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에서 윤리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스피노자는 자신의 윤리학을 욕망에서부터 출발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지닌 혁명성이다. 개개인의 삶보다는 사회질서를 우선시하는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스피노자를 그토록 비난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전체 사회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거나 절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이렇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182쪽)
하루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행하고 죽는 것, 그것이 더 커다란 행복이니 말이다. 기쁘면 기쁘다고 표현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하자. 그것이 바로 욕망을 긍정하는, 쉽지만 녹록치 않은 방식이다. (184쪽)

길게 뻗은 방파제가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 배를 매어 두는 기둥으로 쓰이는 철탑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온통 검은색 차림의 그녀. 움직이지 않고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녀. 신화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사람. 그녀가 돌아본다.
그녀의 얼굴은 어니스티나처럼 곱지는 않았다. 어느 시대, 어떤 취향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아름다운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는 슬픔이 숲속의 샘물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거기엔 어떤 꾸밈도, 위선도, 발작도, 가면도 없었다. (19-20쪽)
거울을 본다.
내 얼굴은 아니다. 난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 아니다. 숲속의 샘물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슬픔이, 내 얼굴에는 없다. 나는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 아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얼굴 속에 무엇인가를 머금고 있다면, 만약 그래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메롱을 머금은 얼굴이다. 메롱.
이 작품이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떤 배우가 좋을까 생각해본다. 금방 떠오르는 배우가 없다. 우수에 찬, 슬픔을 머금은 얼굴이라. 조민수, 김희애, 그리고 신세경이 떠오른다.
이야기를 따라간다. 제목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다. 주인공은 여자일 테고, 그녀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다. 이야기는 ‘프랑스 중위와의 사랑 이야기‘일 수 있고, 아니면, 프랑스 중위와 사귀였던 여자,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전력을 가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여자를 찾아 나선다.
그녀가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은, 자신은 언제나 정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그녀가 생각하는 통치의 개념은, 불손한 백성들은 사납게 몰아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34쪽)
나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찾고 있었는데, 위의 문장은 나를 ‘또 다른 그녀’에게로 이끌어준다.
자신은 언제나 정당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그녀, 불손한 백성들은 사납게 몰아세워야 한다고 믿는 그녀, 상대방은 항상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 의미 해석이 불가능한 문장을 말하는 그녀, 외교 성과를 패션으로만 말하는 그녀.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녀의 말과 행동이 ‘그녀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녀가 정말 몰라서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그녀. 그녀가 나왔다. 그녀를 저리 밀치고, 다시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찾아본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찰스는 그녀가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짓궂은 농담을 당장 알아차릴 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농담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애정이 깊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깊은 애정은 곧 그에게 와닿았다. (12쪽)
또 다른 그녀다. 부족함 없이 자란 부잣집 외동딸, 찰스의 약혼녀, 어니스티나. 어린 나이임에도 바람기 다분한 찰스의 성향을 진작에 간파한 어니스티나는 드디어 찰스의 사랑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녀는 곧 그의 신부가 될 것이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책장을 빠르게 넘긴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가들은 글을 쓸 때 나름대로 설정된 계획을 갖고 있어서, 제1장에서 예견된 미래는 언제나 정확한 경로를 밟아 제13장에 이르러 실현될 것이라고. 그러나 소설가들은 저마다 다른 숱한 이유들 때문에 글을 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모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애인들을 위해, 허영심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즐거움 때문에. ... 모두의 진실은 아닐지라도. 우리들 소설가에게 공통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 <우리는 실재하는(또는 실재했던) 세계만큼 사실적인, 그러나 그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
바꿔 말하면,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는 찰스만이 아니라 티나와 사라, 심지어 저 밉살스러운 풀트니 부인에게도 각각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신에 대한 좋은 정의가 하나 있다 − <다른 자유들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자유>. 나는 이 정의에 따라야 한다. (139쪽)
이번에는 작가다. 소설가라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하나의 이유를 밝히고, 그리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소설 속 인물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있음을 밝힌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 나는 각각의 방문을 열어놓으라고 말한다. 안방의 컴퓨터에서 유튜브로 ‘레고 무비’를 무한반복하는 아롱이 때문이 아니라(아니라?!), 아이들이 아직 어리므로, 문을 열고 닫을 때 손을 다칠 염려가 있어 문을 열어놓으라 한다. 우리집은 문을 열어놓는다.
그래서, 이렇게 느닷없이 소설의 문을 열고, 문장 사이를 뚫고, 정체를 드러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를 만나면 적잖이 당황한다. 근래에 읽었던 소설 중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난다. 한껏 진지하면서도, 완벽하게 유머러스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문을 열어 젖히는 밀란 쿤데라. 문을 열고 갑자기 나타나는 작가들.
찾았다. 드디어 그녀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두 눈으로 덮여 있어서, 그것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액세서리 정도의 구실밖에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지성과 꼿꼿한 정신이 있었다. 또 거기에는 어떤 동정에도 반발하는 조용한 거부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곧 그녀의 존재였다. (168-9쪽)
눈빛에서는 억제된 격정을, 입술에서는 억제된 감각을 드러내는 그녀. 검은 눈에서 나오는 섬광 같은 시선을 찰스에게 쏘아대는 그녀. 프랑스 중위의 여자다.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지만, 단지 연애소설만은 아니다. 다만, 나는 작가가 말하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볼테르에 대해,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에 대해, 영국의 선거권 확대에 대해, 신생국 미국의 역동적 변화와 미국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복잡한 심경에 대해, 렌틴의 『의학에 관한 실제적 지식』(하노버, 1798)에 대해 잘 몰랐기에, 내가 읽을 수 있는만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잠시 서 있었다. 여자는 닫힌 문이었고, 남자한테는 열쇠가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미소는 사라졌다. 긴 침묵이 그들 사이에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찰스는 진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는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뛰어내리고 싶다고, 뛰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을 뻗기만 하면 그녀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열띤 감정으로 호응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마침내 그가 속삭였다.
“다시는 단둘이 만나서는 안 되겠소.” (262쪽)
이승우님의 책, 한 구절이 떠오른다.
문학의 문장은, 실용문과 달라서 정보의 직접적이고 빠른 전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문학은 간접적이고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 할 수 있는 한, 소통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이다. 호수는, 내 마음의 상태를 은유한다. (64쪽)
맞다. 문학은 소통을 가능한 지연시킨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고 불리던 사라라는 여자가, 아름답고 유복한 약혼녀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찰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 짧은 소설은, 이 짧은 이야기는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말을 미룬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에는 이렇게 보여주고 만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아니, 이미 사랑에 빠졌음에도 지금까지 그걸 속여왔던 거다. 이제야, 두 사람은 눈을 맞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 둘 다 최면술에라도 걸린 듯, 눈은 여전히 서로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녀는, 아니 우물처럼 깊고 커다란 눈은 그가 이제껏 보았던 어떤 것보다도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순간이 시대를 극복했다. (349쪽)
처음부터 불길한 예감에 사라를 멀리하려 했던 찰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 한다. 하지만,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당신을 잊지 못할 거요.”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파고드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이 봐둬야 할 게 있다고. 당신의 진실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진실, 당신의 감정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감정, 당신의 역사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역사를 보아 두라고.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나는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내가 말해 주어야만 비로소 당신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면...... (362쪽)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여러해 까지라도 미뤄둘 수는 있지만 영원히 가두어둘 수는 없는 욕망(482쪽) 때문에 결국 찰스는 사라를 안는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럴 수 있다고, 사라도, 찰스도 적어도 머리속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 다음, 찰스의 사랑을 얻은 후 사라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 내에서도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개인주의가 판 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그 당시의 사회와 문화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해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찰스편이다. 왜, 왜 떠나려 하나요? 왜, 떠나나요?
사라는 답하고, 나는 그녀의 답에 조금은 수긍한다. 이렇게 현대적인 여성이라니. 너무 쿨해서 서늘해질 지경이다.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인용되는 시와 소설의 몇 구절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하다. 기품이 있다. 그가 좋아하는 시, 그가 사랑하는 소설, 그리고 그가 아끼는 작가들 때문에 나도 존 파울즈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내 유일한 힘은 그대에게 있나니.
그대 안에 머무는 것은 기쁨이어라.
− 토머스 하디, 「영원한 그녀」 (371쪽)
오, 나의 사랑이여, 그대를 나 혼자서만 사랑하게 해다오.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해다오.
환상이 찾아온 것을 아무도 목격하지 않게 해다오.
모든 것을 보면서도, 보이지 않게 해다오.
− 아서 H. 클러프, 제목 없는 시 (1852) (356쪽)
다음책은 [오래오래]다.
감은빛님의 <커피의 역사> 이벤트에 응모했었다. 사실, 기준 미달인데 넓은 아량으로 이벤트 당첨자로 선정해 주시고, 내가 신청한 책을 보내주셨다. 어제 아침, 일찍 도착한 책을 품에 안고는, 너무 예뻐서 감탄과 탄성에 혼자 원우먼쇼를 하고야 말았다.
“감은빛님, 고맙습니다. 잘 읽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