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엄마 맞아?』와 『펀 홈』을 연이어 읽으면서 부모와 자녀, 책에 대해 생각한다. 큰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책을 고르고 좋아하는 작가를 발견해 찾아 읽기 시작한 게 중학교 2학년 때쯤인 것 같은데, 작은 아이는 아직도 나 뭐 읽어?’ (자매편: 나 뭐 입어?)를 묻는다. 남편이 골라줄 때도 내가 골라줄 때도 있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좋아하는 분야, 지향 같은 게 있다 보니 편식 독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좀 신경이 쓰인다. 최근에는 우리 둘 다 즐겨 읽지 않았던 과학 관련 책을 자주 권한다. 시간은 남아 돌고, 갈 곳도 없다. 학교는 물론이고, 탁구학원에도 드럼학원에도 가지 못 한다. 겸사겸사 책 읽는 시간으로 삼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집에서는 와이파이가 너무 잘 터지고 유튜브에는 매일 새로운 영상이 올라온다.



어제는 온라인 수업을 듣다가 잠깐 거실로 나온 작은 아이가 내가 펀 홈을 읽고 있는 걸 보고는 엄마, 뭐야, 만화책 읽어?”라고 묻는다. 자기는 힘들게(?) 공부하는데, 엄마는 놀고 있는 거 아니냐는 비난의 말투다. 그래서, 책날개의 책소개를 힘차게 읽어줬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일상적 사건과 가족 간 갈등, 성장과 독립의 과정 안에서 삶과 죽음,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 고전 문학, 정치, 역사, 하위문화 요소를 씨실 날실로 촘촘하게 엮어내며 현시대에 인간성의 복원과 휴머니즘, 관용의 가치를 전합니다. (알라딘 책소개)

 

이게 이런 책이야.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자기 할 말만 하고 작은 아이는 벌써 자기 방으로 들어갔는데, 괜히 나만 소리를 높였다.



앨리슨 벡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통 이상의 독서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제임스 조이스와 피츠제럴드, 오스카 와일드를 권하는 부모라니. 한국식으로 하자면, 박완서, 이청준, 이승우를 권하는 부모라니. 나는 좀 부담이 될 것 같다. 너대니엘 호손, 조셉 콘래드, 에밀리 브론테를 권하는 부모를,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내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나 오리엔탈리즘, 『나의 사촌 레이첼을 읽는다는 걸 엄마에게 말할 수 있겠지만, 필립 로스를 읽는다는 말을 도대체/어떻게/ 엄마에게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책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이 책만화로 보는 성sex의 역사를 단숨에 완독했다는 걸 도대체/어떻게/엄마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작은 아이에게 보여줄 수 없는 책, 읽고 나서 구석에 숨겨 놓은 이 책을, 도서관에서 내 손으로 빌려왔다는 말을 여기 알라딘이 아니면 어디에서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이 책만화로 보는 성sex의 역사는 인류학자이자 정신의학자, 성과학 교육자가 쓴 안내서로서, 글도 훌륭하지만 그림이 진짜 짱이라는 말을, 여기 알라딘이 아니면 어디에서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만화이긴 만화이되 19금 어른 만화라는 걸, 여기 알라딘이 아니면 도대체 어디에서 말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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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5-2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라고 다 같은 만화가 아니란 걸 제가 너무 잘 알겠는데요?!!!!
전 봤지만 페이퍼 안 쓴 만화책 더 많다요! ^^

그나저나 식구끼린 책 권하기가 참 애매하기도해요. 식구끼린 못 나누는 게 더러 있는 벱이죠.

단발머리 2020-05-21 00:29   좋아요 0 | URL
전 만화 많이 보지는 않지만 항상 만화가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1인인데요. 여기에서 천재 하나 추가하고 갑니다.
유부만두님 페이퍼 안 쓰신 만화라니..... 궁금하네요^^

레삭매냐 2020-05-2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펀 홈>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것 같아서 빌려다 보려구요.

<당신 엄마 맞아?>는 인근 중고서점
에 있던데, 일단 한 번 가서 봐야겠
네요. 아마 사지는 않을 듯...

단발머리 2020-05-21 10:25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이 부지런하신 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신줄은 몰랐습니다 ㅎㅎㅎㅎㅎ 즐독하세요!! (저도 도서관책으로 읽었답니다)
 





 













'펀 홈(Fun Home)'은 저자가 살았던 Funeral Home을 말한다. 벡델 장례식장의 애칭이다. 아버지는 가업을 이어 장례업을 운영했지만 작은 마을인지라 수입이 적어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어머니는 뛰어난 연극배우이자 교사였다. 천재 예술가 앨리슨 벡델의 출현이 가능했던 건 예술적 조예가 깊었던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앨리슨의당신 엄마 맞아?』를 읽으면서는 그녀의 엄마를 원망했다. 그녀는 왜 앨리슨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했을까? 엄마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딸에게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나 역시 엄마이고, 하나에서 열까지(이건 아닌 것 같다. 하나에서 열까지는 아니다. 하나는 잘 하겠지. 적어도 하나는), 하나에서 아홉까지 부족한 엄마지만, 앨리슨의 엄마가 앨리슨의 감정을 일부러 모른 척 하는 부분에서는 좀 화가 났다. 마지막 부분, 앨리슨이 완전하게 엄마에게서 벗어날 때, 앨리슨은 그녀의 엄마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닫는다. 그 즈음에는 나도 마음이 풀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녀의 엄마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고 할까. 박물관처럼 집을 꾸미고 완벽한 정원을 추구하는 독특한 취향의 남편과 시부모, 그리고 자신의 아이 셋을 돌보면서 산다는 것.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시댁 식구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 산다는 것. 연극무대에 서서 빅토리아 여왕을 연기하고, 그리고 재봉실을 서재로 삼아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것. 사람의 지성과 감정, 그리고 육체적 에너지는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마법의 샘이 아니다. 모든 일을 그런대로 잘해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생각엔 그렇다.

 


자신의 커밍아웃과 어머니의 이혼 요구, 아버지의 죽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떠나버린 아버지와의 추억을 곱씹는다. 그가 좋아했던 일들을 기억하고, 그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감춘 듯 하지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가 남긴 편지를 다시 읽는다. 아버지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뭉개는 게 주특기인 사람이었다(71). 아버지는 책 속의 문장을 가지고 자신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그 문장을 가져다 썼다. 아버지가 사랑한 책들과 아버지가 추천한 책들이 열쇠가 되어 그의 유추를 돕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이런 책들이 읽고 싶지 않다면, 앨리슨의펀 홈』을 제대로 읽지 않을 거라 말해도 되겠다. 나마저도, 심지어 나마저도 책장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을 찾아 책상에 대기자세로 놓아두었다. (물론 이번이 세번째이기는 하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좋은 책의 제1기준을 만족시키는 책. 책 속의 책을 궁금하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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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벡델은 여성 퀴어 서사 분야의 개척자로, 그래픽 노블 작가이다. 1983년부터 25년에 걸쳐 신문에 연재한 <주목할 만한 레즈비언들(Dykes to watch out for)>로 널리 알려졌고, 『펀 홈Fun Home』은 그의 영웅이자 영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이다. 『당신 엄마 맞아? Are you my mother?』 역시 자전적 서사이며 현대 여성의 표본인 어머니에 대한 회고록이다.



기본 골격은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의 추억을 시작으로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복합적 감정과 창작의 어려움을 겪는 작가가 심리 치료를 받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어머니와의 관계 변화가 그녀의 꿈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한다.



버지니아 울프, 에이드리언 리치,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과 수전노, 소야곡, 로얄 패미리 등의 연극을 비롯해 도널드 위니캇과 앨리스 밀러, 프로이트, 라캉 등의 정신 분석학 개념들이 그녀의 고민에 어떤 답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목차는 이 책이 여성주의에 대한 저자의 연구 결과일 뿐 아니라, 스스로 환자인 자기 자신을 치료하려는 열정과 치열함을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이 읽는 책을 보여준다. 그대로 옮기고 그대로 그린다. 번역자는 그 부분을 한글로 바꾸는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읽고 싶은 책이 쌓여간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 때(아무런 기억은 없지만 인간으로 태어나 살게 되었을 때), 전폭적인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돌봐주는 외부의 존재가 없다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아기는 절대적으로 외부의 존재에게 의존한다. 외부의 돌봄은 물질적,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젖, 분유, 우유, 빵과 밥, 그 이상이다. 외부 세계의 사람들 중 완벽한 존재가 되기를 강요 받는 엄마라는 입장에서 읽을 때, 내게 그런 존재였던 엄마를 생각했다. 딸을 둔 엄마로서, 평생 동안 엄마에게 인정받고자 애쓰는 딸의 고통이 느껴져 마음이 짠했다.



엄마가 천재가 아니라서 감사했다.(사실 엄마에겐 천재성이 다분하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서(당연한 말씀을), 우리 딸이 천재가 아닌 것 같아서(10대니까 가능성을 아주 조금은 남겨두자) 감사했다. 그녀의 괴로움은 그녀가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그걸 보여준다. 문제는 아버지도 천재, 어머니도 천재라는 것. 천재 병목 현상. 천재 쏠림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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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20-05-18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계획이 있는책이라 나중에 책을 읽은루에 페이퍼을 읽어야겠어요.😊 선 좋아요~~

단발머리 2020-05-20 19:19   좋아요 0 | URL
네, 보슬비님~~ 보슬비님께도 좋은 독서의 시간이 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2020-05-27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벡델은 벡델테스트와 벌새 시나리오집 인터뷰로 알게되었어요. 이렇게 단발님 페이퍼로 만나니 반가워요. 아직 읽진 못했지만, 꼭 읽어보고 싶은 책 목록에 껴두렵니다

단발머리 2020-05-27 08:35   좋아요 1 | URL
전 벡델테스트가 존재한다는 것도 이 책 읽으면서 알게 되었어요^^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공쟝쟝님께도 유익하고 즐거운 독서시간이 되시길요! 씨 유 순!
 
 전출처 : 단발머리 > 5. 18 광주

5. 18. 광주의 희생이 없었다면... 정권교체도 K방역도 전수조사도 BTS도 없었을 것이다.
우린 모두 광주에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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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디셀러 레즈비언 작가, 앨리슨 벡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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