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비밀 (2disc) [일반판]
주걸륜 감독, 계륜미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와, 밥 먹다가 젓가락질을 멈추기를 여러번이었다.


1. 오글거림

와, 이세상 오글거림이 아니다. 진짜 깜짝 놀랐다. 주인공은 고등학생들인데, '상륜'은 전학온 예고에서 '샤오위'라는 여고생과 처음 만나게 된다. 첫만남에서 상륜은 샤오위에게 반하는데, 음악실에서 네가 피아노로 쳤던 곡이 무어냐, 물으니, 샤오위는 까치발을 하고 상륜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비밀이야."


하는게 아닌가. 와...세상 오글거림. 아니 이런 오글거림이라니. 이런 오글거림은 도대체 뭐지. 아무리 고등학생들이라지만, 아니 고등학생들일수록 더더욱 이런 오글거리는 행동은 안하지 않나. 게다가 수시로 '날 잡으면 말해줄게' 하고 자기 잡으라고 뛰는 씬이 나온다. 오...마이....갓.... 세상 놀래버렸네. 2008년 개봉작인데, 가만있자, 2008년에 내가 몇살이었더라? 그때는 이런 오글거리는게 자연스러웠던가. 귓속말로 '비밀이야' 하고 도망가는거, 나는 그간 살면서 연애에서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건데, '날 잡으면 말해줄게' 하고 도망가는 거, 그것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샤오위랑 상륜이 그거 너무 잘해서 깜놀. 어쩌면... 그래서 샤오위는 진정한 사랑을 받고 산것인가.. 나 잡아봐라 안해서 나는 연애가 항상 금세 끝났나.. 긴 연애는 나 잡아봐라 가 정답인가... 와, 까치발로 비밀이야 하는데 마라탕 먹고 있다가 중국당면 던질 뻔...




2. 피아노 연주

샤오위도 상륜도 피아노 전공하는 학생들이라 피아노 연주 장면이 많이 나온다. 특히나 전학생 상륜은 재학생인 피아노 전공자와 피아노 배틀 붙는데 너무 좋았다! 이 영화에서는 뭐니뭐니해도 다른 사람들이 늘 말해왔던 것처럼 피아노 배틀 장면이 명장면이 아닐까 싶다. 다시 열심히 밥을 먹다가,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멈춰서는 계속 화면만 봤다. 크-




3. 장르 전환

한시간 가량은 이세상 감성이 아닌 감성에 푹 젖어서 진행되는 영화인데, 나는 정말이지, '와 이세상 감성이 아니다' 이러면서 이 오글거림을 어쩔 줄을 몰랐는데, 갑자기, 와, '너 혼자 춤췄잖아' 라는 대사에 영화는 급속하게 장르를 변경하는것인가...........이거, 들은 적 없는데 호러였던가, 하고 밥먹다가 또 멈췄다. 오늘은 냉모밀과 히레까스 셋트를 먹고 있었다. 처음간 돈까스 집이었는데 히레까스의 고기가 아주 두꺼워서 '내일 다시 와서 모밀 치우고 히레까스만 먹어야지' 생각했다. 돈까스 소스에 겨자 섞어서 먹으면 너무 맛있다.

.

.

.

.

무슨 말 하고 있었지?

아, 장르, 장르는 호러가 되는것인가, 사람들 의리 있게 입다물고 이것이 호러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것인가, 깜놀했다가, 그러나 이것은 변함없는 로맨스였음에.....



여러차례 밥먹기를 멈추게된 영화였지만, 그래도 남김없이 다 잘 먹었고, 대만 로맨스는 나랑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이 영화 하나 보고 생각하다가(아니야, 나 또 뭐 본 거 있지 않나?), 그래도 한 편쯤은 더 보도록 하자, 생각하다가, 설마 다른 영화에도 까치발로 비밀이야~ 이러면서 도망가는 장면 나오는건 아니겠지, 2008년 감성이라 그런거겠지, 생각한다.



끝.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6-0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포스팅 보면서 여러 차례 흐흐흐흥 웃었어요.
아 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세상의 오글거림이 아니라니 어떤 지경인가 정말 궁금하지만 안 볼 거 같아요. 앜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다락방 님 단발머리 님은 창비 책 2권 뭐 신청하셨게요? 궁금하죠?
‘날 잡으면 말해줄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6-03 14:54   좋아요 0 | URL
이를 어쩌나요? 단발머리님이 무슨 책을 받으셨는지 저는 이미 알고있지롱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고뇌와 죽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 여주는 말을 할 때도 가끔 똑바로 서서 하지 않고 고개 약간 15도 정도 기울여서 얘기를 하더라고요? 왜저렇게 얘기하지? 진심 궁금했습니다...........................................피아노 치는 장면만은 진짜 좋았어요! 으흐흐흐

잠자냥 2020-06-03 15:11   좋아요 0 | URL
아잉참, 메일 새로 받고 새로 신청하셨다니까요. ㅋㅋㅋ 그건 모르죠?
‘날 잡으면 말해줄게~‘(고개를 15도 각도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왠지 유행어 될 거 같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6-03 15:13   좋아요 1 | URL
뭐..뭐...뭐라고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세상에나 네상에나!!! 잠자냥님 잡으러 뛰어야겠네요? 거기서욧!!

=3=3=3=3=3=3=3=3=3=3=3=3=3=3=3=3=3

단발머리 2020-06-03 15:2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그 쪽으로 뛰지 마시고요. 진지하게 물어볼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니까 다락방님 이메일 못 받으셨어요? 창비세계문학 리뷰대회 팀장이 본명 걸고 어제 이메일 보냈는데 말입니다. 일단 그게 확인이 되야 ‘나 잡아봐라‘가 가능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제 차례죠? 나 잡아봐라!!!

다락방 2020-06-03 15:30   좋아요 2 | URL
제 생각엔, 아마도 제 이메일을 받고 ‘원하는 걸 말해봐라‘가 된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러니까 제가 5/26에 이런 메일을 보냈더란 말입니다.



랜덤으로 보내주신다고 하는데, 저는 이미 창비세계문학전집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바,
<젊은 베르터의 고뇌>와 <이반일리치의 죽음>은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가급적이면,
<주군의 여인 1,2>, <대위의 딸>,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중에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1-10부터 다 가지고 있고요 드문드문 미하엘 콜하스, 패니와 애니 또 여러권 가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이렇게 보내서 답장도 받고 책도 주군의 여인으로 받았어요!!

단발머리 2020-06-03 15:41   좋아요 1 | URL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 놀랍고 기쁜일은 창비에 탄원서를 보내신 잠자냥님과 창비 직원 중에 알라딘 글 읽는 사람 많아요 하시며 어쩌면 상황을 전달하셨을 수도 있는 순오기님, 그리고 이런 이메일을 보내신 다락방님의 수고와 노력의 결합으로서 이루어진 듯 합니다.

어제, 창비에서 이멜을 보내와서는 여자저차 불만 후기를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다. 우리에겐 이런이런 사정이 있었으나 아무튼 미안하다. 좋아하는 책 두 권을 보내드리겠다.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더랩니다. 우리 이메일 공유하는 사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저는 ***을 보내달라 하였더랬죠. 하하하!

잠자냥 2020-06-03 15:43   좋아요 1 | URL
이거슨 집단지성의 힘(잉?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6-03 16:07   좋아요 1 | URL
역시 말은 하고 볼 일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6-0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저는 여태 1인 시위하시겠다는 잠자냥(20.여)님하고, 거기에 가세하시겠다는 다락방(24.여)님 덕택인 줄 알았는데 다락방 님은 또 지하에서 이리 맹활약을 하셨군요. 감격입니다. 흑흑흑....

다락방 2020-06-03 16:08   좋아요 1 | URL
아무튼 그래서 결과적으로 모두가 다 원하는 책을 받을 수 있게 된것이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모두 다행입니다. 꺅 >.<

저는 <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을 가장 원하긴 했는데, 딱 두 권만 정해서 얘기할 걸 그랬어요. 괜히 선택의 여지를 줘서 1등으로 원한건 안왔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험버트는 40대 중반의 남자로 글을 쓰며 살아가고 삼촌이 남겨준 돈으로 딱히 궁핍하지 않게 생활하고 있다. 그런 험버트가 잠시 샬로트라는 과부에 집에 머물게 되는데 거기에서 그녀의 딸인 롤리타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이 때 롤리타의 나이는 열두살 이었다. 애초에 미성년 여자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이상증상을 가진 그였지만, 롤리타를 보고는 그 욕망이 최고조에 달한다. 샬로트가 없는 틈을 타 롤리타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고 롤리타를 훔쳐보고 싶어하고 만지고 싶어한다. 그를 향한 연정을 품고 있던 샬로트는 그녀의 마음을 그에게 고백하며 자신의 마음은 이루어질 수 없을테니 자신의 집을 떠나달라 그에게 말하지만, 그는 롤리타의 곁에 있기 위해 샬로트와 결혼하기로 한다. 롤리타가 캠프에 참가하느라 집을 떠나 있는 틈에 험버트와 샬로트는 결혼을 하고 그 소식을 캠프에 가 있는 롤리타에게 알리고 부부생활을 시작한다. 험버트는 롤리타와 빨리 만나고 싶고 떨어져있고 싶지 않은데 샬로트는 십대의 롤리타가 험버트를 귀찮게 할까봐 걱정하며 그녀가 캠프에서 돌아오면 기숙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 자신의 계획과는 반대로 일이 흘러가자 그는 불면증을 핑계로 수면제를 처방받아와 샬로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샬로트는 그가 죽이기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험버트가 숨겨둔 일기장을 읽어보니 그 안에는 롤리타에 대한 더러운 욕망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캠프의 롤리타에게 편지를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써 급한 마음에 우체통에 넣으러 가다가 사고를 당한 것. 만약 그녀가 그 때 죽지 않았다면 험버트의 욕망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졌을테고 롤리타는 엄마와 함께 지금까지의 삶을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죽는 바람에 험버트의 더러운 욕망은 처벌받는 대신 실현된다. 그는 캠프로 찾아가 롤리타를 데려오고 엄마가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녀를 데리고 1년간 여행한다. 롤리타를 만지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한 채로 지내다가 롤리타의 엄마가 죽고나서는 그녀를 강간하기 시작하는 거다. 물론 험버트는 그것을 '사랑을 나눈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사십대의 남자와 열두살의 여자가 하는 섹스가 '사랑을 나누는 것일 리' 없다.



그렇게 일년여를 여행하다가 정착해 롤리타를 학교에 보내지만, 험버트는 롤리타에게 집착한다. 롤리타가 남자아이들과 노는 것도 금지되어있다. 롤리타와 험버트가 사는 집에서는 학교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험버트는 롤리타가 자기를 떠날까봐 걱정하고, 자신이 주는 용돈을 롤리타가 모으고 있다는 것에 두려워한다. 자신의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어딜 갔나 초조해하며 찾아야 하고 혹여라도 자신과 섹스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런 롤리타가 학교에서 연극을 하게 되었고 연극을 아주 재미있어 하게 되었는데 공연을 앞둔 일주일전, 롤리타는 험버트에게 다시 여행을 하자고 한다. 이번에는 자기가 가자는 대로 가자고. 그렇게 다시 여행을 하면서도 그의 신경은 언제나 롤리타가 다른 남자애들과 히히덕거리지 않을까에만 쏠려있다. 어느 날 몸이 아픈 롤리타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틈을 타 험버트로 부터 도망친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찾아 헤매기를 3년, 그 사이에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데, 롤리타로 부터 돈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렇게 찾아간 롤리타는 열일곱의 나이에 결혼과 임신을 한 상태였고, 남편의 벌이가 좋지 않아 돈이 필요했던 것. 험버트는 롤리타에게 자신이 가진 돈을 충분히 쥐어준 뒤, 자신을 떠나게 만들었던 남자를 찾아가 살해할 결심을 하고, 그대로 한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헤밍웨이는 까페에서 우연히 보게된 여자를 자신의 글에 등장시키고 싶어하다가 그녀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아 이내 포기하고 자신이 쓰던 글을 마저 쓰는 일에 대해 기록한다. 글은, 쓰는 사람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특히나 소설은 지어내는 이야기인지라 거기에는 내가 등장시키고 싶은 인물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등장시킬 수 있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 안에서 나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룬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만나본 적 없던 멋진 남자를 등장시킬 수도 있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 안에서 세상은 이미 성평등을 이루고 있을 수도 있고, 성범죄자는 사지가 찢겨 죽을 수도 있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 안에서는 나에게 모든 권한이 있어 그리고 싶은 세상을 그릴 수 있는 거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악인을 등장시키거나 범죄자를 등장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를 조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폭력을 드러냄으로 인해 폭력의 정당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악인을 등장시키고 범죄를 등장시켜서 그것들이 더 유해함을 말할 수 있다. 그건 충분히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를 꾸며내지만, 어쩔 수 없이 글쓴이의 마인드가 글쓴이의 글로 인해 드러나기도 한다. 영원한 사랑을 말하고자 했던 <달의 영휴>는, 그러나 독자인 내가 읽기에 아동성애를 위한 변명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어린 아이랑 사랑하는 노인남자에겐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꼴이랄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재독이다. 이미 몇 해전에 읽었던 책이고, 그때도 글을 참 잘 썼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최근에 읽고 싶은 책이 생겼는데 그 책을 읽기 위해서는 준비과정으로 <롤리타>를 다시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괴로움을 감수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괴롭다는 건 그 안에 분명한 아동성학대가 담겨있다는 걸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읽으면서 나보코프가 이 책을 왜 썼을까, 를 당연히 여러차례 생각했다. 옮긴이는 해설에서 나보코프는 굳이 예술이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최소한 나보코프가 아동성애를 위한 변명으로 이 글을 쓴 건 아니라는 거였다. 아동성애를 조장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보코프는 아동성학대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지는지 그 누구보다 명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이 책 속에서 험버트는 아동성애를 가지고 있는 성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성애가 드러나면 안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은 숨겨야 할 것임을,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롤리타를 만지고자 할 때는 그것이 노골적으로 만진다는 티가 나서는 안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고, 롤리타의 '엄마'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것도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다. 엄마가 있는 곳, 보호자가 있는 곳에서는 그 아이를 만져서는 안된다, 큰일난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인거다. 이런 이상성애(아동성학대 범죄욕망)를 가진 험버트는,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는 그대로, 어릴적에 스스로 상처 받은 경험이 있던 사람인가? 험버트는 그렇지 않았다. 험버트는 유복한 집에서 자랐고 교육도 잘 받은 사람이었다. 험버트를 둘러싼 어른들은 험버트를 폭력적으로 대하지도 않았고, 마땅히 그러하게도 성학대도 당하지 않았다. 험버트는 자신이 아동에 대해 성적욕망을 갖게된 경위를, 자신의 십대에 사귀었던 십대 소녀와의 이루지 못한, 다다르지 못한 섹스 때문이었다고 얘기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해도, 그것이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변명이나 핑계는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무수히 많고, 그들 모두가 범죄자가 되지는 않으니 말이다. 험버트는 자신의 아동성애가 세상에 드러나면 안되기에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결혼을 한다.



뚜쟁이의 앨범이 어떻게 데이지꽃 화환으로 연결되는지는 모르지만 내 안전을 위해서 나는 곧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규칙적인 생활, 집에서 만든 음식, 결혼에 딸린 온갖 관습들, 잠자리에서의 상투적인 절차, 또 누가 알겠는가, 어디선가 도덕적인 가치가 꽃피고 정신적 능력이 생겨나 나를 도울는지. 위험스럽고 타락한 내 욕망을 정화시키지는 못한다 해도 조용히 다스릴 수 있을지는 모른다. (p.36)

험버트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건데, 그렇다면 그의 아내는... 그의 아내의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책을 읽는 내내 너무 가슴이 아팠다. 롤리타가 당한 성학대 때문에. 험버트는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롤리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롤리타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으며 자신들의 섹스를 '사랑을 나눈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열두살 아이에게 가해진 것은 섹스일 수 없고, 그것은 강간이다. 롤리타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험버트와 내내 둘만 함께 있으면서 그동안 내내 그에게 성적대상이 된다. 험버트는 자신은 참으려 했지만 롤리타가 처음에 유혹했다고 말한다. 정말 역겹기 짝이없는데, 그러니까 자신은 롤리타의 순결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성경험이 있는 까진 소녀였다는 거다. 롤리타가 이미 성경험이 있든 없든 설사 천번 있다고 하더라도, 사십대의 험버트가 열두살의 롤리타를 안을 합당한 이유는 결코 되지 못한다. 롤리타는 험버트와 같이 지내면서 화가 날 때면 '당신이 날 강간했을 때' 라고 그것이 강간임을 얘기한다. '엄마가 살아있었을 때도 날 범하고 싶어했잖아' 라며,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역시 드러낸다. 무엇보다 나는 이 강간이 롤리타의 엄마가 죽고 나서 이루어졌다는 것 때문에 너무 슬펐다. 이 범죄는 롤리타가 '고아'인 상태에서 벌어진다. 롤리타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사십대의 남자 험버트는 엄마도 없는 고아 롤리타를 롤리타의 집으로부터도 데리고 나와 롤리타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내내 데리고 다니는거다. 롤리타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도 없고 그 누구도 롤리타를 지켜주지도 보호해주지도 못한다. 롤리타가 가끔 밤에 혼자 울때마다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 롤리타를 안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것이 범죄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무엇보다 험버트가 비열한 건,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그렇듯이, 이 아이가 가장 약한 상태를 노렸다는 거다. 아이라는 존재 자체로 어른보다 약한게 사실이지만, 그 아이를 둘러싼 주변 어른들이 있다면 그 아이를 그렇게 함부로 하기는 쉽지 않았을테니까. 롤리타에게 아빠 엄마가 다 있었다면, 그들과 함께 살았다면, 험버트의 강간은 그저 욕망에 그치고 실현되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롤리타에겐 아무도 없었고, 무엇보다 험버트는 롤리타에게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롤리타의 아버지를 자처한 사람이 아니던가. 나는 이점이 너무가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리고 현실의 뉴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약한 상태의 아이가 학대와 폭력의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범죄란 원래 비열한 것이지만, 약한 사람이 더 약해진 틈을 타 공격을 하는 건 더 비열하다. 그 비열한 어른 남자의 욕망에 몇 년간을 피해 입은 롤리타 때문에 몇 번이나 울고 싶었고, 그러나 그 피해로부터 벗어났다 해도 평생을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앞으로 롤리타의 삶은 대체 어떻게 될것이란 말인가. 롤리타는 험버트로부터 성학대도 당하지만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만약 네가 이 일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나는 감옥에 가는 걸로 끝나겠지만, 너는 그렇다면 위탁가정을 전전하다고 의지할 곳도 없어 살기가 힘들어져, 그러니 입닥쳐야 해, 라고. 열두살 아이가 열세살이 되고 열네살이 되는동안 듣는 말로 지나치게 가혹하다. 이것이 이 아이의 어린시절이라니.



롤리타가 다른 사람과 함께 도망쳤고, 나는 그 사람이 험버트와 롤리타의 관계를 알고 롤리타를 거기에서 꺼내주려는 것인줄로만 생각했다가, 롤리타를 데리고 도망친 연극부 남자선생이 영화에 출연시켜준다고 꾀어 롤리타에게 포르노를 찍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내내 아파야 했다. 한 번 범죄의 희생자가 되었던 아이는 이렇게 또다시 범죄에 노출된다. 롤리타가 함께 있던 아버지가 친아버지였고 아이에게 진득한 사랑을 주는 그런 보호자였다면, 연극부 선생이 롤리타를 납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험버트가 롤리타를 찾기 위해 롤리타의 옛집에 찾아갔을 때 거기서 피아노를 치는 소녀를 본다. 피아노를 치던 소녀는 험버트를 발견하고는 놀라서 자리를 피하고 그 때 아이의 아버지가 나온다.




내가 살던 집에 들어가볼까? 투르게네프의 단편에서처럼, 거실의 열린 창문에서 이탈리아 음식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낭만적인 영혼이 피아노를 치는가, 로의 사랑스런 다리 위에 햇살이 비치던 그 미혹의 일요일에 뚱땅거리는 피아노 소리는 없었는데.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내가 풀을 베던 잔디에서 황금빛 피부에 갈색 머리, 흰 바바지를 입은 아홉, 열 살쯤 된 님펫이 크고 검푸른 눈에 야생의 황홀함을 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 눈이 참 아름답구나, 라고 별 뜻 없이 그저 의례적인 찬사로 그녀를 즐겁게 해주려 했는데, 그녀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고 음악이 갑자기 그쳤다. 그러고는 땀이 번들거리는 거칠게 생긴 거무스름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노려보았다. (p.394)



롤리타를 처음 만난 그때, 롤리타에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면. 롤리타를 바라보는 험버트를 거칠게 쏘아봐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린 존재에게 보호해줄 어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가. 그래서 그 아이가 맞이하게 된게 대체 무엇인가. 험버트는 어른으로서 그리고 나중엔 아버지로서, 대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건가. 내가 험버트를 죽인다고 해도 롤리타의 어린 시절은 그대로일 것이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 합당한 벌이 내려진다 해도 롤리타의 어린 시절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너무 괴롭다. 너무 괴롭다. 그녀가 살아갈 인생은, 험버트가 없었다면 다른 식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괴롭다.



그녀는 테니스보다 수영을 좋아했고, 수영보다 연극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주장한다. 만일 그녀 내부의 어떤 것이 나에 의해 부서지지 않았더라면-아, 그때는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지만!-그녀는 그 완벽한 폼에다 이기겠다는 의지를 덧붙여 진짜 여성 챔피언이 되었을 것이라고. 팔 밑에 라켓 둘을 끼고 윔블던에 있던 돌로레스. 아라비아의 낙타를 선전하는 돌로레스. 프로 선수가 되었을 돌로레스. 영화에서 여성 챔피언을 연기할 돌로레스. 돌로레스와, 흰 머리에 겸손하고 말 없는 코치인 남편, 늙은 험버트. (p.316)


나보코프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학대가 그 어린아이를 망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또 아이가 가장 약한 틈을 타 비열하게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성학대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롤리타 때문에 몇 번이고 울고싶었고 가슴 아팠는데, 이 책을 읽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런 마음을 갖지 않겠는가. 롤리타를 읽는다면 롤리타의 학대받은 어린 시절에 함께 아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롤리타는 왜이렇게 치명적으로 나쁜 소설의 대명사가 되었는가. 나는 내내 그것을 찾아 헤매야 했다. 우선, 아동을 성적대상으로 묘사할 때 지나치게 자세하고 아름답다는 데 있었다. 만약 아동성애라는 범죄적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묘사에 치중해 자신의 욕망이 더 발현될수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롤리타가 당한 학대라든가 아동 성범죄가 일어나는 비열한 순간들에 대한 것을 캐치하지 못하는게 아닐까. 그것이 이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나쁜 영향이 아닌가 싶었던 거다. 

이 괴로운 소설이 왜 그렇게 악명을 얻게 된 것인가, 생각하면서, 이 소설은 결코 아동성애를 조장하는 게 아닌, 오히려 아동성범죄가 일어나는 배경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음을 잘 말해주는데, 그런데, 왜 굳이 아동성학대에 대한 이야기여야 했는가, 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했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다루는 것이, 굳이 아동성학대여야 했을까. 자연스럽게 필립 로스 의 <휴먼 스테인> 생각도 났다. 필립 로스는 그렇게나 재미있고 고민이 많이 담긴 훌륭한 이야기를 써내면서, 그러나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를 치명적인 멍청이로 묘사한 거다. 필립 로스는, 그렇게나 잘 쓰는 글솜씨로, 굳이 그래야했을까, 가슴이 아팠는데, 나보코프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아동성학대이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정말 가슴 아픈건, 이 책의 옮긴이가 쓴  이 책 말미의 <작품 해설>을 읽고나서였다. 아, 나보코프여, 당신이 이 소설을 쓴 건 잘못이었네요. 왜? 


비평가들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소설이었기 때문에.


나는 작품 해설을 읽으며 몇 번이나 연필을 가지고 물음표를 그려야했다. 세상이,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난 후의 감상을 드러낸 비평가들이, 이 옮긴이를 포함하여, 다들 멀쩡한 사람들인건가, 책을 읽어보긴 한건가 싶었다. 



처음 읽으면 내용이 전통적인 도덕 관념을 상당히 벗어나 읽는 이에게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40대 남자가 열두 살의 어린이와, 그것도 법률상의 아버지로서 딸과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부도덕한 소설이라니! 그러나 읽을수록 이 괴물 같은 주인공의 눈물은 우스꽝스런 느낌에서 동정으로 바뀌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어느 순간엔가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친다. 포르노 소설, 또는 도덕적 금기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출판의 거부라는 시련을 겪고 하마터면 재로 변해 버릴 뻔한 소설이 이제는 현대 주요 작가의 대표작이 된 걸 보면 소설 어딘가에 감동의 근원이 숨겨져 있으리라. 작가가 그것을 보물찾기라도 하라는 듯 교묘하게 숨겨놓았으니 비평적 반응이 다른 소설의 경우보다 더 구구한 것은 당연한 듯싶다. -작품해설, p.433-434


험버트에 대한 동정으로 바뀐다니,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왜 동정하는가. 롤리타가 떠나서? 남들 몰래 '사랑'을 해야 해서? 자신의 사랑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해서? 대체 여기 어디에 '감동'의 소지가 될 것이 있단 말인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숨겨야 할 것, 감춰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숨기고 감추는 거다. 아동에 대한 성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감춰야 해서 괴롭다고? 그건 동정의 여지를 줄 수 없는 부분인거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 치료를. '감동' 만큼 롤리타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또있을까. 


문제는 계속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옮긴이의 문제가 아니다.



작품의 프로이트적 심리 분석이나 알레고리, 신화적인 분석등을 나보코프 자신이 거부하는 탓인지 [롤리타]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은 주인공 험버트의 도덕성을 토론하는 경우가 많다. 라이오넬 트릴링은 이것을 페트라칸 시인들의 로라에 견줄 만한 순수한 사랑이야기로 보며, 더글러스 파울러는 험버트의 도덕성을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험버트는 샬로트를 죽이지 않았으며, 변함없이 롤리타를 사랑한다. 험버트를 먼저 유혹한 롤리타는 이미 성적으로 더럽혀졌으며, 퀼티는 험버트의 왜곡된 악을 상징하는 바 그를 죽임으로써 험버트는 도덕적으로 정화되었다는등의 해석이다.

리이L. L. Lee는 작품의 스토리가 전개됨에 따라 험버트는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롤리타를 가두어둔 것은 죄악이지만 행복하게 해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은 충분히 동적적이다. 부드러움과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험버트에 비해, 퀼티는 이런 사정을 모르기에 그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부드러움과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험버트에 비해, 퀼티는 이런 사정을 모르기에 그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험버틀 둘러싼 사회와 퀼티가 죄인인 험버트보다 더 부패했다는 식의 분석이다. 레바인도 소설의 끝에서 험버트는 죄를 깨닫고 참회하며, 자신의 악덕을 순화하기 위해 퀼티를 죽인다고 험버트에게 동정을 표시한다. -작품 해설, p.438-439



아아, 나보코프의 잘못은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거다. 비평가들로 하여금 개소리를 하게 만든 거. 험버트를 동정하게 만든 거. 그건 나보코프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맙소사, '변함업이 롤리타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롤리타를 사랑한다면 롤리타에게 보호자로서 어린 시절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해줘야 했다. 롤리타를 '변함없이 사랑'한다면서 몇 년간 감금하고 강간하는게 말이 되는가. 도대체 저 비평가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게다가 아동납치, 성학대에 대해서 도대체 얼마만큼의 도덕적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인가. 가두어두었지만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으니 동정한다고? '가두어둔다'와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가 함께 올 수 있는 말인가? 비평을 하는 사람들이 대가리가 비었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납치하고 성학대했지만 먹여주고 학교보내주고 옷도 많이 사주니까 괜춘괜춘해~ 이러는거야? 대체 아동성학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어째서 감금하고 성학대를 일삼은 자에게 동정하는가, 비평가들이여...




당시의 몇몇 비평가들이 롤리타는 망명자 나보코프가 본 아메리카라는 상징적 해석을 내렸던 것에 비해, 최근의 해석은 이와 같이 험버트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쪽이다. 그가 일견 괴물처럼 보이는 부도덕한 인간이지만, 그의 변함없는 사랑과 참회는 동정을 느끼기에 충분하고 퀼티를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분석에도 불구하고 [롤리타]에는 험버트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 이상의 아픔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작품 해설, p.439


나보코프의 문제, 이 롤리타의 문제를,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밝혀내지 못하다가, 작품 해설에 이르러서야 알아차린다. 나보코프는 남자 비평가들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소설을 썼다. 그 누구보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문제가 많은 것이고, 그걸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를 이렇게 짜임새 있게 구성했지만, 그러니까 나중에 자신이 빼앗아버린 롤리타의 어린 시절을 참회하는 것 역시, 나는 나보코프가 부러 넣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금과 가스라이팅과 강간이 이루어지는 그 비열한 상황에 대해 얘기하고 또한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까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놈의 비평가들은 자꾸 그걸 가지고 '진실한 사랑'운운하고 있는 거다. 대체 어른 남자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 그건 상대를 학대하고 괴롭혀도 내가 충분히 사랑해 사랑해 해주면 완성되는 것인가? 역겹기 짝이없다. 

나보코프는 험버트의 입을 빌어, 아이를 보호하는 장치가 법적으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걸 책에 넣어두었다.




여러분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진실로 법적인 상황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아직도 모른다. 아, 나는 이런저런 것들을 조금 배우기는 했다. 앨라배마 주에서는 보호자가 피보히인의 주소를 법원의 허락 없이 바꿀 수 없다. 미네소타 주에서는, 그곳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친척이 열네 살 이하의 아이를 영원히 맡게 되는 경우 법원은 어떤 간섭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질문: 숨막히게 예쁜 사춘기 귀염둥이의 의붓아버지, 한 달 동안 의붓아비였고 상당 기간은 신경증이 있는 홀아버에, 작지만 독립적인 수입이 있고, 유럽 태생이며, 이혼을 했고 정신병원에도 조금 있었는데 그런 사람도 친척이 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호자가 될 수 있는가? 만약 안 된다면, 나는 복지국에 신고를 하거나, 탄원서를 제출하여(어떻게 탄원서를 제출하나요?) 법원 사람이 유순하고 수상쩍은 나와 위험한 돌로레스 헤이즈를 조사하게 할 수 있나요? 크고 작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내가 내밀히 조사한 결혼, 강간, 양녀등에 관한 책들은 국가는 어린이들의 최고 보호자라는 알쏭달쏭한 말 외에는 별로 알려주는 게 없었다. 필빈과 자펠-내 기억이 옿다면-은 결혼의 법적 측면에 대해 논한 아주 두꺼운 책에서 엄마 잃은 딸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의붓아버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어느 순진한 노처녀가 먼지 앉은 뒷창고에서 애써 구해다 준 사회 봉사 책자(시카고, 1936)는 나의 가장 친한 벗인데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다. <모든 미성년자가 보호자를 가져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 법원은 수동적이어야 하고 오직 아이가 굉장히 위험한 상태일 때만 개입한다.> 내 결론은 보호자란 오직 그가 경건하게 공식적으로 희망했을 때에만 임명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의 출두 명령을 받아 그의 잿빛 날개 두 쪽을 펼치는 데 몇 달이 걸릴 것이고 그 사이 고운 악마 아이는 법적으로 내버려진다, 돌로레스 헤이즈의 경우처럼. 그러고 나서 출두 명령이 오겠지. 판사의 몇 마디 물은, 변호사의 확인 답변, 웃음, 고개를 끄덕끄덕, 바깥의 부슬비, 그리고 날짜가 정해진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멀리 떨어져, 쥐처럼 구멍 속에 웅크리고 있다. 법원은 오직 돈 문제가 개입될 때만 열을 올리는 법이지. -p.234-235




나보코프의 문제는 이 책을 읽을 성인 남자들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토록이나 가해자의 서사에 집중하고 가해자에게 동정적이 되는 시선을 가진 남자들이, 이 소설을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마음으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가해자가 참회하는 씬에서 동정을 느끼며, 늘 잘해주고자 했던 가해자의 마음을 사랑으로 포장한다. 어른남자 독자들은 이미 가해자에 대해서는 순수한 마음이 된다.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이 비열한 범죄를 진정한 사랑으로 보다니, 보다보다 진짜 별꼴을 다보는 거다. 자, 열받지만 작품 해설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인용해보겠다.




이상과 같은 소설의 줄거리에는 사회에 대한 얘기, 현실적 문제, 정치 이야기나 작가의 도덕적 주장 등은 전혀 실려 있지 않다. 마치 동화 같다고 할까. 예를 들면 샬로트가 죽는 장면이나 퀼티가 죽는 장면에는 전혀 현실감도 긴박감도 없다. 오직 리얼한 것은 롤리타라는 인물 묘사와 험버트의 감정이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에서 리얼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이것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운명적이고 격정적이고 마술적인 것, 극도의 자제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광적인 것. 롤리타 급우들의 이름을 시처럼 읊던 험버트,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던 험버트,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던 험버트, 그녀를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으로, 감시하면 할수록 그녀가 더 포악해지는 사랑의 역효과를 깨닫지도 못할 만큼 험버트는 롤리타의 노예였다. -작품 해설, p.442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에요.....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라니. 갑자기 이 세상 모든 집착 스토킹 남들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 그러니까 롤리타를 읽으면서도 이것을 사랑이라 생각하잖아. 그걸 읽는 독자들은 그러니까 헤어진 여자친구 찾아가서 다시 만나주지 않는다고 폭행하고 그러는 남자들인거야. 나는 너 싫으니까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해서 집착해대는 남자들이 롤리타를 읽는다? 사랑인거죠. 상대가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시달리는데도 '나는 너가 좋아' 이러면, 이것이 그냥 사랑이 되는 매직... 야, 세상에, 어떻게, 열두살 아이를 감금 강간해놓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냐..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볼 수 있어. 롤리타에서 리얼한 게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사랑이란 게 뭔지에 대해서 기초부터 공부해야 한다. 내가 널 만지고 싶은 이 마음, 너가 싫다고는 하지만, 너가 어리긴 하지만, 그런데 너 만지고 싶어, 이건 사랑이야... 이딴.. 와...... 나보코프는 잘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독자들을 상대로 아동성범죄자를 등장시키면 안되는 거였다. 그게 나보코프의 큰 잘못이다. 개인적으로는 십대 소녀에 대한 육체 묘사를 너무 많이, 그렇게나 잘 쓰는 글솜씨로 해놔서 유감이었는데, 성인 남자들이 이걸 사랑으로 말하고 험버트 동정하는 거 보니, 나보코프의 잘못은 애초에 이 작품을 썼다는 데 있다. 가해자에게 이입하는 성인남자들이 세상의 절반인 이 세상에, 나보코프는 아동성학대 소설을 써서는 안되었다. 거기에서 그러면 안된다를 읽는 사람보다 그것은 사랑이다 를 읽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에 이 소설을 내놓아서는 안되는 거였다. 나보코프는 성인 남자독자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는 십대 시절을 성학대 당하며 살아야 했던 롤리타 때문에, 그런 롤리타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데, 거기다 대고 사랑 타령하는 놈들 때문에 세상은 암흑이 되어버렸다. 원래도 밝지 않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롤리타를 이 소설속에서 꺼내오고 싶다. 꺼내와서 허브공원에 데려가서 여기서 뛰어놀라고 하고 싶다. 올림픽 공원에 데려가서 함께 산책하고 싶다. 누군가 롤리타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본다면, 롤리타 앞을 가로막고 서서 뭐야 이새끼야, 두 눈 부라리며 욕해주고 싶다. 




험버트가 한 건 사랑이 아니고 성학대다. 이걸 사랑으로 읽는 독자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런 소설을 쓴 나보코프가 잘못했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0-05-3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지런도 하셔라. 언제 이렇게 길디 길게 쓰셨대요. 롤리타에 대한 만감이 교차하는 다락방님의 페이퍼. 비록 롤리타를 읽지 않은 저는 쭉 따라 읽었답니다. 뭔가 비위가 대단하시다.. ㅋㅋㅋ..
인용해주신 부분에서 이부분 특별히 역겹네요.
˝리이L. L. Lee는 작품의 스토리가 전개됨에 따라 험버트는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롤리타를 가두어둔 것은 죄악이지만 행복하게 해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은 충분히 동적적이다. ˝ -> 대부분의 데이트폭력 혹은 학대 가 이런 거 아닌가요? 폭력-잘할게-폭력-잘할게! 이거를 반복하니까 피해자는 온탕과 냉탕 왔다갔다 하면서 혼란스러워하다 정서적으로 미치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한결같이 쭈욱 폭력적인 폭력은 피해자도 해석해내기 쉽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험버트의 행동은 도덕적 성장이 아니라 학대의 본질 같은데요??... 그걸 저렇게 쓰다니.. 가해자에 감정이입 오져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가해자에 너무 이입하는 독자들 싫다...!

다락방 2020-06-01 08:34   좋아요 1 | URL
제가 금요일밤에 이 책을 다 읽고 가슴을 움켜쥐면서 토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너무 졸려서 일단 자고(응?) 토요일에 쓰고 가려고 했지만 이래저래 바빠서 못쓰고.. 일요일에 써야지 하면서도 토요일 지나친 음주가무로(응?) 또 너무 뻗어있는라 계속 미루다가, 이렇게 미루기만 하다가 못쓰겠다 싶어서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서재 책상으로 가 다다다닥 뿜어냈습니다. 저는 이게 너무 가슴이 아팠거든요. 롤리타가 당한 학대도 그렇지만, 아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즐거운 유년시절이 몽땅 사라져버렸어요. 험버트는 롤리타로부터 인생을 낚아챘습니다. 너무 괘씸하고 화가 나요. 이 슬픈 소설을 읽고 그런데 많은 비평가들이 사랑타령 하는거 보고 저는 뒤로 나자빠지는 줄 알았어요. 다들 사랑에 미친놈들 같아요.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에 미치니까 세상이 암흑이 되는겁니다. 하아.

소설 읽으면서 소설의 등장인물에 공감하는 것도 괴로울 때가 많지만, 독자인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괴롭기도 한 것 같아요. 롤리타의 고통을 보기만 하는게 너무 괴로운 독서였어요. 아이들의 인생을 갈취하는 어른들은 사라져야 마땅해요.

단발머리 2020-05-31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보코프가 험버트의 입을 빌려서 아이에 대한 법적 보호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지적한 지점이 눈에 띄네요. 전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이런 부분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어요. 롤리타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안타까워하는 다락방님의 마음이 너무 절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험버트에게 동정을 표하는 수많은 평론가들의 이해력 부족은 의도적인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험버트에게 진지하게 감정이입한게 아닌가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됩니다. 좋은 사유 잘 읽고 갑니다.



다락방 2020-06-01 08:38   좋아요 0 | URL
나보코프의 치명적 잘못은, 이해하지 못할 독자들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함부로 아동성학대를 다뤘다는 것입니다. 아마 나보코프도 이럴줄은 몰랐을 것 같아요. 진정한 사랑이라뇨. 미친놈들이 사랑에 환장했어요 진짜. 아이의 고통과 빼앗긴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앞에 놓여있는데, 사랑이라뇨. 자기 사랑 챙기면 전부입니까? 어쩜 그렇게 이기적인가요. 너무 고통스럽고 슬픈 독서였어요. 잃어버린 롤리타의 유년시절은 대체 누가 책임져줍니까. 사십대의 아저씨가 그걸 책임져주나요? 어쩌면 거기다대고 사랑을 말해요? 사랑에 환장한 놈들 다 똥통에 처박혀 죽었으면 좋겠어요 ㅠㅠ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님. 읽는 동안 너무 슬펐어요. ㅠㅠ

잠자냥 2020-06-0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리타>에 대해선 전 양가감정이 있어요.
처음 읽을 때 그 역겨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는데, 그 역겨움을 넘어서니... 작품이 아름다워서(그만큼 나보코프가 잘 쓴 것이지요)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심지어 저는 험버트를 동정하는 부류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을 좋아한다는 건 문학적으로 좋아하는 의미이지, 마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참, 이런 작품을 문학적으로나마 좋아하고 있는 제가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하면서... 암튼 <롤리타>는 참 제게 모순적이 작품이에요.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을 읽을 때도 그렇고요. -_-;;

어제 이 긴 글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많이 했어요.
<롤리타>는 문학동네 버전이 번역이 매우 괜찮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걸로 한 번 더 읽어볼까 늘 벼르고 있던 작품인데, 지금 읽으면 제가 좀 생각이 달라질까요? ㅎㅎ

다락방 2020-06-01 11:36   좋아요 1 | URL
잠자냥 님의 양가감정이 저는 뭔지 알겠어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양가감정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 경우에도 일단 이 책을 읽으면서 롤리타의 처지 때문에 너무 슬펐지만, 아동성학대에 대한 책을 뭐 이리 글을 잘썼단 말인가...하면서 막 마음이 찢어질 것 같더라고요. 글 왜이렇게 잘쓰는건가요? 글 너무 잘쓰잖아요. 엉엉 ㅠㅠ 그래서 너무 속상했어요. 리뷰에도 언급했지만, 이런 글솜씨로 굳이 아동성학대 얘기해야 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저 역시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난 후에도 복잡한 마음이 들었더랬어요.
저도 이 책 다시 읽기 전에 문동 번역이 정말 좋다고 문동판으로 추천 받았는데, 가지고 있는 책이 민음사라 그냥 민음사로 읽었어요. 읽으면서 몇 번 가독성 떨어지는 문장들 만날 때마다 흐음, 역시 문동으로 갈 걸 그랬나 싶었지만, 어쨌든 읽었습니다.


저도 오만년전에 읽고 지금 다시 읽으니 감정이 많이 달라진 걸 느껴요. 저는 처음 읽을 때 변태새끼..라는 정도의 개념만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만년만에 다시 읽어보니 너무나 글을 잘쓰는 나보코프가 구성도 치밀하게 성학대가 이루어지는 과정까지 다 써놓았더라고요. 이번에 읽으면서 롤리타의 사라진 유년시절 때문에 저는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ㅠㅠ


저는 문학이 해야 할 일을 나보코프야 말로 잘한게 아닌가 싶어요. 아동성학대라는 소재 때문에 저는 여전히 자꾸 마음에 걸리지만, 이렇게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난 후에도 사람을 휘몰아치게 만들잖아요. 문학은 이래야 되는게 아닐까 싶어요... 재독하시게 되면 감상 들려주세요!

감은빛 2020-06-0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들은 왠지 이 책을 읽으면 안 될것 같은 생각이 강박처럼 들어요.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더더욱.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을 혹은 읽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아동성애자임을, 변태임을 드러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예전에 문학동네 롤리타가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을 산 건 아니고 다른 책들을 잔뜩 사고,
알라딘 굿즈 중 표지가 롤리타 표지인 알라딘 수첩을 받았어요.
어느 회의 자리에서 옆 자리에 앉았던 선배(여성주의 활동가)가 이 수첩 표지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마치 제가 아동성애자인 것처럼 반응해서 저도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날 이후로 그 수첩은 밖에 갖고 다니지 못하고 집안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답니다.

암튼 그런 핑계로 이 책을 못 읽었다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네요.
남성인 제가 읽더라도 중년 남성이 어린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장면들은 불편할 것 같아요.
이렇게 힘들어하시면서도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으셨다니!
다락방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새삼 깨닫습니다.

다락방 2020-06-03 14:4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고 나보코프가 더 궁금해졌어요. 나보코프의 다른 책들도 읽고 싶었는데, 국내에 번역된 것 중에 제가 다른 것도 읽어보긴 했더라고요.
책은 어차피 독자의 몫이잖아요. 나보코프가 어떻게 썼든 독자가 해석하는대로 작품은 다가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면에서 볼 때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많은 성인 남성들에게 아주 잘못 해석되어 잘못 다가가게 된 경우인 것 같아요. 저는 아이를 성학대하고 아이의 유년시절을 빼앗은 성인 남성을 동정하고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해줄 거라고는 정말이지 생각도 못했어요. 롤리타가 밤에 혼자 운다는 게 저는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말예요. 어휴..

매우 슬프긴 했지만, 그렇게 깊은 감정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보코프는 정말 글을 잘쓰는 작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무릇 문학은 독자를 쥐락펴락하는게 아닙니까.

날시 좋아요. 오늘 점심 먹으러 나갈 때는 땀이 나더라고요! 저는 여름이 좋아요! 으하하하하하하하 (딴소리)

유부만두 2020-06-0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롤리타와 그 엄마가 너무 멍청하게 그려진 것도 너무 싫었어요. 삐걱거리고 기괴한 험버트도 물론 견디기 어려웠고요. 하지만 읽으면서 이게 아름답다, 고 생각은 안 했어요.
다들 칭송하는 ‘문체‘가 그닥... 이었거든요. 그 문체를 즐기자고 이 전체 소설을 택할 이유가 안 보였어요.

그나저나 제게 명성과 다르게 지겹도록 싫은 소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에요.
베르테르가 그토록 바라는 순수한 사랑...은 상대 여자의 의사는 아랑곳 없이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주인공이 감정 이입하는 하인의 경우) 살인까지 하는 거잖아요. 소설도 막 잘 쓴 거 같지도 않은데 왜 우린 아직도 괴테의 소설을 명작에 넣어주는 걸까요.

다락방 2020-06-04 13:43   좋아요 0 | URL
저는 롤리타가 멍청하게 그려졌다는데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네요. 오히려 그 나이때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여지거든요. 갈 곳도 없고 보호해줄 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롤리타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알고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려고 하는 호기심과 자유에의 의지가 있다고 느껴졌거든요. 아이가 연극에 대한 재능과 흥미를 보인다는 것도 꽤 상징적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이 책이 굉장히 대단하게 생각됐어요. 롤리타는 아동성범죄의 피해자이지만 그렇다고 성적대상화 되는 것에서만 멈추는 게 아니라, 인격을 가진 소녀이고 자기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입체적인 인물임이 드러나서요.

아동의 육체를 묘사하는게 너무 노골적이고 성적 대상화 되어 있어서, 그걸 너무 잘써서, 아, 나보코프 이걸 어떻게 이렇게 쓰나, 자기 자신이 설마 아동성애자인건가, 생각할 지경이었고 또 실제 성범죄자들이 그 묘사를 읽으면서 충동을 느끼고 범죄로 연결될까봐, 그 지점이 두고두고 안타깝긴 한데(왜 하필 아동대상 성범죄에 대한 소설을 썼나..), 저는 나보코프의 이 책을 읽으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됐어요. 구석구석 너무 치밀하게 잘 썼더라고요. 저는 나보코프의 소설을 다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유부만두 2020-06-04 13:55   좋아요 0 | URL
아... 롤리타의 의지를 읽으셨네요. 전 인물들 전부가 자기 생각은 하나도 없어 보였어요.
(하지만 다시 읽어볼 용기는 나지 않아요)
롤리타가 완전히 험버트의 의도를 몰랐다고는 할 순 없겠죠. 하지만 그 줄거리나 상황이 너무 끔찍해요.

전 나보코프의 ‘절망‘이 좋았어요. 그리고 ‘문학강의‘도요.
그런데 그 책들이 ‘롤리타‘로는 연결되지 않았어요.

다락방 2020-06-04 14:02   좋아요 0 | URL
[절망]을 오래전에 읽었는데 뭐라고 써놨나 찾아보니 2011년에 지루했지만 읽기를 잘했다고 써놨네요. 이것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2020-06-04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낙태가 불법이었던 시절에 아니 에르노는 임신을 했고 낙태를 해야 했다. 그녀의 나이 이십대초반, 대학생일 때였다. 그녀는 혹여라도 낙태해줄 의사가 있지 않을까 병원을 방문해보지만 언제나 싸늘한 시선을 받고 돌아선다. 엄마한테도 임신이 들킬까봐 초조하고 나는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알려진대로 뜨개질바늘을 자기가 스스로 자기 안에 넣어보기도 한다. 이내 포기하지만..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그녀를 임신시킨 남자는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살아왔던 그대로의 삶을 여전히 그대로 살아갈 뿐. 남자와 여자가 '함께'한 섹스인데 고민과 고통은 모두 여자의 몫이라니. 게다가 육체적 정신적인 피해가 모두 온전히 여자의 몫이라니.


아니 에르노는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이미 기혼인 남자지인으로부터 혹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자신의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는다.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너의 일에게 그녀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한 여성의 이름을 알려주긴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녀에게 섹스를 제안한다. 그로서는 너무 안전한 일이었다. '이미 임신한 여성이니' 자기가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던 셈. 아니 에르노는 그 날의 일을 회상하며 그 남자를 딱히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사실 아니 에르노를 좋아하고, 그녀의 <단순한 열정>을 매우 사랑하지만, 그러나 .. 오늘 아침까지도 내내, 아니 에르노가 그렇게까지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는 정말이지, '남자 없이 못사나?' 싶을 정도로 남자를 사랑했던 것 같다. 하아.



그녀를 도와줄 여자가 드디어, 나타나고 그녀에게 어디로 가면 수술을 (몰래)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며, 그에 해당하는 비용도 빌려준다. 그러나 그 수술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간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차있다.

성적으로 순결한, 더럽혀지지 않은 여자를 원하는 남자들이 많지만, 그러면서 자기들은 언제나 여자를 만나면 섹스하기를 종용한다. 섹스를 남자랑 여자랑 하는데, 아니 생각을 해봐, 늬들이 섹스하는 상대가 여잔데 어떻게 순결한 여자를 바라는거야? 대가리 텅 빈 부분? 돈주고 성을 사면서, 그러나 성을 파는 여자들을 창녀라고 욕한다. 여기에서 어떤 모순을 감지하지 못하는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렇게 좋다고 섹스해 놓고서는 임신을 하면 나 몰라라 한다. 낙태를 불법으로 만들어놓고는 사생아는 사생아라며 욕하고. 낙태하면 또 낙태했다고 흉보고. 오래전 읽었던 소설 중에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일전에 낙태한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남자가 몹시 분노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뭐 어쩌라는건지 모르겠다. 어쩌라고? 섹스한 후에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도 여자의 몫이고 임신하고 낙태하는 것도 여자의 몫이고, 여기에 들어가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도 모두 여자의 몫인데 이러거나 저러거나 다들 지랄들이여.. 임신하면 모른척하는 남자도 남자지만, 하아, 이미 임신한 여자니 콘돔없이 안전하게 섹스할 수 있을 것 같아 덤벼대는 남자는 또 세상 무슨 쓰레기여... 그러면서 또 낙태 수술은 안된대.. 세상이 대체 여자한테 어떻게 살라는건지 모르겠다.



낙태수술을 한 여자는 생각보다 많다. 낙태가 합법이 아닌데도 그렇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



젊은 아니 에르노가 고민하는 내내 함께 고민했다. 영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에서 낙태수술을 하고 나오면서 무너지듯 울던 여자의 모습이 내내 겹쳤다. 낙태수술 한 후에도, 심지어 수술할 때 같이 가주지도 않고 돈을 주지도 않아서 내가 대신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그 남자랑 다시 만나던 친구도 떠올랐다.

여자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한 남자들을 그리고 세상을 너무 봐주면서, 이해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심지어 사랑까지 했어.


보통 한국 사람들에 대해 얘기할때 '한(恨)의 정서' 라고들 하는데, 나는 이 '한'이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있을 것 같다. 다들 가슴속에 홧병 품고 살고 있을것이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unhanje 2022-10-07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홧병을 품고는 사는데 부르주아적 삶을 포기도 못하죠 ㅎㅎ. 낙태를,, 제 주변에선 미혼은 아니고 기혼녀들 낙태를 몇 번 봤고 저도 따라가본 경험도 있는데 여자들은 순종적 동물들 같이 행동하는 것 같아요. 말 잘 듣는 순종적 동물,, 아니 에르노가 어떻게 살았건 느꼈건 상관없이 제가 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전 여자들에 대해 연대의식을 버린지 오래에요. 에르노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 대충 이해는 하는 나이가 되서리.. 에르노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 그녀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가 아닐까 싶네요. 그것에 분노하기엔 그녀가 너무 많은 걸 겪고 알았기에.. 저도 별로 분노는 느끼지 않았을 거 같아요. 걍 웃기는 작자군 정도.. 그런 수작 거는 작자야 뭐 세상 살다보면 흔하게 보는 작자들이니까요.

junhanje 2022-10-07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쁜 일이 너무 많으면 사소한 나쁜 일은 별로 다가오지도 않게 되죠. 슬픈 일이지만요. 그럼에도 그 작자가 그녀에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됐다면 역시 소홀히 넘기진 않았다는 거죠. 세상은 참,, 그렇게 생각하면서 떠올리겟죠. 큰 슬픔 위에 작은 슬픔,, 을 얹어주는 그 작자,, 슬픔 위에 또 슬픔,, 세상사가 그렇더란. 세상이 나쁘면 절대 나쁜 일들의 연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하리오 플라스틱 드리퍼 - 레드, 1~2인용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플라스틱인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전문적으로 내려마시는 사람도 아니고 걍 한 번 사보는 거니까 나름 내면의 쇼부를 친건데 아주 잘샀다. 저렴한 것도 마음에 들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무엇보다 드리퍼와 함께 케이스 안에 들어있던 계량 스푼! 12g 까지를 계량해 넣을 수 있는 스푼인데, 이게 완전 쏙 맘에 들어서 이 드리퍼 구매는 별 다섯의 만족감을 주었다. 나 그동안 커피메이커에 내려 마실 때 걍 무작위로 봉지째 부었던 게으른 사람이건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숟가락 있어서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단 한 번 12g  계량해서 원두 넣었고 그 다음부터는 그냥 단순히 퍼서 옮기는 용도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숟가락 개마음에듦.


오늘 아침의 뜨끈뜨끈한, 막 원두 덜었던 숟가락 사진 첨부한다. 숟가락 만세!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5-22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숟가락 탐나네요;; 저도 대충 집어 넣는데;;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5-22 11:36   좋아요 0 | URL
숟가락 너무 좋아요. 드리퍼보다 더 좋지 뭡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5-22 11:45   좋아요 0 | URL
락방 님께 땡스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5-22 11:46   좋아요 0 | URL
너무 하찮은 금액이 가겠네요. 36원이냐;;;;???

다락방 2020-05-22 11:4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게 어딥니까. 안주셨으면 없는 돈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깨비 2020-05-22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첫 하리오 드리퍼가 윗쪽은 유리로 되고 받침은 플라스틱으로 된 (씻을 때 꼈다 뺐다 할 수 있음) 합체형 모델이었는데요. 오래 썼어요. 근데 얼마전에 보니까 플라스틱 받침 아래쪽 표면 (커피 폿트나 머그컵에 얹을 때 닿는 부분)이 벗겨지더라고요. 오랜동안 수증기에 노출되서 그런건지 씻을때 수세미로 너무 박박 문질러 그런건지 하여간 작은 먼지처럼 바스라진다 해야하나.. 커피속으로 들어가는 거 같아서 찜찜해 가지고 암튼 그래서 얼마전에 돈을 좀 더 써서 세라믹으로 된 것으로 바꿨어요. 저처럼 플라스틱 벗겨질 때까지 너무 오래 쓰진 마시고 써보고 맘에 드시면 세라믹 모델로 업그레이드 추천합니다. 😉

다락방 2020-05-22 13:30   좋아요 1 | URL
오오, 깨알같은 팁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이걸 얼마나 쓸지는 모르겠어요. 워낙에 게으른 인간인지라 사실 제가 드리퍼를 이용해 내려마시게 될 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어쨌든 샀으니까 얼마간 이용은 하겠지만 오래 못갈것 같고.. 혹여라도 제 예상과 달리 제가 오래 사용하게된다면, 북깨비 님의 말씀을 꼭 기억하고!! 좋은 걸로 갈아타도록 할게요. 플라스틱이라는 건 사실 저도 약간 찜찜한 부분이거든요. 후훗. 제가 근면성실하게 커피를 내려 마시는 사람이 되어.. 아니지, 사실 저는 게을러서라기 보다는 성질이 급해놔서 잘 못내려 마셔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마음의 여유를 찾는 사람이 되어 커피를 쫄쫄쫄 내리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된다면, 말씀하신대로 세라믹으로 업그레이드 하도록 하겠습니다. 뽜샷!!

반유행열반인 2020-05-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테인리스에 티타늄 코팅한 드리퍼를쓰는데 종이필터를 안 써도되서 쓰레기도 줄고 커피맛도 종이냄새 안 배어나와 좋습니다. 대신 드리퍼 관리는 신경이 쓰이네요. 내린 커피 마시기 전 뜨거운 물로 드리퍼 먼저 헹구는 부지런함이 있어야...안 그러면 다음커피 내릴 때 막혀서 찔찔쫄쫄...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 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
마야 뒤센베리 지음, 김보은.이유림.윤정원 옮김 / 한문화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그 자리에 남자들이 더 많기 때문에, 라는 결론이 나온다. 남성 의사들과 연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관심 분야를 연구한다. 그러니 남성들에게 흔한 질병을 연구하고 거기에 따른 약을 만들어내고 또 교과서에 싣는다. 생리적으로 남자와 다른 여자는 그렇게 교과서에 실린 증상과는 다른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질병으로 진료되지 못하고, 설사 병명이 나오더라도 그 약이 여성에게 맞지 않을 확률도 높다. 여성에게 임상시험한 약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들이 호소하는 많은 고통, 통증을 의사들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이라며 환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그렇게 집으로 돌려보내진 여자들은 다른 의사를, 또 다른 의사를, 또 다른 의사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돌려보내진 환자들은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이십년까지 자신의 병에 대한 진단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드디어 자신이 앓던 고통에 대한 병명이 나오면, 그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이에 여성들은 '나처럼 돌려보내지고 병명을 진단받지 못한 채 이 병으로 고생하는 여자들이 또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른 곳에 있는 여성 환자들과 연대하며 단체를 만든다. 그 단체들이 활동하고 연구 기금을 끌어 모으고 그렇게 그 병은 '여성들이 앓는 히스테리'에서 하나의 병명을 갖춘 채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활동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그러나 저자는 끊임없이 재차 강조한다. 그 일은 의료계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러니 여성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여성들의 통증들이 히스테리라고 진단 내려지는 것은 명백히 의사들의 오진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게다가 여성들은 아프지 않으면서도 아프고 싶어서 아픈 척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편견을 그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생각을 하게되면 자신을 찾아온 이 여성환자 역시도 그런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아는 증상이 아니기 때문이 이 여자는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이군, 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여자들은 고통을 당하다가 제대로된 약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울증이나 정신과쪽 약을 처방받는 여성환자들 중의 일부는, 아마도 정말 어떤 신체적인 질병을 갖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됐다. 의사들이 그동안 보았던 교과서에 없던 증상이라 단순히 '머릿속 증상'이라고 오해하는 게 아닐까. 이 책에서 가장 처음 언급되는 심장질환도 여성에게 더 많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비전형적'이기 때문에 심장질환으로 진단받기까지 무척 오래 걸린다는 사례가 나오는거다. 심지어 진단 받지 못하기도 하고. 왜 여성의 증상은 교과서에 나오는 증상과 다를까? 왜 여성의 증상은 의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을까. 왜 '비전형적'일까. 그것은 환자의 기준이 남성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몸이 아픈 것도 힘든데 의사들은 환자의 고통이 가짜라고 말한다. 내가 아프다는데 왜 날더러 가짜라고 하는거야. 가짜라고 말하는 의사들 때문에 여자들이 죽었다. 여자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참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구나.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으로만 죽는게 아니라, 비전형적인 증상을 나타내서 제대로 된 진단도 받지 못한채, 자신이 앓는 병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 채로 죽어가기도 해. 


이 책은 당연히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읽어봐야겠지만, 보통의 여자들도 읽어보기를 바란다. 어쩌면 내가 앓고 있는 병이 의사가 말한 우울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환자의 입장에서 다른 환자들과 연대하며 자신이 앓고 있는 고통을 알리고 이것이 병이라는 걸 인정받는 길은 힘들고 고되다. 의사나 박사라면 어떤 질병에 대해 밝혀내고 연구하기가 환자들보다 수월한것은 너무 당연할 터. 역시 제약회사를 포함한 의료계에도 더 많은 여자들이 자리잡아야 할 것 같다.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의사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성혐오가 우선 사라져야 하지만, 교과서의 내용도 달라져야 할테니까. 애초에 공부할 때부터 기준은 여성환자도, 남성환자도 모두 포함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하아. 너무 빡쳐서 글을 잘 못쓰겠다. 이만 쓴다 ㅠㅠ




"나는 인터넷을 찾아 헤매면서 스스로 진단을 내렸고,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의사를 만났으며, 인터넷으로 다른 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댄스 수업 같은 곳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먼저 진단받은 후, 인터넷 환자단체에서 추천받은 의사를 찾은 환자들을 만난다. 인터넷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처음 발견한 이후 이십 년 넘게, 혹은 시작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150년으로도 볼 수 있는 시간 동안 극심한 고통을 일으키는 흔한 질병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환자가 진단부터 주치의 교육, 질병을 밝혀내고 치료하는 데 필요한 과학연구 지원금 모금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했다. 환자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 (p.393-394)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이 상호작용하면서 고치기 어려운 수준까지 고착되었다. 여성에게 더 많이 생기는 질병과 증상, 그리고 여성의 몸에 대해 의사가 단순히 잘 모르기 때문에 여성 환자가 질병을 호소해도 무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의사에게 여성 환자는 신뢰할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선입견이 있어서 여성의 증상을 무시하는 걸까? 지식의 부재일까, 신뢰의 부재일까? 내 생각에는 양쪽 모두다.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은 이 지점에서 너무나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의학은 여성의 몸이나 건강 문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여성의 질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성의 질병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의학은 여성의 몸이나 건강 문제에 대해 잘 모른다. - P28

남성만을 기본값으로 설정한 연구는 모순에 빠지기도 했다. 1960년대 초에 ‘에스트로겐 농도가 낮아지는 폐경기가 오기 전까지는 여성이 심장질환에 걸릴 위험이 낮다‘는 사실을 관찰한 연구자들이 여성 호르몬 치료법이 심장질환에 효과적인 예방법인지를 연구했는데, 연구에는 남성 8,341명과 여성 0명이 참여했다. (의사들은 폐경 후 여성에게 에스트로겐을 무더기로 처방해서 1970년대 중반에는 여성의 1/3이 호르몬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도 여성을 대상으로 호르몬 치료의 임상연구를 최초로 실시한 것은 1991년 이후였다.) - P45

여성건강운동 활동가들은 더 나은 신약 규제와 정보에 대해 충분히 알고 사전 동의하는 것을 연구 대상자의 권리로 요구하는 청원을 했다. 여성에게 잠재적으로 혜택을 줄 수 있는 치료법에 대한 임상시험에, 여성이 스스로 위험을 가늠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여성의 ‘행위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정책은 가상의 태아에게 미칠 이론적인 상해를 논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 태도는 환자 개개인을 가르치려 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 전체가 안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탈리도마이드와 디에틸스틸베스트롤의 대참사는 1977년 식품의약국이 발표한 금지 조항의 기폭제가 되었고, 가임기 여성 전체를 연구 대상자로 꺼리는 상황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건 모두 가임기 여성 전체가 아닌 임신부만 금지했더라도 막을 수 있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런 약을 대중에게 판매하기 전에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으며, 위험도에 대한 증거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 P52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에게만 임상시험을 하고서 약을 여성에게 판매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논의의 중심이 보호주의 쪽으로 기우는 현상을 신약 임상시험에서는 여성의 과소 대표성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외에 다른 생의학 연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심장질환은 여성의 주요 사망 원인이기도 한데, 심장질환의 위험 요소에 대한 미스터피트(다중위험요소조정실험) 연구에서 여성이 배제된 이유를 보호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다. 또 노인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여성이 왜 ‘인간의 정상적인 노화 현상‘연구에서 배제되었는지도 해명하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을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연구자의 해명에 따르면 연구소에 여성 샤워실이 없어서 남성만 연구 대상으로 뽑았다고 한다.) - P52

여성에게 주로 영향을 미치는 질병이 연구 의제에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지만 고치기는 쉽지 않다. 여성 건강운동 활동가들은 역구 계획을 제안하고, 연구 자금을 지원하고, 연구 결과를 출판하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에 자연히 남성의 관점과 관심사를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국립보건원에 있던 소수의 부인과 의사 중에 한 명이었던 플로렌스 하셀틴Florence Haseltine박사는 로런스와 와인하우스에게 "나는 이 현상이 악의적이거나 고의적인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의사들에게 각자 관심 주제에 대해 연구하라고 하면, 50대이고, 남성인 의사라면 모두 심장질환을 연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학 연구에서 연구자가 ‘관심 있는 주제‘는 연구자 자신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이기 마련이다. - P54

1990년에 슈뢰더 대변인이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에 자금을 쓴다. 남성이 대다수인 연구 집단은 유방암보다는 전립선암을 더 걱정하기 마련이다."라고 언급했듯이 말이다. - P55

당시 성·젠더의 차이를 그저 ‘일상적인 관행‘으로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고 승인받아 시장에 나온 약은 수없이 많다. 여성건강연구 사무국장 클레이턴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 사례는 비단 엠비엔Ambien(졸피뎀의 상표명-편집자)뿐만이 아니다. 이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수많은 약이 성·젠더의 차이를 보이며, 그중에는 잘 알려진 것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도 많다."라고 밝혔다. 수많은 약이 여성을 대상으로는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았거나, 여성을 대상으로 했더라도 차이점을 드러낸 증거가 무시됐다. 그러니 남성과 비교할 때 여성의 50~70%가 약의 부작용을 더 많이 겪는 것도 당연하다. - P71

19세기 말에는 또 다른 새 전공이 히스테리와 신경장애 치료법에서 부인과와 경쟁했다. 바로 신경과다. 초기 미국 신경과 전문의들은 부인과 치료법을 무시하면서 전기요법, 비소나 아편 등의 약물, 실라스 위어 미첼Silas Wier Mitchell 박사의 악명 높은 ‘휴식 요법‘등을 실험했다. 미첼 박사의 환자로 치료에 불만을 품었던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은 자신의 유명한 단편 소설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에서 미첼 박사의 휴식 요법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환자는 몇 주 동안 어두운 조명이 켜진 방 침대에 누워 의사와 간호사만 만날 수 있고, 살찌는 음식을 먹는 일과 편지를 받는 일 외에 독서나 글쓰기 등 다른 활동은 금지당한다. 이 치료법은 너무나 ‘쓰디쓴 약‘이라 미첼 박사가 환자에게 치료가 끝나고 병이 나았다고 말했을 때, 환자는 미첼 박사의 말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있다. - P100

오랫동안 비평가들은 히스테리든, 신체화든, 스트레스로 인한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이든 심인성 질환이라는 개념에 오진의 위험이 크게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논쟁은 영국 정신과 의사 엘리엇 슬레이터 Eliot Slater 가 1965년에 쓴 사설에서 한 경고다. 히스테리 진단을 너무 자주 내리는 의사는 자신이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의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경고했다. 슬레이터 본인을 포함한 런던 국립병원에서 1950년대에 히스테리를 진단받은 환자 85명을 추적한 결과, 9년 후 환자의 60%이상이 뇌종양과 뇌전증 같은 기질성 신경계 질환을 진단받은 것이다. 이 중 열두 명은 사망했다. "히스테리 진단은 무지를 위장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풍성한 임상 오류의 원천이다. 사실 착각일 뿐만 아니라 유혹이기도 하다."라고 슬레이터는 결론 내렸다. - P120

이쯤 되면 여성은 자기 충족적 예언의 실현을 위해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의학이 여성 증상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여성은 실제로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으로 더 많이 진단받는 듯하다. 이런 증상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은 약물 부작용일 수도 있고, 남성만 대상으로 연구한 질병의 비전형적인 증상일 수도 있으며, 여성에게 더 흔하다는 이유로 심인성 질환으로 추정해 의학이 거의 연구하지 않은 기능성 신체화증후군 증상일 수도 있다. 의학계에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심인성 질환으로 보는 경향이 깊이 파고들어 있다. 이 지식의 간극은 여성이 히스테리나 건강염려증에 걸리기 쉽고 신체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이 고정관념은 다시 여성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설 때,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할 수 있든 없든 간에 의사가 여성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 P136

여성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에 빠지기 쉬운 환자로 분류하는 순간, 의사는 여성의 증상이 ‘스트레스를 받아서‘라고 빠르게 결론 내리고, 의학적 원인을 밝히기 위한 정밀검사를 하는 대신 항우울제를 처방하며 이 끝없는 순환을 악화시킨다. - P136

그러나 불확성실의 시대에 일단 환자를 믿어주고,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 실제라는 가정이 기본이 되며, 환자가 말하는 증상을 믿고, 만약 이것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증상이라면 이를 설명할 의무는 의학이 맡아야 할 것이다. 여성에게는 이런 기본적인 신뢰가 너무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 P152

실제로 2000년에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실린 논문은 심장마비 증상으로 미국 응급실 열 곳에 실려 온 수천 명의 환자 기록을 분석해서 오진으로 퇴원당환 환자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 추정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오진받은 심장마비 환자가 최소 1만1천 명이라고 한다. 55세 이하의 여성은 다른 환자들에 비해 집으로 돌려보내질 확률이 7배나 높았다. 오진의 결과는 대단히 심각했다. 집으로 돌아간 환자의 사망률이 두 배나 높았기 때문이다. - P165

이는 심장마비의 증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증상은 교과서를 벗어나 더 다양하게 나타난다. 남성 연구를 통해 도출된 대표적인 증상은 극심한 가슴 통증과 왼쪽 팔을 타고 흐르는 통증으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나이 지긋한 과체중인 백인 남성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의자에 털썩 쓰러지듯 앉는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할리우드 심장마비‘로 알려지면서 문화적인 인식 속에 스며들었다. 이 상황은 의학 교과서에도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여성, 특히 폐경 전 여성이라면 심장마비가 왔을 때 ‘비전형적인 증상‘을 더 많이 보이며, 증상이 며칠에서 몇 주 동안 이어지기도 한다. 목, 목구멍, 어깨, 등 위쪽의 통증이나 체한 증상, 숨이 차는 증상, 메스꺼움이나 구토, 발한, 불안감, 눈앞이 깜깜해지는 증상, 어지럼증, 일상적이지 않은 피로감이나 불면증을 들 수 있다. - P171

1996년 국가 차원의 설문조사에서는 의사의 2/3가 증상에서 성·젠더의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2년 미국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1/5 이하만이 메스꺼움이나 피로감 같은 심장마비의 비전형적인 증상을 알고 있었다.
증상의 차이는 여성이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동안 치료받을 시기를 더 늦춘다. - P172

심장질환에서 젠더 격차의 근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지 더 이해하기 쉬운 이유가 있다. 이것은 결국 자명하게도 여성은 처음부터 심장마비로 진단받을 가능성이 적기에 심장마비로 치료받을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 베리 메르츠는 트로포닌 검사법의 문제점에 대해 "여성이 치료받지 못하는 좋은 이유와 나쁜 이유가 있다. 좋은 이유는 그 원인을 우리가 해결할 수 있기에 좋은 것이다. 여성과 남성은 다르며, 그로 인해 진단에 차이가 생긴다는 중요한 변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여성의 증상이 교과서적인 사례가 아닌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성의 위험 요인을 그저 ‘비전통적인‘ 요인으로 인식하고, 여성의 증상을 ‘비전형적인‘ 증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의학이 오직 남성만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 P173

전형적인 자가면역질환 환자가 전형적인 자가면역질환 환자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았는데, 이는 여성이 이미 다른 방식으로 정형화됐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이나 중년 여성이 피로감이나 다른 모호한 주관적인 증상을 호소한다면? 이 환자는 스트레스를 받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신체화한 것이다. 사실 의사가 스트레스를 줄이라는 권고와 함께 항우울제를 처방해서 집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모든 여성 환자를 대상으로 자가면역질환을 의심해보기만 해도, 최첨단 신기술 진단센터나 수련의 과정의 개선 없이도 자가면역질환 진단율이 크게 개선될 것이다. 자가면역질환이 여성에게 얼마나 흔한 질병인지, 의사들이 이를 얼마나 많이 놓치고 있는지 고려한다면, 이는 상당히 믿을만한 주장일 수 있다. - P213

물론 고통의 심각성을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이라면, 통증을 가볍게 보이게 하는 전략에는 명백한 위험이 따른다. 만성통증을 앓는 여성은 종종 히스테릭하지 않게 보이려고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를 의료진에게 숨기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만성통증 관리법에서 의사와 환자 간의 의사소통을 연구한 2007년 논문의 저자들은 "여성 환자는 자신의 통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과 부정적인 젠더 전형성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그들의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더해 로런의 충수염 오진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의사들은 남성 환자에게나 통증을 축소하는 태도를 예상하지 여성 환자에게는 기대하지 않는다. - P266

의료계, 그리고 문화 전반에는 환자의 90%가량이 여성인 섬유근육통 환자를 특히 치명적으로 업신여긴다. 여성 혐오로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외음부통과 섬유근육통 환자인 작가 에이미 베르코위츠Amy Berkowitz는 저서 [압통점(Tender Points)]에서 온라인에서 수집한 섬유근육통 환자에 대한 댓글을 공개했다. "섬유근육통 환자는 장애인 수당을 챙기려는 끔찍하고 뚱뚱한 여자다. ‘일하는 건 피곤하니까, 돈을 주든지 약을 줘!‘라는 식이다. 다른 사람이 열심히 일할 때, 집에 앉아 리얼리티 쇼나 보는 게으른 자들이다. 이들의 71%는 뚱뚱한 여자로,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본 적이 없다. 인정하기 싫어도 이것이 사실이다." "인터넷 기사를 읽을 수 있고 ‘아야!‘라고 11번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 - P286

"직장에서 이런 괴짜들과 일하는데, 그 사람 얼굴에다 대놓고 사기꾼이라고 말해버렸다. 그 뚱뚱한 엉덩이를 움직여서 일해야 한다. 그들은 그저 ‘아프고 싶어서‘ 우는 소리를 하는 것뿐이다."
섬유근육통을 향한 오랜 불신은 의학계가 역사적으로 이런 환자를 어떤 시각으로 봐왔느냐의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섬유근육통과 관련해서 2012년 기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섬유근육통 환자는 의사가 진료하기 싫어하는 환자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계속 의사를 찾아오는 단골 환자다. 유명한 류며티즘내과 과장인 의대 교수가 우리에게 말했듯, ‘이 환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며 이런 시각이 일반적이다." - P286

여성 체중에 대한 불균형적인 우려는 특히 부당하다. 만약 의사들이 성차별적 편견이 아니라 과학에 근거해서 체중을 우려한다면, 반대 현상이 나타나야 정상일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뚱뚱해도 건강할 확률이 높다는 점을 여러 논문이 계속 입증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의 건강을 체중으로 판단하는 일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2016년 분석에 따르면, 체질량지수를 바탕으로 신진대사 건강을 판단한다면 미국 성인 7,490만명에 대한 그릇된 진단을 초래할 것이다. 특히 여성은 잘못 판단된다. 2008년 연구에서는 과체중인 남성 48.8%와 비교할 때 과체중인 여성의 57%가 대사적으로 더 건강했고, 29.2%의 비만 남성보다 35.4%의 비만 여성이 대사적으로 더 건강했다. - P343

여성의 생식주기와 관련지어 병의 증상을 정상이라고 치부하는 현상은 자국내막증, 외음부통, 그 밖의 만성 골반 통증을 일으키는 환자만 고통스럽게 한 것이 아니다. 어떤 통증이든 ‘아래쪽 그 부분‘이면 얼마나 통증이 심각하든지 간에 월경통으로 치부하고, 성관계 중에 생기는 어떤 통증이든 와인 한 잔으로 완화하라고 한다면, 모든 질병에서 ‘오진 왕국‘이 펼쳐진다. 어쨌드 생식기관은 생명에 ㅈ기결된 다른 기관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 - P346

스타일스가 세계자율신경장애협회를 설립한 이유의 가장 큰 부분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진단을 받지 못한 환자들에 대한 생각에 몸서리쳤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스타일스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백인이었고, 뉴욕시 근처에 살았으며,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었고, 연봉이 높고 의료보험이 있는 변호사였으며,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병원‘에 갔다.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가 가난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라고 스타일스는 물었다. "내가 시골에 살았다면? 의사 한 명만 보장해주는 의료보험이었다면?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데, 병원에 데려다줄 가족이 없었다면? 첫 번째 의사에서, 두 번째 의사에서, 세 번째 의사에서 멈춰야 했던 대부분의 다른 여성들을 생각해보세요. 계속 의사를 찾아다닐 돈과 시간이 충분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 P39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5-19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0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