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김하영 지음 / 책벌레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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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요즘 역사서들을 계속 뒤적이고 있습니다. 오랜 친구일 수록 서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성장배경, 즉 개인의 역사를 알고있기 때문이겠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역사를 잘 알고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비트는 것은, 현실에 대한 눈을 멀게하고, 지배자들의 통치를 더욱 쉽게 하죠. 그래서, 한국의 지배자들은 반공의식 주입에 그렇게 열성적이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지배자들의 펜(pen)은 부러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들의 허구적인 반공의식과 위선을 증명해줄 숱한 자료들이 이미 공개되어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부러진 펜을 부여잡고 여전히 통치를 하고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지합니다. 바로, 물량공세 덕분이죠. 이들이 장악한 자본력과 정부, 사법기구, 언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히려, 이들의 자신감이라고 봐야겠죠. 자신들의 물량이라면 어느정도 진실이 폭로된다 하더라도 충분히 무마가 가능하다는 자신감, 자신들의 물량이라면 어느정도 민주니 권리를 보장해주어도 무리가 없다는 자신감입니다. 감출 수 없는 위선과 별개로 그들은 굉장히 영특한 존재들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글쓰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1996년 북한군이 DMZ 무력시위가 김영삼 정부의 사주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는 북풍사건. 북풍사건은 반공논리의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되는 것이었죠. 북풍사건은 그동안 지배자들이 주입해온 역사 속에서는 논리적으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끔찍하게 증오하던 북의 지배자들에게 시위를 사주하다니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북풍사건 이후에도 반공논리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저들의 압도적 물리력 외에도, 우리 스스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지배자들의 모순이란 모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실제, 김대중은 총풍사건을 정쟁에 이용했고,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이미 저들과 한통속인 언론이 폭로하는 지배계급의 모순이란 애초부터 한계가 분명한 것이죠.

따라서, 북풍사건과 같은 명백한 지배자들의 모순을 하나의 사건으로 국한시키지 말고, 완결된 전체의 그림을 보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북풍사건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서, 왜 북풍사건이 일어났느냐를 추론할 수 있어야 하죠.

이것이 우리가 북한과 한국, 그 이전의 조선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이것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을 포함해 폭넓게 해야하겠죠.
북한은 주사파들이 얘기하는 꿈의 사회주의국가는 물론 아닐 뿐더러, 멍청한 우익들이 얘기하듯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한국의 지배자들과 극단적인 대치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마치 함께 훔친 장물의 배분을 놓고 싸우는 도적들과 같죠.

그런 점에서 김하영씨가 쓴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를 추천합니다.
1장 ‘미국과 한반도 위기‘ 에서는 미국이 한반도에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이해관계에 대해서,
2장 ’김대중의 햇볕 정책‘ 에서는 단순히 평화통일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는 햇볕 정책의 실체를 구체적인 사례와 모순을 통해 밝히고 있고,
3장 ’싸우는 형제 - 북한과 남한‘ 에서는 반공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북한 지배자들의 커넥션(connection)을 해방 이후 계속 있어온 북풍사건의 전모를 통해서 밝히고 있으며,
4장 ’황장엽 망명과 주체사상‘ 은 황장엽이라는 북한 거물의 입국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한국의 지배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왜곡하고 이용해왔는지를,
5장 ’북한 사회의 본질‘ 에서는 김일성에 대한 주사파들의 환상과 우익들의 비방 모두를 비판하며 해방 이후 정부수립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고, 동시에 국가 건설 과정 및 이후 사회체제를 분석하며 이 국가가 사회주의와는 전혀 상관없을 뿐 아니라,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과 생존권적인 권리를 철저하게 짓밟아왔음을 밝힙니다. 이 속에서 사회주의의 정수를 옅볼 수 있죠.
마지막 6장 ’남한 좌파와 대안‘ 은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그간 있어왔던 對북한 관련 사안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햐 하는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김하영씨는 ‘다함께‘라는 운동단체의 주필진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녀의 주장 일부, 특히 6장에 서술된 실천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견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자면, 그녀를 비롯한 ‘다함께‘는 운동의 대중성을 중요시하고, 이들은 가장 많은 대중을 결집시킬 수 있는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하지만, 저는 이들이 조금더 자기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는 활동이 좀 더 우선순위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함께가 대학이나 강연, 거리캠페인의 방식을 뛰어넘어서, 좀 더 노동자운동 속에 뿌리내리길 바랍니다.
물론, 운동에 있어서 대중성은 중요한 가치이고, 대중성과 정체성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지만, 진정한 대중성은 정체성의 확립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펜의 힘은 결코 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펜의 힘은 저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 (소수의 테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을 구축하는 운동에 종속되어야겠죠.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흩뿌리는 것으로 자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실천의 방식도 함께 고민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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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3
이나미 지음 / 책세상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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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어른들은 문희준을 보고 웃지 않는다.

미국의 지성이라 불리우는 노엄 촘스키 교수의 잘 알려지지 않은 경력은, 그가 꽤나 업적있는 언어학자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어느 책에서, 노엄 촘스키 교수의 집필 내지는 활동과 그의 경력인 언어학자와의 필연성을 평한 것을 봤는데, 논리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상당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구조주의나 언어학자들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잘은 모릅니다만,
'언어'나 '개념'이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고,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 즈음은 수긍할 만 합니다.

가수 문희준씨에 얽힌 일화들을 모르는 어른들은,
'무뇌중' 이나 '뷁' 이란 이상스런 단어에 낄낄거리며 웃기는 커녕, 고개를 갸우뚱 할겁니다.

그에 얽힌 '일화'들이란,
다름아닌, '언어나 개념의 사회적 맥락' 이라고 폼나게 말 할 수도 있겠죠.

# 자유주의를 보고 웃지 않는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개화시기의 <독립신문>으로 보는 이나미씨는,
방대한 양이었을 당시 발행부들을 들추어보며 자유주의의 개념을 찾아갑니다.

그녀의 책을 읽는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 하는 어른과도 같습니다.
갸우뚱 했다기에 뭐 좀 재밌는 표현이겠거니 했는데, 알고보니 늘상 사용하는 '자유' 라는 단어.
아니, '자유' 도 논쟁의 대상이란 말인가요? 우리는 이미 갸우뚱 하는 군인입니다.

그녀가 책의 말미에 한토막 소개하는 몇해전 자유주의 논쟁을 둘러보면,
'갸우뚱 할 만 하다' 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 논쟁에는 꽤나 알려진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소설가 복거일씨, 공병호연구소 공병호 소장,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시사평론가 유시민씨, 한국일보와 어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 고종석씨와 진중권씨.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떠나, 소위 선수들인데. 그들이 모여 하필이면 '자유주의'에 대해서 논하다니, 갸우뚱 할 만 한가요?

더 재밌는 사실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박정희 대통령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 자칭 자유주의자 복거일씨는, "민주주의의 위협을 줄이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몫이다" 라 했고, 공병호 소장은 "대중민주주의 아래에서 폭력의 뿌리는 유권자 대중이다" 라고 했으며, 진중권씨는 이 두사람과 고종석씨를 비교해 가짜 자유주의자와 진짜 자유주의자를 얘기했답니다.

아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어찌 하란 말인가.

# 민주주의는 옵션이다?

뭐 이미 뱉은 말이니, 복거일씨와 공병호 소장은 자유민주주의자임에 앞서, 자유주의자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일종의 옵션(option) 과도 같아요. '민주적인 자유'는 없을 수 있어도, '자유' 만큼은 없어서는 안되는거죠.

감히 민주주의가 옵션이라니.
놀라는 분들은 십중팔구(十中八九) '자유'와 '민주' 모두가 보편타당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소위 '자유민주주의자' 일겁니다.

자 여기까지 따라온 분들 중,
되돌아가려는 분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옵션일 수 있어?" 라고 반문 내지는 비판할 것이요,
그들의 얘기를 끝까지 경청할 분들은, 필연적으로 "그럼, 너희가 말하는 '자유'는 뭔데?" 를 질문하게 될겁니다.

전자는, 후자처럼 새삼스래 자유의 개념을 묻지는 않겠지만,
이미 그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겁니다. '자유'란 '민주'와 공존 가능한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독립신문>에 대한 상이한 평가

따라서, 전자와 후자의 논쟁은,
'자유'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겁니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의 저자 이나미씨는,
그 질문의 답을 개화시기 <독립신문>에 던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립신문>이 역사에서 덜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을 비판하며,
<독립신문>이야 말로, 한국에서 유교 이후에 자유주의를 처음 도입한 언론매체라고 합니다.

인용하자면, 한국에서 개화사상이 시작된 것은, 박규수가 신미양요를 겪고 1872년에 중국을 다녀온 뒤에 김옥균 등을 지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서재필과 윤치호가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해서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 <독립신문>입니다.
사회 교과서에 익히 출제되었을 법한 내용이군요. 허허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최초의 한글신문이고, 국문역사상 최초의 띄어쓰기가 시도된,
여튼 '최초' 신문이고, 대중적인 영향력 또한 막강했습니다. 최대 3천부까지 발행되었는데, 당시 신문을 돌려가며 읽었던 것 까지 고려하면 충분히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흥미로운 사실은,
<독립신문>에 대한 학계의 평가가 서로 모순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개화운동이 민주주의와 자주독립을 주장함으로써 민중 계몽과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이들은 사실 친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입니다.

이나미씨는, 서로 대립적인 견해의 판 자체를 깹니다.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에요.
<독립신문>의 사상을 민족주의 내지는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판단하면 분명 모순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겁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관련해서 판단하면, 독립신문의 모순적 요소 - 즉,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내용과 외세 의존적이고 민중 불신적인 내용의 공존 - 를 설명할 수 있다는겁니다.

이나미씨는 저 위 단락에서 말씀드린 바에 따라 구분하자면, 후자이군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원칙에 따르자면, 수용되기도 하고 배제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 <독립신문>에서 가장 강조하는 사상은 자주독립과 문명개화 사상으로, 그것의 주요 개념은 자유권, 독립권, 교육, 개화, 진보, 법의 중요성, 군주에 대한 충성, 애국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이익을 추구하고 재산권을 갖는 개인의 자유, 경제적 활동의 중요성 등 근대 자유주의의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교육과 법, 진보, 개화 등은 이러한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

# 자유주의를 말해보자.

'자유주의'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만큼, 그 의미도 너무 다양해졌습니다.
이제 '자유'만으로는 자유주의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죠. 누구의,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동상이몽(同床異夢) 하며 얼굴 붉히기 십상입니다.

사실, 이제껏 제 깜냥으로는, 해방 이후의 반공정국까지가 되짚어간 한국 자유주의사상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해방 이후의 북한 사회에 대한 반정립적 성격이 강했고, 그 기준에 서있던 것은 바로 재산권, 경제적 자유주의였습니다.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느냐" 는 물음이 곧, 자유주의자이냐 아니냐를 결정했죠. 북한은 -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 개인의 재산권을 부정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에 따르면,
자유주의의 기원은 해방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 <독립신문>에 이르게 되는데, 그녀가 <독립신문>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주목한 것 역시 경제적 자유주의에요.

# 무턱대고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재산권을, 정치적 자유주의는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뜻하는데,
무턱대고 '자유주의'라 했을 때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게 되죠.

재산권이라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제적 강자에게 필요해요.
경제적 약자는, 말 그대로 행사할 재산권이 미약하니, 특별히 자신의 재산권에 대한 보호를 주창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집회의 자유니 결사의 자유니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약자에게 필요하죠.
정치적 약자는, 여럿의 약자가 모여서(결사) 요구(집회)할 수 있는 보호를 필요로 하니까요.

결국, 에둘러 '자유주의'라 했을 때는, 경제적 강자와 정치적 약자가 함께 할 자리가 마련되는 셈입니다.

상식적으로, '동맹'이란, 공통의 이해관계를 기본으로 할테니,
경제적 강자와 정치적 약자의 '자유주의' 동맹이 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분명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 강자가 정치적 자유를 필요로 해야하고, 정치적 약자가 경제적 자유를 필요로 해야하죠. 누가 손해보는 장사 하려고 하나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둘 다 썩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집회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도, 데모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권을 주장하는 것도, 도무지 어색하거든요.

이 '자유주의' 동맹엔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 에둘러 자유주의

누가 보기에도 부자연스러운 그들은, 당연하게도 '자유주의' 동맹을 맺은 적이 없어요.
다만, 누군가 한쪽이 에둘러 '자유주의'를 말 할 뿐이죠.

'자유주의' 동맹을 표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적 약자 보다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경제적 강자로 보여집니다.

경제적 강자가 가짜 동맹을 표방하는 이유 역시도 상식적입니다. 동맹상대 혹은 동맹상대에 동조하는 세력을 아우르기 위해서죠.
'자유주의' 동맹 아래 정치적 약자들의 동조 - 그것이 심정적이든 직접적이든 - 를 얻어내고자 함일겁니다.

'정치적 약자'는 누구일까요?
우리 모두가 정치적 약자입니다. 적어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정치적 강자'가 있을 수 없으니까요.

# 나름의 비용

동맹과정이 일방적이었던 쌍방적이었든,
여하튼 동맹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탄탄대로를 달립니다.

그런데, 에둘러 표방한 동맹일지라도, 동맹은 동맹인 법.
경제적 강자들도 나름의 비용은 치뤄야했습니다.

경제적 자유가 주된 목적이라 하더라도, 동맹을 깨지 않으려면, 적당히 정치적 자유주의도 이루어야 했으니까요.
못된 말로, 가끔 정치적 자유에게도 먹이를 줘야했겠죠.

저는 이 시점이 87년 6월항쟁이라고 생각해요.
87년 6월항쟁은 4ㆍ19와 함께 정치적 자유에 있어 상징적인 날이니까요.

6월항쟁의 가시적인 성과는 대통령직선제였죠.
그런데, 이 동맹의 성격을 이해하신 분이라면, 정치적 자유도 '대통령직선제'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대단한 성과를 얻었는데, 경제적 자유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80년대 후반은 한국의 경제규모가 눈부시게 성장하던 특징적인 시기에요.
전에 후기를 올렸던 <한국재벌연구>에서 읽은거지만, 한국의 기업들에 '입법'이라는 제재가 가해진 것은 80년 중후반 들어서에요.
물론, 그 이전시기에는 기업의 해외진출로를 모색하는 것과 더불어 지원이 극에 달했었죠. 전성기라고나 할까요. 한국의 유수 기업들이 최고의 성장기를 구가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 같지만 다른 두 사람

이나미씨가 먼지 묻은 <독립신문>까지 뒤적여가며 하고싶었던 얘기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운 동맹이었을겁니다.

처음에 잠깐 끌어썼던 지식인들의 논쟁으로 돌아가볼께요.
이 지식인들의 논쟁은 99년 한겨레21 특집기사로 다루어진 것이죠.

복거일씨와 공병호소장 모두 소문난 논객들인데, 두사람의 공통점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관점을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집필분야만 조금씩 다르죠. 복거일씨가 좀 더 폭넓게 쓰는 편이고, 공병호소장은 경제 경영분야에 치중하는 편입니다.

진중권씨가 '진정한 자유주의'를 논한 것은 공병호소장이 아니라 복거일씨에 대해서에요.
진씨는 공병호소장이 쓴 <10년 후 한국>을 저평가하면서, 그의 논리는 '시장주의'가 아닌 '시장만능주의'라고 한 적은 있지만, '자유주의'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았었거든요.

그가 유독 복거일씨 앞에서만 자유주의를 논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이나미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주의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진씨가 유달리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까지 자유주의를 고집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나미씨와는 사뭇 다른 태도이죠.
더구나, 이나미씨 역시, 책의 말미에 이 논쟁을 살짝 소개하며 진중권씨가 아닌 복거일씨의 손을 들어주고 있구요.

진씨가 말하는 '진정한' 이라는 기준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가 얼마나 적절하게 조화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는, '경제적 자유주의 아래 정치적 자유주의는 억압될 수 있다' 라는 공병호씨는 이 균형을 깬 것이고,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자격을 잃은 셈이 됩니다.

하지만, 이나미씨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동맹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둘의 균형을 뜻하는 진씨의 '자유주의의 진정성'이라는 기준은 성립하지 못하는겁니다. 그녀는 복거일씨야 말로 자유주의자'다운' 자유주의자라며 손을 번쩍 들어줍니다. 재밌군요.

통속적인 관점에서 좌파논객으로 묶일 이나미씨와 진중권씨.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 두사람은 문제설정 자체를 달리 하고있을 뿐 아니라, 그 입장에도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 독립선언이냐 균형유지냐

기존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 그 명칭을 변경했어요.
신자유주의가 버젓히 20:80의 사회로 자신을 홍보하는 것을 보면, 경제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동맹 내에서 노골적으로 큰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이것은, 동시에 정치적 자유주의의 입지가 여지없이 줄어들 것을 예고하기도 하구요.

독립선언이냐, 동맹내 자리다툼을 통한 균형유지냐.

여러분은 같지만 다른 이 두 사람의 입장을 어떻게 바라보세요?

# 더 읽어야 할 책 - <자유론>, <사회계약론>

암흑으로 비유되는 중세에서 벗어나게 한 근대 자유주의 사상들.
아무렇지 않게 그 진보성에 경탄해왔던 사람이라면,

<독립신문>은 물론, 밀의 <자유론>과 루소의 <사회계약론> 을 '자유주의의 기원' 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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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체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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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매상 탁씨와의 유쾌한 만남

철학자 탁석산씨를 처음 만난 것은 <철학 읽어주는 남자>에서 였습니다.
그와의 만남은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는 <경제학 카페>에서의 유시민씨와 비슷하게도, 소매상 역할을 자처했죠.

철학이든 경제학이든, 결국은 삶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일진데,
전문적인 연구를 업으로 하는 철학'자', 경제학'자' 와 갑동이, 을순이와의 거리는 너무 멀었어요.

철학자, 경제학자들은 도매상이었어요.
갑동이, 을순이의 생활필수품을 판매하긴 하지만, 도매상에게는 장바구니 들고온 갑동이, 을순이가 여간 곤란한게 아니었거든요.

탁석산씨는 철학의 소매상을 자처합니다.
하지만, 흔히 하는 오해처럼, 이를 두고 '쉬운 철학'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거에요. 철학은 전문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학문'이니까요.
철학의 소매상 탁석산은, 갑동이 을순이의 소비심리를 자처하는, 속된 말로 '장사꾼' 이라기 보다는, 도매상과 소비자의 서로 다른 유통구조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엄연한 '소매상' 을 자처했습니다.

탁석산씨의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 연재는, 여전히 - 사실, <철학 읽어주는 남자> 보다 더 일찍 쓰여졌습니다만 - 소매적인 유통구조가 돋보입니다.
그의 철학에는, 이름 모를 철학자 대신 갑동이 을순이가 등장하고, 표현 또한 부드럽고 자상해요.

" 어떻게 살 것인가 ", "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소문이 날 것인가 " 를 고민하는 을순이 갑동이는, 그를 통해 자신의 일상적인 고민이 철학자들의 정체성, 주체성 논쟁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될거에요.
그리고, 일상적인 고민이 하루하루 깊이를 더해갈 수록, 뭇 철학자들과의 만남도 가까워집니다.

# 이번에도 유감없는 소매상적 솜씨, 주인과 손님의 예시

한국인의 주체성을 문제 삼은 탁석산씨의 소매상적 솜씨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빛을 발합니다. 그는, '주체적인 삶이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라고 하며, 주인과 손님의 예를 들어요.

꽤나 근사한 친구집에서 최신형 전자기기를 가지고 마음껏 노는 '손님'과, 허름한 집에서 김치찌개에 밥말아먹는 '주인'.
하지만, 손님은 내심 눈치를 봐야하고, 주인의 마음은 마냥 안락합니다.

친구집이 꼭 근사하라는 법 없고, 우리집이 꼭 허름하라는 법은 없겠지만,
주체적인 삶이란, 물질적인 풍요에 우선해, 자기 의지와 필요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싶은지 한번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한 채, 소위 잘 나가는 일만을 찾아 전전긍긍한다면,
친구집에서 내심 불편해하며 최신형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손님의 마음은 아닐런지요.

주인과 손님의 예시는 계속됩니다.

우리는 마냥 주인노릇만 할 수는 없어요. 살다보면, 집은 동대문인데 저 멀리 신촌에서 밤 늦게까지 술자리가 있을 수도 있고, 친구녀석이 산 새 음악CD를 함께 듣고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주인노릇 할 수 있는 우리집이 최고이지만, 친구를 집에 초대하기도 하고, 친구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사이일꺼에요.

결국 우리는, 주인으로서의, 손님으로서의 예의에 모두 익숙해져야 합니다.
주인되는 삶이라 해서, 고립을 자처하며 주인이기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우리는 열린 인간관계 속에서 혹은 열린 국제관계 속에서 자기 의지와 필요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 이번에는, 집에 초대한 친구가 마치 제집인양 행동한다고 해요.
손님으로서의 암묵적인 규칙이 깨어졌어요.

주인이라면 이 손님을 제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에게 '제재'가 어울리지 않는다면, 좀 더 공식적인 인간관계나 국제관계를 떠올려보셔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인 손님이 있다면, 물리적인 방법도 사용할 수 있을거구요.

주인으로서.

# 철학과 경제의 만남

이처럼, 탁석산씨는 개인 혹은 국가의 주체성을 얘기하며 주인과 손님의 예시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의지와 필요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일정한 규정과 예의, 그리고 이것이 깨어졌을 때 강제할 수 있는 물리력.
이것들은 주체적인 삶의 조건들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제목이 <한국의 주체성>이니 만큼, 그가 국제관계에 이 조건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 즈음은 눈치 채셨을텐데,
그는 각각의 조건에 맞추어, 한글전용, 국가기반시설의 보호, 공기업 민영화의 반대, 환경 이데올로기 비판, 등의 제안을 펼칩니다.

대부분은 첫번째 조건 - 국가가 정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 - 에 맞추어져 있어요.
(세번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핵무장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민감한 사안이니 만큼 넘어갈께요.)

한글전용을 제외하면, 나머지 제안은 경제적 주권과 연관이 있습니다.
환경 이데올로기 역시도, 결국은 비용의 문제 - 친환경적인 생산공정에 필요한 추가적인 비용 - 로 돌아오니까요.

그는 철학자로서 주체성의 문제를 고민했지만,
고민의 결과물은 경제적 주권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불편한 만남

이제 철학과 경제가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 만남이 조금 불편해보여요.
철학의 사고는 자유롭게 이루어지지만, 경제는 말그대로 하나의 제도에요.

시험이라는 '제도' 아래에서는,
응시자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다양한 방식이 도입된다 하더라도, 기출문제나 기출경향과 같은 '제도에의 이해'가 시험의 성적에 큰 영향을 미쳐요.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경제라는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철학의 자유로운 사고와 경제의 규정된 제도와의 결합이란,
철학이 제도에 맞추어 왜곡되던지, 아니면 경제가 왜곡되던지, 둘 중 하나의 왜곡을 거치게되요.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탁석산씨의 철학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래서, 불편하구요.

# 독을 깨고 달아나는 제리(Jerry), 쫓는 톰(Tom)

경제문제는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해요. 응당 경제주체를 기준으로 접근을 해야죠.
그런데, 탁석산씨는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주권'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요.

주권이란 '국가'를 기준으로 하는데,
'국가'는 엄연히 말하자면 경제주체와는 거리가 있어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3대 경제주체가 '국가-기업-가계' 라면,
탁석산씨가 얘기하는 '주권' 역시도 경제주체인 국가의 주체성을 얘기하는 것이겠지만,
솔직히 국가의 역할이란 기업과 가계 사이의 중계자 역할이거든요.

더군다나, 오늘은 무역과 서비스교역, 금융거래까지 자유화 되어서,
국가가 기업에 미칠 수 있는 '규제' 자체란 이전보다 더욱 작아졌으니까요.

국가와 기업의 관계는, 만화영화 <톰과 제리>에서 처럼 고양이와 쥐의 관계와 같아요.
언뜻 보기엔 고양이는 쥐 보다 월등히 힘이 센 것 같지만, 원래부터 쥐를 먹이로 하는 고양이가 쥐 없이 하루도 연명할 수 없는데다,
이제는 '독안에 든 쥐'가 국가라는 '독'을 깨어버렸으니, 고양이로서는 더욱 수세에 몰릴 수 밖에요.

그런데, 탁석산씨는 이미 독을 잃어버린 국가를 두고 경제문제를 논하고 있거든요.
날이 갈 수록 선명해지고 있는, 기업-개인 이라는 경제구도가 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걸까요?

" 보고서대로 우리의 공기업들이 모두 외국 기업에 팔렸다고 해보자. 이제 공기업에 '주인'이 생긴 것이다. 한국전력을 매각했으므로 전기 사용료는 미국기업에 내야 하고, 미국인 사장이 우리의 전력 공급을 좌지우지한다. 요금도 미국인 사장이 판단하여 정할 것이다. 만약 요금이 지금보다 대폭 인상된다 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시정하라고 지시하지 못할 것이다. 사기업에 대한 간섭은 자본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신은 어떠한가? 미국인들이 우리의 통신회사를 거의 인수한다면 한국의 정보 보안을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또 철도가 민영화되어 외국인이 주인이 되었다고 하자. 임금 협상이 결렬되어 외국인 주인이 직장 폐쇄를 단행해도 정부는 간섭할 권한이 없다. "

탁석산씨의 주장은 분명 그가 비판하고있는 시장만능주의자들에 비해 진일보 한 것이지만,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국가'라는 기준은 사실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미국인 사장 대신, 한국인 사장을 대입해보면 결론이 나오게되죠.
즉, '국가'라는 카드를, 아무리 바꿔도 같거나 비슷한 결론이 나와요.

국가가 변수역할을 못하고 있다는거죠.
'경제'라는 법칙에서 국가가 변수역할을 못하고 있다는거에요.

미국인 사장의 경제법칙과 한국인 사장의 경제법칙은 다르지 않으니까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낙제도 행복하지는 않다.

'한국경제'라는 시험지를 앞에 두고 학생들이 앉아있어요.

고액 과외를 통해서 기출문제와 기출경향을 빠삭하게 알고있는 학생은 시장만능씨에요.
물론, 시장만능씨는 높은 점수를 받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주체적이거나 행복하진 않아요.

우리의 탁석산씨는 어디즈음 앉아있을까요?
그는 마음에 드는 문제만 푸는 학생과 같아요.

물론, 컨닝을 하거나, 아는 문제만 푸는 학생들 보다 훨씬 나았지만,
그 역시 점수에 있어서는 여타 학생들과 다를바가 없어요.

그는 학생들의 참신한 사고와는 거리가 먼 채점 기준에 목을 매진 않았지만,
그 역시 시험장에 앉아있는 학생이니까요.

결국, 우리 불행한 학생들을 구출할 수 있는건 새로운 교육일 수 밖에 없듯이,
경제적 주권으로부터 나오는 주체적인 삶이란, 국가가 아닌 실제적인 경제주체 사이에서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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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재벌
조동성 / 매일경제신문사 / 1997년 11월
평점 :
절판


# 역시 논문

<한국재벌연구> 라는 딱딱하기 그지 없는 제목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유머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돈 많아 질투심을 유발하는 재벌 2세에 대한 유쾌통쾌한 뒷조사를 기대하셨다면, 크게 실망하실거에요.

책이 쓰여진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은, 해방 이후 줄곧 동반자적 관계였던 기업과 정부의 관계에 앙금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 - 오늘날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는, 공정거래법이니 수입자유화, 중소기업육성, 수출금융 및 특혜금융지원의 축소, 등등 - 이고, 동시에, 80년대 후반의 사회적인 변화들(87년 민주화투쟁)을 통해서 재벌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죠.
단적으로 얘기해서, 재벌기업들이 일말의 위기의식을 감지했던 시기가 될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재벌에 대한 비판 자체를 승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지사 인지상정.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의 유수 경영/경제학자들이 모여, 재벌에 대한 인식 전환을 꾀하고자 쓰여진 셈입니다.

형식은 깔끔한 논문형식입니다.
매쪽 빠짐없이 통계자료가 들어가있을 정도로, 간단하게 잡아낼 수 있는 결론에도 실증적 근거를 놓치지 않으면서 학자 특유의 성실함을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이야기? 전개 역시도 논문 특유의 그것으로서 명쾌하구요.

# 재벌을 비판하는데에도 충분조건이 있다?

너도 재벌 나도 재벌, 참 쉽게들 말하는 재벌을 대체 무엇이라 정의해야 하는가 부터 이 책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지극히 학자스러운 목차 구조를 바라보며 벌써부터 볼멘소리를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재벌의 정의'는 후반부의 결론으로까지 나아가는 중요한 구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필자 - 서울대 경영학과 조동성 교수 - 는, 재벌의 정의와 더불어 논점을 잡아내는데 100여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하면서,
기존의 서적이나 논문에서 정의된 재벌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동남아, 한국의 재벌의 역사와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분석,
재벌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까지 두루 분석한 다음에야 이렇게 논점을 잡아내고 있는데,

" 위의 표를 볼 때 비교대상 중에서 사회로부터 비판이 되어온 대상은 세 그룹, 즉 20세기 전반 이전의 미국 거대기업과 전전의 일본재벌, 그리고 1986년 이전까지의 필리핀 재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현대 미국의 거대기업과 전후의 일본재벌, 그리고 대만과 홍콩의 재벌에 대해서는 그 사회로부터 반감 또는 비판이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다. (중략)
다시 말해서, 일본의 전후재벌처럼 정경유착의 결과 나타나는 독점적 이윤이 특정개인에게 귀속되지 않고 재벌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분산된 불특정 다수인에게 귀속된다면 이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고, 1920년대 이전의 미국 거대기업처럼 정경유착이 없더라도 기업집단의 독점적 기회가 국민경제의 균형을 파괴하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게되는 것이다."

즉, '개인소유의 정도'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 두가지가, 재벌을 비판하는데 있어 일종의 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 중 한가지만으로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다소 도식적인 결론을 끌어냅니다.

" 개인소유지만 국민경제적 비중이 큰 한국의 재벌도 사회적 비판과 제대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규모를 줄이거나 개인소유형태를 탈피하는 방안중 적어도 하나를 택일해야 함을 알 수 있다. "

# 노련한 한 수. 둘 다 취할 수 없거든 하나를 버리라.

그렇다면, 쉽게 얘기해서,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둘 중 한가지는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 된겁니다.

필자는 '개인소유의 정도'를 선택합니다.

" 대규모성은 기업이 규모의 경제와 내부화의 효익을 누리고 치열해지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경쟁력 확보의 방안으로 갖추어야 하며, 정경유착에 의한 파행적 자본축적은 국민의식과 사회구조의 성숙에 따른 민주화ㆍ다원화의 큰 흐름속에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재벌에 대한 비판이 경제적 효율성보다 사회적 공정성 측면에 강조점이 두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인소유형태의 탈피, 즉 소유집중 및 탈법적 승계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재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완화시켜 재벌은 물론 자본주의체제의 존속기반을 확고히 해 주는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다. "

국민경제에서 재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영향력들을 고려할 때, 재벌기업의 형태에서 나타나는 효용성을 감안해서,
후자는 포기하기 힘든 가치라는 결론을 내린겁니다.
여담이지만, 특별히 1장을 할애해 한국재벌의 경영성과를 집필했으니까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포기하게될 '개인소유'와 관련해, 비판 항목들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구요.

이를테면,
부의 편중과 관련해서는, 소액주주나 노동조합의 이권 그리고 지주제를,
가족ㆍ혈족 중심의 권력 승계와 관련해서는, 상속ㆍ중여세제 개혁안이나 전문경영인에 의한 경영을 제안하고 있고,

정부의 역할로 넘어가,
특혜대출과 정경유착(정치와 경제의 유착관계), 중소산업의 몰락과 산업구조의 왜곡,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방식입니다.

# 혁명적인 한국경영학회장?

여기에서 중요한 논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인정하듯이, '우리도 재벌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인정할 것이냐' 하는 것인데요.

사실, 답은 간단합니다. 객관적인 자료를 앞에 두고서 그 비중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죠.
앨빈 토플러의 제4물결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이상,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적인 생산양식은 재벌기업과 같은 '대규모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체'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소유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규모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체'를 누가, 어떻게 소유할 것이냐.

다시 필자에게로 돌아가보죠.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한국의 재벌이 사회적 비판을 극복하고 한국경제의 성장과 형평의 조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재벌의 소유경영자가 기업을 사적 소유물이 아닌 사회적 실체로 인정하고 경영의 전문화, 그리고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를 위한 기업활동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일이다. "

와 KS(경기고-서울대) 출신에다가 경영학회장까지 맡고있는 엘리트 인사가 이렇게 혁명적인 발언을 하다니.

사실, 자본주의경제의 운동방식이 필연적으로 거대한 생산조직을 출몰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한평생 자본주의를 연구한 K.마르크스에 의해서 주장된 바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세계적인 규모로 조직된 생산조직은, 응당 생산조직을 운영할 노동자들 역시도 세계적인 규모로 조직할 것이라고 했는데,
조직된 노동자들이란, 다름아닌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가 폐지된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산조직을 운영할 주체들이기도 했습니다.

조동성 서울대 교수가 '혁명적'이라구요?
믿기 힘들지만, 그도 분명 기업을 두고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라고 하고 있으니까요.

# 작지만 큰 간극

농담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윗 단락에서 아스라히 만날 뻔한 필자와 K.마르크스 사이에는 작지만 큰 간극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근거를 제가 인용한 필자의 글에서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기업을 사회적 실체로 생각해야 한다' 라는 문장의 주어가, 엄연히 '재벌의 소유경영자' 라는 점과,
'기업의 공공소유'가 아니라, '기업을 사회적 실체로 인정' 이라는 부분입니다.

미묘한 단어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의 간극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니까요.

제대로 된 경제학 수업이라고는 전연 들어본 적도 없는 젊은이로서 무례를 감수한다면,
필자인 조동성 교수님께서 대략 '오버'하신 듯 합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던 90년대 초라지만, 책임지지 못할 발언이었죠.

재벌의 소유경영자가 공식석상에서 '인정'을 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기업이 기업으로 존재하는 이상, 그것은 분명 사적인 소유물입니다.

제가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필자 역시도 이점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반부, 필자의 대안에서도 드러나듯이,
'인정'하는 수준에서의 '사회적 실체'란, 익히 알려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정도가 될테니까요.

일련의 논조가 <한국재벌연구>라는 제목과 다르게, '재벌에 대한 비판'에 맞추어져있다는 점과,
'기업을 사회적 실체로 생각해야 한다' 라는 문장의 주어가, 엄연히 '재벌의 소유경영자' 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일종의 '구색갖추기' 정도로 느껴지는건 제 선입견일런지요.

# 떼었다 붙였다하는 옵션(option), 복지와 공공성.

거리에서 소위 '데모'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공성'이라는 이슈를 줄곧 내세우는데,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나 '공공성'이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일종의 옵션(option)에 불과합니다.

복지의 경우는,
소위 '나누어질 파이'가 있는 호황시기에도 가능하지만,
생산은 이루어지는데 소비가 안되는 디플레이션(de-flation) 불황 시기에 구원투수마냥 등장하는 것입니다.

복지를 통해 빈곤한 다수의 소비능력을 보충하는거죠.
보충된 소비능력이 생산과 소비 사이클(cycle) 중에서, 무너져있는 소비를 일으켜세우면서 다시금 사이클(cycle)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그동안 경제사 면면을 보면서 깊이 느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29년 대공황 시기에 미국의 경제부흥법은 불황시기의 복지의 대표적인 그것이죠.

공공성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클럽에도 몇편 올라온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독서후기에도 쓰여진 바 있지만,
자본주의가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다고 느껴지는건, 그것이 특정 집단이나 사상의 조류가 아니라 '생산양식'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 재화.
그 재화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양식이 바로 '생산양식'이고 '경제체제'인 것이죠.
그것이 숨쉬는 공기와 같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따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공성이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즉 이윤을 위한 생산양식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윤적자적인 사업양식이 용인된 사업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더 현명할겁니다. 밑지는 장사를 하는건 국민, 장사밑천은 세금이겠죠.

하지만, 더 이상 밑질 수 없게 되는 순간,
여느 기업과 다름없이 팔려나갑니다. 국민의 손에서.
 
# 얼마면 돼?

책 고르기를 인터넷 쇼핑몰 구경하듯 하다보니, 간혹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한국재벌연구>가 그랬습니다.

헌책방의 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신간(新刊)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보니,
'그땐 그랬지' 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들에 피식 웃음이 나올 경우가 있는데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60년대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사조가 한국에서 본격화 된 것은, 90년대 중후반.
더군다나, 신자유주의가 그 속도를 유달리 하여, 제반경제구조를 급격하게 변화시켰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이 쓰여진 90년초를 '그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필자가 후반부에 제시한 대안 역시도, 오늘날에는 굉장히 무색하게 느껴지는 것들이죠.
단적인 예로, <한국재벌연구>에서 종종 등장하는 '국민경제'라는 말을 요즘에는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국민경제'는 '국가경제'로, '국민총생산(GNP)'은 '국가총생산(GDP)'으로 대체되었죠.

그 배경에 세계화가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MS에서 내보내기 시작한 CF 처럼,
- 그 왜 아시죠. "넌 어디야? 런던?" "아니, 파리" "언제 갔어? 오전엔 베를린이었잖아." "계약, 일정 모두 바뀌었다구" "보내줘" "보냈어"
투자도 생산설비도 국적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시장'과 '국가'중 이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시장'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국내에서 투자 및 생산을 하던 시절과, 미우면 떠나면 그만인 오늘날을 비교하는건 좀처럼 쉽지 않죠.

필자의 대안이 무색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기업의 사회적 실체', 즉 공공성을 재벌의 소유경영자에게 요구하려면 힘이 있어야하는데,
그 힘을 이 책의 쓰여진 9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무슨 드라마의 원빈처럼 물어볼겁니다.
" 해외투자 비용, 얼마면 돼? " 하고 말이죠.

시장의 힘, 기업의 힘은 더욱 세지고 있습니다.

# 나름대로 재밌는 기업-정부 모델(model)

시장의 힘이라. 한마디로 역전된거죠.

필자의 대안부분에 치중하느라 다소 소홀했습니다만,
해방 이후 재벌성장사에서 기업과 정부의 관계도 세심히 검토하고 있는 이 책에는, 과거 기업과 정부, 시장과 정부와의 관계도 깔끔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통계와 도표, 수식에 모델까지 동원되었죠.

필자에 따르면, 기업과 정부의 관계는,
(1)중상주의 → (2)자유방임주의 → (3)입법주의 → (4)가부장주의 의 단계로 발전한다고 합니다만,
이제 탈(脫)모델화 한 것 같습니다.

다소 도식적이긴 합니다만,
시장과 정부라는 두가지 주체의 대립이,
(1)무정부상태 → (2)시장>정부 → (3)정부>시장 → (4)정부-시장 했던 시기로 볼 수 있을거에요.

한국은 자본주의를 수입한 경우라 중상주의 단계는 없었지만,
해방 이후부터 시작해 해외원조를 받아가며 장사밑천을 마련하던 60년대를 거쳐 계획경제를 시행했던 70년대까지를 (2)자유방임주의 단계로,
80년대부터는 (3)입법주의 단계로 볼 수도 있는데,

솔직히, (4)도 그렇고 한국의 실정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건,
아마도 한국에서는 경제발전과정에서 시장과 정부의 유착이 유달리 심했던 탓일겝니다.

한국일보의 누가 쓴 것 처럼,
이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적 연속성' 때문일 수도 있겠구요.

# 논문의 매력 + 잡담

번번히 실망하면서도 학자들의 논문에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처럼 서문 읽기를 돌같이 하여 무조건 달려드는 사람들에게는,
문제의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학자들의 글은 결론과 상관없이 명쾌해서 좋습니다.

하지만, 간략하게나마 한국 경제사와 정부-기업관계, 삼성ㆍ현대ㆍ기아를 비롯한 10대 재벌기업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소득이 있었고,
소액주주 운동이나 상속ㆍ증여세제의 변화에도 더 관심을 가지게되었습니다.

일본 경제사를 생략한 것이 좀 아쉽지만,
이제 경제사 여행도 얼추 마무리지을 때가 된 것 같아요.

여지껏 읽은 책 보다 좋은 책들이 얼마든지 더 있지만,
제가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아, 일단 이 정도로 만족해야할 것 같습니다.

역사책 한권에 책갈피를 끼워둔 것이 기억납니다만,
당분간은 소설을 읽을 생각입니다.

<한강> 이후로 오랜만에 발을 동동구르게 하는 책을 발견했거든요.
저만 이제서야 읽는 것 같아 챙피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어제 우연히 얻었지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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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한국
공병호 지음 / 해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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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공병호경제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른 적이 있는데, 이분 굉장하더라구요.

집필한 책도 어마어마할 뿐더러, 기업 대학 할 것 없이 강연도 엄청나게 많이 하시는 분입니다.
목록을 훑어보니 경제의 이해나 기업경영에 대한 도움글을 많이 쓰시던데, 『10년 후 한국』이 나온지 얼마 되지않아 『성찰』이라는 에세이를 또 발간했다니 집필력이 꽤 왕성하신가봐요.

구설수에 오른 공병호 소장의『10년 후 한국』을 대충 뒤적이고 몇자 적어봅니다.

# 주객전도

공소장께서 후반부에 직접 말씀하시길, 평소와 다르게 다소 비관적인 내용의 글을 썼다고 하시더군요.
실제 그렇습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비관적 요소를 꼬집고, 이 요소들이 향후 10년간 지속된다면 한국사회가 낮은생산성-높은실업률 이라는 암담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가 주를 이루고 있죠.

공소장님의 시종일관 걱정하시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경제가 어렵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분배니 평등이니를 외치는 자들이 판을 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경향이 향후 10년은 계속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하시네요.

바로 이런,
진보세력의 성장이나 한국사회의 좌선회에 대한 두려움.
『10년 후 한국』의 하나를 이루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어째 한발 앞서 나가시는 듯 합니다.
진보세력의 성장이니 좌선회니 보다는, 다수의 빈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더 고민되어야 할텐데요.

# 조삼모사

시험성적이 안좋았던 아이에게,
" 공부 좀 열심히 해라. 넌 그러다가 인생 망친다. " 라고 거듭 윽박지르는 부모님이 있다고 치죠.

아이에겐 두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새롭게 자극받아 오늘도 학교로, 야간 자율학습으로, 학원으로, 도서관으로 코피 쏟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적당히 엄마 눈치보며 읽고싶던 책도 읽고, 친구들과 밴드활동도 하는겁니다.

시간이 흘러,
짜자잔-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한 아이가 행복해졌을까요?

답을 내리셨나요?
전 어느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비관적인 얘길 하자면,
고등학교 때 불행해지고 나중에 대학졸업장으로 좀 덜 불행해지느냐,
고등학교 때 좀 덜 불행해지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 본격적으로 불행해지느냐의 차이입니다.

조삼모사.
공소장님의 해법이란게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왜 불행해지느냐에 대해서 아주 친절히, 다방면으로 설명해주고 계신데요,

10년 후에 낮은생산성-높은실업률 사회로 이르는 것과,
오늘 당장 그의 해법대로 치열한경쟁-저임금 사회로 이르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는 없어보입니다.

『10년 후 한국』을 팔아준 어깨 축쳐진 30-40대분들이,
도토리 4개에 기뻐하기 전에, 도토리가 총 몇개인지 세어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책에 대한 네티즌들의 평가는 극과 극이라네요.)

# 다소불쾌

제게 그리 유쾌한 책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큰 단락의 제목에서 말씀드린, 주객전도 더하기 조삼모사는 둘째 치고라도,
표현 자체도 굉장히 거칠어서 다소 불쾌했습니다.

빈곤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이나,
사회적 부가 창조적 소수의 전유물인양 얘기하는 것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태도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이 부유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테스트로 제시한다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성공하는 국가들의 9가지 습관들' 의 일곱번째 항목이라는게,
" 당신의 나라는 부상자를 쏘아 죽일 용의가 있는가? " 라니,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이쯤 되면,
'시장주의자-자유주의자' 라는 자칭을, '시장만능주의자' 라는 타칭으로 대체하는 것은 어떨지.

# 통화주의

매듭은 짓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공병호 소장님의 책을 보면,
오늘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경제적으로는 통화주의를 표방하는 분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많이 인용되어 있죠.
제가 아는 분 중에 빠진 분이 있다면, 서울대 경제학과의 송병락 교수님 정도?

특히 자주 인용되는 『자본주의와 자유』, 『노예의 길』(본문에는 『예종의 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는 각각 밀턴 프리드먼, 프리드리히 폰 하이예크의 저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저자 송병락 교수, 『현실과 지향』의 복거일씨가 그렇습니다.

( 앞의 두 저작은 품절되어 구할 수가 없었고,
뒤의 몇가지 저작은 처음 '경제학이 뭐야?' 하면서 뒤적일 때 접했던 책들입니다. )

『10년 후 한국』도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만, 『자본주의와 자유』이 책 정말 엄청났었죠. 이 책이 나온게 1960년대인데, 그 한해에 50만부 이상이 판매되고, 그 인기가 1970년대까지 이어져 그의 이론을 주제로 한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급기야 그는 76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되구요.

그 다음은? 정책에의 반영이죠.
미국의 닉슨-레이건, 영국의 대처, 이스라엘의 베긴,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까지 광범위한 정책적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 레이건과 대처의 경우 책에도 인용되죠. 다 나온다니까요. ^^; )

# 다음에는

다음엔, 위 경제정책의 결과가 어떠했느냐에 대해서 후기를 올려보겠습니다.

사실, 공병호 소장이 제시하는 정책의 결과를,
밀턴 프리드먼이 정책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던 미국, 영국, 이스라엘, 칠레 정부의 과거와 부등호로 연관시키는 데에는,
제 깜냥으로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일정 이상의 시사성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공병호 소장 역시도 책 후반부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경제정책 아홉가지와과 도덕률 여덟가지를 제시하는데,

작은정부, 민영화, 탈규제, 금융자유화, 정도는,
위 경제학자 및 논자들의 공통적인 지향점이 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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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s2108 2005-01-30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이책을 읽고 짜증과 불쾌감을 떨칠수가 없었습니다.
엄청난 저서를 내고 강의도 많은 사람의 생각이 너무나 편협되고, 정말...답답합니다. 이 책 사신분들 삼가 위로의 말씀 올립니다.
각종 자료 짜집기해서 책내는거 이런거 나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