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악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악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악을 정의할 수 없다. 제한적이나마 의사소통을 위해서 자의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은 애매모호한 개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적인 일관성을 갖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범주를 통해 정의하기보다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실존적으로 악을 인식해야 한다.-16쪽
지금껏 나는 악을 우리에게 행해진 어떤 것으로 다루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악을 행하기도 한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악이 미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악을 행하지 않고 살 수 없다. .............. 적어도 악의 문제에 대한 대답의 일부분은 내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대개 악을 외부로부터 다가온다고 이해한다. 스스로 악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악을 저질렀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위험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의 악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이다.-21쪽
악마를 이해할 때 심층 심리학적인 입장, 특히 융의 견해가 가장 시사적이다. 융은 심리 발달을 개별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처음에 자신에 대한 혼돈스러고 미분화된 생각만을 갖는다. 그 사람은 성장하면서 점차로 선과 악의 입장을 분별한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키워가며 악을 억압한다. 이러한 억압과정이 너무 지나칠 경우에 그 삶의 그림자는 괴물처럼 되어 결국 폭발해 그 사람을 압도해버린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세 번째 단계, 즉 조정의 단계가 있는데, 여기서 선과 악이 모두 인지되고 인식의 차원에서 다시 조정된다. -33쪽
①악마는 객관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② 악마는 역사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③ 악마에 대한 역사적 정의는 그 자체로 실존적인 악의 정의와 관련해서 얻어질 수 있다. ④ 악마란 사회 속에서 악으로 이해되는 인격화된 무엇이다. ⑤ 악마라는 개념은 이러한 인격화를 이해하는 전통으로 이루어진다. -53쪽
선과 악처럼 모든 것들이 신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기본 전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악이 신에게서 기인하지 않기를 원하는 한, 사람들은 신성 안에 대립되는 힘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립은 점차 구체화되어 짝이 형성된다. 신의 본성은 여전히 악의 원천이지만, 이제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으로(문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짝을 이루게 된다. 선한 본성은 하나님과 관계되고, 악한 본성은 신의 적이 된다. 이러한 짝을 '이중체'라고 한다. -68쪽
우주는 단순히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신성과 더불어 고동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신의 권위를 그러내는 이 세상에 악의 원리라는 것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악의 원리는 신성한 계열의 일부로, 살아 있는 우주의 일부로만 존재할 수 있다. 죽음, 질병, 거짓, 사기 등 이 모든 것은 자연적인 질서가 파괴된 상태이며 따라서 악이다. -90쪽
플라톤은 전쟁, 살인, 착취, 거짓말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 악인 이유는 그 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말 안에 진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악은 선의 결핍으로만 존재한다. 마치 스위스 치즈에 나 있는 구멍들이 치즈의 부족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플라톤은 존재론적으로 악이 없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악이 없다고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창조자에게서 악에 대한 책임은 없어진다고 했다. -186쪽
지하세계는 죽음뿐만이 아니라 다산성과도 연관되고, 신화나 제의 안에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악마는 성과 연관되기도 한다. 디오니소스, 마그나 마터, 키벨레, 미트라, 이시스, 피타고라스주의와 연관된 의례들은 진위가 얼마나 의심스럽든지 간에 이후에 이교도와 마녀의 의식에 규범이 될 만한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 그리스에서 비록 철학(다이아드)이나 종교(헤카테, 에리니스, 라미아스)로부터 여러 근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성의 원리가 악의 원리로 인정된 적은 없다. 라미아스는 셈족의 릴리트와 쉽게 합쳐져, 밤에 나타나 남자를 유혹하거나 영아를 살해하는 음란하고 흉악한 여성성을 가진 영으로 창조되었다. 이 이미지는 중세에 점차로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적인 영역으로 바뀌어, 결국 마녀라는 개념으로 고착되었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기본 전제는 여자는 천부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므로 악의 원리라는 위치까지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 시대에 수준 높고 지능적인 마술은 주로 남자의 역할로 여겨지고, 반면에 쉽고 경험으로 하는 마술은 여자들의 분야로 여겨졌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223쪽
이 종말론적인 신정론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은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당황하게 했던 질문과 같은 것이다. 만일 주께서 악마를 멸망시킬 권능을 가지고 있고 그를 멸망시키고자 했다면, 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까? 이 질문은 늘 신학자들을 괴롭혀왔다. 신은 왜 그렇게 엄청난 악을 허락했을까? 신이 다른 영에게 자신의 도움으로 파괴를 허락하고 심지어 권한을 부여했다면, 신은 그 파괴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는가? 신은 궁극적으로 그런 일을 스스로 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 져야 할 책임을 무마해보려는 히브리인과 예언서 시대의 유대인이 벌인 노력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마스테마가 하는 것이면 야훼도 한다. -261쪽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민하게 악마를 직접적으로 의식했다. 악마는 기독교의 본질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쉽게 내버려질 수 있는 정도의 주변적인 개념은 아니다. 악마는 신약성서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신의 왕국과 악마의 왕국이 싸움을 벌여 급기야 ㅅ힌의 왕국을 이기고 있다고 설파하면서 신약성서의 중심을 차지한다. 악마는 기독교의 신론에서 중요한 대안을 형성하기 때문에 신약성서에서 악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80쪽
악마는 악한 인간들의 왕이기도 하다.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악마의 부하 또는 아들이라고 불린다. 베드로 자신도 예수를 꾀어 예정된 길에서 십자가의 길로 가도록 동요하게 했을 때, 악마라고 불렸다. 이상하게도 예수는 베드로가 수난을 피하려고 하자 악마라고 불렀다. 이들 두 사도의 공통점은 구원이라는 신성한 계획에 자신들의 개인적인 두려움을 개입시킨 것이다. 유다가 가장 일반적으로 악마와 관련되고, 누가는 유다에게 실제로 사탄이 들어갔다고 말한다. 유다는 너무나 가까운 예수의 상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둘의 관계와 신화에서 너무나 자주 나타나는 이중체들의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알 수 있다. 사탄이 유다를 선택해 악마의 영을 유다에게 집어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택해 자신의 영을 예수에게 보낸다. 이러한 유비 관계는 더욱 가까워진다. 구원이라는 커다란 계획 안에서 신은 항상 예수가 구세주이고 유다가 배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가 수난을 당하기 위해서는 유다의 배반이 필요했으므로 신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의 과정에서 예수뿐만 아니라 유다도 자기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01쪽
악마의 이야기는 잔인하지만, 악의 실존적 공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세계관은 모두 환영에 불과하다.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이반의 아이는 창조물 전체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물 전체와 같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어떤 세계관을 가졌든지 간에 그녀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고, 그러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느다고 선언하거나 거기에 정교한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다거나, 더 위대한 선이란 관점-그러한 선에 신의 이름이든 아니면 인간의 이름이 부여되든-에서 그 고통을 설명한다면, 그러한 견해는 그녀의 삶과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공허하고 헛되게 만들 것이다. 악이 현존하고 그 와중에 세상은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이 우주는 무엇으로 존재하든 창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우주에서 말한다. 내가 당신과 함께 사랑할 것이다"라고.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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