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처음에도 얘기했듯이, 혼자 감정노동하고 자폭한 것처럼 느껴지는 자기혐오감의 문제는 어차피 표현의 타이밍과 수위와 방식이 적절하게 조절되기까지(뭐 조절이 된다면 분노도 아닐 테지만) 거쳐가야 하는 과정. 더욱이 이 갈등관계를 감당하든 극복하든 마감하든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하는 그 ‘훗배앓이’의 무게감이란 원래가 그만큼 힘이 든 겁니다. 그간 비굴하게 웃는 낯으로 대응하며 참아온 것이 고통이라 생각하겠지만 한편으로는 피곤해질 갈등관계를 피하기 위한 자기보호 기제가 작용한 거였다는 거죠. 충돌 당시의 화끈한 긴장감만으로 끝날 게 아니라 그 후에도 가령 반론 먹고, 복수당하고 어쩌면 격한 소통을 통한 극적인 화해 등 참으로 스트레스 받으며 풀어야 할 후속조처 인간관계가 원래 남아 있다는 것이니까요. 이러나저러나 인간관계 ‘뒷감당’ 문제는 절대적인 시간경과를 필요로 하는 거랍니다. 쿨하게 물러난 그 아이는 나한테 어떻게 다시 나올 것이냐, 두근두근두근, 내 마음의 연평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화를 내든, 울부짖든, 얘기하기 잘한 겁니다. 어쩌면 상대는 순순히 바로 사과를 할 수도 있고요, 당장은 서로 화내더라도 나중에 웃으면서 서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과거에 상처받은 것 때문에 내 상상력이 불안감을 더 키우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막상 사람하고 대놓고 부딪히고 싸우는 게 의외로 논리적이고 깔끔할 수도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나저나 지금 이 얘기를 해버리면 상대를 상처 입히고 또 그것이 나한테 실질적으로 안 좋게 작용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을 해버릴 때, 솔직히 그 ‘나를 놔버리는’ 기분이 약간 짜릿하지 않았나요? (한겨레/ 임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