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오 드립필터 - 3~4인용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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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마시는 똑같은 커피를 집에서 내려마시면 묘하게 불쾌한 향이 났다. 강한 향은 아니었고 커피향도 여전했지만, 뭔지 모르게 계속 거슬리는 향이었다. 회사에서 마시는 것과 같은 종류지만 로스팅 날짜가 달라서 그런걸까 싶어 며칠전에는 회사의 커피를 그대로 들고 가 내려마셨는데도 그 거슬리는 향은 여전했다. 이상하다, 커피는 똑같은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 하다가 여과지를 의심하게 됐다. 그렇게 여과지만 꺼내어 냄새를 맡아보니 여과지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흐음, 아닌데, 하고 다시 내렸는데도 역시나 불쾌한 향이 났다.


나는 고민끝에 알라딘에서 이 여과지를 주문했다. 1-2인용을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데 3-4인용을 집에서 쓰기 위해 새로 주문한 것. 토요일 오전, 여과지를 배송받기 전에 집에서 내려마시면서 아, 역시나 거슬리는 향이 난다.. 했는데, 오후에 이 여과지를 받고 다시 커피를 내려 마시는데, 그 거슬리는 향이 전혀, 전혀 나지 않았다. 아, 역시나 여과지 문제였구나. 아니, 그런데 여과지 자체만 맡으면 아무 냄새도 안나는데, 왜 내려서 마실 때는 뭔가 거슬리는게 섞인 것 같은걸까? 알 수 없지만, 몇 장 남지 않은 그 여과지는 버렸다. 그 향을 또 견디기가 싫었다. 새로운 여과지로 상큼하게 커피를 내려마시면 되는데, 왜 그것을 견디는가.


알라딘의 이 하리오 드립필터는 커피를, 커피맛을 그리고 커피향을 제대로 즐기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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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프랑스 책벌레
이주영 지음 / 나비클럽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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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책의 제목에 확 끌리지 않을까. 제목부터 너무 재미있지 않나.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니. 책벌레로부터 쏟아져나오는 에피소드는 또 얼마나 공감이 될까. 그런데, 와, 책벌레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없다니, 당황했다. 중간쯤 읽고 책장을 덮은 뒤에 다 읽을까 말까를 오지게 고민했는데, 너무 재미도 없고 스트레스를 내가 너무 받기 때문이었다. 책벌레는 작가 남편인 프랑스 남자의 가장 큰 특징이겠지만, 그러니 제목으로 정했을 것이겠지만, 책벌레라서 재미있는게 아니라 민폐되는 상황들이 너무 나오는거다. 수시로 물건을 잃어버리는 게 다반사라 일주일만에 핸드폰을 새로 사는것도 그렇고 돈도 막 떨어뜨리고 다니고, 여행 갈 때는 책 때문에 짐이 엄청 많아지고, 벽에 못 박아달라는 것도 미루고 미루면서 책을 읽고, 집안 어지르는 것과 치우는 것도 아내와 개념이 다르고... 이런걸 읽는데 나는 진짜 너무 스트레스 ㅠㅠ 싫어 ㅠㅠ 재미있는 지점이 나는 정말이지 하나도 없는거다.


둘이어서 좋겠구나, 아내도 열심히 책 읽는 사람이니 책으로 대화를 할 수 있어 좋겠구나 싶지만, 역시 가장 편하려면 혼자 사는 삶이 최고구먼... 했다. 방금 이 책의 리뷰를 검색했는데 다들 너무 재미있다고 별다섯 준 거 보고 또 아아... 나는 무엇인가...충격....


이 책 보다는 네이버웹툰 <모죠의 일지>가 훨씬 재미있다. 집에 있는 게 제일 좋다고 하는 모죠의 삶이, 엄마와 개그로 콤비를 이루고 사는 모죠의 삶이 건강해보이고 재미도 있어. 모죠의 일지 응원합니다.



그리고 책벌레 싫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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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0-15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뉘신가....했습니다. 프로필 사진이 달라져서 ㅎㅎㅎ

다락방 2020-10-15 09:17   좋아요 0 | URL
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새 프로필을 달고 이제 프로이트 글을 쓰러 갑니다. 그럼 이만 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0-1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없어 당황되는 이 책의 리뷰도.... 다락방님이 쓰면 재미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0-15 11:37   좋아요 0 | URL
아이고 별말씀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책 제목만 보고 재미 백프로 보장일 줄 알았다가 정말 당황했습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본컬렉터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1 링컨 라임 시리즈 1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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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디버'의 《본컬렉터》를 어제 다 읽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열심히 읽었지만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는 중에도 걸어가면서 읽었다. 일전에 '혹시 저 알츠하이머 초기 아닐까요?' 라고 상담받으러 갔을 적에 닥터가 내게 걸으면서 책 보지 말라고 했었는데, 나는 의사의 말을 금세 어기고 걸으면서 또 책을 보았고..집 앞 횡단보도에 이르러서야 책장을 덮었다. 날이 너무 어두워져 글씨를 보기가 힘들었어..

그렇게 집에 가서는 자기 전에 침대 위에서 책을 펼쳤다. 뒤에 얼마 안남았기 때문에 마저 다 읽고 자고 싶어서. 그런데 뒤로 넘길수록 반전에 또 깜짝 놀랄 반전이... 우와. 이 사람도 이야기를 참 잘 만들어내는구나! 검색해보니 이 시리즈가 국내에 10권 이상 번역되어 있던데,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써냈을까? 어쩌면 작가란 타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고로 몸을 쓸 수 없고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링컨 라임'은 뉴욕형사들의 부탁으로 연쇄살인범을 함께 찾아주기로 한다. 증인은 잘못 볼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증거는 언제나 사실만을 말한다고 생각한 그는, 사고를 당하기 전에 언제나 뉴욕 시내를 걸어다니고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을 머리에 넣어두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현장의 증거들로 그는 상황을 그리고 범죄자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고 이건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가 건강해서 직접 현장에 가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하는 처지라, 그는 이번 살인사건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순찰 경관 '아멜리아 색스'를 불러 현장 요원이 되어달라 부탁한다. 아멜리아 색스는 그렇게 링컨 라임의 눈과 발이 되어 처음으로 현장을 관찰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일을 하게 된다.


라임은 순찰경관이면서 사건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색스의 처음 담대한 결정에 그를 현장 요원으로 부른건데, 단순히 조용하게 순찰경관으로 살고 싶었던 색스는 갑자기 현장요원으로 불려간 게 너무 부담이 되고 싫다. 그러면서 폭력과 살인에 노출된 피해자를 보는 것도 너무 끔찍하고. 라임과 색스는 그래서 처음엔 불화한다. 그러나 사건을 해결해 가는 시간동안 그들은 점점 서로의 생각을 읽게 되고 친밀해진다. 라임도 언급하는데, 어쩌면 뛰어난 미모의 색스가 자신이 남자로서 그녀에게 위협이 될 수 없을걸 인지하기 때문에 그녀 역시 자신을 편하게 생각한거라고 추측하게 된다.


색스가 현장 증거 수집에 더 능숙해지는 것 그러니까 실력이 향상되는 걸 보는건 즐겁다. 두렵지만 자꾸 앞으로 가려고 하는 것도 짜릿하게 좋고. 이미 능숙한 중년의 남자와 이제 시작인 젊은 여자를 배치한 건 너무나 뻔한 설정이고 또 그녀가 누가 봐도 다시 돌아볼만한 미인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남자작가의 한계인가 싶지만, 색스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주장을 펼치고 사과해야 할 때는 사과를 하며 반항해야 할 때는 반항을 한다. 고집스런 여성인 것이다. 점점 더 실력이 향상되어가고 성장하는 여주인공 색스인 것은 너무나 좋지만, 다시 남자 작가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은, 그런 그녀 조차도 다른 사람을 욕하기 위해 그리고 흉보기 위해 '계집애같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물론 여자도 여자를 비하하고 혐오할 수 있지만, 이렇게나 주체적이고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그녀가 툭하면 '계집애같이'라며 다른 남자 형사들에 대해 생각할 때면, '색스, 당신에게 계집애는 어떤 사람인데요?' 묻고 싶었다. 계집애는 대체 뭔데 비하와 멸시의 용어가 되는것일까? 계집애는 어떤데요, 제프리 디버? 계집애가 뭐가 어쨌길래요?



무엇보다 좋은 건 색스가 끝까지 피해자의 편이라는 것이다. 연쇄적인 살인에 결국 FBI 가 수사권을 가져가게 됐을때, FBI 요원은 범인을 찾기 위해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고 에너지를 쏟지만, 그러나 지금 어딘가에서 피해를 당하고 있을 피해자에 대한 색스의 언급에는 '범인을 잡으면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거다. FBI 요원에게는 범인을 잡는게 가장 우선이었고, 그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색스는 이미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을 피해자를 살리는 게 급선무다. 결국 그녀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다시 라임에게로 몰래 도망와서는 피해자를 찾아보자고 그래서 구하자고 한다. 그녀가 피해자를 결국 구해내는 장면장면들은 그녀의 의지였다. 피해자를 구해야한다, 라는 그녀의 생각이 이 책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자신을 지휘하는 사람에게도 "피해자는요?" 라고 물을 수 있는 그 지점이 너무 좋다.


또한 연쇄살인범이 등장하지만 모든 피해자가 계속 죽어나가는 게 아니다. 그 점도 너무 좋다. 일전에 그 뭣이냐..그 일본 소설..머리에 비듬 가득한 탐정 나오는 소설에서는 죽고 또 죽고 죽어도 해결을 못하는 이야기라 너무 싫었는데, 제프리 디버는 그의 소설 속에서 수사하고 추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는 것을 피한다. 윽 죽지마, 그렇게 죽이지말란 말이야, 라는 간절한 바람이 작가에게 들린것 같았달까.


여담이지만, 어딘가에서 본 제프리 디버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이와 동물을 해치지 않고 성폭행을 다루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고 했다. 살인이나 고문장면은 실제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범죄소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다. 그래, 아이와 동물을 해치지 않고 성폭행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제프리 디버는 이 연속된 살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만으로 이야기꾼이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여기선 이제 어떡하지' 하는 지점에서도 그 다음 장면들을 착착 펼쳐낸다. 이를테면,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목 위를 제외한 몸이 마비된 자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될것인가, 아니, 이제 이 사람이 어떡하나, 할 때 조차도 그 다음장면들을 그려낸다.



색스가 굳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미인일 필요가 있었을까 싶고 읽기 전에는 이 둘이 결국 로맨스로 끝난다는 누군가의 리뷰에 뜨악했었다. 굳이 이 둘에게 로맨스를 줘야했나 싶은거다. 그런데 읽고나니 이 둘에게 있는 것은 우정 쪽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상처를 갖고 있고,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을 알아보며 가까워지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니. 이 둘에게는 그런 식의 친밀함이나 우정이 찾아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거기에 이성적인 감정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다. 이미 라임의 머릿속에는 색스를 보면서 미인, 미인의 권력 이란 단어 같은 것들이 떠올랐으니까. 앞으로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둘 사이에 로맨스가 찾아온다면 그건 또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감당할 밖에..



나는 이 책의 다음 시리즈를 주문했고 지금 내게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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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응, 자고 갈게.
    from 마지막 키스 2020-10-07 10:11 
    이 책을 다 읽으면 옮긴이가 그런 얘길 한다. 영화로 보면 그 영화속 등장인물들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된다고. 정확한 워딩은 그게 아닌데 내가 책이 지금 없어가지고 아무튼 그런 뉘앙스의 글이었는데, 그러면서 옮긴이는 덧붙인다. 링컨 라임 역의 덴젤 워싱턴이야 그렇지 않지만, 색스 역의 안젤리나 졸리를 이미 본 이상 시리즈를 읽어가며 색스 역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는 게 불가했다고. 나 역시도 그렇다. 링컨 라임이 사건을 해결하는 '머리
 
 
moonnight 2020-10-0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서 졸리씨와 워싱턴씨 커플이 자동연상 되어요 호호^^ 참 잘 어울렸는데♡

다락방 2020-10-07 10:47   좋아요 0 | URL
저 2,3권 주문했어요. 으하하하하.
영화 너무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안나더라고요. 다시 봐야겠어요. 아 책 재미있어요. 저 링컨 라임 시리즈 다 읽을거에요!!

바람돌이 2020-10-07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12권에서 링컨 라임 너무 멋있거든요. 전 남녀관계에서 저렇게 교과서적으로 쿨하고 멋진 남자 처음 봤어요. ㅎㅎ 그니까 꼭 12권까지 보세용... ㅎㅎ

다락방 2020-10-08 09:33   좋아요 0 | URL
저 이제 2,3권 샀는데 12권까지 언제보죠?
그런데 4권이 품절이에요 ㅠㅠ 중고 사면 되니까 뭐 ㅠㅠ 그런데 깨끗한거 사고 싶다 ㅠㅠ 아무튼 12권까지 달려보겠습니다. 그 길에 함께해주세요!! >.<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 - 우리가 ‘여신’ 칭송을 멈춰야 하는 이유
이충열 지음 / 한뼘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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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뉴욕여행 갔을때 미술관 몇 군데를 혼자 다녔었다. 미술관마다 내가 혼자 거기에 이르렀던 사연들이 있어 모두 특별하고 좋았지만, 그림 자체만으로 내게 감동을 준 곳은 가장 규모가 작았던 <노이에 갤러리>였다. 애초에 건물 자체가 작았는데 3층은 리모델링인지 그림 교체라고 했는지 아예 전시가 없었고 2층에 그림들이 꽉 차있었는데, 아마도 내가 클림트의 그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 같다.


클림트라고 하면 워낙 몇가지 그림이 유명하기도 해서 반가웠지만 내 눈앞에 그가 그려낸 그림들의 화려한 색채가 펼쳐지는데 너무 놀랐다. 그림들을 보면서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한참이나 그의 그림들 앞에 서있었다. 너무나 유명한 <키스>그림도 그랬지만, 그중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건, <The Dancer>라는 그림이었다. 그 분홍빛의 화려한 색채가 눈이 부셨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고, 어떻게 색을 이렇게 썼을까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런 한편, 그런데 왜 젖가슴은 드러났을까. 춤을 추는데 옷이 벗겨질 리도 없는데, 설사 옷이 벗겨지는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 해도, 왜 대부분 옷을 입고 추는 댄스에서 하필이면 가슴을 드러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머리에서 몰아내고 그 화려함만을 간직했다. 그 그림이 너무 좋아서 갤러리에서 나오기전 기프트샵에 들어가 그림의 책갈피를 샀고,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선물로 보냈다. 나 한 개, 너 한 개. 나 이그림 너무 좋아! 미국에 사는 친구는 내 추천에 노이에 갤러리를 방문했고 나와 마찬가지로 클림트의 그림을 본것만으로도 그 작은 미술관은 소임을 다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감탄한 그림의 포스터를 사서 내게 보내주었다. 그 일은 내게 큰 기쁨이고 소중한 해프닝이며 평생 기억할만한 일이 되었다.


포스터를 꼭 내 방에 걸어두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냥 포스터만 붙이긴 아쉬워 액자를 하나 구입하려 했는데, 액자가 너무 비싼게 아닌가. 지금은 부모님 집에 살고 있으니 그냥 벽에 붙여두고, 나 독립하는 날 액자 사서 근사하게 거실에 혹은 꾸미게 될 서재에 걸어두어야지, 하고 일단 지금은 내 침실 벽에 포스터를 붙였다. 방이 환해지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나는 자꾸 이 여성의 가슴이 신경쓰였다. 이 그림이 너무 좋고, 클림트 대 화가이고, 이 그림은 명작이겠지만, 그런데 저 가슴이 저렇게 드러난 건 불필요해보였다. 어떻게 가릴까 싶었지만 내가 무슨 수로 그걸 가려? 하는수없이 그냥 그대로 벽에 딱 붙여두었는데, 내가 붙이는 걸 본 엄마가 보시더니, 보자마자 이러시는 거였다.


"젖통이 다 나왔네."


나는 깔깔 웃으며 엄마, 젖통이 뭐야 젖통이..가슴이라고 해야지! 라고 대꾸했는데 엄마는 다음에 이렇게 물으셨다.


"꼭 그렇게 젖통을 내놓고 그려야했대니?"


나는 그 말에 아무말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내가 클림트가 아니니 대답할 수 없기도 했지만, 꼭 젖통이 나와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체 뭐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장면에서는 반드시 가슴 노출이 필요하다고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그림은 이 그림이다.





나는 이 질문이야말로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꼭 그렇게 가슴을 내놔야만 했다니? 라는 물음. 


이충열의 이 책,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는 우리엄마의 이 물음을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다. 왜 남성 화가들은 그림에서 여성들을 기울이고 눕히고 멍하게 그려두었을까. 세계적 명화라는 것들 속의 여자들은 왜 하릴없이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가. 그 가슴은 결국 누구에게 보여지는가, 그 벗겨진 가슴을 보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충열은 명화들을 보면서 그 안에 등장한 여자들의 포즈를 따라해본다고 한다. 이 동작 자체가 자연스러운 동작인지. 남성화가들이 그린 그림속 여성들의 포즈는 실제 여성들이 현실속에서 자주 취하는 포즈도 아니었을 뿐더러, 애시당초 따라하기 어려운 포즈들도 많았다. 특히나 나도 보면서 이해 안되는 그림이 있었는데,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이 그것이다.



이충열은 묻는다. 항아리에 든 물을 버릴때 저런 포즈로 버리는 것이 자연스러우냐고.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저 여성은 항아리에 든 물을 다 벗고서 저런 포즈로 버리는 것인가. 왜? 저거 누가 저렇게 하라 그래도 못하겠는데 굳이 들어올려 한쪽 어깨에 얹어서 저렇게 따라 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렇게 할 필.요.가 없었는데, 굳이 저렇게 그려야 했다면, 왜, 누구를 위해 그러해야 했는가.


왜 그림속 여성들은 저런 포즈들을 취해야 했는가. 


적장의 목을 벤 '유디트'를 다룬 그림들조차도 유디트는 벗고 있고 표정은 단호함과 거리가 멀다. 남성화가들이 그린 유디트는 적장을 죽인 용맹한 여성이 아니라, 팜므파탈적 요소를 가진 여성이었다. 이런 여성에게 잘못 걸리면 죽는다는 메세지. 



지은이의 이름이 '이충열'이라서 나는 남성작가가 뻘소리한 책이라 짐작하고 이 책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이 작가는 안그래도 이름 때문에 남성으로 오해를 받는 여성작가라고 한다. 작가소개를 보면 미술을 포기했다가 문과와 이과를 거쳐 결국 현대미술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그러는 동안 그림들속의 여성혐오를 발견하고 자기 안에 여성혐오도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충열이 그림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묻는 것은, 그간 그림을 보고 내가 느꼈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했고, 현재에 이르러 시각적으로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대상화 시키는것까지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충열은 '벡델테스트'처럼 '충열테스트'를 만들어 독자들에게 묻기를 제시한다. 앞으로 그림을 보게될 때 이렇게 세가지를 물으라는 것.


1. 필연적인 노출인가?

2. 표정과 동작의 의도가 명확한가?

3. 직업, 나이, 성격등 개인적 특성을 알 수 있는가?



이중 두 가자 이상의 질문에 '아니오'란 답이 나온다면 그 그림은 단순 누드라는 거다. 그렇게 다시 그림들을 보면서 그 질문들에 답을 해보자니, '필연적인 노출인가'라는 1번 질문부터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있는 그림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클림트의 댄서 라는 그림에 있어서도 그랬다. 필연적인 노출인가? 물으면 결코 그렇다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엄마의 질문도 생각났다. 젖통을 굳이 드러내야 했다니? 이것은 이충열의 제1질문과 똑같은게 아닌가. 그 노출이 반드시 필요했는가?


놀랍게도 대부분의 여성노출 그림에 '응 필요했어!'라고 답할 수 있는 그림이 없더라. 그렇다면, 그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왜 그토록이나 열심히 그려댄 것인가. 그걸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커버칠 생각이었는가. 그 그림을 보는 이는 누구이며, 그 그림을 보면서 현실 여성에 대한 관점과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또 누구를 위해 이익인가. 

물론 이충열은 '남성'화가들만 그런 그림을 그린 건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해준다. 남성 주체의 시각에 길들여진 여성 화가들도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기도 했다고. 그래야 남성 소비자들에게 팔리니 그런 시선에 길들여지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자연스런 일이었을 거라는 거다.

그 숱한 여성혐오적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아버지의 강압과 아버지 친구의 강간, 그 모든 싸움을 해내면서 주체적으로 여성주체적 그림을 그려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화가를 알게된 건 큰 수확이었다. 


짧은 책인게 아쉬울만큼 좋은 질문으로 가득한 책이었다. 좀 더 많은 그림을 보여주고 좀 더 많이 질문하도록 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나 이만큼으로 충분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나는 앞으로도 미술관을 종종 찾을 생각인데, 그 때마다 노출된 그림들 앞에서 스스로 질문할 것이다. 필연적인 노출인가? 짐작하건대 아마도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있는 그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 너무 좋다. 이런 책을 읽게 되어서. 그림을 볼 때 질문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서. 무엇보다 미술하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글로 써줬다는 게 너무 짜릿하다. 세상 곳곳에서 모든 현상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계속 책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아직 질문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덕분에 질문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는 ‘누드‘를 이렇게 정의하고자 합니다.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를 기준으로 한 남성만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적 욕망의 소유자라는 입장에서, 남성을 시선의 주체로 놓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이미지‘라고 말입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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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0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감동적이죠. 전 피렌체에서 저 유디트를 봤을 때의 감동을 잊을수가 없어요. 같은 미술관에 있는 카라바조의 유디트와는 정말 다른..... 아 이게 진짜 그림이구나 하는 느낌. ^^

다락방 2020-10-04 15:59   좋아요 0 | URL
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 그림은 숱한 남자화가들의 유디트와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주체적이면서 여성연대적이었어요!! 저도 언젠가 제 눈앞에서 그 그림을 직접 보고싶네요. 이런 코로나 상황에서 그런 날이 언제올지 알 수 없지만... ㅠㅠ

syo 2020-10-0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가 클림트는 아니지만, 제 생각에 클림트한테 저 가슴을 드러내는 게 꼭 필요했니? 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에 관련된 미학적 이유를 댔겠죠.

클림트가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가정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저 가슴 노출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다락방님의 견해고 관점인 것 같아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클림트의 견해고 관점이듯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어느 한쪽의 관점을 기정사실로 전제한 ˝왜 필요하지 않은 것을 그렸는가?˝ 가 아니라, ˝여성노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왜, 무엇을 위해 그렇게 생각했는가?˝가 아닐까요? 물론 두 질문은 결국 같은 과녁을 겨냥하겠지만요.

다락방 2020-10-04 18:59   좋아요 1 | URL
클림트의 저 그림은 제가 제 방에 걸어둘 것이지만,
클림트가 아닌데 클림트에게 이 가슴 노출은 필요했을 것이다, 라고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이시점에 불필요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데 자기 입장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저것이 필요하다고 답할 것이다, 라고 한다면 뭐 클림트만 그렇겠습니까.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그래야 했어, 라고 답하겠지요. 그렇다면 반복되는 문화와 반복되는 세상이 이어질 것이고요. 저는 굳이 클림트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라고 가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진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그렇게 그리는 주체, 그리고 감상하는 주체가 남자였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저것이 꼭 필요했는가, 라는 물음은, 쇼님이 같은 과녁을 향한다고 했을때도 어쨌든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쇼님이 바꿔서 질문하고자 한 그런 질문이 나오기 위해서라도 질문했어야 하는 것이고요. 가슴 노출이 꼭 필요했는가,라는 질문이야말로 본질적이죠. 자연스레 따라나오니까요, ‘누구에게‘, ‘왜‘ 가요.



˝창조주가 세상 만물을 만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한 것처럼, 자신이 ‘보기에 좋은‘ 여성을 ‘창조‘해내고자 하는 남성 화가의 욕망과, 아름다운 여성 그림을 주문하고 소유함으로써 여성 신체를 소유하고자 했던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욕망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 바로 누드화였습니다.˝ (p.107)


syo 2020-10-04 19:32   좋아요 0 | URL
저는 ‘클림트에게 저 노출이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가정한 게 아니라, ‘클림트는 스스로 저 노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가정한 거구요. 그거 두 개는 같은 말이 아니에요.

클림트가 저렇게 그렸잖아요. 그럼, 스스로 이렇게 그릴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그려야지- 하고 그렸다기보다 자기는 자기만의 이유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렸다고 보는 게 납득이 가지요. 그래서 그 생각을 비판하자는 거구요. 작가가 자기가 필요해서 그렸다고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면 그걸 듣고 나서는 비판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실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음, 화가가 자기 입장상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렸다고 하더라도 비판할 부분은 비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핑계없는 무덤 없다는 말 있듯이 자기 입장 없는 사람 누가 있느냐, 그렇게 봐주면 안된다˝라는 말씀은 정확한 반론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저자에게 입장이 있건 없건 별로 안 봐주는 스타일입니다. 오죽하면 다자이 오사무 <사양> 비판할 때도 시대 상황 고려하라는 이야기를 들었겠어요. 제 말대로 클림트가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건 그렇지 않건, 아니면 심지어 다락방님 표현대로 클림트에게 그게 필요하다고 가정하건 그렇지 않건, 비판의 여지가 있으면 비판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우리는 비판해야 한다는 같은 견해입니다.

가슴 노출이 꼭 필요했는가- 라는 질문은 전혀 본질적인 질문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술은 때로 필요하지 않은 것도 하니까요. 만약 클림트가 스스로 가슴 노출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저걸 그렸다면, 가슴노출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의 답은 클림트가 저 그림을 그리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까요. 저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클림트가 가슴 노출이 필요하다고 인식해서 저걸 그렸고, 그래서 그 인식을 격파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본질적 질문은, ˝왜 남성 화가들은 여성의 그림을 그릴 때 가슴 노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입니다.

다락방 2020-10-04 20:19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쇼님의 댓글을 읽고 클림트에게도 그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거라고 받아들였어요. 저는 그 이유까지 제가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고요. 그렇지만 지금도 ‘필요했을 것이다‘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가 다른가? 라고 하면 그렇게 다른 말 같지도 않아요. 필요는 생각에서 오는게 아닌가요? 어떤 이유가 있으니 그렸을 것이고 그것은 그 이유를 생각한 것이며, 필요인 것이겠지요.

요약하자면 어쨌든 비판해야 한다는 견해는 같은데 본질적 질문에 대한 차이가 있는 것이군요. 저는 궁극적으로 쇼님이 질문한 것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질문에서 더하고 덧붙이면 결국 그 질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본질적이란 단어에 대해서 어쩌면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본질적 질문이라고 한 건, 그 그림을 보자마자 나오게되는 즉각적 반응에 대한 것이었어요. 저 그림을 딱 보았을 때, ‘저 가슴은 왜그렸지?‘ 가 되고 저희 엄마는 ‘그 가슴을 꼭 그려야했대니?‘ 라고 물었다 했잖아요. 제게 본질적 질문이란 그런 뜻이었어요.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질문이요. 결국은 ‘왜 남성화가들은 여성의 가슴을 노출하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에 이르긴 하겠지만, 그리고 결국 이렇게 이르는 질문을 쇼님은 본질적이라고 했지만, 저는 ‘뭐야 왜 저렇게 그렸어‘가 먼저 튀어나오거든요. 이충열은 왜 여자들 다 눕혀놨을까? 라고 질문한것처럼요. 저는 그런 질문을 본질적 질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나오고 나서야 답을 하고 또 하는 과정에서 찾아간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이렇게 쓰다보니까 좀 말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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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초면 내게는 또 한명의 조카가 생긴다. 여태 이모의 삶을 살다 이제 고모의 삶도 살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조카가 태어날 거란 소식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이모도 될 수 있고 고모도 될 수 있나, 감동했다. 새 조카를 맞이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이 작은 아가가 태어나서 목을 가누지 못할 때부터 나는 지켜보겠지. 다른 조카들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성장과정 하나하나 눈이 부시게 바라볼 것이다. 목을 가누지 못하던 아이를 품에 재우면 폭 안겨들고 내게 기대겠지. 아, 그때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리고 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랄 것이고, 뒤집을 것이고, 길 것이고, 걸을 것이고, 언젠가는 고모, 하고 부르게 될 것이다. 매순간 나는 얼마나 사랑이 커져갈까. 아가의 손과 발을 보는 것은 기쁨일 것이고, 매일 커지는 사랑 때문에 하루하루가 축복에 가깝다 느껴질 것이다.


그러다가도 불쑥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에 대해 미안해진다. 나는 이만큼의 인생을 살아왔고,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을 만났다. 그러나 이 아가는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엄마, 우리 조카 어떡해,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이야, 어떡해. 그 생각만 하면 너무 슬프고 아프다. 갓 태어난 아가는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을 것이고,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으니 밖에 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까. 아가가 자라면서 바깥에 자유롭게 나가게 되었을 때, 그때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되어있을까?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조카에게, 어른들이 잘못했어, 어른들이 미안해,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태어나자 마자 이런 세상이라서 정말 미안해, 라고 자꾸 말한다. 지금 초등학생인 조카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것도 너무 가슴이 아픈데, 태어나자마자 코로나 세상일 조카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서 어쩌지를 못하겠다. 미안해 아가야, 잘못했어 조카야. 어른들이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자연을 너무 많이 파괴했어. 어른들이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깊숙이 들어갔어. 그러면 안되는거였는데 너무 많은것들을 건드려놔서, 그래서 이런 세상이 되었어. 나는 보이지 않는 곳의 혐오에 익숙해져 있었고, 보이지 않는다고 외면하면서 세상이 이렇게 되는 것을 방치했다. 내가 직접 숲으로 들어가 자연을 파괴하자고 도끼들고 나무를 벌목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런 행위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침묵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감으로써, 동조했다. 나는 혐오자였다. 이 책에서 데릭 젠슨이 일컬은 것처럼, 에코사이드의 조력자였다. 조카가 태어날 세상을 코로나 세상으로 만든 건 나였다. 내가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먹고 싶은 걸 사먹고 입고 싶은 옷을 사 입는 그 모든 행위,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 모든 행위는, 환경을 파괴하고 있었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었다. 혐오로 도배된 문명속에 나는 구성원이었다. 조카에게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할 때는 나 자신을 포함해야 했다. 저기 저 먼데에서 다른 어른들이 그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조카는 자라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었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과 친척들,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학교를 거쳐가며 친구와 선생님들을 만날 것이었다. 직장에 가면 동료들을 만날 것이고. 그 시간들 속에 언제나 텔레비전도 있을 것이고, 설사 조카가 직접적으로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환경을 만든다해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조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대중매체를 소비하는 대중일테니까.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혐오를 만날 것이다. 외모를 비하하는 광경을 수도없이 맞닥뜨릴 것이고, 강요된 미모에 억압받을 것이다. 여성차별에 대해서도 인지하게 될것이고 세상에 인종차별이 있다는 것도 알게될 것이다. 자신이 먹는 것이 동물을 죽이는것이라는 것도 알게될 것이다. 설사 조카가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고 하면,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은 잘못되었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성차별은 안되는거야, 인종차별은 안되는거야를 나는 조카에게 말해줄 것이다. 봐라, 네가 보고있는 저 뉴스들은 성차별 혹은 인종차별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세상은 그런 혐오들이 존재한단다, 우리는 혐오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해, 인간은 평등하단다, 피부색이 무엇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차별해서는 안되는거야, 를 나는 조카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데릭 젠슨이 말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면 외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까지 내가 알려줄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노예제와 수많은 인종학살이 벌어진 전쟁들에 대해서, 그 안에서 무수히 죽어나간 사람들의 숫자를, 그 기록을, 데릭 젠슨은 보기 싫으면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외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숫자들을 봐가면서, 태초부터 이 문명은 혐오로 세워졌어, 하는 것을 내가 조카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아니, 조카에게 알려주는 게 다 무어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 숫자를 찾아볼 생각도 않았는데. 인종차별도 저기 다른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했는걸. 눈 앞의 혐오만 알려주기도 벅찬데 보이지 않는 혐오까지 내가 알려줄 수 있을까. 거리가 멀어서 보이지 않는 혐오들을, 그러니까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이 어디서 왔는지, 음식들이 어디서 왔는지까지, 그 구체적인 모습들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양심의 가책 없이 입고 쓰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인지하고 알려주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또한, 조카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도, 그건 네가 자라면서 알아서 보고, 보는만큼 알아서 공부하고 행동하렴,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자본주의와 민주화(정말?)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이제 이것들을 그간 내가 모르고 살았다고 해서 이제부터 알면서 무언가 행동하게 될것인가. 나는 그러기에 돈 버는 것을, 돈을,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마구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지 않나.


내가 하는 일, 먹고 사는 일에 대해 나도 종종 생각했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해 통장에 노동에 대한 대가가 들어오는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선태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내가 먹고 사는 것이 불가능해지니까.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돈을 버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는 꿈꾸는 소박한 미래가 있고, 그 미래에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대단치 않은 일인데, 거주할 집이 필요하고 먹을 음식이 필요하고 읽을 책이 필요한데, 그것에는 돈이 든다. 돈을 쓰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돈 버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인데, 그런 한편 내가 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나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언젠가 친구에게도 말한 것처럼, 내가 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 나를 위한 일도 아닌 것 같아, 한거다. 이 일을 함으로써 내가 사회에 혹은 지구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이 일이 과연 필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도 수시로 의문을 갖는다. 내게는 돈이 필요하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세계를 한바퀴 돌겠다, 같은 것을 나는 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 조직에 몸담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나.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은 어떤가? 그 일들은 필요한 일인가? 필요하다면 어디에 필요한 일인가? 필요하다는 것의 그 필요는 누구에게 그렇단 말인가? 데릭 젠슨은 이 책에서 '우리가 하는 일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적으로 쓸모있는 일인가(p.512)' 의문을 갖는데, 그렇다면,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것에 대해 고민하고 산다는 것인가. 이럴 때 구체성에 눈을 돌려야 하나. 건너고 건너면 나 역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일로부터 돈을 벌고 있는게 아닌가.


데릭 젠슨은 백인 남자이며 교육받은 중산층이다. 그런 그는 제노사이드와 에코사이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과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환경과 노예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인상깊지만, 그가 포르노를 보고 그의 달라진 인식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도 놀라웠다. 포르노를 보기 전에 그는 여자들을 볼 때 어떻게 말을 걸까를 생각했다면, 포르노를 보고난 후의 그는 여자들을 보면 그 여자의 신체 일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서 빨리 자신이 대화를 원하던 그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그는 포르노에서 여자들이 조각조각 신체로 보여지는 것, 그러니까 한 명의 여자사람으로 인식되기 보다, 성적 대상화 되는 추상화라는 것을 인지한다.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일들, 직접적으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일들, 과거에 일어났던 인종들의 대학살, 땅을 빼앗는 것, 추방하는 것, 그리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은 그것의 구체성, 그 사람들의 구체성을 보기보다는 그 모든 '사람'들을, '자연'들을 추상화 시키기 때문이라고.


결론은 당연히 우리가 추상성을 벗어나 구체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흑인이 아니라, 포르노속의 여체가 아니라, 소모할 자원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하나 생명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인지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혐오를, 멸시를, 파괴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이 얼마나 구체적인 해결방법인가. 구체성을 자각하자는 것은, 구체적 해결방법인 것이다.



현상과 숫자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아니, 왜 그래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라치면, 어김없이 내가 가진 의문도 같이 표현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지구 절반에 있는 408개 도시를 태워버릴 수 있는 잠수함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읽다가, 아니, 도대체 408개 도시를 태울만한 잠수함이 왜 필요한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에 "감히 그런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그런 것을 가지려고 할까요?" (p.506) 가 나오는 식이다. 질문과 답이 모두 들어있는 책인데, 그것이 결코 불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세상을, 지구를 망치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러나 구하려고 하는 것도 인간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그저 관료주의에 충실해 자기 몫의 일을 하면서 혐오와 파괴에 한몫하고 있다면, 그것이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이라고 일깨워주는 사람도 이렇게 어딘가에 있다. 읽고 알고 보는 것이 바로 어떤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기 전과 알고난 후는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것이다.


부디 조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이 조금이라도 혐오로부터 멀어져있기를 바라본다.







인디언들의 경험은 인디언들이, 여성의 경험은 여성이 해석하도록 남겨두려 한다. 내게-나와 같은 백인 남자들에게-남겨진 일은 나의 인종과 성별에 속한 사람들의 혐오 경험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건대 그것을 멈추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 P10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예전의 얕잡아보던 느낌이 혐오로 바뀐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대대적이고 극적인 폭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뀌는데 그것은 위계질서의 상층에 위치한 이들을 위해 다시 노동을 제공하도록 예전 노예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다. 물론 위계질서의 상층에 위치하는 것은 당연히 그들 자신이라 여긴다. 이렇게 겁을 주는 행동은, 자신이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원 또는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건 가질 수 없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P15

좌파든 우파든 자기가 자라고 살아온 사회적 조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 P15

교도소 안에서 보면 강간이 성범죄가 아니라 권력 불균등에서 나온 범죄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다. 남자만 있는 교도소에 여성이 없다는 것은 남성으로 하여금 여성을 만들게 한다. 즉 종속적인 계급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의 남성다움에 대비되는 여성다움, 그들의 공격성에 대비되는 수동성, 그들의 삽입을 받아들일 성교 상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 P48

교도소에서 남자가 강간당하는 비율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 전반에서 여자가 강간당하는 비율보다 낮다는 것이다. - P49

인터넷에서 ‘강간‘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다른 범주(성폭력 상담 전화, 지지 그룹, 학분적 분석, 역사, 뉴스 등)에 대한 정보보다 포르노 사이트가 훨신 더 많이 뜬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포르노그래피가 강간 관련 사이트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검색어가 섹스나 누드가 아니었다는 것, 질, 페니스, 좆, 씹 같은 것이 아니라 강간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신체기관이 아닌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도. - P50

진실을 말하자면 인종차별적 사이트중 그 어떤 것에서도 이런 포르노 사이트에서와 같은 뚜렷하고 거칠고 노골적인 폭력의 100분의 1도 본 적이 없다. 인종차별 사이트가 해롭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많은 문제점을 낳는다. 가장 명백한 문제이기도 한 첫 번째 문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그린 사진 등이 왜 혐오 선전물로 간주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 P51

한 집단의 특권이 다른 집단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다면 특권층 집단은 그러한 특권 중 일부를 잃어버리는 데 대해 위협을 느낀다. - P75

어떤 인종이나 계급의 사람들을 그들 뜻에 반하여 예속 상태로 있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노예가 된 사람들에 대한 엄청난 경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P79

담배를 재해바는 것은 혐오범죄인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어떤 물질이 사람들을 죽게 만들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그것에 중독되도록 하려면, 내가 앞서 노예제에 대해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많은 멸시가 필요하다. - P99

"상업 매체의 첫 번째 과제는 공포를 파는 거야. 왜냐하면 공포가 불안감을 키우기 때문이야. 그러면 소비문화는 우리에게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수도 없이 내놓지. 그러나 일시적인 방법뿐이야. 매체는 우리 외모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잔뜩 심어주었지. 뿌루퉁한 입술, 불룩 솟은 가슴, 강철같이 단단한 궁둥이, 영원한 젊은 같은 것 말이야."
"거기다 흰 피부"하고 내가 덧붙였다.
그는 계속 말했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정해주는 이런 이미지들을 보고 또 보면서 내면화하다 보면 자기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내 인성의 가장 기초적인 것을 바꾸어놓지. 성적 욕구, 성 의식도 비틀어놓잖아." - P120

몇 년 전 텔레비전 비판가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와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내게 말했다. "대본을 대부분 남자가 쓰기 때문에, 텔레비전은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 남자가 대부분의 역할을 하는 세상을 보여주지. 텔리비전과 영화는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비추고, 동시에 그것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지속시키고 그것이 정상으로 보이게 하고 그것만이 할 만한 일인 듯, 그것만이 이야기하고 생각할 만한 일인 듯 보이게 해. 시청자들이 일단 어떤 유형의 이야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누군가 그것을 바꾸려 할 때 엄청난 당혹감을 느끼게 되지.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전형적인 캐스팅을 하지 않고 그것을 바꾸려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여자가 권력을 휘두르고 여자가 폭력을 행사하는 이야기가 되겠지. 그런데 그 경우에 그게 왜 그런가를 설명하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는 전혀 할 수가 없어." - P123

"왜 여자가 명예롭지 않은 그런 일을 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가 돌아가야 하거든. 남자가 할 때에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일인데도 말이야. 시청자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대중의 감수성이 혼란을 일으킨다는 거야."
텔레비전이 우리 문화의 대표라는 의미냐고 내가 조지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 그건 권력 구조를 대변하는 거지. 문화가 아니고. 권력 가진 자들이 텔레비전에 너무 많이 나온다는 뜻이야. 그들은 성공할 확률이 더 높고 그들은 폭력을 당하기보다 폭력을 행사할 확률이 더 높아."
"그렇다면 권력 구조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쥔 자들의 판타지라는 말이로군." 내가 말했다. - P124

"사병이 지휘관과 섹스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는 답을 듣고 싶어 물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휘관이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맥락으로 보건대 그의 요점은 친밀성이 아니라 삽입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에게 삽입을 하면, 우월하던 자는 그때부터 우월하지 않게 된다. 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온 것을 그제야 이해했다. 우리 체제 안에서 섹슈얼리티는 권력의 문제라는 것이다. 씹을 하는 자와 당하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이 자신을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문화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삽입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표시다. - P154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떤 여자가 해준 이야기였다. 자기랑 같이 사는 남자가 자기한테 점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종종 밤에도 침실에 있다 말고 서재로 갔다. 여자는 그가 일을 하러 가나 보다 했는데 어느 날 따라가보니 그가 포르노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 있는 여자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와 경쟁해서 이길 방법이 없었어. 그 여자는 말을 안 하니까." 여자는 관계를 끝냈다. 관계라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P158

포르노는 나의 무의식적인 공상까지 바꾸어놓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나의 판타지는 대화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즉 어떤 여성을 봤는데 관심이 간다면, 즉시 ‘저 여자에게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하고 생각했다. 어떤 창조적이고 열띤 대화를 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포르노를 보았을 뿐인데도, 가끔 여자를 보면 저 여자의 음모는 무슨 색일까, 성기는 어떤 모양일까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건 질색이다. 나는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다. 곧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 P179

혼동에 빠져서 객체가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슬픈 일일 뿐이다. 그래서 벌거벗고 유혹하는 여자 사진들이 내 욕망을 자극하기보다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객체를 주체로 착각하는 정도가 심해서-모든 객체를 주체로 착각할 정도로-망상이 심해진 사람들은 때때로 병원에 수용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존재를 객체로 혼동하는 것은 슬프기보다는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훨씬 더 슬프고 훨신 더 가엾은 건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망상에 사로잡혀서 나무, 인간, 살아있는 지구를 보지 않고 그 대신 돈다발, 노동자, 자원으로만 보게 되면,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는 커녕 돈과 명예를 갖게 될 것이다. 아마도 어느새 기업의 최고 경영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 P181

15년 전쯤에 나는 네바다 주 북동부에 살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엘코 군에서는 곰이 한 번도 목격되지 않았다. 아마 반세기 동안은 곰이 살지 않았을 것이다. 곰 한 마리가 아이다호에서 엘코 군으로 넘어왔다. 곰은 겁에 질려서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목장 주인이 곰을 쏘아버렸다. 다른 곰이 또 넘어온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곰들이 그 지역에 살지 않는 것은 곰들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 P204

읽고 쓰는 것을 배웠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도구를 내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나는 내가 서 있는 곳, 즉 문명의 중심에서 문명에 더 큰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즉 인류에게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굶주리는 인도네시아 아이에 비해, 제3세계의 도시에서 여러 명의 아이를 기르는 가난한 아버지나 어머니에 비해, 그런 일을 하기가 훨씬 쉽다. 내가 좋은 일을 하기 위해 그런 특권을 더 가지려고 얘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힘있는 자리에 접근하기 위해 점점 더 심한 타협이라는 미끄러운 비탈로 내려가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특권-나의 성별, 피부색, 태어난 나라, 교육 정도에 기초한 특권-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으로 인해, 그런 특권의 기초를 흔들거나 뿌리뽑는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의무가 된다는 뜻이다. - P211

지구를 노예화하고,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것은 흑인 남자들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프리카 문화가 아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도 아니다. 그것은 백인들의 서양 유럽 문명이다. - P237

나는 백인이다. 교육을 받았다. 중상층계급에서 자랐다. 기독교인으로 컸다. 나는 흑인이 아니다. 원주민이 아니다. 히스패닉이 아니다. 나는 남자다. - P238

나는 내가 속하는 집단을 이해하고 싶고 우리의 공통된 역사를 이해하고 싶다.
흑인이 백인을 린치한 것이 아니라 백인이 흑인을 린치했다. 흑인이 백인을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백인이 흑인과 다른 백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인디언들이 백인을 절멸시키려 한 것이 아니고 그 반대였다. 이 모든 것을 낳은 사회적·문화적 심리학을 이해하고 싶다. - P238

포르노그래피처럼 아주 명백하게 대상화하는 것을 잠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물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셀 수 없이 많은 그보다 더 미묘하고 그보다 더 끊임없이 되물이되는 메시지, 우리가 보는 이미지들에 의해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더 많이 영향을 받을까? 의문시되지 않은 가정들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을까? 우리가 어떤 말을 선택할지 결정하게 하는 이야기, 우리의 학교 교육을 지금처럼 만든 이야기, 영화, 책, 신문,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
만약 이 이야기들이 한 가지 폭력만 폭력이라고 말하고 다른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고(즉 ‘변태‘라거나 ‘사업‘이라거나 ‘과학‘이라거나 ‘국익 보호‘라고)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믿게 될 것이다. - P262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노동을 하게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노동의 열매인 안락과 고상함을 즐기게 되어 있다고 이 이야기들이 말한다면, 우리는 신의 섭리를 따르고 있는 듯 보이는 이 사회 계약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자기 삶을 바치게 될 것이다. - P263

우리 문화는 우리 모두를 어떤 생각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우선하고, 우리의 삶과 타인들의 삶에 우선한다. 그런데 어떤 생각의 노예가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노예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가 묶인 줄의 끝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개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날들을 살아왔다. - P305

"여러분 중에는 내가 성 노동자로 남기를 택했으므로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당신들의 사회, 나의 사회, 내 조국 캄보디아가 나쁘다는 겁니다. 나 같은 소녀들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할 가능성 말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나와 내 여동생들 같은 어린 여자를 강간한 남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남자들이 나 같은 여자들의 서비스를 찾고 요구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다고 봐요. 힘있는 자들에게 돈을 벌어주기 위해 우리가 노예가 되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해요. 우리 가족이 그토록 가난한 것, 더욱 가난해지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해요. (…) 우리를 착취하고 우리의 품위와 돈을 빼앗아가고 때로는 우리 목숨까지 앗아가는 사람드은 자기 가족과 잘 살고 있어요. 왜죠?" (디나 찬) - P317

우리도 우리 앞에 놓인 제한된 선택지 가운데서 합리적으로 하나를 고른다. 그러나 비인도적인 체재가 제시한 비인간적인 선택지들을 거부하고 인간처럼 살기 시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호레이쇼 앨저 이야기의 기본 전제는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부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는 살펴보지 않으며 물론 그 답이 주어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부를 축적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가난에서 나온 것일 뿐 아니라 지구의 황폐화에서 나온 것이라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19세기 노예주인들은 자신이 누리는 부유함이 타인들의 불행에 기초하고 있음을 때때로 인정하는 정직함과 품위는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 P322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보자-이 상상 속 풍경이 황당하더라도 너무 심하게 웃지는 말기를. 경찰이 파업을 깨기 위해서 총을 쓰는 것이 아ㅣ라 회사 측이 협상에 나오도록 하는 데 힘을 쓰면 우리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 기업 최고경영인들과 정치인들에게 시애틀 경찰이 고무 총탄과 최루탄을 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세계무역기구(WTO)와 다양한 이른바 자유무역 협약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미국의 통치권을 다국적 기업으로 넘기는 배신을 저지른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스왓(SWAT)팀이 워렌 앤더슨(전 유니언 카다이드 사 회장-옮긴이)의 집 현관문을 깨부수고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보라. 또는 골프 코스의 후반을 돌고 있는 그를 스왓팀이 기습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 P353

가리폴리 전투, 사앗아 50만 명. 카르파티아 160만 명. 베르 160만 명. 솜 강 120만 명. 아루타. 샹파뉴. 루스. 여기까지 읽고, 그 이름과 숫자와, 그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고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개를 돌려버릴 수 있으니까. 으깨진 몸뚱이에 다리가 겨우 매달려 있는 남자는 아마도 내가 평생 잊지 못할 괴로운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이야기는 여전히 추상적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 P380

"역사를 통틀어 전쟁은 정복과 약탈을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간단명료한 본질입니다. 언제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지배계급이었고 그 전쟁에 나가 싸운 것은 피지배계급이었습니다. 판결을 받기 전에 뎁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래전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고 내가 지구상의 가장 미천한 존재보다 조금도 더 나을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 말한 것처럼 하층계급이 있는 한 저는 하층계급에 속합니다. 범죄가 있는 한 저도 범죄자 중 하나고, 감옥에 한 명의 영혼이라도 있다면 저도 자유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진 뎁스) - P388

두보이스(Dubois, 미국의 흑인운동 지도자 겸 저술가-옮긴이)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세계를 착취하는 자들은 이제 더 이상 호상(豪商)이나 독점 귀족이 아니고 고용주 계급도 아니다. 그들은 국가, 즉 단합된 자본과 노동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다." - P397

"대안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자본주의는 가진 자들에게 더욱 더 유리하게 되어가고 있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의 경제 제도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체제예요. 세계 사람들 절대 다수는 이 제도에서 이익을 전혀, 또는 거의 얻지 못해요."
"이익을 얻기는 고사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많지요." 내가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만 1990년대의 엄청난 경제 팽창 동안 믿기 어려울 정도의 부를 쌓았지만, 대다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그러면 이 모든 것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누구일까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 이 체제를 지배하는 사람들, 이 체제의 주식을 소유한 사람들, 그들이 이익을 얻어요. 미국의 신화 중 하나-우리 코드의 일부라고도 말할 수 있을텐데-는 자본주의에 이로운 것이 나라에도 좋다는 겁니다."
나는 계속해서 그의 말에서 자본주의 대신 문명을 넣어 생각하고 나라 대신 민중을 넣어보았다.(리처 - P463

권력을 쥔 자들이 그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사회적 목표를 정할 때(그 목표에는 수익 극대화가 포함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생산 극대화가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목표에 대해 너무 깊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단지 가능한 한 매끄럽게 사회의 목표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고 할 때, 그 문화는 끝없이 잔학 행위를 매끄럽게 저지를 것이다. 화물 위치를 옮겨서 앞 차축에 부담을 줄이는 것으로 기여를 하든, 땅속에서 석유를 더 효율적으로 짜내는 데 기여하든, 도서 유통회사나 출판 재벌들에게 돈을 벌어다주는 책을 쓰는 것으로 기여를 하든 마찬가지다. 관료주의 사회가 매끄럽게 움직이려면 우리 각자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 P493

그(램지 클라크)가 트리이던트 핵 잠수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잠수함 하나면 지구 절반에 있는 408개 도시를 없앨 수 있다.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계예요. 어떤 머리가 그런 기계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그런 잠수함의 존재에 대해 어떤 정당화 논리가 있을 수 있을까요? 감히 그런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그런 것을 가지려고 할까요?" - P506

"미국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에요." 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은 끔찍한 오해고 민주주의에 대한 중상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미에서의 금권정치 체제예요. 부자들의 정부지요. 부자가 멋대로 하는 나라예요. 부의 집중과 빈부 양극화에서 미국을 따라올 곳이 없어요. 우리가 칭찬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봐요.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록펠러와 모건 집안 사람들,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 도널드 트럼프 같은 부자들이에요. 매년 1,000만명의 유아가 굶어 죽는 대에 도덕적인 인간이 몇십억 달러를 모으고 싶을까요? 내 시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이 그것일까요?" - P506

1990년 전 세계가 2.5시간 동안 군사비에 쓴 돈이면, 천연두가 1970년대에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B1 폭격기 한대 값이면, 즉 2억8,500만 달러면, 대충 계산해도 전세계 5억 7,500만 어린이들에게 수두, 디프테리아, 홍역 등 기본 예방 주사를 맞힐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매년 2,500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비교는 강력하고 생상한 효과를 주기는 하지만, 그 돈이 폭격이에 쓰이지 않으면 좋은 데 쓰일 것이라는 암시를 담고 있어요. 그러나 만약 B1이나 B2가 취소되더라도 우리 정부는 그 돈을 예방 주사에 쓰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비전의 일부가 아니거든요. 그 아이들에게 예방 주사를 맞히는 것은 미국의 무역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램지 클라크) - P507

나를 포함한 우리들이 하는 일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적으로 쓸모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벌을 키울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적어도 그때 그 해가 끝났을 때에는 누군가가 먹을 수 있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살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것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우리가 인간적이고 인도적인 존재가 되도록 돕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안 해도 될 일을 만들어 하는 것, 뭔가 일이 필요해서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되는가? - P512

이 책은 서구 사회의 혐오에 대한 탐구로 시작해서 지구 위 삶의 끝과 함께 끝난다. 문제는, 구체보다 추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생명보다 생산을 높이 평가하는 것, 인간이든 강이든 북극곰이든 생명체보다 경제 제도(그 외 다른 제도)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문화적·개인적 역사를 전부 갖춘, 욕구와 희망과 두려움을 가진 이 흑인 남자, 이 중국인 여자, 이 아일랜드 남자로 보는 대신 검둥이나 중국 놈이나 아일랜드 놈은 어떠하다고 보는 선입견이다. 문제는, 여자들 자체보다 여자들 사진을 더 좋아하는 것, 여자의 존재 젗네, 여자의 몸과 마음과 슬픔과 기쁨보다 여자의 몸만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가보다 무엇을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능력에 대해 조각난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관계 속에서 기쁨을 얻을 사람들로 보는 대신, 사용해야 할 도구로 보는 것이다.
- P531

추상화의 우세라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내가 제안하는 것은 구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체와 사랑에 빠지길 부추기는 반체제를 나는 지지한다. 이 특정한 구체적인 나무, 이 구체적인 사람, 잠자리 날개에서 반짝이는 이 특저한 햇빛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능한 한에서 우리 주변 사람들 하나하나를 주체로 인식하기 위해서. - 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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