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탄핵 범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여의도 촛불문화제는 6천여 명이 운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윤중로를 'ㄴ자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행렬에 사람들이 자꾸 뒤이어 들어오는 형국이었다. 참여자의 구성은 매우 다양했다. 물아기를 안고 온 엄마부터 초중고등학생, 직장인, 주부 등 모든 세대가 한데 모인 자리였다. 세대가 다른 만큼 생각도 다르고 이해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텐데, 인터뷰를 해본 결과 요구사항은 나이든 사람이고 어린 사람이고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생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 기자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협상에 항의하는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자 앞에 앉은 사람들부터 뒤에 앉은 사람들에게 촛불을 나눠주어 거리는 금세 촛불로 뒤덮였다.>

 

세대는 달라도 걱정은 한결같아

 

"어린이신문에서 30개월 이상 소도 수입한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무서워요"(이담초 5학년 이수정 양)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주세요"(중학교 3학년 학생)

"사람들의 걱정이 커지지 않게 정보를 공개했으면 좋겠다"(용화여고 2학년 여학생)
"국민을 대변하는 것이 정부인데, 정부의 역할을 똑바로 해주세요"(영산고 2학년 학생들)
"정보에 대한 통제와 끊임없는 밀실정치를 당장 그만두라"(IT 업종에 근무하는 20대 직장인)
"국민이 원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일곱 살 아이를 둔 30대 주로미 주부)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으면 좋겠다"(중학생 딸을 둔 40대 주부)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한 정치를 해달라"(고2 딸을 가진 51세 주부 이모씨)
- 이상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에 꼭 해주고 싶은 말"에 대한 답변


우석훈 씨는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대한민국 사회는 세대간 착취현상이 매우 심각하다고 우려한 바 있는데, 최소한 여의도 광장에 모인 서로 생각이 통하는 듯했다. 초등학생부터 50대 주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지만, 걱정하는 내용은 한결같았다. 이명박 정부는 왜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느냐는 질타다. 한 학생은 "청와대 분들과 정부에 계시는 분들이 직접 이곳에 나와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계천의 두 번의 집회를 포함해서 세 번째로 집회에 참여한다는 50대 주부는 "청계천에서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여의도는 아기엄마나 주부들이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자가 만난 고등학생은 용화여고, 회수고, 영산고 등이었는데, 학교에 따라서 40명 반에서 10명에서 많게는 25명 반에서 16명까지 적지 않은 고등학생들이 청계천과 여의도에 있었던 3회의 집회에 참여했다고 학생들은 전했다. 기자는 학생들과 인터뷰를 하기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했다. 어른으로서 여기까지 오게 한 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극기 아래 수천 명의 점점한 촛불 행렬이 늘어서 있다.>

 

죽기 싫어서 나왔다

 

어떻게 해서 직접 참여를 하게 되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학생은 망설임 없이 "죽기 싫어서요"라고 대답해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 학생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쇠고기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하지만 자신들처럼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어른들은 알지만 아이들은 느낀다는 것이다. 행사를 알게 된 것은 대부분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서다. 자신을 고3 수험생이라고 소개한 한 남학생은 "개교기념일이라 쉬는 날이지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학원수업을 빼먹고 온 학생들도 적지 않은 듯했다. 대체로 학생들은 사진을 찍는 것과 실명을 공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학교 공개는 괜찮다고 말했다. 언론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노출될 경우 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공부를 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 아니냐" 하는 짓궂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그야말로 우문현답니다. "배운 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진짜 학생이다"라는 회수고 3학년 최재용 학생의 말에 기자는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한 학생은 "학생도 국민이므로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 용화여고 2학년 학생의 말을 듣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저희가 나설 정도면 상황이 좀 심각하다는 얘기다"
면목동에 사는 송이 엄마 주로미 주부는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행렬에 동참하고 싶어서 나왔으며, 특히 아기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를)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이 자리에 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아이의 문제일 거라고 생각해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 데려왔다"고 말했다.

 

<애독하는 어린이신문을 통해 쇠고기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다는 이담초등학교 5학년 이수정 어린이와 남동생. 이수정 어린이는 솔직히 집에서 동생과 놀고 싶었다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당신이 내 옆에 있어서 나는 든든하다

 

여의도 광장에는 학생들이 천 명은 넘게 보였다. 이를 감안해 학생과 어른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선택한 것이 바로 '애국가'다. 태극기도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군중이 태극기를 가지고 온 이유는 "우리도 애국자입니다"라는 진행자의 소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학생들의 직접 참여에 대해서 어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IT업종에 근무하는 직장인은 "휘둘리는 건 위험하지만 그들이 나오는 것은 정당한 권리다"라며 학생들을 응원했다. 성산동의 한 주부는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이 너무 저조해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오늘 여기서 젊은 사람들과 학생들을 많이 만나게 돼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직 어둡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며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행사에 참여한 한 학생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느껴서 좋았으며, 특히 옆에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매우 든든하다"며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 열린 촛불문화제를 포함해서 현재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국민의 행동과 이를 바라보는 언론에 대해서 우려와 불만이 쏟아졌다.

한 직장인은 정부의 밀실정치도 문제지만 도농의 정보격차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언론에만 유지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과 국민적 메시지를 잘못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주부는 최근 조갑제 씨가 "1만명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한 발언을 들며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질타했다. 어른들은 물론 학생들도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에 대해서 불만을 나타냈다.

 

<5월 6일 저녁 9시 20분경, 여의도 광장의 윤중로에 촛불을 든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인터뷰에 응한 한 학생은 학교에서 배운 현대사 과목을 예로 들며 "4.19 혁명 때 언론은 제대로 보도한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지금 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현재의 언론 실태를 비판했다.

한편 이번 행사를 주최한 이명박 탄핵 범국민운동본부는 '정치선동'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신경을 쓴 듯 보였다. 며칠 전 청계 광장에서의 행사와 달리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고 침묵과 애국가, 촛불만을 가지고 행사를 진행했다. '조아세' 등 시민단체나 각종 정치 세력들이 호기를 틈타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팜플렛을 배포했지만, 이로 인해 주최측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진행자의 선창에 맞춰 따라 한 구호는 "농부 아저씨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나 "어른들이 미안합니다"와 같은 메시지뿐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없지는 않았다. 인천 용현동에 사는 안형남 씨는 "이곳에 나와서 어떤 방식으로든 의사를 표출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인 행동인데 너무 몸을 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 아무개씨 역시 "메시지가 없는 행사라 밋밋했다"는 평이다.
세 번의 운집, 만 명이 넘는 행렬에 혹자는 냄비와 월드컵을 떠올렸다. 월드컵처럼 집회를 즐기기 위해서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다른 건수가 터지면 곧 묻힐 거라는 비관적인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만난 고등학생의 말처럼 쇠고기 문제는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생명과 건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쉬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현장의 중론이다. 그 중에서도 한 시민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냄비가 끓더라도 이번에는 좀 제대로 끓여보자!"


<한 어린이가 엄마와 촛불을 들고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의도 광장에서는 어린이를 데리고 오거나 심지어 아기까지 업고 온 엄마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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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5-07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학생들 인터뷰 내용 읽으며 눈물났어요~~ 아침부터 찔끔거리며시작하는군요.
국민의 우매화 정책은 세월이 흘러도, 세상이 변해도 집권자들이 즐기는 정책인 듯...
국민의 생각이 정책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세상은 그리 어려운 것인가!
알만한 분의 실명이 반가웠어요~~~~~

승주나무 2008-05-08 22:38   좋아요 0 | URL
네~ 그 분밖에 실명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 분한테 무척 감사한 일이죠^^

Jade 2008-05-07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천에 사는 안형남씨와 직장인 박아무개씨....ㅋㅋ

승주님 기사를 보니 더 절실하네요.
"우리가 나설정도면 심각한거다"란 말이...
예전 우석훈 강연에서 "중학생들이 나오면 어느 정권이든 뒤집어지게 되어있다"라고 한 말이 기억나네요 ㅎㅎ


승주나무 2008-05-08 22:38   좋아요 0 | URL
"우리가 나설정도면 심각한거다"
결국 이게 메인 제목으로 됐더군요^^;
 

 








4월 29일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공개한 날이다. 그 날 서중석 교수는 그 자리에 함께 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기자와의 인터뷰 약속이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급한 인터뷰는 아니었는데 괜히 역사에 죄를 짓는 것 같아 속상했다. 서중석 교수는 전날 밤늦게 요청전화가 와서 불가피했으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오히려 기자를 달랬다. 인터뷰는 오전에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 연구실에서 진행했고, 그날 저녁 역사비평사가 주최하는 서중석 교수 강연회의 내용을 묶어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하였다. - 기자주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 소묘

 

성균관대 교수연구실에서 서중석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나는 지식인의 인상적인 유형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이며, 둘째는 지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이다. 첫째 유형에 걸맞는 인물은 스피노자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 일관된 삶의 방식에 존경을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철학자 러셀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의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스피노자를 "가장 고귀하고 또 존경할 만한 대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며 "지적인 면에서 그보다 탁월한 철학자가 몇몇 있기는 하였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그를 따를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둘째 유형에 걸맞는 인물은 '루소'를 들 수 있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교육학이나 사회학에 영감을 준 바가 컸으나, 사생활에 있어서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신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을 모조리 고아원에 보냈기 때문이다. 물론 격변기를 살았던 그의 신상을 생각하면 봉시불행(逢時不幸), 즉 시대를 잘못 만난 탓도 있었겠지만 그가 남긴 지적 성과는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지식인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서중석 교수에 대한 인상을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서중석 선생은 대한민국 헌법과 같은 해(1948년)에 태어났다. 현대사의 주요한 변곡점과 마디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5년 2월 17일 석방되었고, 당시 '정치 신문'과 동의어였던 <동아일보>에서 약 10년간(1979~1988) 기자 생활을 했다. 현재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의 상임공동대표와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위원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강연회에서 "역사의 방향에 맞춰서 진지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밝혔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강연을 하는 동안,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표정에서 현대사가 생생하게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안타까운 순간을 말할 때는 아쉬운 표정, 화가 나는 순간을 말할 때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신명나는 순간을 지나가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화색이 돌았다. 나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그와 같이 일체화시킬 자신이 없다. 그가 일궈낸 역사적 연구성과나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그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갑자기 궁금했다. 현대사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동시대인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냉정함. 이성에도 '온기'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서중석 교수와 인터뷰를 나눈 주제는 현대사, 선거, 교과서 문제 등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인터뷰의 내용이다.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현대사를 불편하게 보고 피하려 하는 경향 안타까워

 

개성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다. 북한의 분위기는 어떤가?

- 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동안(24,25일) 북한의 학자들과 학술토론을 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남북역사용어사전을 공동편찬하기로 협의한 데에 따른 모임이었다. 모임의 성격은 민간교류이므로 남북 당국에서 막으려 하지도 않고 필요성도 느끼고 있지만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은 사실이다. 민간교류 성격이지만 사전편찬 등으로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을 때는 또 다른 것 아니겠나. 북쪽에서는 "남쪽의 태도를 '이해'하겠다"는 입장이라는 데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정부 또한 남북관계가 안 좋게 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결국 남북이 안 풀리지는 않을 거 아닌가.

 

요즘 드라마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사와 관련된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반면 현대사에 관한 책은 너무 적다. 그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

- 독자들이 고대사나 조선사는 좀 친근함을 가지고 접근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하지 않나 생각한다. 국제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보였고 강토를 넓혔다는 주장들은 일반인들에게 고대사에 대한 흥미와 유혹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부정확한 내용이나 과대하게 포장된 부분이 적지 않다. 조선사도 마찬가지로 왕실의 이야기나 애정관계, 권력투쟁을 주로 다루며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지만 일반 서민의 모습이 그 안에 얼마나 담겼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을 보면 대중들이 현실과 관계있는 것을 고민하기보다는 그것을 피하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일제시대에 최초로 나라를 빼앗겼고, 6.25로 최초로 분단현실을 맞은 것과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나라를 빼앗긴 것이 비단 일제시대만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삼전도 굴욕에서 보듯이 청나라에게 항복한 경험이 있으며 삼국시대도 일종의 분단현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삼전도 굴욕사건을 예로 들면 청나라는 곧바로 철수하고 '조공형태'로만 지배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다기보다는 일종의 외교관계의 재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 역시 엄밀한 분단국가가 아니라 역사가 통합ㆍ진전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분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람들이 현대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수강신청률 같은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근현대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자기 자신조차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이를 불편하게 보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뭔가 잘못했다는 자괴감 같은 거다. 그것은 현대사의 부정적인 면이 너무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분명히 사회ㆍ문화적인 면에서도 발전하고 있고 동태성ㆍ능동성ㆍ활기가 분명히 포착되는데, 이런 점이 부각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예전에 강의를 받던 학생이 "현대사는 고통과 비관에 차 있는 것 같다"고 한탄을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지금도 강의당 학생 수는 좀 줄었지만 꾸준히 등록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현대사 시험을 보고 나면 성적이 참 좋지 못하다. 그것은 초중고등학교 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온통 박정희 찬양만 들어서 객관적인 관점으로 현대사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교육이란 결국 반복효과 아니겠는가. 그런데 현대사 강의에서는 이제까지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거꾸로 된 것을 일러주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거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너무 크거나, 내가 너무 현대사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학생들을 짓누르는 면이 있다. 때문에 나는 학생보다 오히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수를 하는데, 골자는 교사들이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면에 비중을 두어서 학생들의 기를 펴줘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을 전달해주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수를 가 보면 "남북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같은 질문들만 해서 토론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무슨 예언자인가? 그런 걸 알게.

 

서중석 교수, <역사비평사> 주최로 열린 <풀로엮은집>의 대중강연에서 

 

새역모 교과서 채택률은 저조하지만 대중서는 반향 엄청나 

 

교사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묻겠다. 이번에 새역모가 출판사를 지유샤(自由社)로 바꿔서 문부과학성에 검정 신청을 했고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만약 내년 3월에 검정에 합격하고 4월에 채택전이 시작되면 또 시끄러워질 것 같다.

- 새역모가 내홍을 통해 두 파로 갈라진 것으로 안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거기도 책을 팔아야 한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수요자가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게 이번에는 더 부드럽게 만들 거라는 말이 들린다. 내용이 달라지고 좀더 교묘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사실 이전 교과서는 내용에서 문제가 많고 독자들에게 극단적인 주장을 강요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교과서 치고는 얇은 두께인 데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에서는 무려 4쪽을 할애하였고, 소화천황에 대한 내용도 불필요하게 길다.

2001년도에는 0.03%, 2005년에는 0.4% 정도로 미미한 수치이지만, 이 수치에 안심하기는 이르다. 새역모의 위상을 생각해 보자. 일본 자민당 의원의 다수와 민주당의 상당수가 사실은 새역모 교과서와 사관을 똑같이 한다고 보면 된다. 새역모의 일반용 단행본은 넉달만에 50만부가 팔렸다. 그것의 만화판은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것은 일본 대중이 군국주의 사관에 호응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장에서의 성공과 대중의 지지, 정치세력으로서는 의회의 다수파가 우군이 받쳐준다는 것이 새역모의 실상인데 0.4% 채택률로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22일 ‘일본에 과거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대일정책을 선언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 태도를 바꿀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최근의 대통령들은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시작한 거 아니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일본과의 협력·우호를 강조했지만, 과거사와 관련된 일본의 망언이 나오기가 무섭게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강경 발언을 했고, 김대중 정부는 ‘21세기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통해 조심스러운 출발을 했으나 교과서 파동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노무현 정부 역시 초기에는 사상 처음으로 양국 정상 셔틀회담이 마련될 정도로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지만 독도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단숨에 일본과의 ‘외교전쟁’을 거론하는 단계까지 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예만 들어도 2005년 86돌 삼일절 기념사에서 역사 문제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약속했고, 정부는 ‘외교 문제보다 독도 문제를 상위개념으로 두겠다’고 정책 전환을 선언하는 등 능동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지지가 올라갔거든. 때문에 일본에서는 정략적이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과거사를 말할 때는 독일과 일본의 예를 든다. 독일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달라.

- 일본 대중들은 자신들이 침략을 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참화'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누구나 자기가 당한 것을 오래 기억하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에 대한 제재를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육성해준 것이 지금까지 역사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 역시 나치에 협력한 세대들은 반성을 안했다. 하지만 68혁명을 주도한 진보적 학생을 중심으로 독일에서는 자기반성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올해는 68혁명 40돌 되는 해이다.) "희생자의 편에서 역사를 보아야 진실이 보인다. 우리 아버지, 부모 세대 잘못을 반성하자"는 주장이 공감대를 얻었고, 스스로 반성하고 후학들을 가르침으로써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척 노력을 했다. 독일 총리가 희생자에게 사죄를 하거나 엄청난 비용을 관련 사업에 후원한 것은 본질이 아니다. 독일의 시민과 학생, 청년 사이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반성이 있었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지금도 독일에서 과거사와 관련한 세미나가 있을 때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듣는다.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하면 작년에 의미 있는 전시회가 있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진재(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일본 정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에 의해 살인자와 약탈자로, 강도와 성폭행범으로 몰린 재일조선인들이 일본 경찰과 자경단들에 의해 6천여 명이나 학살되었던 사건) 84주기 전시회할 때 수십일간 전시회를 열었지만 그곳을 방문한 시민들은 많지 않았다. 이 대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을 '국민성'의 차이로 볼 수 있는가?

- '국민성'으로 접근하면 결정론과 흑백론에 잘못 빠지기 쉽다. 그보다는 시민의 의식이 얼마나 성숙했는가 하는 차이가 큰 요인일 것이다. 일본 시민사회는 여전히 부국강병의 사고가 만연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천황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는 것 같다.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청산하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다. 한국은 활기라도 있는데, 일본은 그게 없다. 무엇보다 자기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사회에서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자라나기 힘들다.

 

그래도 68혁명의 대표지성인 샤르트르가 일본에서 강연을 할 정도로 지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고(이 강연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걸작으로 출간됐다) 전공투 세대가 활약하지 않았나?

- 전공투의 활약은 평가할 만하다. 미일신안보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1960년 기시정권을 무너지게 한 주역들이다. 하지만 1970년대 엄청난 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당시 '경제동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즉 도덕성, 가치관, 민주주의, 과거사와 함께 이뤄낸 경제발전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을 계기로 일본인의 의식이 멈추고 보수화ㆍ우경화로 나타나고 말았다. 과거사 반성은 더욱 약화됐으며, 고이즈미가 신사참배를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는 절정에 달했다.

 

이명박 정부 역시 '경제살리기'에 치중하고 있어서, 우리나라도 10년 후에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우려된다.

- 우리나라 역시 삶의 질은 따지지 않고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쳐 왔다. 이렇게 가치관 없는 발전을 이룩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크게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일본 보수세력은 일본인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보인다는 점, 에도 정부와 도쿠가와 막부, 30년대 군국주의 침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역사관이 일본인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비판적으로 보는 측면이 많다. 말뿐 아니라 몸으로 저항하다가 다들 감옥소 갔다온 역사가 있지 않은가. 나는 우리 역사를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그렇게 볼 만큼 나쁜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서중석 교수, 합정역 근처 풀로엮은집 강의실에서 

 

진보세력조차 현대사 공부 너무 안 한다.

 

선거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선거의 결과를 어떻게 보나?

-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막판에 혈전 비슷하게 나타났다. 민심 동향이 달라진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역사상 최하인 50%의 투표율이 안 되었다는 점이고, 특히 젊은층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두고두고 뼈아프다. 서울ㆍ경기권에 사는 젊은이 2~3%만 투표했어도 한국사회가 더욱 동태적으로 되고, 국회가 논의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권의 판도와 양상이 달라질 수 있는 득표율이었는데 참 아쉽다. 이 역시 현대사의 역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번 선거에도 '현대사의 역설'이 작용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 보수세력은 젊은이나 여성, 노동자 등이 투표장으로 오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그들이 어디에 투표할지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선거연령의 변천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남조선 과도입법부에서 보통선거법을 통과시켰을 때 이승만은 선거연령을 아주 높여 놨다. 피선거권을 25세, 선거권을 23세로 규정한 것이다. 미군정이 이 법안을 보고 무척 놀랏다. 이건 안 된다. 요새 이런 나라 없다고 설득할 정도였다. 당시 유엔감시위원단의 선거방식을 담당한 대표국가는 프랑스였는데, 프랑스 대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18~20세에서 선거권이 정해지는 데, 이러한 '터무니없는' 선거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3월 중순 발표된 보통선거법에 의하면 선거권은 21세, 피선거권은 23세가 되었다. (대한민국 유권자로서 프랑스 대표에게 감사(?)한다) 선거권이 20세로 낮아진 것은 그로부터 12년 후인 1960년대였다. 여기서 또 1년이 낮아지기 위해서는 4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싸워서 얻어낸 선거권 연령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투표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대사의 역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선거이야기>에서는 역설적 현상, 또는 '이성의 간지(奸智)'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역설도 몇 가지만 소개해 달라.

- 지방자체제, 정당제, 공천제를 소개하면 될 것 같다. 52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이승만의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국회에는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내각책임제가 민주주의의 보증수표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이승만이 짜낸 묘안은 자유당을 만든 것이다.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집단을 만든 것이다. 이를 관제여당이라고 하는데,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대표적인 관제여당이었다. 최초의 공천제 역시 그 의도가 불순한데,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을 허용할 것"이라는 개헌 각서에 사인하는 사람에게만 공천을 준 것이 최초의 공천이 된 것이다. 지방자치선거는 더 기가 막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지방자치 제도 자체를 거들떠도 안 보다가 전쟁 중인 1952년에 뜬금없이 지방자치선거를 했다. 당시 국회의원들은 압도적으로 이승만을 반대했는데, 이승만은 "읍면도의원도 민의를 대변하는 선량이다"고 주장하며 지방의원들을 자신의 권력유지용도로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의도는 나빴지만 결과적으로 이 제도가 한국정치에 공헌한 바가 크다. 하지만 역설적인 변화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는 한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두 번의 선거로 인해 선거제도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선생님의 <선거이야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고 있는데, 간단히 소개해 달라.

- 4.19혁명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 보자. 먼저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그에 대항해 3월 학생운동이 바로 일어났고 100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이것을 발화로 해서 4.19혁명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결국 이승만이 퇴진하게 되었다. 결국 '선거'는 4.19를 이끌어낸 동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0.26 역시 사건 자체보다는 문맥을 살펴야 한다. 10.26 직전인 1978년 12월 12일에 선거가 있었는데, 야당 득표가 1.2% 앞섰던 것이 결정적이다. 이런 민의를 의식해서인지 1978년 대통령 취임식에는 세계 어떤 나라도 축하사절을 보내지 않았고, 일본 역시 비공식 사절단만 12명 보냈을 뿐이었다. 80년대는 더욱 빠르다. 살얼음같은 서울의 봄이 12.12와 5.17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85년 2.12총선에서는 세상이 뒤집어지려는 분위기를 누구나 감지할 수 있었다. 여당인 민한당 의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한 한민당 후보는 "'이거 큰일 났다. 이거 큰일 났다'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했다. 2.12총선은 그야말로 폭풍이 불어닥친 선거였다. 이로 인해 6월 대항쟁으로 나아가는 대도가 뚫린 것이다. 당시 정치인들은 이런 민의를 잘 대변했다. 정치는 이런 거다 하는 기백이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마지막 코너로 집어넣을 수 있었다. 조봉암의 경우 한때 주먹으로 날렸다는 시라소니조차도 무서워서 곁을 떠날 만큼 배짱이 있었다. 그 배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있을 때, 민중과 일체될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정치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 정치의 국면으로 따지자면 한국정치는 갈 데까지 갔다. 야당은 지리멸렬하고, 지금 시류에 맞지 않은 주장들을 하는가 하면 아마추어리즘을 노출하곤 한다. 무엇보다도 진보세력조차 현대사 공부를 너무 안 하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이 현대사 공부를 조금만 했더라면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총선 직전에 분열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면 그들을 '학습미달 정치인'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 학습미달이 맞다. 이런 나쁜 정당정치는 고통 속에서 정리될 것이다. 박정희 18년 정치가 부재했던 것이 가장 큰 영향일 것이다. 정치부재의 사회, 중앙에 의한 중앙정치의 사회. 박정희 시절은 현대사의 허리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성장제일과 근대화 지상주의에 빠지는 등 그 시절이 보인 패착이 주는 그림자가 매우 길고도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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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5-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중석 선생님 얼굴이 너무 붉게 상기되셨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술 한잔 걸치신 줄 알겠어요 ㅎㅎ

승주나무 2008-05-03 15:07   좋아요 0 | URL
서중석 선생님이 현실에 대해서 갖는 애정으로 읽혔어요^^
기쁨과 슬픔을 어떻게 이렇게 일체화시킬 수 있는지~~~
나도 나이가 들면 저런 표정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해요^^

순오기 2008-05-05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
우리딸이 대학입학 후 두달만에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애들이 현대사를 너무 모른다.'는 한탄이었어요.ㅠㅠ 이 글을 읽으니 훨씬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 방학에 오는 딸을 위해 찜합니다!

승주나무 2008-05-03 15:07   좋아요 0 | URL
저도 2000년까지 현대사의 현 짜도 모르는 형편이었어요. 현대사는 자기가 스스로 찾아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영원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마노아 2008-05-0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중석 선생님은 지식인의 인상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인터뷰 잘 읽었어요. 오늘 근현대사 시험 채점했는데 가장 점수가 좋은 반만 평균 59점이었고, 2등반이 47점이었어요.
수능에서 선택과목으로 채택한 학생들이 한 반에 다섯 명 정도인데, 그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관심이 전무하다고 봐야 하더라구요. 가심이 쓰렸습니다. ㅜ.ㅜ

승주나무 2008-05-04 02:49   좋아요 0 | URL
당연히 인간적 감화를 주는 지식인상이었습니다.
<선거이야기>는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난 책인 것 같습니다. 일관된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도전일 텐데, 그것을 잘 이겨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몹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주민히한테 또 지적을 당했습니다.

뭐 쓸데없이 자꾸 많이 찍냐며~
나는 말도 많고 사진도 많다나~ 흥!!
이게 다 스타일을 따라가는 것이지 원~~
이를테면 저는 다다익선입니다. 스크롤로 쭉 내리시고 시간 남으시면 글도 읽어보시압^^

 

처음에는 이렇게 셋이서 출발했습니다.
우중충한 날씨에 우중충한 사내 셋이서 편의점 앞에서 포즈를 취합니다.
승주나무는 또 잘난척 '전집질'을 하고 있네여~ 

왼쪽부터 승주, 멜기(세덱), (라)주민히(주미힌)ㅋㅋ

호드기를 구성지게는 아니고 칭얼대듯 불렀던 멜기.. 수작부릴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암튼 소리가 나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작년에 해봤다더군요 ㅋ

 

동백꽃의 소품들을 책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책이 좀 젖기는 했지만 운치가 좀 있었지요. 설정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듭니다 ㅎㅎ

 

김유정역에 도착해서 단체사진을 찍는데, 저는 앞으로 휭 도망나와 사진을 찍었습니다. 많이들 왔지요~ 왼쪽에 멜기를 간신히 잡았습니다. 화사한 동백꽃(동박꽃)색 점퍼를 입으신 분이 유인순 선생입니다.

김유정이라는 역의 이름이 참 기분 좋습니다. 2004년에 마을주민 전체가 모여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해요. 격조 있는 마을인 것 같아요. 공자님은 이인(里仁)이라고 했겠죠^^ 근데 뉘신지?

 

 

 

김유정의 이름을 딴 식당이 많았습니다. 결국 답사를 땡땡이치고 유정마을에서 춘천닭갈비와 막국수, 동동주를 기울였습니다. 한잔만 먹어도 벌개지는 그 사내들이 생각나네요^^

 

꼬마농악대의 길트기가 흥겨웠습니다. 개중에는 귀치않은 듯한 사내들도 보였으나 그런 게 올망졸망하고 더 보기 좋지요

 

역시 트로트 청년이라 그런지 멜기는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 씨를 얼른 알아채리고 사진을 훌떡 한장 찍었답니다.

 

김유정상입니다. 내가 아는 김유정은 서간치가 아니라 저잣거리를 굴러다니며 따라지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모습이 표현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마침 유정문학상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작가들이 참 많이 왔습니다. 생각나는 사람들을 찍었습니다. 카메라가 매우 즐거워했습니다.

 

오늘 그를 보니 '익덕'이 떠올랐습니다. 저렇게 벌건데 눈은 부리부리하여 가까이 있으면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도 간만에

 

쑥쓰런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김훈 작가입니다.

 

윤대녕 작가입니다. 생각보다 소탈하게 생기신 아저씨 같았습니다.

 
오정희 작가입니다. 김유정문학상에 올라온 최종 심사작품 3작품 중 본상을 심사했습니다. 지금은 심사평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오정희 작가의 심사평은 앞서 올린 페이퍼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로쟈 님의 댓글을 보니 오정희 작가를 따로 소개하지 않은 듯해 추가합니다^^

 

그 분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제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은희경 작가입니다.

 

지나가는 그 분을 붙잡고 '반협박'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연수 작가입니다.

 

귀한 사진을 하나 잡았습니다. 미소천사 윤성희 작가입니다. 감기조심하세요~~

 

그의 모습을 찍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제 사진기와 마주친 모습은 앵글이 한참을 빗나간 것이었죠. 김애란 작가입니다.

 

전경린 작가입니다. 쑥쓰러운 미소가 그래도 활짝 피었네요~

 

제2회 김유정 문학상을 받은 김중혁 작가와 결선 심사위원을 맡은 김유정문학촌장 전상국 작가입니다.

역시 큰작가의 행사에 갔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작가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심지어는~

 

한컷에 네 명의 작가를 담기도 했습니다. 작가들은 참 예민한가 봅니다. 아까 은희경 작가도 그렇고, 김애란 작가도 카메라의 '살기'를 느꼈을까요~ 자꾸봐~~^^;; 

 

증1리와 증2리에서 준비한 장터는 활기찼습니다.

 

아이들이 김밥에 소머리국밥을 많이 먹겠다고들 다투고 있네요.

 

동네 어르신들도 술 한잔 들이키며 정답게 상에 모여앉았습니다.

 

닭잡이가 시작됐습니다. 닭을 잡아봤어야죠~ 그래서 다들 신기한가 봅니다.

 

 

무섭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그래도 기분은 째집니다~~!!

 

 

 

김유정 문학관에서 귀여운 인형들을 만났습니다. 대개는 봄봄과 동백꽃을 형상화한 것이겠지요. 한눈에 어느 장면인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유인순 교수님과 뒤늦게 합류한 웬디양과 김유정을 떠나는 역에서 한컷 찍었습니다. 유인순 선생님은 저에게 김유정에 대해서 많이 일깨워 주셨습니다. 많은 영감을 얻었고, 김유정에 대한 편견을 녹이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서울에 가자마자 두꺼비를 읽고 저도 전율을 했답니다. 감사합니다.

 

 

 

김유정으로 오던 길의 설렘을 갈무리하고 다시 김유정을 떠납니다. 돌아가도 한동안은 김유정 언저리에서 맴돌겠지요. <소낙비>의 어린 안해처럼 간만에 남편과 정을 바꾸고 나서 희색이 떠도는 것처럼, 어느 때에는 맺적게 생글생글 웃음도 나겠지요. 그런데~

 

많이 놀았는지 참~ 피곤합니다. 안녕 여러분~ 안녕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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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4-2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흣 사진보내줘요 승주나무님~~ ^_^
사진찍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막누르는 컷이 그래도 생생하긴 하죠~

승주나무 2008-04-29 14:14   좋아요 0 | URL
네~ 따로 정리해서 메일로 보낼게요.
이번에는 정말 공개를 자제했습니다.
주민히는 멜기 사진 막 올리던데 ㅡㅡ;

마노아 2008-04-29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활기가 느껴져요. 모두가 생생히 살아있네요. 좋은 시간 보내셨어요. ^^

승주나무 2008-04-29 14:14   좋아요 0 | URL
네~ 힘께 갔으면 더 재밌었을 거에요^^
나중에 기회 만들어서 함 꼭 가보세요~

로쟈 2008-04-2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 작가 옆은 오정희 선생 아닌가요? 김애란씨 옆에는 항상 편혜영씨가 있군요.^^

승주나무 2008-04-29 14:13   좋아요 0 | URL
네~ 로쟈 님.. 오정희 선생도 왔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따로 안 했군요. 사진이 따로 있었는데 추가해서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까지 포함하면 열 명도 더 온 것 같더라구요^^;

순오기 2008-04-29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작가들을 이렇게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니~ 부럽군요.
역시 여기서도 붉은 멜기님이 문을 열고 닫았군요.^^

승주나무 2008-04-30 09:45   좋아요 0 | URL
네~ 붉은 멜기님은 어딜 가도 인기이지요 ㅋ
 

※ 먼저 사진 안에 얼굴이 노출된 분들께 양해의 말씀을 전합니다. 허락 없이 사진을 찍고 이렇게 올린 점 사과드리며, 혹 이 글을 보고 삭제를 요청하신다면 바로 그 부분을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이 사진은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금전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100분토론이라는 분위기와 기록자의 느낌을 담기 위해서 소재로 채택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확실히 mbc는 좀 감각적인 것 같습니다. 연말에 연기대상이나 각종 대상을 해도 mbc가 눈에 띄는 이유는 감각과 기획에 있는 것 같습니다. 100분 토론 스튜디오는 생각했던 것보다 깊고 넓고 높았습니다. 컵도 100분 토론, 그림자 조명도 100분토론, 둘레에는 5개의 기둥에 받쳐진 5개의 너른 방벽에도 100분토론 로고가 보입니다. 맞은 편에도 그런 방벽과 기둥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두 개의 대형스크린으로 이루어진 대형스크린*2와 맞은편 와이드TV가 있었습니다. 모니터링 용이겠죠.

 

 



시민논객의 자리에 모르고 앉았다가 쫓겨났습니다. 자리는 일단 끝쪽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어떤 분께서 김용철 변호사 뒤에 앉으라고 하셨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는 관계로 한쪽 끝 뒷자리에 앉았는데, 이승환 변호사라고 김용철 변호사와 김상조 교수를 모두 상대하는 바람에 화면에 많이 나왔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고개를 자주 숙이고 있었다고 하는데, 뭘 자꾸 적고 있었습니다. 이한유 교수 뒤에 앉은 분들은 봄날에 세번 정도나 나왔을까요 ㅋㅋ

 

이 분이 100분토론 1회부터 지금까지 연출을 맡고 있는 이영배 PD입니다. 토론면접을 이 분이 직접 관장했습니다. 이 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기사에서 많이 언급될 예정입니다^^ 오른쪽의 숫자는 본방 카운트다운입니다. 30분 전에 리허설을 조금 했는데, 패널의 자리에 방청객이 들어가서 마이크테스트 같은 것을 하고 사람들이 픽 웃었습니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활발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더 활발해지는 묘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 날은 손석희 교수의 말대로 9기 시민논객들이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방송이기 때문에 서로 애틋한 감정을 마구마구 분출했습니다. 뒤에 애틋한 사진을 감상하시기를...

 

 
시민논객들이 기분을 내고 있습니다. 마지막 방송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있는데, 몰래 옆에서 찍어서 죄송합니다. 요청하면 즉시 삭제하도록 하지요~ 왠지 안혜경 씨와 닮은 최현정 아나운서와도 한컷 찍었습니다. 남자분들 최현정 아나운서 죽고 못 사는 분 많겠죠ㅋㅋ 이번 회에서부터는 최현정 아나운서의 역할이 좀 늘었습니다. 방송의 처음과 마지막에 브리핑하는 것에서 시민논객과 직접 호흡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민논객 9기는 참 좋겠습니다^^

 

 

드디어 등장한 이 남자.. 먼발치에서 여성분들이 환호했습니다. 내 옆을 둘러싼 분들은 시민논객 지원한 여성분들이었는데, 막 흥분하고 장난 아니었습니다. 저까지 떨리더라구요 ^^

 

오늘의 안건과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100분토론의 안방마님..아니 안방전하 손석희 씨 참 든든했습니다. 마스크보다 더 든든한 건 단연 그의 '목소리'겠죠^^

 

오늘의 하이라이트 김용철 변호사입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100분토론에 묘한 맛을 더했습니다. 좀 엄격한 분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논쟁이 있는 토론 프로그램에는 처음 출연하기 떄문에 토론의 스킬 면에서 약간 미숙함을 보였습니다. 예컨대 중간에 끼어들거나 언성을 높이는 면이 몇 번 포착됐습니다. 하지만 좀 아량 있는 분의 입장에서 보면 삼성 문제의 당사자로서 용기 있게 자리에 선 것을 평가해 줘야겠죠. 그리고 최고의 압권은 이건희 불구속 기소에 대해서 상대측에서 "도주의 우려가 없지 않습니까?" 하는 반문에 "이건희 회장 도망 많이 갔습니다"하고 말을 흘려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이승훈 변호사와는 법정토론에 버금가는 논박을 벌여 김상조 교수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독특한 맛을 내는 캐릭터였음은 분명합니다.

 

 

이 분을 보면 참 고맙기도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참 서글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후마니스트)라는 책을 좀 보죠. 제 말보다 백 배는 더 이를 잘 그려주고 있으니 좀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한화 김승연 회장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고요?" 2007년 4월 31일 오후, 김상조 교수는 자신의 대학 연구실에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폭 문제에 대해 코멘트를 해 달라는 SBS 방송 기자와 전화 통화중이었다. "황제 경영의 문제점이 말 그대로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죠.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기업 밖으로까지 표출된 것 아닐까요..." 휴대전화를 든 김 교수의 설명이 몇 분가량 이어졌다. 통화를 끝낸 김 교수가 <경향신문> 취재진의 취재에 응하려던 찰나, 이번에는 연구실 전화가 울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손님이 와 있어서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습니다." 김 교수는 전화를 끊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MBC 방송 기자라고 했다. 불과 1시간 전에는 KBS 방송기자가 취재차 다녀갔단다. 1시간 사이 같은 사안으로 방송 3사의 취재 요청을 받은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사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내용이죠. 그런데 재벌 문제라고 하면 유독 몇몇 교수들에게만 접촉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학계의 사정이 안타깝습니다."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이면서 사회적인 경제문제, 특히 재벌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몇 손가락 안 되는 학자입니다.

 

 

"자, 10분 전입니다." 방송이 곧 시작됨을 알리는 스텝의 알림입니다. 20분 전, 10분 전, 5분 전, 3분 전, 1분전 계속 알려줘서 방청객들과 패널 등 참여자들이 더욱 긴장하였습니다. 역시 방송은 긴장이 제맛입니다.^^

 

생방을 앞두고 참석자들도 긴장한 눈치입니다. 한 시민논객은 옷매무새를 고쳐매고 있네요. 연출진은 방송이 시작되면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방송이 곧 시작되는 긴급한 상황에서 이런 장면을 찍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모습은 본방 10초 전의 모습입니다^^

 

아니 11초 전의 모습입니다. ^^

방송이 끝나고 손석희 교수가 시민논객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매주 이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방송이라 저도 운을 잘 탄 거죠. 손석희 교수는 시민논객을 무척 아끼는 눈치였습니다. 특히 이번 9기 시민논객은 손 교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시민논객과 연출진 간의 유대관계가 참 좋았습니다. 매우 부러운 관계였습니다.

오늘의 두 주인공입니다. 오늘 100분 토론의 분위기를 통해 삼성 문제가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태풍이 밀려간 이후의 평안한 분위기였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도 표정이 편안했고, 시민논객의 질문이나 토론 분위기도 '뒤풀이'라고 하면 너무 희화화한 표현일까요?

삼성 문제는 6개월 정도 전 국민의 관심과 우려 속에서 도마 위에 올랐는데, 100분 토론 자체도 김용철 변호사의 출연이 아니었다면 너무 익숙한 주제였다고 말하듯이 뉴스가치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2의 싸움과 제3의 싸움판이 벌어지겠지만, 오늘은 그냥 이제까지의 문제들과 의미들을 정리하고 히딩크 감독의 말처럼 와인파티나 하면서 발 쭉 뻗고 누워 게으른 밤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MBC를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제10기 시민논객 지원자 승주나무의 무단 촬영 체험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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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5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04-26 02:13   좋아요 0 | URL
흐뭇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비밀글로 남기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괜히 궁금합니다^^;

Jade 2008-04-2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잘 봤어요. 어제의 열기가 전해지는듯 하네요. 토론 끝나고 못다한 얘기를 풀어놓을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ㅡ 워낙 늦은 시간이라 ㅎㅎ

승주나무님 이러다 시민논객으로 선정 안되시면 아쉬워서 어째요. ㅎㅎ 이런 열정때문이라도 꼭 되셔야 되겠어요~


승주나무 2008-04-26 02:14   좋아요 0 | URL
원래 오늘 발표하기로 했는데, 월요일 오후로 연기됐대요.
이거 사람 마음 오그라들게 하는 게 특기 아냐~ 흥!!
나 안되면 엠비씨 불매운동 할 거야 ㅋㅋㅋ
이산만 보고..

무스탕 2008-04-2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손석희 교수 팬입니다만 정말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으시군요!!
꼭 10기 시민논객에 뽑히셔서 다음에 석희오라버니 뵈거들랑 무스탕이가 많이 응원하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

승주나무 2008-04-26 02: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꼭 10기 시민논객이 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도를 좀 더 많이 해보겠습니다.

거기 가는 체험만도 참 즐거웠습니다 ㅎㅎ

순오기 2008-04-2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제 정말 맛있는 방송이었어요. 킹왕짱이란 말이 어울리는...
난, 앞으로 김상조교수 팬입니다~~~ 승주나무님, 10기 시민논객으로 자주 뵐 수 있겠죠?^^

승주나무 2008-04-26 02:16   좋아요 0 | URL
김상조 교수님~ 참 대중과 사회에 애정이 많으신 분 같아요.
알기 쉽게 차분히 논리적으로 정감 있게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10기 시민논개은 100번째 시민논객이 태어나는 기수라고 합니다.
괜히 긴장됩니다 ㅎㅎ

프레이야 2008-04-26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사진으로라도 보니 좋으네요. 그날 방송은 다른 일로 못봤거든요.
10기 시민논객 승주나무님의 활약은 차츰 기대하면 되는 거죠? ^^
아, 아직 확실친 않은가요. 꼭 되시기를요.
마지막 사진, 시민논객과 손을 꼭 잡고 선 두분, 인상적입니다.
 

나도 이렇게 글을 전투적으로 써야 겠다.
박지원의 글을 좀처럼 볼 시간이 안 된다. 만사 접고 푹 빠지고만 싶다

 

연암 박지원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아마도 병법을 알았던 것인가.

 

   글자는 비유하면 군사이고, 글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은 적국(敵國)이고 전고(典故)와 고사는 전장의 보루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묶어 문장을 만듦은 대오를 편성하여 행진하는 것과 같다. 음으로 소리를 내고 문채(文彩)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조응(照應)은 봉화(烽火)에 해당하고, 비유(譬喩)는 유격병에 해당하며, 억양 반복은 육박전을 하여 쳐죽이는 것에 해당하고, 파제(破題)를 하고 결속하는 것은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사로잡는 것에 해당한다. 함축을 귀하게 여김은 늙은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사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무릇 장평 땅에서 파묻혀 죽은 조나라 10만 군사는 그 용맹과 비겁함이 지난날과 달라진 것이 아니고, 활과 창 들도 그 날카로움과 무딘 것이 전날에 비해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염파가 거느리면 적을 제압하여 승리하기에 충분했고, 조괄이 대신하면 자신이 죽을 구덩이를 파기에 족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군사를 잘 쓰는 장수는 버릴 만한 군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이것저것 가리는 글자가 없다.

 

   진실로 훌륭한 장수를 만나면 호미ㆍ고무래ㆍ가시랭이ㆍ창자루를 가지고도 굳세고 사나운 무기로 쓸 수 있고, 헝겊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도 훌륭한 깃발의 정채를 띠게 된다. 진실로 올바른 문장의 이치를 깨치면 집사람의 예삿말도 오히려 근엄한 학관에 펼 수 있으며, 아이들 노래와 마을의 속언도 훌륭한 문헌에 엮어넣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문장이 잘 지어지지 못함은 글자 탓이 아니다.

 

   자구(字句)의 아속(雅俗)을 평하고, 편장(篇章)의 고하(高下)만을 논하는 자는 실제의 상황에 따라 전법을 변화시켜야 승리를 챙취하는 꾀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비유하자면 용맹하지 못한 장수가 마음속에 아무런 계책도 없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면 견고한 성을 맞닥뜨린 것과 같다. 눈 앞의 뭇과 먹이 꺽임은 마치 산 위의 초목을 보고 놀라 기세가 꺽인 군사처럼 될 것이고, 가슴속에 기억하면 외던 것은 마치 전장에서 죽은 군사가 산화하여 모래밭의 원숭이나 학으로 변해버리듯 모두 흩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짓는 사람은 항상 스스로 논리를 잃고 요령(要領)을 깨치지 못함을 걱정한다. 무른 논리가 분명하지 못하면 글자 하나도 써내려가기 어려워 항상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깨치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면서도 오히려 허술하지 않은가 걱정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항우가 음릉에서 길을 잃자 자신의 애마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과 같고, 물샐틈없이 전차로 흉노를 에워쌌으나 그 추장은 벌써 도망친 것과 같다.

 

   한마디의 말로도 요령을 잡게 되면 적의 아성으로 질풍같이 돌격하는 것과 같고, 한 조각의 말로써도 핵심을 찌른다면 마치 적국이 탈진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저 공격신호만 보이고도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과 같다. 글짓는 묘리는 이렇게 하여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벗 이중존이 우리나라의 역대 과거문장을 모다 열 권짜리 책을 만들고 이름을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여기 수록된 글들은 마치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승리를 거둔 병사와 같은 것이다. 비록 그 문체와 격식은 다르고 정밀함과 조잡함이 섞였으나 모두 승리할 비책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날카로운 창과 예리한 칼날은 무기고같이 삼엄하며, 시기에 따라 적을 제압함은 군대를 지휘하는 묘리에 부합한다. 이를 계승하여 문장을 지을 사람은 모두 이 길을 따르리라. 반초가 서역 50여 국을 정복한 것이나 두헌이 연연산에 전공을 개신 것도 그 방법은 이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무턱대고 옛 전법을 흉내내다 실패하는 수도 있고, 옛 전법을 역이용하여 승리를 얻는 경우다 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전법을 구사하는 것은 또한 그 시점이 중요한 것이지 고정된 전법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 騷壇赤幟引

 

 

 

소단적치인 : 引은 문체의 명칭으로 序와 마찬가지이다. 소단적치라는 책에 붙인 서문이란 뜻이다. 소단은 원래 문단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문예를 겨루는 과거 시험장을 가르킨다. 적치는 한 나라의 한신이 조 나라와 싸울 때 계략을 써서 조 나라 성의 깃발을 뽑고 거기에 한 나라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세우게 하여 적의 사기를 꺽어 승리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전범이나 영수의 비유에 쓰인다. 요컨대 소단적치란 과거에서 승리를 거둔 명문장들을 모은 책이란 뜻이다.

 

   글을 잘 짓는 자는 아마 병법을 잘 알 것이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이란 적국이요, 고사(故事)의 인용이란 전장의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요,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모아서 장(章)을 이루는 것은 대오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 운(韻 운치)에 맞추어 읊고 멋진 표현으로써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는 것과 같으며, 앞뒤의 조응(照應)이란 봉화요, 비유한 유격(游擊)이요, 언양반복(抑揚反覆)이란 맞붙어 싸워 서로 죽이는 것이요, 파제(破題 첫머리에서 시제의 의미를 먼저 설파하는 것)한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요, 함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란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요, 여운을 남기는 것이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무릇 장평의 병졸은 그 용맹이 옛적과 다르지 않고 활과 창의 예리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었지만, 염파가 거느리면 승리할 수 있고 조괄이 거느리면 자멸하기에 족하였다. 그러므로 용병 잘하는 자에게는 버릴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에게는 따로 가려 쓸 글자가 없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만나면 호미자루나 창자루를 들어도 굳세고 사나운 병졸이 되고, 헝겊을 찢어 장대 끝에 매달더라도 사뭇 정채(精彩)를 띤 깃발이 된다. 진실로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면, 하인들의 상스러운 말도 오히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잇고 동요나 속담도 고상한 말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글이 능숙하지 못한 것은 글자의 탓이 아닌 것이다.

 

   대저 자구가 우아한지 속된지나 평하고 편장의 우열이나 논하는 자들은 변통의 임기응변과 승리의 임시방편을 모르는 자들이다. 비유하자면 용맹스럽지 못한 장수가 마음에 미리 정해 놓은 계책이 없는 것과 같아서, 갑자기 어떤 제목에 부딪치면 우뚝하기가 마치 견고한 성을 마주한 것과 같으니, 눈앞의 붓과 먹이 산 위의 초목을 보고 먼저 기가 질려 버리고 가슴속에 기억하고 외우던 것이 모래 속의 원학(猿鶴)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글 잘 짓는 자는 그 걱정이 항상 스스로 갈 길을 잃고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무릇 갈 길이 밝지 못하면 한 글자도 하필하기가 어려워져서 항상 더디고 깔끄러움을 고민하게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얽어매기를 아무리 튼튼히 해도 오히려 허술함을 걱정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오추마가 달리지 못하고, 강거가 겹겹이 포위했지만 육라가 도망가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실로 한마디 말로 정곡을 찌르기를 눈 오는 밤에 채주에 쳐들어가듯이 할 수 있어야 하니, 글을 짓는 방도가 이정도는 되어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친구 이중존이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고금의 과체(科體 과거 시험에서 보이던 여러 문체의 글)를 모아 10권으로 편집하고 그 이름을 『소닥적치』라 했다. 아! 이는 모두 승리를 얻은 병졸이요, 수백 번의 싸움을 치른 산물이다. 비록 그 격식이 동일하지 않고 정교한 것과 거친 것이 뒤섞여 들어갔지만, 각자 승리할 계책을 지니고 있어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가 있다. 그 예리한 창끝과 칼날이 삼엄하기가 무기고와 같고, 때에 맞춰 적을 제압하는 것이 늘 병법에 맞는다.

 

   앞으로 글을 하는 자들이 이 길을 따라간다면, 정원후의 비식과 연연산에 명을 새긴 것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인저, 여기에 있을 것인저! 비록 그렇지만 방관의 거전은 앞사람의 자취를 본받았으나 실패했고, 우후의 증조는 옛법을 역이용하여 승리했으니, 그 변통하는 방편은 역시 때에 있는 것이요, 법에 있지는 아니한 것이다. (法 ⇔ 時)

 

   붓과 먹이 날카롭고 글자와 글귀가 날고 뛴다. 이야말로 문예계의 염파와 이목이라 하겠다.

 

   세상의 이른바 '글제를 고려하여 거기에 꼭 들어맞게 지은 글'이란 것으로 과거를 위한 글을 짓게 되면, 납이 섞이고 철이 섞여서 겉으로는 마치 정련된 것 같지만, 속을 보면 실을 참작해서 관대히 보아줄 곳이 있다. 진실로 충분히 고려하고 충분히 꼭 들어맞도록 하여 한 글자도 겉도는 말이나 두서없는 말이 없게 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득의한 고문 중에서도 상승일 것이다.

 

   주제를 결정하여 글을 엮기를 『울료자』에서 병법을 말할 때나 정불식이 군사를 출동할 때처럼 한다면 당연히 공령문의 상승이 될 것이다. 편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심복하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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