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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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이 작품속에서의 해리 홀레 진짜 너무 싫다.

나는 책이나 영화에서 술이나 마약에 찌든 거 보는거에 좀 스트레스 받는 편인데, 여기서 해리 홀레가 그렇다. 술에 떡이 되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하는 말과 행동들을 보는게 너무 싫어. 하아.

게다가 사랑하는 여자한테 살인사건 해결을 위한 인질이 되어달라 부탁하네요. 그래서.. 하아-


해리 홀레는 여기까지만 읽겠다. 더이상 읽고 싶지 않다. 무슨 해리 홀레 사랑하면 다 비극적 결말이야.

역시 잭 리처인가...


이책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책인데 나는 종결해버리게 됐다. ㅋㅋㅋㅋㅋ

잭 리처 만세!!



"돈 들여 욕구를 해결할 필요가 없었나 보군요." 해리가 말했다.
샌드러가 콧방귀를 뀌었다. "성욕이랑은 상관없어요. 성을 사려는 욕구는 별개예요. 남자들한테 그건 강렬한 쾌감이에요. 집에서못하는 걸 우리가 아주 다채롭게 해줄 수 있으니까. 진짜예요." - P151

"어렸을 때 우리 집 근처에 게이가 살았어." 해리가 기억을 더듬었다. 마흔 살쯤 됐을 텐데 혼자 살았고, 우리 동네에서 그 남자가 게이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겨울에는 우리가 그 남자한테 눈 뭉치를 던지면서 ‘남창‘이라고 소리치고는 죽어라 내뺐어.
그 남자한테 잡히면 엉덩이에 그 짓을 당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그는 한 번도 쫓아오지 않고 그냥 모자를 귀까지 푹 눌러쓰고 집으로 갔어.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동네를 떠났어. 나한테 해코지한 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그 남자를 미워했는지 늘 의문이었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두려워하니까. 그리고 두려워하는 대상을 증오하고."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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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2021-08-11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노우맨까지의 해리홀레는 하드보일드 주인공 특유의 허세로 그럭저럭 넘겨줄만 했는데, 최근작 두편은 도저히 못참아주겠더라구요 ㅋㅋㅋㅋㅋ 책을 읽다가 그렇게 화가 나긴 정말 오랜만 (...)

다락방 2021-08-11 10:41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초반의 서투른 해리 홀레가 너무 싫으네요. 아오.. 저 사두고 안읽은 해리 홀레 또 있는데 역시 사람은 책을 미리 쌓아두면 안되는건가봐요. 이렇게 정떨어질줄은 모르고 미리 사뒀네요.. 히융 ㅠㅠ

독서괭 2021-08-11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잭리처인가요. 잭리처 만세!!!

다락방 2021-08-11 11:02   좋아요 1 | URL
해리 홀레 너무 민폐에요. 으.. 잭 리처가 짱입니다. 잭 리처 만세! ♡

단발머리 2021-08-11 12:16   좋아요 1 | URL
잭리처 만세! 만세만세 만만세!!!

다락방 2021-08-11 12:22   좋아요 1 | URL
여름이 가기 전에 잭 리처 한 권 읽어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단발머리 2021-08-11 12:24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리차일드 마니아 4위이신데 엄청 많이 읽으시더라구요. 3위인 저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전 차기작품으로 <10호실> 찜해놓았다는 걸, 마니아 2위님께 미리 알려드립니다^^

다락방 2021-08-11 12:26   좋아요 1 | URL
저도 계속 치고 올라오는 독서괭님을 피하기 위해 얼른 도망가려고 합니다. 독서괭님 올라오시는 속도가 너무 무서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퍼스널> 읽으려고 시동걸다가, 종이책으로 읽고 싶은 마음에 <원티드 맨>사려고 합니다. 엣헴-

독서괭 2021-08-11 12:55   좋아요 1 | URL
저 지금 원티드맨 1/3 넘게 읽었습니다. 엣헴~

다락방 2021-08-11 13:03   좋아요 1 | URL
뭐..뭐…뭐….뭐라고욧? 😱😱😱

독서괭 2021-08-11 13:05   좋아요 1 | URL
빨리 도망가시죠 ㅋㅋㅋ

단발머리 2021-08-11 13:06   좋아요 1 | URL
큰일났어요!! 독서괭님 잭리처 만세!! 할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

다락방 2021-08-11 13:10   좋아요 1 | URL
큰일났네요. 아직 원티드맨 사지도 않았는데 ㅋㅋㅋ 퍼스널 을 먼저 읽어야겠어요. 아놔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8-11 13:31   좋아요 1 | URL
2,3,4위가 이렇게 경쟁하고 있는데 1위는 대체 누구실까요 너무 궁금하다…

다락방 2021-08-11 13:39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어쩐지 1위는 신경도 안쓰고 1위를 유지할 것만 같습니다...

syo 2021-08-11 13:44   좋아요 1 | URL
억 나 5위 왜 5위?ㅋㅋㅋㅋㅋ 😂

다락방 2021-08-11 13:45   좋아요 1 | URL
엥? 쇼님이 5위라고? 왜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친구라 자동으로 올라갔나? (막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8-11 13: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식으로 나의 경쟁심에 불을 붙인다?

단발머리 2021-08-11 13:59   좋아요 1 | URL
1위는 하이드님이고요! 여러분! 2위 다락방님 아니고 단발머리래요!!! 🥳🥳🥳

독서괭 2021-08-11 14:01   좋아요 1 | URL
오옷 그렇군요!! syo님이 원래 4위였는데 제가 밀어냈군요?ㅋㅋ 하이드님이 1위였군요. 궁금증이 풀렸다! 감사해요 ㅋㅋ

다락방 2021-08-11 14:02   좋아요 2 | URL
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잠깐 해리한테 갔다왔더니 잭이 저를 밀어냈군요. 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 잭, 미안해. 어딜가도 당신만한 사람은 없었어. 곧 돌아갈게!!!

(울면서 달려나간다)

단발머리 2021-08-11 14:03   좋아요 2 | URL
저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을거에요!! 🏃🏻‍♀️ 리처! 기다려요!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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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한창 페미니즘 강연을 들으러 다녔을 때 '정상'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정상'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그 정상의 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비정상'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어떤 것에 대해 무어라 단정지으며 가리키는 것은 생각에 생각을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칭찬에 대해서도 그렇다. 단정하다, 깔끔하다, 예쁘다 등등의 것을 내 앞에 오로지 '너'만 있을 때 말하는 것과,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명에게 말하는 것은 다르다. 내가 내 눈앞에 있는 영숙이에게 넌 참 예뻐 라고 말하는 순간 옆에 있는 미숙이는 예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눈 앞에서 하나를 어떻게 지칭하는 순간 다른 하나는 그것과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경찰공무원 준비를 하던 사람으로부터 '법은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말해준다'는 얘길 들었다. 유럽에는 동물과의 섹스를 금지하는 법이 있는데, 왜 그 법이 있냐면 동물과 섹스를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결이 좀 다른듯해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두 가지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의 책 《젠더 트러블》을 통해 섹스와 젠더는 모두 이런 식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얘기한다. 그 주장을 함에 있어서 푸코, 라캉, 모티그, 레비 스트로스, 보부아르를 다 소환한다. 자 봐봐, 동성애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돼? 이성애가 정상인게 되지. 근친상간을 금지해? 그렇다면 근친상간이 아닌 이성애는 허용하는 게 되지. 여성은 만들어지는 거라고 얘기해?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게 일단 존재하는게 되지.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이라는 섹스는 존재하는걸까? 염색체로 구분된다고 했을 때 그 염색체대로 신체적 발현이 일어나는 게 아닌 경우도 있는데 우리는 염색체에 따라 성별을 결정해 지칭해야 할까? 그렇게 지칭해서 거기에 젠더를 씌워버리면 모든 사람들이 젠더롤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지만 어쨌든 그 규율에 맞게끔 행동하고자 하지. 우리는 젠더라는 걸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롤대로 행동하려고 해. 그렇게 해야하는걸까? 그래서 버틀러는 드랙이 젠더에 트러블을 일으키는 가장 전복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드래그야말로 젠더의 표현적 양식과 진정한 젠더 정체성이라는 개념뿐 아니라 내부와 외부 심리공간이라는 구분을 완전히 전복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p.342



그리고 나는 이런 버틀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다른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동의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와 같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이런 패러디적 정체성은 드래그나 옷 바꿔 입기의 경우 여성 비하적인 것으로, 특히 부치/팸의 레즈비언 정체성의 경우 이성애 실천에서 나온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전유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p.342



책에 어려운 단어도 너무 많이 나오고 이론적인 내용들이라서 읽는 내내 도대체 이것을 읽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어떤 식의 도움이 된단 말인가 좀 괴로웠는데, 반복되는 내용을 계속해 읽다보니 학자들이 연구하고 이렇게 어렵게 써내는 것을 읽는 독자들의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디스 버틀러가 갑자기 현실을 살고 있는 젊은 여성들 혹은 젊은 남성들을 만나서 이 책의 이론들을 설명하고자 하면 뭔 소리인가 싶고, 그게 어떤 필요가 있나 하겠지만, 어쩌면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중간에서 연결고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백프로 이해가 아닌 적은 이해 큰 오해를 한다 치더라도, 나는 이 책을 읽고 생각한 것, 혹은 알아낸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디스 버틀러보다 훨씬 더 쉬운 말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주디스 버틀러가 한 것처럼 굳이 라캉이나 푸코, 위티그를 데려오지 않더라도 내가 깨달은 바를 내 식대로 표현하노라면 그것은 작게 보면 생각의 변화부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게 아닐까. 어떤 주장에 동의하고 어떤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이 책을 읽은 것은 분명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내가 한 행위이고, 어떤 부분부분들이 내 안으로 들어왔을 터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작게나마 건드리긴 할것이고, 그렇게 건드려진 나는 이 책을 읽은 후의 내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바깥으로 보여지며 어떤 식의 작은, 아주 미미한 영향이라도 되는게 아닐까. 책을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이딴게 다 무슨 쓸모야 성범죄자 죽여버리는 게 제일 큰 쓸모다! 하였지만, 그러나 이렇게 큰 이론을 읽고 작게 영향을 받아 그보다 더 작게 표현되더라도 의미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그 책에 대한 이해가 10이고 오해가 90이라 해도 혹은 15는 기억나고 85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책의 흔적이 몸에 고스란히 남는것 같다. 버틀러가 위티그를 가져올 때 나는 아, 모티그가 내 안에 남아 있었구나, 하고 너무 기뻤다. 모티그의 책 역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였는데, 그거 읽을 때는 그 얇은 책이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랐던 거다. 그런데 버틀러가 위티그를 소환하며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 라고 할 때, 이 도대체 알 수 없는 문장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니크 위티그는 버틀러가 가장 나중 소환한 작가인데, 계속 버틀러가 가져온 인용이나 생각을 읽노라니, 이성애 속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고 여성은 그러므로 이성애 안에서 존재하는데,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를 하는 레즈비언이라면 이성애를 벗어나 있으므로 여성이 아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을 이제 알겠는거다. 그 주장에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느냐 마느냐와는 완전 별개로, 이걸 모티그의 책에서 읽었을 때는


아니, 여성과 여성이 하는게 동성애고 그들이 레즈비언인데 레즈비언이 여성이 아니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이야..


하였단 말이다. 그런데 버틀러의 책에서 다시 만나는 위티그의 같은 문장은 이제 '아 위티그가 그말을 하는 것이로구나!' 하게 되는거다. 어쩌면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그 책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보다, 그간 읽어온 다른 책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게 아닐까 싶어지면서 매우 기뻤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를 고작 5만큼 했다해도, 앞으로 나의 남은 독서인생이 그것을 조금씩 더 크게 키워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내게는 있다. 움화화화핫.



아무튼 매우 기쁘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어려운 책을, 그래서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바로 이 책을, 어쨌든 나는 다 읽었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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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음 2021-07-28 1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책이 어려워서 이 책을 해설한 책을 읽었어요. 조현준의 주디스버틀러, 젠더트러블...그나마 이해가 조금 되더라구요. 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21-07-28 11:00   좋아요 4 | URL
안녕하세요, 좋음 님! 저도 언급하신 조현준의 해설서를 읽으려고 찜해두고 있답니다. 젠더트러블의 경우 해설서를 몇 권 읽어줘야 비로소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지 않을까 싶어요. 해설서 읽고 좀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흑 ㅜㅜ

미미 2021-07-28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역시👍👍👍👍👍수고하셨어요!!🐳🐬🐠 다음달도 고고씽!

다락방 2021-07-28 11:01   좋아요 3 | URL
저는 다 읽어서 진짜 너무 씐납니다. 그 어떤 책보다 씐납니다. 어휴 진짜 고생했어요. 어휴.
미미님, 우리는 8월 도서로 만나요. 8월 도서도 다시한번 안내하도록 할게요!!

공쟝쟝 2021-07-28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틀러는 패러디가 전복적이긴 하지만 모든 패러디는 전복적인건 아니라며 빠져나가요 ㅎ 말씀주신 드래그도 전복적이지 않은 패러디가 되어버린 예시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을 본질화 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비껴가는 버틀러의 이론이 여성들의 삶을 더 낫게할지 더 나쁘게 할지는 사용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패이퍼 쓰는 중이예요 ㅋㅋㅋ (아직 다 읽지는 않음) 축하해요 ㅋㅋ 완독! 완독 왕! 다락방!

다락방 2021-07-28 13:55   좋아요 1 | URL
저는 버틀러가 기존 이론들이 없었다면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모든게 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어떤 모순이 있다, 라고 밝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주장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버틀러의 이 책을 한 15프로정도 이해했나 싶은데(하하하하하)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는 흐음 그래, 그렇다는거군, 알겠어 하기는 하였지만 뭐랄까 저한테 막 전율을 준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저한테는 이것이 되게 ‘멀다‘는 느낌을 준 책이었어요. 어떻게 됐든 도움은 되겠지만 되게 멀다, 먼 책이다, 는 생각이요. 즉각적인 반응을 주지 못하는 책이었고 그나마 이해되는 부분에 있어서도 적극적 동의를 할 순 없었어요. 쟝님의 페이퍼 읽으니 같은 책을 읽은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글이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이해하려고 애쓰고 잘 이해했나 싶을 정도로 놀라운 페이퍼였어요, 쟝님의 페이퍼는.
제 이해의 폭이 좁기도 하겠지만, 저는 역시, 여자는 인질이다, 드워킨의 포르노그라피 이런 책들이 좋아요. 뱀이 깨어나는 마을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7-28 14:14   좋아요 0 | URL
저는 전율은 안했고 오이디푸스 패줘서 좋았음ㅋㅋㅋ 프로이트 드디어 한대 맞은 것 같았죠? 버틀러는 가부장제가 아닌 이성애중심주의를 없애는 게 결국 페미니즘에게도 좋다라고 본 것 같아요. 저는 그가 지적으로 흔드는 개념들이 아름답지만, 잘못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굉장히 많게 느껴졌어요. 모든걸 다 흔들어버리면 강한 권력도 흔들리겠지만 가장 많이 무너지는 건 제일 약한 사람들이니까요. 어쨌든 버틀러가 정체성 논의 종식시키고 ‘몸’으로 가셨다는 풍문이 들려서 몸 .. 페미니즘과 몸.. 이러고 있습니다! 책 포르노 그라피는 언재 나와요??

다락방 2021-07-28 14:20   좋아요 1 | URL
포르노 그라피 책은 대체 언제 나오는건지 모르겠네요 ㅠㅠ

우리 땡볕에 걷자! 지치지 않게 플랭크로 체력 좀 다지고 있어요!(뜬금 플랭크)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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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아 일자리를 잃은 펠리사아는 다른 풀타임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일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빠와 오빠들은 펠리시아가 파트타임 잡을 구해 가사노동을 온통 펠리시아가 도맡아 주기를 바랐다. 백살이 된 할머니를 돌보는것 까지도. 이런 답답한 펠리시아의 삶에 사랑은 한줄기 빛이었고 구원이었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바라봐줄까 했던 펠리사아에게 다가와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 '조니'가 나타난 것이다. 일주일간 매일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고 혹시 모를 임신에 대한 걱정을 할라치면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이 다 알아서 한다고 조니가 말했기 때문에, 펠리시아는 사랑에 빠져 조니를 믿었다. 조니와 펠리시아는 사랑하니까 앞으로 이 사랑으로 서로에게 행복이 되어줄 터였다. 펠리시아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몸이 아픈 엄마를 방문하기 위해 고향에 들르는 것이 전부였던 조니는 다시 자신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했다. 주소를 알려달라고 편지를 쓰겠다고 펠리시아는 요구했지만 주소를 알 수 없었고 그는 자신이 먼저 편지를 보내겠다고 했지만 펠리시아의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내내 애를 태우던 펠리시아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깨닫고 조니의 엄마를 찾아가 조니가 사는 곳의 주소를 알려달라고, 나에게는 그가 필요하다고 애원해보지만 조니의 엄마는 그녀에게 내 아들을 그냥 두라고 말하며 그녀를 쫓아낸다. 열일곱 펠리시아의 임신은 펠리시아의 아버지도 알게 되고, 아버지는 펠리시아에게, 자신의 딸에게 창녀라고 소리친다. 펠리시아는 집을 나온다.


너무나 전형적인 나쁜 놈이 나온다. 피임하지 않았으면서 그러나 걱정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임신하지 않는 육체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빈번히 생각하지만, 만약 임신이 섹스후에 랜덤으로 오는 것이었다면, 그러니까 반드시 여자만 임신하는 게 아니라 남자도 임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남자들은 지금보다 콘돔 쓰는데 더 열심이었을 것이고, 세상에 섹스의 횟수는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임신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섹스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러나 임신은 여자만의 몫이고 아이를 배안에서 키워가거나 혹은 병원에 가 낙태를 하는 일도 여자만의 몫이기 때문에 남자들은 때로는 귀찮아서, 콘돔 사는 걸 까먹어서, 콘돔을 끼면 느낌이 살지 않아서, 너무 욕망이 강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피임에 소홀한다. 그들에게 섹스는 절실하지만 임신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그러면서도 괜찮아, 내가 다 조심하고 있어, 라고 말하고 그러다 여자가 임신을 하면 그야말로 세상 찌질한 남자가 된다. 조니는 펠리시아가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로 임신시켜두고 떠났고 사실 펠리시아랑 다시 또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도 전혀 없었다. 펠리시아는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지만 조니에게 그것은 잠시잠깐 고향에 내려가서 욕구를 해소한 것 뿐이었다. 아, 하나의 모험담으로 추가될 순 있겠다. 동료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말야 이번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하고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면서 얘기하겠지. 친구들은 껄껄 웃을테고. 그런 모험담속의 소재가 펠리시아였다. 



초반에 한 남자의 모험담 속에 등장하는 여자라면, 그 후에는 힐디치 씨라는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자의 트로피 여친이 된다. 아니, 펠리시아는 자신의 정체성이 그 남자의 여자친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그럴 의도도 아니었으며 또한 자신이 그렇게 보일 거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누가 봐도 집을 나왔으며 갈 곳 없어 보이는 듯한 열일곱 펠리시아에게 중년의 퉁퉁한 사내 힐디치 씨는 다가왔고, 온갖 선함을 가장하며 그녀에게 선의를 베푼다. 네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줄게, 너를 배불리 먹여줄게, 나의 집에서 쉬게 해줄게, 너의 남자친구를 찾아줄게 등등. 그러면서 그는 수시로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원하고 그것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그녀와 함께 병원에 가서는 '나의 여자친구'라고, 물론 펠리시아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것이 너무 짜릿하고 즐겁다. 그녀가 인정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관계를 설정하고서는 그 혼자 그 관계에 뿌듯해하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키고 싶어한다. 나는 너에게 잘하고 있으니 너는 나랑 오래 잘 지내고 나에게 고마워해야지. 그러나 이 젊은 여성은 사실 처음부터 그가 두렵긴 했다. 누군가의 선의를 이렇게 단번에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못하며 그것은 반드시 되갚아야할 것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간직한 채로, 그것에 앞서 이 중년의 남자가 '혼자서', '혼자인' 나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것을 받아들여도 되는가, 이 사람의 차에 타도 되는가, 이 사람의 집에 발을 들여놓아도 되는가. 이런 불안감을 가지면서도 그러나 그곳에 발을 들이는 까닭은 펠리시아가, 그리고 그전에 펠리사아 같았던 다른 젊은 여성들 모두가 다른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돈이 없고 그렇게 갈 데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었고,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르면 더이상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본인의 갈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렇지만 이제 가야겠어요.



이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뿌듯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베푼 것이 선의라고 믿었던 힐디치 씨는 자신이 돌봐주고 도와주었던 그녀들이 그렇게 말을 할 때마다 너무나 너무나 서운했다. 왜 이 관계를, 이 집 안에서 너와 나의 단단한 관계를 너는 더 유지하려 하지 않지? 자신이 베푼 선의에 대해 자신이 기대한 답을 받지 못하는 힐디치 씨는 그래서 자신 안의 악에 몸을 푹 담근다. 한 발은 원래 담그고 있었던 터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일상이, 그녀들의 떠나겠다는 말에 무너지는 거다. 뭐라고? 날 떠나? 내가 널 그냥 떠나게 둘 수 있겠니?



힐디치 씨에게 관계-그는 그것을 우정이라 말한다-란 그런 것이었다. 직장에서 성실히 일 잘하는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두루두루 좋은 사람인 듯, 평범한 사람인 듯 보였지만, 그가 맺는 관계라는 것, 친밀함이라는 것은, 이 밀폐된 집 안에서 단 둘이 있으면서 서로 결속되는 것이어야 했다. 바깥으로 나가서는 안되고 이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갇혀사는 삶. 필요한 걸 모두 자기가 해주고 있으니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만족해야 했다. 내가 아껴주잖아. 그가 그런 관계를 자꾸만 시도하고 실패에 절망했다 또 상대를 물색해 시도하는 것은, 그가 어릴적부터 맺어왔던 관계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감금되어지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하고 그러면서 입 닥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여야 했던 삶. 그 삶은 힐디치 씨를 어른이 되어 자신이 당한 일을 그대로 하게 만들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어느 순간 바뀌어버린 것. 거기에, 자신의 길을 찾고자 나섰던 펠리시아가, 그리고 펠리시아 이전의 베스, 샤론, 보비, 게이, 엘시, 재키가 걸려들었다. 그저 자신의 길을 가려고 했던 것뿐인데 중간에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여자가 길을 떠난다는 것은 왜 이다지도 어렵고 험난한걸까.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고 선의는 선의가 아닌 길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왜 이다지도 힘든가. 나아가지 않으면 가사노동으로 허리가 휘면서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이 기다리고, 사랑을 찾아 그것이 구원이 되겠다 싶으면 사실 남자는 임신시키고 도망쳐버린다. 늙은 남자의 선의는 그저 나를 장식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었고, 길을 다니면서도 숱하게 바로 악의 구렁텅이로 직행하는 손길이 자꾸만 뻗쳐온다. 거기에서 열일곱살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간신히 하나를 피해 도망쳤다한들 또 만나게 될 위험에서도 도망친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또 오늘의 희망과 빛을 끌어안으려 노력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에너지일까. 어떻게 펠리시아는 햇볕을 쬘 수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는 책의 말미에서 선의를 얘기한다. 보통 사람들의 크지 않은 선의. 그러나 햇볕을 쬐도록 도와주는, 고통을 덜어주는 진정한 선의. 선의를 가장한 악의로부터 빠져나와서 다시 햇볕을 쬘 수 있는건, 그 선의들을 보고 받았기 때문에 가능햇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의 펠리시아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간 살아오며 다른 사람의 삶의 형태에 대해 내 기준으로 단정지어서는 안된다는 걸 배웠지만, 그런데 그 후의 펠리시아는 어떻게 됐을까를 자꾸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쬘 수 있는 건 다행한 일이지만,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 책의 해설에서 정부는 펠리시아 같은 사람들을 위한 구제책을 마련해 성공했다는데, 펠리시아는 그 수혜를 받았을까. 내가 어릴 적에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이제는 남자의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어른 여자가 되었을까. 


열입곱살 여자에겐 더 많은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 그 남자를 따라 숲에 가지 말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필요하고, 그 남자를 따라 차에 타지 말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물론 열일곱살 남자에게도 그런 어른은 필요하다.  힐디치 씨에게도 방향을 알려주고 끌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우정이란 어떤건지 몸소 보여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뒤에 다른 소녀들에게 가해질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아이들이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그 길을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걸 원한다면 원하는 걸 이루어내는데에 있어서 악의가 끼어들어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길을 펼쳐 보여주고 혹은 길을 물었을 때 옳은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하는 몫이다. 길을 떠나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주저 앉혀서는 안된다. 떠나는 걸 원한다면 가도록 해야한다. 여정을 떠난 여자아이들이 밑바닥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자아이들의 여정은 힘차게 계속되어야 한다. 원하는 것을 비로소 찾아낼 때까지.



여아자이들은 엉망진창이 된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혹은 그냥 뭔가 다른 것을 원해서 길을 떠난다. 여정중인 그들을 본 이들은 알다가도 모를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도시나 여자를 사고파는 일이 있을 만한 큰 동네에서는 랜드로버나 폭스바겐, 도요타의 차문이 열리며 아이들을 태운다. 

콘스 씨 집에 그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들은 상점 입구에 머물러보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며 노상의 잠자리에 자리잡는다. 한동안은 실종으로 처리되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밑바닥 인생, 이제 그들은 그렇게 불린다. -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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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7-25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트레버 단편집을 끝까지 못 읽었지만 트레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알라딘 이웃님들이 극찬하시는 이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만난다는 건 정말 좋은 거 같아요. 그 시대에 새롭게 쓰여진 것도 소중하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을 새롭게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횡재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문학이야!의 다락방님의 외침이 귀에 울리는 듯 합니다^^

다락방 2021-07-26 09:47   좋아요 1 | URL
이래서 소설을 읽는거지, 오랜만에 소설 읽는 기쁨에 젖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되는지 궁금해서 책장을 빨리 넘기게 되기도 했고요. 저는 윌리엄 트레버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데 근데 이 책 참 좋았어요. 책장을 덮고나서도 자꾸 생각하게 돼요. 힐디치 씨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 여자에게는 여정을 떠나는 것 뿐만 아니라 떠나지 않을 때조차도 위험한 삶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좋은 독서의 시간이었습니다.

독서괭 2021-07-26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트 100개요❤️❤️❤️❤️❤️

다락방 2021-07-26 09:47   좋아요 0 | URL
하트 백개 접수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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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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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는 자신을 사랑해줬던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존재들이 다 자기 곁을 떠나고 우울해하면서 죽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서있는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에 자기 혼자 서서 도대체 이게 뭔가 하고 있는데, 어릴적 학교의 사서였던 '엘름 부인'이 나와 '후회의 책'을 보여주며, 너는 네 인생을 다시 살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노라의 후회의 책을 펼쳐보니 두껍고 빽빽하게 후회로 가득차 있었다. 아마도 그 후회가 그토록 가득 차 있기에 노라의 인생은 그토록이나 우울했던 것일테다. 자, 너는 어떤 후회를 지우기 위해 어느 때로 돌아가 이 도서관에 오기 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어, 어디로 갈래?


노라는 되고 싶은게 많았고 하고 싶은게 많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오롯이 자신이 생각한,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수영을 했고 오빠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밴드를 했었다. 후회의 책에 쓰여진 그 많은 자신의 후회들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이 살 수 있었던 다른 삶속으로 들어가는데, 그러나 그 삶속으로 들어간다고 노라의 행복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노라의 작은 선택 하나는 아주 많이 다른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당연하다. 세상은 나 하나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내 작은 선택하나는 내 가족에게, 내 애인에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또 다른 결과들을 불러온다. 남자친구랑 결혼해서 남자친구의 소망대로 펍을 이루고 살았다면 우리는 결혼전에 꿈꾸었던 그 행복한 삶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그 삶속으로 들어가보면 어떨까. 그러나 기대와 혹은 상상과는 다른 삶이 다른 선택들로 인하여 펼쳐졌고 그 과정에서 노라는 지금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의 삶을 살아보며, 하나씩 삶이란 것을 배워간다. 후회를 하나씩 지우면서 교훈을 하나씩 얻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교훈은 사실 뻔하다. 처음 노라가 도서관에 도착해서 다른 삶을 선택하는 과정이 주어지는 순간, 바로 그 때부터 우리는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 수있다. 우리는 가보지 못한 다른 삶에 대해 후회를하기 마련이지만, 어떤 선택을 했어도 거기에 후회는 남는다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대신 지금 주어진 삶에서 최대한의 의미를 찾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아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아는 것을 읽어가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되새기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 알려줌으로써 새롭게 각오를 다지게 할 수도 있다.



'올랜도 블룸'과 '커스틴 던스트' 주연의 영화 《엘리자베스 타운》을 보면 초반에 남자가 죽고자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 때 누나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죽기를 계속할까 전화를 받을까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을 때, 수화기 너머 누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것 때문에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뒤로 미루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들동안 그는 가족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과 알고 지내게 되면서 다시 사는 결심을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뻔한 사실은 뻔한만큼 또 너무 당연하기도 하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아주 많은 부분에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내 예상과는 다른일들이 벌어지지만, 그러나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가깝게 혹은 멀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제에 이어 오늘을, 오늘에 이어 내일을 살 수 있다. 먹고 사는 일에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고 내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일에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내 지식을 늘리는 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엘리자베스 타운에서 남자가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해'하는 간절한 바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그의 연결됨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동생에게 전화하자는 너무나 당연한 이 누나와의 연결고리는 그의 죽음을 최소한 그 순간에 찾아오지 않을 수 있게 했다. 만약 그에게 그를 생각할만한 사람이 누구하나 없었다면 그의 자살의 뒤로 미뤄질 확률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어떤 의도가 됐든 생각하고 찾는다는 것은 나를 오늘 하루 더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 이것은 그러나 타인이 내게 해주기만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연결된다는 것 그리고 이어진다는 것은, 누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 것으로만 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그 연결됨에 가담을 해야 한다. 너가 나한테 전화를 하고 너가 나의 집 벨을 누르기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나 역시 너의 집의 벨을 눌러야만 비로소 우리가 서로에게 걸친 끈이 계속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이어져 있는 이상 내가 혼자라는 외로움, 내가 혼자라는 절망 때문에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생을 놓으려는 생각들은 늦춰지거나 약해지는 거다.



처음 노라가 자살을 결심하면서 자신을 자책할 때, 그 때의 노라가 너무 싫었다. 온통 비극과 우울을 끌어안고, 역시 나는 뭘 해도 안되고 누구도 내게 없어, 라고 할 때, 그 우울함이 너무 싫었다. 도서관에 도착해 다른 삶을 선택하면서도 노라는 내내 그런 태도였다. 그러나 삶 하나하나를 거치면서 그녀는 조금씩 달라지고, 그러다 자신이 비로소 원한 행복한 삶을 찾았을 때, 그 때의 노라는 이제 성장했구나 싶어졌다. 그 삶은 그동안 평행우주에서 겪어본 그 어떤 삶보다 만족스럽고 행복했으며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매우 욕심이 났지만, 그러나 노라에게 그것은 '그렇지만 이것은 진정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끼어들어 가져온 것이다'라는 감각이 있다. 나는 이게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삶 역시 다른 우주 속의,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의 노라가 살게될 삶이지만, 그러나 지금 여기에 갑자기 나타나 이 삶을 사는 노라는, 이 삶을 여기까지 끌어온 노라와는 다른 노라이다. 박사 학위를 받은 것, 좋은 남편을 가지고 사랑스런 딸을 가진 것. 이 모든것을 선택하고 이 삶을 끌어온 것은 여기 있는 노라인거지, 이렇게 중간에 푱 하고 나타난 노라가 아닌 것. 욕심나서 이걸 잃고 싶지 않지만 '그렇지만 이건 온전히 내것은 아니야' 라는 바로 그 감각. 한줄기나마 '이것은 옳지 못하다'는 감각을, 나는 사람들이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로 말하자면 내가 죽어야겠다 생각을 안할사람이니 처음부터 아예 노라랑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내가 만약 노라처럼 인생을 다시 선택할 수있는 도서관에 들어가고 후회의 책을 펼쳐본다면, 장담하건데 내 후회의 책은 노라의 책보다 훨씬 얇을 것이며, 어느 순간부터-아마도 삼십대 중반부터가 아닐까 싶은데- 쓰여진 후회는 극히 적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나도 후회를 한다. 아 그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가 그런데 대부분 어린 시절의 것이다. 성인이 되어 어느 순간이 되면서부터는 나는 선택에 앞서 항상 나에게 묻는다. 이걸 선택하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래서 지금은 딱히 후회되는 어른의 일이 별로 없다. 가장 후회되는 게 학창 시절 공부 안한 것이고, 가끔 떠올리는 못된 짓들도 역시 어린 시절의 것이고, 그런것들로도 나는 충분히 괴롭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는 정말이지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물론 그러다가도 '그때 다른 선택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종종 들지만 곱씹어보고 또 곱씹어봐도 아니, 그 때 내가 한 선택이 옳았다. 그것이 나에게 더 나았다. 만약 이십년 후에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간혹 내가 공부를 좀 더 잘했다면 조금 더 좋은 직업을 가지고 더 돈을 잘벌지 않았을까 등등 더 잘나고 싶은 욕망에 대해 얘기하노라면 남동생은 '누나에겐 열 개의 자아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최선의 자아가 지금 발현되고 있는거야' 라는 말로 대꾸해준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평행우주속의 내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삶을 살 가능성이 없지않지만, 그러나 나는 대체적으로 내 삶에 만족한다. '에이모 토울스'는 자신의 책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까만 사과를 먹으면 시간을 돌릴 수 있다' 라고 했을 때, 주인공의 입을 빌어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동안의 내 선택들이 내 눈 앞에 있는 당신과 함께 있도록 했으니까, 라고 말한다. 나 역시 똑같이 생각한다. 나는 내 가족과 내 친구들, 그리고 내 과거의 어떤 연인에 대해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다른 평행우주 속에서 이보다 나은 사람들을 혹은 이만큼의 사람들을 만날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의 내가 좋고 지금 내가 꾸려온 여기까지의 삶에 만족하며 내가 만났던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만족한다. 나는 죽기로 결심하지 않을 것이고 도서관에 갈 일도 없을 것이며, 굳이 후회희 책 들춰보고 다른 인생을 선택할 생각도 없다.



노라에게 필요한 건, 연결됨이었다.

내게 아무도 없고 나는 누군가 원하는 삶만을 살아왔다는 우울함 앞에, 그래서 노라는 누군가 손내밀어주는 이가 없는 외로움 때문에 죽기로 결심했지만, 그렇게 누군가를 바라기만 하는 마음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액션을 취해야 한다. 누군가와 연결되어야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한 나의 몸짓도 반드시 필요하고, 이 책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지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노라는, 일어나서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가 문을 두드린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깨달은 게 있다면 강한 사람은 혼자 모든걸 다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누군가 다가와주길 바란다면 다가와달라고 말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연결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뒤로 늦출 수 있고, 죽음을 뒤로 늦춰야 좀 더 괜찮은 삶을 만날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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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19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리뷰 쓰심!? ㅋㅋㅋ 저도 곧 읽어보겠습니다. 리뷰는 그 다음에 정독!

2021-07-19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9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9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9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9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1-07-19 14: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집에 이 책이 있더라구요. 딸아이가 읽고 싶다 해서 사줬는데 저도 락방님 따라서 읽어봐야겠어요. 저기 위에 남동생님이 말씀하신 거 최선의 자아 발현_ 그 말 넘 좋네요. 그래도 평행 우주 어딘가 락방님 나머지 아홉 자아도 궁금하긴 하다 ^^ 오늘의 리뷰가 이달의 리뷰가 될 거 같습니다. 마지막 문단도 좋고.

다락방 2021-07-19 14:48   좋아요 2 | URL
저도 달러구트 좋아한 조카가 이것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읽고 조카 주려고 샀어요. 달러구트 보다는 훨씬 나은 책이었습니다만,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주인공 성격 너무 제 취향 아니어서 ㅋㅋㅋㅋㅋ 저랑 친구 못할 타입이며 저랑 친구하면 저한테 잔소리 폭탄 들을 타입입니다. 저는 잔소리 하는 거 진짜 싫어해서 가급적 잔소리 하게 만드는 사람은 안만나려는 편인데요, 그래서 아마도 노라랑 저는 친구가 될 순 없을 것 같아요. 으하하하. (뜬금 댓글이네요?)

공쟝쟝 2021-07-20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진짜 강한 사람! 😭😭😭😭 (운다)

다락방 2021-07-20 17:57   좋아요 2 | URL
아주아주 어른이 되어서야, 최근에야 알았어요. 정말 강한 사람은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울지말고 우리 더 단단해지도록 합시다. 플랭크를 뽝- 하면서!!

공쟝쟝 2021-07-20 18:24   좋아요 1 | URL
하지만 오늘의 내 플랭크에 타인의 도움은 해당되지 않는다… 오늘의 채찍질만이 ㅋㅋㅋㅋ

2021-07-22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2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2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2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8-06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관왕! 축하드려요~
 
제로 웨이스트 키친 - 식재료 낭비 없이 오래 먹는 친환경 식생활
류지현 지음 / 테이스트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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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 책의 실물이 궁금해 잠실교보에 갔다. 매대에 놓여진 이 책을 찾아 펼쳐보는데, 작가소개에 류지현 작가는 '냉장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식생활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써있는 게 아닌가. 제로 웨이스트 키친, 이라는 제목에서 그리고 '식재료 낭비 없이 오래 먹는 친환경 식생활' 이라는 부제에서 나는 이미 낭비 없는 식생활에 대해 얘기할거라 짐작은 했지만, 그것이 '냉장고 없이' 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좀 당황했다. 


저자는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 Save Food from the Fridge> 운동을 진행중이라 했는데, 당연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게 될까?'였다. 모든 음식과 재료를 구매하는 순간 냉장고에 넣어 쌓아두는 나로서는 그것이 될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거였다. 그것이 부정적으로 '안돼, 나는 냉장고 있어야 돼' 하고 책을 내려놓게 되는게 아니라, 그게 된다고? 하면서 펼쳐보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서부터 이 책을 읽는 독자와 그렇지 않은 독자는 갈리게 될 것 같다. 무슨말이야, 현대에는 냉장고가 필수지, 하고 그냥 내려놓는 사람들도 다수일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는데, 처음 부분은 저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만들고 브런치를 먹고 그리고 점심 때는 있는 재료가 무언지 보고 이 재료들로 무얼 만들어 먹을까를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료가 이게 있으니 이걸 만들자, 그런데 저게 없네 그러면 저걸 사오자, 하고 나가는 그저 식사를 챙기는 일상적인 모습.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인데, 나는 사람들이 자기 먹을 거 잘 챙기고 먹고 사는 게 너무 좋다. 혼자 먹더라도 예쁘게 먹고 또 잘 먹는 거, 끼니를 잘 챙기는 걸 너무 좋아하는 거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시작은 그 이야기 만으로도 내게 좋았다. 너무 좋았다. 아, 너무 좋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저기 멀리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그것만으로 나는 마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활자로 만나는 느낌이랄까. 나는 리틀 포레스트도 너무 좋아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읽고자 한 이유는 어떻게든 쓰레기를 줄이고자 하는데 있었다. 배달음식을 시켜먹어도, 밀키트를 이용한 요리를 해도 쓰레기가 엄청 나오는거다. 그렇지만 시장에 가서 재료를 사 직접 해먹는 걸 선택해도 쓰레기가 나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배달과 밀키트가 일회용 쓰레기를 만들었다면, 내가 사는 재료들로 만들 경우엔 재료 낭비가 되는 거였다. 밀키트로 밀푀유나베를 만들면 필요한 재료가 적당한 만큼만 들어있는데, 내가 시장에 가 직접 재료를 사온다면 고기도, 배추도, 깻잎도 모두 남을 터였다. 그걸 다시 어떻게 쓰나 고민하면서 냉장고에 넣어둘 것이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잊히기 일쑤였다. 지금은 밀키트가 그나마 가장 나은 대안이 아닌가, 그것말고도 대안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보고자 한거였는데, 아니 이 책은 세상에나,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닌가!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부지런해야 했다. 몸을 재게 놀리는 것도 그렇고 나에게 남은 재료가 무엇인지도 기억하고 들여다봐야 했다. 게다가 오래 두면 상하니 조금씩만 사둬야 했고, 그렇다면 시장에 더 자주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지금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이 책이 너무 좋지만, 독립한 후에야 내게 쓸모가 있을 것 같다, 매대에 책을 다시 내려두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도 이 책이 너무 생각나는 거다. 거기에 음식 저장방법에 대해 써져있었는데, 거기에 남은 음식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도 적혀 있었는데, 거기에 음식을 오래 두기 위해 어떻게 조리하는지도 나와 있었는데, 라고 자꾸만 자꾸만 생각이 나는거다. 몇년 내에 독립할 예정인 나는 나 혼자 살림을 살게 되면 늘 식탁 위에 이 책을 두어야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왜 꼭 그때여야 하는가 스스로 묻게 되었고, 지금 미리 준비해도 되지 않나 싶었던 거다. 그렇게 나는 하룻밤이 지나 오늘, 점심을 먹고 이 책을 사러 천호 교보에 갔다.



천호 교보에 도착해 이 책을 찾기 위해 검색창에 넣었더니 F6-4 에 있다고 했다. 천호점은 잠실점처럼 크지가 않아 매대가 거의 한 눈에 보이는 수준인데, F 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직원에게 어디냐고 물어보니 저기, 에스컬레이터 지나서 우측으로 가라고 했다. 오, 거기에도 책이 있었어? 그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쪽인데. 그렇게 나는 F 를 찾았는데, 거기에는 생뚱맞게 아이들 학습지와 참고서가 있는거다. 하는수없이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F6-4 가 여기뿐이냐 물었더니 내가 찾는 책이 무어냐 했다. 나는 제로 웨이스트 키친이다, F6-4 에 있다고 했는데 아닌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가보다 했더니 그럼 다시 검색해보자는 거다. 그렇게 직원은 직원용 컴퓨터로 가서 책을 다시 검색창에 넣었고 거기에는 F6-4 대신 E6-4 가 써있는 게 아닌가. 아아, 제가 잘못봤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직원과 나는 서로 웃었는데 그러면서 나는 물었다. 그런데 E는 어느 쪽이지요? 직원은 저 쪽이라고 방향을 알려주면서 책 검색용지의 출력을 누르는 게 아닌가. 아아, 그렇게 종이가 쑥- 뽑혀버렸어... 이 내가, 그 종이 안쓸라고, 본 뒤에 쓰레기 되니까 굳이 안뽑고 외운건데, 아아, 이렇게 기어코 뽑혀버리는구나. 나는 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어 말했다.


"아아, 종이 안 뽑으려고 외운건데요.."


그러자 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맞네요. 웨이스트....."


그렇게 함께 웃었다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 책에 담긴 나의 사연이다.



나는 보통 도서관에 가도 그리고 서점에 가도 책 검색을 한 뒤에 종이를 뽑지 않는다. 여러권이거나 외울 힘이 없으면 핸드폰으로 화면을 사진 찍는다. 그것이 출력되고 이내 버려지는 게 영 신경쓰이기 때문이다. 그냥 외우면 되는데, 사진 찍으면 되는데 뭐하러 출력하나, 나는 이 종이 낭비에 보태지 말자, 싶어 늘 그러했는데, 아아, 외우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내가 이렇게 잘못 외우게 되고 ... 그러면 기어코 시간과 노력을 들인 뒤에 낭비에도 보태버리게 되는 거다. 이 일은 내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걸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낭비 없이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몸을 재게 놀리고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당연히 불편할 터였다. 냉장고가 없는 삶은 냉장고 있는 삶을 살았던 나로써, 당연히 더 불편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와 이 책의 책장을 한장씩 다시 넘기면서, 그래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면, 내가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살지 못할 게 무어람. 내가 다른 식구들과 함께 하는 게 아니라 나 혼자라면, 그리고 혹여라도 내 앞으로의 삶에 나와 뜻이 맞는 사람이 나와 함께하게 된다면 나는 혼자 그리고 또 누군가와 함께, 냉장고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이 필요하다. 아예 냉장고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냉장고가 부엌 한 켠에 있다 하더라도, 모든 재료를 처박아두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이 책이 필요하다. 냉장고 없이 보관하는 방법이 이 책에 있고, 오래 보관하는 방법 역시도 이 책에 있다. 맛있게 먹기 위해 최소한 며칠 내에 다 먹어야 하는지도 이 책에 있고, 심지어 채소들을 먹고난 껍질들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이 책에 있다. 


저자가 이렇게 살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들을 거쳐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음식과 재료에 대한 관심도 많고 또 요리도 잘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나 같은 경우 요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재료의 특징도 알지 못하니 처음부터 누가 알려주는대로 해보면서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이 필수일 터였다. 오래 보관하기 위해 그리고 맛있게 먹기 위해 잼을 만들고 또 기름에 저장하면서, 양념 및 조미료로 저장하면서 산다는 것이 내게는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만든 걸 내가 먹는 삶. 잼을 만들거나 기름에 저장한다면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선물할 수도 있겠지. 저자는 자신이 가진 재료들로 무엇을 만들어볼까, 잠깐 고민하면 요리가 뚝딱 나오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자연스레 오늘은 이런 것들이 있으니 이걸 해서 저 채소들을 다 먹을까, 할 수 있지 않을까. 


텃밭을 가꾸며 산다면 상추며 깻잎, 토마토와 피망을 길러 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이 책에 있는 것처럼 바질이나 부추도 가능할 것이다. 윽, 바질과 부추를 내가 먹을만큼 키우면서 사는 삶이라니. 너무 좋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부지런하고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은 이렇게 살고 싶다,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간 이런 거에 관심없이 살았던 내가 앞으로는 관심을 두면서 살 수 있을까? 나는 쓰레기를 줄이고 싶고 먹거리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 마음만으로 실천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나를 설레이게 한다. 나는 이 책에 실린 모든 사진들이 좋고 모든 이야기들이 좋다. 저자가 지나치게 소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그 점이 나랑 살짝 어긋나지만(왜 아침 그렇게 무시해요? 왜 그렇게 간단하게 먹어요?), 무엇보다 잘, 건강하게 먹고 사는 것 같아서, 그러면서 친환경적이라는 게 진짜 자지러지게 좋다. 


이 책에는 위에 언급한것처럼 재료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저장할 수 있는지 여러가지 방법이 실려있는데, 무엇보다 나는 생강술, 생강술에 아주 큰 관심이 있다. 생강술은 내가 꼭 한번 도전해서 맛보도록 하겠다. 생강술, 컴온!


아, 역시 이 책은 내 식탁위에 언제나, 언제나 있어야 된다. 나의 패이버릿이 될 것 같다.



생강술은 '시간이 만드는 저장 음식'(p.159) 이라는데, 여러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생강술을 가지고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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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7-04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 사는 사람으로서 여러 모로 반성하게 되는 글이네요ㅜㅜ 생강술 궁금합니다ㅇ_ㅇ!

다락방 2021-07-05 10:29   좋아요 1 | URL
근데 생강술을 조미료처럼(그러니까 미림처럼)쓰려고 만들자는 의도인것 같아서 제가 생각하는 의도와는 빗나가는듯합니다. 하여, 생강술 대신 페스토를 만들어볼까.. 해요. 흠흠.

붕붕툐툐 2021-07-04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저랑 공통점 발견~ 저도 종이 뽑는 거 싫어서 핸드폰으로 찍어요~ 냉장고 없는 삶을 지향하지만, 그러려면 진심 김치가 없어져야 할까요?ㅎㅎ 김치는 포기 못하겠다. 포기김치~

다락방 2021-07-05 10:32   좋아요 1 | URL
아, 툐툐님. 저는 이거 읽으면서 한 순간도 김치 생각을 안했거든요. 맙소사.. 김치 ㅠㅠ 저 김치 정말 너무나 사랑해요. 김치 만세입니다. 아파트에 살면 땅에 묻는 것도 불가하니, 흐음, 그렇다면 김치는 겉절이로만 먹어야 할까요.. 묵은지가 맛있는데.. 냉장고를 아주 없앨 순 없고 의존도를 줄이면서 살아가는 걸로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그 종이 한 번 보고 쓰레기 되는게 너무 싫어요 진짜 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21-07-04 2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학교 도서관 이용하고 집에 와서 가방 속을 보면 그 청구기호 종이들이 한 가득이였거든요..(언제 이렇게 뽑은거지?;;;)
뒤늦게 ‘한번 보고 나면 버려지는구나’ 라는 걸 깨닫고 요즘엔 검색대에서 청구기호 기억하고 책을 찾으러 가지요..
(까먹고 다시 돌아와 검색하는 건 가끔 있지많요..)
(이 글 보고 느낀것: 아! 검색 화면을 핸드폰으로 찍으면 되는구나!😅)

다락방 2021-07-05 10:32   좋아요 1 | URL
저도 한 권이니까 기억해야지 했다가 시간을 배로 들이는 바람에.. 아 정확히 기억하자, 그리고 가급적 내 머리 믿지말고 폰에 의존하자.. 하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핸드폰으로 찍으세요, 앞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1-07-05 02: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뭘 사도 깨알스토리를 덤으로 사오는 인생!! 🤓

다락방 2021-07-05 10:32   좋아요 2 | URL
나는 사람들이 참 좋아.. ♡

독서괭 2021-07-05 0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실천 어려울 것 같지만 참 좋은 생각이고 궁금한 책이다.. 이러며 읽다가 마지막 보고 왠지 빵 터졌네요 ㅎㅎ 생강술 ㅎㅎ

다락방 2021-07-05 10:34   좋아요 1 | URL
근데 생강술 대신 바질 페스토로 바꿔타야 겠어요. 생강술... 조미료로 쓰라는 말인 것 같아요. 먹으면 안되나? 소주 들어가는데... 흐음. 흐음...
중간에 아주 많이 재료 보관법이나 사용법 같은게 나와있긴 하지만 저는 처음 부분에 작가가 밥 해먹고 시장보러 나가고 하는 것도 너무 좋더라고요. 제 취향의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