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좋다는 평이 자자해 읽기 시작했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좋지는 않았다. 언제부턴가 젊은 작가들이 '여성 서사', '사이다 서사'에 갇힌것 같았는데,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여성 서사를 써야해, 사이다 서사를 써야해, 라는 생각이 작가들에게 압박으로 다가가고 있는건 아닐까. 여성서사는 더 나와야 하고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읽을 것이지만, 나는 이 작품집의 여성작가들이 굳이 여성서사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저 쓰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여성 서사에 다름 아닐테니까. 기성 남자작가들의 글과는 완전히 다른 글을 써낼테니까. 그러니 좀 더 자유로워져도 좋을 것 같다고 나는 바랐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어디에도 갇히지 말고 하기를 바라는 마음. 문장력도 세상을 보는 섬세한 시선도 이미 탁월한 작가들이니 좀 더 은유해도 괜찮지 않을까.


작품집에 실린 작가들중 최은영을 가장 선호하긴 했는데 굳이 이 작품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을 꼽자면 장희원과 김초엽이었고 가장 별로인 걸 꼽자면 김봉곤 이었다. 김봉곤의 명성을 익히 들어 기존에도 《여름 스피드》라는 단편집을 읽긴 했었는데, 그 때도 느꼈던 감정을 이 작품집에서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김봉곤 글의 어떤 점이 좋다는걸까? 물음표 천 개 되는 순간이었다.




*리뷰의 마땅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책 제목 붙였다.



‘글 쓰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이어서 좋다‘라는 말을 종종 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내가 두려움에 맞서도록 도와준 사람들, 나의 글을 끝까지 믿어준 사람들,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지지해준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계속 글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고맙다. 나는 나의 행복만큼 내 친구들의 행복을 원한다. 우리가 계속 밝은 곳으로 가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기를, 자신을 내팽개치치 않기를 바란다. (최은영, 작가노트)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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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3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3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3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3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3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3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3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5-1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김봉곤 두 번째 소설집 매우 애정하며 읽고 있습니다. 취향의 차이란...

다락방 2020-05-13 13:45   좋아요 1 | URL
저는 김봉곤은 이제 더이상 안읽으려고요. 저는 그의 소설에서 소설의 의미를 1도 찾을 수가 없어요. -.-

hellas 2020-05-1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 저도 그분 이미 접음.

다락방 2020-05-13 22:33   좋아요 0 | URL
어떠한 이유인지 출판계에서 과하게 밀어주는 것 같은 느낌인데, 저로서는 이제 안읽어도 좋을 작가인 것입니다. 킁.

hellas 2020-05-13 23:41   좋아요 0 | URL
여운도 의미도 없어서 오독인가 싶어 다시 읽어봤잖아요 ㅡㅡ

다락방 2020-05-14 07:41   좋아요 0 | URL
다시 읽어보시다니 ㅠㅠ 안타깝네요 ㅠㅠㅠ

2020-05-20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0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5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기고부터 지금까지 소설을 제외하고도 80여권 정도의 페미니즘 서적을 읽어왔다. 어렵지 않게 에세이부터 시작해 소위 벽돌책이라 불리우는 책들까지. 그렇게 읽고나니 가끔 어떤 책들에 대해서는 '이건 내가 읽지 않아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됐는데,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도 그중 하나였다. 사둔지는 오래였지만 이제는 '이런 기본적인 건 읽지 않아도 될 것같다'는 생각을 한거다. 그러나 나는 읽었고, 읽으면서는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본 최고의 여성학자이며 사회학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우에노 지즈코는 여성혐오에 대해서 아주 날카롭게 파악하고 분석한 것을 이 책에 알기 쉽게 썼기 때문이다. 우에노 지즈코의 책을 전에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던바, 우에노 지즈코는 기득권을 가진 남성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비판하는데도 전혀 망설임이 없다. 이미 유명한 책(혹은 작품)을 보란듯이 비판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고, 사회현상들 이면에 숨겨진 여성혐오를 보란듯이 까발리는 데에는 속이 다 시원해졌다.


날카로운 분석에도 불구하고 포르노에 대해서는 규제하지 말자고 하는데에서 좀 놀랐다. 우에노 지즈코는 '상상력을 막아서는 안된다'라고 하는데, 나는 이미 포르노라는 것이 여성과 아이 그리고 인종에 대해서까지 혐오표현이라는 페미니스트들과 생각을 같이하는 바, 거기에 대해서는 우에노 지즈코와 의견을 달리했다. 우에노 지즈코는 상상력을 규제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포르노를 금지하자는 데에는 찬성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아동 포르노도 안되고, 트라우마를 건드려도 안된다는 등의 조건들을 내건다. 나는 거기서 좀 갸웃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저것도 고려해야 해, 라고 한다는 것은 어찌됐든 그것이 어떤 식의 피해를 가져올 것이 있다는 걸 안다는 것일텐데, 그렇다면 '되고' '안되고'의 기준을 대체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우에노 지즈코의 포르노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이 책이 10년전의 책이기도 하고 또 우에노 지즈코가 1948년생인만큼, 현재의 포르노가 어떤 식의 영상을 송출하는지에 대해서는, '게일 다인스'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서둘러 부연해 놓아야 하는 것은, 포르노라고 하는 표상 안이라 할지라도 실재하는 어린이를 모델로 사용한 차일드 포르노는 별도라는 사실이다.

모델의 현실과 모델의 연기 사이의 경계는 대단히 모호하다. 살인 현장을 연기로 표현하는 피해자 모델은 살아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 미디어에 넘쳐나는 살인 신을 단속하라는 미디어 규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그것이 연기자에게 트라우마적인 체험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포르노 모델이 시나리오에 없는 실제 강간을 당하게 된다면 당연히 인권침해로 볼 수 있다. 또한 트라우마적인 포르노를 연기함으로써 받게 되는 영향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p.101)


포르노에 대해 표현의 자유이며 그것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들도 있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나는 그런 쪽이 아니다. 나는 포르노 반대, 성매매에 반대한다.


내가 그것에 대해 우에노 지즈코랑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이 책이 나쁜 것도 결코 아니고 우에노 지즈코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페미니즘, 사실 그보다는 '여성 혐오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아주 날카로운 안내서가 될것이다. 이미 페미니즘 책을 숱하게 읽어온 사람이라도 다시 읽어보기에 좋은 책이고. 여성혐오가 대체 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나는 여자 좋아해, 나는 혐오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어보기에 매우 유용하다. 여자라고 여성혐오를 안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여성혐오를 했던 자신을 파악해야 여성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으니, 역시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호색‘한 남자가 여성을 혐오한다고 하면 모순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misogyny‘라는 연단어는 번역하기가 힘들다. ‘misogyny‘말고 ‘women hating‘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호색한 남자가 ‘women hating‘하다고 하면 더욱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바람둥이‘라 일컬어지는 남자들을 떠올리면 좋다. 그들은 ‘자기것‘으로 만든 여자의 수를 자랑하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여자라면 누구든 상관 않고 발정할 정도로 여체와 여성기, 여성성의 기호나 신체 부위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도록 조건 훈련된 ‘파블로프의 개‘가 바로 자신이란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여성을 ‘여자‘라고 하는 하나의 범주에 일괄 처리하는 그들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 P13

나가이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두 평짜리 방의 장지》(1972)에는 몸을 파는 여성에게 쾌락을 부여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사창가 손님들의 ‘신사적‘ 문화가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은 남성 지배의 궁극적 형태를 언어화한 텍스트인 것이다. - P15

남자들 마음 속에는 ‘여자 없이 어떻게 안 될까‘ 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때문에 이성애 중심의 근대인에 비해 소년애를 칭송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여성 혐오가 더욱 철저하게 보이는 것이다. 남성성을 미화하는 동성애자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불신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 P16

‘자기 여자‘란 말은 참으로 잘도 만들어낸 표현이다.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자기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남자가 무슨 남자냐‘는 판정 기준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성 멸시-를 ‘여성 혐오‘라고 한다. - P37

사실 인간의 역사에는 남성/여성의 이항뿐만 아니라 ‘제3의 성‘이라 불리는 남성도 여서도 아닌 중간적인 젠더가 언제나 존재했다. 북미 인디언의 베르다쉬berdache, 인도의 히즈라hijra, 통가의 파카레이티fakaleiti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범주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다. 둘째, 여장女裝과 같은 여성성 기호에 의해 ‘여성화‘ 되어 있다. 셋째, 종종 종교상의 의례적 역할뿐만 아니라 (남성을 상대로 한)매춘에도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남성이면서 남성이 되지 못한 남성‘ ‘여성화된 남성‘이며 그들의 존재 의의는 오로지 남성을 위한 ‘성적 객체‘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제3의 성‘을 ‘n개의 성‘에 대한 증거로 언급해 온 이들이 많으나,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중간적 성이라기보다는 성별이원제 하에 존재하는 하위 범주이다. 이들을 ‘제3의 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호칭인 것이다. - P38

누가 생각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안부‘라는 명칭은 참으로 절묘하게도 지은 이름이다. 이 ‘위안‘은 오로지 남성의 ‘위안‘이지 ‘위안부‘에게는 지옥의 노예 노동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자에 의한 증언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위안부‘가 아닙니다"라고 그 호칭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 P53

‘성적 약자론‘은 진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과 연결됨으로써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기타 등등의 약자인 장애인 남성은 성의 자유 시장에서도 성적 약자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러한 성적 약자 장애인의 성욕은 충족될 권리가 있다고 인정되어 장애인의 매춘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마스터베이션 혹은 성행위를 위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등이 논의되고 있다. 여기서도 여성 장애인의 ‘성적 약자‘ 문제는,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는 모르나, 간과되고 있다. - P65

‘전원 결혼 사회‘는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그것은 결혼이 강제였던 사회,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선택지가 없었던 시대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시대 결혼은 여성의 ‘평생 직장‘이라 불렸다.
그에 반해 결혼이 선택지의 하나인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혼인율은 저하하고 이혼율은 상승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여성에게 ‘평생 직장‘이외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원 결혼 사회‘가 종언한 오늘날, 우치다 다츠루나 고야노 돈같은 남성론자가 ‘누구나 결혼 가능했던(해야만 했던)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논하는 것, 야마다 마사히로와 시라가와 도코가 《결혼 활동 시대》(2008)를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P70

K군(무차별 살상 사건의 범인)은 말한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차를 도난당하지 않아도, 야반도주하지 않아도, 휴대전화 의존증에 걸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자 친구‘가 모든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역전 홈런의 히든카드라 생각하는 그의 사고는 완전히 도착하고 있다. 실제 인과관계는 ‘일을 그만두거나, 차를 도난당하거나, 야반도주하거나, 휴대전화 의존증에 걸리는 놈‘한테 여자 친구가 생길 리 없다, 일 테니까.
- P74

그런데 남자에게 있어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학력이 없어도, 직장이 없어도, 수입이 없어도, ‘여자 친구만 있으면‘ 왜 역전타를 날릴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인기‘가 다른 모든 사회적 요인을 웃도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여자 친구만 있으면 ‘나는 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여성에게 선택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2장에서 논한 세지윅의 호모소셜리티 개념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선택되는 것에 의해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남성 집단의 정식 멤버로 인정됨으로써 최초로 남성이 되는 것이며 여자는 그 가입 자격을 위한 조건, 또는 그 멤버십에 사후적으로 딸려 오는 선물 같은 것이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여자를 한 명 소유‘, 즉 문자 그대로 ‘자기 것을 하나 가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 P74

여자가 교태를 부리며 남자를 조종하는 것을 가리켜 일본어로 ‘코털을 읽는다‘고 표현한다. 말 그대로 남자에게 기댄 채 아양을 떨며 대각선 45도 위를 올려다보면 시선 정중앙에 콧구멍이 오게 된다. - P77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하고 바라던 K군의 외침이 진정으로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었다면 그가 선택했어야 하는 행동은 아키하바라에서 타인을 칼로 찌르는 행동이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행동을 근거로 판단했을 때, K군과 J군이 공통적으로 바랐던 것은 자신을 ‘남성으로 만들어주는‘, 독선적인 ‘여성 소유‘욕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 P84

성욕은 개인의 내부에서 완결되는 대뇌 작용의 현상이다. 전미 성교육 정보 협의회(SIECUS)에 의한 정의와 같이 ‘성적 욕망‘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섹슈얼리티‘는 ‘다리 사이between the legs‘가 아니라 ‘귀 사이between the ears‘, 즉 대뇌 안에 있다. 대문에 섹슈얼리티 연구는 사실 하반신 연구가 아니다. 무엇이 성욕의 장치가 되는가는 개인이나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육체가 눈앞에 있지 않으면 성욕을 느낄 수 없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시렞로는 단순히 기호화된 신체의 일부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며 완전히 버추얼한 심벌이나 영상으로도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사물이나 기호에 반응하는 즉물적即物的 경우도 있을 것이고 특정 판타지를 요구하는 복잡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완전히 오리지널할 수는 없으며 문화에 의해 학습된 ‘기성품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자기 식의 버전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 P88

나는 예전에 가부장제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의한 적이 있다.
‘가부장제란 자신의 다리 사이로 낳은 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멸시하도록 기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성을 멸시하는 것은 가능해도 어머니를 멸시하는 것은 남성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기의 ‘근본‘을 더럽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P147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 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 P158

시즈미는 ‘OL위원회‘를 조직하여 젊은 여성의 생생한 목소리를 모아 분석하였는데, 이 책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관한 약 1,500명 여성의 이야기를 모아 분석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약 50퍼센트의 딸들이 아버지를 싫어하고 있다‘고 한다. - P193

가정 내에서 최약자인 딸의 공격은 강자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향하지 않는다. 약자의 공격은 더욱 약하고 저항하지 않는 이, 즉 자신의 신체와 영혼, 섹슈얼리티로 향한다. 아들의 공격성이 단순히 타벌 또는 타자에 대한 상해 행위로 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렇게 자기 신체를 시궁창에 던져 넣듯 남성에게 바치는 성적 일탈(그 안에 매춘 행위도 포함된다)은 섭식 장애나 손목을 긋는 자해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 P227

프라이버시는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바로 강자이다. 이 대답은 성추행과 가정 폭력 피해자, 성적 소수자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페미니즘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이지 개개의 ‘남성 존재‘가 아니다. 만약 ‘남성‘으로 분류되어 있는 자들이, 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정당한 바람이다-여자들이 여성 혐오와 싸워왔듯이 남자들도 자신의 여성 혐오와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302

‘게이와 페미니즘은 같이 투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린 적이 있다. ‘Yes, but 여성 혐오적이지 않은 게이들이라면 가능하다‘. 추가로 ‘섹슈얼리티 여하를 불문하고 여성혐오적이지 않은 남자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을 덧붙여도 좋다. 페미니스트가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 신중하게 ‘여성 혐오아 싸우고 있는 남자들이라면‘이라고. - P303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었다. 남성에게도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여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혐오‘와 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은 더 이상 여성의 역할이 아니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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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5-12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문 중에 마지막 문구 더 콕콕 와박혀요.

다락방 2020-05-12 17:40   좋아요 0 | URL
수연 님 요즘에 아주 날개달고 책 읽으시더라고요. 쉬엄쉬엄 하세요. 지치지 않으려면 꾸준히 오래 천천히 가야지요. 화이팅!

단발머리 2020-05-1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우에노 지즈코라면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의 하루카 요코가 생각나요. 다정한 선생님은 아닌듯 하지만 ㅎㅎㅎㅎ 좋은 선생님 같기는 해요. 우리에게도 이 정도의 여성주의 학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 좀 안타깝기도 해요. 학문적 업적, 성과도 있겠지만 우에노 지즈코가 학계에서 자리잡고 일해왔기 때문에 이정도라도 평가받는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저도 이 책 읽어보려고요^^

다락방 2020-05-12 17:41   좋아요 1 | URL
전 이 책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우에노 지즈코의 책들을 천천히 다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에요. 날카롭고 거친 태도가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ㅋ 이런 분이 일본에 계시다니 한편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이 책 읽어보세요, 단발머리님. 그리고 우리 우에노 지즈코도 열심히 찾아 읽고 아무튼 세상의 페미니즘 책들 다 정복해버립시닷!
 
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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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졸업 파티에 참석했다. 나는 졸업 파티 무대에 오를, 졸업반 학생들로 구성된 소규모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맡았다. 파티에서 우리 밴드는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어머니가 약간 눈물을 보였다. 그날 어머니는 몸이 많이 아팠는데도-당연히-참석해야 한다며 왔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처음으로 나를 지켜볼 수 있어서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집에 있는 나를, 유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서, 어쩌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내 자신감에, 또 그것을 해내고 그 대가로 박수갈채를 받고 있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서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니면 당연한 일이라곤 별로 없는 우리의 삶에서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슬퍼서 그냥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p.287)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민을 가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가급적이면 영어권 국가이면 좋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니 영어권 국가를 가는쪽이 그나마 언어 공부하는데 시간을 덜 들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는 굳이 영어권 국가일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기존에 내가 알던 영어로는 생활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고 어느 나라 어떤 언어가 됐든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가 살기로 한다면 가장 먼저 언어를 배워야 할 것이었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곳의 모든 생활방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마트에 가 계산을 하는 것도, 운전을 하는 것도, 이웃과 어떻게 지내는 게 실례가 아닐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며 내가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든 것들을 다 알아보고 새로 시작해야 할 것이며 살아가는 내내 무엇도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20년간 근무했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갔을 때 얼마나 유의미할까. 나는 그저 어느 나라를 가든 외국인 노동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이면서 언어를 할 줄 모른다면 보수가 낮은 직업을 고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내가 이럴진데 우리 부모님은 어떨까. 나보다 더 늙으신 부모님, 나보다 더 배움이 짧으신 부모님이 갑자기 외국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가 힘든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드실 것이다. 언어를 익히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익숙해지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운전까지 하게 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이웃들과 인사를 하게 되기까지는?




사샤 스타니시치는 십대 시절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거주지를 옮긴다. 아니, 옮겨야 했다.  언어를 새로 배워야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이들과 친해져야 했다. 외국에 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환경으로 공부를 하며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 매우 스트레스가 큰 일일것이다. 매일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아이대로 낯선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부모는 아마 더할 것이다.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는 인텔리였지만 외국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어떤 일이 주어지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살아야 하니까. 사샤 스타니시치 부모는 몸을 다쳐가며 새로운 나라 독일에서 적응하려고 한다. 살아가는 집도 형편없지만, 필요한 가전기구도 어디서 주워오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참에 아들이 이 이국땅에서 학교를 졸업하게 되는거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고국을 떠나왔던 일, 그리고 아들이 이 낯선 나라에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는 일. 그걸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샤의 부모는 그러나 독일에서 추방당한다. 사샤는 독일에서 대학을 다닐 것이고 또 직업이 있음을 증명하면서 독일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 책, [출신]은 그런 사샤 스타니시치의 삶의 기록이다. 사샤의 가족이 독일에 살고 싶어서 독일에 온 게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독일로 온 것이다. 부모는 추방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다. 그들이 돌아갈 나라가 없다. 사샤와 사샤의 가족 그리고 여기의 내가 또 다른 세상 어디의 누구라도 '낯선 나라에서 사는 건 힘들것이다'는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샤와 내가 다른 건 '돌아갈 곳'의 유무였다. 나는 낯선 나라 어디를 가서 적응하려 하다가도 너무 힘이들면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샤가 떠나온 곳, 유고슬라비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돌아갈 곳이 없다. '낯선 곳 적응 힘들어,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래' 라는 생각이 들어도 돌아갈 곳이 없다. 내가 출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그러나 사샤가 출신에 대해 책을 쓸 수 있었던 건, 그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에 있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완전히 새로운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설레이고, 낯선 곳에 도착해 새로운 것들을 맞닥뜨리는 것도 기쁨이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집으로 돌아갈 때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안정감을 준다. 아, 이제 집에 간다, 하는 평안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 나는 여행을 하는게 아닐까를 돌아올 때마다 생각한다. 그래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막막한 기분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샤가 유고슬로비아에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샤는 출신을 묻는 말들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를 갈등하게 된다. 식구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살며 만나기 위해서는 각자 서로 다른 나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유고슬로비아 출신이었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해 살고 있다. 독일, 스웨덴, 뉴질랜드, 터키의 여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들은 자신을 어느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잘 모르겠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한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다.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지만, 그러나 그들이 각자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면서, 그들은 그들의 아이들에게 돌아올 곳을 마련해주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에 있어서 뭐가 더 나아진걸까. 잘 모르겠다. 누군가 출신이 어디냐 물으며 지도를 펼쳤을 때, 그 지도에서 어느 한 곳을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역시 나는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과 질문들로 시간이 오래 걸린 힘든 독서였다. 

내가 알 수 없는 것,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이다. 

사샤 스타니시치가 쓸 수밖에 없었고 사샤 스타니시치만이 쓸 수 있는 기록이다.



나는 함부르크에 살고 독일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낯선 산 너머에 있다. 친숙한 엘베강 가에서 달린 거리를 계산하는 앱을 켜놓고 일주일에 두 번 조깅을 하는 나는 길을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P48

늘 홀로 증조부를 먼발치에서만 지켜보던 증조모님은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노랫소리로 술리오를 유인했지. 그때까지도 술리오는 자기가 내 거라는 걸 몰랐지!" 그러나 증조모는 이미 알고 있었다. - P106

어느 날 우리는 어린아이들과의 교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라힘 부모님이 자녀 네 명을 키워낸 일과, 내가 어린 사촌 동생 두 명을 귀찮게 여긴 일이 화제에 올랐다. 그날 내가 한 말이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라힘 부모님이 와인 잔을 손에 들고 내 맞은편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는 모습,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기억이 난다. 보통 어떤 사람이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당신은 그 사람과 충분히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P251

1998년, 부모님은 독일을 떠나야 했다. 혹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면 부모님에게 하이델베르크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 점에서 생각해보면 하이델베르크는 부모님이 지금도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다. 세상은 부모님이나 나와 같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꽉 차있다. 고향을 떠나온 난민의 자녀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자녀를 두고 있고, 그 아이들은 스웨덴, 뉴질랜드, 터키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인 한 사람일 뿐인 나는 가족과 가족의 단결보다 나 자신을 더 돌보았다. - P289

어머니와 할머니가 가방에 옷, 블라우스, 속옷을 차례로 챙겨 넣는다. 어머니는 겨울용 코트도 넣으며 말한다. "이번 생에서 얼마나 더 세상 밖을 돌아다닐지 누가 알겠어요." 그 말에 두 사람은 며칠만에 처음으로 웃는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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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의 신화 - 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베티 프리단 지음, 김현우 옮김, 정희진 / 갈라파고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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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태어난 '베티 프리단'은 이 책을 1963년에 출간했다. 세상은 여자들에게 집에 있으면서 청소와 요리를 하고 남편과 아이를 키우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여자의 역할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대중매체에서도 그랬다. 여자들은 대학을 가지 않거나 대학에 다니다가도 중퇴하고 결혼을 했다. 그러는 것이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그렇게 결혼을 해 집안일을 하고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분명 이것이 여성이 해야할 일이며 이것이 여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바라고 하는데도 어딘가 공허했다. 분명 누가 봐도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데, 하라는대로 하고 있는데, 살라는대로 살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공허할까. 왜 이렇게 다 아플까. 그런데 어디가 아픈지 병원에서는 왜 진단내릴 수 없어하는걸까. 그리고 왜 그렇게 아픈 가정주부가 나 뿐만이 아닌건가. 


베티 프리단이 대단한 건 이런 시기를 살면서 '나도 아프다'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이게 왜그럴까' 그리고 이걸 낫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깊이 생각했다는 거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현상에 대해 이상하다는 의문을 갖고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고 또 문제해결방법까지 제시한 게 베티 프리단이 이 책으로 한 일이다. 누구보다 앞서 나아갔고 누구보다 생각이 깊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부인할 수가 없다. 모두가 살라는대로 살면서 지치고 공허해할 때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다니, 그 하나 만으로도 베티 프리단의 업적은 기릴만하다.



그런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써낸 베티 프리단의 이 책은 그래서 매우 '세다'. 만약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관심도 없던 '기혼 유자녀 고학력자 전업주부 여성'이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후려쳐지는 걸 활자로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뭔가 비어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짚어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베티 프리단은 가사 노동 자체는 그렇게 머리써서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거, 누구든 시켜도 할 수 있어, 남자들도 잘 할 수 있지. 그런데 머리 좋고 지적인 여자들이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아무 발전 없는 일을 쳇바퀴 돌리듯 하고 있으니 안아프고 베기겠니? 오늘 하는 일 내일 또 하고, 그러면서 하루를 보내고 일년을 보내야 하니 새로운 청소도구를 쓰고 새로운 청소방법을 써보고..그런다고 그 일이 해결되니? 그렇다면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아이를 낳아 육아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가겠지. 그런데, 아이는 언제까지 낳을 수 있나. 그것 역시 언젠가는 그만 낳아야 해. 매해 아이를 낳을 수도 없잖아.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다 자라면, 스무살전후로 결혼한 여성들이 30,40대가 되었을 때, 그 때 그 시간은 어떻게 보낼 것이야?



베티 프리단은 지적인 성인 여성들을 이렇게 집에 가둬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그건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지만, 그들의 아이들에게도 결코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얘기한다. 아이들에게만 온 열과 성의를 다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대리 만족을 느끼고 싶어하고 아이들에게 역할 대행을 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은 성장할 수 없고 각종 질환들을 끌어안게 된다고. 그러면서 동성애 까지도 이런 식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다. 이게 단순히 여성들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라는 의도로 강하게 말하려고 했던 까닭이겠지만, 이런 주장들은 반발을 살 위험이 너무 높아 보인다. 어떤 의도로 쓴 글인지 알겠지만, 그렇다해도 '아이들이 잘못되는 건 다 엄마 탓이라니까!' 라고 읽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 잘못되는 건 다 엄마탓이야, 그건 그런데 엄마를 그렇게 만든 세상탓이지. 이렇게 주장하려는 바이긴 하지만, 그래도 왜그렇게 죄다 엄마탓을 하는거지? 라고, 어떤 의도인줄 알면서도 거부반응이 들었다. 물론 알고있다. 조곤조곤 살살 말했다면 아마 귀기울여 듣는 사람도 현저히 적었을 것일 뿐더러, 들었어도 새기질 않았겠지. 거칠게, 세게 말해야만 들어주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나 세게 얘기한 것일테다.



결론은 놀랍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교육'이었다. 여성들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모든 문제들은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음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도 교육이 답이라고 말하는 베티 프리단의 주장을 읽노라니 너무 짜릿했다.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 자신을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혼한다고 교육을 멈추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교육은 어떻게든 답이 된다고. 배우기를 멈추지 말라는거다. 그건 동네에서 문화센터에 가 교양을 쌓는 그런 교육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남자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는 바로 그 교육, 똑같은 교육이었다. 언어, 화학, 수학, 물리 등에 대한 교육들. 그런 교육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마치라고 한다. 어떻게든 마치라고. 그러면 설사 결혼하고 일에서 멀어졌어도, 나중에 아이들이 다 자란 뒤에도 세상에 나가서 뭘 어떻게 할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다는 거다. 자, 어디가서 무얼 해볼까,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다는 것. 실제로 그녀가 인터뷰한 전업주부들 중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림 그리기를 배운다던가 학교를 다시 다닌다던가. 뭔가를 배웠던 사람들은 그 다음을 향해 나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는데, 교육 자체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은 아이들이 자라고 이제 자신에게 쏟을 시간이 왔을 때 조차, 어디에서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는 거다. 



또한, 교육을 받고 거기에 머리를 쓰고 그걸 이용해 직장을 다니면서 돈을 버는 것. 이 모든 것이 여성 개인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여성이 속한 가족 구성원들을 위해서도 더 나은 방법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한다.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도 높은 여성이 아내인 것이 또 엄마인 것이 더 낫다는 것. 그 가족들은 가족 내에서 더 잘 지낼 수 있었고 가사 노동에 들어가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게다가 아주 흥미롭게 읽은 부분인데, 이렇게 자기 만족이 높은 여성이 섹스에서도 더 즐길 수 있었다.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섹스로 즐거움을 찾으려 하거나 아이에 몰두하거나 하게 되는데, 내가 일을 하고 나의 발전을 위해 힘을 쏟는 사람들에게는 섹스가 부수적인 것이 되고, 하면 즐겁게 하지만 굳이 안한다고 스스로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뭐, 너무 당연한 말이다.



미국의 전업주부 여성들이 모두들 아프다고 할 때 그 현상을 직시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베티 프리단은, 이 책이 날개 돋힌 듯 팔린 이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한다. 단체를 조직하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거다. 그러나, 아, 베티 프리단은, 래디컬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남성을 끌어안지 않으려는 래디컬들을 향해 비난한다. 베티 프리단은 반드시 남성과 함께 가야 한다고 하는데, 읽으면서 '베티 프리단, 남자 디게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이 책은 지금 읽기에는, 그리고 지금의 젊은 페미니스트나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읽기에는 그렇게 획기적은 책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 책이 얼마나 놀라웠을지는, 이 책 속에 숱한 인터뷰이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베티 프리단이 말하는 여성의 교육, 그리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 있어서는 나 역시 마음 깊이 동의하는 바다. 전업주부로 살며 아프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여자가 어떤 식의 삶의 형태를 선택하든, 단단하게 설 수 있기 위해서 교육을 받고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하는 거다. 내가 결혼해 남편과 함께 살더라도, 그리고 그 남편이 운좋게 돈을 마구 벌어온다고 해도(그레이의 오십가지 그림자 속 그레이처럼), 거기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나는 내가 교육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은, 그 축이 무너졌을 때 나 역시 쏟아져버리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기대야 하는 게 나 자신이라면, 내 축을 내가 잘 세우는 한 내가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교육에 대한 부분이 너무 짜릿했다. 여성들이 더 많이, 더 열심히 배움에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베티 프리단의 주장은 그런 지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역시나 좋은 독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인의 아들들이 성취감이 없고, 개인에 대한 가치관을 상실하고, 독자적인 행동이 결핍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딸들이나 이전 세대에 그 딸들의 어머니들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어떤 문화가 여자가 인간적으로 성숙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여자가 미숙하다고 해서 손실로 생각하거나 그것이 노이로제와 갈등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모욕적인 것은 우리가 국가적으로 여성들이 그들의 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고 나서야, 여성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우리 문화의 정의가 진정으로 반영되어 있다. - P366

원시사회에서 부족들이 처녀를 신에게 바치는 것처럼, 우리는 소녀들을 여성성의 신화에 희생시키고, 우리나라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소비자가 되도록 성적 상술을 통해 그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손질한다. - P412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쾌락이나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성장하고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라면, 편안하면서 공허하고 목적 없는 나날들은 정말로 이름 없는 테러의 원인이 된다. - P542

인류를 발전시키는 욕구, 즉 지식에 대한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는 다른 동물들의 식욕과 성욕 그리고 생존 욕구만큼이나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이다. - P543

매슬로는 더 큰 세상에 살며 자아실현을 달성하는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그날그날의 삶을 즐기는 것과, 그들만이 유일한 세계인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날 수 있는 사소한 일에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런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진부한 경험이 된다 해도 경외, 즐거움, 경이, 심지어 황홀감을 가지고 새롭고 소박하게 삶의 기본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감상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또한 "성적 쾌락은 자아를 실현하려는 사람의 가장 격렬하고 황홀한 완벽함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강한 인상을 준다."고 보고했다. 더욱 넓은 세계에서 개인의 능력을 성취하는 것이 성적 환희의 새로운 전망마저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섹스나 사랑도 인생을 추동시키는 힘은 아니다. - P556

(매슬로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사랑하게 되고 성적 만족도도 증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성관계는 에전보다 더 나아졌으며 항상 더 나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밝혀지는 매우 평범한 보고다.") 이런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자신이 되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 깊고 심오한 관계를 맺고, 더 포용하고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더 완벽하게 식별할 수 있고, 자신의 경계를 더 많이 초월하며,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 P557

오르가슴을 온전히 즐기는 여성들은 특히 자아실현을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하는 여성이며, 집 밖의 세상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교육 받은 여성이었다. - P563

미국에서 여성의 정체성의 위기가 시작된 때는 개척이 끝나고 남성이 집 밖에서 산업사회와 전문 사회라는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시작할 때였다. - P574

잠재력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도 존재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자신들의 충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노동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정체성은 남편이나 자녀와 같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발견할 수 없다. 여성의 정체성을 가사노동이라는 단조로운 틀에 박힌 일에서 찾을 수 없다. 모든 시대의 사상가들이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삶을 몰수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직시할 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때때로 이러한 자각은 죽음의 순간에만 온다. 수동적 순응과 무의미한 일에 의한 자아의 죽음. 여성성의 신화는 사실 여성들에게 그런 살아있는 죽음을 요구한다. - P575

그 함정의 열쇠는 물론 교육이다. 여성성의 신화는 여성에게 고등교육을 허락하는 것이 회의적이고 불필요하며 위험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교육이야말로 미국 여성들을 여성성의 신화라는 끔찍한 위험에서 구했으며, 앞으로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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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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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선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책은 결의에 가득 차있다. 페미니즘이 뭔지 내가 한 번 공부해보겠다, 그리고 실천해보겠다!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적합한 입문서가 될 듯.


처음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거 대체 뭘까, 세상은 왜 기울어졌을까, 어떻게 평등하게 만들 수 있나, 무엇이 문제인가 들여다보다 보면 숱하게 많은 문제들을 마주치게 된다. 거대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테두리 안에서 여성들의 가사노동, 돌봄노동, 재생산 노동은 그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따른 임금 역시 후려쳐졌다는 것도 알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을 가진 권력자들이 대부분 남성인 탓에 여성들은 진급도 힘들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도 받지 못하고, 게다가 성적으로도 이용당한다. 성을 판매하는 고통에 놓이는 것도 여자고, 성을 구매하는 놈들도 판매하는 여자를 욕한다. 게다가 포르노는 어떻고. 포르노의 수위는 점점 더 강화되어 여성의 실생활 곳곳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여성은 성적 대상화 되어 매스컴에 등장하고, 여성의 미의 기준 역시 그렇게 만들어지고 강제되며, 여성들은 돈으로 다시 또 세상이 원하는 미를 만들어내야 한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자들은 여성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긁어먹는다. 이건 뭔가 아닌데, 하고 들어갔다가 분노에 분노를 만나게된다. 내가 예상했던 분노가 거기 있고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분노도 거기 있다. 



그렇게 여러갈래로 쭉 뻗어나간 분노를 종합해놓은 책이 이 책이라 봐도 틀리지 않다. 그동안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보이지 않는 노동에, 페미사이드에 분노하고 있었다면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고 종합해주는 책이랄까. 세분화해서 공부하고 분노했다가 이쯤에서 한 번 토탈 정리를 해줄까, 할 때 이 책은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입문자에게 더 적합하고. 자, 어떻게 돌아가나 보자, 뭐가 문제인가 보자, 하는 사람이 읽을 때 더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낯선 용어에 대한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이 매끄럽지 않다. 많은 문장을 두 번씩 읽어야 했다. 분량도 얇고 글자도 매우 큰데-정말 크다-, 게다가 내가 페미니즘 책을 적게 읽은 것도 아닌데, 이 얇은 책 한 권을 읽어내기 위해서 미간에 주름을 뽝 잡아야 했다. 나랑 결이 다른 부분들이 수시로 나오지만, 어차피 모든 것에서 의견을 같이할 수는 없을 터. 그런 결이 다른 부분들보다는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개인의 출세에 대한 열광은 페미니즘을 개별 여성의 오르막과 혼동하는 소셜 미디어 유명인social-media celebrity들의 세계에도 똑같이 스며둘었다. 그 속에서 페미니즘은 실시간 인기 해시태그이자 자기 홍보 수단이 되고, 다수를 해방시키기보다는 소수의 지위를 올리는 데 쓰인다. - P47

‘망설임 없이 뛰어들라‘는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내려놓는kick-back‘ 페미니즘이다. 우리는 유리 천장을 부수고, 그래서 대다수가 바닥에 쏟아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게끔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전망 좋은 사무실을 차지한 여성 CEO 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게 아니라 CEO와 전망 좋은 사무실이란 것을 없애 버리길 원한다. - P48

가족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적 해방이라 통하는 것들은 종종 자본주의적 가치를 재활용한다. ‘훅 없hook-up‘과 온라인 데이팅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이성애 문화는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소유own‘하게 하지만 남성에 의해 정의된 기준으로 외모를 평가하게 만드는 것은 여전하다. 신자유주의 담론은 ‘자기 소유권self-ownership‘을 촉구하는 한편, 남성의 성적 이기주의를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적인 세태로 허가하면서 여성이 남성을 즐겁게 해 주도록 압력을 가한다. - P114

마르크스의 [자본론Capital]을 읽은 독자는 착취를, 자본이 생산 시점에 임금 노동자에게 가하는 불의를 안다. 그런 환경에서 노동자들은 생활비를 겨우 감당할 정도의 임금을 받도록 되어 있지만, 실상 더 많이 생산한다. 요악하면 상관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가족, 사회 기반 시설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도록 요구하며, 우리가 생산한 잉여를 소유주와 주주를 위한 이윤의 형태로 도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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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2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읽기도 쓰기도 쓱싹쓱싹!! 놀라운 속도입니다!!

2020-04-28 0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8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8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8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머큐리 2020-04-2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려고 대기 중인 책인데... 다락방님이 먼저 읽으셨구나....ㅎㅎ

다락방 2020-04-28 15:21   좋아요 0 | URL
저같은 노안을 위해 아주 큰 글자로 나온 책입니다, 머큐리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