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하우스 레이크
레이철 케인 지음, 유혜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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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월요일이니(아니 벌써 오늘이다) 일찍 자려고 했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지나'는 아이 둘을 낳고 함께 살아왔던 다정한 남편 '멜빈'이 젊은 여자 열두명 이상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끔찍한 살인은 그들의 집 차고에서 일어났는데, 그녀는 남편이 그곳에서 여자를 죽이고 있을 줄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며 그녀 역시 공범이라고 얘기한다. 그녀는 그렇게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난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남편으로부터 살해당한 여자를 목격하게 되고, 그리고 우연히 그가 그 한 사건의 범인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녀는 그 일 자체로도 이미 충격적이었지만 그녀의 무죄를 세상이 믿지 않기 때문에 삶이 지옥이 된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계속 거주지를 옮겨야 하고 신분을 바꿔야 했다. 그렇게 거주지와 신분을 바꿔도 감옥에 있는 남편은 계속해 편지를 보내온다. 우리가 얼마나 좋은 가족이었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그리운지, 그리고 아내를 얼마나 찾아가서 죽이고 싶은지.

지나와 아이들에 대한 협박은 비단 남편으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의 수많은 트롤들은 그녀의 행적을 쫓으며 그녀를 죽이자고, 그 아이들을 죽이자고 한다. 살인자의 아내, 살인자의 공범, 살인자의 자식들. 지나와 아이들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에서 뿌려지고 다른 잔인한 사진들과 합성되어 돌고 있다. 


그녀 자신과 그녀의 아이들을 지킬 사람은 그녀 혼자 뿐이다. 그녀가 재판을 받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맡아준 적이 있었고, 그때 아이들은 할머니와 다정하게 지내며 친해졌다. 할머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가끔 통화해서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해야 한다. 그들이 어디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 할머니에게 조차도 알려서는 안되니까. 어떤 식으로 그것이 그들을 향해 적의를 가진 이들에게 들어가게 될지 모르니까.



아이들이 자꾸 학교를 옮기는 것도 그리고 친구가 없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은 게 아니어서 지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갈등하는데, 마침 스틸하우스 레이크가 바로 앞에 호수가 보이고 한적하며 좋다. 어쩌면 이번에는, 이곳에는 정착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녀는 뛰면서 체력을 키우고 사격을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호숫가에서 여성의 시체가 떠오른다. 그 시체는, 전남편이 여성들을 살해했던 방식으로 살해되었고, 이에 지나는 용의자로 지목된다. 익명의 제보가 그녀가 호숫가 보트에 있는걸 봤다는 거짓을 말한탓이다. 이 살인으로부터 취조를 받고 집에 돌아왔는데 며칠뒤 또 호수에서 시체가 떠올랐고, 이제 그녀는 확실한 용의자가 되어 다시 경찰에게 잡힌다. 그녀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경찰서에 잡혀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의 집에는 빨간 페인트로 온갖 욕이 써있었다. 



지나는 이제야 비로소 남편과의 생활에서 잘못된 것들이 인식된다. 사실 그 때도 그게 좀 이상했더 거였는데, 그런데 내가 그냥 견디기만 했어, 하는 것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가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빠라고, 그리고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녀가 아내라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지 않았다는 것들을 그녀는 이제 안다. 남편의 거짓을 그녀는 그 당시에 볼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있지 않을 때, 이제 그녀는 남편이 자기에게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남편은 그녀에게 살인을 연습했고, 그녀를 길들였다. 남편은 그녀가 남편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그녀의 싫다는 말을 무시했다. 



얼마전에 읽었던 '게일 다인스'의 [포르노랜드]의 내용이 이 책에 겹쳐졌다. 남자친구 혹은 남편의 이상한 요구에 갈등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 포르노에서 본 장면을 그대로 따라하는 남자들이었는데, 왜 이런 이상한 요구를 하는지 몰라 어떤 여자들은 갈등했고, 어떤 여자들은 거부했고, 어떤 여자들은 견뎠다. '지나'는 견디는 여자였다.



멜은 자심이 숨결 놀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내 목에 끈을 감고 조르길 좋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국이 남지 않도록 부드럽고 푹신한 재질의 끈을 사용했고, 그걸 사용하는 데 전문가였다. 난 그게 너무 싫어서 그에게 자주 풀어 달라고 이야기했고, 노골적으로 거절 당했을 때는 눈앞에서 뭔가 번쩍 하다 .... 캄캄해졌다. 다시는 싫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절대 기절할 정도로 세게 조르는 법은 없었지만, 그런 상태에 매우 근접했다. 그리고 난 그걸 견디고 또 견뎠다. 섹스하는 내내 내가 산소를 갈망하는 동안 그에 의해 땅 위로 들렸다 내렸다 하면서 올가미와 사투하는 여자를 그가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학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잘못됐다고 느꼈던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아보면 그가 자신의 살인 놀이에 나를 반복해 이용했다는 생각에 .... 오싹 소름이 돋도 구역질이 난다. (p.118)



포르노를 연구한 책들을 읽으면서 항상 드는 의문이었다. 영상 속에서 여자가 남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장면, 그러니까 항문에 고추를 넣고 입안에 넣고 얼굴에 정액을 싸고 여자를 때리고 묶고 목을 조르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떻게 한쪽 성은 '저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이것을 활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그 영상들 속에서 그것을 '서로의 쾌락'으로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쾌락이 아니라는 건, 그냥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아는게 아닌가. 트윗에서 그 수많은 짧은 영상들을 신고하면서 내가 느낀건 괴로움이고 고통이었다. 여자들이 당하는 일들은 성적 학대였다. 그런데 그런 영상을 많은 남자들은 심지어 돈을 주고 본다고 하니 미쳐버리겠는거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학대하는 걸 보면서 쾌락을 느끼고, 그리고 그걸 직접 해보고 싶어한다니. 


지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는 거다. 남편은 섹스 도중 그녀의 목을 조른다. 그녀는 싫었다. 이게 좋을 리가 없잖아. 난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고 끔찍한데, 나랑 섹스하는 남자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걸 견뎌야 하는걸까? 지나는 무서워서 견뎠다. 거절했다가 눈앞이 번쩍 했기 때문에. 섹스할 때 자신의 쾌락을 위해 혹은 서로의 쾌락이라는 명목으로 한 쪽의 목을 조른다는 것의 그 폭력성, 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건가? 그 불안정을 그 불안함을 그 공포를? 어떻게 다른 쪽의 목을 조르면서 쾌락을 얻고자 하는걸까.  설마 부드럽게 졸랐다고 다정하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쾌락이 그렇게나 중요한건가. 한쪽을 고통에 빠지게 할만큼. 그리고 '나는 분명 상대의 허락을 받았고 상대도 좋아했다'고 하는 남자들은 천번 만번 스스로에게 솔직히 묻고 답하기를 바란다. 여자가 정말 자유의지로 그것을 원했을지. 예스라는 답을 받기 위해 자신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를 정말이지 진지하게 돌아보기를 바란다.



그녀는 죄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살인에 한 번도 공범인 적이 없었고 심지어 남편이 살인범인지도 몰랐다. 그건 상상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죄책감은 무섭게 따라붙는다. 왜? 그녀가 몰랐다는 것 때문에. 한 남자가 살인범이라는 걸 모르면서 그와 함께 살았고,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 때문에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다. 세상은 그녀에게 돌을 던진다. 여자들을 납치해 살인한 건 남편인데, 오히려 남편에게는 추종자가 생기고 팬레터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죽일년이 되어 있다. 세상은 여자의 말을 믿지 않고, 세상은 여자의 죄를 더 가혹하게 평가한다. 이 책의 작가 레이철 케인은, 이 모든 여성혐오를 누구보다 인지하고 있다. 그게 이 책을 이 밤에 끝까지 읽게 만들었고, 그게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남자 연쇄살인범에게 어떤 광적이고 불건전한 끌림을 느끼는 반면, 공범인 여성은 훨씬 더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성 혐오와 독선적인 분노, 다른 이들은 안 되지만 이 여자는 망가트려도 괜찮다는 단순하고 맛있는 사실이라는 독이 들어간 수프다. 

난 결코 무죄가 아닐 테니 무죄가 된 것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p.246)




레이철 케인은, 죄없는 여자가 죽일년이 되어 계속 도망쳐야 하는 이야기를 써냈다. 아니라고 수십번 외쳐봤자 아무도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경찰도 믿을 수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돈으로 보안장치를 설치해야 했고, 사격 훈련을 받아야 했다. 자신을 지키는 일은 오로지 자신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게다가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눈앞의 적들을 물리쳤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자의 삶에 안전을 위협하는 놈은 결국 한 명이 아니기 때문에. 여자가 스토커로 의심했던 건, 여지없이 스토커였다. 레이첼 케인이 쓴 건 지나라는 인물을 만들어내 진행한 소설이었지만, 현실과 아무것도 다른 게 없었다. 여자는 죄인이 되기는 쉽고 무죄가 되긴 어렵다. 여자는 누구를 믿기도 힘들고 자기 안전은 자기가 책임져야만 한다. 




결론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더 현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한 소설이었고, 그리고 주인공은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 스스로 강해지고 또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가 겪었던 일과 그 일로 인한 트라우마까지, 소설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레이철 케인은 이걸 알고 있고, 그래서 아주 좋은 소설을 써냈다. 

"인터넷에서 누구나 악플을 들어요, 엄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요. 그냥 무시해 버려. 그럼 가 버릴 거야."
이 말은 아주 많은 관점에서 날 미치게 한다. 마치 인터넷이 가공의 인물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라는 듯이. 마치 우리가 애초부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반사적으로 안전을 추정하는 말은 저렇게 어린 수컷이나 하는 말이다. 여자들은, 래니 나이 정도 되는 소녀조차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세상이 정말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맹목적이며 특권적인 무지를 드러냈다. - P53

코너가 30분 뒤 나를 이곳에서 찾는다. 난 호수의 이 조용한 침묵, 물에 비친 달빛, 머리 위에 뜬 청명한 별들을 사랑한다. 불어오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소나무에게 속삭인다. 위스키가 연기와 햇살의 기억이라는 근사한 대위법을 제공한다. 난 이런 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길 좋아한다. 내가 그럴 수 있을 때. - P84

"여러 가지로 감사해요."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것은 진심이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잘해 주었다. 그냥 나 자신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인생에서.... 그것은 중요하다. 난 아버지의 딸이다가 멜빈의 아내가 되었고, 그러고 나서 릴리와 브래디의 엄마가 되었고, 그런 다음에는 많은 이들에게 법망을 피해 간 괴물이 되었다. 내 고유의 권리를 지닌, 한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나 자신을 온전히 느끼고, 그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나는 그웬 프록터로 지내는 게 좋다. 그 신분이 진짜건 아니건 그녀는 충만하고 강한 사람이고, 난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 - P115

멜은 자심이 숨결 놀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내 목에 끈을 감고 조르길 좋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국이 남지 않도록 부드럽고 푹신한 재질의 끈을 사용했고, 그걸 사용하는 데 전문가였다. 난 그게 너무 싫어서 그에게 자주 풀어 달라고 이야기했고, 노골적으로 거절 당했을 때는 눈앞에서 뭔가 번쩍 하다 .... 캄캄해졌다. 다시는 싫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절대 기절할 정도로 세게 조르는 법은 없었지만, 그런 상태에 매우 근접했다. 그리고 난 그걸 견디고 또 견뎠다. 섹스하는 내내 내가 산소를 갈망하는 동안 그에 의해 땅 위로 들렸다 내렸다 하면서 올가미와 사투하는 여자를 그가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학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잘못됐다고 느꼈던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아보면 그가 자신의 살인 놀이에 나를 반복해 이용했다는 생각에 .... 오싹 소름이 돋도 구역질이 난다. - P118

손을 써서 일하고, 요리를 좋아하고, 준수한 외모.... 난 이 남자가 왜 이곳 호수에 혼자 와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두가 ‘사랑/결혼/아기‘라는 인생길에 순응하지는 않는다. 난 우리 아이들을 낳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그 아이들을 낳게끔 한 결혼을 후회할 뿐이다. 여전히 나는 대부분의 삶보다 나은, 외롭고 고독한 삶을 이해할 수 있다. - P148

사람들은 남자 연쇄살인범에게 어떤 광적이고 불건전한 끌림을 느끼는 반면, 공범인 여성은 훨씬 더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성 혐오와 독선적인 분노, 다른 이들은 안 되지만 이 여자는 망가트려도 괜찮다는 단순하고 맛있는 사실이라는 독이 들어간 수프다.
난 결코 무죄가 아닐 테니 무죄가 된 것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 P246

"왜 날 돕고 싶어하죠?"
"당신은 도움이 필요해요. 아버지 부탁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린다. "당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일로 평가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니까요."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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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랜드 열다 페미니즘 총서 5
게일 다인스 지음, 신혜빈 옮김 / 열다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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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코타 존슨' 주연의 영화 《하우 투 비 싱글》에 보면 여자1이 여자2와 싸우나에 가서 그녀의 음모를 제거하지 않음에 대해 언급한다. 니가 거기의 털을 제모하지 않았다는 것은 연애(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인즉슨, 섹스를 위해서라면 음모를 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성인여자가 연애를 위해서 좀 더 정확히는 섹스를 위해서 보지의 털을 밀어야 하는가.

'게일 다인스'는 그것이 세상에 만연한 포르노 때문이라고 몇 번이나 사례를 들어 언급한다.

한 대학에서 여자 대학생들이 '그건 내가 원한거야' 혹은 '나를 위해서야'라고들 말했지만, 얘기하다 보니 '보지 털을 밀지 않으면 남자친구가 섹스 하기 싫어해' 라는 대답이 나왔던 것. 그것을 마치 부수적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여자들이 자신의 신체를 변형하면서 포르노를 산다고 얘기하는 거다.


몸에 대해 변형을 가하는 것은 모든게 끔찍하지만, 특히나 보지털을 미는 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더 끔찍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성인 여성에게 온 몸의 털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보지라고 다를 것도 없다. '게일 다인스'는 이 책에서 여러가지 포르노를 다루면서 당연히 '아동 포르노'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자, 음모 제거에 대해 보자.



여자의 몸을 아동화하는 또다른 기법 하나는 음모를 전부 제거해 외음부가 사춘기 전 여자의 그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수년간 포르노에서 여자의 외음부 전체 제모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이 기법이 그 표지의 기능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한 한가지 결과는, 현재 사실상 모든 여자 포르노 배우가 아동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려스러운데, 이용자가 유사-아동 이미지를 검색할 마음이 없더라도 포르노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그런 이미지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p.291)



나는 많은 여자들이 자신이 원한다는 명목으로 음모를 제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걸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지도 얘기한다. 위생과 청결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음모 제거가 시작된 건, 포르노였다는 것을. '김이설'의 소설 [환영]을 봐도 남자가 여자에게 '거기 털을 밀어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남자와 섹스하지 않는 여자라면,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여자라면, 감히 '흐음, 보지털을 밀어볼까' 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누군가는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싸인을 보냈기 때문에, 그게 반드시 내 남자친구가 아니라도, 내 여성친구를 통해서 그리고 이렇게 영화나 책을 통해서 남자가 여자에게 더 즐거운 섹스를 위해 보지 털을 미는 것을 요구하는 걸 보기 때문에, '자, 왁싱샵에 가볼까' 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싸인들이 없었다면 내 성기의 털을 대체 왜 민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 '내가' 원한 것이 맞는가. 왜 여자들은 포르노를 본 적도 없으면서 포르노속의 여자들을 닮아가는가. 예쁘게 보이고 싶고 섹시하게 보이고 싶은 그 모든 기준이, '내가 꾸미는 걸 좋아해, 이러면 기분이 좋거든요' 하면서 가꾼 내 외양이, 어째서 포르노 속의 여자들을 닮아가는가. 아이처럼 입는 것도 마찬가지. <유사 아동 포르노>라는 포르노의 장르는 성인을 미성년자처럼 꾸며 만들어지는 포르노다. 그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은 거기에서 보여주는 내용(이랄 것도 없지만), 설정, 고통을 본다. 저 미성년자가 나이든 남자 어른의 꼬임에 넘어가서 처녀성을 빼앗겼어! 이 자극은 좀 더 큰 자극으로 더 큰 자극으로 옮겨간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 감상 후기 게시판도 수시로 찾아 들어가본다. 거기에 보면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더 큰 고통과 울부짖음을 표현할 때 쾌락을 느끼고 명장면이라 일컫는 감상이 수두룩하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진짜 고통스러워 보여 그것을 보는게 힘들었다고 말했던 남자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이제 그거야말로 명포르노다, 라고 감탄하는 것들이 바로 그 안에 있었다.


무엇보다 포르노 감상후기를 올린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건 본인이 포르노를 본다는 사실이 곧 숨겨져야 할 것이 아님을 의미했다. 포르노 감상후기 게시판에서 남자들은 서로 좋았던 포르노를 공유하고 추천한다. 그리고 '토론'한다. 한 여자에게 두세명의 남자가 들러붙어 얼굴에 정액을 뿌려대고 그걸 먹고, 목구멍에 고추가 들어가 여자가 오바이트를 하면서 울면, 그걸 보고 좋다고 환호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야 말할 것도 없고, '사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세게 박아주는 걸 좋아해' 라는 고정관념부터, 그렇게 박히고 우는 여자들이 '걸레이고 창녀' 라고 말하면서 이분법을 강화하고, 미성년자 역시 순진하지만 큰 자지를 좋아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루밍이 필요하다는 것도 포르노가 알려준다. 겁먹은 미성년자가 성인 남자의 어떤 그루밍에 쭈뼛쭈볏 옷을 벗는지. 인종 차별도 마찬가지.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도 포르노가 강화한다. 흑인들은 대물을 가졌고 아시아인들은 작은 고추를 가졌으며 백인은 그 중간 어디쯤. 포르노가 보여주는 여성에 대한 편견, 인종에 대한 편견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영상을 보는 이용자들에게 침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공유된다.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광고까지. 포르노가 깔리지 않은 곳이 없다. 영화속에서도 포르노를 이용하는 것은 공공연히 등장하고, 포르노에서 설정을 가져온 뮤직비디오들도 나온다. 포르노를 보지 않았던 여자들도 그런 영상들을 본다. 저렇게 허리를 비트는 게, 저런 옷을 입는게, 저런 표정을 짓는게 남자들한테 사랑받는 것이라는 걸 여자들도 습득한다. 아이들도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고 괴로워하고, 나를 위한 것이라며 털을 민다.


만약 여성이 아닌 다른 대상이, 그러니까 흑인이나 유대인이 맞고 입에 이물질이 들어가 토하는 영상이 반복적으로 보여진다면, 사람들은 집단으로 항의를 할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그 일을 당하는 영상에 대해서는 환호하며 이용된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아주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서양 남자와 교제하는 여자들을 보며 한국남자들이 욕했던 것, 유학이나 어학연수에 다녀온 여자들을 놀았던 여자로 표현했던것, 어린 여자들에게 다가가 그루밍했던 것. 모두 포르노의 영향이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던 내 많은 여자친구들은 한국에 와 교제한 남자들로부터 '너 거기 갔다 왔다며, 그럼 너도 서양놈 좀 알거아냐' 하면서 큰 좆을 맛본 여자로 후려치기 했다. 아, 이게 다 포르노 영향이구나.

섹스 도중 정액을 먹으라고 했던것도, 목구멍 깊숙이 고추를 넣는 것도, 항문에 넣고자 한것도, 얼굴에 싸면 안되느냐 묻는 것 모두, 포르노를 보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들이었다. 포르노를 전혀 접하지 않은 남자라면(현실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 정액을 뿌려댈 생각을 감히 어떻게 할까.



'조셉 고든 래빗' 주연의 영화 《돈 존》에서 남자는 포르노 중독에 걸려있다. 그는 당연히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는 것에만 능하고, 그래서 '젊고 예쁘고 쭉빵한 여자'를 사귀게 되었을 때 뿌듯해한다. 그 여자를 집에 데려갔더니 아버지는 '니 여친 귀엽다'며, 당연히 성적 대상으로만 평가한다. 그러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라도 돈 존을 만족시킬 수 없다. 돈 존은 여자친구와 섹스 후에 여자친구가 자는 틈을 타 포르노를 본다. 포르노를 찾아 봐야만 비로소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일은 비단 영화에서만 보여주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게일 다인스도 이런 남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좀 더 큰 자극, 좀 더 큰 자극을 찾는 남자들.



포르노는 강간문화를 형성한다. 여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여성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좋아한다고 보기 때문에 여성에게 그렇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해보고 싶어하게 만든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를 본다'는 것이 곧 '강간범이 된다'는건 당연히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포르노는 강간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유사 아동 포르노도 마찬가지. 유사 아동 포르노를 만드는 이들 조차도 '아동에 대해 이러면 안된다'고 동참하지만, 그러나 이게 얼마나 모순인가. 여자를 아동처럼 꾸며서 딸로, 순진한 옆집 소녀로 만들고 성적 폭력을 가하는 일을 보여주는게. 유사 아동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진짜 아동 포르노를 찾게 된다는 것도 역시 아니지만, 그러나 유사 아동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이 진짜 아동을 성학대 하는 영상으로 가게 될 확률은 매우 높다는 거다. 역시, 현실 폭력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 포르노를 보는놈이 강간범이다, 라고도 말할 수도 없고 유사아동 포르노를 보는 놈들이 아동 성학대범이 된다는 것도 아니지만, 게일 다인스는 실제 아동성학대범 재소자들과 만나면서, '원래는 성인과 정상적 연애를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남자들의 경험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포르노는, 성학대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일전에도 SNS 를 통해 아주 짧은 여성학대(포르노) 영상을 보고 신고하면서, 한 사람(여자)이 다른 사람(들, 남자)에게 고통을 당하는 장면을 도대체 왜 보고 싶어하는지, 이런걸 만들고 보는 사람들의 영혼이 괜찮은건지 오래 생각한 적이 있다. 그날 밤에는 엄마 옆에서 자면서, '엄마, 이나라 남자들... 정신이 찢어진 것 같애, 건강한 정신이면 그런 걸 보면서 어떻게 견뎌'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엄마, 남자들 다 영혼이 찢어졌어.



한 여성이 고통을 당하는 걸 '보면서' 자위를 한다는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거 아닌가. 이게 왜 '나의' 상식이기만 해야할까. 토하고 똥구멍에 찔리고 얼굴에 배설물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는게, 그게 어떻게 건강한 삶을 형성할 수 있을까. 지나가는 여자를 보는 시선을 대체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당신들의 영혼은 파괴되었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에 한 번이라도 노출된 남자는, 그 이전으로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당신들의 영혼은 찢어졌다. 그리고 보고, 보고, 또 볼때마다 영혼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거다.




나는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이, 포르노를 '소비하는' 남자들이 '누구 좋으라고' 그걸 보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걸 보는 그들 자신을 위한 걸까? 포르노를 제작하는 사람들, 그들이 아주 큰 돈을 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포르노 '제작자'들이다.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도 '저 영상속의 여자는 괜찮을까' 같은걸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걸 만드는 제작자들은 그걸 보는 남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 더 큰 쾌락을 너희에게 안겨줄게, 라고 광고하지만, 그것은 남자들의 정신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게일 다인스는 십대 포르노를 구글에 검색하면 몇백개가 뜬다고 했다. '십대 포르노'라는 게 말 자체가 형성되어서도 안되지만, 그런데 몇 백개나 된다고?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구글을 열어 똑같이 검색해보았다.




관련 글이 20억개가 뜬다. 이 책이 2010년에 쓰여진 책이니 그로부터 십년이 지났고, 십년동안 이렇게나 급속하게 확산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상속의 여자들 역시 더 많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게일 다인스'의 멘탈은 괜찮을까, 를 걱정했다. 활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언급되는 포르노의 장면들은 내 멘탈을 찢어지게 만들었는데, 이걸 직접 연구한 게일 다인스는 괜찮을까. 남자들과 연애하면서 '이 남자가 내가 보기엔 황당한 요구를 하는데' 라며 걱정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괜찮았을까. 포르노는 그저 판타지일 뿐이에요, 우리는 조금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죠, 라고 말하는 남자들을 보는게 괜찮았을까. 무엇보다 그 영상들을 보았던 것들은 괜찮았을까.



이 책의 결론은 기운이 빠진다. 게일 다인스 역시 해결책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




우리 문화의 포르노화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내게 마법 같은 해결책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우리는 거대한 경제 구조와 맞닥뜨리고 있다. 포르노 산업과 싸우려면 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적 운동으로써 저항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저항은 개인적 층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희망적인 시작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는 포르노를 이용하는 남자와 데이트하지 않겠다는 여자 청년, 자녀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길러주는 모부, 체계적인 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교사, 섹슈얼리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포느로를 보이콧하는 남자도 있다. 더 넓은 층위의 사회적 움직임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러한 개인적 형태의 저항이 현재로서는 가장 의미 있다. (P.320)



하아- 한숨부터 난다. 할 수 있는게 고작 이것뿐이란 말인가.


다시, 영화 《돈 존》에서 남자도 나이든 여자를 만나 '눈을 보고 대화하는'것의 기쁨을 아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서서히 포르노 중독을 치료해가는 것. 섹스를 위해 섹스를 했던 사람이 진정한 교제를 시작하는 거다. 그건 그 남자에게 그전까지 몰랐던 일이었다. 사실 이거야말로 판타지 아닌가 싶지만, 그러나 대화의 기쁨을 알아가는 것, 눈을 마주치고 애정을 담는 것이야말로 포르노에 저항하는 방법일 것이다.

몇년전까지 나 역시 포르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건 내가 생각하는 포르노가 그저 섹스를 위한 섹스 정도였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섹스하고 싶어서 섹스하는 걸 보는게 뭐가 잘못이야, 라고 생각한건데, 그건 내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영상을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와 또 많은 여성들이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칠게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편에 서게 되는 거다. 현실을 몰랐다. 아주 몰랐다.



나의 개인적 저항, 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그런 포르노를 보았던 남자이면서, 그러나 포르노를 옹호하는 새끼들에 대해 경멸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일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봤자, 학대당하는 여자를 보는 걸 즐기는 놈들임에 틀림 없으니까. 나는 그런 놈들의 영혼이 말짱할 리 없다는 타당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게일 다인스는 자신과 같이 포르노를 연구했던 '로버트 젠슨'에 대해 언급하는데, '로버트 젠슨'을 검색해보니 국내에는 그의 저서가 번역된 게 없는 것 같다. 《절정의 순간:포르노그래피와 남성성의 종말》의 저자라는데, 이 책도 꼭 읽어보고 싶으니 누군가가 어서 빨리 번역해서 내주었으면 좋겠다.



포르노는 혐오 표현이다. 여성과, 인종과, 아이에 대한 혐오 표현이다. 표현의 자유로 허락할 수 없는, 혐오 그 자체이다. 여성차별을 견고히하며 아동학대를 인정하고 인종차별을 강요하는 혐오 표현이다. 포르노를 보고 또 보는 당신들은, 강간으로 가는, 아동성학대로 가는 바로 그 중간을 살고 있다. '나는 그런 놈이 아니야'라고 확신하는가? 지금 감옥에 가있던 아동성학대범들도 그랬다. 당신들은 강간범이 되기 직전에 놓여있다. 아동성학대범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2008년 3월 나는 코네티컷주 교도소에서 아동 포르노 소지죄로 수감 중인 남자 일곱 명(이 중 셋은 아동 성폭력 가해자였다)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들 중 누구도 소아성도착자의 정의에 들어맞지 않았다. 일곱 명 전부 자신은 성인 여자와의 섹스를 선호하지만, 일반적인 포르노에 질렸다고 말했다. 이 중 다섯 명이 처음에는 PCP(pseudo-child pornography) 사이트에 접속했고, 그러다가 실제 아동 포르노로 넘어갔다. 이는 소아성도착자와 비소아성도착자 모두에게 PCP 사이트가 "성인 포르노와 아동 포르노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는 러셀과 퍼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현재 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실증적 연구가 없으므로 특정 연구 결과를 지목해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러셀과 퍼셀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리고 일화적 증거가 그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면, PCP의 인기가 계속되고 또 더 많아지는 현상이 아동 성폭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실제 아동 포르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제작 과정에서 학대당하는 아동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둘째, 아동 포르노를 실제 아동과의 섹스를 시도하는 데 디딤돌로 삼는 남자들에게 성폭력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는 아동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P.314)



대규모 연구가 그 뒤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일 다인스의 이 주장은 현실이 됐다. 위에 내가 검색해본 것처럼, 십대 포르노의 영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우리는 어제, 오늘의 뉴스에서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자들에 대해 지겹게 듣고 있지 않은가.


퀘일과 테일러는 아동 성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부 응답자에게 포르노는 실제 가해를 대체하는 대응물이었지만, 다른 일부에게 그것은 실제 가해를 위한 청사진이자 자극제로 작용했다." 아동 포르노 이용자 중 실제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비율은 연구마다 다르며 낮게는 40%, 높게는 85%까지 나타났지만, 이러한 증거가 중요하게 시사하는 바는 아동을 성애화한 이미지를 보고 자위하는 행위는, 상당 비율의 남자에게 있어 실제 아동 성범죄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P.315)





 

남자들은 자신의 의지로 포르노를 살고 있고, 여자들은 의지는 아니었으되 끌려가서 포르노를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두 혐오를 살고 있다.


나는 포르노에 반대한다.

그리고 포르노의 편을 드는 사람들에 반대한다.

나는 반포르노주의자다.

나는 포르노를 살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들 역시 포르노에 살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포르노에 반대한다.



이 실험의 설계자는 포르노 제작자로, (대부분)남성이며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들은 시장을 형성하고, 팔릴 만한 상품을 찾아내고,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장기 사업 계획을 구상한다. 이 책에서도 곧 다루겠지만, 한 마디로 말해 포르노 제작자는 철두철미한 사업가지, 우리의 성적 자유를 위해 힘쓰는 혁신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 P18

컨벤션홀 내부를 돌아다니며 포르노 제작자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니, 이들이 섹스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다는 점이 매우 분명해진다. 이들을 흥분시키는 건 돈이다.
(…)
내가 인터뷰하는 포르노 제작자 중 많은 이들이 이 산업에 종사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지, 우리에게 성적인 힘을 부여하거나 창조성을 증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이 남자들 중 그 새로운 극단이 어떻게 실제 여자의 몸에 작동하는지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 P29

"고급화 상품이 밀려나고 더 수위가 센 아마추어 느낌의 영상물이 그 자리를 채우면서 우리가 형성한 이 시장은 내가 보기엔 ‘포르노 올림픽‘의 현장이다… 이제 중요해진 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다. 영화 한 편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와 동시에 섹스할 수 있는지, 구멍에 페니스를 얼마나 많이 집어 넣을 수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정액을 먹을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다. - P39

야동의 세계에 사는 여자는 자신에게 경멸과 혐오만을 표출하는 남자와의 섹스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이며, 대개는 그 모욕이 심하면 심할수록 당사자 모두가 더욱더 황홀한 오르가슴을 느끼는 듯하다. 이곳은 여성에게 동일 임금, 의료 및 보육 서비스, 은퇴 후 계획, 자녀를 위한 양질의 교육, 안전한 주거 환경 같은 건 필요치 않은 단순한 세계다. 이 세계는 일차원적 여성, 구멍의 집한에 지나지 않는 여자들로 가득하다.
포르노가 전달하는 남자에 관한 메시지는 사실 훨씬 단순하다. 포르노 속 남자는 영혼도, 감정도, 도덕 관념도 없이 발기한 음경만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 유지 체계로,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여자를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 - P42

"나는 남자들이 진짜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 여자에 대한 폭력이 바로 그거다. 그걸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센 수위가 얼굴 사정이다." - P46

포르노 문화에 의해 변화화는 집단은 남자뿐만이 아니다. 여아와 성인 여자는 모두 포르노의 주 소비자층은 아니지만, 10년 전만 해도 소프트코어 포르노로 분류되었을 이미지가 대중문화에 범람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6장에서는 여아와 성인 여자에게 던져지는 여성성의 이미지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가는지 진단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따르면 매우 엄격한 문화적 기준을 충족하는 대상은 ‘섹시한‘ 몸뿐이다. 일부 집단은 이 과잉성애화가 여성에게 힘을 부여한다고 찬양해 마지않지만, 이 유사-힘키우기는 진정한 권력의 모습과 동떨어진 빈약한 대체재일 뿐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적 평등으로, 여성에게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제도를 통제할 힘을 주는 것이다. - P51

내가 「걸스 곤 와일드」에 출연한 여자들(대부분 십대 후반)과 얘기를 나눈 후 분명히 알게 된 점은 프랜시스와 촬영팀이 이들을 교묘히 조종하여 자기 상품을 위한 원재료로 이용하는 데 실로 전문가라는 사실이었다.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들이 자신을 성적 대상물로 보도록 하는 문화에 이미 길든 상태라는 점이다. 프랜시스와 촬영팀은 이를 발판으로 삼아 그들이 얼마나 예쁘고 섹시한지, 몸매가 얼마나 끝내주는지 등의 찬사를 퍼부으며 그들을 압도한다. - P102

나와 대화를 나눈 여자 청년 중 많은 이들의 삶이「걸스 곤 와일드」출연 이후로 180도 바뀌었으며, 일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가까운 증상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중 어떤 사람은 친구와 ‘여-여 섹스‘장면을 촬영하고 나서 "멍청한 걸레"가 된 기분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자꾸만 쳐다봤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학교에선 지나가는 남자들이 전부 나를 쳐다봤고 그건 정말 끔찍했다." 무모했던 한순간이 영상에 담겼고, 그들은 그것이 남은 평생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요소보다 우선해 자기를 규정할 거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 중 일부는 다른 학교든 새로운 직장이든 어디를 가도 「걸스 곤 와일드」이미지를 털어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학교를 자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며, 실로 많은 이들이 깊은 수치심을 느낀다. 이들은 학업이나 커리어 계획이 좌절되면서 삶이 틀어지기도 했다. - P107

미디어가 내보내는 제임슨(포르노 업계의 간판 배우)의 인생 이야기에서 그의 실제 삶이 어떠했는지는 대부분 빠져 있다. 그의 실제 삶은 대외 이미지보다 훨씬 덜 화려하다. 『포르노 스타처럼 사랑하기』에서 그는 방임과 학대로 얼룩진 유년기와 초기 성년기를 상세히 기술한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의 유년기는 혼란으로 가득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방임 탓이 컸다. 십대 때 집단강간과 폭행을 당한 후 그 자리에서 죽도록 방치되었으며, 후에는 학대를 일삼던 남자친구의 삼촌에게 강간당했다. 열여섯 살 때는 아버지에게서 쫓겨나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그에게 스트리퍼로 일하라고 부추긴 사람이 그 남자였다.
- P110

기사에서도 가끔 그가 받은 학대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였는지, 그러한 경험이 이후 그의 삶의 선택과 결정을 어떻게 형성했는지는 대충 얼버무린다. 가정에서 방치된 십대가 집에서 아버지에게 쫓겨나 남자친구의 강권으로 스트립쇼에 서게 되었다는 인생사는 포르노 산업을 긍정적으로 그려내기에는 너무 추한 이야기다. 그 대신 기사는 대부분 그의 부유한 라이프스타일과 포르노 제국을 건설한 1인 여성으로서의 면모에 초점을 맞춘다. - P110

경험을 통해 남자에 대한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묻는 말에, 제임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남자를 조금은 증오하게 되는데, 왜냐면 남자를 정말 끔찍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죠. 다들 취했고, 무례하고, 완전히 통제 불능이에요. 거기서 술을 조금 더 먹이면 정말로 추해지죠." 그는 이어서 스트리퍼로 일했던 경험을 통해 "그들[남자들]이 뭘 잘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리건이 "뭔데요?"라고 묻자, 제임슨은 답한다. "철저한 폄하요." 그 후 제임슨의 갑작스러운 시인이 이어진다. 폄하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느냐는 리건의 질문에, 제임슨은 이렇게 답한다. "네, 아직 어리고 지금 뭐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면 그렇게 되죠.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몇 번 겪었고, 그러다가 금방 철이 들어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이해하게 됐어요." - P112

『맥심』같은 남성잡지-십대를 겨냥한 조악한 콘텐츠 때문에 영국에서는 ‘청년잡지lad mag‘라고 불린다-도 유사한 방식으로 젊은 남자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핀업 사진 같은 이미지와 섹스, 술, 스포츠에 관한 기사를 통해, 이들 잡지는 여자가 오로지 성적 대상물로만 존재하는 남성 판타지 세계를 구축한다. 이런 잡지의 기조는『맥심』의 창간 멤버인 숀 토머스Sean Thomas가 잘 설명했다. "『맥심』같은 잡지는 뉴스 보도를 위한 잡지가 아니다. 그런 건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사의 일이다. ‘청년잡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남자들에게 남자답게 굴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다. 맥주를 마시고, 다트 게임을 하고, 여자를 쳐다봐도 된다는 거다. 『맥심』을 창간할 당시 우리는 페미니즘의 과도한 조롱에 반격하는 흐름의 선봉에 있다는 의식을 갖고 시작했다. 나는 우리가 성공했다고 믿는다." - P123

포르노 산업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설립된 또 하나의 단체로는 아동보호를 위한 웹사이트 협회(ASACP)가 있다. 1996년 발족한 ASACP는 다음과 같이 홍보된다. "인터넷에서 아동 포르노를 근절하기 위해 힘쓰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ASACP는 아동 포르노 신고 핫라인을 구축함으로써, 그리고 극악무도한 아동 성폭력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온라인 성인 산업의 노력을 조직함으로써 아동 포르노와 싸우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들이 온라인으로 연령 등급에 맞지 않는 영상물을 시청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한편 표현의자유연합은 2002년 아동 포르노 관련 법 개정을 위한 로비에 성공했고, 포르노 업계에서 18세이기는 하나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를 배우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이 ‘아동보호를 위한 웹사이트 협회‘의 회원 중에는 「허슬러」도 있는데, 이보다 더한 위선이 또 있을까? - P143

「허슬러」는 『베일리 리걸』을 운영하며 "십대 미녀들의 최대 컬렉션을 보유한 세계 1위 틴 매거진"이라고 홍보하는 그 「허슬러」가 맞다. - P143

어떤 집단을 비인간화함으로써 그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 가하는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방식은 포르노 제작자들이 처음 생각해 낸 게 아니며, 이미 수많은 압제자가 그 유효성을 증명했다. 나치 선전기구는 유대인을 ‘카이크kike‘라고 부르며 폄하하는 데 성공했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아프리카게 미국인을 인간이 아닌 ‘깜둥이nigger‘로 규정했으며, 동성애 혐오자들은 레즈비언과 게이에게서 인간성을 벗겨내는 용어를 거의 무제한으로 가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폄하되는 집단에 속하는 개인의 인간성을 일괄적으로 비가시화하면 그들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가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 P158

남자들은 포르노 이미지가 뇌에서도 ‘판타지‘라고 표시된 구역에 갇혀 있으며 현실 세계로 새어 나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나, 나는 남자친구가 점점 더 포르노 섹스를 요구한다는 여자 학생들의 사연을 지겹도록 듣는다. 그것이 얼굴 사정이 되었든, 항문성교가 되었든, 이 남자들은 현실 세계에서 포르노를 해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남학생의 경우, 처음에는 그 두 세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산업이 생생한 포르노 이미지가 실제로 자신의 사적 관계에 스며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점점 더 많이 들린다. - P162

이들 중 많은 팬들이 느끼는 쾌락은 여자가 자기 입에 뭘 넣어야 하는지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얼굴에 잠깐 스치는 날것의 불신과 역겨움, 혐오감을 보는 행위에서 오는 듯하다. 이것은 누군가가 완전히 비인간화되고 굴욕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얻는 쾌락이다. - P165

아이러니하게도 "포르노는 판타지"라고 주장하는 측이 놓치고 있는 점은, 실은 포르노가 우리의 상상력과 성적인 창조성을 오히려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포르노가 전달하는 이미지가 사고를 마비시킬 정도로 내용이 반복적이고, 정신이 둔해질 만큼 단조롭기 때문이다. - P189

해방을 위해 싸워 온 집단이라면 누구나, 미디어 이론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깨달은 사실, 즉 미디어 이미지가 억압당하는 집단을 체계적으로 비인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안다. 이 이미지는 결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집단에 가해지는 지속적인 억압을 합리화하는 메시지의 더 광범위한 체계 안에 연루되어 있고, 그것이 가진 권력은 대개 태도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묵인하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정상화하는 데서 나온다. - P194

남자가 처음 포르노를 접할 때쯤이면 대부분은 우리 문화의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이미 내재화한 상태고, 포르노는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대신 그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각을 굳히고 공고히 한다. 게다가 이는 그들에게 강렬한 성적 쾌락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ㅇ차별적 이데올로기를 섹시하고 화끈한 것으로 프레이밍하는 행위는 포르노에, 다른 형식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여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자격을 부여한다. - P194

텔레비전에서 예컨대 흑인이나 유대인을 계속해서 인종차별적, 혹은 반유대주의적으로 그리는 드라마나 시트콤이 쏟아져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백인 남자가 이들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얼굴을 가격하고, 목을 조르며 그들의 입에 이물질을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추측건대 격한 항의에 부딪힐 것이고, 그러한 이미지는 단지 판타지라는 이유로 옹호받지 못할 것이며 보이는 그대로 간주될 것이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가하는 가혹행위다. 포르노는 폭력에 성적인 외피를 덧씌우며 그것을 비가시화하며, 결과적으로 그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은 반폭력주의자가 아니라 반섹스주의자로 규정된다. - P195

내가 남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자기가 성적으로 실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얘기다. 그들은 대학에 가면 섹스 기회를 쉽게 얻을 거라 기대했고, 당연히 다른 남자들은 "하고 다닐"거라 생각하며, 결국 자기한테 뭔가 문제가 있거나 혹은 자기가 한 번 해 보려고 시도하는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들은 자기가 충분히 잘 생기지 않아서, 말주변이 없어서, 혹은 남자답지 않아서 점수를 따지 못하는 걸까 봐 걱정하며, 포르노의 세계관이 여성을 언제나 접근 가능한 존재로 그리는 탓에 거절에도 몹시 당황한다. 그들은 대개 여자와 자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에 깊은 수치심을 표출하며, 이 수치심은 ‘야동녀‘와는 다르게 ‘싫어‘라는 어휘를 가진 여자 학우들을 향한 분노로 바뀐다. - P196

음모는 분위기를 깨는 요소가 되었고, 특히 오늘날에는 여자 청년이 많이들 음모를 제거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며, 그렇기에 음모를 ‘관리‘하지 않은 여자는 매력이 떨어진다. 조시는 지난 수년간 자신이 선호하는 여자 신체 유형이 점점 포르노 배우와 닮아가고 있다며, "제모하고 오일을 바른 탄탄한 몸"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여자친구의 몸이 그런 몸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으냐고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기 관리를 안 한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좀 더 자신을 가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현실 세계의 여자들이 포르노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도 불만의 원인 중의 하나다. 거친 섹스를 해달라며 애원하지도 않고, 만질 때마다 오르가슴을 느끼듯 반응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 P200

여태껏 강연하면서, 발표가 끝난 후 내게 찾아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기가 어린 시절 당했던 강간 장면이 찍힌 사진이 분명 화면에 뜰 거라 생각했다고 말한 여자가 최소 스무 명은 있었다. 이 불안감에서 이들이 겪은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가 드러난다. 나는 강연에서 아동 포르노 사진을 보여주지도 않을뿐더러,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수백만 장의 사진 중에서 특정 사진을 고를 확률은 극히 낮다. 하지만 확률의 법칙은 트라우마를 겪는 개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이들은 자기를 강간한 사람이 전능하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찍힌 사진이 의심의 여지없이 반드시 수면 위로 떠 오를 거라고 확신한다. - P207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는 포르노를 여성,아동, 일부 남성을 대상으로 나쁘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들었다. 나는 포르노를 본 남자에게 삶을 파괴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들 생존자에게 있어 포르노는 판타지가 아니라 악몽 같은 현실이다. - P208

포느로를 이용하는 남자들이 모두 이러한 강간 신화를 통째로 삼킨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식의 주장은 이용자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며, 포르노의 영향에 관한 논의를 단 하나의 영향-강간-으로 축소하게 될 것이다.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그러한 신화가 홍보하는 문화가 수많은 방식으로 남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일부는 강간을 저지르겠지만, 더 많은 이들이 파트너에게 섹스 혹은 특정 성행위를 해 달라고 애원하고, 조르고, 강요할 것이며,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다른 인간 존재와의 섹스 그 자체에 흥미를 잃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자를 이용하고 다 끝나면 그를 무시할 것이며, 또 어떤 이들은 파트너의 외모나 성 기능을 평가할 것이고, 많은 이들이 여자를 일차원적인 섹스 대상이자 남자만큼 존중할 필요도, 존엄하지도 않은 존재로 볼 것이며, 이는 침실 안이든 밖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 P210

그 영향이 무엇이든, 남자가 포르노 이미지를 접한 이상, 다시 멀어진다 한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 P210

남자(그리고 여자)대다수는 성 불평등이 자연스러우며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현실인 것처럼 느낄 정도로지배적인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매일 주입당하며 살아간다. 포르노는 이 이데올로기를 최대한으로 뽑아 먹을 뿐 아니라, 그것을 포장해서 고도로 성애화한 형태로 남자에게 돌려준다. 그것에 대항하는 반이데올로기가 부재한 상태에서, 이같이 달콤한 성차별 이데올로기는 지배적 사고방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포르노는 사회화의 유일한 행위자는 결코 아니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와 우리 신체에 미치는 영향 덕분에 강력한 설득의 도구가 되었으며, 남자가 여자를 동등한 존재로, 자기가 당연히 갖는 인권을 마찬가지로 당연히 가지는 존재로 보는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 - P211

현실에서 여자들은 포르노를 보지 않고도 그것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데, 오늘날 포르노의 이미지, 재현, 메시지가 대중문화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자들은 여전히 하드코어 포르노의 주요 소비자층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게 모르게 포르노의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하고 있으며, 대개 이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하면 섹시하고, 도발적이고, 쿨하게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지(또 가능하다면 붙잡아 둘 수 있는지)에 관한 충고의 모습으로 위장한다. 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음부 왁싱이다. 음부 왁싱은 포르노에서 처음 보급되어 『코스모폴리탄』같은 여성 매체로 흘러 들어갔는데, 이 잡지는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려면 해야 할 ‘자기 관리‘방법에 관한 기사와 팁을 정기적으로 싣는다. - P217

거의 추종자에 가까운 팬층을 형성하며 대성공을 거둔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도 왁싱을 소재로 삼았다. 예컨대 「섹스 앤 더 시티」영화에서, 미란다는 음부를 제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맨사에게 "막 나간다"는 꾸지람을 듣는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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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4-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내가 원하는 일이야˝의 범주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확장될 수 있을지 생각하면 할수록 더 절망하게 됩니다. 남자친구가 샵에 다녀오라고, 자꾸 다녀오라고, 그게 좋겠다고 할 때 좋아하는 사람의 그 ‘권유‘를 계속해서 거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구요.
이 모든 일이 가장 개인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많은 여성들이 ‘똑같은‘ 강요 속에서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정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뷰를 읽는 것 마저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힘드네요.
다락방님도 그러셨을 것 같아요. 쉽지 않은 독서였을텐데, 이렇게 기록으로도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읽는 것만으로도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희진쌤이 그러셨죠. 우리, 읽는 이 일을 통해 연대합시다, 다락방님!!!

포르노에 반대합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포르노에 반대합니다.
포르노 속 학대당하는 여성의 소비에 찬성하는 모든 의견에 반대합니다.

다락방 2020-04-10 12: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단발머리님.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아니‘라고 말하는 게 결코 쉽지 않죠. 결국 그렇게 서서히 어느 정도까지 원하는 바대로 해주게 되는것 같고, 결국 그래서 지금은 브라질리언 왁싱샵이 따로 생긴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식으로 대부분의 것들이 서서히 침투하게 된거겠죠.
최근에 반포르노 삼종셋트 읽으면서 앞으로도 계속 읽자 다짐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렇게 읽고 쓰는 일이 어떤 효용을 가져올까 좀 회의가 들기도 했거든요. 그렇지만 이렇게 읽고 글로 쓰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미칠거다, 라는 생각이 들면 또 게을리 할 수 없기도 해요. 아무튼 계속 하겠습니다.

단발머리님 이 책 사셨다니, 어휴... 힘든 길 가시겠습니다. 영상 묘사 하는 거 읽으면 너무 고통스러워요. 성인 여성들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미성년 그루밍 성폭력은 울것 같더라고요. 이런 것들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읽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 때문에 펑펑 울것 같았는데 말예요. ㅠㅠ

포르노에 반대합니다. 반대합시다.

잠자냥 2020-04-1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 개 드리고 싶은 리뷰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포르노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반포르노주의자들이 많아지는 방법밖에는 없군요. :(
야동이라고 부르면서 별것 아닌 것처럼 취급하던 문화도 정말 잘못 되었고, 여자들도 포르노 보는 남친(또는 자신)에 대해 관대한 자신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고‘를 갖고 있는 개방적인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포르노는 혐오표현이라는 말, 여성, 인종 아동에 대한 혐오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해요.

다락방 2020-04-10 12:52   좋아요 0 | URL
반포르노주의자들이 많아지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지만, 그 방법은 너무 느릴 것 같아요, 잠자냥 님. 그래서 답답합니다. 포르노를 전파하고자 하는, 돈욕심에 눈이 먼 제작자들이 활개를 치는데, 과연 개인이 반포르노주의자가 되는것이 어느 속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맞아요, 잠자냥 님. 야동이라고 부르면서 별 거 아닌 것처럼 취급하던 문화가 결국 이렇게 만든게 아닌가 싶어요. ‘주체적 섹시‘가 정말로 ‘주체적‘인것인지에 대해서, 여성들도 스스로 끊임없이 물어보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포르노문화가 없었다면, 사방천지에 포르노가 침투해있는 게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주체적으로 ‘섹시하고‘ 싶었을까요?

책 뒷표지에 영국 페미니스트 저술가 ‘줄리 빈델‘의 한 줄이 실려있거든요.

<단 한 번이라도 포르노가 혐오 표현이 아닌가 의심해 본 적이 있다면 『포르노랜드』를 반드시 읽어볼 것.>

이라고요. 저도 보면서 확 오더라고요. 포르노는 혐오 표현이라는 말, 깊이 공감했어요.

(그리고, 별 다섯개 접수합니다!)

건조기후 2020-04-1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본 트윗이 생각나서 보고 그대로 옮겨봐요. 물론 다락방님도 보셨을 거에요...

진짜 나라 꼬라지하고는. 미성년자 애들은 성착취물 만들고, 젊은 성인 남성들은 그거 사고, 그러다 걸리면 국가기관 전반에 걸쳐 온갖 결정권 다 쥐고 있는 늙은 남성들이 ‘남자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부둥부둥 무마하고 용서하고 기회주고...

진실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 줄을 전혀 모르는 거죠, 과거에도 지금도. 얼마나 뿌리가 깊고 튼튼한지... 종종 암담해요.
단발머리님 말씀처럼, 이렇게 리뷰만 보아도 힘든데 책을 끝까지 읽어내시고 기록으로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성주의 책읽기 꾸준히 해오시고 이렇게 훌륭한 리뷰를 쓰고 계시다니 너무나도 리스펙이에요, 다락방님.
함께 하기로 말만 얹어놓고 바로 하차해버렸던 저도 -_ㅜ 부지런히 곁눈질이라도 해가면서 열심히 공부할게요.

별 다섯 개 받으셨으니 이번엔 하트 백만 개 받으세요! :)

다락방 2020-04-12 11:28   좋아요 0 | URL
이 리뷰에 대해서는 다들 긴 댓글을 달아주시네요. 아마도 그간 포르노에 대해 나름 생각했던 것들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책도 그렇고 다른 책에서도 그렇지만 ‘외모 권력‘에 대해서도 언급하거든요. 그러니까, ‘여성의‘ 외모권력이요. 그런 포르노배우 같은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가 마치 여자들의 권력인듯 보이지만, 그것은 전혀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잠시 그 앞에서 숭배하는듯한 모양새를 보일 수는 있으나, 자기랑 자주지 않거나 사귀어주지 않으면 금세 강간해도 좋을 성적대상이 되어버리니까요. 애초에 네 미모가 너무 아름답다 하는 것은 성적대상으로서 최고의 가치다,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것이고요.

사람마다 끈기를 보이는 방면이 다르잖아요. 저의 경우만해도 모든걸 이렇게 계속하진 못하고요. 방통대는 반학기 다니다 말았고, 외국어 공부는 하겠다고 교재만 수두룩하게 사놓고 펼쳐 보지도 않았는걸요. 그런데 여성학에 대해서라면 제가 하면 할수록 갈증을 느껴요. 여성학에 대해서라면 흡수도 빨라지는 것 같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계속 해보고 싶어요. 포르노에 대한 책도 더 읽어보려고 장바구니에 더 담아뒀어요.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것이니만큼 모두가 저처럼 할 순 없겠죠. 그렇지만 단발머리님이 말씀하셨듯이, 이렇게 누군가가 읽었던 기록이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보다는 더 나으니까요.


건조기후님의 하트 백만개도 접수합니다. 후훗.
세상이 좀 나아지면 제육볶음 먹으러 가요!
 
증언혐오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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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눈, 두 종류의 전략이 있다. 하나는 권력자, 착취자, 가해자, 남성의 눈이다. 짧게 표현하면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자연 사건을 희화화하고 즐기면서 진실을 미궁 속으로 빠뜨리는 마약에 취한 눈, 초점 잃은 눈이다. 눈의 초점이 불분명할수록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그 성폭력 체제는 흐릿해진다. 그러면 이 체제의 수혜자들은 별장과 클럽에서의 성폭력을 지속하면서 축적과 치부 그리고 명령의 오르가슴을 반복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다중, 저항자, 피해자, 여성의 눈이다. 짧게 표현하면 생명의 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발 방지를 열망하는 눈이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실사구시적으로 응시하는 부릅뜬 눈, 두려움에 떨면서도 봐야 할 것을 놓치지 않는 다초점의 눈이다. 초점이 분명해져야만 어디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공격의 화살이 날아오고 어디에 자신을 빠뜨릴 함정이 있으며 어디로 생존의 출구가 열려있는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P.36)




최근에는 혐오란 단어를 어디서(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상대가 혐오자가 되는 경향이 있고, 그게 싫어서 혐오란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은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이 책의 소개를 읽다보니 윤지오의 증언에 관한 것이었다. 윤지오와 그녀의 증언에 관한 것이라면 지지하면서도 그 흐름과 자세한 사항을 깊이 있게 알지 못하던 터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으로 알고자 했던건 매우 좋은 선택이었는데, 장자연의 사망부터 지금 현재 인터폴로 윤지오가 수배 내려진 것까지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그 사이사이 일어났던 말과 사건들에 있어서도 그리고 본인의 생각까지 논리적으로 알기 쉽게 써있기 때문이었다. 


저자 '조정환'에 대해서는 이 책으로 처음 접하는데, 시종일관 정확하게 사건의 본질을 궤뚫고 있어서 놀랐다. 그러니까 윤지오의 증언과 그 안에 담겨져있는 뜻을 날카롭게 짚어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그에 따른 여성에 대한 폭력까지도 정확히 인지한 터라 아마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현재의 상황과 문제를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윤지오와 그 증언에 대해서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자라'를 보고 놀란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 것이다. 만약 자라로부터 놀란 경험이 없었다면, 솥뚜껑을 보고 놀랄 까닭이 없다. 경찰과 숱한 언론들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 윤지오를 향해, '놀란게 솥뚜껑 때문이었잖아, 자라가 아니었다고, 거짓말쟁이, 사기꾼!' 이라고 몰고 갔다. 그들은 아주 쉽게 윤지오가 놀란 게 솥뚜껑이었기 때문에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솥뚜껑 보고 놀랐던 까닭이 자라를 보았던 경험 때문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으려'하는 걸까.



저자 조정환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 이유는 그 전에 자라를 보았기 때문을 인지하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매우 상세히 기술해주고 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거나 혹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내가 아는 모든 남자사람들보다도, 더, 가부장제와 권력 그리고 성폭력에 대한 것을 가장 잘 인지하는 저자임에는 틀림없다.


지독하게 진부한 말이라 나는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박훈이 윤지오가 있지도 않은 신변위협을 과장한다면서 신변위협의 실재성을 부정할 때,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 뚜렷이 나타난다. 신변위협이란 긴장, 싫음, 떨림, 두려움, 공포 등으로 나타나는 고통의 감각이다. 이것은 결코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의를 기울임을 통해 실천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훈은 신변위협을 알고자 하는 방향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고자 하는 방향으로, 무시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신변위협을 모르고자 하는 마음이 표현되는 방식이 ‘신변위협은 없었다‘라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 P22

윤지오가 개인 방송(인스타라이브)에서 협찬 화장품 파는 것에 경악하신다면 JTBC 방송에서 자동차를 파는 것을 보실 때는 어떤 느낌이신지요? - P66

나는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이 어떤 실효적(즉 돈을 돌려받기 위한) 사법행위라기보다는 수개월간 지속한 윤지오 죽이기의 일환으로서 윤지오의 이미지를 회복 불가능할 만큼 훼손하기 위한 정치재판으로 준비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장자연에 대한 가해자들의 입장에서는 윤지오의 향우 있을 수 있는 증언 투쟁을 예방하기 위해 이런 위협적 소송이 필요할 것이며, 윤지오에 대한 가해자들에게는 윤지오에 의한 사법 투쟁을 미연에 저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런 소송일 것이다. 이 소송이 후원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 비후원자인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속해서 촉구되고 홍보된 인위적 소송이라는 점도 이런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 P76

이 소송 준비를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싶다.
증언자는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희생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걸면서 할 때만 그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가 개인으로건 단체로서건 후원을 받으면 그의 증언이 진실성을 잃는가?
증언자가 놀고자 하는 욕망, 성적 욕망, 사치와 쾌락에 대한 추구를 갖지 않을 때만, 즉 성자聖子이고 성녀聖女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는 증언 이외의 것에서도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일절 거짓을 말하지 않을 때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의 삶은 모든 부면에서 일관되고 통일되어 있어야 하며 어떤 부분에 카메라를 갖다 대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일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 P76

권력과 제도언론이 효과적인 무기로 훔쳐 사용한 것이 바로 윤지오의 저 "영리하게"라는 말의 왜곡이었다. 제도언론에 앞서 김수민이 그것을 계산적 "영악함"으로 굴절시켰고 윤지오의 증언 실천을 "가식"의 프레임 속에 집어넣었다. 그 프레임은 "네가 네 욕심 없이 오직 장자연만을 위해서 증언한다고 모든 걸 걸고 말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 나타났다. 순수주의, 순결주의를 척도로 내세우고 ‘당신은 순수하지 못하다, 순결하지 못하다‘고 선동하는 순수주의적 혐오 프레임이었다. ‘증언자는 순결해야 한다. 증언자의 실천은 희생과 헌신이어야 한다. 순수한 자만이 증언할 수 있다‘는 프레임.


- P109

이 순수주의=순결주의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 여성에게,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씌어온 굴레이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비판하고 그것에 대항해온 운동들이 스스로 내면화해 온 거울 이미지다. 국민이 영웅을 기대하고 민중이 지도자를 기대할 때 그 국민과 민중은 그 영웅과 지도자에게서 순수를 기대하는 만큼 오히려 자기 자신이 순수하고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백성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근대의 과정이다. 탈근대화의 과정에서 국민/민중과는 다른 다중이 출현하지만, 그것은 민중의 자기 전화이며 그 마음 깊은 곳에 근대적 백성의 습성은 유전자처럼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순수/순결주의의 정동은 영리함을 견디지 못한다 - P110

착취, 수탈, 국가권력 남용 등 우리 사회의 모순과 권력 집단의 주요 문제를 고발하는 이 증언 내용 중 아직 어느 것도 증거에 의해 반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법부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거나 여러 증언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새로운 증거에 의해 보강되어 왔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폭압이,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혼탁하게 하는 센세이셔널한 매스미디어의 선정적 보도들이 증언이 던지는 진실의 메시지를 시민사회 관심사의 후경後景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폭압자들의 목적이 윤지오의 진술을 무력화하고 그 증언으로 인해 위기에 처할 수 있는 권력 질서를 옹호하며 훼손된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 증언들은 어떻게 판명되었고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가? - P184

2019년 6월 검찰은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를 뇌물 혐의로 기소했다. 오랫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학의의 성범죄 혐의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었다. 어떤 마술로 검찰이 그 들끓던 여론을 잠재운 것일까? 김학의에 대한 특수강간 혐의를 "무죄"처분하기 위해 검찰이 사용한 핵심 기술이 바로 "성폭력"(성접대 강요, 성상납 강요)에서 강요를 제거하여 성접대, 성상납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그것을 "뇌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 P243

2019년 3월 4일 실명 공개와 그것에 대한 일차원적 대응에서 비롯된 이 지각적 착시로 인해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의 영상자료 등을 보면 윤지오 씨가 대외활동을 공개적으로 한 사례들이 많은데, 왜 숨어 살았다고 말했는지,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지?" 따져 묻거나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나며 숨어 살았던 것이 가명의 나 혹은 필명의 나가 아닌 ‘실명의 나‘였듯이, 윤지오에게도 숨어 살았던 것은 ‘증언자 윤지오‘이지 본명의 윤지오, 가명의 윤지오, 예명의 윤지오, 이름 없이 기호화된 윤지오가 아니었다. 본명, 가명, 예명, 기호의 윤지오는 ‘증언자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증언자가 된 이후 다양한 위험들과 위협들 때문에 숨직이며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 다양한 이름의 윤지오들의 존재야말로 윤지오가 "숨어 살았음"을 뚜렷이 증명하는 지표가 아닌가? - P274

지각적 착시로 인해 윤지오가 숨어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2019년 3월 4일에 있었던 이름 공개와 얼굴 공개의 사건을 보고도 마치 수십 년 전부터 자신이 윤 씨, 김지연 씨, 이순자 씨, A 씨, Y 씨가 윤지오 이고 윤지오가 윤애영이라는 것을, 또 그들이 모두 증언자 윤지오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착각한다. 착각은 착각을 부르고 기만은 기만 속에 녹아들며 환상은 환상을 연출한다.
바로 이 환상의 극장을 파고든 것이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가해자들이다. 이들은 ‘윤지오는 숨어 살지 않았다‘는 환상을 근거로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뒤튼다. 또 오래전부터 증언자 윤지오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느끼는 지각적 환상을 근거로 윤지오의 이름 공개와 얼굴 공개를 사기를 위한 포석으로 조작한다. - P277

자신의 검은 실체가 증언을 통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윤지오 2019년 3월 4일에 처음으로 그간 숨어 살았던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건너뛰면서 ‘윤지오가 과거에 숨어 살지 않았다‘를 부동의 사실처럼 만들어 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래야만 3월 4일의 이름 공개와 어굴 공개를 미래의 사기를 위한 공개-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주체적 결단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거짓말과 미래를 위한 사기를 영리하게 편집하는 범죄 행위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교활한 작태인가? 이 얼마나 간악한 집단범죄인가? 이 얼마나 끈질긴 n차 가해인가? 이 끈질김을 통해 우리는, 윤지오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바로 그 가부장제 권력 집단임을 유추할 수 있다. - P278

장자연은 누가 봐도 증언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도록 만드는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취재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동료 배우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오락거리로 가십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검증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이상異常 경향을 보인다. 기자들의 태도가 이런 관심사에 의해 지배되는 한에서 장자연의 동료 배우로서 윤지오가 기자들의 취재에 응했을 때, 그에게는 ‘가해권력에 대한 고발자=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피해자 장자연의 피해자다움 유무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윤지오는 이러한 역할을 떠맡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이 (기자를 피해)"숨어 살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가해자에 대한 ‘고발=증언‘이라는 공세적 태도가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자 장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 배우였던 자신에게 권력이 강요하는 피해자다움(숨어 살기)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 P282

시민 사회가 약할 때 가장 먼저 혐오 행동에 나선 것은 경찰과 군대였다. 국가기구가 혐오 행동의 선봉대였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두터워진 후 혐오 행동의 선봉대는 국가기구가 아니다. 시민사회 속에서 일상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성폭력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 대응에는 "아내들"이 앞장선다. 아내는 ‘안 것‘을 의미하는 ‘안 해‘에서 나온 말이다. 경상도 말 ‘니 해라‘가 ‘너의 것으로 하라‘를 의미하듯이, ‘해‘는 ‘물건‘, ‘소유물‘을 의미한다. 그것은 남성 가부장의 시선에서 파악된 여성,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이 이 ‘아내‘관념을 내면화할 때, 이 여성은 가부장주의의 파수꾼으로 기능하게 된다. 아내 의식이 페미니즘의 옷을 걸칠 때도 있다. 그러한 유사 페미니즘은 다른 모든 여성을 위험한 여자, 이상한 여자로 보는 보편적 의심증과 결합된다. - P308

아내-페미니즘은 여성의 권익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 노력은 꽃뱀으로 의심되는 모든 여자로부터 자신의 아내 지위를 지키고자 하는 방어적 투쟁으로 된다. 그 결과 남성 권력자들이 자행하는 성폭력은 위험한 여자들의 꼬임(사기)으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겪는 피해로 인식된다. 아내-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사회를 내전의 무대로 만들면서, 자신들이 이상한 여자들이라고 보는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시민사회 내 투쟁을 지켜보면서 성폭력 체제와 가부장주의는 아마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서술하고 실비아 페데리치가 『캘리번과 마녀』에서 서술한 마녀사냥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국가기구와 남성 권력자만이 아니라 아내주의-여성, 아내-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도 생생하게 되풀이되는 잔혹사이다. - P309

신변위협의 문제에서 현실성은 행사의 차원이며 잠재성은 존재의 차원이다. 혼자 밤길을 걷는 여성에게 남성으로부터의 신변위협이 행사되지 않을 때도 여성이 신변위협을 느끼는 것은 신변위협이 잠재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신변위협이 행사되고 있을 때 신변위협이 실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변위협이 행사되지 않고 있음이 현실일 때조차 신변위협은 잠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윤지오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이 경험한 현실적 신변위협과 잠재적 신변위협에 대해 여러 차례 진술해 왔다. - P322

경찰 응답은 언론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입증한다. 이것들은 현장조사와 탐문, 그리고 과학수사 후에 나온 것으로, 윤지오가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했고 윤지오가 제기한 문제점들이 그 상황에서 일상적 지각과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의심할 만한 것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하물며 윤지오가 "보복이 우려되는 중요범죄 신고자"였고 "국민적 공분이 큰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음을 고려하면 반드시 의심될 만한 것이 윤지오에 의해 의심된 것임을 보여준다. - P329

경찰의 실제 발표문이었던 "신변위협 시도로 볼 범죄혐의점은 파악되지 않았다"는 신변위협이 없었다"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신변위협의 행사를 부정하는 것이며 후자는 신변위협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북한이 남한을 위협하는 시도(침범 행동)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북한의 위협은 상존한다고 말한다. 칼을 든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 위협 시도(범죄 행동)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신변위협이 있다고 느낀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어두운 밤거리에서 지나가는 남성이 성폭행이나 성추행과 같은 신변위협 시도(범죄 행동)를 하지 않을 때도 여성은 신변위협을 느껴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조선일보』, 『뉴시스』, 『머니투데이』는, 변호사 박훈이 고발장에서 그랬던 것과 유사하게, "신변위협 시도로 볼 범죄혐의점은 파악되지 않았다"는 경찰청의 발표를 "신변위혐이 없었다"는 말로 왜곡한다. - P329

대한민국 경찰은, 증언자를 보호하려는 국민, 국민을 대의하는 대통령, 증언자를 변호하는 변호사, 그리고 증언자 자신등에 떠밀려 마지못해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에 나섰으나 증언자의 신변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타율적이고 무책임한 기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반만 옳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해권력자들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그들의 잘못을 은폐하고 먼저 나서서 보호하는 식으로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자발적이고 기민한 기관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국민의 생명보호 의무에 속하는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를, 시민사회에 "진실을 밝힐 힘"을 증여하는 증언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답례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은 윤지오의 신변보호 요청을 증언자를 자처하는 윤지오가 과장으로 꾸며낸 일대 소동처럼 발표함으로써 증인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 - P400

윤지오는 2009년에 사법경찰을, 2018년에 검찰을 경험한 후에 2019년에는 행정기관과 입법기관을 경험했다. 언론기관과의 마주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누누이 이야기했으므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2009년 사건 직후부터 10년간 지속적으로 윤지오를 추적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국가기관과 친밀한 접촉이 있었던 셈이다. 2019년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청와대가 검찰의 과거사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엄정한 조사를 요구하면서도 결코 엄정할 수 없는 검찰 자신에게 과거사 조사를 맡기고, 국회의원이 표면적으로는 증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동행을 약속하면서도 증언자가 여론의 공격을 받을 때는 연락을 끊고 침묵하며, 행정경찰이 증인의 신변보호를 책임지겠다고 하고서도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증인에게 전가한다는 것, 즉 국가기관들의 보편적 위선이었다. - P403

국가의 위선과 이중성 때문에 윤지오는 10년 만에 다시 사법경찰과 접속하게 된다. 이번에는 참고인으로서가 아니라 피의자로서다. "10년 동안 일관되게 진술한 유일한 증인으로 걸어온 지난날이 드디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은 절망으로 곤두박질쳤다. "진실이 침몰하지 않도록 여태껏 그래왔듯 성실하게 진실만을 증언"하려고 했지만, 변호사·작가·기자·유튜버·인스타그래머 등의 고소·고발자들은 윤지오의 새로운 "증언은 고인을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한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제소의 릴레이를 전개했다. 일찍이 "조선일보 방사장과 그 아들"이 누구인지 안개 속으로 감추어 최초 증언자 장자연의 증언조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허위 문건으로 만들고자 했던 대한민국 사법경찰은 이제 윤지오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함으로써 후속 증언자인 윤지오의 증언도 허위라는 고소·고발자들의 제소에 힘을 실어주고 장자연 사건 전체를 미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것이 나라인가? - P404

경찰의 답변과 이호영 변호사의 해석을 통해 우리는, 윤지오 증언자가 일반적인 적색수배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이 "특별히"윤지오 증언자를 적색수배 요청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요청에 따르는 판단은 윤지오 증언자를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중요사범"이라고 본것이다. 나는 여기서 경찰이 오히려 "중대한"범주 혼동, 범주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증언과 범죄를 혼동한 것이다.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이 사회적 파장이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의 재계·언론계·연예계·정치계·법조계를 망라한 모든 권력층의 부패와 성폭력 관행에 대한 기록인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 대한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이 가지고 온 사회적 파장은 분명히 컸고 증언이 지목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 P455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증언이 지목하는 가해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는 이 "큰 사회적 파장"이나 "높은 수사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증언자의 증언으로 기소된 조O천조차 1심에서는 무죄선고되었다. 이러한 사법현실의 불합리함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찰은 돌연 여기서 "수사 요구"를 가해 혐의자가 아니라 증언자에게로 돌리는 불합리함을 계속한다. 윤지오의 "증언"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증언이 지목하는 "가해 혐의자"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았다"는 사실을, 경찰은 윤지오의 "범죄"가 "사회적 파장이 크고""윤지오"의 범죄혐의에 대한 "수사 요구가 높다"는 생각으로 바꿔치기 한다. 증언과 범죄, 증언자와 가해자를 순식간에 바꿔치기하는 이 마술을 통해 윤지오에 대해 내려진 적색수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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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3-30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윤지오씨는 처음 증언하러 나섰을 때 몇 번 인터뷰를 보았는데 좀 시끄러지고 나서는 저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거 같아요. 인용해주신 거 읽어보니까 ‘피해자다움’을 미끼로 윤지오씨의 입을 막으러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20-03-30 17:03   좋아요 3 | URL
내용적으로는 참 답답한데요 작가가 되게 글을 잘 썼더라고요. 날카롭고 정확한 시선을 가지고 피해자의 편에서 얘기를 하려고 한달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방향이 잘 잡히고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자 조정환이 글쎄, 실비아 페데리치랑 마리아 미즈의 책을 낸 출판사의 대표더라고요?! 남자이면서 가부장제로 인한 성폭력에 대한걸 인지할 수 있다니 좀 놀랐어요. 단발머리님, 꼭 읽어보세요. 저에게는 정말 좋은 독서였어요.

단발머리 2020-03-30 17:07   좋아요 1 | URL
게다가 저자가 용감하기까지 하네요. 윤지오를 미워하는 세력의 거대함을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다락방 2020-03-30 17:09   좋아요 3 | URL
네, 보통의 남자들이 선택하지 않는 걸 선택했죠. 윤지오의 말을 듣는 것 외에도 이렇게 책으로 써내는거요. 이 책 읽으면서 윤지오도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조정환도 참 명민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유부만두 2020-03-31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서민 교수가 윤지오 씨 사태(?)에 대해 책 내지 않았었나요? 그건 어떤 시각이었을까 궁금하네요.
그런데 게을러서, 더하기 속터지기 싫어서 찾아읽게 되진 않아요.
요샌 뉴스 보기가 너무 버거워요. 너무 화가 나서 현실의 가족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게 되고 매일 힘들어요.

다락방 2020-03-31 14:17   좋아요 2 | URL
읽어보진 않았지만 서민 교수님은 윤지오가 사기꾼이라는 주장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읽은 책에서도 서민 교수님이 언급되면서 비판하고 있고요.
조정환의 책은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희망적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에요.

개학 미뤄져서 더 힘드실텐데, 기운내세요 유부만두님 ㅠㅠ
전 마스크 쓰고 오랜만에 스벅가서 화이트초코모카 사가지고 왔어요. 달달하니 맛있네요..

공쟝쟝 2020-04-01 07: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자에 대한 정보가 눈에 들어와요. 오홍!! 갈무리 출판사 좋은 책 많이 낸다고 생각중이었는데 ㅡ

다락방 2020-04-01 09:09   좋아요 3 | URL
최근에 본 정말이지 드문 남자사람이었어요. 뭐 직접적으로 아는 남자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후훗. 앞으로도 기대가 돼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아우또노미아총서 45
마리아 미즈 지음, 최재인 옮김 / 갈무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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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읽어왔던 여성주의 책들이 이 한권안에서 반복된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세상이 여성을 어떻게 취급해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책. 1986년에 나온 책인데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것은 씁쓸하지 않은가. 이미 그 당시에 마리아 미즈가 분석해낸 문제점들이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결국 여성이 처한 상황의 문제다. 가사노동이 보이지 않는 걸 얘기하고, 페미사이드가 세계 곳겟에 만연한 걸 얘기한다. 그 오래전 마녀사냥에서부터 남성은 여성을 이용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노동을 시키기 위해 일어났던 일들과 그리고 지금 일어나는 일들. 아니, 가부장제랑 자본주의 얘기할 줄 알았는데 왜 페미사이드가 나와? 이 모든 건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다 연결되어 있어.



그간 숱하게 읽어왔던 것들의 반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짜릿하다. 게다가 이미 많은 젊은 여성들이 깨닫고 주장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마리아 미즈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뿌리째 흔들기 위해서 길게 보고 가야한다고 제시한 방법중에 하나가 바로 '소비에 대한 자율권'이다. 여성은 중요한 소비 주체이고 소비의 기둥이니 이 소비를 멈춤으로써 바로 시작할 수 있고 또 자본주의를 작동할 수 없게 할 수 있다는 것. 너무 짜릿하지 않은가. 바로 위에도 썼지만 마리아 미즈는 이것이 단시일내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비하고 어떤 것을 소비하지 않을 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려면, 그 상품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제3세계의 여성들을 착취함으로써 내게온 게 아닌가, 내가 잘 살게 됨으로써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더 못살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사치품의 보이콧을 얘기하면서 그리고 의류나 화장품에 대한 보이콧도 얘기한다. 나는 특히 이 부분이 짜릿했다.


페미니스트들이 탈코르셋을 주장했을 때, 그래서 화장품을 부수면서 그것을 인증했을 때 얼마나 많은 비아냥을 들었는지는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화장하는 게 탈코르셋이야'라는 주장 역시 나왔던 것도 알고 있다. 아름답게 보이려는 건 사람의 본능이지, 라는 말과 함께 '아름답게 보일 필요 없으니 꾸미지 말고 탈코르셋하자'는 주장을 얼마나 많이 까내렸는가. 그러나 누군가에겐 화장하지 않는게 탈코르셋이라면 누군가에겐 화장하는 게 탈코르셋이야, 라는 것 자체가 타당하지 않음을, 그것이 결국은 여성을 자유롭게 만드는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1986년의 '마리아 미즈'도 얘기하고 있다. 마리아 미즈는 '여성이 화작품과 새로운 섹시한 패션 유행을 공개적으로 보이콧한다면(p.459)'성차별적인 이미지와 여성을 규격화된 모델에 맞추려는 사회를 성공적으로 방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자율권은 소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렵겠지만 생산에 대한 자율권을 이내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과 몸에 대한 자율성을 요구한다. 당연히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오지 못했던것처럼 수많은 방해공작들이 있을 것이고 또 단시일내에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여성이 여성의 소비,생산, 삶과 몸에 대한 자율성을 찾는 것이 함께 가야할 길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일.




여성주의책을 그간 계속 읽어온 사람이라면, 다른 책들에서 했던 얘기들이 이 책에서도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부장제에 대해 읽었다면 여기에 그것이 있고, 자본주의에 대해 읽었다면 이 책에 그 내용이 있다. 우리가 강간과 페미사이드에 대해 읽었던 것들이 이 안에 있고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해 읽었던 것, 여성이 왜그렇게 오래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 읽었던 것, 우리가 왜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지를 읽었던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책 안에 있다. 우리가 그간 읽어왔던 것들은 결국 다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이거봐, 이렇게 연결되어 있잖아' 하고 한 권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도 짜릿하게 제시해주고.



결론을 읽는 순간 짜릿해져서 좋았다. 그러나 이 책에 자꾸 튀어나오는 오타는 옥의 티다. 개정판으로 알고 있는데 개정판으로 내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보지 않았단 말인가. 갈무리 출판사는 다시 읽으면서 오타들 잡아내기를 바라고, 그리고 최근의 개정판에는 그 누구냐, 《혁명의 영점》, 《캘리번과 마녀》의 저자 '실비아 페데리치'의 서문도 추가되었다는데, 그걸 좀 가져와서 번역해주고 개정판 다시 내주길 바란다. 물론 이미 서문 너무 많지만 많은 거에 페데리치 꺼 더해도 나쁘지 않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율권을 갖지 못한 여성은 자신에게 강요된 것을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밖에는 심리적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인간으로서 자기존엄을 모두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들과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가장 깊은 이유이며, 강간당했을 때, 자신의 ‘명예‘와 가족의 명예가 침해당했다는 인식을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 P353

강간은 기존의 계급과 기존의 남녀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사실 일어나는 투쟁은, 유력한 남성과 무력한 남성 사이의 투쟁이다. 여성은 이 투쟁에서 유력한 남성의 남성다움, 그들의 힘을 증명하기 위한 대상으로 사용된다. - P358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압적인 노동관계를 통해 여성 노동을 갈취하는 것은,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인 셈이다. 폭력은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 필수적인 것이지,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 축적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적 남녀관계를 이용하고, 강화시키고, 심지어 발명해내야 했다. 세계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임금 노동자,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면, 이윤을 착복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제3세계에서부터 제1세계까지 가정주부, 노동자, 농민, 창녀 등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점이다. - P363

현대 기술을 통해 주간, 일간 혹은 연간 노동시간이 줄어들어도 남성은 가사노동을 분담하지 않는다. - P444

이런 해방의 과정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남성이 같은 방향으로 운동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가부장적 관계의 울타리를 깨고 나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남성의 운동은 시혜적인 온정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간적 존엄과 존중을 되찾으려는 갈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기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겠는가? - P454

우리는 이 체제에 대한 우리의 충성과 공모를 당장 거부하기 시작해야 한다. 여성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희생자일 뿐 아니라, 다양한 수준에서, 질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이 체제의 협력자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 세계 중산층 여성과 산업화된 국가의 백인 여성에게 특히 그러하다. 우리의 몸과 삶 전반에 대한 자율권을 다시 획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부장제에 대한 이런 공모를 거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 P457

페미니스트 소비자해방운동은 이런 눈먼 상태에서 벗어나 눈을 뜨는 것에서, 상품의 실체를 보는 것에서, 상품 속에 있는 여성, 자연,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재발견하는 것에서, 그리고 우리를 말 그대로 여성,남성,동물,식물,지구 등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시장관계를 진정한 인간적 관계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는 추상적인 상품 뒤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을 재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상품이 우리 식탁이나 우리 몸에 닿기까지 어떤 길을 거치는지를 추적하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여행의 끝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 저개발 국가에 사는 가난한 남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P462

서구 노동계급이 생산 결정들, 예를 들면 생산의 자동화, 무기생산, 위험한 화학물질과 사치품 생산등을 받아들인 것은 정말 어리석다. 이를 받아들인 것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진보라는 추상적 생각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전략으로는 일자리를 유지할 수도 없고, 파괴적인 생산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남성 노동자는 ‘식구를 먹여 살려야‘하기 때문에 선택권이 없다는 주장을 내놓곤 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핑계다. 왜냐하면 여성이 남성만큼 가족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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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3-2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록달록 무수한 플래그가 멋집니다.

다락방 2020-03-27 12:14   좋아요 1 | URL
흑백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책상 위에 있던 칼라를 가져다 썼습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반유행열반인 2020-03-27 13:06   좋아요 0 | URL
흑백이 조금 더 책표지에 어울리네요. 전 책에 저런 멋진 걸 붙여본 적이 없는...그러니 읽고 나면 남는 게 없고...

다락방 2020-03-27 15:19   좋아요 1 | URL
정리 잘해서 리뷰 잘 쓰시잖아요. 독후 활동으로는 리뷰 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리뷰 쓰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니까요. 계속 읽고 쓰세요, 반유행열반인님!

수이 2020-03-27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히 올해 최고의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듯 해요, 다락방님. 아직 2020년은 많이 남아있지만요.

다락방 2020-03-28 15: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우리는 남은 2020년에 더 좋은 책을 읽게 될지도 모릅니다. 힘내서 같이 읽어요, 수연님!
같이 읽기로 완독한 첫 책이 수연님께 강한 인상을 주어서 저는 너무나 뿌듯합니다. 하핫.

공쟝쟝 2020-04-01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제 꿈벅꿈벅 졸며 인도의 지참금 살해를 읽다 잠들어서 완전 악몽 꿨어요. 암담함을 지나 저자가 초대하는 실천의 길로 어서 돌입하고 싶습니다 빠샤!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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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8월에 태어나기를, 우리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기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내 선택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가 세상에 태어났고 자라는동안 여자라서, 내가 태어난 생일이 있어서, 우리 부모님의 딸이어서, 대한민국 국민이어서 경험하게 되는 일들에 맞닥뜨렸다. 어떤 것들을 슬픔이었고 어떤 것들은 기쁨이었으며 어떤 것들은 고통이었고 어떤 것들은 행복이었다. 고통과 행복 혹은 기쁨과 슬픔앞에 놓일 때면 '내가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같은 생각들을 수도없이 해보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고 해서 잠시라도 다른 사람으로 살아볼 수는 없었다. 삶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안줌' 역시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다 가지고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나보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가 모두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장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 사람들, 그런 '히즈라'들이 머무르는 장소 '콰브가'에, 안줌 역시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가난하게 태어나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고, 남성이며 동시에 여성으로 태어나길 원한 것도 아니었고, 인도에 태어나길 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안줌은 지금에 와서 다른 곳에 태어날 수도, 다른 모습으로도 태어날 순 없으니까. 삶은, 정말이지, 그런 게 아니니까.



2002년,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인 《미들섹스》를 출간했다. 책에서 남,녀의 성기 모두를 가진 주인공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다가, 써커스단에 들어가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며 돈을 벌기도 한다.

'아룬다티 로이'가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니, 나는 이 책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히즈라로 태어난 고통, 히즈라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고통, 그리고 그 히즈라가 자라면서 받게 되는 차별당하는 삶까지. 그런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성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며 몇 번의 사랑을 할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자신의 저주받은 몸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최종선택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거다. 《미들섹스》를 읽을 때는 그저 '아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구나'를 생각하며 주인공의 고통을 이해하려 했다면, 지금 이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치면서는, '그러나 아룬다티 로이가 히즈라가 아니면서 히즈라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혼자 했다. 당사자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이야기를 해도 되는걸까.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괜찮은것인가, 하는 생각. 그러다가 퍼뜩, 그러나 당사자성이 없다는 것은 나의 편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읽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히즈라'인 안줌의 이야기는 백페이지도 되지 않을 때 모두 나온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에 학교 가기를 포기하는 점, 변성기를 맞고,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건 '여성'으로서의 삶이고, 콰브가에 들어가고, 그리고 마흔한 살이 되어 '엄마'가 되고 싶고, 엄마가 되고 싶을 때 마침, '자이나브'라는 아기를 입양하게 되고, 그리고 마흔 여섯에 정든 콰브가에서 떠나기까지. 이 이야기가 백페이기도 되기 전에 모두 나오는거다. 아직 뒤에 무수히 많은 페이지가 남았는데,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안줌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렇게 훅- 지나가버린 거지?




그러니까 이 짧다면 짧은 페이지안에서 안줌은 '개인'을 산다. 히즈라로 태어난 개인, 여성이 되길 선택해 성전환 수술을 받는 개인, 아이를 입양하고 엄마가 되는 개인, 그리고 상처입고 콰브가를 떠나는 개인의 이야기. 그런 안줌 개인의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자, 이제는 안줌이 살고 있는 나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안줌은 안줌 개인이되 동시에 인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인도의 흐름 속에서 안줌의 생활 역시 그 흐름과 뒤섞일 수밖에 없다. 안줌은 생각지도 못하게 '구자라트 폭동'의 한가운데에서 친구의 죽음을 맞게된다. 그건 안줌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작별이었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폭력의 현장이었다. 이 일은 안줌의 생각을, 생활을 바꾸게 된다. 안줌은 콰브가에서 나와 무덤가로 간다. 그곳에서 폐인처럼 살면서 자신처럼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씩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이제는 죽어서도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장례식장을 만든다. 살아서 가난한 사람들과 죽어서 가난한 사람들, 아니지,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과 가난하게 죽는 사람들을 위한 파라다이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드는 거다.




이야기는, 결국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 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이 겪은 삶은 살아서도 고통이었고 죽어서도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정부를 비롯하여, 탄광때문에 밀려나고, 가스누출에 희생된 사람들, 집을 잃고 쫓겨나고, 종교 때문에 박해받고, 일용노동자로 일하다 다치고, 부러지고, 맞고, 묶이고, 납치당하고, 지진의 피해를 입고, 강간당하고, 눈이 멀고, 폭탄이 터지고, 물밑으로 가라앉고, 사생아를 낳고, 시위를 하고 맞서지만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 부모님의 죽음을, 아내의 죽음을, 아이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사람들. 울부짖어도 바뀌지 않아 절망하는 사람들. 마을 사람들에게, 경찰에게, 군인에게 희생되어 죽어가는 사람들. 헤어지려는 아내에게는 따귀 몇 대를 날려주라고 충고하는 친구, 친구의 충고대로 아내의 따귀를 때리는 친구. 그들이 사는 인도는 사람들이 죽어야 사는 곳이었고, 때로 두 번 죽어야 하는 곳이었다. 시체를 만들고, 시체를 보고, 시체를 발견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거기에서 개인으로 살지만, 그러나 고통받는 개인은 고통받는 나라를 만들고, 고통받는 나라는 고통받는 개인을 만든다. 엉망인 개인과 엉망인 나라. 죽음이 삶이 되는 현장.




여기에서 저기로 그리고 저기에서 거기로 가도 머무를 곳은 없었다. 반드시 누군가가 죽었고, 죽여야했고 아니면 내가 죽었다. 도망쳐야 했고 숨어야 했고 감춰야 했고 속여야 했는데 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삶의 의지를 다질까. 무엇이 이들을 살게 할까. 여기에서 폭력을 만나거나 저기에서 폭발을 만나는데, 여기에서 폭도들을 만나거나 저기에서 군인들을 만나는데, 어디로 가야 안전할까. 분쟁이 없는 곳엔 전쟁이 있었고, 전쟁이 없는 곳엔 테러가 있었고 테러가 없는 곳엔 계급이 있었다. 가난이 있었고 더 큰 가난이 있었고, 더 더 큰 가난이 있었고, 그리고 부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상처와 고통과 복수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가난해서 힘들었고, 불가촉천민이어서 힘들었고, 두개의 성을 한꺼번에 가진 몸이라서 힘들었고, 사생아로 태어나서 힘들었는데, 그렇게 나만의 상처만으로는 끝나는 게 아니라고, 살고 싶다면 더한 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삶이 말해주고 있었다. 너가 태어나 고통이니? 사는 건 더 고통이야.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사랑하며 사는게 가능할 수 있을까?



안줌은 18세 생일에 꿈속에서 오르가즘을 겪었던 것이 자기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오르가즘이다. 틸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없다. 가슴속에 사랑을 품었으되 그 사랑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사치였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삶.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은 포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그저 바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각자의 상처와 또 복수를 끌어안고 그들은 결국 한 데 모여 버려진 아기 '미스 제빈 2세'의 엄마가 되어주고 또 엄마가 되어주고 그리고 그 아기에게 최상의 장소를 제공하고자 한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사랑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 숱한 폭력과 희생, 무의미한 죽음의 기록들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낯선 용어들로 가득차 힘들었다. 처음 보는 단어는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했고, 직업이기도 했고, 직함이기도 했고, 장소이기도 했다. 게다가 인도에서 그들이 겪었던 역사적 사건들 역시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수차례 컴퓨터 앞에 앉아 혹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야 했다. 카슈미르 분쟁은 도대체 뭐야, 구자라트 폭동은 또 뭐야. 이 사람들 왜이렇게 많이 싸우고 죽인거야. 이 모든 것들을 나는 기억하며 읽을 수가 없어서 결국 이면지를 반으로 접어 메모하기 시작했다.





반으로 접힌 메모지는 책을 읽어갈수록 꽉 채워졌다.




소설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자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연달아 등장하는 낯선 단어들 앞에 무릎 꿇었다.


게다가 이야기의 흐름은 어떻고.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미스 제빈 2세를 얘기하면서 갑자기 미스 제빈 1세가 언급이 되면, 아 1세가 어디에서 나왔지? 내가 놓쳤나? 앞장을 몇 장 뒤적여야 했다. 그러나 미스 제빈 1세에 대해서는 그 뒤에 나오는 거다.

자,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됐냐면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야, 로 과거를 되짚는 식.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그 때마다 나는 번번이 내가 뭘 놓친건 아닌지, 내가 제대로 읽은 게 아닌지, 혹시 내가 메모를 해둔 것에 있는지, 책장을 되넘기거나 메모를 살펴야 했던 거다.


책의 표지를 넘기고 책장을 한장씩 넘기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가고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결코 한 번에 다 읽어낼 수 없는 책이 있다.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사람이라면 최대한 집중해야 할것이며 다른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내가 미리 알려준다. 그리고 나처럼 메모를 하는 게 도움이 된다. 읽는 순간에는 '음, 이건 기억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해서 메모해두지 않았던 단어중에 '아자디'가 있다. 이게 뒤로 갈수록 자주 나오는거다. 심지어 사람들이 아자디, 아자디 함께 외치기도 한다. 그런데 내 메모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 단어가 없어. 나는 다시 책장을 되돌린다. 그리고 한참 앞에서 발견한다. 아자디는 '자유 혹은 독립'이란 뜻을 가진 단어였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책읽기었으므로 결코 즐겁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데, <10장 지복의 성자> 시작부분부터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10장에서는 모두가 만나 모두가 함께하는 삶이 펼쳐지니까.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들어 있었다. 똑똑한 여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는 여자, 재회 그리고 사랑까지. 기쁨은 슬픔 뒤에 오고 희망은 절망 뒤에 오는 거라면, 이 책은 1장부터 9장 뒤에 10장이 온다.



우리는 개인으로 살아가며 자신만의 역사를 만든다.

다른 사람과 사랑하며 그 사람과 나만의 역사를 함께 만든다.

이런 우리가 모여서 역사속의 일부가 된다.


지복의 성자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아프타브는 그 여자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투르크만 게이트까지 여자를 따라가서 그녀가 안쪽으로 사라진 푸른 문 밖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보통 여자라면 그런 차림으로 샤자하나바드의 거리를 활보할 수 없었다. 샤자하나바드의 보통 여자들을 부르카를 입거나 손과 발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과 머리를 가리고 다녔다. 아프타브가 따라간 여자가 그런 차림(밝은색 립스틱을 칠하고 금색 하이힐을 신고 반짝이는 초록색 새틴 살와르 카미즈를 입은)으로 그렇게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 P33

안줌은 쾌락을 주는 자로서는 노련한 기교를 발휘하여 큰 인기를 얻었지만, 붉은 디스코 사리를 입었을 때 맛보았던 것이 그녀의 생애 마지막 오르가슴이었다. - P47

안줌은 자신이 ‘학살자들의 행운‘일 뿐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남은 생애 동안, 심지어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조차, 그녀와 ‘남은 생애‘의 관계는 늘 불안정하고 무모했다. - P96

이런 따분한 소견을 말해도 용서가 된다면, 결국 영원히 실현되지 못할 공연을 위해 연습하는 것, 어쩌면 그게 인생이 아닐까? 혹은 인생 대부분의 결말이 그런 식이 아닐까? - P202

틸로는 건축학부 3학년 학생이었고, 세트와 조명 디자인을 맡았다. 그녀는 우리에게 자신을 틸로타마라고 소개했다. 그녀를 처음본 순간, 나의 일부가 내 몸에서 걸어나가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 P203

이제 과거를 돌아보며, 나가는 자신이 오랜 세월 잠재의식 속에 틸로가 사막을 지나는 낙타처럼 그저 자신의 삶을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언젠가는 그녀가 분명 자신을 떠날 거라는 두려움을 품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 P310

무사와 비스킷을 든 사람이 뒤에서 나타나기 전부터 금속 쟁반에 놓인 찻잔들이 희미하게 달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사와 비스킷을 가져온 사람은 즉시 서로를 알아보았으나, 그들의 표정은 수동적이고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암리크 싱은 그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방안의 공기가 동이 났다. 호흡이 불가능해졌다. 호흡을 하는 것처럼 가장해야만 했다. - P447

틸로와 무사는 연인인 동시에 前 연인, 애인인 동시에 전 애인, 남매인 동시에 전 남매, 급우인 동시에 전 급우였기에 제 3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런 기묘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너무도 특이한 방식으로 서로를 신뢰했기에, 설령 그것 때문에 자신이 상처를 받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사랑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사랑할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마음의 문제에서는 사실상 숲처럼 빽빽한 안전망을 갖고 있었다. - P483

여전히 무사는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몇 년동안 품고 다니던 끊임없는 두려움-갑작스레 무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될 것에 대한-의 무게가 얼마간 가벼워졌다. 그건 그를 덜 사랑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만신창이가 된 묘지의 천사들이 만신창이가 된 피수호자들을 보살피며, 두 세계 사이의 문을 (불법적으로, 아주 조금만)열어두어 이승의 영혼들과 이승을 떠난 영혼들이 같은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처럼 어울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삶은 덜 확정적인 것이 되고 죽음 또한 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왠지 모든 게 조금은 견디기가 쉬워졌다. - 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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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9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9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3-1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룬다티의 책을 읽고 싶지만 저 역시 부제가 주는 느낌 때문에 아직까지 미루고만 있었어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진 사람의 이야기... 로만 예상했거든요. 다락방님 글 읽으니 읽고 싶은데 마지막에 공부 메모 사진 보고 나니... 맘이 복잡해지네요@@

다락방 2020-03-19 17:0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이 미루신 이유가 제가 갈등했던 이유와 아마도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또 거기에 있어서 좀 복잡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등장인물이 중심인물 ‘안줌‘이기는 하지만, 안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책에서는 다양한 개인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인용문을 옮겨 놓긴 했지만,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이 다크룸 읽다가 저에게 일러주었던 부분이 이 책에서도 나온답니다.


아프타브는 그 여자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투르크만 게이트까지 여자를 따라가서 그녀가 안쪽으로 사라진 푸른 문 밖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보통 여자라면 그런 차림으로 샤자하나바드의 거리를 활보할 수 없었다. 샤자하나바드의 보통 여자들을 부르카를 입거나 손과 발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과 머리를 가리고 다녔다. 아프타브가 따라간 여자가 그런 차림(밝은색 립스틱을 칠하고 금색 하이힐을 신고 반짝이는 초록색 새틴 살와르 카미즈를 입은)으로 그렇게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P33

잠자냥 2020-03-1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아프타브, 그러니까 안줌에 대해서 다락방 님은 좀 더 다른 할 말이 있을 것 같았어요. ㅎㅎ

다락방 2020-03-20 08:25   좋아요 1 | URL
저도 어쩐지 그럴 것 같아서 이 책을 읽는데 엄청 망설인 거였거든요. 그런데 아룬다티 로이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그런 글을 안쓸 수 있도록(?) 중심인물이긴 하되 어쨌든 ‘이런 개인‘에 대해 쓰는 것에서 멈추더라고요. 저에겐 다행한 일이었어요. 하하.

얼음장수 2020-03-1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정말이지 그런 게 아니니까!
드라마에 나온 유치한 대사였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데 다른 사람의 인정은 필요하지 않다‘도 떠오르고.
메모를 보니까 와우, 꼭 문학 전공하는 대학원생 같아요.

다락방 2020-03-20 08:28   좋아요 0 | URL
어휴.. 소설 읽는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 소설은 그럴 일이 별로 없지만 이게 외국소설 읽다보면 이름 헷갈릴 때도 엄청 많잖아요. 일본 소설도 엄청 헷갈려서 ‘어, 얘 아까 죽지 않았나? 왜 살아있지?‘ 라고 해서 뒤로 넘겨보면 한글자 다르고.. 러시아 소설은 애칭이 겁나 많고... 그런데 인도 소설은 이름 뿐만이 아니라 직업도 그렇고 호칭도 그렇고 뭐가 그렇게 낯선 단어가 많은지 따라가기가 벅차더라고요. 휴... 이젠 메모해가며 읽어야 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