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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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졸업 파티에 참석했다. 나는 졸업 파티 무대에 오를, 졸업반 학생들로 구성된 소규모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맡았다. 파티에서 우리 밴드는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어머니가 약간 눈물을 보였다. 그날 어머니는 몸이 많이 아팠는데도-당연히-참석해야 한다며 왔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처음으로 나를 지켜볼 수 있어서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집에 있는 나를, 유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서, 어쩌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내 자신감에, 또 그것을 해내고 그 대가로 박수갈채를 받고 있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서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니면 당연한 일이라곤 별로 없는 우리의 삶에서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슬퍼서 그냥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p.287)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민을 가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가급적이면 영어권 국가이면 좋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니 영어권 국가를 가는쪽이 그나마 언어 공부하는데 시간을 덜 들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는 굳이 영어권 국가일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기존에 내가 알던 영어로는 생활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고 어느 나라 어떤 언어가 됐든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가 살기로 한다면 가장 먼저 언어를 배워야 할 것이었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곳의 모든 생활방식을 배워야 할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마트에 가 계산을 하는 것도, 운전을 하는 것도, 이웃과 어떻게 지내는 게 실례가 아닐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며 내가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든 것들을 다 알아보고 새로 시작해야 할 것이며 살아가는 내내 무엇도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20년간 근무했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갔을 때 얼마나 유의미할까. 나는 그저 어느 나라를 가든 외국인 노동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이면서 언어를 할 줄 모른다면 보수가 낮은 직업을 고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내가 이럴진데 우리 부모님은 어떨까. 나보다 더 늙으신 부모님, 나보다 더 배움이 짧으신 부모님이 갑자기 외국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가 힘든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드실 것이다. 언어를 익히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익숙해지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운전까지 하게 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이웃들과 인사를 하게 되기까지는?




사샤 스타니시치는 십대 시절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거주지를 옮긴다. 아니, 옮겨야 했다.  언어를 새로 배워야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이들과 친해져야 했다. 외국에 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환경으로 공부를 하며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그 당사자에게 매우 스트레스가 큰 일일것이다. 매일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아이대로 낯선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부모는 아마 더할 것이다.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는 인텔리였지만 외국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어떤 일이 주어지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살아야 하니까. 사샤 스타니시치 부모는 몸을 다쳐가며 새로운 나라 독일에서 적응하려고 한다. 살아가는 집도 형편없지만, 필요한 가전기구도 어디서 주워오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참에 아들이 이 이국땅에서 학교를 졸업하게 되는거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고국을 떠나왔던 일, 그리고 아들이 이 낯선 나라에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는 일. 그걸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샤의 부모는 그러나 독일에서 추방당한다. 사샤는 독일에서 대학을 다닐 것이고 또 직업이 있음을 증명하면서 독일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 책, [출신]은 그런 사샤 스타니시치의 삶의 기록이다. 사샤의 가족이 독일에 살고 싶어서 독일에 온 게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독일로 온 것이다. 부모는 추방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다. 그들이 돌아갈 나라가 없다. 사샤와 사샤의 가족 그리고 여기의 내가 또 다른 세상 어디의 누구라도 '낯선 나라에서 사는 건 힘들것이다'는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샤와 내가 다른 건 '돌아갈 곳'의 유무였다. 나는 낯선 나라 어디를 가서 적응하려 하다가도 너무 힘이들면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샤가 떠나온 곳, 유고슬라비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돌아갈 곳이 없다. '낯선 곳 적응 힘들어, 익숙한 곳으로 돌아갈래' 라는 생각이 들어도 돌아갈 곳이 없다. 내가 출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그러나 사샤가 출신에 대해 책을 쓸 수 있었던 건, 그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에 있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완전히 새로운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설레이고, 낯선 곳에 도착해 새로운 것들을 맞닥뜨리는 것도 기쁨이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집으로 돌아갈 때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안정감을 준다. 아, 이제 집에 간다, 하는 평안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 나는 여행을 하는게 아닐까를 돌아올 때마다 생각한다. 그래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막막한 기분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샤가 유고슬로비아에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샤는 출신을 묻는 말들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를 갈등하게 된다. 식구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살며 만나기 위해서는 각자 서로 다른 나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유고슬로비아 출신이었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해 살고 있다. 독일, 스웨덴, 뉴질랜드, 터키의 여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들은 자신을 어느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잘 모르겠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한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다.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지만, 그러나 그들이 각자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면서, 그들은 그들의 아이들에게 돌아올 곳을 마련해주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에 있어서 뭐가 더 나아진걸까. 잘 모르겠다. 누군가 출신이 어디냐 물으며 지도를 펼쳤을 때, 그 지도에서 어느 한 곳을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역시 나는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과 질문들로 시간이 오래 걸린 힘든 독서였다. 

내가 알 수 없는 것,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기록이 이 책이다. 

사샤 스타니시치가 쓸 수밖에 없었고 사샤 스타니시치만이 쓸 수 있는 기록이다.



나는 함부르크에 살고 독일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낯선 산 너머에 있다. 친숙한 엘베강 가에서 달린 거리를 계산하는 앱을 켜놓고 일주일에 두 번 조깅을 하는 나는 길을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P48

늘 홀로 증조부를 먼발치에서만 지켜보던 증조모님은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언제부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노랫소리로 술리오를 유인했지. 그때까지도 술리오는 자기가 내 거라는 걸 몰랐지!" 그러나 증조모는 이미 알고 있었다. - P106

어느 날 우리는 어린아이들과의 교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라힘 부모님이 자녀 네 명을 키워낸 일과, 내가 어린 사촌 동생 두 명을 귀찮게 여긴 일이 화제에 올랐다. 그날 내가 한 말이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라힘 부모님이 와인 잔을 손에 들고 내 맞은편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는 모습,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기억이 난다. 보통 어떤 사람이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당신은 그 사람과 충분히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P251

1998년, 부모님은 독일을 떠나야 했다. 혹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면 부모님에게 하이델베르크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 점에서 생각해보면 하이델베르크는 부모님이 지금도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다. 세상은 부모님이나 나와 같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꽉 차있다. 고향을 떠나온 난민의 자녀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자녀를 두고 있고, 그 아이들은 스웨덴, 뉴질랜드, 터키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인 한 사람일 뿐인 나는 가족과 가족의 단결보다 나 자신을 더 돌보았다. - P289

어머니와 할머니가 가방에 옷, 블라우스, 속옷을 차례로 챙겨 넣는다. 어머니는 겨울용 코트도 넣으며 말한다. "이번 생에서 얼마나 더 세상 밖을 돌아다닐지 누가 알겠어요." 그 말에 두 사람은 며칠만에 처음으로 웃는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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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의 신화 - 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베티 프리단 지음, 김현우 옮김, 정희진 / 갈라파고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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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태어난 '베티 프리단'은 이 책을 1963년에 출간했다. 세상은 여자들에게 집에 있으면서 청소와 요리를 하고 남편과 아이를 키우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여자의 역할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대중매체에서도 그랬다. 여자들은 대학을 가지 않거나 대학에 다니다가도 중퇴하고 결혼을 했다. 그러는 것이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그렇게 결혼을 해 집안일을 하고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분명 이것이 여성이 해야할 일이며 이것이 여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바라고 하는데도 어딘가 공허했다. 분명 누가 봐도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데, 하라는대로 하고 있는데, 살라는대로 살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공허할까. 왜 이렇게 다 아플까. 그런데 어디가 아픈지 병원에서는 왜 진단내릴 수 없어하는걸까. 그리고 왜 그렇게 아픈 가정주부가 나 뿐만이 아닌건가. 


베티 프리단이 대단한 건 이런 시기를 살면서 '나도 아프다'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이게 왜그럴까' 그리고 이걸 낫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깊이 생각했다는 거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현상에 대해 이상하다는 의문을 갖고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고 또 문제해결방법까지 제시한 게 베티 프리단이 이 책으로 한 일이다. 누구보다 앞서 나아갔고 누구보다 생각이 깊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부인할 수가 없다. 모두가 살라는대로 살면서 지치고 공허해할 때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다니, 그 하나 만으로도 베티 프리단의 업적은 기릴만하다.



그런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써낸 베티 프리단의 이 책은 그래서 매우 '세다'. 만약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관심도 없던 '기혼 유자녀 고학력자 전업주부 여성'이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후려쳐지는 걸 활자로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뭔가 비어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짚어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베티 프리단은 가사 노동 자체는 그렇게 머리써서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거, 누구든 시켜도 할 수 있어, 남자들도 잘 할 수 있지. 그런데 머리 좋고 지적인 여자들이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아무 발전 없는 일을 쳇바퀴 돌리듯 하고 있으니 안아프고 베기겠니? 오늘 하는 일 내일 또 하고, 그러면서 하루를 보내고 일년을 보내야 하니 새로운 청소도구를 쓰고 새로운 청소방법을 써보고..그런다고 그 일이 해결되니? 그렇다면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아이를 낳아 육아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가겠지. 그런데, 아이는 언제까지 낳을 수 있나. 그것 역시 언젠가는 그만 낳아야 해. 매해 아이를 낳을 수도 없잖아.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다 자라면, 스무살전후로 결혼한 여성들이 30,40대가 되었을 때, 그 때 그 시간은 어떻게 보낼 것이야?



베티 프리단은 지적인 성인 여성들을 이렇게 집에 가둬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그건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지만, 그들의 아이들에게도 결코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얘기한다. 아이들에게만 온 열과 성의를 다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대리 만족을 느끼고 싶어하고 아이들에게 역할 대행을 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은 성장할 수 없고 각종 질환들을 끌어안게 된다고. 그러면서 동성애 까지도 이런 식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다. 이게 단순히 여성들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라는 의도로 강하게 말하려고 했던 까닭이겠지만, 이런 주장들은 반발을 살 위험이 너무 높아 보인다. 어떤 의도로 쓴 글인지 알겠지만, 그렇다해도 '아이들이 잘못되는 건 다 엄마 탓이라니까!' 라고 읽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 잘못되는 건 다 엄마탓이야, 그건 그런데 엄마를 그렇게 만든 세상탓이지. 이렇게 주장하려는 바이긴 하지만, 그래도 왜그렇게 죄다 엄마탓을 하는거지? 라고, 어떤 의도인줄 알면서도 거부반응이 들었다. 물론 알고있다. 조곤조곤 살살 말했다면 아마 귀기울여 듣는 사람도 현저히 적었을 것일 뿐더러, 들었어도 새기질 않았겠지. 거칠게, 세게 말해야만 들어주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나 세게 얘기한 것일테다.



결론은 놀랍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교육'이었다. 여성들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 모든 문제들은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음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거다. 너무 당연한 말인데도 교육이 답이라고 말하는 베티 프리단의 주장을 읽노라니 너무 짜릿했다.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 자신을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혼한다고 교육을 멈추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교육은 어떻게든 답이 된다고. 배우기를 멈추지 말라는거다. 그건 동네에서 문화센터에 가 교양을 쌓는 그런 교육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남자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는 바로 그 교육, 똑같은 교육이었다. 언어, 화학, 수학, 물리 등에 대한 교육들. 그런 교육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마치라고 한다. 어떻게든 마치라고. 그러면 설사 결혼하고 일에서 멀어졌어도, 나중에 아이들이 다 자란 뒤에도 세상에 나가서 뭘 어떻게 할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다는 거다. 자, 어디가서 무얼 해볼까,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다는 것. 실제로 그녀가 인터뷰한 전업주부들 중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림 그리기를 배운다던가 학교를 다시 다닌다던가. 뭔가를 배웠던 사람들은 그 다음을 향해 나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는데, 교육 자체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은 아이들이 자라고 이제 자신에게 쏟을 시간이 왔을 때 조차, 어디에서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는 거다. 



또한, 교육을 받고 거기에 머리를 쓰고 그걸 이용해 직장을 다니면서 돈을 버는 것. 이 모든 것이 여성 개인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여성이 속한 가족 구성원들을 위해서도 더 나은 방법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한다.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도 높은 여성이 아내인 것이 또 엄마인 것이 더 낫다는 것. 그 가족들은 가족 내에서 더 잘 지낼 수 있었고 가사 노동에 들어가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게다가 아주 흥미롭게 읽은 부분인데, 이렇게 자기 만족이 높은 여성이 섹스에서도 더 즐길 수 있었다.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섹스로 즐거움을 찾으려 하거나 아이에 몰두하거나 하게 되는데, 내가 일을 하고 나의 발전을 위해 힘을 쏟는 사람들에게는 섹스가 부수적인 것이 되고, 하면 즐겁게 하지만 굳이 안한다고 스스로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뭐, 너무 당연한 말이다.



미국의 전업주부 여성들이 모두들 아프다고 할 때 그 현상을 직시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베티 프리단은, 이 책이 날개 돋힌 듯 팔린 이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한다. 단체를 조직하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거다. 그러나, 아, 베티 프리단은, 래디컬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남성을 끌어안지 않으려는 래디컬들을 향해 비난한다. 베티 프리단은 반드시 남성과 함께 가야 한다고 하는데, 읽으면서 '베티 프리단, 남자 디게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이 책은 지금 읽기에는, 그리고 지금의 젊은 페미니스트나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읽기에는 그렇게 획기적은 책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 책이 얼마나 놀라웠을지는, 이 책 속에 숱한 인터뷰이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베티 프리단이 말하는 여성의 교육, 그리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 있어서는 나 역시 마음 깊이 동의하는 바다. 전업주부로 살며 아프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여자가 어떤 식의 삶의 형태를 선택하든, 단단하게 설 수 있기 위해서 교육을 받고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하는 거다. 내가 결혼해 남편과 함께 살더라도, 그리고 그 남편이 운좋게 돈을 마구 벌어온다고 해도(그레이의 오십가지 그림자 속 그레이처럼), 거기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나는 내가 교육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은, 그 축이 무너졌을 때 나 역시 쏟아져버리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기대야 하는 게 나 자신이라면, 내 축을 내가 잘 세우는 한 내가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 



교육에 대한 부분이 너무 짜릿했다. 여성들이 더 많이, 더 열심히 배움에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베티 프리단의 주장은 그런 지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역시나 좋은 독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인의 아들들이 성취감이 없고, 개인에 대한 가치관을 상실하고, 독자적인 행동이 결핍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딸들이나 이전 세대에 그 딸들의 어머니들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비극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어떤 문화가 여자가 인간적으로 성숙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여자가 미숙하다고 해서 손실로 생각하거나 그것이 노이로제와 갈등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모욕적인 것은 우리가 국가적으로 여성들이 그들의 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고 나서야, 여성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우리 문화의 정의가 진정으로 반영되어 있다. - P366

원시사회에서 부족들이 처녀를 신에게 바치는 것처럼, 우리는 소녀들을 여성성의 신화에 희생시키고, 우리나라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소비자가 되도록 성적 상술을 통해 그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손질한다. - P412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쾌락이나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성장하고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라면, 편안하면서 공허하고 목적 없는 나날들은 정말로 이름 없는 테러의 원인이 된다. - P542

인류를 발전시키는 욕구, 즉 지식에 대한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는 다른 동물들의 식욕과 성욕 그리고 생존 욕구만큼이나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이다. - P543

매슬로는 더 큰 세상에 살며 자아실현을 달성하는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그날그날의 삶을 즐기는 것과, 그들만이 유일한 세계인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날 수 있는 사소한 일에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런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진부한 경험이 된다 해도 경외, 즐거움, 경이, 심지어 황홀감을 가지고 새롭고 소박하게 삶의 기본적인 것들을 계속해서 감상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또한 "성적 쾌락은 자아를 실현하려는 사람의 가장 격렬하고 황홀한 완벽함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강한 인상을 준다."고 보고했다. 더욱 넓은 세계에서 개인의 능력을 성취하는 것이 성적 환희의 새로운 전망마저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섹스나 사랑도 인생을 추동시키는 힘은 아니다. - P556

(매슬로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사랑하게 되고 성적 만족도도 증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성관계는 에전보다 더 나아졌으며 항상 더 나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밝혀지는 매우 평범한 보고다.") 이런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자신이 되고 스스로에게 진실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 깊고 심오한 관계를 맺고, 더 포용하고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더 완벽하게 식별할 수 있고, 자신의 경계를 더 많이 초월하며,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 P557

오르가슴을 온전히 즐기는 여성들은 특히 자아실현을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하는 여성이며, 집 밖의 세상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교육 받은 여성이었다. - P563

미국에서 여성의 정체성의 위기가 시작된 때는 개척이 끝나고 남성이 집 밖에서 산업사회와 전문 사회라는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시작할 때였다. - P574

잠재력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도 존재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자신들의 충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노동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정체성은 남편이나 자녀와 같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발견할 수 없다. 여성의 정체성을 가사노동이라는 단조로운 틀에 박힌 일에서 찾을 수 없다. 모든 시대의 사상가들이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삶을 몰수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직시할 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때때로 이러한 자각은 죽음의 순간에만 온다. 수동적 순응과 무의미한 일에 의한 자아의 죽음. 여성성의 신화는 사실 여성들에게 그런 살아있는 죽음을 요구한다. - P575

그 함정의 열쇠는 물론 교육이다. 여성성의 신화는 여성에게 고등교육을 허락하는 것이 회의적이고 불필요하며 위험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교육이야말로 미국 여성들을 여성성의 신화라는 끔찍한 위험에서 구했으며, 앞으로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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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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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선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책은 결의에 가득 차있다. 페미니즘이 뭔지 내가 한 번 공부해보겠다, 그리고 실천해보겠다!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적합한 입문서가 될 듯.


처음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거 대체 뭘까, 세상은 왜 기울어졌을까, 어떻게 평등하게 만들 수 있나, 무엇이 문제인가 들여다보다 보면 숱하게 많은 문제들을 마주치게 된다. 거대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테두리 안에서 여성들의 가사노동, 돌봄노동, 재생산 노동은 그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따른 임금 역시 후려쳐졌다는 것도 알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을 가진 권력자들이 대부분 남성인 탓에 여성들은 진급도 힘들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도 받지 못하고, 게다가 성적으로도 이용당한다. 성을 판매하는 고통에 놓이는 것도 여자고, 성을 구매하는 놈들도 판매하는 여자를 욕한다. 게다가 포르노는 어떻고. 포르노의 수위는 점점 더 강화되어 여성의 실생활 곳곳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여성은 성적 대상화 되어 매스컴에 등장하고, 여성의 미의 기준 역시 그렇게 만들어지고 강제되며, 여성들은 돈으로 다시 또 세상이 원하는 미를 만들어내야 한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자들은 여성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긁어먹는다. 이건 뭔가 아닌데, 하고 들어갔다가 분노에 분노를 만나게된다. 내가 예상했던 분노가 거기 있고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분노도 거기 있다. 



그렇게 여러갈래로 쭉 뻗어나간 분노를 종합해놓은 책이 이 책이라 봐도 틀리지 않다. 그동안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보이지 않는 노동에, 페미사이드에 분노하고 있었다면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고 종합해주는 책이랄까. 세분화해서 공부하고 분노했다가 이쯤에서 한 번 토탈 정리를 해줄까, 할 때 이 책은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입문자에게 더 적합하고. 자, 어떻게 돌아가나 보자, 뭐가 문제인가 보자, 하는 사람이 읽을 때 더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낯선 용어에 대한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이 매끄럽지 않다. 많은 문장을 두 번씩 읽어야 했다. 분량도 얇고 글자도 매우 큰데-정말 크다-, 게다가 내가 페미니즘 책을 적게 읽은 것도 아닌데, 이 얇은 책 한 권을 읽어내기 위해서 미간에 주름을 뽝 잡아야 했다. 나랑 결이 다른 부분들이 수시로 나오지만, 어차피 모든 것에서 의견을 같이할 수는 없을 터. 그런 결이 다른 부분들보다는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개인의 출세에 대한 열광은 페미니즘을 개별 여성의 오르막과 혼동하는 소셜 미디어 유명인social-media celebrity들의 세계에도 똑같이 스며둘었다. 그 속에서 페미니즘은 실시간 인기 해시태그이자 자기 홍보 수단이 되고, 다수를 해방시키기보다는 소수의 지위를 올리는 데 쓰인다. - P47

‘망설임 없이 뛰어들라‘는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내려놓는kick-back‘ 페미니즘이다. 우리는 유리 천장을 부수고, 그래서 대다수가 바닥에 쏟아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게끔 만드는 일에 관심이 없다. 전망 좋은 사무실을 차지한 여성 CEO 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게 아니라 CEO와 전망 좋은 사무실이란 것을 없애 버리길 원한다. - P48

가족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적 해방이라 통하는 것들은 종종 자본주의적 가치를 재활용한다. ‘훅 없hook-up‘과 온라인 데이팅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이성애 문화는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소유own‘하게 하지만 남성에 의해 정의된 기준으로 외모를 평가하게 만드는 것은 여전하다. 신자유주의 담론은 ‘자기 소유권self-ownership‘을 촉구하는 한편, 남성의 성적 이기주의를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적인 세태로 허가하면서 여성이 남성을 즐겁게 해 주도록 압력을 가한다. - P114

마르크스의 [자본론Capital]을 읽은 독자는 착취를, 자본이 생산 시점에 임금 노동자에게 가하는 불의를 안다. 그런 환경에서 노동자들은 생활비를 겨우 감당할 정도의 임금을 받도록 되어 있지만, 실상 더 많이 생산한다. 요악하면 상관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가족, 사회 기반 시설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도록 요구하며, 우리가 생산한 잉여를 소유주와 주주를 위한 이윤의 형태로 도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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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2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읽기도 쓰기도 쓱싹쓱싹!! 놀라운 속도입니다!!

2020-04-28 0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8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8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8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머큐리 2020-04-2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려고 대기 중인 책인데... 다락방님이 먼저 읽으셨구나....ㅎㅎ

다락방 2020-04-28 15:21   좋아요 0 | URL
저같은 노안을 위해 아주 큰 글자로 나온 책입니다, 머큐리님. ㅎㅎ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창비세계문학 6
딩링 지음, 김미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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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책들이 있지만 제목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책들도 있다. '딩링'의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후자에 해당한다. 나는 이 책의 작가인 딩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읽겠지 하고 준비해뒀던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들었을 때는, 대체 안개마을에 있을 때 뭐가 어떻게 됐다는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 안개마을에서 안개라니, 은둔하기 좋아 쓴걸까, 그 마을에서 사랑을 한걸까, 그 마을에서 혁명을 한걸까.


표제와 같은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중국인 여성 위안부 '전전'이 등장한다. 그리고 위안부 전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당연한 편견도.


오래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여옥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자고 있는 집으로 마을 남자가 침입한다. 그리고는 '어차피 너는 버려진 몸'이라며 강간을 시도한다. 그러니까 이 정서.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졌거나 성폭행을 당했던 여자에 대한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이 정서가,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에도 드러난다. 이 소설의 화자는 휴양차 안개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일 년전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 전전을 만나게 되는데, 전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위안부로 끌려가게 됐고 또 그렇게 중국 공산당의 첩자가 되기도 하는데, 나라는 그녀를 이용했고 마을 사람들은 남녀할것 없이 그녀에 대해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뻔뻔하게 낯짝을 들고다니는 여자가 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다른 여성을 깨끗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그녀는 그렇게나 부당하게 가족들의 수치가 되었다. 우리가 진작 결혼했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었을텐데, 지금이라도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전전의 남자동창 '샤다바오'는 그녀를 구해주려고 하는 착하고 의로운 남자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끌려가고 강간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드는 이도 남자이고 그런 여자를 구원해주고자 하는 것도 남자인 셈. 여자의 인생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더렵혀지고 혹은 구원되어 지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숱한 영화와 책속에서 드러나는 바다. 그토록이나 여성을 혐오하던 남자주인공이 자신의 피부병을 지적받자 '이걸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그걸 욕하면 어떡해' 라고 항변하는 영화 《히트》에서도 알 수 있고, '당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일로 평가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니까' 당신을 돕겠다고 말하는 형사가 등장하는 책 《스틸하우스 레이크》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걸 안다고 해서 자신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가 끌려간 것이 자명한 사실이고 지금 나라로부터 이용당하고 있는 것 역시 자명한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구경하고' 또 '혐오한다'.


책 속의 화자는 이 마을에 처음 올 때 자신과는 다른 정치사상을 가진 여자와 함께였다. 그것은 딱히 즐거울 리 없는 동행이었지만, 그러나 전전의 삶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그들에게 공통된 감각이다. 전전의 삶은 전전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흘러갔고 그것이 부당하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 통제하지 못하는 여성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안타까운 감각은, 동시대를 살고 있던 다른 환경의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각인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 고통 앞에 통곡을 하는 여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리고 통제하지 못한 삶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는다고 해서 전전이 무너지기를 선택하지도 않고, 남자에게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아픈 몸이 낫기를 원하고 그리고 나름의 살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사방에서 자신을 공격해오는데도 끝까지 버티려는 의지가 전전에게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가고자 하는 길에서 그녀는 그녀의 동지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화자는, 그녀의 동지가 되어주길 자처할 것이다.



이렇게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여성은 그 다음 단편인 <병원에서> 에서도 등장한다. '루핑'은 산부인과 의사 공부를 했지만 자신에게 의사일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치대학에 들어가 정치공작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그렇게 공산당원이 되지만, 당에서는 그녀를 이제 막 개척하고 있는 병원의 의사로 보내버린다. 이 역시 그녀의 의지도, 의사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하기 싫은 일을 하러 갔는데, 그 병원의 상태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의사로 일하고 있고 온갖 기구들은 소독되지 않은 상황이며 그 누구도 청소를 하지 않아 더럽기만 하다. 일단 환자들을 낫게 하고 건강한 출산을 하게 하려면 환경부터 바꿔야 하기에 열성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보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나 그녀의 열성적 태도로 환경이 바뀌기는 커녕, 사람들은 그녀를 음해하려고 한다. 이에 그녀는 처음의 의지를 잃게 되지만, 며칠 풀죽어 있다가 다시 의지를 다진다. 그녀는 삶의 매순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고난 속에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세번째 단편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는 소년병이 주인공인데, 내전중인 자국의 군인에게 발견되어 총살 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총알 하나를 남겨두는 게 좋겠소. 남겨두었다가 일본 놈과 싸우시오! 나를 칼로 죽이고!" (p.97)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군인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고작 열세살의 소년이 자신이 죽을 위기 앞에 공통의 적인 일본을 죽이는데 총알을 쓰라고 말할 수 있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네번째 단편 <두완샹>은 읽으면서 가장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계모에게 학대받아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하다가 열세살에 시집을 가는 두완샹이, 그곳에서도 다른 며느리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미친듯이 열심히 일하는 거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 세계의 전부인줄 알며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이 대가족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수고를 했다' (p.106)

그런 그녀의 마을에 해방군이 들어와 토지개혁을 하겠다고 하고, 그녀는 토지개혁 업무중인 중년의 부인과 매일밤 이야기를 나누며 지금 가족과 마을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넓은 세상에 헌신하고자 하는데,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과 이런 생각이 일치해 좋은 동지가 된다. 이 부부는 며칠간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는 개척지로 거주지를 옮겨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데, 그곳에서도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우 성실히 일하고 꼿꼿한 정신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그녀가 모범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인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오랜 진심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배움이 짧았지만 스스로 깨우쳐 다른 사람들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면서 이 소설은 끝나는데, 이 모든 삶의 굴곡에서 그녀에게 성장이 있었고 또 깨닫는 바가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게 되지만, 이 단편 내내 '두완샹에게 삶의 기쁨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열심히 일하는 것, 모두에게 이로운 것, 그것이 그저 그녀 삶의 기쁨의 전부란 말인가. 왜 어릴 때부터 고생을 하고 또 하고 쉬지 않는 것이 궁극의 선이 된것일까.




이 책에는 이렇게 총 네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모든 단편들에서 중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핍박받고 고생이란 고생을 다하고 또 죽음의 위기 앞에 놓이는데도 결코 그들은 좌절속으로 혹은 절망속으로 끌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두 눈 가득 으르렁 거리는 불꽃을 품고 세상을 보는 의지가 단단히 새겨질 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 대단하다, 그들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후의 결론은 될 수 없다. 그 삶이 핍박이었던 것, 고통이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이 언제든 나라는 사람을 후려칠 수 있지만, 이토록이나 심하게 후려치는 것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시스템이 한 개인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으게 만들고 그렇게 방전되게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 의지를 다지는 것은 시스템의 도움이 아니라 나 개인의 몫이라니. 이 얼마나 피곤하고 한심한 일인가. 이들 모두가 후려치는 삶 앞에 꺾이지 않고 살려는 의지, 한 발 앞으로 어떻게든 나아가려는 의지는 분명 높이살만한 것이지만, 오히려 나는 그간 내 생각과 다르게 삶에 있어서 때로는 도망치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어디로? 그건 모르겠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방송을 보노라면, 도시에서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자연으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괴롭히는 건 사회적 시스템이기도 하고, 자신을 찾아온 병이기도 하고, 자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그저 물과 나무가 있는 자연으로 숨어드는 것은 그들이 생각해낸 그들이 남은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딩링' 의 소설속 단편들은 이미 드넓은 땅 안에 있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 넓고도 넓은 땅에서, 게다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나를 괴롭히는 게 이 나라 전체를 둘러싼 어떤 사상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숨어들것인가. 정작 휴양을 위해 찾아간 안개마을에서도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나를 숨길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내 눈에 이글거리는 독기를 품는 것 말고는 남은 방법이 없는 것일까.



사는 일은 이토록이나 고되다. 어쩔 수 없이 강함을 내 안에 욱여넣어야 비로소 버텨지기도 하는 것이다. 맞서려고 하는 강인한 자들 앞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삶의 고됨을 느낀다. 고되고 고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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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moon 2020-04-2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으려고 했는데 잊어버린 책; 다락방 님 덕분에 떠올라 보관함에 담아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20-04-23 12:20   좋아요 0 | URL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라 당황했는데, 중국에서 이런 글을 썼던 작가가 있었구나, 반가웠어요.
:)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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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예전만큼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즐거웠다. 38년간 꾸준히 글을 써온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듣는다는 건, 언제까지고 읽고 쓰는걸 계속하고 싶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하루키의 의도가 독자에게 어떻게 전해졌다한들, 하루키 본인은 '결국은 선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어쨌든 '계속 살아나가자'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고, 선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물론 선하다는 것은 각자의 판단 기준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선함이 너의 선함이나 모두의 선함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한들 모두를 오래 속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얘기한다. 


또한 문체와 문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하루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장을 예로 들어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문장을 쓰고자 계속 노력한다는데, 나 역시 글에 있어서 문장과 문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바, 크게 동의하며 읽었다. 아울러, 하루키가 늘상 인지하고 가는것처럼, 나 역시 챈들러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는 문장을 계속 저기 안쪽에 넣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용은 누가 쓰든 크게 달라질 바 없지만, 문체가 그 책이 더 재미있는 책이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는 하루키의 말은 틀리지 않다.


하루키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글을 쓰고 달리기 역시 꼬박꼬박 하는 것은, 하루키의 팬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하루키는 일기를 쓰지는 않지만 그런 매일의 기록을 숫자로 남기는 것은 끊임없이 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오늘 달리기를 얼마나 했는지의 수치에 관한 기록.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하루키의 신념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소설에 대해서는 근면한 편'이라고 하는데, 소설가가 소설에 대해 근면한 편이라는 것은 얼마나 마땅하며 근사한가. 이런 하루키의 생각을 읽는 것이 이 책의 기쁨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하루키의 영향을 어느 부분 받았거나 받게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건 하루키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나의 성향 탓이겠지만, 매일매일 꼬박꼬박 글을 쓰고 읽고 앞으로도 계속 그걸 놓지않으려는 자세라고 해야할까. 그런 삶의 태도들. 그건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나 역시 하루키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아는만큼, 어떻게든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지금은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고작 이정도 뿐이지만, 나는 나중에도 일정시간을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에 내어주고 싶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니까. 이를테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하루를 온전히 내게 쓸 시간이 지금보다 더 늘어났을때, 과연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더이상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을 때, 그럴 때에도 나는 하루중 어느만큼의 시간을 뚝 떼어내 글을 쓰는데 들이고 싶다. 내가 혼자 산다면 혼자 사는대로, 혹은 동거인이 있다면 있는대로, 그 동거인이 단순히 한 공간을 함께 이용하는 동거인이라거나, 아니면 나랑 함께 한침대에서 잠드는 이라해도, 그 성별이 남자이든 여자든 그러니까 어떤 형태로 존재한다고 해도, 내가 글을 쓰는 공간으로 들어가 어느정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내 동거인도 너무나 당연한듯이 받아들여주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쓰는 방이 있어야 할 것이고, 따로 쓰는 방도 있어야 할터이니, 큰 집에 살아야 한다. 역시 돈을 벌어야........ 돈이 최고되는 것이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와카미 미에코'가 인터뷰한 기록이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들어본 책, 《젖과 알》의 작가이다. 《젖과 알》은 출간 당시 독특한 문체로 유명했다 하고 하루키 역시도 그 문체를 극찬하는데, 정작 가와카미 미에코는 그렇게 쓰지 않기로 했다한다.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자'작가이기 때문에 문체만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는 것. 인터뷰중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던데, 페미니즘을 알고 있는 여성 작가가 인터뷰어가 되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언젠가 한번은 꼭 거쳐야 하는 게 아니었나 생각하던 바, 즐거이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고대하던 질문 역시 나온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하루키를 인터뷰 하기 위해 그의 책들을 한 번 더 읽기도 하고,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데아'를 파악하기 위해 플라톤을 읽기도 하며,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해 인터뷰에 임한다. 정말이지 성실한 인터뷰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하루키에 대한 선망을 가진 터라 또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난 거라 하루키에 대해 등을 질 순 없는 자세를 베이스에 두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네 작품에서 여성들은 보조적이다, 왜 그렇게 그리느냐'라고 묻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지점이었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자신의 친구들도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그 점에 의문을 품었다 했고, 나 역시 여성을-특히나 소녀를-그런 식으로 다루는가에 대해 불만이 있던 터다.


하루키의 대답은 이 부분에서 실망스러웠다. 자신은 딱히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 자기는 남자든 여자든 그런것에 크게 개의치 않고 쓴다는 거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하루키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말은 그에게 진실이겠고 또 진심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구나, 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냥 관심이 없어. 가와카미 미에코가 자신이 여자 작가이기 때문에 받는 부당함에 대해 토로하지만 하루키는 '그런가요?' 정도로 응시하는거다. 아 그래? 그렇구나, 그건 그대로 힘들겠구나, 하고 넘어간달까. 이 인터뷰를 하던 당시에 하루키의 나이는 68세였고 1949년생이다. 그래, 49년에 태어난 일본 남자에게 뭐 크게 여성문제에 대해 기대할게 있을까, 앞으로 딱히 바뀌는 것도 없겠지, 하게 되지만, 그래도 이 긴 인터뷰를 거치며 여성작가로부터 그런 생각, 그런 말을 들었으니, 그래도 아예 듣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래해왔다는 것은 반드시 선은 아니겠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글을 써오면서 굳은 독자층을 형성했다는 것은, 그의 이야기가 어느 지점에서 신뢰를 주고 있다는 뜻일테다. 하루키가 지향하는 그 결국은 선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도 알아챈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의 유머가 좋아서 그의 책을 읽곤 했지만, 돌이켜보건대, 그의 이야기가 악하거나 한심했다면 진작에 내치지 않았을까.


하루키는 이야기에 힘이 있다고 믿고, 이야기가 오래 버텨온만큼 앞으로도 이야기가 오래 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이야기가 아닌가. 각자가 근면한 지점이 모두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운동에, 누군가는 산책에, 누군가는 공부에 근면할 수 있을 것인데, 하루키는 소설에 있어서 자신이 근면하다 했다. 아, 달리기에 있어서도 그렇지. 소설에 대해 근면한 편이라고 말하는 하루키를 보면서 나는 나 역시 읽고 쓰는 일에 매우 근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봐, 얼마나 꾸준히 읽고 쓰고 있는가. 나 자체가 딱히 근면한 사람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아니겠지만(물론 게으른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읽고 쓰기에 있어서는 근면함을 발휘한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읽고 쓰고 있다. 게다가 굳이 덧붙이자면, 나는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다. 어느 한 사람을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에 대해서도 쉽게 포기하지도 돌아서지도 않는 것 같다. 사랑을 꾸준히, 성실히, 근면하게 하는 편이다.



나 역시 그동안 보잘것 없는 많은 글들을 써오면서 그 안에 선함을, 그리고 옳은 방향을 담아내고자 했었다. 그 길이 맞다는 확신이 조금 더 들게하는 좋은 책읽기였다. 이 책을 읽고 하루키가 더 좋아진 건 아니지만, 38년이나 글을 써온 소설가의 글에 대한 생각을 읽는 것은 매우 좋은 책읽기가 틀림없다. 앞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나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다.




덧.

이들은 총 네 번에 걸쳐 인터뷰를 하고 그 때마다 장소를 이동하는데,  '신초샤 클럽'에서 두번째 인터뷰를 했다며 네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동안


'간식으로 나는 초콜릿, 무라카미 씨는 도넛 반 개를, 저녁으로는 모두 함께 가락국수를 먹었다' (p.77)


고 한다. 나는.... 너무 놀랐다. 간식으로... 초콜릿... 고작 그것을......아니 게다가 하루키는 뭐여...도넛 반 개라니.. 장난하나. 도넛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반 개를 간식으로 먹다니.. 도넛이 지름 30센치는 되는 거였을까. 대체 도넛 반 개를 뭐하러 먹지? 너무 이해 안되는 부분인 것이다. 사실 사람들 다 간식..도넛 반 개로 끝내는건가요? 간식은 햄버거나 샌드위치, 치킨 두 조각... 정도 되야 하는거 아닌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지나치게 적은 간식, 게다가 저 가벼운(!) 저녁은 또 뭐람?


엊그제도 퇴근길에 혼자 순댓국 시켜 소주 마신 사람으로서,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네. 일단 씁니다. 만약 친구가 와주지 않더라도 와줄법한 환경을 만들어둬야죠. 저쪽에 방석도 좀 깔아놓고, 청소도 하고, 책상도 닦고, 차도 내려두고.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그런 ‘밑준비‘라도 해두는 겁니다. 아무도 안 오니까 오늘은 실컷 낮잠이나 자볼까, 이러지는 않아요. 전 소설에 대해서는 근면한 편이라서요. - P82

링컨이 말했듯이, 아주 많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도 있고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속이기는 불가능해요. 그것이 이야기의 기본 원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P106

글쎄요. 꼭 해피엔드여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제 소설에는 해피엔드가 별로 없지 않나요. 『양을 쫓는 모험』도 왠지 쓸쓸하게 끝나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드랜드』의 주인공은 결국 그 세계에 남잖아요. 그림자와 헤어져서 혼자. 결코 해피하게 끝나지 않죠. 그래도 역시,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리라는 일종의 신뢰감 같은 것이 독자의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살아남는 것, 혹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그건 이야기의 아주 중요한 요소죠. 적어도 어느 정도 길이가 있는 픽션에는. - P178

제 생각에, 한 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으며 찬찬히 곱씹죠.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요. - P197

다시 말해 여성 캐릭터가 성적인 역할만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야기, 남성, 우물 등을 그릴 때는 그렇게 아낌없이 발휘되던 상상력이 ‘여자와의 관계‘에서는 발휘되지 않아요. 여자가 여자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죠. 주인공이든 조역이든 이른바 주체성을 지니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전개도 얼마든지 가능할 텐데, 늘 남자 주인공의 희생양처럼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무라카미 씨 소설에서 여성 캐릭터는 왜 그런 역할이 많은가 하는 거죠. (가와카미 미에코) - P257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저는 어떤 등장인물에 대해서든 그리 깊이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그 인물이 어떤 세계에 관계되었는가, 요컨대 그 인터페이스(접면)가 주된 문제지, 존재 자체의 의미나 무게, 방향성 등은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묘사하지 않으려 주의하는 편이에요. 앞서 말했듯이 자아에 대해서는 되도록 다루지 않으려 합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 P257

결국 말이죠. 소설에 직접적인 형태로 써넣으면 동기가 어쨌건 사건을 겪은 사람들을 소설적으로 이용하는 셈입니다. 가슴 아픈 일을 당한 사람들을 픽션의 형태로 이용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큰 사건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마찬가지고요. - P348

인류 역사에서 이야기의 계보가 끊긴 적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단 한 번도요. 레이 브래드버리 원작,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화씨 451>이라는 영화가 있죠. 아무리 책을 불태워도, 작가를 죽이고 묻어도, 책을 읽는 이들을 모조리 감옥에 보내도, 교육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은 깊이 숲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것이 좋은 이야기이기만 하다면. - P352

설령 종이가 없어도 인간은 이야기를 이어갈 것입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역사라고 해봐야 아직 십 년도 되지 않았잖아요. - P352

그에 비해 이야기는 적어도 사만 년, 오만 년은 이어져 왔는걸요. 축적의 정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히 죽지 않아요.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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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2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전 예전에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하루키는 남자 주인공은 분명 의도를 갖고 쓰는 거 같은데....(본인 로망 실현 ㅋㅋㅋㅋ) 여성 캐릭터는 그렇단 말이죠? 흠....
딱히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꾸준히 쓰고 늘 달리는 것만큼은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거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ㅎㅎ

그나저나 저렇게 소주 한 병 주문하면 몇 잔이나 마셔요? 설마 한 병 다???

다락방 2020-04-22 10:44   좋아요 0 | URL
여성인권엔 딱히 관심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지만 1949년생 일본 남자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싶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꾸준히 쓰고 달리고 또 이야기의 힘을 믿는 것, 선한 의도를 담고자 하는 것들은 참 좋았어요. 괜히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구나 싶고요.
잠깐 멈춰서, 가만, 내가 읽고 쓰는 건 어떠한가, 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좋은 책읽기 였어요.


저렇게 소주 한 병 시키면 보통 반병이나 그보다 조금 더 마셔요. 혼자 식당가서 시켜서 한 병 다 마신 적은 없어요. 집에서는 혼자 마셔도 한 병 다마시곤 하는데 밖에서는 한 병 다는 안마셔요. 엊그제는 소주 석잔쯤 남기고 온 것 같아요. 다 마시고 싶었는데 참았네요. ㅋㅋㅋㅋㅋ

감은빛 2020-04-2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방금 북플 앱으로 길게 댓글 남겼는데, 자꾸 옆의 다른 자판이 눌러지는 불편한 폰 자판으로 힘들게 남겼는데, 등록 버튼을 누른 다음 순간 갑자기 북플 앱에서 로그아웃되면서 제가 남긴 댓글이 없어진 것 같네요. 분명 저는 댓글만 썼을 뿐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 이런 버그는 왜 생기는 건지 따지고 싶네요.

암튼 퇴근길 순대국에 소주,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요새 계속 칼바람이 불어 따뜻한 국물에 소주 한 잔이 땡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새벽에 순대국( 수육)에 소주 마셨어요. 시간 차이는 있지만 같은 음식을 먹었군요. ㅎㅎ

하루키가 숫자를 기록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저도 따라해보고 싶네요. 지금 저는 습관 기록앱에 매일 그 활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만 체크하고 있어요.

독서, 글쓰기, 달리기, 맨몸운동, 케틀벨운동, 바벨운동 등으로 큰 틀에서 분류해 간편하게 기록하고 확인할 수 있는 건 좋지만, 나중에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단점이네요.

요걸 어떻게 기록하면 좋을지 고민해봐야 겠어요. 간편하게 꾸준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어요.

다락방 2020-04-23 12:00   좋아요 0 | URL
북플 앱으로 긴 댓글을 시도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저는 북플앱에 들어가 스맛폰에서 댓글 남기는 거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앱으로 들어가면 댓글을 잘 안남기게 돼요. 넘나 아날로그 세대인 것입니다. ㅋㅋㅋㅋㅋ

감은빛 님 운동 열심히 하시니까 하루키처럼 기록하시는 거 되게 좋을 것 같아요! 뭔가 스스로 성취감도 느껴질 것이고 또 나중에 어떻게 변화가 있었는지도 수치상으로 파악 가능하니까요. 도전 응원합니다!!

jeeinn 2020-04-27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말고) 에세이를 좋아하는 데, 이 인터뷰집은 계속 읽을까 말까 했어요.. 님의 평을 보고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하루키의 성실함은 이상하게 위안을 주는 거 같아요. 물론 재능도 있겠지만 성실함.이란 단어는 재능보다 성실.에 조금 더 무게를 주어, 성실하기만 하다면 나도! 라는 생각이 들게 하거든요. 자기 위안 일수도 있겠지만요. 어쨋든 서평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0-04-27 09:42   좋아요 0 | URL
저는 하루키의 소설도 참 좋아했어요. 하루키 특유의 유머가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열심히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 왔습니다. 이 인터뷰집은 저도 사놓고 안읽다가 최근에 읽었는데,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실함에 대해서라면 저 역시 높게 사는바, 그리고 그건 내가 따라할 수 있잖아, 하는 생각도 들어서, 꾸준히 성실히 글 쓰고 조깅하는 하루키를 만나는 것이 저에게도 위안이 됩니다. 특히나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인터뷰집을 읽는게 매우 도움이 될것 같아요. 즐거운 독서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