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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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적, 혁명적, 정력적, 악마적,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가득하고, 창조하려는 엄청난 충동으로 넘치는 삶, 그것이 바로 성장과 행복을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의 삶이다

- <온들의 교장 샌더슨의 연설> 중 일부

 

이 책은 내가 읽은 도킨스의 두 번째 책이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이기적 유전자'를 1교시라고 한다면, 이 책은 '쉬는 시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확장된 표현형'이나 '눈먼 시계공', 혹은 '조상 이야기' 같은 책으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렇지만 소개글에 '대중을 향한 글'이었다는 문구가 '꽂혀서' 이 책을 다음 책으로 선정했다.

 

도킨스가 그리는 다윈 같은 사람은 너무나 수줍음이 많아서, 메모나 서한문을 보지 않고서는 그 사상의 큰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킨스는 다윈의 충실한 탐구자로, 시대와 과학수준의 간극을 메워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가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들을 일별하는 것으로 그의 '칼럼니스트'의 면모를 볼 수 있게 된다. '대중적 과학자의 대중을 향한 글쓰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오래된 경서인 '대학(大學)'에 주자 서문을 보면, 옛 선현들이 학문을 하는 원리가 기록돼 있다. 즉 몸소 행하고 나머지를 학문에 정진하며(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 서민들이 일상에서 몸소 행하는 정도를 넘어가지 않는다(不待求之民生日用彛倫之外). 그래서 당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얻어듣지 않을 수 없고, 얻어들은 사람은 자신의 직분에 맞게 소화시킨다. 도킨스가 일상으로 파고든 이유는 그가 믿는 과학관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과학은 무엇이 윤리적인지 판단할 방법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판단할 문제이다. 하지만 과학은 제기되는 질문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으며, 판단을 흐리는 오해들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그가 볼 때 아직도 세상에는 비과학적 생각이 비과학적 경로를 통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때의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준거틀을 바탕으로 부딪히는 문제들마다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그가 논쟁에 익숙한 것은 이 때문이며, 다소 도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즐거운 삶의 비밀은 위험을 무릅쓰며 사는 데 있다 - 니체(본문 중에서)

 

그것은 그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호감도는 '극단적'이고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그가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신념은 '경직성 걷어내기'이다. 대중적 글쓰기 자체도 그렇고, 대중과 잦은 대면을 시도하는 것 역시 그러한데, 그것은 그의 글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면을 아끼지 않으며, 그가 사용하는 '독특한 유머'는 순전히 그의 의도 안에 있는 내용물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 자신이 제안한 단어인 '밈'이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 검색해본 적도 있다. 거기서 '바이러스 교회'라는 신흥 종교에서 '성 다윈'을 따르는 '성 도킨스'로 우상화되어 있는(사실은 비꼬는) 말을 보고 흠칫했다고 술회한다.

뿐만 아니라 '상상의 동료'나, '마음 근육', '애정 어린 냉소'와 같은 독특하면서도 와닿는 언어 사용법은 그의 유쾌한 성향을 잘 보여준다. 유쾌한 문구를 하나만 들어보기로 하자.

 

125년이 지났으므로,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이론이 그가 원래 제시한 이론을 수정한 것이라고 예상하기만 하면 된다. 현대의 다윈주의는 다윈주의에 바이스만주의와 피셔주의와 해밀턴주의를 더한 것이다(거기에 기무라주의와 몇몇 다른 주의들을 덧붙인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윈의 글을 읽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이 대단히 현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끊임없이 놀란다. 그는 유전학의 모든 중요한 주제들에서는 심하게 잘못된 견해들을 내놓았지만,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에서는 정답에 도달하는 기이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아마 지금의 우리는 신 다윈주의자이겠지만, ‘신’이라는 접두어를 아주 약하게 발음하도록 하자.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주지하듯이 신문에 냈던 칼럼, 책에 대한 서평, 추도사, 서한문 등 저술가가 일상에서 '글을 써야 할' 모든 지면의 흔적이 담겨 있다. 특히 종교와 권위, 전통과 같은 오래된 문제,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들을 들춰내 지속적으로 따져 묻는(지면을 아끼지 않으면서) 부분은 가히 '도발적'이라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배심제'에 대한 불만도 잔뜩 담아냈다. 토니 블레어 수상이나 찰스 왕세자에 대한 풍자도 삼가지 않으며, 자신의 라이벌인 스티븐 제이 굴드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애정어린 비판'을 가한다. 어느 면을 보더라도 우리는 글 속에서 아련한 애정과 열정, 과학의 공정성에 대한 진한 믿음을 볼 수 있다. 과학을 체화해낸 이 용감한 대변인은 언제,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리라는 믿음이 들 정도이다.

 

저자 서문과 편집자 서문, 역자 서문을 설레설레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보니 마지막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 책을 종합하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에 도달한 자신이 즐겁고 자랑스러웠지만, 머리말에 그런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무의식'이 결정적인 힌트를 준 모양이다. 이 책을 처음 잡은 사람은 앞의 머리말도 좋지만, 맨 마지막의 편을 머리말로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도킨스에 가장 감사하는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를 맨 처음 읽고 나서부터 지금가지 '종의 기원'이나 '대담'과 같이 나랑은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은 '생물학'(또는 사회생물학)에 흠뻑 빠질 수 있게 한 그의 '대중적 글쓰기' 덕분이었다. 이 '밈'은 국내외의 학자들을 심히 자극시킨 모양이다. 아니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물학' 서적에 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 있었겠는가.

 

브로노프스키의 말처럼 21세기는 과연 '생물학의 시대'이다. 수학-물리학-생물학으로 이어지는 과학 정신의 '핵심과목(?)'은 타당하고 장구한 서사를 이루고 있으며, '말과 글'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언어 수단을 '생물학' 또는 '과학'에 초점을 맞춰, 그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매일같이 고심하고 있는 그는 분명 선각자이거나 선각적 지식인이다. 맹자가 그려낸 '선각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중에 깨달은 사람을 일깨우는[覺後覺] 의미의 '선각자' 말이다.

 

하늘이 이 사람(선각자)을 세상에 나게 한 것은 ‘먼저 안[先知]’ 이로 하여금 ‘나중에 안[後知] 이’를 일깨우기 위함이며, ‘먼저 깨달은[先覺]’ 이로 하여금 ‘나중에 깨달은[後覺] 이’를 일깨우게 하기 위함이다.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맹자》, <만장 상,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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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6-09-2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감사함다^^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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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생물학, 두 이산가족의 상봉의 시작



도정일 선생과 최재천 선생은 인문학자와 과학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 분야를 넘나드는 사람들이다. ‘큰 장사꾼은 큰 장사를 한다’는 옛 문헌의 금언을 학문적으로 실천한다면 가장 큰 동그라미를 매일같이 그려나가는 학자들이 두 사람이다. 특히 최재천 선생은 유명한 개미 연구가로 수년 동안 논문 한두 편도 나올 수 없는 ‘느리고 큰’ 분야를 맡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빛을 보기 힘들다. 그가 얼마나 큰 학문의 원을 그려내든 우리들의 척도로 보면 ‘원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불만과 ‘간극’이 그의 인문학적 출발점이라고 하면 너무나 거창할까?

도정일 선생은 어떠한가. ‘생물학자와 인문학자의 대화’라는 기획은 그 특성상 생물학자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지만 그는 단순 명쾌한 비유와, 평소에 왕성하게 섭렵한 과학적 지식을 인문학적으로 요리하여 최재천 선생의 과학적 견해를 구수하게 풀어낸다. 이 대담에서 생물학과 인문학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도정일 선생 덕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살아있다’는 말과 같이 사유와 생명은 한 몸과 같았다. 불행히 신의 벌을 받고 둘로 가라진 남자와 여자의 존재와 같이 세분화된 지식의 험로에서 두 분야는 단절되고 만다. 둘은 항상 만나야 하는 사명을 타고 났으며, 그것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이유이다. ‘죽은 사유’와 ‘무미건조한 과학’의 토양 위에 서서 서로를 향해 가녀린 손짓을 보낸다. 그것이 ‘대담’이 있게 된 연유이다.



과학은 답을 추구하고 인문학은 질문을 추구합니다.<도정일>


사실 과학과 인문학의 출발점은 다르다. 생물학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 생물학이 캐낸 진실 역시 ‘진정한 의미의 진실’이 되기는 힘들다. 그 한계가 분명할수록 발견은 더욱 빛난다. ‘객관적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부분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불가능하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이론이나, ‘수학의 불완전성’을 입증한 괴델의 공리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엄밀한 관찰을 통해 ‘엄밀한 과학’의 한계성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변수’들을 일깨우는 것은 인문학과 과학이 힘을 모아 해결할 과제이다.

황우석 사건과 이 책의 발간이 묘하게 겹치면서 우리는 생물학과 인문학의 접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리들이 이 사건을 통해 고수했던 ‘절대성’은 ‘엄밀한 과학’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과학의 부재와 인문학의 부재가 겹친 ‘맹신’의 결과였다. 따라서 황우석 사건에 대해 분명한 답을 구하기 위해 이 책을 펼쳐들었다면 주소를 잘못 찾은 것이다. 이 책은 과학에 관한 아주 분명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야 솔직한 대담이 되기 때문이다.


저도 유구라, 그러니까 유홍준 선생님과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데, 그분은 정말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게 다 구라야"라고 밝히고 계속 구라의 길을 가더군요.(하하하) 그런데도 옆에 있는 분들이 전혀 반감을 안 가져요. 그분의 이야기는 재미있구 유익한 구라니까요. 그런데 제가 구라를 치면, 그게 조금만 틀려도 저는 낙마하고 맙니다. <최재천>

- 본문 중에서


모든 것은 생명활동이므로 생물학 안에 있다.


이 책을 일독한 독자라면 읽는 내내 지속적인 긴장감과 빛나는 지성의 합연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읽고 나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서평을 쓰려 했는데, 당혹스럽기만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까닭은 내용을 도식화하지 않고 이야기의 실타래를 잡고 물처럼 흘러가기 때문에 머릿속에서는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한 부분을 읽거나 나중에 관련 분야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된다면 그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대화’라는 방식은 참으로 놀라운 표현 기법이다. 그 옛날 플라톤 할아버지도 그 효과에 반해 모든 저작을 이 방식으로 쓰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 옛날의 대화는 일방적 혹은 산파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대담을 ‘반전 대화’라고 명명하고 싶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분야에 천착해온 두 꾼이 생동감 있고 박력 있게 주고받는('치고 받는'이라고 해야 더 적절하리라) 이야기에는 불꽃 같이 강렬하게 뇌리를 자극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단어로 심오한 견해를 펼쳐내는 추임새는 감동 그 자체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최재천 선생을 칭찬하고 싶다.


섬들이 천천히 연결되어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부 하나의 대륙으로 뭉쳐져버린 느낌입니다.

- 본문 중에서


최재천 선생의 말투가 대개 위와 같은데, 위의 말은 거대 경제 권력이 세계의 다양성을 무참히 짓밟는 비생물학적 경제 현상을 빗댄 표현이다. 이보다 더 향 깊은 부분도 있다. 1990년대 초 미국에서 거의 1년 내내 저녁 뉴스 시간을 달군 ‘아버지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젊었을 때는 돈도 없고 장래도 불투명해 낳은 아이를 입양시켰으나 나중에 여유가 되어 아이를 다시 찾겠다고 법정까지 간 그 사건은 결국 ‘생물학적 아버지’인 ‘친부’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최재천 선생은 그 아버지에게 ‘생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기른 아버지도 충분히 ‘생물학적’이라는 것이다. 낳은 아버지는 ‘유전학적’이라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즉 ‘생물학’이라는 것은 ‘유전’ 못지 않게 ‘환경’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사회’나 ‘문화’가 될 수 있다. 만약 책의 내용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며, 너무 쉽게 다가가려는 사람(이런 사람은 없겠지만)이 있다면 쉬운 말 속에 함유하는 뜻 역시 쉬운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출판사인 ‘휴머니스트’의 교열부 직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적인 일이지만, 논술 강의를 위해서 ‘전문가들의 오탈자 사례’를 채집할 목적으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데, 공교롭게 ‘휴머니스트’ 출판사의 책들을 최근 자주 접하게 된다. 나의 눈은 ‘띄어쓰기, 오탈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대담’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오탈자라고는 단지 503쪽 최재천 선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운명(殞命)을 달리하다’(‘유명(幽冥)을 달리하다’라고 써야 함)가 전부이다. 지난 번 ‘세계사’에도 감탄했지만,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이 책은 ‘완결된 텍스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셍떽쥐베리의 말은 분명 옳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과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인문학과 생물학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학문은 여기저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유한 분야의 향기를 자꾸 퍼뜨리고 색깔을 자꾸 겹쳐야 천의 향기와 아름다운 그림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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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1-03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정리가 안되더라구요.. 너무나 풍성해서...
꼼꼼히 읽으셨네요..

승주나무 2006-01-04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개발한 독서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손'으로 읽는 거죠. 정확히 말하면 '눈'으로도 읽고 '손'으로도 읽습니다. 아마 그 점이 '꼼꼼하게' 보였던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

라주미힌 2006-01-0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으로 읽는다? 혹시 받아 적기? 어떻게 하시는데요?

승주나무 2006-01-04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워드가 거의 단거리 선수 수준이거든요. 맨 첨 형광펜으로 그은 부분을 워드로 다시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읽었던 부분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고 생각이 정리가 되는 거죠. 시간은 걸리지만, '책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압축독서'라는 콘텐츠도 만들었죠. 히히^^
http://blog.naver.com/dajak97
여기에 제가 만들어 놓은 파일(한글 파일)이 많아요^^

2006-01-07 0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6-01-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주의 리뷰 되셨네요... 역시!!!
축하합니당. ㅎㅎ

승주나무 2006-01-07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감사합니다. 요즘 사고 싶은 책에 비해 예산이 형편없이 부족했는데, 조금의 도움은 되겠네요. 이로서 2번째 선정입니다. 자꾸 동기가 되어서 계속 읽고 쓰게 돼요. 행복합니다.^^

승주나무 2006-01-1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65쪽의 두 번째 단락 "계몽철학자들이 생각한 '지식과 판단의 주인'로서의"<도정일>도 새롭게 발견된 오탈자네요. "'지식과 판단의 주인'으로서의"라고 해야겠죠?
 
인간 등정의 발자취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김은국. 김현숙 옮김, 송상용 감수 / 바다출판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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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 등정의 발자취          
- 현대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에 대한 겸손한 기억



전환



이 책의 나의 기억에 '인생을 바꾸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저자도 히로시마 원폭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케이스다. 개인적으로는 문학도인 선배에게 인생을 바꾼 책이라는 소개를 받고 신비감과 호기심이 강하게 자극되었으나, 벌써 5년 전의 이야기이다.
화려한 기술로 위장된 현대 위에, 이보다 더 놀라운 발전이 있을까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적당한 응용'에 불과하다. 여기서 다루는 이야기는 인간의 행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킨 '원천 기술'이다.




작고도 섬세한 온갖 세공품들은 핵 물리학의 어떤 장비 못지않은 발명의 재능이 필요하고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인간의 등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바늘, 송곳, 단지, 화로, 삽, 못과 나사, 풀무, 끈, 매듭, 베틀, 마구, 단추, 신발 등등 단숨에 그 실례를 백 가지라도 들 수 있다. 이 풍요로움은 발명의 상호 작용에서 온다. 문화는 아이디어를 번식시키며, 그 안에서 새로운 고안은 제각기 다른 고안의 효력을 가속화시키고 확대한다.
          본문, 62 ∼ 67



화려하고 거대 단위로 변천하는 역사가 아니라, 소박하고 조그만 순간에 결정적인 착상을 통해서 거대 세계를 연 계기들의 기념비를 아름다운 필체로 묘사하고 있는 저자를 따라 수백만년 지구라는 모태에서 현재까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 인간의 유연성에 대해서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탄생




인간이 중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손에 돌을 든 검고 작은 동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대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데 줄잡아 2백만 년이 걸렸다. 그것이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다. 그런데도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다른 어떤 동물의 그것보다 빨랐다. 그와는 달리, 호모 사피엔스가 여러분과 내가 열망해온 인간이 되기까지는 2만년보다는 훨씬 적게 걸렸다.
……
문화적 진화의 속도는 그와 같아서 일단 시작이 되면 앞서 지적한 두 숫자의 비율이 말해 주듯, 최소한 생물학적 진화보다는 일백 배나 빨리 진행된다.
'일단 시작이 되면'이라는 말이 중요한 구절이다.
         본문,  46



아기공룡 둘리를 보면 희동이와 똑같이 생긴 식인종 아기가 나온다. 형들이 희동이를 동생인 줄 알고 부모에게 데려갔을 때, '털도 없고 이렇게 비실한 애가 어떻게 동생이냐'며 형들을 꾸짖고 당장 찾아오라고 한다. 인간은 야생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약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 기본적인 조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환경은 적자(適者)들을 붙들어 놓는다. 적자들은 환경을 거부할 수 없다. 초원에 가장 멋지게 적응한 가젤(gazelle) 영양은 그 아름다운 뜀뛰기로도 영원히 초원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굴로 숨어들어가고, 맹수를 피해 다닐 때부터 생존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신체적 취약성 사이에서 두뇌를 끊임없이 고양시켜 왔을 것이다.



말[馬]의 저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 켄타우로스나 또 다른 반인 사티로스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그것은 스키타이족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공포심을 반영한 표현이다. 저자는 우리가 만든 힘이 우리의 의도 안에 한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서 용도를 왜곡할 만큼 균형을 상실했는가를 묻고 있다. 역사가 소박한 오솔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잉여가 우리를 여기까지 몰고 왔다.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면서부터 농업에는 활력이 붙고 생산량이 늘어나 항상 괴롭히던 식량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자급자족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 등장하면서부터 비교도 안 될 힘과 속도로 인해 농촌의 잉여에 위협을 주게 된다. 즉 전차와 승마법 등 전쟁과 약탈에 필요한 기술들이 말 위에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페르샤, 아프카니스탄, 몽고 등지를 아우른 스키타이족의 침략은 그리스인들에게 공포감과 동시에 호전적인 영혼을 선사했다. 전쟁은 끊이지 않고 군비 확장의 경쟁은 그때부터 달아올랐다.
말의 저주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멘델레예프가 꼼꼼히 정리하여 더 이상 탐구하지 않았던 주기율표를 넘어 저승의 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받게 된다. 그것이 플루토늄 폭탄이다. 핵 에너지의 위력을 잘 아는 과학자들 특히 지라드는 '계획'을 무마시키기 위해 '공개 시험'도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선물의 의미'를 너무나도 몰랐다. 물리학은 정열의 학문이었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나 이제는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위해 쓰여져야 함을 인식하게 된 뼈아픈 교훈이 되었다.



말이 남긴 저주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말의 속도감은 감각을 무디게 하였다. 그 놀라운 힘과 부산물은 우리의 힘을 놀라운 위치까지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플루톤의 말을 타고 만나는 두 가지 딜레마 중 하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인간의 고뇌를 외면하는 전쟁무기로 향하는 길이다. 그리고 하나는 말 위에 서 있는 지고한 존재라는 오만이다. 이들에게 말 위의 인간과 말 아래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말 아래의 인간은 그저 움직이는 노획물 혹은 전유물에 불과하다. 아우슈비츠는 말 아래 인간들을 4백만의 숫자로 본 인간의 오만함을 극렬히 보여준다. 인종과 인종의 차이는 말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신이 그어준 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발견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판단 없이 저승의 신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셈이다.



함정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것은 주어진 상황을 개척해가는 지속적인 유연성이다. 유연성이 죽은 사회는 역사 안에 묻혔으며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유연성을 살리는 방법은 유연성을 가두지 않고 숨쉬게 놔두는 것이다. 폐쇄된 사회 안에서 역사의 동력이 멎는 현상이 바로 그런 함정에 해당한다.




위대한 제국에 있는 도로, 교량과 통신은 예외없이 진보적 발명이다. 그것이 절단되면 권위가 고립되고 붕괴된다 현대에는 혁명의 제1차 목표의 전형이 바로 그 셋이다. 잉카는 대단한 정성을 들여 그것들을 보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에는 바퀴 달린 수레가 없었고, 다리 아래에는 아치(arch)가 없었으며, 통신은 문자로 씌어지지 않았다. 잉카 문명은 기원 1500년까지도 이러한 발명을 이룩하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몇천 년 늦게 출발한데다, 구세계의 온갖 발명들을 성취하기 이전에 정복당했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굴림대로 커다란 건축용 석재를 운반하여 건축을 하던 사회에서 바퀴를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몹시 기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바퀴의 기본적 요소는 고정된 굴대라는 점을 우리들은 잊고 있다. 현수교를 만들었으나 아치를 놓쳤다는 사실 역시 매우 이상하게 생각된다. 그런데 가장 기이한 사실은 수적 정보 기록을 세심하게 보전하던 문명이 그러한 것들을 문서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라 하겠다. 군주인 잉카는 제일 가난한 시민, 또는 그를 뒤엎은 스페인의 폭력배들이나 마찬가지로 문맹(文盲)이었다.
         본문,  86 ∼ 88



마추피추가 묻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폐쇄적인 사회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잉카 한 사람을 위해서 일했고, 잉카가 그들에게 신이 아닌 유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며 무너졌을 때,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단절되었다. 이런 집단적 배신감은 잉카를 폭삭 내려앉게 하기 충분하다. 그리스인들이  자랑하는 기하학과 조형술에서 아치가 발견되지 못한 이유는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민주적인 사람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인간이 축복받은 발견을 이룬다면 그것은 반드시 정신의 민주화 안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저자의 동료인 폰 노이만은 상당히 지적이고 위대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천재였다. 그는 발견의 일꾼의 자리에서 벗어나 정계의 험악한 중심가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로 이날까지도 정신과 수학에 관해 그가 다가가려고 했던 분야는 밝혀지지 않았고, 노이만은 그것을 했어야 했다. 저자는 그를 지성의 귀족주의와 사랑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성실성이 담보되지 않은 과학자가 쉽게 범하는 실수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의 깊이를 모른다. 그냥 냉장고에서 꺼내듯이 쉽게 써버린다. 신이 부여한 깊고 고요한 능력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으며 자기보다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기 일쑤이며, 늦잠꾸러기 근성처럼 천성이 성실하지 못하다. 성실성은 자신의 결여를 겸허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자라나는 인간의 고요한 능력이다. 노이만의 귀족주의는 우리들의 문명을 파괴시키는 교조주의를 너무 많이 닮았다. 우리의 지성이 제 값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성은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능성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할 임무를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 지성인의 길이다.
역사를 살다간 천재들이 얼마나 많은 함정에 빠졌는가를 생각하면, 천재적 지적 능력이라는 것은 부여받은 사람에게도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이적인 발견의 역사




모래알 하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하나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한 시간 속에 영원을 잡으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결의 조짐들(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본문, 295



발견이라는 것은 비범한 정신 외에도 확신에 가득 찬 인내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들의 눈은 편견에 지배되지 않고 사물 자체와 대화를 한다. 몸소 체득한 확신을 가지고 절대정적 안에서 발견의 정수를 걷어올릴 때의 모습은 하도 눈부셔서 워즈워드는 "프리즘을 든 고요한 얼굴의 뉴튼"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경이로운 발전의 순간에 이들의 표정은 마치 신의 손길을 느끼듯이 경건하였다.




이것이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중국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객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 고전적 실험이다. 그들은 수은의 황화물의 하나인 빨간 색소로서 진사를 골라 열을 가했다. 그 열은 유황을 몰아내고, 신비로운 은빛 액체 금속인 수은이라는 절묘한 진주를 남겨 그 실험의 후원자에게 경탄과 경외감을 불어넣는다. 수은을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산화하는데, 다시 진사가 되지 않고(처방을 작성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역시 빨간 색이기는 하되 일종의 수은 산화물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그 처방이 완전히 빗나가지는 않았다. 그 산화물은 다시 수은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빛깔은 은빛에서 빨강으로 바뀌게 된다. 그 수은은 다시 산화물로 은빛에서 빨강으로 되돌아가는데 이 모두가 열의 작용이다.
          본문, 107 ∼ 110



과학의 발전이란 우리들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전혀 관계 없을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서로의 발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성실한 탐구밖에 없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욕구가 행동이라는 연금술사를 만나 위대한 착각을 일으키면 그것을 해석하고 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과학은 성숙하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와 맹수들의 공격을 피해 동굴에 갇혀 있으면서도 벽면에 무수히 나 있는 손자국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치 "이것이 나의 자국이다. 이것이 인간이다."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스페인 산탄데르 엘 카스티요에 있는 손자국들)
모든 농업권에서 가장 강력한 발명은 쟁기이다. 쟁기로 인해서 대형 생산이 가능해졌으며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정착이라는 것은 항상 떠돌아다녀야 하는 유목에 비해 안정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발전의 필수 요소가 된다.
일찍부터 인류의 욕구는 왕성해서 인간들은 지구 전역을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근동으로, 근동에서 대륙으로 다녔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빙하가 녹으며 완전히 눌러앉게 되었다.
인간이 돌과 불을 발견하기까지는 200만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그 이후로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돌을 발견한 이후 인간은 돌의 성질에 대해 깊이 천착했다. 인간의 손은 눈에 보이는 용도를 초월하여, 안에 숨겨진 결의 법칙을 읽는다.
아치, 버팀벽, 돔은 돌의 결이 낼 수 있는 지고한 능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돌에게서 그것 이상을 읽어낸다. 즉 돌이 받쳐오던 하중을 더욱 강력히 지탱할 수 있는 재료에까지 손길이 뻗치는 것이다.
문명은 완성된 공예품들의 집합이 아니고, 공정(工程)의 정교화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의 가장 초기 단계는 '구리'의 단계이다. 정착농민들은 구리를 이용해 농구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리의 결점은 결정이 무르다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낸 사람들은 연금술사들이다. 이들은 구리에 모래 등의 불순물을 섞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었다. 주석의 발견은 놀라운 일이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은 가히 '성년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도가 단단하여(구리의 거의 3배) 시대의 플라스틱으로 손상이 없었다. 이때부터는 보다 정밀한 공정이 아니면 새로운 발견은 쉽지 않았다. 계기(計器)에 의해 작업을 하지 않던 문명에서 강철을 주조하기 위해서는 "그 칼이 아침해의 빛깔로 이글거릴 때까지 지켜보는 것을 관습"으로 한다.



대개 인간의 두뇌를 어느 수준에 올려놓는 발상은 단순하고도 근본적이다. 과학자군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인이 과학의 수준을 이끌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의 뇌리에 경종을 울리는 참신한 발상이 의식의 전환을 일으키고 답보상태인 문명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파라켈수스가 있기 전에 의사라고 하면 아주 오래된 책을 읽어주는 유식한 학자로 통하였고, 그의 조수는 하라는 대로 불쌍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파라켈수스는 '의사의 진단'을 의술의 결정적 방법으로 격상시킴으로써 환자를 오래된 책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다. 의사들의 판단 여하에 따라서 오래된 의술서에 반하게 되는 치료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자였다. '열소(熱素)'라고 하여 알려진 원자와 결합해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거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설이었는데, 마침내 새로운 원소인 산소를 발견한 후에야 불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원소들이었고, 그 미시적인 세계만 밝혀진다면 자로 잰 듯이 그 질서를 파악할 수도 있다. 서로 결합하는 상이한 원소들의 측정량은 일정하며, 그것은 원자결합의 기본 도식을 시사한다. 이것이 돌턴이 도달한 결론이다.




"나는 기초 입자들이라 정당하게 부를 수 있는 상당수의 입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입자들은 절대로 다른 입자로 변형시킬 수 없다."
          본문, 135



한때의 과학은 이들의 손에 의해 직접적으로 밝혀졌다. 멘델레예프, 그는 원자와의 고된 카드놀이를 통해서 일정한 무게와 성격을 지닌 주기율표를 완성했고, J.J.톰슨, 그는 원자는 분리될 수 없다는 그리스 시대의 믿음을 뒤엎어 놓았다. 러더포드, 그는 그 중성자로 핵을 열어서 변형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선두에는 그 새로운 개념들을 최초로 다져놓은 사람들, 구습 타파자들이 있으니 막스 플랑크, 그는 에너지에 물질과 같은 원자적 성격을 부여했다. 그리고 루드비히 볼쯔만, 원자―세계 속의 세계가 우리 자신의 세계만큼이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크게 빚을 지고 있다. 이것이 역사가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이 믿고 있는 사실이 현실화되었고, 그것들을 현실화하려는 의지가 승리를 거두는 아름답고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 그 견고한 그릇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과학이 불멸의 생명을 받는 마지막 시험이다. 천문학이 다른 과학보다 체계적 발전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수학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마저도 수학적 모형으로 그 법칙들을 형상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보를 거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수학에서는 반드시 포함해야 할 개념들이 있는데, 증명이라는 논리적 개념, 자연의 정확한 법칙을 표현한 수리적 방법,  자연의 다이나믹한 현상을 기술하고 예측마저 할 수 있는 동태적(動態的) 특성이다. 그것을 온몸으로 실현한 사람이 바로 피타고라스이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화음과 수학 간의 기본적 관계를 발견했다.
……
팽팽하게 쳐 놓은 하나의 현(絃) 전체가 진동할 때에 기음(基音)이 난다. 그 기음과 조화되는 음을 내려면 현을 등분(等分)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확히 2등분, 3등분, 4등분 등등으로 나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현의 정지점(靜止點) 즉, 마디가 등분점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으면 그 소리는 불협화음이 된다.
……
피타고라스는 귀―서양인들의 귀―에 즐거운 소리를 내는 화음은 정수(整數)로 현을 정확히 등분한 소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피타고라스는 기하학과 숫자를 연결지은 개척자였는데……
……
피타고라스는 음의 세계는 정확한 숫자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을 입증했다. 나아가서 그는 시각(視覺)의 세계에서도 그 논리는 참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것은 비범한 업적이다.
          138 ∼ 140



그는 숫자를 자연의 언어라고 불렀다. 그에게 자연의 법칙들은 예외 없이 숫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사유를 물려받은 사람은 뉴튼이었다. 뉴튼은 기존에 수학이 수학으로 머물던 유클리드의 정태적 기술 방식에서 동태적 접근 방법으로 바꾸어 눈앞에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과학은 진정으로 엄밀해졌다고 할 수 있다.
원소도 질량이라는 수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대한 세계가 드러났다. 지금은 원자의 기본 형태가 숫자적이라는 사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수는 표현 가능한 것에서 불확실한 것에 대한 표현까지 범위를 넓혀오고 있다. 어느 대상이든 정확한 관찰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 이론가들의 주장이다. 모든 정보는 불완전하며 우리는 그 오차까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가우스는 오차의 산포를 곡선의 편차나 폭으로 요약시키는 '가우스 곡선'을 만들었다. 관찰 대상이 불확실의 영역 내에 있다면, 그 영역은 관찰자의 산포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수학은 문제를 명확하게 만들고 표현방법 또한 단순하다. 숫자에는 우주를 묶고 있는 정확한 법칙들이 담겨 있다는 피타고라스의 예언을 받아들여 직각삼각형을 이루는 숫자들을 다른 항성계(恒星系)의 행성들에 보내어 그쪽에 이성적(理性的)인 생명체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메시지로 삼자는 제의가 실제로 나왔었다. 숫자는 우주의 언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슬픈 역사, 의미 있는 기억




고인이 된 피렌체인 빈첸쪼 갈릴레이의 아들이며, 당년 70세인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 법정에 직접 소환되어 기독교 공화국 전역의 이단적인 타락 행위를 제소하는 이단 심문관이신 존경하는 추기경 예하(猊下) 앞에 무릎을 꿇고, 거룩한 복음서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성가톨릭 사도 로마 교회가 지지하고 전도하며, 가르치는 모든 것을 항상 믿어 왔으며, 지금도 믿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후에도 믿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한편―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거짓 의견을 완전히 버릴 것이며, 전술한 이론을 구두나 서면 등 어떤 형식으로든 지지, 옹호 또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명령을 이 성청(聖聽)이 저에게 사려, 분별 있게 암시한 뒤, 그리고 전술한 교리가 성서에 배치된다고 저에게 통보한 뒤에도―저는 이미 단죄된 이 교리를 논의하고, 이들에 관한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교리를 지지하는 매우 강력한 주장을 도출하는 한권의 책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원인이 되어 저는 이단, 다시 말하면,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하고 믿었다는 강력한 의심을 성청으로부터 받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저에 대해서 정당하게 제기된 이 강력한 의미를 추기경 예하와 믿음 있는 모든 기독교도들의 마음에서 제거하고자, 성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저는 앞서 말한 과오와 이단, 그리고 전술한 교회에 배치되는 다른 모든 과오와 교파 전반을 포기, 저주하고 혐오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와 비슷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어떤 것도 이후에는 절대로 구두나 서면으로 말하거나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또한 어떠한 이단자, 혹은 이단의 혐의가 있는 사람을 안다면, 저는 그를 이 성청 또는 제가 있는 지방의 이단 심문관과 종무(宗務) 판사에게 고발할 것을 서약합니다. 나아가서 이 성청이 저에게 부과했고, 부과하게 된 모든 고행을 충실히 이해하고 준수할 것을 맹세하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약속, 확언과 서약의 어느 하나라도 위배할 경우(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저는 그러한 일탈 행위에 대해서 일반적이든 특수한 것이든, 성경과 다른 전범(典範)들에 규정 공포된 모든 고통과 형벌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그리고 제 손을 얹고 있는 이 거룩한 복음서여, 저를 도와 주소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위와 같이 내 주의를 버릴 것을 선서하고, 맹세하고, 약속했으며, 자신을 거기에다 묶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증인 삼아 저는 제 손으로 위에서 지적된 신념을 포기하겠다는 이 문서를 작성하여 1633년 6월 22일 로마의 미네르바 회의에서 한마디 빠짐없이 낭독하였습니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위와 같이 자필로 선서했습니다.
          본문, 188 ∼ 190



이것은 진리가 자연에 있지 않고 진리의 담당자로 여겨졌던 사람들의 손에 있을 때 나타나는 불행한 사건이다. 갈릴레오 자체도 현실감과 처세술에 대한 조금의 사려도 없이 진리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순진함을 드러냈다.
과학의 시련은 억압된 사회 분위기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과학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수성에도 적지 않게 의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 발견되는 새로운 학설은 확정된 패러다임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새로운 사실들이다. 다윈의 경우가 그러하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했을 당시는 스스로도 깊은 충격을 받아서 정체성의 혼란 속에 있었다. 만약 전혀 다른 곳에서 다윈의 논문과 자매를 이루는 왈라스의 논문이 그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다윈을 모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치가 또 있을까. 왈라스가 내가 1842년에 써 놓은 원고를 갖고 있다 해도 이보다 더 훌륭하고 간결하게 간추려 놓을 수는 없었으리라!
          본문, 259



다위의 이론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가라앉았을 때, 우리들은 차분히 우리의 기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대개의 과학의 발견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우리들에게 당연한 지식이 된다.



1900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원자의 실재(實在) 여부에 대해, 생명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위대한 철학자인 비인의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는 원자는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 했고, 위대한 호학자 빌헬름 오츠왈드(Wilhelm Ostwald)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기의 그 중요한 전환점에서, 한 사람이 근본적인 이론에 입각해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완강해 주장했다. 저자는  강력하고 저명한 적수들에 맞서서 원자론을 옹호했으며 원자론이 승리할 즈음 모든 것을 잃은 패배감에 자살하고 만다. 만약 그때, 반원자론이 실제로 득세했더라면, 우리의 진보는 확실히 수십년, 아마 일변 년쯤은 퇴보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생물학에 있어서도 진보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럽 전체에 암울한 구름이 덮치고 있었다. 그 중 특히 1백 년 동안 괴팅겐을 덮고 있던 특별한 구름이 있었다. 1800년대 초에 요한 프리드리히 부루멘바하(Johann Friedrich Blumenbach)는 전 유럽의 뛰어난 인물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해골을 수집해 놓았다. 그가 인간의 가계를 분류하기 위해 해부학상의 척도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의 작업에서 그 해골들로 인류의 인종적 차별을 지지한다는 조짐은 없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0년에 부루멘바하가 죽은 이후부터 그 수집물은 점점 더 보태어져서 마침내는 인종주의(人種主義), 즉 범게르만 이론의 핵심이 되었는데 그 이론은 나치스들의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본문, 308



상대방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극구 부인한다. 자신은 항상 모자란 사람이며 도의 가르침을 매번 어겨서 후회하곤 한다고 술회한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숨질 때 마침내 긴장을 풀고 편안히 저세상으로 간다. 이들을 우리는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인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인간 이하로 취급함으로써 거기서 얻어지는 상대적 지휘를 차지한다. 신 아래 인간에는 여러 구분이 있으며, 다른 종과는 근본적으로 차별되었다고 판단하면서도 공식적으로 표명하려는 것이 인종주의자들의 특성이다. 이들에게 권력과 지식이 침투했을 때, 인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파생시키게 된다. 도그마는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 신에 도달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인간이 또 있을까? 마찬가지로 신을 독점하려는 인간처럼 무지하게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이 상상치도 못할 광란의 희생자 중 과학자도 적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이로 인해 세계관의 일대 전환을 겪게 된다. 저자가 인간이라는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에세이를 쓰려는 의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물리학자에서 생명과학자로 전향한 지라드의 선택은 현명했다.
과학자뿐만 아니라 신 바로 아래 있다고 자처하는 인간의 한 족속들도 거대한 세계를 보고 있는 뉴튼의 마음과 같다면 인간의 등정은 순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고, 이따금 보통 것보다 한결 매끈한 돌멩이나 예쁜 조개껍질을 찾으며 놀고 있지만, 진리의 대양(大洋)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본문, 204 ∼ 205



망망대해 앞에 서 있는 어린이의 이미지는 과학의 세계에 천착하는 사람도, 인간이나 예술, 철학에 관여하는 사람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그림이다. 저자가 인간 발견의 장면을 그리는 필체는 하나같이 경건한 무엇이었다. 인간의 의지는 욕심에 물들지 않았고, 그의 엄밀성은 인간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사고의 혁명적 전환을 불러올 학설을 쥔 학자는 불안하고 망설이는 모습으로 서 있으며, 우리들의 무지에 관해서는 언제나 겸허하다. 이들이 이룩한 과학의 발전이 대중에게 얼마나 희망이 되고 생활의 활력이 되었는지는 「광학」을 저술했을 당시 젊은 시인이었던 포프의 시에서 강력하게 천명돼 있다.




영롱한 눈의 농어는 티로스의 물감들인 지느러미를 달고,
은빛 장어는 반짝이는 몸뚱어리를 굼틀거리며,
노란 잉어는 황금빛으로 물든 비늘에 싸여 있고,
날쌘 송어들은 진홍색 반점으로 치장했노라.
          본문, 199∼ 200



어떤 때는 순수한 과학자보다 기술자나 일반 서민들에 의해서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바늘, 송곳, 단지, 화로, 삽, 못과 나사, 풀무, 끈, 매듭, 베틀, 마구, 단추, 신발 등등의 발견은 인류의 지적인 여행 중 반드시 밟아야 할 첫 단계였으며, 아치의 힘을 더욱 강력하고 세밀하게 만든 것은 과학자들이 아니라 기술자들이었다. 때문에 기하학을 사랑하는 그리스인이나 문명의 중요한 요소를 안고 있던 페루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평민적인 문화에 의해서 발전의 결정적 단서가 발견되었다. 때문에 인간 발견의 역사는 유연성의 역사이다. 중국의 청동 공예술은 과학의 발견 이상의 유연성을 자랑하는데 청동 작품들의 주기(酒器)와 식기들―놀이의 의미가 담겨 있으면서 동시에 거룩한―은 그 자체의 기술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하나의 예술을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기쁨을 준다. 우리들의 손은 이것을 과학으로, 과학에서 예술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 등정에서 발견한 저자의 놀라운 성과이다. 우리들은 자연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하며, 서로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저자는 매 여행지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브로노프스키에의 이 저서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점은 서술 방식이다. 물질적이고 유물론적 유추에 의해서 논의를 진행시키는 과학정신의 글 속에서 사적이고 인간적인 감흥이 묻어난다.
과학자는 사실과 사실의 조합을 통해 거대한 비유와 은유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상상력의 극치이다.
저자의 '낯설은 글쓰기'를 보며 나는 얼마나 과학적·유물론적 사고에 우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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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기적 유전자
- 생존을 위한 혈투


전체와 개체


인간의 의식이란 게 생겨났을 때부터 그것을 지배한 것은 무엇일까? 그 물음은 신비롭고 재미있는 세계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풍화작용인지 권력의 생리작용인지 사람들의 관심사는 변천과 반복을 거듭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과학과 철학, 문화와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사조는 대개 '전체를 포함하려는 야심'을 갖는 특성이 있다. 철학사나 문학사 한 분야가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전 분야가 대표정신의 한 분야를 담당하고 있으며 적어도 두어 가지 분야의 연계를 통해 자신들의 운동을 역사에 알렸다.
고대에는 우주의 기원과 최초라는 것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시대를 지배했다. 그리고 어떤 반발을 통해서 좀더 솔직히 인간이나 무지의 자각이 대세를 이끌었던 적도 있다. 이에 대한 제안으로 '척도'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논리나 과학이 그에 해당한다.
'이기적 유전자'를 보면 현재 우리들의 '척도'가 생명과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명과학이라 함은 보다 인간에게 실질적이고 미시적인 세계이다. 전체에 대한 고찰은 어느 정도 우리들에게 위험과 모험(어쩌면 억측까지도)을 요구한다. J.브로노프스키는 그의 저서에서 점차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은 생명과학이 될 것이며, 수학자로 출발한 자신의 일생에서 생명과학의 작업에 참여했던 경력을 '축복 받은 기회'라고 술회하였다. 인간이 과학에 의해서든 철학에 의해서든 좀더 내부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살되 전체에 의해 희생되는 일은 만나지 않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혹시 내가 이야기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개인의 도전'이라는 주제로 쓰고 싶다. 지적으로 지극히 성숙한 한 인간은 인류를 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야기의 골자인데, 우리들이 내부의 눈을 통해 좀더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타인과 나에게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


불가피한 이기성과 투쟁

서로 돕고 살며, 이웃을 사랑하라

위의 명제를 평생동안 새기며 이왕이면 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나에게 '이기성'이란 말에는 우선 거부감부터 생긴다.
저자는 초입부터 아예 이 책에서 도덕이란 말은 기대도 하지 말라고 잘라 말한다. 특히 생물학적인 세계에서 '자비'란 곧 퇴화를 의미하며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생명체에게는 독약과도 같다. 우리들은 탄생에서부터 수백억의 정자군을 물리치고 태어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이기성은 생물학적 시원(始原)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타(利他)라 함은 양보를 뜻하는데, 그 안에 이기적 개체가 끼여들어 이익을 독식한다면 집단 내의 이타적 계보를 보존할 수 있을까 하고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실제 우리가 이타적이라 하는 집단은 '이기성'을 전제로 생성된 것들이 많으며, 누군가는 그 지고한 뜻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민족'이나 '국가'이다. 인간의 존엄성도 만물의 영장도 인간을 제외한 만물의 희생이 아니고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서두에서 저자의 요지는 이것이다. '이기성'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걷고 생활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담겨 있는 이기성을 솔직히 인정하라고 저자는 요구한다.

자기 복제자와 생존


생존이란 가장 원초적인 활동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생존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사명이며 생명보존에 필요하다면 적당한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 저자의 이론이 논리를 얻는 지점은 원초적 활동인 생존을 이론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생존의 명수이다.
생명의 유지라는 것은 거친 바다를 횡단하는 것과 같다. 시간의 풍화도 만만치 않으며 다른 종족간의 대결도 커다란 장애이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야 하며 최고의 효율성과 역량을 보유해야 한다.
이러한 생존의 대안은 '결정(結晶)'이 있다. 결정이란 안정된 상태를 의미한다. 소금의 결정이 입방체인 이유는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결합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현실에 맞는 결정을 찾아서 생존하고 있다. 과일을 예로 든다면, 여기 사과가 있다. 누군가 칼자국을 내지 않는다면 나름대로의 결정을 유지하며 오랜 시간 그 모양을 유지할 것이다. 오랜 경험과 자기 생존을 통해 유전자는 나름대로의 모델을 만들었는데, 결국 그 모양은 인체라는 기계를 조종하기는 하되 간접적으로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얻어도 자식에게 전수되지 않는 까닭도 유전자의 '간접 제어' 때문이다.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서, 유전자는 두뇌나 문화 같은 요인에 의해 통제되기도 한다.
유전자가 오랜 시간을 기울여 만든 질서를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전자에게 말을 걸 수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유전자가 100만년 후의 이야기를 쌩뚱같이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기 복제자와 진화
 
자연선택은 무엇이고 어떻게 선택하는 것일까?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저자는 자연에는 '건축물은 있되 건축가는 없다'고 못박았다. 한 개체의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처절한 대결을 통해 상대방을 몰아내고 판의 승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청동무기로 무장한 적들이 영토를 차지하고 판을 장악하고 있을 때 철을 개발한 자들이 나타나 그들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한 것을 '자연선택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생명활동이란 엄청난 의지력의 총화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렬히 욕구한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명제는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모든 신경과 욕구가 거기에 쏠려 있다면 점점 거기에 가까이 가려는 의지가 판을 지배하게 된다. 최초에 유전자에게 부여된 지령은 '살아남아라'였지만, 여기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녀석을 제압하고 네가 살아남아라'

여기에 적합한 사례가 바로 '의태'라는 현상이다.

어떤 종류의 나비는 구역질나는 맛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선명하고 눈에 띄는 색깔을 하고 있어서 새들은 그 '경고' 표지를 기억하여 그런 종류의 나비를 피한다. 반면에 맛이 나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나비는 잡혀 먹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나비들은 나쁜 맛의 나비를 흉내낸다. 즉 나쁜 맛의 나비를 닮은 색깔과 형태(맛은 닮지 않은)를 가지고 태어난다. 박물학자들도 종종 그것들에게 감쪽같이 속는 경우가 있으며 새들도 속는다. 정말 나쁜 맛의 나비를 한 번 맛본 새는 비슷하게 보이는 나비를 모두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는 의태종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의태의 유전자는 자연 선택상 유리하게 된다. 이것이 의태가 진화하는 이유이다.          

본문. 69p

유전자의 팀플레이


진화를 자연선택이 유능한 돌연변이에게 부여하는 생존 자격이라고 한다면, 그 영예의 수상자는 군체(群體, colony : 집단)이다. 사실 돌연변이란 용어도 군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쓸 수 없다. 즉, 하나의 군체에서 돌연변이가 강력하게 자신의 위세를 뽐낸다. 유전자 군체는 자기복제를 잠시 멈추고 돌연변이를 받아들이는 작업을 하고 결국 돌연변이가 반영된 군체로 복제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돌연변이의 조건인데, 군체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 육식의 이빨이 초식동물의 세계에서 열등한 유전자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능한 육식동물의 몸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필요하다. 그 중에는 고기를 자르는 이빨, 고기를 소화하기에 적합한 소화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한편 유능한 초식동물은 풀을 씹기 위한 평평한 어금니와 특별한 소화 기구를 가진 매우 긴 창자를 필요로 한다. 초식동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육식용의 날카로운 이빨을 그 소유자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유전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육식이라는 착상이 나빠서가 아니다. 적합한 소화관과 기타 육식 생활에 필요한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고기를 효율적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식용의 예리한 이빨에 관한 유전자가 본래 열등한 유전자는 아니다. 그것은 초식성을 위한 유전자가 우세한 유전자 풀 속에 있을 때에만 열등한 유전자이다.
본문, 76p

선택은 현실에 적합한 유전자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개개의 생존기계는 공동체적 진화에 익숙하다. 하나의 예로 세포 클럽은 특수한 형태로 분화하여 하나의 목적을 향해 협력한다. 어떤 세포는 먹이를 발견하는 감지기로서 공헌하고, 다른 세포는 메시지를 전하는 신경으로서, 다른 세포는 근육과 촉수를 이용해 먹이를 낚아채고, 어떤 세포는 체내에서 요구한 양대로 잘게 자르거나 분비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들의 조합이 긴밀하고 견고할 때에만 모두의 생명이 보장된다.

프로그래머


우리들은 유전자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된 생존 기계이지만, 막상 태어난 후에는 유전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오퍼튜너티(opportunity)호를 발사할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우주선이 만나게 될 역경을 최대한 예측하여 그에 대응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것뿐이다. 우주선이 바위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바위를 치워줄 수 없다. 그것을 저자는 '시간 지연'이라고 말한다.
시간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프로그래머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학습능력'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것과 접촉할 경우 조건 값을 넣어서 조건에 합당하면 좋은 것이고, 합당하지 않는다면 피해야 한다는 명령어를 입력한다.

"여기에 달콤한 것, 오르가슴, 따스한 기후, 방실거리는 아이 등과 같은 보상이라고 정의되는 사물의 목록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고통, 구역질, 공복, 울고 있는 아이 등에 해당되는 싫은 사물의 목록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그 후에 싫은 사물 중의 하나가 생기면 다시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좋은 사물 중의 하나가 생기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위의 지령이 수많은 성인병 어린이나 마약 중독자들을 양산할지도 모르며, 이 지령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죽일 놈이 되겠지만, '학습능력' 역시 진화한다는 것을 염두해 둘 때 적절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점장인 유전자는 뇌를 지점장으로 임명해 매일같이 일변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일정의 권한을 부여하고 심혈을 기울여 투자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본점장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뇌는 고도로 발달하여 지점장 겸 전결권자(專決權者)가 되었다. 즉, 방침을 결정하던 유전자 고유의 업무를 대부분 인수하였고, 유전자의 방침이 부당하다면 수정할 수도 있었다. 특히 인간 세계에서 뇌는 유전자보다 더욱 강력한 지도자로 정평이 나 있다. 만약 뇌가 유전자의 암호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유전자를 지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고

이 책에서 도덕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하나의 경고로 읽어주기 바란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개개인이 공통의 이익을 향하여 관대하게 비이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거의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경고한다.

이 책의 곳곳에 '격전지'로 부를 만한 지면이 있는데, 그 장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자가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목적론이나 호혜적 이타성, 초월자의 존재가 등장하는 부분을 '이기성' 이론으로 채우는 것이 저자의 목표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강렬한 욕구로 인한 '이기성'은 현상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이타성이나 초월자 등의 대입은 논리적 맹점을 애써 작위적으로 처리한 흔적을 숨길 수 없다. 그것은 과학적 사고가 될 수 없고, 어떤 현상에 대한 정당한 설명이라 볼 수도 없다.
생물체에게서 유난히 강하게 나타나는 모성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형 배우자가 융합할 경우, 새로운 개체에 기여하는 두 배우자의 유전자가 동수인 것은 물론 두 배우자가 기여하는 음식물의 비축량도 같다. 정자와 난자의 경우도 유전자의 기여수는 같다. 그러나 음식물 비축에 대해서는 난자의 기여도가 정자를 훨씬 능가한다. 실제로 정자의 기여는 전혀 없고 다만 정자는 유전자를 가급적 빨리 난자로 운반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임신 시점에서 수컷이 자식에 대해 투자한 자원량은 공평한 분담량, 즉 50%보다 훨씬 적다. 개개의 정자는 아주 작아서 수컷은 매일 수백만 개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수컷이 서로 다른 암컷들을 이용하여 단시간 내에 많은 수의 2세를 만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개의 배가 수정할 때 어미로부터 충분한 먹이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는 일정한 한도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수컷이 암컷을 상대로 한 착취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본문, 231 ∼ 232p

인위적으로 해석된 생물계의 특성에 대해, 도의적인 어법을 쓰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저자의 고심이 저서 곳곳에 배어 있다.
생명체가 자식의 보존에 적극적인 이유는 '복제하도록' 프로그램된 것에 다름아니다. 자기복제를 통해서 개체를 번식시켜야 하는데, 그 막대한 부담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혈투가 암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개체는 부성애가 더욱 강조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생명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이기성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새,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 같은 육상동물은 체외 수정을 할 수 없다. 그들의 생식 세포는 매우 건조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컷의 운동 능력을 가진 정자가 암컷의 젖에 있는 체내로 주입된다. 교미 후 육상 동물의 암컷은 얼마 동안 체내에 배를 가지고 있게 된다. 만일 암컷이 교미 직후에 수정란을 낳는다고 해도 수컷에게는 여전히 도망쳐서 암컷을 트라이버스의 '가혹한 속박'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 수컷에게는 암컷의 선택을 봉쇄하고 먼저 도망칠 결단을 내릴 기회가 필연적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아이를 내버려 확실히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머물러서 양육을 할 것인가의 결단을 모두 암컷에게 떠밀어 버린다. 그러므로 육상 동물의 자식 보호에는 아비보다 어미에게 기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를 비롯한 다른 수생동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수컷이 암컷의 체내에 정자를 주입하지 않는다면 암컷이 '자식을 품고' 혼자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수정이 막 끝난 알을 상대에게 맡기고 급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암수 모두에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때에 종종 수컷이 버림받는 이유는 어느 쪽이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하는가를 가지고 진화적인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한 개체는 수정된 배를 상대에게 떠맡길 수 있는 점에서 유리하지만 동시에 배우자가 자칫하면 뒤따라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 점에서는 정자가 난자보다 가벼워서 확산이 쉽다는 것만을 고려해 봐도 수컷 쪽의 위험이 크다. 암컷은 수컷이 아직 준비가 되자 않은 상태에서 알을 빨리 방출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알은 비교적 크고 무거워서 잠시 동안은 한 덩어리가 되어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암컷은 먼저 산란하는 '위험'을 무릅쓸 가능성이 있다. 물고기의 수컷은 이런 위험을 무릅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컷이 서둘러 정자를 방출해 버리면 암컷이 방출하기 전에 정자가 흩어져 버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암컷은 산란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을 낳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확산 문제 때문에 수컷은 우선 암컷이 산란하기를 기다려 그 후 알에 정자를 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암컷은 실로 귀중한 몇 초간을 얻을 수 있다. 그 사이에 몸을 감추고 난자를 수컷에게 떠맡겨서 수컷을 트라이버스의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수컷에 의한 자식의 보호가 왜 물 속에서는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고 건조한 육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지를 솜씨 좋게 설명하고 있다.
본문, 252 ∼ 254p

그것은 자살적 행동으로 포식자에게서 집단을 지키려는 톰슨가젤의 희생적 뜀뛰기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톰슨가젤의 높이뛰기 위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아드리는 그 행위가 명백히 자살적인 이타적 행위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룹 선택에 의해서만 설명된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이 예는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보다 더 어려운 문제이다.
……
자하비 이론은 다음과 같다. 그의 수평 사고의 결정적 생각은 높이뛰기 위장이 다른 영양에 대한 신호와는 전혀 관계없이 실제로 포식자를 향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것을 본 다른 영양이 행동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있어도 그것은 부수적일 뿐, 어쨌든 그것은 무엇보다도 포식자에 대한 신호로서 선택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자! 나는 이처럼 높이 뛴다. 이렇게 활기차고 건강한 나를 잡는다는 것은 네게는 무리다. 나만큼 높이 뛸 수 없는 것들을 쫓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인간의 형태와는 다르게 포식자는 쉽게 잡힐 만한 먹이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높게 허세 부리는 뛰기를 가능케 하는 유전자는 포식자에게 쉽게 먹히지 않는다. 특히 많은 포식성 포유류는 늙은 개체와 건강치 못한 개체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뛰는 개체는 그리 늙지도 않고, 또 건강하다는 사실을 과장된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 과시는 이타주의와는 관계가 멀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이기적 행위이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에 포식자에게 다른 개체를 쫓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누가 제일 높이 뛰는가를 확인하는 경쟁이다. 이 경쟁의 패자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전자가 가지는 이기성은 '자기 복제에 미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체간의 생존경쟁을 통해 더욱 격정적인 장이 되는데, 포식자의 위협과 개체의 증산이라는 조건이 상충되어 있다면 유전자는 안전을 택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성적 매력을 갖춘 개체가 암컷 세계에서 강자로 생존할 수 있다면, 당연히 유전자는 거추장스러운 뿔과 포식자의 눈에 잘 띄는 선명하고 화려한 색상의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라


유전자가 우리에게 주는 극적 긴장은 바로 '생존'에 걸려 있다. 상식적으로 진보된 역량을 갖췄으나 환경이 그에 반한다면 유전자는 당연히 한 단계 퇴보를 반복하더라도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강자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정적이 나타난다. 유전자의 풀은 고요하지만, 그곳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자기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유전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통일된 하나의 비유이다. 기존의 생물학적 의식이 나타났을 때 대부분의 관심은 운반자, 즉 생물 개체에 한정돼 있었다. 뒤늦게 알려진 이유로 유전자는 생물 개체가 쓰는 장치의 부속품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중요성에서도 자기 복제자가 운반자에 앞선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운반자는 모든 생명체의 현상을 민족, 국가, 인간의 시선 안에 국한해서 설명하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유전자는 점점 확장하여 세계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며 연계와 인과의 과정이 교차하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군체로 표현되었고, 그것이 이른바 개체가 되지만, 개체와 개체는 '유전자의 긴 팔' 안에서 숨쉬고 살아간다. 그것이 생물체가 수십 수백만 년 동안 살아가는 과정이며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생기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될수록 우리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에게 말을 걸어야 하며 우리들의 기원과 추후의 향방에 대한 단서를 알아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수십억 년의 지구 안에서 불과 수십만 년 전에 갑자기 태어난 나이 어린 존재가 아니라 지구가 수십억 년 동안 정성껏 품어서 탄생한 결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처절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갖은 시도는 비단 유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도 지키고 살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죽음의 위기를 항상 목전에 둔 유전자의 용감한 행보를 살펴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가 생겨나지 않는가 하는 비감이 눈을 뜬다.


다시, 밈(meme)의 격전지로


유전자와 뇌 간의 불화를 조화시키고, 돌변하는 현실에 유연히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차세대 주자가 바로 밈(meme)이다. 그 안에는 문화와 강렬한 욕구가 담겨 있으며, 유전자처럼 복제기능도 보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강력한 기억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 견고한 결정만 갖춘다면 유전자에 버금가는 영속성도 가질 수 있다. 밈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르게 개체를 증식시킬 수도 있으며 독자적 유형의 진화도 이끌 수가 있다.
저자는 우리를 낳아준 이기적 유전자에게 반항할 수 있는 것처럼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뿐만 아니라 좀더 안정되고 이성적인 밈을 생산해 퍼뜨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밈은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다. 찢어진 청바지, 펑키 머리 등의 유행이 가장 낮은 수준의 밈이며 그것은 곧 경쟁적인 밈에 의해 대체된다. 그것은 첨단 IT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비해 좀더 유통기한이 긴 밈으로는 사회이론과 철학, 과학, 패러다임이 그에 해당한다. 이 밈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를수록 견고해진다. 그리고 학설을 둘러싼 광범위한 격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견고한 밈이 탄생한다.
다산은 학설 중에서도 10년 가는 학설이 있고 100년 가는 학설도 있다고 하였다. 어쩌면 밈 자체가 '진리'를 넘어서는 결과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엄격히 알 수 없는 이유도 밈의 견고함을 더해주는 이유가 된다. 역사라는 것도 강한 밈들의 경연장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자가 우리의 머릿속에 뿌리내리려는 밈(meme)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목적론적 세계관이라는 맹신적 밈(meme)을 정당하고 과학적인 유추과정의 세계관으로 수정하려는 밈(meme)의 건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자신의 저술에서 도덕적 결론은 기대하지도 말라고 못박은 데는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종교의 유혹이 너무 강하여 모든 결과를 그와 같이 이해하려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곤이불학(困而不學)의 밈 바이러스


밈이 진리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밈이 가질 수 있는 단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와 곤이불학(困而不學)을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니체의 말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겸손, 이해, 금욕, 헌신'등의 덕목들을 놓지 않지만 결코 그러한 덕목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롭다. 반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위와 같은 덕목들에 지배당하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사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는 진정한 행동가들은 그것을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 대신 그들은 치밀한 관찰자이다. 인정세태를 관찰했을 때 겸손 등의 덕목이 가장 최고의 수(數)라는 것은 학이지지(學而知之)의 경지이다. 좀더 나아가면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듯이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빛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신비스런 최고의 원인이며, 천(天)과 도(道)의 자연스런 흐름이다. 이런 흐름을 생(生)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이지지(生而知之)의 경지이다.
그러나 축복받은 선지자가 아니라면 그런 궁극의 경지는 힘들다. 우리같은 범인(凡人)들은 겸손이나 이타 등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존에 유리하므로 취하는 일종의 '이기적 유전자론'의 착상에 가깝다.
국가의 구성원들은 자기의 자유중 아주 조그만 부분을 희생하면서 그보다 큰 이익과 자유를 얻는다고 한다. 그것이 국가가 성립하는 근본 원인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가장 최하의 수는 '설익은 도덕률'을 그 근본으로 삼는 경우이다. 미국의 대다수의 중고교생들은 어떤 행위에 대해서 묻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것은 옳지 않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이 왜 옳지 않은지 반문했을 때 그들은 당황하거나, 질문자를 불경한 사람보듯 쳐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독재국가가 누군가를 찬양하는 현상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리가 도덕률이라는 설익은 밈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저자가 자신의 밈을 결론적으로 진술한 이유는 "밈은 조종할 수 있으며 조종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정 우리에게 도덕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시점이 되었고, 우리들은 그 물음에 너무 오랫동안 묵묵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전쟁과 독재, 원폭 투하 같은 장면은 "설익은 정의"라는 밈의 작품이 아닐까? 그런 밈들은 당연히 "정당한 밈"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무지의 밈에서 자각의 밈으로 바뀐다면 우리들의 행위는 좀더 현명해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근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유익한 기회가 되었다.
 만약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서 핵탄두가 발사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권력의 깃발을 밈 바이러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밈 원정대"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어릴 적 즐겨 보던 '퀴즈탐험 동물의 세계'를 보면 물고기나 물방개가 자식들을 업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고 제목에는 '동물들의 부성애'라고 나와 있었다. 나는 당연히 동물들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까마귀를 효의 상징으로 보고, 올빼미를 불효의 상징으로 보던 우리 옛 조상들의 사고방식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 인정을 부여한 결과는 어쩌면 인간적인 냄새가 날 수도 있겠지만, 사실적 접근은 아니다. 이 책에서 격전지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집단 진화론'과의 격론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자식을 수컷이 키우는 것이 그 종에 유리하기 때문에 종은 수컷에게 양육권을 부양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집단 진화론의 결과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이기성 이론은 그보다 근본적인 단위에서 판단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실적 접근이자 엄밀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우리들이 흔히 범하는 사고방식의 오류를 이 책은 잘 꼬집어내고 있는데,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넘겨버리는 한 사물과 사고에 대해서 판단유예를 주장하는 시인의 눈이나, 철학자의 사유와 마찬가지로 과학자의 엄밀성 또한 잊지 말아야 할 방법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1)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 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 중용(中庸) 20장
즉 혹 나면서부터 깨닫는 사람이 있고, 배워서 깨닫는 사람, 애써 노력하여 겨우 깨닫는 사람이 있는데, 그 깨닫는 한에서는 한결같다. 혹 별 마음씀 없이 실천하는 사람과, 행위의 이로움을 간파하여 실천하는 사람과, 애써 자신의 나태함과 맹점을 극복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천하는 한에서는 한결같다는 뜻이다.
위의 세 가지는 깨닫고 실천한다는 한에서 같다고 판단하지만,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지적인 역량을 품부받지도 않았고 머리도 좋지 않은데다가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사람이 바로 곤이불학(困而不學)이다. 위의 세 가지 단계는 공통점이 있고 호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록 "전장이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유연함을 유지할 수 있지만 밈 바이러스는 "아군 사이에서도 백이면 백 모두 다르고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이것이 이기성과 결합한다면 무서운 재앙이 도래할 것이다. 우리들은 주적 이외에 무서운 사방의 적과 싸워야 한다. 그것은 건강한 경쟁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전투구이다. 반거충이의 학문이 세상의 독이 되듯이, 열악하나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득세했을 때 세상은 절망적이 된다는 경고를 옛부터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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