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창비세계문학 6
딩링 지음, 김미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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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책들이 있지만 제목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책들도 있다. '딩링'의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후자에 해당한다. 나는 이 책의 작가인 딩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읽겠지 하고 준비해뒀던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들었을 때는, 대체 안개마을에 있을 때 뭐가 어떻게 됐다는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 안개마을에서 안개라니, 은둔하기 좋아 쓴걸까, 그 마을에서 사랑을 한걸까, 그 마을에서 혁명을 한걸까.


표제와 같은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중국인 여성 위안부 '전전'이 등장한다. 그리고 위안부 전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당연한 편견도.


오래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여옥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자고 있는 집으로 마을 남자가 침입한다. 그리고는 '어차피 너는 버려진 몸'이라며 강간을 시도한다. 그러니까 이 정서.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졌거나 성폭행을 당했던 여자에 대한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이 정서가,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에도 드러난다. 이 소설의 화자는 휴양차 안개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일 년전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 전전을 만나게 되는데, 전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위안부로 끌려가게 됐고 또 그렇게 중국 공산당의 첩자가 되기도 하는데, 나라는 그녀를 이용했고 마을 사람들은 남녀할것 없이 그녀에 대해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다니는 여자가 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다른 여성을 깨끗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그녀는 그렇게나 부당하게 가족들의 수치가 되었다. 우리가 진작 결혼했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었을텐데, 지금이라도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전전의 남자동창 '샤다바오'는 그녀를 구해주려고 하는 착하고 의로운 남자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끌려가고 강간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드는 이도 남자이고 그런 여자를 구원해주고자 하는 것도 남자인 셈. 여자의 인생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더렵혀지고 혹은 구원되어 지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숱한 영화와 책속에서 드러나는 바다. 그토록이나 여성을 혐오하던 남자주인공이 자신의 피부병을 지적받자 '이걸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그걸 욕하면 어떡해' 라고 항변하는 영화 《히트》에서도 알 수 있고, '당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일로 평가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니까' 당신을 돕겠다고 말하는 형사가 등장하는 책 《스틸하우스 레이크》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걸 안다고 해서 자신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가 끌려간 것이 자명한 사실이고 지금 나라로부터 이용당하고 있는 것 역시 자명한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구경하고' 또 '혐오한다'.


책 속의 화자는 이 마을에 처음 올 때 자신과는 다른 정치사상을 가진 여자와 함께였다. 그것은 딱히 즐거울 리 없는 동행이었지만, 그러나 전전의 삶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그들에게 공통된 감각이다. 전전의 삶은 전전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흘러갔고 그것이 부당하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통제하지 못하는 여성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안타까운 감각은, 동시대를 살고 있던 다른 환경의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각인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 고통 앞에 통곡을 하는 여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리고 통제하지 못한 삶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는다고 해서 전전이 무너지기를 선택하지도 않고, 남자에게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아픈 몸이 낫기를 원하고 그리고 나름의 살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사방에서 자신을 공격해오는데도 끝까지 버티려는 의지가 전전에게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가고자 하는 길에서 그녀는 그녀의 동지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화자는, 그녀의 동지가 되어주길 자처할 것이다.



이렇게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여성은 그 다음 단편인 <병원에서> 에서도 등장한다. '루핑'은 산부인과 의사 공부를 했지만 자신에게 의사일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치대학에 들어가 정치공작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그렇게 공산당원이 되지만, 당에서는 그녀를 이제 막 개척하고 있는 병원의 의사로 보내버린다. 이 역시 그녀의 의지도, 의사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하기 싫은 일을 하러 갔는데, 그 병원의 상태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의사로 일하고 있고 온갖 기구들은 소독되지 않은 상황이며 그 누구도 청소를 하지 않아 더럽기만 하다. 일단 환자들을 낫게 하고 건강한 출산을 하게 하려면 환경부터 바꿔야 하기에 열성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보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나 그녀의 열성적 태도로 환경이 바뀌기는 커녕, 사람들은 그녀를 음해하려고 한다. 이에 그녀는 처음의 의지를 잃게 되지만, 며칠 풀죽어 있다가 다시 의지를 다진다. 그녀는 삶의 매순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고난 속에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세번째 단편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는 소년병이 주인공인데, 내전중인 자국의 군인에게 발견되어 총살 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총알 하나를 남겨두는 게 좋겠소. 남겨두었다가 일본 놈과 싸우시오! 나를 칼로 죽이고!" (p.97)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군인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고작 열세살의 소년이 자신이 죽을 위기 앞에 공통의 적인 일본을 죽이는데 총알을 쓰라고 말할 수 있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네번째 단편 <두완샹>은 읽으면서 가장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계모에게 학대받아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하다가 열세살에 시집을 가는 두완샹이, 그곳에서도 다른 며느리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미친듯이 열심히 일하는 거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 세계의 전부인줄 알며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이 대가족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수고를 했다' (p.106)

그런 그녀의 마을에 해방군이 들어와 토지개혁을 하겠다고 하고, 그녀는 토지개혁 업무중인 중년의 부인과 매일밤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 가족과 마을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넓은 세상에 헌신하고자 하는데,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과 이런 생각이 일치해 좋은 동지가 된다. 이 부부는 며칠간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는 개척지로 거주지를 옮겨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데, 그곳에서도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우 성실히 일하고 꼿꼿한 정신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그녀가 모범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인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오랜 진심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배움이 짧았지만 스스로 깨우쳐 다른 사람들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면서 이 소설은 끝나는데, 이 모든 삶의 굴곡에서 그녀에게 성장이 있었고 또 깨닫는 바가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게 되지만, 이 단편 내내 '두완샹에게 삶의 기쁨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열심히 일하는 것, 모두에게 이로운 것, 그것이 그저 그녀 삶의 기쁨의 전부란 말인가. 왜 어릴 때부터 고생을 하고 또 하고 쉬지 않는 것이 궁극의 선이 된것일까.




이 책에는 이렇게 총 네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모든 단편들에서 중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핍박받고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고 또 죽음의 위기 앞에 놓이는데도 결코 그들은 좌절속으로 혹은 절망속으로 끌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두 눈 가득 으르렁 거리는 불꽃을 품고 세상을 보는 의지가 단단히 새겨질 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대단하다, 그들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후의 결론은 될 수 없다. 그 삶이 핍박이었던 것, 고통이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이 언제든 나라는 사람을 후려칠 수 있지만, 이토록이나 심하게 후려치는 것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시스템이 한 개인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으게 만들고 그렇게 방전되게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 의지를 다지는 것은 시스템의 도움이 아니라 나 개인의 몫이라니. 이 얼마나 피곤하고 한심한 일인가. 이들 모두가 후려치는 삶 앞에 꺾이지 않고 살려는 의지, 한 발 앞으로 어떻게든 나아가려는 의지는 분명 높이살만한 것이지만, 오히려 나는 그간 내 생각과 다르게 삶에 있어서 때로는 도망치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어디로? 그건 모르겠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방송을 보노라면, 도시에서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자연으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괴롭히는 건 사회적 시스템이기도 하고, 자신을 찾아온 병이기도 하고, 자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그저 물과 나무가 있는 자연으로 숨어드는 것은 그들이 생각해낸 그들이 남은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딩링' 의 소설속 단편들은 이미 드넓은 땅 안에 있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 넓고도 넓은 땅에서, 게다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나를 괴롭히는 게 이 나라 전체를 둘러싼 어떤 사상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숨어들것인가. 정작 휴양을 위해 찾아간 안개마을에서도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나를 숨길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내 눈에 이글거리는 독기를 품는 것 말고는 남은 방법이 없는 것일까.



사는 일은 이토록이나 고되다. 어쩔 수 없이 강함을 내 안에 욱여넣어야 비로소 버텨지기도 하는 것이다. 맞서려고 하는 강인한 자들 앞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삶의 고됨을 느낀다. 고되고 고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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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20-04-2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으려고 했는데 잊어버린 책; 다락방 님 덕분에 떠올라 보관함에 담아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20-04-23 12:20   좋아요 0 | URL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라 당황했는데, 중국에서 이런 글을 썼던 작가가 있었구나, 반가웠어요.
:)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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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예전만큼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즐거웠다. 38년간 꾸준히 글을 써온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듣는다는 건, 언제까지고 읽고 쓰는걸 계속하고 싶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하루키의 의도가 독자에게 어떻게 전해졌다한들, 하루키 본인은 '결국은 선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어쨌든 '계속 살아나가자'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고, 선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물론 선하다는 것은 각자의 판단 기준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선함이 너의 선함이나 모두의 선함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한들 모두를 오래 속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얘기한다. 


또한 문체와 문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하루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장을 예로 들어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문장을 쓰고자 계속 노력한다는데, 나 역시 글에 있어서 문장과 문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바, 크게 동의하며 읽었다. 아울러, 하루키가 늘상 인지하고 가는것처럼, 나 역시 챈들러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는 문장을 계속 저기 안쪽에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용은 누가 쓰든 크게 달라질 바 없지만, 문체가 그 책이 더 재미있는 책이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는 하루키의 말은 틀리지 않다.


하루키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글을 쓰고 달리기 역시 꼬박꼬박 하는 것은, 하루키의 팬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하루키는 일기를 쓰지는 않지만 그런 매일의 기록을 숫자로 남기는 것은 끊임없이 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오늘 달리기를 얼마나 했는지의 수치에 관한 기록.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하루키의 신념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소설에 대해서는 근면한 편'이라고 하는데, 소설가가 소설에 대해 근면한 편이라는 것은 얼마나 마땅하며 근사한가. 이런 하루키의 생각을 읽는 것이 이 책의 기쁨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하루키의 영향을 어느 부분 받았거나 받게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건 하루키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나의 성향 탓이겠지만, 매일매일 꼬박꼬박 글을 쓰고 읽고 앞으로도 계속 그걸 놓지않으려는 자세라고 해야할까. 그런 삶의 태도들. 그건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나 역시 하루키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아는만큼, 어떻게든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지금은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고작 이정도 뿐이지만, 나는 나중에도 일정시간을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에 내어주고 싶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니까. 이를테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하루를 온전히 내게 쓸 시간이 지금보다 더 늘어났을때, 과연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더이상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을 때, 그럴 때에도 나는 하루중 어느만큼의 시간을 뚝 떼어내 글을 쓰는데 들이고 싶다. 내가 혼자 산다면 혼자 사는대로, 혹은 동거인이 있다면 있는대로, 그 동거인이 단순히 한 공간을 함께 이용하는 동거인이라거나, 아니면 나랑 함께 한침대에서 잠드는 이라해도, 그 성별이 남자이든 여자든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 존재한다고 해도, 내가 글을 쓰는 공간으로 들어가 어느정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내 동거인도 너무나 당연한듯이 받아들여주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쓰는 방이 있어야 할 것이고, 따로 쓰는 방도 있어야 할터이니, 큰 집에 살아야 한다. 역시 돈을 벌어야........ 돈이 최고되는 것이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와카미 미에코'가 인터뷰한 기록이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들어본 책, 《젖과 알》의 작가이다. 《젖과 알》은 출간 당시 독특한 문체로 유명했다 하고 하루키 역시도 그 문체를 극찬하는데, 정작 가와카미 미에코는 그렇게 쓰지 않기로 했다한다.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자'작가이기 때문에 문체만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는 것. 인터뷰중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던데, 페미니즘을 알고 있는 여성 작가가 인터뷰어가 되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언젠가 한번은 꼭 거쳐야 하는 게 아니었나 생각하던 바, 즐거이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고대하던 질문 역시 나온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하루키를 인터뷰 하기 위해 그의 책들을 한 번 더 읽기도 하고,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데아'를 파악하기 위해 플라톤을 읽기도 하며,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해 인터뷰에 임한다. 정말이지 성실한 인터뷰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하루키에 대한 선망을 가진 터라 또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난 거라 하루키에 대해 등을 질 순 없는 자세를 베이스에 두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네 작품에서 여성들은 보조적이다, 왜 그렇게 그리느냐'라고 묻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지점이었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자신의 친구들도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그 점에 의문을 품었다 했고, 나 역시 여성을-특히나 소녀를-그런 식으로 다루는가에 대해 불만이 있던 터다.


하루키의 대답은 이 부분에서 실망스러웠다. 자신은 딱히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 자기는 남자든 여자든 그런것에 크게 개의치 않고 쓴다는 거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하루키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말은 그에게 진실이겠고 또 진심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구나, 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냥 관심이 없어. 가와카미 미에코가 자신이 여자 작가이기 때문에 받는 부당함에 대해 토로하지만 하루키는 '그런가요?' 정도로 응시하는거다. 아 그래? 그렇구나, 그건 그대로 힘들겠구나, 하고 넘어간달까. 이 인터뷰를 하던 당시에 하루키의 나이는 68세였고 1949년생이다. 그래, 49년에 태어난 일본 남자에게 뭐 크게 여성문제에 대해 기대할게 있을까, 앞으로 딱히 바뀌는 것도 없겠지, 하게 되지만, 그래도 이 긴 인터뷰를 거치며 여성작가로부터 그런 생각, 그런 말을 들었으니, 그래도 아예 듣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래해왔다는 것은 반드시 선은 아니겠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글을 써오면서 굳은 독자층을 형성했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어느 지점에서 신뢰를 주고 있다는 뜻일테다. 하루키가 지향하는 그 결국은 선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도 알아챈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의 유머가 좋아서 그의 책을 읽곤 했지만, 돌이켜보건대, 그의 이야기가 악하거나 한심했다면 진작에 내치지 않았을까.


하루키는 이야기에 힘이 있다고 믿고, 이야기가 오래 버텨온만큼 앞으로도 이야기가 오래 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이야기가 아닌가. 각자가 근면한 지점이 모두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운동에, 누군가는 산책에, 누군가는 공부에 근면할 수 있을 것인데, 하루키는 소설에 있어서 자신이 근면하다 했다. 아, 달리기에 있어서도 그렇지. 소설에 대해 근면한 편이라고 말하는 하루키를 보면서 나는 나 역시 읽고 쓰는 일에 매우 근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봐, 얼마나 꾸준히 읽고 쓰고 있는가. 나 자체가 딱히 근면한 사람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아니겠지만(물론 게으른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읽고 쓰기에 있어서는 근면함을 발휘한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읽고 쓰고 있다. 게다가 굳이 덧붙이자면, 나는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다. 어느 한 사람을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에 대해서도 쉽게 포기하지도 돌아서지도 않는 것 같다. 사랑을 꾸준히, 성실히, 근면하게 하는 편이다.



나 역시 그동안 보잘것 없는 많은 글들을 써오면서 그 안에 선함을, 그리고 옳은 방향을 담아내고자 했었다. 그 길이 맞다는 확신이 조금 더 들게하는 좋은 책읽기였다. 이 책을 읽고 하루키가 더 좋아진 건 아니지만, 38년이나 글을 써온 소설가의 글에 대한 생각을 읽는 것은 매우 좋은 책읽기가 틀림없다. 앞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나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다.




덧.

이들은 총 네 번에 걸쳐 인터뷰를 하고 그 때마다 장소를 이동하는데,  '신초샤 클럽'에서 두번째 인터뷰를 했다며 네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동안


'간식으로 나는 초콜릿, 무라카미 씨는 도넛 반 개를, 저녁으로는 모두 함께 가락국수를 먹었다' (p.77)


고 한다. 나는.... 너무 놀랐다. 간식으로... 초콜릿... 고작 그것을......아니 게다가 하루키는 뭐여...도넛 반 개라니.. 장난하나. 도넛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반 개를 간식으로 먹다니.. 도넛이 지름 30센치는 되는 거였을까. 대체 도넛 반 개를 뭐하러 먹지? 너무 이해 안되는 부분인 것이다. 사실 사람들 다 간식..도넛 반 개로 끝내는건가요? 간식은 햄버거나 샌드위치, 치킨 두 조각... 정도 되야 하는거 아닌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지나치게 적은 간식, 게다가 저 가벼운(!) 저녁은 또 뭐람?


엊그제도 퇴근길에 혼자 순댓국 시켜 소주 마신 사람으로서,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네. 일단 씁니다. 만약 친구가 와주지 않더라도 와줄법한 환경을 만들어둬야죠. 저쪽에 방석도 좀 깔아놓고, 청소도 하고, 책상도 닦고, 차도 내려두고.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그런 ‘밑준비‘라도 해두는 겁니다. 아무도 안 오니까 오늘은 실컷 낮잠이나 자볼까, 이러지는 않아요. 전 소설에 대해서는 근면한 편이라서요. - P82

링컨이 말했듯이, 아주 많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도 있고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속이기는 불가능해요. 그것이 이야기의 기본 원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P106

글쎄요. 꼭 해피엔드여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제 소설에는 해피엔드가 별로 없지 않나요. 『양을 쫓는 모험』도 왠지 쓸쓸하게 끝나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드랜드』의 주인공은 결국 그 세계에 남잖아요. 그림자와 헤어져서 혼자. 결코 해피하게 끝나지 않죠. 그래도 역시,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리라는 일종의 신뢰감 같은 것이 독자의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살아남는 것, 혹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그건 이야기의 아주 중요한 요소죠. 적어도 어느 정도 길이가 있는 픽션에는. - P178

제 생각에, 한 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으며 찬찬히 곱씹죠.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요. - P197

다시 말해 여성 캐릭터가 성적인 역할만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야기, 남성, 우물 등을 그릴 때는 그렇게 아낌없이 발휘되던 상상력이 ‘여자와의 관계‘에서는 발휘되지 않아요. 여자가 여자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죠. 주인공이든 조역이든 이른바 주체성을 지니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전개도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늘 남자 주인공의 희생양처럼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무라카미 씨 소설에서 여성 캐릭터는 왜 그런 역할이 많은가 하는 거죠. (가와카미 미에코) - P257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저는 어떤 등장인물에 대해서든 그리 깊이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그 인물이 어떤 세계에 관계되었는가, 요컨대 그 인터페이스(접면)가 주된 문제지, 존재 자체의 의미나 무게, 방향성 등은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묘사하지 않으려 주의하는 편이에요. 앞서 말했듯이 자아에 대해서는 되도록 다루지 않으려 합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 P257

결국 말이죠. 소설에 직접적인 형태로 써넣으면 동기가 어쨌건 사건을 겪은 사람들을 소설적으로 이용하는 셈입니다. 가슴 아픈 일을 당한 사람들을 픽션의 형태로 이용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큰 사건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마찬가지고요. - P348

인류 역사에서 이야기의 계보가 끊긴 적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단 한 번도요. 레이 브래드버리 원작,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화씨 451>이라는 영화가 있죠. 아무리 책을 불태워도, 작가를 죽이고 묻어도, 책을 읽는 이들을 모조리 감옥에 보내도, 교육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은 깊이 숲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것이 좋은 이야기이기만 하다면. - P352

설령 종이가 없어도 인간은 이야기를 이어갈 것입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역사라고 해봐야 아직 십 년도 되지 않았잖아요. - P352

그에 비해 이야기는 적어도 사만 년, 오만 년은 이어져 왔는걸요. 축적의 정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히 죽지 않아요.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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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2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전 예전에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하루키는 남자 주인공은 분명 의도를 갖고 쓰는 거 같은데....(본인 로망 실현 ㅋㅋㅋㅋ) 여성 캐릭터는 그렇단 말이죠? 흠....
딱히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꾸준히 쓰고 늘 달리는 것만큼은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거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ㅎㅎ

그나저나 저렇게 소주 한 병 주문하면 몇 잔이나 마셔요? 설마 한 병 다???

다락방 2020-04-22 10:44   좋아요 0 | URL
여성인권엔 딱히 관심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지만 1949년생 일본 남자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싶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꾸준히 쓰고 달리고 또 이야기의 힘을 믿는 것, 선한 의도를 담고자 하는 것들은 참 좋았어요. 괜히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구나 싶고요.
잠깐 멈춰서, 가만, 내가 읽고 쓰는 건 어떠한가, 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책읽기 였어요.


저렇게 소주 한 병 시키면 보통 반병이나 그보다 조금 더 마셔요. 혼자 식당가서 시켜서 한 병 다 마신 적은 없어요. 집에서는 혼자 마셔도 한 병 다마시곤 하는데 밖에서는 한 병 다는 안마셔요. 엊그제는 소주 석잔쯤 남기고 온 것 같아요. 다 마시고 싶었는데 참았네요. ㅋㅋㅋㅋㅋ

감은빛 2020-04-2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방금 북플 앱으로 길게 댓글 남겼는데, 자꾸 옆의 다른 자판이 눌러지는 불편한 폰 자판으로 힘들게 남겼는데, 등록 버튼을 누른 다음 순간 갑자기 북플 앱에서 로그아웃되면서 제가 남긴 댓글이 없어진 것 같네요. 분명 저는 댓글만 썼을 뿐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 이런 버그는 왜 생기는 건지 따지고 싶네요.

암튼 퇴근길 순대국에 소주,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요새 계속 칼바람이 불어 따뜻한 국물에 소주 한 잔이 땡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새벽에 순대국( 수육)에 소주 마셨어요. 시간 차이는 있지만 같은 음식을 먹었군요. ㅎㅎ

하루키가 숫자를 기록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저도 따라해보고 싶네요. 지금 저는 습관 기록앱에 매일 그 활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만 체크하고 있어요.

독서, 글쓰기, 달리기, 맨몸운동, 케틀벨운동, 바벨운동 등으로 큰 틀에서 분류해 간편하게 기록하고 확인할 수 있는 건 좋지만, 나중에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단점이네요.

요걸 어떻게 기록하면 좋을지 고민해봐야 겠어요. 간편하게 꾸준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어요.

다락방 2020-04-23 12:00   좋아요 0 | URL
북플 앱으로 긴 댓글을 시도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저는 북플앱에 들어가 스맛폰에서 댓글 남기는 거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앱으로 들어가면 댓글을 잘 안남기게 돼요. 넘나 아날로그 세대인 것입니다. ㅋㅋㅋㅋㅋ

감은빛 님 운동 열심히 하시니까 하루키처럼 기록하시는 거 되게 좋을 것 같아요! 뭔가 스스로 성취감도 느껴질 것이고 또 나중에 어떻게 변화가 있었는지도 수치상으로 파악 가능하니까요. 도전 응원합니다!!

jeeinn 2020-04-27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말고) 에세이를 좋아하는 데, 이 인터뷰집은 계속 읽을까 말까 했어요.. 님의 평을 보고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하루키의 성실함은 이상하게 위안을 주는 거 같아요. 물론 재능도 있겠지만 성실함.이란 단어는 재능보다 성실.에 조금 더 무게를 주어, 성실하기만 하다면 나도! 라는 생각이 들게 하거든요. 자기 위안 일수도 있겠지만요. 어쨋든 서평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0-04-27 09:42   좋아요 0 | URL
저는 하루키의 소설도 참 좋아했어요. 하루키 특유의 유머가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열심히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 왔습니다. 이 인터뷰집은 저도 사놓고 안읽다가 최근에 읽었는데,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실함에 대해서라면 저 역시 높게 사는바, 그리고 그건 내가 따라할 수 있잖아, 하는 생각도 들어서, 꾸준히 성실히 글 쓰고 조깅하는 하루키를 만나는 것이 저에게도 위안이 됩니다. 특히나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인터뷰집을 읽는게 매우 도움이 될것 같아요. 즐거운 독서 되시기를 바랍니다!
 
스틸하우스 레이크
레이철 케인 지음, 유혜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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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월요일이니(아니 벌써 오늘이다) 일찍 자려고 했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지나'는 아이 둘을 낳고 함께 살아왔던 다정한 남편 '멜빈'이 젊은 여자 열두명 이상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끔찍한 살인은 그들의 집 차고에서 일어났는데, 그녀는 남편이 그곳에서 여자를 죽이고 있을 줄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며 그녀 역시 공범이라고 얘기한다. 그녀는 그렇게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난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남편으로부터 살해당한 여자를 목격하게 되고, 그리고 우연히 그가 그 한 사건의 범인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녀는 그 일 자체로도 이미 충격적이었지만 그녀의 무죄를 세상이 믿지 않기 때문에 삶이 지옥이 된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계속 거주지를 옮겨야 하고 신분을 바꿔야 했다. 그렇게 거주지와 신분을 바꿔도 감옥에 있는 남편은 계속해 편지를 보내온다. 우리가 얼마나 좋은 가족이었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그리운지, 그리고 아내를 얼마나 찾아가서 죽이고 싶은지.

지나와 아이들에 대한 협박은 비단 남편으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의 수많은 트롤들은 그녀의 행적을 쫓으며 그녀를 죽이자고, 그 아이들을 죽이자고 한다. 살인자의 아내, 살인자의 공범, 살인자의 자식들. 지나와 아이들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에서 뿌려지고 다른 잔인한 사진들과 합성되어 돌고 있다. 


그녀 자신과 그녀의 아이들을 지킬 사람은 그녀 혼자 뿐이다. 그녀가 재판을 받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맡아준 적이 있었고, 그때 아이들은 할머니와 다정하게 지내며 친해졌다. 할머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가끔 통화해서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해야 한다. 그들이 어디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 할머니에게 조차도 알려서는 안되니까. 어떤 식으로 그것이 그들을 향해 적의를 가진 이들에게 들어가게 될지 모르니까.



아이들이 자꾸 학교를 옮기는 것도 그리고 친구가 없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은 게 아니어서 지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갈등하는데, 마침 스틸하우스 레이크가 바로 앞에 호수가 보이고 한적하며 좋다. 어쩌면 이번에는, 이곳에는 정착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녀는 뛰면서 체력을 키우고 사격을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호숫가에서 여성의 시체가 떠오른다. 그 시체는, 전남편이 여성들을 살해했던 방식으로 살해되었고, 이에 지나는 용의자로 지목된다. 익명의 제보가 그녀가 호숫가 보트에 있는걸 봤다는 거짓을 말한탓이다. 이 살인으로부터 취조를 받고 집에 돌아왔는데 며칠뒤 또 호수에서 시체가 떠올랐고, 이제 그녀는 확실한 용의자가 되어 다시 경찰에게 잡힌다. 그녀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경찰서에 잡혀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의 집에는 빨간 페인트로 온갖 욕이 써있었다. 



지나는 이제야 비로소 남편과의 생활에서 잘못된 것들이 인식된다. 사실 그 때도 그게 좀 이상했더 거였는데, 그런데 내가 그냥 견디기만 했어, 하는 것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가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빠라고, 그리고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녀가 아내라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지 않았다는 것들을 그녀는 이제 안다. 남편의 거짓을 그녀는 그 당시에 볼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있지 않을 때, 이제 그녀는 남편이 자기에게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남편은 그녀에게 살인을 연습했고, 그녀를 길들였다. 남편은 그녀가 남편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그녀의 싫다는 말을 무시했다. 



얼마전에 읽었던 '게일 다인스'의 [포르노랜드]의 내용이 이 책에 겹쳐졌다. 남자친구 혹은 남편의 이상한 요구에 갈등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 포르노에서 본 장면을 그대로 따라하는 남자들이었는데, 왜 이런 이상한 요구를 하는지 몰라 어떤 여자들은 갈등했고, 어떤 여자들은 거부했고, 어떤 여자들은 견뎠다. '지나'는 견디는 여자였다.



멜은 자심이 숨결 놀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내 목에 끈을 감고 조르길 좋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국이 남지 않도록 부드럽고 푹신한 재질의 끈을 사용했고, 그걸 사용하는 데 전문가였다. 난 그게 너무 싫어서 그에게 자주 풀어 달라고 이야기했고, 노골적으로 거절 당했을 때는 눈앞에서 뭔가 번쩍 하다 .... 캄캄해졌다. 다시는 싫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절대 기절할 정도로 세게 조르는 법은 없었지만, 그런 상태에 매우 근접했다. 그리고 난 그걸 견디고 또 견뎠다. 섹스하는 내내 내가 산소를 갈망하는 동안 그에 의해 땅 위로 들렸다 내렸다 하면서 올가미와 사투하는 여자를 그가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학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잘못됐다고 느꼈던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아보면 그가 자신의 살인 놀이에 나를 반복해 이용했다는 생각에 .... 오싹 소름이 돋도 구역질이 난다. (p.118)



포르노를 연구한 책들을 읽으면서 항상 드는 의문이었다. 영상 속에서 여자가 남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장면, 그러니까 항문에 고추를 넣고 입안에 넣고 얼굴에 정액을 싸고 여자를 때리고 묶고 목을 조르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떻게 한쪽 성은 '저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이것을 활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그 영상들 속에서 그것을 '서로의 쾌락'으로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쾌락이 아니라는 건, 그냥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아는게 아닌가. 트윗에서 그 수많은 짧은 영상들을 신고하면서 내가 느낀건 괴로움이고 고통이었다. 여자들이 당하는 일들은 성적 학대였다. 그런데 그런 영상을 많은 남자들은 심지어 돈을 주고 본다고 하니 미쳐버리겠는거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학대하는 걸 보면서 쾌락을 느끼고, 그리고 그걸 직접 해보고 싶어한다니. 


지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는 거다. 남편은 섹스 도중 그녀의 목을 조른다. 그녀는 싫었다. 이게 좋을 리가 없잖아. 난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고 끔찍한데, 나랑 섹스하는 남자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걸 견뎌야 하는걸까? 지나는 무서워서 견뎠다. 거절했다가 눈앞이 번쩍 했기 때문에. 섹스할 때 자신의 쾌락을 위해 혹은 서로의 쾌락이라는 명목으로 한 쪽의 목을 조른다는 것의 그 폭력성, 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건가? 그 불안정을 그 불안함을 그 공포를? 어떻게 다른 쪽의 목을 조르면서 쾌락을 얻고자 하는걸까.  설마 부드럽게 졸랐다고 다정하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쾌락이 그렇게나 중요한건가. 한쪽을 고통에 빠지게 할만큼. 그리고 '나는 분명 상대의 허락을 받았고 상대도 좋아했다'고 하는 남자들은 천번 만번 스스로에게 솔직히 묻고 답하기를 바란다. 여자가 정말 자유의지로 그것을 원했을지. 예스라는 답을 받기 위해 자신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를 정말이지 진지하게 돌아보기를 바란다.



그녀는 죄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살인에 한 번도 공범인 적이 없었고 심지어 남편이 살인범인지도 몰랐다. 그건 상상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죄책감은 무섭게 따라붙는다. 왜? 그녀가 몰랐다는 것 때문에. 한 남자가 살인범이라는 걸 모르면서 그와 함께 살았고,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 때문에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다. 세상은 그녀에게 돌을 던진다. 여자들을 납치해 살인한 건 남편인데, 오히려 남편에게는 추종자가 생기고 팬레터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죽일년이 되어 있다. 세상은 여자의 말을 믿지 않고, 세상은 여자의 죄를 더 가혹하게 평가한다. 이 책의 작가 레이철 케인은, 이 모든 여성혐오를 누구보다 인지하고 있다. 그게 이 책을 이 밤에 끝까지 읽게 만들었고, 그게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남자 연쇄살인범에게 어떤 광적이고 불건전한 끌림을 느끼는 반면, 공범인 여성은 훨씬 더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성 혐오와 독선적인 분노, 다른 이들은 안 되지만 이 여자는 망가트려도 괜찮다는 단순하고 맛있는 사실이라는 독이 들어간 수프다. 

난 결코 무죄가 아닐 테니 무죄가 된 것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p.246)




레이철 케인은, 죄없는 여자가 죽일년이 되어 계속 도망쳐야 하는 이야기를 써냈다. 아니라고 수십번 외쳐봤자 아무도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경찰도 믿을 수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돈으로 보안장치를 설치해야 했고, 사격 훈련을 받아야 했다. 자신을 지키는 일은 오로지 자신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게다가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눈앞의 적들을 물리쳤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자의 삶에 안전을 위협하는 놈은 결국 한 명이 아니기 때문에. 여자가 스토커로 의심했던 건, 여지없이 스토커였다. 레이첼 케인이 쓴 건 지나라는 인물을 만들어내 진행한 소설이었지만, 현실과 아무것도 다른 게 없었다. 여자는 죄인이 되기는 쉽고 무죄가 되긴 어렵다. 여자는 누구를 믿기도 힘들고 자기 안전은 자기가 책임져야만 한다. 




결론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더 현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한 소설이었고, 그리고 주인공은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 스스로 강해지고 또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가 겪었던 일과 그 일로 인한 트라우마까지, 소설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레이철 케인은 이걸 알고 있고, 그래서 아주 좋은 소설을 써냈다. 

"인터넷에서 누구나 악플을 들어요, 엄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요. 그냥 무시해 버려. 그럼 가 버릴 거야."
이 말은 아주 많은 관점에서 날 미치게 한다. 마치 인터넷이 가공의 인물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라는 듯이. 마치 우리가 애초부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반사적으로 안전을 추정하는 말은 저렇게 어린 수컷이나 하는 말이다. 여자들은, 래니 나이 정도 되는 소녀조차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세상이 정말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맹목적이며 특권적인 무지를 드러냈다. - P53

코너가 30분 뒤 나를 이곳에서 찾는다. 난 호수의 이 조용한 침묵, 물에 비친 달빛, 머리 위에 뜬 청명한 별들을 사랑한다. 불어오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소나무에게 속삭인다. 위스키가 연기와 햇살의 기억이라는 근사한 대위법을 제공한다. 난 이런 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길 좋아한다. 내가 그럴 수 있을 때. - P84

"여러 가지로 감사해요."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것은 진심이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잘해 주었다. 그냥 나 자신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인생에서.... 그것은 중요하다. 난 아버지의 딸이다가 멜빈의 아내가 되었고, 그러고 나서 릴리와 브래디의 엄마가 되었고, 그런 다음에는 많은 이들에게 법망을 피해 간 괴물이 되었다. 내 고유의 권리를 지닌, 한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나 자신을 온전히 느끼고, 그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나는 그웬 프록터로 지내는 게 좋다. 그 신분이 진짜건 아니건 그녀는 충만하고 강한 사람이고, 난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 - P115

멜은 자심이 숨결 놀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내 목에 끈을 감고 조르길 좋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국이 남지 않도록 부드럽고 푹신한 재질의 끈을 사용했고, 그걸 사용하는 데 전문가였다. 난 그게 너무 싫어서 그에게 자주 풀어 달라고 이야기했고, 노골적으로 거절 당했을 때는 눈앞에서 뭔가 번쩍 하다 .... 캄캄해졌다. 다시는 싫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절대 기절할 정도로 세게 조르는 법은 없었지만, 그런 상태에 매우 근접했다. 그리고 난 그걸 견디고 또 견뎠다. 섹스하는 내내 내가 산소를 갈망하는 동안 그에 의해 땅 위로 들렸다 내렸다 하면서 올가미와 사투하는 여자를 그가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학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잘못됐다고 느꼈던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아보면 그가 자신의 살인 놀이에 나를 반복해 이용했다는 생각에 .... 오싹 소름이 돋도 구역질이 난다. - P118

손을 써서 일하고, 요리를 좋아하고, 준수한 외모.... 난 이 남자가 왜 이곳 호수에 혼자 와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두가 ‘사랑/결혼/아기‘라는 인생길에 순응하지는 않는다. 난 우리 아이들을 낳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그 아이들을 낳게끔 한 결혼을 후회할 뿐이다. 여전히 나는 대부분의 삶보다 나은, 외롭고 고독한 삶을 이해할 수 있다. - P148

사람들은 남자 연쇄살인범에게 어떤 광적이고 불건전한 끌림을 느끼는 반면, 공범인 여성은 훨씬 더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성 혐오와 독선적인 분노, 다른 이들은 안 되지만 이 여자는 망가트려도 괜찮다는 단순하고 맛있는 사실이라는 독이 들어간 수프다.
난 결코 무죄가 아닐 테니 무죄가 된 것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 P246

"왜 날 돕고 싶어하죠?"
"당신은 도움이 필요해요. 아버지 부탁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린다. "당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일로 평가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니까요."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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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랜드 열다 페미니즘 총서 5
게일 다인스 지음, 신혜빈 옮김 / 열다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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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코타 존슨' 주연의 영화 《하우 투 비 싱글》에 보면 여자1이 여자2와 싸우나에 가서 그녀의 음모를 제거하지 않음에 대해 언급한다. 니가 거기의 털을 제모하지 않았다는 것은 연애(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인즉슨, 섹스를 위해서라면 음모를 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성인여자가 연애를 위해서 좀 더 정확히는 섹스를 위해서 보지의 털을 밀어야 하는가.

'게일 다인스'는 그것이 세상에 만연한 포르노 때문이라고 몇 번이나 사례를 들어 언급한다.

한 대학에서 여자 대학생들이 '그건 내가 원한거야' 혹은 '나를 위해서야'라고들 말했지만, 얘기하다 보니 '보지 털을 밀지 않으면 남자친구가 섹스 하기 싫어해' 라는 대답이 나왔던 것. 그것을 마치 부수적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여자들이 자신의 신체를 변형하면서 포르노를 산다고 얘기하는 거다.


몸에 대해 변형을 가하는 것은 모든게 끔찍하지만, 특히나 보지털을 미는 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더 끔찍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성인 여성에게 온 몸의 털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보지라고 다를 것도 없다. '게일 다인스'는 이 책에서 여러가지 포르노를 다루면서 당연히 '아동 포르노'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자, 음모 제거에 대해 보자.



여자의 몸을 아동화하는 또다른 기법 하나는 음모를 전부 제거해 외음부가 사춘기 전 여자의 그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수년간 포르노에서 여자의 외음부 전체 제모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이 기법이 그 표지의 기능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한 한가지 결과는, 현재 사실상 모든 여자 포르노 배우가 아동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려스러운데, 이용자가 유사-아동 이미지를 검색할 마음이 없더라도 포르노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그런 이미지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p.291)



나는 많은 여자들이 자신이 원한다는 명목으로 음모를 제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걸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지도 얘기한다. 위생과 청결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음모 제거가 시작된 건, 포르노였다는 것을. '김이설'의 소설 [환영]을 봐도 남자가 여자에게 '거기 털을 밀어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남자와 섹스하지 않는 여자라면,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여자라면, 감히 '흐음, 보지털을 밀어볼까' 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누군가는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싸인을 보냈기 때문에, 그게 반드시 내 남자친구가 아니라도, 내 여성친구를 통해서 그리고 이렇게 영화나 책을 통해서 남자가 여자에게 더 즐거운 섹스를 위해 보지 털을 미는 것을 요구하는 걸 보기 때문에, '자, 왁싱샵에 가볼까' 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싸인들이 없었다면 내 성기의 털을 대체 왜 민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 '내가' 원한 것이 맞는가. 왜 여자들은 포르노를 본 적도 없으면서 포르노속의 여자들을 닮아가는가. 예쁘게 보이고 싶고 섹시하게 보이고 싶은 그 모든 기준이, '내가 꾸미는 걸 좋아해, 이러면 기분이 좋거든요' 하면서 가꾼 내 외양이, 어째서 포르노 속의 여자들을 닮아가는가. 아이처럼 입는 것도 마찬가지. <유사 아동 포르노>라는 포르노의 장르는 성인을 미성년자처럼 꾸며 만들어지는 포르노다. 그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은 거기에서 보여주는 내용(이랄 것도 없지만), 설정, 고통을 본다. 저 미성년자가 나이든 남자 어른의 꼬임에 넘어가서 처녀성을 빼앗겼어! 이 자극은 좀 더 큰 자극으로 더 큰 자극으로 옮겨간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 감상 후기 게시판도 수시로 찾아 들어가본다. 거기에 보면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더 큰 고통과 울부짖음을 표현할 때 쾌락을 느끼고 명장면이라 일컫는 감상이 수두룩하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진짜 고통스러워 보여 그것을 보는게 힘들었다고 말했던 남자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이제 그거야말로 명포르노다, 라고 감탄하는 것들이 바로 그 안에 있었다.


무엇보다 포르노 감상후기를 올린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건 본인이 포르노를 본다는 사실이 곧 숨겨져야 할 것이 아님을 의미했다. 포르노 감상후기 게시판에서 남자들은 서로 좋았던 포르노를 공유하고 추천한다. 그리고 '토론'한다. 한 여자에게 두세명의 남자가 들러붙어 얼굴에 정액을 뿌려대고 그걸 먹고, 목구멍에 고추가 들어가 여자가 오바이트를 하면서 울면, 그걸 보고 좋다고 환호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야 말할 것도 없고, '사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세게 박아주는 걸 좋아해' 라는 고정관념부터, 그렇게 박히고 우는 여자들이 '걸레이고 창녀' 라고 말하면서 이분법을 강화하고, 미성년자 역시 순진하지만 큰 자지를 좋아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루밍이 필요하다는 것도 포르노가 알려준다. 겁먹은 미성년자가 성인 남자의 어떤 그루밍에 쭈뼛쭈볏 옷을 벗는지. 인종 차별도 마찬가지.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도 포르노가 강화한다. 흑인들은 대물을 가졌고 아시아인들은 작은 고추를 가졌으며 백인은 그 중간 어디쯤. 포르노가 보여주는 여성에 대한 편견, 인종에 대한 편견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영상을 보는 이용자들에게 침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공유된다.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광고까지. 포르노가 깔리지 않은 곳이 없다. 영화속에서도 포르노를 이용하는 것은 공공연히 등장하고, 포르노에서 설정을 가져온 뮤직비디오들도 나온다. 포르노를 보지 않았던 여자들도 그런 영상들을 본다. 저렇게 허리를 비트는 게, 저런 옷을 입는게, 저런 표정을 짓는게 남자들한테 사랑받는 것이라는 걸 여자들도 습득한다. 아이들도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고 괴로워하고, 나를 위한 것이라며 털을 민다.


만약 여성이 아닌 다른 대상이, 그러니까 흑인이나 유대인이 맞고 입에 이물질이 들어가 토하는 영상이 반복적으로 보여진다면, 사람들은 집단으로 항의를 할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그 일을 당하는 영상에 대해서는 환호하며 이용된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아주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서양 남자와 교제하는 여자들을 보며 한국남자들이 욕했던 것, 유학이나 어학연수에 다녀온 여자들을 놀았던 여자로 표현했던것, 어린 여자들에게 다가가 그루밍했던 것. 모두 포르노의 영향이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던 내 많은 여자친구들은 한국에 와 교제한 남자들로부터 '너 거기 갔다 왔다며, 그럼 너도 서양놈 좀 알거아냐' 하면서 큰 좆을 맛본 여자로 후려치기 했다. 아, 이게 다 포르노 영향이구나.

섹스 도중 정액을 먹으라고 했던것도, 목구멍 깊숙이 고추를 넣는 것도, 항문에 넣고자 한것도, 얼굴에 싸면 안되느냐 묻는 것 모두, 포르노를 보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들이었다. 포르노를 전혀 접하지 않은 남자라면(현실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 정액을 뿌려댈 생각을 감히 어떻게 할까.



'조셉 고든 래빗' 주연의 영화 《돈 존》에서 남자는 포르노 중독에 걸려있다. 그는 당연히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는 것에만 능하고, 그래서 '젊고 예쁘고 쭉빵한 여자'를 사귀게 되었을 때 뿌듯해한다. 그 여자를 집에 데려갔더니 아버지는 '니 여친 귀엽다'며, 당연히 성적 대상으로만 평가한다. 그러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라도 돈 존을 만족시킬 수 없다. 돈 존은 여자친구와 섹스 후에 여자친구가 자는 틈을 타 포르노를 본다. 포르노를 찾아 봐야만 비로소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일은 비단 영화에서만 보여주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게일 다인스도 이런 남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좀 더 큰 자극, 좀 더 큰 자극을 찾는 남자들.



포르노는 강간문화를 형성한다. 여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여성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좋아한다고 보기 때문에 여성에게 그렇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해보고 싶어하게 만든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를 본다'는 것이 곧 '강간범이 된다'는건 당연히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포르노는 강간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유사 아동 포르노도 마찬가지. 유사 아동 포르노를 만드는 이들 조차도 '아동에 대해 이러면 안된다'고 동참하지만, 그러나 이게 얼마나 모순인가. 여자를 아동처럼 꾸며서 딸로, 순진한 옆집 소녀로 만들고 성적 폭력을 가하는 일을 보여주는게. 유사 아동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진짜 아동 포르노를 찾게 된다는 것도 역시 아니지만, 그러나 유사 아동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이 진짜 아동을 성학대 하는 영상으로 가게 될 확률은 매우 높다는 거다. 역시, 현실 폭력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 포르노를 보는놈이 강간범이다, 라고도 말할 수도 없고 유사아동 포르노를 보는 놈들이 아동 성학대범이 된다는 것도 아니지만, 게일 다인스는 실제 아동성학대범 재소자들과 만나면서, '원래는 성인과 정상적 연애를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남자들의 경험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포르노는, 성학대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일전에도 SNS 를 통해 아주 짧은 여성학대(포르노) 영상을 보고 신고하면서, 한 사람(여자)이 다른 사람(들, 남자)에게 고통을 당하는 장면을 도대체 왜 보고 싶어하는지, 이런걸 만들고 보는 사람들의 영혼이 괜찮은건지 오래 생각한 적이 있다. 그날 밤에는 엄마 옆에서 자면서, '엄마, 이나라 남자들... 정신이 찢어진 것 같애, 건강한 정신이면 그런 걸 보면서 어떻게 견뎌'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엄마, 남자들 다 영혼이 찢어졌어.



한 여성이 고통을 당하는 걸 '보면서' 자위를 한다는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거 아닌가. 이게 왜 '나의' 상식이기만 해야할까. 토하고 똥구멍에 찔리고 얼굴에 배설물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는게, 그게 어떻게 건강한 삶을 형성할 수 있을까. 지나가는 여자를 보는 시선을 대체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당신들의 영혼은 파괴되었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에 한 번이라도 노출된 남자는, 그 이전으로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당신들의 영혼은 찢어졌다. 그리고 보고, 보고, 또 볼때마다 영혼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거다.




나는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이, 포르노를 '소비하는' 남자들이 '누구 좋으라고' 그걸 보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걸 보는 그들 자신을 위한 걸까? 포르노를 제작하는 사람들, 그들이 아주 큰 돈을 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포르노 '제작자'들이다.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도 '저 영상속의 여자는 괜찮을까' 같은걸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걸 만드는 제작자들은 그걸 보는 남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 더 큰 쾌락을 너희에게 안겨줄게, 라고 광고하지만, 그것은 남자들의 정신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게일 다인스는 십대 포르노를 구글에 검색하면 몇백개가 뜬다고 했다. '십대 포르노'라는 게 말 자체가 형성되어서도 안되지만, 그런데 몇 백개나 된다고?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구글을 열어 똑같이 검색해보았다.




관련 글이 20억개가 뜬다. 이 책이 2010년에 쓰여진 책이니 그로부터 십년이 지났고, 십년동안 이렇게나 급속하게 확산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상속의 여자들 역시 더 많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게일 다인스'의 멘탈은 괜찮을까, 를 걱정했다. 활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언급되는 포르노의 장면들은 내 멘탈을 찢어지게 만들었는데, 이걸 직접 연구한 게일 다인스는 괜찮을까. 남자들과 연애하면서 '이 남자가 내가 보기엔 황당한 요구를 하는데' 라며 걱정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괜찮았을까. 포르노는 그저 판타지일 뿐이에요, 우리는 조금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죠, 라고 말하는 남자들을 보는게 괜찮았을까. 무엇보다 그 영상들을 보았던 것들은 괜찮았을까.



이 책의 결론은 기운이 빠진다. 게일 다인스 역시 해결책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




우리 문화의 포르노화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내게 마법 같은 해결책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우리는 거대한 경제 구조와 맞닥뜨리고 있다. 포르노 산업과 싸우려면 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적 운동으로써 저항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저항은 개인적 층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희망적인 시작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는 포르노를 이용하는 남자와 데이트하지 않겠다는 여자 청년, 자녀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길러주는 모부, 체계적인 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교사, 섹슈얼리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포느로를 보이콧하는 남자도 있다. 더 넓은 층위의 사회적 움직임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러한 개인적 형태의 저항이 현재로서는 가장 의미 있다. (P.320)



하아- 한숨부터 난다. 할 수 있는게 고작 이것뿐이란 말인가.


다시, 영화 《돈 존》에서 남자도 나이든 여자를 만나 '눈을 보고 대화하는'것의 기쁨을 아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서서히 포르노 중독을 치료해가는 것. 섹스를 위해 섹스를 했던 사람이 진정한 교제를 시작하는 거다. 그건 그 남자에게 그전까지 몰랐던 일이었다. 사실 이거야말로 판타지 아닌가 싶지만, 그러나 대화의 기쁨을 알아가는 것, 눈을 마주치고 애정을 담는 것이야말로 포르노에 저항하는 방법일 것이다.

몇년전까지 나 역시 포르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건 내가 생각하는 포르노가 그저 섹스를 위한 섹스 정도였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섹스하고 싶어서 섹스하는 걸 보는게 뭐가 잘못이야, 라고 생각한건데, 그건 내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영상을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와 또 많은 여성들이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칠게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편에 서게 되는 거다. 현실을 몰랐다. 아주 몰랐다.



나의 개인적 저항, 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그런 포르노를 보았던 남자이면서, 그러나 포르노를 옹호하는 새끼들에 대해 경멸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일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봤자, 학대당하는 여자를 보는 걸 즐기는 놈들임에 틀림 없으니까. 나는 그런 놈들의 영혼이 말짱할 리 없다는 타당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게일 다인스는 자신과 같이 포르노를 연구했던 '로버트 젠슨'에 대해 언급하는데, '로버트 젠슨'을 검색해보니 국내에는 그의 저서가 번역된 게 없는 것 같다. 《절정의 순간:포르노그래피와 남성성의 종말》의 저자라는데, 이 책도 꼭 읽어보고 싶으니 누군가가 어서 빨리 번역해서 내주었으면 좋겠다.



포르노는 혐오 표현이다. 여성과, 인종과, 아이에 대한 혐오 표현이다. 표현의 자유로 허락할 수 없는, 혐오 그 자체이다. 여성차별을 견고히하며 아동학대를 인정하고 인종차별을 강요하는 혐오 표현이다. 포르노를 보고 또 보는 당신들은, 강간으로 가는, 아동성학대로 가는 바로 그 중간을 살고 있다. '나는 그런 놈이 아니야'라고 확신하는가? 지금 감옥에 가있던 아동성학대범들도 그랬다. 당신들은 강간범이 되기 직전에 놓여있다. 아동성학대범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2008년 3월 나는 코네티컷주 교도소에서 아동 포르노 소지죄로 수감 중인 남자 일곱 명(이 중 셋은 아동 성폭력 가해자였다)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들 중 누구도 소아성도착자의 정의에 들어맞지 않았다. 일곱 명 전부 자신은 성인 여자와의 섹스를 선호하지만, 일반적인 포르노에 질렸다고 말했다. 이 중 다섯 명이 처음에는 PCP(pseudo-child pornography) 사이트에 접속했고, 그러다가 실제 아동 포르노로 넘어갔다. 이는 소아성도착자와 비소아성도착자 모두에게 PCP 사이트가 "성인 포르노와 아동 포르노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는 러셀과 퍼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현재 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실증적 연구가 없으므로 특정 연구 결과를 지목해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러셀과 퍼셀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리고 일화적 증거가 그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면, PCP의 인기가 계속되고 또 더 많아지는 현상이 아동 성폭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실제 아동 포르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제작 과정에서 학대당하는 아동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둘째, 아동 포르노를 실제 아동과의 섹스를 시도하는 데 디딤돌로 삼는 남자들에게 성폭력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는 아동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P.314)



대규모 연구가 그 뒤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일 다인스의 이 주장은 현실이 됐다. 위에 내가 검색해본 것처럼, 십대 포르노의 영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우리는 어제, 오늘의 뉴스에서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자들에 대해 지겹게 듣고 있지 않은가.


퀘일과 테일러는 아동 성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부 응답자에게 포르노는 실제 가해를 대체하는 대응물이었지만, 다른 일부에게 그것은 실제 가해를 위한 청사진이자 자극제로 작용했다." 아동 포르노 이용자 중 실제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비율은 연구마다 다르며 낮게는 40%, 높게는 85%까지 나타났지만, 이러한 증거가 중요하게 시사하는 바는 아동을 성애화한 이미지를 보고 자위하는 행위는, 상당 비율의 남자에게 있어 실제 아동 성범죄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P.315)





 

남자들은 자신의 의지로 포르노를 살고 있고, 여자들은 의지는 아니었으되 끌려가서 포르노를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두 혐오를 살고 있다.


나는 포르노에 반대한다.

그리고 포르노의 편을 드는 사람들에 반대한다.

나는 반포르노주의자다.

나는 포르노를 살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들 역시 포르노에 살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포르노에 반대한다.



이 실험의 설계자는 포르노 제작자로, (대부분)남성이며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들은 시장을 형성하고, 팔릴 만한 상품을 찾아내고,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장기 사업 계획을 구상한다. 이 책에서도 곧 다루겠지만, 한 마디로 말해 포르노 제작자는 철두철미한 사업가지, 우리의 성적 자유를 위해 힘쓰는 혁신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 P18

컨벤션홀 내부를 돌아다니며 포르노 제작자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이들이 섹스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다는 점이 매우 분명해진다. 이들을 흥분시키는 건 돈이다.
(…)
내가 인터뷰하는 포르노 제작자 중 많은 이들이 이 산업에 종사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지, 우리에게 성적인 힘을 부여하거나 창조성을 증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이 남자들 중 그 새로운 극단이 어떻게 실제 여자의 몸에 작동하는지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 P29

"고급화 상품이 밀려나고 더 수위가 센 아마추어 느낌의 영상물이 그 자리를 채우면서 우리가 형성한 이 시장은 내가 보기엔 ‘포르노 올림픽‘의 현장이다… 이제 중요해진 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다. 영화 한 편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와 동시에 섹스할 수 있는지, 구멍에 페니스를 얼마나 많이 집어 넣을 수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정액을 먹을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다. - P39

야동의 세계에 사는 여자는 자신에게 경멸과 혐오만을 표출하는 남자와의 섹스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이며, 대개는 그 모욕이 심하면 심할수록 당사자 모두가 더욱더 황홀한 오르가슴을 느끼는 듯하다. 이곳은 여성에게 동일 임금, 의료 및 보육 서비스, 은퇴 후 계획, 자녀를 위한 양질의 교육, 안전한 주거 환경 같은 건 필요치 않은 단순한 세계다. 이 세계는 일차원적 여성, 구멍의 집한에 지나지 않는 여자들로 가득하다.
포르노가 전달하는 남자에 관한 메시지는 사실 훨씬 단순하다. 포르노 속 남자는 영혼도, 감정도, 도덕 관념도 없이 발기한 음경만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 유지 체계로,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여자를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 - P42

"나는 남자들이 진짜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 여자에 대한 폭력이 바로 그거다. 그걸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센 수위가 얼굴 사정이다." - P46

포르노 문화에 의해 변화화는 집단은 남자뿐만이 아니다. 여아와 성인 여자는 모두 포르노의 주 소비자층은 아니지만, 10년 전만 해도 소프트코어 포르노로 분류되었을 이미지가 대중문화에 범람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6장에서는 여아와 성인 여자에게 던져지는 여성성의 이미지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가는지 진단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따르면 매우 엄격한 문화적 기준을 충족하는 대상은 ‘섹시한‘ 몸뿐이다. 일부 집단은 이 과잉성애화가 여성에게 힘을 부여한다고 찬양해 마지않지만, 이 유사-힘키우기는 진정한 권력의 모습과 동떨어진 빈약한 대체재일 뿐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적 평등으로, 여성에게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제도를 통제할 힘을 주는 것이다. - P51

내가 「걸스 곤 와일드」에 출연한 여자들(대부분 십대 후반)과 얘기를 나눈 후 분명히 알게 된 점은 프랜시스와 촬영팀이 이들을 교묘히 조종하여 자기 상품을 위한 원재료로 이용하는 데 실로 전문가라는 사실이었다.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들이 자신을 성적 대상물로 보도록 하는 문화에 이미 길든 상태라는 점이다. 프랜시스와 촬영팀은 이를 발판으로 삼아 그들이 얼마나 예쁘고 섹시한지, 몸매가 얼마나 끝내주는지 등의 찬사를 퍼부으며 그들을 압도한다. - P102

나와 대화를 나눈 여자 청년 중 많은 이들의 삶이「걸스 곤 와일드」출연 이후로 180도 바뀌었으며, 일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가까운 증상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중 어떤 사람은 친구와 ‘여-여 섹스‘장면을 촬영하고 나서 "멍청한 걸레"가 된 기분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자꾸만 쳐다봤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학교에선 지나가는 남자들이 전부 나를 쳐다봤고 그건 정말 끔찍했다." 무모했던 한순간이 영상에 담겼고, 그들은 그것이 남은 평생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요소보다 우선해 자기를 규정할 거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 중 일부는 다른 학교든 새로운 직장이든 어디를 가도 「걸스 곤 와일드」이미지를 털어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학교를 자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며, 실로 많은 이들이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이들은 학업이나 커리어 계획이 좌절되면서 삶이 틀어지기도 했다. - P107

미디어가 내보내는 제임슨(포르노 업계의 간판 배우)의 인생 이야기에서 그의 실제 삶이 어떠했는지는 대부분 빠져 있다. 그의 실제 삶은 대외 이미지보다 훨씬 덜 화려하다. 『포르노 스타처럼 사랑하기』에서 그는 방임과 학대로 얼룩진 유년기와 초기 성년기를 상세히 기술한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의 유년기는 혼란으로 가득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방임 탓이 컸다. 십대 때 집단강간과 폭행을 당한 후 그 자리에서 죽도록 방치되었으며, 후에는 학대를 일삼던 남자친구의 삼촌에게 강간당했다. 열여섯 살 때는 아버지에게서 쫓겨나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그에게 스트리퍼로 일하라고 부추긴 사람이 그 남자였다.
- P110

기사에서도 가끔 그가 받은 학대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였는지, 그러한 경험이 이후 그의 삶의 선택과 결정을 어떻게 형성했는지는 대충 얼버무린다. 가정에서 방치된 십대가 집에서 아버지에게 쫓겨나 남자친구의 강권으로 스트립쇼에 서게 되었다는 인생사는 포르노 산업을 긍정적으로 그려내기에는 너무 추한 이야기다. 그 대신 기사는 대부분 그의 부유한 라이프스타일과 포르노 제국을 건설한 1인 여성으로서의 면모에 초점을 맞춘다. - P110

경험을 통해 남자에 대한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묻는 말에, 제임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남자를 조금은 증오하게 되는데, 왜냐면 남자를 정말 끔찍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죠. 다들 취했고, 무례하고, 완전히 통제 불능이에요. 거기서 술을 조금 더 먹이면 정말로 추해지죠." 그는 이어서 스트리퍼로 일했던 경험을 통해 "그들[남자들]이 뭘 잘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리건이 "뭔데요?"라고 묻자, 제임슨은 답한다. "철저한 폄하요." 그 후 제임슨의 갑작스러운 시인이 이어진다. 폄하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느냐는 리건의 질문에, 제임슨은 이렇게 답한다. "네, 아직 어리고 지금 뭐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면 그렇게 되죠.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몇 번 겪었고, 그러다가 금방 철이 들어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이해하게 됐어요." - P112

『맥심』같은 남성잡지-십대를 겨냥한 조악한 콘텐츠 때문에 영국에서는 ‘청년잡지lad mag‘라고 불린다-도 유사한 방식으로 젊은 남자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핀업 사진 같은 이미지와 섹스, 술, 스포츠에 관한 기사를 통해, 이들 잡지는 여자가 오로지 성적 대상물로만 존재하는 남성 판타지 세계를 구축한다. 이런 잡지의 기조는『맥심』의 창간 멤버인 숀 토머스Sean Thomas가 잘 설명했다. "『맥심』같은 잡지는 뉴스 보도를 위한 잡지가 아니다. 그런 건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사의 일이다. ‘청년잡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남자들에게 남자답게 굴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다. 맥주를 마시고, 다트 게임을 하고, 여자를 쳐다봐도 된다는 거다. 『맥심』을 창간할 당시 우리는 페미니즘의 과도한 조롱에 반격하는 흐름의 선봉에 있다는 의식을 갖고 시작했다. 나는 우리가 성공했다고 믿는다." - P123

포르노 산업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설립된 또 하나의 단체로는 아동보호를 위한 웹사이트 협회(ASACP)가 있다. 1996년 발족한 ASACP는 다음과 같이 홍보된다. "인터넷에서 아동 포르노를 근절하기 위해 힘쓰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ASACP는 아동 포르노 신고 핫라인을 구축함으로써, 그리고 극악무도한 아동 성폭력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온라인 성인 산업의 노력을 조직함으로써 아동 포르노와 싸우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들이 온라인으로 연령 등급에 맞지 않는 영상물을 시청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한편 표현의자유연합은 2002년 아동 포르노 관련 법 개정을 위한 로비에 성공했고, 포르노 업계에서 18세이기는 하나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를 배우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이 ‘아동보호를 위한 웹사이트 협회‘의 회원 중에는 「허슬러」도 있는데, 이보다 더한 위선이 또 있을까? - P143

「허슬러」는 『베일리 리걸』을 운영하며 "십대 미녀들의 최대 컬렉션을 보유한 세계 1위 틴 매거진"이라고 홍보하는 그 「허슬러」가 맞다. - P143

어떤 집단을 비인간화함으로써 그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가하는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방식은 포르노 제작자들이 처음 생각해 낸 게 아니며, 이미 수많은 압제자가 그 유효성을 증명했다. 나치 선전기구는 유대인을 ‘카이크kike‘라고 부르며 폄하하는 데 성공했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아프리카게 미국인을 인간이 아닌 ‘깜둥이nigger‘로 규정했으며, 동성애 혐오자들은 레즈비언과 게이에게서 인간성을 벗겨내는 용어를 거의 무제한으로 가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폄하되는 집단에 속하는 개인의 인간성을 일괄적으로 비가시화하면 그들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가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 P158

남자들은 포르노 이미지가 뇌에서도 ‘판타지‘라고 표시된 구역에 갇혀 있으며 현실 세계로 새어 나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나, 나는 남자친구가 점점 더 포르노 섹스를 요구한다는 여자 학생들의 사연을 지겹도록 듣는다. 그것이 얼굴 사정이 되었든, 항문성교가 되었든, 이 남자들은 현실 세계에서 포르노를 해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남학생의 경우, 처음에는 그 두 세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산업이 생생한 포르노 이미지가 실제로 자신의 사적 관계에 스며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점점 더 많이 들린다. - P162

이들 중 많은 팬들이 느끼는 쾌락은 여자가 자기 입에 뭘 넣어야 하는지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얼굴에 잠깐 스치는 날것의 불신과 역겨움, 혐오감을 보는 행위에서 오는 듯하다. 이것은 누군가가 완전히 비인간화되고 굴욕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얻는 쾌락이다. - P165

아이러니하게도 "포르노는 판타지"라고 주장하는 측이 놓치고 있는 점은, 실은 포르노가 우리의 상상력과 성적인 창조성을 오히려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포르노가 전달하는 이미지가 사고를 마비시킬 정도로 내용이 반복적이고, 정신이 둔해질 만큼 단조롭기 때문이다. - P189

해방을 위해 싸워 온 집단이라면 누구나, 미디어 이론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깨달은 사실, 즉 미디어 이미지가 억압당하는 집단을 체계적으로 비인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안다. 이 이미지는 결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집단에 가해지는 지속적인 억압을 합리화하는 메시지의 더 광범위한 체계 안에 연루되어 있고, 그것이 가진 권력은 대개 태도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묵인하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정상화하는 데서 나온다. - P194

남자가 처음 포르노를 접할 때쯤이면 대부분은 우리 문화의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이미 내재화한 상태고, 포르노는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대신 그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각을 굳히고 공고히 한다. 게다가 이는 그들에게 강렬한 성적 쾌락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ㅇ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섹시하고 화끈한 것으로 프레이밍하는 행위는 포르노에, 다른 형식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여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자격을 부여한다. - P194

텔레비전에서 예컨대 흑인이나 유대인을 계속해서 인종차별적, 혹은 반유대주의적으로 그리는 드라마나 시트콤이 쏟아져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백인 남자가 이들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얼굴을 가격하고, 목을 조르며 그들의 입에 이물질을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추측건대 격한 항의에 부딪힐 것이고, 그러한 이미지는 단지 판타지라는 이유로 옹호받지 못할 것이며 보이는 그대로 간주될 것이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가하는 가혹행위다. 포르노는 폭력에 성적인 외피를 덧씌우며 그것을 비가시화하며, 결과적으로 그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은 반폭력주의자가 아니라 반섹스주의자로 규정된다. - P195

내가 남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자기가 성적으로 실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얘기다. 그들은 대학에 가면 섹스 기회를 쉽게 얻을 거라 기대했고, 당연히 다른 남자들은 "하고 다닐"거라 생각하며, 결국 자기한테 뭔가 문제가 있거나 혹은 자기가 한 번 해 보려고 시도하는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들은 자기가 충분히 잘 생기지 않아서, 말주변이 없어서, 혹은 남자답지 않아서 점수를 따지 못하는 걸까 봐 걱정하며, 포르노의 세계관이 여성을 언제나 접근 가능한 존재로 그리는 탓에 거절에도 몹시 당황한다. 그들은 대개 여자와 자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에 깊은 수치심을 표출하며, 이 수치심은 ‘야동녀‘와는 다르게 ‘싫어‘라는 어휘를 가진 여자 학우들을 향한 분노로 바뀐다. - P196

음모는 분위기를 깨는 요소가 되었고, 특히 오늘날에는 여자 청년이 많이들 음모를 제거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며, 그렇기에 음모를 ‘관리‘하지 않은 여자는 매력이 떨어진다. 조시는 지난 수년간 자신이 선호하는 여자 신체 유형이 점점 포르노 배우와 닮아가고 있다며, "제모하고 오일을 바른 탄탄한 몸"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여자친구의 몸이 그런 몸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으냐고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기 관리를 안 한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좀 더 자신을 가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현실 세계의 여자들이 포르노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도 불만의 원인 중의 하나다. 거친 섹스를 해달라며 애원하지도 않고, 만질 때마다 오르가슴을 느끼듯 반응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 P200

여태껏 강연하면서, 발표가 끝난 후 내게 찾아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기가 어린 시절 당했던 강간 장면이 찍힌 사진이 분명 화면에 뜰 거라 생각했다고 말한 여자가 최소 스무 명은 있었다. 이 불안감에서 이들이 겪은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가 드러난다. 나는 강연에서 아동 포르노 사진을 보여주지도 않을뿐더러,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수백만 장의 사진 중에서 특정 사진을 고를 확률은 극히 낮다. 하지만 확률의 법칙은 트라우마를 겪는 개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이들은 자기를 강간한 사람이 전능하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찍힌 사진이 의심의 여지없이 반드시 수면 위로 떠 오를 거라고 확신한다. - P207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는 포르노를 여성,아동, 일부 남성을 대상으로 나쁘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들었다. 나는 포르노를 본 남자에게 삶을 파괴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들 생존자에게 있어 포르노는 판타지가 아니라 악몽 같은 현실이다. - P208

포느로를 이용하는 남자들이 모두 이러한 강간 신화를 통째로 삼킨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식의 주장은 이용자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며, 포르노의 영향에 관한 논의를 단 하나의 영향-강간-으로 축소하게 될 것이다.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그러한 신화가 홍보하는 문화가 수많은 방식으로 남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일부는 강간을 저지르겠지만, 더 많은 이들이 파트너에게 섹스 혹은 특정 성행위를 해 달라고 애원하고, 조르고, 강요할 것이며,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다른 인간 존재와의 섹스 그 자체에 흥미를 잃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자를 이용하고 다 끝나면 그를 무시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은 파트너의 외모나 성 기능을 평가할 것이고, 많은 이들이 여자를 일차원적인 섹스 대상이자 남자만큼 존중할 필요도, 존엄하지도 않은 존재로 볼 것이며, 이는 침실 안이든 밖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 P210

그 영향이 무엇이든, 남자가 포르노 이미지를 접한 이상, 다시 멀어진다 한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 P210

남자(그리고 여자)대다수는 성 불평등이 자연스러우며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현실인 것처럼 느낄 정도로지배적인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매일 주입당하며 살아간다. 포르노는 이 이데올로기를 최대한으로 뽑아 먹을 뿐 아니라, 그것을 포장해서 고도로 성애화한 형태로 남자에게 돌려준다. 그것에 대항하는 반이데올로기가 부재한 상태에서, 이같이 달콤한 성차별 이데올로기는 지배적 사고방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포르노는 사회화의 유일한 행위자는 결코 아니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와 우리 신체에 미치는 영향 덕분에 강력한 설득의 도구가 되었으며, 남자가 여자를 동등한 존재로, 자기가 당연히 갖는 인권을 마찬가지로 당연히 가지는 존재로 보는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 - P211

현실에서 여자들은 포르노를 보지 않고도 그것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데, 오늘날 포르노의 이미지, 재현, 메시지가 대중문화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자들은 여전히 하드코어 포르노의 주요 소비자층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게 모르게 포르노의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하고 있으며, 대개 이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하면 섹시하고, 도발적이고, 쿨하게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지(또 가능하다면 붙잡아 둘 수 있는지)에 관한 충고의 모습으로 위장한다. 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음부 왁싱이다. 음부 왁싱은 포르노에서 처음 보급되어 『코스모폴리탄』같은 여성 매체로 흘러 들어갔는데, 이 잡지는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려면 해야 할 ‘자기 관리‘방법에 관한 기사와 팁을 정기적으로 싣는다. - P217

거의 추종자에 가까운 팬층을 형성하며 대성공을 거둔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도 왁싱을 소재로 삼았다. 예컨대 「섹스 앤 더 시티」영화에서, 미란다는 음부를 제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맨사에게 "막 나간다"는 꾸지람을 듣는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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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4-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내가 원하는 일이야˝의 범주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확장될 수 있을지 생각하면 할수록 더 절망하게 됩니다. 남자친구가 샵에 다녀오라고, 자꾸 다녀오라고, 그게 좋겠다고 할 때 좋아하는 사람의 그 ‘권유‘를 계속해서 거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구요.
이 모든 일이 가장 개인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많은 여성들이 ‘똑같은‘ 강요 속에서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정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뷰를 읽는 것 마저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힘드네요.
다락방님도 그러셨을 것 같아요. 쉽지 않은 독서였을텐데, 이렇게 기록으로도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읽는 것만으로도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희진쌤이 그러셨죠. 우리, 읽는 이 일을 통해 연대합시다, 다락방님!!!

포르노에 반대합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포르노에 반대합니다.
포르노 속 학대당하는 여성의 소비에 찬성하는 모든 의견에 반대합니다.

다락방 2020-04-10 12: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단발머리님.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아니‘라고 말하는 게 결코 쉽지 않죠. 결국 그렇게 서서히 어느 정도까지 원하는 바대로 해주게 되는것 같고, 결국 그래서 지금은 브라질리언 왁싱샵이 따로 생긴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식으로 대부분의 것들이 서서히 침투하게 된거겠죠.
최근에 반포르노 삼종셋트 읽으면서 앞으로도 계속 읽자 다짐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렇게 읽고 쓰는 일이 어떤 효용을 가져올까 좀 회의가 들기도 했거든요. 그렇지만 이렇게 읽고 글로 쓰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미칠거다, 라는 생각이 들면 또 게을리 할 수 없기도 해요. 아무튼 계속 하겠습니다.

단발머리님 이 책 사셨다니, 어휴... 힘든 길 가시겠습니다. 영상 묘사 하는 거 읽으면 너무 고통스러워요. 성인 여성들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미성년 그루밍 성폭력은 울것 같더라고요. 이런 것들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읽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 때문에 펑펑 울것 같았는데 말예요. ㅠㅠ

포르노에 반대합니다. 반대합시다.

잠자냥 2020-04-1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 개 드리고 싶은 리뷰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포르노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반포르노주의자들이 많아지는 방법밖에는 없군요. :(
야동이라고 부르면서 별것 아닌 것처럼 취급하던 문화도 정말 잘못 되었고, 여자들도 포르노 보는 남친(또는 자신)에 대해 관대한 자신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고‘를 갖고 있는 개방적인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포르노는 혐오표현이라는 말, 여성, 인종 아동에 대한 혐오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해요.

다락방 2020-04-10 12:52   좋아요 0 | URL
반포르노주의자들이 많아지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지만, 그 방법은 너무 느릴 것 같아요, 잠자냥 님. 그래서 답답합니다. 포르노를 전파하고자 하는, 돈욕심에 눈이 먼 제작자들이 활개를 치는데, 과연 개인이 반포르노주의자가 되는것이 어느 속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맞아요, 잠자냥 님. 야동이라고 부르면서 별 거 아닌 것처럼 취급하던 문화가 결국 이렇게 만든게 아닌가 싶어요. ‘주체적 섹시‘가 정말로 ‘주체적‘인것인지에 대해서, 여성들도 스스로 끊임없이 물어보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포르노문화가 없었다면, 사방천지에 포르노가 침투해있는 게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주체적으로 ‘섹시하고‘ 싶었을까요?

책 뒷표지에 영국 페미니스트 저술가 ‘줄리 빈델‘의 한 줄이 실려있거든요.

<단 한 번이라도 포르노가 혐오 표현이 아닌가 의심해 본 적이 있다면 『포르노랜드』를 반드시 읽어볼 것.>

이라고요. 저도 보면서 확 오더라고요. 포르노는 혐오 표현이라는 말, 깊이 공감했어요.

(그리고, 별 다섯개 접수합니다!)

건조기후 2020-04-1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본 트윗이 생각나서 보고 그대로 옮겨봐요. 물론 다락방님도 보셨을 거에요...

진짜 나라 꼬라지하고는. 미성년자 애들은 성착취물 만들고, 젊은 성인 남성들은 그거 사고, 그러다 걸리면 국가기관 전반에 걸쳐 온갖 결정권 다 쥐고 있는 늙은 남성들이 ‘남자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부둥부둥 무마하고 용서하고 기회주고...

진실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 줄을 전혀 모르는 거죠, 과거에도 지금도. 얼마나 뿌리가 깊고 튼튼한지... 종종 암담해요.
단발머리님 말씀처럼, 이렇게 리뷰만 보아도 힘든데 책을 끝까지 읽어내시고 기록으로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성주의 책읽기 꾸준히 해오시고 이렇게 훌륭한 리뷰를 쓰고 계시다니 너무나도 리스펙이에요, 다락방님.
함께 하기로 말만 얹어놓고 바로 하차해버렸던 저도 -_ㅜ 부지런히 곁눈질이라도 해가면서 열심히 공부할게요.

별 다섯 개 받으셨으니 이번엔 하트 백만 개 받으세요! :)

다락방 2020-04-12 11:28   좋아요 0 | URL
이 리뷰에 대해서는 다들 긴 댓글을 달아주시네요. 아마도 그간 포르노에 대해 나름 생각했던 것들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책도 그렇고 다른 책에서도 그렇지만 ‘외모 권력‘에 대해서도 언급하거든요. 그러니까, ‘여성의‘ 외모권력이요. 그런 포르노배우 같은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가 마치 여자들의 권력인듯 보이지만, 그것은 전혀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잠시 그 앞에서 숭배하는듯한 모양새를 보일 수는 있으나, 자기랑 자주지 않거나 사귀어주지 않으면 금세 강간해도 좋을 성적대상이 되어버리니까요. 애초에 네 미모가 너무 아름답다 하는 것은 성적대상으로서 최고의 가치다,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것이고요.

사람마다 끈기를 보이는 방면이 다르잖아요. 저의 경우만해도 모든걸 이렇게 계속하진 못하고요. 방통대는 반학기 다니다 말았고, 외국어 공부는 하겠다고 교재만 수두룩하게 사놓고 펼쳐 보지도 않았는걸요. 그런데 여성학에 대해서라면 제가 하면 할수록 갈증을 느껴요. 여성학에 대해서라면 흡수도 빨라지는 것 같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계속 해보고 싶어요. 포르노에 대한 책도 더 읽어보려고 장바구니에 더 담아뒀어요.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것이니만큼 모두가 저처럼 할 순 없겠죠. 그렇지만 단발머리님이 말씀하셨듯이, 이렇게 누군가가 읽었던 기록이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보다는 더 나으니까요.


건조기후님의 하트 백만개도 접수합니다. 후훗.
세상이 좀 나아지면 제육볶음 먹으러 가요!
 
증언혐오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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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눈, 두 종류의 전략이 있다. 하나는 권력자, 착취자, 가해자, 남성의 눈이다. 짧게 표현하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자연 사건을 희화화하고 즐기면서 진실을 미궁 속으로 빠뜨리는 마약에 취한 눈, 초점 잃은 눈이다. 눈의 초점이 불분명할수록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그 성폭력 체제는 흐릿해진다. 그러면 이 체제의 수혜자들은 별장과 클럽에서의 성폭력을 지속하면서 축적과 치부 그리고 명령의 오르가슴을 반복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다중, 저항자, 피해자, 여성의 눈이다. 짧게 표현하면 생명의 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발 방지를 열망하는 눈이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실사구시적으로 응시하는 부릅뜬 눈, 두려움에 떨면서도 봐야 할 것을 놓치지 않는 다초점의 눈이다. 초점이 분명해져야만 어디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공격의 화살이 날아오고 어디에 자신을 빠뜨릴 함정이 있으며 어디로 생존의 출구가 열려있는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P.36)




최근에는 혐오란 단어를 어디서(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상대가 혐오자가 되는 경향이 있고, 그게 싫어서 혐오란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이 책의 소개를 읽다보니 윤지오의 증언에 관한 것이었다. 윤지오와 그녀의 증언에 관한 것이라면 지지하면서도 그 흐름과 자세한 사항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하던 터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으로 알고자 했던건 매우 좋은 선택이었는데, 장자연의 사망부터 지금 현재 인터폴로 윤지오가 수배 내려진 것까지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그 사이사이 일어났던 말과 사건들에 있어서도 그리고 본인의 생각까지 논리적으로 알기 쉽게 써있기 때문이었다. 


저자 '조정환'에 대해서는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데, 시종일관 정확하게 사건의 본질을 궤뚫고 있어서 놀랐다. 그러니까 윤지오의 증언과 그 안에 담겨져있는 뜻을 날카롭게 짚어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그에 따른 여성에 대한 폭력까지도 정확히 인지한 터라 아마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현재의 상황과 문제를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윤지오와 그 증언에 대해서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자라'를 보고 놀란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 것이다. 만약 자라로부터 놀란 경험이 없었다면, 솥뚜껑을 보고 놀랄 까닭이 없다. 경찰과 숱한 언론들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 윤지오를 향해, '놀란게 솥뚜껑 때문이었잖아, 자라가 아니었다고, 거짓말쟁이, 사기꾼!' 이라고 몰고 갔다. 그들은 아주 쉽게 윤지오가 놀란 게 솥뚜껑이었기 때문에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솥뚜껑 보고 놀랐던 까닭이 자라를 보았던 경험 때문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으려'하는 걸까.



저자 조정환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 이유는 그 전에 자라를 보았기 때문을 인지하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매우 상세히 기술해주고 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거나 혹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내가 아는 모든 남자사람들보다도, 더, 가부장제와 권력 그리고 성폭력에 대한 것을 가장 잘 인지하는 저자임에는 틀림없다.


지독하게 진부한 말이라 나는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박훈이 윤지오가 있지도 않은 신변위협을 과장한다면서 신변위협의 실재성을 부정할 때,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 뚜렷이 나타난다. 신변위협이란 긴장, 싫음, 떨림, 두려움, 공포 등으로 나타나는 고통의 감각이다. 이것은 결코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의를 기울임을 통해 실천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훈은 신변위협을 알고자 하는 방향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고자 하는 방향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신변위협을 모르고자 하는 마음이 표현되는 방식이 ‘신변위협은 없었다‘라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 P22

윤지오가 개인 방송(인스타라이브)에서 협찬 화장품 파는 것에 경악하신다면 JTBC 방송에서 자동차를 파는 것을 보실 때는 어떤 느낌이신지요? - P66

나는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이 어떤 실효적(즉 돈을 돌려받기 위한) 사법행위라기보다는 수개월간 지속한 윤지오 죽이기의 일환으로서 윤지오의 이미지를 회복 불가능할 만큼 훼손하기 위한 정치재판으로 준비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장자연에 대한 가해자들의 입장에서는 윤지오의 향우 있을 수 있는 증언 투쟁을 예방하기 위해 이런 위협적 소송이 필요할 것이며, 윤지오에 대한 가해자들에게는 윤지오에 의한 사법 투쟁을 미연에 저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런 소송일 것이다. 이 소송이 후원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 비후원자인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속해서 촉구되고 홍보된 인위적 소송이라는 점도 이런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 P76

이 소송 준비를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싶다.
증언자는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희생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걸면서 할 때만 그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가 개인으로건 단체로서건 후원을 받으면 그의 증언이 진실성을 잃는가?
증언자가 놀고자 하는 욕망, 성적 욕망, 사치와 쾌락에 대한 추구를 갖지 않을 때만, 즉 성자聖子이고 성녀聖女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는 증언 이외의 것에서도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일절 거짓을 말하지 않을 때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의 삶은 모든 부면에서 일관되고 통일되어 있어야 하며 어떤 부분에 카메라를 갖다 대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일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 P76

권력과 제도언론이 효과적인 무기로 훔쳐 사용한 것이 바로 윤지오의 저 "영리하게"라는 말의 왜곡이었다. 제도언론에 앞서 김수민이 그것을 계산적 "영악함"으로 굴절시켰고 윤지오의 증언 실천을 "가식"의 프레임 속에 집어넣었다. 그 프레임은 "네가 네 욕심 없이 오직 장자연만을 위해서 증언한다고 모든 걸 걸고 말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나타났다. 순수주의, 순결주의를 척도로 내세우고 ‘당신은 순수하지 못하다, 순결하지 못하다‘고 선동하는 순수주의적 혐오 프레임이었다. ‘증언자는 순결해야 한다. 증언자의 실천은 희생과 헌신이어야 한다. 순수한 자만이 증언할 수 있다‘는 프레임.


- P109

이 순수주의=순결주의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 여성에게,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씌어온 굴레이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비판하고 그것에 대항해온 운동들이 스스로 내면화해 온 거울 이미지다. 국민이 영웅을 기대하고 민중이 지도자를 기대할 때 그 국민과 민중은 그 영웅과 지도자에게서 순수를 기대하는 만큼 오히려 자기 자신이 순수하고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백성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근대의 과정이다. 탈근대화의 과정에서 국민/민중과는 다른 다중이 출현하지만, 그것은 민중의 자기 전화이며 그 마음 깊은 곳에 근대적 백성의 습성은 유전자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순수/순결주의의 정동은 영리함을 견디지 못한다 - P110

착취, 수탈, 국가권력 남용 등 우리 사회의 모순과 권력 집단의 주요 문제를 고발하는 이 증언 내용 중 아직 어느 것도 증거에 의해 반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법부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거나 여러 증언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새로운 증거에 의해 보강되어 왔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폭압이,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혼탁하게 하는 센세이셔널한 매스미디어의 선정적 보도들이 증언이 던지는 진실의 메시지를 시민사회 관심사의 후경後景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폭압자들의 목적이 윤지오의 진술을 무력화하고 그 증언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권력 질서를 옹호하며 훼손된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 증언들은 어떻게 판명되었고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가? - P184

2019년 6월 검찰은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를 뇌물 혐의로 기소했다. 오랫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학의의 성범죄 혐의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었다. 어떤 마술로 검찰이 그 들끓던 여론을 잠재운 것일까? 김학의에 대한 특수강간 혐의를 "무죄"처분하기 위해 검찰이 사용한 핵심 기술이 바로 "성폭력"(성접대 강요, 성상납 강요)에서 강요를 제거하여 성접대, 성상납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그것을 "뇌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 P243

2019년 3월 4일 실명 공개와 그것에 대한 일차원적 대응에서 비롯된 이 지각적 착시로 인해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의 영상자료 등을 보면 윤지오 씨가 대외활동을 공개적으로 한 사례들이 많은데, 왜 숨어 살았다고 말했는지,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지?" 따져 묻거나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나며 숨어 살았던 것이 가명의 나 혹은 필명의 나가 아닌 ‘실명의 나‘였듯이, 윤지오에게도 숨어 살았던 것은 ‘증언자 윤지오‘이지 본명의 윤지오, 가명의 윤지오, 예명의 윤지오, 이름 없이 기호화된 윤지오가 아니었다. 본명, 가명, 예명, 기호의 윤지오는 ‘증언자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증언자가 된 이후 다양한 위험들과 위협들 때문에 숨직이며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 다양한 이름의 윤지오들의 존재야말로 윤지오가 "숨어 살았음"을 뚜렷이 증명하는 지표가 아닌가? - P274

지각적 착시로 인해 윤지오가 숨어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2019년 3월 4일에 있었던 이름 공개와 얼굴 공개의 사건을 보고도 마치 수십 년 전부터 자신이 윤 씨, 김지연 씨, 이순자 씨, A 씨, Y 씨가 윤지오 이고 윤지오가 윤애영이라는 것을, 또 그들이 모두 증언자 윤지오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착각한다. 착각은 착각을 부르고 기만은 기만 속에 녹아들며 환상은 환상을 연출한다.
바로 이 환상의 극장을 파고든 것이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가해자들이다. 이들은 ‘윤지오는 숨어 살지 않았다‘는 환상을 근거로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뒤튼다. 또 오래전부터 증언자 윤지오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느끼는 지각적 환상을 근거로 윤지오의 이름 공개와 얼굴 공개를 사기를 위한 포석으로 조작한다. - P277

자신의 검은 실체가 증언을 통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윤지오 2019년 3월 4일에 처음으로 그간 숨어 살았던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건너뛰면서 ‘윤지오가 과거에 숨어 살지 않았다‘를 부동의 사실처럼 만들어 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래야만 3월 4일의 이름 공개와 어굴 공개를 미래의 사기를 위한 공개-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주체적 결단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거짓말과 미래를 위한 사기를 영리하게 편집하는 범죄 행위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교활한 작태인가? 이 얼마나 간악한 집단범죄인가? 이 얼마나 끈질긴 n차 가해인가? 이 끈질김을 통해 우리는, 윤지오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바로 그 가부장제 권력 집단임을 유추할 수 있다. - P278

장자연은 누가 봐도 증언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도록 만드는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취재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동료 배우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오락거리로 가십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검증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이상異常 경향을 보인다. 기자들의 태도가 이런 관심사에 의해 지배되는 한에서 장자연의 동료 배우로서 윤지오가 기자들의 취재에 응했을 때, 그에게는 ‘가해권력에 대한 고발자=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피해자 장자연의 피해자다움 유무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윤지오는 이러한 역할을 떠맡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기자를 피해)"숨어 살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고발=증언‘이라는 공세적 태도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 장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 배우였던 자신에게 권력이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숨어 살기)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 P282

시민 사회가 약할 때 가장 먼저 혐오 행동에 나선 것은 경찰과 군대였다. 국가기구가 혐오 행동의 선봉대였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두터워진 후 혐오 행동의 선봉대는 국가기구가 아니다. 시민사회 속에서 일상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성폭력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 대응에는 "아내들"이 앞장선다. 아내는 ‘안 것‘을 의미하는 ‘안 해‘에서 나온 말이다. 경상도 말 ‘니 해라‘가 ‘너의 것으로 하라‘를 의미하듯이, ‘해‘는 ‘물건‘, ‘소유물‘을 의미한다. 그것은 남성 가부장의 시선에서 파악된 여성,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이 이 ‘아내‘관념을 내면화할 때, 이 여성은 가부장주의의 파수꾼으로 기능하게 된다. 아내 의식이 페미니즘의 옷을 걸칠 때도 있다. 그러한 유사 페미니즘은 다른 모든 여성을 위험한 여자, 이상한 여자로 보는 보편적 의심증과 결합된다. - P308

아내-페미니즘은 여성의 권익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 노력은 꽃뱀으로 의심되는 모든 여자로부터 자신의 아내 지위를 지키고자 하는 방어적 투쟁으로 된다. 그 결과 남성 권력자들이 자행하는 성폭력은 위험한 여자들의 꼬임(사기)으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겪는 피해로 인식된다. 아내-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사회를 내전의 무대로 만들면서, 자신들이 이상한 여자들이라고 보는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시민사회 내 투쟁을 지켜보면서 성폭력 체제와 가부장주의는 아마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서술하고 실비아 페데리치가 『캘리번과 마녀』에서 서술한 마녀사냥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국가기구와 남성 권력자만이 아니라 아내주의-여성, 아내-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도 생생하게 되풀이되는 잔혹사이다. - P309

신변위협의 문제에서 현실성은 행사의 차원이며 잠재성은 존재의 차원이다. 혼자 밤길을 걷는 여성에게 남성으로부터의 신변위협이 행사되지 않을 때도 여성이 신변위협을 느끼는 것은 신변위협이 잠재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신변위협이 행사되고 있을 때 신변위협이 실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변위협이 행사되지 않고 있음이 현실일 때조차 신변위협은 잠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윤지오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이 경험한 현실적 신변위협과 잠재적 신변위협에 대해 여러 차례 진술해 왔다. - P322

경찰 응답은 언론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입증한다. 이것들은 현장조사와 탐문, 그리고 과학수사 후에 나온 것으로, 윤지오가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고 윤지오가 제기한 문제점들이 그 상황에서 일상적 지각과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의심할 만한 것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하물며 윤지오가 "보복이 우려되는 중요범죄 신고자"였고 "국민적 공분이 큰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음을 고려하면 반드시 의심될 만한 것이 윤지오에 의해 의심된 것임을 보여준다. - P329

경찰의 실제 발표문이었던 "신변위협 시도로 볼 범죄혐의점은 파악되지 않았다"는 신변위협이 없었다"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신변위협의 행사를 부정하는 것이며 후자는 신변위협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북한이 남한을 위협하는 시도(침범 행동)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북한의 위협은 상존한다고 말한다. 칼을 든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 위협 시도(범죄 행동)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신변위협이 있다고 느낀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어두운 밤거리에서 지나가는 남성이 성폭행이나 성추행과 같은 신변위협 시도(범죄 행동)를 하지 않을 때도 여성은 신변위협을 느껴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조선일보』, 『뉴시스』, 『머니투데이』는, 변호사 박훈이 고발장에서 그랬던 것과 유사하게, "신변위협 시도로 볼 범죄혐의점은 파악되지 않았다"는 경찰청의 발표를 "신변위혐이 없었다"는 말로 왜곡한다. - P329

대한민국 경찰은, 증언자를 보호하려는 국민, 국민을 대의하는 대통령, 증언자를 변호하는 변호사, 그리고 증언자 자신등에 떠밀려 마지못해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에 나섰으나 증언자의 신변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타율적이고 무책임한 기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만 옳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해권력자들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그들의 잘못을 은폐하고 먼저 나서서 보호하는 식으로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자발적이고 기민한 기관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국민의 생명보호 의무에 속하는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를, 시민사회에 "진실을 밝힐 힘"을 증여하는 증언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답례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은 윤지오의 신변보호 요청을 증언자를 자처하는 윤지오가 과장으로 꾸며낸 일대 소동처럼 발표함으로써 증인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 - P400

윤지오는 2009년에 사법경찰을, 2018년에 검찰을 경험한 후에 2019년에는 행정기관과 입법기관을 경험했다. 언론기관과의 마주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누누이 이야기했으므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2009년 사건 직후부터 10년간 지속적으로 윤지오를 추적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국가기관과 친밀한 접촉이 있었던 셈이다. 2019년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청와대가 검찰의 과거사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엄정한 조사를 요구하면서도 결코 엄정할 수 없는 검찰 자신에게 과거사 조사를 맡기고, 국회의원이 표면적으로는 증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동행을 약속하면서도 증언자가 여론의 공격을 받을 때는 연락을 끊고 침묵하며, 행정경찰이 증인의 신변보호를 책임지겠다고 하고서도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증인에게 전가한다는 것, 즉 국가기관들의 보편적 위선이었다. - P403

국가의 위선과 이중성 때문에 윤지오는 10년 만에 다시 사법경찰과 접속하게 된다. 이번에는 참고인으로서가 아니라 피의자로서다. "10년 동안 일관되게 진술한 유일한 증인으로 걸어온 지난날이 드디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은 절망으로 곤두박질쳤다. "진실이 침몰하지 않도록 여태껏 그래왔듯 성실하게 진실만을 증언"하려고 했지만, 변호사·작가·기자·유튜버·인스타그래머 등의 고소·고발자들은 윤지오의 새로운 "증언은 고인을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한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제소의 릴레이를 전개했다. 일찍이 "조선일보 방사장과 그 아들"이 누구인지 안개 속으로 감추어 최초 증언자 장자연의 증언조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허위 문건으로 만들고자 했던 대한민국 사법경찰은 이제 윤지오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함으로써 후속 증언자인 윤지오의 증언도 허위라는 고소·고발자들의 제소에 힘을 실어주고 장자연 사건 전체를 미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것이 나라인가? - P404

경찰의 답변과 이호영 변호사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윤지오 증언자가 일반적인 적색수배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이 "특별히"윤지오 증언자를 적색수배 요청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요청에 따르는 판단은 윤지오 증언자를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중요사범"이라고 본것이다. 나는 여기서 경찰이 오히려 "중대한"범주 혼동, 범주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증언과 범죄를 혼동한 것이다.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이 사회적 파장이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의 재계·언론계·연예계·정치계·법조계를 망라한 모든 권력층의 부패와 성폭력 관행에 대한 기록인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 대한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이 가지고 온 사회적 파장은 분명히 컸고 증언이 지목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 P455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증언이 지목하는 가해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는 이 "큰 사회적 파장"이나 "높은 수사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증언자의 증언으로 기소된 조O천조차 1심에서는 무죄선고되었다. 이러한 사법현실의 불합리함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은 돌연 여기서 "수사 요구"를 가해 혐의자가 아니라 증언자에게로 돌리는 불합리함을 계속한다. 윤지오의 "증언"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증언이 지목하는 "가해 혐의자"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았다"는 사실을, 경찰은 윤지오의 "범죄"가 "사회적 파장이 크고""윤지오"의 범죄혐의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다"는 생각으로 바꿔치기 한다. 증언과 범죄, 증언자와 가해자를 순식간에 바꿔치기하는 이 마술을 통해 윤지오에 대해 내려진 적색수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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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3-30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윤지오씨는 처음 증언하러 나섰을 때 몇 번 인터뷰를 보았는데 좀 시끄러지고 나서는 저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거 같아요. 인용해주신 거 읽어보니까 ‘피해자다움’을 미끼로 윤지오씨의 입을 막으러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20-03-30 17:03   좋아요 3 | URL
내용적으로는 참 답답한데요 작가가 되게 글을 잘 썼더라고요. 날카롭고 정확한 시선을 가지고 피해자의 편에서 얘기를 하려고 한달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방향이 잘 잡히고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자 조정환이 글쎄, 실비아 페데리치랑 마리아 미즈의 책을 낸 출판사의 대표더라고요?! 남자이면서 가부장제로 인한 성폭력에 대한걸 인지할 수 있다니 좀 놀랐어요. 단발머리님, 꼭 읽어보세요. 저에게는 정말 좋은 독서였어요.

단발머리 2020-03-30 17:07   좋아요 1 | URL
게다가 저자가 용감하기까지 하네요. 윤지오를 미워하는 세력의 거대함을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다락방 2020-03-30 17:09   좋아요 3 | URL
네, 보통의 남자들이 선택하지 않는 걸 선택했죠. 윤지오의 말을 듣는 것 외에도 이렇게 책으로 써내는거요. 이 책 읽으면서 윤지오도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조정환도 참 명민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유부만두 2020-03-31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서민 교수가 윤지오 씨 사태(?)에 대해 책 내지 않았었나요? 그건 어떤 시각이었을까 궁금하네요.
그런데 게을러서, 더하기 속터지기 싫어서 찾아읽게 되진 않아요.
요샌 뉴스 보기가 너무 버거워요. 너무 화가 나서 현실의 가족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게 되고 매일 힘들어요.

다락방 2020-03-31 14:17   좋아요 2 | URL
읽어보진 않았지만 서민 교수님은 윤지오가 사기꾼이라는 주장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읽은 책에서도 서민 교수님이 언급되면서 비판하고 있고요.
조정환의 책은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희망적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에요.

개학 미뤄져서 더 힘드실텐데, 기운내세요 유부만두님 ㅠㅠ
전 마스크 쓰고 오랜만에 스벅가서 화이트초코모카 사가지고 왔어요. 달달하니 맛있네요..

공쟝쟝 2020-04-01 07: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자에 대한 정보가 눈에 들어와요. 오홍!! 갈무리 출판사 좋은 책 많이 낸다고 생각중이었는데 ㅡ

다락방 2020-04-01 09:09   좋아요 3 | URL
최근에 본 정말이지 드문 남자사람이었어요. 뭐 직접적으로 아는 남자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후훗. 앞으로도 기대가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