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루니의 화제작 『노멀 피플』보다 그녀의 데뷔작 『친구들과의 대화』가 더 좋았던 이유는 오로지 주인공 때문이었다. 나는 좀처럼 아니 도저히, 『노멀 피플』의 코넬을 좋아할 수 없었는데, 물론 마리앤에게도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화살은 주로 코넬에게로 향했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좋았던 건 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처음 샐리 루니를 읽었을 때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혼란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제일 정확하게는 당혹스럽다고 해야겠는데, 닉에 대한 내 감정이 그랬다. 폭력적이고 타인을 억압하는 남성은 모두가 싫어한다. 그건 여성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을 '남성적 성향'이라고 찬양하고 숭배하는 문화에서는 물론 다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닉은 너무 가냘픈 그대여서, 유약하고 다정하며, 배려심이 가득하지만... 아, 생각만 해도 지친다. 프랜시스가 그랬다. 당신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 식물은 건강하고, 깨끗하고, 활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초식남 닉은 그냥 매가리가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는데 그렇게나 소극적이었다. 먼저 키스해 주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는 남자였다. 근데 내가 프랜시스가 되어 그렇게나 매가리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니, 소설을 읽는 내내, 다 읽은 후에도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구야.









아름다운 세상으로 돌아와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한데, 그래도 한 번 써보자. 아일린과 사이먼이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네가 우리를 만나러 파리에 올 예정이었는데 내가 그 뭐랄까, 네가 비행기를 타는 거며 뭐 그런 일에 대해서 걱정을 했어. 그러자 나탈리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 이런, 아빠의 어린 딸이 아무도 없이 혼자군. 뭐 그 비슷한 말이었어. 웃겼어. 내 말은 그녀가 농담한 것 같다는 거야.

그 순간 아일린이 두 눈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나도 얘기 하나 해줄게. 어느 날 밤 당신이 문자를 보냈는데, 마침 에이든이 내 전화기 바로 근처에 있어서 대신 그 메시지를 확인해 줬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한테 화면을 보여주면서 '네 아빠야'라고 하더라. (183쪽)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5살이니 20대 초반이라면 나이 차이가 크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제든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빠 같은' 이라니. 꺼림칙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이먼은 아일린을 그렇게 대했다. 아일린의 남자친구도, 사이먼의 여자친구도, 사이먼이 아일린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에 sexual한 의미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아일린의 언니 롤라가 사이먼을 험담할 때 말했듯이 사이먼은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존과 자기 보존, 그리고 보호의 의지는 당연히 sexual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생존의 조건, 생명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Lucy by the sea』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루시는 인터넷 쇼핑을 못하나요. 루시는 쿠팡 아이디가 없나요. 루시는 앱카드가 없나요. 아니요, 아닙니다, 아닌데... 윌리엄은 그런 사람이다. 루시에게 필요한 걸 기억해 두었다가 사 주는 사람이다. 윌리엄이 주문해 준 겨울 코트가, 가디건이, 운동화가 맘에 든다고 크게 소리쳐 부르는 루시에게 '손 씻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물건을 담아둔 상자를 루시 대신 밖에 내다 놓는 사람이다.

젠더가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은 양태는 다른 어떤 사회적 양식보다 견고하고 은밀하다.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는 말이 주는 힘은 공기처럼 무게감 없이, 저항감 없이 우리를 지배한다. 사람들에게 여성다움 혹은 남성다움은 '규범'으로 작동하고, 그러한 규범은 자연스레 '이상화'된다. 나는 지금, 샐리 루니가, 혹은 샐리 루니마저도 '강한 남성', 나를 보호해 주는 남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고 말하는 중이다. 나는, 아일린과 사이먼이 '아빠 같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 편안하게 마주 보며 웃는 장면에서 그렇게 느꼈다. 아일린을 걱정하는 사이먼, 아일린이 혹시 어려움을 겪을까 안절부절못하는 사이먼.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들으면서 적잖이 놀라는 사이먼. 사이먼은 그런 남성이길 원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며, 아일린은 그런 사이먼의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의 보호를, 간섭을, 침입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지점은. 이것이 아일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이먼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다.

다시 루시에게로 간다. 이 장면은 예전에 페이퍼로도 한 번 썼다. 코비드 상황에 비교적 안전한 바닷가 외딴 마을로 이사를 간 윌리엄과 루시. 간만에 두 사람이 함께 마트에 갔는데, 주차장에 혼자 남아있던 루시의 자동차 번호판을 보고 어떤 여자가 '뉴욕 사람들은 뉴욕으로 돌아가라!'라며 욕을 한다. 황망해하는 루시와 달리 윌리엄은 별다른 말이 없다. "윌리엄, 나는 누가 나한테 소리지르는 게 싫어!" 루시의 말에 윌리엄은 자기한테 소리지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답한다. 며칠이 지나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루시가 윌리엄에게 묻는다. 당신은 심지어 그 여자가 내게 소리를 지른 뒤에도 왜 나한테 다정하게 하지 않는 거야? 윌리엄이 답한다.



나는 윌리엄이 루시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내놓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루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혹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게 될 불이익이나 불편, 혹은 바로 이전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경우까지라도. 윌리엄은 단지 그녀가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윌리엄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코비드 때문에 루시가 죽게 된다면,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살기 위해 루시를 살리려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파스텔 연분홍 펜으로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내가 너를 위해 뭔가 해준 적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거든.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너한테 내가 필요하다고, 너는 나 없이는 안 된다고 느끼고 싶었어. 내 말 이해하겠어? 내가 쉽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네. 내가 너를 위해 해준 것보다 네가 나를 위해 해준 게 정말 훨씬 더 많다는 뜻이지. 그리고 네가 나한테 더 필요했어. 너한테 내가 필요한 것보다 나한테 네가 더 필요해. 그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잠자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틀린 말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무척 어렵거든. 다시 한번 그는 한숨 쉬듯 숨을 내쉬고 자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녀는 그를 계속 지켜보면서, 말없이 귀 기울여 듣기만 했다. 마침내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겁먹은 거 알아. 그리고 네가 우리 우정에 대해 한 모든 말, 친구로 지내고 싶을 뿐이라는 말도 진심이었을 수 있어. 만약 진심이었다면 받아들일게. ... (381쪽)

사이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네게 내가 필요한 것보다, 내게 네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렇게 느꼈다. 다만.... 다만, 그는 너무 소극적이었고, 느렸고, 그리고 정중했으며. 이 모든 사이먼'적' 요소는 아일린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보호하고자 하는 남성과 겹칠 때, 그 '이상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어질 때, 그 남성이 그 수행을 성실히 해나갈 때, 나는 가끔 서로를 구원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이먼이 원하는 대로 된 것 같지만, 그건 아일린을 위한 것이고. 아일린이 원하는 그것이 바로 사이먼이 원하던 그것이었으니까. 그 수행을 허락한 사람은 아일린이니, 최후의 승자는 아일린인 것으로. 사이먼도 그 결과를 좋아할 테다.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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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09-11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전 닉 별로였는데…… 단발머리님이 좋아하신다니.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가…..

사실 두 권 읽었는데 아직 샐리 루니의 매력을 잘 모르겠어요.

루시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읽고 더 읽어야지 하고선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그래서 이 글은 나중에 와서 다시 읽기로…

단발머리 2025-09-13 07:34   좋아요 0 | URL
저도 닉을 좋아하는 제가 싫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깐 내 마음이 왜 이러냐구요ㅋㅋㅋㅋㅋㅋ

어느 지점에서 샐리 루니가 탁 저를 건들때가 있더라구요. 전 <노멀 피플> 읽고 한동안 안 읽어야지 했는데, 이번 책은 마음에 들어요.

나중에 다시 꼬옥~~~~~~~ 오셔야 됩니다!!

다락방 2025-09-11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단발머리 님의 이 페이퍼를 읽으니 사이먼과 닉이 비슷한가 싶기도 하네요. 물론 저는 닉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먼이 무조건 이긴다고 보지만 말예요. 뭐에서 이기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매력?

‘생존과 자기 보존, 그리고 보호의 의지는 당연히 sexual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생존의 조건, 생명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라는 단발머리 님의 이 구절이 너무나 인상깊은데요, 이건 저도 좀 생각을 깊게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생존과 자기 보존 그리고 보호의 의지는 당연히 sexual 한것인가.. 음, 잘 모르겠어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건 계속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처럼 아일린을 돌보는 것을 사이먼이 좋아했고 또 사이먼이 그러는 것을 아일린이 좋아햇다는 것 자체가 이들을 이어주는 거겠죠. 저는 아일린의 마음을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사이먼을 사랑하고, 이 책속의 사이먼이라면 사랑하지만, 오늘 이 페이퍼를 읽고 누군가 저를 아버지처럼 돌보아주려고 한다면 어떨것인가, 를 떠올려보면, 음, 지금 한 명이 떠오르는데, 영 별로였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건 아마 그가 그라서 그랬던걸지도... 흠흠.

저는 그동안 샐리 루니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느 캐릭터도 좋아한 적이 없었어요. 저한테 매력 있는캐릭터가 아니었죠. 이번 소설에서의 사이먼을 제외하고는요. 그런데 노멀 피플에서 코넬은 성장하는 캐릭터였다고 생각해요. 전 그 지점에서 노멀 피플이 좋았어요. 처음의 코넬과 나중의 코넬은 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거든요. 이번 소설에서도 그래요. 어릴 적의 펠릭스는 형편없었죠. 지금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그 때 형편없었다는 걸 인지하고 죄책감을 갖는 어른이 되었잖아요.

오늘 이 페이퍼 읽으니 저도 어쩐치 친구들과의 대화를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단발머리 님이 좋아하신다하니 닉에 대해서도 좀 달리 보일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책은 읽으면서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 ㅠ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는데, 어쨌든 저 방에 있고 저 방에 있고 그런데 유부남하고 섹스하는 장면 같은거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요 ㅠㅠ

소중한 페이퍼 감사합니다. 이 책은 참, 계속 사람들을 글쓰게 하는 책이네요!!

단발머리 2025-09-13 08:01   좋아요 1 | URL
섹스를 성행위를 넘어서는 범위로 볼 수 있다는게 제가 읽었던 ‘섹스‘ 관련 책에서의 결론인데, 이걸 제가 잘 표현을 못하겠네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뭔가를 하게 하고, 하고 싶게 하는(욕망, 욕구, 정동을 포함한) 그 모든 걸 섹스라는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고 보는 거거든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그 사람을 발견했을 때 (이건 그 사람이 그걸 알아챘느냐 혹은 알아채지 못했느냐와 상관 없이요)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동요. 저는 이거 자체를 섹슈얼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동성일수도 이성일 수 있겠지요. 제가 앨리스의 말을 그대로 가져올게요.

그러니까 섹스란게 대체 뭐야? 나한테는 실제로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지 않아도 그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해 성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평범한 일이야. 아니, 더 중요한 것은, 심지어 그들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상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그렇다는 거야. 이것은 섹슈얼리티에 성행위에 관한 것이 아닌, 어떤 ‘다른‘ 개념이 포함된다는 것을 암시해. 우리의 성적 경험의 대부분이 이런 ‘다른‘ 개념의 영역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이 다른 개념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내가 펠릭스에게(그나저나 나를 육체적으로 건드린 적조차 없는 이 사람에게) 느끼는 것,우리의 관계를 성적인 관계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113쪽)

저는 옆방에서의 유부남과의 섹스는 진짜 별로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압도적인 잘생김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았다. 닉의 얼굴은 아주 일반적인 의미에서 잘생겼다. 깨끗한 피부, 두드러진 뼈대, 약간 부드러워 보이는 입. 하지만 미묘하고 지적인 표정이 잘생김을 압도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와 눈이 마주치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닉이 나를 바라보면 나는 그에게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과의 대화>, 58쪽)

다락방 2025-09-13 09:45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님이 읽으셨다는 그 섹스 관련 책에 대한 공유 부탁드립니다. 저도 읽고 깨닫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제가 이미 가진 책일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단발머리 2025-09-13 10:49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여러권이긴 한데요.
일단 <섹스할 권리>, <왓이즈섹스> 그리고 <에이스>요. 푸코의 <성의 역사>도 맞기는 한데 제가 거기까지는 닿지 않고요 ㅋㅋㅋ 지금 외출하는 길이라 돌아와서 간단 페이퍼 써볼게요. 🤗

바람돌이 2025-09-11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시는 인터넷 쇼핑을 못하나요? 쿠팡 아이디가 없나요?라는 대목에서 막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집 남편이 다 못하고 다 없어서 쿠팡 아이디오 제걸로 폰에 넣어주고 이제 제발 나한테 사달라고 하지만했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뭘 사든지 저한테 바로 문자옵니다. ㅎㅎ 우리집에서는 윌리엄이 하는 역할을 제가 하는거같군요. 그럼 아빠 마음 아닌 엄마 마음? ㅋㅋ

샐리 루니의 작품을 이 한 작품 밖에 안 봣는데 어쨌든 이 소설에서는 강한 남성, 여성을 보호해주는 남성이라는 젠더 역할 고정에 빠져있다는데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 앨리스와 펠릭스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돈도 더 잘 벌고 더 똑똑한 앨리스지만 결국 앨리스를 구원하는건 펠릭스거든요. 심지어 앨리스와 아일린의 갈등에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중재자의 역할을 하죠. 펠릭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펠릭스는 넷의 관계에서 가장 객관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합니다. 다 모자란데 약물중독자인 펠릭스는 안 모자라요. 심지어 약물중독인데도 말이죠.

어쨌든 연애나 결혼이라는 것은 사실 둘 사이의 문제이고 둘이 캐미가 어떻게 맞느냐 하는거죠. 서로가 맞으면 뭐가 문제겠어요. 아마 아일린과 사이먼은 저 사이먼이 돌봐주는 역할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한 둘이 행복할겁니다. 하지만 저런 관계를 사실 저는 예전에 한번 본적이 있는데요. 문제가 생기더라구요. 아이요. 아들이 크면서 엄마를 똑같이 지가 돌봐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아빠와 자기를 동격화해요. 그게 다른 생활에서는 굉장히 타인을 자기 생각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걸로 나타나더군요.

뭐 산다는게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사이먼과 아일린은 아직은 어울리고 둘이 행복해져서 일단은 다행입니다. 그 뒤는 뭐 둘이서 알아서 할 문제죠. 그쵸.

단발머리 2025-09-13 10:51   좋아요 0 | URL
<노멀 피플>에서도 앨리스, 펠릭스와 비슷한 구성의 남녀가 나오거든요. 거기에서도 여주가 남주보다 돈이 많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니깐요. 연약하고 유약한 여주는 남주의 접근을, 친밀함을, 사랑을 기다리죠. 앨리스는 대놓고 내가 널 좋아한다... 너에게 빠졌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저는 나름 펠릭스라는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는데, 좀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안 그래요. 그게 20대의 치기인지 20대 남성의 특징인지 저는 잘 모르겠고요.

저는 사이먼이 아일린을 돌봐주는 역할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 아이 낳고 아일린 돌변! 사이먼 왈. 나는 왜 맨날 혼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구성, 이런 미래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너무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같이 읽고 같이 쓰는 기쁨을 바람돌이님과 나누는 이 시간이요!!!

다락방 2025-09-13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영어로 아직도 절반 밖에 읽지 못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려드립니다..

단발머리 2025-09-13 08:07   좋아요 0 | URL
저는 반 정도 왔는데요. 일단 이메일 저도 건너뛰기로 결정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했음을 굳이 알려드립니다.

다락방 2025-09-13 09:44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님의 이메일 건너뛰기에 저도 편승함을 굳이 알려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9-13 10:50   좋아요 0 | URL
제가 다락방님을 따라 이메일을 건너뛰고 있음을 재차 확인드립니다🫣

독서괭 2025-09-24 21:52   좋아요 1 | URL
😂😂😂😂😂 저도 읽지않고 보기만 했음을 고백합니다…

독서괭 2025-09-24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가리없는 닉 ㅋㅋㅋㅋㅋㅋㅋㅋ 빵 터졌네요 ㅋㅋㅋㅋㅋ 매가리없..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9-26 18:50   좋아요 1 | URL
매가리가 없어요, 그 사람이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내가 좋아했으 ㅋㅋㅋㅋㅋㅋㅋㅋ 매가리 하나 없는 닉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이 책을 샀다고 생각했다. 혹은 집에 이 책이 있다고 생각했다. 8월 초에 독서괭님 서재에서 글자 크기 관련 이슈가 있어서, 하드커버로 사야겠다 생각하고 장바구니에 책을 담아 두었더랬다. 그러다가, 아마존에서 이북을 저렴하게(1.91달러) 판매하기에 킨들도 가지고 있겠다, 그냥 구입해 버렸다.

다락방님의 페이퍼를 읽고 난 후에,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중..... (이북도 슥슥 넘겨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 쪽씩이지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어느 페이지에선가 느껴지는 이유 있는 기시감.

이 문장을 읽었던 것이다.

이 책을 샀던 것이다.

이 책은 집에 있었던 것이다.

아닌데...... 이틀을 찾았는데, 분명 없었는데. 알라딘 구매 내역에도 교보 구매 내역에도 없었는데. 비밀 창고 <사 놓고 아직 안 읽은 영어책>에도 없었는데... 그럼 이 책은 지금 어디에.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하여, 지난 주말은 땀을 뻘뻘 흘리며 책장 뒤쪽까지 샅샅이 뒤져보는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찾. 았. 다. 이 책을. 내 책을. 샐리 루니를. 뷰티풀 월드를. 이 책을 보고 나서야, 나는 이 책을 교보문고에서(알라딘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표지), 책을 너~~무 많이 사 주는 친구가 선물해 준 책임을 알게 됐다. 그랬다. 그랬던 것이다.


이북이랑 나란히 두고 사진을 한 장 찍는다. 킨들이 꼭 컬러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표지는 컬러가 예쁘고. 힘겨운 숨박꼭질 끝에 책을 찾아냈지만, 내가 읽는 책은 이 책이다.









이 페이퍼 왜 썼냐면.... 다음 페이퍼 진지할 예정이어서. 그래서 썼다. 그래도 좋아하는 문단은 하나 적어 두자. 너무 많은데.... 제일 좋아하는 문단은. 아니 그 중에 하나는 여기.

꼭 물에 빠진 생쥐 같아. 가자. 그는 자매가 함께 걸어가게 했다. 그는 말없이 자전거 바퀴만 쳐다보면서 기도했다. 하느님, 저 애가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제가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간절히 바랍니다. (290쪽)

새벽의 기도, 잠들기 전의 기도. 하나님, 저 애가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세요. 저 애의 삶을 축복해 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 제게 주시려고 하는 좋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 그걸 저 애에게 주세요. 저 애에게, 그 좋은 것을 주세요.


저 애에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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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9-10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술을 부르는 문장이네요. 세상에, 저렇다니까요.
(인용해주신 문장에 새벽 세시가 떠올랐는데 이건 나중에 기회되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음 페이퍼, 진지한 다음 페이퍼를 내놓으시죠. 기다리기 초조합니다. 얼른 내놓으시죠.

단발머리 2025-09-10 17:31   좋아요 0 | URL
초조한 심정이야 십분 이해갑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바쁩니다. 일단 청소기 한 판 돌리구요.
커피 한 잔 때리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오늘은 안 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10 17:52   좋아요 1 | URL
네?? 오늘은 안된다고요? 😭

단발머리 2025-09-10 19:52   좋아요 0 | URL
네네네~~ 차분히 마음 가라앉히시구요. 저 좀만 더 사이먼 만나고요. 아일린하고 진지한 대화 좀 나눠보고요. 앨리스 왜 그런지 좀 들어보고. 펠릭스하고도 시간 좀 보내 보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5-09-10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멀피플만 읽었는데 좋은 인상을 못 받아서 이 작가는 다 패스했는데 요즘 서재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한권 더 읽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어요 😆

단발머리 2025-09-10 19:53   좋아요 1 | URL
저도 노멀피플은 별로였어요. 지금 이 책이 좋아서 ㅋㅋㅋㅋㅋㅋㅋ참 좋아라 하고 있습니다.
망고님도 컴온!!

바람돌이 2025-09-10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가끔 생기는 일이죠. 자책하지 마세요. 책을 사다보면 뭐...
사이먼의 사랑이 저 때부터 꼬이는거죠. 저건 사랑하는 남자의 기도가 아니라 아빠의 기도 아닌가요? ㅎㅎ

단발머리 2025-09-10 19:54   좋아요 1 | URL
아주 잘 되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이먼의 사랑이 저 때부터 꼬이죠 ㅋㅋㅋㅋㅋㅋ 근데 저도... 남사친 아닌 애인 아닌 어떤 사람을 위해 저렇게 기도했다는 거 아닙니까? 엄마도 아니면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5-09-10 21:14   좋아요 1 | URL
오 그럼 이번 페이퍼에는 엄마기도 얘기도 나오는겁니까?

단발머리 2025-09-10 21:28   좋아요 0 | URL
아니요~~~~~~~ 엄마는 날라리 신자라서 기도 많이 못 하는 엄마입니다. 주님, 용서해 주소서~~
이번 페이퍼의 주인공은 사이먼이죠. 아니, 아일린. 아니 사이먼. 아니네요. 아일린.........

다락방 2025-09-10 21:34   좋아요 1 | URL
아일린이든 사이먼이든 둘다이든 어서요, 어서!!

단발머리 2025-09-10 21:37   좋아요 0 | URL
워워~~ 싱가폴은 8:36분이죠?ㅋㅋㅋㅋㅋㅋㅋㅋ우린 9:36분이에요~~ 일단 기다려 보시고요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9-24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제 봤네요.! 무려 네권의 책이 좌르륵? ㅋㅋㅋ 다 달라서 보는 맛이 있군요 ㅎㅎ 단발님에게도 산책어플이 필요합니다. 있어도 안 쓰는 다.. 님이 있다는 건 안비밀.

단발머리 2025-10-16 09:57   좋아요 1 | URL
에궁 ㅋㅋㅋㅋㅋㅋㅋ 이 댓글 지금 봤어요. 알라딘에서 놀다가요 ㅋㅋㅋㅋㅋㅋ 산 책 어플 뭐 쓰시는지 알려주고 가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기에다 놓고 가세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10-16 11:36   좋아요 0 | URL
산책어플은.. “산책”어플 쓰는디요 ㅋㅋㅋ
 
















샐리 루니를 두 권 읽었다. 첫 번째는 『친구들과의 대화』였고, 두 번째가 『노멀 피플』이었는데, 『친구들과의 대화』를 더 좋아한다. 첫 번째 샐리 루니를 읽고는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 여주와 남주를 본 적이 없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두 번째 샐리 루니를 읽고서는 불쾌하다는 감정이 주요했기에 한동안 샐리 루니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했다. 세 권의 샐리 루니 중에 나는 이 책이 제일 좋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을 것 같다. (나는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둥지 비기 전에 먼저 떠나왔으나 빈둥지 증후군 유사 증세를 호소했던 사람답게 아일린의 엄마 메리와 아일린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딸에게 자신의 인생을 토로하는 엄마에 대해 쓸 수 있겠다. 앨리스가 펠릭스에게 아일린을 소개하는 장면도 그렇다. 예쁘다는 것에 대해 앨리스가 아일린에 대해 설명하는 문장 사이사이에서 느껴지는 뾰족함에 대해서도.

앨리스와 아일린 두 사람의 이메일에 대해서도 쓸 수 있겠다.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앨리스와 아일린은 두 사람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의 내면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말을 건다. 서로에 대한 편지는 물음과 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두 사람의 말은 동시적이지 않고, 당연히 그 사이에는 시간성이 존재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내가 좋아했던 알라딘의 '먼 댓글' 기능이 생각난다. 질문에 대한 답이고, 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겠지만, 결국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나 그 이해를 통한 '합의된 의견'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제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혼자 말할 뿐이고, 듣는 사람은 후에 듣고, 나중에 듣는다.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일부만 이해한 경우라도 매우 희귀한 경우다. 들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중요한 건 오직, 말하는 것이다. 특히, 1976년, 플라스틱 상용화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나는 작가가 이렇게 전면으로 나서서 특정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는 소설을 좋아한다. 그려내는 배경, 전하고자 하는 감상이 모두 작가의 것이겠지만, 작가의 생각을 읽을 때 특히나 좋다.

하지만 제일 먼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역시나 아일린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영어로 챕터 9까지 읽었고, 한글로 앞부분을 다시 읽었다. 한글책으로는 챕터 10까지 읽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아일린은 챕터 10까지의 아일린이다.





그가 그녀를 보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오자, 그녀는 의자를 발로 차며 그가 자신이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 평생에 딱 한 사람이라고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식구들은 내가 당신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더니, 이제 당신은 가려고 해요.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반쯤 열린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일린, 그런 말 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내가 약속할게. 너랑 나는 우리의 남은 평생 동안 친구로 지낼 거야. (39쪽)

내가 이해하는 아일린, 더 정확히 챕터 10까지의 아일린에게 사이먼은 전부다. 성을 sex로만 이해하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 할 때, 15살의 아일린에게 사이먼은 가장 성적인 존재다. 이때 15살의 아일린은 사이먼을 상대로 로맨틱한 감정을 상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의 아일린, 15살의 아일린에게 사이먼은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유일한 이유가 되는 사람이다.

5살 혹은 6살의 자아라면, 내가 좋아하는 동네 오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커서, 오빠랑 결혼할 거야. 하지만, 15살의 자아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오빠를 좋아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가지 말라고도 말할 수 없다. 15살의 자아는, 15살처럼 말한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아일린의 이 절박한 외침에 사이먼이 응답한 필요는 없다. 그는 모범생답게 모범답안을 말한다. 너랑 나는 우리의 남은 평생 동안 친구로 지낼 거야. 사이먼의 이 말이 아일린에게 위로가 되었을지 혹은 상처가 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예언이 되었을지 저주가 되었을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냥 아일린의 간절함이 뭔지 알 것 같다. 15살짜리가 '내 평생에'라고 말할 때, 15살의 치기로 여겨질지도 모를 이 상황 속 아일린의 그 마음을 나는 쪼금 알 것도 같다. 그래서 괴롭다.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이 맞다. 나는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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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9-09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로 괴롭네요. 그러나 괴롭게 하는 것이 좋은 소설이라고, 저 역시도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나 괴로웠던가요. 저는 열다섯의 아일린보다 스물아홉 아일린에 더 아파했습니다. 저 말, 우리는 남은 평생 친구가 될거라는 사이먼의 저 말은 그 말을 들었던 바로 저 당시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의미를 갖게 된 말일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순전히 제 입장에서 아일린이 되어본 후에 말이지요.
사이먼은 열다섯 아일린에게 전부였죠. 아 저도 갑자기 괴롭습니다.

역시 같은 책을 읽으니 너무 좋네요. 단발머리 님의 감상을 볼 수 있어 너무나 좋습니다.

참고로 저는 노멀 피플-친구들과의 대화-아름다운 세상 순으로 읽었는데, 처음 노멀 피플 읽었을 때는 별로였거든요? 그런데 여러분과 영어로 다시 읽었을 때, 그 때는 노멀피플이 확 좋아졌었어요. 결국 저는 샐리 루니를 계속 읽자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아름다운 세상도 참 좋아서요. 플라스틱 부분도 그렇지만-친구들끼리 이런 대화를 하다뇨!- 저는 언급했지만, 어릴 적에 철 없을 때 저질렀던 잘못을 끌어안고 사는 대화에 대해서도 그랬어요. 그 부분도 아팠습니다.

단발머리 2025-09-09 17:00   좋아요 0 | URL
완전 동의합니다. 괴롭게 하는 것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저도요. 좋은 기억과 아픈 기억 모두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담을 수 있는 게 바로 소설이구요. 저는 <패니와 애니>를 생각할 때, 가슴 한 쪽이 찌릿하거든요. 그 소설을 읽을 때의 감정이 제목을 생각만 해도 소환되구요. 그런 의미에서 <친구들과의 대화>는 참 좋은 소설이구요. 읽으면서 괴로웠던 이유가, 제가 닉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걸, 전 한참 뒤에야 알았어요. 나는 막.... 매달리고 싶었거든요.

이 소설도 참 좋구요. 저는 세 권 중에는 이 책이 제일 좋아요. 전반적으로 개새인줄 예상되었던 사이먼이 나름 괜찮은 사람이어서 그럴까요? 물론 쥐어 패주고 싶은 순간은 있구요. 사이먼, 아일린한테 잘 하자~~~~~~~~

수이 2025-09-09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독은 제가 먼저 휘릭 ㅎㅎ

단발머리 2025-09-09 17:02   좋아요 0 | URL
왜요~~~~~~~~~~ 왜, 왜, 왜~~~~~~~~~~~ 왜케 빨리 읽어요~~~~~~~~~~~~~~~~~~~~~~~

바람돌이 2025-09-09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한글로 이 책 읽고있는데 영어로ㅜ읽기 문장들이 쉽지 않을거 같던데요. 훌륭하셔요 다들. 조금 생각해보니까 영어로 책을 읽으면 직관적으로 문장이 들어오지 않으니 느리지만 계속 한 문장 한 문장을 보듬듯이 읽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독서도 괜찮겠다 싶어지네요. 물론 제가 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누히 말했지만 영어 울렁증이 극심해서.... ㅠㅠ

저도 아일린이 엄마 메리와 얘기하는 장면에서 깜짝 놀랐어요. 엄마 메리 때문에... 와 무슨 엄마가 그렇게 귀찮다면 잊어버려 하면서 전화를 끊나요? 소설 초반에 저는 아일린이 사이먼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하기 좀 어려웠는데요. 아일린의 가족관계를 보면서 점점 이해가 가요. 아일린에게 사이먼은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고 나를 있는 그대로ㅠ인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두변이도 그게 보이죠. 사이먼을 아일린의 아빠라고 부르잖아요. 이런 결핍은 보통 이상 집착을 가지게 되는게 맞는거같아요. 연인이나 부부로 나아갔을 때 유일한 지지다를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좀 이하가 되더라구요. 사이먼은? 돔 더 읽고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이 책 읽으면서 저는 괴롭지는 않고, -아마 나이가 너무 먹어서겠죠-좀 신선하게 읽고 있어요. 젊은 세대가 결혼과 섹스, 연애에 대해서 느끼는 불안 이런게 좀 흥미롭게 읽혀요.

단발머리 2025-09-09 19:02   좋아요 1 | URL
저는 영어로 읽다가 얼른 읽고 싶어서 한글로 읽는데.... 놀라운 일입니다. 한글로도 빨리 안 읽혀요. 아~~~~~~

아일린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는 사이먼에게 집착하지 않기 위해, ‘쿨‘하기 위해 아일린은 얼마나 애쓰는지요. 이 부분이 바람돌이님이 위 댓글에 적어주신 결혼과 섹스, 연애에 대해서 느끼는 불안이라고 느껴져요. 당연한 것으로 알고 연애하고 연애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았던 대부분의 과거 세대 사람들과는 구별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구요. 소설 자체에서 젊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제가 좀 늙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많습니다. 하하하.
바람돌이님과 감상 나눌 수 있어서 좋아요~~ 바람돌이님의 페이퍼도 기다려집니다!!!

바람돌이 2025-09-09 17:27   좋아요 1 | URL
저는 지금 막 다 읽었습니다 ㅎㅎ

단발머리 2025-09-09 17:28   좋아요 1 | URL
227쪽이라고요!!! 😟😣🥺🥵🫣

바람돌이 2025-09-09 17:53   좋아요 1 | URL
스포일러를 잔뜩 넣어서 페이퍼를 쓸지도 모릅니다. ㅋㅋ 나는야 심술돌이 ㅋㅋ

다락방 2025-09-09 20:47   좋아요 2 | URL
와 두 분의 댓글이 오늘 저를 또 찌릅니다. 책 읽다가 아일린 보면서 괴로웠는데 여러분 댓글에 또 괴로워집니다. 네, 맞습니다. 사이먼에 대해 집착하지 않으려고 쿨하기 위해 애를 쓰는 거요. 제가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집착할까봐, 집착하는게 들킬까봐 어찌나 쿨하려고 노력했었는지. 그러면서 속으로 끙끙 앓고요. 사람은 사랑 앞에 쿨할 수 없습니다. 쿨하려고 애를 쓰고 쿨하게 보이려고 가장할 순 있어도 정말 쿨할 순 없어요. 그러니 쿨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아일린에게서 보고 저를 보는것 같아 괴로웠는데, 여러분이 그걸 구체적으로 딱 말씀해주시네요. 하- 이 책이 저를 너무나 여러번 찌르네요. 책 읽으면서도 찔리고 여러분의 댓글로도 찔리고. 독서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영어로 읽는데 진도 너무 안나가고요 특히 이메일 부분은 대환장 입니다. ㅎㅎㅎㅎ

바람돌이 님의 페이퍼도 기다리겠습니다.

바람돌이 2025-09-09 18:32   좋아요 1 | URL
이런 다락방님의 마음이 뭔지 너무 다가와서 좀 찔립니다. ㅎㅎ 연애할 때 우리 다 그럴걸요?

단발머리 2025-09-09 22:12   좋아요 1 | URL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요. 그 사람과 헤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저도 그게 맞다고 보거든요. 너 아니면 안 된다.... 나는 너 아니면 안 돼... 이건 아니잖아요. 그럴 수 없고요.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나는 너여야만 한다고. 나한테 필요한 건 너 뿐이라고요. 인간의 대체 불가능성을, 그 독특함을, 다른 어떤 것으로, 다른 어떤 사람으로 대신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동시에 내가 그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하고요.

근데 왜!!!!!! 저는 한글로 읽는데도 빨리 못 읽냐고요~~~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님 만석입니다. 페이퍼 서둘러 주세요!

독서괭 2025-09-09 22:05   좋아요 0 | URL
이메일 대환장.. 제말이 그말입니다…
대화에 끼고 싶다.. 지금 좀 취한 채 집에 가는데 막 주정부리듯 끼고 싶네요 ㅋㅋㅋ

다락방 2025-09-09 22:10   좋아요 0 | URL
얼른 끼어들어요, 독서괭 님!!

단발머리 2025-09-09 22:13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 컴 온!!!!

그레이스 2025-09-09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나이 모든 시점에서 사랑은 전부이니,,, 사이먼의 말은 상처가 되었겠죠. 시간이 흐른 뒤 달라질지 모르지만!^^

단발머리 2025-09-09 21:17   좋아요 1 | URL
시간이 흐른 뒤에 달라져야 한다고........ 이 연사 강력하게 부르짖습니다!!!!!!!!!!!

책읽는나무 2025-09-09 2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샐리 루니. 종종 느꼈지만 이번 댓글에서도 한글 번역서 책이라도 읽고 싶은…
궁금한데…한글 번역서도 진도가 안 나간다구요? 뭘까요?ㅋㅋㅋ

바람돌이 2025-09-09 22:47   좋아요 2 | URL
여자 주인공 둘이 이메일로 소통하는게 그 이메일이 무지 길어요. 수다를 있는대로 떠는데 그냥 자기가 관심있는 책, 정치, 환경 뭐 이런걸 중구난방으로 얘기해요. 그러다가 결국은 연애고민 상담으로 끝나는.... 전 이메일은 업무용도로밖에 써본적이 없어서 참 당황스럽달까요? ㅎㅎ 하여튼 대학 토론하듯이 이메일을 씁니다. 그래서 진도가 안나가요
그리고 이 작가 특징인거 같은데 대화 따옴표를 안쓰요
그래서 이거 누가 한 말이지 자꾸 신경써서봐야하는... 그래서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다락방 2025-09-09 22:57   좋아요 2 | URL
책나무 님, 이참에 한 번 이 책으로 도전하시죠!!

단발머리 2025-09-09 23:02   좋아요 1 | URL
우아~~ 바람돌이님 설명 완전 요점만 똭똭! 저는 그 부분이 힘들었어요. 누구 말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상형 문자 미스테리, 플라스틱 이야기는 흥미롭구요.

책나무님, 저희랑 같이 가시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5-09-10 10:58   좋아요 2 | URL
ㅋㅋㅋ
이렇게 또 팔랑귀 소지자는 팔랑팔랑…
한국 소설 읽기의 해가 좀 빨리 저물고 외국 소설로 바로 넘어가겠군요.ㅋㅋㅋ
샐리 루니.✍🏻
아름다운 세상이여..✍🏻✍🏻
일단 제목 기억했습니다.
이메일 부분은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따옴표!✍🏻
저는 따옴표가 있어도 한 번씩 누가 한 말인지 다시 앞 뒤 문장 찾아 읽느라 혼자서 바쁜데..
이게 완전 홀로 미스테리로 남겠군요.ㅋㅋ
그리고 사랑 부분..더 집중해서…✍🏻✍🏻

대충 댓글들을 읽어보곤 있는데 대충 알 것도 같은데 누가 누군지 막 헷갈리고..책을 읽지 않아서인지 정확도가 떨어져서…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하고.ㅋㅋㅋ
근데 친구끼리 이메일로 상형 문자 미스테리, 플라스틱 환경 이야기가 가능하다니…
애들이 참 똑똑한 친구들이로군요.
저는 메일을 거들떠 보질 않아 한 번 들어가 보면 죄다 광고, 스팸 메일 위주던데…
애들이 참.^^

단발머리 2025-09-13 08:59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메모 열심히도 하셨어요. 알라딘 서재 노트왕으로 임명합니다!!
같이 읽으시면서 댓글 읽으시면 훨씬 더 재미있고요. 또 글 쓰시면 책나무님 버전 샐리 루니를 만날 수 있어서 저도 좋아요!
얼른 들어오세요, 컴온 컴온!!!!!!!!!!

독서괭 2025-09-09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일린같이 사랑하지 않아서인지 많이 이입은 못했어요. 전 그냥 좋으면 좋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람이라 ㅋㅋㅋ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너무 좋은 사람이라 친구로 남고 싶다? 그정도로 좋은 사람을 못 만난 건지 몰라도 암튼 저는 남자는 남자로 만나는 게 좋더라구요ㅋㅋㅋ
전 펠릭스가 인상적이었는데 육체노동자 펠릭스와 달리 다른 세사람은 내가 이 세상에 무슨 쓸모가 있는가 고민하는 지점이 재밌었어요. 펠릭스가 질문을 막 직접적으로 해서 무례해보이기도 하는데 그덕에 다들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다락방 2025-09-09 22:56   좋아요 1 | URL
조금 다른 지점이긴한데 저는 펠릭스가 인상적이었던게 코로나 상황에도 계속 일하려고 하잖아요. 여자친구가 돈이 그렇게 많다는거 알면서도 자기는 자기가 할 수 있능거 계속하는게 당연한것 같아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굉장히 자존감 있달까요? 여자친구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친구가 쓴 책엔 딱히 관심 없어서 안읽음 ㅋㅋ 그 지점이 독특하더라고요.

단발머리 2025-09-09 23:06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너무 적절한 선곡이었습니다. 저 역시 좋은 남사친 없어서 말이지요. 그 세계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구요. 펠릭스에 대한 부분, 저도 동의합니다.

다락방님 / 여자친구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그 책에 딱히 관심 없어서 안 읽음 ㅋㅋㅋㅋㅋㅋ대목에 빵! 터졌스빈다.

독서괭 2025-09-09 23:06   좋아요 0 | URL
ㅋㅋㅋ맞아요. 근데 앨리스가 그점에서 펠릭스를 편안해 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작가의 글만 보고 작가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펠릭스는 그럴 걱정이 아예 없으니까! 자기를 더 있는 그대로 보는 느낌?

다락방 2025-09-09 23:3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유명한 작가고 그 작가의 책 읽었다고 그 작가에게 뭐가 더 나은지 자기들이 충고하려 하는데 펠릭스에겐 앨리스의 책이 안중에도 없으니 그래서 더 편할 것 같아요. 그 지점에서 가장 많이 끌린게 아닐까 싶어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나를 그냥 나로 대하는 사람이요.

단발머리 님/펠릭스는 그냥 무독서자 입니다. 책 따위 걍 안읽는 사람, 아무리 여자친구가 작가여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9-13 09:02   좋아요 0 | URL
여기 마지막 두 댓글. 독서괭님과 다락방님의 댓글이 다락방님 데이팅앱 페이퍼와 만나는 거 같아요. 앨리스가 펠릭스를 편안해 할 수 있는건 책을 안 읽으니깐 그렇다는 말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펠릭스가 그럴 수 있는가. 아예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깐요.
책읽기, 고전, 작가에 대한 로망이나 환상은 어디까지나 글을 읽는 사람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니까요. 그런 환상이 아예 없음이요. 책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깐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에게 사람들은 끌리나 봅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게 부부싸움의 제1원인이며 ㅋㅋㅋㅋㅋㅋㅋ
 















『Lucy by the sea』는 2022년에, 한글판 『바닷가의 루시』는 2024년에 출간되었다. 내용 중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쓰려고 해서 스포일러 싫어하시는 분이시라면, 이 글의 패쓰를 권한다.










『오, 윌리엄!』에서 윌리엄은 71세, 루시는 7살 어리니깐, 64세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들의 가족이 살고 있는 뉴욕에까지 퍼지려는 상황. 윌리엄은 두 딸에게 뉴욕 탈출을 권고 및 지시한다. 그리고 자신은 루시와 함께 북쪽의 메인 주로 이사한다. 당시의 상황이라면, 전 세계가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고, 그 진행과 변화의 과정이 역동적이어서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게 될지 알지 못했지만, 대학교수이자 과학자였던 윌리엄은 상황을 간파하고 있었다.

나름 환경이 안정화되고 있을 무렵, 일이 생긴다. 첫째 딸인 크리시와 남편 마이클은 마이클의 부모가 살고 있던 집으로 이사한 상태였는데, 플로리다에서 골프를 즐기던 마이클의 부모가 골프가 지겨워서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당연히 가져야 할 '자가 격리' 시간을 무시한 채, 아들, 며느리와 행복한 시간을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마이클의 아버지. 크리시를 통해 상황을 듣게 된 윌리엄은 마이클의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를 시도하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

마이클의 부모가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한 그 바로 전날, 윌리엄은 루시에게 다음날 마이클 부모의 집으로 함께 가자고 말한다. 사위인 마이클이 천식을 앓고 있는데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이클의 아버지를 직접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크리시는 변호사이고, 마이클은 뉴욕 금융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긴급하고 중요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70대의 아버지가 나선다. 유력한 변호사인 마이클의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진중하게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윌리엄의 끈질긴 권유와 약간의 협박을 더해 마이클의 아버지는 다른 장소에서 2주를 보내기로 한다. 그 기간 중에 마이클의 부모 두 사람 모두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 밝혀져 마이클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윌리엄이 마이클을 구한 것이다.

두 딸 모두 결혼을 해 새로운 가정을 이뤘음에도 윌리엄은 자녀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이와 비슷하게 루시는 두 딸들에 대한 정서적인 지원을 계속해왔다. 한편으로 두 딸들과의 이러한 끈끈한 접합은 루시에게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서로 간의 직접적 접촉이 불가능해졌을 때, 눈앞에 닥친 혼란과 어려움에 힘들어하면서 루시의 두 딸은 그제야 비로소 루시에게서 독립을 하게 된다. 심정적으로 더 이상 엄마에게 기대지 않게 된다. 결혼 생활의 큰 변화와 부침 속에서 두 딸은 울고, 절망하고, 슬퍼하지만, 그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서서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지만, 이것에 대해 루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루시는 결국 이 상황을 현재의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나는 잠시 서서 아이들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이 아이들의 삶이 내가 기대한 것과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이들의 삶이라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고, 혹은 필요한 대로.

그리고 나는 예전에 내가 크리시를 가졌을 때 내 커진 배를 내려다보며 그 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생각한 것을 떠올렸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내 소유가 아니야. 내 일은 네가 세상에 나오는 걸 돕는 것이고, 너는 내 소유가 아니야. (『바닷가의 루시』, 369쪽)

이 책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으면서 내 감상은 그랬던 것 같다. 아니, 다 큰 자식들이 변호사이고, 사회 활동가이고, 둘 다 결혼했는데, 왜 루씨는 이렇게 두 딸에게 집착하는 걸까. 루시가 '그래, 이건 아이들의 삶이야. 아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면 돼.'라고 말했을 때,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라고 생각했더란다. 내 이야기는 아니고, 내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욕망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사춘기 자녀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주위의 가정을 돌아보면서 저자는 생각했더란다. 부모가 좋은 사람들인 것 같고,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실은 저 가정에 말 못 한 무슨 사정이 있는 거라고. 그래서 가정 내에, 혹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이 있는 거라고. 저자가 그 생각이 틀렸음을 확인하게 된 건, 그의 딸이 사춘기에 돌입했을 때다. 그게, 그게 아니었구나. 꼭 그래서 그랬던 게 아니었구나.

큰아이가 한국 나이 4살이었을 때, 백화점 6층 한쪽 모퉁이의 장난감 코너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한 아이가 떼를 쓰다 못해 바닥에 눕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아이는 원하는 장난감을 얻기 위해 힘겨운 투쟁 중이었다. 큰아이의 손을 잡고 백화점 바닥에 누워 있는 아이를 지나가면서, 속으로 생각했더란다. 아니, 얘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밖에서 저런 난장판을, 쯧쯧. 정확히 3년 뒤, 그 자리에 누워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떼를 쓰는 한 아이가 있었으니. 이번에는 쯧쯧거리며 지나칠 수 없었는데, 그 아이는 내 아이였던 것이며. 기나긴 실랑이 끝에 나는 만 원이 조금 넘는 미니카를 하나 사서 아이 손에 쥐여 주고 나서야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내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 일들이, 그렇게 가끔 아니 자주 일어났고.

이제 진짜 하려고 하는 이야기에 도착했다.

『바닷가의 루시』에서 루시가 딸들의 일상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될 때, 나는 저건 아닌데...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아, 미국에서도 중산층은 이렇구나. 자식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그들의 일상에 부모가 이렇게 깊이 관여하는구나. 우리나라와 비슷하네. 우리나라는 예전에도 그랬고, 요즘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은데. 마지막에 루시가 자신의 딸들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될 거라 말하는 대목에서도 그랬다. 당연하지 않나요. 그게 당연하지 않아요?

이번 여름이었다. 특별한 말없이, 별다른 사건 없이 큰애가 우리 부부에게서,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고 느꼈다. 그렇게 느껴졌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지만. 유난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 애의 시원한 그늘막이 되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꼭꼭 싸서 키운 건 아니지만, 학원을 안 다녔기에 저녁 시간에 항상 함께 했던 큰애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됐다. 아침마다 톡을 보내고, 전신 거울에 서서 '등교룩'을 찍어 보내던 아이였다. 같은 방을 쓰는 친구가 없는 시간에는 밥을 먹으며, 화장을 지우며 먼저 영상 통화를 걸어왔던 아이였다. 실사판 고슴도치 부모가 되어 전화기 앞에 고개를 들이밀던 때, 그때 나는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웃었던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다. 빈둥지 증후군이라면, 자식의 성적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이나, 자식을 과보호하는 사람이나, 자식 말고 자신의 삶을 꾸려갈 줄 모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세라고. 나는 아니라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그런 사람이었고.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으나, 나쁜 인상을 남긴 일과 빈둥지 증후군 유사 증세는 같은 시기에 왔다. 외로움과 슬픔, 절망과 분노의 순간마다 책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쌓여 있는 책을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는 나 역시 루시처럼 이 상황을,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다시 생각에 잠긴 후에 다시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조금 기운이 나면 맥파든을 읽었고, 그다음에 또 맥파든을 읽었다.

간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빈둥지 증후군에 대해 쓰려고 그래. 다정하면서 솔직한 친구가 답했다.

참... 빈둥지 증후군이라니요. 둥지가 비기 전에 먼저 나가신 분...

샤워를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잠들기 전에도 큭큭. 나는 총 12,738번을 웃었다. 둥지에서 먼저 나갔는데, 무슨 빈둥지 증후군이라고...... 그렇다. 그랬던 것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일들이 내 일로 착착 등장하는 순간들이 있다. 멈칫하고 꿀꿀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건강하게 잘 자라 둥지를 떠나 훨훨 날아가겠다면 이 역시 환영할 만한 일이다.

둥지가 비기 전에 먼저 나가신 분은 빈둥지 증후군 유사 증세를 호소하는 일이랑 그만두고 맥파든이나 읽어야겠다. 내내 나쁜 사람으로 찍어두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착한 사람인 것으로 밝혀지기 직전이다. 나쁜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궁금하고, 함정에 빠진 사람이 이 어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궁금해진다. 신난다.

이틀이 지났다. 나쁜 사람은 정체가 드러나고, 함정에 빠진 사람은 구출되었다. 역시나,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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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03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학에 가서 등교룩을 찍어보내는 딸이라니.. 자랑이 너무 심하십니다. 우리집 딸래미들 초등학교 수학여행부터 집나가면 전화 한통 안합니다. 그래서 우리집에 제가 억지로 만든 규칙이 안 들어오는건 괜찮다. 하지만 하루 한번 생존신고는 해라인데 이것도 잘 안 지켜져요. 만약 기숙사 들어가면 일주일에 한번 통화하기도 힘들걸요. ㅎㅎ

둥지가 비기 전에 둥지에서 나갔다니 표현이 참 절묘하다 싶으면서도 사실 우리 그 둥지에 그대로 있잖아요. 다만 내가 있는 곳이기에 비지 않았을 따름이지요. 나만으로도 충만한곳, 그러다가 아이들이든 누구든 오면 조금 복잡해지다가 가고 나면 또 평안한곳. 제 둥지 목표입니다. ㅎㅎ

단발머리 2025-09-03 20:45   좋아요 2 | URL
그랬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모두 추억으로 지나쳐 가고, 오늘도 언제 들어올지 기약할 수 없는ㅋㅋㅋㅋㅋㅋㅋ

나만으로도 충만한 곳. 누구든 오면 조금 복잡해지다가 가고 나면 또 평안해지는 곳. 이 문장이 너무 좋네요. 혹 어떤 분이 빈둥지 증후군을 겪고 계시다면 이 문장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다만, 저는 ㅋㅋㅋㅋㅋㅋ 둥지가 비기 전에 나가신 분으로서 ㅋㅋㅋㅋㅋㅋ 둥지든 집이든 어디든 안 들어가고 신나게 놀고 싶습니다. 역시나 체력이 문제네요. 흠....

난티나무 2025-09-04 02: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9월 개학에 맞춰 작은넘을 기숙사에 던져넣으려고 6시간 넘게 달려갔다가 다시 긴 시간 돌아오는 길입니다. 짐은 뭐 왤케 많은 건지 @@ 집에서 출발하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어요. 아 빨리 혼자 있고 싶다…
그 넘 2년 전만 해도 저랑 수다 떨던 그 넘 맞고요.ㅋㅋㅋㅋㅋㅋㅋ
여름방학 포함 석 달동안 집에 있었던 건 앞 일주일 뒤 일주일밖에 안 된다는 사실.ㅋㅋㅋ

루시 안 읽어서 한쪽 눈만 뜨고 읽었어요.^^

단발머리 2025-09-05 22:11   좋아요 0 | URL
아 빨리 혼자 있고 싶다.... 음성 지원이 가능하네요? 참 신기합니다. 난티나무님 프랑스에 계신데 음성 지원이 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숙사도 좋은 의견입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지원했는데 떨어졌ㅋㅋㅋㅋㅋㅋㅋㅋ

다음에는 반드시!!

2025-09-04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9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9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5-09-05 0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도 비슷합니다. 막내가 고등학생일 땐 그래도 챙겨야 할 아이라 여기고 제가 힘든 티를 냈어요. 이젠 둘 다 밖에 오래 있고 애들 집에 들어오기 전엔 노부부만 남아서 각자 책읽고 야구보고 그럽니다. 무슨 영화에서 보던 흔들의자 앉아서 옛날 얘기 하는 노부부 같은거에요. 하하. 이런 시간에 익숙해져야겠지요? 빈둥지, ... 우리 둥지는 애들이 죄다 어질러놔서 비지는 않았어요. ㅋㅋ

단발머리 2025-09-05 22:24   좋아요 0 | URL
이젠 둘 다 밖에 오래 있고 애들 집에 들어오기 전에 노부부만 남아서 각자 책읽고 야구보고 ㅋㅋㅋㅋㅋㅋ

에서 우리집인줄 알았어요. 이런 시간에 익숙해져야될텐데... 저는 철없는 신혼부부 컨셉으로 가고 싶은데, 나이상으로는 노부부가 가깝네요. 정말 큰일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5-09-05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5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5-09-06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곳에서 매일 엄마에게 제가 얼마나 잘 먹고 있는지를 보고하고 있어요. 밥 차려 먹을 때면 엄마에게 사진을 보냅니다. 엄마 걱정하실까봐서요. 전화도 자주 드리려고 노력하고요. 그런데 단발머리 님의 이 글을 읽으니, 저를 이곳에 보내놓고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싶네요. 제가 이 나이어도 엄마한테는 분명 딸이고, 아시다시피 저는 여태껏 엄마랑 함께 살았으니까요.

제가 방금 채경이에게 빈둥지증후군에 대해 물어봤거든요. 독서나 여행, 학습등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빈둥지증후군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대요. 이미 지나오신 것 같지만, 단발머리 님은 맥파든을 만나셨으니, 새로운 관계설정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더 단단해지실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25-09-08 08:41   좋아요 0 | URL
너무너무 잘하고 계신거에요. 얼마나 궁금하실까요. 공부하는 것보다 그곳에서의 생활보다 어쩌면 더.... 무얼 먹는지를 궁금해하실거에요. 전 오늘 아침에 새우양배추전 부쳤거든요. 생각보다 잘되었어요(무슨 일? 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 찍어 두었습니다. 이따 오후에 엄마 보내드리려고요 ㅋㅋㅋㅋㅋㅋ 엄마, 아침에 이거 해먹었어요.

독서나 여행, 학습이 빈둥지 증후군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거 같아요. 운동도 그렇구요, 물론 취미 생활도. 전 이제 운동쪽으로 가볼까 생각 중인데, 너무 안 해서 평생 미지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ㅋㅋㅋㅋㅋㅋ 맥파든이 있습니다. 아직 18권이 남아있다는 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하루도 굿데이, 다락방님!!
 










1. 운명의 과학

도서관에서 영어책 읽다가 너무 졸려서 일어나 서가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책이다. 다 읽지 않고 챕터 4, <보살피는 뇌>를 읽었다.

어떤 형태이든지 섹스는, 그리고 섹스에 대한 관심 결여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 측면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통용되는 사회적 규범과 외부의 압박이 생물학적으로 깊숙하게 새겨져 있는 욕망과 경쟁할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력을 정교하게 분리하는 것이 현재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자기 고유의 개인 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측면 중에는 보편적으로 타고난 성적 지상명령sexual imperative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사랑에 빠질 때 경험하는 육체적 간절함,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고 보호하려는 맹렬한 욕구, 심지어는 사랑을 위협하는 사람을 향한 질투심 어린 적대감 등 이 모든 필수적인 감정 상태는 섹스와 육아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도록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한 격렬한 신경화학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142쪽)

성적 지상명령이라. 유전자의 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그 원대한 힘, 그 멈추지 않는 힘이 섹스를 중심으로, 그러니깐 섹스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러니까, 『여성성의 신화』가 개정되기 전, 『여성의 신비』로 읽히던 시절, 한글책 구하기가 원서 구하기 보다 훨씬 어려웠던 시절에 베티 프리단의 책을 처음 읽고, 나는 하염없이 흥분했다고 한다.

'프로이트'에 정면으로 맞선 것에 더해 '말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위대한 여성의 통찰은 가히 충격적이어서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야만 했는데. 여성주의 주장의 한 면이 본질주의일 수도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에는 이건 또 뭔가요?의 혼란이 어김없이 찾아왔으니. 남녀가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으며, 성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의 다른 면은 여성주의의 이론의 최전선(정희진쌤 표현)인 도나 해러웨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그냥 두고 나선다. 다만, 과학, 특히 근자의 뇌과학이 여남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2. 아주 작은 습관의 힘

8월이 다 지나고, 곧 9월이라니. 얼마 남지 않은 2005년에 작은 성과를 만들려면 어찌해야 하는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변화나 성과, 혹은 성장과 성공이 정말 가능할까의 의문을 가진 채로. 일석이조를 예상하며 처음에는 영어로 읽었는데, 마음은 급하고 진도는 나가지 않아서, 결국 마무리는 한글책으로 했다.

실제 삶의 행로는 우리가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여정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굳이 하나의 시나리오에만 자신의 길을 맞출 이유는 없다. (47쪽)

를 모르지는 않는데, 이걸 제대로 인지하는가는 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결국 내가 제일 궁금해하고 나 자신에게 묻고 싶은 그것은 '성공'이란 무엇인가가 될 테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바라는, 내가 추구하는, 내가 꿈꾸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 정돈되어야만 이 '아주 작은 습관'을 통해 현재의 나를 갱신하고, 변화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는,

분명하게 만들어라. 매력적으로 만들어라. 하기 쉽게 만들어라. 만족스럽게 만들어라.

를 적용해야 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일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혹은 나는 무엇을 이뤄내고 싶은가. 아주 작은 습관을 통해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변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3. 쓰기의 미래

서문의 '쓰기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인가?'가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질문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해답은 '아니다'가 명확해 보인다. 이 책은 AI의 시작과 발달 과정, AI의 확산과 활용의 기술적 역사를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2004년 대학 작문 및 커뮤니케이션 회의 CCC는 다음과 같은 입장문을 발표했다.

모든 글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인간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 기계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쓰기의 기본적인 사회적 속성을 위반한다. 우리는 사회적 목적을 띠고 타인을 위한 글을 쓴다.

그런 정서는 조금도 낯설지 않다. 후일 찬사를 한몸에 받는 작문 교사가 될 에드 화이트는 1969년 이런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어떻게 쓸 수가 있겠는가?

(..) 어떤 이에게도 쓰지 않은 글은 도무지 글이라고 할 수 없다." (141쪽)

밑줄 긋고 싶었던 에드 화이트의 이야기는 오히려 '이상적으로' 들린다. 이미 오래전부터 AI는 신문 기사를 썼고,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했으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에세이를 쓰고, 급기야 소설을 쓰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 여겨지던 '창의성'은 이제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쓰는가. 왜 쓰려고 하는가.

<해제>에서 엄기호는 '셋이 추는 춤'을 제안한다. AI와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가 함께 삶이 담긴 자기표현으로서의 쓰기를 지향하자는 것(550쪽)인데,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가르치는 자는 진즉에 외면당할 것 같고, 배우는 자 역시 쉽게 쫓겨날 것 같다. 남는 건 AI, 승자는 AI 다.

인공 지능의 가늠하기 어려운 발전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서, 실체가 없는 이런 지적 능력이 '몸'을 갖게 된다면, 그에 더해 공감 능력이 배가된다면,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실리콘에 새겨진 의식의 반란. 계산, 수리 능력에서 이미 인간을 압도하는 AI가 정보를 바탕으로 이 세계의 특정 사안에 대해 '판단'하겠다고 하면, 인간이 이를 제어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에 가까울 것이다. 'AI가 우리 종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진화 경로를 바꾸는 데까지(『넥서스』) 도달할 때, '쓰기'는 오히려 사소한 문제가 아닐까. 출현 이후로 한결같이 지구를 파괴하고, 이 행성의 주인 행세를 했던 무도한 인류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다.










4. 금붕어의 철학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적 핵심으로서 반본 질주의

  1. 원본 없는 재현; 재현 이전의 현전은 없다

  2. 이성에 대한 불신; 기호의 유희

원래대로라면 나는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면서 이 책을 읽어가려고 했다. 각 이론의 핵심 주장을 찾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요약하면서 읽기. 데리다의 이론을 정리한 김상환 님의 주장에 근거한 저자 배세진의 설명을 차근히 따라가며 이 책을 읽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쓰기의 미래』에 의하면, 책에 대한 정보를 가공하고, 지식을 정렬시키는 요약, 발췌는 모두 무의미하다고 한다. 이는 AI가 인간보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인데,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맡은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내용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보다는 텍스트를 끌어가는 저자의 '서술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더 주효한 읽기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단다.

<버틀러의 섹스-젠더 이분법 해체>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버틀러는 데리다의 기호의 해방론을 젠더 문제에 적용해 확장하면서, 섹스와 젠더, 남성과 여성, 이성애와 동성애 간 이분법의 해체를 강조했다. '젠더 수행'이라는 측면에서 설득되고 동의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 여자라는 '몸', 여성이라는 영토 속에 살면서 내가 느꼈던 한계와 절망의 기억 때문이다.

정리의 필요를 가볍게 떨치고 분홍 형광펜을 그어가며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은데, 저자가 완전 신나서 설명하는 게 단어와 문장 너머로 완연히 느껴진다. 그래서 나도 재미있게 읽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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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25-09-01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책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게 없네요! ㅎ 저는 세번째 책, 쓰기의 미래라는 책이 특히 궁금합니다. 일할 때 챗지피티를 쓰곤 하거든요. 교재 내에 코너 정할 때나, 항목별로 분류할 때 넣어보기도 하는데, 오류도 잦습니다. 아예 ChatGPT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는 재차 확인하세요. 이게 하단에 꼭 붙잖아요 ㅎㅎ) 그럼에도 너무 똑똑해서 흠칫흠칫합니다. 지금도 쓰기의 미래를 검색어로 넣고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을 넣었더니.. 쓰기의 주체, 목적, 형식, 운명으로 챕터를 나눠서 답을 주더라고요. ...그 중에 쓰기의 목적을 옮겨와 보면,,,예전에는 설득, 기록, 자기표현이 글쓰기의 핵심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AI가 대량으로 텍스트를 생산하는 시대에는, “차별성”이 쓰기의 본령이 될 듯합니다. 곧, 왜 네가 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글은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글은 기계와 다른 고유한 결―즉 체온, 망설임, 주저, 불완전함―을 품을 때만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라고 답하네요. 금붕어 철학 책 표지는 색감이 딱 제 스타일이네욧!!

단발머리 2025-09-02 08:23   좋아요 1 | URL
아~~ icaru님은 일할 때 챗지피티(채경이)를 이용하시는군요. 맞아요~~ 실수가 종종 있더라구요. 저는 읽었던 책에 대한 줄거리 확인할 때 많이 씁니다. 이걸 왜 채경이한테 물어볼까요. 저도 아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쓰기의 미래, 검색 결과도 솔깃하네요. 만약에 대학생이 챗지피티를 이용해서 거기에 좀 덧붙여서 리포트 쓰면 일단 중간 이상으로 혹은 오~ 잘 썼는데! 이런 평가를 받을 거 같고요. 왜 써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니,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네요.

제 고민은, AI가 인간의 고유한 결, 체온, 망설임, 주저, 불완전함을 쉽게 복사해 내면서, 인간보다 훨씬 더 인간다워지지 않을까, 하는 거에요. 전, 지금의 기술 발전이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어떤 선을 약간 넘지 않았나 싶거든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금붕어는 icaru님 스타일에 더해 딱 제 스타일입니다. 안 읽고 보기만 해도 흐뭇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5-09-01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2 0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1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2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2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2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2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2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2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03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5-09-01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회의 할 때 녹음앱 켜놓고 하면 알아서 회의내용 요약정리해주더라구요. 회의록 결재 올릴 때 문장만 찔끔 다듬으면 됩니다. 그러나 책을 보고 정보를 가공하는건 딱히 의미가 없다는 말이 일면 공감이 되기도 하는데, 근데 다시 생각하면 이건 원해 그런거 아니었다 싶기도 해요. 수학문제 풀 때 정답이 도출되는 논리과정을 추출하는게 진짜 중요하잖아요. 글쓰기나 책읽기나 뭐 원래 서술방식, 논리추론의 과정을 이해하는게 중요한것도 똑같은듯요.

근데 단발머리님 읽은 책은 왜 힌권도 만만해보이는 책이 없습니까? 저는 요즘 만만한 독서가 좋아요. 이것도 지적 게으름이 분명하지만 반성 안 할래요. ㅎㅎ

단발머리 2025-09-02 08:34   좋아요 1 | URL
아.... 그런 앱이 있었군요. 진짜 잘 활용하면 기계의 발전이 인간에게는 이렇게나 도움이 될 수 있는데...

바람돌이님 말씀해 주신 그 지점에서 말이에요. 책을 보고 정보를 가공하는 것이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진다면, 그 효과가 덜 중요해진다면, 어쩌나 하는 그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됩니다. 서술방식과 논리추론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그래서 더 와닿는 거 같아요.

첫번째 책이 뇌에 관련된 책이라 술술 읽힙니다. 어려운 내용이 없구요 10대의 뇌, 케일이냐 도넛이냐, 이런 부분은 익히 아는 내용들이 많아서요. 두 번째 책은 실천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ㅋㅋㅋㅋㅋ 역시나 술술 읽힙니다.
4번째가 제일 어려운 책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어제는 프리다 맥파든을 만나고 왔습니다^^

다락방 2025-09-02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 아직도 만나야 할 프리다 맥파든이 남아 있습니까?!

단발머리 2025-09-02 20:46   좋아요 0 | URL
네, 남아 있다고 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어제 한 권 더 읽어서요, <The Crash>. 이제 10권 채웠고요. 아마존에는 아직도 17-8권 있는 거 같아요. 제가 프리다 좀 몰아서 읽으려고 킨들 언리미티드 신청했거든요. 이게 더 이득인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읽어가고 있습니다.

이승우 작가님도, 리 차일드도 다락방님 덕분에 알게 됐고, <레 미제라블>도 다락방님이 읽어서 따라 읽었잖아요, 제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올해 여름의 큰 선물 프리다 맥파든 감사해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난티나무 2025-09-02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I가 인간보다 인간다워지지 않을까 , 라는 단발머리님 위 댓글 내용에 동감입니다. 부정적 감정도 훨씬 쉽게 복사하겠죠. 실제로 인간의 프로그래밍을 거부하고 스스로 명령을 수정해버린 일례를 sns 에서 봤습니다. 선을 넘었다는 말씀에도 같은 생각이에요.ㅠㅠ

단발머리 2025-09-02 20:48   좋아요 1 | URL
인간의 프로그래밍 거부하고 명령을 수정하던 AI가 실제로 인간, 인류의 멸망을 모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아무래도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읽어야할 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된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AI라~~~ 그것도 참 걱정이네요.

난티나무 2025-09-02 22:00   좋아요 1 | URL
파운데이션??? 찾아보러 갑니다!!!!

단발머리 2025-09-02 22:11   좋아요 1 | URL
파운데이션 7권이라고 하네요. 허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5-09-03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사회과학 맛집^^ㅋㅋㅋ
다 어려워 피하고 싶은 책들인데 희한하게도 제가 읽은 책이 눈에 띄네요.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요.ㅋㅋㅋ
근데 단발 님은 원서로 읽기 시작하셨군요?
요즘 원서 많이 읽으시는군요.
그렇다면 영어원서 맛집.ㅋㅋㅋ
저도 <쓰기의 미래>저 책이 좀 궁금합니다.
요즘 sf소설을 읽고 있어서인지 매우 흥미롭네요. 다음엔 저도 파운데이션 찾아봐야겠습니다요.
근데 제가 단발 님의 지령을 받들어 산책 페이퍼 글쓰기 오랜만에 했거든요.
근데 페이퍼가 당최 올라가질 않네요?
글자 수 제한이 있는 건지?
책을 링크를 걸어서 버그가 온 건지?
내 핸드폰 용량이 달리는 건지?
글은 안 올라가고 계속 로딩만.ㅜ.ㅜ

단발머리 2025-09-06 08:41   좋아요 0 | URL
우앗! 저 사회과학 맛집이네요? 신난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시작은 원서로 마무리는 한글로ㅋㅋㅋㅋㅋㅋ 원서가 울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쓰기의 미래>는 쓰기와 관련된 역사가 많이 나오고요. AI가 발전해온 역사도 잘 정리되어 있어요. 왜 쓰는가...가 제일 주요한 이야기일 거 같은데, 인간이라서 쓴다~ 이런 이야기도 나오고요.

책나무님 산책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가끔 알라딘이 그렇게 안 될 때가 있더라구요. 다 썼는데 안 올라가면 너무 짜증나요. @@
저는 다른 곳에 써두었다가 복사해서 올려요. 소듕해서요 ㅋㅋㅋㅋㅋㅋㅋ 날리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