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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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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구온난화가 전세계의 화두가 되면서 그 심각성에 대해서 누구나 공감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막연한 추측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막연한 추측에 머무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들은 실질적으로 환경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주저하는 것이다.

둘째, 온난화에 적극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크고 작은 규모의 부담에 대해서 매우 인색하기 때문이다. 몇몇 국가와 다국적 기업의 이기주의로 인해 교토의정서를 포함해 중요한 환경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온난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재활용을 하거나 음식물을 줄이는 등의 기본적인 실천 이외에 체계적인 실천방향을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 국가시스템과 개인의 노력이 맞물려 돌아가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넷째, 스스로의 오만함으로 인해 인간은 생태계와 공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즈의 환경 전문 기자 출신인 저자는 지구온난화 문제의 실체를 다각도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제공하는 수치와 자료, 수치와 자료가 나타내는 상호관계, 미래의 대재앙을 경고하는 조그마한 변화 등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이미 자연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다음 차례가 누구인지 명확히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협력과 대책이 지지부진한 이유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즉 이해관계에 있는 국가와 기업이 눈앞의 손실에 급급해 미래의 대재앙을 방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지금도 온난화를 가속화하는 탄소 소비량은 은행 이자보다 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다.

지구의 위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현실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어찌 되었건 간에 순조롭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를 공포로 불어넣는 테러리즘도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고가지는 않으며 이에 대한 대책 수립이 가능하다. 심지어 우주 괴물마저도 우리는 싸워서 이겨냈다. 하지만 자연의 재앙은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연이 제공하는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선진국, 강대국이라고 일컫는 국가들이 대부분의 환경 재앙을 조장하였으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 없고 가난한 아프리카나 제3세계의 국가들이 짊어져야 하는 극심한 모순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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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1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관심갖고 있는 주제인데, 요새 신문에서도 많이 떠들고, 책도 많이 나왔더라고요.

승주나무 2007-04-10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 님//IPCC 4차 평가보고서가 나온 시점이라서 더 민감한 것 같더군요. 미국이나 중국은 또 '문구따먹기'를 했다죠. 추악하게스리ㅡㅡ;
 
살아있는 과학 교과서 1 - 과학의 개념과 원리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김태일 외 지음, 통합과학 대안교과서 편찬위원회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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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교과서에서 가출했다.


과학*은 내게 물었다.

“왜 너는 자꾸 형이상학적인 질문만 하니?”


나는 과학*이 레고 조각과 조각을 끼워 맞춘 플라스틱 탑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레고 조각 하나에 관심이 있었던 것인데, 과학*은 ‘조각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나를 강하게 질타했다. 과학*과 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공식 앞에 굴복하지 않을수록 나는 제도권에서 멀어져갔으며, ‘과학*’은 투명한 유리병 안으로 숨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과학을 그리워했다.


‘살아있는 과학교과서-1’(이하 과학교과서)은 제도권에서 잠시 나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다. 나무 그늘 아래서는 오붓하게, 기댈 곳 없는 지하철에서는 위태롭게, 야구 경기장에서는 흥미롭게. 만약에 내가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다는 태세다.

“과학교과서가 상상하기 시작했다”

사실 ‘국정 교과서’는 할 말이 얼마나 많은가. 짧은 시간 안에 주어진 분량의 이야기를 전부 전달해야 하므로 찬찬히 일상을 과학적으로 음미할 여유가 없다. 그런데 통합교과 패러다임으로 진입하려는 요즘은 이런 제도권 과학이 학생들에게 “과학을 일상의 소재로 적용시켜 이해할 수 없겠느냐”며 타박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평가표를 들고 성적을 매기겠다고 한다.


과학을 쉽고 흥미롭게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과학 교과서의 개념 전체를 일상의 소재와 상상력을 끌어다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시도는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장면이다. ‘과학교과서 1’에서는 과학의 기본 개념을 그림과 사진, 실험과 역사 이야기 등을 통해 다채롭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각 장마다 간단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아버지께서 회사에서 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 몹시 피곤하시다. ”나도 일이 있어 어머니를 따라 시내에 나갔다.“ 등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일’이란 말을 자주 쓴다. 그런데 일은 과학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일은 어떤 뜻을 지니고 있을까?

- 본문 중에서


글쓴이들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과연 우리가 배운 지식이 어디에 소용이 되며, 왜 알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과학의 시작’으로 보도록 배려한 점이다. 과학이든 수학이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은 머리와 꼬리가 잘린 ‘무생물 지식’이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의 주제를 교과서는 철저히 배제해 왔던 것이다. 글쓴이들의 고민은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넓은 세상 안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으며, ‘과학의 일상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만 장을 시작하며 던지는 화두 중 틀에 맞춘 듯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던 점과 지식 전달의 대의 아래 이야기를 성급하게 닫아버린 점은 무척 아쉽다. 집필 후기에서 필자 중 한 분은 ‘부족한 글발과 철학’을 통탄하기도 하였지만.


과학자는 두 개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일상적 상상력이고 하나는 과학적 상상력이다. 자연이 보여주는 1/10,000의 편린으로 그 대강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문학가 못지않은 ‘위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과학교과서 1’ 안에서 철학이 빛나는 부분은 아마 아래의 구절이 아니었나 한다.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들은 수소ㆍ산소ㆍ탄소ㆍ질소ㆍ칼슘 등으로 천체 및 우주를 구성하는 성분 원소들과 같다. 결국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은 우주로부터 온 것이다. 즉 천체의 물질과 인간의 몸은 같다.”

- 본문 중에서


철학이 과학을 온전하게 감싸고 과학이 그 틀을 뚫고 나오기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정렬적인 그림이 순간 내 앞에 펼쳐진 듯하여 행복했다.



※ 과학*은 ‘과학교과서’를 말한다. 그 당시는 과학교과서가 내가 만날 수 있는 과학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이 글에서 ‘과학’이란 말 자체가 분열과 모순을 보이는 데, 그것은 의도한 바이다. 그리고 263쪽의 '1.6m'는 마땅히 '1.6mm'가 되어야 할 것 같으니, 확인하고 재판에 반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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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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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삶에 걸고 있는 기대는 진실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들에게 걸고 있는 기대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내가 첫 번째로 잡은 심리학 책이다. 이 후로 나의 심리학적 지식은 하나도 덧붙여지지 않았다. 꽤 오래 전부터 심리학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거나, 정치제도나 광고 등을 위한 필수 요소라는 의미로 내게도 필요한 지식이었다.

빅터 프랭크의 심리학은 '실존 심리학'이기에 더욱 끌리는 바가 있다. 그는 책의 지면 내내 프로이트를 비판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심리학을 '해부학' 또는 '자동차 부품학' 정도로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요즘 이래저래 욕을 많이 먹는 것 같다. 심리학의 원리는 '실존과 실존' 혹은 '실존과 세상'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어떤 사람의 행동 양상에는 그것을 이끄는 '기제'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의인화시키는 순간부터 심리학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부속품'이 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수십 년 동안 치료를 받고도 치유되지 못하는 까닭은 심리 치료사가 환자를 '인격'으로 본 것이 아니라 '환부'로 보았기 때문이다. 환부와 환부는 부딪칠 수 있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자를 수는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치유한다는 근거 위에 있지만, 프로이트 식으로 따지면 그것은 '지독한 모순'이 된다.

이들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심리를 논하게 된 까닭은 그들의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빅터 플랭클은 인생의 경험이나 억압에 상처받은 수준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사를 알 길 없는 '수용소'에서 3년을 살아왔다.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힌 것은 생사의 갈림길 안에서 목격한 정서적 공황 상태였을 것이다.

1. 수송은 수용소의 일정한 수의 죄수들을 다른 수용소로 이송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그러면 모두들 최종 목적지는 당연히 가스실이 될 것이라고 쉽게 추측을 했다. 병자나 일을 할 수 없는 연약자들 가운데서 뽑힌 사람들은 가스실과 화장터가 설치된 중앙의 대수용소로 옮겨지리라는 것이다. 이 선발 과정은 모든 죄수들 상호간, 혹은 떼를 지은 집단끼리의 제약 없는 싸움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다른 한 명의 희생자가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친구를 희생자 명단에서 지우려고 아우성을 쳤다.
한 번에 몇 명의 포로가 수송되느냐, 하는 것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수송되는 죄수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번호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숫자만 채워지면 되었지, 누가 수송되느냐 하는 것은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2. 나는 발진 티푸스 화자로서 얼마간 오두막집 병실에서 보낸 적이 있다. 티푸스 환자들은 높은 열이 올라 혼수상태에 빠져들곤 했으며, 많은 환자들이 산송장이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막 죽고 난 후 곧이어 벌어지는 광경에도 나는 전혀 정서적인 좌절감을 맛보지 않고 지켜볼 수 있었다. 한 환자가 죽고 난 후 벌어지는 광경은 되풀이되었던 것이다……모두 차례로 여전히 체온이 남아 있는 시체 곁으로 다가간다. 한 사람이 불결한 감자밥의 찌꺼기를 움켜잡았다. 다른 한 사람은 시체의 종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이 자기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바꾸어 신었다. 세 번째의 사내는 죽은 자의 코트를 자기의 것과 바꾸어 입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진짜 노끈을 약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흐뭇하게 여겼다. 상상이나 해보라, 이 얼마나 끔찍한가!
이 모든 광경을 나는 무관심으로 지켜본 것이다.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도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의 모습은 마치 영성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로고데라피'라는 용어는 그가 도입하였는데, '로고스'에는 '의미'와 '진리', '심령'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의 로고데라피 치료법은 환자의 억압 기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장래'에 충족되어야 할 의미와 임무를 각인시키거나, 현재의 상황을 '환기'하도록 만든다. 장애를 가진 아이와 단 둘이 남아 자살하려는 어머니에게 '그 아이의 생명'의 권리를 주지시키거나, 80세의 부유하지만 자식이 없는 노파라는 설정을 통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또는 30년 동안 정부 관료로 지내면서 억업과 스트레스, 상처로 고통받는 사나이(그는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에게 직업을 바꾸라고 권하는 것은 '직관'에 의지하는 바가 크지만, '같잖은 분석'보다는 환자를 위해 유익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가'처럼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안과의사'처럼 그림을 볼 수 있게 눈을 열어주는 것이다. 즉 그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소통시켜 그 스스로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로고데라피의 미덕이다.

로고데라피가 심령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의미있어 하는 실존적 '열망'이나 '좌절' 등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무의식의 뿌리와 원천을 더듬어 올라가는 ‘본능적’인 견지에서 다루려 하지 않고 심령적인 견지에서 진지하고도 열의 있게 다룬다'는 것이 심령적 요법의 핵심이다.

인간은 한정된 지적 능력을 초월할 수 있다. '합리적인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절대적인 무의미함을, 그의 무능력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기에 '로고스'는 '논리'를 넘어서 있다.

이처럼 나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심리치료사를 만난다면 나는 스스로 '정신치료 희망자' 그러니까 '정신병자'가 될 용의가 있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마다 따로 출판된 적이 있다. 1부는 그의 '로고데라피' 이론의 풍부한 예시가 될 만한 내용이다. 즉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맞닥뜨리고 견뎌냈던 3년간의 일상이 수록되어 있는 보고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2부와 3부의 내용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와 3부는 '로고데라피'에 관한 본격적인 견해가 나와 있다. 그가 30분의1도 안 되는 지독한 생존률의 지옥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수용소 생활을 피해의식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좀 더 분명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살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한 가지 사실은 내가 겪어야 하는 괴로움이 헛된다는 것, 오직 그것뿐이다.”
이 말은, 강제수용소에서 최후의 내적 자유는 상실할 수 없다는 사실을 행동으로써, 고통과 죽음으로써 증언을 해준 순교자들을 알게 된 이후, 빈번하게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곤 하였다. 그러니까 그들이 받은 고통은 보람찬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 낸 방법은 순수한 내적인 성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빼앗길 수 없는 심령적 자유야말로 삶을 의미 있고 목적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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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북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피터 탤랙 엮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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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과학혁명의 구조 등 과학 교양 서적을 읽고 나서 들끓는 욕구로 과학사 책을 하나 정해서 보기로 했다. 시중의 과학사는 주로 과학사의 연대를 몇 부분으로 나누고 이에 대한 의의를 서술하는 식이었다. 문학사든 철학사든 흔한 방법중의 하나이다. 그 중에서 눈에 띈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된다는 점, 시간 여유가 많이 없을 때 아무 페이지나 볼 수 있다는 점, 집중적으로 하나의 주제에 매달린다는 점, 기억할 만한 사건과 기억할 만한 과학자, 그리고 주제와 인물을 적절히 표현하는 그림이다.

'사이언스 북'은 텍스트 한 면, 그림 한 면으로 되어 있어, 왼편에 있는 글을 읽으면서 오른쪽의 그림을 참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중간에는 대표저자들이 총론에 해당하는 두 페이지짜리  글을 써놓았다.

역사 서술로 따지면 편년체(編年體)라 할 수 있는데, 기원전 35000년부터 인간 유전체 지도가 작성된 2000년까지 유구한 과학의 역사를 담아낸 250개의 장면 안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알고 있지 않은 이야기나, 알 도리가 없는 내용을 실감나게 알려주고 있다. 혈액형 ABO가 항체인 것은 알지만, 동물의 피를 수혈해 왔고, 때로는 성공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수학이나 기호를 표현하는 것도 단순화의 극단적 표현이다. 그들은 대나무의 텅빈 속처럼 뚫려 있다. 어디 매이지도 않고, 쓸데없는 오해를 조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야기가 단조롭지 않다. 그들이 발견한 세계는 시인과 철학자들이 발견한 정신세계와 같이 신비하고 아름답지만 보다 다채롭고 선명하다. 만약에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이 만들어 놓은 비유의 강을 예술적 원천으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들의 표현하는 과학 안에는 정치, 속설, 종교, 민간신앙, 배신, 모략 등이 인간계보다 훨씬 넓은 자연계 안에서 펼쳐진다. 그들에게 '인간'이라는 개념은 만물의 주인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성적인 동물과 같은 영예로운 것이 아니다. 동물과 같은 계를 가지며, 동물과 같은 사회 안에서 서로 먹고 먹히면서 동물의 본능을 공유하는   좀 특이하고 관심이 더 가는 존재일 뿐이다.

만약 데카르트가 '정신'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주일간 성찰한다면 그는 '과학자'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하여 나온 듯한 이 책이 만약 5년 정도만 늦게 발간되었다면 우리나라 연구팀의 자랑스런 연구결과도 게재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책을 덮었다. 과학의 각 분야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는 저자들의 세련된 필체와, 세심하게 배려한 배열을 따르며 과학사의 넓은 밑그림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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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 개정신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김용준 옮김 / 지식산업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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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분과 전체
- 학자의 인품



들어가기 전에 - 재독(再讀)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요약하고, 요약한 부분을 다시 정독하는 과정에서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다가가려 했던 이전의 책읽기와 달리 책 전체를 완전히 다시 읽는다는 것은 내게는 초유의 경험이었다. 물론 읽고 난 책이 다시 생각나 꺼내본 적이 있지만, 그것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이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인상은 묘한 유혹이었다. 저자는 알고 있는 부분을 논리적으로 요약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계를 모험하듯이 저술하고 있으며 저술이 끝난 후에도 이 모험은 끝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이를 읽고 요약을 한다는 것도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나는 다만 저자의 동선을 따라서 그의 족적을 그려보는 데 만족할 따름이었다.
인문학을 주로 경험한 내가 과학의 이론에 다가간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모험일 수도 있다. 비록 저자가 인문학을 위한 배려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정신의 진행과정을 가볍게 따라갈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내가 이 글에서 기록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나의 즐거웠던 기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쓰고 보니 인용문들이 아주 많은 것 같다. 오히려 본문보다 인용문이 글의 전체를 차지하여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글은 책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나의 글보다 저자의 글을 더 소개하는 것이 후기로서의 미덕이라 생각하여 많은 인용문을 담았으니 양해 바란다.


대화


이 글의 기본적인 저술방식은 '대화'이다. 그것은 저자가 플라톤의 저서에 심취했다는 배경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화가 주는 효용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대화가 '산파술'이라는 이름으로 대화상대를 일정한 목표까지 가기 위한 도구로 삼은 반면, 하이젠베르크의 대화는 그의 시대와 이론과 관계되는 모든 구성원들을 불확실한 세계를 함께 탐험하는 동반자로 본다. 특히 세계란 한정된 사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소신을 바탕으로 관심과 인내를 가지고 누구든 그의 대화상대로서 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자가 살아간 시대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는다. 저자가 평생 친구이자 스승으로 여긴 보어가 전통적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급변하는 대세에 자신의 소신을 끊임없이 되물으며 치열한 생을 걸어왔던 바탕은 그를 좀더 광활하고 현실적인 세계로 안내하였다.

보어가 19세기 시민사회의 전통적 사고, 특히 그리스도교적인 철학의 사고과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선 커다란 노력을 필요로 했던 시대에 성장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신도 그런 노력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고대철학, 특히 신학(神學)의 언어를 아무런 주저 없이 사용하기를 항상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두 차례의 혁명을 거치는 동안 어떤 전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데는 노력이라는 것이 거의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된 대화상대자는 보어나 아인슈타인 외에도, 나치 당원의 젊은 지도자와 미국의 실용주의자, 칸트 철학 신봉자, 친구의 어머니, 부인, 당시 독일 수상 등 거의 사회 전구성원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주장은 간혹 어설프고 치중된 것이었을지라도 저자는 개의치 않고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들이 진지하게 물어오는 물음에 대해서 저자의 각별한 애정과 사명을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불확정성의 원리


내가 일주일 내내 끙끙거리면서 독서후기를 완성 짓고자 했으나 끝내 내 품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이 책의 신비한 원인를 찾다가 갑자기 불확정성의 원리에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해서 표현하기 위해서는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왜곡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책의 완전한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이 책에 대해서 알기란 요원하다. 즉 불확정성의 원리란 액체스프의 마지막 내용물을 짜내듯이 우리는 상을 비틀어 값을 구하므로 값은 왜곡성을 갖는다. 하지만 비틀지 않고서는 데이터는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원리상으로 우리는 한 세포 내에 있는 모든 원자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측정이 살아 있는 세포를 죽이지 않고서도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살아 있는 세포가 아니라 죽은 세포에서의 원자들의 배열이 됩니다. 우리가 그때 양자역학에 따라서 관측한 원자의 배열을 기초로 해서 그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계산하였다고 하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 세포는 붕괴하고 부패하기 시작한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역으로, 세포를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매우 한정된 관찰만이 허락될 것이며, 여기서 얻어진 결과는 역시 좋은 정보이기는 하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 세포가 살아 있는지 파괴되었는지를 결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응하는 방법이자 내가 제대로 된 독서후기를 쓸 수 있는 방법을 추론하면 다음과 같다. 군에 있을 때 한 달에 두 작품의 후기를 썼다. 그것은 하나의 책을 읽고 보름이라는 기간 동안 충분한 사유의 숙성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유로워진 상황에서는 수학적으로 두 배 정도의 후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나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특히 나의 후기는 후기대로, 책은 책대로 완강히 거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두고 사유를 조금씩 넓히고 좁혀가면서 나는 좀더 능숙하게 후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실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실험이란 짧은 시간에 좁은 공간에서 조건값을 주고 그 결과를 바라는 행위이다. 자연 전체나 모든 시간을 실험실로 쓰면 그만큼 진리에 가까운 발견을 할 수 있겠지만, 모든 전체적인 조건을 조건값에 대응해서 결과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주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되도록 조건값 하나하나를 설정할 때 전체 자연과 관계지으면서 사려하고 배려한다면 좀더 유연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보다 완숙한 진리값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학에 종사하지 않는 인문학도의 의견이다. 좀더 문학에 가깝게 간다면 도스또옙스끼의 회고가 생각난다.

젊은이들은 영감이 떠오르자마자 열정적으로 달려들어 작품을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영감이 턱끝까지 차올라도 섣불리 작업을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천천히 하나의 그림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그림이 전체의 상을 찾을 때 비로소 작품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글쓰기로 돌아가 보자. 책이 나타내고자 하는 요지는 한정돼 있다. 그것을 포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핵심적인 문단들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활성화가 되어 있다는 말은 언제나 적재적소에 넣을 수 있는 준비상태를 말한다. 3단 필터 방식의 그물몰이로 핵심을 잡아서 글을 쓰기 전에 머리 속에 전체 그림의 조각을 다 맞춰야 한다.

두 주인공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인 서술로 이루어졌는데, 많은 동료, 스승, 토론자, 친지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단연 지면을 장악하는 인물은 역시 저자와 닐스 보어이다. 이 두 사람은 평생에 걸쳐 공동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양자역학이라는 체계를 구축해 냈다. 그러나 그 양자역학이 나오기 위한 결정적인 씨앗은 역시 그들이 최초에 지녔던 착상이었다. 험하게 말해 '저자는 대칭성에 보어는 안정성에 미친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 두 사람은 불확정성과 상보성 이론에 도달했으며 그것이 양자역학의 바탕이 된다. 원제를 번역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대칭성을 책 제목으로 설정하였고 책 전반에 걸쳐 대칭성을 탐구하고 몸소 표현하고 있다.

「태초에 대칭성이 있었다」―이것은 데모크리토스의 「태초에 입자가 있었다」라는 명제보다 더 옳은 명제이다. 소립자는 대칭성을 구체화시킨 가장 단순한 표현이지만 그것은 또 비로소 대칭성이 이루어진 한 결과인 것이다.

역자도 해제에서 대칭성 부분을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저자의 생의 대칭성에 해당한다.

어떤 구체성을 띤 일을 하기 시작할 때는 대단히 작은 점까지를 세밀하게 검토해 가면서 몰두하는 저자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다. 거의 초인적인 정력을 쏟으며 산중에서 씨름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부분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해 나가는 태도와, 일단 결과가 얻어지면 이론 전체 또는 실험 전체의 상황 하에서의 총체적인 관련성을 재검토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전체성을 재검토하는 일들이 본문에 전개되고 있는 주옥과 같은 대화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후기의 제목도 역시 '대칭성'에서 나온다. 학자는 의식적으로 선을 지향할 수 없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향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선을 행동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 자신의 분야에 열정을 바치는 것이 '선'을 향한 길인 것이다. 그것이 철학자나 문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기술자나 과학자, 노동자도 역시 그러한 길이 분명히 놓여 있다. 학자가 설익은 선을 의도하려 할 때 과학적으로 많은 오해가 생기며 정치와 불온한 거래가 이루어진다.

나는 적어도 학문만큼은―내가 뮌헨의 시민전쟁에서 아주 싫증이 나도록 들었던―정치적 의견의 싸움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격적으로 약한 사람들이나 병적인 인간들을 이용하면 학문의 생활도 악의 있는 정치적 격정에 의하여 오염되고 일그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이다.

보어의 주제는 안정성이다. 안정성은 돌턴의 혼합물 이론에서 제기된 문제이다. 원자의 모형을 탐구한 보어는 오랫동안 돌턴을 탐구하였을 것이다. 설탕물에서 설탕과 물의 성분비가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세부의 원자들 또한 결정을 어김없이 유지하는 모습이 보어에게는 매혹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전에 '인간등정의 발자취'란 책으로 썼던 후기에 나오는 돌턴의 말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기초 입자들이라 정당하게 부를 수 있는 상당수의 입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입자들은 절대로 다른 입자로 변형시킬 수 없다."

물질이 화합물인가 혼합물인가를 보기좋게 재단해준 돌턴의 제일보를 이어받아 보어는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화합물론의 편린들을 걷어내려고 시도한다.

내 출발점은, 지금까지의 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경이(驚異)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물질의 안정성이었습니다. 내가 안정성이라는 말로써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이 항상 반복하여 같은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 또 같은 결정(結晶)을 반복 형성한다는 점, 그리고 항상 같은 화학종합(化學綜合)이 생긴다는 점 등등입니다.
통일적인 물질의 존재, 그리고 고체의 현존, 이 모든 것은 원자의 안전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학생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플랑크는 원자계의 에너지는 쉽게 불연속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즉 그러한 체계에 의한 에너지의 방출에 있어서는 내가 후에 정상상태(正常狀態)라고 불렀던 특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정류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혼합물이 되고 안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의 물질 안에 모든 것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원자 안에는 어느 한 부분에 핵심적인 요소들이 '불연속적'으로 뭉쳐 있으며 그것은 볼쯔만이 제기했던 통계열역학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조만간 라듐 B원자가 어떤 방향에서 전자 하나를 방출하고 라듐 C라는 원자로 이행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꼭 반시간 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원자에 따라서는 어떤 것은 1초가 되기 전에 그런 전이가 일어나고,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여기서 평균적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많은 라듐 B원자를 취급하는 경우 30분 후에는 대략 절반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인과율의 어떤 파탄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양자택일에 놓였을 때 대칭성과 상보성, 안정성과 불확정성이 모두 나타난다. 우리는 한쪽을 택하면 한쪽은 배척되는 거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물론 결정적인 선택은 돌이킬 수 없으나 선택의 순간에도 선택지는 우리를 향해 그 대칭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하나를 완벽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이에는 대칭적인 비율이 있어서 자신 있게 한 가지를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반대 선택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항상 두 선택지는 서로 대등하게 겨루고 있으며 비율이 반이 넘은 것이 결과적으로는 선택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가장 간단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목적적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가장 간단한 것이란 다름 아닌 양자택일입니다. 예스냐 노냐, 존재냐 비존재냐,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양자택일만 생각하고 있는 한 거기서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자이론에서는 확실히 양자택일에 있어서도 예스나 노라는 대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밖에 상보적인 대답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그 대답 안에서는 예스나 노에 대한 확률이 정해져 있으며, 더 나아가서 예스와 노 사이에 하나의 진술가치(陳述價値)가 있는 어떤 종류의 간섭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대답의 하나의 연속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자들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다. 실제로 선현들은 선택의 강요에도, 딜레마에도 빠지지 않았다. 비록 외양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엄청난 시련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의연하며 거기에 그들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학자의 인품

인생에 커다란 딜레마와 어려운 선택의 강요에 몰리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저자도 커다란 시련에 놓이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독일 사회는 무서울 정도로 경직되었고 집단환각증세를 보였다.

내가 독일에서 보냈던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 년간은 항상 무한한 고독 안에서 시달리는, 그러한 기간이었다. 국가사회주의 정권은 점점 더 경직되어 갔으며 내부로부터의 개선 같은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도 없었다.
……
설상가상으로 독일 내에서는 개개인의 고립화가 심해지고 있었으며, 상호간의 이해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극히 제한된 친구들간에서만 마음놓고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했으며,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알린다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은폐하려는 듯한 매우 조심스런 언사들만이 오가는 것이었다.

이 시절 독일에 남을 것인가 독일을 떠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저자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라이프치히로 가는 기차 안에서 플랑크와의 대화에서 오고간 말들이 나의 머리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나는 내가 이민을 결심해야 할 것인지 여부에 몹시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독일에서 강제적으로 생활기반을 빼앗겼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나라를 떠나야만 하는 친구들이 부럽기조차 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지독한 물질적인 곤경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들에게는 선택에 대한 결단의 고통은 없었다.

선택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소하고 작은 주위의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자각시키는 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딜레마의 위기에서 힘차게 내 손을 잡아줄 수도 있다. 대개 사람들이 딜레마에 빠지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먼저 빠지게 된다. 오래된 경전의 한줄 글귀처럼 '자신을 해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이 나를 해할 수 있고, 나라가 스스로를 멸망시킨 후에야 적국이 그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 연로한 플랑크 선생의 진언이 저자의 선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당신들의 계획(정부의 파국적 임용에 저항하여 교수사회가 시위적으로 사직하려는 계획, 저자는 플랑크에게 최종적으로 조언을 얻으러 간 것이었다―인용자주)은 이 파국이 끝날 때까지 당신들에게 반작용만 미칠 것이고―당신들에게 이미 희생에 대한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을 줄은 압니다만―기껏해야 이 재난이 다 지나간 후에나 어떤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목표를 그곳에다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만약 사직한다면 최상의 경우에 외국에서 어떤 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행한 경우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군요. 그럴 경우 당신은 외국에 이민을 가 정착하게 되겠지만, 당신보다 훨씬 더 곤경에 처할 사람들을 계산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 경우는 외국에 가면 이 같은 재난 밖에서 안주하면서 조용하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파국이 종언을 고할 때 당신은 나는 저 무법자들과는 타협하지 않았다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귀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경과해야 할 것이며, 당신은 지금의 당신과 많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곳 사람들도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그때 과연 당신이 많은 변화가 일어난 이 땅에서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한편 사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머문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문제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결국 이 파국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불변의 고도(孤島)들을 형성하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젊은 사람들을 당신 주위에 모을 수 있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학문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의식 속에 옛날의 올바른 가치척도를 심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재난이 끝날 때까지 이와 같은 고도(孤島)들 중에서 몇 개가 살아남을 것인지는 물론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을 가지고 이와 같은 공포시대를 끝까지 헤쳐나갈 수 있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그것은 극히 작은 그룹일지라도―이 있다면, 그들은 파국이 끝난 후 이 나라의 재건에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
인종문제로 인하여 이 땅을 떠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땅에 머물러 먼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 준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입니다. 이런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위험이 반드시 수반될 것입니다. 여지없이 강요되는 타협 때문에 후에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며, 때에 따라서는 법의 제재를 받는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행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으며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저자의 인품이 흘러나오는 경로였다. 저자는 진지한 탐구자세로 자신의 학문분야는 물론 실생활과 철학적인 문제까지 일관된 인간형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대개 명성 따로 인간성 따로인 위인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역사에 '인간적인 생리'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그들의 영웅적인 행보와 역사에 기여한 성과들을 훌륭히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은 한 인간이 '인생'이라는 단위로 보여주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그 반쪽만을 보여주는 영웅들에게 우리는 역시 '반쪽'으로 대면해야 하며, 전체로 보여주고자 하는 드문 사람들은 '전체'로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루소의 정신적 기여도만 가지고 그가 아이들을 모조리 고아원으로 보내버린 행동을 정당하게 볼 수 없다. 영웅과 선현을 대하는 우리들이 이런 비판정신 없이 그들의 완결되지 않은 성향을 인정한다면 사회는 그들의 결여 만큼 타락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되도록 완전한 가르침을 인생을 통해 보여준 사람들을 발굴하여 그에 맞도록 인생의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선택에 앞서 저자와 페르미의 격렬한 대화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후기를 마친다.

(페르미)
<도대체 당신은 독일에서 무엇을 더 바라는 것입니까. 당신은 물론 전쟁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고, 하기를 원치 않는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책임지기를 꺼리는 일을 책임져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모든 불행을 함께 함으로써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당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나라는 유럽에서 고향을 등지고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서 건설된 나라입니다. 그들은 그곳 유럽의 협소한 환경과 작은 나라들 사이의 끊임없는 분쟁과 싸움, 억압, 그리고 해방과 혁명들, 이 모든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비참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광막하고 자유로운 신천지에서 역사적인 과거로부터 밀려오는 모든 사슬을 풀어버리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는 위대한 존재였지만 이곳에서는 한낱 젊은 물리학자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시원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그 모든 짐을 던져버리고 이곳에서 새출발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곳에서 당신은 훌륭한 물리학에 전념할 수 있으며, 이 나라에서의 자연과학의 커다란 비약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왜 이런 행복을 포기하려 하시는 것입니까.>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 바로 그러한 질문을 천 번이나 스스로에게 반복하였습니다. 저 협소한 유럽에서 이 넓은 나라로 이민을 올 수 있는 가능성은 저에게는 끊임없는 유혹의 씨였습니다. 아마도 그때에 나는 이민을 했어야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 머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과학에서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데 공헌하고, 전쟁 후에 독일에서 훌륭한 과학을 재건코자 하는 뜻 있는 젊은이들을 나의 주위에 모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이 젊은이들을 버린다면 그들은 나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우리보다는 훨씬 더 어려울 것이고, 이곳에서 쉽게 직장을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이와 같은 나의 이점을 단순히 나를 위해서만 이용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전쟁이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의 위기 때 나도 소집을 당했었는데, 그때 나는 이 전쟁을 원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총통(總統)이라는 사람의 소위 평화정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때 독일 민중은 자각하여 히틀러와 그의 신봉자들을 추방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너무 안이한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페르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독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나로서는 아직도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군요. 나는 사람들은 그 결단에 있어서는 시종일관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어떤 일정한 주위환경과 일정한 언어와 사고영역에 태어나서 매우 어릴 때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는 그 영역에서 가장 적절하게 생장할 수 있으며 또 그곳에서 가장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경험에서 미루어본다면 어느 나라든 조만간 혁명과 전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마다 미리 이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확실히 합리적인 충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이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여야 하며, 도망갈 생각부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파국을 자기들 스스로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요청은 모든 파국을 미리 방지해야겠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부당한 것이라는 점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개개인이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민중이 완전히 잘못된 길로 휩쓸려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 자신의 탈출도 단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니까요. 다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점은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일반적인 규칙은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결단을 자기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결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아마도 둘 다 옳을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에 독일에 남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결심은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와서 그 결심을 변경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불의와 불행이 초래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았으며, 그러한 결정에 대한 전제들이 아직도 전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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