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내가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다음엔 어떤 속도로 달리고 그 다음엔 또 어떤 속도로 달리자는 식의 목표가 생기겠지만, 나는 빨리 달리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고, 대신 나는 좀 더 천천히 오래 달려보자, 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는 하다. 그래서 7킬로를, 8킬로를 그러다가 10킬로를 달렸었고, 10킬로 너무 힘들었었는데 하여간 얼마전에는 그 때보다 조금만 더, 하고 11킬로를 달렸더랬다. 와, 너무 힘들어서 천천히 오래 달리는 것도 이거 쉽지 않겠어..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내심 다음엔 언제가 됐든 12킬로... 생각중이다.
아마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달리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는 것도 좋고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다. 게다가, 이제 어떤 장소를 보고 오오, 저기 달리기 좋겠는데, 라고 달리기 회로가 먼저 돌아간다. 국내든 국외든 어떤 장소를 보게 되면 오오 저기 달려보고싶다!! 하게 된다.
최근에는 '그렇다면 회사에서 집까지 달려보면?' 하고 지도를 찾아 검색해봤는데, 얼라리여, 회사에서 집까지 13킬로 밖에 안되는게 아닌가. 이거, 해볼만하잖아? 처음에야 길을 몰라 시간이 곱으로 걸릴것이고 또 길을 찾아가며 가야하니 중간에 걷기도 많이 해야겠지만, 오오, 이건 해볼만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거다. 그걸 알게된 후 그럼 한 번 오늘? 했는데, 때는 이미 여름을 지나있었고 해가 빨리져서 좀 위험하게 생각되었다. 금세 어두워지는데 낯선 길에서 괜찮을까... 그래서 미루다가, 아, 반차를 내고 한 번 해보자, 벼르고 있었다.
어제가 바로 그 반차를 낸 날이었다. 오후 반차를 냈으니 점심때 퇴근을 해서 집까지 달리자, 아니, 집까지는 가지 말고 천호동 현대백화점만 가자! 하고 생각해두었더랬다. 그러나 회사 사정이 있어 반차를 취소해야 했다. 나는 달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고 옷도 다 준비했는데, 하아, 왜 보쓰는 갑자기 돌아오셔서... 라고 원망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걸 왜 주변의 영향으로 그만둬야 하지? 내가 하고 싶다면, 방해가 있어도 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아? 그래서, 그냥 퇴근 후에 뛰어보기로 했다. 퇴근 후에 달리자. 한 번 해보지 뭐. 달리다 너무 어두워져서 무섭거나 두렵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차 타지 뭐. 나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지도앱을 켜고 길찾기를 검색해보았다.
음, 양재에서 학여울까지는 양재천으로 갈 수 있고 영동 6교까지 달리면 되는구나, 오케이, 이건 그냥 지도 안 보고 달릴 수 있어, 학여울에서 잠실까지가 좀 문제군, 잠실에만 가면 거기서부터는 길을 안다.. 하고 다시 지도를 보고 익혀둔 뒤, 퇴근 후, 나는 양재천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영동 6교까지 달리니 3킬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양재천을 벗어나는 계단이 보여 올랐다. 여기서 속도가 확 늦춰진다. 계단을 오르고 멈춰서 지도를 봤다. 흐음, 여기로 가면 되는거군. 방향을 좀 바꿔야 되니 여기서는 걷자, 하고 걸었다. 자, 그리고 커다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이건 뭐야..신호 왜 이렇게 안바뀌어. 한참을 기다려서 초록 신호에 길을 건너서 다시 지도를 보았다. 아, 이 방향으로 가는게 아니라 오른쪽으로 쭉 가는거구나, 나는 다시 천천히 뛴다. 천천히 뛰다가 횡단보도가 나오면 멈추고 천천히 뛰다가 길이 좁다거나 하면 다시 멈춘다. 멈춰서는 지도를 본다. 음, 이 방향이 맞군. 그러다 또 계단이 나오고 횡단보도가 나오고, 어느 사이 나는 삼전역에 가있다. 오오 여긴 번화가라 아주 안심이 되는군. 매우 좋아. 그렇지만 횡단보도가.. 나는 또 걷고, 멈추고, 그러다 조금 천천히 뛰어본다.
그 사이 내가 점점 더 집을 향해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랜드마크가 있었으니, 그건 롯데타워였다. 어디서나 보이는 롯데타워, 볼 때마다 저거 진짜 높긴 하구나, 여기서도 보이네, 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차피 내가 잠실을 거쳐야 하는 터라 롯데타워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정말, 정말 반가웠다. 내가 맞게 이동하고 있구나, 점점 더 목표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어,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잠실에 도착했다. 만세!!
잠실에서 좀 고비가 있었다.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걷고 뛰고 여기까지 온게 너무 힘들었다. 잠실.. 우리 집에 가는 버스가 있는 잠실.. 나 버스 타고 갈까?
그러나 오늘 나의 목표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퇴근 후 대중교통 없이 나의 두 다리로만 집에 가기' 였다. 그건 뛰는 것과 걷는 것을 포함한 것. 그래, 뭐가 됐든 오늘은 한 번 그렇게 해보자, 하고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
으면 좋았겠지만, 아아, 롯데 근처 왜이렇게 사람이 많은가요. 여기선 뛰다가 자칫 어깨빵 당하기 십상이다. 여긴 그냥 편한 마음으로 걷는다. 어차피 길도 아는 터라 마음도 편안하다. 걸으면서 좀 쉬자, 하고 올림픽공원이 나올 때까지 걷는다. 흑흑. 양재에서 달리면서 또 걸으면서 올림픽공원까지 왔어!!
그런데, 뛰다가 한참을 걷다가 혹은 멈추다가 다시 뛰는 일은, 계속 뛰는 것보다 더 힘들다. 나는 다시 뛰지만 조금만 뛸 수 있고 조금 뛰다 걷고 또 조금 뛰다 걷고 그렇게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현대백화점 천호점에 도착했다. 만세!!
위에는 런데이 앱의 기록인데, 런데이는 내가 횡단보도 앞에 한참 기다려도 시간과 거리를 잡아버린다. 그러니 11킬로를 갔다고 나오고, 밑에는 애플 워치인데 애플 워치는 내가 횡단보도 앞에 서는 순간 자기가 알아서 운동을 잠깐 중단한다. 그리고 내가 다시 걸으면, 운동을 다시 체크한다. 그러니 거리는 좀 더 적게 나오고 페이스는 좀 더 빨리 나온다. 어쨌든 내가 거의 11킬로에 달하는 거리를 뛰고 또 걸으면서 갔다는 건 분명한 사실!! 휴..
나는 목표지점 현대백화점에 왔으니 들어간다. 사실 내가 현대백화점을 목표로 한 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똠얌누들을 먹기 위해서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기 12층에서 똠얌누들 팔거든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짜잔-
맥주는 처음부터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식당 들어가자마자 충동적으로 시켰다. 시원한 맥주가 너무 간절했다. 그런데 맥주 나오기 전에 물 네 컵 연거푸 마셔버린 부분... ㅋㅋㅋㅋㅋ 그리고 맥주도 마시고 똠얌누들도 먹고. 그리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 와, 너무 힘들지만 기분이 너무 좋다. 나 흥분돼! 맥주로 축배를 들자!! 막 이렇게 되어버린거다. 껄껄.
다 먹고 너무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집까지 택시나 지하철, 버스를 타면, 오늘의 목표였던 '대중교통 없이 두 다리로만 집에 가기'를 지키지 못하는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걸 먹고 집까지 또 걷는다. 하하하하하.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그리고 잠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래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목표를 지키기 위해 걸었다. 걷다가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나한테 쪽팔리기 싫어서 약속이나 목표를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런데 왜 '전교 1등 해보자', '박사 학위를 따자', '교수가 되어보자' 같은 목표..를 가진 적은 없을까? 왜지? 그건.. 어차피 안 될거라고 내 스스로 생각하고 체념했기 때문인가? 음..
집에 도착했다. 와 얼른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지친 몸을 쉬게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식탁 위에 남동생이 보내준 카스테라가 있는게 아닌가. 남동생이 가족들과 처갓집 식구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사온 카스테라를 보내준거다. 냉장고엔 우유도 준비되어 있지! 카스테라에 우유는 꿀맛이잖아? 카스테라에 우유는 국룰 아니냐! 나는 참지 못하고 카스테라랑 우유를 먹는다. ㅋㅋㅋㅋㅋ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아 너무 좋아 꿀맛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씻고는 매트 펼쳐서 스트레칭 좀 해주고, 아니 보통 귀찮아서 달리고난 후 스트레칭 건너 뛰는 편인데, 어제는 너무 힘들어가지고 안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 스트레칭 해주고 침대로 들어가서 책 좀 보려다가 기절해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오늘 거울을 보는데 오!! 예뻐졌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 어쩐지 예뻐진 것 같아!!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도 문에 비치는 내가 이쁘고 화장실 가서 거울을 봐도 예쁘다. 동료에게 "나 어제 집까지 달렸더니 오늘 더 예뻐진 것 같지 않아?" 물었더니 동료가 웃으면서 그런 것 같다고 했고, 그러자 옆에 있는 동료가 "대답 강요하시는데요?" 이러면서 다른 직원들까지 다 빵터져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 뭐, 나 예뻐졌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오늘 너무 예쁘고 어제 집까지 달려간 성취감도 장난 아니라서, 저녁엔 맛있는 걸 좀 나에게 먹여줘야 겠다. 나는 나에게 보상이 좀 후한 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앞으로 회사에서 집까지 대중교통 없이 가는건 안할 것 같지만, 또 모르지, 해보고 이게 어떤지 알았으니 어쩌면 오늘 또 한 번, 하고 언젠가 다시 해보게 될지. 여름에 이렇게 달려 퇴근하는 나를 상상해봤는데 옷이 완전 몸에 찰싹 달라붙겠구나. 으음, 그런데 어쩌면 나는 여름 전에 퇴사를...
자, 이렇게 달리기 이력에 새로운 성취를 하나 더했다.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