이켜 자신이 당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걸 알게되는 것은 그녀에게 결코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고 또 힘든 과정이었다. 그녀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자꾸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자기에게 폭력을 휘두른 오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어김없이 큰 실망만 안고 돌아와야 하고. 그녀는 아주 오래, 자신이 모든 걸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여전히 가족들을 사랑했고 또 가족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당했던 학대와 폭력을 인지할 수 있었던 것, 그랬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배움 덕이라고 타라 웨스트오버는 말하고 있다. 그 결론은 충분히 묵직했지만,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내가 기대한 배움의 짜릿함 보다는 폭력의 거대함에 무력해졌다. 그녀가 홀로 자신이 집이라 불렀던 곳으로 돌아가는 걸 볼 때마다 너무 힘들었고, 대체 왜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릴 때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예방 접종도 받아본 적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하버드와 케임브리지를 거쳐 박사학위를 받아냈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결코 오빠의 사과를 받지 못했고, 그 때의 기억은 그녀에게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녀의 일기장 속에도. 배움으로 인해 그녀는 예전에 보았던 세상과는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었지만, 그러나 나는 무력함을 느낀다. 폭력의 힘이 너무 세서. 폭력의 힘이 너무 강해서. 그것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서 너무나 무력하고 기운 빠진다. 



폭력이 존재하면 그 폭력의 기억은 피해자에게 내내 따라다닌다. 피해자는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 기억을 조작해보고 미화해본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한걸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그들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신의 탓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어지고 자기 자신과 타인을 믿는 것도 어려워지는데, 이 모든 것들을 거쳐나가는 그 오랜 시간동안 가해자는 이렇게 어려운 시간을 보내질 않는다. 



물론 타라 웨스트오버가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것, 더 나쁜 환경속에서 더 나쁜 일들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그 과거의 폭력을 고발할 수 있었던 것은 배움의 덕이다. 배웠기 때문에 그녀는 이만큼 올 수 있었다. 그것은 다행한 일이고. 그렇지만 독자인 나도 책장을 덮고나서도 그 폭력에 대해서 잊을 수가 없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앞에서 느꼈던 그 수치심과 고통, 살면서 겪었던 외로움과 고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괴롭다. 폭력 그 따위 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괴롭다. 폭력의 기억이 나를 후려치지 않게 해야한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괴롭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던 학대에 대해 알고 읽었지만 폭력 또한 그녀를 내리치고 있을지 몰라서 괴로웠다. 이런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그리고 여자들이 여전히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다. 배움의 발견보다 폭력의 기억이 더 크게 다가와서 이 책을 읽는 것이 괴로웠고 책장을 덮은 지금도 괴롭다. 




산파 일은 엄마를 변화시켰다. 엄마는 일곱 자녀를 가진 성인 여성 이었지만, 이전에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의심이나 도전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책임자 역할을 수행한 적이 없었다. 가끔 분만을 한 후 며칠동안 엄마한테서 주디한테서 느꼈던 무거운 존재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머리를 고집스럽게 돌린다든지, 도도하게 눈썹을 추겨세운다든지 할 때 말이다. 엄마는 화장하는 일을 그만뒀고, 화장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는 일도 그만했다. - P41

나는 그날 제닛이 입은 남색 블라우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블라우스의 목선은 쇄골에서 2센티미터밖에 내려오지 않았지만, 헐렁했기 때문에 몸을 수그렸으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나는 초조해졌다. 블라우스가 더 딱 맞았으면 몸을 수그려도 속이 덜 보였겠지만, 딲 맞는 옷 자체가 덜 점잖아 보였을 것 아닌가. 의로운 여성은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여자들이나 하는짓이다.
내가 어느 정도 몸에 맞는 옷이 적당히 맞는 것일까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제닛은 내가 볼 때까지 기다려서 그 성가집을 주우려고 몸을 구부렸어. 내가 보길 원했던 거야." 엄마는 못마땅하다는 듯 <쯧>하고 한 번 혀를 찬 다음 감자를 네 조각으로 잘랐다.
- P185

아버지의 말은 그전에 수백 번 들었던 비슷한 내용의 설교와는 다른 형태로 내 뇌리에 박혔다. 그 후 몇 년동안 나는 무척 자주 그 말들을 머리에 떠올렸고, 그 의미를 곱씹을수록 내가 잘못된 부류의 여자로 변화해 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 커졌다. 어떨 때는 <그들처럼>걷거나, 몸을 숙이거나, 쭈그리고 앉지 않는 데 너무 신경을 쓰다가 거의 방도 못 지나갈 지경이 됐다. 그러나 아무도 얌전하게 몸을 숙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몸을 숙이는 방법이 잘못된 방법일 거라고 짐작했다. - P185

내 몸을 마비시킨 것은 두려움뿐 아니라 연민이기도 했다. 그 숙난 나는 오빠를 증오하고 있었고, 오빠 얼굴에 대고 오빠가 증오스럽다고 외치고 싶었다. 내 말과 자기혐오의 무게에 눌려 구겨지고 부서져 버릴 오빠의 모습을 상상했다. 당시에도 나는 진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오빠를 아무리 증오해도 오빠 자신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혐오감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진실 말이다. - P197

오빠는 나를 모욕하고, 과거로 시간을 돌이켜서 과거의 내 이미지로 나를 가두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단어는 내 주제를 깨닫게 하기는커녕, 나를 먼 곳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야, 깜뚱이, 기중기 팔 좀 올려> 혹은 <수평자 좀 가져와, 깜둥아>할 때마다 나는 대학의 대강당으로, 인간의 역사가 내 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그 속에서 내 자리는 어디일까 생각했던 시간으로 돌아갔다. 에멧 틸, 로자 파크스,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이야기는 숀이 <깜둥아, 다음 줄로 옮겨>하고 소리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해 여름 숀 오빠가 용접으로 고정시킨 모든 도리들보 위에는 그들의 얼굴이 겹쳐서 떠올랐다. 그 일이 끝날 무렵에야 나는 처음부터 불 보듯 바로 알아차렸어야 할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평등을 향한 대장정에는 누군가 반대했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누군가의 손에서 자유를 쟁취해야만 했던 것이다. - P286

내 계좌에는 1천 달러가 들어 있었다. 입에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다. 1천 달러. 여윳돈. 내가 즉시 필요하지 않은 돈. 그 사실에 적응하는 데 몇 주가 걸렸다. 내가 즉시 필요하지 않은 돈. 그 사실에 적응하는 데 몇 주가 걸렸다. 그러나 적응을 하고 나니 돈이 갖는 엄청나게 강력한 장점을 경험하게 됐다. 바로 돈 말고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교수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학비 보조금을 받기 전까지는 마치 흐릿한 렌즈를 통해 그들을 본 느낌이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꼭 필요한 것 이외의 참고 서적도 읽기 시작했다. - P327

나는 역사 기록학에 관한 이야기를 우물쭈물 꺼냈다. 역사 자체가 아니라 역사학자들에 대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심은 홀로코스트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에 대해 배우면서 내게 근거나 기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고 절감했던 경험에서 나온 것 같다. 누군가가 과거에 대해 아는 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제한받게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 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지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 P373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애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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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2-02 2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던 어떤 무협소설 중에, 어릴적부터 엄마에게 학대받고 자란 멍청한 아이가 기연을 만나서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고 무림을 종횡무진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작품은 만화로도 나왔는데요, 원작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만화에서는 결말부분만 살짝 바꿔서 굉장한 충격을 줬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가 이제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어서 당당하게 엄마를 찾아간 거에요. 엄마 나 좀 보라고, 근데 미친 엄마가 어린 시절에 학대했던 것처럼 채찍을 들고 주인공을 때리기 시작하니까, 주인공은 별안간 어릴적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서 아이때처럼 잘못했다고 빌고 빌면서, 그 천하제일의 무술을 하나도 발휘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엉엉 울면서 계속 맞고 바닥을 뒹굴어요. 맞아서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주인공을 기다리던 정혼녀가 그후 오랜 세월 계속 그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걸로 봐서 주인공은 아마 엄마한테 맞아 죽었나보더라구요.

그 만화는 진짜 충격이었어요. 잊히지가 않네요. 천하제일의 무술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어떤 폭력의 경험.....

캐모마일 2020-02-03 00:29   좋아요 0 | URL
혹시 고 김용 작가님의 협객행 아니었을까요. 아마 엄마가 개잡종이라면서 학대를 했던 거 같네요.

다락방 2020-02-03 08:01   좋아요 0 | URL
아이고 세상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까.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폭력의 경험은 그것을 경험이라고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강하게 남는 것 같아요. 그것을 경험이라 말해도 되는걸까 싶을만큼요. 경험이란 단어를 거기에 써도 되는걸까.

[배움의 발견]에서 타라 웨스트오버는 집에 가면 그 무서운 오빠가 있는데도 자꾸 집에 가요. 그럴 때마다 미치겠더라고요.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또 잘못된 걸 바로 잡고 싶고..그 모든 마음이 뭔지 알겠으면서도 계속 집에 가고 그리고 또 폭력에 노출되고, 아무도 타라의 폭력피해를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타라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타라는 나중에 공황발작을 일으키고 공부도 손에서 놓게 되는데, 지금은 이렇게 책을 써서 어느정도 밖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 일이 없던 것처럼 살 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걸 읽고 있는게 너무 고통이었어요.

어떡해야 어릴 적에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우리가 구해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거기에서 보호할 수 잇을까요? 너무 무력합니다. ㅠㅠ

단발머리 2020-02-03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꾸 가정으로 돌아가는, 돌아가려는 타라의 모습이 제일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것만이 그녀가 아는 익숙하고도 유일한 세상이니까요.
어쩌면 가족이, 가정이 가장 질긴 악연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슬픈 일이죠.
괴로웠다는 다락방님 감상에 동감합니다. 저도 그랬어요 ㅠㅠ

다락방 2020-02-03 08:02   좋아요 0 | URL
저는 으앗, 역시 공부 좋아 공부 짜릿해!! 이걸 느끼고 싶어서 이 책을 읽은건데, 읽다보니 그 느낌 보다는 답답하고 두렵고 안타깝고 괴로운 마음이 몇 배 더 컸어요. 다 읽고나서도 그랬어요. 너무 괴로웠어요, 단발머리님 ㅠㅠ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 동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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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케이시 윅스'의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를 다 읽었다. 서문부터 어려워 과연 내가 이번에도 완독할 수 있을것인가 걱정했는데, 같이읽는 멤버중 2등으로 완독할 수 있었던 걸 보면(1등인 블랙겟타님, 축하합니다!!), 역시 나는 짱인 것 같다. (네?)


서문도 어렵고 1장 2장도 어려웠지만 기본소득이 나오는 부분부터는 너무 재미있어서 짜릿했다. 기본소득에 대해서 사실 크게 관심없었는데 케이시 윅스가 말하는 기본소득을 읽노라니 너무 재미있는거야. 아니, 이렇게 좋은 기본소득을 왜 안하는거지? 그러나 그렇게 흥미롭게 읽었으면서도 '그런데 기본소득이 정말 궁극적인 답인가'하고 혼자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나는 노동윤리를 말끔히 내다버리지 못하고 있는건가, 스스로 돌이켜보고 있다. 어쩌면 노동윤리에 갇혀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에 관심이 없었던걸지도 모르고. 



기본소득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기본소득은 개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가족이나 가구 구성, 다른 소득 여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고용 여부와 상관없이 지급되는 소득이다.(van Parijs 1992, 3) 기본소득은 소득이 그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게끔 바닥 수준을 정립하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 많은 이들이 임금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의 조건과 상태에 덜 의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p.217)



기본소득은 임금관계로부터 분리되고 거리를 둘 수단을 획득할 방법으로서 요구될 수 있다. 그 거리는 다시 삶의 질을 위해 더 이상 일에 그토록 완전히 쉼 없이 의존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원하는 것을 하고자, 또는 원하는 존재가 되고자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기본소득은 다른 것을 원하고 행하고 다른 존재가 되는 삶, 다른 종류의 삶을 고려하고 실험할 수 있게 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27)




기본소득 요구는 더 많은 돈과 시간, 자유를 향한 욕망의 자극으로서, 가사임금 요구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선언에 접근하는 다른 많은 방식들과 차별화된다. 기본소득 요구는 검약과 저축의 윤리, 양보의 정치, 희생의 경제학을 설교하는 대신, 필요와 욕망의 확대를 촉구한다. 일을 칭송하고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정치적 분석과 전략의 좀 더 익숙한 스타일들과는 달리 기본소득 요구는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적게 원해야 한다는 통상적 지침을 거부한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원하고 요구해야 하는 것의 합리적 한계로 그어져 있는 것에 도전하며 과잉으로 나아간다. 기본소득 요구는 개인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연결 고리에 반기를 들고, 임금노동만이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누리도록 하는 합당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일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 (p.228)




가사임금은 탈자연화의 효과를 일으켰을지는 모르지만, 가사임금에 대한 주부들의 요구는 이 노동이 가정 내에서 행해지는 여성의 일이라는 점을 다시 확고하게 할 위협이 되었다.

기본소득 요구는 가정 내 특정 젠더 구성원을 잠재적 수혜자로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관점이자 자극으로서 훨씬 나은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기본소득 요구는 현실화된 젠더 범주를 재생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혜택이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다. (p.232)





케이시 윅스는 이 기본소득 요구를 가져오면서 페미니즘의 유명한 저자들, 가사노동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발언했던 '베티 프리단'과 '앨리 훅실드'의 저서를 가져와 비판한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고 요구한 것들에 대한 의미는 충분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노동과 가사임금의 한계를 비판한 것. 그러면서 기본소득 요구를 가져오는 거다. 가사노동과 그에 대한 임금을 책정하는 것은 젠더를 고정화시키고 이상적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 그러나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이것들로부터 더 한걸음 나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부분은 너무 재미있어서 열심히 밑줄 그으며 읽을 수 있었다. 기본소득에 대한 부분은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봐도 아주 좋을 것 같다.


제 5장 유토피아 부분 읽으면서는 다시 좀 어려워저 헤롱헤롱 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요지만은 알 수 잇었다. 유토피아를 차마 우리가 갈 수 없는 이상향이라 생각하고 비난하거나 무시하는대신, 우리가 그곳에 다다를 수 있음을 상상해야 한다는 것. 결국 상상해야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건 작년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여자는 인질이다》의 결론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상상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곳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곳에 다다를 수 있겠는가. 얼마전에 실패하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꼽았던 '부정적인 성격' 역시 통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가 싸울 수도 있음을, 싸워서 이길 수도 있음을,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상할 필요가 있다. 지금 젊은 여성들이 주장하는 탈코르셋도 그 상상의 연장선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라면 으레 화장해야지, 예쁘게 보여야지, 를 체화하고 살고 있다가 '아니, 우리가 왜 그래야하지?' 로 생각이 뻗어갔고, 그 생각은 결국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의 사회적 성을 지울 수 있는 도약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상상이라는 것도 내가 얼만큼의 개인적 자원을 가졌느냐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질 터.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고 연결되는 이야기지만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은 여기에서도 답이 된다. 더 많이 아는 사람, 더 많이 본 사람, 더 많이 들은 사람, 더 많이 경험한 사람이 더 많이 더 넒게 상상할 수 있다.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으면서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부정적 생각보다는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면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확실히 더 나은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아닐까.




이 책은 옮긴이의 말까지 읽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이다. 유토피아 부분에서 막연하지만 확 정리되지 않았던 부분을 옮긴이 제현주가 제대로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다른 세상은 가능할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다른 세상이 가능한 듯이 요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존재할 때만, 비로소 다른 세상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나는 이 책을 옮기면서 그렇게 믿게 되었다. -옮긴이의 말, p.363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믿게 되었다.








노동 거부는 단순히 노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가장 고결한 소명이자 도덕적 의무로 보는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것, 노동을 사회적 삶의 불가피한 중심이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심 없는 소비"를 포함한 다른 모든 추구보다 일을 우위에 두는 이들-좌파에 있는 그런 이들까지-의 금욕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노동 거부의 당면한 목표는 두 가지로 제시되는데, 하나는 노동 감소로 노동시간을 줄인다는 의미이자 노동의 사회적 중요성을 줄인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조직화 방식을 새로운 협업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노동 거부는 착취당화는 노동, 소외되는 노동을 거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성과 합리성의 원칙으로서의 노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Baudrillard 1975, 141) 이런 면에서 "해방된 노동은 곧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Negri 1991, 165) - P161

"노동 거부는 활동을 소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지배에서 벗어난 인간 활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Berardi 2009, 60) - P167

뮤어헤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두 가지 측면, 즉 노동의 내재적 가치를 긍정하는 것과 그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어긋나 버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 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뮤어헤드는 세 번째 요소를 더한다. 일이, 심지어 좋은 일이라도, 그 자리에 붙들어 둠으로써 삶 전체를 잠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P174

더 나은 일에 대한 요구는 더 적은 일에 대한 주장을 손쉽게 압도해 버린다. 그리하여 내가 짚어 두려는 두 번째 주장은, 노동윤리의 수정된 버전을 내놓기보다는 이 윤리를 비판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더 적은 일에 대한 투쟁에 성공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 - P175

가족 제도는 임금을 버는 이들의 임금을 벌지 않는 이들에 대한 사회관계로서(12) "실업자, 노인, 병자, 아이, 그리고 주부들"을 포함하는 포괄적 범주이다.(James 1976, 7)이런 면에서 가족은 분배 기제로 작동하는데, 가족을 통해 임금이 임금을 벌지 않는 자, 임금을 적게 버는 자, 임금을 아직 못 버는 자, 임금을 더 이상 벌지 않는 자로 가닿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은 사회적 재생산의 사유화된 장치로서 기능한다. 가족이 이처럼 기능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개인들은 가정 내에서 생산되는 재화나 서비스를 상품화된 등가물을 통해 확보하거나 임금노동을 하고도 시간이 충분해 그런 재화나 서비스를 직접 생산할 것이다. 이 경우 임금은 더 높아야 하고 노동시간은 더 짧아야 할 것이다. - P192

이렇게 가족은 임금 시스템에 계속해서 결정적 요소로 기능하지만 여전히 숨어 있는 파트너로 남아 있으며, 가족 제도를 자연화하고 낭만화하며 사유화하고 탈정치화하는 모든 담론들이 그 역할을 은폐한다. - P193

델라 코스타는 가족을 임금 시스템과 연결 지어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를 이루는 한 축으로 설명함으로써(Dalla Costa and James 1973, 33)가족 제도가 노동 가격 인하를 흡수하며, 저렴하고 더 유연한 여성화된 노동 형태를 제공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게 사회적 재생산 비용의 책임을 상당부분 면제해 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P193

임금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권력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요소 중 하나이자, 그 조건을 놓고 벌어지는 투쟁의 가장 구체적인 대상 중 하나다. 가사임금을 옹호하는 두 학자 니콜 콕스Nicole Cox와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가 설명하다시피 "임금에는 언제나 두 편이 있다. 자본의 편은 임금을 올릴 때마다 생산성이 올라가게끔 하려고 노력하면서 노동계급을 조종하는 데 임금을 사용한다. 노동계급의 편은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적은 일을 위해 점점 열띤 투쟁을 벌인다."(1976.11) 임금은 자본의 축적, 그리고 노동자가 잠재적으로 지닌 자율적 필요와 열망의 확대 양쪽을 모두 촉진할 수 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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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1-2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제 1장까지 읽었어요. 서문은 정말 어려워서 읽은 부분 다시 읽기를 몇번이나... 이론서를 오랫만에 읽으니 책 읽기의 색다른 경험이네요.

다락방 2020-01-29 07:55   좋아요 0 | URL
트윗 보니까 2장까지 다 읽으셨던데, 유부만두님. 이 책은 3장,4장이 특히나 재미있어요. 막 빨려들어가서 읽게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요. 밑줄 그을 준비도 하셔야 할거에요.

전 너무 짜릿했어요. 선배 학자들의 말을 가져와서 인용을 하고 또 어떤 건 비판을 하고 그 위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는게요. 너무 짜릿해서 더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연구하고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무쪼록 기쁘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5장은 어렵지만.....킁킁.

단발머리 2020-01-28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제일 앞서가다가 이제부터 서두르고 있는 단발머리입니다. 저도 <제5장>이 저한테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답은 기본소득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새롭게 더 배워갔으면 해요.

상상한다는 것에 대한 문단 특히 좋아요. 여자가 재산을 갖는다는 것, 가정을 가진 상태에서 자신의 일을 계속한다는 것, 혼자 여행한다는 것. 모두 예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더 나은 세상을 같이 상상해 봐요. 수고했어요, 다락방님! (찡긋)

다락방 2020-01-29 07:57   좋아요 0 | URL
5장 때문에 당황했네요. 선명하게 잡히진 않았는데 응 뭔지 알겠다, 이러면서 읽다가, 제현주 님의 옮긴이의 말로 한 방에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어요.

단발머리님, 상상이라는 것도 그러나 자기 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아요. 자기 경험, 자기 생각, 자기 지식이요. 이게 충분해야 상상도 더 멀리, 넓게 뻗어나가는 것 같아요. 답은, 공부라고 또 생각했어요. 늘 하는 말이지만, 계속해서 뭐가 됐든 읽고 쓰는 게 아주 중요한 자기 자본이 될 것 같아요. 우리 서로 격려하며 함께 나아갑시다!

공쟝쟝 2020-01-2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기본소득넘나 요구하는 저는 이렇게 한명의 동지를 얻은 것 같아 기쁩니다! 핫핫

다락방 2020-01-29 07:57   좋아요 0 | URL
나는 공쟝쟝님의 동지 ♡

공쟝쟝님, 일단 이를 악물고 2장까지는 읽어내봐요. 3장부터는 소리 지르면서 읽게 될 거에요. 후훗.

syo 2020-01-28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을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저는 많이 늦었지만 이번 달을 넘겨서라도 한 챕터 한 챕터 읽으면서 꼼꼼하게 읽으면서 페이퍼 남겨야겠어요.
으쌰으쌰

다락방 2020-01-29 07:58   좋아요 0 | URL
쇼님이 한 챕터 한 챕터 꼼꼼하게 읽는다면 정말이지 좋은 페이퍼가 나올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쇼님 안에는 많은 지식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으니, 이 책과 만난다면 완전 근사한 페이퍼를 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훗.
 
희망이 삶이 될 때 - 아무도 모르는 병에 걸린 스물다섯 젊은 의사의 생존 실화
데이비드 파젠바움 지음, 박종성 옮김 / 더난출판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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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팀의 쿼터백을 하고있던 '데이비드 파젠바움'은 암으로 엄마를 잃고 암전문의가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의대공부에 매진하는데, 2년의 석사과정도 8개월에 끝낼만큼 스스로가 집중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릴적에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진단을 받았는데 이는 어떤 일에서 다른 일로 옮기는 일에는 방해가 됐지만, 하나의 일에 집중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해낼 수 있게 해줬다고 한다. 신체적으로 혹은 선천적으로 풋볼을 잘하게끔 태어나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집중력과 노력으로 풋볼팀의 쿼터백을 할 수 있었던 것. 그 집중력이 이제는 의대 공부로 옮아간 것이었다.


의학공부를 하며 이제는 취미로만 풋볼을 하던 그에게 '캐슬만병'이라는 희귀병이 찾아온다. 세계적으로 발병한 환자가 2만명 미만인 '고아병'으로써 이 병에 대해 충분한 치료방법이 나오지 않았던 터라, 그는 캐슬만병의 권위자를 찾아가 치료를 받지만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야만 했다. 온 몸이 부어오르고 의식도 희미해지면서 곧 죽겠구나, 하는 시점에서 그는 간신히 살아나지만 그러나 이 병은 재발하고 그렇게 다섯차례에 걸쳐 그를 죽음앞으로 데리고 간다.


데이비드는 암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마지막을 충격적으로 그리고 슬프게 기억하고 있다. 병들어 약해졌던 모습. 데이비드는 자신이 병들어 약해지고 신체의 곳곳이 망가져있는 모습을 사랑하는 '케이틀린'에게 보여주기를 거부한다. 병실에 찾아온 그녀를 애써 만나지 않는다. 그는 쿼터백이었던 건강한 자신의 모습을 그녀가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곧 죽어갈 약한 모습으로 그녀가 기억하기를 원치 않았던 거다. 그렇게 두번째 발병에도 그녀를 만나기를 거부하면서 그는 고통스러워 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삶을 그녀와 함께 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지금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



내가 처음 이 책, 《희망이 삶이 될 때》를 읽으려고 한 것, 그리고 읽으면서 기대했던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이별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는 한 사람의 '희망'이었다.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고 내 삶이 끝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게 누구나 죽음은 찾아오는 법. 그 때 내가 과연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박경리'의 토지에서 '용이 아내'가 죽음을 앞두고 발악하던 모습은, 어쩌면 나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거부하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나의 죽음. 그렇게 나는 이 책이 나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죽음으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삶에 대한 희망적인 태도 혹은 위로를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데이비드가 약혼녀 케이틀린을 병상에서 만나기를 거부하고 그러나 그녀와 함께 살기를 꿈꾸는 것들이 아마도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었던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고작 그런것들'만 이 책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모습에게 내 병든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닐까, 나는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 같은 당연한 욕망을 직시하고 공감하게 했지만, 데이비드 파젠바움은 이 책에서 '너 고작 그것만 생각했지? 다른 걸 보여줄게' 라고 하고 있다.



처음 엄마를 잃은 아직 어린 데이비드 파젠바움은, 이런 슬픔을 다른 사람들도 겪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부모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AMF(Ailing Mothers & Fathers 아픈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공동체를 만든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또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원봉사단체. 이 단체는 점점 커져서 각 대학마다 지점도 생겨나고 뉴스에도 소개가 되며 회원수가 많아진다.



자신의 슬픔을 그저 자신의 슬픔을 돌보는데에만 쓰지 않고 '그렇다면 이렇게 슬픈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텐데' 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뭔가 해보자' 라고 행동으로 옮기다니. 이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거다.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은 분명 많겠지만 어떻게 그들을 위해 뭔가 하자는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을까. 이건 정말 특별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같은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못했을텐데.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이 처음 부분에서 약간의 거부반응이 들었다. 데이비드가 너무 '특별'하고 '대단'하게 보여서. 그러니까 이 책을 써내는 작가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좀 더 '잘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나 나는 점점 더 데이비드의 삶의 방향, 방식, 그가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매혹됐다. 얼마전에 기사에서 본 '실패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얼핏 기억나는 것만 떠올려보자면, '매사에 부정적이고', '호기심이 없고', '늘 비슷한 자들과 어울린다'는 게 있었다. 데이비드는 이 모든 것에서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에 놓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앓고 있는 '캐슬만병'에 지지 않고자 한다. 한 번으로 완치가 된 게 아니라 재발하고 다시 또 재발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 병에 대해 잘 알고자 한다. 알려져있는 모든 논문들을 읽고 알려져있는 모든 치료방법을 검토한 후, 치료방법 자체, 치료약 자체가 너무 적다고 생각한 그는, 이에 대해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건 자기 자신을 살리는 방법임과 동시에 이 병을 앓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방법이었다. 그는 그렇게 이 병에 대한 네트워크, CDCN(캐슬만병네트워크)를 만든다. 그는 확실히 이 병에 대해 알고 이 병의 치료법을 찾고 싶었다. 그간 캐슬만병에 대해 관심이 있고 연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 이메일을 뿌린다. 그들과 함께 세미나를 열고 제약회사를 찾아가 자신들을 지원해주기를 요구한다.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또 캐슬만병이 재발했을 때, 그는 알려진 치료약들로 자기가 낫지 않았던 바, 자기가 그간 논문을 보고 혈액샘플을 보고 생각했던 다른 약을 써보고자 한다. 처음엔 역시 재발했으나 그 다음에 써본 약으로 그는 다섯번째까지 재발한 뒤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방법이 모든 캐슬만병의 환자에게 다 통하는 건 아니었다. 캐슬만병을 앓던 다른 환자들, 그러나 알려진 방법만으로 치료가 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투여하는 약을 투여했을 때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었다. 그러니 또다른 방법이 나와야했다. 그가 하는 연구라는 것도 없던 약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나와있는 약중에 그리고 다른 병을 치료하는 약중에서 여기에도 어떤 효과로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들을 생각해내는 거다. 그가 기존에 캐슬만병에 대해 처방되었던 약이 아닌 새로운 다른 약을 자신에게 직접 투약해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약 자체가 세상에 없던 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캐슬만병에 대해 다른 약이 다른 식으로 또 치료의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병에 걸리고 낫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각하고 행하라'는 삶의 모토가 생겼음을 밝힌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팠을 때 더 강하게 확신한 것일뿐, 그의 기본 삶의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실패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자면 매사에 부정적이라 '안되는 핑계'만 찾는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 그러나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아무것도 가진 자원이 없는 사람이 생각만 한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전에 생각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게끔 몸의 건강을 신경써서 돌봐야 하고, 생각해서 꺼낼 수 있는 방안이 나오려면 지식도 충분해야 한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들었던 사람이 더 많은 것들을 머리에 넣을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생각하는 건, 그런 지식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그 양과 질에서도 확실히 다를 것이다.



데이비드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에 맞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스스로가 그걸 알고 있다. 그동안 자신의 삶이 여기에서 활용되고자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물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환경이 갖추어져있다고 해서 모두가 자신의 병으로부터 나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의지와 환경 그리고 운까지. 모든 것들이 다 맞물려서 그는 지금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노력하면 돼, 노력하면 너도 잘 살 수 있어, 라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지만, 그러나 굳건한 의지와 또 차곡차곡 지식과 건강을 쌓을 수 있었던 성실함을 갖추고 있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확실히 더 높다.




데이비드의 그런 삶의 태도를 보는 것이 좋았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가 여전히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남들보다 특출나게 더 가진 것들이 있다고 생각되어지고 또 운도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고, 나는 그런 삶의 태도가 무척 좋다. 사람은 보고싶은 대로만 본다고 하는데,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데이비드 파젠바움의 그런 태도를 보고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같은 처지에 놓인다고 하고 또 생각했으면 행한다고 했을 때, 데이비드 처럼 이렇게나 넓고 깊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의대학생이었고, 여러번의 재발을 겪으며 의대 조교수까지 될만큼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의학적 지식이 전무한 나와는 또 접근 방법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러나 그의 그런 삶의 태도만큼은,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데이비드는 처음 자신의 병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도 싫었고 또 케이틀린에게 병든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도 않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청혼하고 결혼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낸 약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의 국내 제목에서는 '희망'을 강조했고 저자도 희망에 대해 얘기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문제 해결에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케이틀린을 거부한 것은 당시의 내가 상상해낼수 있는 최선의 우선순위 배정 방식에 따른 것이었노라고.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나를 생명력 넘치는 건강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일이었다고.
나는 그 상상력이 매우 빈곤한 것이었음을 이제 알고 있다. 우선순위를 배정할 때 최선은 나 자신이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를 그대로 그녀 앞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 P165

중병의 발병과 회복은 내게 ‘정상적‘인 삶이 대단히 비싼 것이라는 놀라운 진실을 가르쳐줬다. 어떻게든 정상에 가까운 삶을 재구축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내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에 실제로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지 절감했다. 이를테면 병원을 오가지 않는 삶 같은 것. - P172

돌아보면 그때까지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이 내게 이 병과 맞설 수 있는 준비를 시킨 것 같다. 아직 전문의가 아닌 내겐 질병 치료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도구가 있었다. 강박에 가까운 노동윤리, 근면성이 있었다. AMF 를 설립해봤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뭔가를 구축할 때 필요한 계획성과 완성해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 P212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내 삶은 더 좋은 것이 됐고 더 행복한 사람이 됐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은 생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4차 재발을 겪는 동안 병상을 지키는 케이틀린을 보면서 더이상은 그녀와 함게하는 미래를 꿈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떤 결단을 내릴 수도 없었다. 나는 너무나 절실하게 케이틀린과 결혼하고 싶었다. 그녀 또한 그걸 원한다는 걸 알고 잇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녀에게 너무나 큰 부담을 지우는 일이 아닌가? 몇 년전에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의 남자, 별 걱정거리 없이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듯 보이는 건강한 쿼터백과 지금 삶을 함께하려고 하는 남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이다. 매일매일 죽음과 싸우는 중병 환자가 바로 나였다. 게다가 성공 보장이 없는 일을 추진하고 있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청혼할 각오가 되어있는 것만큼이나 마음 한쪽에선 그녀와 겨별하고 그녀를 내 곁에서 떼어놓고 싶은 생각이 강했다. - P234

그렇게 하면 케이틀린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보다 안정되고 예측 가능하고 편한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이었다. - P235

그런데 계시라는 것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계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갑자기 IQ가 엄청나게 좋아지면서 찾아오는 마법의 순간이 아니다. 계시는 우리가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것들, 우리의 지속적인 노력들로부터 온다. 심지어는 그런 노력들이 있은 지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오기도 한다. 그건 마치 풋볼이 강화시켰던 내 인내력과 근육으로 인해 발병 초기 내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과 같다(그것들이 그런 식으로 사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계시는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우리가 이미 행한 노력들의 결과로서 또는 그 결과물을 들고 나타나는 것이다. - P280

케이틀린은 내 힘과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녀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어서 내게는 참으로 다행이었다. 내가 실험실에 나가지 않을 때 우리는 아파트에서 같이 일할 수 있었다. 대화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몇 시간마다 한 번씩 쉬면서 그녀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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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0-01-1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락방님 드디어 읽으셨군요! 저도 백퍼 공감합니다. 삶의 자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지지 않는 투지, 이런게 도식적인 게 아니라 정말 살아 있는 느낌. 그리고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의 해피엔딩이 저는 너무 좋았어요.

다락방 2020-01-17 13:59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덕분에 좋은 책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삶에 자세에 대해 감탄했지만 독서란 것에도 다시 한번 감탄했어요. 책 읽는 건 이렇게나 좋구나, 지식적인 면으로도 그렇지만 감동면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볼 수 있는 수단으로 책만큼 좋은 게 어디있단 말인가요. 저자의 삶에 태도는 제가 갖고하 나는 것이라 아주 좋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훗.

2020-01-17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0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1-18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원래 ‘불굴의 의지‘ 이런 거에 많이 약하거든요. 작심삼일이 안 되는 사람이라서요 ㅠㅠ 근데 소개해 주신 이 책의 이야기는 정말 소설같은데 소설보다 더한 감동을 주네요. 인용해 주신 구절 읽어보니 구구절절 너무 안타깝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하는데,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막 전해지고 그러더라구요.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인생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성공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되구요.
잘 읽고 갑니다, 다락방님! 이 페이퍼는 아래에 ‘한나 아렌트‘ 페이퍼 다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페이퍼예요^^

다락방 2020-01-20 10:07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저도 처음엔 저자가 너무 특별한 사람인 것 같아서 거부반응 들었다가 점점 저자의 말과 행동에 함께 힘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이런식의 삶에 대한 자세, 삶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는 제가 정말이지 좋아하는 태도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어요. 물론 저자는 여러가지로 많은 것들이 갖춰진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 삶에 대한 태도 만큼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나 해요.

단발머리님, 우리 문제 해결에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갑시다. 잘 지내보자구요!!

2020-01-20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0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리모 같은 소리
레나트 클라인 지음, 이민경 옮김 / 봄알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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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책 읽기를 거듭할수록 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내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고 느낀다. 어쨌든 가야할 방향은 그곳이구나,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닿아야 여성의 권리를 위한 것이 되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알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도덕 코르셋'을 벗어야 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성애부부의 의뢰인 여성, 난자 공여자, 생모에 이르기까지 세 여성 모두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침해와 해를 입히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하는 대리모를 없애자는 '레나트 클라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있다. 그러나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많은 여성들이 '불쌍한 게이남성들에게 안된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리모 반대 보다는 규제 쪽의 손을 들어준다.



나는 2014년 대리모 우호 회담의 티타임에서 대리모로 인해 여성과 아동에게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서 어떤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게 동의했지만 착석 종이 울릴 때쯤 곧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가엾은 게이 남성들이 아이를 그토록 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다른 이들의 감정을 해치는 데 대한 긴장감과 겁, 특히 이 경우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만연한 동성애 혐오로 보일 수 있다는 이 두려움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팽배하다. 겁은 많은 사회 정의 쟁점들과 결부된 근본적인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용감하게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 (p.116)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부적절한 것이라면 안된다고 말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게이에게 향한 것일 경우, '게이 혐오'로 비춰질까 우려되어 차마 안된다는 말을 하지도 못한다. 레나트 클라인은 동성애 혐오로 보일 수 있다는 이유로 겁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안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대리모가 해외나 국내 어디에서 이루어지든, 이것이 얼마나 잘 혹은 잘못 진행되는, 확실한 것은 대리모라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하는 일은 아이를 어른의 재산으로 상정해서 사고판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절박하게 원한다는 것이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조 프레이저, 대리모 연구 조사 보고서, 2016, p.3)



대리모를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시종일관 강한 어조로 얘기해주는 것이 나는 무척 좋았다. 자연스레 안드레아 드워킨과 캐서린 맥키넌 생각도 났다(이 책에서도 몇 번 드워킨을 언급한다). 여성의 몸을, 정신을, 다시말해 여성의 인권 자체를 침해하려는 시도에 대해 안된다는 말을 할 때는 그것이 착할 필요도 없고 부드러울 필요도 없다. 나는 안드레아 드워킨과 캐서린 맥키넌이 강한 어조로 포르노를 반대했듯, 레나트 클라인이 강한 어조로 대리모를 반대한다고 말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결국 여성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은 이런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강한 목소리가 아닌가 싶다.




대리모라는 부적절한 이름으로 칭해지는 이 여성은 자신의 몸으로 아홉달 동안 아이를 품고 낳는다. 상업적 대리모에서 생모는 의뢰인 부부보다 항상 더 낮은 사호경제적 계층에 위치하고 또한 대게 더 ‘낮은‘ 인종적 위계상에 위치한다. 인종과 계급 문제가 한데 얽힌 것이다. 우리는 (흰 피부의) 최고경영자가 (어두운 피부를 가진)청소부의 아이를 낳아주는 경우를 아직 보지 못했다. - P20

‘선택‘은 내가 (그럴 힘만 있다면) 기꺼이 금지하고 싶은 단어다. 나는 선택이란 말은 두 가지 좋은 것 가운데서만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예로는 "초콜릿 케이크와 레몬 타르트중에 뭐 먹을래?"가 있다. 이렇게 쓸 때에만 양 선택지의 결과가 모두 끔찍한 상황에서 선택이라는 단어를 즉시 제거할 수 있다. 코카인에 심하게 중독된 상태에서 돈이 절실하고 집이 없으며 지지를 구할 만한 곳도 막막한 가운데 성매매를 계속하기로 ‘선택하는‘것은 ‘선택‘이 아니다. 이는 가장 어렵고 불운한 결정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을 포함한 당신의 가족이 불임이라는 이유로 당신을 비난하고 따돌리는 가운데 여성을 대리모로 착취하기를 ‘선택하는‘것은 ‘선택‘이 아니다. 이 역시 가장 어렵고 불운한 결정이다. - P31

우리는 이런 결정을 내린 여성들을 절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다만 여성이 결정을 내리는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를 ‘선택‘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 결정 이후 일어나는 일들로 대부분의 여성은 심각한 해를 입게 되지만, 그것으로 탐욕적인 성착취 및 재생산 산업은 반드시 제 배를 채운다. - P32

미토콘드리아 DNA는 오직 모체로부터만 유전된다. 매들린 비크먼이 말했다시피, "당신이 받는 미토콘드리아는 모체로부터만 올 수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당신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리모에 대입했을 때 이 때의 ‘어머니‘는 난자 ‘공여자‘이고 ‘모체‘는 이 세포를 발달시키는 생모다. 정자 공여자들은 착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당신의 중요성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몸을 부정하고 유전자만 찾아대는 이들을 한 번 더 입다물게 할 증거는 인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리모 연구자 실라 사라바난에 따르면, 고대 인도 아유르베다 문화에서 "출산과 수유는 어머니에서 아이로 핏줄을 이어주는 행위로서, 아이들은 이에 빚을 지고 있는 자신의 삶 내내 어머니를 보살피고 존경을 표해야 한다"(pers.com. June 2017). - P37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낳으려는 이들이 ‘절박하게‘ 가정을 이루고 싶어하며 아이를 향한 그들의 갈망이 ‘자연적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해서만 끝도 없이 이야기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이가 용인하고 때로 지지하는 것은 아이를 선불 상품으로 상정한 작본일 뿐이고 이를 가질 자격은 그만큼 부유한 이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신생아는 말이 없다. 이들의 삶은 제왕절개를 거쳐 ‘인큐베이터‘와 같은 포궁에서 꺼내지고 난 뒤부터 시작되는 빈 서판과도 같다. 이를 어린이로 그리고 어른으로 길러낼 이들은 의뢰인 부부다.
부끄럽게도 이는 성인 혹은 모부 중신적 관점으로, 신생아의 기본 인권을 무시한다. 대리모는 단순히 순진한 신자유주의적 환상일뿐 아니라 누군가의 배아를 임신하는 문제를 ‘일‘로 바라보는 것이다. - P49

대리모가 해외나 국내 어디에서 이루어지든, 이것이 얼마나 잘 혹은 잘못 진행되는, 확실한 것은 대리모라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하는 일은 아이를 어른의 재산으로 상정해서 사고판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절박하게 원한다는 것이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조 프레이저, 대리모 연구 조사 보고서, 2016, p.3) - P52

"내가 나를 위해서 이걸 선택하겠는가? 당신이 이 세상에 나온 이유가 그저 부끄러움을 모르는 수표 덩어리라면 분명 당신도 모욕적이라 느낄 것이다." (대리모를 통해 출생한 ‘제시카 컨‘, 뉴욕포스트) - P55

"그렇다. 나는 화가 났고, 사기를 당한 기분이다. 이는 수치이며 끔찍한 경험이다. 우리 모두에게 엄청나게 더러운 짓이다. 자신을 정확히 어딘가로 보내버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걸 알면 어떤 기분일 것 같나? 당신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의견을 갖게 되리라는 걸 알아야 한다." (대리모를 통해 출생한 ‘브라이언‘) - P55

‘선택‘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사회 전체가 자신의 안녕을 해쳐서라도 타인을 우선시하는 여성을 대우한다면 이것을 ‘선택‘, 자유 의지, ‘행위자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 - P70

모든 종류의 경제적, 사회적 차별로 인해 고통받는, 권리가 박탈되고 문맹인 수많은 여성의 어깨에 얹힌 빈곤이 덜어져야 하지만 이는 대리모나 성매매와 같이 여성의 신체를 팔거나 대여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아기의 인신매매 혹은 판매가 소수의 여성과 그 가족을 빈곤으로부터 끌어낼 윤리적인 방법이 되어서도 안 된다. - P74

대리모가 윤리적일 수 있다는 주장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임신 내내 관여하는 우생학의 존재다.
영국 맨체스터의 프리메이사 헬스 사에서 발명한 IONA테스트 혹은 스위스 게노마 사가 개발한 트랜퀼리티 같은 비침습적 산전 검사(NIPTs)의 활용이 늘어나면서부터, 모든 임신부는 다운증후군이나 다른 염색체 이상뿐 아니라 태아 성 감별 검사도 함께 받았다. 산전 검사는 임신 10주까지 가능하다. 유전자 이상이 감지되었을 때 진행되는 유일한 ‘해법‘은 임신중단인데, 국제 메타 분석이 경고하기로 이 중 92.2퍼센트가 여아를 대상으로 ‘선택‘된다(Achtelik 2015, p.58)
심지어 대리모가 되는 데 동의한 여성들은 이 문제에서 ‘선택‘을 더 적게 한다. 아이 구입자들은 ‘완벽한‘ 아이를 원하고, 이미 정자와 ‘공여된‘혹은 구입된 난자들은 유전자 결함을 진단받는다(허용된 곳에서는 성별도). - P84

그리고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어 수정란이 만들어지면 배아로부터 세포 하나를 떼어내 착상 전 유전자 진단(PGD)을 시행해 ‘품질 검사‘를 실시한다. ‘결함 없는‘ 배아만 대리모의 포궁으로 주입될 수 있다. 산전 검사나 초음파는 몇 번이고 계속되고 임신중단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면 임신부는 이에 따라아먄 한다. 계약이 이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강압이라고 부른다. 대리모를 윤리적이라고 부를 여지를 박탈하기 위함이다. - P85

대리모를 통해서 태어난 이들이 자신의 연원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가 연구된 바 없다. - P105

어떤 부유한 개인들이 어째서 다른 가난한 이들-그리고 오로지 여성들-에게 사랑이나 돈을 이유로 아이를 기르고 낳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느냐는 것이다. - P115

나는 2014년 대리모 우호 회담의 티타임에서 대리모로 인해 여성과 아동에게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서 어떤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게 동의했지만 착석 종이 울릴 때쯤 곧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가엾은 게이 남성들이 아이를 그토록 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다른 이들의 감정을 해치는 데 대한 긴장감과 겁, 특히 이 경우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만연한 동성애 혐오로 보일 수 있다는 이 두려움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팽배하다. 겁은 많은 사회 정의 쟁점들과 결부된 근본적인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용감하게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 - P116

대리모 폐지를 위한 국제협약이라는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신나는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전 세계 페미니스트 개인과 집단이 대리모라는 폭력으로부터 여성과 아이의 인권과 존엄을 지키고자 함께 움직이리라는 데 엄청난 희망을 갖는다. - P120

대리모였던 알레한드라 무뇨스와 퍼트리샤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번식자 여성이라는 계급이 있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여자아이에게 최선인가? 이는 여자아이의 자존감에 얼마큼 해로운가? 만약 해롭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인가? (…) 재생산을 산업화하는 사회를 원하는가? 자본주의라는 물레방아는 정말로 모든 것을 가루 낼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을 팔고 혹은 살 수 있는지에 어떤 제한이란 것이 과연 존재는 하는가?" - P139

대리모는 아이를 사랑 혹은 돈을 이유로 그를 기른 생모로부터 떼어놓는 행위이며 어떤 ‘동의‘나 ‘선택‘을 들먹인다 해도 이것은 여성의 신체완전성에 대한 침해다. - P155

우리는 법적 분쟁이나 의료 비용을 치르는 과정에서 아기 구입자들이 항상 대리모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P168

(로마에서 열린 국제)회의 때 읽은 결의안에서 서명인들은 다음을 지적했다.


"우리는 ‘삶이라는 경이로운 선물‘과 개인의 자유라는 수사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자 한다. 대리모는 사실상 희생과 유기를 만들어내며 어머니와 아이를 비인간화한다. 모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여성의 신체에 통제를 가하고 그 결과로서 아이의 생명을 사적 재산으로 만드는 개인의 ‘소비자‘로서의 권리로 이어질 수 없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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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1-08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가 불쌍하기에 다른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 그들 몸의 일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 가능하군요.
더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뿐이에요 ㅠㅠ

다락방 2020-01-08 16:25   좋아요 0 | URL
‘내가 강하게 원하기 때문에‘, ‘저사람이 원하기 때문에‘로 여성의 몸을 침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게 너무 끔찍하죠. 그러면서 그것이 대리모 여성들의 ‘선택‘이었다고 말해요. ‘선택‘이란 단어는 여기에서 저자가 지적했듯이 이럴 때 쓰는 용어가 아닌데 말예요. 이 ‘선택‘이란 단어 때문에 [페이드 포]도 생각났어요. 우리의 처지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결정하게 된 것에 과연 ‘선택‘이란 단어가 적합한것일까요?

역시나 좋은 독서였습니다, 단발머리님.

Jeanne_Hebuterne 2020-01-12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원하는 게이 남성들은 가엽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들은 가엽지 않다는 말인지, 제발 돈으로 이것저것 다 사재기 좀 그만 했음 좋겠어요.

다락방 2020-01-13 09:20   좋아요 0 | URL
‘게이 혐오‘란 말을 듣기 싫어서 그러는 것도 큰 것 같아요. 혐오자 낙인 찍히기 싫어 여성의 몸을 팔아대는 꼴이죠. 아 정말 너무 끔찍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