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등정의 발자취
- 현대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에 대한 겸손한 기억
전환
이 책의 나의 기억에 '인생을 바꾸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저자도 히로시마 원폭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케이스다. 개인적으로는 문학도인 선배에게 인생을 바꾼 책이라는 소개를 받고 신비감과 호기심이 강하게 자극되었으나, 벌써 5년 전의 이야기이다.
화려한 기술로 위장된 현대 위에, 이보다 더 놀라운 발전이 있을까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적당한 응용'에 불과하다. 여기서 다루는 이야기는 인간의 행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킨 '원천 기술'이다.
작고도 섬세한 온갖 세공품들은 핵 물리학의 어떤 장비 못지않은 발명의 재능이 필요하고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인간의 등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바늘, 송곳, 단지, 화로, 삽, 못과 나사, 풀무, 끈, 매듭, 베틀, 마구, 단추, 신발 등등 단숨에 그 실례를 백 가지라도 들 수 있다. 이 풍요로움은 발명의 상호 작용에서 온다. 문화는 아이디어를 번식시키며, 그 안에서 새로운 고안은 제각기 다른 고안의 효력을 가속화시키고 확대한다.
본문, 62 ∼ 67
화려하고 거대 단위로 변천하는 역사가 아니라, 소박하고 조그만 순간에 결정적인 착상을 통해서 거대 세계를 연 계기들의 기념비를 아름다운 필체로 묘사하고 있는 저자를 따라 수백만년 지구라는 모태에서 현재까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 인간의 유연성에 대해서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탄생
인간이 중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손에 돌을 든 검고 작은 동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대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데 줄잡아 2백만 년이 걸렸다. 그것이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다. 그런데도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다른 어떤 동물의 그것보다 빨랐다. 그와는 달리, 호모 사피엔스가 여러분과 내가 열망해온 인간이 되기까지는 2만년보다는 훨씬 적게 걸렸다.
……
문화적 진화의 속도는 그와 같아서 일단 시작이 되면 앞서 지적한 두 숫자의 비율이 말해 주듯, 최소한 생물학적 진화보다는 일백 배나 빨리 진행된다.
'일단 시작이 되면'이라는 말이 중요한 구절이다.
본문, 46
아기공룡 둘리를 보면 희동이와 똑같이 생긴 식인종 아기가 나온다. 형들이 희동이를 동생인 줄 알고 부모에게 데려갔을 때, '털도 없고 이렇게 비실한 애가 어떻게 동생이냐'며 형들을 꾸짖고 당장 찾아오라고 한다. 인간은 야생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약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 기본적인 조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환경은 적자(適者)들을 붙들어 놓는다. 적자들은 환경을 거부할 수 없다. 초원에 가장 멋지게 적응한 가젤(gazelle) 영양은 그 아름다운 뜀뛰기로도 영원히 초원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굴로 숨어들어가고, 맹수를 피해 다닐 때부터 생존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신체적 취약성 사이에서 두뇌를 끊임없이 고양시켜 왔을 것이다.
말[馬]의 저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 켄타우로스나 또 다른 반인 사티로스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그것은 스키타이족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공포심을 반영한 표현이다. 저자는 우리가 만든 힘이 우리의 의도 안에 한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서 용도를 왜곡할 만큼 균형을 상실했는가를 묻고 있다. 역사가 소박한 오솔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잉여가 우리를 여기까지 몰고 왔다.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면서부터 농업에는 활력이 붙고 생산량이 늘어나 항상 괴롭히던 식량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자급자족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 등장하면서부터 비교도 안 될 힘과 속도로 인해 농촌의 잉여에 위협을 주게 된다. 즉 전차와 승마법 등 전쟁과 약탈에 필요한 기술들이 말 위에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페르샤, 아프카니스탄, 몽고 등지를 아우른 스키타이족의 침략은 그리스인들에게 공포감과 동시에 호전적인 영혼을 선사했다. 전쟁은 끊이지 않고 군비 확장의 경쟁은 그때부터 달아올랐다.
말의 저주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멘델레예프가 꼼꼼히 정리하여 더 이상 탐구하지 않았던 주기율표를 넘어 저승의 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받게 된다. 그것이 플루토늄 폭탄이다. 핵 에너지의 위력을 잘 아는 과학자들 특히 지라드는 '계획'을 무마시키기 위해 '공개 시험'도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선물의 의미'를 너무나도 몰랐다. 물리학은 정열의 학문이었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나 이제는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위해 쓰여져야 함을 인식하게 된 뼈아픈 교훈이 되었다.
말이 남긴 저주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말의 속도감은 감각을 무디게 하였다. 그 놀라운 힘과 부산물은 우리의 힘을 놀라운 위치까지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플루톤의 말을 타고 만나는 두 가지 딜레마 중 하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인간의 고뇌를 외면하는 전쟁무기로 향하는 길이다. 그리고 하나는 말 위에 서 있는 지고한 존재라는 오만이다. 이들에게 말 위의 인간과 말 아래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말 아래의 인간은 그저 움직이는 노획물 혹은 전유물에 불과하다. 아우슈비츠는 말 아래 인간들을 4백만의 숫자로 본 인간의 오만함을 극렬히 보여준다. 인종과 인종의 차이는 말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신이 그어준 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발견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판단 없이 저승의 신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셈이다.
함정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것은 주어진 상황을 개척해가는 지속적인 유연성이다. 유연성이 죽은 사회는 역사 안에 묻혔으며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유연성을 살리는 방법은 유연성을 가두지 않고 숨쉬게 놔두는 것이다. 폐쇄된 사회 안에서 역사의 동력이 멎는 현상이 바로 그런 함정에 해당한다.
위대한 제국에 있는 도로, 교량과 통신은 예외없이 진보적 발명이다. 그것이 절단되면 권위가 고립되고 붕괴된다 현대에는 혁명의 제1차 목표의 전형이 바로 그 셋이다. 잉카는 대단한 정성을 들여 그것들을 보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에는 바퀴 달린 수레가 없었고, 다리 아래에는 아치(arch)가 없었으며, 통신은 문자로 씌어지지 않았다. 잉카 문명은 기원 1500년까지도 이러한 발명을 이룩하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몇천 년 늦게 출발한데다, 구세계의 온갖 발명들을 성취하기 이전에 정복당했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굴림대로 커다란 건축용 석재를 운반하여 건축을 하던 사회에서 바퀴를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몹시 기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바퀴의 기본적 요소는 고정된 굴대라는 점을 우리들은 잊고 있다. 현수교를 만들었으나 아치를 놓쳤다는 사실 역시 매우 이상하게 생각된다. 그런데 가장 기이한 사실은 수적 정보 기록을 세심하게 보전하던 문명이 그러한 것들을 문서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라 하겠다. 군주인 잉카는 제일 가난한 시민, 또는 그를 뒤엎은 스페인의 폭력배들이나 마찬가지로 문맹(文盲)이었다.
본문, 86 ∼ 88
마추피추가 묻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폐쇄적인 사회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잉카 한 사람을 위해서 일했고, 잉카가 그들에게 신이 아닌 유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며 무너졌을 때,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단절되었다. 이런 집단적 배신감은 잉카를 폭삭 내려앉게 하기 충분하다. 그리스인들이 자랑하는 기하학과 조형술에서 아치가 발견되지 못한 이유는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민주적인 사람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인간이 축복받은 발견을 이룬다면 그것은 반드시 정신의 민주화 안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저자의 동료인 폰 노이만은 상당히 지적이고 위대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천재였다. 그는 발견의 일꾼의 자리에서 벗어나 정계의 험악한 중심가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로 이날까지도 정신과 수학에 관해 그가 다가가려고 했던 분야는 밝혀지지 않았고, 노이만은 그것을 했어야 했다. 저자는 그를 지성의 귀족주의와 사랑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성실성이 담보되지 않은 과학자가 쉽게 범하는 실수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의 깊이를 모른다. 그냥 냉장고에서 꺼내듯이 쉽게 써버린다. 신이 부여한 깊고 고요한 능력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으며 자기보다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기 일쑤이며, 늦잠꾸러기 근성처럼 천성이 성실하지 못하다. 성실성은 자신의 결여를 겸허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자라나는 인간의 고요한 능력이다. 노이만의 귀족주의는 우리들의 문명을 파괴시키는 교조주의를 너무 많이 닮았다. 우리의 지성이 제 값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성은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능성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할 임무를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 지성인의 길이다.
역사를 살다간 천재들이 얼마나 많은 함정에 빠졌는가를 생각하면, 천재적 지적 능력이라는 것은 부여받은 사람에게도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이적인 발견의 역사
모래알 하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하나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한 시간 속에 영원을 잡으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결의 조짐들(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본문, 295
발견이라는 것은 비범한 정신 외에도 확신에 가득 찬 인내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들의 눈은 편견에 지배되지 않고 사물 자체와 대화를 한다. 몸소 체득한 확신을 가지고 절대정적 안에서 발견의 정수를 걷어올릴 때의 모습은 하도 눈부셔서 워즈워드는 "프리즘을 든 고요한 얼굴의 뉴튼"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경이로운 발전의 순간에 이들의 표정은 마치 신의 손길을 느끼듯이 경건하였다.
이것이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중국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객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 고전적 실험이다. 그들은 수은의 황화물의 하나인 빨간 색소로서 진사를 골라 열을 가했다. 그 열은 유황을 몰아내고, 신비로운 은빛 액체 금속인 수은이라는 절묘한 진주를 남겨 그 실험의 후원자에게 경탄과 경외감을 불어넣는다. 수은을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산화하는데, 다시 진사가 되지 않고(처방을 작성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역시 빨간 색이기는 하되 일종의 수은 산화물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그 처방이 완전히 빗나가지는 않았다. 그 산화물은 다시 수은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빛깔은 은빛에서 빨강으로 바뀌게 된다. 그 수은은 다시 산화물로 은빛에서 빨강으로 되돌아가는데 이 모두가 열의 작용이다.
본문, 107 ∼ 110
과학의 발전이란 우리들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전혀 관계 없을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서로의 발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성실한 탐구밖에 없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욕구가 행동이라는 연금술사를 만나 위대한 착각을 일으키면 그것을 해석하고 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과학은 성숙하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와 맹수들의 공격을 피해 동굴에 갇혀 있으면서도 벽면에 무수히 나 있는 손자국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치 "이것이 나의 자국이다. 이것이 인간이다."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스페인 산탄데르 엘 카스티요에 있는 손자국들)
모든 농업권에서 가장 강력한 발명은 쟁기이다. 쟁기로 인해서 대형 생산이 가능해졌으며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정착이라는 것은 항상 떠돌아다녀야 하는 유목에 비해 안정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발전의 필수 요소가 된다.
일찍부터 인류의 욕구는 왕성해서 인간들은 지구 전역을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근동으로, 근동에서 대륙으로 다녔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빙하가 녹으며 완전히 눌러앉게 되었다.
인간이 돌과 불을 발견하기까지는 200만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그 이후로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돌을 발견한 이후 인간은 돌의 성질에 대해 깊이 천착했다. 인간의 손은 눈에 보이는 용도를 초월하여, 안에 숨겨진 결의 법칙을 읽는다.
아치, 버팀벽, 돔은 돌의 결이 낼 수 있는 지고한 능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돌에게서 그것 이상을 읽어낸다. 즉 돌이 받쳐오던 하중을 더욱 강력히 지탱할 수 있는 재료에까지 손길이 뻗치는 것이다.
문명은 완성된 공예품들의 집합이 아니고, 공정(工程)의 정교화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의 가장 초기 단계는 '구리'의 단계이다. 정착농민들은 구리를 이용해 농구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리의 결점은 결정이 무르다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낸 사람들은 연금술사들이다. 이들은 구리에 모래 등의 불순물을 섞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었다. 주석의 발견은 놀라운 일이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은 가히 '성년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도가 단단하여(구리의 거의 3배) 시대의 플라스틱으로 손상이 없었다. 이때부터는 보다 정밀한 공정이 아니면 새로운 발견은 쉽지 않았다. 계기(計器)에 의해 작업을 하지 않던 문명에서 강철을 주조하기 위해서는 "그 칼이 아침해의 빛깔로 이글거릴 때까지 지켜보는 것을 관습"으로 한다.
대개 인간의 두뇌를 어느 수준에 올려놓는 발상은 단순하고도 근본적이다. 과학자군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인이 과학의 수준을 이끌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의 뇌리에 경종을 울리는 참신한 발상이 의식의 전환을 일으키고 답보상태인 문명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파라켈수스가 있기 전에 의사라고 하면 아주 오래된 책을 읽어주는 유식한 학자로 통하였고, 그의 조수는 하라는 대로 불쌍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파라켈수스는 '의사의 진단'을 의술의 결정적 방법으로 격상시킴으로써 환자를 오래된 책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다. 의사들의 판단 여하에 따라서 오래된 의술서에 반하게 되는 치료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자였다. '열소(熱素)'라고 하여 알려진 원자와 결합해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거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설이었는데, 마침내 새로운 원소인 산소를 발견한 후에야 불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원소들이었고, 그 미시적인 세계만 밝혀진다면 자로 잰 듯이 그 질서를 파악할 수도 있다. 서로 결합하는 상이한 원소들의 측정량은 일정하며, 그것은 원자결합의 기본 도식을 시사한다. 이것이 돌턴이 도달한 결론이다.
"나는 기초 입자들이라 정당하게 부를 수 있는 상당수의 입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입자들은 절대로 다른 입자로 변형시킬 수 없다."
본문, 135
한때의 과학은 이들의 손에 의해 직접적으로 밝혀졌다. 멘델레예프, 그는 원자와의 고된 카드놀이를 통해서 일정한 무게와 성격을 지닌 주기율표를 완성했고, J.J.톰슨, 그는 원자는 분리될 수 없다는 그리스 시대의 믿음을 뒤엎어 놓았다. 러더포드, 그는 그 중성자로 핵을 열어서 변형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선두에는 그 새로운 개념들을 최초로 다져놓은 사람들, 구습 타파자들이 있으니 막스 플랑크, 그는 에너지에 물질과 같은 원자적 성격을 부여했다. 그리고 루드비히 볼쯔만, 원자―세계 속의 세계가 우리 자신의 세계만큼이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크게 빚을 지고 있다. 이것이 역사가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이 믿고 있는 사실이 현실화되었고, 그것들을 현실화하려는 의지가 승리를 거두는 아름답고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 그 견고한 그릇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과학이 불멸의 생명을 받는 마지막 시험이다. 천문학이 다른 과학보다 체계적 발전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수학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마저도 수학적 모형으로 그 법칙들을 형상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보를 거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수학에서는 반드시 포함해야 할 개념들이 있는데, 증명이라는 논리적 개념, 자연의 정확한 법칙을 표현한 수리적 방법, 자연의 다이나믹한 현상을 기술하고 예측마저 할 수 있는 동태적(動態的) 특성이다. 그것을 온몸으로 실현한 사람이 바로 피타고라스이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화음과 수학 간의 기본적 관계를 발견했다.
……
팽팽하게 쳐 놓은 하나의 현(絃) 전체가 진동할 때에 기음(基音)이 난다. 그 기음과 조화되는 음을 내려면 현을 등분(等分)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확히 2등분, 3등분, 4등분 등등으로 나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현의 정지점(靜止點) 즉, 마디가 등분점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으면 그 소리는 불협화음이 된다.
……
피타고라스는 귀―서양인들의 귀―에 즐거운 소리를 내는 화음은 정수(整數)로 현을 정확히 등분한 소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피타고라스는 기하학과 숫자를 연결지은 개척자였는데……
……
피타고라스는 음의 세계는 정확한 숫자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을 입증했다. 나아가서 그는 시각(視覺)의 세계에서도 그 논리는 참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것은 비범한 업적이다.
138 ∼ 140
그는 숫자를 자연의 언어라고 불렀다. 그에게 자연의 법칙들은 예외 없이 숫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사유를 물려받은 사람은 뉴튼이었다. 뉴튼은 기존에 수학이 수학으로 머물던 유클리드의 정태적 기술 방식에서 동태적 접근 방법으로 바꾸어 눈앞에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과학은 진정으로 엄밀해졌다고 할 수 있다.
원소도 질량이라는 수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대한 세계가 드러났다. 지금은 원자의 기본 형태가 숫자적이라는 사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수는 표현 가능한 것에서 불확실한 것에 대한 표현까지 범위를 넓혀오고 있다. 어느 대상이든 정확한 관찰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 이론가들의 주장이다. 모든 정보는 불완전하며 우리는 그 오차까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가우스는 오차의 산포를 곡선의 편차나 폭으로 요약시키는 '가우스 곡선'을 만들었다. 관찰 대상이 불확실의 영역 내에 있다면, 그 영역은 관찰자의 산포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수학은 문제를 명확하게 만들고 표현방법 또한 단순하다. 숫자에는 우주를 묶고 있는 정확한 법칙들이 담겨 있다는 피타고라스의 예언을 받아들여 직각삼각형을 이루는 숫자들을 다른 항성계(恒星系)의 행성들에 보내어 그쪽에 이성적(理性的)인 생명체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메시지로 삼자는 제의가 실제로 나왔었다. 숫자는 우주의 언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슬픈 역사, 의미 있는 기억
고인이 된 피렌체인 빈첸쪼 갈릴레이의 아들이며, 당년 70세인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 법정에 직접 소환되어 기독교 공화국 전역의 이단적인 타락 행위를 제소하는 이단 심문관이신 존경하는 추기경 예하(猊下) 앞에 무릎을 꿇고, 거룩한 복음서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성가톨릭 사도 로마 교회가 지지하고 전도하며, 가르치는 모든 것을 항상 믿어 왔으며, 지금도 믿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후에도 믿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한편―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거짓 의견을 완전히 버릴 것이며, 전술한 이론을 구두나 서면 등 어떤 형식으로든 지지, 옹호 또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명령을 이 성청(聖聽)이 저에게 사려, 분별 있게 암시한 뒤, 그리고 전술한 교리가 성서에 배치된다고 저에게 통보한 뒤에도―저는 이미 단죄된 이 교리를 논의하고, 이들에 관한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교리를 지지하는 매우 강력한 주장을 도출하는 한권의 책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원인이 되어 저는 이단, 다시 말하면,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하고 믿었다는 강력한 의심을 성청으로부터 받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저에 대해서 정당하게 제기된 이 강력한 의미를 추기경 예하와 믿음 있는 모든 기독교도들의 마음에서 제거하고자, 성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저는 앞서 말한 과오와 이단, 그리고 전술한 교회에 배치되는 다른 모든 과오와 교파 전반을 포기, 저주하고 혐오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와 비슷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어떤 것도 이후에는 절대로 구두나 서면으로 말하거나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또한 어떠한 이단자, 혹은 이단의 혐의가 있는 사람을 안다면, 저는 그를 이 성청 또는 제가 있는 지방의 이단 심문관과 종무(宗務) 판사에게 고발할 것을 서약합니다. 나아가서 이 성청이 저에게 부과했고, 부과하게 된 모든 고행을 충실히 이해하고 준수할 것을 맹세하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약속, 확언과 서약의 어느 하나라도 위배할 경우(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저는 그러한 일탈 행위에 대해서 일반적이든 특수한 것이든, 성경과 다른 전범(典範)들에 규정 공포된 모든 고통과 형벌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그리고 제 손을 얹고 있는 이 거룩한 복음서여, 저를 도와 주소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위와 같이 내 주의를 버릴 것을 선서하고, 맹세하고, 약속했으며, 자신을 거기에다 묶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증인 삼아 저는 제 손으로 위에서 지적된 신념을 포기하겠다는 이 문서를 작성하여 1633년 6월 22일 로마의 미네르바 회의에서 한마디 빠짐없이 낭독하였습니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위와 같이 자필로 선서했습니다.
본문, 188 ∼ 190
이것은 진리가 자연에 있지 않고 진리의 담당자로 여겨졌던 사람들의 손에 있을 때 나타나는 불행한 사건이다. 갈릴레오 자체도 현실감과 처세술에 대한 조금의 사려도 없이 진리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순진함을 드러냈다.
과학의 시련은 억압된 사회 분위기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과학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수성에도 적지 않게 의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 발견되는 새로운 학설은 확정된 패러다임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새로운 사실들이다. 다윈의 경우가 그러하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했을 당시는 스스로도 깊은 충격을 받아서 정체성의 혼란 속에 있었다. 만약 전혀 다른 곳에서 다윈의 논문과 자매를 이루는 왈라스의 논문이 그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다윈을 모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치가 또 있을까. 왈라스가 내가 1842년에 써 놓은 원고를 갖고 있다 해도 이보다 더 훌륭하고 간결하게 간추려 놓을 수는 없었으리라!
본문, 259
다위의 이론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가라앉았을 때, 우리들은 차분히 우리의 기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대개의 과학의 발견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우리들에게 당연한 지식이 된다.
1900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원자의 실재(實在) 여부에 대해, 생명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위대한 철학자인 비인의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는 원자는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 했고, 위대한 호학자 빌헬름 오츠왈드(Wilhelm Ostwald)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기의 그 중요한 전환점에서, 한 사람이 근본적인 이론에 입각해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완강해 주장했다. 저자는 강력하고 저명한 적수들에 맞서서 원자론을 옹호했으며 원자론이 승리할 즈음 모든 것을 잃은 패배감에 자살하고 만다. 만약 그때, 반원자론이 실제로 득세했더라면, 우리의 진보는 확실히 수십년, 아마 일변 년쯤은 퇴보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생물학에 있어서도 진보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럽 전체에 암울한 구름이 덮치고 있었다. 그 중 특히 1백 년 동안 괴팅겐을 덮고 있던 특별한 구름이 있었다. 1800년대 초에 요한 프리드리히 부루멘바하(Johann Friedrich Blumenbach)는 전 유럽의 뛰어난 인물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해골을 수집해 놓았다. 그가 인간의 가계를 분류하기 위해 해부학상의 척도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의 작업에서 그 해골들로 인류의 인종적 차별을 지지한다는 조짐은 없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0년에 부루멘바하가 죽은 이후부터 그 수집물은 점점 더 보태어져서 마침내는 인종주의(人種主義), 즉 범게르만 이론의 핵심이 되었는데 그 이론은 나치스들의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본문, 308
상대방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극구 부인한다. 자신은 항상 모자란 사람이며 도의 가르침을 매번 어겨서 후회하곤 한다고 술회한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숨질 때 마침내 긴장을 풀고 편안히 저세상으로 간다. 이들을 우리는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인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인간 이하로 취급함으로써 거기서 얻어지는 상대적 지휘를 차지한다. 신 아래 인간에는 여러 구분이 있으며, 다른 종과는 근본적으로 차별되었다고 판단하면서도 공식적으로 표명하려는 것이 인종주의자들의 특성이다. 이들에게 권력과 지식이 침투했을 때, 인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파생시키게 된다. 도그마는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 신에 도달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인간이 또 있을까? 마찬가지로 신을 독점하려는 인간처럼 무지하게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이 상상치도 못할 광란의 희생자 중 과학자도 적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이로 인해 세계관의 일대 전환을 겪게 된다. 저자가 인간이라는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에세이를 쓰려는 의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물리학자에서 생명과학자로 전향한 지라드의 선택은 현명했다.
과학자뿐만 아니라 신 바로 아래 있다고 자처하는 인간의 한 족속들도 거대한 세계를 보고 있는 뉴튼의 마음과 같다면 인간의 등정은 순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고, 이따금 보통 것보다 한결 매끈한 돌멩이나 예쁜 조개껍질을 찾으며 놀고 있지만, 진리의 대양(大洋)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본문, 204 ∼ 205
망망대해 앞에 서 있는 어린이의 이미지는 과학의 세계에 천착하는 사람도, 인간이나 예술, 철학에 관여하는 사람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그림이다. 저자가 인간 발견의 장면을 그리는 필체는 하나같이 경건한 무엇이었다. 인간의 의지는 욕심에 물들지 않았고, 그의 엄밀성은 인간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사고의 혁명적 전환을 불러올 학설을 쥔 학자는 불안하고 망설이는 모습으로 서 있으며, 우리들의 무지에 관해서는 언제나 겸허하다. 이들이 이룩한 과학의 발전이 대중에게 얼마나 희망이 되고 생활의 활력이 되었는지는 「광학」을 저술했을 당시 젊은 시인이었던 포프의 시에서 강력하게 천명돼 있다.
영롱한 눈의 농어는 티로스의 물감들인 지느러미를 달고,
은빛 장어는 반짝이는 몸뚱어리를 굼틀거리며,
노란 잉어는 황금빛으로 물든 비늘에 싸여 있고,
날쌘 송어들은 진홍색 반점으로 치장했노라.
본문, 199∼ 200
어떤 때는 순수한 과학자보다 기술자나 일반 서민들에 의해서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바늘, 송곳, 단지, 화로, 삽, 못과 나사, 풀무, 끈, 매듭, 베틀, 마구, 단추, 신발 등등의 발견은 인류의 지적인 여행 중 반드시 밟아야 할 첫 단계였으며, 아치의 힘을 더욱 강력하고 세밀하게 만든 것은 과학자들이 아니라 기술자들이었다. 때문에 기하학을 사랑하는 그리스인이나 문명의 중요한 요소를 안고 있던 페루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평민적인 문화에 의해서 발전의 결정적 단서가 발견되었다. 때문에 인간 발견의 역사는 유연성의 역사이다. 중국의 청동 공예술은 과학의 발견 이상의 유연성을 자랑하는데 청동 작품들의 주기(酒器)와 식기들―놀이의 의미가 담겨 있으면서 동시에 거룩한―은 그 자체의 기술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하나의 예술을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기쁨을 준다. 우리들의 손은 이것을 과학으로, 과학에서 예술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 등정에서 발견한 저자의 놀라운 성과이다. 우리들은 자연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하며, 서로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저자는 매 여행지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브로노프스키에의 이 저서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점은 서술 방식이다. 물질적이고 유물론적 유추에 의해서 논의를 진행시키는 과학정신의 글 속에서 사적이고 인간적인 감흥이 묻어난다.
과학자는 사실과 사실의 조합을 통해 거대한 비유와 은유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상상력의 극치이다.
저자의 '낯설은 글쓰기'를 보며 나는 얼마나 과학적·유물론적 사고에 우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