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혼자다 - 결혼한 독신녀 보부아르의 장편 에세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박정자 옮김 / 꾸리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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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뤼스Pyrrhus, BC319~272는 주변의 많은 나라를 정복한 고대 희랍의 왕이다. 시네아스Cineas라는 신하가 왕의 끝없는 정복 전쟁을 저지하고 싶어 했다. 특히 로마 원정에 반대하였는데, 이때 왕과 나눈 대화가 유명하다. 시네아스는 끊임없이 "그다음에는?" 이라고 묻다가 피뤼스가 마지막 정복 후에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하자 겨우 질문을 끝낸다. 그리고는 원정의 허망함에 대하여 왕에게 충고한다. 그 모든 제국들을 정복하느라 고생하고 결국 나중에 돌아와 쉴 텐데 굳이 뭐하러 떠나느냐는 것이다. -역자 후기 中, p.155-156



SNS에서는 가끔 초콜렛, 사탕, 아이스크림, 쿠키,빵들을 자르고 녹이고 굽고 쪼개서는 다시 섞어서 새로운 디저트로 만드는 영상들을 마주치게 된다. 따로따로 먹어도, 그것들중 하나만 먹어도 이미 달고 맛있는데 굳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건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굳이 왜 이래야할까? 이렇게까지 해서 더 달고 맛잇는 걸 먹어야 하나? 나는 이 영상들을 무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은 내가 아닌데, 과연 내가 타인의 행동에 대해 무용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이런 나의 생각을 반성하게 된건, 나 역시 누군가 무용하게 생각할만한 일들을 누구보다 많이 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이다. 쉽게 예로 들자면 여행이 그렇다. 나는 여행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을 사랑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부터 짐을 싸고 공항에 가는 리무진을 타는일,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고 라운지에 들르고 면세점을 들르고 비행기에 탑승하고 기내식을 먹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낯선 공항에 도착해서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호텔에 도착하고 낯선 거리를 걷고 낯선 음식을 먹고 호텔에서 잠을 자는 그 모든 순간과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 순간까지. 그렇게 내 집, 내 방, 내 침대로 돌아오면 그제야 비로소 여행이 완성된 느낌이고 나는 그 느낌을 몹시 사랑한다. 와, 내 방 내 침대 너무 좋네, 나는 내 침대가 얼마나 좋은지 깨닫기 위해서 여행하는가봐, 라고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말하는데, 그런 나의 말을 들으면 아빠는 어김없이 "나는 여행 안해도 내 침대 좋은거 아는데 너는 왜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여행해야만 그걸 아는거냐?" 라고 물으시는 거다.


한 번은 가족이 모여서 텔레비젼을 보는데 캐나다에서 오로라를 기다렸다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오는거다. 와, 저걸 눈앞에서 실제로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너무 좋겠다! 라고 내가 감탄하고 부러워하자 예의 아빠는 또 그러시는 거다. "내 집에서 가만 있어도 다 볼 수 있는데 왜 부러 저기까지 가서 저걸 봐야되냐?" 라고.



스물아홉에 뉴욕으로 드디어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은 나의 중학교때 부터의 목표였으므로 나는 너무나 기쁘고 떨렸다. 하루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터에 친구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내게 그랬다. 고작 일주일 동안 미국에 가다니 너무 돈지랄이라고, 비행기값이며 호텔값이며 그 먼데를 가는데 고작 일주일 가느냐는 거다. 나는 그 친구에게 그렇게라도 나는 꼭 가고 싶고, 그게 내가 원하는 바라고 얘기했다.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내게 주어진 휴가는 일주일 뿐이었다. 만약 그 친구 말대로 그곳이 먼 곳이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 때를 노려야 했다면, 여전히 그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 채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멀기 때문에 가지 않기를 택하는 것은 그 친구가 선택하는 것이지 나의 선택은 아니다. 나를 세상 한심하게 보았던 그 친구의 냉소는 나로서는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왜 힘들게 굳이 여행을 하면서 그래봤자 어차피 집이 좋다는 걸 깨닫느냐는 아빠의 냉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는 보부아르의 이런 문장을 읽는다.



스키 선수는 오로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단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운동을 아무렇게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 혹은 계곡의 바닥을 목표로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합적 의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행위의 모든 요소들은 그 의미들을 향하여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오르내림은 산보나 운동을 위한 초월적 행위인데, 이와 같은 좀 더 넓은 총체의 관념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결정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키를 타는 사람이지 냉소가가 아니다. - p.42



앞서 말한 디저트를 새로 만드는 영상을 보고 내가 한 것도 바로 그 냉소였던 것 같다. 내가 그 디저트를 만드는 혹은 그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면서 나는 냉소가가 되어 바라보지 않았는가.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방향과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무용하다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소가가 아닌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갈거라고 냉소하는 사람은 스키를 탈 수 없다. 돌아올건데 뭐하러 떠나냐고 말하는 사람은 여행을 할 수 없다. 먼데에 그 짧은 기간 뭐하러 가느냐고 말하는 사람 역시 여행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분야가 다르지만 자기가 생각한 것들을 목표로 하고 있고 방향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이걸 생각하다가 책을 읽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읽었는데 내용 다 까먹었어, 이럴 거면 책을 왜 읽을까.' 그러나 까먹을 거라서 안읽는다면, 거기에는 책을 읽지 않는 내가 남는 거다. 어떤 행위를 하면 하는 사람이 된거고, 그 행위를 한 내가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아한다.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혼자 준비하는 것, 그리고 낯선 장소와 낯선 음식, 낯선 사람을 오롯이 혼자 만나는 것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 있다. 얼마나 짜릿한지 매 시간이 행복으로 가득찬다. 그러나 그렇게 혼자 걷고 먹고 보는 걸 마치고 호텔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우면 외로움이 찾아든다. 오늘 내가 보낸 이 시간, 내가 보았던 것과 먹었던 것과 느꼈던 것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이 밤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디가 특히 아름다웠는지, 어느 음식은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든지, 어디를 걸을 데는 좀 두려웠다든지 하는 것들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좀 더 근사하고 완성된 여행이 될 수 있을텐데.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또 나는 혼자 이 거리를 걸어야 하니까! 이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나는 혼자인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혼자이고 싶다는 건 아니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인간이란 무릇 그런 존재라고 보부아르가 말해주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돌을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칸다울레(BC 8세기 리디스의 왕) 왕은 왕비의 미모가 만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기를 원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 - p.89



캬- 나는 위의 인용문이 너무 좋다. 자지러지게 좋다. 특히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는 부분.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



이 책은 2016년 12월에 읽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재독해야겠다고 이미 리뷰를 썼던 책이다. 그 당시에 도대체 뭐라는거야, 당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언젠가 재독할거라고 생각했던 책이어서 2020년 12월에 재독했는데, 한장 한장 너무 재미있고 신나게 읽으면서, 도대체 내가 2016년에 이걸 왜 이해하지 못한걸까 궁금했다. 어쩌면 내 독서근육이 그 때 더 약했기 때문인걸까. 이 책에는 평소에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 그래서 알라딘에서도 썼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친구랑 홍콩에 여행갔을 때는, 홍콩 호텔에서 그 다음에는 태국으로 여행가자고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있었다. 몇해전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보러 갔을 때, 사주 선생님은 내게 '너가 그게 무엇이든 하물며 네 적성에 꼭 맞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 너는 너를 돌아보며 이것이 맞는걸까 답답해하고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라고 했더랬다. 나는 자꾸 앞으로 가려고 하고 그리고 이렇게 가는게 맞는건지 중간중간 멈춰서 돌아보는데, 보부아르는 인간이 원래 이런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내가 혼자라면 내 생각대로 됐을 일들이, 그러나 세상은 나 혼자 사는게 아니기 때문에 내 예상과는 다른 일들로 변해버리게 되는 것, 보부아르는 세상이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고 한다. 내가 누누이 말했던 바로 그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자기 자신이 온전히 자신으로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던 것을, 보부아르 역시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또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안녕을 바라야 하는 거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섞여서 살아가고 그들이 우리를 밀어주거나 반대하거나 끌어주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방법이며 모습이라는 거다. 다만, 보부아르는 이 모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가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야기에 '기투', '초월', '초월성', '지양', '실존' 등의 철학 용어를 더했다. 이 용어들이 낯설어서 중간중간 책을 읽다가 턱- 하고 막힐지도 모르지만, 이 책의 <역자 후기>는 크- 한줄기 빛이 되어 이 용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너무 알기 쉽게 설명해줘서 아니,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지? 했더니 옮긴이 '박정자'는 '사르트르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역자 후기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좋겠고, 이 책을 읽고 역자 후기를 읽어도 좋을 것이며, 이 책을 읽고 역자 후기를 읽은 후에 이 책을 다시 읽는 것은 더 좋을 것 같다. 나도 언젠가는 또 이 책을 읽을 것이다.



나는 항상 애인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러니까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물론 가장 처음 나 자신을 포함해서,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자고, 지치지 말고 나아가자고 말하고 다닌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게 그런데 절대선인걸까?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선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의문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뒤로도 가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우리가 돌아가고 뒷걸음질 치더라도, 결국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부아르는, 나의 이런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이 책 한권을 통해 이야기해준다. 인간은 현재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 우리가 지금 사는 이 현재는 미래의 나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 미래는 또다시 현재의 내가 되어서 또 그 다음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거다. 내가 항상 작은 목표라도 만들고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면서 살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환하게 설명될 수밖에 없다. 내가 자꾸 여행을 떠나는 것, 어차피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부득이 그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자 내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은 분명 의미가 있고 어떤 식으로든 미래에서 나를 맞이할 것이며, 나는 잘 살고 있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바로 얼마전에 이 책을 읽었던 과거가 있고, 그 과거는 그 책을 읽는 동안에는 현재였다. 이런 미래를 위해 준비된 현재였다.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 p.78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지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된 일과를 마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작은 산꼭대기에서 나는 내가 돌아다녔던 길을 바라본다. 내 성취감의 기쁨 속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길 전체이다. 이 휴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보행이다. 그리고 이 한 잔의 물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갈증이다. - P33

인간이 기투企投인 이상, 인간의 행복은 인간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기획일 수밖에 없다. 행운을 잡은 사람은 곧 다른 행운을 잡으려고 한다. 파스칼이 정확하게 말했듯이, 사냥꾼이 흥미를 가진 것은 토끼가 아니라 사냥 그 자체이다. 자기가 그 안에서 살 생각도 없이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그런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 목적지는 저쪽 깊숙한 곳에 있을 경우에만 목적지일 수 있다. 목적지에 이르면 그곳은 곧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 P39

스키 선수는 오로지 내려가기 위해 올라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단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운동을 아무렇게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 혹은 계곡의 바닥을 목표로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합적 의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행위의 모든 요소들은 그 의미들을 향하여 스스로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오르내림은 산보나 운동을 위한 초월적 행위인데, 이와 같은 좀 더 넓은 총체의 관념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결정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키를 타는 사람이지 냉소가가 아니다. - P42

인류가 소멸할 것이라고 단언할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 개개인의 인간은 반드시 죽지만 인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60

사람은 무산계급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일하면서 동시에 인류 전체를 위해 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산계급을 위해 투쟁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산계급과 함께, 무산계급 이외의 인류에 대항하여, 어떤 기획을 추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산계급과 더불어 일한다는 것이 계급의 차이가 없어질 미래의 인류를 향하여 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오늘날의 자본가로부터 한 세대 혹은 수 세대에 걸쳐 재산을 빼앗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이외의 사람들에 반反하여 일하는 것이다. - P66

자기 행동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가?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노벨은 자신의 일이 과학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전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학설을 뒷날 사람들이 향락주의라고 부를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니체는 니체주의를, 그리스도는 종교재판 같은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곧 역사의 밀물과 썰물에 떠밀려 새로운 순간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그 주위에 무수한 생각지도 못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 P69

나의 행위가 완료되면 그것은 최초에 내가 바라던 바와는 다른 행위가 된다. 그렇다고 하여 그 행위가 완전히 낯설게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 행위는 자기의 존재를 완료하는 것이고, 이때 비로소 그 행위가 진실로 완성되는 것이다. - P72

피뤼스는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복할 것이다. "그럼 그다음은?" 다음 일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 P78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한다. 그는 오늘 저녁 리옹Lyon에 도착하려고 서두른다. 그 이유는 내일 발랑스Valence에 가고, 모레 몽텔리마르Montelimar에, 그리고 그다음 날에 아비뇽Avignon에, 또 그다음 날은 아를Arles에 가기 이ㅜ해서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수도 있다. 아무리 해 보았자 실제로 그는 님Nimes이나 마르세유Mareille도 보지 못핫 채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니 말이다. 본Beaune이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는 자신의 여행을 할 것이다. - P79

사람은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장 폴 사르트르도 『존재와 무』에서 밝혔듯이 인간 존재는 사물처럼 응고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이다. 인간 존재는 기투의 형태하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그 기투는 죽음을 향한 기투가 아니라 각기 개별적인 목표를 향한 기투이다. - P82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돌을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칸다울레(BC 8세기 리디스의 왕) 왕은 왕비의 미모가 만인의 눈에 아름답게 비치기를 원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몇 년동안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러나 숲에서 나와 『월든』을 썼다. - P89

아들이 원하는 결혼을 막는 권위적인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 대신 이 상황 아닌 저 상황을 선택하여 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자기가 아들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서 살짝 벗어나, 건간이라든가, 부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기존 가치의 객관성을 제시한다. - P95

하나의 생명을 준다는 것은 생명을 받은 사람의 자유까지 좌지우지할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므로 아이에게 최대의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는 알고 있다.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현존해 있음에 의해서만 그에게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기획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 태생이나 교육은 그가 반드시 지양해야 할 사실성facticite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해 준 일은 상황의 한 부분이며, 이 상황을 초월하는 것은 바로 그의 자유이다. 그는 이런 상황 혹은 저런 상황에 있게 될 것이지만, 그 어떤 상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항상 다른 곳에 있는 존재이므로. - P103

우리는 타인에게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칸트의 말처럼, 비둘기에 저항하면서 비둘기를 밑에서 받쳐주고 있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의 장애물일 때조차 우리는 타인의 도구가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그에게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타인에 의해서이다. - P110

만일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았고,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고, 거기 없었더라면, 아마 타인의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의 인생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말이나 몸짓이 어떤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다. 그는 자유롭게 그 의미를 결정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주위에서 모든 것은 똑같이 충만되어 있었을 것이다. - P111

부동의 자세이건, 아니면 마구 움직이는 자세이건 간에, 우리는 언제나 지구 위에 올라앉아 있다. 모든 거절은 선택이고, 모든 침묵은 목소리이다. 우리의 수동성조차 우리 의지의 소산이다. 선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P114

"철도나 비행기가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라신느Jean Baptiste Racine 없는 프랑스 문학, 또는 칸트 없는 철학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지금 현재의 만족을 넘어서, 자기 뒤로, 회고적으로, 하나의 필요를 던져 놓는다. 물론 그가 살고 있는 지금, 비행기는 하나의 필요에 부응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물건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난 필요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의 존재로부터 사람들이 만들어 낸 필요이다. - P121

우리들의 행위 하나에주어지는 칭송이 우리들의 전존재全存在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란다. 이름은 대상 속에 마술적으로 집합된 나의 총체적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행위들은 분산되어 있다. 우리는 행위를 하고 있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분열된 존재 속에서만 타인을 위하여 존재한다. - P124

내가 정립할 대상들을 정의하는 것과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기획이다. - P135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세계 속에 하나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 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를 우선 내 주변에 출현시켜야만 한다. - P136

나의 기획이 그들의 기획과 일치하느냐 혹은 저촉되느냐에 따라 그들은 동맹자로서 혹은 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런 모순 또한 나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면서 그 모순을 존재시킨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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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2-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재독이란 말입니까?! 전 그 옛날 사두고 아직 한 번도 안 읽었는데!
다락방 님 리뷰에 힘입어 조만간 저도 읽겠습니다!!!

다락방 2020-12-10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때는 도대체 이게 뭔말이여...했었습니다. 그런데 4년만에 읽으니 와,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씐나서 읽었습니다. 후훗. 잠자냥 님도 재미있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빠샤!!

라로 2020-12-1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아~~~ 근데 이러면 안 되는데. 😓

다락방 2020-12-10 18:21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아쉽게도 전자책이 없네요. 종이책도 아주 얇은데 비싸고요. ㅜ

난티나무 2020-12-10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 고고!!
밑줄 하나하나 읽다가 어제 읽은 <스토너>가 생각났어요...

다락방 2020-12-10 18:22   좋아요 0 | URL
크- 스토너 참 좋지요? 스릴러만 읽는 제 동생도 스토너 읽더니 한참 지난 후에도 생각나는 책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즐거운 독서가 되실거라 감히 예상합니다. 후훗.

2020-12-10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0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12-10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12월에도 보부아르를 읽었다죠 ㅎㅎㅎㅎ 전 처음 보는 책이에요. 다락방님이 재독하셨다니 달리 보입니다.

다락방 2020-12-10 18:2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작년 12월에도 보부아르를 읽었네요? 아하하하. 근데 저는 보부아르랑 한나 아렌트랑 자꾸 헷갈려요. 바부팅 ㅜㅜ

서니데이 2020-12-10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락방 2020-12-11 09:03   좋아요 1 | URL
아이고, 축하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면 서니데이님은 해마다 축하해주시네요.
연말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서니데이님.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고요!

파이버 2020-12-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첫여행이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다들 아깝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ㅎㅎㅎ 그래도 그때 일주일만이라도 갔다오길 잘한것 같아요
다락방님 글을 읽으니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현실은 방콕이지만요ㅎㅎ

다락방 2020-12-11 09:04   좋아요 1 | URL
저는 일주일 여행이 결코 나쁘지 않거든요. 주어진 일정에 따라서 여행을 즐기는 것이 저는 너무 만족스러워요. 직장생활 하면서 휴가를 그만큼 쓸 수 있으니 아 어느 때 어느만큼 가면 되겠구나, 계획 세우고 다녀오는 게 저는 행복합니다.
파이버님, 우리는 언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요. 흑흑 ㅠㅠ

scott 2020-12-1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드디어 푸코 탈출! 추카 ㅋㅋㅋ

다락방 2020-12-11 09:04   좋아요 0 | URL
푸코 탈출 못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떻게 탈출하나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랑이 한 일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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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아버지는 넘어서고 뛰어넘었지만, 그래서 그렇게 했지만, 그래서 그렇게 하고도 현재를 살고 인간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 일을 당한, 아마도 아버지처럼 넘어서고 뛰어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을 형과 형의 어머니인 하갈은 어땠을까? 그들 안의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파괴되고 훼손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 <허기와 탐식>, p.149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도, 창세기의 유명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일. 아브라함은 신의 말을 충실히 따르며 그의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한다. 아직 어린 소년인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끄는대로 졸졸 따라가서는 하나님에게 바쳐질 제물이 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든 그 때, 신은 다급하게 아브라함에게 멈추라 말한다. 네 마음을 알았으니 지금 하는 행동을 그만두고, 저기 내가 놓아둔 숫양을 제물로 바치라는 거다. 이에 이삭은 제물로 바쳐지지 않을 수 있었다.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교회를 아주 오랜 시간 다녔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래서 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제대로 되는지도 역시 모른다. 그러나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일, 아브라함이 정말로 그렇게 하려고 했던 일에 대해서는 안다. 교회를 다닌 시간이 길다면 길었지만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가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신은 왜 그랬는가. 신은 왜 아브라함의 믿음 혹은 사랑을 시험하려 들었는가. 신이란 절대적 존재가 아니던가. 굳이 인간의 사랑을 혹은 믿음을 시험해야만 했는가. 그거 너무 부족함이 드러나는 일 아닌가. 게다가 그 시험을 어째서, 아들을 바치는 걸로 하라는건가. 결국 신의 뜻대로 아들을 바치려고 한 아브라함은 신에게 그 사랑을 인정받고 복된 인생을 사는건가? 이게, 기독교인들에게는, 믿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신은 내게 네 사랑을 보여다오, 했고 아브라함은 네 그러겠습니다, 했는데, 왜 죽을 위험에 처하는 건 이삭인가. 신과 아브라함이 서로의 사랑을 이제 확인했기 때문에 이삭은 오, 베리 굿,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승우는, 이 상황에서의 이삭의 입장이 되어본다. 이삭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경험하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는 수차례 묻는다. 신이 그만두라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 정말 내 배를 갈랐을까? 이게 어린 이삭에게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수 있을까? 신에게 믿음을 증명하게 위해 나를 죽이려고 한 나의 아버지를, 이삭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신에게 충심한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삭은 신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신에 대한 사랑을 이해한다. 안다. 그래, 그것이 사랑이 한 일이구나, 깨닫고 또 깨닫는다. 그러나 그 이해는 너무나 처절하다. 이해가 돼서 하는 이해가 아니라, 자신이 살려면 그것을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어린 이삭이, 그리고 성인이 된 이삭이 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정말이지 처절한 데가 있다. 그가 아무리 사랑해서 그래, 신은 아버지를 사랑했어, 아버지도 신을 사랑했지, 계속 되뇌이고 되뇌어도, 거기에는 자연스러운 이해나 용납이 아닌 처절함이 있는 거다. 내 아버지인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러면 나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하는 처절함.



그렇게 제물로 바쳐질뻔한 데에서 살아나고 나서야, 그는 그제야 자신의 어린 시절 집에서 내쫓겼던 하갈과 그의 이복 형인 이스마엘을 떠올린다. 아,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아버지로부터 내쫓겼다고 했지, 버려졌지. 내가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이미 내쫓긴 그들이 있었지, 그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는 그제야 비로소 그동안 없는듯 생각해왔던 존재를, 보이지 않았던 존재를 소환해낸다. 그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그랬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전, 자신이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을 어린 아들과 함께 내쫓았다. 아브라함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아브라함의 아내는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하갈에게 네가 대신 아이를 낳아다오, 하고는 바라고 명령하였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나자 그녀를 내친다. 그렇게 자신이 임신해서 이삭까지 낳고 나자 더이상 하갈을 두고볼 수 없어 아브라함에게 계속 저들은 내쫓으라 말한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하갈은 어린 아들과 함께 내쫓긴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걷고 또 걷다가 무너지기 직전, 신이시여 저를 데려가시되 제 아들은 살려주세요, 기도하다가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그녀는 우물을 발견해 아이와 함께 터를 이루고 살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하갈은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을 내쫓은 아브라함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의 아들과 무사히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신의 보살핌을 감사히 여길 수 있게 되었을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살아가는 내내 숱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저 어린 아이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원망하는 일이 없었을까?



재차 언급하자면 나는 성경을 읽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승우가 여기에서 풀어낸 이야기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성경의 내용인줄은 모른다. 어느만큼을 이승우가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들어낸건지도 역시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승우가 이 책에서 서영채의 해설대로, 제물로 바쳐질뻔한 이삭과 내쫓긴 하갈에게 목소리를 주었다는 것은 알겠다. 신과 아브라함의 사랑 때문에 그들이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 알겠다. 이삭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처절한지도 알겠다. 그런 틈틈이 나는 계속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을 겪어도 어째서 이런 일은 반복되는가? 이삭은 자신의 쌍둥이 아들을 차별한다. 자신의 맏아들이 사냥해온 음식을 맛있게 먹고 축복하고자 한다. 그에게 둘째 아들은 딱히 사랑의 대상이 아닌데, 이에 이삭의 아내는 둘째 아들에게 더 큰 애정을 쏟는다. 사람은 이렇게나 불완전하고 사랑은 이렇게나 균형을 잡지 못한다. 그런데 이게 어디 인간만의 일이던가.


신은? 신은 어떤데? 신은 공평한 사랑을 사랑답게 했는가? 애시당초 신이 시험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어째서 시험하는가, 왜? 너무 못나지 않았나, 사랑을 시험하는 일은. 아브라함이니까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갔지, 나였으면 안갔을 것이다. 신이든 인간이든 내 사랑을 시험하려 했다면, 게다가 그 시험이 '날 사랑한다면 만원만 줘' 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면, 아이고야, 당신 사랑 안하고 말지 그걸 시험이라고 하고 있다니, 맙소사,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를 사랑한거야? 하고 그 사랑을 내던질 것이다. 아마, 그래서 내가 지금은 더이상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들마다의 글쓰기 성향이겠지만, 어떤 작가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자신이 경험한 일중에서 자신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천착할 수밖에 없는 것같다. 아니, 무릇 인간이란 다 그렇겠지. 그런 면에서 이승우가 창세기에서, 그것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가져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은 지나치게 당연해 보인다. 이승우의 책을 읽다보면 이승우는 끊임없이 온전하지도 다정하지도 못했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까. 감히 짐작건대, 종교학을 공부했던 이승우가 결국 소설가가 되어서 이런 소설을 써내는 것은, 작가 자신이 천착하는 일이 내면에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일은 처음에 내면의 약함으로 시작했을 것 같다. 그것이 자기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 들여다봐야 되는데, 계속 들여다보게 되니까 그것을 풀어내야 했고, 그렇게 그것이 글로 표현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글로 계속 표현하다보니 결국은 그 내면이 단단해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게 풀어준 창세기 이야기가 좋고 고맙다.



창세기의 이야기들로 풀어낸 다섯편의 단편이 이 책 안에 있고, 각 단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창세기의 성경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이승우가 인용한 성경은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되어 있던데, 이승우 책을 읽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이번엔 한 번 읽어볼까, 하고 현대인의 성경을 검색해 장바구니에 넣는다. 적어도 창세기 부분만큼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승우의 소설을 읽은 후에 성경을 읽는 것이 성경을 읽는 바른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승우가 출애굽기도 레위기도 시편까지도 다 써줬으면 좋겠다. 책장에 차곡차곡 이승우가 써낸 성경모티브 책들을 꽂아두고 싶다. 창세기를 출애굽기를 시편을, 신약성서 까지도, 이승우의 글로 만나고 싶다. 간절히 그러고 싶다.






그들은 그들이 하려고 하는 악한 짓에 대한 의식이 없었고, 롯은 그 사실을 지적했다. 롯이 의도한 것은 구별하는 것이었다. 악과 악이 아닌 것,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나누는 것이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섬세해지는 것이었다. 잠든 그들의 윤리적 감각을 깨우는 것이었다. 윤리적 감각은 무분별,무차별의 함몰 상태를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똑바른지 휘어졌는지, 명중했는지 빗나갔는지, 선 안에 있는지 선 밖에 있는지 묻고 따지는 것에서 비롯한다. 롯은 몰려온 소돔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했다. 무엇이 악한 짓인지 아닌지, 선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구별해내라. 차이를 찾아내라. - P25

롯은 그 도시에 매혹되어 이십 년 넘게 그곳에 살았지만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 도시 사람들이 그를 향해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라고 비난한 이유이다. - P32

갑자기 눈이 어두워져 앞을 볼 수 없게 된 무리는 대문을 찾을 수 없었다. 볼 수 있을 때는 바로 앞에 있던 대문이 볼 수 없게 되자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대문은 멀어지고 급기야 사라졌다. 사라졌으므로 그들은 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때리며 엉겨붙어 난장판을 벌였다. 누가 때리는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든 때렸다. 대문이 부서질 때 그들이 대문 안의 나그네들에게 하려고 했던 일을 대문 밖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행했다. - P40

그들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주어져 있다. 그들은 소돔을 멸망시켜야 하고, 동시에 멸망하는 그 도시에서 롯의 가족을 구해내야 한다. 그들 가족을 구해내기 전에는 도시를 멸망시킬 수 없다. 멸망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 두 가지 임무는 실은 한 가지 사건의 양면이다. 물에 잠긴 곳에서만 물에서 건져지는 사람이 생기는 이치이다. 물에 빠지지 않은 사람을 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 P52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내보일 수 없고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감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잠깐 위장할 수는 있지만 오래 속일 수 없고, 한때 감출 수는 있지만 결국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 아들을 향한 눈빛과 미소와 말투를 통해 그는 늦게 얻은 외아들에 대한 속깊은 사랑을 어쩔 수 없이 자주 노출했다. 그녀를 대하는 눈빛과 미소와 말투에서 언뜻언뜻 느껴졌던 것이 아들을 보는 눈빛과 미소와 말투에서는 자주자주 느껴졌다. 그것은 그녀의 은밀한 기쁨이었다. - P61

신은, 너의 아들, 너의 사랑하는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는 걸 보니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이제 확실히 알겠다, 라고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에게 한 말을 나도 듣는다. 이 말은 놀랍다. 그분이 요구하셨으니 그분이 마련하실테지, 하고 한 아버지의 말만큼이나 놀랍다. 신은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마음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것은 없다. 시험이라는 비순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사랑보다 더 순수하고 큰 사랑은 없다. 비순수를 통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순수가 있다. 사랑이야말로 그러하다. 심지어 순수한 사랑일수록 그 표현이 더 순수하지 않아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순수하지 않은 것들이 순수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 P114

사람에게는 균형을 잡는 재주가 없고 사랑에게는 균형에 대한 감각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균형을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 P128

위장에 빈 공간이 없는데도 여전히 음식을 갈구한다면 이 갈구는 어떤 공간을 채우기 위한 갈구인가. 위장은 꽉 찼는데 어디가 비어 있어서 어디를 채우려고 음식을 탐하는가. 탐식하는 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가 비어 있는지 안다면 그곳을 채울 것이다. 그러나 어디가 비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가 비어 있는지 모르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음식을 찾고 부르고 음식에 손을 대고 이미 꽉 차 있는 위장 속으로 집어넣는다. - P137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주인인 세계, 집에 있는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속해 있는 세계였다. 아들인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를 사랑했고, 그는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 사랑이 ‘속해 있는 것‘을향한 지배의 방법이라는 사실이 어렴풋이 깨달아지자 견딜 수 없었다. 집은 사랑이 없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굴레인 곳이어서 돌아갈 수 없는 곳, 달아나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는 집을 튼튼하게 하는 효율적인 재료의 역할을 하는 사랑을 털어내기 위해 떠돌이가 되었다. - P146

쫓아낸 아버지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신의 뜻을 앞세웠을 것이다.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 법과 도리를 뛰어넘는 신의 섭리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들을만큼 들어 알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삭은 회의했다. - P148

신과 아버지는 넘어서고 뛰어넘었지만, 그래서 그렇게 했지만, 그래서 그렇게 하고도 현재를 살고 인간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 일을 당한, 아마도 아버지처럼 넘어서고 뛰어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을 형과 형의 어머니인 하갈은 어땠을까? 그들 안의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파괴되고 훼손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 P149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맛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먹는 사람은 맛을 모르는 사람이다. 맛을 모르는 사람이 먹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 맛을 모르는 사람만이 탐식할 수 있다. - P151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항상 다른 누군가를 미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다른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부르는 일은 뜻밖에 흔하다. - P166

그녀가 미래를 기다렸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녀는 기다리는 일을 했다.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나서서 맞아야 하는 것임을 그녀는 어렴풋이 의식했다. 기다림이 바람이고 참여, 즉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바라지도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기다리는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는 서서히 알게 되었다. - P180

그런데 이승우는 그런 이삭에게 입을 달아주었다. 그 입은 구양에 없는 입이다. 그뿐 아니다. 이삭보다 먼저 하갈에게 입을 달아주었다. 입이 생긴 자들은 묻는다. 하갈도 이삭도 묻고 또 묻는다. 당신은 내게 왜 이러는가. -해설, 서영채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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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2-02 1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삭을 매개로 한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은 그 대상이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 두 사람이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백살에 낳았고, 나무짐을 지고 따라갈 정도라면 적어도 열넷 혹은 열다섯 정도 아니었을까요.
삼일 길 이후에 아버지와 둘만 산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이삭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제단에 자신을 누이고 칼을 드는 아버지를 보았으니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겠죠. 물리적으로 아버지를 물리칠 수 있었을텐데 이삭이 그대로 누워있는 모습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말씀하시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삭에게는 아버지를 뿌리칠 수 있는 적당하고 이성적인 이유가 열 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아버지의 칼을, 정확히는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린건 아니었을까요.

백살에 낳은 아들을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었던 경우라면 저는.... 부모된 입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살에 낳게 하신 아들이라면 죽어도 살리실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살 것이다. 그게 바로 귀한 자식을 제단에 올리는 심정일거라 추측합니다.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괜히 길어졌네요. 저도 얼른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20-12-03 08:00   좋아요 0 | URL
리뷰에도 썼지만 일단 노파심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저는 성경을 읽은 게 아니라 이 소설을 읽은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혹시 어떤 오해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쓴 제탓입니다. 그렇지만,

단발머리님의 댓글은 이승우가 소설에서 쓴 말과 완전히 같아요! 이삭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아버지와 자신에 대한 시험임을 알고 있어요, 아버지 역시 괴로웠을 것임을,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는 신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가 탈진해버렸음을 보고 그 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거든요. 성경을 읽고 이승우가 쓴것을 단발머리님도 바로 그대로 짐작하셨네요. 저는 더더욱이 창세기가 궁금해집니다. 어서 성경을 사서 창세기 도전할까, 하고 있는데, 마침 어제 친구가 ‘너 나랑 성경 읽어볼래?‘ 해서 그러자고 했어요. 물론 성경을 산 뒤에요.. ㅋㅋㅋㅋ

이삭은 신의 시험이 아버지와 저를 향한 것이었음을 알고 실제로 아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마도 아버지의 안도가 제것보다 컸으리라고도 짐작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과 믿음에서 온 것이라는 것도 알고요. 귀한 자식을 제단에 올리라고 한 신, 귀한 자식을 제단에 올려야만 했던 아버지의 입장까지 이삭은 다 짐작하고 이해합니다. 정말 단발머리님의 이 댓글이 그대로 다 소설에 있어요. 다만, 이 댓글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이삭은 이 책에서 이삭의 입장으로 말하고 있는 거지요. 저는 그 부분도 성경에 나온건지 궁금해요. 이삭은 그 날의 트라우마로 식탐이 생겼거든요. 이것이 이승우의 짐작인지 실제 그러한지 성경을 읽어봐야 알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을 읽고난 후 단발머리님의 감상이 너무 궁금합니다. 성경을 이미 읽으신 분이고 또 부모의 입장도 자식의 입장도 되어보신 분이잖아요. 저랑은 완전히 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자, 오늘도 우리 독서 화이팅!!

syo 2020-12-03 22:19   좋아요 0 | URL
멋있어!! 두분 다!! 와아아!!

다락방 2020-12-04 10:42   좋아요 0 | URL
엣헴- 우리가 좀 그렇죠? (으쓱)

scott 2020-12-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고 댓글 두세번 읽고 나니 책한권 다 읽은것 같아요 ㅎㅎㅎ

다락방님 이승우 작가님 찐 사랑팬 ♥

다락방 2020-12-07 07:56   좋아요 0 | URL
ㅎㅎ 이승우 작가는 진짜 너무 좋아요. 글을 읽는 맛이 있어요! >.<
 
주군의 여인 2 창비세계문학 61
알베르 코엔 지음, 윤진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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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97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를 내가 정할 순 없었지만, 태어나고 난 후부터는 순간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하나를 결정하면서 나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이만큼의 돈을 벌고 지금 이 위치에서 어떤 사람을 친구로 두고 또 어떤 사람과 연인으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지는 그러니까 나의 어느 한가지 면 때문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진 복합적인 내가 하는 일이다. 만약 내가 1920년대에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2000년에 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도 없었을 것이며 친구도, 연인도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는, 단순히 '지금의 나'가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내가 있다. 나였기 때문에, 이 나이의 이 모습의 이곳에 사는 나였기 때문에 당신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의 진행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이 선택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내가 한 일이라는 거다.



쏠랄도 마찬가지였다. 쏠랄은 부하직원의 아내 아리안을 만나 사랑을 했다. 뜨거운 사랑을 했다. 아리안 앞에 처음에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랑을 얻고자 했던 일, 세상이 힘에 굴복한다는 사실, 자신의 외모가 가져오는 유리함 그러나 자신의 외모에서 어쩔 수 없이 티나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이 모든 것들이 그를 이루고, 그렇게 이루어진 쏠랄이 아리안을 사랑했다. 아리안 역시 마찬가지. 그녀의 과거의 삶이, 환경이 아드리앵 됨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게 했고, 그 남편과 사는 삶이 쏠랄을 사랑하게 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는가는 단순히 지금 내 기분 하나에만 의지하는 게 아니고, 내가 상대를 향해 사랑이란 감정을 품게 되었을 때는, 이렇게 태어난 나와 이렇게 살아온 내가 있다.



쏠랄과 아리안은 사랑했고, 사랑의 도피를 했고, 서로에게 열중했지만, 세상과 소통할 순 없었다. 처음에 그것은 의지였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상이 이 연인을 배제한 것임이 드러난다. 불륜이어서, 국제연맹 사무차장이라는 직업도 잃어서, 프랑스의 국적도 박탈당해서,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어서.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처음, 그가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책의 말미에는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고통과 괴로움은 없었을 거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인생은 한 번 뿐인데,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다시 태어날 수가 없는데, 이제와서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이것이야말로 부질없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사랑,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사랑은 활활 타올랐던 것도 잠시. 지쳐버리고 무너져내리고 꺼져버린다. 그란 쏠랄과 아리안에게 남은 것이 서로가 전부이며 또 그들이 시작한 사랑만이 전부였기에,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그 사랑을 붙든다. 그렇게 붙들지만 그 사랑은 결국 어떻게 될까.



이 책은 1,2권 두 권인데 두 권다 너무 두껍고 게다가 수시로 문장 부호도 없는 긴 장광설이 등장한다. 1권의 아드리앵 됨의 장광설과 2권의 마리에뜨의 장광설은 깔깔대며 웃기에 좋고, 그들의 장광설은 신분과 계급과 사회를 비웃는다. 아리안의 장광설은 과거의 사랑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또 현재의 사랑에 대한 열정을 퍼붓고 또 퍼붓는다. 그리고 쏠랄의 장광설은 힘과 사랑에 관한 것이며 그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 사랑과 질투와 화해와 연민이 결국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이르고, 그 정체성만으로도 자신은 이미 세상으로부터 배제된 사람이라, 이 어마어마한 분량의 내용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며 나를 반성에 이르게 한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저렇게 혼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고민하며 걷는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에 나 역시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는건 아닌가. 존재하는 사람을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세상 속에서 당사자는 그 존재가 드러날까 숨어다녀야 한다. 그가 혼자 외출하고 혼자 걸을 때, 벽에서 유대인에 관련된 낙서를 볼 때, 술집에서 유대인에 관한 사람들의 숙덕임을 들을 때, 쏠랄은 이 세상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캐서린 맥키넌의 말이 생각났다.



'백인 전용'이라는 간판은 '유대인 사절'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차별행위로 간주된다. 인종 격리는 "나가!" "당신은 여기 못 들어오게 되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다. 상대를 높이는 것이나 깎아내리는 것이나 모두 의미 있는 기호나 의사 전달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 《포르노에 도전한다》, 캐서린 맥키넌, p.36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런 행위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죽으라는 말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쏠랄이 한 명의 연인만 보고 살아가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책장을 덮으면서 힘들었다. 여전히 묵직하다. 이유있는 장광설들이었다.



그런 참에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이승환의 노래 얘기가 나왔다. 오늘 아침, 말 나온김에 들어볼까, 하고 재생하는데, 어젯밤 잠들기 전에 읽었던 쏠랄의 이야기가 훅- 다가왔다. 노래의 모든 가사가 쏠랄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갑자기 슬퍼졌다. 이승환은 어떻게 사랑이 그러느냐 물었지만, 나는 쏠랄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어졌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오늘은 쏠랄 때문에, 쏠랄을 위해, 술 한 잔 해야겠다.


마음이 막 너무해 ㅠㅠ




사랑이 잠시 쉬어 간대요
나를 허락한 고마움.. 갚지도 못했는데
은혜를 입고 살아 미안한 마음뿐인데
마지막 사랑일거라 확인하며 또 확신했는데
욕심이었나봐요
난 그댈 갖기에도 놓아주기에도 모자라요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있건
다시 만나 사랑해야 해요
그때까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마요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사랑한단 말 만번도 넘게
백년도 넘게 남았는데
그렇게 운명이죠 우린
악연이라 해도 인연이라 해도 우린..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있건
다시 만나 사랑해야 해요
그때까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마요
안돼요 안돼요..

그대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
간절한 그리움..
행복한 거짓말 은밀한 그 약속
그 약속을 지켜 줄 내 사랑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너만의 나이길 우리만의 약속
그 약속을 지켜 줄 내 사랑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너만의 나이길 우리만의 약속
그 약속을 지켜 줄 내 사랑..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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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26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복명가왕에서 차지연이 부른 버전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는 걸 알려드리려 굳이 댓글을 답니다. 사랑 가득한 아침이에요. 근데 슬픈 사랑....

다락방 2020-11-26 10:09   좋아요 0 | URL
아오.. 아침에 제대로 허우적대네요. 이 노래 출근하면서 내내 반복해 들었어요.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ㅠㅠㅠㅠㅠㅠㅠㅠ엄청 절규하잖아요? 엉엉 ㅠㅠ 아주 지금 가슴속을 헤집어놔가지고 제 마음이 갈 곳을 잃고 헤매입니다... 아아 이 마음......

간절한 그리움
은밀한 그약속

울자 울어버립시다 단발머리님.


이승환의 그 뭣이냐, <사랑이 떠나가네>도 옥주현 버전이 더 좋았는데, 이 노래는 차지연 버전이 더 좋군요? 한 번 찾아서 들어야겠어요. 그리고 또 울겠습니다. 오늘은 운다.......

단발머리 2020-11-26 10:14   좋아요 0 | URL
옥주현 버전의 이승환 노래는 <천일동안>이 되겠습니다. 물론 <사랑이 떠나가네>도 너무너무 좋지만서도요.

울면서 쓰는 댓글입니다.
다락방님, 우리 울어요. 그냥 막 울아버립시다!!! 엉엉!!!!!

다락방 2020-11-26 10: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맞다 천일동안 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이 떠나가네는 김건모죠 ㅋㅋㅋㅋㅋ 아무튼 천일동안도 이승환보다 옥주현이 더 좋았다는 말씀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울다가 웃어버렸네. 똥구멍에 털나겠어요 ㅠㅠ

Forgettable. 2020-11-2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쏠랄이(!!!) 이 쏠랄이 되었군요. 별 5개라 좀 놀라며 읽었는데 ㅎㅎ 유대인이 그렇게 천대받던 시절이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아랍인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유대인을 받아들여서 그들의 수학적 지식이 나라의 부강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후 다시 스페인 왕가가 복귀하면서 유대인을 다시 천대하며 천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이 못된 차별주의자들!! 궁금했던 이 이야기의 한 면모를 이 책에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락방 2020-11-26 10:29   좋아요 0 | URL
뽀 댓글 읽다보니 제가 얼마전에 [유대인의 역사]를 사놓고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퐉 떠오르네요. 하아.. 이것이야말로 부질없다. 왜 사는가..책을 왜 사는가, 왜..

어휴 막판에 너무 감정이 휘몰아치더라고요. 쏠랄이 어디에도 갈 데가 없고 설 데도 없고 머무를 곳도 없고 속할 곳도 없어서 혼자 움츠리며 걷는 시간들이 너무 훅 오는 바람에 힘들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책장 덮는데 ‘그러지마‘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주 돌아버리겠더라고요. 너무 감정 쏟아지는 독서였어요. 그 쏠랄이 정말 이 쏠랄이 되었네요. 휴.. 지금 감정이 너무 거시기해져서 이 감정을 좀 어떻게 해놔야지 안되겠어요. 그래도 예정대로 저녁에 술은 마실겁니다. 훗. 혼와인 너무 기대되는 것.
 
너무 과한데 만족을 모르는 - 트럼프에 관한 가장 치명적이고 은밀한 정신분석 보고서
메리 트럼프 지음, 문수혜.조율리 옮김 / 다산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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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에 속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조직 내에서 가장 힘이 센 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험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직장이라면 그 힘센 자가 인사권을 쥐고 있을 것이고, 혹여라도 내가 이곳에서 근무하는데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섣불리 말하지 못한 채로 침묵한 적이 여러번일 것이다. 나에게 올 불이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힘이 센 자가 내 말을 들어줄 리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업무상 회의라도 하려고 여러 임원들이 모인 가운데 가장 권력자가 엉뚱한 소리를 해도, 그 자리의 참석자들이 그게 엉뚱한 소리라는 걸 알아도, 그러나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권력자의 말이 그대로 실행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권력자의 의견은 그러므로 절대적이고, 권력자는 누구도 자신의 말에 거절이나 거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걸 고칠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다. 반대되는 의견을 들은 적이 없으므로.


아주 많은 사람들은 힘에 굴복하고 조용히 입을 닫고 산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이란, 권력이란, 곧 돈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아주 힘이 센 사람이다. 그가 가진 자본만큼이나 그가 가진 힘도 세다. 그는 부자여서 힘이 셌는데, 부자이기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자신의 회사를 위해 일하도록 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옆에는 그의 말을 그대로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차마 그에게 거부할 수가 없어서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 그가 가진 힘은 다른 힘있는 자와 손을 잡고 여러 군데에 그가 힘을 쓸 수 있도록 도왔지만, 그가 계속 그 자리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 건 수많은 힘없는 자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있는 자가 곧 힘있는 자라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런 그가 소시오패스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체적으로 큰 기업의 보쓰들이 딱히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도덕적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우리가 하지 않기는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경우에는 그들보다 더 심한 경우였다. 그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가치판단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공감능력의 결여는 그를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을 보란듯이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그에게는 자신 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메리 트럼프'는 도널드 트럼프의 조카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형인 '프레디'의 딸. 그런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삼촌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이다. 그녀는 고모와 엄마 그리고 할머니로부터 도널드 트럼프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메리 트럼프는 임상심리학자인 만큼 어린 시절이 성인이 되어서도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아직 아기였을 때, 도널드 트럼프를 보호해주는 어른이 없었다. 사랑해주고 돌봐주는 어른이 없이 방치되어야만 했다. 그건 도널드 트럼프 형제들 모두에게 같은 조건이었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형이나 누나보다 어렸다는 데에 좀 더 차이가 있다. 물론 개인이 타고난 것도 있었을 것이고.


아파서 자신 조차 돌보기 힘든 어머니와 공감능력이 전혀 없이 모든건 다 잘되고 있다고 긍정 확신에 찬 아버지 사이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했다. 아버지의 뜻과 반하는 삶을 사는 형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면서 도널드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설정했다. 도널드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는채로 자신의 욕망을 죽여가며 살았는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했던 그 어린시절부터의 욕망은 이 형제들을 아주 오래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을 쉽게 인정하지도 않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이 형제들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다. 행복하지 않은 개개인이 행복한 가족으로 연결될 리도 없다. 그들 모두는 서로 친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고 의무적으로 크리스마스 때 모이는 게 전부인 가족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돈과 회사 그리고 직위로부터 그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어린 시절에 방치되었던 아이를 보는 것은 괴로웠다. 도널드 트럼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는 초반에는 그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아이고, 내 안에 자라는 이 연민을 도대체 어쩌면 좋담, 하면서 만약 다른 어린 시절을 살았다면 그에게도 다른 삶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해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어린 시절이 없었다면 그에게는 지금의 대통령이란 권력도 주어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에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한채 방치되어 자란 아이가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살면서 아주 많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학교에서 선생님을,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직장에서 동료를 만나기도 하며, 동호회의 친구, 그리고 또 연인을 만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족보다 저 진한 정을 나누는 관계를 새로이 형성하기도 하고, 어린시절이 마치 보상받는 것 같은 큰 애정을 주고 받기도 한다. 사랑받은 적 없던 사람이 아 이런 것이 사랑이구나 새삼 깨닫게 되기도 하고, 우정과 신뢰를 나누면서 점차 자신 안에 있던 상처를 극복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어른으로 살게 된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라는 거다. 세상에는 악한 인간들도 있지만 선한 인간들이 더 많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조직에 속하고 또 개인대 개인을 만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도 자라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진실한 우정, 사랑을 나누고 연대를 느끼고, 신뢰라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돈이 있었다. 돈이 있었고 돈은 곧 힘이었기에 그에게는 '그렇게 살면 안된다' 라든가 '그건 틀렸다' 라고 말해줄 사람이 현저히 적었다. 이 아이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았던 엄마는 아들보다 힘이 약해 아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심지어 이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큰아들로부터 얻지 못했던 성공에 대한 욕망과 성취를 이 작은 아들로부터 본 것이다. 그렇게 이미 부를 가지고 태어나 부를 더 쌓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잘못되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적을 뿐더러, 설사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트럼프는 이미 잘했다고 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다른 의견에 귀를 열지 못한다. 초반에 그에 대해 생긴 연민이 아직 저기 어디에 희미하게 남아있긴 하지만, 끝까지 그에게 연민을 가져갈 수가 없는건, 그가 그러면 안되는 행위를 권력자로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리 트럼프'는 언급했다시피, 도널드 트럼프의 조카이다. 대통령이라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에게, 모든 포지션이 더 약자인 사람으로서, 젊은 여성이자 조카이자 성소수자인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늙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에 대해 반하는 글을 결국은 책으로 냈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짜릿했다. 권력에의 도전은 내게 언제나 짜릿함을 준단 말이지. 트럼프의 출판금지 가처분 소송까지 이겨내고 나온 책이라니, 이 얼마나 튼튼하고 단단하게 어마어마한 의지와 분노로 여기온 것인가. 나는 권력에 맞서는 자에게 언제나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짜릿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이 책이 새롭지도 않고 충격적이지도 않다. 겉에서 보이는 트럼프에 대한 인상과 딱히 별로 다를 바 없는 내용이고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트럼프나 미국에 대한 인상을 새로이 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가족 내에서도 유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몰랐지만-트럼프에게 다른 형제가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내게 없었다-, 그것은 돈 있는 집에서라면(사실 돈 별로 없어도)늘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이 책의 내용을 미국에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가진 사람들이 몰랐을까, 라고 한다면 그도 아닐 것 같다. 이미 알고 있는 일들을 책에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이 아니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트럼프에 대해 모르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이미 알면서도 여기까지 끌어온 것이고, 이 책이 나왔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결과가 펼쳐질 것 같지도 않다.


트럼프에게는 이 책이 나온게 달랐을까? 그러니까 자신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의 조카가 자기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책이 나온게, 그에겐 어땠을까? 잘 모르겠다. 이제 앞으로 트럼프의 삶은 어떻게 될까? 잘 모르겠다.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변할 필요조차 못느낄 것 같다. 그러니 그의 삶이 뭐 크게 달라질까, 라고 한다면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이 내가 기대한만큼 특별한 건 아니어서 별은 세개반을 주고 싶은데, 알라딘은 별 반개가 없고, 그렇다면 올릴까 내릴까 기로에 서서, 권력에의 도전에 별 반개를 더 실어주자, 하고 네 개를 준다.



늘 그렇듯 도널드는 이야기가 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앞에서 진실은 쉽게 희생당했다. 거짓말을 통해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잇을 때 특히 더 그랬다. - P21

고모와 삼촌의 생각과 달리, 나는 돈을 뜯어내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다.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면 그가 연쇄 파산한 사업가이자 얼토당토않은 리얼리티쇼 진행자라는 자신의 명성을 백악관 입성에 써먹기 훨신 전에 이미 출간했을 것이다. 삼촌이 내부 고발자들과 자신을 비판하는 인물을 위험에 빠뜨릴 만한 위치가 아니었을 때 책을 내는 편이 훨씬 더 안전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3년간 일어난 사건들을 보며, 나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이 책이 출간될 때쯤이면 수십만 미국인의 삶이 도널드의 자만심과 의도적인 무시의 제단에 희생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 P37

메리 할머니는 애정에 굶주린 사람이었던 데 반해, 프레드 할아버지는 감정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실 할아버지는 고기능 소시오패스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소시오패스의 수는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달할 만큼 적지 않다(소시오패스 판정을 받은 사람 중 75퍼센트가 남성이다). 소시오패스의 증상으로는 공감 능력 결여,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능력, 옳고 그름에 대한 무감각, 학대 행위, 타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 부족 등이 있다. 이런 소시오패스인 양육자 밑에서 자란다는 것은, 게다가 그 양육자가 미치는 영향을 완화시켜줄 사람이 부재한 환경에서 자란다는 것은 아동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며 세상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다. - P46

도널드는 세 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그에게는 성장·학습·발달 능력이 없고,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능력도 없으며, 자신의 반응을 절제하거나 정보를 받아들여 취합할 기술도 없다. 그는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자신의 지지자 중 대다수가 유세 현장이 아닌 곳에서 만났다면 그와 말도 섞지 않았을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 P299

세상으로부터 도널드를 보호해주던 값비싸고 튼튼한 ‘벽 보호대‘(환자가 벽에 머리를 박아 다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 정신 병동 벽에 설치해 놓은 보호대-옮긴이)가 무너지고 있다. 도널드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도널드보다 힘ㅇ 없고 겁이 많지만, 도널드만큼 필사적이다. 이 사람들의 미래는 도널드으 성공과 총애에 직접적으로 달렸다(자신의 운명이 과거 도널드에게 충성했던 사람들과 같아질 거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하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도널드가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신념을 영구화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은 박수부대의 일원이 되어 도널드의 무능함을 감춰주었다. 애초에 도널드를 대통령 자리에 앉힌 건 힘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자리를 지키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은 도널드보다 더 유약한 이들이다. - P302

도널드는 무관심에 대한 공포와, 형을 파멸로 이끌었던 실패에 대한 공포 사이의 어두운 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다. 형을 끌어내리는 데까지는 42년이 걸렸지만, 형을 끌어내리기 위한 밑 작업은 그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도널드가 트라우마로 힘들어할 때 형이 무너지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도널드가 목격한 일과 직접 경험한 일의 조합은 도널드를 고립시키고 공포에 떨게 했다. 어린 시절에 느낀 두려움의 기제가 성인이 돼서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두려움이 지금까지도 도널드를 압도한다는 사실은 그 감정의 뿌리가 60년 전, 하우스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증명한다. - P305

그로부터 50년 후,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정과 대책 없는 소통 방식은 말 그대로 여러 사람을 죽어나게 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연방정부에 직접 인공호흡기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쏟아졌을 때조차 도널드는 주지사가 자신에게 충분히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 주에는 재정적 지원을 끊고 구명장비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난 이 소식을 듣고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소시오패스처럼 대놓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와 한 사람의 행동이 불러올 수 있는 결과에 단체로 침묵하는 행위는, 내게 다시 한번 어린 시절에 겪었던 절망의 나락을 상기시켜줌과 동시에 진짜 문제는 도널드가 아니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명확히 확인시켜주었다.
이 모든 것은 도널드가 상황을 빠져나갈수록 주변에서 계속해서 도와준 결과이다. 또한 전통과 존엄성, 법과 인간에게 죄를 저질러온 한 사람에게 보상으로 반응해온 최종 결과물이기도 하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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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19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어요!
트럼프는 지금처럼 어렸을 때도 악동이었겠지만, 그래도 궁금하네요. 전 도서관 책으로 읽어보겠어요 ㅎㅎㅎㅎ

다락방 2020-11-19 16:36   좋아요 0 | URL
악동은 너무 귀여운 표현인 것 같습니다!! 참... 여러가지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복잡한 마음이에요. 인간의 삶이란 게 개개인으로 놓고 보면 다들 저마다 나름나름으로 불행하고 안됐기도 하고 그렇지만....트럼프는,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냥 끝까지 트럼프일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ㅜㅜ

수이 2020-11-20 09:32   좋아요 0 | URL
악동 말고 악당........ 트럼프에게는 아까운 표현;;;;; 트럼프 넘 시러요.....

다락방 2020-11-20 09:39   좋아요 0 | URL
보기만해도 너무 징그러워요 ㅜㅜ

이 책 읽다보면 메리가 18살 때 수영복 입은 거 보고 ‘오 가슴 죽이는데!‘ 하는 게 나와요. 너무 끔직해 ㅠㅠ
 
한겨레21 제1336호 : 2020.11.09
한겨레21 편집부 지음 / 한겨레신문사(잡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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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폭력 활동가 마녀' 님 글을 읽기 위해 응원하는 마음으로 샀다. 이번 주제는 '보복성 고소'에 관한 것이었는데 읽다가 밑줄을 그었고 아직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 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었다. 지금은 트윗에서 'D'님으로 활동중이신데,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재판에 연대자로 함께 해주시며 또한 트윗 내에서도 발언을 늘 해주신다. 그 분이 가장 많이 하는 발언은,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라'는 것.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돕겠다고 연대하겠다고 해주시는 거다.


최근에는 자살 협박을 이용해 여성들을 유인, 성폭행 했던 시인이 마녀님께 대드는 걸 보면서 세상 뻔뻔하기 이를데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던 미성년자 성폭행 전과자부터 시작해서 왜이렇게 이 남자들은 뻔뻔함으로 무장되어 있을까 생각했다. 후...


마녀님의 말씀대로 늘 주장하시는 바대로,

여자들아 어떻게든 살아 있자. 그러면 다른 여자들의 연대로 그 다음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자살협박하는 자들에게 달려가지 말자. 누군가 자살로 유인을 한다면 경찰에 신고하자. 그 사람의 자살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너가 지금 오지 않으면 나는 죽을 것 같아, 한다면 무조건 경찰에 신고하자.

그리고 당신이 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었다해도, 다시 말하지만 당신 탓이 아니다. 정말 아니다.

많은 경우 경찰들은 여자 피해자의 말들을 들어주지 않고 가볍게 취급하지만,

남자가 자살한다고 한다면 달려갈 것이다.

누군가 자살할 것 같다고 와달라고 하면 거기에 달려가는 대신 경찰에 신고하자.

그리고 살자, 여자들아. 살아남자.

살아남아서, 그 다음 세대의 여자들이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자.

우리 그렇게 하자.

뻔뻔한 남자들을 가볍게 즈려밟고 그렇게 살자.





보복성 고소란 ‘역고소‘ ‘맞고소‘ 등으로 불리는 성폭력 가해자들의 대응 전략이다. 성범죄 전문 법인에서 가해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이 방식은, 피해자 입을 틀어 막고 지지와 연대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통상 피해자가 고소·신고하면 무고, 명예훼손, 모욕, 업무방해, 공갈, 협박 등의 조명으로, 피해자가 폭로만 했을 때는 무고를 뺀 나머지 죄명으로 고소한다. 게시물과 기사, 방송 내용에 대한 가처분 신청과 민사소송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는 피해를 입었음이도 피고소인 신분으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아야 한다. 자시느이 피해 사실 입증에 집중하기 어려워지며, 가해자 쪽 고소 취하·합의 종용에 끌려가게 된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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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16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해자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을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인간에 대한 기대를 자꾸 저버리게 되네요.
우리 그래도 살아봐요. 우리 여자들아, 어떻게든 살아남자!

다락방 2020-11-16 09:15   좋아요 0 | URL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 남아야 해요. 우리 어떻게든 살아남아요, 단발머리님!!

수이 2020-11-1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전에 어디 기사인지 깜박했는데 오마이뉴스 였던 거 같기도;; 데이트 폭력으로 아니 데이트 살인이라고 해야할까 그 통계를 보았는데 모조리 살릴 수 있었어요, 그 무고한 죽음들이 전남편이나 남편이나 애인들에의해서 행해졌고_ 법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야.... 살 수 있는 여자들을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 아닌가 현 법망은. 열불나서 또 씩씩거리는 아침

다락방 2020-11-16 10:31   좋아요 1 | URL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여자들은 남성들에 의해 죽음의 공포를 겪죠. 이에 대해 바깥으로 얘기하면 다들 과한 생각이라고 여자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결국 남성에 의한 여성 살인은 반복되죠. 이에 대해 리베카 솔닛도 얘기한 적이 있어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에 이런 구절이 나오거든요.

<신뢰성은 생존의 기본 도구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알아가기 시작하던 시절에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핵물리학자 삼촌이 있었다. 어느 크리스마스에 그 삼촌은 우리에게 핵폭탄 연구자들이 사는 교외의 자기 동네에서 한 이웃집 부인이 한밤중에 알몸으로 집을 뛰쳐나와서는 남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비명을 질러댔다는 이야기를-마치 가볍고 재미난 대화 소재인 것처럼-들려주었다. 나는 물었다. 남편이 진짜로 아내를 죽이려 한 게 아니란 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내게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 사람들은 점잖은 중산층 가정이었다고, 따라서 남편이 아내를 죽이려 했다는 말은 여자가 남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외치면서 집을 뛰쳐나온 데 대한 설명으로서 믿을 만하지 않다고, 오히려 여자가 정신 나간 거라고 ‥‥‥(p.18)>


매일매일 화나는 아침과 낮, 밤입니다.


수이 2020-11-16 11:28   좋아요 0 | URL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읽을 게 넘 많아..... 그래서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