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감시 권력인가 정치적 무기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1
조지형 지음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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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2004년 3월에 있었던 대통령 탄핵 사건을 즈음하여 쓰여졌습니다. 한국 헌법이 미국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해, 미국의 대통령 탄핵 사건들을 소개하며 탄핵의 의미와 절차상의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닉슨, 존슨까지 모두 3명의 대통령이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클린턴은 소추되었으나 부결, 존슨은 소추 자체의 부결, 닉슨은 소추되기 직전에 사임을 했기 때문에, 탄핵이 결정된 사례는 없는 셈입니다.

- 탄핵 역시도 형사법과 같이, 탄핵안의 상정, 조사, 고발, 재판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탄핵안 상정이 '고소 고발'에 해당한다면, 상정된 안이 객관적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정식적으로 고발하는 과정은 '기소'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탄핵에서는 이것을 '소추'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추된 탄핵안은 재판을 거쳐 탄핵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죠.

- 탄핵 절차에서 미국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두가지로 보여집니다. 소추된 탄핵안에 대한 재판권과 탄핵 사유에 대한 규정이 그것입니다. 탄핵안에 대한 재판권에 있어서, 미국은 상원의회가 한국은 헌법재판소가 권한을 가지고 있고, 탄핵의 사유에 대해서는, 미국은 반역행위 뇌물수수 등과 같은 구체적 항목이 규정된 반면, 한국은 '직무 집행에 있어서 헌법과 법률을 위배한 경우'라고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소추의 권한이 국회에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 저자가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과 같이, 탄핵이란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권력이자 감시권력이면서, 동시에 정당정치에서 다수당의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겠죠. 입법부와 행정부의 상호견제를 위한 제도적 절차에 주목하는 것 보다는, 두 권력 자체의 민주적인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 '탄핵 반대 운동에 참여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도 있었습니다.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지만 우익들의 정치공세를 방어하기 위해서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과, 원칙적으로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대립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시기에 여당 우익 후보들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는 야당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지'와 원칙적으로 독자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독자후보' 논쟁과 비슷합니다.

- 짧은 생각이지만, 저는 후자의 입장을 옹호하고 싶습니다. 운동가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세력화가 아닌 '정치'세력화에 있다면, 자신의 정치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에서 정치활동을 해야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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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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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대통령을 거치며 18년간 공식 비공식적인 최고권력자의 지위를 구가했던 박정희. 그는 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로서의 비판과 경제 발전을 이룩한 경제대통령으로서의 환호를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 일정정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구현된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박정희는 잊혀져가고 있지만, 시도때도 없이 위기에 처하는 한국경제는 '경제대통령' 박정희를 어김없이 등장시킵니다.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다시 한번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이 등장해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 저자는 경제정책을 포함해 집권시절 박정희의 정책을 분석하여, 다시 한번 그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근대주의'와 달리, '반동(reaction)'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북의 군대가 남의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는 것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반동'이란 "원래는 역학상의 용어로 동()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사회현상에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진보’에 대한 반작용을 의미하는 ‘정치적 반동’이라는 말로 사용된다." 라고 쓰여있습니다. 진보의 반작용인 '반동'은, 무엇을 진보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단어인 것이죠. 결국, "박정희는 반동적인가"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박정희를 반동적이라 규정하고 있는) 저자의 진보가 무엇인가?"가 될 것이며, "(이 책을 읽고있는) 나의 진보는 무엇인가?"가 될 것입니다.

- 진보에 대한 최소공약수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더 나은 삶의 질'일 것입니다. 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정정도 구현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진보는 유효하며,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가 여전히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절차적 민주주의 만으로 구현하지 못한 '더 나은 삶의 질'은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루어 낼 수 있는가"가 오늘날 진보의 화두가 될 것입니다.많은 이들은 '경제발전'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치세력들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주문은 진보에 대한 열망입니다.

- 저는 '박정희 평가의 모순'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사고, '민주주의는 후퇴시켰지만 경제는 발전시켰다'는 평가는, 오늘날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으니 경제발전만 남았다'는 사고와 같습니다. 저는 이 두가지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516 군사쿠데타 이전의 민주당 정권에게도, 박정희 정권에게도 경제발전의 화두는 '축적'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이야 기업 수준에서도 국가 기간산업 규모의 투자가 가능하지만, 당시에 이런 투자를 위해서는 해외의 원조와 차관, 전국에 흩어져있는 자본을 규합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정권이라도 봉착해야 하는 과제였을 것이고, 차이는 어떤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할 것인가에 있었을 것입니다. 소비에트연방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들은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주도적으로 자본의 동원과 축적이 용이했지만,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있던 한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는 사유재산을 집중하기 위한 절차가 따로 필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폭력이 동원됩니다. 516 군사쿠데타의 명분이 되었던 '민주당 정권의 무능력' 역시 '자본 축적의 무능력'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의 정치폭력이 자본 축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들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정치정화법, 1963년 군정 4년 연장안, 4대 의혹 사건, 1964년 화폐계혁, 1966년 삼선개헌, 1971년 국가비상사태, 1972년 비상계엄령과 유신헌법, 등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행보는 대부분 집권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대 의혹 중 유일하게 자본축적과 연관된 새나라자동차 사건 역시도 자동차 산업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죠.

- 제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자본주의 국가의 초기 자본축적에는 폭력이 수반된다는 보편적 진실입니다. 영미의 자본주의가 식민 지배와 노예 무역을 통해서 자본축적을 이루었다면,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 중국, 북한은 당의 독재를 통해서, 자본주의 한국은 정치폭력을 통해서 자본축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들 사이에는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저는 이점이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박정희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근대주의의 폭력성, 분리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의 정치적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 정치와 경제를 분리할 수만 있다면, 1970년대에 칭송받아야 할 사람은 박정희가 아니라 김일성일지도 모릅니다. 체제 경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던 경제 발전에서의 김일성과 박정희의 차이, 정치폭력을 휘둘렀던 박정희와 김일성의 차이 보다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에서 경쟁적 폭력적으로 자본축적을 해야했던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런지요.

- 신드롬으로까지 추켜세워진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의 반영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박정희 신드롬을 바라보고 있을 과거 민주화 운동가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들의 용기와 신념, 열정을 저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박정희 신드롬 자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도 끔찍한 정치적 폭력으로 점철된 70년대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 집권세력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희미하게 려줄 뿐입니다. 우리가 박정희 신드롬으로 부터 진정으로 깨우쳐야 할 점은,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어 낼 대안세력의 형성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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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 - 박근혜 53년 인생 이야기
천영식 지음 / 북포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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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산적인 얘기를 주고받자면, 정치인 박근혜를 '박정희의 딸' 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접근방식은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박근혜의 정치행적 속에서 박정희를 발견하는 방식이죠.

굳이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녀가 현실정치에 개입하고 있는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박정희의 딸' 이라는 수식어는, 당대표까지 역임한 주요 정치인 중의 한명이면서도, 별다른 정치적 이슈를 만들고 있지 못한 그녀의 책임인지도 모릅니다. (04년 415 총선에서 대중동원력을 과시했다든지, 선거 유세 도중 커터칼로 피습을 당해 병원신세를 졌다든지 하는 것들은 정치적 이슈에는 못미치는 사건들입니다.)
그녀의 정치적 경력과 내용의 모순이,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런 모순은 백수에게도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300여쪽이 넘는 그녀의 일화를 읽으면서도, 그녀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목표를 묻는 질문에 '나라사랑' 이라고 대답했다는 내용 아닌 내용을 둘째 치자면, "세력과 돈, 충성파로 포진했던 20세기 정치에 대한 거부" 내지 "고성장 경제정책, 안보동맹의 강화, 하향평준화를 막는 교육정책의 도입, 작은정부론" 정도가 고작이니, 이거 너무 싱겁다는겁니다. 이런 정도의 거대담론이라면, 그녀의 당적 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으니까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면, 한나라당 내에서 당내 분파를 형성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나, '약간 샌님 스타일에다 이지적이고 개혁 지향적인 소장 그룹' 이라는 정치적 인맥에 대한 것, 등 좀 더 세세한 분석도 있습니다만, 올해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지켜보건데 꽤나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나 싶구요. 이런 점은 올해 말 부터 내년에 이르는 대선국면에서 좀 더 확연해 질 것 같습니다.

'박풍' 이라니, 연예계 에이전시 산업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흔히들 '3김 시대' 와 함께 인물 중심의 정치가 막을 내렸다고 말하지만, 인물이 중심인 것은 여전하되 인물이 형성되는 방식만 변화하는 것이죠. 과거의 인물이 그 개인의 정치적 행적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면, 현재의 인물은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미니홈피나 16개에 달하는 인터넷 팬클럽(?)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죠.

형식만을 본다면, 문화가 개인의 영역을 넘어 집단의 영역에서 창조되고, 다시 개인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에이전시 산업일겁니다. 정치 역시, 정당이라는 집단의 영역에서 창조되고 그것이 정권 내지 대통령이라는 개인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라면, 그 또한 한국 정치의 진일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형식을 넘어 내용까지 닮아가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에 의해 내세워진 박근혜라는 정치인이 한나라당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앞세우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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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7색 - 일곱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곱 개의 세상
지승호 지음 / 북라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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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년쯤 되었을겁니다. 중국에 대한 책을 모아서 읽었는데, 무척 눈에 띄는 책이 있었습니다.
<저 낮은 중국> (퍼슨웹) 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당시 숱하게 쏟아지던 중국 관련 서적들과 이 책과의 차별성은 바로 '현장감'이었죠. 이전에 수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쉬이 느끼지 못했던 갈증이었기 때문에, 반가움이 컸습니다.
현장감의 비결은 인터뷰라는 형식에 있었는데요,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집필하는 방식이 아니라, 17명의 각 계층의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묶어놓은 것이었죠.

저는 이때부터 인터뷰에 관심을 갖게됩니다. 그리고, '퍼슨웹' 출판사가 인터뷰를 전문으로 하는 커뮤니티에서 출발했다는 것도 알게되었고, 인터뷰만을 전문으로 하는 코너를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7인 7색>은 인터뷰라는 형식만으로 충분히 흥미를 끌었던거죠. 저자인 지승호씨는 익히 알려진 인터뷰 전문 기자라고 합니다. 웹진 데일리 서프라이즈에서 '지승호의 인터뷰정치'라는 코너를 운영하셨었고, 몇권의 책을 쓰셨더군요.

<7인 7색>의 최소공약수는 소위 '진보적'이라고 불리우는 정치인 지식인들 - 박노자, 유시민, 김규항, 진중권, 이우일, 하종강, 노회찬 - 입니다.
제목에서는 마치 7가지의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승호씨가 바라보는 그들 사이에는 최소한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인터뷰 내용에서 인터뷰이(interviewee) 서로에 대한 생각을 묻는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지승호씨가 이들을 '화해시키려한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저도 대략 동감합니다.

아쉬운 점은, 인터뷰 특유의 현장감이나 기획성은 다소 떨어진다는 것인데요,
인터뷰이 개개인이 내면의 삶을 넘어 (익히 알려진) 외면화된 활동을 가지고 있는, 소위 '유명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지승호씨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인터뷰 내용은 인터뷰어의 기획보다는, 인터뷰이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질문 중에는 인터뷰이가 이전에 썼던 글이나 활동에 대한 자료를 근거로 한 것들도 있으니까요.

인터뷰이에게 편향적인 인터뷰는, 이미 인터뷰이들의 활동을 잘 알고있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을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 훨씬 많이 있지만요.

# 박노자

국제정세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룹니다. 오세철 교수가 말했듯이,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무정부주의나 아나키즘을 찾기 어려운데요, 사실 이 둘은 사회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국가관을 거부한다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다르지만,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이죠. 아나키스트임을 표방하는 박노자 선생은 7인의 인터뷰이 중에서 가장 (현 체제로부터) 열린 자세로 국제정세를 얘기합니다.
그는 앞으로 미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패권 싸움을 가열화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그리고, 극단의 무력대립은, 단기적으로는 사회억압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전쟁의 자기파괴적인 특성으로 인해 혁명적인 전망을 열어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전 이후의 소련, 베트남 패전 이후의 미국처럼 말이죠.

그 외에도, 한국경제와 부동산, 군대문제, 민족주의, 육아, 교수의 귀족화, 등에 대해서도 발언합니다.
"어느 자본주의 국가든 성장기가 끝나면 계급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는 표현이 인상 깊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부의 대물림' 인데요, 70년대 조성된 중산층의 분화, 사회 양극화가 굳어져서 더 이상 신분상승(?)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죠. 이런 불만들이 자본주의 체제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시대'라는 성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있듯이, 70년대의 경제개발과 오늘날의 경제개발이란 분명히 다른 것이죠. 산업은 더 적은 노동력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고, 이것은 곧 산업의 개발과 일자리 창출의 연결고리가 미약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 배제적인 어떤 경제모델도 지속 불가능하겠죠.

# 이우일

이우일 작가의 만화를 한번도 본 적이 없어 다소 낯설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함께 비루해하기 보다는, <순풍산부인과>를 보면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역사물이나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제 취향은 '현실성'에 있는데요,
별로 유쾌하지 않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기쁨이든 슬픔이든 현실성이 전제되어야 그 감정이 '날것'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날것이 아닌 가짜 감정, 인스턴트 감정인 바에야, 기뻐도 그만 슬퍼도 그만이잖아요.

# 유시민

유시민 의원은 스스로를 이렇게 평합니다.
"나는 온건 진보 혹은 중도 좌파적인 성향의 정치인이다. 경제 정책 분야에서는 다소 보수적이고, 정치 사회 문화 영역에서는 다소 진보적인, 그렇게 결합되어 있는 소셜 리버럴"

그를 비롯한 개혁세력의 정체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뒤에 등장하는 하종강, 김규항씨의 평과 유시민 의원 스스로의 평이 다르지 않아요.
이들 이 말하는 개혁과 국민들이 기대하는 개혁은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중점이 달라요. 전자가 후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전자를 아무리 제대로 한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추상적으로 '경제의 민주화'죠. 나의 의사가 온전히 정치에 반영되는 것이 정치의 민주화이고 정치개혁이라면, 나의 노동이 나의 경제활동이 온전히 나의 무난한 생계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 경제의 민주화입니다.

물론, '경제 정책 분야에서 다소 보수적'이라는 것을 두고 시장만능주의라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재 한국 시장체제에 그의 문제의식을 옅볼 수 있습니다.
하종강 선생은 "어느 구조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느냐가 유익과 해를 결정한다." 고 말했습니다. 유시민 특유의 합리성과 유쾌함도 딱 거기까지만이겠죠.

# 진중권

지식인으로서 자기정립이 매력적입니다. 지식인이 지사인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인데요, 이제 지식인도 엔터테이너(entertainer)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의 변명>에서, 진실과 존재조건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로 지식인을 규정했는데요, 진중권에 따르면 그 존재조건이 변했다는겁니다. 존재조건이란 쉽게 얘기해서 먹고사는 문제인데요,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문제는 시장에 달려있는데, 과거 권력에 대한 폭로가 청와대를 대상으로 했다면 이제는 시장이라는거죠. 생존을 앞에 두고, 지식인의 갈등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다는겁니다.
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그이지만, '진중권 교수' 가 아닌 '진중권' 으로 불리우는 것을 개의치 않는, 그만의 냉정한 자기정립입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균형자로서의 진중권의 모습입니다. 강준만 선생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균형자의 역할을 자임합니다. 개혁세력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수구세력들을 돕지 않으려면 전략적으로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저로서는 좀 생소한 모습이에요. 물론, 그는 민주당 구주류에 대해서 호의적인 입장을 가진 강준만 선생을 비판했지만, 정도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 노회찬

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07년 대선을 두고, 보수 대 진보의 양대 축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과의 경쟁이 막바지에 달할 것이라는거죠.
노회찬 의원의 예측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양대 우파정당간의 극한 경쟁과 더불어 민주노동당의 실력발휘가 필수적이겠죠. 지금까지의 민주노동당은 그 스스로 지적하고 있는 것 처럼, 이미지에 의해서 지지율을 유지해가는 측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정당의 스펙트럼, 그 중에서도 경제 정책에서의 스펙트럼은 주관적으로만 결정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국가 내 산업의 경제적 지불능력이 객관적 요소로 존재하는 것이죠. 유럽의 좌파정당들 역시, 충분한 산업발전의 토대 속에서 성장하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쇠퇴하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민주노동당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성을 당장의 집행가능성으로 풀이한다면, 민주노동당 경제정책의 폭은 굉장히 좁아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현실성을 따지면 정책의 독자성이 떨어지고, 보수 정당들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면 당장의 선거일정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니까요.

"지지나 호감을 얻기 위해서 나의 정체를 숨기거나 왜곡하지 않는다"는 노회찬 의원의 선전을 기대합니다.

# 하종강

진보적 지식인들의 화해를 추구한다던 지승호씨와 부채감을 지고 묵묵히 활동하는 하종강 선생의 각축전(?)이 드러난 인터뷰였습니다.
소위 제도권과 타협했다는 배일도 의원에 대해서 조직운동과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부분과, 조직운동을 할 자신은 없지만 '평생 노무상담이나 하고있다는' 자평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직한 선생의 모습을 응원합니다.

# 김규항

김규항 선생의 블로그를 가끔 들르면서, <고래가 그랬어>의 출간에 대한, 그리고 두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화제로 등장하는군요.
"이미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실제 삶이 연결되지 않는 세대를 상대로 글을 쓰는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는, 아이들의 인권교육에 대한 선생의 고민이 인상적입니다. 타성에 물드는 것을 다시 한번 경계하게 합니다. '조직'이란 좌우와 규모를 구분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그의 고민에는 약간의 갈증도 담겨있습니다. 그간 "개혁은 진보가 아니다" 라며 강준만 진중권을 비롯해 네티즌 다수가 개혁 우파에 힘을 싣고 있는 상황을 역전시키려 노력해왔던거죠.
하지만, 하종강 선생이 말한 것 처럼, 왕도가 없는 것이 대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당장의 지지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장을 견지해야겠죠. 길 잃은 배가 등대의 불빛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등대가 날씨와 상관 없이 불을 밝혀왔기 때문인 것 처럼요.

"전통적인 좌파의 논리 만으로는 부족하기에, 급진성을 유지하면서 미래의 비전을 확보하고 싶다." 는 그의 이후 행보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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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살리기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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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는 총 8장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크게는 조선ㆍ중앙ㆍ동아일보의 잘못된 보도행태를 다루고 있고, 작게는 대통령 노무현과 민주당 내 개혁세력 (오늘날의 열린우리당) 에 대한 쓴소리입니다. 300여쪽에 달하는 본문은 대부분 조중동의 사설과 기사들을 인용하고 반박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조중동에 대한 강준만 선생의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죠. 그 스스로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매개로 해서 강준만이 펼쳤던 싸움이, 근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의 수구 기득권 세력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자신은, 특정 정권을 방어하는 차원이 아니라, 기존 기득권 세력과의 온전한 단절을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이 지적하고 있는 조중동의 숱한 보도행태를 가장 잘 요약하는 표현은 '당파성'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가지 사례들은, 조중동의 당파성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다양한 표현양태인 것이죠. 정치적인 지향과 논조는 필요하지만, 당파성만 너무 앞세워 언론으로서의 기본규범까지 어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선생의 충고입니다.
물론, 선생의 글은 어렵지도 딱딱하지도 않습니다. 선생의 글이 주는 희열이란, 익히 알려져있는 것 처럼, 성실함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인용과 비판문답지 않은 해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통쾌한 선생의 글에는, 함정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련의 책들이 현실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서 역사의 기록이라는 의미에만 머물러도 좋은 건지, 저자는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600만부 이상을 간행하고 있고, 막강한 의제 설정으로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그들의 아성에 대한 토로이고, 전략과 전술을 강조했던 선생이니만큼 그동안의 '글쓰기를 통한 공격전략'에 대한 회의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의지와 별개로, 독자들은 선생의 글을 읽으며,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한걸음 떨어져 자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숱한 저서를 냈고,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셨던 선생의 고백이기에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당파성이란 모든 형태의 의식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특징입니다. (선생이 말하는 '당파성'이란, 마르크스-레닌주의 본연의 당파성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약하자면, 당파성은 글을 통해 공격한다고 해서 약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거죠. 조중동 뿐만 아니라 어떤 세력이라도, 당파성은 곧 존재의 의미일 것입니다. 선생의 주문대로 당파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해체'이거나 혹은 전혀 다른 세력으로의 '변화'를 의미할 것입니다.
소위 "니네 너무 심하니까 좀 살살해라." 라며 조중동의 당파성 약화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지면의 50%를 부동산 광고로 채우는 신문과 절절하게 구독료 인상을 펼치는 신문의 논조는, 크게 볼 때 딱 그만큼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언론의 논조가 수익창출모델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 것을 '펜'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들에 대한 헛된 기대를 거두고 정면 승부를 해야합니다.

정면승부란 조중동을 압도하는 의제설정을 의미할 것입니다. 판매부수로 표현되는 의제설정력이, 단순히 자본의 규모나 잘못된 독점판매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분명 신문의 내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죠. 즉, 비주류 언론 역시 조중동을 대체할 만한 독자적인 의제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불공정한 경쟁구도보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빠진 경쟁이란, 승부가 결정된 경쟁이거나, 결국 그들과 같은 매커니즘으로의 귀결을 의미할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선생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 대한 옹호가 전략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에게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는,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부이기 이전에, 수구 기득권 세력이 사정없이 흔들고 있는 정부라는 것이죠. 양당 구조인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노무현 정부의 몰락은, 곧 수구세력들의 재집권을 의미하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 자칫 "좌우지간 잘못했다." 라며 수구세력들의 비판과 영합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의 전략이 전략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이 직접 말씀하셨듯이, "자기가 잘해서 점수 딸 생각은 않고 남 안되는 것에 편승해 이익 보려는건 부도덕하며 성공하기 어렵다." 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강준만 선생께서 좀 더 정치적으로 구체적인 발언을 하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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