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승주나무 > 마르크스 열풍에 대한 국내 시장의 반응은?


▲ 1989년에 출간된 <자본론> 시리즈(총5권)은 지금도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2009년 초에 출간된 자본론 해설서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조사일 : 2009년 3월 17일)



마르크스에 대한 뜨거운 관심, 실제 판매는 어떨까?

중국에서는 한 달에 많아야 2~3질 정도 팔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국영 신화통신과 각종 매체에서 이슈로 다룰 정도다. 마르크스의 고국 독일에서는 자본론 판매량이 이미 지난해보다 3배나 늘었다고 한다.
국내에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경제지면에 자주 등장하는 칼럼니스트들이 마르크스를 자주 입에 담았고 마르크스 해설서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런 흐름을 관찰하던 중, 인터넷 서점에서 자본론 관련 서적들을 검색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민주화운동 직후인 1989년 초에 출간된 비봉출판사의 <자본론> 시리즈가 아직도 심심찮게 팔리고 있었다. 인문분야 독자가 많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7천 대의 sails-point를 기록했다. (Sails-point(알라딘), 판매지수(예스24)란 인터넷 서점이 각자의 산출방식으로 매출실적으로 표시하는 지수) 하지만 뒤로 갈수록 판매지수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출판영업의 관점에서 당연한 말이지만, 1권과 다른 권의 판매가 도서구매자들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한 호기심으로 첫 번째 권이나 두 번째 권을 펼쳤지만 도저히 다섯 번째 권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혹은 처음부터 한 질을 모두 구매했을 수도 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출간된 지 불과 3~4개월도 안 된 두 권의 책이 20년간 누렸던 '원전' 자본론의 기세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대의창 출판사에서 출간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임승수, 2008년 12월),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지승호, 2009년 1월)는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묵직한 원전을 들고 있을 만한 여유가 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입맛을 달래주는 패스트푸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원전보다 해설서가 각광받는 시대가 됐다.


▲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작가 임승수 씨가 80여 명의 대중들 앞에서 책의 앞 장부터 끝장까지 차근차근 개념을 '강의'하고 있다. 


원전보다 해설서가 각광받는 시대

몇 달 전부터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를 오랫 동안 연구해온 세미나공간에서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윤독과 발제를 번갈아 가며 힘들게 진도를 따라간 지 3개월 정도 됐다. 특히 1-1권에 있는 1편~4편이 자본론의 정수이자 가장 건너기 힘든 '대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수 차례 도하를 시도했지만 끝내 넘지 못했던 첫 번째 권은 오랫동안 자본론을 읽어온 대학원생들에 의해 설명을 들으며 일독 정도 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3월 12일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시대의창 출판사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작가와의 만남>(장소 : 신촌 아트레온 토즈)은 많은 독자들에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효용 가치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 자본론 1-1의 주요 개념들을 '선행학습'할 수 있다. 그리고 원전의 무게를 견디지 않고서도 어디 가서 마르크스에 대해서 '아는 척'할 수 있다.
이 책을 쓴 임승수 씨도 "내가 이해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고 할 정도로 이 책은 철저히 자본론 원전 이해에 충실하고 있다. 자본론 1-1권에 부딪힌 독자라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1~6강을 훑고 재도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실제로 자본론 서두에 등장하는 난해한 개념을 작가는 아주 쉽게 설명하는 범상찮은 기술을 선보였다.

"상품이라는 녀석의 특징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쓰기 위해서 물건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상품이 아니다. 상품은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이 때 팔 수 있는 상품은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상품의 사용가치에 해당하며, 그것에 값을 매길 수 있을 때 이를 교환가치라고 한다. 두 개의 전제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상품이 성립된다."

상품과 사용가치, 교환가치 같은 어려운 개념을 간단하게 설명하며 화폐와 노동, 자본에 대해서도 곧잘 정리했다. "수많은 상품 중 하나가 튀어나와 화폐 역할을 하게 되는데, 거래가 늘어나고 재화가 발생하면 화폐의 등장은 필수적이다"라는 설명은 화폐가 상품에서 비롯되었다는 자본론의 요지를 온전하게 설명했다.
강연장에는 80명 넘는 인파가 몰려 뒷자리 보조좌석과 바깥에까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나이는 대학생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강연의 콘셉트는 책의 기획의도에 충실했다. 강사는 1강~15강까지의 챕터를 리플레이해주었다. 현장에서 강연의 분위기와 내용을 지켜보며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지만, 약간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 60석 남짓한 좌서에 빈틈이 없었다. 이것은 앞칸의 모습에 불과하다. 뒤쪽에는 보조의자를 긴급투입했으며 옆방에서까지 강연내용을 지켜볼 정도였다.



되살린 마르크스의 기억, 씨앗은 언제 꽃필까?

"자본론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공감하려면 높은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책은 단지 거기에 사다리를 하나 놓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임승수 씨는 자신의 책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담담하게 말했다. 겸손하기보다는 당당한 멘트로 이해됐다. 구체적인 양태나 방법이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유의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것이 현실의 고질적인 모순을 분쇄하는 무기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대중강연장이 아니라 '헌책방'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 자본론 원전 이해를 위해 헌책방에서 발굴한 책들이다. 자본론의 오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치론'을 중점적으로 봐야 하는데, 그 때 이영협의 <경제학>이 쓸모가 있고, 자본론의 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경제사적 관점을 길러야 하는데 일반경제사요론을 구할 수 있으면 좋다. 마르크스가 특히 공을 들이던 주제는 '소외'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이를 포함해 소외에 관한 전반적인 담론을 살펴보고 싶다면 정문길의 <소외론연구>를 권할 만하다.


현재의 전방위적인 위기상황은 현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천년에 걸친 모순들이 엉키고 설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단지 대중적인 담론으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지성을 통해서 전승된 맑은 담론, 거친 음식과 같은 원전을 힘겹게 소화해야만 미래의 문이 열린다.

요컨대 우리 사회가 마르크스에게 시사점을 얻기 위해서는 젊고 노련한 지성에 의해서 연구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류의 해설서는 철저히 기능서로 분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상황이다. 우리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페이퍼에 참여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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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9-03-17 0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계자료에 대한 해석에 약간 의문이 드네요. 알라딘과 예스의 회원 성향이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자료인 것 같아요. <원숭이도>와 <김수행> 이 두 권의 판매량만 놓고 볼 때, 알라딘과 예스가 거의 2배차이가 나는데요, <자본론>의 경우는 역으로 2배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어요. 이를 좀 더 확대해석하면 알라딘과 예스의 회원수의 차이가 전자에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아시다시피 예스가 알라딘에 비해 회원이 크게 많잖아요? 그렇게 볼 때 알라딘 독자들이 <자본론>을 무시무시하게 사들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위의 자료를 두고 알라딘과 예스를 일괄적으로 통합해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보여요. 3권의 절대 판매량이 예스가 많지만, 알라딘에서의 판매비중이 훨씬 놓을 거라는 판단에서요.

위의 글에서의 통계자료에 대한 해석에서 현재 <자본론>에 대한 판매량보다 다른 2권의 판매량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셨는데, 이는 <자본론>이 전5권이라는 점, 출간된지 20년이나 됐다는 점 등을 너무 간과하시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알라딘만 놓고 봤을 때, 출간된지 20년된 책이, 게다가 어렵다고 소문난, 제1권만도 7000부 이상 팔렸다는 건 <원숭이도> 8000여권쯤은 비할바가 아닌거 같은데.

위의 자료를 보다 합리적으로 해석하자면, 알라딘의 <자본론> 전5권의 판매량 총합만 놓고 볼 때, 나머지 두권의 최근 판매량을 합친 것보다도 월등히 앞서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래도 "우리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결론 도출를 위한 성급한 해석이 아니었나 싶네요. ㅎㅎ

승주나무 2009-03-20 10:11   좋아요 0 | URL
댓글 늦어 죄송해요. 제가 할 수 있는 통계치에서 적용해서 작성한 것이니만큼 공신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나름대로의 근거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자본론이 그렇게 많이 팔렸다는 사실은 최근 출간된 2권의 위세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르크스 열풍과는 상관 없을 정도죠.

따끔한 지적 감사합니다.
 
이유 있는 항의

그냥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글을 잘 써서 그런다는 게 아니라,
후기를 진솔하게 구체적으로 남겨야 나중에 그걸 보고 나서도 후회가 덜 하거든요.

예전에 시를 쓴 적이 있는데
시를 쓴 다음에는 절대 다시 그 시를 보지 않고
일주일 정도 지나고 나서 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 시를 보면 감정은 누그러지고
시에 대해서 냉정하게 볼 수 있게 되더라구요.

일주일 후에도 살아남는 시는 단 하나도 없었죠.
다른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저 스스로에게 막 화가 나는 거 있죠.

기형도 추모행사에 다녀와서 후기를 남기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입니다.
많은 분들이 후기를 쓰신 것을 보고
혹 제가 당첨이 되면 참 민망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당첨 마일리지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쓴 후기가 당첨이 많이 되니까
행사가 있을 때 제 얼굴이 보이면
알라디너 분들이 많이 슬퍼하지 않을까 하여....


그래서 말인데,
이 글을 보고 있는 알라딘 관계자들은
제 후기를 당첨에서 제외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후기는 후기대로 올리지만,
열심히 글 남기신 다른 분들에게도 기회를 좀 주셨으면 합니다.
괜히 4만원 탔다가
은근히 원망의 대상이 되는 상황은 난감하니,

저에 대한 배려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알라딘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려 볼 수밖에 없겠네요.
아니면 제 관심분야의 행사에 보이콧하는 수밖에 없겠죠.
저는 알라디너 이웃이 더 소중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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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9-03-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마지막 멘트에 닭살이 송송 돋았지만 참 예뻐요.

승주나무 2009-03-13 14:02   좋아요 0 | URL
요즘 예쁘고 귀엽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더라구요. 실제로 예쁘고 귀여워서 그런 것 같아요..^^

네꼬 2009-03-12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하하! 승주나무님! 원망이라뇨. ㅎㅎ 저는 상금을 말 그대로 '탐'냈다가 승주나무님의 진심이 느껴지는 후기에 놀라 반성하고 꼬리를 내린 건데요! (상처 받으신 거 아니죠? ㅎㄷㄷ) 제가 가졌던 사심도 부끄럽고, 또 그렇게 좋은 후기에 추천과 댓글만으로는 부족한 듯해서 트랙백을 달아보았더랬어요. 아니 글 잘 쓰시는 게 죕니까. 원망은 무슨 원망요. (질투라면 몰라도!) 하하. (((안녕하세요? ^^ 즐거운 마음으로 트랙백을 했던 네꼬 드림)))

승주나무 2009-03-13 14:02   좋아요 0 | URL
네꼬 님 덕에 당첨 마일리지가 날아가면 원망페이퍼를 쓸까 생각중입니다^^

모과양 2009-03-1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될 것을 우려하여 알라딘 이웃들에게 피해가 없는 후기만 알라딘에 써요. 서재 외는 제대로된 블로그도 없지만 서도... 알리디너들이 제일 소중하니까요.ㅎㅎ

실은 알라딘에서 당첨 잘 안시켜 줘욧! ㅠ.,ㅠ

승주나무 2009-03-13 14:03   좋아요 0 | URL
"알리디너들이 제일 소중하니까요" 무슨 CF 광고멘트 같은데.. 재밌어요~
이런 페이퍼 쓰는 것도 잘난척으로 보일까봐 조심스러워요~

순오기 2009-03-13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유쾌한 사연이네요.
네꼬님 글도 진즉에 봤었거든요~~~ 알라딘은 당첨될 만한 글을 당첨시키겠지요.^^
알라딘은 서재인들의 둥지라서 소중하잖아요.

승주나무 2009-03-13 14:04   좋아요 0 | URL
"알라딘은 당첨될 만한 글을 당첨시키겠지요"
오~ 이 말을 기다렸습니다. 알라딘이 알아서 하겠죠..
저는 원망이든 선망이든 다 좋습니다. 무관심만 하지 않는다면 ㅋ
 
기자가 되고 싶은 막내~

순오기 님이 페이퍼에 질문을 남겨놓은 것을 찾았다.
그것도 심심해서 검색창에 승주나무를 쳐봐서 그때야 알았다.

언론인이 되고 싶어하는 학생에게 추천하는 책이라..

손석춘 씨는 오랫동안 언론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언론에 관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특히 '독자'에 관한 배려도 많이 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문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지를 담은 글이지요. 일반독자에게 신문의 제작 과정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저의'를 알려주는 <신문읽기의 혁명>과 학생 독자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쓴 최근작 <순수에게>를 추천합니다.


<순수에게>를 펴낸 '사계절 출판사'에서 목록집에 담은 글을 인용해둡니다.

오랫동안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사회적 진실을 공론의 장으로 내오는 데 앞장서 온 비판적 언론인 손석춘. 그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성숙한 발전을 위해 여러 권의 책을 내왔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십대에 띄우는 글을 썼다. 저자 손석춘은 십대들에게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순수함’을 지켜 나가야 한다고 권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순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되새김질해야 할 열 가지, 곧 '순수 10계'를 내놓으며 우리 사회와 역사를 톺아본다.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추천도서 목록집 <아름다운 서재> 4호 일부

제가 언론운동을 하면서 현장에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 '언론'의 면모는 전적으로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손석춘 씨는 기성 언론을 대표하는 분이시지만, 순오기 님의 자제분이 언론인이 될 때는 언론의 패러다임이 변화돼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래의 언론을 생각해야 할 때이죠.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무너졌듯이 기자와 독자의 경계도 무너졌습니다. 호접몽보다 더 호접몽스러운 언론환경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순오기 님의 자제분은 이미 기자가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이를 사람들이 보면서 반응을 한다면 하나의 언론, 즉 1인미디어인 것이죠.

1인미디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의 언론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략적인 청사진이나마 제시하는 책이 미디어2.0과 <세계 1등 인터넷 신문에게 배우는 블로그와 커뮤니티 경영 전략>입니다. 후자는 가디언이라는 신문이 구독부수에 비해 인터넷 언론사 지존이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는 없을 겁니다.


이 책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제가 한번 더 강조하고 싶은 말씀은, '기자'를 관찰하지 말고 '독자'를 관찰하라는 점입니다.

저도 3년간 고등학생 진학컨설팅에 참여해 왔지만 학생들은 대체로 드러나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환상을 갖기 마련입니다. '기자'에 대한 동경도 어느 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 정도는 '자기'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금새 없어질 수 있을 겁니다.

좀 건방진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기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넉 달 만에 이렇게 페이퍼를 쓰게 돼 민망하지만,
민경이에게 제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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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3-1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개월 뒤의 답변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경이 기자는 벌써 접었는지, 2학년 장래희망란에 번역가라고 썼답니다.ㅋㅋㅋ
이 페이퍼 별찜해놓고 민경이도 보여주고, 저도 저 책들을 챙겨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 책들은 막내인 민경이보다 대딩인 큰딸이 더 관심있어 할 것 같습니다.^^

승주나무 2009-03-13 14:02   좋아요 0 | URL
민경이를 위해서 쓴 건데..그러면 대딩용으로 다시 써볼까요 ㅎ
 
 전출처 : 승주나무 > 기형도 시인 20주기를 찾은 특별한 문상객들


▲ 기형도 시인이 아끼던 수동 타자기로 집자한 <기형도 전집>이라는 글씨체는 이제 기형도의 상징이 되었다. 친필로 똑바로 쓰다가 타자로 된 시를 읽고 시인이 몹시 흐뭇해 했다는 일화를 생각하게 만드는 현수막이다.



20년 만의 제사를 찾은 문상객들

좀 특별한 문상을 다녀왔다. 벌써 20년이나 지난 기형도 시인을 추억하는 <기형도 시를 읽는 밤>에 초대됐다.
이 날은 기형도 시인이 좋아하는 진눈깨비는 아니지만 하루 종일 굵은 비가 내려 자연스럽게 음습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회를 맡은 '대중음악가' 성기완 씨는 "기형도 시인이 홍대 주변에서 서성거리다가 이곳(이리카페)로 들어왔을 것 같은 밤이다."라고 말했다. 3월5일 저녁 인터넷 서점 알라딘(www.aladin.co.kr/)과 기형도 시인의 주요 작품들을 출간한 문학과지성사(www.moonji.com/)가 공동으로 주최한 <기형도 시를 읽는 밤>에는 시인과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부대꼈던 소설가 성석제, 시인 이문재, 황인숙 씨와 시인의 후배군인 김중혁, 한강(소설가), 함성호, 진은영, 최하연(시인) 등이 애써 준비한 시들을 낭독하며 독자들과 함께 했다. 이 시인, 소설가들은 다른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기형도에게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 기형도의 시 <안개> 일부


이 날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발디딜 틈이 없이 들어차 기형도를 추억하는 독자들이다. 알라딘에서 이날 밤을 위한 티켓 25장(1장당 2명)명을 내놓았을 때 티켓을 얻기 위해 정원의 10배인 250명이 신청을 했다. 저마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려주며 기형도 시 읽는 밤에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인터넷에서의 열기를 말해주듯 그날은 자리가 없어서 맨바닥에 앉아서 행사를 즐길 정도로 빽빽했다. 기형도 20주기에 관심을 갖는 취재진은 뒤로 하더라도 시인이 생전에 갖고 싶었던 '독자'들이 20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기 때문에 사회자도 "기형도 시인이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형도는 생전에 끝내 시집을 독자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사후에야 동료들에 의해서 작품집이 출간되었다) 주인공인 시인은 없고 나머지 사람들이 다 주인공이 되는 특이한 제삿날이라는 인상이었다.
행사에 참여한 문인들은 오늘의 행사를 위해 창작시도 쓰고 작품집도 읽고 했지만 저마다 기형도의 흔적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기형도로부터 일부러 도망친 문인도 있었다. 그 사연이 참 다채로웠지만 그들에게 기형도의 '시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 기형도의 시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일부



▲ 소설을 쓰는 한강은 기형도 시집을 대학 1학년 때 보았을 때 겉이 앙상해 보였는데 내용은 전혀 앙상하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시집에는 밑줄이 마구 그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밑줄이 하나도 그어지지 않았지만 기형도 시집 하면 생각난다는 <기억할 만한 지나침>을 낭독했다.


성석제 "'노인의 노안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나라'라고 했을 것이다"

문인들은 기형도 작품 중에서 유난히 흔적을 깊이 남겼던 작품을 낭독했고 이 날을 위해 특히 시를 써오기도 했다. 이 시들은 '샘플링'이라고 하는데, 기형도의 시어를 서캐훑이해서 20주기에 어울리는 새 시를 하나 만든 것이다. 시인, 소설가들이 좋아했던 작품의 목록을 올려 본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한강),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김중혁), 어느 푸른 저녁(성석제), 입 속의 검은 잎(이문재), 그 집 앞(황인숙), 빈집(백현진, 퍼포먼스)

낭독도 낭독이지만 이 날 문상 온 문인들의 재기발랄하고 날카로운 멘트들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소설가 김중혁은 습작기에 시인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시를 쓰지 못해 소설을 쓰게 됐으며 소설 속에 그 열패감이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소설가로서 이 자리에 초대된 것은 자신이 유일하며(성석제는 시도 쓰고, 한강은 문체가 유려한 시 같으니까) 소설을 열심히 써서 기형도 낭독회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성석제는 기형도 20주년 소회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갑자기 '유인물' 이야기를 꺼냈다.
"낭독을 하려고 유인물을 보니 글자가 안 보여 혼났다. 이렇게 노인을 배려하지 않는 나라가 있을까? 아마 기형도가 살아 있었으면 이렇게 불평했을 것이다"
청중들은 이 소설가들의 재담에 그 날이 제삿날인줄도 모르고 킬킬거렸다. 황인숙 시인은 더 이상 보탤 것 없는 말로 기형도에 대한 감상을 정리했다.
"나잇살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도 참 살이 많이 쪘구나. 기형도도 살이 많이 쪘으련만."
이 말에 옆에 있던 이문재와 성석제가 몹시 흥분했다. 성석제가 한마디 거들었다.
"저는 보이는 곳에 나잇살이 있고, 안 보이는 곳에 노안이 있습니다."

기형도 시에 대한 시인들의 고뇌도 엿들을 수 있었다. 함성호 시인은 십 년만에 읽은 느낌이 '유치하다'고 말했다. 기형도는 죽었지만 자신은 살아서 시를 계속 써야 했기 때문에 시가 늙고 노련해지는 게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유치함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나는 박제된 시와 나잇살 먹은 시를 동시에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문재가 이런 느낌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이 젊은이(기형도)로 하여금 이토록 단정적이고 단호한 언사를 사용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것은 기형도 시를 오랫동안 마주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 경우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기형도를 넘어서거나 기형도를 회피하게 된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 기형도의 시 <오래된 書籍(서적)> 일부


▲ 기형도에 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단짝친구 성석제다. 시인이 생을 마감한 3월 7일로부터 두 날 남짓한 때에 첫시집을(입 속의 검은 잎)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 때문이다. 원재길, 조병준, 이영준, 후배 기자 박해연 등은 누구의 위임도 받지 않은 편집위원으로 자처하고 첫 시집과 전집, 최근 출간된 20주기 기념 문집 작업을 함께 했다. 기형도의 첫 시집을 황망히 엮고 지금은 작고한 김현 선생을 찾아갔을 때 김현 선생이 직접 원고를 받으며(선생은 당시 몸이 불편했다) 손을 꼭 잡아주셨던 그 손의 힘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대학 3학년 때 손에 쥔 유고시집 뒷장에 쓴 말 "1989년 7월 15일 나에게"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 기형도의 시 <그 집 앞> 일부

2시간이라는 짧은 '의식'을 위해서 문인들과 음악인들이 오랫동안 준비했을 법한 재주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말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라딘에 남긴 250개의 댓글을 보면서 독자들의 생생한 반응을 엿볼 수 있었다. 진행자 성기완 씨는 그 중에 몇 개를 소개하는 것으로서 위안을 삼아 달라고 요청했다.

제가 갖고 있는 기형도 시인의 유고시집 맨 뒷장에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이 시집을 샀던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1989년 7월 15일 나에게'. 시집을 구입한 이후 정말 책이 낡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더랬지요. (jure)

기형도가 죽은 날 대학 3학년이었던 몹시 오래된 독자가 들려주는 회고와 시집에 기록된 말이 청중들의 가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 속에 자리잡은 기형도라는 숨겨진 공간을 슬쩍 끄집어내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기형도는 사라지지 않는 추억이다.

내가 그 시를 처음 알게 된 건 열일곱살 때 였는데 저는 지금 서른네 살의 아이 아빠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기형도 시인은 언제나 그대로 이네요.. 15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이 아빠가 된 지금 기형도 시인이 쓴 <엄마생각>이란 시를 나의 아이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어요 (비쿨)

네티즌 윤화는 수험생이었는지 현대시 문제집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을 발견해 문제를 풀다 말고 시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기형도가 교과서에 실린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문청'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사람들은 문인이나 독자를 막론하고 기형도를 모방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나 보다. 네티즌 'mamasday'은 스무 살 때 기형도 시집을 산 이후로 시풍이 기형도의 그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기형도가 시집에 잃은 사랑 이야기를 쓴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기형도 하면 '실연'이나 '슬픈 연애'라는 이미지가 덧붙었다. 특히 <빈집>이라는 시가 그러한데, 네티즌 'dudn'은 <빈집>을 처음 읽었을 때 잃었던 사랑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형도 시가 '그로테스크'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처럼(김현에 의해) 2~30대 독자들을 매료시킨 것은 그로테스크한 감수성이었다.

20살이 되어서 그의 시집을 읽고 저는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 후부터 매년 칼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는 밤이면 자연스레 그의 시들이 생각나네요.
아마도, 그로테스크한 그의 시들이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닮아 있어서일까요. (아난)

네티즌 '타인의삶'은 "20대를 통과하면서 겪었던 현실에 대한 억한 심경과 분노"를 위로받았다고 썼다. 네티즌 'renee'는 '"이십 대의 밤, 외로이 앉은 새벽,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내 삶과 영혼과 자유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고 말했다.

네티즌 로맨티스트는 "대체 기형도 시인은 왜 차별화가 되는건지" 궁금하다고 썼는데 수많은 댓글들을 보면서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시를 읽는 독자도 시를 쓰는 시인도 몹시 희귀해졌다는 게 요즘 드는 생각인데, 기형도가 대중의 사랑을 잔뜩 받은 거의 마지막 시인이 아닌가 싶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은 그의 '유령'을 사랑한 것이겠지만, 20살이나 먹은 나이 든 유령이 지금도 사랑을 잔뜩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재미있었다.


▲ 좌석이 없어서 맨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어도 나쁘지 않은 기색들이었다.

◆ 기형도 시인의 주요 작품과 최근 출간된 20주기 기념 문집 ◆ 
 

 
▲ 2008년 여름 동요를 부르는 잡곡가(잡다한 노래를 짓는다고 해서) 백창우가 기형도 <빈집>이라는 시에 노래를 붙인 <빈집>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날 백재현 씨의 퍼포먼스 '빈집'과 비교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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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강렬했던 에티카와의 첫만남 

나의 인격이랄 수 있는 특징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이다.
정확히 대학 2년생이다.

책도 안 읽고 공부도 하기 싫어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대학에서는 '학문'이 하고 싶어졌다.
맨 처음 만난 책은 <철학 이야기>(윌 듀런트).
몇 년 후 철학을 복수전공하면서 이 첫만남이 무척 행운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다음 권으로 <에티카>를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사과나무를 심던 스피노자의 필생작을 여름 방학 두 달 내내 잡고 있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윤리학)은 인간과 우주의 질서를 기하학의 관점으로 서술한 대작이다. 때문에 명제, 공리, 정리, 요청 등 수학 용어가 많이 나오며 앞 장과 뒷 장이 연결되면서 머리가 뽀개지기 시작한다. 그 외에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노트에 정서를 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읽고 음미할 만한 구절을 10쪽이고 20쪽이고 정서를 했기 때문에 한 번 정서를 하고 책을 덮을 때도 많았다. 다른 하나는 그 당시 '노가다'라는 것을 처음 해봤다.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뙤약볕 아스팔트에서 낑낑대다가 옷을 갈아입고 7시부터 9시까지 단 두 시간 책을 읽으러 학교 도서관에 올라갔다. 나는 이 두 시간을 신앙처럼 모셨다.

신에 관해서, 이성에 관해서, 감정에 관해서, 감정의 예속에 관해서,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을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에티카의 대강의 순서)

어느 하나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본질을 다루는 책을 가장 먼저 만난 탓에 아직도 스피노자의 특징들이 몸에 배어 있다. 죄와 벌의 '라주미힌'(알라딘의 라주미힌이 아님)처럼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캐릭터를 갖게 된 것도 스피노자의 영향이 지대하다.

긍정은 힘이 커지는 것이며 부정은 힘이 작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에티카)


<정치론> 리뷰를 위한 메모 

인터파크와 인문사회과학출판협의회에서 공동 진행하는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의 담당자로부터 인문학 분야의 선정위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어째서 편독증 환자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지만, 추천사를 위한 준비 메모 정도의 글을 남겨두려 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아버지이지만 이들의 꿈은 '정치'였다.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철학'을 최고 목표로 삼았다. 얼핏 철학하면 지고지순하며 초연해서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느 철학을 살펴봐도 '정치'의 결이 보이기 마련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정치'를 지향하지 않은 철학은 공허하다.
우리가 철학자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철학자들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후손에게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대인'을 위해 고뇌하고 당대인에게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편성을 타고 현재까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대'는 곧 '정치'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때문에 '정치'라는 키워드로 철학자에게 접근하면 훤하게 길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보지 못한다면 '당대'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부족한 것이다.

고전으로서 정치론으로서 스피노자를 소개하는 이유를 500자에 담기란 이 책을 10번 읽기보다 어려울 것이다. 짧은 말로 간결하게 정리하는 훈련이 돼 있지 않은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스피노자에게는 '전복'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데, 그를 제외한 어떤 철학자도 책을 덮었을 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억제하도록 만든 사람이 없었다. 오죽 했으면 스피노자를 읽은 사람들이 '마녀의 빗자루 효과'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까. 1998년 여름 토익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소리를 질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철학자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정념의 변화들을 사람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생겨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경건하게 보이려고, 대개는 그러한 정념들을 비웃거나, 측은해 하거나, 또는 비난하고, 저주한다. - <정치론> 맨 첫줄

첫줄부터 스피노자의 진면목이 보인다. 스피노자를 읽을 때는 '정념'이라는 개념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정념뿐만 아니라 '몸'의 가치 역시 스피노자로부터 환기된다. 니체는 '스피노자를 읽고 나서야 나는 몸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서양 철학에서 정념은 몸과 마찬가지로 저급하게 취급하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스피노자는 한솥밥 먹는 철학자들과 원천적으로 다른 길을 가겠노라는 선언을 한 셈이다. 이 선언은 평생동안 지켜졌다. 내가 스피노자에게 가장 큰 은혜를 입었고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구절을 공개하면

감정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감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그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하면(또는 이해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은 더 이상 나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 에티카 중에서

나는 이제까지 이 구절을 '처세술'적으로만 활용했다. 하지만 <정치론>의 첫구절을 읽음으로써 드디어 '이해', 즉 '정념에 대한 이해'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왔다. 10년만의 발견이었다.
10년 만에 또 다른 보너스를 얻었다. 바로 '안또니오 네그리'의 발견이다. 이 철학자는 적어도 두 사람에게 소개받았다. 드팀전 님과 다른 한 분이다. 네그리는 "철학사로는 스피노자를 도저히 담을 수 없다"는 평가를 했는데 전적으로 동감한다. 철학사를 펼 때마다 스피노자 부분을 맨 처음 읽으면서 이내 답답했던 마음이 네그리의 이 한마디로 드디어 '표현'을 얻어서 자유로워졌다.

아무튼 10년 만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 행복한 밤이다. 그리고 이 책을 널리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니 이것 역시 축복이다. 500자 추천사와는 별도로 이 시대에 왜 스피노자의 <정치론>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글을 조만간 따로 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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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2-18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 <정치론>의 새 국역본 출간이 너무 반가워서ㅡ예전에 <국가론>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적도 있었고 90년대에도 한 번 더 국역된 바 있었지만ㅡ출간 즉시 바로 구입해서 틈틈이 읽어오고 있는데요, 승주나무님의 개인사가 담긴 이 글을 읽으니 더욱 힘을 내서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로 내놓겠다고 말씀하신 <정치론>에 대한 글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승주나무 2009-02-22 23: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고 있는데 스피노자에 대한 옛 추억이 떠오르면서 앞으로 갈 길이 밝아지는 듯합니다. 즐거운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