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학 발전 문인들 나선다 [04/11/17] 
 
‘문학을 통해 지역주의를 타파하자’는 캐치프레이즈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호·영남 문학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국제펜클럽광주시위원회(회장 김종)는 부산펜클럽(회장 정순영)과 공동으로 ‘제6회 호·영남 문학인 문학교류 한마당’ 행사를 오는 20일과 21일 하동청소년수련원과 섬진강 일대에서 100여명의 문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한다.

문학세미나 및 주제강연, 생태문학 현장과 유적지 답사, 시낭송회, 분임토론 등으로 이뤄질 이번 행사에서는 지역이질감 극복과 문학의 역할, 지역문학의 발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문병란 시인(조선대 명예교수)과 문학평론가 정영자 교수(신라대)는 세미나와 주제강연을 통해 광주와 부산의 문학속 이질감과 동질성 찾기, 중앙문단 권력을 극복하고 지역문학의 색깔을 찾는 방안 등에 관한 논의를 전개할 예정이다.

이와함께 도서의 위상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책과 활자가 갖는 진정성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아울러 ‘인문학의 위기’를 맞은 현시대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문인들의 역할 등을 다각도로 접근할 계획이다.

둘째날에는 창작소재를 발굴하기 위한 섬진강 주변 생태문학 현장과 유적지 답사도 실시된다.

이 지역에서는 강만(시인·송정중 교장)씨, 함수남(극작가)씨, 박신영(소설가)씨, 이성자·윤삼현·노순환(아동문학가)씨, 정주환 교수(수필가·호남대), 조병기 교수(시조시인·동신대) 등이, 부산에서는 류명원·임수생·한창옥·정남순 시인 등이 각각 참여한다.

김종 회장은 “경기침체로 문화예술계 교류마저 어려움에 직면한 가운데 문인들이 모여 문학교류에 나서는 뜻깊은 자리”라며 “말로만 지역문학 발전을 부르짖기 보다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문학발전의 방향을 찾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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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펼치며] 책은 공산품인가

모든 것이 풍족해지다 보니 물건에 대한 애착이 부족해진 세상입니다.

부산 서울 등 지하철이 있는 도시의 유실물보관소에는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물건들이 꽤 쌓여 있고 젊은 세대들은 멀쩡한 휴대전화를 몇달만에 새 기종으로 바꾸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중 하나인 대량생산 체제가 가져온 일면입니다.

원래 공산품이라는 게 일체의 감정개입 없이 돈을 매개로 판매와 구입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사용해보다 싫증이 나면 쉽게 정(情)을 끊어 버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출판과 서점가에서는 도서정가제 문제가 현안으로 제기되면서 '과연 책은 공산품인가 아닌가'라는 의문도 자연스럽게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2003년 2월부터 책값의 과열 인하 경쟁으로 학술 문예분야 등 고급서적 출간이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점들이 출판사가 정한 책값대로만 팔도록 하는 도서정가제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올해까지는 모든 책에 대해 적용되고 그 이후부터는 취미·여가 활동 관련 도서, 자격증 수험서, 초등학생용 참고서 등의 순으로 단계적으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또 인터넷 서점의 경우 10% 내에서 할인판매가 가능하고 출판된 지 1년이 넘은 도서는 재고로 간주해 책값을 내려 팔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2008년 이후에는 이 제도가 폐지됩니다.

문제는 도서정가제 만료가 임박해지면서 책이 과연 재고 소진을 위해 파격적인 할인도 불사하는 일반 공산품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에 모아집니다.

일부에서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제품이 생산되는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박리다매도 마케팅의 일종인 만큼 책에 대해서만 예외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익을 목적으로 자본을 투입해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책은 공산품이 분명하며 공산품을 싸게 팔아 소비자가 만족을 얻는 것이 무슨 시비거리가 되느냐고 덧붙입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책에는 저자의 전문적 식견이나 사상이 투입되는데다 독자는 책을 통해 고도의 정신적 충족을 하기 때문에 일반 공산품과 같은 취급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반박을 합니다.

책은 한번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 두고두고 간직하면서 활용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손에 넣은 책에 대해 무슨 애착이 생기겠느냐는 겁니다. 또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극단적으로 책 두어 권을 살 때 한 권을 덤으로 끼워서 팔거나 이른바 '땡처리' 방식도 나올 수가 있는데 이게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물론 시각을 달리 해서 본다면 이들의 이런 주장은 책값이 내려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줄어들 자신들의 이익을 염려해서 하는 소리라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관련 업계에서는 책은 일반 공산품과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는데 목소리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토론회를 열어 도서정가제는 반드시 필요하며 연관 법률이 개정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앞으로 정부와 관련 업계가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한 논리싸움을 벌이겠지만 책 담당 기자인 제가 보기에는 책은 뭔가 좀 특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그것이 참 다행스럽습니다.

(국제신문 염창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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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7회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작 점검 <3·끝> [04/11/16]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깊이있는 시선

김동식 김형중 씨와 한국일보 문학상 예심작 선정 작업을 하면서 평소와 다른 보람을 느낀 것은 무엇보다 한국 소설계가 다양한 컬러와 지향을 보여주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년에 없던 현상이고 아쉽게 본선에 올리지 못한 몇 분 작가들과 더불어 우리 소설의 내일을 밝게 전망하도록 했다. 작품평을 맡은 김연수의 ‘거짓된 마음의 역사’, 정지아의 ‘미스터 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새롭게 보면서 이러한 생각은 떠 또렷해지게 된다.

김연수- '거짓된 마음의 역사'
"역사는 실존적 공간" 허무주의 이겨내는 믿음직한 안목

먼저 김연수의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단편소설이라는 짧은 형식 속에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를 선명하게 부조해 낸 작품이다. 역사를 해석하고 요리할 줄 아는 작가가 얼마 되지 않는 오늘의 한국소설계에서 ‘거짓된 마음의 역사’는 단연 두각을 드러내는 수작이다.

동양의 은둔국 조선에서 실종되어 버린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태평양을 건너가는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를 서간체로 요령있게 변주해 나간 솜씨도 솜씨지만, 허무주의적인 역사해석에 들떠 있는 시류와는 달리 그것을 개인적 삶이 펼쳐지는 실존적 공간으로 파악하는 안목이 믿음직스럽다.

서양인의 시선에 노출된 동양의 이미지, 그 수정의 문제, 이를 통해 드러나는 세계의 새로운 모습 등은 지극히 현대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김연수가 세계관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정지아- '미스터 존'
시대와 개인의 삶… 무리없이 아우르는 기품있는 작품

다음으로 정지아의 ‘미스터 존’에 대해서. 얼마 전에 출간된 정지아 씨의 창작집 ‘행복’을 두고 또 후일담 소설이냐는 식으로 반문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사람은 한번의 인생밖에 살지 못하며 단 한번의 클라이맥스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작가에게 시류에 맞는 소설을 써달라고 요구하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없다. 무엇보다 ‘미스터 존’은 현재를 보는 작가의 촉수가 예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부족하지 않다.

전향이라는 과거를 가진 여자가 낯선 타국의 고립된 공간에서 또 다른 고독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존이라는 남자를 만나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이 이야기는 이념과 실업이라는 시대적 주제를 무리 없이 갈무리한 수작이라고 할 만하다.

작가가 풀어나가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아름답고 깊이가 있어 단편소설의 미학성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단편소설의 기품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한강- '채식주의자'
한국사회 부패성에 날카로운 메스 대는 시원스러운 여성소설

마지막으로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저력을 유감없이 입증해 준 문제작이라고 생각된다. 한강, 하면 항상 신진작가답지 않게 정통적인 수법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선입견이 작용하면서 새로운 것 같지 않다는 인상을 갖게 되지만 ‘채식주의자’ 한편을 통해서 그녀가 한국적인 삶의 양상을 얼마나 근본적인 입장에서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육식을 거부하면서 메말라 가는 여주인공으로 상징되는 우리사회 부패성은 이 작품을 단순한 여성소설로 보지 않게 하는 비범함과 극단성이 있다.

주류적인 여성소설의 불철저함에 시달려온 눈을 다시 뜨게 만드는 시원스러움이 있다. 한강의 소설은 기법과 재능의 차원에서 얻어질 수 없는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신진작가답지 않은 본격성이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은 1990년대 중반쯤으로부터 시작된 문학적 흐름의 한 시대를 정리, 검토해 보는 위치에서 새로운 문학을 구상해야 할 시점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두각을 드러낸 작가들을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검토해 보면서 우리가 잊고 있던 다른 작가는 없는지 생각해 볼 것을 필요로 한다.

김연수 정지아 한강 3인의 공통점은 세계를 읽어내는 시각과 세련된 스타일로 유행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가는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정지아가 보여주는 절제된 슬픔과 인생에의 성찰, 김연수가 보여주는 역사 텍스트와 사실의 새로운 만남, 한강이 헤쳐 나가는 결백한 세계를 향한 투쟁은 우리 소설이 안정감과 깊이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임을 예견케 한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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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작 점검 <2> [04/11/16]
 
한국일보 문학상 본심의 대상작품 가운데 김경욱의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영하의 ‘은하철도 999’, 윤대녕의 ‘고래등’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특유의 유머로 그린 '이미지의 은하'
▲ 김영하 '은하철도 999'

김영하는 변신의 작가이다. 첫 작품집 '호출'에서는 소설 미학의 급진적인 가능성을 탐색했고, '아랑은 왜'에서는 소설 쓰기에 대한 흥미로운 성찰들을 보여주었으며, '검은꽃'에서는 영웅이 아니라 개인이 역사소설의 주인공일 수 있음을 입증한 바 있다.

최근에 발표된 단편들은 일상적 삶에 잠재된 다양성들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 주변에 절묘하게 배치하는 솜씨를 보여준다. 단편 '은하철도 999' 역시 그러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강남역 스타벅스 앞에서 우주정거장 체류 희망자 모집 광고를 보았고, 이러저러한 사건을 경험한 뒤에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모집 버스에 올라탄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전제가 숨어있다. 하나는 인간과 세계 모두가 기호와 이미지들로 구성된 은하(galaxy)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기호와 이미지로 구성된 은하를 떠도는 유목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잠재된 기호-이미지와 세계가 방출하는 기호-이미지는 서로 접촉하고 부딪힌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소설적인 간지러움'이 생겨난다.

다양한 기호와 이미지가 충돌하는 우리의 삶 속에는 이미 언제나 소설이 꿈틀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은 말한다. 기호와 이미지는 실체 없는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소설적 육체성의 문제라고. 작가 특유의 유머 속에서 전복적인 상상력이 은은하게 배어나는 작품이다.

대중문화에 매혹 당한 섬세한 관찰자
▲ 김경욱 '장국영이 죽었다고?'

소설은 작가가 지닌 세계관의 표현이고, 사회적 상황의 반영일 수도 있으며, 문학적 전통에 대한 반복과 전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경욱은 대중문화의 기호와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의 세계관, 사회적 상황, 문학적 전통을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단편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2003년 4월 1일에 투신자살한 장국영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피씨방에서 채팅을 하다가 장국영의 죽음을 알게 되고, 그가 출연했던 영화 ‘아비정전’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을 더듬어간다.

그리고는 번개를 하러 나갔던 극장 앞의 풍경을 살펴보니,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장국영 관련 플래시몹에 참여하고 있더라는 내용이다. 연배가 지긋한 세대에게는 전쟁과 빈곤의 경험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겠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대중문화가 삶의 기념비이고 추억의 매개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국영은 한 세대의 문화적 기념비이다.

하지만 플래시몹에서 보듯이, 장국영에 대한 세대론적인 추억은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퍼포먼스 속에서 휘발될 따름이다. 개인의 추억마저도 균질적인 정보로 환원되어 무한복제되는 시대의 문화적 초상이 여기에 있다.

김경욱에게 소설이란 대중문화에 매혹 당한 시선인 동시에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섬세한 관찰의 체계이다. 그는 대중문화의 기호를 통해서 현대성의 알레고리를 바라본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묻는 작가
▲ 윤대녕 '고래등'

윤대녕은 은어(銀魚)를 닮은 작가이다. 첫 작품집 ‘은어낚시통신’에서 삶의 시원과 존재의 근원을 향해 힘겹지만 아름답게 거슬러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한다. 은어가 힘이 부쳤던 것일까. 어느 작품부터라고 적시하기는 힘들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작품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닮아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하천으로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물결에 떠밀려 가는 은어가 연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편 ‘고래등’은 윤대녕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예감하게 하는 작품이어서 주목의 대상이다. 고향에서 영어 선생을 하던 아버지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고향을 떠났고, 타향을 전전하면서 고생 끝에 처자식들 몰래 기와집을 샀는데, 정작 그 집에서 살지는 못하고 가끔 들러 커피나 마신다는 이야기이다.

비평가 김윤식이 지적했듯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온정주의에 빠지지 않은 작품이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집(존재의 근거)에 대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래등이란 무엇인가.

고향을 떠나 자리를 잡은 전셋집 문 앞에 달아놓은 외등(外燈)인데, 그 모양이 고래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겠는가. 고래등은 내가 있어야 할 장소, 또는 그곳에 있으면 내가 살아서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장소를 표시하는 기호가 아니겠는가. 이를 두고 존재의 적소성(適所性)이라고 할 것이다. 윤대녕이 다시 묻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김동식ㆍ문학평론가)=한국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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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7회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작 점검 <1>  [04/11/15]
 
한국일보문학상 예심 위원들이 올해 후보작으로 뽑은 9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3편씩을 나누어 맡아 3회에 걸쳐 선정 의미를 밝힌다.

김형중(강영숙 박민규 천운영), 김동식(김경욱 김영하 윤대녕), 방민호(김연수 정지아 한강)씨의 순서로 이어진다.

세 사람의 예심 위원들 공히 장편의 흉작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가 컸다.

작년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나 김영하의 ‘검은 꽃’ 등에 필적할 만한 묵직한 장편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몇몇 작품이 거론되었으나 결국 올해의 예심통과작들은 모두 중·단편들이 되고 말아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중·단편의 경우는 스펙트럼도 다양했고, 작품들의 수준 역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수준작들이 많았다.

게다가 아직 그 새로움의 전모를 파악하기 힘든 독창적인 신인들의 작품도 적지 않았다.

애초에 다섯 편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심사가 그 배에 가까운 아홉 편을 골라내는 선에서 마무리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덕분에 심사는 다소 난항을 겪었지만 아주 기분 좋은 난항이었다.

일차로 강영숙, 박민규, 천운영의 작품 선정 경위를 밝힌다.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 우울한 내면풍경
▲ 강영숙 '태국풍의 상아색 샌들'‘태국풍의 상아색 샌들’은 그간 작가 강영숙이 일구어 온 소설세계를 집약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혔다.

은유적 계열체를 형성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환유적으로 쇄도하는 문체, 서울이면서 동시에 현대 도시 일반이기도 한 무국적 도시의 전망 없는 주체들, 그리고 화려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불길하고 그로테스크한 축제 분위기 등이 그렇다.

최근 우리 소설들이 반응하기를 게을리 하고 있거나, 불충분하게만 반응하고 있는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 주체들의 암울한 내면풍경을 이 작품처럼 냉혹하고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은 찾기 힘들다.

심사위원들 모두, 불모이자 동시에 인공낙원인 강영숙의 도시가 우리 문학이 아직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고 있는 다국적 후기 자본주의와의 싸움에 미칠 긍정적인 영향에 대한 기대가 컸다.

'B급 문화의 전복적 상상력' 창작법 엿보여
▲ 박민규 '카스테라'박민규는 강영숙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소설 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작가다.

그는 그간 한국 소설을 지배해 왔던 엄숙주의를 조롱하면서 소위 B급 문화의 상상력을 대대적으로 차용한다.

작품 ‘카스테라’는 바로 그러한 소설 쓰기에 대한 일종의 선언문으로 읽히는 데가 있다.

그가 ‘카스텔라’를 의도적으로 ‘카스테라’로 오기(誤記)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못마땅한 것들과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모두 냉장고에 집어넣어서는, 그로부터 오롯한 ‘카스테라’ 하나(한 편)를 얻어낸다는 발상이 박민규답다.

게다가 그렇게 얻어진 작품이 엄숙하고 정연한 ‘카스텔라’가 아니라 표기법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B급 ‘카스테라’라고 하는 발상 또한 전복적이다.

‘대왕오징어의 기습’과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포함한 다른 몇 작품도 눈에 들었으나 굳이 ‘카스테라’를 예심 통과작으로 정한 사정도 이와 같다.

이 작품은 박민규가 누설한 박민규의 소설 작법이다.

'모계 공동체의 가족 판타지' 변화 징후
▲ 천운영의 '명랑'천운영은 언제나 평균 이상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다.

그리고 그 저력 너머에는 취재를 통해 ‘생산된’ 직접 체험이 놓여 있었다.

그러던 작가가 최근작들에서는 체험의 직접성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대신 환상성, 특히 변형된 가족 판타지를 도입하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올해 출간된 창작집 ‘명랑’에 실린 ‘늑대가 왔다’가 그 전형적인 경우다.

‘명랑’의 경우도 가족 판타지의 변형으로 읽혔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족 판타지는 부친이 개입하지 않는 가족 판타지, 삼대에 걸친 모계 공동체의 가족 판타지, 그래서 오이디푸스 서사를 허용하지 않는 여성형 가족 판타지다.

게다가 천운영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구체적인 생활의 곤경과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 작품은 전작들에서 천운영이 보여준 성역할의 전도라고 하는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지금 작가가 시도하고 있는 어떤 변화의 징후로도 읽혔다.

‘늑대가 왔다’가 가진 여러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명랑’을 본심에 올리기로 합의한 저간의 사정도 이와 같다.


(김형중 문학평론가)=한국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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