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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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모든 것이 혼란으로 가득차 있을 때, 그리고 그 삶이 때로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아니면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 늘 뭔가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원초적 욕구가 올라온다. 그래서 삶에 대한 은유와 상징은 어떻게 보면 아무런 실제의 의미도 없고 허무한 삶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특히나 정신적 세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말이다.

해변의 카프카 역시 이런 메타포로서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한다. 소년 다무라 카프카가 겪은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메타포는 자신의 존재확인이면서 동시에 그가 절대가치로 사랑하는 사에키를 또 다른 세계에 남겨두고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사랑을 현실세계에서 확인하는 일과 그녀를 사랑하는 단 하나의 존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말하자면 그가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그 메타포는 해변의 카프카라고 하는 그림으로 귀결되어버렸다. 그가 세상의 어디에 살든지 무엇을 하고 살든지 그의 껍질육체가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그의 마음은 늘 사에키상의 마음이 머무는 해변의 카프카 그림에 머물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행동과 생활과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어떤 가치도 없다. 각자의 삶에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은 바로 메타포에 의한 방식이다. 때로는 그것이 고도의 농밀한 진리이면서 존재의 실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루키가 이 책을 쓰면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어쩌면 이것이 아니었을까? 선악과 미추와 호오와 세상의 이중성에 휩쓸리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들의 내면 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것은 세상의 기준에서 판단할 수 없는 절대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 불확실성과 혼돈의 세상에서 허무해지고 무의미해져버린 우리 삶에 대한 보상이랄까, 가치의 복원이랄까 하는 그것이 결국의 우리 마음 속의 새로운 가치 생성이라고 하는 메타포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가 대학 때 올라다녔던 과자료실로 오르던 계단이 생각난다. 그때에는 그 계단이 희망과 꿈의 계단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찾아간 그 계단은 단지 도시의 어느 건물에나 아무렇게나 그저 있는 계단이랑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바로 그 계단에 사랑과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고 그러기 위해 메타포의 옷을 입혀주는 특별한 방식에 의해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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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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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처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나서 난 마치 조각그림의 일부만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이 가진 독특한 문체에 끌려 전혀 지루함없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상실의 시대>는 내가 방황하던 20대 초반의 삶을 다시 되살려내어서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그 소설속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지금 손에 든 이 책만큼 완성도와 작품성 면에서 나를 끌고 있는 작품은 없었다. 이 책은 그 자신의 말대로 하나의 촛점이면서 그 촛점속에 세상의 모든 촛점을 담아보려고 한 그의 노력이 엿보인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에서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이중성과 모순'이라고 말하고 싶다. 카프카라는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이 그러하며 두 가지 동떨어진 이야기의 시작이 그렇고(물론 이 두 이야기가 어느 지점에선가 만나리라는 예감은 누구나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의 나이를 성인과 소년의 중간지대인 15세로 한 것도 그러하며 소년의 심리를 표면의식의 자아와 내면의식의 무의식으로 표현하여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는 점도 그렇다.(까마귀소년이라고 상징되는 그의 지하깊숙히 자리한 불안한 무의식) 그것은 삶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쾌락, 삶과 죽음, 범죄와 예술, 미추와 선악의 모든 문제들을 담아내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깊은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담고자 했던 것은 메타포의 형식을 통한 인간 삶의 전형을 보다 불확실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보여주고자 함이 아닐까? 하지만 그 불확실성이 어쩌면 이야기전개에서 조각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늘 주입시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된다'는 신화적 상상력에 기댄 운명적 스토리를 전제로 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즉 이야기 속의 운명화된 카프카의 인생을 해석하는 독자들의 인생의 불확실성....이렇게 그가 보는 삶에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이 역시 공존할 것이다.

소설 작품 한 편이 때로는 삶의 깊이와 재미와 스토리의 꽉 짜여진 체계를 갖게 되어 사람을 감동시킬 때 그 작품은 단지 문학적 상상력으로서만 읽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잠재의식속에 자리잡아 삶의 깊은 색깔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물이 땅에 스며들어 걸러져서 일정한 양만이 깊은 수맥에 이르듯이 이야기의 줄거리나 등장인물과 사건들은 빠지고 그 작품이 주는 깊은 감동과 삶의 메타포만이 우리 의식의 깊은 수맥에 도달하여 우리들의 삶을 형성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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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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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환경운동가 치고 멘데스에게 바친다고 서문에서 밝힌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그의 소설 '세상 끝의 세상'과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와 더불어 손꼽히는 그의 환경소설이다.

노인 볼리야르는 아마존강의 원주민 수하르 족으로부터 자연을 바라보고 생태계의 균형을 중시하는 삶의 방법들을 배우고 밀림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며 지내는 평범한 노인이다. 그가 책을 읽게 된 것은 더 이상 젊지 않는 자아에 대한 정체감을 갖기 위해서였다. 특히 그가 즐겨읽는 연애소설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그의 이데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금발머리의 밀렵꾼의 죽음으로부터 바뀌어버린다. 새끼삵괭이와 수컷을 죽인 그는 암삵괭이에게 살해당하고 이 복수심에 불타는 암삵괭이에 의해 주민들은 하나 둘씩 살해당한다. 결국 아마존의 밀림을 파헤치고 문명화시키려는 백인들의 무모한 탐욕이 조화롭고 평화로왔던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밀림의 생리를 잘 아는 노인 볼리야르가 삵괭이 사냥에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새끼와 가족을 잃은 암삵괭이의 처지는 아내를 잃고 가족 하나 없이 혼자서 살고있는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으며, 파괴되는 밀림에 의해 본의와는 무관하게 목숨을 건 싸움으로 내몰리게 될 운명조차 같다.

환경소설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의 상상력(2미터도 넘고 지능을 가지고 인간에 맞서 지혜롭게 싸우는 삵괭이)과 자세하고 치밀한 이야기 전개는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은 결국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가 결국은 인간의 승리일 수 없고 물질적 승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부끄러움일 뿐이라는 노인의 참회는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물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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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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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식민지 상황과 그로부터 독립되던 역사적 상황을 안다면 이 책은 더욱 잘 이해되어질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문체는 뭔가 독특한 것이 있다. 어떤 현실을 객관적이고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마음 속에는 어떤 감정과 욕구에도 휘말리지 않는 그만의 냉정함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데이비드 루리라는 50대에 접어든 대학교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나이와 더불어 추락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추락하게 만든 것은 멜라니라고 하는 한 제자와의 우연의 만남이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결국은 그를 대학에서 쫓아내게 되지만, 그는 자신을 쫓아낸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관계를 직시하는데 참을 수 없어하는 세인들의 눈이라고 단정짓는다.

하지만 자신의 어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흔히 자기정당화의 방법은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추락을 바이런의 삶에 비유한다. 테레사와의 열정적인 사랑과 추락, 그로 인한 바이런의 파멸속에서 그와 겹쳐지는 자신의 삶의 예술적 의미를 찾으려 한다. 오만하면서도 전형적인 지식인의 병든 모습일수도 있고 어쩌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문제에서만이다. 반대로 자신의 딸, 루시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평범한 세상사람이 되고 만다.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중성을 작가는 냉담하고도 자신을 객관화하는 담담한 글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추락이란 제자와의 성관계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딸의 삶을 수용하는 방식들간의 건널수 없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정신이 겪는 자아분열이기도 하고 자기모순일수도 있다.

결국 딸이 강간범의 아이를 갖고도, 자신의 농장을 부당하게 점점 잃어가고 있으면서도 그런 억울함에 호소하기는 커녕 잘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와의 멀어진 거리를 메울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게 된 그가 택한 정신적 자살이자 체념이 추락이다. 그가 애정을 갖고 돌봐왔던 절뚝거리는 개는 어쩌면 자신의 모습이며 그 개를 수술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경험하는 추락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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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밤의 꿈 - 레종북스 세계명작시리즈 1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이병하 옮김 / 여성신문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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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수많은 사랑은 모든 것이 고유하며 단 한 번 뿐인 사랑이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쏟아붇는 그리고 그 사람만이 필요로 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대상이 바뀌어도 자신의 내면에서 솓구쳐 오르는 사랑을 늘 분출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그리워하고 여자는 남자를 간절히 원한다.

사랑에 관한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우리에게는 왜 사랑이 필요한가? 라는 물음이었다. 그것이 단지 우리들의 생리적인 욕구만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라면 너무나 허망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서 삶을 완성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고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가진 본성이 아닐까?

두번째는 사랑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의 에너지로 삶이 즐겁고 행복한 에너지가 가득 찬다. 그 에너지를 한꺼번에 폭발시켜버리고 시간이 흐른 후 폭발 후의 재만 남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폭발의 에너지를 더디게 긴 시간 속에서 지연시키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것이 좋고 그르다 말할순 없는 것이고 다만 그것은 사랑하는 당사자가 가진 에너지의 표출방식의 차이이다. 다만 나는 이 폭발적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좀 더 내면적인 방향으로 돌려서 의미있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예술가나 작가처럼.....

마지막으로 그 사랑이 나를 뒤흔들고 지나간 후 내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과연 나는 그 사랑으로 더욱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타인에 대한 벽을 한층 더 두텁게 쌓은 것은 아닌가? 따지고 보면 이것은 내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대로 이루어진다.

사랑은 때로는 자아를 잊게 한다. 사랑하는 그 순간 엄청난 고통과 절망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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