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마한 독서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1월의 주제는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를 정확하게 지칭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1월에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을 주재료로 삼고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와 <한국경제 새판짜기>를 부교재이자 논쟁 재료로 삼아, '경제민주화'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워밍업 정도 되겠죠.

문제는 2월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깊고 중대한 문제이므로 1개월 가지고는 양도 안 차고, 이번 주제가 '신자유주의'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 같아. 주재료로 삼을 만한 책과 그에 대한 논쟁 작품이나 부재료 등을 포함해서 2~3권 정도의 책을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몇몇 젊은이들의 사소한 모임이지만, 만약 님들의 조언을 통해 지혜로운 방향을 잡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관계자'(?)분들의 탁견을 기다립니다.



이 글은 테마카페에 등록된 테마입니다.
테마는 '먼댓글(트랙백)'이나 '댓글'을 이용하여, 하나의 주제(테마)를 놓고 여럿이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테마카페 바로가기 >>

댓글(9) 먼댓글(5)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내가 산 고 1문제집
    from J.Y 2008-01-27 16:56 
     
  2. 잃어버린 기억, 친구의 영성
    from 2008-02-04 17:39 
    잃어버린 기억, 친구의 영성 플라톤이 <국가>의 처음을 좋은 친구에 관한 대화로 시작하고 공자는 <논어>에서 인생의 큰 세가지 즐거움 중에 하나로 친구를 드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좋은 친구란 언제나
  3. 살것
    from 2008-02-15 00:39 
    ,,,
  4. 전지구적 유행인 신자유주의와 전지구적 문제인 굶주림에 관심있다면.
    from pacifica(TM)'s_ bookshelf 2008-02-26 14:49 
    전지구적 유행인 신자유주의와, 전지구적 문제인 굶주림에 관심있다면. 한번즘 읽어볼만한.

  5. from 2008-02-29 00:25 
     
 
 
바라 2008-01-2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승주나무님? 저는 관계자;는 아니고 신자유주의를 언젠가 차분히 좀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만 있는 사람인데요;; 제가 주위로부터 들어보거나 읽어본 책 몇 가지만 소개드려볼게요.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강상구, 2000, 문화과학사가 일단 가장 평이하고 사전 지식 없이 읽기에 무난한 책이었던 걸로 기억하구요. 그 밖에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자본의 반격』 ,뒤메닐 & 레비, 2005, 필맥이나 『금융의 세계화』, 프랑수아 셰네, 2002, 한울이 조금 어렵긴 하지만 체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동학을 서술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론 격으로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세계체제론의 시각을 살펴보고 싶으시다면 『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2006, 그린비가 읽을 만 한 것 같네요.(강연문을 엮은 책이라 크게 어렵지도 않구요) 이 밖에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세계체계론의 시각』, 1998, 공감 등 과쳔연구실에서 나온 책들 중 주제에 맞춰 고르셔도 될 거 같구요. 워낙 제가 잘 몰라서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네요;; 암튼 하시는 독서모임 잘 되시길 바랄게요^^





saint236 2008-03-13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걸 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요.
조금은 빗나간 듯 보이지만 함께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문화 논리"(한올 아카데미/김창민 외 편역)
수고하세요.

승주나무 2008-03-1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int236 님.. 정말 감사합니다. 꼭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2008-04-06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6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7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7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7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태빈 2008-05-1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도 빼놓을 수 없죠.^^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나는 요즘 시사저널에도 미쳐 있지만, 춘추시대에도 미쳐 있다.
춘추시대에 미쳐 있는 이유는 '자공'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다.
'왜 춘추시대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은 '시대정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차피 현대사회는 1,2차 세계대전 같은 무식한 전쟁은 할 수 없다.
그 대신 초정밀한 세계전쟁으로 판이 압축되었다.
시장경쟁이나 외교전쟁이 그것이다.
이것은 치밀한 두뇌싸움임과 동시에 정황을 최대한 포착해서
상대방의 빈틈을 노려야 하는 한판 승부이다.
이 승부로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한일어업협정이나 FTA를 생각해 보라.
시대정신은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한다.
전리나 이상, 도덕 등의 절대가치는 어느 시대고 활짝 날개를 펼쳤던 때가 없었다.
하물며 소크라테스나 공자의 시대에도 위악이 판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러한 가치들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인물이 바로 '자공'이라는 인물인데,
내가 자공에 빠져드는 이유이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이면서
외교에 능하고 치산(治産)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자는 그를 심정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자공이 필생의 질문을 공자에게 던진다.
"선생님, 부유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답한다. "괜찮구나.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 더 낫지 않은가?"
부유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사람이란 바로 자공 자신을 가리키며, 가난하면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은 사람이란 바로 공자의 수제자 '안연'을 가리킨다.
공자는 안연을 아끼면서도 실질적인 처세에는 자로와 자공을 많이 이용했다. 자로는 공자의 보디가드를 하면서 온갖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자공 역시 국난이 닥쳤을 때(제나라가 모국을 공략하려고 하였을 때) 자공을 보내 이 사태를 수습하라고 지시한다.
이것은 '논어'에 갇혀 있었던 나로서는 보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는 '공자'를 반동적인 인물로 그려낼 생각은 없다. 장자의 방식을 따라 '풍자'와 '해학'을 깃들여 그려낼 생각이다.
이 이야기를 위해 필요한 지식은 물론 춘추시대의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이다. 그것을 담고 있는 책들이 요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책들이며, '자공리뷰'라는 제하에 펼쳐질 온갖 영웅담이다.




1차 자료는 춘추시대를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책들과 공자의 사적이 드러나 있는 작품들이다. 그 특징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의 사적을 다룬 가장 유명한 자료이다. 편집자의 오묘한 방침에 따라 엮였는데, 공자의 사상과 제자들의 성격을 탐색하는 데 소용이 된다. 




 공자가어는 논어에서 보지 못했던 공자의 사적과 제자들의 이야기가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만약 공자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거나, 욕심이 생긴다면 공자가어를 지나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논어에는 상황이 생략되거나 압축된 데 비해, 공자가어에서는 구체적인 상황이 드러나므로 발언의 정황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좌구명의 춘추좌전과 국어를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논어에서 공자는 '좌구명'을 현자라고 칭찬하는데, 그 좌구명이 이들 책의 좌구명인지 확실하지 않고, 춘추좌전의 좌구명과 국어의 좌구명이 동일인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하지만 '좌구명'이 춘추시대에 대해서는 절대적 권위자라 할 수 있다. 국어는 춘추시대의 패제후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책사들을 다루고 있는데, 각 사건을 이야기체 형식을 빌려 국가별로 다루고 있는 일종의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형식을 띠고 있다. '전국책'과 그 특색은 같으나, 주나라의 세계관 안에 잔류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춘추시대의 시대정신이다.











춘추좌전은 '국어'와 마찬가지로 춘추시대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특히 사건을 시간대별로 기술한 편년체 형식을 썼다는 점이 국어와는 다른 점이다. 그리고 노나라를 중심으로 한 춘추시대의 역사서이므로 각국의 입장에서 춘추시대를 기록한 국어와는 또다른 차이점이다. 책의 두께에서 알 수 있듯이 춘추좌전은 국어에 비해서 기록이 매우 상세하고 사상이 매우 심대하므로 철학서와 역사서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은 춘추좌전을 '춘추내전'이라고 하며, 국어를 '춘추외전'이라고 부른다.


안자춘추는 공자의 정치적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서로 인정해 마지 않았던 안연이라는 특이한 인물을 중심으로 당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이상 실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나, 안연이라는 당시 재상의 견재로 이상이 '시련'을 겪게 된다. 안자의 관점에서 공자를 바라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노자의 입장에서 공자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자가 놓치고 있거나 혹은 애초부터 담당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공자의 '우활'을 우회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자공에게 있어서도 공자는 바로 그런 인물이다.




오월춘추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경계를 이루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패권쟁탈기를 중심으로 춘추시대의 말기를 소개하고 있다. 자공이 활약한 시기,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외교적 역량을 발휘한 사건이 오나라와 월나라의 대치 상황 아래서 펼쳐지고 있으므로, 앞서의 춘추서보다 훨씬농도 짙은 이야기를 취재할 수 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등의 고사성어를 낳을 정도로 앙숙인 두 나라는 시대정신의 거대한 변화를 알리는 메신저이기도 하다. 오월 이전에는 주나라를 섬기며 '도의'를 중시한 반면, 이들 두 나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전국시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역시 자공이라는 인물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접경에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진에 들어가지 못한 책이 있는데, 그것은 여불위의 '여씨춘추'이다. (3권짜리 민음사판 여씨춘추를 자료로 활용하지만, 이미지가 없어서 고려원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여불위는 진시황의 '진짜 아빠'이다. 거상인 그는 돈에 있어서는 이미 황제가 되었지만, 현실정치에서도 그만한 지위를 얻고자 당시 조나라에 볼모로 왔던, 볼품없던 왕족 '자초'에게 과감한 투자를 한다. 결국 여불위가 씨를 뿌리고 바친 정부(여불위의 아이, 즉 진시황을 배었음)를 장양왕이 된 '자초'에게 바치고 나서 진나라의 권력을 잡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와는 상관 없는 역사서가 바로 여씨춘추라고 하는데, 여씨춘추는 '일자백금'이라는 말로 통할 정도로 내용이 상세하다고 한다. 즉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저작이라고 스스로도 칭찬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엄청난 자금을 풀어 여러 방면의 전문 학자에게 외주를 주어 만들었으니, 그만큼 과학적이지 않겠는가. 이것을 오늘날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삼성경제연구소'쯤 될 것이다. 삼성공화국의 핵심 브레인인 삼성경제연구소~~ 오호라. 비유가 좋구나!






2차 자료는 이야기의 직접적인 바탕이 되지는 않지만, 중요한 정보와 조언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춘추시대가 '의로운 경쟁시대'였다면 전국시대는 '비열한 경쟁시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삼는 시대정신은 이미 멀리 사라졌고, 주나라도 전국시대의 언저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오로지 전략과 권모술수만이 나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맹자 같은 사람도 이 두꺼운 책에는 두 번 정도밖에 소개되지 않고 있다. 반면 합종연횡의 대부인 소진(합종가)과 장의(연횡가)와 그 파벌들이 거의 모든 지면을 독차지하고 있다. 자공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전국책'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만약 자공에게 전국시대의 색채를 정도 이상으로 집어놓는다면 이야기의 판도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이 책은 지금 세상에 가장 어울리는 책인 것 같다.











사기열전 '상편'에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게 펼쳐져 있는데, 개인적으로 사기열전 하면 이 이야기가 주로 생각난다. 사기열전 '하편'(을유문화사 판 중심으로)은 한나라의 시대를 중심 이야기를 다뤘으므로,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별로 들어있지 않다. 그렇지만 뒤편에 나와 있는 '화식열전'은 빼놓아서는 안 된다. 자공의 '치산'에 관한 가장 자세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공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 '치산'에 관한 것인데, 자공의 치산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인의 밝은 경제 관념을 자공의 치산적 뿌리로 설명해줄 수 있다.
사기세가는 춘추시대의 패제후들과 함께 '공자'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게 특이하다. 논어나 공자가어 외에 공자에 관한 엄밀한 역사적 기록이 담긴 책은 바로 사기세가라고 할 수 있다.  


장자를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의 풍부한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공자를 거칠고도 흥미롭게 풍자하면서도 공자의 시대정신을 끌어안고 이를 종합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학'의 완성을 장자에게서 찾았다. 노장 외에도 법가, 종횡가 등 제자백가는 적지 않다. 유학이 공자 안에 갇힌다는 것은 새가 새장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가치로는 현대의 문제들을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 나는 이를 위해 좀더 먼 데까지 가보려 한다. 자공을 이야기하려면 공자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공자의 허위를 묘사하는 데 장자를 많이 빌려올 것이다.



서점에서 중국 고대사 관련서를 찾아봤는데, 대개 전국시대나 한나라 시대부터 서술하고 있어서 춘추시대 관련 조항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은 춘추시대의 시대상황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뤄주고 있으므로, 시대상황을 위해서 필요한 책이다. 아직 구입은 못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사진에는 동작도서관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혹시 춘추시대의 시대상황을 성실하게 담은 저작을 알고 있다면 당장 제보 바란다.



최인호의 '유림'에 대해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인호는 분명 '공자'를 주된 캐릭터로 삼았으니, 배울 것이 많겠구나 생각했지만, 그도 2,500년의 시간차를 극복하지 못한 걸까. 최인호의 유림 중 '공자' 부분은 '공자평전'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안에 작가적 상상력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논어나 당대의 역사서에 의존했고, 이를 인용하는 수준이었다. 이 외의 조선시대는 그의 손바닥 안이어서 흥미롭게 다뤘다는 후문이 있었지만, 아직은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이 2차 자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까닭은 당대의 인물을 다루는 '부분적인 모델'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와 중첩되는 부분이 적지 않으므로 참고해서 해될 건 없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07-1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 정말 열심히 보시는군요! 계속 일하니라 대꾸를 할 수 없었어요. -_-

antitheme 2007-07-13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은 나는 책들이지만 제가 읽기엔...

red7177 2007-07-1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승주나무님 대단하다. 전 책 제목만봐도 머리가 어지럽네요. 잘있죠?^^

승주나무 2007-07-1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 님//글쿤요.. 혹시 저한테 삐지셨나 했는데.. 제가 삐져도 되겠죠?^^;

antitheme님//반가워요. 제가 좀 고풍스러운 스타일이라..먼지나는 책밖에 안 보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랄까요 ㅋㅋ
red7177님//혹시 제가 아는 레드 님이 맞나요 ㅋㅋ 저도 어지럽답니다. 요즘 정신없이 살아요.. 돈이 안되는 것만 빼고는 즐겁고요 ㅋㅋ

눈먼자 2007-10-3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저도 요즘 중국고전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중인데요, 저보다는 휠씬 앞서가시네요.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7-10-3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먼자 님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 책 중에서 반 정도밖에 못 읽었습니다. 오래된 책일수록 읽는 게 힘이 들더군요~~

야상곡(夜想曲) 2016-09-14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자나 상군서같은 책들도 리뷰해 주세요

야상곡(夜想曲) 2017-07-07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영화가 끝나면 영화가 시작되는 독특한 영화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나서 되돌아가는 길은 씁쓸했다. 그리고 허무했다. ‘용두사미’ 작품으로 규정하고
페이스북에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글을 올리고 났더니 한 페친이 의외의 호평을 한다. “설국열차 괜찮던데. 봉준호
감독이 10년 전에 꽂힌 작품이라던데.” 좋았던 반응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나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겨울 열차를 타는
상상을 했다. 눈이 쌓인 평야를 달려가며 아무도 안 밟았을 것 같은 숫눈 구경을 하는 맛이 일품이다. 기차는 같은 레일을 쓰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만 같을 뿐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제각각이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그렇지가 않다. 오로지 달리는
것만을 목표로 달리며 그 외에는 죽음뿐이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누웠지만 내 마음 속의 ‘겨울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는
용두사미가 아니었다. 사두용미. 용의 꼬리가 너무 커져서 숨이 막힐 듯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과 메시지, 그리고 봉준호
감독이라는 사람의 숨결이 거칠에 몰아치는 설국 속에서 나는 온몸을 다해 헤쳐 나왔다. 이 글은 영화를 보고 나서 탔던 상상의
겨울 열차에서 내가 보았던 이야기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영화가 끝나면 시작되는 독특한 영화이며, 봉 감독의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는 결론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 누가 타고 있는가

상상의 겨울 열차를 타고 가면서 문득 한 가지 물음이 스쳤다.

“가만! 열차에 누가 타고 있었지?”

앞 칸과 꼬리칸, 그리고 여러 가지 편의시설 칸에 담긴 사람들은 자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차는 인도의 카르텔처럼 엄격한
계급 사회의 압축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설명 장치일 뿐이다.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균형’이 있다. 인위적인 인구 수
조정(학살), 반란, 꼬리 칸과 머리 칸의 짬짜미. 하지만 이것 역시 설명 장치일 뿐이다. 이런 설명 장치에 기대
<설국열차>를 디스토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섣부른 추측일 수 있다. 영화에는 봉준호의 메시지를 머금고 있는 메신저들이
존재한다.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기존의 세계 위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대결을 펼치고 끝내 승리한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심지어 아이들은 설국열차의 목표마저 바꿔 버린다. 그러니까 영화에 펼쳐진 모든
설명장치들은 어린이로 대표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들이다. 여기서 ‘어린이’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어린이 관찰 보고서와 설국열차의 어린이

나는 세 살, 다섯 살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다. 그리고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독서 책을 쓴 이유로 많은 가족과 어린이를
만나서 오랫동안 관찰했다. 내가 관찰한 어린이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아이들은 타고난 논리학자, 민주주의자로서 유전자에 논리와 민주주의가 새겨져 있다.
2. 아이들은 창의력 또한 타고 났다. 밖에서 주입하는 방식의 교육은 창의력뿐만 아니라 학습능력과 독서력, 판단력 등 기본적인
두뇌 능력을 낡은 것으로 만들 뿐이다. 아이들에게 있는 것을 자극해야 한다.
3.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른 욕구 단계에 이미 진입했다. 즉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넘어서 소속/애정 욕구, 존경 욕구,
자아 실현 욕구의 상위 욕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패러다임은 2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낡았다고 할 수
있다.
4. 아이들은 놀이의 천재다. 책으로 노는 방법을 알려주면 재창조를 곧잘 해낸다.
5. 아이들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어른들이 기존의 사고로 깨지 못하는 세계를 깨워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어린이다. <왕의 귀환>이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아이들은 곧 주인공으로 귀환할 것이다.
6. 아이들은 온몸이 거울과 같다. 짝퉁을 비추면 짝퉁이 반사되고, 창조를 비추면 창조가 반사된다.

<설국열차>에서는 적어도 3~6까지의 관점이 녹아 있다. 회고해 볼까? 설국열차의 세계는 어른이 만들었다. 단지 죽지 않기
위해서 열차 안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이지 목표 따위는 애초에 없다. 균형 따위도 없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세계다.
영화의 출발은 디스토피아다. 철저한 어른의 세계에서 어린이들이란 한낱 “고기가 맛있다”거나 “좁은 공간에서 작업을 시킬 수
있다”는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앞칸과 꼬리칸이 공유하는 관점이지만 균열이 생겼다. 꼬리칸의 사람들이 어린이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앞칸은 꼬리칸에서 어린이를 공급받는 입장이었던 데 반해, 꼬리칸은 어린이를 낳는다. 낳은 자식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꼬리칸 사람들에게 어린이들은 희망이다. 그래서 소중히 여긴다. 열차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산다. 트레인
베이비(train baby)들은 앞칸 승객들이 낳은 아이들로 어른의 세계의 완벽한 복제물이다. 실제가 되어 버린 짝퉁의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거울이다. 엔진칸에서 노역을 하는 어린이들은 작업장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이 역시 착취의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열차가 전복되고 두 아이가 짝퉁의 세계에서 실제의 세계로 넘어왔다. 아이들은 기꺼이 실제의
세계로 들어간다. 발견된 것은 코라콜라 광고에 나오는 북극곰이 전부인 가시밭길이지만 온몸이 세계의 거울인 아이들은 반영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봉준호)


도스토옙스키와 봉준호의 아이들

봉준호 감독의 최근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가족’이다. <괴물>, <마더>는 가족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가족
테마가 전면에 배치해 있다. <설국열차>에도 가족 테마는 왕성한 힘을 발휘하는데, 이번에는 ‘괴물’에서 선을 보인 ‘어린이’가
전면에 등장한다. 가족과 어린이를 예술작품에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는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가 생애 마지막으로 쓴 유작으로서 작가의 치열한 작품 인생을 훌륭하게 종합해낸 역작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에는 <카라마조프 씨네 아이들>의 주제와 설정을 빌려 쓴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커티스가 윌포드의 문 앞에서 “아기
고기의 맛을 알게 되었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등장인물 이반 카라마조프가 동생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터키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터키인들은 음탕한 쾌감을 느끼면서 아이들을 괴롭혔다는데, 어머니의 배를 칼로 갈라 태아를 꺼내는가 하면 심지어 어머니의
눈앞에서 젖먹이를 위로 집어던진 뒤 총검을 받아내는 짓까지 한다는 거야. 어머니들의 눈앞에서 이런 짓을 한다는 데 쾌감의
핵심이 있는 거지. 그런데 나의 흥미를 아주 자극하는 명장면이 있어. 한번 상상을 해 봐, 젖먹이가 부들부들 떨고 잇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고, 그 주위를 여기로 들어온 터키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거야. 그 녀석들은 즐거운 장난거리 하나를 생각해
냈어. 그 녀석들은 갓난애를 웃기려고 얼러 보기도 하고 웃어 보기도 하는데, 결국 성공해서 갓난애가 깔깔 웃게 됐어. 이
순간, 터키 녀석 한 놈이 갓난애의 얼굴에서 불과 4베르쇼크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갓난애를 향해 권총을 겨누는 거야. 아이는
즐겁게 깔깔거리면서 권총을 잡기 위해 고사리 손을 내뻗는데, 갑자기 이 예술가는 아이의 얼굴 정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서 작은
머리를 박살 내는 거지..” -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식들의 투쟁 이야기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해서 대가를 갚는다. 특히 마지막 법정 장면에서 변호사의 연설 장면은 소설의 주제와 같은데, 변론의 골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한낱 노리개로 여기고 스스로 가족을 파괴하기 때문에 미래가 위태롭다는 주장이다. 설국열차에서 봉준호 감독이 의도한 주제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주인공 알료사는 아버지를 놀리는 아이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서 싸우다가 죽은 한 소년을 추모하면서 어린이가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풍긴다. 그러니까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디스토피아 현실과 유토피아 미래의 혈투다. 꼬리칸의
어른들이 혈투를 주도할 때는 싸움의 목적이 명확치 않았지만 어린이가 주도하는 순간 싸움의 목적이 명확해진다. 예컨대 “리포드의
열차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린이는 이런 답을 내놓는다. “열차는 멈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봉준호와 헐리우드 봉준호의 차이점

커티스가 윌포드 문 앞에서 문을 박차고 깨부수려고 하는 ‘오버 액션’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나는 마치 베드신을 보는
듯한 야릇함을 느꼈다. 커티스가 윌포드 문 앞에서 발악하는 순간 커티스의 역할은 끝났다. 커티스의 목표는 열차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머리칸에 있는 자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기억’을 상징한다. 설국열차의 어른에게 부여된 쓸 만한
역할은 기억이다. 길리엄과 남궁 민수 역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꼬리칸의 어른들은 왜 어린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가? 그것이
미래이고 생명임을 믿기 때문이다. 낮고 차가운 곳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어른은 아이들과 ‘연결’된다. 이것 역시 봉준호 감독이
설정한 유토피아의 한 열쇠일 것이다.

끝으로 헐리우드 봉준호와 봉준호의 차이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설국열차>는 헐리우드 문법에 충실한 영화다. 퀘스트와 액션이
있고 영웅이 등장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구도 자체가 무척 단순해야 한다. 단순한 구도 속에서 세계관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영화가 끝난 후 영화가 시작되는 방식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특성이 동양과 서양의
관객들을 설득하고 보편타당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과 서양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한 방법이기도 하다.
요컨대 형식적으로 메시지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룬 봉준호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주4.3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며칠 전, 제주도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영화 <지슬>을 보고 왔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나름 준비를 많이 했다. 굿다운로드로 오멸 감독(42·본명 오경헌)의 <어이그, 저 귓것>('귓것'은 '귀신'의 제주 사투리로 어리석다는 비아냥)과 <뽕똘>('뽕돌'은 낚싯바늘이 물속에 가라앉도록 낚싯줄 끝에 매어 다는 작은 쇳덩이나 돌덩이)을 봤고, 관련기사를 찾아 읽어봤다.

제주 4·3을 처음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내가 대학(제주대학교)에 입학한 1997년이었다. 당시는 대학 내에 운동권이 쇠락하기 시작할 즈음이었기 때문에 일명 사과학습(사회과학학습)을 통해 제주 4·3을 배웠다. 게다가 나는 국문학 전공을 했던 터라 현장답사 당시 소주를 끼고 할머니를 설득해 '취중진담'으로 당시 증언을 듣곤 했다(할머니들은 맨정신으로는 절대 제주 4·3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제주 4·3 관련자료 속에서 파묻혀 살다가 안 되겠다 싶어 자료를 치워버리고 제주로부터 벗어나 12년을 보냈다. 대학생이었던 1990년대 후반, 현기영 소설가의 강연을 우연히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제주 4·3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은 내게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제주 출신인 타지 사람으로 이 말에 특히 공감이 갔다. 나는 현기영 작가가 이어 꺼낸 말도 가슴 속에 간직했다. 

"멀리 도망쳐서 보니까 그제서야 제주 4·3이 보이더라."

내가 12년째 타향살이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현기영 작가의 이 말과 관련이 있다. 제주인에게 제주 4·3은 한마디로 '억눌림'이다. 해방공간에서 재건 의지의 꿈을 산산조각짓밟힌 억눌림이며, 국가권력에 의한 대량학살과 예비검속·연좌제 등으로 오늘날까지 시달려온 억눌림이다. 

제주 4·3 위원회에 2001년 5월까지 신고된 4·3 관련 피해자 수는 총 1만715명인데, 2003년 통과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인구 감소 같은 여러 근거를 종합해 2만5000명에서 3만 명가량이 제주 4·3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제주도 주민이 30만 명 정도였으니 '공식적'으로만 10분의 1 정도가 희생됐다는 이야기다. 

제주인 중에서 제주 4·3에 직·간접으로 관계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 외조부는 제주 4·3 당시 행방불명이 돼 오늘날까지 당신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고, 외할머니는 당시 군경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사실상 대살(代殺)을 당한 셈이다. 

'억눌린 시간'을 사는 동안 자연스럽게 '억눌린 언어'에 익숙해졌다. 비유하자면 1948년에 큰 태양이 제주에 뚝 떨어진 것과 같다고나 할까. 태양(제주 4·3)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새카맣게 타버렸고, 그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타죽지는 않았지만 눈이 멀었다. 6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나마 '태양'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은 '억눌림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제주 4.3, 세 번째 예술의 옷을 입다


제주 토박이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이 모티브로 삼고 있는 제주4.3이 모처럼 화제다. 오멸 감독 이전에 제주4.3을 대표하는 예술가는 현기영 소설가와 강요배 화백이었다. 현기영 작가는 1978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순이 삼촌>은 제주4.3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지만, 현기영 작가는 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나는 현기영 작가의 작품 중에서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가장 좋아한다. 1948년에 유년기를 보냈던 추억들과 6.25, 직업군인 아버지의 부재와 죽은 아버지의 시체를 닦는 이야기 등 시대에 대한 성찰과 화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작품 속에서 "그것 보라.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지 않앰시냐.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일로 중한 거다."라는 어머니의 말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다.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오래가고"는 제주 사람들의 정신을 상징하며 영화 '지슬' 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현기영 작가가 제주 4·3을 글로 표현했다면, 강요배 화백은 그림으로 표현했다. 대표작 <동백꽃 지다>에는 제주 4·3과 한국전쟁 전후 제주 사람들의 삶 그리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종이·먹·아크릴릭·목탄·유채 등으로 다채롭게 표현했다. <동백꽃 지다>에는 그림과 함께 당시 생존했던 34인의 증언이 삽입돼 생생함을 더했다.

나는 2007년 작품 '젖먹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김석보씨(1998년 당시 63세)의 증언에 따르면 북촌리라는 마을에서 대학살이 벌어지던 날, 군인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을 때 한 아기엄마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업혀 있던 아기는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았다. 미대 출신의 오멸 감독은 강요배 화백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영화 <지슬>과 <동백꽃 지다>를 함께 본 사람들이라면 <동백꽃 지다>에 표현된 그림과 증언들이 영화 <지슬> 안에 많이 녹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지슬>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기존 작품들과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현기영 소설가의 글과 강요배 화백의 그림 등 일련의 작품들을 요약하면 "사람덜아 내 말 좀 들어봅서(사람들아 내 말 좀 들어보세요)"였다. 하지만 2013년의 오멸 영화 <지슬>은 그걸 깼다. 제주 4·3 당시 희생된 영령을 향해 직접 "많이 설왔지양? 진짜 속아수다"(많이 서러우셨죠? 진짜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가 접했던 제주 4·3 관련 예술작품들을 떠올려보면서 '우리가 영령에게 직접 말을 걸고 위로한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영화 <지슬>이 제주 4·3 예술 중에서도 유독 당당해 보이는 까닭은 희생 영령들을 직접 바라 보며 예를 표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를 통해서, 제도를 통해서 위령제를 벌였다면 이제는 예술이라는 제기와 제수를 가지고 제사와 씻김굿을 할 차례다. 씻김굿을 하면 씻기는 사람과 씻는 사람들은 모두 위로를 받는다. 

제기들이 엎어진 채로 시작되는 영화는 '제사'가 시작됨을 알린다. 중간 중간에 소제목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 역시 제사의 진행 과정을 의미한다. 나는 제사의 마무리를 뜻하는 '소지' 편을 보면서 끝내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내가 꼬맹이였던 시절, 어른들이나 친척 형들은 "승주야, 제사 먹으래 가게"(승주야, 제사 먹으러 가자)라고 말했다. '제사 지내다'라는 표현은 망자에게 하는 것이지만, '제사 먹다'라는 표현은 산 사람이 주인공이 된다. 사소하지만 이 '먹다'라는 말은 제주사람의 정신이 농축된 표현이 아닐까. <지슬>은 제주도 사투리로 '감자'를 뜻한다. 이 단어는 "지슬이라도"라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는데 "쌀밥은 못 먹고(먹이고) 지슬로 밥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이중섭 화가(1916~1956)가 제주도에서 끼니도 제대로 못 이어가며 어렵게 작품활동을 할 때 이를 측은히 여긴 동네 할머니가 화가에게 쥐어준 것도 '지슬'이었다. 이중섭 화가가 '지슬'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그림을 전해준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제주 4·3이라는 난리통에 밥상 차려놓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저마다 보자기에 지슬을 담고 아무 곳에서나 자리를 깔고 끼니를 때웠으니 '지슬'은 제주 피란민들의  비상식량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화의 내용으로서는 더 깊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멸 감독의 '지슬'을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영화 <뽕똘>에서 육지에서 내려온 주인공이 친구가 된 감독에게 "너는 영화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극중 감독은 "자파리!(어떤 것을 가지고 하는 놀이 또는 장난)"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제주 사투리를 몰랐던 주인공은 "자파리가 뭐냐?"고 재차 물어보고 감독 친구는 "자파리가 자파리지 뭐냐?"며 끝내 '자파리'의 뜻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뽕똘>에 나오는 짤막한 대사 안에는 세 가지 열쇳말이 담겨 있다. 지역성과 언어 그리고 해학이다. <이어도>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제주 사투리로 쓰여지고, 극중에서 배우들이 사투리를 쓰는 것은 감독의 의지를 보여준다.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역문화 자체가 세계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 <지슬>은 '제주 사투리를 표준어로 번역한 최초의 영화'라는 흥미로운 타이틀도 하나 세웠다. 제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왜 전국개봉을 하지 않고 제주에만 먼저 개봉하느냐?"는 항의성 질문을 많이 받았단다. 나도 그 사정이 궁금해서 배급사에 문의해 봤는데 관계자는 그것이 감독의 뜻이라고 말했다.

"감독님이 제작발표회 때도 말씀하셨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제주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끼리 먼저 잔치를 하자는 취지입니다."

해학 역시 양보할 수 없는 미덕이다. <레 미제라블>을 쓴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해학과 관련해서 특히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빠리의 웃음은 온세상에 진창이 튀게 하는 화산의 아가리이다. 빠리의 해학은 곧 불똥이다. 빠리는 무수한 민족들에게 자기의 이상과 함께 자기의 풍자화들을 안겨 준다. 인류 문명의 가장 숭고한 기념물들이 빠리의 빈정거림을 받아들이며, 그 장난질들에 자기네들의 불후성을 부여한다."(<레 미제라블> 펭귄판 3권, 33쪽)

해학은 제주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 <지슬>에 표현된 것처럼 제주인들은 최악의 순간에도 농담을 던진다. 앞서 언급한 내 외할머니는 만삭에 모진 고문을 견뎌가며 끝내 외아들인 외삼촌을 낳고 죽었다. 동네 사람들은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고 비유했단다. <지슬>은 억눌리지 않았다. 억눌리지 않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해학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여러 가지 자료와 기사를 찾고, 감독의 영화를 봤지만, 같은 곳에서 영화를 함께 본 관객이 남긴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극장 안 매점에서 팝콘이 가득 든 상자를 들고 상영관으로 들어간 한 아줌마가 나올 때도 팝콘이 가득한 상자를 그대로 들고 나오며 친구에게 "팝콘을 하나도 못 먹크라라(못 먹겠더라)"라고 말했다. 곧 이 영화를 볼 독자들이여. 팝콘을 들고 상영관에 들어가지 말기를 바란다. 그 대신 '제사 먹으래 가듯' 영화를 보고 오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신분석학적 임상치료를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심리학자이면서 철학자입니다. 인류의 차원에서 인본주의 제3심리학을 창시해 21세기 심리학자로 추앙받는 아이브러햄 매슬로 역시 심리학자이면서 철학자입니다. 심리학자들 중에서는 철학자인 사람도 있고, 철학자가 아닌 사람도 있는데 인류에 커다란 통찰을 남긴 사람은 대부분 철학자라는 점은 시사할 만합니다. 


<최성애ㆍ조벽 교수의 청소년 감정코칭>을 읽으면서 최신의 심리 이론과 상담 사례, 그리고 쉬운 말과 인생의 지혜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특히 현재 우리의 사회적 나이가 중학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책을 기반으로 진보적 시민운동이나 정치운동을 하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영감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철학과 심리학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작동한다고 했을 때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컨대 청소년기에 전두엽이 리모델링되면서 30평의 두뇌가 100평의 두뇌로 넓어진다는 설명에서 100평 집으로 이사를 가면 30평인 '나의 옛집'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성찰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트라우마를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다 보니 트라우마와 마음의 상처가 나에게 준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환기와 접근 자체가 차단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내가 오늘 지독한 감기를 앓았다면 감기 역시 나의 일부분이지 한시바삐 떨쳐내야할 천덕꾸러기인 것만은 아닙니다. 감기는 다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서양의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심리학,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능서로 한 등급 내려갈 수 밖에 없는 모습이 아쉬웠습니다. 


마음은 21세기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자 철학적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심리학 공부를, 심리학자들은 철학 공부를 하면서 마음의 정체성을 하나로 만드는 일을 하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