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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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의 소설엔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허무함이 있다.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물질주의와 돈에 눈먼 세상에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을 채우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 참되고 진실한 가치는 없다라고 하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즉 세상엔 정말 인간적이고 진실한 가치는 없기 때문에 그저 내 욕망에 따르는 삶이 무난하지 않은가 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냉소가 그의 글 아래 깔려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글에서 허무를 본다.

하지만 이 삶의 허무를 용납하지 못하는 인물의 설정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때로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니까...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열정을 불어넣는다. 자신이 맺고 있는 세상과의 관계 속에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런 의미부여가 없는 기능적인 삶, 냉소적인 삶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참기 힘든 일일테니까...

어쩌면 참된 삶이란 그가 그리고 있는 열정과 냉소라고 하는 양극단의 중간지점 어디엔가 놓여 있을 수도 있다. 열정이란 삶에 대한 과장된 의미부여일 뿐이고 냉소란 삶에 대한 지극히 기능주의적인 생각이므로 사실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담기가 망설여진다. 어쩌면 그가 그린 극단의 두 삶의 방식에서 독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찾아보도록 하고자 한 게 아닐까

현실적 삶은 늘 허무하다. 내가 욕망하는 바는 늘 채워지지 않고 때로는 내가 나를 불사르고 사랑하고 싶은 이를 얻지 못하기도 하며, 진정으로 내 안에서 올라오는 영혼의 욕구를 버리고 외부세상이 강요하는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인생도 있다. 삶의 깊은 좌절과 고통속에서 삶에 대한 허무와 냉소의 꽃은 피어나고 그 허무와 냉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시행착오의 과정으로 삶의 헛된 열정의 병에 걸려야만 한다.

삶은 아직 삶을 이해하지 못한 미숙한 사람이 겪어야 하는 극단적인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삶의 많은 경험을 통해 삶에서는 결국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깊은 허무의 수렁에서 헤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의 성숙한 삶이란 그래서 양쪽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고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 우리의 빠른 삶의 속도에 지친 영혼을 천천히 그리고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지혜를 갖는 것이 정말 인생을 가치있게 그리고 의미있게 사는 길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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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라
맹난자 지음 / 김영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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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가 낳은 위대한 작가들의 묘비를 찾아 떠난 여행은 고갈되어 황폐한 우리 영혼을 고양시켜준다. 그들의 죽음 속에 삶은 담겨져 있었다. 그들의 삶 속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삶의 극한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과 번민 속에 그것을 뛰어넘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한 편의 시로, 불멸의 이야기로 소설로 삶으로 이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그들이 삶을 살아오며 가졌던 인생의 의미와 가치엔 빛이 바래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과 연민과 생의 열정은 영적으로 승화되어 인간정신의 나아갈 길을 횃불로서 밝혀 주었다. 그들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하며 그들의 승화된 정신적 경지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하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란 인생의 기쁨과 열정과 사랑과 행복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뒷면에 놓여진 고통과 번민, 시련과 좌절, 절망과 비극조차도 삶의 아름다움이 되고마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톨스토이도 세익스피어도 괴테도 임어당도 ....그들의 삶이 말해주는 한결같은 진리는 인생의 희노애락에 선악과 시비가 없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영혼을 성숙하게 하고 고양시켜주는 삶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사생관에는 그런 선악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삶 그 자체를 즐기며 살 수 있었으리라...그들이 가진 영혼의 기억과 성숙함에 의해서건 이 생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에 의해서건....그런 면에서 이 책은 죽은 그들의 흔적을 살펴보는 책이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되살려 읽으며 그들의 영혼과 대화하고 교류하여 우리들 각자가 그들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작가들을 한정된 지면에 다루는 바람에 내용을 온전하게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단순한 기행문을 넘어 그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자 했던 저자의 노력에 깊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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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별맘 2004-05-12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삶과 죽음은 같은 길을 걸어가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것이겠죠. 단지 인정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그저 인식의 수준에 머문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원래는 없건만 인간의 분별과 집착이 선과 악을 나누고 스스로 고달파 하는 것이겠죠.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인듯 합니다. 저도 한번 읽어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달팽이 2004-05-1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과 악이 멈추어버린 광활한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윤별맘 2004-05-1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 걸기... 선과 악은 마음 작용의 문제죠, 선과 악이 멈춘다 함은 마음 작용이 멈춤을 말하는 것일텐데... 마음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는 상태는 마음이 죽었을 때이죠. 달팽이 님께서 그리워하시는 건 선과 악을 초월한 님의 마음이시겠죠^^

달팽이 2004-05-1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윤별맘 2004-05-1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은 ㅇㅇㅇ 입니다." 라는 관념적인 정의는 중요치 않죠.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상황에서 내 마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즐겁다. 화가 난다. 짜증이 난다." 등과 같이. 내 마음이 바로 그곳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달팽이 2004-05-13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념적인 정의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증험하는 것이죠..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순간적으로 올라왔다 사라지는 그 잔물결같은 마음 속에 변하지 않는 깊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할 것 같군요...그것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마음이기도 하구요...그런 면에서 마음 공부란 끝이 없는 길 같기도 하구요. 말씀 감사합니다.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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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덩이를 금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을 알고 있다면 아마 자신의 인생은 크게 변할 것이다. 그런 연금술이 있다면 누구나가 그것을 배우고 싶어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런 연금술이란 다름아닌 돈을 잘버는 직업이나 기술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돈이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으로 되는 소비중심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가치에 맹목적인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코엘료가 말하는 연금술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그래서 마음을 고양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을 말한다.

그런 연금술은 우선 말과 글의 언어를 떠나 동물이 내는 언어를 알아야 하고 식물이 내는 언어도 알아야 하며 광물과 모든 생명체가 내는 언어를 알아야 한다. 즉 '만물의 언어'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아들어야 하고 그런 만물의 언어의 바닥에 존재하는 신의 언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온전히 현재에 사는 방법이다. 지금 이 순간 온 우주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온전히 귀기울이는 것. 지켜보는 것. 느끼는 것.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양치기였던 산티아고가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 속에는 이런 만물의 언어, 즉 신의 언어가 곳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운명적인 삶의 기로에 서있을때 항상 그를 주어진 운명대로 이끌게 해주기 위해 신이 남긴 표지가 존재했다. 과연 나의 삶도 그러했다고 본다. 내가 태어난 곳, 나를 낳고 기르신 부모님, 그 부모님을 낳고 기른 조부모님들과 나와 함께 유년시절의 고락을 함께 한 형제들과 동료들, 많은 사람들을 지나치고 만난 아내와 지금의 내 마음의 여행에 함께 한 사람들 모두 일종의 지표였다. 진정한 자아의 신화를 찾기 위한....

그 운명적 선택의 순간, 나를 끌어당기는 운명의 힘을 마주보는 순간, 나는 그것이 온전히 나의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마음 속에서 에고로 인한 온갖 부정적 감정들과 생각들을 걷어내어 주고 추위에 언 영혼을 따스로운 태양 아래서 녹여주어 긍정적 마음으로 바꾸어내는 영혼의 연금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만물의 언어를 현상하는 물질세계의 언어와 닿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만물의 정기를 알고 사는 것은 단순한 진리를 마음과 몸으로 행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고로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아는 것이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것임을 이해없이 생각없이 자연스레 가지는 마음이며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며 삶인 것이다.

인생여행을 통해 누구나가 자아의 진리를 찾아나간다. 다만 그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각자에게 고유한 길이다. 하지만 그 고유한 길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의 언어, 신의 지표를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사이에는 천국과 지옥의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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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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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위화의 이 소설을 접한 것은 '매혈기'라고 하는 색다른 제목이 주는 끌림이었다. 역시 넓고 넓은 중국 대륙은 우리가 가벼이 보아넘길 곳이 아니었다. 모처럼 눈물을 찍어가며 때로는 웃음소리를 크게 질러가며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 책을 단숨에 읽어내렸기 때문이다.

허삼관이라고 하는 주인공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는 딴 남자와 눈이 맞아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고 넷째 삼촌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 누에방직공장에서 일을 하다 우연히 피를 팔게 되고 그 피를 판 돈으로 그는 하옥란이라는 여자를 얻어 결혼을 하게 된다. 그가 다시 피를 팔게 된 것은 하소용의 아들로 의심되는 첫째 아들 일락이가 대장장이 아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게 되면서이다. 피는 그에게 있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서민이 시련을 극복해가는 마지막 수단이자 힘없고 돈없고 벼슬없는 아무 보잘 것 없이 사는 이가 가지는 마지막 자기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는 땀과 달리 자꾸만 팔게 되면 그 사람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되며 결국엔 한 인간의 존재기반을 허물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귀중한 피를 그는 결국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집안의 생계와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계속 팔아야만 하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이렇게도 기구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가 집을 나간 일락이에게 국수를 사주기 위해 업고가던 모습에서, 아내와 간통했던 하소용이를 살리기 위해 아들 일락이에게 사람먼저 살리자고 부탁하던 모습에서, 문화대혁명의 환란 속에서 세 아들 앞에서 아내의 부정은 자신의 부정과 같다고 하면서 옥란을 두둔하던 모습에서, 만성 간염으로 죽어가는 일락이를 구하기 위해 매혈여로를 거쳐 아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내 가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감동과 삶 그 자체에 대한 연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가진 것이 하나 없는 비참한 삶 속에서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아넘기지 못하는 연민과 사랑이 바로 이 작품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그것을 너무 무겁고 어렵게만 읽히지 않도록 적절한 희극적 요소를 가미한 것은 어쩌면 실제로 우리 서민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의 굴레를 수용하며 극복해가는 삶의 지혜였을 것이며 그것을 이렇게도 날카롭고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위화의 작가적 위대함의 산실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삶을 살아오며 느끼는 삶 그 자체의 애환과 그로 인한 연민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내가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많은 사람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그들의 애절한 삶에서 내 마음도 슬퍼하며 한줄기 공감의 눈물을 뿌리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모습은 달라도 상징이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똑같은 삶의 비극 속에 놓여진 인간 삶의 공통된 슬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매혈을 하며 사는 인생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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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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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먼다는 것은 단순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눈이 먼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자동차를 잃어버린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집과 자신의 아내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소유물이 자신인양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고 자신을 버리는 사람까지 눈 먼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180도 뒤집어버린다. 빈부와 성별, 종교와 사회적 신분은 사라지고 눈먼자들의 도시에는 새로운 조직화와 새로운 사회적 서열이 생긴다.

기존에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모든 소유물과 사회적관계의 파괴를 견디지 못하면 눈 먼 상태의 현실을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 눈 먼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바뀐 현실에 대한 수용의 자세이다. 따라서 눈 먼 세상에서는 보이는 세상에서의 물리적이고 현상적인 가치는 사라져버리고 이젠 보이지 않는 가치가 그들의 삶을 지탱시켜준다. 동병상련에 처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해주고 공존을 위해 협력하는 마음의 변화가 바뀌어버린 현실에서 찾아낸 지혜이자 선물이 된다.

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마 더 이상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쳐버리거나 자살하고 말 것이다. 오물덩어리에 둘러싸인 채 오물을 몸에 묻히고 숨쉬고 살아가야 하는 올릴것만 같은 불결함을 수용하는 것, 남편이 자신의 앞에서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 장면, 자신의 부끄러운 생존의 빵을 얻기 위해 아내를 깡패들의 소굴로 보내 몸을 바치게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그것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변화된 세상에선 무엇보다 변화된 삶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전체의 삶의 지속에는 필요하니까.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가 우리들에게 주는 메타포는 많다. 그것은 인류공존의 문제(핵, 환경, 식량, 자원 등)가 목도해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이기심과 탐욕을 채우려고만 하는 정지와 멈춤을 모르는 경제성장의 사회와 전쟁의 사회가 그러하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또는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관심없이 늘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면에만 인생을 허비하고 사는 허무에 찬 이 시대의 방랑객들에게 과연 그대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물어오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전쟁없는 사회, 학살없는 지역, 비극없는 곳이 없다. 늘 인간은 비극을 통해서만 정화되는 것인가? 눈먼자들의 도시에 다시 눈을 갖게 된 검은 안경을 쓴 여자가 대머리에다 한 눈은 없고 늙어버린 노인을 여전히 자신의 삶의 반려자로 선택하는 장면에서 그래도 눈먼세상이 우리 세상에 가져다 주는 교훈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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