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났다. 세상에ㅠㅠ 이럴 수가. 휴가도 못 갔고, 많이 놀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책도 맘껏 못 읽은 거 같은데. 방학이 끝났다. 월요일 개학 기념으로 방학 중 최고의 이벤트였던 '스피박 실물 영접 후기'를 써보자.




강연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게 되면 앞에 앉는 편이다. 앞쪽에 앉을 때, 가운데 앉는다. 스피박 강연 때도 그랬는데, 앞쪽 두 줄이 초대석이었다. 나도 신청하고 간 건데, 맨 앞줄의 저 초대석은 신청 안 하고 '초대된' 사람들이 온 걸까 궁금해하면서 앞에서 4번째 줄, 초대석 더해서 6번째 줄에 앉았다. 더 앞쪽으로 갈까도 싶었는데, 가운데 쪽이 좋아 그 자리에 앉았다.

무사히(?)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앞쪽, 즉 초대석에 앉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키가 큰 남자, 말 그대로 서백남이었다.

강연도 자주 가지 않거니와, 강연에 참석한 경우에라도 질문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강연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강연을 마친 후에 질문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조금 서운하지 않을까 싶어, 용기 내어 손을 들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비슷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첫 번째 질문자는 그 대학의 교수였다. 질문을 시작했는데, 아... 질문의 배경에 대한 설명 혹은 언급이 끝나지 않는 거다.

그때 갑자기, 스피박님께서 손을 내저으시고는 청중을 향해 물으셨다. "질문이 상당히 긴데.... 여러분, 이 질문 다 이해하고 있는 거죠? 지금, 잘 따라오고 있는 거죠?" 청중은 긍정의 의미로 제각각 웃었다. 행사 진행과 부총장의 축사, 스피박님의 강연이 전부 통역 없이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까지의 과정을 함께한 청중들이라면 그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스피박님의 의도는 명확했다. 질문을 하시오. 기다리고, 기다려도 질문은 등장하지 않았고, 결국 돌아오는 선생님의 역공. Go to the question.

그다음 질문 역시 초대석의 서백남이었고, 역시나 교수였다. 이 교수는 앞 교수의 교훈을 오늘에 되살려 최대한 짧게 질문하려 했으나, 역시나 돌아온 스피박 선생님의 역질문. What is your question?


그 이후의 질문 시간도 마찬가지였는데, 인도에서 공부하기 위해 한국에 온 젊은 여성이 유일하게 스피박님에게 좋은 질문을 했다며 칭찬을 들었다. 서발턴은 아이덴티티로서가 아니라 포지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그에 대한 그람시의 해석 등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질문 그 자체라기보다는 질문하는 사람들의 모습,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의도에 대해서라면 알 수 없다. 외모로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스피박님의 강연을 들으러 온 그 소중한 자리에서 열심히 질문하는 모습과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그 질문들이 얼마나 어이없는가에 대해, 혹은 필요 없이(정확히는 쓸데없이) 장황했는가에 대해 나는 오래오래 생각했다. 세계적인 석학인 스피박님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같이 강연을 들었던 자신의 학생들에게 강렬한 모습을 남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확언할 수 없고,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쓸 수 있는 이유는 이 일이 남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고,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생일 즈음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그 노력이 완전히 실패했다고는 할 수 없는데,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했다. 나쁜 쪽으로 혹은 안 좋은 쪽으로. 이불킥과 머리 쿵쿵의 시간이 얼마큼 지나고, 말복이 지나도 찬바람이 불지는 않았지만, 나는 조금씩 제정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순간에 김건희의 말이 떠오른 건 또 무슨 일일까. 무수한 학력 위조와 의도적 조작이 드러났을 때, 김건희는 말했다.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랬습니다. 아, 그 마음을 알겠는 내 마음. 이내마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픈 마음. 스피박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 강연자들에게 은근한 찬탄을 받고 싶은 마음. 학력을 위조해서라도 돋보이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 이내마음.









자기 증명과 인정 투쟁의 그 지긋지긋한 정글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를 고민하면서 악셀 호네트의 책 두 권을 대출해 왔다. 자세히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목차로 살펴보기에 내가 궁금해하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보다는 '인정투쟁을 정체성 인정을 넘어 물질적 재분배까지도 획득해 내는 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악셀 호네트의 시도'(알라딘 책소개)가 펼쳐진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승자는 에밀리 디킨스와 프란츠 카프카이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로는 주커먼. 과거의 내가 필립 로스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이유를, 나는 이제야 알 것도 같다.










나는 만찬회 같은 데도 참석하지 않고 영화 구경도 가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휴대전화나 VCR나 DVD 플레이어나 컴퓨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계속 타자기의 시대를 살고 있고, 월드와이드웹이 뭔지도 모른다. 선거 같은 것도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대개 밤늦게까지 글을 쓰며 보낸다. 독서도 하는데, 주로 학생 때 처음 접했던 책들을 읽는다. (『유령 퇴장』,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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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8-28 1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저는 강연 잘 다니지는 않지만 가끔 가면 꼭 질문 시간에 남자들은 대부분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가장해서 자기 지식자랑을 하더라고요. 그것도 한 줌의 알량한 ㅋㅋㅋㅋ
그건 한남이나 서백남이나 똑같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절레절레*

단발머리 2025-08-28 10:47   좋아요 1 | URL
서백남 질문하는 거 자주 못 봐서~~ 우아, 말이 많더라구요. 저는 질문을 가장해서 자기 지식자랑하는 남자들도, 그런 여자들도 자주 보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요약하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가 보기엔 뭐뭐뭐가 중요한 거였대요.
그 중요한 거를 강의한 사람 앞에서 ㅋㅋㅋㅋㅋㅋㅋㅋ 우앗 웃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열정적인 강의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직접 뵙고 이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아까 설명해주신 ‘Re-thinking Globality‘에 대해 조금만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5-08-28 1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질문하는 시간이 돌아오면 참 난감하죠. 저도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누구라도 질문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왜 그리 좌불안석인지…누구라도 손을 들어주는 것에 휴..안도하게 되는데 질문의 의도나 수준이 떨어질 땐 또 내가 질문한 것마냥 또 부끄러워지는…질문 시간은 늘 난감한 것 같아요.

강연을 경청하는 저 사진을 보니 스피박 님도 멋있고 대단해 보이시지만 제 눈엔 강연을 들으시는 분들도 참 멋져 보입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집중력이 떨어져 강연을 오랫동안 듣는 것이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좀 피하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저런 자리에 앉아서 듣는 중년들의 집중력을 경탄하게 되었어요. 저 자리 6번째 줄 그것도 가운데 자리에서 집중력 발사하신 단발머리 님!
스피박 님이 칭찬 많이 하셨을 거에요.ㅋㅋㅋ

단발머리 2025-08-28 17:25   좋아요 1 | URL
저는 진짜 질문하는 사람들한테 고맙거든요. 그 질문이 어떻든간에 그 행동 자체는 질문한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요. 그러나 스피박님은 그 핵심을 짚어주셨죠. 질문이란 무엇인가. 당신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어디 가나요, 질문을 말하세요 ㅋㅋㅋㅋㅋ

저도 간만에 참석한 강연인데 큰애가 알려줘서 굳이 ㅋㅋㅋㅋ굳이 다녀왔습니다. 물론 중간 시간에 졸리기도 했구요. 저도 집중력 부족한 중년으로서 😉 아시죠? ㅋㅋㅋㅋㅋㅋ

망고 2025-08-28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엥 왜 통역이 없어요 무서운 강의네요😤 스피박 잘 모르지만 어렵다고 들었는데, 영어로 강의도 들으시고 넘 멋진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25-08-28 22:15   좋아요 1 | URL
제가 이 강연 소식 듣고 나서 들려온~~ 소식에.... 이 강연이 통역 없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비난 + 비판이 많이 있었던 듯 합니다. 처음에는 스피박님을 감히ㅋㅋㅋㅋㅋㅋ 통역하겠다는 교수가 아무도 나서지 않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요.
가서 보니깐 영문학과의 한 파트(비교문학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행사라 그런지.... 돈이 없는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기본 중의 기본인 물이랑 필기구 정도도 제공되지 않은 행사여서요.

영어로 들었지만, 사실 들은 건 아닙니다. 들렸습니다만 들은 건 아니구요. 부끄럽네요 ㅎㅎ

다락방 2025-08-28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무려 스피박 강연에 통역이 없다고요? 무섭...

그리고 그 질문자들 빡치네요. 그런데 니 질문이 뭐냐고 되물어주시는 스피박 님, 역시 스피박 님이십니다. 괜히 단발머리 님과 한글자 같은게 아니네요. (응?)

음, 잘 보이고 싶은거 그거 누구한테나 있는 욕망이잖아요. 그러나 모든 욕망이 그렇듯이 그게 지나치면 오히려 화를 불러 일으키고요. 강연에서 서백남들의 그 질문들처럼 말이죠. 단발머리 님이 이불킥할 만한 행동을 하실 분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지만, 그건 제 생각이고요. 당사자에겐 당사자의 기쁨과 후회와 자책 같은게 있으니까요.

저도요, 단발머리 님. 돋보이고 싶어서 했던 말과 행동들이 잇고, 그래서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그냥 솔직한게 제일 좋다, 서로에게. 라는걸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지나친 어떤 욕망이 잘못 새어나오려고 합니다. 인간은 계속계속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깨달아가는 존재인가 봅니다.

단발머리 2025-08-28 22:15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무서운 강연이었습니다. 왜 불을 끄나요?ㅋㅋㅋㅋㅋㅋㅋ전 아직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불을 끄더라구요. 밑에 노트가 안 보이는 ㅠㅠㅠㅠㅠ

사실 이 페이퍼의 핵심은ㅋㅋㅋㅋ 제 마음의 핵심은 다락방님이 적어주신 바로 그 부분이에요.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요. 쓸데없는 질문을 길게 길게 하면서 잘난척 하고 싶은 그 마음이요.
인간은 계속계속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깨닫는 존재라고 적어주신 그 부분이 그래서 딱 마음에 와닿구요. 제 의문은ㅋㅋㅋㅋ 왜 계속 그러느냐는 거예요. 왜 그럴까.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 양껏 혹은 맘껏. 저는 이게 생존의 욕구 그 자체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직 잘 모르겠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고, 설명하고, 포장하지 않으면, 내 생존의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까요. 아무튼 신기하고 놀랍고 즐거운 밤이었습니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은 밤이요^^

icaru 2025-08-28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단발머리님 진짜!! 찐으로다가 멋지심 ㅎㅎ) 알라딘서재에 백만년만에 (빌게이츠가 어제 유퀴즈에 나왔는데, 추천한 책 검색해 보려고 말이죠) 들어왔다가 댓글 보고 다다다 달려왔습니다!

단발머리 2025-08-28 17:06   좋아요 0 | URL
도대체 어디 계세요? icaru님!!! 🥹🤩😍

icaru 2025-08-28 1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모르지만 인정투쟁과 유령퇴장에 반색을~~~ ㅎㅎㅎ 유령퇴장은 단발머리님의 선한 영향력으로 5~6년전에 읽었고, 인정투쟁은 예전에 사놓기만 한 책이 있어라우~~

단발머리 2025-08-28 17:05   좋아요 0 | URL
icaru님의 다정하고 용기 팍팍 댓글 있어야 제가 신나서 훌라춤을 추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쓸 수 있단 말입니다!
제발 플리즈 자주 좀 오소서!!!!!!!!!!!

젤소민아 2025-08-29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강연이네요. 부럽습니다!

단발머리 2025-08-29 09:17   좋아요 0 | URL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막 방송국에서 카메라 들이밀고 그런 강의는 아니었지만...
네, 멋진 강연이었고,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젤소민아님^^

거리의화가 2025-08-29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경험하고 오셨네요. 강연을 듣거나 하면 별별 사람이 다 있더라구요ㅎㅎ 주로 질문하는 사람만 하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가봅니다^^; 덕분에 저도 스피박을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이야기도 듣네요.

단발머리 2025-08-29 09:24   좋아요 0 | URL
네네. 어디가나 똑같고, 동서고금 남녀노소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소~~ 젊은 사람 혹은 아이들의 질문이 오히려 발랄하고 진지하고 진솔하고 그런 거 같아요.

사실 스피박님 후기라서 스피박님 이야기 많이 써야하는데 말이지욬ㅋㅋㅋ 제가 딱 한 번 먼발치로 뵌거라 단정해서 말하는게 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분인데도, 뭐랄까요~~ 그 웃음소리가 딱 동네에서 들어봤을법한 그런 웃음소리였어요.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과하지 않고요. 강의안을 읽다가 설명이 필요할 때는 안경을 벗으셨는데요. 특정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실 때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약간 분위기가..... 진짜 대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하는 듯한, 강연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에게 개념이나 예시를 설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튼, 뭔가, 오늘 이거 하나는 꼭 배워가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구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반복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좋은 시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헤헤!

그레이스 2025-09-09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참,,,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먹고,,, 많이 공부해도,,, 인간은 여전히 어떤 부분에서는 치기 가득하고, 서툴러요^^

단발머리 2025-09-13 09:17   좋아요 1 | URL
헤헤헤.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그런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부족하고, 치기 가득하고요. 티가 안 나면 좋을텐데요 ㅋㅋㅋㅋㅋㅋ 어떻게든 티가 나네요^^
 


『The Surrogate Mother』를 읽었다. 읽는 시간은 참 즐거웠는데,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들고. 아무튼 그랬다. 이때쯤 한 번 만나주는 맥파든 랭킹.

쉽게 싫증을 내는 편이라 한 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지는 않는데, 프리다 책은 연거푸 읽어 가고 있다. 무엇보다 재미있어서인데, 안 좋은 점이라면 이어서 읽다 보니 각 작품의 주인공들이 서로 섞여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 각각 다른 캐릭터지만, 성격, 행동, 특히 외모가 비슷해서 한 사람으로 수렴된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이 리스트는 어디까지나 내가 좋았던 작품 순이기는 한데, 살짝 돌아보니 첫 번째 책을 제외하고는 최근에 읽었던 책들이 앞쪽으로 배치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란 건 단순히 '최근에 읽은' 책이란 말인가.











1. The Housemaid

"Who has the time?"

I bite back any kind of judgemental response. Nina Winchester doesn't work, she only has one child who's in school all day, and she's hiring somebody to do all her cleaning for her. (5p)

프리다 맥파든 월드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다. 표지를 특히 칭찬하고 싶은데, 작품 전체의 느낌을 잘 살려내었다. 콩쥐처럼 니나에게 당하는 작품 속 화자가 아니라, 팥쥐처럼 못된 니나에게 감정이입하는 나를 지켜보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2. The Surrogate Mother

프리다 맥파든의 9번째 책이다. 표지 선호도는 하우스메이드 1권에 버금갈 정도였는데, 읽으면서 제일 힘들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사라/아브라함/하갈'의 구조가 그대로 차용되었다. 이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다락방님의 보석 같은 페이퍼 '하갈이 오만하다는 말입니까?'(https://blog.aladin.co.kr/fallen77/16509349)를 참고하시면 되겠다.

이 책은 이 기본 구조 속에서 '사라'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아이를 그렇게나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어렴픗이 알 것도 같아, 그러니까 정확히는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아 괴로웠다. 남편의 아이를 가진 여자, 자신과 비슷한 용모이지만 자신보다 열 살이 어린, 젊고 아름다운 임신한 여성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 역시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아 심기가 불편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맴도는 질문은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의 물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어떻게, 사랑이.... 사랑은 변한다. 사랑은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마음도 변하고 외모도 변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장내 세포들도 한 달 반에서 두 달 사이에 새로운 세포로 변한다. 변한다. 결국에는 변한다.

그의 마음이 변할 것인가에 대해 화자가 가진 두려움과 걱정. 사랑도 변하고, 우정도 변하고, 신뢰가 사그라들고, 그리고 나 자신도. 막을 수 없는 엄연한 사실과 겹겹이 쌓여가는 진실들, 그리고 우주적 법칙 앞의 나. 답은 역시나 '받아들임'이던가.











3. The Locked Door

읽는 중에 마음이 제일 간절해졌던 작품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부족함이 있고, 말할 수 없는 각각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만, 노라가 의지하고 비밀을 털어놓을만한 딱 한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이 소설의 끝이 해피엔딩이길 간절히 바랬다.











4. Never Lie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You don't have to say it back."이라고 남주가 말해서 좋았다. 실상은 과도한 열정과 집착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되 강요하지 말 것. 고백하되, 강제하지 말 것.











5. The Wife Upstairs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말을 빼앗긴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어떻게 되찾아야 할까. 말하기를 부정당한 사람은 어떻게 그 권리를 찾아올 수 있을까. 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은 현재 언어를 빼앗긴 사람의 기록이다. 일기는 강하다. 일기는 힘이 쎄다.














6. The Housemaid's secret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사람, 함께 살고 싶은 사람에게 고백할 수 없는 내 비밀. 말할 수 없고, 고백할 수 없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다.











7. The Coworker

Caleb believes I'm a better person than I am. He can never know the truth. (<The Coworker>, 353/361)

나를 믿어주는 그 사람을 위해, 나를 더 나은 나로 믿고 있는 그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8. The Housemaid is watching

이웃집 여성의 과감한 플러팅이 과한 면이 적지 않다. 핫한 남편과 사는 여성의 괴로움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9. The Housemaid's wedding


결혼한다. 하우스메이드가 결혼한다. 저기 저 멀리 수상한 사람이 보이고... 하우스메이드는 결혼한다.


책장을 한참 뒤지고 나서 샐리 루니의 『Beautiful World, Where Are You』가 집에 없다는 걸 발견했고, 알라딘과 교보 구매 내역을 확인해 보니, 없는 게 아니라, 구매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백 년 뒤를 약속한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광화문 교보에 잠시 들렸는데, 아하하. 그 책 없는 거 실화인가요. 국내 최대 규모의 서점에서 샐리 루니 책이 없다니요. 샐리 루니 자리에 다른 책만 있고, 내가 찾는 책 없다니요. 터덜터덜 돌아서기 직전에 한 바퀴 돌아보는데, 사이좋게 모여있는 프리다 맥파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프리다 맥파든 이어서 읽는 사람 나밖에 없는데. 아, 프리다 책이 이렇게 전시된 거는 광화문 교보에서 처음 본단 말이지요. 나를 위한 것입니까. 진정, 이건 나를 위한 것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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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8-20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정도면 사랑 아닙니까?!

단발머리 2025-08-20 10:54   좋아요 1 | URL
참사랑 ㅋㅋㅋㅋㅋ😘😍🥰💕💙

수이 2025-08-20 11:03   좋아요 0 | URL
반사 😝

단발머리 2025-08-20 11:18   좋아요 0 | URL
😳😨😢🥺😤

수이 2025-08-20 11:26   좋아요 1 | URL
귀여운 반응이군요 흠 그렇다면 어디 한번?!

단발머리 2025-08-20 11:27   좋아요 0 | URL
성공이다! 😆🤩😎

수이 2025-08-20 14:07   좋아요 0 | URL
교보 달랑 1권 방금 없어졌네 🥵 인기가 어마무시

단발머리 2025-08-20 14:35   좋아요 0 | URL
알라딘 페이퍼백 글씨가 작다고 독서괭님이 알려주셔서 하드커버 주문하려니 9월 1일에 온대요. 혹시나 하고 아마존 갔더니 1.91달러라고 해서 일단 킨들에 넣어두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 샐리 루니 이야기하는거 맞죠? ㅋㅋㅋㅋㅋㅋ

수이 2025-08-20 15:37   좋아요 1 | URL
샐리 루니는 아예 없음 ㅋㅋㅋ

바람돌이 2025-08-20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우스 메이드 결혼한다구요. 설마 결혼이 호러인건 아니죠? 표지의 저 핑크빛 심상찮아요. 요즘 맥파든 인기 좋으니까 오늘부터 빌어봅니다. 빨리 번역 돼라
ㅎㅎ 저는 맾차은 책 번역된 건 다 읽었어요. 그래서 원서 보는 단발머리님 막 부럽지만 그게 또 영어 공부하고싶을 정도로 부럽지는 않습니다. ㅎㅎ
우리나라 교보문고에 원서가 저렇게 쫙 깔린것도 이채롭네요.

단발머리 2025-08-21 15:41   좋아요 1 | URL
결혼은 호러가 아닌데, 식장 가는 길에 ㅋㅋㅋㅋㅋㅋ 이런 저런 일들이 있더라구요.
영어 공부하고 싶을 정도로 부럽지 않다고 하시니 무척 분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바람돌이님의 다종다양한 도서 선택과 고퀄 페이퍼가 많이 부럽단 말입니다!!!

책읽는나무 2025-08-20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교보에 원서가 저렇게나 많이 있나요?
번역서만 세 권 읽은 저로선 아직 순위를 매기기 힘드네요. 그래도 1위는 저도 역시 저 파란색 표지 책이에요. 근데 제가 첨 읽었을 당시 별 네 개를 줬더라구요. 다섯 개로 고치고 싶은데 지난 일이라 수정하는 게 구차하여 놔뒀네요.ㅋㅋㅋ
이상하게 읽을수록 별점이 자꾸 높아지는 맥파든의 소설들이에요. 그래도 마음 속 1위는 파란색 하우스 메이드.ㅋㅋㅋ
근데 저 핸디맨이 3위까지 올라가 있어 놀랍네요? 아직 저 책은 안 읽었는데 기대가 됩니다.^^
그나저나 하우스메이드가 결혼을 한다구요?
정말요? 와…축하한다고 전해 주….근데 표지를 보니 축하할 일이 아닌 것도 같고?🙀
결혼한다는 저 책이 제일 궁금합니다. 번역해 주세요. 단발 님.^^

단발머리 2025-08-21 15:49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1위도 파란색 표지군요. 반갑습니다! 읽을수록 별점이 높아지는 신기하고 놀라운 맥파든 월드! <핸디맨>은 읽으면서 저는 그 여주가 너무 안 됐더라구요. 쓸쓸한 외톨이.... 그래서 3위의 위업을 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의 저 자리가 원서 자리입니다. 제가 교보 갈 때마다 한 번씩 훑어보는데 제가 마지막으로 갔던 게 6월이거든요. 그 때 맥파든 소설 매대에 깔린게 한 권도 없었는데, 이번에 보니 이렇게나 많더라구요. 맥파든 대풍년입니다!

다락방 2025-08-21 0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이 하우스 메이드 읽으실 때만 해도 프리다 맥파든 전작.. 하실 줄 몰랐는데요. 그나저나, 아니 교보에 프리다 맥파든 무슨일입니까. ㅋㅋㅋㅋㅋㅋㅋ프리다 맥파든 난리났네요. 제가 몇해전에 외국에 있는 서점 갔을 때 딱 저렇게 콜린 후버가 있었는데요. 아, 저 싱가폴에서 큰 서점 갔는데 거기에도 프리다 맥파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앤드류한테 프리다 맥파든 사줄까, 하다가 아니야 잭 리처 사주자 하고 잭 리처 사줬습니다. 아, 맞다 싱가폴 서점에 리 차일드도 많아요!!

그나저나 하갈과 사라 이야기라니, The Surrogate Mother 겁나 읽고 싶네요!! (사버려?)
저도 어제 싱가폴 아마존으로 샐리 루니 주문했습니다, 단발머리 님!! 이제 열심히 책 일겠어요!! 라고 다짐하지만, 오늘 하루종일 수업 들었더니 에너지 고갈입니다. 저는, 괜찮은걸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25-08-21 17:30   좋아요 0 | URL
저는 맥파든 전작을 할 생각을 없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맥파든 전작 하게 되겠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교보에 프리다 맥파든 대풍년입니다. 한국에서도 콜린 후버 많았잖아요. 그제 보니 두세권 밖에 안 보이더라구요.
앤드류에게 잭 리처는 참 좋은 선택일거 같아요. 많이 먹고 운동 안 해도 건강하고 튼튼한 잭 리처!

The Surrogate Mother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샐리 루니도 이북으로 샀어요 ㅎㅎ
내내 수업 듣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어제는 제육볶음이었고, 오늘은 뭘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어공주>를 검색했다. 내가 찾는 건 '인어공주'를 각색한 책 아니고, 안데르센판 '인어공주'. 제일 판매가 많이 된 책이 있어 책 소개를 따라 내려가는데, 헐. 여기에서 만나는 <시크릿가든>.












재벌 총각과 가난한 집(혹은 평범한 집) 처자의 만남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용이 일반적이었던 때에, 김은숙 작가는 인어공주 서사를 가지고 온다. 백화점 재벌(현빈)은 가난한 스턴트우먼(하지원)에게 네가 마음에 든다고, 사귀자고 말한다. 그렇게 신나게(?) 사귀고 난 뒤에는 인어공주가 그랬듯 거품처럼 사라져 달라는 조건을 앞세우면서 말이다. 하지원이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자, 현빈은 그럼 자기가 인어공주가 되겠다고 말한다. 네 곁에 머물다가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겠다고, 인어공주처럼.

갑자기 인어공주를 찾아보게 된 건, 그 밤에 보았던 발레 <인어공주>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인어공주는 다른 세계로 넘어온다. 물이 아닌 땅의 세계, 물고기가 아닌 인간의 세계, 지느러미가 아닌 다리의 세계. 걸을 때마다 칼로 베이는 듯한 고통을 겪게 되지만, 인간 세상에 동화되기 위해 그들 중 일부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어색함은 어린아이의 행동으로 이해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그 모든 것은 왕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인데, 왕자 역시 인어공주를 그런 식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언어 없이' 표정, 몸짓 그리고 음악으로 전달되는 인어공주의 애달픔. 왕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처절한 노력. 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 그를 구해준 사람이라 짐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

인어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이 된다. 인어로 돌아가기 위해 왕자를 죽이느니, 차라리 자신이 죽기로 선택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사람마다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생명의 은인인 인어공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썰미 없는 왕자를 원망하거나, 왕자를 구하지 않았음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이웃나라 공주를 원망하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미움이 강고해질 때, 이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발현될 수 있다. 반대로 그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왕자를 구해 주었던 그 순간에 자리를 비웠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거나, 바닷속 마녀와 잘못된 계약을 맺은 자기 자신을 원망할 수도 있다. 내부로 향하는 원망과 후회는 우울로 수렴될 수 있다.

희생 말고 다른 답은 없을까. 자기희생 말고 다른 방식은 없을까. 나 자신을 다 불태우지 않고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내가 없어지지 않으면서, 그에 대한 내 사랑을 완성할 수는 없을까. 무위의 삶 이면에 사랑을 품고 있을 수는 없을까.


우리 동네, 우리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가 난리라는 <KPop Demon Hunters>(케데헌)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진우는 루미에게 '미안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서, 마지막의 그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은 뭐라 말할까. 그 말은 '사랑해'가 아니라, '미안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은 '사랑해' 혹은 '고마워'가 아니라 '미안해'일 거라고.

루미를 보호하기 위해 귀마의 공격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고, 자신의 영혼을 희생해 루미의 꿈을 완성한 진우의 최후는 희생일 수밖에 없는가. 완벽한 소멸 이외에 이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정말,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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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7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어 공주도 슬픈데 단발머리님 글도 슬퍼요. 저는 죽을 때 제가 먼저 죽는다면 남편한테 미안해 말고 고마워 하고 죽을래요.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남편이 저한테 잘하게 채찍질을 야물딱지게 막 해야겠어요
ㅎㅎ

단발머리 2025-08-19 20:36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도 고마워~~ 하고 싶거든요. 하지만, 더 오래사는 거 어떠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님, 우리 오래오래 살아요! 천세만세 만만세!!!

다락방 2025-08-17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을 제가 아직 보지 않았다는 소식 전해드립니다. 그런데 끝장면이 저렇다고요? 반드시 봐야겠어요! 그러나 싱가폴에서 저의 넷플릭스가 재생되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 저거 보러 한국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때로 어떤 선택은 딱 두 가지에서 주어지잖아요. 이거 할래, 저거 할래? 인어공주의 선택도 그래요. 왕자를 죽거나 내가 죽이거나. 꼭 그 방법 밖에 없는 걸까요? 왕자도 안죽이고 나도 살아가는 그런 방법은 없는걸까요? 저는 왕자를 죽이기도 싫지만 저도 죽기 싫거든요.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걸까요? 그걸 좀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찾아보면, 열심히 찾아보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단발머리 2025-08-19 20:57   좋아요 0 | URL
저도 일부러 찾아봤어요. 외국에서 하도 난리라고 해서요. 저는 재미있게 잘 보기는 했는데 외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지점에서 ㅋㅋㅋㅋㅋㅋㅋ 이 현상이 참 신기하게 느껴지기는 합니다.

저도 왕자도 안 죽이고 저도 안 죽고 싶기는 한데... 만약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인어공주가 왕자를 안 사랑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왕자를 구해줬다 해도 안 사랑했으면 되는데..... 그를 만나기 위해 인간 세계로 오지 않았으면 되잖아요. 바닷속 마녀와 다리와 목소리 교환하는 비합리적 계약을 맺을 필요도 없구요. 그러니깐 이 모든 괴로움의 시작은 사랑인 것입니다.

아...... 사랑.... 러브...

망고 2025-08-17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우는 오백살 넘게 살았으니 호상. 루미는 잘생긴 또래 만나서 다시 예쁜 사랑하길...ㅋㅋㅋㅋㅋ
죄송해요 이 아름다운 글에서 이런 몹쓸 댓글만 달아서요🤣

단발머리 2025-08-19 20: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님의 귀한 말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럼요. 갈 사람은 가야하죠. 진우씨 잘 가~~ 인사하고, 루미는 새로운 인생 시작하는 걸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5-08-18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최근에 초등학생들이 캐더헌에 나오는 노래를 떼창하는 장면(그것도 영어로) 을 보고 허걱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에 페이퍼로 적을 예정입니다.
시크릿 가든, 내용은 좀 그랬지만 재미는 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에 절대 미안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미안한 일이 없어요 ㅎㅎ
아마 고마워라고 할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5-08-19 20:59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동영상 본 거 같아요. 시카고 버스 동영상 보셨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주 난리입니다. 흡사 분위기가 엘사 열풍과 비슷해요. 4세에서 8세까지의 모든 여자 아이들이 엘사였던 때가 있었잖아요.

미안한 일이 없어서 고마워~~ 라고 하실거라니 페넬로페님 너무 근사합니다. 저도 더 노력(?)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마워 파로 가보겠습니다.

책읽는나무 2025-08-18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케데헌 봤었는데 ‘미안해‘라고 말 했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어 조금 당황스럽습니다.ㅋㅋ
안데르센 동화집 저 책 가지고 있는데 시크릿 가든에 저렇게 인용됐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구요. 고백 대사를 읽으니 기억 날 듯, 말 듯 하긴 합니다만…ㅋㅋㅋ
헌데 단발 님 마지막 두 문단을 읽으며 잊고 있었던 기억은 정확히 떠오릅니다.
마지막 말 ‘미안해‘ 말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부모님 두 분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직접 듣진 못했지만 엄마가 아빠한테 그동안 섭섭하게 했던 일들 있었다면 다 잊어달라고 미안했다고…그리고 고맙다고 말을 남기셨다고 아빠한테 전해들었어요.
아빠는 저한테 고맙다고 한 번씩 말씀을 하셨어서 그게 마지막 말이라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도 사랑해라는 말은 떠나보내는 사람이 하게 되는 말이 아닐까 싶어요.
떠올려 보건대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말은 고맙다, 미안하다 그 말이 맞아요. 단발 님의 통찰에 존경심이 이네요.^^

단발머리 2025-08-19 21:17   좋아요 1 | URL
예전에 제가 어디선가(출처가 기억이 안 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 들었던 말인데요. 식물에게 좋은 말, 나쁜 말 하는 실험을 했는데 ‘사랑해‘라는 말보다 ‘고마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식물의 긍정적인 반응이 더 확연하게 나타났다...... 라고 그랬던 거 같아요.
사랑해‘보다는 ‘고마워‘가 나은 것 같고요. ‘미안해‘ 보다는 ‘사랑해‘가 나을 것 같습니다. 미안해 / 사랑해 / 고마워

책나무님, 미안해요. 책나무님, 사랑해요. 책나무님~~~~~~ 고마워요!!!

책읽는나무 2025-08-19 22:18   좋아요 0 | URL
미툽니다.^^🤭😍

단발머리 2025-08-19 22:22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
 
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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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수험생에게 냉동밥 먹인 엄마니, 말 다 했다. 엄마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눅 드는 건 1인분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면에서가 아니라, 엄마를 기능하는 나를 돌아볼 때, 나는 1인분이 못 된다. 중간치에도 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툭하면 미안한 일들이 생기고, 가슴 철렁한 일들이 자주 벌어진다.

12월 3일 계엄의 밤에서부터 이어진 일기장에서 나는 여기 황정은의 문장이 너무 애달팠다.

'한강진 대첩'과 '키세스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침뉴스를 통해 그들을 보았다. 서울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사람들 몸을 덮은 은박 담요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전날처럼 또 누군가는 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런 모습으로 밤을 보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다시 서로를 돕고 살피며 밤을 보낼 줄은.

남태령 이후로도 이런 사건을 목격했다는 것은 이 나라 구성원으로서 내가 누리는 복일까.

도대체 이 마음을 어떻게 글이나 말로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미안하고.

놀랍고.

고맙고.

그리고 미안하고.

고맙고. (87쪽)

나 역시 남태령의 소식을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들었다. 체념과 탄식을 넘어서서 눈앞의 벽과 같은 장애물에 강인하게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다시 한번 놀랐다. 대단한 사람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계엄의 밤이 지나고 그다음 날 아침, 전날처럼 출근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마다 종이 울리고,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평소와 똑같았다. 종이접기와 오리기를 도와주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다. 일상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계엄 이후 식구들이 모여 앉아 그 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황당함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제일 심각한 사람은 학교에 자주 가지 않는 큰애였다.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더라면 학교를 다니지 못했을 거라고 큰애가 말했다. 당연히, 당연히 그렇게 되었을 거라 말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높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불법적인 계엄에 저항할 것이고, 국민에 대한 통제와 억압의 시작점은 대학이 될 게 분명하니까. 대학에 다니던 아이는 학교를 마치지 못할 것이 뻔했고, 대학에 가려고 공부하고 있는 아이는 어느 대학에든 갈 수 없을 수도 있었다. 예상하고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멈춰버리는 상황. 그런 상황이 몇 년이나 지속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몇십 년을.

비상계엄 뉴스를 듣고 집에서 입던 옷에 슬리퍼를 신고 패딩을 걸치고 여의도로 달려 나간 사람들이 대략 오천 명에서 만 명 정도라고 들었다. 그 사람들이 역행하려는 이 나라의 운명을 돌려세웠다고 생각한다. 남태령의 바람을 몸으로 막아낸 사람들이야말로 이 나라가 가진 혁명의 기운을 현실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은박지로 어깨를 두르고서도 활짝 웃는 그 사람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출근을 하고, 아이들 밥을 먹이고, 아픈 친구를 만나 위로하는 이 모든 일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자신의 일상을 넘어 기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했기 때문이다.

1인분이 넘는 사람들.

3인분을 감당한 사람들.

50인분을 어깨에 맨 사람들.

100인분에도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지켜냈다.

황정은의 일기에는 원고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내가 해야 할 일, 해야만 하는 일을 어떻게든 이루려 애쓰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자세이다. 그 와중에 표현되는 미안함과 고마움. 미안한 마음 그리고 고마운 마음.

그러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충분히 표현될 때, 오래오래 기억될 때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발 지상주의자의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세상은 이렇게 자신의 몫에 더해 조금 더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져 간다고 생각한다. 춥고, 불편하고, 아프고, 괴롭지만. 그 일을 감당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일상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희망이라는 걸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단어를 쓰고, 문장을 다듬는 소설가 황정은의 이 일기 역시 그런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다시 고마워하는 순간들의 기록. 이 순간을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기록한 작가 황정은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식구들 아침을 간단히 차려주며 어제 있었던 '광복 80주년 전야제'를 듣고 보았다. 나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가사나 그 장중함 때문에도 놀랐지만 멜로디가 특히 놀라웠다. 단어로, 문장으로, 투쟁으로, 긴 밤의 고뇌로 기록하는 순간들. 가사로, 멜로디로, 오케스트라로, 그리고 목소리로 모아지는 한 가지.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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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5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은 일기 읽으면서 수많은 고마움을 다시 느꼈습니다. 그리고 작은 소리지만 이렇게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기억하고 또한 아직인것들을 살피는 작가도 고마웠구요. 전 어젰밤에 광복절 전야제를 tv생중계로 봤는데요. 드론이 독립운동가들 얼굴을 만들어낼 때 좀 울컥했어요.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성독립군인 남자현님이 나올 때는 조금 더 감격했고요.
얼마 안되는 시간에 이 정도 준비를 한 사람들의 노고와 광복절이 진짜 국민의 축제에 장이 될수 있게 해준 지난 시간에도 감사했습니다

단발머리 2025-08-15 15:56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저는 황정은 작가의 고맙고, 그리고 미안하고, 고맙고..... 이 부분 읽는데 딱 제 마음이랑 같은 거에요. 이 순간을 기록한 작가가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매일 우리를 경악하게 했던 뉴스들이 일기에 나올 때, 와... 우리가 이런 시간을 겪어왔구나. 체포 영장 가지고 가서도 범인을 잡아오지 못할 정도록 법치가 무너졌구나... 그런 순간들이 기억나더라구요.
저는 아침에 다 보지는 못하고(중간에 광복절 경축식 보느라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야제 돌아보는데 참 좋더라구요. 카메라에 잡히는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것도 좋았구요.

책읽는나무 2025-08-15 1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답니다.
며칠 전에 받았어요.
띠지 문구를 읽고서 그날 내가 뭐하고 있었나. 를 떠올리며 조금 부끄러웠었어요.
다음 날 뒤늦게 알고서 며칠 잠을 못 잤었던 기억도 났었구요.
지금 이 시간. 그때 그 사람들 덕분에 내가 편하게 앉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단발머리 2025-08-15 15:58   좋아요 2 | URL
저는 그 밤에 계엄이 해제되고 나서 바로 잠들었는데, 나중에서야.....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제가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알게 됐어요. 그 날 밤의 수많은 우연과 도움, 하늘의 도움에 대해서, 저는 요즘도 자주 생각합니다.
그 날의 기록을 책으로 쓰는 것만큼 그 기록을 읽는 것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읽어야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우리 같이 읽어요, 책나무님^^

감은빛 2025-08-17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밤에 수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리에서 또 각자의 집에서 이게 착오나 거짓이기를 바랐었죠.

당시 국회가 일터였던 한 지인은 공교롭게도 그날 밤에 술에 취해 저에게 연락을 했었는데, 제가 피곤하다고 나가지 않았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과 술을 더 마셨는데, 계엄 소식에 그 취한 상태로도 택시를 타고 국회로 가서 담을 넘었다고 무용담을 들려주더군요. 특공대원들이 건물로 진입하는 장면들이 뉴스에 반복해서 나오면, 저기 뒤쪽에 자신이 있었다고 말하면서요.

누군가는 국회로 바로 달려갔지만, 또 누군가는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고 말리는 가족 때문에 차마 뿌리치고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보느라 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마음이 계엄을 무너뜨린 것이겠죠.

단발머리 2025-08-19 21:21   좋아요 0 | URL
네, 감은빛님! 그 밤에 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걱정하고 염려했죠.

저는 ‘에휴~~‘하면서 잠이 들었는데, 나중에 뉴스를 통해 그 밤이 얼마나 위험했던지 듣게 되었습니다. 비상 계엄이 해제된 뒤에도 군에서는 여전히 비상 경계 근무를 서면서 계엄 관련 인사 조치가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큰 위기를 우리가 지나쳐 왔는지 생각할 때마다 다시 가슴을 휴.... 쓸어내리게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다행히 그 위기를 지나온 것에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Never Lie (Paperback)
Anonymous / Poisoned Pen Pres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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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맥파든의 8번째 책이다. 한글책은 원서와 같은 제목 『네버 라이』이고, 소개와 줄거리는 <알라딘 책소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줄거리와 그 전개, 범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이 이야기를 써 보자.

기본 구성은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서술된다. 화자는 트리샤와 에이드리엔, 두 사람이다. 트리샤와 이선이 커플이고, 에이드리엔과 루크가 다른 커플이다.

화자 중 한 명인 에이드리엔은 현직 의사인 작가의 생각과 감정이 깊이 투영된 인물처럼 보인다. 특별히 정신과 상담과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이해와 교감, 갈등과 감정의 대립이 대화 속에서 실감 나게 표현된다. 응, 맞아~ 응, 그랬구나~ 정도의 적당한 응대와 이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추적, 그에 대한 판단과 이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의사가 수련된 사람이어야겠구나 싶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말하는 사람의 슬픔과 절망, 분노와 후회의 감정이 일정 정도 해소될 수 있겠지만, 심각한 성격 장애와 트라우마에 대해서라면 전문적인 치료와 처치가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책을 읽다가 중간 중간 멈춰서 '범인이 누구일까' 생각한다. 나는 스릴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무서운 책, 무서운 영화를 '무조건적으로' 꺼리는 사람이다. 범인이 누구일까. 여러 번 멈춰서 생각해 봤지만, 내가 예상한 사람(들)은 범인이 아니었다. 지난 책에서도 범인을 맞추지 못했던 나는 이번에도 예상이 '틀렸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차근히 찾아보려 했다. 추리 능력의 부족함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고정적인 '피해자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에게 잠재적인 가장 큰 위협은 남성이다. (정확히는 '가까운' 남성). 남성에게 잠재적인 가장 큰 위협 역시 남성이다.("강도, 방화, 폭행 등으로 사망한 사건을 제외하고 살인 사건 피해자만 따지면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 또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78%에 이른다" - <한겨레 21>, 1393호) 단순한 통계조차 믿지 않는 특정 성별(남성), 특정 연령대(2, 30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테지만, 프리단의 문장은 사실이다. 남자 친구를 갖게 된다는 건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과 동시에 삶의 위협 요소일 수도 있다.

동시에 젠더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젠더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자원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젠더는 전부가 아니고, 전부일 수도 없다. 여성을 피해자의 자리에만 위치시킨다면, 지난 3년간 이 나라를 실제적으로 지배했던 김건희를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그간의 과정에서 김건희가 보여줬던 적극성, 능동성, 그 폭발적인 활동성조차 무능력한 윤석열 때문이라 말해야 하는가. 여성은 항상 피해자인가. 약자는 항상 선한 존재인가. 범인을 맞추지 못한 스릴러 입문자의 머릿속에는 질문이 계속 맴돈다.

여성 집단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압박과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 외모에 대한 통제, 출산 강요, 엄마의 역할에 대한 강제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되는 이 불합리함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념'의 실천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성별'의 문제로만 이해하면 그 본위(?)을 벗어난 여성과 남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놓쳐버리게 된다. 개별적 존재를 집단의 일부로만 치환하지 않으면서도 개별적 존재의 특별함을 구분하는 섬세함과 정밀함이 필요하다.

이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도착했다. 에이드리엔의 말이다.


사랑을 생각할 때 내가 자주 떠올리는 지점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무력감'에 대한 부분이다. '사랑에 빠졌다'라거나 '마법 같은 사랑' 혹은 '열병 같은 사랑'이라는 문구가 쉽게 허용되는 이유가, 나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밀당'은 '사랑'이라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감정의 변화와 의지의 변환, 행동의 추동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 격동의 진폭을 스스로 조정하거나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유일한 구원은, 그녀가, 그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의 사랑에 응답해 주는 것이다. 이건 강제할 수 없다. 강요할 수 없고, 청원할 수 없다. 혹 어떤 사람이 그러한 방식으로 사랑을, 마음을, 열정을 획득했다면 그는 계속해서 그 진실성을 의심할 것이다. 원하는 건, 자발적 사랑이다. 그녀의 선택, 그의 확언. 그것만이 필요하다.

환자들에게 '아이 러브 유'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는 에이드리엔에게 루크가 말한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울음을 터뜨린 에이드리엔에게 루크가 말한다. 내게 똑같이 말해주지 않아도 돼.

나는 이 장면이 좋았다. 루크가 에이드리엔에게 'I love you.'라고 말해줘서가 아니라, 'You don't have to say it back.'이라고 말해줘서 좋았다. 그녀 앞에 자신이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해서 좋았다. 사랑으로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겠다고 해서 좋았다. 부담 갖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져서 좋았다. 진지한 사랑을 부담감 없이 표현하려고 해서 좋았다. 심장을 내놓고서 내 사랑은 죽을 때까지 너밖에 없어,의 사랑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렇다고, 내 마음이 그래, 그렇게 말해서 좋았다.

어제는 말복이라 시어머니랑 오리 백숙을 먹고, 백화점에 가서 엄마 양산을 사고, 딸롱이가 신청한 왕김말이 어묵과 악어 떡볶이를 샀다. 휴가 가지 않는 여름이 오히려 더 시원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팥빙수를 먹으며 1초간 했다.

(잭 리처, 귀 막아주세요.)

프리다 맥파든이 내겐 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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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8-11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리다 맥파든의 책을 이렇게 멋지게 분석하여 글을 써주셔 감사하네요. 잠시 출타 중이신 그 분을? 대신하여 제가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ㅋㅋㅋ
프리다 책 세 권을 읽고 듣고 했는데요. 그 중 유일하게 범인을 못 맞춘 책이 이 책이었네요.
단발 님의 글을 읽다 보니 저도 너무 젠더에 빠져 있었구나. 깨달았답니다. 그래서 범인을 확인한 순간 정말 깜짝놀랐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프리다 맥파든 이 작가 뭐야?!가 되어가지구선…ㅋㅋㅋ
여름엔 프리다 맥파든을 읽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ㅋㅋㅋ (잭 리처 님 표정.🥺ㅋㅋ)
오리 백숙도 신의 한 수네요.
그리고 악어 떡볶이는 뭘까? 생각하다가…
빙수 사진 보고 헙! 했네요.
속이 시원해집니다.
휴가를 몇 년째 가지 않은 제가 공감 많이 하고 있어요.ㅋㅋㅋ

단발머리 2025-08-11 10:32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감사의 말씀에 심오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책나무님 범인 너무 잘 맞추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딱 한 권 맞췄단 말입니다! 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진짜 저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의심해볼 예정입니다 ㅋㅋㅋ 오리 백숙은 아이들은 같이 안 먹으려고 해서요. 어른들만 먹게 되네요. 전 커피와 쿠키만으로도 만족하는데 아… 팥빙수는 참을 수가 없네요. 리처한테 미안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이번 여름은 맥파든과 함께! 😍

바람돌이 2025-08-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맥파든 책 중에서도 결이 좀 다른 책인거 같아요. 사건의 전개야 식상할정도로 클리세 투성이인데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완전히 반대로 비틀어버리니까 어 이거 뭐야 이러게 된다죠. 너무 생뚱맞아서 저는 좀 별로였는데 앞으로 프리다 맥파든이 이런 캐릭터도 좀 더 다듬으면 완전 다른 추리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도 하게 됐어요. 뭐 지금 나오고 있는 소설도 신선하긴 했지만요. ㅎㅎ
원서로 읽는데 속도가 장난 아니신데요. 얼마전에 핸디맨 읽으셨잖아요. 와 이건 한국어 속도랑 비슷한 거 같은데 능력자셨군요. ^^

단발머리 2025-08-11 10:24   좋아요 1 | URL
저는 범인을 잘 못 맞추거든요. <하우스 메이드> 한 번, 그 때 딱 한 번 맞췄습니다. 이번에는 혹시 이 사람, 혹시 저 남자? 이러면서 머리 굴려 봤는데 틀렸구요. 저는 프리다가 너무 과하지 않아서 좋거든요. 많이 폭력적이지도 않구요. 킨들 연장해서 더 읽어볼 용의가 ㅋㅋㅋ용의가 있습니다.

핸디맨은 조금 전에 읽었던 내용을 정리해서 올린 거라서요. 속도가 빠르지도 않을 뿐더러 전자책이라 휙휙 넘겨버리네요 ㅋㅋㅋ자세한 내용 토크 금지입니다🫣

헬가 2025-08-11 1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멋져요 집중한 포인트가 콱 들어오네요 인사한번 안드렸지만 님의 글이 올라오면 늘 눈 빤짝이며 읽기시작하는 1인 애독자예요 글 너무 가끔말고 자주 써주셔요~~~~

단발머리 2025-08-11 21:51   좋아요 0 | URL
헬가님! 반갑습니다^^
눈 빤짝이며 읽는다고 해주시니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기특한 결심을 하게 되네요ㅎㅎ 저도 자주 쓸테니 앞으로 자주 뵈어요!

건수하 2025-08-11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다 맥파든이 점점 궁금해지는 중입니다.

얼마 전 제가 재미있게 읽은 <Love Hypothesis> 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더군요.
You don’t owe me anything :)

팥빙수가 맛있어보입니다-

단발머리 2025-08-11 21:58   좋아요 1 | URL
프리다 맥파든이, 제게는 전혀 새로운 세계라 신나게 읽고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는다는게 이런 걸까요? 건수하님? 저 문장은 챕터 17에 나온 문장인데 ㅋㅋㅋㅋㅋㅋㅋ이런 이야기를 건수하님과 나눌 수 있어서 마냥 즐겁구요. 제가 예전에 이 책의 보너스 챕터 이야기 페이퍼로 썼는데 기억나실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 책 사서 읽었을 때는 없었구요, 최근에 발간된 책에는 보너스 챕터가 들어가 있는데, 그건 애덤 버전에서 쓴 에피소드잖아요.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위의 문장과 어울린다고 생각해 한 번 적어 보겠습니다.

He doesn‘t want anything in return.
She doesn‘t need to fall for him, because he loves her enough for the both of them.

올해 저의 발견과도 같은 폴바셋 팥빙수, 맛있습니다^^

건수하 2025-08-11 23:14   좋아요 1 | URL
앗 제가 읽은 책에는 그 보너스 챕터가 없던데… 궁금해집니다. 한국어 번역본에도 그 보너스 챕터는 없겠죠? 전 보답이 없는 사랑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애덤은 그래서 오래 표현하지 않고도 잘 버틸 수 있었나봐요.

단발머리 2025-08-12 07:39   좋아요 1 | URL
건수하님, 굿모닝! 아, 건수하님과 이 책 토크 계속 하고 싶네요..... 자중하려 했으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 오른쪽 분홍색 동그라미 속에 ‘Now with Bonus Chapter‘라고 쓰인 책에 들어 있더라구요. 저도 예전에 산 거라 보너스 챕터가 없습니다. 한국어 번역본도 제가 읽었을 때는 없었고요. 근데 지금쯤은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이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오디오북이에요. 오더블의 그 성우, 특히 올리브를 맡은 여성분의 목소리와 그 톤이 저는 참 좋더라구요. 운전할 때랑, 수건 접을 때 틀어놓기도 하구요.
제가 요기 이 페이퍼,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6407979 에 자세히 적었는데요. 이 책의 오디오북을 사고 이북을 사고 킨들앱에서 플레이를 누르면, 두 가지가 연동되어서, ‘집중듣기‘ 방식으로 영어 텍스트를 들을 수 있더라구요.
오더블은 예전에 한 달 무료가 있었거든요. 혹 저처럼 애덤을 좋아하신다면 이런 방법으로 애덤을 가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건수하 2025-08-12 08:18   좋아요 1 | URL
전 애덤보다 올리브가 좋더라고요. 집중듣기… 리스닝에 무척 약하지만 올리브 목소리가 좋다니 시도해보고 싶네요 ^^

icaru 2025-08-28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톰 크루즈가 나오는 잭 리처 시리즈 영화들도 단발머리님 페이퍼에서 슬쩍 보고 골랐더랬는데 ㅋㅋ 저 단발머리님 발자국 찾기 하는 중

단발머리 2025-08-28 17:20   좋아요 0 | URL
저 여기 있어요 ㅋㅋㅋ발자국 찾지 마시고 ㅋㅋㅋㅋㅋ어디 가지 마세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